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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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누구도 노예상태에 놓여지지 아니한다.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 및 노예매매는 금지된다.

2. 어느 누구도 예속상태에 놓여지지 아니한다.

3. (a) 어느 누구도 강제노동을 하도록 요구되지 아니한다.

(b) 제3항 ''(a)"의 규정은 범죄에 대한 형벌로 중노동을 수반한 구금형을 부과할 수 있는 국가에서, 권한있는 법원에 의하여 그러한 형의 선고에 따른 중노동을 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

(c) 이 항의 적용상 "강제노동"이라는 용어는 다음 사항을 포함하지 아니한다.

(i) "(b)"에서 언급되지 아니한 작업 또는 역무로서 법원의 합법적 명령에 의하여 억류되어 있는 자 또는 그러한 억류로부터 조건부 석방중에 있는 자에게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것

(ii) 군사적 성격의 역무 및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고 있는 국가에 있어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법률에 의하여 요구되는 국민적 역무

(iii) 공동사회의 존립 또는 복지를 위협하는 긴급사태 또는 재난시에 요구되는 역무

(iv) 시민으로서 통상적인 의무를 구성하는 작업 또는 역무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B규약) 제8조

1. 개요
2. 상세
3. 개념
3.1. 유럽
3.2. 한국
3.3. 일본
3.4. 중국
3.5. 중동
3.6. 대항해시대
3.7. 현대
4. 현황
5. 종류
6. 효율 문제
7. 명언
8. 관련 인물
9. 창작물
9.1. 노예이거나 노예였던 캐릭터

1890년 잔지바르의 노예 소년

奴隸 / Slave

1. 개요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구속돼 노역을 하는 사람을 노예라 한다. 고대부터 오랜 시간 동안 노예 제도가 존재하였으나, 점진적으로 폐지되어 현재 공식적으로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국가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음지에서는 노예에 준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대부분 가혹한 환경에서 고통을 받기 때문에 심각한 인권 침해이다.

관련사건, 인물로는 미국에서 19세기 흑인 노예 해방이 쟁점이 되어 벌어진 남북전쟁에이브러햄 링컨, 존 브라운 등이 있다. 남북전쟁에서 노예제 폐지를 주창한 북군이 승리함으로써 미국의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2. 상세

노예란 다른 사람의 소유권 하에 놓아져 강제로 부림을 당하는 사람을 뜻한다. 국제연맹이 채택한 노예제 조약(Slavery Convention, 1926)에서는 노예를 "Slavery is the status or condition of a person over whom any or all of the powers attaching to the right of ownership are exercised"로 정의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예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되는데 고대 함무라비 법전성경에도 노예가 언급되며,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국,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 인도는 물론 중남아메리카 에도 존재했다. 광범위하게 노예가 나타난 만큼 그 형태도 다양했으며, 노예에 대한 대우 역시 큰 차이를 보인다. 이에 따른 논의도 고대부터 존재하였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서도 언급된다.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한자로는 奴隸라고 쓰고(북한에서는 '노례'라고 쓴다.), 영어로는 Slave 로, 슬라브에게서 유래하였다는 말이 있다[1]. 항목참고. 중국 고대 은나라갑골문자에는 奴자가 이미 보이는데, 여기서의 奴란 포로로 붙잡아 복종시켜 부린다는 것을 의미했다[2]. 隸 역시 붙잡다는 뜻과 종, 죄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최초로 奴隸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후한서 서강전으로 보인다. [3]

Slave는 고대 프랑스어인 sclave에서 유래하였는데, 이것은 중세 라틴어로는 sclavus라 한다. 중세 그리스어로는 σκλάβος라고 하는데 이는 전부 슬라브인을 뜻하는 말이다. 9~10세기의 발칸 반도에서는 전쟁이 잦아 많은 포로가 발생하였는데, 대부분은 슬라브인들이었다. 슬라브인들이 주로 노예로 거래되면서 자연스럽게 슬라브인이라는 말은 노예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고, 그 결과 대부분의 유럽어와 아랍어에서 노예를 지칭하는 말로 자리잡게 되었다.[4]

노예무역은 따로 서술한다.

3. 개념

3.1. 유럽

고대를 가리켜 노예 경제 혹은 노예제 사회라는 용어로 부르곤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노예가 없으면 경제가 휘청거렸던 스파르타, 노예 덕분에 대농장 경영이 가능했던 로마 제국 등도 있었던 반면 착취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이집트에서는 의외로 임금 노동자로 대우했다거나[5] 고대 중국의 한족 국가에서는 한족 노예가 없었다는 점[6] 등등...

하지만 고대의 율법에서 노예에게 상해를 입힌 죄가 상대의 물건을 손상시킨 죄와 동급이었던 걸 보면 인간으로서 대했다기보다는 좀 많이 비싼 물건으로 대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또한 이집트에서 노예와 관련된 말 중에 왕의 무덤을 비밀로 하게 하기 위해 노예들을 죽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구가 보이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미국 흑인 노예 수준은 아니지만 이들도 인권의 결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고대 노예제 사회라고 할 때는 노예 노동이 경제적 기반을 이루어고 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노예가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이는 대척점에 있는 원시 공산사회,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와 비교해도 명백한 것이고. 이런 점에서 보자면 고대를 불문하고 노예제 사회라고 할 수 있는 범위는 극히 한정적이 된다는 문제가 있다.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단계론이 공산주의 귀결을 떠나서 인정받는 동시에 비판 받은 부분이 이런 점이었다. 원시공산사회-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자본주의를 따라간 것은 전 세계의 역사를 기준으로 보자면 인류의 보편성이라기보다는 유럽의 특수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을 포함하여 이에 대한 수많은 논쟁과 비판도 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쓰이고 있는 것은 인류 역사의 보편성 설명+현재의 자본주의사회+대체 논리의 공감대 형성 부족 등등.

노예의 대명사로 꼽히는 로마 제국의 노예를 살펴보면 공화정~ 제국 초기 시기 노예들의 삶은 대체로 비참했다. 1세기 초기까지는 노예에 대한 로마인들의 인식은 같은 인간이라기 보단 '가축'에 가까웠다. 의외로 물건이 아닌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는데 세네카를 비롯한 소수의 철학자들 정도였다. 예컨대 트리말키오는 "운명에 짓눌려 살고 있긴 해도 노예들 역시 사람이며 우리와 같은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라고 했으며 노예 해방은 주인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통념과는 달리 로마법 어디에도 노예를 물건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주인에 비해 열등한 인간이었고 주인은 노예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해방노예마저도 노예를 학대한 것으로 유명하다.[7] 아우구스투스를 자신의 집에 초대한 한 해방노예 출신의 재력가(흔히 베디오스 풀리오라고 하는)는 자신의 노예가 황제 앞에서 작은 실수를 하자 그를 곰치 연못에 빠트리려고 했는데, 황제의 만류로 간신히 살 수 있었다. 일단 아우구스투스의 친구 중 베디오스 폴리오(Publius Vedius Pollio)라는 사람이 있었기는 한데 이 사람은 자유민 출신이다. 하지만 이 사람이 노예가 자신을 실망시키면 칠성장어의 연못에 먹이로 던저주는 것으로 유명했고 한번은 아우구스투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을때 그의 노예가 유리잔을 깨자 그 노예를 먹이로 던지려고 했던건 사실이다. 이를 본 아우구스투스가 그 집의 모든 유리잔을 깨버리고 장어의 연못은 메워버렸다고 한다.

생사여탈권뿐만 아니라 폭행도 서슴지 않았으며 성폭행도 일삼았다.

만약 노예가 자신의 주인의 암살을 막지 못하면 그 집안의 노예들은 수십 명이든 수백 명이든 처형당했다.

이러한 무자비한 처형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하기도 했는데 결국 처형은 이루어졌다고 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칙령으로 주인이 노예를 죽인 경우에도 사형이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다고 했으나 이는 노예를 처벌할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경우에 한정되었다. 즉 주인이 노예를 죽일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주인은 얼마든지 노예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이는 로마가 강력한 가부장제 사회였던 데서 기인한다. 심지어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었다. 로마의 십이표법에는 "아버지가 자식을 3번 노예로 팔면 자식은 아버지의 지배권에서 해방된다."는 조항이 있다. 바꿔말하면 3번씩이나 노예로 팔 수 있다는 거다.(...) 다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노예의 처우는 조금씩 좋아지는데 AD 2세기에 쓰인 가이우스의 법학제요를 보면 노예에 대한 주인의 과도한 폭력은 금지되었고 만일 폭력에 그 정도가 심할 때에는 국가가 강제로 노예를 매각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이전까지 금지된 노예의 결혼과 재산보유가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등 전반적으로 노예의 직위가 상승하기도 하였다.

이런 신분상승은 로마의 정복전쟁이 중단되면서 정복지에서의 노예수급이 함께 끊어진데서 기인했다. 즉 이전 같으면 말 안 듣는 노예는 족쳐버리고 다시 들여온 노예로 메우면 그만이었지만, 이제 한정된 수의 노예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다보니 자연스럽게 근로 동기를 부여할 여러 당근이 필요해진 것이었다. 일례로 악명높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중에서도 선발된 죄수에 한해 결혼을 시켜주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노예수급의 중단에서 오는 자원풀의 감소는 해소할 도리가 없어, 결국 경제적으로 몰락한 자유민이 사실상 노예의 자리를 대체하는 농노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제국 후기에 그리스도교의 만민평등 사상에 따라 노예들의 삶이 전반적으로 개선된다. 실제로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대전의 노예 관련법 개정에서 어떤 이유로든 주인이 노예를 죽이거나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따위의 행위를 하지 못하게 했다.

고대가 끝난 중세 유럽에도 노예는 존재했다. 11세기와 12세기에 에스파냐는 서유럽에서 가장 큰 노예무역 시장이었고, 1128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온 상인들이 제노바 시장에서 이슬람 노예를 팔고 있었다. 1348년 흑사병이 돈 이후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갑자기 가내 노예 수요가 늘어나기도 했다. 피렌체에서 1336년에 공포된 시 법령은 노예들이 이교도, 즉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조건으로 노예 수입을 공식 허가했고, 곧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거의 모든 부유한 가정이 노예를 두게 되었다.

유럽의 지중해 노예무역은 대규모라기보단 다른 상품에 노예를 덤으로 끼워 운송하는 형태였다. 1396년 5월 21일 로마니아 지방에서 제노바로 들어온 한 선박의 화물목록에는 순례자용 의복 37자루, 납덩이 191개와 함께 80명의 노예가 기록되어 있다. 시라쿠사에서 마요르카로 들어온 또 다른 선박은 짐승 가죽 1,547필과 노예 열 명을 운송했고, 베네치아에서 이비사로 가는 한 선박은 대청 128자루, 놋쇠 55자루, 원면 열다섯 자루, 면사 다섯 자루, 종이 네 자루, 오배자 다섯 통과 함께 아홉 명의 터키 노예를 운송했다.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노예 제도가 기승을 부렸던 곳이기도 했다.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인인 성 패트릭도 아일랜드 해적들에게 붙잡혀 아일랜드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무척 오래되었다.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는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유럽에서 가장 큰 노예 시장이 있었다. 이러한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대략 서기 8세기 무렵에 점차 줄어들다가, 바이킹들이 아일랜드를 침입하면서 다시 노예 제도를 되살렸다. 바이킹들이 서기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에 부딪쳐 쇠퇴해지자, 노예들은 바이킹에서 토착 아일랜드인으로 대체되었다. 잉글랜드헨리 2세가 군대를 보내 아일랜드를 공격했던 1171년에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최고조에 달했다.[8]

또한 이탈리아의 북동부 프리올리에는 16세기까지 노예 제도가 있었다. 프리울리의 법령에는 노예 신분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아버지가 자유인인 경우에도 노예가 된다는 조항이 적혀 있었다.[9]

3.2. 한국

한국중국동아시아에서는 남성 노예를 奴(), 여성 노예를 婢()라고 칭하였다. 고조선의 팔조법금에는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부여의 법률에 “살인자의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라는 규정이 있었다. 중국 당나라의 형법인 당률(唐律)의 명례(名例)에는[10] 노비에 대한 법률이 존재하였는데 이것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노비에 대한 기준적인 법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경국대전에서는 노비를 우마와 동일하게 여기었는데 나이 16세 이상 50세 이하의 장년 노비의 값을 저화 4.000장, 15세 이하 50세 이상은 3,000장으로 규정하였으며 노비의 반품기한과 등록기간을 명시하기도 하는 등 상속, 소유, 매매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규정이 존재하였다. 자세한 것은 노비 문서 참조.

조선시대의 노비제에 관련해서 제임스 팔레, 에드윈 라이샤워 등은 조선 17세기 경 호적의 노비호가 전체의 1/3에 달한다는 점을 들어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보기도 한다. 사실 이 사람은 시민혁명 이전 남부 미국도 노예제 사회라고 본다. 팔레 교수의 조선 노예제 사회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노비 비율이 전체 인구의 30 - 40% 내외였던 시기는 17세기 기준이라는 것이다. 다만 저 비율 자체도 논란이 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조선 인구구조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극단적으로 줄어든다. 당연하지만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한 주장에 반박하는 주장들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제임스 팔레 교수가 타계할 때까지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한 주장들에 계속 반박해온 이영훈 교수의 주장 등이 있다. 이영훈 교수의 반박 조선의 노비제 숙의

사실 팔레 교수의 견해가 특이한 것은 아니다. 근대 서양인들도 조선의 노비제를 노예제와 진배없는 교정되어야 할 적폐로 인식했다. 조선의 노비제도에 대한 정치국 극동과의 보고

주요 반박 논거로는,

조선의 노비들은 미국의 흑인노예나 일본의 게닌에 비해 예속의 강도가 훨씬 약하였고, 그런 점에서 노비들은 곧 노예라기보다 농노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러한 분석이 조선의 정치나 사회경제상이 비교의 대상이 된 다른 사회들보다 역사적으로 더 높은 수준이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농노제사회가 노예제사회보다 발전단계가 높다는 등식은 애당초 성립하지도 않을뿐더러, 순수한 형태의 노예제사회는 인류의 역사에서 극히 예외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전근대 인간예속의 유형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구조의 성격을 "노예인가, 농노인가?'와 같은 서유럽 중심의 잣대만을 기준으로 하여 양자택일 방식을 통해 규정하려는 협소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연구자와 역사대중 스스로가 좀 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노비는 노예도, 농노도 아니다. 노비는 어디까지나 노비 그 자체일 뿐이다. (pp.155~159) - 이영훈,「한국사 연구에서 노비제가 던지는 몇가지 문제」(『한국사시민강좌』40, 2007). 출처

3.3. 일본

일본의 노예와 관련한 최초의 문서는 후한서 동이전으로 [13] 왜국 왕 스이 쇼우(帥升)가 후한의 안제(安帝)에게 노예 160명을 바친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왜왕 히미코가 239년 위(魏)의 명제에게 사절을 보내 남녀 노예를 바첬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등 적어도 야요이 시대부터 노예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동시에 동아시아에서 법적으로 가장 먼저 노예제를 페지한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그 대신에 농노제가 그만큼 크게 발달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다이카 개신 이후 일본은 중국의 율령제를 본떠 국민들을 양인천인으로 나누고 천인은 5가지로 [14] 구분하였다. 10세기 초 율령제가 붕괴되면서 법적인 노예 계급은 사라졌으나 실질적인 차별은 여전하였고 인신매매 역시 꾸준히 발생하였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굶주리던 사람들이 자신과 배우자, 자녀를 판매하는 등 인신매매가 증가하면서 [ruby(人商人, ruby=ひとあきびと)]라 불리는 노예상인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가마쿠라 막부는 1239년 인신매매를 금지를 명하기도 하였으나 심한 기근이 발생했을 때에는 자매[15]를 묵인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일본은 과거 동아시아에서 인구 대비 노예의 비율이 제일 낮은 편이긴 하나 전국시대 당시 농민들이나 전쟁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는 사례가 많았다.[16]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큐슈 지방을 중심으로 노예를 팔아넘겼으며[17], 여기에는 서양 선교사도 가담한 경우도 있어서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독교를 금압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화약값 대신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 중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들도 노예로 팔려갔다. 훗날 16세기 말에 에도 막부는 일본 내에서 노예 매매를 금지했으나, 천민계층인 부라쿠민이나 '요시와라'의 유곽에서 여성을 매매하는 등 실질적으로는 노예라고 규정지을만한 이들이 계속 잔존했다. 거기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노들이 노예처럼 의복 등에서 '노예상징'을 강요받는 등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 출처

심지어 근대화 시절인 19세기 메이지 유신 무렵부터 20세기인 1920년까지 일본에서는 가라유키상이라고 하여 규슈 지역의 가난한 여자들 30만 명을 해외에 성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링크1, 링크2, 링크3, 링크4

3.4. 중국

한국 인터넷상에는 중국 전한과 후한 시대의 기록만 들먹이며 중국에 노예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니지만, 이는 중국사의 극히 일부분만 발췌해 체리피킹을 한 것이다. 중국에도 엄연히 노예라고 할 수 있는 세습 노비와 천민 계층이 존재했으며, 심지어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 초기에까지 존재했다.

조선과 같은 시대인 중국 청나라에서는 엄연히 가생자(家生子)라고 하여 세습 노비가 존재했다. 참고로 청나라 시대 노비들은 주인이 하녀으로 삼거나 다른 사람한테 첩으로 넘겨주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민과 결혼할 수 없으며, 노비가 낳은 아이는 가생자가 되어 역시 부모의 신분을 물려받아 노비가 되었다. 아울러 청나라의 옹정제는 동화록(東華錄)에서 노비 관계를 “하인(노비)들은 자손 대대로 영원히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며, 하인의 신분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라고 옹호했다.[18]

청나라의 노비들은 사회 최하층에 있었으며, 인신자유가 없으며 주인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 학대를 당해야 했으며 짐승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른바 노비는 천민이며 법률적으로는 축산품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청나라 시절의 노비들은 여러 부류들이 있었다. 첫째는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진격하기 전에 붙잡아 노예로 부린 한족이었고, 둘째는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진격한 후에 붙잡아 노예로 부린 한족이었으며, 셋째는 범죄를 저질러 국경지역에 보내져 주둔 군대의 노예로 전락한 자이고, 넷째는 너무나 가난해서 노예로 팔린 빈민들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첫째와 둘째 부류의 노비들이 많았고 후기에는 넷째 부류의 노비들이 많아졌다.

높은 벼슬을 지내는 집안에 필요한 노비들을 공급하고자 전문적인 인신매매꾼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소군(蘇郡)에는 등돈호(等囤戶 어린 여자 아이를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 키워 파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자)가 있었는데, 가난한 집의 딸을 보면 사다가 집에서 키워 많은 돈을 받고 먼 지역으로 첩이나 노비로 팔아버렸다. 혈육을 서로 갈라놓고 사람의 평생을 망치는데 이보다 더 한 것은 없을 것이다.(옥화당양강시고玉華堂兩江示稿의 57쪽)"라는 기록이 있다.

어떤 지방은 매 번 장날이면 백화가 진열되고 사방 멀리에서 팔려는 노비들이 몰려오곤 했다(장심태의 월유소식 권 3).

또 어떤 지방에서는 홍수나 가뭄 등 자연재해로 인해 가난한 집안에서는 하는 수 없이 아들 딸들을 팔기도 했다. 예를 들어 강희제 20년, 대동과 선부 등지는 연속 몇 해 동안 흉년이 들어 가난한 백성들이 아들과 딸을 팔았는데, 어린 아이는 백 문도 안 되고 장정도 은 1~2냥도 안 되었으며 크고 작은 수레들이 끊이지 않고 들이닥쳐 여러 손을 거쳐 판매되곤 했다.

또 어떤 지방에서는 노예 매매가 창궐했는데 인신 매매꾼들은 집단을 구성해 관병서리들과 결탁해 유괴와 납치와 약탈을 저질렀다. 사천성에서는 토표(土豹 시라소니)라는 이름을 가진 불량배 수십 명이 여자를 납치해 으로 입을 틀어막고 커다란 자루에 넣어 둘러메곤 도망쳐서는 배에 싣고서 천강을 건너 호북성에 가져가서 팔았다(납치당한 여자는 개당자開堂子라고 불렸다). 이 토표들이 관문을 지날 때마다 관부의 하인과 서리들한테 돈을 주고 그 대가로 무사히 통과했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관리들도 이를 보고도 못 본척 그냥 지나갔다(청인종실록 권97 7년 4월).[19]

또한 중국 청나라에는 타민(惰民). 세부(世仆), 반당(伴當), 단민(蛋民) 같은 세습 천민 계급들도 존재했다.[20] 이들은 옷차림과 가옥 등에서 모두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규모가 작은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노동에만 종사할 수 있을 뿐, 지식인이나 농민이나 장사꾼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글을 읽지도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으며, 양인과 결혼하지도 못했다. 이 천민 계급들은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 시대에 되어서야 비로소 없어졌다[21].

아울러 청나라 건륭제 36년인 1771년, 청나라 정부는 천민 호적에서 벗어난 사람이 과거시험을 보려면 먼저 자격을 심사해야 하는데, 4대(증조부, 조부, 아버지, 본인)에 걸친 성분을 모두 조사하여 본 가족의 직계친속이 모두 청백해야 과거 응시 자격을 주었으며, 만약 그들 중 제 1대와 2대 및 삼촌 이내의 사람들이 여전히 천민들의 직업인 취고수나 심부름꾼 같은 직업을 갖고 있다면 과거 응시 자격을 주지 않겠다고 규정했다. 당시 대다수 천민들은 여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 천민 시절의 직업에 종사하는가 하면 대부분이 차별을 받고 있었다. 그 예로 소주의 걸호(거지들)들은 봄을 맞을 때 할 수 없이 심부름꾼으로 일하거나 취고수로 일해야 했다. 안휘성 남부에서의 세부들도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 초기 시절까지 계속 있었으며, 절강성의 타민들도 여전히 배를 집으로 삼고 살면서 육지에 오를 때는 신발을 신지 못했다.[22]

그리고 중국 쓰촨성 지역과 섬서성 지역에는 방호(旁户)라는 이름의 소작농들이 지주들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송사에는 이들을 가리켜 "서민임에도 소작농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노예처럼 일했다."라고 기록했으며, 20세기 역사학자 범문란(范文澜)의 중국통사에도 방호에 대해 "실제로는 소작에 의존해 살아가야 했고 대를 이어 세습하면서 마치 노비처럼 사역했다."라고 기술했다. 이들 역시 넓게 본다면 노예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23]

3.5. 중동

아랍의 흑인 인종청소

역사적으로 제일 흑인 노예무역에 열을 올린 사람들은 유럽인이 아니라 아랍인들이다. 아랍인들은 흑인들을 열등하게 여기는 경향이 심하다. 유명한 아라비안 나이트를 비롯한 중동 문학에서 흑인은 열등하게 묘사되며[24]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모욕을 하는 장면들이 비일비재하다. 게다가 아랍 국가들에서 아프리카계 아랍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은 현재진행형으로 심각하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흑인 국가들은 자기 나라들을 식민지배했던 유럽계 백인 못지않게 아랍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하다.

특히 차드나 말리, 니제르, 세네갈, 탄자니아, 케냐, 소말리아 등 과거 아랍 이슬람 세력에게 침략, 식민지배를 받았거나 전쟁을 겪었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흑인 국가들의 사람들에게 이집트나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같은 중동,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바로 쓰레기, 악독한 놈들, 이놈들은 백인 국가들이지 아프리카 국가가 아니다 하며 바로 욕부터 튀어나오거나 나쁘게 여길 정도이다.(...)

아라비아 지역에서도 인도양을 중심으로 한 노예무역은 상당히 성행했다. 시기도 훨씬 길고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티오피아, 말리 등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와 부족들은 고대시대 때부터 아랍 상인들과 많은 교류를 해왔다. 특히 이들 아랍 국가 중 오만 제국은 당시 포르투갈 왕국, 스페인 제국 등과 함께 잔인하고 악랄한 제국주의자 노예 상인 이미지로 유명했다.

특히 동아프리카 탄자니아다르에스살람과 바가모요, 잔지바르세계 최대의 노예 무역항이었다. 현 이라크에 위치했던 압바스 왕조에서 흑인 노예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을 정도다.[25]

오스만 제국에서는 튀르크인 노예들로 구성된 맘루크라는 직업 군인 집단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맘루크는 일반적인 노예가 아니라 고도로 전문화/제도화된 용병 집단에 가까우며, 서아시아의 정치/군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스만 제국에서 관료나 학자, 또는 근위병인 카프쿨루 등을 위한 인재 징집용 제도인 데브시르메 제도로 모은 자들도 일단 명목상으론 술탄의 노예였다. 물론 실제 대우는 보통 생각하는 노예 따위 수준은 전혀 아니기에 그냥 형식상일 뿐이다. 맘루크와 비슷한 셈. 일반적인 노예도 존재하기는 했지만, 오스만 제국 특유의 빡빡한 재산법 때문에(...) 노예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재산적 손실이라, 보통 노예 소유주는 가사노동을 시킬 하녀나 하인 두서너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방시켜 자기 토지에 소작하게 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특히 학식이 높은 그리스인 등 유럽인 노예를 아이들을 위한 가정교사나 재산관리자로 삼는 것은 로마시대의 전통과(...) 비슷했다. 한편 전쟁에 참가한 이들 중 집안이 가난해서 이슬람 문화권 특유의 지참금을 낼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여자를 포로로 잡아와 해방시켜서 혼인하는 것을 선호했다. 오스만 제국 시기의 노예법은 상당히 관대한 편이어서, 일단 노예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무슬림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자동으로 해방되었고, 노예 소유주들도 재산세 때문이긴 하지만 노예를 부리기보다는 해방시켜 소작을 부치는 걸 선호했고, 노예를 해방시키는 행위가 상당히 명예롭고 관대한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에 집안에 경사가 나거나 잔치를 열 때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도 흔했다. 또한 성적 착취를 목적으로 노예를 부리는 행위는 불명예스러운 행위로 간주되어 심하게 비난받았다.

참고로 이슬람 문화권에서 노예들 중 흑인 남성들에 대해서 성욕이 과해 일을 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하여 생식권을 박탈하고 예외없이 거세를 시켜버렸기 때문에 흑인 노예의 자손들은 흑인 여성 노예로부터 태어난 후손들을 제외하면 없다고 한다. 다만 이것도 케바케라서 이집트 남부나 모리타니, 사우디아라비아, 에멘, 이라크에서는 흑인의 후손도 있으며, 무함마드도 한창 박해를 받았을 때 같이 탄압을 받았던 에티오피아로 신도들을 내보낸 것도 있기도 하다. 본격 선지자 모욕

현대의 이슬람 국가들에서 노예제도는 구시대의 유물 취급 받고 있으며 대게 노예제를 허용하는 구절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그 시대상에는 어쩔수 없었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극단주의자들은 다시 부활시키자고 하고 테러단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보코 하람 등은 실제로 노예제를 부활시켰다.

3.6. 대항해시대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이동표

근세 식민주의 시대에 이르러 아프리카 노예무역이 세계적인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초기에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선취권을 얻은 포르투갈이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후에는 영국을 포함한 후발국가들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 노예무역은 가장 많은 이윤이 남는 장사로 통했었다. 때문에 돈좀 있다는 상인들은 족장과 물물교환을 하는 형식으로 주민들을 받아내거나,[26] 용병들을 고용해 아프리카로 가서 눈에 보이는 아프리카 주민들을 무더기로 납치했다. 당시 아프리카 주민들은 이들에게는 물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였다.

또한 취급이 물건이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은 정말 물건처럼 수납되어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다. 어떻게 수납되었는지는 아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이들은 어디까지나 물건이었고, 아메리카 항해는 기간도 최소 한 달 이상인데다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는 장거리 항해 자체가 목숨을 건 여정이었기 때문에, 한번에 최대한 많은 노예를 수납하기 위해 위 사진처럼 노예를 실었다. 이 배에 실려있던 식량들은 당연히 항해사들을 위한 식량이 대부분이었고, 아프리카 노예들은 이러한 상태에서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한 달 이상을 버텨야 했다. 다만 이건 배 자체의 적재량의 한계와 노예를 최대한 많이 실으려는 욕심 때문이고, 노예는 살려둬야 가치가 있는 거니 간신히 목숨만 연명할 정도로라도 먹을 것을 주기는 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죽으려고 입을 꾹 다물고 음식을 거부하는 노예들이 나오면, 노예상들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석탄을 쇠집게로 집어 얼굴에 들이대서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한 다음, 목구멍에 금속 깔때기를 쑤셔박아서 음식을 쳐넣는 잔혹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비참한 항해 과정에서 지독한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바다에 뛰어들거나 상처를 일부러 곪아들게 만들어 자살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노예들이 사망하였지만, 절반만 살아남아도 남는 장사였던 관계로 저것보다 더 심하게 적재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대표적으로 영국에서 1781년 Zong호라는 배에서 400명의 노예를 싣고 서아프리카 상토메에서 자메이카로 가던 도중 선장의 실수로 기항지를 놓쳐 항해가 길어져 식량과 물이 부족해졌다. 본인들의 살길은 물론이고 이 노예들은 화물로서 보험처리가 되었는데 후에 병으로 죽은 노예들에 대한 배상도 걱정되어 약하고 병든 노예들 중 133명을 골라 바다에 던져버려 그대로 익사시키게 만들었다. 후에 법정은 이들한테 죽은 노예의 소유주에게 화물에 준하는 배상금을 지불하는 걸로 다소 가벼운 처벌을 내렸지만, 후에 영국에서 노예제 폐지를 논의하는 큰 사건이 되었다.

노예제의 역사와 함께 노예 탈출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1526년 현재의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동쪽에 위치한 스페인 정착지에 노예로 잡혀와 있던 아프리카 흑인 한명이 탈출한 것이 미국 대륙 최초의 노예 탈출이다. 원주민 족의 보호를 받았다고. 영국의 초기 식민지였던 제임스타운이 1622년 원주민들에게 습격당해 파괴됐을 때 백인들은 살해됐으나 흑인들은 원주민들에 합류했다.

18세기~19세기에 들어서면서 체로키, 세미놀 족 등의 아메리카 원주민도 흑인 노예를 부리며 플랜테이션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다만 이 경우는 경제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백인 국가와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로부터 정당한 문명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정부를 구성하거나 심지어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지만 미국은 무시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흑인 노예무역은 사그러들게 되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유럽에서 열대농산물 수요가 늘어나 아프리카 현지에서 생산 및 조달하기 위해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인권의식이 커지면서 아프리카인들은 자주 집단반란을 일으켜 노예주들이 관리하기 어렵게 되었다. 노예무역의 악폐가 널리 알려지면서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더이상 아프리카인을 함부로 다루지 말자는 여론이 커졌다.[27]

1807년 영국이 노예무역을 불법화하고[28] 노예무역 단속을 시작하자 영국의 압박을 받은 프랑스나 스페인, 네덜란드도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단속에 동참한다. 이후로 노예무역은 음성화되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미국 남부에서는 이에 대해 노예간의 통혼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흑인노예를 대폭 늘려 공급 중단에 대처했으나 결과적으로 50년쯤 지나자 노예제의 이익 상실과 수가 급격히 많아진 흑인들에 의한 해방 운동과 미 정부에 의한 노예제 폐지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1833년 영국을 시초로 1848년 프랑스, 스페인어권 라틴아메리카에 이어 남북전쟁으로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예제도 폐지가 되고 이들은 자치구에 합류했다. 2000년대 들어 자치구들에서 흑인들의 거주를 금지하는 안건들이 통과되었으나, 법원과 미국 정부가 반대하여 논란 중이다. 1886년 쿠바, 마지막으로 1888년 5월 22일 브라질에서 노예제가 폐지됨으로서 모든 서구 국가에서 노예제가 사라진다. 그 이후로 서구 열강들이 새로 차지하는 모든 식민지에서 노예제가 폐지되게 된다. 그러나 식민지 주민들에 대한 강제노동 제도는 계속되었다.

3.7. 현대

당연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불법이다. 대한민국 형법상에서는 노예라는 표현보단 인신매매라는 표현을 쓰기 때문에, 형법상의 해석은 이점을 유의하는 게 좋다. 자세한 사항은 인신매매 참조.

그러나 안타깝게도 21세기에도 노예는 실존한다. 노예 '처럼' 일하며 어렵게 사는 은유적인 의미의 노예가 아니라 정말로 사고 팔리며 계급적인 차별을 받는 노예. 인신매매 이후 여러번 되팔리는 사창가 여성들, 부채로 예속되어있는 인도, 중동, 중남미, 동남아시아 등지의 부채 노예 등등...단순히 생각한다면 그냥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하층민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처해있는 상황과 노예의 사전적/사회적 의미를 잘 생각해 본다면 이들은 분명히 노예이다.

꽤 부유층에서 태어나 세상 걱정을 모르던 체 게바라가 젊은 시절 친구와 같이 모터바이크를 타고 남미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가 목격한 사탕수수 농장에서 족쇄를 차고 힘겹게 일하면서 채찍으로 맞으며 살아가던 노예를 보고 충격에 빠져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사회 저항 운동으로 나서게 된 것도 유명한 일화다.

전 지구상에 노예제가 합법화되어있는 나라는 단 한 곳도 없지만[29] 2003년 미 국무부 인신매매 보고서에 따르면 매년 100만명 이상이 밀매되고 그들이 소유물로서 인식되며 불법 노역에 시달리는 나라는 약 106개국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러한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2700여 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상당수의 국가에서 인신매매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로 개발도상국부터 선진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나라의 상당수는 지역 사회에서 불법인 줄 알면서도 모른척하거나 심지어 옹호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문제가 아주 심각한 편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라에 한국도 포함된다. 신안군에서도 섬노예 건으로 논란이 된 바 있다. 매춘부들의 경우도 자발적이 아닌 인신매매→강간 및 억지 사채→협박과 부채, 폭력으로 매춘행위 지속시키기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면 이에 해당한다. 또는 불법 직업소개소에서 직업 알선을 해준다면서 어선에 팔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래놓고 항해 갔다오면 돈 쥐꼬리만큼 준 다음 항구에서 못 벗어나도록 통제한 다음 다시 또 어선에 팔아버리는 식으로 진행된다. 어선 측에서 신고를 하거나 하면 당연히 적발되지만 심신박약자를 낚는 경우가 많다. 혹은 멀쩡한 사람을 납치, 마구잡이로 폭행하여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만들어 어선에 넘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선에 감시자가 동승하거나 교묘하게 부채를 갖도록 해서 자의적으로 빠져나가기 어렵게 한다. 무엇보다 사용자 측인 어부들이 이런 식의 불법 노역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 작업 여건이 열악해지고 수지가 안 맞는 어로 활동에 몰린 나머지 이러한 불법 노역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는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장애인을 직업 알선으로 유인하거나 그냥 끌고 간 다음 섬으로 옮긴 뒤 평생 노예 노동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신분제 폐지 이후에도 관행이 계속되었으나 잘 알려지지 않다가 긴급출동 SOS24에서 이슈화되었다. 여기 하지만 경찰 등과 유착되어 있는데다 주민들도 무관심해 문제 해결이 쉽지는 않은 듯...이렇게 아주 운이 좋은 사례도 있지만 평생 행방을 알 수 없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 외에도 곳곳에 사례가 적발되는데 공중파에서 노예 할아버지 어쩌고 하는 아이템이 방송될 정도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한 것이다. 더더욱 안타까운 건 섬 지역이나 뱃사람들은 의식상 신분제를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혹은 극도로 폐쇄적인 소규모 지역 사회인 탓에 적극적인 피해자 구제가 힘들다는 것. 게다가 현지 공권력이 매수되어 섬노예를 묵인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아 상부에서 직접 조사에 나섰다가 적발. 말 그대로 피바람이 부는 경우도 꽤 된다. 한국에서 사실상 노예로 취급되어 온 것이 드러난 사례는 다음과 같다. 긴급출동 SOS 24방송을 타서 파급력을 얻은 케이스가 많다. 안산의 선감원처럼 일제시대부터 역사가 이어지기도 한다.

21세기의 노예는 법적인 굴레가 아닌 폭력 또는 비정상적 금전채무로 인해 구속되어있고 이것이 대대로 세습되며 고착화되고 있다. 즉 법적인 노예제가 없으니 더욱더 브레이크 없이 가혹해져가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 특히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네팔/부탄/몰디브/스리랑카 등등 인도 반도 주변국들이 심각한 상황인데 상기한 2700만 명 중 2/3인 1000~1500만 명의 노예가 이쪽에 존재하고 특유의 사회문화 덕분에[34] 사회적 제재 없이 고대 노예제 못지 않은 특성을 띄게 된 것이다.

더불어 빚과 아동노동제도 심각하다. 가난한 시골 지역 사람들에겐 돈이 필요한데 은행은 대출이 까다롭고 결국 사채업자에게 터무니없는 이자로 돈을 빌리지만 돈을 갚지 못하면 아이들을 대신 데려가서 채석장이나 여러 곳에서 종일 막노동을 시키고 그 임금을 이자 대신 사채업자가 가져가는데 일부에선 아이들이 달아나는 것을 막고자 족쇄를 채우기도 한다. 게다가 이쪽은 현지 경찰 등 공권력의 부패가 굉장히 심각한데다 사채업자에게 협조적이기까지 해서[35] 더 문제.

마이크로크레디트로 수십여만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키는데 기여해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방글라데시의 무함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총재를 봐도, 노예 해방은 그야말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정도로 봐도 될 지경이다.

낮은 단계의 산업- 즉 농장이나 단순공업 등에서는 열악한 노동 조건을 필요로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노동 조건을 그대로 적용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에 인신매매 등을 통해 인력을 확보하고 부채를 강요하여 노예로 부리는 일이 벌어진다. 나름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에서조차 지방의 오렌지 농장 등에서 이러한 불법 착취와 인신매매로 적발되는 일이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그나마 공권력이 썩지는 않아서 걸리면 바로 잡아내고 기소하여 수백 년 징역, 종신형 등 엄벌을 때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애당초 사형이 존재한다고 연쇄살인범이 살인을 안 하는 게 아니듯 이런 짓으로 이익을 보는 사회 구조 자체를 없애야만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심지어 이 농장에서는 가공의 화폐를 사용하여 노동력 유출을 막기도 하였다. 즉 완벽하게 출입을 통제한 농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수표를 발행하고 생필품 판매를 통해 다시 회수하는 형태를 취한 것. 이렇게 되면 부채를 영원히 갚지 못한다. 가격 책정도 자기 맘이니까. 사실 일제강점기 징용 현장들 중에서도 이런 방식을 취한 곳이 몇몇 있었다고 한다.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에 등장하는 제애그룹 지하노역장 같은 게 엄연히 실존하는 셈이다.[36]

전세계에 현존하는 노예들의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등등에 있어서 노예들이 동원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미국의 '노예해방' 등의 인권단체들이 여러가지로 노력하곤 있으나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의 일부 노동자들을 구제하는데 그치고 있다고 한다. 세계 여러 나라의 NGO에서 활발하게 추진 중인 공정무역 운동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시리아와 이라크의 무장세력 단체인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에서 21세기에 공식적으로 노예제 부활을 선포하고 실천했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수종교집단인 야지디교도들을 공격해 살해하고 또한 1500명이 넘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납치해 성노예로 삼은 것이 밝혀졌다. 이들은 이슬람교의 성경인 꾸란에 이교도들은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노예나 첩으로 삼아 자신들의 아이를 낳게 하라는 교리를 부활시키고 실천한 것이라고 당당히 나서고 있다. 물론 꾸란에 노예 관련 구절들이 상당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노예해방을 권장하는 쪽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원을 끌어모으려고 곡해하는 쪽이기는 하다. 야지디교도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이라크인들이나 시아파 여성들이 납치당하여 군인들을 위한 매음굴에서 강제 매춘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4. 현황

위 지도는 국가별 인구대비 노예 수를 나타낸 지도인데 기준도 안나와있으므로 확실하지는 않다., 모리타니아이티, 파키스탄, 인도는 인구대비 노예 비율이 1%를 넘는다. 이 네 나라는 전세계 인구의 20%와 전세계 노예의 55%를 차지한다. 특히 모리타니는 모리타니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노예 비율이 높은 나라이고, 4% 수준으로 그 다음인 아이티의 두 배에 이른다. 대한민국의 경우, 5,0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현역병을 제외하면 약 10만 명 정도가 노예라고 하여 162개 국 중 137위를 기록했다. 사실 전세계에서 노예가 10,000명당 1명 이하인 나라는 뉴질랜드, 영국,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4개국이 전부다. 그 밖에 미국도 3억 1,000만 명의 인구 중 6만 명이 노예라고 한다. 주요 국가의 통계 수치는 아래 표를 참고하자.

국가

인구

노예 수

인구대비 비율

심각도 순위[47]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5,234,927

2,640,000

10.456%

1위

에리트레아

4,846,976

451,000

9.303%

2위

부룬디

10,199,270

408,000

3.995%

3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4,546,100

101,000

2.225%

4위

아프가니스탄

33,736,494

749,000

2.219%

5위

대만

23,485,755

12,000

0.049%

165위

캐나다

35,949,709

17,000

0.048%

166위

일본

127,974,958

37,000

0.029%

167위

러시아

143,888,004

794,000

0.551%

64위

중국

1,397,028,553

3,864,000

0.277%

111위

미국

319,929,162

403,000

0.126%

158위

대한민국

50,593,662

99,000

0.195%

137위

노예의 비율이 제일 적은 국가제일 많은 국가가 모두 아시아에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체로 사회가 작거나 군소도서가 없어 통제가 용이하고 선진적인 국가일수록 노예가 적음을 알 수 있다.[48] 공권력이 지방 토호와 유착한 인도, 파키스탄, 에티오피아, 아이티 같은 개발도상국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고,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생각보다 오지나 작은 사회가 많은데[49] 이런 지역을 배경으로 상당한 규모의 노예가 존재하며 한국도 역시 남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작은 사회가 형성되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작은 사회가 형성되기가 어려운 소국인 아일랜드나 아이슬란드, 소국은 아니지만 역시 한국처럼 군소 도서의 작은 사회가 나오기 어려운 지형 구조를 갖춘 영국은 노예가 적은 편. 이외 미국처럼 노예를 부리기가 쉬울 만큼 나라 전체가 넓고 신분이 불안정한 사람들도 흔하지만 대신 국가 차원에서 노예제 적발의 의지가 철저하고 공권력이 썩지 않은 경우에는 비교적 노예가 적을 수 있다. [50]

물론 영국처럼 노예가 거의 없는 국가일 경우에도 몇몇 문제 가정이나 집단에서 노예를 비밀리에 부리는 것은 못 막아서 간혹 적발되곤 한다. 당장 2013년에 터진 30년 노예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나라는 한국처럼 작은 사회가 마을 혹은 지역 단위로 형성되어 있지는 않아서 대놓고 노예를 부리지는 못하기에 그 숫자가 적은 것이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차이는 별로 없어서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대부분의 국가는 작은 사회가 형성되기 어려운 지형적 구조를 갖고 있고, 공권력이 현지 토호들과 유착되지도 않아서 대부분의 노예는 가정이나 특정 사교집단 등에서 소수만 데리고 착취하다가 적발되는 식의 케이스가 많고 섬노예 같은 경우는 드물다.

http://www.globalslaveryindex.org/index/#

Global Slavery Index 2016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32위, 일본은 42위, 중국은 40위, 미국은 52위, 북한은 1위, 러시아는 16위다.

5. 종류

사실 고대 로마에서도 노예는 그냥 인신의 자유가 없는 사람을 일컫었을 뿐이고 전부가 하급 육체 노동자는 아니었다. 고도의 기술을 가진 학자와 기술자 집단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물론 그런 노예는 주로 그리스인이었다. 로마 귀족 자제에게 기초 교양인 리버럴 아츠를 가르치는 것은 거의 그리스인 노예 강사였으며 귀족의 대리로 상업활동을 하거나 토목, 건축, 미술 분야에서 전문인으로 활동하였다. 심지어 주인에게 명을 받아 배를 지휘하는 노예 선장이 자유민 선원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 로마 시대의 노예는 사유재산과 가족을 가질 권리가 있었으며[51] 일정액 이상의 재산을 모으고 주인에게 돈을 지급한 경우 해방되는 제도가 있었다. 이를 해방 노예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로마의 기술, 경제인으로 활약했다.

동북아시아에도 노비라고 불린 노예 계급이 있으며, 이들이 일반적인 노예 이미지에 더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이들도 독자적인 재산권이 인정되는 등, 통상적인 노예와는 달랐다[52][53]. 재산 소유가 인정됐다는 점때문에 노비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보유하기도 하여 꽤나 괜찮은 경제력을 갖추기도 했고, 때문에 이를 이용해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기도 하는 등[54], 인신의 자유가 없고 천민으로 분류되어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만 빼면 생각보다 괜찮은 삶을 누리는 경우가 꽤 있었다.

성노예도 존재했다. 과거에도 광범위했고 현대에도 암암리에 행해지기는 하지만 가장 유명한 건 제국주의 시대 일본군에서 운영한 일본군 위안부. 군 주도로 전선에다 공창을 운영한 것인데 여인들에게 사기를 치거나[55], 아예 납치하다시피 해서 여기 투입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른바 한국 사창가의 '인신매매' 패턴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정부 주도로 행했다.

6. 효율 문제

노예 제도가 산업 혁명 이후 산업 혁명에 성공한 사회에서도 존재하였지만 그 사회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되지 못하였는데 노예제의 근본적인 문제인 비효율성 때문이다. 일단 노예라는 것 자체로 노동의 효율성이 극감하며 가혹하게 수탈하는 경우에도 생존과 노동력의 보존의 비용이 주인에 부과되는데 그 득실을 맞추기 상당히 어렵다. 더구나 대다수 노예들에게 공통적인 목표가 생긴다면 집단 반발의 가능성까지 존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추가적인 관리 비용까지 요구된다. 노예 경제를 기반으로 둔 고대 사회에서도 이 비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예가 스파르타이다. 게다가 아테네 등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은 노예가 노력해서 자유를 사거나 전장에서 공을 세워 해방될[56] 수 있는 권리는 주었지만 스파르타는 그것도 없었다.[57]

여기까지 오면 이걸 유지할 필요의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강제 노동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노예 자체가 재산인 상황에서 가혹한 수탈은 '노예라는 재산의 가치 하락'이라는 역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 노동을 시키면서 가혹한 수탈을 한 사례가 있다. 아우슈비츠. 물론 이쪽은 처음부터 유대인의 절멸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냥 죽이는 것보다는 노동력을 극한까지 뽑아내고 죽였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사례가 미국 남부 노예 산업이다. 미국의 노예 제도는 개척 과정에서 등장하였는데 초기의 주력 산업은 담배 농사였다. 하지만 담배 재배에 의해 지력 고갈이 심각해지면서 약탈 농업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고 이걸 노예 유지비용과 비교하면 적자에 근접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 시기 남부에서는 노예제 폐지에 대한 논란이 자발적으로 나타났다. 물론 인권의 문제를 포함하여 언급되었다. 하지만 《국부론》을 저술한 아담 스미스는 이것이 이해 득실의 문제라는 것을 간파하고 만일 이익으로 결판이 나면 논란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물론 결과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을 극단적으로 뒤집은 것이 산업혁명의 주역인 면방직 공업의 발전이었다. 이때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은 방직기, 방적기를 포함한 기계화가 이루어져 면방직 공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이 때문에 목화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목화를 재배하는 데에는 농기계도 없던 시절이라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때문에 노예제는 더욱 공고한 형태로 지속된다.

1791년 당시만 해도 미국의 목화 재배량은 90만 kg 정도에 불과했으나 불과 10년 뒤인 1801년에는 2200만 kg에 달할 만큼 늘어났다. 남북전쟁이 발생하는 1861년에 이르면 미국 수출품목 전체의 비중이 거의 60%에 달할 만큼 커졌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노예의 재산적 가치도 높아졌으며 이 때문에 많은 노예주들은 노예 해방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이후 다들 알고 있다시피 북부가 승리하여 노예는 해방된다.

여담이지만 미국의 면방직 산업은 영국과는 달리 그리 발달하지 않았고 목화 자체를 수출하는 것이 주력이었다. 방적기는 목화에서 섬유를 빼내는 기계이고 방직기는 이를 이용해서 천을 만드는 기계이다. 둘 다 목화를 재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목화 수요가 크게 늘어나서 일손이 더욱 필요해졌다. 때문에 기계화로 인해 노예의 필요성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

실제로 노예제는 결코 효율이 좋은 경제적 수단이 못된다. 우선 노예를 먹이고 입히는 비용 등과 재우기 위한 주택 건설에 대한 비용 등도 전부 주인이 부담해야 하는데, 노예들은 매맞기를 두려워해서 어떠한 일도 주도적으로 하지 않았고, 상을 준다고 해도 이들이 올리는 성과는 자유민들에 비해 극히 낮았다.

무엇보다도 노예의 효율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역사적인 사례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무기를 들고 일어난 노예들은 수도 없이 많다. 당연히 이를 진압하거나 혹은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에도 많은 비용이 소모되었고 도망간 노예를 잡기위해 수색하는 것도 엄연히 주인 몫이었다.

또한 이들 노예노동에 의존한 농업도 점치 한계를 나타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노예 입장에서는 열심히 해봤자.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이 시킨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그 결실도 자유민이 일한 것에 비하면 매우 적었다.

물론 농장주들도 이를 대비하여 할당량을 정해두거나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노예를 처벌하거나 죽이는 등 채찍을 가하기도 하였으나... 이러자, 곧 공산주의에서 나타나는 효율저하가 나타났다. 모두가 다 약속하고 일을 못해 버리는 것. 그럼 주인이 죽이거나 두들겨 패면 되지 않나 하겠지만, 폭력을 써도 손해는 결국 노예주에게 돌아간다. 당시 건장한 청년층 노예의 가격이 현대의 1억원에 달하는 고가였는데, 이런 노예가 일을 못한다고 죽이면 당연히 주인의 손해이다. 맘에 안 드는 노예를 팔아치우려고 해도, 등에 채찍자국이나 도망자 낙인 등이 있으면 노예의 가격이 1천만원 이하로 급격히 떨어진다. 결국 공포로 통제할 수는 있어도, 이 방법으론 장기적으로 갈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예를 통제하는 간부들을 고용하는 것에도 비용이 들었다. 이런 감시꾼 역할은 보통 동네에 할 일이 없던 백인 하류층들이 주로 했는데, 이들이 하루종일 땡볕에서 노예들과 같이 있으며 근무를 감독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채찍을 휘두르며 때리는 것도 상당히 중노동이며, 이를 반복하는 것도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도 더 힘든 것이어서[58] 이들은 보통 술에 의지하며 한 철 버티다가 오래 일을 못하고 폐인이 되거나, 일을 그만두기 일쑤였다.

거기에 이런 간부들의 폭력이 강해질수록 노예들의 도망이 늘었고, 이런 도망을 막기 위해, 철망을 치거나, 사냥개를 사들이고, 추적자들을 고용하고 하는 것도, 전부 다 주인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었다.

그렇게 도망간 노예를 잡아서 채찍질하고 다시 일시키며 팔아버린다고 해도, 노예의 가치는 떨어졌으니 주인에게는 계속 손해가 날 뿐이다.

결국 이러한 비효율이 상당히 만성화되며, 남북전쟁 전의 남부의 경제는 훗날의 공산주의 경제와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남부의 대농장/대저택을 다룬 작품들을 보면, 엄청난 수의 노예들이 있는데 이들은 오직 자신에게 정해진 한두가지의 업무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으며 틈만나면 주인과 감시꾼들의 눈을 피해 시간이나 때운다.

예를 들어, 이 노예는 거실만 쓸고, 이 노예는 설거지만 하고 이런 식이다. 한가지 일을 잘 해봤자 더 많은 일을 시킬 것이고, 일을 잘해도 돌아오는 보상이 거의 없으니, 결국 일을 잘 할 필요가 없는 것.[59]

결국 북부의 자유민들에게 돈을 주면 10명이 한시간이면 할 일을 노예를 쓰려면 100명을 데려가서, 20명의 자유민들로 감독해야 10시간 만에 간신히 마무리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의 사유지인 콩고 자유국에서 사실상 자신의 노예나 다름없는 콩고원주민들에게 고무 채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을 절단하는 형벌을 가하여 최소 1000만에서 최대 3000만에 달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하였다. 그 결과, 1893년엔 250t도 되지 않았던 콩고 자유국의 고무 수출량은 1901년엔 6,000t으로 엄청나게 증가하여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재산을 크게 불린 것은 물론, 벨기에에 수많은 공공건물들을 건설하기까지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콩고 자유국의 원주민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노예 제도의 경우 주인이 노예를 먹이고 입히고 하면서 나름의 돈을 써야 하는데, 콩고 자유국의 경우 그냥 원주민들을 강제로 죽을 때까지 노역을 시키는 걸로 해결했다. 거기다 원주민들이 저항하려고 해도 무장이나 기술력의 차이가 많이나서 당해낼 수가 없었다.

벨기에의 레오폴트 2세가 콩고 전체를 노예로 삼아 고무 할당량의 기준을 못 채운 노예의 사지를 절단하는 방법으로 고무 생산량을 높인 것은 사실이며 강력한 무장으로 원시수준 무장을 갖춘 콩고인들을 억압하여 효율성을 높인 것도 사실이다. 초기에는 노예로 전락한 콩고인들의 단결력과 기술 수준이 떨어져서 레오폴트의 방식이 먹혔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콩고의 인구감소와 지속적인 저항으로 군대를 항상 동원해야 했고 군대 동원비용도 만만치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식의 노예억압책은 노예들의 반란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에 항상 그것에 대비해야 했다. 레오폴트 2세에게 콩고를 넘겨받은 벨기에 정부는 할당량에 따른 사지 절단 방식을 폐지함과 동시에 콩고인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임금을 주는 방식으로 레오폴트 2세에 못지 않는 고무 생산량을 유지했다. 거기다 아이티처럼 처음에는 빈약한 무장과 낮은 단결력으로 주인들에게 굴복한 노예들도 점차 주인이 프랑스인들 처럼 최신무기를 장착하고 단결하면서 주인인 프랑스인과 프랑스를 몰아내고 국가 단위로 해방된 사례도 있다.

7. 명언

If slavery is not wrong, nothing is wrong.

노예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에이브러햄 링컨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프리드리히 니체

8. 관련 인물

19세기 미국의 노예였으며[60] 노예 해방을 위한 많은 사회운동을 했다.
고려의 노예인 노비였으며, 자유를 찾기 위해 만적의 난을 일으켰다.
야훼의 명에 따라 히브리 민족을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해방시켰다고 전해진다.
자유를 위해 싸운 고대 로마의 검투사.
노예 출신이었으나 5호16국시대의 혼란을 틈타 황제까지 올랐다.
일종의 군사노예였던 맘루크 출신의 술탄.
뿌리(소설)의 작가이며 이 '뿌리'는 자신의 직계 조상이자 흑인 노예인 쿤타 킨테와 그 후손들이 노예에서 해방되기까지의 일대기를 다뤘다.
남북전쟁에 승리함으로서 흑인 노예를 해방시켰다.
영국의 노예제도를 폐지시킨 인물.
국가 소속 노예인 공노비로 태어났지만 탁월한 재주를 인정받아 면천되고 벼슬까지 한 인물이다.
회사랑 노예계약을 맺은 인물. 그런데 회사가 노예인 비범한 사람이다(...)
노예에서 오스만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역시 노예에서 오스만 제국의 2인자가 되었으나 위에서 언급한 휴렘 술탄의 모략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61]
에티오피아 출신의 노예였으나 이후 인도 지방국가의 왕이 되었다.

9. 창작물

9.1. 노예이거나 노예였던 캐릭터


  1. [1] 하지만, 반대로 슬라브족이라는 말이 노예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고대 영어로 노예는 sclava라고 하는데, 이 말이 변형돼서 슬라브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2. [2] 참고로 갑골문자에서 民자는 원래 '백성'의 뜻이 아닌 산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을 뜻했다. 을 찔러서 눈을 멀게한 제물이 될 사람을 줄에 묶어서 끌고가는 모습을 본딴 상형자다.
  3. [3] 羌無弋爰劍者秦厲公時爲秦所狗執以爲奴隸,不知爰劍何戎之別也
  4. [4] 참고로 고대 라틴어로 노예는 servus(여성은 serva), 고대 그리스어로는 δοῦλος(둘로스). 성경 번역에서는 보통 '종'(servant)으로 의역한다.
  5. [5] 노예와 일반 농민의 차이는 직업과 거주지에 대한 선택권의 유무였다.
  6. [6] 한족은 노예로 하지 않았고 이민족 노예 역시 모국과 비교하여 그렇게까지 나쁜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도적으로 비교하면 모국보다 나은 점들이 많았다.
  7. [7]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처지라고 해서 완전히 자유는 아니었다. 해방 노예는 자신을 풀어준 주인의 은혜를 갚기 위해 그를 지지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믿음이 로마 사회에 있었고, 이를 어기면 배은망덕한 자라고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해방 노예가 주인에게 반항하거나 하면 주인은 노예의 해방을 취소하고 다시 노예로 되돌릴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8. [8] 출처: 바다의 늑대/ 라스 브라운워스 저/ 김홍옥 역/ 에코리브르/ 141~142, 337쪽
  9. [9] 출처: 치즈와 구더기/ 카를로 진즈부르그 저/ 김정하,유제분 공역/ 문학과지성사/ 93쪽
  10. [10] 당률소의 6권 名例 "奴婢賤人,律比畜產"
  11. [1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확한 호적 작성은 이런 것들을 위해서니까. 다만 인구동태 파악 면에서 유럽은 교회의 세례명부라는 훌륭한 대체재가 있었다. 한국도 절에서 의무적으로 수계를 받았어야 했다..
  12. [12] 참고로 에도시대 '일본의 농노'들에게는 이런 식의 노예의 상징이 실제로 강요되었다. 출처
  13. [13]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
  14. [14] 陵戸、官戸、家人、官奴婢、私奴로 구분하였으며 입은 옷의 색으로 구분하였기에 五色の賤라고 한다.
  15. [15] 自賣 - 스스로를 다른 사람더러 노예로 사 달라고 하는 것
  16. [16] 심지어 구매해가는 사람들도 똑같이 서양인들이었다.
  17. [17] 대가로 조총화약등을 받기도 했다.
  18. [18] 출처: 한 권으로 읽는 청나라 역사 (하)/ 따이이 저/ 전영매, 김선화 공역/ 김승일 감수/ 경지출판사(27~30쪽)
  19. [19] 출처: 한 권으로 읽는 청나라 역사 (하)/ 따이이 저/ 전영매, 김선화 공역/ 김승일 감수/ 경지출판사(27~30쪽)
  20. [20] 이들 천민 계급이 생겨나게 된 유래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하나는 원나라가 절강을 점령한 후 남송 백성들을 징벌하여 육지에서 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며 혹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자신의 적수인 장사성의 부하들에게 대대로 타민이 되어 배 위에서 살아가라는 벌을 내린 것이라고도 한다.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 멍펑싱 저/ 김순림 역/ 신원문화사(248~250쪽)
  21. [21]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 멍펑싱 저/ 김순림 역/ 신원문화사(248~250쪽)
  22. [22]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 멍펑싱 저/ 김순림 역/ 신원문화사(248~250쪽)
  23. [23] 출처: 민, 란: 중국 민중의 항쟁 기록/ 최종명 저/ 썰물과밀물/ 2015년 11월/ 158쪽
  24. [24] 아라비안 나이트의 첫부분이 바로 왕비가 사이드라는 이름의 흑인 노예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인데, 아라비안 나이트 본문에서는 이 장면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25. [25] 아랍권에서 흑인 노예의 반란은 여러 차례 일어났지만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것은 잔즈 반란이다.
  26. [26] 주로 값은 엄청 저렴한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신기해 보이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유리구슬이나 희한하게 만든 장신구 등이 이에 해당된다.
  27. [27] 정작 아프리카 현지에서는 흑인 부족들이 다른 부족들을 포획해 유럽과 아랍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먹었다. 노예를 매매한 부족은 노예로 팔린 부족에게 지금까지도 인종주의적 우월 의식을 지니고 있다.
  28. [28] 노예 자체를 금지하는 급진적인 방법보다 노예무역을 금지시켜 공급을 완전히 끊어버리면 얼마 뒤 노예제 자체가 메리트를 잃고 자연스레 소멸하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노예제 폐지에 대해서는 Amazing Grace가 잘 묘사하고 있다.
  29. [29] 북한의 경우 노예제가 딱히 없지만 국가에 전 국민이 노예로서 사실상 귀속된 상태고 민간에서도 여러 노예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노예제 합법국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30. [30] 관리감독기관은 양천구청인데, 시설은 김포에도 있다.
  31. [31] 보령경찰서가 이 사건을 맡았는데 이는 태안군이 1989년에서야 신설되어 1971년 당시에는 태안경찰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태안경찰서는 1948년 설치되었다가 1956년 서산경찰서에 통폐합되었고, 2017년에 재설치되었다.
  32. [32] 보령은 전혀 관계없느냐를 보면 그것도 아니다. 2018년 현재 보령 행정구역 내에 포함된 오도, 외연도 또한 납치된 청소년들이 혹사당한 곳이다.
  33. [33] 2008년 12월 김제시청이 폐쇄조치했다. 수용 장애인 전원이 타 시설로 분산 조치됐다고 한다.
  34. [34] 카스트 제도 등
  35. [35] 당연한 일인 게 현지 경찰들에게 사채업자나 조폭들이 적당히 돈을 찔러 준다. 그나마 중국은 이게 잘 먹히지 않으니 걸리면 구출이라도 되지만 인도나 다른 남아시아 국가들은 그런 것도 없다.
  36. [36] 그나마 제애그룹 지하노역장은 이런 짓을 봉급의 일부에만 적용. 다른 돈으로는 빚을 갚도록 하고 이자 추가도 중단함으로써 살아서 나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므로 오히려 더 가혹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37. [37] 대부분이 빚 혹은 납치로 끌려온다. 자식을 소유물 취급하는 남아시아 국가들 특성상 부모가 팔아넘긴 경우가 상당수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불가능하고 대부분 보육원 등에서 맡거나 난민 등의 형태로 선진국 혹은 중진국에 보내기도 한다.
  38. [38] 대부분이 빈민가인 파벨라 출신 혹은 나라꼴이 말이 아닌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 주변국 출신 노예노동자들에 의해 이뤄진다. <일회용 사람들> 이라는 책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나와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도 최하층 계급은 아니며 진짜 최하층은 이들 지역에서 강제 매춘을 하는 여자 노예들.
  39. [39] 웬 폭죽이냐 할지 모르겠지만 전 세계에서 폭죽에 가장 환장하는 사람들이 중국인들이다. 일본인들도 한 폭죽 사랑 한다지만 중국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워낙 수요가 많고 업체가 난립하는지라 닥치고 최저비용으로 생산해야 하니 당연히 아이들에 대한 안전 대책 따위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해마다 수많은 중국의 아동노예 아이들이 제조장의 학대와 폭발 사고로 불구가 되거나 죽어가고 있다. 인도도 폭죽을 많이 쓰느라 아이들을 저임금으로 부리긴 하지만 그 수요가 중국이 압도적이다.
  40. [40] 내전 당시 시에라리온의 RUF라는 도적떼는 사람들을 납치하여 힘없고 약한 사람은 손목을 자르고 그렇지 않으면 다이아몬드 광산에 보내 강제 노역을 시켰다.
  41. [41] 주로 수단 공화국, 에티오피아에서 온 가난한 사람들이 대상이다.
  42. [42] 2003년 수단에서 비이슬람계 및 남수단 흑인들로 이뤄진 노예 매매단이 적발되었다. 물론 수단도 노예가 금지라서 합법적은 아니지만... 허나 문제는 그 피해국인 남수단 공화국조차도 다른 부족 아이들을 노예로 부리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노예가 된 아이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국제구호단체에 의해 구출. 난민으로 인정받아 해외로 나가는 것.
  43. [43] 상당수의 농장에서 불법 이민자를 고용한 다음 사실상 노예처럼 부린다. 그나마 미국은 공권력이 썩지는 않아서 적발하려는 노력이 있고, 적발될 시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최대 수백년까지 징역을 때리는 등 처벌이 엄격하다. 물론 상당수의 개발도상국들의 대농장들도 똑같는데 여기는 공권력이 썩어빠져서 제대로 단속도 안하고 처벌도 약한게 문제.
  44. [44] 소수 유흥업소 종사 중에 빚을 지고 그걸 이유로 감금 및 성매매를 강요하거나 처음부터 가짜 계약서를 만든 뒤 신체적 자유를 빼앗고 성매매를 시키는 경우도 존재한다. 최근에는 한국인 피해자는 정부에서 처벌과 단속을 강화함에 따라 별로 없지만 중국, 필리핀, 러시아, 동유럽 등 외국인 여성 입국자 중에 이런 사례가 많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45. [45] 관리 및 감시도 북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 중동, 아프리카 등에서도 외화벌이 목적으로 노동력 착취중.
  46. [46] 태국 영화 옹박 2에서 태국의 성매매 여성들이 유흥업소 사장에게 학대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47. [47] 비율 순위와 거의 일치하지만, 완전히는 아니다.
  48. [48] 슬로베니아 (심각도 순위 67위), 폴란드 (61위)와 예멘 (92위), 스리랑카 (118위) 같은 예외도 꽤 많다.
  49. [49] 중국의 경우 땅이 워낙 커 공권력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많으며 숫적으로도 한중일중 제일적은 일본의 경우도 접근이 어려운 여러 작은 섬들이 많이 존재한다.
  50. [50] 다만 작은 사회는 말 그대로 규모가 작은 사회로서 닫힌 사회와 동의어는 아니다. 닫힌 사회가 흔히 말하는 유착, 노예 등이 나타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작은 사회는 무조건 닫힌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 특히 한국은 수많은 개발과 통상으로 시골이든 도시의 수많은 작은 사회들이 큰 사회들의 속성 일부를 교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51. [51] 다만 유대인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던 모양이다. 탈무드에서 자신이 죽으면 아들이 먼 곳으로 여행간 틈을 타 노예가 재산을 가로채고 도망갈까봐 한 가지를 뺀 모든 재산을 노예에게 준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돌아온 아들이 랍비와 상담했을 때 '노예의 재산은 주인에게 귀속되는 것이니 노예를 물려받는다 하면 되지 않느냐'고 답변했고 그대로 행해 재산을 온전히 물려받게 된다.
  52. [52] 탈무드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유대인 사회의 노예들의 재산권은 무조건 주인에게 귀속되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노비들은 이와 달라서, 제아무리 주인이라도 노비 소유의 재산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자기 노비의 재산을 강탈했다간 절도죄로 처벌받았으며, 때문에 대신 돈 좀 만지는 노비들에게 몸값을 받아내는 조건 하에 집 밖에서 생활할 권리를 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를 대행하는 이들이 바로 드라마 추노에도 나오는 추노꾼들이다. 그리고 이런 덕분에 노비의 재산은 그 자녀에게 그대로 상속되었고, 노비에게 자녀가 없을 때만 주인이 그 상속자가 되었다.
  53. [53] 웃기는 사실은 이 때문에 종종 자기 주인보다 부유한 노비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님은 쫄딱 망해서 거지나 다를 바 없이 비참하게 사는데, 노비는 고래등같은 기와집에서 살면서 떵떵거리는 아이러니한 일도 많았다. 당연히 주인 입장에서는 추노꾼을 고용하거나, 아예 자기가 직접 노비한테 가서 몸값을 받아내서 한몫 챙기려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노비 쪽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미 공명첩이나 족보 매매를 통해 양인 신분을 사놓은 데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사또나 지역 유지들을 돈으로 구워삶아놨기 때문에, 대부분은 휴지 조각에 가까운 노비 문서를 들고 추노를 시도했다가 되려 가짜 문서로 구라쳤다는 누명만 쓰고 몰매를 맞고 내쫓기기 일쑤였다.
  54. [54] 공명첩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양인(양반+평민)의 신분을 얻기도 하고, 족보를 사들이는 방법으로 양인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55. [55] '정신대'라고 해놓고(공장에서 일하는 것이다) 막상 모이니까 위안부로 끌고 가는 일이 빈번했다.
  56. [56] 실제로 아테네가 벌인 전쟁의 상당수가 시민만으로는 그 수가 부족하여 노예까지 포함해서 치른 것이다.
  57. [57] 그러다보니 스파르타의 노예들은 틈만나면 반란을 일으켰다.
  58. [58] 노예들이 언제 반항하거나 도망갈지 모르는데다 노예로 인한 사고가 발생하면 고용주에게 질책을 받거나 해고당하기 때문이다.
  59. [59] 특히 노예를 멸시하기 때문에 더욱 하고 싶지가 않다.
  60. [60] 이후 자유인의 신분을 찾았다.
  61. [61] 첨언하면, 오스만 제국 역사상 노예 출신으로 고관이 된 예나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된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휘렘 술탄이나 이브라힘 파샤는 그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예시들. 일단 하렘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문서상으로 황제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했고,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 이후 오스만 제국의 정치, 군사적 실세는 데브시르메 제도로 징집된 기독교도 소년들이 잡게 되는데, 그들 가운데 노예로 팔려왔다가 징집된 이들도 종종 있었다. 예니체리도 문서상으로는 황제의 노예들.
  62. [62] 다만 도서관 패치를 사용하면 이벤트 진행이 가능해져 노예 발견이 가능해진다.
  63. [63] 리오 스나이퍼와의 내기에서 져서 리오의 시중을 평생 동안 들게 되었다. 리오는 원하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는 그녀가 불쌍해서 노예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거두어 주어 상부의 보복을 막았다. 게다가 세계관상 여성 노예는 성폭행을 포함해 무슨 짓을 당해도 이상할 게 없고 일단 전쟁포로의 신분으로 노예가 된 것이라 본인도 각오하고 있었던 듯한데 리오는 건드리지도 않고 그녀를 계속 보호해 준다.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서로 같이 있는 시간도 많고 해서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는데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리오랑 어디까지 갔냐고 묻기도 하는데 본인은 무시한다. 애초에 그녀를 하대할 수 있는 사람은 명목상이지만 그녀의 주인인 리오뿐이다. 그 리오 역시 후반부에는 그녀에게 존대를 하며 작전지휘권을 넘기기도 한다. 말 그대로 이름만 노예. 그런데 진행하는 동안 아예 진짜 노예근성이 되었는지 하이엘바인을 박살내고 리오를 거의 죽일 뻔한 중간보스의 위엄은 어디 가고 후반부에 리오가 존대를 자꾸 하자 당황해서 이러지 말라고 하며 리오에게 주인님 주인님 그런다. 그리고 리오는 괜히 그녀의 설정을 노예로 짰다고 후회한다. 그리고 결국 진히로인화하며 오랜 기간 벌어져 온 히로인 쟁탈전의 최후의 승자가 된다.
  64. [64] 서룡족의 용제 바이칼이 고아가 된 그녀를 거두어 주었는데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쑤밍은 적대세력인 동룡족이기 때문에 그냥 거두면 서룡족과 동룡족 양쪽에서 극딜을 당할 수 있는 정치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이다.)노예 신분이다. 그러나 암암리에 차기 황후 후보로 거론되는 등 노예라기는 애매하다. 애초에 그 리오에게 가르침을 받은 수제자라 용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인 데다 그녀에게 함부로 하면 바이칼에게 찍히는 건 둘째치고 리오와 하이엘바인 루이체 등 신계의 고위 장교들과 용신 브리간트와도 관계가 불편해진다. (쑤밍은 브리간트의 총애를 받을 뿐 아니라 루이체의 절친이고 그 외 신계의 고위 장군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65. [65] 막시무스는 본디 귀족이자 장군이었지만 콤모두스의 계략에 빠져 사막을 헤메다 정신을 잃은 사이 검투 노예 상인에게 납치되어 검투사로 팔린다. 당시 검투사들은 단순한 검투노예라기 하기 힘들지만 (항목 참고), 이 영화에선 그냥 사고 팔고, 죽으라면 죽는 노예 신분으로 설정됐다. 실제로 막시무스가 가면을 벗으라는 콤모두스의 명령을 어기고 돌아서자 그가 분노해 "노예가! (Slave!)"라고 외친다.
  66. [66] 스폰지밥과 징징이는 집게리아의 직원이지만(스폰지밥은 주로 조리 담당, 징징이는 주로 계산 담당.) 집게사장의 성향과 이윤을 우선시하는 경영 방식, 직원에 대한 태도를 고려하면 말이 직원이지, 실상은 노예와 다를 것이 없다. 정작 스폰지밥은 집게리아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67. [67] 공식적으로는 엘븐가르드(엘프가 사는 국가)에 사는 필 닐바렌의 노예지만 크라미의 주인인 필이 크라미를 노예가 아닌 친구로써 대하며 그 영향으로 크라미도 필을 애칭인 '피이'라고 부르고 말도 놓기 때문에 필하고의 관계는 친구나 모녀(크라미 첼은 18세, 필 닐바렌은 52세.)처럼 나온다. 다만 필이 크라미의 편을 들어줬어도 안 좋은 기억, 울고 싶은 기억, 죽고 싶어지는 기억이 많다고 하며 크라미도 과거 회상을 할 때 '노예로서 닐바렌 가문에서 '사육'되던 나날.'이라고 표현했다. 애초에 크라미를 노예가 아닌 친구로 보는 엘프는 필 한 명뿐이다. 단적인 예로 5권에 등장한 엘프는 크라미를 '노예 한 마리'('노예 한 명'이 아니다.)로 취급한다.
  68. [68] 투믹스 웹툰.
  69. [69] 19화까지.
  70. [70] 오죽하면 손오반, 크리링, 트랭크스(미래)한테 말해서 사이어인들을 우주의 악마라고 할 정도로 노예 피해자다.
  71. [71] 란스와 록키는 란스Ⅵ 초반 한정.
  72. [72] 란스Ⅸ에서 란스의 노예 2호가 된다.
  73. [73] 본래 노예였으나 어릴 적 아지르의 목숨을 구한 대가로 황제의 오른팔이 되었다.
  74. [74] 실사 영화판 한정. 실사 영화판은 스켈레토에게 끌려가서 노예가 되지만 마지막에 그의 친구들에 의해 풀려난다.
  75. [75] 히어로즈 오브 메이플에서 빵 몇 조각 받고 맞으며 일했다고 묘사된다.
  76. [76] 한때 노예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된 적도 있었지만 본인이 자진해서 다시 노예가 되었다. 물론 주인인 이와타니 나오후미는 그녀를 매우 신뢰하고 있는지라 사실상 형식적인 주종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77. [77] 스토리 진행 중 자기가 저질러온 악행들이 다 밝혀져 어머니인 여왕의 명으로 노예문(=노예에게 거는 마법)이 걸려 노예 상태였다가 17권 기준으로 해방.
  78. [78] 콰이곤 진을 만나기 이전
  79. [79] 노예 대우를 못이겨 반란을 일으켰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80. [80] 도혜옥에게 입양된 이후 초등학교 때 구박받다가 중졸이 된 채 국밥집에서 사실상 노예로 착취당한 적이 있다. 참고로 부려먹었던 사람은 연민정의 친모인 도혜옥으로 연민정이 자기 엄마의 인성을 닮아 인간말종이 된 것에 가장 큰 일조를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81. [81] 작중 나온 이들은 초신성과 실버즈 레일리가 휴먼숍에서 깽판을 부린 덕에 탈출할 수 있었다.
  82. [82] 작중에서는 노예가 아니라 '펫숍'의 상품이라고 나온다.
  83. [83] 키스샷(시노부)의 노예였으나, 지금은 주인.
  84. [84] 과거 라스타의 부모가 로테슈 자작에게 사기를 쳐 노예가 되었다. 노예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주인의 아들 안렘을 유혹해 아들을 낳으나 배신 당하고 도망치다 덫에 걸려 황제 소비에슈의 정부가 되었다.
  85. [85] 에델로즈와 비슷하다.
  86. [86] 시즌1까지만.
  87. [87] 이들은 제레프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마스터 하데스에 의해 낙원의 탑에 갇혀 불행한 삶을 살아왔다.
  88. [88] 이쪽은 일단 미닛맨 장군이자 정착지 지도자, 혹은 브라더후드의 부사령관, 인스티튜드 소속 바운서, 레일로드의 현장 요원이긴 하지만...
  89. [89] 특히 렌죠지 베루, 하야미 히로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90. [90] 가끔식 노예경매장이 열리는데, 할 짓 없는 석상들이 노예를 자처한다. 경매로 노예를 사고, 금액을 노예에게 주고 일을 시키는 일종의 인력대기소(...)다. 물론 뉴비가 나오면 경매가가 미친듯이 치솟는 걸 볼 수 있다...그럴 때는 거뿔로 'X채널 경매장에서 뉴비를 거래하고 있어요'라고 신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