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정치인)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영등포구 을)

제13·14대
나웅배

제15·16대
김민석
[1]

제16~18대
권영세

제19·20대
신경민

제21대
김민석

현직

역임한 직위

{{{#!folding [ 펼치기 · 접기 ]

<color=#373a3c> 대표

초대
강신성

제2대
김민석
·박준영[2]

합당
(더불어민주당)


}}} ||

<color=#373a3c> 제2대 대표

대한민국 제15 · 16 · 21대 국회의원
김민석
金民錫 | Kim Minseok

<colbgcolor=#004ea2> 출생

1964년 5월 29일 (55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본관

경주 김씨[3]

학력

숭실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회학 / 학사)
하버드 대학교 (행정학 / 석사)
칭화대학 (법학 / 석사)
럿거스 대학교 (법학 / J.D )

가족

김민웅, 김민화[4]
슬하 1남 1녀[5]

배우자

이태린[6]

종교

성결교[7]

병역

면제(수형)[8]

소속 정당

지역구

서울 영등포구 을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5, 16, 21[9]

현직

제21대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포용국가비전위원장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 부위원장
미국 변호사(뉴저지주)

약력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제15, 16, 21대 국회의원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특별보좌역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새천년민주당 총재 비서실장
민주당 최고위원
통합민주당·민주당 최고위원
아이공유프로노보코리아 대표·상임이사
한양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초빙교수
단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민주당 대표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특보단장
제19대 문재인 대통령후보 종합상황본부장
민주연구원

외부 링크

(공식사이트)

1. 개요
2. 생애
2.1. 학생운동 시절
2.2. DJ계로 정계입문
2.3. 정치적 역풍과 첫 실패
2.4. 김민석 그리고 노무현
2.4.1. 2002년 대선 과정에 대한 스스로의 항변
2.5. 정치는 계속
2.6. 복귀
3. 소속 정당
4. 여담
5. 선거이력
6. 둘러보기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제15대, 16대, 21대 국회의원. 극적인 정치적 부침과 오랜 야인생활을 거친 정치인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자 전학련 의장으로서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을 주도하여 민주화 운동의 불을 당기고 87년 6월 항쟁을 이끌어냈다. 미문화원 점거사건으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이 한국 사회에 공론화되었고 국제적으로 이슈화되었으며 확산되었다. 이 일로 옥고를 치른 청년 김민석은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별이었으며 젊고 참신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1990년대에는 386세대의 명실상부, 확고부동한 원톱이라 불렸고, 정치권과 언론에서 민주당의 차기 대선 주자 재목으로 촉망 받는 정치인이었다. 386 운동권 출신 중 중앙 정치계에서도 가장 중앙에 있던 인물. 미남이고 언변이 뛰어나고 의정활동도 잘했다. 야권의 절대적 권위자인 김대중이 차세대주자 중 하나로 영입하여 20대에 국회의원 공천을 받고 30대 초반 두 번에 걸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김민석은 16대 총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당 총재비서실장으로서 영입ㆍ공천을 맡아 새천년민주당 창당작업의 실무를 사실상 주도했다. 이제는 모든 정당이 기본적으로 하는 여론조사 및 그를 통한 공천작업을 민주당계열에 도입한 선두주자였다.

2. 생애

2.1. 학생운동 시절

1964년 5월 29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3형제 중 막내로[10]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 유학 시절 결혼했다. 198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으며,[11] 4학년 때인 19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전국대학 총학생회 연합체인 '전학련' 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1980년대 초의 학생 운동을 주도하였다. 학생운동 시절에 미남으로 이름을 날렸고,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의 많은 대학에서 여대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하며, 여장도 꽤 어울렸던 모양인지(...) 경찰의 추적을 상당 기간 피해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및 삼민투[12]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5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3년간 복역하였고, 1988년 사면으로 출소했다.

학생운동 활동이야말로 정치인 김민석의 행보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수감 중 작은형 김민화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김수환 추기경의 노력으로 귀휴 조치되었고 이때 조문객으로 찾아온 김대중을 만났다. 당시 김민석의 어머니 김춘옥 여사는 교통사고 사망 보상금으로 "민화의 집"을 설립하여 구속자 가족과 수배학생들을 돌보았고, 김대중과 김영삼 부부가 민화의 집 개소식에 함께 참석할 정도로 "김민석 어머니"에 대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어머니 김춘옥 여사는 김민석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설립하였고, 재야단체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약칭 민가협) 초대 의장이 되었다.

2.2. DJ계로 정계입문

1990년 3당 합당 이후 이기택 등이 주도한 `꼬마 민주당'[13]에 입당함으로써 정치에 입문하였다. 이후 민주당과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이 합당한 `민주당'에 참여했다.

당시 민주당 당수이던 DJ에 의해 상품성을 높이 평가 받아, 약관 28살의 나이로 1992년 총선에 제1야당 공천을 받았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던 것. 김대중의 전폭적 지원에 민주자유당 나웅배 후보에게 불과 200여 표차로 안타깝게 낙선하면서 화려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14] 14대 총선에 실패한 뒤인 1993년 KBS 아나운서인 김자영과 결혼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 후 미국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5년 귀국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조순(趙 淳)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본부의 기획실장 및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 후 김대중의 정계 복귀로 인한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김대중을 선택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제14대와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최영한(최불암) 의원을[15] 꺾고 초선의원이 되었다. 이때의 슬로건 '김민석을 국회로 최불암은 무대로'는 상대방 최불암 의원도 감탄했을 정도였다.

"(국보급 탤런트와 국보급이 될 정치인을 둘 다 살려) 두 개의 국보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국보급 탤런트는 연기를 못 하게 하고, 국보급 정치인을 키우지 않아) 국보를 둘 다 놓치시겠습니까?".

1997년 한보그룹청문회 때는 돋보이는 논리와 질문으로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됐다. 김대중 대선광고 (김민석 의원 연설) 1999년에는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 대변인으로서 창당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같은해 외곽 지원조직인 `젊은 한국'을 결성, 차세대를 의식한 행보를 계속해왔다. 1999년 10월에는 영문 시사주간지 `아시아위크'에 의해 아시아의 새천년 젊은 지도자 2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하며 386세대의 대표주자 위상을 확보했다. 2000년에는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미래를 이끌어갈 세계 지도자 100인에 선정돼 주목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순풍에 돛단 듯한 행보였다.

2.3. 정치적 역풍과 첫 실패

386세대의 대표주자로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지만, 2000년 5·18 기념식 전날 벌어진 이름바 새천년 NHK 사건으로 도덕성에 흠집이 생겼다. 이 사건은 김민석을 포함한 386세대 정치인 전부에게 상당한 이미지 훼손을 가져왔지만, 사건을 폭로했던 임수경은 2000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실과 많이 다르며, 자신이 쓴 글에 변질, 각색, 과장, 악의가 포함되어 각색된 글이라고 밝혔다.

2000년 12월 `권노갑 2선 후퇴' 요구를 계기로 민주당이 쇄신 파문에 휩쓸렸을 때, 당권을 쥐고 있던 주류 동교동계편에 서면서 비개혁적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당시 정풍운동을 주도하던 // 등 소장 정풍파 의원들에게 "질서 있는 쇄신"을 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16]

그래도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언변 덕분에 새천년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대체로 인기가 좋아서 2001년 당내 대선 후보 여론조사 2위[17]까지 오르며 유력 대권 주자로 주목 받았다. 그 결과,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이상수를 경선에서 누르고 새천년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될 수 있었다. 대선 후보 여론조사 2위인데 왜 대선 대신 서울시장에 나섰냐면, 2002년 기준 만 38세라 대통령 후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18]

사실 이 선거는 원래 당시 민주당은 현직 시장이었던 고건을 경선도 없이 추대하는 상황이었는데, 고건이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한나라당 예비후보로 유력했던 홍사덕도 고건이 나오면 필패라고 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상대를 홍사덕이라고 생각하고, 민주당은 정동영이 앞선 상황에서 동시에 거론되던 인물이 김근태, 노무현 등이었고, 다크호스라는 인물이 김민석과 추미애였다. 주간한국 당시 기사 그런데 결과는 홍사덕을 밀어낸 이명박과, 민주당 후보가 된 김민석의 대결이 된 것.[19] 김민석은 당시로선 생소한 개념인 "생활정치"를 처음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선거 초반 여론 판세와 토론에서 보인 우위와는 다르게 김대중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20], 측근 비리 문제로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분위기는 박빙으로 흘렀고, 결국 2002년 월드컵의 영향으로 젊은 층의 투표까지 저조하면서 이명박 후보에게 10%가 넘는 큰 차이로 패배해버리고 말았다. 당시 함께 출마한 서울 지역 구청장들과 지방의원 후보자들은 더 큰 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그리고 당선된 분서울시장을 계기로 승승장구하며 대통령까지 올랐음에 반해, 김민석은 이때를 기점으로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장 선거에 나가기 위해 김민석은 국회의원을 사퇴했고, 지방선거 이후에 치뤄진 영등포 을 보궐선거에선 한나라당 권영세 후보가 당선되었다.[21]

2.4. 김민석 그리고 노무현

이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재기할 수 있다고 여겨졌지만, 서울시장 선거 패배 이후 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2002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10월 17일 갑자기 민주당을 탈당하고 정몽준 캠프로 이적하면서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김민석은 철새 정치인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겨났다. 심지어 이때의 행적으로 당시 김민새라는 별명까지 생겨났을 정도. 참고로 이 문서는 김민새로 들어올 수 있다.(...) 아무튼 이때까지만 해도 김민석 본인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여유있게 "새들도 저때문에 피해를 많이 봤다."라고 말하는 상황이였다.

참고로 당시 대선후보 지지율은 노무현후보가 17%, 정몽준, 이회창 후보(?)가 각각 30%를 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민석의 탈당은 의외의 후폭풍을 몰고 오는데, 지방선거 참패와 후단협의 흔들기, 월드컵 이후 정몽준의 급부상 등으로 계속 폭락하던 노무현 지지율이 반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관망하던 개혁성향 유권자들이 노무현에 대한 동정심리 등을 이유로 재결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면초가에 놓여있던 노무현 캠프는 다시금 활기를 찾았고, 이후 정몽준과 후보단일화하겠다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다. 지지율이 상승세로 반등했으니 여론조사로 붙어도 정몽준을 누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김민석은 유권자들에게 철새정치인의 낙인이 찍혔으나 최근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단일화를 위한 일념(정치공학적 접근)으로 정몽준 캠프에 갈 수밖에 없었다는 비하인드스토리가 소개되기도 했다. 영상

2.4.1. 2002년 대선 과정에 대한 스스로의 항변

2016년 10월 7일 방송분

김민석은 더불어민주당 복당으로 민주진영에 돌아온 뒤인 2016년 김어준의 파파 이스 115화에 출연해 당시 상황에 대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회창 후보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후보단일화가 필요했다. 노무현후보가 단일화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단일화를 만들어내고 민주당으로 복당하겠다고 성명을 내고 정몽준 캠프에 합류했고 실제 정후보를 설득해 여론조사 단일화를 성사시켰다.[22] 단일화를 통해 이회창 후보에 대해 승세를 굳혔으나 유세 마지막 날 정몽준의 지지철회 파동때문에 대선 후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김민석은 당시 노무현 후보 흔들기 핵심인 후단협과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의 타이밍 때문에 결과적으론 철새 이미지가 만들어져 버리고 말았다.[23]

파파이스에서 "왜 정몽준에게 갔느냐"는 질문에 "정몽준에게 가서 단일화를 시켜도 대선에 이기면 이후에 결과로 평가될거라 생각했고 워낙 대선승리가 절박했다"[24], "누가 봐도 단일화가 없으면 지는 상황이었다"[25][26]고 답변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김민석의 행동은 충격이었고, 단일화를 위한 합리적 충정이었을 수 있으나 본인은 아주 어렵게 되었다. "는 취지로 기록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도 했다.

그의 발언을 정리하자면, 서울시장 선거 이후 휴식기를 가지려다 여론조사를 보니 한나라당이 대선에 너무 유리했고, 한나라당이 대통령 되는 건 죽어도 싫으니 대선 판에 개입하기로 결심했고, 민주당이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를 안 하면 망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자신이 하는 거 외에 방법이 없으니 "어차피 내가 가서 욕을 먹더라도 단일화시켜[27] 대통령만 만들고 복당하면 더 이상 욕 안 먹겠지"라고 생각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선 하루 전날 정몽준의 지지철회 선언을 한 것 때문에 복당을 하지 못하고 완전히 휩쓸려 갔다는 것이다. "단일화 이후에는 왜 돌아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당시 단일화 이후에는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고 대선이 다 끝나고 돌아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선이 끝나면 어차피 정치적 상처가 생겼으니 잠시 정치를 떠나 유학할 의사를 주변에 피력했다고 한다. 단일화 이후 정몽준 진영에서 후보단일화를 위한 트로이의 목마가 아니냐며 심한 비난과 수모에 가까운 조사를 받기도 했다.

2.5. 정치는 계속

결국 "가출했던 아들이 집에 돌아온 심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새천년민주당으로 복귀했지만, 이후 출마하는 선거마다 고배를 마셨다. 당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등포구 갑으로 지역구를 옮겨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고진화 후보에게 패배했고 심지어 열린우리당 김명섭 후보에게도 밀리면서 3위로 낙선하는 수모를 당했다. 여담으로 그가 복당한 시점은 03년 11월 4일로 열린우리당 창당인 11일의 1주일 전이었고, 이미 분당의 가능성이 점쳐지던 시점이었다.

2008년 총선엔 서울시장 선거 당시 선대위에서 영수증 발급을 잘못한 정치자금법 문제에 대한 책임을 후보가 지게 되어 컷오프를 당했지만 결국 낙천에 승복한 뒤 오리알 유세단을 이끌었고 그 후 전당대회에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에 2위로 당선되며 부활하는 듯 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불법 정치자금 수사가 발목을 잡았고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에 대한 저격수 역할을 맡았다가 홍대표 측의 반격과 표적수사로 김민석은 당사에서 한 달간 농성을 벌였지만 끝내 구속되고 말았다. 2009년 3월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고, 2심에서 벌금형으로 감경되었으나 2010년 8월 형이 확정되면서 2015년까지 피선거권을 상실하였다.#

대법원 심리가 진행 중이던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선언했지만, 경선에서 김정길대한체육회장에게 밀렸다.

당적이 자동소멸되었던 상태에서 (안철수, 김한길새정치민주연합 출범으로 민주당 당명이 사라지자) 민주당의 이름과 전통을 지킨다는 기치하에 2014년 원외 민주당[28] 창당을 주도하였고 이후 당대표로 취임했다. 이 민주당의 존재로 인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이 당명을 바꿀 때 '민주당'을 사용할 수 없다는 문제가 걸려 논란이 있었으며,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을 결정했을 때 원외 민주당에서 당연히 반발하여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한 적이 있다.

2.6. 복귀

2016년 10월 원외 민주당이 더불어민주당에 흡수통합되면서[29], 당대표 특보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문재인 대통령 후보 종합상황본부장,민주연구원장을 거쳐 지금은 포용국가비전위원회의 위원장과 일본경제침략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외신기자회견중 일본의 대표적 혐한인물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에게 일침을 날린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와 가짜뉴스의 최대 피해지역인 영등포(을) 예비후보로 나선 김민석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즉각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코로나와 가짜뉴스, 혐오를 청정, 협력, 포용으로 이겨내자”는 슬로건으로 신종 코로나 극복과 민생보호를 위한 영등포대림시민대책본부를 결성하여 다양한 대책과 대응을 제시하며 포용과 협력의 선례를 남겼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자신의 옛 지역구이자 정치적 고향 서울 영등포구 을에서 재기를 노리게 됐다. 이 지역구 재선 현역인 신경민 의원과 공천장을 놓고 진행된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2000년 16대 총선 이후 20년 만에 민주당 후보로 총선에 도전하게 됐다. 그는 경선 결과 발표 후 20년 만에 정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험한 세상 공부를 마치고 온 아들에게 창문을 열어주신 영등포 시민과 당원에 감사하다는 입장을 냈다.

선거 결과 개표 전 지상파 출구조사에는 미래통합당 박용찬 후보에 1.4%차이(김민석 46.9% vs 박용찬 48.3%)로 밀리는 것으로 나왔으나, 실제 개표에서는 50.3%의 득표율로 낙승[30]하면서 국회 복귀에 성공했다. 2002년 서울시장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한 뒤 정확히 18년 만의 원내 복귀이다.[31][32]

당선 이후 사람들을 조금 놀라게 했던 점이 국회의원 3선째에 서울시장선거 출마 경험까지 있는 올드비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이가 55세라는 점인데, 김민석이 얼마나 빠른 나이에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었는지 새삼스레 체감케 했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0 - 1991

정계 입문

1991 - 1995

합당[33]

1995

새정치국민회의 합류를 위한 탈당

1995 - 2000

창당

2000 - 2002

합당[34]

2002

국민통합21 합류를 위한 탈당

2002 - 2003

창당

2003

새천년민주당 복당을 위한 탈당

2003 - 2005

복당

2005 - 2007

당명 변경

2007

합당[35]

2007 - 2008

당명 변경

2008

합당[36]

2008 - 2010

당명 변경

2010 - 2014

당적 상실

2014 - 2016

창당

2016 -

합당[37]

4. 여담

5.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

민주당

48,151 (40.95%)

낙선 (2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

새정치국민회의

49,657 (48.87%)

당선 (1위)

초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

새천년민주당

50,438 (60.39%)

당선 (1위)

재선[40]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새천년민주당

1,496,754 (43.02%)

낙선 (2위)

[41]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갑)

새천년민주당

21,033 (20.88%)

낙선 (3위)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민주당

209,872 (0.88%)

낙선 (2번)

[42]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

더불어민주당

47,075 (50.26%)

당선 (1위)

3선[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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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서울특별시장 출마로 의원직 사퇴.
  2. [2] 박준영 공동대표 탈당
  3. [3] 여담이지만, 정치인 김민석과 동명이인인 아이돌 EXO의 김민석(시우민)은 경주 김씨가 아니라 김해 김씨다.
  4. [4] 1987년 교통사고로 사망
  5. [5] 전처 김자영 아나운서 슬하 자녀
  6. [6] 재혼.
  7. [7] 신길교회 집사
  8. [8] 징역 6년을 선고받으면 병적 제적으로 의한 면제로 신체등위가 없이 병역이 면제되나, 김민석은 5년 6개월을 받았기 때문에 병적에서는 제적되지 않고 제2국민역 판정을 받았다.
  9. [9] 21대 국회의 재선 이상 의원 중 제일 최근 당선에서 21대 당선까지의 기간이 가장 길다. 당장 21대 전반기 국회의장인 6선의 박병석이 16대부터 21대까지 연속 당선되었으므로 국회 경력으로는 김민석보다 후배다. 심지어 현역 정치인 중 보수정당의 거물들인 홍준표, 김무성과 국회 입성 동기다.
  10. [10] 큰 형은 잡지 ''의 기자를 지낸 김민웅 경희대학교 교수이다. 작은 형 김민화는 1987년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1. [11] 더불어민주당은수미 성남시장과 같은 과, 같은 학번의 동기이기도 하다.
  12. [12]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위원회. 약칭 삼민투이다.
  13. [13] 노무현, 이철 등도 있었고, 후일 유명해진 안희정, 이광재 등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유명한 야구선수 최동원도 입당하여 선거에 나갔을 정도였고, 미래통합당 조경태 의원 역시 이 곳 출신.
  14. [14] 보수 성향이 강했던 여의도동에서 표차가 크게 벌어진게 패인이었다지만, 애초에 상대 후보인 나웅배는 상공부 장관과 경제부총리 그리고 3선 의원을 역임한 여당의 중진 인사였다. 이런 거물을 상대로 28살짜리 정치 신인이 고작 200여 표차로 낙선했다는건 당선 못지 않은 영광인 셈.
  15. [15]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정주영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주영이 낙선하면서 사실상 국민당이 해체되자 민주자유당으로 이적했던 것. 이때는 비례대표 의원이 탈당해도 국회의원직 유지가 가능했다.
  16. [16] 김민석은 대학생 시절에는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권의 주류였고, 의 리더였고, 정계 입문 후에는 김대중의 총애와 동교동계의 무조건적인 지원을 받는 주류 중의 주류였다.
  17. [17] 1위 이인제, 3위 한화갑, 4위 노무현
  18. [18] 우리나라 헌법에서 대통령 출마의 자격은 만 40세 이상에게만 주어진다.
  19. [19] 김민석에 의하면 당시 여론조사 결과 이명박을 이기는 후보가 김민석밖에 없어서 자의반 타의반 나갔다고 한다.
  20. [20] 세아들의 소위 홍삼게이트...
  21. [21] 당시 민주당은 장기표를 영입해서 내보냈으나 17% 차이의 대패를 당했다. 그리고 장기표는 역시나 낙선하자마자 탈당. 참고로 이 두 후보는 18년 후 같은 당에서 선거를 치루게 된다(...).
  22. [22] 당내 대부분이 단일화의 필요성을 얘기했지만 실제로 이를 위해 움직인 사람이 본인밖에 없었다고 한다.
  23. [23] 여기엔 노무현이 더 크게 이길 수 있었는데 정몽준의 지지 철회로 2~3%가 빠졌다고 주장하는 의견,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통해 비로소 승리가 가능해졌고 정몽준 측의 지지 철회는 이미 표심이 결정된 후라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의견 등 다른 견해도 많다.
  24. [24] 정몽준에게 가기 전까지 김민석은 사적으로 정몽준과 만나본 적이 한두 번밖에 없어 전혀 친분이 없었고 그렇다고 딱히 정치적 존경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정몽준을 보고 선거대책위원회로 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로 정몽준 측에 가서도 정몽준과 사적인 대화를 많이 하거나 친해진 것도 아니라고 한다.
  25. [25] 한나라당 이회창이 대통령 되는 꼴을 죽어도 보기 싫었다고 한다. 이회창이 되면 남북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거나 단절된다는 정치적 공포가 있었다고.
  26. [26] 이외에도 서울시장 낙선 이후 북한에 유학생을 보내는 사업을 하고 대선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는데 대선판세가 급격히 안 좋아져 고심끝에 행동하게 되었다는 발언 등을 볼 때 북한에 유화적이고 남북관계에 관심이 많은 듯 하다.
  27. [27] 노무현, 정몽준 누가 되더라도 당시의 상황상 이회창이 되는 것보다는 남북관계에서 김대중노선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28. [28] 다만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 신기남 의원이 합류해서 잠시 원내정당이 되긴 했다.
  29. [29] 이를 통해 언론 및 방송에서 더불어민주당을 '민주당'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30. [30] JTBC 예측조사는 김민석의 경합우세를 예측했다.
  31. [31] 비교를 하자면 그가 낙선한 17대 총선부터 다시 당선된 21대 총선까지 연달아 당선된 사람들이 현재 무려 5선이다.(민주당에서는 김진표, 변재일, 조정식, 안민석 등이, 통합당에서는 주호영, 조경태 등이 있다.)
  32. [32]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려 정치적 재기에 성공한 의원들은 찾아보면 좀 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15대 총선에서 김문수에게 떨어지고 2008년 18대 총선에서 12년 만에 여의도 복귀에 성공했던 박지원 전 의원(단 박지원 의원의 경우는 중간에 국민의 정부 시기를 공보수석과 비서실장 등 청와대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고, 참여정부 시기에는 대북송금 특검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기에 원내복귀가 늦었다.)이나 10월 유신으로 8대 국회가 해산된 뒤, 1988년 13대 총선을 통해 17년 만에 원내복귀한 조윤형 의원, 1992년 14대 총선을 통해 21년만에 국회에 복귀한 김상현 전 의원, 21대 총선 원주시 갑에서 10년 만에 의회복귀에 성공한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를 예로 들 수 있다.
  33. [33]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
  34. [34]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
  35. [35]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
  36. [36]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성 합당
  37. [37] 더불어민주당에 흡수 합당
  38. [38]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던 그녀는 1987년 KBS 공채 14기 아나운서가 됐고 입사 직후부터 TV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각종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두각을 나타냈다.
  39. [39] 외무상 취임 당시 초기에는 친한파적인 노선을 취했지만, 이후 아버지 고노 요헤이와는 다르게 한국에 강경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그러나 김민석과의 오찬 이후 한국에 대한 발언이 다소 부드러워졌고, 한국 정부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는 식의 반응을 보여 두 사람의 관계가 한ㆍ일 양측을 중재할 수 있는 의사소통 채널로 급부상 하고 있다.
  40. [40] 2002. 5. 25 사퇴
    (서울시장 선거 출마)
  41. [41] 이명박 후보 당선
  42. [42] 더불어민주당과의 합당으로 더불어민주당으로 자동 복당
  43. [43] 16년만의 원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