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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의 주요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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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
Kurt Cobain

본명

커트 도날드 코베인(Kurt Donald Cobain)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67년 2월 20일, 워싱턴 주 애버딘

사망

1994년 4월 5일 (향년 27세), 워싱턴 주 시애틀

소속

너바나

포지션

보컬, 기타

신체

171~2cm 추정[1]

활동

1982년 ~ 1994년

배우자

코트니 러브(1992년 ~ 1994년)

자녀

프란시스 코베인(1992년 출생)

서명

[image]

1. 개요
2. 상세
3. 생애
4. 기념지(Memorial)
5. 어록
6. 기타

1. 개요

[image]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번에 불타는 것이 낫다.[2]

너바나의 프론트맨.

2. 상세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열풍을 주도한 인물로, 앨리스 인 체인스, 펄 잼, 사운드가든 등과 함께 얼터너티브 록의 하위 장르라고 볼 수 있는 그런지 록의 시대를 열었다.

1990년대 대중음악을 상징하는 락스타[3] 대중 음악계 통틀어서 커트 코베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아이콘도 드물다. 롤링 스톤지 등 권위 있는 평론가들이 꼽는 세기의 명곡에서 상위권에 항상 과거 1950년대 ~1970년대 명곡들이 주류를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는 80년대 이후 곡들이 20위 권안에 전멸할 때 조차 항상 10위 권 안에 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Nevermind' 앨범 역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을 뽑는 각종 명반 리스트에서 매번 10위권 내지 20위권 안에 든다.

많은 음악 칼럼니스트들, Charles R. Cross, 가디언지, 미디어 출처, 출처2 등 많은 언론들은 커트 코베인을 마지막 록 아이콘이라고 말한다. 너바나 이후로 미국이나 전 세계 음악시장에서 록 장르의 뮤지션이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된 경우는 없다. 잭 화이트데이브 그롤, 피트 도허티 등도 대단한 록 아이콘이지만 한 세대를 풍미했거나 시대를 바꾼 록 아이콘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물론 톰 요크, 트렌트 레즈너 등의 업적이 그와 필적할 만큼 위대하지만 대중적 파급력이나 정통적인 록 서사에 있어선 밀리는 게 사실이다.

아내는 록 가수이자 배우인 코트니 러브로 커트 코베인과 결혼하기 전부터 막장 중의 막장이었는데 그가 죽은 지금도 마약과 각종 사고로 뉴스에 오른다. 코트니 러브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펑크 록 그룹 의 리더였고 가슴을 드러낸 채 라이브를 하기도 하는 등 성욕을 도발하는 이미지의 악동이다. 딸은 프란시스 코베인으로, 시각 예술가 겸 모델이다.[4]

3. 생애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스스로도 '중산층인 척 하는 화이트 트래시'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코베인의 전기를 집필한 작가는 전기의 후기에서 그의 워싱턴 주 애버딘 생가를 취재한 뒤 '비교적 가난하다고 알려진 엘비스 프레슬리의 집도 커트 코베인의 집에 비하니 대궐같다'는 표현을 했을 정도였다.[5] 커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 웬디는 19살, 아버지는 21살에 불과했고 부모님은 커트가 9살 되던 해에 잦은 마찰과 다툼으로 이혼하게 된다. 부모님의 이혼 후 코베인은 아버지를 증오하였고 이로 인해 평생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그의 우울증은 선천적인 영향과 후천적인 영향 둘 다에 기인한다고 보는 게 맞다.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적인 건강 문제는 그의 양가에 두루 존재하였으며 그의 친척들 중 몇 명은 자살을 기도했거나 혹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살하였다. 그의 외증조부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자해를 하다가 병원에서 죽었으며 다른 두 명의 삼촌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또한 그와 함께 밴드를 꾸려온 멤버들과 올림피아 그리고 시애틀의 록 씬 대부분의 펑크 로커들은 커트처럼 가난했고 이혼으로 얼룩진 인생을 헤쳐나왔다. 크리스 노보셀릭 역시도 부모의 이혼으로 얼룩진 과거를 가지고 있으며 데이브 그롤은 노숙자 출신이었다. 불우한 가정환경은 사실 그 바닥에서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인터뷰 중 기자가 커트 코베인에게 '스스로의 인생이 슬프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커트는 "자신은 그저 미국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산물일 뿐이다."라고 대답했던 적도 있다.

그의 사진집 겸 기록물인 'Cobain unseen'에서는 어렸을 때 동네친구의 형이 산속에서 목을 매 자살한 시체를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들이 현장에 올 때까지 몇 십분 동안이나 그 기괴한 현장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그의 성격, 불우한 가정환경, 이러한 충격적 장면을 본 기억의 잔재 등이 그의 곡이나 특히 가사에 많이 투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커트 코베인에게 자살과 우울증은 그리 먼 대상이 아니였던 것이다. 생전 그는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였는지 혹은 특별히 의도했는지 몰라도 인터뷰에서 본인의 성장 이야기를 말할 때 사실과 허구를 섞어서 모호하게 표현하곤 했으며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 중에는 사실이 아닌 것들도 일부 있다고 한다.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서 가출하기도 했으며 가출한 동안에는 친척과 친구 집을 돌아다니며 살기도 하고 노숙을 하기도 했다.[6] 이러한 환경 속에서 청소년 시절부터 그는 마리화나, , 담배 등에 빠져서 심각한 중독 수준에 이르렀고,[7] 동시에 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가 차차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처음 배운 악기는 드럼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1987년, 커트 코베인은 자신을 기타리스트 겸 보컬로해서 베이시스트 크리스 노보셀릭과 함께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에서 너바나를 결성했고 1989년 데뷔 앨범 Bleach를 발매한다. 인디 시절, 커트 코베인은 동료 뮤지션들 사이에서 최소 하루 9시간 이상은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는 정열적인 음악인으로 유명했다. 또한 당시 커트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공연 중에는 금주, 금연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금연을 요구했다고 한다.

Bleach는 예상과는 다르게 차트상에도 오르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너바나는 많은 라이브 공연들과 미국 투어에 힘입어 언더 씬에서 확고한 팬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이미 시애틀을 넘어선 언더그라운드 록의 기대주가 되었고, 그 잠재력을 밴드 멤버나 외부의 많은 레이블들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90년에는 첫 앨범 Bleach의 드러머였던 채드 채닝을 해고하고 데이브 그롤을 드러머로 영입했다.

한편, Sub Pop으로부터 실력에 비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낀 커트와 크리스는 이때부터 미 전역 및 전세계에 음반 배급망을 갖춘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기를 원했고, 많은 유명한 메이저 레코드 레이블들이 너바나와 계약하기 위한 물밑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커트 코베인이 존경하고 교류가 많았던 소닉 유스의 서스턴 무어의 권유로 당시 소닉 유스도 속해 있었던 게펜 레코드의 산하 레코드인 DGC(David Geffen Company)와 1991년 초에 계약을 맺고 소닉 유스의 멤버 킴 고든의 추천을 받아 LA에 있는 사운드 시티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서 부치 빅과 메이저 데뷔 앨범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Nirvana의 정체성을 어디까지나 펑크 록 밴드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커트 코베인은 밴드의 첫 메이저 앨범인 Nevermind 레코딩 내내 음반이 너무 상업적으로 프로듀싱 되고 있다며 불만을 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에 지쳐 사회적 성공을 원했던 커트는 앨범이 발매되자 매니저 앞에서 왜 MTV에 앨범의 첫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의 뮤직비디오가 자주 나오지 않냐고 불평했을 정도로 밴드의 유명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조지프 히스의 '혁명을 위하여'는 이러한 코베인의 자기모순에 대해 잘 다루고 있다.)

Smells Like Teen Spirit의 히트 후 대중들과 평론가들은 Nevermind에 대해서 마치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창시한 앨범이라는 식으로 설레발을 떨기 시작했고 커트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운드로 밴드가 성공한 것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밴드가 <Smells...>만이 히트한 원 히트 넘버 밴드로만 기억될 것이란 생각에 우울해 하며 점점 음악에 흥미를 잃어갔다.

게다가 언론에서는 동성애 인권 옹호주의자이지만 이성애자인 커트를 그의 중학교 시절 친한 친구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양성애자로 몰아가는가 하면,[8] 커트가 낙태를 찬성한다는 발언을 하자 부부가 심각한 마약 중독자라 기형아가 태어날 확률이 굉장히 높은데도 낙태를 하지 않고 프렌시스 빈 코베인을 낳았다는 이유 등으로 까댔다. 커트 코베인의 지인들도 커트가 밴드의 성공을 즐기는 모습을 보이자 "무명 시절에는 엘비스 프레슬리는 예술적인 재능이 없는 장사꾼이다"라면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까던 사람이 성공하니 엘비스처럼 행동한다며 그를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불우한 주변 환경은 그로 하여금 약물에 대한 탐닉을 일으켰다. 그러나 커트 코베인은 록씬에서 유명한 헤로인 중독자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약중독자라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굉장히 꺼렸고 그를 약물중독자라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몹시 싫어하였다. 때문에 인터뷰에서 매번 자신이 마약 중독자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약문제는 그를 죽음까지 몰아갔던 적이 여러번 있었다. 그의 자살은 헤로인 중독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커트는 죽기 직전 아내인 코트니가 자신과 결혼한 후에도 전남친인 빌리 코건과 밀회를 즐기는 등 여러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MTV UNPLUGGED 라이브에서 부른 마지막곡,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이 자신이 빌리 코건의 약혼녀였던 코트니를 가로채서 결혼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과 코트니가 다른 남자들과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의 분노 등이 담긴 코베인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빌리 코건은 본래 코트니 러브와 약혼했으나 코건이 스매싱 펌킨스 투어를 도는 사이 러브가 코베인과 바람을 피웠고 코베인의 아이를 갖게 되자 코건과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뒤 코베인과 결혼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코건은 우울증에 걸리고 스매싱 펌킨스 활동을 중지했으며 심지어는 자살 시도까지 했다고 한다. 코건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코베인과 결혼하더니 다시 코베인을 배신하고 코건과 바람을 피운 것이다.)

이 외에도 그는 선천적이라 할 수 있는 조울증과 더불어 복통척추측만증을 비롯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렸다. 죽기 직전의 인터뷰에서 커트가 위장 수술을 받았다는 언급이 있었는데 수술을 받은 뒤, 커트는 주위 사람들이 그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만족해했다고 한다. 코트니가 위장병으로 괴로워하는 커트에게 진통제로 헤로인을 사용해보라고 권유했다는 것은 코트니 타살설의 증거 중 하나로 거론된다.

새로 나온 음반 In Utero가 생각보다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밴드 해체의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1994년 4월 5일, 커트 코베인은 약물중독 요양소에서 탈출한 후, 헤로인을 치사량으로 맞은 뒤 Auto-5 산탄총으로 머리를 쏴서 자살하는 충격적 최후를 맞았다.[9] 그가 자살한 방에는 Automatic for the People라는 앨범이 틀어져 있었다고 한다. 인기와 명예의 정점에서 27살의 젊은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은 미국 락씬을 넘어 전 세계 음악계에 엄청난 충격과 비통함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그의 죽음을 베르테르 효과를 우려해서 조심스럽게 방송했으나 몇명의 청소년들이 자살했고, 프랑스에서도 자살한 팬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락카페에서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팬들이 울면서 너바나의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그의 자살은 음모론자들이 물어뜯기 좋아하는 사건이지만 자살로 판명되었다.(음모론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게 '코트니 러브가 죽였다'랑 '살해설'이라고 한다.) 자살 직전의 미공개 인터뷰에선 너바나를 해체하고 너바나와 정반대인 포크 장르로 솔로 앨범을 내거나 아내 코트니의 밴드 홀에 가입할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 이후 반응이 다양한데, 록스타들은 대부분 슬퍼하는 분위기였고, 유서에 자신의 곡 Hey Hey, My My (Into the Black)의 구절이 인용된 닐 영과 데이브 그롤이 몸담고 있는 푸 파이터즈는 각각 Sleeps With Angels곡과 Friend of a Friend라는 추모하는 곡을 쓰기도 하였다. 평소 친분이 있었던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코베인 사망 이듬해 발표된 6번째 앨범 One Hot Minute 9번째 트랙 Tearjerker란 곡으로 커트를 추모했다.[10] 힙합씬에서는 노래에 그의 죽음을 소재로 한 문장을 집어넣기도 했다.(에미넴의 Cum On Everybody, 퍼블릭 에너미의 Are You Gonna Go Our Way.) 라이브 퍼포먼스와 정규 2집에서 적극적으로 락을 차용한 MGK의 경우 "코베인이 돌아왔다(Cobain is back)"라는 문구로 자신을 대변하기도 했다.

[image]

커트 코베인의 자살 당시 신문기사의 사진, 경찰의 경비에 의해 기자가 근처 나무에서 올라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하루를 담은 영화 "라스트 데이즈"(거스 밴 샌트 감독)가 있지만 불친절한 거스 밴 샌트 영화에 속하니 유념하고 볼 것. 무엇보다도 영화 속에서 그는 커트 코베인이라 불리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사실의 충실한 재현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에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에 가깝다.

2015년 1월 24일, 그의 생전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제목은 Kurt Cobain: Montage of Heck이며 감독은 브렛 모르겐이다. 코트니 러브가 최초의 아이디어 제공자라고 하며, 그의 딸인 프란시스는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 커트 코베인을 소재로한 영상물 중에서는 최초로 유족이 제작에 참여한 사례라고 한다. 특이하게도 몇몇 장면은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했다고 한다. 5월 4일에는 HBO를 통해서 TV로도 방영되었다.

4. 기념지(Memorial)

커트 코베인을 기리던 자원자들이 관리하던 기념공원(Memorial Park)이 그가 태어난 도시 Aberdeen시에 의해 2015년 정식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첫번째 공식 기념공원이 탄생했다. 이 기념지의 이름은 Kurt Cobain Memorial Park 혹은 Kurt Cobain Landing이라 불린다. 이 공원은 작다. 멈추지 않고 걷는다면 가로지르는데 1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공원 안에는 그의 펜더 재규어 기타상과 그가 이 공원의 위를 가로지르는 Young Street Bridge에서 가사를 떠올렸다고 전해지는 'Something In the Way' 가사를 적은 팻말, 그리고 그의 사진과 그의 생전 어록(혹은 말했다고 믿어지는 어록)을 함께적은 돌판이 있다. '커트 코베인의 에어기타'라는 기타 스탠드같이 생긴 조형물도 있으나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참고로 그곳의 돌판은 비석이 아니며 커트 코베인은 땅에 묻히지 않고 화장을 했다. 돌판에 적힌 어록들 중 "...they(마약을 말함) will fuck you up"의 Fuck 부분은 파여져 있는데 누가 훼손한것이 아니라 Aberdeen시의 시장이 그 단어를 기입하는걸 원치 않아서 그렇다. 공원은 Young Street Bridge가 위로 가로지르고 있어 그 브릿지의 밑을 볼수 있는데 그를 기리는 팬들의 그라피티를 구경할수 있다.

언급해두었듯이 말그대로 작은 공원이므로 실망을 할 수도 있다. 너무 초라하고 잘 관리된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실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커트의 수난많던 어린 시절 집에서 나온 그가 노숙을 하며 밤을 지새기도 했던 장소에 직접 앉아볼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는 있다고 할수있을것 같다. 사실, 이 Bridge 밑에서 커트가 노숙을 했는가는 의문이 남긴한다. 커트의 일생에 대한 책인 Charles Ross의 책 Heavier than Heaven에서는 커트가 가출을 했을시 함께했던 친구를 인터뷰했는데 그가 말하길 사실 다리밑에서 노숙을 한건 사실이 아니고 24시 열려있는 병원의 대기실같은 곳에서 밤을 지새웠다라고 한다.

이 기념공원은 커트 코베인을 기리는 첫번째 공식 기념물은 아니다. 그를 기리는 첫 공식 기념물은 이 공원에 들어가기 위해 필시 통과해야할 Aberdeen시의 입구에 세워진 'Welcome to Aberdeen'이란 환영 도로표지판 밑의 'Come As You Are'라 적힌 표지판이다. 이것은 2005년에 만들어졌으며 만약 원한다면 차를 멈추고 도로표지판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지만 필시 운전 중일 것이므로 안전하게 정차하고 뒤차를 위험하게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커트의 기념공원에 대해 한가지 언급하자면 이 기념공원은 민가의 바로 앞에 있다. 문자 그대로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집주인은 매일 찾아드는 커트의 팬들을 봐야한다. 이 작은 공원은 전용 주차장 따윈 없으며 고로 팬들은 그의 집앞에 주차를 한다. 꽤나 팬들에게 시달린 모양인지 집 앞에 페인트로 팻말을 만들어 못에 박아놓았는데 그 내용은 자신의 집은 커트의 기념품 상점이 아니고, 이 집은 커트가 살았던 집이 아니며, 자신은 커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고(그러나 옆집의 이웃은 알았으며), 자신은 많은 구경객에 힘들어 하고 있으며,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당신들이 직접 911을 불러야하고, 다리밑의 주사기등의 뾰족한 물건에 조심하고, 자신들의 물건을 가져가지 말것을 부탁하고 있다. 이 모든 말들은 영어의 대문자로 적혀있는데 영문에서 대문자로 적는것은 소리를 지르는 모양새를 표현하는 경우가 있단걸 생각해보면 방문객으로서 그들을 존중해야할 이유를 알 수 있다.(당신이 커트의 팬이고 이 조그만 공원을 방문하고자 한다면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들의 삶을 방해하는 행위는 하지 절대 하면 안 된다.)

이 공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커트가 정말로 어린시절을 보낸 집이 보존되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볼수도 없고 심지어 공식 기념물도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칠 순 없을것이다. 얼마나 가깝냐면 차로 1분 걸어서 3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집의 넘버는 1210이며 노란색의 조그맣고 낡은 집이다. 이 집에는 더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지만(확실하지 않다.) 이 집의 이웃집에는 분명히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두집 정도 앞에사는 주민은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돌판에 적혀있는 가장 첫 문장 : I'd rather be hated for who I am than be loved for who I am not(내 본모습으로 미움받을 지언정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고 싶지는 않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말은 커트 코베인이 최초로 만든 말은 아니다. 이 말은 프랑스의 소설가 André Gide(앙드레 지드)의 Autumn Leaves에 적혀있는 같은 의미의 말을 약간 다르게 말한 것이다. 하지만 커트 코베인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돌아봤을때, 그의 죽음과 자기모순과 그로 인해 괴로워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아닌 그가 이 말을 했다는 것에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5. 어록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번에 불타는 것이 낫다.

만약 로큰롤이 불법이라면, 날 감방에 쳐 넣어라.

사람들은 내가 남들과 다르고 튄다는 이유로 비웃는다. 나는 그들 모두가 개성없이 똑같은 놈들이라는 이유로 비웃는다.

만약 죽는다면 완전한 행복을 찾고 영혼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살게 되겠지.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죽음 이후의 완전한 평화와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이 내가 항상 꿈꾸던 것이니까.

펑크는 음악적인 자유다. 내가 원하는 걸 말하고, 행하고, 연주하는 것이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너바나(nirvana)는 고통, 괴로움, 외부 세계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펑크록의 뜻과 아주 가깝다.

만약 나의 눈이 나의 영혼을 보여줄 수 있다면 모두들 내가 웃는 걸 볼 때 눈물을 흘리겠지.

비극에 감사한다. 나의 예술에 필요한 것이다.

pracitical makes perfect, but nobody's perfect, so why pracrice?

연습해야 완벽해진다. 하지만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 고로 왜 연습하는가?

I Hate Myself and Want to Die

나는 내 자신이 싫고 죽고 싶다.

Though the sun is gone but I have a light

비록 태양이 사라져도 나는 한 줄기 빛을 얻으리라.

6. 기타

[image]

또한 코베인은 데이브 그롤이 곡 작업을 하는 것을 여러 차례 엿들었고[15] 이를 매우 흡족하게 여겨 In Utero 앨범부터는 그롤의 곡들을 적극적으로 수록하고자 하였지만 그롤이 스스로 자신의 곡들은 '너바나스럽지 않다'고 여기며 합주를 통한 공동작곡의 형식을 지향하거나 커트의 곡 작업을 응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커트는 1994년 자살하기 직전 인터뷰에서 "나는 혼자 곡을 만드는 것에 지쳤고 밴드는 해체 직전의 상황이다. 멤버들과 합주를 해서 곡을 만들려고 해도 소음만 나오고 음악은 안 나온다."라는 말을 했다.

한 시대를 대표했던 뮤지션이라는 상징성과 비극적인 인생과 자살 등의 이유로 수많은 곡들의 노랫말에 등장한다.


  1. [1] 178cm인 코트니 러브보다 작다. 척추측만증을 앓았기 때문에 그런 듯.
  2. [2] 그의 유서에 써 있는 문장으로 유명하지만, 본래는 닐 영의 My My, Hey Hey라는 곡의 가사 구절 중 하나이다.
  3. [3] 링크
  4. [4] 딸이 엄마의 코와 아빠의 눈을 닮았는데 그다지 미인은 아닌 코트니 러브를 더 많이 닮았다. 다만 록 스피릿은 둘 다 닮았다는 평이다. 참고로 딸 이름은 코베인이 죽어라 좋아했던 스코틀랜드 인디 팝 밴드 더 바셀린즈(한국의 바세린하고는 상관 없다.)의 여성 보컬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자신을 저버리고 자살한 아버지 커트를 당연히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너바나보다 오아시스, 머큐리 레브, 브라이언 존스타운의 음악을 더 좋아한다고 밝혔다.
  5. [5] 후에 너바나의 다큐멘터리 영화 '몽타쥬 오브 헥'의 어머니 웬디 인터뷰에 따르면 결혼 당시 어렸던만큼 경제적인 어려움을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았고, 결혼 후에도 가능한 한 빨리 아이를 가지기를 원했다고 한다.
  6. [6] "Something In The way"의 노랫말은 내가 만약 가출했을 때 다리 밑에서 살았다면 이렇게 살았을 거라고 상상하며 썼다고 한다.
  7. [7] 다만, 평전에 따르면 커트 코베인은 그리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게 아니었기 때문에 너바나가 본격적으로 성공하기 전까지는 헤로인이나 코카인을 그리 쉽게 접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8. [8] 다만 코트니 러브를 만나기 전에는 성적 지향에 혼란을 느낀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9. [9] 평전에 따르면, 커트 코베인은 버드 드와이어라는 정치인이 자살하는 비디오를 구해서 자주 돌려봤다고 한다.
  10. [10] 또한 Californication에서 코베인을 언급하는 가사도 있다.
  11. [11] 정말로 페미나치라고 써놨다. 비키니 킬이 딱히 너바나를 이용하려는 건 아니었다. 왜나면 너바나의 이름을 팔면 잘 나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올림피아의 로컬 밴드로 남았으니...
  12. [12] 생전에 쓰던 이펙터는 앰프 드라이브는 아예 사용하지 않고, 고작 보스 DS-1 디스토션과 Small Clone 코러스 이펙터 페달이 전부였다.
  13. [13] 코베인 평전에 따르면 Nevermind 발매 전에 라이브로 공연했을 당시에는 관객들의 호응이 높아서 사실은 그도 이 노래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히트곡으로 떠오르고 자신이 화제의 중심이 되어 언론들의 먹잇감이 되자 이러한 원인이 <Smells Like Teen Spirit>의 지나친 히트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점차 이 곡을 부르기 싫어했다. 심지어 어떤 공연에서는 커트가 <Smells Like Teen Spirit>를 부르지 않으면 공연을 취소해 버린다는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공연에서 Teen Spirit만 듣고 공연장을 나가는 사람들도 많아서 스트레스가 굉장히 심했다고. 다만 공연장에서 가장 반응이 좋은 곡이었기 때문에 말년에도 팬서비스 차원에서 종종 부르기는 했다고 한다. 물론 그럴수록 자기모순이 심해졌겠지만.
  14. [14] 이 퍼포먼스는 영국 언론에서 "가장 반항적인 락 퍼포먼스"에서 10위권에 들어가기도 했다.
  15. [15] 데이브 그롤은 이미 너바나 시절부터 수 많은 자작곡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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