장세동

12.12 군사반란 가담자 (총 3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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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웅종

김호영

신윤희

최석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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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국

허삼수

김진영

허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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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연

이차군

백운택

김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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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병

이필섭

권정달

고명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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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영

장기오

우국일

최예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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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

송응섭

장세동

이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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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창

박희도

노태우

전두환

★★

★★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김윤호

★★★

★★★

★★★

★★

정호용

김기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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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동의 역임 직위

이름

장세동 (張世東)

출생

1936년 9월 27일 (83세)

전라남도 고흥군

복무

대한민국 육군

기간

1960년~1984년

임관

육사 16기

최종계급

중장

최종보직

대통령경호실장

주요보직

제 3공수특전여단장

1. 소개
2. 생애
2.1. 군인 시절
2.2. 전두환 정권 시절
2.2.1. 대통령경호실장 시절
2.2.2. 안기부장 시절
2.3. 전두환 퇴임 이후
3. 여담
4. 매체에서

1. 소개

대한민국 제5공화국 당시 대통령경호실장,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역임했다.

전두환 정부의 실질적인 2인자로 그전에 박정희 정권에 인사로 대입하면 그 권세와 공작과 신임이 이후락+차지철이라 할 수 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 30경비단장[1]으로, 직속상관인 장태완 소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수장 전두환을 따라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였다. 장태완이 말한 "반란군 놈의 새끼들", "역적놈의 새끼들" 중 한 명. 게다가 실제로 장태완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장세동을)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리기도 했다.

전라남도 고흥군 출신이다. 장세동은 본적이 경상북도 대구, 즉 그의 아버지는 대구광역시 출신이라는 말도 있지만 근거는 없다. 아마 하나회 회원들 중 대다수가 경상도 출신인지라 오해를 한 듯하다.[2] 실제로 그의 선산이 녹동에 있으니...[3] 근데 정작 안기부장 시절에 고흥지역 원로들이 자신을 만나려는 것도 거부했다.

2. 생애

2.1. 군인 시절

성동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1960년 육군사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하고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하나회는 PK, TK 등 경상도 출신 군인들이 주축인데 호남 출신인 장세동이 가입한 건 그만큼 장세동이 소위 '난 놈'으로 통했던 셈.

월남전에 파병된 장세동은 퀴논 북쪽 24 km 탄광 지역에서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어깨에 총격을 당하여 중상을 입었지만 견디면서 전투를 계속해서 부대원들의 사기를 올려 결국 적 43명을 사살하고 1개 중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후 귀국해서 육군 수도보병사단 30경비대대에서 작전장교로 근무하다가 두번째로 베트남에 파병을 갔는데 이때 베트남에 와있던 전두환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귀국 후 전두환이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할 때 장세동은 그 밑에서 장교로 근무하는 등 전두환의 심복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육군본부와 대통령경호실 경호관을 거쳐 1977년 대령 시절에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부임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다만, 장세동이 전두환의 힘만으로 군내에서 출세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전두환과 인연을 쌓기 전에 베트남전에서 주목받을 정도의 무공을 쌓았기 때문에 귀국 후 군내에서 출세가 보장된 상황이었다. 때문에 장세동의 능력과 자질을 알아본 전두환이 장세동에게 먼저 접근하여 자신의 심복으로 만든 것이라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 수경사 제30경비단장으로서 지휘계통을 어기고 하나회 인맥에 의해 신군부에 가담하고 직속 상관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체포하였다. 이 공로로 준장에 승진하며 육군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장을 맡게 되었다.

2.2. 전두환 정권 시절

2.2.1. 대통령경호실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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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현역 장군 신분을 유지한 채 제3공수특전여단장에서 대통령경호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여느 육군 장성들처럼 육군참모총장을 꿈꾸었던 장세동 개인으로서는 별로 원치 않던 자리였으나[4] 각하가 하라면 해야지 어쩔 수 있겠나(...)[5] 이는 전두환이 허화평 비서실 보좌관과 허삼수 사정수석비서관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듬해인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이후 전두환이 경호실의 위상을 높여 허화평 허삼수를 압박하는 목적으로 장세동을 소장으로 진급시켜주었다.[6]

장세동은 청와대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으로 재직할 시절 대통령 경호가 단순히 신변을 보호하는 업무를 넘어 대통령의 심기까지 편안케 해야 한다는 이른바 심기경호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대통령의 마음이 편안해야 국정도 잘 되니 심기까지도 경호해야 한다"는 뜻으로, 장세동이 만든 신조어다.

실제로 장세동은 전두환이 산책하다 돌부리에라도 걸리면 심기가 불편해질 수 있다며 도로 평탄화 작업을 지시하고, 그것도 성에 안 차 산책로에 쌓인 새똥까지 녹여 낼 수 있는 약품을 개발하라는 지시했다. 또 전두환이 찾으면 늘 5분 이내로 갈 수 있게 항상 대기했으며 호출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머리 손질을 하고, 전두환이 쓰는 것과 똑같은 향수를 뿌리고, 윗옷 양 호주머니에는 지도와 메모용 수첩을 반드시 지참해서 갔다고 한다. 이른바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로 전두환의 심기를 편안하게 해서 경호 업무 수행중 전두환이 물어볼 때 즉시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지나칠 수준의 그의 행동은 다 대통령의 심기를 고려한 행동이었다.*

전두환 경호하러 가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특전사 53명

사회"장세동이 전두환에게 과잉충성..." '조사중'인 채로 25년 간 오리무중

1982년 전두환 경호를 위해 악천후임에도 무리한 출격명령으로 특전사 47명, 공군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명 봉황새 작전을 강행한 지시자로 알려져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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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으로 인해 경호실장으로서 책임을 져야함에도 불구하고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함께 유임되어 직책을 계속 수행했던 것을 본다면, 전두환은 단순히 세력 견제용으로 장세동을 불러들인 차원을 넘어서서 권력다툼이 난무한 청와대 내부에서 장세동을 매우 신임하고 심적으로도 매우 의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84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2.2.2. 안기부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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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요구가 거세진 1985년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에 임명되었다. 이 때 노태우의 손아래 사촌 처남이자 당시 대통령비서실 법률비서관 겸 정무비서관이던 박철언을 자신의 특별보좌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정권 후반기에 노태우, 노신영 등과 함께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그가 국가안전기획부를 맡았을 때 일으킨 사건만 여러건이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평화의 댐 사건,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게다가 야당 국회의원 빼오기 같은 공작에는 꼭 그의 그림자가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물러났다.

2.3. 전두환 퇴임 이후

전두환의 심복으로 찍혔기 때문에 같은 신군부 출신인 노태우가 집권한 후에는 전혀 권력을 얻지 못하고 청문회에 불려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하나회 내에서 전두환 파벌과 노태우 파벌이 경쟁하게 되었고, 전두환계인 박희도, 최세창 등이 줄줄이 정리되는 상황 속에서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지낸 장세동은 눈엣가시라고 봐도 무방했다.

장세동은 청문회에서는 비교적 당당한 모습으로 일관하여[8] 의리의 사나이, 의리의 돌쇠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노태우의 장세동 격 심복이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바로 미국으로 도망갔던 것과 대비되어 전두환이 인복은 많았다고 비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현재까지 건재한 이유는 전두환의 리더십이 매우 뛰어났고, 그에 감화된 측근들이 버텨 주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 과정에서 재밌는 설이 있는데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으로 장세동이 전두환을 대신해서 자신이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갔고 출소한 뒤 바로 전두환을 찾아가 인사하며 '대통령님! 휴가 다녀왔습니다!' 했다고 하며 전두환은 장세동을 크게 치하하며 장세동에게 대략 수십억을 줬다고 한다. 참고로 이 일화는 썰전에서도 소개되었는데 장세동이 받은 돈이 18억이란 것을 알자 김구라가 한 말이 할만하네 돌쇠! ...

여러번 5공세력을 규합하여 정계에 진입하려고 했으나 너무나 음험한 이미지가 굳어져서 할 수 없었다. 전두환이 나들이라도 하면 항상 따라다니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김영삼 대통령 시절 소위 "역사 바로 세우기" 때 전두환과 함께 구속되어 12.12 때 반란 가담혐의로 3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12월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과의 합의를 통해 사면시켰고, 1998년에 최종적으로 복권되었다. 하지만 군인연금은 잘렸다.

문병호?[9]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눈앞의 이익을 위해 당적을 옮기는 등 철새 행각을 벌이며 의리와 소신이 사라지고 배신과 변절이 난무하는 시대에는 자신과 같은 의리 있는 사나이가 나서야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다는 명분이었는데, 어차피 본인은 본인에게 개밥 줄 상대에게 충성한 거지 국민에게 충성한 건 아니니, 전두환도 지원을 안 해주게 된다. 이로서 득표율이 처참할 듯하자, 투표일 하루 전날 후보를 사퇴하였다. 전두환의 말로는 출마 전까지 극구 반대했으나 기어코 출마를 해버리자 "세동이도 나이 먹으니 내 말을 안 듣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군소후보 토론회에서 사회당 김영규 후보에게 극딜을 당했다.

지난 79년 오늘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오늘 그 정권의 하수인과 같이 자리한 것이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다."

라고 했었다.심지어 토론 이후에도 김 후보는 '"쿠데타의 주역과 악수하지 않겠다"'는 뜻을 토론회 전부터 밝혀 끝내 장세동 후보와 악수를 나누지 않았다. 이는 '과거 청산'을 공약으로 내세운 사회당의 정책이 있기 때문이었다.

2013년 11월, 취재파일 K에서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으로 인해 장 씨에게 청구된 구상금 6억여 원이 아직 납부되지 않았다는 기사가 보도되었으며#, 2014년 6월 13일에는 장세동 등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장성 10명이 국방부를 상대로 군인연금 지급 거부 취소소송을 제기했으나 원고 패소 판결했으며, 위헌법률심판제청 또한 기각되었다.#

3. 여담

안 믿길 수 있으나, 옛날 미의 기준으로 상당한 미남이다. 정말 믿기지 않는다면 나이많으신 분들께 물어보자. 십중팔구 미남이라 하실 것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이 제작되던 당시에 자신의 역으로 맡은 홍학표에게 연기를 두고 훈수를 두곤 했다고 한다.

4. 매체에서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는 홍학표가 캐스팅되었는데, 외모상 싱크로율이 높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5공 청문회 영상을 보면 목소리까지도 복붙 수준이다. 이 드라마 초기에 출연한 김재규 역의 김형일은 외모만 흡사했지 목소리가 정반대였던 걸 감안[10]하면 장세동은 가히 도플갱어 직전 수준이었던 셈.

1화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덕화)을 만나 경호실장이 이렇게 설치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불만을 나타내는데, 정작 그도 전두환 집권 후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본다면 묘하다. 다만 이승만곽영주박정희의 차지철과는 달리, 경호실장 시절에는 대놓고 설치는 스타일은 아니긴 했다. 경호실장 시절에는 허화평-허삼수, 노신영 등이 권력을 서로 견제하는 구도였기 때문. 드라마에서도 경호실장 시절의 장세동은 정치적인 사안보다는 군부 자체 문제나 허화평-허삼수 견제 등에 전두환에게 조언 좀 하는 모습으로 주로 나온다. 물론 안기부장이 되고부터는 야권분열 등 정치공작이나 서울 물폭탄, 수지김 등 각종 공안이슈를 조작하고 실행하는 간교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영화 퍼펙트 게임(2011)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듯한 어떤 높으신 분이 선동열과 최동원의 선발 맞대결을 영호남 갈등을 부추기는 이벤트로 써먹기 위해 분주히 움직히는 장면이 여럿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 5공 정권은 광주학살의 멍에 때문에 어떻게든 지역감정을 잠재워보려 노력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냥 공부 하나도 안 한 작가의 헛소리.

영화 1987에서는 배우 문성근이 캐스팅되었다.[11] 본인의 정치 성향과는 정 반대 배역인 게 특징.


  1. [1] 함께 쿠데타에 가담한 김진영이 지휘했던 33경비단과 함께 現 수방사 제1경비단의 전신.
  2. [2] 하나회 멤버 중 호남 출신으로 유명한 인물로는 고명승도 있다.출처필요
  3. [3] 녹동 근방에 장씨들이 많다. 장성민이나 가수 거미의 어머니(장숙정)가 이쪽 출신.
  4. [4] 게다가 장세동은 단순히 하나회 연줄로만 덕을 보았다기 보다는 과거 월남전 참전 등에서 군인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하던 사람이었기에 그런 마음이 더욱 컸던 것도 사실이다.
  5. [5]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전두환이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는지 내 마음이 외로워서 그랬다며 장세동에게 미안하게 되었다고 달래기도 한다.
  6. [6] 허화평 허삼수는 당시 예편한 민간인이었지만 예편 최종 계급은 장세동과 같은 준장이었기 때문이다.
  7. [7] 정확히는 707특임대원 47명과 공군 6명이 사망했다.
  8. [8] "본인의 지시, 책임"이라 말하는 장면도 많았다고 함
  9. [9] 실제로 문병호 본인도 이와 관련된 드립을 쳤다. 안철수 의원의 측근 인사들 중 하나로 자기가 의리가 있어서 문세동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런데 얼마전 바른미래당을 탈당했다.
  10. [10] 외모도 얼굴만 비슷했지 김형일은 180센치가 넘는 풍채가 좋은 편 이지만 실제 김재규는 키 170도 안되는 왜소한 인물이었다. 목소리도 김형일은 중후한 남성적인 목소리인데 반해 실재 김재규의 목소리는 약간 높은 편이다.
  11. [11] 작중에는 장씨 성만 나오고 이름은 후반에 딱 한번 나오나, 1987년 당시 안기부장은 장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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