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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慶淑嬪
화경숙빈

시호

휘덕안순수복화경숙빈(徽德安純綏福和慶淑嬪)

빈호

숙빈(淑嬪)

궁호

이현궁(梨峴宮)

본명

밝혀진 바 없음[1]

출생

1670년(현종 11년) 12월 17일, 전라북도 태인현

사망

1718년(숙종 44년) 4월 9일(향년 49세)
조선 한성부

재위

숙원

1693년 ~ 1694년

숙의

1694년 ~ 1695년

귀인

1695년 ~ 1699년

1699년 ~ 1718년

능묘

소령원(昭寧園)

사당

육상궁(毓祥宮)

본관

해주(海州)

부모

최효원, 남양 홍씨

부군

조선 숙종

자녀

장남 영수, 차남 조선 영조, 삼남

1. 개요
2. 출신
3. 후궁이 되다
4. 말년
4.1. 추측
4.2. 숙종의 교지로 인해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5. 묘소
6. 가계
7. 사극

1. 개요

조선 숙종후궁으로 영조의 어머니이며 장희빈과 더불어 일명 조선판 신데렐라. 장희빈은 양반만 아니었지 대부호 중인집안 딸이었던 반면 숙빈 최씨는 이에 한참 뒤쳐지는 천민이거나 그에 준하는 빈민층 출신이다.

1670년 음력 11월 6일(12월 17일) 최효원의 딸로 태어났다. 정말 단박에 신분이 고속 상승한 케이스라서 로또 맞은 인생이라고밖에 달리 설명이 안 된다.[2]처음에는 종 4품 숙원이었으나 임신 등을 거쳐서 정1품 빈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사후 "화경"이라는 시호를 받아 화경숙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영조~철종까지는 모두 숙빈의 후손이 된다.

2. 출신

출신이 불분명하여 여러가지 설이 많다.

원래 궁녀도 아닌 무수리인데다,[3] 천민 출생에 심지어 결혼을 했다가 남편과 사별한 기혼녀였다는 주장도 있다. 무수리는 궁녀와 달리 꼭 처녀여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궁에만 머물지 않고 출퇴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의 불확실하고 천한 출신 신분 때문에 영조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형이 있다는 소문, 심지어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돌았고, 영조가 이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물론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다. 숙종과 영조의 성깔을 보면 친부자지간이 확실하다. 영조의 친형은 어려서 죽었다. 그래서 영조가 숙빈 최씨의 차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4][5]

어쩌다가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는데, 기록에 남는 이야기로는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사가에 나가서 살던 시절, 인현왕후의 생일에 인현왕후를 모셨던 적이 있는 그녀가 인현왕후를 위한 기원을 올리고 있던 모습을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숙종이 목격하는 바람에 눈에 띄게 되어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이문정의 수문록)

다른 기록에서는 인현왕후가 쫓겨나간 사가에서 어느 날 밤 홀로 바느질을 하고있다가 후원을 지나가던 숙종이 뒤태가 아름다워 잠시 들어가서 만남을 가졌다 한다. 그런데 낮에 한번 더 본 이후 외모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찾지 않았다 한다. 하지만 이 설은 신빙성이 낮은 게, 일찍 죽기는 했지만 그녀 소생 왕자가 영조 앞뒤로 둘이 있다. 낮에 본 뒤 찾지 않았다면 이 두 왕자는 어디서 온 거란 말인가.[6] 거기다 영조가 가례할 때의 비용이 만만찮았다는 등, 의외로 영조와 숙빈 최씨를 편애했다는 걸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또 영조의 외모가 조선 시대의 미남상이라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숙빈 최씨의 외모 역시 적어도 나쁘진 않았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7]

또 다른 이야기로는 전염병으로 고아가 된 그녀가 산신령의 계시를 받고 나주 목사에게 거둬졌는데 목사의 부인이 인현왕후의 친척이었기에 인현왕후가 입궁할 때 같이 입궁하였다고 한다. 혹은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이 영광 군수로 부임하는 길에 다리 옆에서 그녀를 거뒀으며 인현왕후의 입궁시에 나인으로 입궁했다고 한다.

고종은 영조가 말하길 숙빈 최씨는 침방의 궁녀였다며 무수리 설을 부정했는데 영조의 컴플렉스 등을 생각해보면 이쪽은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침방 궁녀는 내명부에서 꽤 높은 편에 속한다. 지밀 궁녀 바로 다음이 침방 궁녀.

후궁이 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녀의 숙모의 사위 김해성이 그녀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혐의로 문초를 받을 때 원래 구걸을 하면서 살았다가 그녀가 숙원에 봉해지면서 도움을 받았다고 진술한 것을 보아 야사에서처럼 천민이 아니더라도 매우 가난하고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보통 사극에서는 무수리설을 가장 많이 채용한다.

3. 후궁이 되다

숙빈 최씨가 후궁이 되자, 당시 왕비였던 장희빈의 강력한 경쟁 상대로 떠오른다. 그 탓에 인현왕후가 복귀되기 전까지는 고초도 많이 겪은 모양이며, 노론 세력이 희빈 장씨를 천하의 악녀로 기록한 수문록에 나오는 이야기라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처음 태기가 있었을 무렵 당시 중전이었던 장씨가 그녀를 잡아서 린치를 가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숙종이 졸다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오지 못 하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중전 장씨의 처소에 가니 빈 독이 뒤집혀져 있었는데 그 독 안에 두들겨맞은 임신부 숙빈 최씨가 있었다. 급히 응급 조치를 하여 태아와 숙빈 최씨를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린치에 관한 일화는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겠지만[8] 임금의 총애를 받고 왕자를 낳았기에 수많은 견제와 공격을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이며, 이에 맞서기 위해 서인 세력과 친밀해졌다. 비천한 출신에 뒤를 봐줄 배경도 없는데다가 장희빈의 견제가 극심했기 때문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연잉군은 훗날 서인 분파인 노론 세력과 손을 잡는다.

지지 기반이 불안했기 때문인지 숙종의 총애를 받을 때에도 몸 가짐과 말에 극히 조심했다고 한다. 본인은 물론 휘하 나인들의 입까지 단속하였다고. 숙종이 농담으로 그녀를 왕후에 봉하겠다고 하자 그 말이 무서워 눈 위에 엎드려 있었다는 야사도 전한다.[9]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앉혔다가 다시 인현왕후를 복귀시키고 장희빈을 도로 희빈으로 강등시킨 것은 숙종의 왕권 강화책이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그 구실을 만들어준 것이 다름 아닌 숙빈 최씨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무고하여 죽였다는 것을 고발한 것도 숙빈 최씨.[10] 이런 점을 볼 때 실제 역사에서 아예 정치색이 없는 인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위의 내용을 읽어보면 서인과 손을 잡는건 선택이라기 보다는 필수였다고 볼 수밖에 없겠지만.

4. 말년

사실 많은 사극들이 장희빈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일반 시청자들은 숙빈 최씨의 후일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일설에 따르면 숙종은 인원왕후를 맞으면서 숙빈 최씨를 궁 밖으로 내보냈고, 그녀는 이현궁[11]에서 기거하다가 숙빈 혼자 살기엔 궁이 너무 넓어서 안쓰럽다는 이유로 창의궁(연잉군 사저)으로 옮겨간 후 연잉군 내외와 같이 살다 숨을 거두었다. 숙빈도 불쌍한데 영조를 제외하고 아들 둘을 먼저 보냈기 때문. 하지만 그녀의 아들인 영조와 증손자인 정조가 조선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끈 명군들이 되면서 위로는 됐을 듯 하다.

4.1. 추측

그러나 숙빈이 인원왕후의 등장 이후 궁 밖으로 나갔다는 역사적 근거는 전무하다. 숙빈 최씨가 궐을 나갔을 거라 추측하는 근거는 이현궁을 환수할 때 등장하는 숙빈방이라는 표현 때문인데 조선왕조실록 숙종 편을 보면 장숙원방, 장귀인방, 숙의방이란 표현이 등장하며 비변사등록에도 영빈방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숙빈방이란 표현은 숙빈이 기거하는 곳이 아닌 숙빈의 창고 또는 재물일 가능성이 높다.[12]

또한 숙종은 1702년 이현궁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시행하였는데 이 규모가 워낙 커 말 30필이 토석을 운반하는데 3개월 이상이 걸린다며 숙종에게 만류하는 상소를 올린 것과 숙종이 결국 끝까지 밀어붙여 공사를 마친 기록이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에 존재한다. 쫓겨나는 후궁을 위해 숙종이 숙빈의 사저인 이현궁을 욕 먹어가며 공사를 한 것이 모순인 듯 하지만, 인원왕후의 가례를 앞두고 재물 소요가 많은 시점에 굳이 빈 집인 이현궁의 수리하고자 한 뜻이 숙빈의 출궁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이것을 근거로 한다면 인원왕후의 가례 직전에 출궁을 당했을 수도 있다.

4.2. 숙종의 교지로 인해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가 죽은 후 숙종은 후궁이었던 자는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교지를 내린다. 이 교지의 타깃이 바로 숙빈 최씨라는 주장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는 조선시대 법도를 모르고 나온 주장이다. 조선의 왕비는 왕의 총애가 아니라 철저하게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선택되는 자리로 출신도 불분명한 빈민이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뒷날 왕위에 오른 숙빈의 아들 영조조차 어머니의 무덤을 릉으로 올리지 못했다.

숙종의 후궁들 중에는 숙빈 외에 영빈 김씨가 있었고, 인현왕후가 사망할 당시 품계는 숙빈보다 한 단계 낮은 귀인이었지만[13] 위에 서술된 대로 매우 한미한 집안 출신임이 분명한 숙빈과 달리 영빈은 서인 세력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숙빈 역시 서인에 속하였고 당시 귀인이었던 영빈보다 품계가 높긴 했지만, 집안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만약 후궁들 중에서 중전을 간택했다면 중전이 됐을 사람은 숙빈이 아니라 영빈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교지의 타깃은 숙빈이 아니라 영빈이다.[14]

여기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는데, 숙종이 영빈 김씨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영빈은 기사환국이 터지고 한달이 안 된 시점에서 왕의 동정과 궁중 기밀에 관한 정보를 친정에 빼돌리고 이모부 홍치상[15]과 작당하여 희빈의 친정 어머니에 관한 유언비어를 날조한 혐의가 적발되어 홍치상은 처형되고 그녀는 폐출됐다.[16] 후에 인현왕후가 복위할 때 같이 복위했지만 숙빈이 이런저런 이유 와 핑계 로 계속해서 품계가 올라 그보다 높은 빈이 되고 다른 후궁들도 하나하나 승봉[17]될 때에도 홀로 귀인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는 안습한 상황을 겪었다.

게다가 역시 인현왕후 복위 때 같이 복권되었던 홍치상의 경우 그의 아들인 홍태유[18]홍치상의 무고함을 밝혀달라고 호소했다가 빡친 숙종에 의해 복권이 취소되고 이후 명예 회복이 영원히 금지되어 버린다. 안습.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영빈에 대한 악감정이 대단했던 모양. 영빈 김씨인원왕후 책봉 때에야 간신히 빈으로 승봉된다.[19]

진실이 무엇이건 숙종은 적어도 그녀 소생의 아들 연잉군을 총애했고, 결국 연잉군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철종 대까지의 임금들은 모두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난 자손이 되는 셈이다.

또한 인원왕후연잉군을 지켜주고 왕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숙빈에게 있어서는 인원왕후가 아들의 은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뒷날 영조인원왕후를 친어머니 모시듯 극진히 모셨다고.[20]

5. 묘소

최씨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그녀의 묘소를 소령원(昭寧園)이라고 부른다. 영조는 최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여러차례 그녀를 기리는 제문을 지었고, 또 왕권 강화 차원에서 어머니의 무덤을 능(陵)으로 승격시키고 싶었던 듯 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드라마 동이 마지막 장면에서 성장한 영조가 차천수(배수빈 분)와 함께 어머니의 묘를 찾은 장면에서 나온 그 무덤이 실제 소령원이다.

계압만록에 따르면, 한 나무꾼모화관 부근에서 향나무를 팔고 있는데, 암행을 하고 있던 영조가 어디에서 나무를 캐왔냐고 묻자, 나무꾼이 "나랏님의 모후를 모신 소령이 있는 양주 고령산에서 캐웠다."고 했다. 영조는 기뻤지만 넌지시 "다른 사람들은 소령원이라고 부르는데 왜 소령릉이라고 하시오?"라고 물으니 "아니, 임금님의 어머니가 묻혀 계신 곳인데 왜 원이요? 능이지?" 라며 오히려 영조를 무식쟁이 취급(...)했다고 한다. 나무꾼이 무식하여 원과 능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영조는 기뻐하여 향나무를 다 사겠다며 나무꾼을 경희궁으로 데려오고, 그제서야 방금 전까지 호통을 친 양반이 임금이란 걸 깨달은 나무꾼은 바닥에 넙적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영조는 기분이 좋아져 백성들도 능이라 부르는데 왜 원이라고 하느냐고 신하들을 꾸짖고는 나무꾼에게는 통훈대부 능참봉의 지위를 주었다고 한다.

다만 아이러니하다면 아이러니한 것이, 숙종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를 비롯 희빈 장씨까지 모두 그 무덤이 서오릉 경내에 있는데, 숙빈 최씨만 홀로 파주에 떨어져 있다. 신주는 칠궁의 하나인 육상궁(毓祥宮)에 모셔졌다.

소령원은 비공개 구역이라서 여기를 방문하려면 문화재청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묘의 관리는 파주삼릉관리소에서 하고 있기에 여기에다가 방문 신청을 하면 된다.

6. 가계

7. 사극

장희빈을 다룬 많은 사극에서는 드라마 중반부터 출연,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 시대를 다룰 땐 대개 인현왕후장희빈의 대결의 비중이 커서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에겐 인지도가 밀리기에, 동이가 방영되기 전까지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은 없고 김혜수가 출연한 장희빈을 제외[21]한다면 단지 인현왕후 편을 들 뿐, 정치색은 아예 없는 인물이었다.

보통 숙종 연간 장희빈을 둘러싼 내명부의 갈등을 다루는 작품의 경우 일반적으로 숙빈에게는 별 다른 포커스가 주어지지 않거나 영조의 어머니로서만 부각된다거나 아예 극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온다고 해도 인현왕후를 돕는 어진 여성상으로 등장할 뿐. 그러나 후기 작품 들어서 숙빈 역시 갈등의 중심축으로 들어가 주역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질고 조용한 숙빈상을 연기했다는 평을 받는다.
욕심없이 착하고 순박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인현왕후를 모후로서 잘 모셔야 한다며 어린 영조를 훈육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극중 시점에서는 이미 사망한 인물이라 회상장면으로만 몇 차례 등장하는데, 주로 아들 영조가 가진 컴플렉스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등장. 영조가 어린아이였을 때 사람들이 숙빈이 무수리 출신이라고 쑥덕이는 소리를 듣고 와서 순진하게 무수리가 뭐냐고 묻자, 충격을 받는 표정을 보였다. 임종 직전에 영조에게 정성왕후를 소박맞힌 것[22]에 대해 꾸짖고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다.
본격적으로 장희빈과 맞서는 역할로서 유명해진 숙빈이었다. 서인 세력과 결탁하여 궁중에 사씨남정기를 퍼뜨리는 등 인현왕후 복위를 돕는 것으로 나온다. 후궁이 된 이후 장희빈이 그녀의 출신을 문제삼자 희빈 역시 중인 궁녀 출신이면서도 중전이 되지 않았느냐고 쏘아붙이는 등 희빈과 대립하는 숙빈상을 그려냈다.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병훈 PD의 전작 이산에 나오는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를 그대로 옮긴 것 같다(...). 이산에 나오는 영조(연잉군) 역의 이순재가 동이의 한효주의 아들(...)이라는 배우개그가 성립한다.또 너무 동화적이고 선한 인물이라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는 장희빈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인현왕후하고도 포지션이 겹쳐서 식상하다는 평도 있었다. 이런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 아들 연잉군이 태어난 이후 치열한 정쟁으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뒷바라지하는 모습이 부각됐다. 허나 드라마에서 그려내는 행위들은 거의 역모에 해당하는 수준이라서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는 인현왕후가 사가에서 부리던 몸종이라는 설정으로, 나름대로 욕심도 있고 영악한 인물로 그려진다. 특히 장옥정을 자해 공갈로 괴롭히고 낚아서 숙종으로부터 후궁의 자리를 따내는 영악함까지 보인다. 신분 상승의 과정이나 그 방법이 장옥정이 겪었던 방식 그대로[23]인 것을 보아, 장옥정의 사랑이 주제인 작중에서 그 사랑을 독차지하는 장옥정과 장옥정처럼 사랑받고 중전이 되고 싶어하는[24][25] 최 무수리로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나쁜 년. 이라 보기는 어렵고 그저 작중에서 사랑받지 못했을 뿐이다.
위에 나온 숙빈 기혼녀 설을 반영하여, 본래 노름꾼 백만금(이문식 분)의 아내였으나 도박빚 때문에 백만금과 헤어져 궁인이 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인좌(전광렬 분)의 계략에 놀아난 것이었다는 설정이 나와있다.


  1. [1] 드라마에서는 동이, 복순 등의 이름으로 나오지만 이름이 기록된 것은 없다. 위키백과에서는 복순이 본명이라고 하지만 그건 SBS 드라마 대박에서 나온 것이고...
  2. [2] 물론 마지막의 귀인과 빈으로 올라간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신분상승은 모두 아이를 낳아서 올라간것이다. 첫 임신으로 숙원, 둘째를 임신하여 숙의 이후 다음해 귀인이 되었다가 3년뒤에 단종복위 기념으로 숙빈이 된다. 이중 숙원,숙의,귀인은 모두 1년도 되지 않아 이루었는데, 그와중에 장남 영수, 차남 영인군을 연년생으로 낳고, 숙빈에 임명된 해에 셋째 아들을 낳았다. 사실 아들만 셋을 낳는다는건 당시 조선 특히 손이 극히 귀해진 후기 왕가에 있어서는 엄청난 강운이긴 하다.
  3. [3] 궁녀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본디 천민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보다 더 낮은 무수리였던것. 무수리와 궁녀의 처지는 하늘과 땅차이였다.
  4. [4] 여러 사극에서 숙빈 최씨가 무수리였다가 승은을 입고 영조를 낳아 빈으로 승급됐다고 묘사되나 사실 장남을 낳고 차남인 영조를 낳은 뒤 삼남까지 낳았다. 그러나 영조의 동복 형제들이 모두 요절해서...
  5. [5] 오죽하면 야사에서 국문을 받는 소론 세력들이 "영조는 선왕의 자식이 아니다!"라며 바락바락 대드는 얘기가 있다. 게다가 숙종조 공작 정치의 대가인 김춘택과도 염문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걸 비틀어 과거 MBC 정통 사극 <대왕의 길>에서 혈통을 부정하는 소론 이인좌에게 영조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자, 숙종의 혈육이 맞다고 데꿀멍하는 장면이 있다.
  6. [6] 숙종에게 아들이 없던 것도 아니라 이미 세자인 훗날의 경종이 있었다. 그러니 구태여 후사를 얻기 위해 후궁을 더 두는 일은 안해도 되었다. 즉 한번 보고 별로면 내쳐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무려 세 아들을 둘 정도였다면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7. [7] 연산군이나 영조나 둘 다 어머니의 얼굴을 닮아 여자같이 예쁘게 생겼다는 기록이 있다
  8. [8] 아무리 숙빈 최씨의 신분이 낮다고는 해도 이 야사대로라면 장희빈은 감히 왕의 씨를 밴 여자를 죽이려 한 왕비가 된다. 물론 세자와 왕자가 같지 않고 장희빈이 중전이긴 했지만 그래도 왕의 자식을 해치려 했다는건 절대 그냥 넘어가질 수는 없는 죄가 된다. 또 용이 땅에서 나오지 못하고 라는 대목을 보면 알겠지만 용은 임금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냥 지어낸 얘기일 확률이 100%다. 어떻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왕이 될지 안될지 안단 말인가. 하다못해 성 감별도 없던 시절에 말이다.
  9. [9] 하지만 그녀는 절대 중전의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신분이 비천하다고 그렇게나 무시당하던 장희빈조차 중인의 신분으로, 일단은 양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민으로 양인조차 되지 못했다. 만일 무고의 옥 사건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왕세자의 생모이자 전 중전이었던 장희빈이 왕비로 진봉되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더라도 서인은 숙빈이 아닌 간택 후궁 영빈 김씨를 왕비로 올리려고 했을 것이다. 숙빈이 장희빈의 몰락에 일조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숙빈 최씨를 중전으로 삼자고 하는건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무리수이기 때문. 마침 중종 때 장경왕후가 승하한 후 중종이 경빈 박씨를 왕비로 내심 세우고 싶어했다가 정광필에게 "중전이란 마땅히 좋은 집안의 여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라며 반대했던 전례도 있었다.
  10. [10] 단 장희빈이 폐위된 것은 인현왕후의 복위로 인해 자동적으로 이뤄졌다.
  11. [11] 숙빈이 기거할 때는 숙빈방이라 불렸다.
  12. [12] 장숙원방, 장귀인방, 영빈방이 쓰인 시기에 희빈 장씨영빈 김씨는 모두 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13. [13] 이때 당시 숙종의 후궁들 중 빈의 지위에 있던 사람은 장희빈을 제외하면 숙빈이 유일했다.
  14. [14] 실제로 중종 때 장경왕후가 죽자 중종은 경빈 박씨를 왕비로 삼고 싶어했는데 정광필이 왕비는 좋은 집안에서 들여야 한다고 주장해 무산시켰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파와 시대와 위치를 초월해 같은 시각인 걸 감안하면 그 숙종이라 할지라도 숙빈 최씨를 왕비로 삼지 못했을 것이다.
  15. [15] 효종의 차녀인 숙안공주의 아들. 즉 숙종의 고종 사촌이다.
  16. [16] 이 일이 있고 열흘 후에 인현왕후도 폐출된다. 숙종이 이 일의 배후로 인현 왕후를 지목했다 한다.
  17. [17] 쉽게 말해 진급
  18. [18] 영빈에겐 이종 사촌 동생이 된다.
  19. [19] 원래 새로운 내명부의 수장이 즉위하면 후궁들의 품계를 올려주는 것이 관례였다. 인조 때 인렬 왕후가 죽어 계비인 장렬 왕후를 간택하였는데, 이 때도 숙원 조씨를 비롯한 대부분의 후궁이 승봉되었다.
  20. [20] 경종은 인현왕후 민씨의 아들로 입적하였고, 영조는 인원왕후 김씨의 아들로 입적하였다. 인원왕후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아들인 영조가 더 이뻐보일 수 밖에 없는 상황...
  21. [21] 이 드라마에선 서인 세력과 손을 잡고 희빈을 견제하며 인현왕후의 복위를 돕는다.
  22. [22] 영조가 혼인 첫날밤 아내 정성왕후의 손이 고운 것을 칭찬하자 정성왕후가 "부잣집에서 태어난 덕분에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자라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어머니가 허드렛일 하던 무수리란 사실에 열등감을 품고 있던 영조가 정성왕후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야사를 그대로 인용해서 썼음.
  23. [23] (가짜이긴 하지만)승은 호새칸 을 받는 묘사나, 독이 있는 음식을 일부러 먹어 다른사람을 모함하고 상전(장옥정은 명성왕후에게)에게 핍박받은 것이 숙종이 알게되어 첩지를 받는 묘사는 장옥정이 겪은 그대로다.
  24. [24] 최 무수리는 1화에서 '나는 아씨처럼 될래요. 장옥정처럼'이라는 말을 한다. 그 외에도 몇번 장옥정이 누리는 것을 훔치러 왔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
  25. [25] 작중에서 최 무수리는 인현 왕후와의 관계도 왠지 불편하게 묘사된다. 자기가 아들을 낳으면 왕세자는 아니더라도 왕세제로는 세울 수 있느냐고 떠보자 인현 왕후가 난색을 표하고, 인현왕후가 아들이 없고 몸이 불편한 것을 알아채자 그녀 사후에 자기가 중전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내비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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