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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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孝文)

군호

월산대군(月山大君)

본관

전주이씨(全州李氏)

이름

정(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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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子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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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정(風月亭)

부친

덕종(의경세자)

모친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형제

명숙공주(明淑公主), 성종(成宗)

부인

승평부대부인 박씨(昇平府大夫人 朴氏)

자녀

덕풍군 이이(德豊君 李恞)

능묘

월산대군묘

생몰기간

1454년(단종2) ~ 1488년(성종19)

1. 소개
2. 생애
3. 후손들
4. 월산대군 신도비문
5. 친동생인 성종과의 우애
6. 월산대군의 시
7. 관련 작품
8. 관련 사진
9. 관련 문서

1. 소개

월산대군 이정(月山大君 李婷)

1455년 1월 5일(음력 1454년 12월 18일) ~ 1489년 1월 22일(음력 1488년 12월 21일)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시인으로 본관은 전주, 성은 이(李), 이름은 정(婷),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세조의 장손이자 덕종(의경세자)의 장남이며 성종의 친형이다. 연산군과 중종의 큰아버지 이기도하며, 평양군 박중선의 맏사위이자 박원종의 매형이다. 월산대군은 나면서부터 총명함이 보통과 다르니 할아버지인 세조가 사랑하여 궁중에서 길렀다. 7세 때인 1460년(세조6) 월산군(月山君)에 봉해졌고 1468년(예종1)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2) 월산대군(月山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으며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어려서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성품이 또 충담(沖澹)하여 분화(紛華)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성색(聲色)과 응견(鷹犬)은 더욱 좋아하지 아니하고 오직 시주(詩酒)만 좋아하였다. 일찍이 작은 정자를 정원 안에 짓고 편액(扁額)을 풍월정(風月亭)이라고 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모아 놓고 날마다 그 사이에 있으면서 거의 다 섭렵(涉獵)하였다. 지은 시(詩)가 평담(平談)하였으며 음률(音律)도 알았다. 비록 문사(文士)를 좋아하였으나 함부로 사귀고 접하지 아니하므로, 문정(門庭)이 고요하고 거마(車馬)가 들레지 아니하였다.

낭중(郞中) 기순(祈順)이 우리 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정(婷)의 의모(儀貌)가 한정(閑整)하고 예절(禮節)이 있음을 보고는 조용히 접견하기를 허락하였다. 정(婷)을 일찍이 문소전(文昭殿)과 종부시(宗簿寺) 제조(提調)로 삼았었는데 감히 마땅하지 아니하다고 사양하여 면직하였다. 국법에 조정의 신하가 왕자를 길에서 만나면 말에 내려서 두 손을 모아 잡고 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렸는데 정(婷)이 피마(避馬) 하도록 계청(啓請)하여 윤허를 받았으니 그 겸손한 덕이 이와 같았다.

매일 아침에 예궐하여 문안하며 아무리 심한 추위와 더위에도 일찍이 잠시도 폐함이 없었다. 잔치와 활 쏘는 데 입시(入侍)하여 아무리 즐거움이 지극하더라도 법도에 따르고 조금도 실수함이 없었다. 친동생인 성종과의 우애가 매우 돈독하고 대우가 극히 융숭하여 은혜를 자주자주 베풀었다. 1488년 9월에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가 불예(不豫)하자 시약(侍藥)하면서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어 두어 달을 끌어오다가 이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가 35세였다.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仲善)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後嗣)가 없고 측실(側室)인 원주김씨(原州金氏) 사이에서 외아들 덕풍군 이이(德豊君 李恞)를 두었다. 사후에 봉상시에서 시호(諡號)를 공간(恭簡)으로 의논하였지만 성종(成宗)이 특별히 시호를 효문(孝文)으로 내렸다. 덕을 지키고 간사하지 아니한 것이 효(孝)이고, 시행함이 이치에 맞는 것이 문(文)이다.

월산대군은 덕행이 높아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가(史家)들이 중국의 태백(泰伯) 중옹(仲雍)에 버금간다고 칭송하였다. 그는 서책을 가까이 하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고양 북촌에 별장을 두고 자주 찾으며 풍류적인 생활을 하였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깊어 친동생인 성종(成宗)과 시와 편지를 자주 주고 받았으며 학문 또한 왕자들 중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성종의 명으로 월산대군의 시집(풍월정집)의 서문을 쓰게 된 성현과 신종호는 월산대군의 품성과 시적 재능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월산대군의 시호는 효문(孝文)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처음의 시호는 문효(文孝)였다. 그래서 성현과 신종호는 서문에서 월산대군을 문효공이라고 불렀다)

문효공(文孝公)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임금께서 그가 남긴 시를 모아서 시집을 만들게 하고, 신(臣)으로 하여금 서문을 지어 그 첫머리에 얹게 하였다. 신은 생각하건대 진기한 나무를 기르는 사람은 한 치 정도의 뿌리를 얻어가지고 반드시 거기에 흙을 북돋아 주며 물을 뿌려 주며 햇볕으로 따뜻하게 쬐어준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나서 무성할 수 있으니, 이것은 그 뿌리가 붙어 있는 곳이 얕기 때문에 반드시 인력(人力)으로 이를 보호하고 가꾸어 주어야 된다. 그러나 깊은 산 큰 골짜기 속에서 난 것은 북돋우거나 물을 주거나 볕을 쪼여주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가지와 잎이 피어나서 마침내 위로 푸른 구름을 건드리며 그 끝을 볼 수 없을 만큼 자란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 뿌리가 깊게 박히고 원기가 충실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재주도 이와 마찬가지다. 일반 사람들은 공부를 하는데 부지런히 정신을 쓰며 걱정을 거듭하여 실컷 고생을 해가면서 공부에 힘을 드린다. 그렇게 한 뒤에 문장을 짓게 되는데, 수식을 가하며 기묘하게 되기를 힘써도 그의 기상은 어딘지 천근(淺近)한 병을 면하기가 어렵다. 왕공과 귀인은 그렇지 아니하여 그의 거처하는 지위가 기운을 나게 하여 몸을 기르는 것이 저절로 틀을 크게 한다. 있는 곳이 높으므로 보는 것이 커서 학문에 힘을 들이지 아니하여도 제대로 여유가 생기며, 공부를 힘쓰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순수해져서 넉넉히 남는 힘을 갖고 있으므로 그 공부가 성취하기가 쉽다. 그러나 문장의 이름이 곤궁한 사람에게서 많이 나오며 부귀한 사람에게서는 나오지 않는 것은 , 곤궁한 사람만이 홀로 공교하고, 부귀한 사람은 홀로 능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부귀와 번화의 향략에 빠져서 미처 공부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한(漢)이 일어날 적에 하간헌왕(河間獻王)이 덕을 닦고 옛것을 좋아하여 사방에서 학문이 있는 학자를 맞아 들여서 그들과 더불어 학술을 강론하였으며, 또한 삼옹(三雍)의 궁(宮)에 대책(對策)을 바쳤고, 동평왕 창(東平王蒼)은 어릴 적부터 경전을 좋아하여 문장을 지은 것이 전중(典重)하고 고상하여 그가 지은

서(書)ㆍ기(記)ㆍ부(賦)ㆍ송(頌)ㆍ가(歌)ㆍ시(詩)가 당시 학자들의 수록한 바가 되었으니, 그들의 문장과 사업은 모두 양한(兩漢)의 으뜸이 되었다. 그러나 이름을 좋아하고 자기를 선전한 결점은 아는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였다.

공은 왕실의 아들이며 골육의 지친이다. 예의로 몸을 단속하며 행동을 예법에 맞추었고, 복잡하며 사치스러운 것을 버리고 검약한 생활을 하려고 힘썼다. 방문객을 사절하고 조용히 옛 서적을 연구하여 이를 표현하여 짓는데 생각나는 대로 곧 글을 이루었다. 이제 이 시집을 보면 큰 작품은 화평스러우며 작은 시편은 고상하고 건전하여 법칙을 맞추려고 애쓰지 아니했는데도 틀이 저절로 잡혔고, 수식하려 하지 아니했는데도 형식이 꼭 들어 맞았으며, 솜씨를 부리려 하지 않았는데도 문채가 찬란하고, 견제를 가하지 아니하여도 한군데도 군색한 곳이 없다. 그는 맑고 심오하며 온자하여 하나도 부귀한 사람의 태가 없고 깨끗이 세속을 초월한 듯한 감이 있다. 스스로 이치를 분명히 보고 사물의 정수[精]을 본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으랴. 비록 늙은 학자로서 큰 솜씨로 문학계에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도 이를 붙잡고 올라 갈 수 없을 정도이니, 저 하간헌왕이 동평왕 같은 무리야 어찌 어깨를 겨누어 비교할 수 있으랴. 세상에 몸이 부귀에 묻혀 있으면서 눈으로 글 한 획도 알지 못하여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할지라도 생명은 짧은 것이다.

공은 학문이 풍부하였고 문장과 인품이 일대에 이름을 독차지하여 널리 퍼져서 찬란히 빛났으니, 몸은 비록 없어져서도 없어지지 아니한 듯 남아 있으니, 비록 인간의 연령으로는 일찍 죽었다 할지라도 생명으로는 오래 살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위로는 국가의 문화를 장식하고 아래로는 민간의 문학에 이바지하였으며, 아(雅)와 송(頌 궁중의 음악)을 지어서 빛나며 명랑히 역사에 남아서 없어지지 아니할 터이니, 뒷사람의 입에 음미 감상되는 것이 어찌 얕다고 할 수 있으랴. * 성현(成俔)

문효공(文孝公)이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니 우리 전하께서는 특별히 천륜(天倫)의 슬픔을 가지시고 슬픔을 억제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그 극진함을 베풀지 아니하심이 없었다. 평생에 지은 시 약간 편을 갖다가 편집하여 이를 전하게 하시니, 그것은 영원한 세대에까지 밝게 유전하려 하심이다. 지극하시도다. 하늘과 땅은 끝이 없으니, 사람이 그 사이에서 나고 죽고 오래 살고 일찍 죽고 하는 것이 비록 길고 짧고 더디고 속함이 같지 못함은 있으나, 그것을 천지가 끝이 없는 것과 비교하여 본다면 다만 한 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하루아침에 별안간 초목금수와 마찬가지로 없어져 버리고 들릴[聞]것이 없다면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는가.

이러므로 옛적의 군자는 혹은 덕을 세우고[立德], 혹은 공을 세우며[立功], 혹은 말을 세우[立言]되, 나의 심사(心思)와 재력(才力)의 미치는 바로 인하여 없어지지 아니할 자료를 만들어서, 뒷세상으로 하여금 모두가 그의 이름을 듣고 흠모하며 영원히 감탄하여, 그의 용모를 대하매 그의 음성을 들으며, 서로 더불어 그의 거처하던 자리에서 부앙(俯仰)하면 돌아다니는 듯한 감을 가져서 딴 세상 사람인 줄을 모르게 하였다면, 이런 사람은 비록 천지가 끝나고 만세에 이르도록 없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가하다. 그런즉 일시의 길고 짧은 것이 족히 문제삼을 것이 못 되며, 이 문효공(文孝公)은 말을 세운[立言] 군자라고 할 수 있도다.

공은 천품이 지극히 높아서 비록 부귀한 가운데서 생장하였으나, 호화스러움에 마음이 팔리지 아니하여 풍류와 여색 같은 향락에 대하여는 담박하였다. 책 속에 들어 앉아서 도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문장을 지은 것이 간결하며 고아(古雅)하였고, 더욱 시에 대하여 힘을 많이 썼다. 그의 시는 맑으면서도 차지[寒] 아니하며, 담박하면서 메마르지 아니하여, 자연으로 된 옥[天球]으로 손질을 하지 아니하여도 순수한 빛을 가릴 수 없으며, 주현(朱絃)의 소리로 다루지 아니하여도 태고(太古)의 소리가 저절로 있는 것과 같았다. 이를 도연명(陶淵明)ㆍ사조(謝眺)ㆍ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의 대열에 끼어 놓는다 하더라도 누가 먼저인지 누가 뒤인지를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러나 공의 시를 읽고 다만 이것을 음향이나 음률 사이와 말과 글자의 말단적인 것에서 찾아 보고, “나는 공의 시를 다 알았다.” 한다면, 참으로 어찌 공의 시의 취지를 알았다 할 수 있으랴. 대개 3백 편이 비록 징계하고 느끼는 것이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세상의 교화를 붙들고 백성의 본심을 도탑게 함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니, 시가 없어진 지 오래다.

한(漢)의 가요(歌謠)와 위(魏)의 시(詩)에서 제(齊)ㆍ양(梁)의 옥대(玉臺)와 당(唐)ㆍ송(宋)의 서곤(西崑)과 강호(江湖)가 복잡하게 교대하여 일어났으나, 모두 글자를 가지고 정신을 피로하게 하며 힘을 쏟았으나, 그 의미를 따지면 모두 쓸데없고 부질없는 말뿐이었으니, 시의 도가 극히 곤난한 지경에 빠졌다.

문효공은 왕실의 존귀함으로 임금의 은혜를 가까이 받들어 붓과 벼루로 모시며 시문을 지으셨으니, 비유하건대 규(奎)와 벽(璧)이 서로 빛나는 듯, 훈(壎)과 지(篪)를 교대로 연주함과 같아서 글자 한 자 말 한마디라도 전하의 지극하신 우애를 형용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후일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이 감상한다면 왕성하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바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즉 그것이 세상의 교화와 백서의 윤리에 있어서 어찌 작은 도움만이 되리요. 말의 정(精)한 것이 시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그 시는 또한 족히 세상의 교화를 붙들고 백성의 본심을 도탑게 하게 되니, 곧 공의 세워 놓은 것이 얼마나 많는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또 슬퍼할 것이 무엇이랴. 삼가 서(序) 한다. * 신종호(申從濩)

특히 시를 매우 잘 지어서 명성이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그의 시를 가지고 싶어한 사람이 많았다고 하며 지은 시 중 일부는 국조시산(國朝詩刪), 동문선(東文選), 여지승람(輿地勝覽), 대동시림(大東詩林) 등에 백여 편의 시가 실려 있다고 한다. 또한 시들 중 일부는 중국의 전우산열조시집(錢虞山列朝詩集)에도 수록되었고 대표 저서로는 풍월정집(風月亭集)이 있다.

2. 생애

1454년 수양대군의 장남 의경세자(덕종)와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도원군(의경세자)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자신도 세손이 되는가 싶더니 3살 때 아버지가 죽는다. 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라 세자가 죽으면 세자의 아들이 대통을 잇는 게 순리이지만, 세조가 자신의 차남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해버리면서 월산대군은 완전히 물먹게 된다. 애초에 세조 본인부터가 세종대왕의 차남이라는 이유로 왕위 계승 순위에서 밀린 것에 불만을 품고 국왕인 조카가 나이가 어린 것을 기회로 삼아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를 우려하여 어린 장손 월산대군을 세손으로 책봉하지 못한 듯하다.[1] 사실 차남인 해양 대군도 8살의 어린 아이였지만, 평균 수명이 짧아서 10대 중반만 되어도 성인 취급했던 시대였으니 몇 년이라도 더 빨리 성년이 될 차남을 후계자로 삼은 듯하다.[2]

1468년 해양대군이 조선의 제8대 임금 자리에 즉위하여 예종이 된다. 그러나 예종이 불과 재위 1년 2개월 만에 사망하면서 월산 대군에게도 희망이 약간 생긴다. 당시 예종의 아들(제안대군)은 불과 4세였기에 세조의 장손인 자기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나이도 시의적절하게 15세라 내심 기대를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위는 어머니 수빈 한씨가 당시 최강의 권신인 한명회의 딸과 혼인시켰던 동생 자을산군에게 돌아간다. 이 일을 한명회와 수빈의 왕위를 염두에 둔 사전 모의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미 왕위가 자신의 시동생인 예종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예종이 요절만 안 한다면야 자동적으로 예종의 아들에게 왕위가 돌아갈 건데 역모를 꾸밀 각오가 아니고서야 왕위를 노리고 한명회와 결탁해서 사돈 관계를 맺었다는 설명은 비합리적이다. 그냥 우연한 일. 게다가 수빈이 정 왕위를 노렸다면 오히려 월산대군과 결혼시키는 게 정상이다. 의경 세자의 적장자이니 오히려 자을산군보다 계승 순위가 더 높기 때문이다. 그냥 예종이 죽은 후에 적합한 왕위 계승자가 누군지 알아보다가 마침 당대의 막강한 권신이었던 한명회의 사위인 자을산군이 있어서 자을산군이 왕위를 이어받은 거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당시 건강 면에서 월산대군보다 자을산군이 더 나았던 점도 크게 작용했지만 말이다.[3]

예종이 죽은 당일에 세조의 비이자 월산군의 할머니인 정희왕후(자성대왕대비 윤씨)는 신숙주 및 한명회 등과 논의하여 한명회의 사위라서 정치적 보호막이 두터운 동생 자을산군을 차기 왕으로 결정한다.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왕위에 오르고 나서 2년 뒤, 왕의 친형이 된 그는 기존의 월산군에서 월산 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왕위를 빼앗긴 것에 대한 위로 차원에서 혹은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 어차피 월산 대군의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성종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덕종(德宗)으로 추숭되었으니 군에서 대군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동생이 왕위에 오른 후 월산대군은 정말 철저한 자기 관리로 안전을 지킨다. 사실 성종보다 계승 서열이 높았기에 까딱하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역모의 추대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조선 시대 내내 이런 사례는 결코 적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자기 관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노(家奴)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어서, 다른 시대에 흔히 발생한 왕족 집안의 사람이 배경을 믿고 행패를 부리는 사건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 흔한 술 실수 한 번 않고 망원정(望遠亭)에서 시와 글과 음악에 묻혀 지내다시피 살면서 보내게 된다.

성종은 그러한 형의 처지를 가슴 아프게 여겨 그를 자주 만나고 각별히 대하며 위로해주었다. 월산대군은 당대의 문장가로 유명해서 명나라에서도 월산대군의 시가 알려져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월산대군은 1488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아무래도 평생 강박에 가까운 자기 관리로 인한 스트레스가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월산대군이 살던 사가(개인 집)는 이후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자 선조가 임시 궁궐로도 사용했고 광해군, 인조를 거치며 방치, 철거되기 시작되다 구한 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한국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이곳에서 일어나기도 하였다. 지금의 덕수궁[4]이다.

'월산대군의 부인인 승평부대부인 박씨가 연산군과 정을 통당하여 그 결과로 임신을 하게 되자 박씨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약을 먹고 자진하였고, 박씨의 남동생 박원종이 이에 분을 품고 중종반정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야사로 알려져있지만, 무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63권에 기록된 내용이다. 연산군 문서 참조.

월산대군은 동생인 성종과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고 인품이 훌륭했으며 학문도 풍부했었던 종친의 모범이였기에 후세의 왕들에게도 좋은 예우를 받았었다.

연산군은 월산대군이 국가에 공로가 있으므로 다른 대군에 비할 수 없으니 나뭇갓을 도로 주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월산대군 부인 승평부대부인 박씨와 아들인 덕풍군에게 많은 물품을 하사 하기도 했다. 또 신하들이 임해군을 처벌하라고 아뢰자 광해군은 임해군이 월산대군과 같게 되기를 간절히 생각했었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영조는 월산대군 사당에 친히 석광사(錫光祠)라는 편액을 내렸으며 더불어 치제(致祭)를 명 하였고, 정조(正祖)는 월산대군 사당이 무너진 것을 보고 마음 아파 하며 말하기를

"월산대군(月山大君)은 지위가 태백(泰伯)이나 중옹(仲雍)보다도 존귀했고 연릉 계자(延陵季子)나 사어(史魚)보다도 고귀한 뜻을 지녔는데 성묘(成廟)로부터 형제간의 보살핌을 듬뿍 받았었다. 그리고 시문(詩文)을 보면 강호(江湖) 풍월(風月)을 읊는 사이에 고상한 운치가 애연히 넘쳐 흘렀는데, 아조(我朝)에 물론 훌륭한 종친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월산이 으뜸이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 성조(聖祖)께서 높이 예우하고 총애하여 우애하신 성대함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생생하다. 더구나 열조에서 군졸(軍卒)을 배치하여 수호하고 내려주신 물품도 성대하였다. 그런데 이제 이처럼 쓸쓸하게 되었으니 몹시 서글프고 한탄스럽다. 해도(該道)로 하여금 보조하여 수리하게 하라. 또 월산 대군의 봉사손 이헌규(李憲圭)를 해당 조(曹)로 하여금 초사(初仕)에 등용하도록 하고, 대군의 무덤에는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대군이 살던 집은 강가의 교외에 있었는데, 자손들이 외지로 유리하여 낙향하였기 때문에 어느 때 전매(轉賣)하였는지 모르겠으나 ‘풍월정’이란 편액(扁額)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성종조[宣陵朝] 때에 대군에게 베푼 지극한 우애에 대하여 지금도 전송(傳誦)되고 있다. 그런데 대군의 자손이 하사(下賜) 받은 집을 대대로 지킬 수 없게 된다면, 어찌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느냐? 호조에서 즉시 값을 치르고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월산대군 사당에 승지를 보내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종가집이 빈한하니 본도로 하여금 먹을 것을 대주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선왕께서 형제간에 우애하시던 성덕을 본받는 길인 것이다." 라고 전교하며 월산대군을 예우했다.

순조(純祖), 고종(高宗)때에도 조정에서 신하를 보내어 왕을 대신해서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3. 후손들

월산대군은 정실 승평부대부인 박씨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하고 측실인 원주 김씨 사이에서 서자 덕풍군(德豊君) 이이(李恞)를 두었는데 덕풍군은 윤임의 누이이자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언니인 윤여필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3남을 두었다. 장남 파림군(坡林君) 이주(李珘)는 을사사화가 일어나기전에 세상을 떠나 화를 면했고 차남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5]와 삼남 전성부정(全城副正) 이리(李璃)[6]을사사화 때 연루되어 사사당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월산대군의 졸기에는 서자가 2명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한명은 조졸한듯 하다)

그러나 파림군, 계림군, 전성부정의 자식들은 화를 피해 대를 계속 이어 나갔고 현재 전주 이씨 월산대군파와 계성군파로 이어지고 있다. (계림군의 후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의 영부인 이희호 여사와 국민의 정부때 노동부 장관을 지낸 이기호가 있으며 이희호 여사와는 3촌 관계로 알려져 있다. 또한 조선 말에 철종의 형 영평군 이경응의 양증손자가 된 청풍군 이해승은 실제 혈통으로는 덕풍군의 장남 파림군의 14대손이다)

월산대군 후손이 계성군파로도 분파된 이유는 손자 계림군이 성종의 서자 계성군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인 경릉의 제향을 장남인 월산대군 후손인 전주이씨 월산대군 파종회에서 주관하고 있다. (덕종대왕 562주기·소혜왕후 515주기, 경릉 제향)

4. 월산대군 신도비문

조선국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월산대군 증시 효문공 신도비명과 서문. 절충장군 행충무위 대호군 임사홍(任士洪)이 왕명을 받아 지음.

전(傳)에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고 했다. 그러나 안회(공자의 제자) 같은 사람은 단명(33세)하고, 도척이 장수한 것을 보면, 오래 산 사람이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고 어진 사람이 반드시 오래 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그 이유를 궁리한 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 월산대군을 보니 더욱 유감스럽고 슬픈 마음 금할 수 없다.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린 훌륭한 성인으로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처럼 준철해서 정성과 효성으로 양궁(兩宮)을 모시고 있다. 또 지극한 인자함으로 일가친척을 친하게 대해 덕은 아랫사람에게 미치고 백성들은 믿음으로 따라 요순시대 같은 태평성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야흐로 천륜의 즐거움을 펴려고 할 때 대군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누가 생각이나 했겠으며 어떻게 슬픔을 멈출 수 있겠는가? 장례가 끝난 지 달포 뒤 전하께서 내게 하교했다. “내게 형 한 분뿐인데 홀연히 구천으로 떠나버리니 창자가 찢기는 듯하나, 겉으로는 억지로 참고 있다. 아무리 부의를 많이 보내고 증직을 해주며 제사를 부지런히 지낸들 내 곡진한 정이 없어지지 않으니 사람들의 이목에 들어온 형의 덕행을 글로 지어 돌에 새겨 신도비를 세워 없어지지 않게 하라.” 그리고는 내게 명(銘)을 지으라고 명했다. 나는 황급히 실상을 가려내 글을 지었다.

대군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정(婷)은 이름이다. 전하의 형으로 경태(景泰) 갑술년(1454년) 12월 18일 갑오일에 출생했다. 타고난 성품이 빼어나게 훌륭하고 총명함이 남달라 세조가 애지중지하여 궁중에 두고 기르면서 사어서수(射御書數)를 직접 가르쳤다. 전하가 성장하면서는 같이 거처하고 같이 놀게 하여 크고 작은 행차에는 뒤를 따르게 했으며, 가끔 궁중에서 놀이가 벌어져 함께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고 웃곤 했다.

천순(天順) 경진년(1460년) 대군의 나이 7살 되던 해에 월산군에 봉해지고 정의대부의 자급이 내려졌으며 임오년(1462년)에는 중의대부로, 성화(成化) 을유년(1465년)에는 흥록대부로, 무자년(1468년)에는 현록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신묘년(1471년)에 월산대군에 봉해졌는데 전하가 등극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같은 해에 조정에서 논열하여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에 책봉되었다.

대군의 고아한 성품은 고요하고 맑아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음악과 사냥 같은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서사(書史)에 파묻혀 지냈다. 이미 대의(大義)를 터득하고 소장하고 있는 백가자집을 두루 섭렵한 것도 부족하여 새로운 책이나 알려지지 않은 글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기어이 사서 구했다. 구한 책은 등불을 켜놓고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었다.

문장은 정치하고 순수하며 맑고 아름다워 율격이 높아 자못 위진(魏晋)의 풍미가 있었으므로 당대의 문인과 시인들이 “우리나라의 왕자와 왕손 중에 일찍이 이렇게 훌륭한 솜씨는 없었다.” 고들 하면서 탄복했다. 여러 사람들의 시를 차운한 한도십영(漢都十詠)은 강한 운을 적절하게 눌렀고 시어는 예스럽고 뜻은 원대하여 풍치가 유달랐다. 이것 하나만 봐도 다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상물사회(狀物寫懷: 사물을 묘사함으로써 자기의 생각을 드러냄)에 있어서도 자기만의 기틀이 있어 옛날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를 답습하지 않았으므로 한번 읽으면 잊혀지지 않았다.

저술한 시문 약간은 전하와 주고받은 내용들로 우애의 정이 베어있다. 왕이 자주 대군의 집을 방문했는데 집안사람을 대하는 예로 접대하니 어렸을 때처럼 즐거워하며 수많은 하사품을 내렸다. 왕이 대군의 집 서쪽 정원에 있는 정자에 가서 정자 이름을 ‘풍월’이라고 지어주고 친히 오언 율시의 근체시(近體詩)를 지은 다음 측근 신하들에게도 시를 짓게 했다. 이런 일 역시 특별한 은총이었다. 대군은 본래 산수를 좋아하여 고양의 북촌에 별장을 두고 시간 날 때마다 가서 구경하며 시도 읊으면서 흥취를 붙였다. 왕이 그것을 알고 중관에게 술을 들려 보냈다.

병신년(1476년) 사신으로 온 명나라 호부시랑 기순(祁順)이 대군의 거동과 풍모가 매우 한가하면서도 단정하고 예절이 있는 것을 보고 특별히 좋아하고 공경하여 시를 지어주었다. 계묘년(1483년) 봄 정희대왕대비와 인수대비, 인혜왕대비가 함께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 대군이 호종하게 되었다. 대군은 이씨의 본향인 전주에 있는 태조의 영정에 참배하라는 왕명을 받았다. 대군의 풍도를 멀리서 바라본 남방의 백성들은 모두들 감탄했다.

조정의 신하들은 길에서 왕자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공수하고 서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 때문에 대군은 사전에 행차를 알려 피해 가게 했다. 전에 문소전과 종부시의 제조를 맡겼으나 기어이 사양한 적도 있어 세상 사람들은 그 겸양하는 미덕을 칭찬했다.

천성이 조심스럽고 근신하여 매일 아침 왕에게 문안을 드렸는데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거르는 일이 없었으며, 간혹 활쏘기를 같이 하거나 조용히 정담을 나눌 때 아무리 만취했더라도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평생 문사들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함부로 사귀지는 않아 집안이 조용하고 수레나 말이 왕래하지 않았다.

홍치(弘治) 원년(1488년) 9월 인수왕대비의 병이 심해져 궁 밖으로 나와 여러 집을 옮겨 다니면서 치료하게 되었다. 대군이 온종일 마음을 졸이며 침식도 잊고 탕약에 힘쓰다가 자기도 병에 걸렸다. 궁액(宮掖)들이 놀라고 문병객이 줄을 잇자 모시는 사람들이 거처를 옮기라고 권했다. 며칠 지난 뒤 대군은 자기 병에 차도가 없는 것을 알고 속히 집으로 돌아와 처방전을 찾아 증세를 알고자 했다. 모시는 사람이 일부러 지체하며 주지 않자 대군은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처방전을 본다고 마음이 달라지겠느냐?” 하고 말했다. 처방전을 본 뒤 부인 박씨에게 말했다. “내가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사별을 해야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는 왕의 얼굴을 뵙지 못하겠구나.”라고 말한 뒤 한참동안 오열하다 담담하게 서거했다.

왕이 대군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 가보려고 차비를 하고 있던 중 중관이 달려와 때가 이미 늦었다고 보고했다. 왕은 너무 슬퍼 어찌할 바를 몰랐고 신하들로부터 거리의 백성들까지 애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날짜는 1488년 12월 21일 이었다. 조정과 저자를 사흘간 닫았고, 태상시(太常寺: 시호를 주관하는 관서)에서는 ‘효문’이라는 시호를 정했으며, 부의는 다른 때보다 두 배를 내렸고 장례를 지내는 도구도 필요한 대로 쓰도록 했다. 또 대신에게 장지를 잡으라고 명하여 고양 별장의 서쪽에 정했다. 이것은 왕이 애도하는 마음에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려는 뜻에서 나온 결과였지만, 대군이 마련한 별장 곁에 자기의 영혼이 쉬게 되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왕과 대비는 길지를 얻었다고 좋아하고 특별히 청성군 한치형(韓致亨)에게 일을 맡겼다.

기유년(1489년) 3월 3일 경신일에 백관이 참여한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부인 박씨는 평양군 중선(仲善)의 딸로 현숙했다.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고 곡하면서 종신토록 변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작은 부인에게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생각해보니 대군은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지혜가 밝고 총명한 데다가 학문까지 갖추었기 때문에 성취한 것이 남달랐다. 귀하기는 왕의 아들이고 높기로는 왕의 형님으로 왕의 사랑을 받고 삼궁(三宮: 정희, 인수, 인혜대비)의 총애를 받았으니 성덕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수명이 길지 못한 것이 애석할 따름으로 내가 하늘의 이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내가 전에 양한(兩漢)의 “제왕전(諸王傳)”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중위 상려(常麗)가 하간왕(河間王) 덕(德)에 대해 “몸가짐은 단정하고, 행실은 온화, 인자, 공손, 검소, 독실, 공경하며, 선비를 밝게 보고 깊이 살폈다.” 고 칭찬했다. 대행령(봉상시와 같음)이 시호를 짓는 법에 대해 “총명하고 예지가 있는 것을 헌(獻)이라고 하니 마땅히 헌으로 시호를 정해야 합니다.”고 했다. 반고(班固: 한나라 역사가)는 이에 대해 “크게 고아하여 뛰어나게 탁월한 사람으로는 하간 헌왕이 근접할 것이다.”하고 찬(贊)을 썼다.

장제(章帝: 후한 3대 황제)가 동평왕 창(東平王蒼)을 책봉하면서 “왕을 도와 예에 벗어난 일이 없었고 전교를 들을 때는 아래 서서 들었다. 하늘이 자애롭지 못해 위로 보답하지 않았다.” 범엽(후한서를 지음)은 이에 대해 논했다. “공자는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자이면서도 교만하지 않는 것이,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자이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 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동평 헌왕이야말로 예를 좋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소견으로는 대군은 사실 두 가지를 다 겸했으나 자제들만은 많이 부족했다. 재주가 부족한 내가 감히 두 왕의 어진 점을 칭송하면서 대군에게 빗댄 것은 오래오래 그 덕을 드날리게 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나 역시 반고와 범엽을 사모하여 삼가 머리 숙여 본떠서 비문을 짓고 명을 붙이기는 했지만, 전하의 돈독한 우애에 들어맞지 못할까 심히 두려울 뿐이다. 명왈(銘曰),

하늘이 조화를 맡아 선악이 갈라지니

덕을 주었으면 수명도 줘야 하는 법

때로 고르지 않아 이치 알기 어렵네

개국한 이래로 성자 신손 계승하고

훌륭한 왕족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누가 대군처럼 재주와 덕 겸했는가?

대군이야말로 세운 뜻 높고 높아

공명을 멀리하고 경서만 탐했네

백가를 섭렵하고 박약으로 귀결하여

문장을 지으면 옥구슬을 꿴 듯하네

크나큰 솜씨도 손이 굳고 한숨이라

뛰어난 묘구 ‘한도십영’에 있다네

임금의 글과 시 공에게만 지어주고

화답하라 명하니 우애 생각함이라

우애는 말이 되고 글로써 즐기니

두터운 은우 힘으로 못 이기네

공경한 마음 교만하지 않는 안색

널리 소문나 온 조정에 퍼졌고

거동은 얼음 항아리 속 옥 같고

봄바람 같은 보살핌 따뜻한 은혜

모두 좋아하여 사신도 감복하네

벼슬은 세상이 영화로 여기는 일

공은 그렇지 않아 굳이 사양하니

겸양의 미덕은 청사에 빛나리라

매일아침 하는 문안 거르지 않고

한 발짝 움직임도 법도를 따랐네

절도 있는 행의는 고금에 드물어

동평왕의 착함과 하간왕의 어짐

그 이름 드높아 뉘 감히 비기랴?

천년 뒤 여기 공이 다시 있어

신성한 우리 임금 효로 다스리고

우애하여 체화(형제간의 우애) 더욱 빛나네

갑작스런 재앙 하늘의 뜻이나

임금의 정 어찌 두고 떠나는가?

구천에 위로삼아 묏자리 잡으니

그곳 어디인가? 고양 북쪽이라

무성한 풀에 나무는 빽빽하고

산과 물 돌고 감아 마땅한 유택이라

어제의 별장이 오늘은 현궁이니

미리 정했다면 하늘과 통함이라

영원히 평안하길! 높다란 무덤

왕명으로 비 세워 빛나는구나

살아서의 영광 죽어서의 슬픔

천년만년 그 아름다움 퍼지리라

부족한 글로 덕을 써 전하노라

홍치(弘治) 2년 기유년(1489년) 월 일

5. 친동생인 성종과의 우애

월산대군은 친동생인 성종과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보통 왕의 형님으로 지내면서 왕위계승과 관련해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피해갈 길이 없는데, 이들 형제는 우려와 달리 평생 우애가 좋았다. 먼저 형인 월산대군은 임금인 동생에게 짐이 안되기 위해서 가능한 정치적으로 엮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시와 술을 벗삼아 풍류적인 생활을 하면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사람도 함부로 사귀질 않아 집앞이 적막했으며 계양군의 아들 부림군 이식과 처남인 박원종 이외에 교류하는 사람들도 극히 적었다.

세종의 서자인 계양군(桂陽君)의 아들 부림군(富林君) 이식(李湜)이 먼저 세상을 떠난 월산대군을 애도하는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자미(子美)를 애도하며

冥寞人間隔(명막인간격) 

적막하게 인간 세상과 헤어져 

嗟君向此行(차군향차행)

아아 그대 이렇게 떠나다니

英靈埋厚土(영령매후토)

영령은 땅에 묻히고

名字寄銘旌(명자기명정)

이름은 명정에 부쳤네

鳥噪高陽宅(조조고양택)

새는 고양의 옛집에 울고

雲封望遠亭(운봉망원정)

구름은 망원정을 에워쌌네

遺稿盈一篋(유고영일협)

유고는 상자에 가득하니

千載揖芳馨(천재읍방형)

천년 후에도 그 향기에 절하리라

동생인 성종 또한 형님인 월산대군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해서 대궐에 연회가 있을 때마다 대군을 불러서 모셨고 직접 쓴 시와 글을 물품과 같이 자주 보내서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하게 하였다. 월산대군은 날이 추우나 더우나 매일 아침 입궐하여 성종에게 문안을 드렸고 대군이 궐 밖으로 나가있을 때는 서로 편지로 시를 수창하면서 안부를 묻곤 했다고 한다. 성종도 월산대군의 사저나 별장에 자주 들렀고 반드시 가인(家人)의 예(禮)를 행하여 형님을 예우하였다. 월산대군과 성종은 3살 차이인데 어렸을 때 일찍 아버지 덕종(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두 형제는 서로 의지하며 함께 지내면서 공부도 같이 하고 놀았다고 한다. 둘다 성격도 비슷해 잘 맞고 학문과 시도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이들 형제는 형식적인 우애가 아니라 진심으로 정이 깊었는데 1488년(성종19) 12월21일 월산대군이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자신이 병이 들어서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형의 갑작스런 죽음에 동생인 성종은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월산대군은 죽어서까지 동생에게 짐이 안되려고 "내가 죽어서 묘가 남쪽으로 향해있으면 동생이 부담을 가질 것이니 나무꾼을 해도 넉넉하게 살기를 바라니 북쪽으로 향해야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성종은 월산대군이 죽기 일주일 전 친히 형의 집에 가서 병문안도 하고 월산대군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바로 가보려고 했으나 이미 대군이 세상을 떠났다는 내관의 비보와 인수대비의 전교를 받고서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성종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수라도 거르면서 식음을 전폐했고 화산대도 파했으며 왕의 거둥시 울리는 고취까지 폐지시켰다. 한동안 조회나 경연을 나가지 않아 조정일을 돌보지 않을만큼 힘들어 했으며 결국 마음이 아파서 작은 병에 걸리기까지 했다고한다.

월산대군 사후 성종은 신하들을 보내 형의 장례와 제사에 정성을 다했으며 시호를 봉상시에서 공간으로 논의했으나 특별히 효문으로 자신이 직접 지어서 내렸다. 이러한 동생의 애틋한 마음으로 월산대군묘는 왕릉 버금가게 장엄하며 봉분이나 석물들이 다른 왕자묘에 비해 매우 크고 조각이 섬세한 편이다. 또 성종은 당대에 문장가로 알려진 임사홍을 불러 신도비 비명을 짓게하고 월산대군이 생전에 지었던 시문들을 모아서 풍월정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또한 월산대군의 초상화를 그려서 초상찬 즉 초상화에 곁들여진 글과 시를 성종이 직접 짓기도 했으며 완성된 초상화를 보면서 성종은 형을 매우 그리워 했다고 한다.

또한 성종은 월산대군을 기리는 마음에 형이 세상을 떠난 뒤에 두번 다시 망원정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성종의 애통한 마음은 이에 그치질 않고 1492년(성종23) 월산대군의 처남이였던 박원종을 특지를 내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부승지로 임명하였다. 이 배경에는 월산대군이 정실 승평부대부인 사이에서 적자는 없었고 서자인 늦둥이 아들 둘을 두었는데, 서자가 태어나기 전에 자식이 없었던 월산대군이 처남인 박원종을 아들 대하듯 총애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때문에 성종이 박원종의 나이가 20대로 젊은축에 속했고 무관 출신이였지만 월산대군을 생각해서 박원종을 전격 발탁했다고 볼 수있다. 이를 두고 신하들의 반대가 심해 박원종이 동부승지를 사직하겠다고 청하자 성종이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글을 배우라면서 선생까지 붙여주기도 한다. 평생동안 월산대군과 성종의 우애는 매우 깊었고 이를 두고서 후세에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도 알려져 두고두고 칭송 받았다고 전해진다.

월산대군은 왕의 형이란 지위를 내세워 얼마든지 세도를 부릴 수 있었지만 동생의 예우에 대해 겸덕으로 답하였고 모든 욕심을 내려놓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서 왕위에 있는 동생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다. 조정의 언관들은 성종의 지나친 월산대군 사랑에 대해서 간쟁을 한 적은 있으나 월산대군의 행실에 대해 비난한 적은 없었다. 월산대군과 성종은 그 형에 그 아우였다. 형은 최선을 다해 종친으로 살았고, 동생은 최선을 다해 국왕으로 살았기에 성군(聖君)의 명성을 얻었다.

끝으로 성종은 형인 월산대군과 시를 많이 주고 받았는데 알려진 시 만해도 엄청 많지만 이중 피를 나눈 형제간의 뜨거운 우애가 느껴지는 동생이 형을 위해 지은 시 몇수만 소개한다.

知兄每喜無憂日

형이 근심 없어 매번 기뻤지만

顧己長慙寡德王

나는 덕이 없어 오래도록 부끄러웠네

問兄何事送羲娥

묻노니 형은 무슨 일로 세월을 보내는가

遐想洋琴與渭歌

상상하건대 거문고와 노래겠지

期會親戚 聘招佳妓

친척들을 모으고 아름다운 기생을 부르니

義雖君臣 恩則兄弟

의리는 비록 군신이지만 은혜는 곧 형제이다

新苽初嚼水精寒

새 참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처럼 차구나

兄弟親情忍獨看

형제간의 친한 정의로서 어찌 차마 혼자만 먹고 보랴

此日兄何去

오늘형은 어디로 가는가

秋風霜更淸

가을바람에 서리가 더욱 맑네

知鴻不失伍

기러기가 줄을 잃지 않으니

可以識我情

내 마음을 알았으면 하네

淸秋節欲晩

맑은 가을의 절기가 늦어지는데

楓葉幾日紅

단풍잎은 몇 날이나 붉었던가

離夏蟬聲匝

여름 지나 매미 소리 두루 들리고

依籬菊蘂濃

울에 기댄 국화꽃이 진하네

尊兄今却疾

형이 이제 도리어 병이 나서

惟弟政深衷

동생은 정말로 속으로 걱정하네

調護無疑日

조섭하여 병이 다 나은 날에

相歡後苑中

후원에서 서로 만나 기뻐하세

相對山茶手自裁

손수 심은 산다화를 마주하니

雨中如火一枝開

빗속에 불꽃처럼 한 가지 피었네

分明有意兄知否

분명히 마음 있는 것을 형은 아는가

欲暎天晴携酒來

하늘에 비가 개면 술을 들고 오리라

山北山南錦雉飛

북쪽 산과 남쪽 산에 꿩들이 나는데

非渠何以致朱扉

네가 아니면 어떻게 좋은 집에 잡아 올까

頑雲氷雪春無力

먹구름과 빙설도 봄에는 무력하니

更副兄心空不歸

형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네

忽然深憶兄在寂

갑자기 쓸쓸한 형을 깊이 생각하며

封贈欲曉予深衷

먹을 주어 나의 깊은 마음을 밝히네

養之錦囊堪掇裏

비단 주머니에 보관하다 꺼내어서

應憶靑蓮幕下翁

청련 막하의 노인을 생각하리라

半成拙句羞猶改

시를 반쯤 짓다가 부끄러워 고치고

一失佳辰悔莫追

좋은 때를 놓쳐서 후회해도 소용없네

招得撫琴兄破寂

형은 심심풀이로 불러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期知讀易我啣疲

나는 피곤한 몸으로 주역을 읽으려네

何心不覺年華晩

어찌하여 봄이 저무는 것도 알지 못했나

自聘姸姿秋日開

고운 모습 불러서 가을에 꽃이 피네

應是爲予深寂寞

나 때문에 응당 매우 적막하리니

與兄相玩泛金杯

형과 함께 즐기면서 금 술잔을 띄우리라

山雲匹練樓前度

흰 비단 같은 산 구름이 누각 앞을 지나가고

樹葉錦裁階下來

붉은 비단 같은 나뭇잎이 섬돌 앞으로 날아오네

無限秋光何處送

무한한 가을 풍경을 어디에서 보내오는가

夕陽兄醉綠尊開

석양에 술통 열고 형과 술에 취하리라

梅雨初晴景倍嘉

매우가 막 개자 풍경이 배나 좋고

華亭春日錦烟霞

봄날 정자에 안개 노을이 비단 같네

閑多自覺登臨數

한가하여 정자에 자주 오름 알겠는데

目極還驚望遠賒

응시하니 망원정이 멀어서 놀라네

樂許佳賓分半席

즐겁게도 좋은 손님이 자리에 나눠 앉고

靜饒飛鷺占平沙

조용히 날던 백로가 백사장을 차지하리

知兄此處吟情豁

형은 여기에서 시정이 활달함을 알겠거니

故送宮壺一醉華

일부러 궁궐 술을 보내어 취하게 하네

予有一兄無寂寞

나에게 형이 있어 쓸쓸하지 않은데

日論三德更溫純

날마다 삼덕 논하고 또 온순하네

慇懃自不堪情重

은근히 중한 정을 감당할 수 없거니와

詩句何從寫意眞

시구는 어디에서 진의를 표현할까

故製蓮杯無所吝

일부러 연배 만들어 아끼는 바 없는데

待看宮苑泛靑春

궁원에서 봄날에 띄우기를 기대하네

病餘愁思逐閑生

병 뒤에 시름겨워 한가한 삶 따르니

炎赫隆隆麥未榮

불볕더위 성대하여 보리가 피지 않았네

樑燕啣泥粘却落

들보 제비가 진흙 물어 붙이려다 떨어지고

宮鶯如響聽非聲

궁궐 꾀꼬리가 울어도 그 소리가 아니네

沈沈晝景烘如火

무더운 대낮은 불처럼 뜨겁고

寂寂低軒念在兄

고요한 난간에서 형님을 생각하네

何日天瓢傾數夕

어느 날에 하늘 바가지를 며칠 기울여서

一催檀板共金觥

단판을 치면서 술을 함께 마실까

我得蒼鷹毛骨淸

푸른 매를 얻으니 모습이 깨끗한데

一飛千野衆禽驚

온 들판을 한 번 날면 새들이 놀라네

韝邊萬里心先發

토시에서 만 리 나는 마음이 먼저 일고

呼處多能氣自呈

부르면 능력 많아 기운 절로 솟아나네

却憶尊兄開別墅

형님이 별장을 지은 것을 생각하니

深知錦雉送春聲

꿩들이 봄 보내며 우는 것을 알겠네

纖纖雨霽花明日

부슬부슬 비가 개어 꽃들이 선명한데

應不忘吾選貺情

내가 가려 선물을 보낸 정을 잊지 않으리

憶兄酒後思新橘

술 마신 뒤 형이 떠올라 새 귤을 생각하니

始得猶酸色未黃

처음에 시큼하니 누렇게 익지 않았네

的皪豈同桃李子

빛깔 선명하니 어찌 복숭아 오얏과 같으랴

芳新肯比枳棖香

향긋하니 어찌 탱자 정자 향에 견주랴

甘成石蜜皤翁笑

단 꿀을 만들어 파옹이 웃음 짓고

金鑄彈丸公子揚

황금으로 탄환 만들어 공자가 드날리네

欲飮瓊漿王母遠

경장을 마시려니 서왕모가 아득하여

不如醉裏恣心嘗

취중에 마음껏 먹는 것만 못하네

欲學背肩非嗜舊

어깨 맞대고 배우면서 벗과 즐기지 않았는데

安知兄弟鑑興亡

형제가 흥망을 경계할 줄 어찌 알았으랴

雨知天意難諶問

비 내릴 줄 아는 하늘 뜻은 정말 묻기 어렵고

贏得人情易作瘡

이익 구하는 인정은 상처를 쉽게 받네

在澗考槃誠不羨

냇가에서 소요함이 진실로 부럽지 않고

與君湛露正無償

형과 밤이슬에 술 마심은 정말로 보상 없네

望遠登臨水拍天

망원정에 오르니 강물이 하늘을 치고

主人迎我笑聲先

주인이 나를 맞아 웃음소리 앞서네

松陰滿檻秋光動

솔 그늘이 난간 가득하여 가을빛이 일렁이고

雲影搖尊醉色牽

구름이 술잔에 흔들려 취기에 이끌리네

危坐便知財一粟

바로 앉으니 재물이 좁쌀 한 톨 같음을 알겠고

相談何遠享千年

서로 이야기하니 천 년을 사는 것이 어찌 멀랴

雖慙薄物難充寶

변변찮은 물건으로 보물 보태기 어려워 부끄럽지만

洞我深情作□仙

나의 깊은 정을 알아 [빠짐] 신선이 되었으면 하네

尊兄畵像贊

존경하는 형의 화상에 쓴 찬문

溫溫玉質

온화한 옥의 자질로

栗然縝密

엄숙하고 치밀하며

器範自天

기량이 하늘에서 나와

璿儀表帥

종친의 모범이었네

肅穆盛容

엄숙한 모습은

璠璵煥瑟

옥처럼 빛나고 

孶孶往賢

현인에게 힘써 가서

乾乾終日

부지런히 종일 공부했네

孝以事親

효도로 부모를 섬기고

忠以作臣

충으로 신하가 되어서

履道無遹

정도 걸어 잘못이 없고

尙德若人

남들처럼 덕을 숭상했네

哲工運思

철인처럼 사색하고

粹姿逼眞

순수한 자태가 핍진하여

豁如披霧

운무가 활짝 갠 듯하고 

粲瞻星辰

빛나는 별을 보는 듯했네

琅琅尊哥

낭랑한 형의 말이

昻昻獨鳴

높이 홀로 울렸지만

他人奚識

남들이 어찌 알랴

我愛篤誠

나는 정성 다함을 아꼈네

心胸恢廓

마음이 드넓어서

海闊天晴

넓은 바다와 갠 하늘 같았고

文章陶鑄

문장을 단련하여

觸物混成

사물 보고 글을 지었네

時接華萼

형제를 때로 만나

友愛實深

우애가 실로 깊었고

韞匱飄馥

상자의 옥에서 향이 일어

灼乎知心

마음을 밝게 알았네

麒麟鳳凰

기린과 봉황은

千載難尋

천 년 뒤에 찾기 어렵고

風流氣像

풍류와 기상은

丹靑合臨

초상화에 모였네

一雇明鏡

명경을 한 번 보면 

撫掌應驩

손뼉 치며 기뻐하리니

何以爲樂

어찌하여 즐거운가

澄瑩大觀

맑고 밝아 볼만하네

玉壺秋露

옥호의 가을 이슬 같고

英炯猗蘭

난초처럼 빛나서

天錫眉壽

하늘이 장수를 주었으니

永保鴻

영원히 큰 은택을 보존하라

6. 월산대군의 시

* 웹상에 알려진 대표적인 시 몇수만 소개함

추강(秋江)에 밤이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오니 고기아니 무노매라

무심(無心)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가노매라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황하의 강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바삐 흘러 바다로 가서 다시 오지 못함을

또한 보지 못하였는가 고대광실 거울의 백발의 슬픔

아침에 검던 머리 저녁에 희어졌네

그대는 강태공이 반계에서 늙은것을 의심하지말라

그 사이에서 낚싯줄을 드리우지 않았으니

또한 엄자룡이 부춘산에 누웠음을 의심하지 말라

그 사이에서 낚시터에 임하지 않았으니

인생의 행복은 참다운 즐거움을 만남이니

이 땅에 편히 깃들고자 하나 늦었나 보네

그림을 보고 마음이 트이니 기쁘고

돌이켜 보면 이 속된 생각이 아주 미미해지네

좋은 수레와 옷이 나의 일생을 그르쳐 늙게 하였으니

흰머리가 듬성듬성하고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다네

그대는 웃지 말게 나는 돌아가리니

우희유제

태평한 종실 월산대군이

귀밑머리는 희끗하지만 벼슬과 나이는 높다네

뜰아래 많은 아이들 밤을 좋아한다지만

마루에는 함께 술잔을 기울일 손님도 없다오

전주덕진지 출여지승람

깊은 연못 바라보니 파란 하늘이 비쳐있네

예부터 이 못 여느라 파낸 많은 사람 공일세

마을의 저녁연기 멀리 가을 달을 감싸고

고깃배 노 젓는 소리 저녁바람을 비끼도다

가을밤 품은 생각

두 살쩍이 이미 다 희었거니

그윽해지네 이 밤 내마음이여

하늘 끝으로 기러기 줄지어 날고

서리 내린 저 밖에는 다듬이 소리

뜰 나무에는 가을 달 그림자 지고

처마 구름은 저녁어스름 만드네

그리운 정은 다하지 않아

머리 돌려 그대 그린 시를 읊노라

음주

혜강은 양생을 좋아했지만

양생은 장수의 계책이 아니었네

어지러운 때를 만나 죽임을 당했기에

이름을 끝네 전하지 못하였네

사람이 한 세상 사는 동안에

목숨이 금석처럼 단단하지 못해

그러므로 내 몸을 귀히 여김이

어찌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을까

삶이란 다시 즐길 수 없는 것

세월은 흐르는 강물 같은 것

두어라 날마다 술이나 먹지

어질거니 어리석거니 따지지 말자

임금이 지은 이른 봄 일에 갱진하여

아침 해 뜨자마자 대궐 문 비추니

새봄의 경물자태 어그러짐 하나없네

못가에 가는 풀은 푸른 빛 잎을 내고

동산 속 긴 가지는 푸른 빛으로 바뀌였네

단청 건물에 제비 쌍쌍히 지나는 걸 이미 보았는데

다시 보니 궁궐 깊은 곳엔 몇 사람만 돌아 오네

태평세월 이곳에 경물자태 다함 없음은

이로부터 군왕이 만기를 맡아 보기에

題畵扇(제화선)

부채 그림에 읊기

黃葉秋風裏(황엽추풍이)

가을바람 속 누른 단풍잎

靑山落照時(청산낙조시)

청산에 해지는 시간

江南渺何處(강남묘하처)

강남은 아물아물 어느 곳인지

一棹去遲遲(일도거지지)

노 젓는 배, 느릿느릿 떠나간다

寄君實(기군실)

군실에게 부친다

旅館殘燈曉(여관잔등효)

여관 새벽에 가물거리는 불빛

孤城細雨秋(고성세우추)

아무도 없는 성에 가랑비 내리는 가을

思君意不盡(사군의부진)

그대 생각하니 온갖 생각 다 일고

千里大江流(천리대강류)

천리 기나긴 큰 강물 흘러만 가는구나

有所思(유소사)

그리움

朝亦有所思(조역유소사)

아침에도 그리운 사람 

暮亦有所思(모역유소사)

저녁에도 또 그리운 님

所思在何處(소사재하처)

사랑하는 님 어디 계시나 

千里路無涯(천리로무애)

천릿길 아득히 먼 곳 

風潮望難越(풍조망난월)

풍랑으로 건널 수 없고 

雲雁托無期(운안탁무기)

구름 속 기러기라 소식 못 전해

欲寄音情久(욕기음정구)

오랜 사랑 전하고 싶지만 

中心難如絲(중심난여사)

내 마음은 엉크러진 실타래라네

待月有懷(대월유회)

달 뜨기를 기다리며

灩灩高樓月(염염고루월)

높다란 누각 위엔 달이 휘영청

團團玉窓裏(단단옥창리)

둥그런 옥창 가에 기대섰으리

娟娟一美人(연연일미인)

아리따운 그 미인 바로 내 사랑

渺渺隔秋水(묘묘격추수)

아득해라 가을 물이 가로막혔네

紉佩不可見(인패불가견)

차고 있는 패란은 아니 보이고

蘭香空在玆(난향공재자)

난초의 향내만이 여기 있구나

思之望何處(사지망하처)

그리워서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腸斷亦天涯(장단역천애)

애닯아라 그 역시 하늘 끝일 뿐

懷浪翁

낭옹을 그리워하며

近來宗室老

근래 종실에 늙은이(부림군)가

知我嘆相離

자신을 알고자 한탄하여 이별하였네

會面何時識

언제 그것을 깨닫고 만나게 되려나

論情底處期

정을 논함이 그 어느곳일지 기약하네

江山微雨後

강산의 보슬비를 뒤로 하고

煙樹夕陽時

안개 낀 나무에 석양이 비치네

對此亦惆悵

이런 곳에서 또한 애달퍼하며

思君終日思

그대 그리며 종일토록 그대만 생각하네

奉敎御製寫親筆畵蘭(봉교어제사친필화란)

幸得萬機暇

다행히 정무 가운데 한가함을 얻어             

揮毫造化來

붓을 휘두르니 조화가 찾아왔구나             

蘭莛圖已妙

난꽃 그림은 이미 묘한데                        

詩詠興相催

시를 읊어 흥이 서로 돕는구나    

對物思無盡

사물을 대하니 생각이 끝이 없고    

霑恩感幾廻

은혜에 젖어 감회를 몇 번이나 돌이키네   

相看似眞性

형상을 보니 본성을 잘 나타냈으니

疑是手栽培

아마도 손수 재배한 것인 듯하네

京都十里千萬家(경도십리천만가)

서울이라 십리 수많은 집들

燈街處處蒸紅霞(등가처처증홍하)

등불켜진 거리곳곳 붉은 노을 타오르네

香車寶馬滿路去(향거보마만로거)

향기로운 수레 단장한 말 거리에 가득 오가고

醉歌遊女顔如花(취가유녀안여화)

술에 취해 노니는 여인들 그 얼굴 꽃같구나

留連光景竟何如

끊임없는 햇살이 마침내 어떠한가

政是春歸欲夏初

정말 봄이 가고 여름이 되려 하네

田麥登時風澹蕩

보리를 타작할 때 바람은 넘실거리고

園梅熟處雨殘餘

매실이 익는 곳에 빗방울 남아 있네

人多望重愁讒謗

사람들은 많이들 명망이 중하여 참소를 근심하는데

我獨身閑脫毁譽

나는 홀로 신세가 한가하여 칭송과 비방 벗어나 있다네

幸被聖君恩顧重

다행히 성군의 은혜 돌아봄에 무거우니

豈辭華髮曳長裾

하얀 머리에 긴 옷 끌고 다님 어찌 사양하리요

옛 절에서 꽃을 보다

春深古寺燕飛飛

봄 깊은 옛 절에 제비들은 훨훨 날고

深院重門客到稀

깊숙한 집 겹대문에 찾아오는 사람 적네

我正尋花花正落

내가 꽃을 보러 갈 땐 꽃이 한창 지는 때라

尋花還爲惜花歸

꽃을 보러 갔다 되레 꽃 애석해 돌아오네

箭郊尋訪

살곶이벌을 찾다

春郊細草如華茵

봄철 교외 가느다란 풀은 비단자리 같은데

春風載酒尋遊人

봄바람에 술을 싣고 노는 사람 찾아가네

朝乘駿馬踏靑去

아침엔 준마 타고 푸른 풀 밟고 나갔다가

日暮醉歸空惜春

저물녘 취해 돌아오며 공연히 봄을 아까워하네

寒食(한식)

寒食淸明二月天(한식청명이월천)

한식과 청명의 이월 맑은 하늘에서

東風庭院掛鞦韆(동풍정원괘추천)

동풍 불어와 정원에 그네를 매었네​

流鸎啼過畫樓去(류앵제과화루거)

꾀꼬리 울며 아름다운 누각을 날고​

一樹杏花開正姸(일수행화개정연)

한 그루 복사꽃이 예쁘게도 피었네

楊花踏雪(양화답설)

양화도 눈 밟기

江村漁家數茅屋(강촌어가수모옥)

강마을 어촌에 초가 두어 채

籬下森森滿銀竹(이하삼삼만은죽)

울 밑에는 은죽 같은 고드름이 촘촘히 맺혔네

歸來此地足乘興(귀래차지족승흥)

세속 떠나 돌아오니 흥이 일어나

吟詩擧酒無休息(음시거주무휴식)

시 읊으랴 술잔 들랴 쉴 새 없네

愛蓮亭(애련정)

鑽(鑿)得新塘又種蓮(찬(착)득신당우종련)

새로이 못 파고 연까지 심으니 

風流可愛主人賢(풍류가애주인현)

풍류를 아는 원님 어질기도 하네

淸馨冉冉誰能賞(청형염염수능상)

솔솔 퍼지는 맑은 향기 누가 기리나 

濃艶娟娟我獨憐(농염연연아독련)

고운 꽃 나 홀로 사랑하고 싶어라

翠蓋紅粧遙夜月(취개홍장요야월)

푸른 갓 붉은 옷 입고 달빛 속에서

碧波淸浪泛瑤船(벽파청랑범요선)

찰랑이는 맑은 물에 꽃배 띄우네

此間對酒堪乘興(차간대주감승흥)

이 풍경 대하며 술로 흥을 돋우고

唯得吟哦喜欲顚(유득음아희욕전) 

시 읊으며 환희에 도취하고 싶네

濟川翫月(제천완월)

제천정에서 달을 구경하며

銀河無風素波靜(은하무풍소파정)

은빛 강물은 바람 없어 흰 물결 고요한데

老蟾吸此潭底影(노섬흡차담저영)

달빛은 못 밑까지 환히 비추네

江頭似轉白玉盤(강두사전백옥반)

강머리에서 백옥 소반 굴리는 것 같은데

雲際已吐黃金餠(운제이토황금병)

구름 저 사이로 벌써 황금 떡이 솟아났네

高樓樽酒冷似徹(고루준주냉사철)

높은 다락에 한잔 술 차갑고 깨끗한데

對此淸光欺白髮(대차청광기백발)

이 맑은 빛을 대하니 백발도 모르겠네

回頭橫笛一聲來(회두횡적일성래)

어디선가 잣대 소리 들려와 머리 돌리니

夜蘭似聽霓裳曲(야란사청예상곡)

깊은 밤 월궁의 음악소리 듣는 것 같네

麻浦泛舟(마포범주)

마포 포구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정경을 읊다

滿浦煙光綠發地(만포연광록발지)

포구에 자욱한 안개 대지엔 초록빛 피어나는데

微風嫋嫋吹寒漪(미풍뇨뇨취한의)

미풍이 산들산들 불어 차가운 잔물결 일으키고

江邊小草綠於染(강변소초록어염)

강가의 작은 풀들은 물감색갈보다도 더 푸른데

堤柳又作黃金枝(제류우작황금지)

강둑의 버드나무는 또다시 금빛 가지를 틔우네

畵船蕭鼓橫渡頭(화선소고횡도두)

북소리 요란한 놀잇배는 나룻가에 정박해 있고

碧蘅紅杜生芳洲(벽형홍두생방주)

푸른 족두리 붉은 두견화는 모래섬에 피었는데

蕩漿歸來夕陽邊(탕장귀래석양변)

해저무는 강가에 상앗대 노를 저어 돌아오다가

回頭忽見來沙鷗(회두홀견래사구)

고개돌려 문득 모래밭에 내리는 갈매기를 보네

暮春日與伯胤同遊望遠亭有感

(모춘일여백윤동유망원정유감)

저문 봄 백윤과 함께 망원정에서 노닐다가 느낌이 있어

望遠亭前三月暮(망원정전삼월모) 

망원정 앞에 춘삼월이 저무는데

與君携酒典春衣(여군휴주전춘의) 

그대와 술 마시려 봄옷 잡혔네

天邊山盡雨無盡(천변산진우무진)

하늘가 산은 다하여도 비는 그치지 않는데

江上燕歸人未歸(강상연귀인미귀)

강의 제비는 돌아가도 사람은 돌아가지 못하네

四顧雲煙堪遺興(사고운연감유흥)

안개를 돌아보니 흥을 풀 만한데

相從鷗鷺共忘機(상종구로공망기)

갈매기와 서로 좇아 사심을 잊는다

風流似慰平生願(풍류사위평생원)

이 풍류가 평생의 소원을 위로할 듯하니

莫向人間學是非(막향인간학시비)

인간 세상 시비를 배우지 마세

7. 관련 작품

8. 관련 사진

풍월정집

월산대군 보도블록 시조

망원정

월산대군 요여

월산대군 사당

월산대군 태실

월산대군 신도비 상형문자 제액

월산대군 신도비

월산대군묘

9. 관련 문서


  1. [1] 사실 역사적으로도 쿠데타로 즉위한 군주들은 대체로 쿠데타에 민감하여 제2의 쿠데타를 막기 위해 노력한 경우가 많았다.
  2. [2] 사실 세자가 죽거나 폐세자가 되었을 때 세자의 아들을 새로운 후계자로 삼는다는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양녕대군 때도 그랬고 의경세자 때도 그랬고 소현세자 때도 그랬다. 만약 월산대군이 왕위에 올랐다면 할아버지인 세조, 아버지인 의경세자로부터 이어져온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좀 다른 사례지만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었을 때도 대비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의 세자는 (어쩌면 당연히) 계승하지 못했다. 예외가 있다면 생부인 사도세자가 죽었음에도 왕위에 오른 정조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있다. 헌종은 그 말고는 왕위 계승자가 아무도 없긴 했지만.
  3. [3] 사실 권신들의 입장에선 건강이 안 좋은 왕을 섬기는 게 건강한 왕을 섬기는 것에 비해 자기들 권력을 휘두르기 편하다. 만약 한명회의 사위가 자을산군이 아니라 월산대군이었다면 원래대로 월산대군이 즉위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경우 월산대군의 건강 문제까지 겹치면서 왕권이 급격히 약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4. [4] 선조 때부터 고종황제가 황위에서 퇴위하기 전까지는 '경운궁'이라고 불렸다.
  5. [5] 성종의 서자 계성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6. [6] 조선왕조실록에 전성정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