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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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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전쟁
麗蒙戰爭

시기

1231년(고종 19년) ~ 1259년 (고종 46년)

장소

한반도 전역

원인

강동성 전투 이후, 고려와 몽골의 관계 악화.

교전국

고려

몽골 제국

지휘관

고종
박서
김경손
김윤후
대집성
최춘명
이자성
채송년 등

<^|1>살리타이
탕우타이
자랄타이
예케
아모간 등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정규군(3군) 절반 이상 손실 , 민간인 사상자 100만 이상

2차 여정 도중 최고 사령관 전사, 그외에는 미미

결과

고려, 무인정권 붕괴 및 몽골과 강화 체결.

영향

몽골의 내정 간섭으로 고려의 정치·경제 파탄.
고려 중기 이전의 문화재 소멸.

1. 개요
2. 배경
3. 제1차 침입
4. 제2차 침입
5. 제3차 침입
6. 휴식기
7. 제4차 침입
8. 제5차 침입
9. 제6차 침입
10. 제7차 침입
10.1. 제7차 침입 - 몽골의 상륙 작전
10.2. 제8차 침입
10.3. 제9차 침입
11. 후일담
12. 평가
13. 결과
14. 같이보기

1. 개요

1231년(고종 19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9차례에 걸친 몽골고려 침입으로 촉발된 전쟁. '대몽항쟁', '항몽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여요전쟁과 달리 고려의 항복으로 끝난 고려 전쟁사 최악의 암흑기로, 그야말로 전국토가 탈탈 털렸다.[1][2]

2. 배경

칭기즈 칸의 주도 하에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하며 유목민족의 기상을 드높였다. 서역을 정리하자 몽골 제국은 중원으로 눈을 돌렸고 1차 목표는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금나라였다. 몽골은 남송과 연합하여 금을 남북으로 공격하니 금은 멸망하였다. 이 때 거란 잔당의 일부는 금나라가 망해가는 틈을 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 다시 몽골에 쫓기게 되어 1216년(고종 4년), 갈 곳 없어진 거란의 잔당들은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에 몽골은 여진족의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거란의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고려에 들어왔다. 고려도 거란 잔당 소탕을 위해 군사를 동원, 몽골-동진 연합군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의 잔당들을 소탕하였다. 이것이 강동성 전투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으니…

몽골은 이를 계기로 고려에 큰 은혜나 베푼 듯이 행동하였고, 해마다 고려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 몽골 사신들은 고려에 들어와 깽판을 부렸다.[3] 이러니 고려에선 당연히 반몽 정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흘러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구유(저고여, 箸告與)가 귀국하던 도중 국경에서 자객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골에서는 고려의 소행이라 주장, 고려에선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4]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져 결국 국교 단절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몽골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5]

3. 제1차 침입

몽골군
※ 출처 :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 블로그

일시: 1231년 음력 8월 ~ 1232년 음력 3월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를 치기 위해 배후의 위협을 미리 차단하기를 원했고[6] 이에 권황제 살리타이(撒禮塔)에게 군사 3만을 주어 고려를 침략하였다.

몽골군은 음력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철주 등을 단숨에 함락시키고 남하, 고려군은 이에 맞서 자주·동선역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안북성 전투에서 희대의 패착을 거두며 전황이 급속도로 불리해졌다. 귀주에서 혈전 속에 그 지역을 수비하던 박서, 김경손 등의 맹활약으로 1만명의 북로군을 귀주에 묶어두며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황에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몽골군이 수도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할 수 없이 살리타이가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만나고 왕족인 회안군 왕정을 적진에 보내어(사실상 인질) 강화를 맺었고 제1차 침입은 종료된다.

4. 제2차 침입

일시: 1232년 음력 8월 ~ 1232년 음력 12월

불리한 전황에서 고려는 잠시라도 피하고자 몽골과 강화를 했지만 이는 고려의 작전상 후퇴였고 당시 집권자인 무신정권최우는 앞으로 있을 몽골의 침략에 대비해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 천도를 단행하였다.[7] 결국 1232년(고종 19년) 음력 6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몽골과의 장기 항전 태세에 돌입하자 몽골은 살리타이를 다시 내세워 침입해 서북부를 다시 초토화시킨 뒤 홍복원의 배신으로 서경을 함락하는 데 성공하고, 그 뒤에 홍복원[8]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시킨 후 남경(南京, 서울)도 함락시킨 뒤, 계속 남하하였다. 초원에서 자란 유목민족의 특성상 해전에 약한 몽골[9]은 강화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고려는 거절하였다. 이에 열받은 몽골군은 다시 남하하여 처인부곡을 공격했지만 김윤후라는 스님[10]에 의해 수장 살리타이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바람에 퇴각하였다.

고려군 출처

한편, 몽골군이 철수하자 최우는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에게 3천을 주어 앞서 배반한 역적 홍복원을 토벌하고, 홍복원의 가족을 사로잡았으며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이 2차 침입 때 많은 문화재가 불타 사라졌고, 부인사에 소장되어있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좀 어이없는 사건도 하나 있었다. 충주성 전투에서 성을 수비하던 관리들이 도주하자 양민과 노비들이 남아서 성을 지켰는데, 문제는 몽골군이 철수한 후 돌아온 관리들이 성안의 재물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백성들을 처벌한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니 졌지

5. 제3차 침입

일시: 1235년 윤달 7월 ~ 1239년 4월

금나라가 1234년에 멸망하자, 몽골은 1235년(고종 22년)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탕우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공격케 하였다. 몽골은 여러 차례 패배를 하면서도 4년간에 걸쳐 고려 영토를 초토화 시키고 점령했다.몽골군은 1,2차전에 털어버린 황해도,경기도뿐만 아니라, 대구, 경주(동경)등 현 경상북도까지 털었다. 이때 몽골군은 황룡사에 불을 질러 전소시키는 등 막대한 피해를 고려에게 안겼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 웅거하여 저항하였고 부처의 힘을 빌어 난국을 타개하고자 '대장경'의 재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육지에선 몽골군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결국 1238년 겨울, 고려 조정에서 몽골에게 강화를 제의했고, 몽골은 고려 고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1239년 봄에 철수하였다.

철수 후 고려는 약조를 이행하지 않다가 몽골의 협박 독촉으로 왕의 신병을 이유로 입조가 불가능함을 알렸다. 그 대신 왕족인 신안공 왕전(新安公 王佺)을 왕의 아우라 속여서 칭하여 몽골에 보냈다. 그리고 2년 후인 1241년(고종 28년)에 신안공 왕전의 사촌 형인 영녕공 왕준(永寧公 王綧)을 왕자로 가장시켜 또 한 번 사기를 쳐서 몽골에 볼모로 보냈다

6. 휴식기

1239년부터 1247년까지는 몽골의 침입이 없었다. 그러나...

7. 제4차 침입

일시: 1247년 윤달 7월 ~ 1248년 3월

오고타이 칸(원 태종)의 대를 이어 구유크 칸(원 정종)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에서의 출륙을 조건으로 아모간(阿母侃)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구유크 칸이 곧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고려의 선철군 후입조를 받아들이고 철군하였다. 1249년 2월에야 구유크의 사망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고, 고려는 어차피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기에 뻗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의 권력자 최우가 그 해 11월 사망하고 만다. 뒤를 이어 최항이 권력자가 된다.

8. 제5차 침입

일시: 1253년 7월 ~ 1254년 1월

후계 분쟁이 끝나고 몽케 칸(헌종/몽키)이 즉위하게 되자 1253년(고종 40년) 예케(한자: 야굴也窟 또는 也古)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9월부터 10월 초까지 동주(東州: 철원)·춘주(春州: 춘천)·양근(楊根: 양평)·양주(襄州: 양양)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충주성엔 21년 전의 그 김윤후가 있었다. 충주성은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으며 한달 이상 시간을 끌었다. 이 사건으로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된다. 이때(11월) 돌연 예케는 병을 이유로 귀국하였는데,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

그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종은 강화도를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11], 한편 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부 지방에 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고 있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淐, 혹은 안경공 강)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하였다. 안경공 창은 1254년 8월에 귀국했다.

몽케 칸(원 헌종)은 안경공 창을 만났는데 처음에는 안경공이 그 전에 인질로 간 영녕공 준의 동생이라고 여겨서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런데 민칭(閔偁)이란 자가 사실을 고발해서 영녕공이 고려의 왕자가 아니라 친척임을 알았다. 물론 영녕공은 자기가 국왕의 친자가 아닌 줄은 몰랐다고 박박 우겼으며(...)막장 드라마, 그와 함께 온 참지정사 최린도 '왕의 친자(親子)는 아니지만 왕의 사랑하는 자식(愛子)이니 그게 왕의 아들이라는 뜻임'이라며 콤비로 우겼다(...). 당연히 몽케 칸은 증거를 가져오라며 그 전에 고려에서 몽골에게 보낸 표문을 읽어 보았는데 정말로 표문에도 친자식(親子)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愛子)라고 쓰여져 있었다. 즉 거짓말은 하지 않은 것. 몽케 칸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불문에 부친 채 넘어가야 했다.[출처:] 잘도 빠져나갔다

9. 제6차 침입

일시 : 1254년 7월 ~ 1254년 12월

몽케 칸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치 않았고, 최항을 대동한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면서 1254년(고종 41년) 음력 7월 자랄타이(한자: 차라대車羅大 또는 札剋兒帶)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케 하였다.

한편 몽골은 수군을 동원하기 시작했다(1254년 2월, 하동군의 갈도 약탈).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원의 앞잡이 이현(추밀원 부사)을 바다에 던져 죽여버리니 휴전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자랄타이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것이 이른바 다인철소 전투 혹은 유학산성 전투로, 이 전투 역시 중앙군 없이 향리인 지씨와 어씨 진짜로 이것밖에 역사서에 기록이 없다.의 지휘 아래 몽골군을 막아냈다. 이 일로 다인철소는 익안현으로 승격하고 다인철소의 천민들도 모두 면천되었다. 이에 자랄타이는 다시 우회해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계속 남하하여 지리산까지 내려가 진주를 앞에 두었다.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으로 군을 개경으로 돌이켰는데, 이때 이 짧은 5개월 사이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하여 《고려사》에는 포로가 20만 6천 8백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하였다.

10. 제7차 침입

일시: 1255년 9월 ~ 1259년 3월

몽골군의 장기 주둔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다. 사실상 6차 침입 이후의 연속 전쟁에 가까웠다. 경우에 따라 6차 침입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10.1. 제7차 침입 - 몽골의 상륙 작전

일시: 1255년 9월 ~ 1256년 6월

이듬해 몽골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하여 대거 침입하여, 전라도 전역을 쑥밭으로 만들고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도(강화도)에 돌입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마침 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몽골은 서경으로 일시 철수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의 산발적인 습격은 끊이지 않았고, 전쟁은 계속 되었다.

10.2. 제8차 침입

일시 : 1257년 5월 ~ 1257년 10월

1257년(고종 44년)에는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다. 그사이 최항이 죽고 최의가 집권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257년 5월이었다.

그간 정부는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서,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했다. 1257년 10월에 몽골군은 선 철군 후 입조의 설득에 따라 철수하게 되었다.[15]

하지만 최의는 그 다음해 김준 일파에게 살해당한다.

10.3. 제9차 침입

일시: 1258년 4월 ~ 1259년 3월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약속했던 고려 태자가 오지 않자, 김준이 정권을 잡은 지 한 달만에 몽골군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앞세워 제9차 침입을 개시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김준도 몽골군에 대한 최씨 정권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하여 항전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1259년 3월, 고려는 여러 차례 몽골군과의 전투 끝에 몽골과 강화를 맺게 되어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게 된다. 그리고 그해 8월, 몽케 칸도 사망하고 몽케 칸의 동생인 쿠빌라이 칸(세조)이 즉위한다.

11. 후일담

1260년 고려와 몽골은 강화를 맺었으나 조정 의견 불일치로 출륙(개경 환도)만큼은 계속 지연되었다.[16] 1259년 음력 6월 고종이 승하했고, 같은 해 8월 몽케 칸도 사망하면서 새롭게 칸이 된 몽케 칸의 동생 쿠빌라이를 만나고 온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다. 원종은 몽골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어 복속을 거듭 표시하였으나,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권자가 된 김준의 반대로 강화도에서 나올 수 없었다.

심지어 김준을 살해하고 새 집권자가 된 임연은 1269년 6월 강화를 반대하여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창을 임시 즉위시키니 이것이 영종(후의 시호)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몽골의 압력으로 11월 물러나고, 임연 역시 몽골의 재침공을 두려워하다 등창으로 죽는다. 임유무 역시 출륙을 반대하지만 몽골의 군사적 뒷받침을 받은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 12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난지 100년만에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강화를 맺은지 10년만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그러나 일부 배중손, 김통정 등 고려의 무신들이 환도에 극렬 반대하여 삼별초의 난으로 이어졌으나, 1271년 배중손 전사, 1273년 제주도에서 여몽 연합군에 의해 김통정이 살해되면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2. 평가

  자세한 내용은 여몽전쟁/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결과

이 해에 몽골의 군사에게 사로잡힌 남자와 여자는 무려 20만 6800여 명이다. 살육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다. 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골의 병난이 있는 이래 금년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 『고려사』 권24 고종 41년 조

전쟁고려의 강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상당한 인명 손실과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덕분에 몽골 침입 이전의 목조 건물도 많은 피해를 봤다. 다만 고대-중세시대때의 한국 건축물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더 많이 소실되었다.[17]

이런 이유로 인해 항복하러 간 훗날 원종이 되는 태자와 고려 사절에게 쿠빌라이 칸당태종도 못한 것을 자신이 해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쿠빌라이는 강력한 제위 경쟁자이자 카라코룸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인 아리크부카의 도전에 맞서기에는 명분상 취약한 상태[18]였는데, 고려는 30여년간의 장기간에 걸친 저항으로 인해 꽤 알려진 지역이었으며, 동시에 만주 지역에서 상당한 위상을 지닌 고구려의 계승 국가였으므로,[19] 고려가 자신에게 항복한 것은 자신이 대칸의 자격이 있다고 선전하기에 매우 충분하고도 합당한 명분이 되었다. 여기에 고려 공략에 동원되던 만주 지역의 동방 3왕가로 대표되는 초원 이남 지역 몽골 귀족들이 쿠빌라이에게 동조하면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대칸으로 즉위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 측면에서도 밀리지 않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공급되던 물자 운송로를 끊어서 결국 아릭 부케를 항복시킬 수 있었다.

원종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쿠빌라이 칸은 이후 원종이 임연에 의해 강제 폐위되자 원종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 왕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곧 짐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천명하며 원종이 복위되고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무신 정권이 타파되자 1270년에 고려는 정식으로 개경으로 환도하고 원종이 정식으로 카라코룸의 몽골 황궁에 입조하면서 39년 간의 여몽전쟁은 정식으로 막을 내렸다. 그 이후로 고려는 몽골에 결혼 동맹을 제안하였고[20] 몽골 측에서 받아들여 훗날의 충렬왕이 되는 세자 왕심이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 보르지긴 쿠툴룩켈미시(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면서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이 되었다.[21]

몽골 측에서는 속국에 6사(六事)라고 하여 항복할 때 6가지 조건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데 첫 번째가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는 입질(入質)이고 둘째는 해당 국가의 재정을 파악하는 호구 조사, 셋째는 몽골군에 식량과 조부를 바치는 것이고 넷째는 정복 사업에 군사를 제공하는 조군(助軍), 다섯째는 다루가치의 주둔, 여섯째는 몽골군의 물자 보급과 연락을 위한 역참 설치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고려에 제대로 관철된 것은 첫 번째인 입질 하나밖에 없다. 호구 조사와 조세 수납의 경우는 고려 측에서 "고려의 재정은 너무 열악해서 몽골의 재정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된다."고 하면서까지 완강하게 반대하였고 조군의 경우는 일본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 이후로 유명무실해졌다. 다루가치 또한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면서 쿠빌라이 칸이 직접 다루가치를 둘 필요가 없다고하여 사실상 1278년 이후로는 완전히 사라졌다. 역참 설치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 간섭기 속에서 몽골은 고려 국왕을 자신들의 지배 범위 속에 두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관제 개혁, 군사 기구 개혁 등 상부 구조 지배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하부 구조에까지는 철저하게 관철되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이 몽골은 고려의 호구 조사를 실시하지도 못했고 그로 인해 고려의 호구와 군사의 내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또 고려의 경제적 기반인 노비 제도를 개혁하려 했으나 이 역시 고려 측의 완강한 반대로 불발되었다. 따라서 정치사만 놓고 보면 고려는 원나라에 철저하게 종속적이었으나 노비 제도 개혁, 조세, 호구 등 사회 하부 구조에 대한 원나라의 지배는 제한적인 것에 불과했다. 관직 제도와 왕실의 호칭 역시 천자국에서 제후국에 걸맞게 격하되었긴 했지만 그 역시 고려가 유지해 왔던 근본적인 틀이 백지화된 게 아니라 제후국에 걸맞은 것으로 부분 수정되었을 뿐이다.

다만 일본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일본 원정을 위해 몽골 측에서 전진 기지격으로 세웠던 정동행성이 점차 내정 간섭 기구로 변질이 되며 고려를 더욱 옥죄는 계기가 되었고 몽골의 입김에 따라 국왕이 폐위되고 복위되는 이른바 중조 현상도 2번이나 나타났다. 그리고 국왕의 시호에 항상 忠자를 붙여야 했다. 여몽전쟁 이후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우호적이긴 했지만 불평등한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몽전쟁 이후 고려의 영토도 상실되었는데 먼저 1233년에 고려의 역적 홍복원이 귀주를 비롯한 서경 도호 40여 성을 들어다 몽골에 갖다바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몽골은 이 지역을 심양로(瀋陽路)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1258년에 고려의 역적 조휘와 탁청 등이 화주 일대를 몽골에 갖다 바쳤고 이 땅에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다. 또 1270년에 고려의 역적 최탄과 이연령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서경의 부, 주, 현, 진 60성을 들어 몽골에다 갖다 바쳤고 그 탓에 자비령에서 고려와 몽골의 국경이 형성되었다. 몽골은 이 지역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22] 마지막으로 삼별초의 난이 평정된 후 1273년에 몽골은 탐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목마장을 경영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지역들은 몽골이 강제로 빼앗았다기보다는 고려의 역적들이 스스로 갖다 바친 땅들이라고 할 수 있다. 동녕부는 1290년에 반환되었고 탐라총관부는 1301년에 반환되었으며[23] 쌍성총관부공민왕 때인 1356년에 무력으로 되찾아왔다.[24]

또한 원 간섭기가 이어지면서 원의 세력을 등에 진 이른바 권문세족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고려 전기부터 있던 문벌 귀족 일부와 무신 집권기에 성장한 가문, 그리고 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하는 등 원나라와의 친선 관계를 통해 새로 등장한 가문으로 구성되었는데, 권문 세족은 막강한 원의 힘을 앞세워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만들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았으며 각종 폐단을 일삼았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고려사동국병감, 동국통감 등에서 이 전쟁의 기록을 했다고 하지만, 암흑기였기 때문인지 생각만큼 이 당시 전쟁 기록이 구체적이진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의 경우는 난중일기징비록,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등으로 초기 이후 기록은 구체적이었던 것과 달리 이 전쟁에서는 이러한 전쟁을 담은 일기나 실록이 생각보다 많이 누락되어있다. 즉, 이때의 일을 누군가가 일기나 사략 형식으로 더 구체적으로 담았더라면 더 당시의 실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병자호란(조청전쟁)의 경우는 여몽전쟁보단 짦은 전쟁이었지만 여러 일기나 야사록이 쏟아졌을만큼 당시 기록들이 여럿 남았다.

여담으로 병자호란과 여몽전쟁을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병자호란은 그나마 몇차례 교전과 빠른 항복으로 끝나 실질적인 손해는 미비했지만, 여몽전쟁은 자존심 뿐만 아니라 실제 전국토가 모조리 짓밟혔다. 다만 이걸 병자호란보다 더한 굴욕으로 칭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원-고려 관계나 청-조선 관계는 형식만 놓고 보면 큰 차이가 없었다. 고려가 받은 관제격하랑 충자 돌림 시호를 굴욕의 예로 거론하는데, 조선 효종은 충선왕과 똑같은 시호를 받았으며 이후의 왕도 충과 비슷한 의미의 글자가 들어간 시호를 받았다. 관제격하는 조선은 애초에 제후국 관제를 쓰고 있어서 격하될 필요가 없었을 뿐. 오히려 전후 결과만 보면 왕자만 보내서 항복한 고려보다 왕은 물론이고 왕자와 왕비, 대신들까지 잡힌 조선이 더 암담했다. 한국사에서 망국을 제외하곤 세자와 다음 서열 계승자, 세자빈까지 적국에 잡혀간 사례는 이때밖에 없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이후 청나라가 대륙을 통일한 이후 개화기 이전까진 조선에 큰 관심을 안둔 덕분에 내정간섭도 덜 받고 몰래 조종의 묘호를 쓰는 꼼수를 부릴 순 있었다.

14. 같이보기


  1. [1] 사실 한국 뿐만 아니라 근대 이전 구대륙이 겪은 최악의 난세기였다고 볼 수도 있다. 남송은 44년 동안 전쟁 끝에 거점 지역을 털리고 멸망했고, 동유럽이나 (아직 연합체 수준이긴 했지만) 러시아 지역도 아예 전 국토가 짓밟혀 도시국가들이 박살났고, 농노제의 근간이 탄생되었으며, 중흥을 이루던 중앙아시아 지역 이슬람 국가들도 대다수는 몽골에게 정복되거나 큰 피해를 입어 한동안 재기불능 상태가 되었다. 그나마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 왕조가 승리하며 이집트 및 북아프리카 일대의 이슬람권은 보호한 것이 이슬람 입장에선 불행 중 다행.
  2. [2] 몽골 제국과의 전쟁에서 지역, 정치, 문화적으로 그나마 온전히 기존 세력이 보존된 곳은 서유럽 일대와 아프리카, 동남아, 일본, 인도 정도를 꼽을 수 있을텐데, 이 역시 베트남은 수도인 하노이(당시 탕롱)만 3번 함락되어서 쩐흥다오의 활약 등으로 겨우 재기할 수 있었고, 일본 역시 태풍으로 본토는 살아남았으나, 규슈 북부 지방과 이키섬, 대마도는 꽤나 심하게 털렸다. (그래도 몽골의 침입을 운칠기삼으로 막은 덕분에 아직 권위가 약하던 일본사 첫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의 입지가 굳어진 점은, 이기간 몰락한 고려의 무신정권과 비교해보면 묘한 점.) 서유럽이나 아프리카는 사실 너무 멀어서 몽골이 전력을 다했다고 보긴 힘드니.. 인도는 당시 몽골의 침략을 막긴 했지만, 훗날 몽골 제국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 제국의 후예인 무굴 제국에게 정복된다.(...)
  3. [3] 대표적인 사신의 깽판으로 신원사에 기록된 사신 포리대완의 일을 들 수 있다. 포리대완은 사신으로 왔을 때 관 앞에서 들어가지 않고 임금이 나와서 맞이하라고 꼬장을 부렸고, 다음 날 왕 앞에서 조서를 직접 임금에게 쥐어줬다. (신원사에 의하면 이때 고려의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고 나온다.) 포리대완의 의도가 어땠던 당시 고려 입장에선 무례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아님 애초에 작정하고 온 것일지도.
  4. [4] 저구유 살해 사건 내막에 금나라가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5. [5] 물론 저구유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몽골이라면 치를 떨던 고려의 민중들은 좋아했다. 하지만 정부에선...
  6. [6] 일본을 공격한다급의 뜬금없는 공격은 아니었다. 금나라는 거의 형식상 수준이긴 했지만, 어찌됐든 고려의 상국이었기 때문이다.
  7. [7] 이 때 최우는 천도에 반대하는 반대파들을 죽여버렸다. 대표적으로 김세충이 있다. 야별초(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은 대표적인 천도 반대파였는데 성을 지킬 수 있다면서도 정작 성을 지킬 계책에 대해 말하지 못해 최우에게 처형된다.(...)
  8. [8] 고려 입장에선 배신자로 성문을 열어 몽골군에 협조한 역적이다. 그의 아들 홍다구도 몽골에서 출세하여 고려로 파견와서 김방경을 고문하고 내정에 간섭하는 등 부원배짓을 일삼았다. 부자가 쌍으로 개쌍놈들인 셈이대.
  9. [9] 내륙 중의 내륙이자 장난이 아닌 추위를 자랑하는 몽골은 물이 부족한 탓에 전통적으로 물에 대한 금기가 대단했다. 워낙 기후가 건조해서 몸의 분비물이 적으니 빨래를 안 하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고인 물에 오줌을 누면 사형일 정도였다.(1999년 발간된 '신현덕의 몽골 풍속기' 참조.), 그나마 현대엔 사막에도 관개수로를 만들 정도로 향상되었기에, 물 공급이 이전보다는 많아졌지만, 그래도 물부족 국가에 속한다.
  10. [10] 이설(異說)이 있다. 이후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되었고 김윤후는 장수가 되었다.
  11. [11] 이때 강화 성벽을 헐라는 몽골의 요구에 송나라 해적들이 강화도를 털어요ㅜㅜ 라며 나중에 하겠다며 박박 우겼다. 점령지에 달로화적(다루가치)을 두고 1만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도 반대했다(...)
  12. [출처:] 12.1 고려사 열전 12권 최유청 중 부 최린 부분
  13. [13] 충주성을 지나쳐 근처의 대원령(계립령, 하늘재)를 지나다가 다인철소 천민들의 습격으로 후퇴했다. 이로 인해 다인철소의 천민들은 모두 익안현으로 승격해 일반 백성이 되었다.
  14. [14] 여기서 말하는 포차는 투석기다.
  15. [15] 고종이 연로하여 목표는 고려 태자의 입조로 낮춰졌다.
  16. [16] 원종은 당연히 출륙 입장이었지만 당시 집권자 김준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7. [17] 몽골의 침입으로 많이들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예로 황룡사가 불탔긴 했지만 여몽전쟁이나 병자호란은 두번의 왜란에 비하면 그 건축사적 손실은 비교가 안되는 수준이다. 당장 현대까지 살아남은 거대 건축물들 대부분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한번 불탔고 이후 재건된 것들 투성이다.
  18. [18] 몽케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몽케조차 혼낼 정도로 그동안 보여준 유목민의 전통에서 동떨어진 행태로 인해 워낙 명분에서 밀려서 몽골 귀족들의 지지가 없다보니 자파만으로는 대칸 선출 회의인 쿠릴타이조차 열 형편이 아니었다.
  19. [19] 다만 이에 대해서는 쿠빌라이의 고려 왕조에 대한 교묘한 이간책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 왕조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국가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 이전의 삼한(여기서 삼한이란 고려, 후백제, 신라의 후삼국을 의미하지만 넓게 보아서 후기 신라 이래의 고구려, 백제에 대한 '삼한 일통' 의식의 연장이기도 했다)을 통합해 세워진 나라이기도 했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을 자처하는 나라라면 이는 거꾸로 보아서 옛 고구려가 아니었던 백제나 신라, 나아가 제주(탐라)는 지금의 고려 왕조와는 별 상관이 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으며, 제주(탐라) 지배에 대한 고려의 권리를 희석시키고 나아가 고려 내부에서의 백제나 신라 옛 지방 세력들의 분리 의식을 획책하려고 했다는 것. 이미 고려 고종 때에 '제주'라는 이름이 있었던 제주도를 굳이 '탐라'라고 옛 이름대로 부르거나 혹은 아예 '백제'라고 부른 것도 제주가 고려와는 애초부터 별개의 존재이자 오래된 독립 왕국이었던 역사를 들춰내면서 그것을 탐라에 대한 고려의 지배권 주장이나 탐라 지배 개입을 차단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이다.(출처 : 김일우 <고려 시대 탐라사 연구>) 어떻게 생각하면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제1조에 일본이 "조선은 자주 독립국이다"라는 조항을 넣은 것도 전통적으로 중국 왕조에 조공을 바치고 형식적으로 그 신하국임을 자처해 온 조선에 청나라가 개입할 여지를 미리 차단해 두려는(조공을 받는 중국 입장에서는 필요할 경우 조선의 요청에 따라 조선에 지원을 할 의무 비슷한 것이 있었으므로) 일본의 의도가 있었다는 해석과도 비슷하다.
  20. [20] 흔히 몽골이 먼저 고려에 왕자들을 몽골에 장가 보내라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사에는 분명히 원종이 먼저 몽골과 사돈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애초에 몽골은 황금씨족이 아니면 절대로 아무하고 결혼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몽골 측에서 그런 국혼을 먼저 제안할 리가 없다.
  21. [21] 과거에는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는 고려 측에서 최소한의 자주성이라도 보장받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다. 왜냐하면 충렬왕은 칸의 사위가 되는데 몽골에서는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할 때 쿠릴타이라는 회의를 통해서 결정한다. 여기엔 칸의 사위도 참석할 수 있으므로 고려의 발언권을 높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몽골의 부마국의 위치로 자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국사책과 인터넷의 몽골제국 강역 지도부분에 우리나라는 마치 독립국처럼 몽골의 지배영역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나온다.
  22. [22] 최탄은 서경유수(西京留守) 최년(崔年), 판관(判官) 유찬(柳粲), 사록(司錄) 조영불(曹英紱), 용주(龍州) 수령 유희량(庾希亮), 영주(靈州) 수령 목덕창(睦德昌), 철주(鐵州) 수령 김정화(金鼎和), 선주(宣州) 수령 김의(金義), 자주(慈州) 수령 김륜(金潤)을 죽였고 그 나머지 각 성의 원리(員吏)들도 다 적에게 살해당했으며 성주(成州) 수령 최군(崔群)은 부하의 손에 죽었다. 김정화의 처는 대경(大卿) 이덕재(李德材)의 딸로, 처음 고을로 들어올 때 그 미색을 뽐내느라 얼굴을 가리지 않았으므로 그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적이 김정화를 기둥에 묶어놓고 보는 앞에서 강간했다. 김의는 사람됨이 굳세었는데 적이 술을 부으라 하니 분을 못이겨 스스로 목매어 자결했다.
  23. [23] 그러나 그 뒤에도 실질적인 지배권은 여전히 탐라 현지에서 목장을 관리하던 몽골인 세력들이 쥐고 있었다. 탐라가 완전히 고려에 귀속된 것은 1374년 탐라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을 진압하고 나면서부터의 일이다.
  24. [24] 동녕부와 탐라는 반환되고 쌍성총관부는 반환하지 않아 무력으로 탈환해야 했던 이유를 세조 구제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의 고유한 풍속을 헤치지 않겠다는 것인데 동녕부와 탐라는 세조 구제를 선포한 이후에 넘어갔지만 쌍성총관부는 그전에 넘어갔기 때문.
  25. [25] 1168년 ~ 1232년. 이규보와 쌍벽을 이룬 문인이자 과거 급제 동기지만 세자 시절부터 고종의 스승이었던 근왕파였다. 이를 바탕으로 재상(첨지정사 參知政事)에 올랐다. 최우의 강화 천도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나 석연찮게 2개월 이후 사망한다. 반면 천도에 적극 찬성한 이규보는 그의 뒤를 이어 재상직에 오른다.
  26. [26] 대월 이씨 왕조의 마지막 왕자로, 왕국의 멸망을 피해 고려로 피신한 그 이용상이 맞다. 화산 이씨 족보에 수록되어 있는 화산군 본전과 옹진군 관청에 있었다는 수항문기적비에서 화산군 이용상의 대몽 항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27. [27] 東眞으로 13세기에 있던 국가였다. 금나라 장수였던 포선만노가 세운 국가. 몽골 사신인 저고여 피살 사건의 배후로 추정된다.
  28. [28] 정확히는 잔당.
  29. [29] 여몽전쟁의 단초를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