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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교유 관계
4. 주요 저서

1. 개요

丁若銓

1758년 ~ 1816년.

조선 영조, 정조, 순조 때 살았던 성리학자이자 생물학자. 정약용복자 정약종[1] 아우구스티노의 형으로, 호는 손암(巽菴), 자는 천전이다. 종교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2. 생애

어린 시절부터 성리학자이자 실학자인 이익의 학설을 배웠으며,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암브로시오) 아래에서 학문을 배웠다.

1783년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에 올라갔고, 1790년에는 증광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 병조좌랑의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1798년에는 왕의 명령을 받아 영남인물고를 편찬하는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친척인 천주교도 이벽(세례자 요한), 이승훈(베드로) 등과 교류했으나 이후 동생 정약용과 함께 천주교를 멀리하였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서당을 운영하며 섬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다가 유배 생활 16년만인 1816년에 우이도에서 사망했다. 묘지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 성지에 있다.

아들로는 본래 외아들 정학초가 있었는데, 혼인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자식도 없이 병으로 요절했다. 정약전은 물론이고, 평소 조카 학초의 재능을 높이 사서 자신의 학문적인 후계로 삼고자 했던 정약용도 크게 슬퍼하였다. 정학초의 죽음으로 인해 후사 문제를 두고 정약용과 정약전이 편지로 토론한 적이 있다. 며느리가 자식도 없이 청상과부로 사는 모습을 가엾게 여긴 정약전과 그의 아내는 정약전 형제의 외가 가문의 친척인 정학기의 아들을 학초의 양자로 삼아서 후사를 잇기를 원했다.

하지만 정약용은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얻은 서자인 학소에게 대를 잇게 하라고 주장했다. 적서 차별이 심한 당대에도 적자가 없을 땐 양자를 들이는 것보다는 서자가 대신 대를 잇는 것이 오히려 더 예법에 맞는 방법이었고, 정약전도 학소를 차별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내와 며느리가 자식도 없이 힘들게 사는 모습[2] 때문에 정약용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러자 정약용은 한발 물러나서 학소가 이후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이 학초의 양자로 들어가서 대를 잇게 하라고 주장했고 정약전은 이를 따랐다.

3. 교유 관계

3.1. 정약용

정약전은 형제들 가운데서도 4살 아래 동생인 정약용와 우애가 깊었다. 정약용은 둘째 형인 정약전을 어린 시절부터 잘 따랐고, 유배 생활 중에도 그에게 심적으로 많이 의지하며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인지 정약용의 글에서도 정약전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두 형제는 젊은 시절 함께 동림사, 봉은사에서 수학하며 학문의 즐거움과 형제들간의 우애를 논하기도 했으며 정약전이 본래 벼슬길인 대과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정약용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나서기도 했다. 정조 역시 “정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정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하며 총애하였다.

두 형제들에게 정조 시기는 참으로 영광의 시기였으며 인생에서 보람찬 순간들로 가득차 있었고 형제간의 우의는 더욱 깊어졌다. 이 때의 일화 가운데 정약용이 좌부승지로 있을때 고향이 그리워 중앙 벼슬아치가 허락없이 도성을 함부로 나가면 안 된다는 법을 슬쩍 어기곤 고향에 잠시 돌아가 형인 정약전과 강에서 고기를 잡고 산나물도 뜯고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는 등 평안한 여가를 보냈다는 일화가 있는데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 일화를 일생에서 즐거웠던 순간들 중 하나로 언급하기도 했다.

율정에서의 마지막 만남 이후 유배시절 때도 두 형제는 서로 편지를 보내면서 형제간의 애뜻한 정을 표현하였다. 정약용 본인은 '나는 강진 땅에서 그나마 편안하게[3] 살고 있지만 형님은 그 험한 섬 생활을 어떻게 하실까'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저술할 무렵 정약용에게 편지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약용은 그림보다 글로 쓰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해주었고 정약전은 바다에서 생활하는 와중에 정약용에게 조석이 발생하는 까닭은 에 있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많은 저술에 대해 일일이 답을 해주었는데, 정약용은 형의 조언을 따르면 의심났던 글과 서로 맞지 않던 수가 모두 신기하게 들어맞아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그 외에도 정약용이 정약전의 건강을 염려하여 박제가에게 들었던 개고기 조리법 편지[4]와 재료인 깨를 보내기도 하는 등 그 우애가 같이 있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두 형제는 단순히 형제지간을 넘어 학문적, 정치적 지기나 다름없었는데 이는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정약전을 떠나보낸 뒤, 애통해하며 쓴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외로운 천지 사이에 우리 손암(정약전) 선생만이 나의 지기였는데, 이제는 잃어버렸으니, 앞으로는 비록 터득하는 바가 있더라도 어느 곳에 입을 열어 함께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차라리 진작에 죽는 것만 못하다.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프지 않으랴.

3.2. 문순득

홍어 상인으로 유구(오키나와)와 필리핀까지 표류했다가 간신히 돌아온 문순득의 이야기를 처음 글로 쓴 인물이 정약전이다. 조선으로 돌아온 문순득은 흑산도에 들렀다가 정약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정약전은 그의 이야기를 날짜별로 정리하여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표해시말' 집필을 계기로 문순득은 정약전과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을 가족처럼 모셨고,[5]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사망했을때는 극진하게 장례도 치러주었다. 정약용도 형 정약전을 통해 문순득의 친절을 알고 있었기에 문순득이 아들을 낳았을때 아들 이름도 지어주고, 형 정약전이 사망후 문순득이 장례를 잘 치루어 준것에 대해 감사의 편지도 보냈다.

참고로 '표해시말'의 말미엔 112개의 한국어 단어를 한자로 적은 뒤 류쿠어(81개)와 필리핀어(54개)로 싣고 있어서 언어학적으로 가치가 높다. 이때문에 일본에서는 이미 100여년 전에 이 책이 완역되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아직도 완역판이 없다.

4. 주요 저서

대표적인 책으로는 흑산도로 유배갔을 때 집필했던 자산어보가 있으며, 그 외에도 자산역간, 논어난, 동역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였다.


  1. [1]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장남 정철상 가롤로와 함께 시복됨.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중 하나. 아내 유소사 체칠리아, 차남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한국 103위 순교성인에 포함되어 있다.
  2. [2] 이 토론이 이어질 당시 정약전의 아내가 정약용에게 편지를 써서 '도련님 나 좀 살려주시오. 청상과부인 며느리에게는 아들도 없는데 예법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편지에 나온 표현 그대로이다)라며 양자를 들이게 해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3. [3] 사실 정약용의 유배 생활도 결코 편안하진 않았으므로 이는 정약용의 형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기 위해 표현한 것이 맞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도 정약용의 유배 생활이 정약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건이 좋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쨋든 정약용이 있던 강진은 육지라서 정약전이 있던 흑산도에 비해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도 넉넉한 곳이었고, 정약용 형제의 외가인 해남 윤씨 가문이 강진과 가까워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4. [4] 다만 정약용의 책임은 아니지만, 이 편지는 정약전에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수준으로 비현실적이었다(...). 당시 정약전의 섬 생활은 개고기조차 먹기 힘들 정도로 열악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5. [5] 정약전이 19살 연상으로, 거의 아버지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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