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제

전한의 역대 황제

1대 태조 고제 유방

2대 혜제 유영

중국 한중 석문잔도풍경구(石門棧道風景區)에 있는 유방의 석상. 왼편으로 소하, 오른편으로 한신이다. 장자방도 있지만 신선술을 익혔기 때문에 안보이는 것일 뿐이다.

朕若逢高皇,當北面而事之,與韓彭競鞭而爭先耳。

"짐이 만약 고황(高皇)을 만났다면 응당 북면하여 그를 기쁘게 섬겼을 것이고, 공을 세우기 위해 한신(韓信), 팽월(彭越)과 채찍질을 경쟁하며 선두를 다투었을 것이오." - 석륵

걔네랑 같이 다니면 안되는데...

묘호

태조(太祖)

시호

고황제
(高皇帝)[1]

이름

유방(劉邦)[2]

계(季)

출생지

패현(沛縣)

영문표기

한고조(Emperor Gaozu of Han) 유방(Liu Bang)

생몰기간

음력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 (52세?)

재위기간

음력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 (7년)[3]

1. 개요
2. 출생과 외모
3. 생애
3.1. 패현의 허풍쟁이
3.2. 거병
3.3. 반(反) 진 전쟁
3.3.1. 풍읍의 배반
3.3.2. 항량의 부장으로
3.3.3. 함양으로의 진격
3.3.4. 홍문연(鴻門宴)
3.4.2. 삼진평정과 팽성대전
3.4.3. 형양 함락과 성고 함락
3.4.5. 해하의 결전
3.5. 제국의 황제
3.5.1. 나는 세 사람보다 못하지만, 세 사람을 부릴 줄은 안다
3.5.2. 내가 이제야 황제 귀한 줄 알겠다
3.5.3. 백등산 포위전과 토사구팽
3.5.4. 대풍가(大風歌)
3.5.5. 그 다음은 당신이 알 것 없소
4. 평가
4.1. 군사적 능력
4.2. 정치적 능력
4.3. 인간적인 면모
4.4. 총평
5. 기타
6. 대중문화 속의 한 고조 유방
6.1.1. 행적
6.1.2. 능력 및 인품표현
6.1.3. 기타

1. 개요

중국통일 왕조전한의 초대 황제[4]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제후나 귀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이 피지배층에서 벼락출세하여 지배층으로 떠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秦) 말기의 대혼란에서 세력을 일으켜, 초한대전에서 최대의 호적수이자 압도적인 항우(項羽)을 몰락시키고 승리를 거두어 중국 천하를 손아귀에 넣었다.

이후 각지의 반란을 평정하고 이성왕(異姓王)들을 숙청하여 대제국 한나라의 기틀을 닦은 인물. 특히 한(漢)족, 하나의 중국과 같은 오늘날까지 엄존하고 있는 중국의 국가적 문화 정체성을 만들어낸 낸 왕조의 창시자로서 중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5][6]

워낙 파격적인 행동이 많고 질기게 살아남고 버틴 타입이라 인물에 대한 호불호가 꽤 극단적으로 갈리는 탓에 이를 배경으로 하는 초한지 소설 등에서는 라이벌인 항우나 부하인 한신 등에 비해 인기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지만, 최후의 승자로서 가지는 역사적 입지와 비중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출생과 외모

유방(劉邦)

유방은 초나라 출신으로서 패현(沛縣) 풍읍(豊邑)[7] 중양리(中陽里)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태공(太公)이었고 어머니는 유온(劉媼)이었다. 그러나 태공이나 온은 남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호칭에 지나지 않았다고 사기집해나 사기색은 등의 주석서에서 일관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유태공과 유온을 현대어로 풀이하자면 그저 유씨댁 어르신, 유씨댁 안주인 정도의 의미로 유방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조차도 사서에 보이지 않는 셈이다.

사실 이는 부모뿐만 아니라 유방 본인도 마찬가지인데, 사기나 한서(漢書)에서는 아예 유방(劉邦)이라는 이름 자체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저 성이 유씨이고 자(字)가 계(季)라고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유방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것은 순열(荀悅)의 한기(漢紀)에서부터인데, 물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설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유방이 어렸을 당시에는 유계라는 호칭으로 통하다가, 즉위한 후 유방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유방의 형제를 살펴보면 이 이름이 형제간의 서열, 순서를 간편하게 나타내는 백중숙계(伯仲叔季)를 붙여서 지어진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방의 형들로 유백(劉伯)과 유중(劉仲)이 언급되는것을 보면 '유계' 라는 호칭이 어떻게 붙여졌는지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8] 이렇게 보면 유방은 본래 개별적인 이름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고, 그저 "유씨네 막내" 정도로 통용될 수 있는 유계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형 유중은 유희(劉喜)라는 휘가 알려져 있고, 동생 유교(劉交)는 아예 자인 유(游)로는 거의 기록되지 않아 모든 사람의 휘가 불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백중숙계가 대충 지은 이름 같아 보이지만 그게 정식 자나 이름인 예가 꽤 있어 그 유계라는 이름이 개별적인 이름일 가능성은 다분하다. 유이치로, 유지로, 유사부로 같은 걸로 치자 더욱이 유교가 유학자로, 특히 시경에 능한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집안 사람들 중에 이름이 아예 없는 인물이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기도 하고.

유방의 출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방의 어머니인 유온이 연못가 근처에서 쉬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神)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뇌성벽력이 치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했는데, 근처에 있던 태공이 그 모습을 보자 유온의 배 위쪽에 교룡(蛟龍)이 떠 있었고, 유온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 사람이 유방이었다.

물론 창업군주의 출생에 대해 온갖 전설이 따라 붙는건 고금을 막론하는 이야기지만, 간혹 어떤 사람들인 이 이야기에서 교룡의 존재가 강간범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별 근거는 없다. 그보다 유방은 외모에 대해서도 융준용안(隆準龍眼), 용안미수염(容顔美鬚髥)과 같은 식으로 용과 연결이 자주 되는 편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전설이라고 보는것이 좋을 듯 싶다.

유방의 외모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대로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넒어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 수염이 아주 그럴듯 해서 멋있었다고 한다. 또한 왼쪽 넒적다리에는 72개의 반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반점의 숫자야 '비범한 인물' 에 대한 묘사에서 자주 나오는 특징 중에 하나고, 용의 얼굴을 닮았다지만 사람 얼굴을 보고 연상시키는 동물이야 모두 다른 법이니 일단 알 수 있는 사실은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넒고 수염이 꽤 멋있었다는 정도다.애초에 용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그리고 좀 뒤의 이야기지만, 유방은 정장(亭長)의 벼슬을 하고 나서부터는 자기 밑의 부하를 설(薛)[9] 땅으로 보내 죽피관(竹皮冠)[10]을 만들어 오게 하여 외출 할때는 무조건 이를 쓰고 다녔는데, 허세를 위한 용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훗날 황제가 되고 나서도 이 죽피관은 계속 착용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체로 유방의 초상화에서는 넒은 이마, 콧날, 죽피관이 강조되는 편이다.

3. 생애

3.1. 패현의 허풍쟁이

젊은 날의 유방은 변변한 일도 하지 않고 지냈었다. 사기 고조본기에서는 유방에 대해 아예 대놓고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혔다 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통일 제국의 창업 군주에 대한 묘사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베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했다고 하는데, 본인이 가진건 없더라도 한 턱 낼때는 화끈하게 내는 남자들의 행동과 비슷한듯. 훗날 유방이 황제가 되고 나서 아버지인 태공에게 "저보고는 생업도 못 꾸리고 작은형처럼 노력도 안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보면 어떻습니까?"라고 농담하면서 부친의 장수를 기원한 일이 있었는데, 이를 보면 당시의 유방은 집에서도 천덕꾸러기 같은 처지였다. 실제로 황제가 된 이후 유방은 젊은날 식사중에 밥 좀 더달라고 했다가 큰형수가 국그릇을 긁으며 갈궜던 일을 기억해놨다 형수의 아들 유신(劉信)을 갱알후(羹詰侯)에 봉하기도 했다. 국 갱자에 긁는 소리 알자, 문자 그대로 조카를 국그릇을 긁는 제후로 봉하는 쪼잔한 복수를 한셈(....)[11]

그 당시 유방은 가진건 쥐뿔도 없었지만 패기는 실로 남달라서, 왕온(王媼)과 무부(武負)라는 사람들의 집에서 매일매일 외상술을 퍼마시고 그러다 잠이 오면 아무데서나 널부러져 잠을 잤다. 유방이 술 퍼마시고 잠을 자면 그 몸 위에 용의 기운이 서리고 술집에서 매상이 몇배가 더 나가서 술집에서는 외상 장부를 찢어 외상값을 없애버렸다고 하는데, 용의 기운이 서렸다는 기록은 유방이 술집에 가면 분위기를 주도하여 매상이 더 올랐다는 식으로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직업은 없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만나고는 했던듯 하다. 아직 진나라가 천하를 모두 집어삼키기 전에 떵떵거리며 살던 장이(張耳)를 만난적도 있을 정도. 그러다 어느날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咸陽)에서 요역을 하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의 위풍당당한 행차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오호라! 대장부라면 실로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12]

이렇게 일도 없는 백수였던 유방은 사수(泗水)의 정장(亭長)[13]이라는 조그만 자리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오해하는 부분이 소하(蕭何)가 자리를 추천하여 만들어주었다는 것인데, 유방이 이 자리를 얻게 된것은 소하와는 관련 없이 유방이 시험을 쳐서 획득한 자리다.[14] 직업을 얻었다고 해도 조그만 자리에 불과한 말단이었지만, 워낙 유방의 패기가 대단해서 관아의 모든 관리들을 아랫사람 처럼 같잖게 여겼다고 한다.

이때 유방은 따로 만나던 조(曹) 씨라는 여자가 있었다. 다만 둘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루거나 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조씨는 이 관계에서 훗날 제도혜왕(齊悼惠王)이 되는 유비(劉肥)를 낳았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끝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어느날 선보(單父)[15] 출신인 여공(呂公)이라는 인물이 패현으로 이주하는 일이 생겼다. 본래 살던 곳에서 원수가 있어 이를 피해서 도망친것인데, 이 여공이 패현의 현령과 안면이 있어 손님으로 와서 지내다가 아예 모든 가족을 이끌고 이주를 했던 참이었다. 현령이 돌봐주는 사람이니 패현의 여러 호걸들이나 관리들도 이 여공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만나서 축하를 하고 하례금을 바쳤는데, 이 사람들의 숫자가 꽤 돼서 소하가 나서서 사례금을 걷는 일을 맡게 되었다. 소하는 사례금의 액수가 천 전(錢) 이하인 사람들은 대청 아랫 자리에 앉게 했다.

헌데 이 자리에 땡전 한 푼 없던 유방이 나타났다. 유방은 돈도 없었지만 당당하게 하례금 일만전이라고 쓰고 들어왔다. 일만전이라는 숫자를 본 여공은 깜짝 놀라서 나와 유방을 직접 맞이했는데, 본래 관상을 즐겨 보던 여공이 한번 유방을 보자 꽤 그럴듯한 면모가 있었다. 여공은 유방을 극진히 대접해서 윗자리에 앉게 했는데, 소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이렇게 빈정거렸다고 한다.

"유계라는 작자는 본래 큰소리만 치지 일을 끝마치는것은 드뭅니다."

적당히 눈치나 보라는 이야기겠지만, 유방은 그런 이야기는 다 무시해버리고 계속 윗자리에 앉았다. 앉아있는것도 앉아있는 일인데,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사양하는 기색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술자리가 끝날 무렵이 되자, 여공은 슬쩍 유방을 자리에 남겨놓더니 자신의 딸인 훗날의 여후(呂后)를 주겠다고 권했다.[16] 이에 대해 여공의 부인이 "아니, 패현 현령이 딸을 주라고 할때도 안좋았는데 저런 거렁뱅이에게 딸을 주다니요?" 하고 노발대발했지만, 여공은 "아녀자가 무슨 일을 알아!" 하면서 무시하고 기어코 딸을 유방에게 주고 만다.

그렇게 여후와 결혼한 유방은 훗날의 혜제(惠帝) 유영(劉盈)과 노원공주(魯元公主) 등의 자식을 얻었다. 유방과 조씨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당초에 둘이 제대로 살림을 차리고 산것도 아니라서 그리 문제는 없었거나 혹은 유방이 유력자인 여공과 관계를 맺기 위해 조씨와의 인연을 정리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17][18]

그러던 어느날, 여후가 아이들을 데리고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중 어떤 노인이 물을 좀 주라고 부탁했고 여후가 물을 주자 노인은 여후의 관상을 보더니 "부인은 천하의 귀인이 되실 겁니다." 고 대답했다. 여후가 두 아이의 관상도 봐달라고 부탁을 하자, 노인은 혜제를 보고는 "부인이 귀하게 되는 것은 이 사내아이 때문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노원공주의 관상도 칭찬을 한 노인이 자리를 떠나자, 마침 사랑채에서 나온 유방에게 여후가 이 말을 전하자 유방은 노인을 찾아가 자신의 관상도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이런 대답을 했다.

"조금 전의 부인과 아이들이 모두 당신의 상을 닮았습니다. 당신의 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귀합니다."

이에 유방은 감사하면서 "혹시 그 말대로 된다면, 은덕을 잊지 않겠다." 고 대답했다. 하지만 유방이 어느정도 세력자가 되고 난 후에는 노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19]

3.2. 거병

이때 진나라의 여산(驪山)에서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고통스럽게 노역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정장이었던 유방은 패현의 죄수들을 호송해서 여산으로 끌고 가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20] 하지만 현시창의 상황이었던 여산에 끌려가고 싶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기에 죄수들은 하나, 둘씩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여산에 도착할 즈음이면 모두 도망치고 한명도 남지 않을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책임자인 유방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유방은 아예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속 편하고 을 진탕 마시고는, 밤이 되자 "가고 싶은 대로 가라. 나도 도망칠 테니까." 라고 말하면서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무리 중 열명 정도가 유방을 따르기를 원했다.

유방은 그들과 술을 더 마신 후, 한밤중에 이동을 하면서 먼저 사람을 보내 앞 길을 살펴보게 했다. 앞서가던 사람은 이내 돌아오더니 "앞에 큰 이 길을 막고 있으니 되돌아가는게 좋다." 고 권했다. 그러자 유방은 술김에 "장사가 길을 가는데 그깟 뱀이 뭐라고!" 라며 소리치고 앞으로 가더니 칼로 뱀을 베어서 죽여버렸다. 그런 다음 몇 리를 더 가다가 기어코 술에 취해서 그대로 뻗어버렸다.

유방을 따르던 사람들이 이를 쫒아서 와보자, 뱀이 죽은 자리에서 한명의 노파가 통곡하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노파는 "어떤 사람이 내 아들을 죽여서 그렇다." 고 대답했고, 자신의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인데, 뱀으로 변해 있다가 방금 적제(赤帝)에게 참살 당했다고 이야기 했다. 사람들이 노인네가 헛소리를 한다고 여겨 두들겨 패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할때, 노파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술에서 깬 유방은 그 이야기를 듣자 비범한 이야기라고 여겨 내심 좋아하게 되었고, 따르던 사람들도 유방이 뭔가 특이한 인물이라고 여겨서 더욱 그를 경외하게 되었다.[21]

그 무렵 진시황제는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는것 같다." 고 여기며 동쪽으로 순행해 그 기운을 억누르려 했는데, 여러가지 묘한 일도 있고 해서 스스로 특이한 사람이 아닐까 여긴 유방은 "혹시 나 잡으려고 그런게 아니야?" 라고 생각해서 망탕산의 연못가 근처 암석 사이에 은둔하면서 몸을 피했다.

그런데 혹시 여후가 유방을 만날 일이 있을때, 여후는 유방이 어딘가에 숨어있어도 항상 귀신같이 그를 찾아내었다.아내를 만나는데 왜 숨어 이에 유방이 신기해서 어떻게 찾았느냐고 물어보자, 여후는 "당신이 머무는 곳 위에는 항상 운기(雲氣)가 서려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패현의 많은 자제들은 더욱 유방을 대단하게 여겨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22]

유방이 숨어 다닐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 · 오광의 난이 발발 했고, 진승 등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패현의 현령 역시 그런 분위기는 느끼고 있었고,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먼저 반란에 동참해야 하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자신은 진나라 관리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 같으니, 마침 숨어 지내던 유방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면 적절하다고 여겨 번쾌(樊噲)를 불러 유방을 돌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정작 유방이 돌아올 때가 되자, 마음이 또 바뀐 현령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유방이 들어오는것을 막으면서, 유방과 친해보이던 소하와 조참(曹參)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느닷없이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된 소하와 조참은 부리나케 성벽을 넘어 도망쳐서 유방에게 붙어버렸다. 유방이 "현령 그 놈을 잡아 죽여야 패현이 무사하다." 는 내용의 글을 적어 성 내로 화살을 쏘아 보내자, 성 내에서 반응이 일어나 현령을 때려 죽이고 성문을 열게 된다.

일단 반란이 일어나고 나자, 이제 사람들을 이끌 주모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유방에게 이 일을 부탁했다. 유방은 짐짓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소하나 조참이나 여기서 유방을 거슬려서 좋을 것도 없고, 또 만약 주모자로 모반을 저질렀다가 일이 실패하면 자기 친척들이 모조리 도륙 당할까봐 두려웠던 그들은 유방에게 모든 일을 양보했다. 유방은 이렇게 추대되었고, 이후부터 패공(沛公)으로 불리게 된다.

추대된 유방은 패현의 관청에서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짐승을 죽여 피를 북에 바르고 깃발을 모두 붉은색으로 했다.[23] 이에 소하와 조참, 번쾌 등과 젊은 관리들이 패현의 젊은이 이삼천 명을 모았고, 호릉(胡陵)[24]과 방여(方輿)[25]을 공격하고 다시 돌아와 풍읍(豊邑)을 지켰다.

3.3. 반(反) 진 전쟁

3.3.1. 풍읍의 배반

이렇게 유방이 거병을 한 기원전 208년, 천하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장초군의 장수 주장(周章)[26]은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 수도 함양에서 불과 50km 정도 떨어진 위치까지 진군했으나, 진나라 최후의 명장장한(章邯)이 대반격을 가하자 여지없이 분쇄되었다. 또한 장초의 장수들은 각각 (燕), (趙), (魏) 등을 세워 독립하였고 또한 (齊) 역시 전(田) 씨 형제들이 거병하여 나라를 세웠다. 또한 오나라 땅에서는 항량(項梁)이 봉기하고 있었다.

그 무렵, 진나라의 사천군감(泗川郡監)[27] 평(平)이 반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풍읍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유방은 이틀 후 출진하여 그들을 쳐부셨다. 이제 수비가 아니라 공세에 나서기로 결정한 유방은 옹치(雍齒)에게 풍읍의 수비를 맡기고는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설현으로 진군, 사수군을 지키는 장(壯)을 격파했다. 장은 도망쳤지만 유방군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은 이를 추격하여 장을 잡아 죽였다. 이후 유방은 군대를 돌려 항보(亢父)를 거쳐 방여(方輿)에 이르기까지 진군했다.

그런데 이 무렵 장초의 진승은 수하의 장수 주불(周巿)을 시켜 위나라 땅을 공격하게 하려고 했는데, 주불은 이에 풍읍에 사자를 보내 "풍읍은 본래 위나라가 천도한 곳이었으니[28] 항복해라. 항복하면 후로 삼아 맡기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모두 도륙할 것이다." 라고 협박을 했다.

헌데 당시 유방은 밖으로 나가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에, 이 연략을 받은 사람은 옹치였다. 본래부터 유방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옹치는 이에 넘어가 훌라당 풍읍을 바쳐버렸고, 이 소식을 듣고 놀란 유방이 귀환해 풍읍을 공격했지만 함락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병이 난 유방은 일단 패현으로 물러났다.

옹치와 풍읍의 배반에 원통하고 분한 유방은 마침 동양(東陽)[29] 출신 사람인 영군(寧君)과 진가(秦嘉)가 경구(景駒)라는 사람을 임시왕으로 삼아 유(留)[30]에 있다는 사실을 듣자 경구를 만나 의탁하여 군사를 빌렸고 다시 풍읍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무렵이 장한이 진승의 세력을 완전히 격파해버리고 있던 참이었다. 장한의 부장이었던 사마니(司馬夷)는 북쪽으로 초나라 땅을 평정하고 상현(相縣)[31]을 도륙하고 탕(碭)[32]에 이르렀다. 이에 유방은 영군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소(蕭)[33]로 진군하여 전투를 벌였지만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아 일단 유 땅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했다. 그 후 재차 공격을 감행, 3일간의 싸움 끝에 사마니에게 함락된 탕성을 재함락하고 탕성의 장정을 거두어 대략 오천명 가량의 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유방은 이 부대를 가지고 하읍(下邑)[34]을 함락시키고 풍읍 부근에 주둔했다.[35]

3.3.2. 항량의 부장으로

이때 유방의 지상과제는 물론 풍읍의 옹치를 박살내는 일이겠지만, 당시의 전력으로는 어려운 면이 많았다. 그런데 봉기군 중 최강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항량이 설(薛) 땅에 주둔하자 기회라고 여긴 유방은 직접 백여명의 기병만 거느리고 항량을 방문했다. 유방과 이야기를 나눈 항량은 오천여명의 병사와 오대부(五大夫)에 해당하는 장수 십여명을 빌려주었고 유방은 이를 바탕으로 다시 풍읍을 공격했다. 하지만 풍읍은 여전히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로부터 한달 뒤, 양성(襄城)을 함락하고 대학살을 자행한 항우는 항량의 본군으로 귀환하였고, 이에 맞추어 항량이 각지를 공격하고 있는 장수들을 소집하였기에 유방도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진승이 살해된 것이 확실해졌기에 항량은 이에 맞추어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새로운 초회왕으로 추대하고 초나라를 다시 부활시켰다.[36]

그 무렵 진나라의 장한은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제나라를 공격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항량은 곧바로 동아로 진군하여 장한을 물리쳤다. 항량은 기세를 타고 장한을 추격했지만, 장한은 군세를 수습해서 다시 강력한 진영을 갖추었다. 이에 항량은 별동대를 조직하여 항우와 유방에게 이를 이끌게 하고 성양(城陽)을 공격하게 했다. 성양을 함락하고 성 내의 사람들을 학살한 별동대는[37] 이윽고 복양(濮陽)으로 진군하면서 진나라 군을 한번 격파하고, 다시 성에 공격을 가해 복양을 점령했다. 그리고 정도(定陶) 공략에 나섰지만 쉽지 않자 옹구(雍丘)로 진군하여 진군을 격파하고, 진나라의 재상 이사(李斯)의 아들 이유(李由)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이후 별동대는 외황(外黃)을 향해 진군했다.

그런데 교만을 부리던 항량은 이후 장한의 반격에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항우와 유방의 별동대는 외항을 버리고 진류를 공략 중이었지만, 항량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들의 사기가 염려되어 여신(呂臣) 등과 함께 퇴각을 했다. 그 당시 초나라의 기둥이었던 항량을 참살한 장한은 이제 초나라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조나라를 박살내기로 한 것이다.

3.3.3. 함양으로의 진격

유방과 항우의 진격로

장한은 한단(邯鄲)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부장 왕리(王離)[38]를 파견해 장이(張耳), 진여(陳餘) 등이 몸을 피한 거록(巨鹿)을 공격 중이었다. 조나라 마저 무너지면 진나라의 세력이 다시 천하를 뒤덮을 것이 자명하였기에, 이를 구원하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초회왕은 관중에 먼저 입성하는자가 그 지역의 왕이 되리라 라는 선언을 한 상태였다. 또한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켰야만 항량의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유방과 함께 서쪽으로 가길 원했지만, 회왕의 주변에 있는 노장들이 항우를 서쪽으로 보내는 일을 꺼려 이 일은 유방이 맡게 되었고, 항우는 송의(宋義)와 함께 북쪽으로 진군해 거록의 진나라군을 격파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유방은 독자적으로 군단을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유방은 강리(杠里)[39]의 진나라 군을 물리치고 서쪽으로 나아가다, 창읍(昌邑)[40]에 이르렀다. 바로 이때 팽월(彭越)을 만나 양 군대는 힘을 합쳐 창읍을 공략했으나, 창읍의 수비가 완강하여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잠시 율현(栗縣)으로 후퇴하였다가 강무후(剛武侯)[41]의 군사 4천여명을 빼았아 위나라 장군 황흔(皇欣), 신도(申徒) 무포(武蒲) 등과 함께 창읍을 재차 공격했지만 여전히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 무렵 항우가 거록대전에서 놀랄만한 승리를 거둔 참이라, 유방은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창읍을 내버려 두고 서쪽으로 진군하며 고양(高陽)을 지나갔다. 바로 이때 역이기(酈食其)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유방은 양다리를 떡 벌리고 마루에 걸터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고 있었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로서는 무례한 행위였는데, 그 모습을 본 역이기는 절을 하지 않고 길게 읍만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족하께서는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유방은 이 말을 듣고 역이기에게 욕을 퍼부었다.[42]

"이 비루한 유자 놈아! 지금 천하가 진나라의 폭정으로 고통을 받은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몸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한다고 하느냐?"

그러나 역이기는 기가 꺾이지 않고 말하길.

"무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무도한 진나라를 멸하기 위해서는 장자(長子)를 거만한 태도로 맞이하심은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따지자, 유방은 그 즉시 발씻기를 멈추고 벌떡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역이기를 윗자리에 모셔 조언을 구했다.[43] 유방은 역이기의 조언에 따라 진류(陳留)를 습격해 진나라가 비축한 양식을 얻어 군량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그 후 역상(酈商)[44]을 장수로 삼고 개봉(開封)을 쳤지만 여기도 쉽게 함락이 되지 않자 그대로 서쪽으로 나아가 백마진(白馬津)[45]에서 진나라 장수 양웅(楊熊)을 쳐부수고 이를 추격하여 곡우(曲遇)에서 대파하였다.

이후 유방은 남쪽으로 나아가 영양(穎陽)을 함락시켰고, 장량과 다시 재회하여 그 도움을 바탕으로 환원(轘轅)[46]을 점령하였다.

그런데 조나라의 별장 사마앙(司馬卬) 관중으로 진입해 왕이 되고 싶은 마음에 하수를 남하하여 함곡관(函谷關)으로 진입하려고 하자, 유방은 평음(平陰)[47]을 공략하여 나룻터를 끊어버렸다.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 낙양 동쪽에서 전투를 치루었으나 유리하지 못해 양성(陽城)으로 후퇴하여 병력을 추스린 후, 남양현(南陽縣) 동쪽에서 남양 태수 여의(呂齮)를 무찔러 남양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여의는 완성(宛城)으로 도망쳤고, 유방은 여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서쪽으로 진군할 요량이었지만 장량이 "후방에 적을 남기는건 좋지 않다." 고 충고하여 완성을 함락시켰다.[48] 완성을 함락시킨 유방의 세력은 이 무렵에는 무시못할 정도로 강력해져서 주위의 성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는데, 개중에는 왕릉(王陵)도 있었다. 유방은 파군(番君) 오예(吳芮)의 별장 매현(梅鋗)과 함께 석현(析縣)과 역현(酈縣)을 함락시켰다. 이때는 장한이 은허에서 항우에게 항복을 했고, 유방은 더욱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바로 그 악명이 자자한 조고가 유방에게 접촉을 시도한것. 조고는 당시 호해를 이미 살해한 후였는데, 관중을 쪼개서 서로 나눠 왕이 되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유방은 이것이 속임수라고 여기고 그대로 진군했고, 무관(武關)을 돌파한 후 남전(藍田)에서 진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이어서 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206년 10월. 마침내 유방의 병사들은 패상(覇上)에 이르렀다. 천하의 그 어떤 제후들보다 가장 먼저 함양 근방에 도달한 것이다.

3.3.4. 홍문연(鴻門宴)

당시 함양은 황제를 살해하고 복마전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괴물 조고를 자영(子嬰)이 살해한 후였다. 자영은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타고 목에는 밧줄을 메고서, 황제의 옥새(玉璽)와 부절(符節)을 봉해 가지고 나와 지도(軹道)[49]로 나와 유방에게 항복했다. 유방의 장수들 중에 자영을 죽여 분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유방은 이를 거절했다.

"처음 회왕이 나를 관중으로 보낸 이유는 원래 내가 관대하고 남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소. 이미 항복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또한 앞일이 상서롭지 않을 것이오."

이에 자영을 관리에게 맡기고, 본인은 함양에 입성하여 호화로운 진나라의 보물과 여자들을 취해서 신나게 노려고 하였다. 하지만 번쾌(樊噲)와 장량의 설득으로 결국 그만두고, 진나라의 보물에 일절 손을 대지 않고 군대를 패상에 주둔시켜 함양의 백성들이 민폐를 당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현의 호걸들과 노인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여기 계시는 나이든 어른들께서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 왔습니다. 이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멸족을 당해왔고, 서로 모여 말을 나눈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여 거리에 내던져졌습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제후들은 나와 ‘관중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그곳의 왕이 된다’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대로 나는 마땅히 이곳의 왕이 될 것입니다."

"이에 나는 여러분들과 ‘살인자는 죽인다, 남을 상하게 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는 법에 따라 처벌한다’는 내용의 법삼장(法三章)을 약속합니다.[50] 나머지 진나라의 모든 법은 폐지하겠습니다.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예전처럼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부로들을 위해 나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마음대로 당신들을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결코 두려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내가 휘하의 군사들을 패상으로 물리쳐 주둔하는 이유는 제후들이 오기를 기다려 그들과 함께 규약을 제정하기 위함에서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각 현(縣), 진(鎭), 향(鄕), 촌(村) 등에 이 소식을 전하니 진나라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을 잡고 을 가져와 대접하려고 했지만, 유방은 "이미 우리는 먹을게 많다." 면서 모두 물렸다. 이에 모든 백성들은 기뻐하면서 오직 유방이 진나라 왕이 되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어떤 사람이 유방에게 이러한 제안을 했다. 지금 항우가 진격하고 있는데, 서둘러 함곡관을 막아 관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책에 솔깃해진 유방은 이대로 행했지만…… 이는 항우의 어그로만 잔뜩 끌게 하는 행위였다. 11월 무렵, 항우는 유방이 함곡관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청나게 분노해 경포(黥布) 등을 시켜 함곡관을 뚫어버리게 했다.

이렇게 되자, 유방의 부하였던 조무상은 '이럴 바에야 항우에게 항복해서 녹봉이나 받자.' 는 생각으로 "유방이 관중에서 왕 노릇 할 생각으로 금은보화를 챙기고 있습니다." 라고 고자질을 했고, 범증(范增) 역시 지금 유방을 죽여야 한다고 권하자 항우는 병사들을 배불리 먹인 후 다음 날 아침 유방을 박살내버릴 생각을 하였다.

이 당시 양측의 전력은 유방은 십만 명의 군사를 이십만이라고 부풀린 형국이었고, 항우는 사십만의 병사를 백만이라고 부풀리는 상황이었다. 전력으로는 전혀 상대도 되지 않을 수준이었는데, 항백(項伯)은 친분이 있던 장량을 살리고 싶어 몰래 진영을 빠져나와 장량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51]

이에 장량은 "나 혼자 도망치면 의(義)가 아니다." 라면서, 유방에게 이 모든 일을 말해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방은 경악했으며, "항우를 이길 자신이 있느냐." 는 장량의 물음에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는 결코 항우와 대적할 수 없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라고 물었다. 이에 장량은 항백을 데려와 유방과 만나게 했고, 둘의 자식들이 혼인하도록 약속을 한뒤 항백을 돌려보냈다.

환대를 받고 돌아온 항백은 "아, 패공은 자네에게 개기려고 그런게 아니라, 도적들 막으려고 함곡관을 잠군 것 뿐이야. 개길 생각은 전혀 없던걸?" 이라고 변명을 해주었고, 유방은 항우를 만나 사죄했다. 그러나 범증은 이 자리에서 유방을 죽여버릴 심산이었으나, 번쾌와 장량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유방은 돌아오자마자 조무상을 죽였다.[52]

이후 항우는 함양에 입성해서 대학살을 하고 모든것을 불태워버렸다.

3.4. 초한대전

3.4.1. 권토중래

천하의 지배자가 된 서초패왕 항우는 각지의 제후왕을 분봉했는데, 가장 위협이 되는 유방은 파촉(巴蜀)의 벽지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관중은 육국을 제외하고 통일 이전의 진나라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였기에, 파촉의 왕이 되는것도 '함양에 먼저 입성하는 자가 관중의 왕'이라는 선언을 지키는 선에 들어가기는 했다.

유방의 본래 고향이었던 강소성 지역의 위치를 생각해보자면 돌아버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이는 유방 뿐만이 아니라 주발(周勃), 관영(灌嬰), 번쾌 등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유방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번 항우하고 싸워볼까?" 라는 생각까지 품었고 장수들도 동의했지만, 소하는 "이까짓거 죽는것보다는 낫다."고 설득했다. 네가 먼저 죽어볼테냐고 소하에게 화를 내던 유방이었지만, 소하가 "그러든가, 어차피 죽을 거면 먼저 죽든 늦게 죽든 그게 그거지. "라고 쏘아붙이자 결국 그 의견에 동의하고 소하를 승상으로 삼았다.[53] 참으로 화기애애한 군신 사이

유방 입장에서 더 열받는 일은, 본래 유방의 군단은 10만에 육박했는데 항우는 그 중 3만명만 유방을 따를 수 있게 하였다(……).[54] 이래서 차라리 한 판 뜰까 했던 것. 그 정도로 항우는 아직 유방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 장량은 잔도(棧道)를 불태우라고 충고해서 항우의 의심을 덜게 하였다.[55]

그러나 유방을 따라 한중 지역으로 들어가는 대다수의 병사와 장수들은 관동(關東)출신으로서 이내 이런 촌구석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까 두려워하며 그 길이 너무나도 험하여[56] 도망치기 시작했고, 병사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불러제꼈다. 유방으로서는 괴로운 나날이었는데, 어느날 소하마저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어이쿠, 이제 난 망했구나!" 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소하는 달아난 게 아니었다. 그는 도주한 한신을 데려오기 위해 떠났던 것이다.

당시의 한신은 원래 항우군의 집극낭중으로 있었는데 낭중의 신분을 이용하여 항우에게 여러 차례 계책을 올렸지만 매번 무시당했으며 그의 출신이 미천하여 홀대하였기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다고 생각한 한신은 초나라를 떠나 유방의 군대를 따라갔었다. 그러나 유방의 진영에 들어가서도 대접을 받지 못했으며 급기야 동료와 함께 군령을 위반하는 일을 저질러 참수형이 내려졌는데 13명이 참수 당하고 한신의 차례가 되었는데 한신도 이제 곧 죽게 될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는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하후영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때 하후영에게 큰소리로 "한왕께서는 천하를 얻고 싶지 않으신가? 어찌 장사를 함부로 죽이는 것이오?" 라고 매우 당당하게 외쳤다. 이를 장하면서도 신기하게 여긴 하후영은 한신의 처형을 잠시 미루고 대화를 나누고선 크게 기뻐한 하후영은 유방에게 죄를 사면하고 중용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에 치속도위로 임명되었다. 치속도위를 맡긴 하였으나 본디 뜻이 컸던 한신은 행진 중 소하와 여러 차례 면담을 청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소하는 한신이 매우 뛰어난 인재임을 알게 되었으며 한신 또한 소하가 자신을 유방에게 추천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남정에 이르러 수일이 지났는데도 아무 기별이 없자 유방 또한 자신을 중용할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여 아무 말 없이 밤중에 도주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소하는 깜짝 놀라 유방에게 기별조차 하지 못한 채 황급히 한신의 뒤를 쫓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신을 겨우 설득하여 군영으로 돌아와 유방을 만났는데, 유방은 소하를 보자 기뻤지만 한편으론 화가 나서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도망갔던 것인가?"

소하가 답했다. "신은 감히 도망친 것이 아니라 도망친 자를 쫓았을 뿐입니다."

유방이 물었다. "그대가 뒤쫓아 갔던 사람이 누구인가?"

다시 소하가 답했다. "치속도위 한신을 쫓았습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꾸짖으며 말했다. "내가 관중에서 남정으로 오기까지 그렇게 많은 장졸들이 도망쳤는데 여지껏 한 명도 뒤쫓지 않다가 어찌하여 한신만을 뒤쫓아 갔다는 말인가? 한신을 쫓아갔다는 것은 거짓이로다."

그러자 소하는 자신이 한신을 뒤쫓은 이유를 유방에게 자세히 설명하였다.

"다른 장수들이야 쉽게 얻을 수 있지만 한신과 같은 인물은 걸출해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왕께서 만약 한중에서 계속 왕 노릇을 하시려면 한신을 쓸 바 없거니와, 만일 천하를 취하고자 하신다면 한신 말고는 그 일을 상의할 인물이 없습니다. 다만 왕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때 소하의 설명 중 '至如信者 國士無雙' (한신만은 국사로서 둘도 없는 사람입니다.)로 부터 나온 말이 국사무쌍(國士無雙)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즉, 한신이 없으면 우린 여기 박혀서 아무것도 못함.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소하의 추천으로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은[57] 유방은 한신과의 대화에서 용기를 얻었고, 세력을 정비해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3.4.2. 삼진평정과 팽성대전

마침내 기원전 206년 8월, 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방은 한신의 제안에 따라 옛날의 길을 이용해 우회하여 옹왕(雍王) 장한(章邯)을 공격했다. 당시 한군은 파촉에 들어오면서, 장량의 건의에 따라 여러 절벽 등에 만들어놓은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워버린 상황이었다. 때문에 한군의 기습을 예상하지 못한 장한은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장한은 여러차례 한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한군은 장한을 연달아 격파했고, 곧 관중을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장한은 폐구(廢丘)에서 포위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형국이 되었고, 이후 한군은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책왕(翟王) 동예(董翳),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한왕(韓王) 정창(鄭昌) 등을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이 간단하게 제압했다. 그 후 본격적으로 동쪽으로 진군한 유방은 위왕(魏王) 위표, 은왕(殷王) 사마앙도 항복시키게 된다.

당시 항우는 제나라에서 전영(田榮)과 교전을 치른 후 완전히 늪에 빠진것처럼 허우적대던 판이라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마음껏 세력을 키우고 제후들을 끌어들인 유방은 죽은 의제(義帝)를 위해 3일장을 치른 후, 제후군을 집결시켜 56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모아 초나라의 본거지인 팽성으로 진격했다.

항우가 없는 팽성은 당연히 이런 공격을 막을 수 없었고, 유방은 손쉽게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제나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항우도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항우는 부하 장수들에게 성양의 공격을 맡긴 채, 단 3만명을 인솔하여 엄청난 속도로 남하,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이르고 그때부터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한군을 개미처럼 밞아 죽였다. 이때 양군의 전력차는 무려 19배 정도. 심지어 과장을 고려해 한군의 전력을 10분의 1로 줄여도 초나라군의 숫자 열세는 변함이 없다. 제후 연합군은 숫적으로 압도했지만 여러 제후들의 군대가 모여 통일된 체계가 아니었고, 그 상태에서 기습을 당해 모랄빵을 먹자 제대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렸다.

결국 팽성의 동쪽인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여명의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남쪽으로 도망친 병사들도 수수(睢水)에서 무참하게 살육당하여 10만여 명이 물귀신이 되었다.[58]

워낙 엄청난 패배라 유방 본인도 죽을 고비를 두번이나 겪었지만, 한번은 모래 폭풍 때문에 목숨을 구했고 다른 한번은 정공(丁公)을 설득해서 죽음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유방은 도망치는 와중에 패현(沛縣)에서 가족들을 챙기려고 했는데, 항우도 유방의 가족을 잡기 위해 패현에 사람을 보냈고 가족들도 난리를 피해 도망친 와중이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달아나는데, 도중에 유방의 아들인 유영과 장녀인 노원공주가 길거리에 버려져있는 것을 보고 이들을 자기가 타고 있는 수레에 태웠다.

그런데 저 멀리서 초군의 추격군이 보이기 시작하자, 당황하고 지친 유방은 수레의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수레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때 수레를 몰고 있던 하후영(夏侯嬰)은 그때마다 수레를 멈추고 아이들을 태운 후에야 다시 달렸는데, 그것도 처음에는 아이들을 목에 매달고 일부러 천천히 달리다가, 아이들이 진정하고 난 후에야 다시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 짓을 3번 반복하자 머리 끝까지 열이 뻗친 유방은 10번이나 하후영을 찔러서 죽이려고 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59] 하후영도 기어이 화가 치밀었는지, 참다 못해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하찮은 짐승도 제 새끼 귀한 줄은 아는 법인데, 폐하께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아버지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아니면 하후영에게 겁을 먹은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유방은 아이들을 던지려 드는 것을 그만두었고, 이런 온갖 우여곡절 끝에 유방과 두 아이들은 간신히 초군의 추격을 피하여 무사히 풍읍(豊邑)으로 올 수 있었다. 유방은 그 후에 하후영에게 기양(祁陽) 땅을 식읍으로 주고 공신으로 평생 우대했다. 참고로 여후와 유영은 이 일을 매우 고마워하여 유방이 죽은 후 혜제가 집권했을 때에도 태복으로 삼았으며 하후영에게 궁궐 북쪽에 제일 훌륭한 저택을 지어주는 특혜를 주면서 하후영에게 “가깝게 지냅시다.”라고 말하고, 그를 각별히 존중하여 여후가 죽을 때까지도 후한 대접을 받았으며 여후가 죽은 이후에는 주발,진평등과 함께 여씨 일당을 제거하는데 일조하고 효문황제까지 섬겼으니 이 일은 하후영 자신에게 있어선 신의 한수였던 셈이다.

그러나 유방과 두 자식과는 달리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과 마누라가 되는 여후(呂后)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심이기(審食其)라는 인물은 이 둘을 호위하면서 어떻게든 유방과 만나려고 했지만, 오히려 초군을 먼저 만나 꼼짝없이 사로잡히고 말았고 초군은 태공과 여후를 항우에게 바쳤다. 항우는 이들을 군중에 두어서 데리고 다녔다.

이렇게 엄청난 패배를 겪었지만, 유방은 소하의 보급 등을 바탕으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초군을 경읍(京邑)과 색읍(索邑)에서 격파한 유방은 형양(滎陽)을 중심으로 항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3.4.3. 형양 함락과 성고 함락

팽성대전의 패배 이후 유방은 부하인 수하(隨何)를 통해서 경포를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한신을 시켜 도망친 위표를 물리치게 하고, 이후 하북으로 진군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하게 지시했다. 팽성대전 이후 기세를 보자면 단박에라도 한군을 부셔버릴 수 있을 법한 초군이었지만 의외로 한군을 시원하게 몰아내지 못했고 한군은 거의 1년 동안 형양에서 초군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초군이 한군의 군량을 끊어버리게 되자 한계에 봉착했고 기원전 204년 5월, 형양은 거의 함락 직전이 되었다. 유방은 이 때문에 심하게 우려스러워 하면서 항우에게 강화 요청을 하고, 형양의 이서 지역을 경계로 하여 초나라와 한나라의 국경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범증은 유방이 위험한 인물이니 강화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항우는 더욱 강하게 형양을 공격했다.

이 무렵, 유방은 진평(陳平)을 수하로 삼았다. 여러 장수들은 진평이 형수간통을 한 색마이며[60],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작자라고 욕을 퍼부었지만 진평과 면담을 해본 유방은 되려 진평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호군중위의 벼슬에 임명했다. 그 진평은 이 위기 상황에서 하나의 계책을 내놓았는데, 이간책을 사용해 항우와 범증의 사이를 악화시키자는 것이다. 우선 유방이 준 돈을 닥치는 대로 쏟아부어 '범증, 계포, 종리말, 용저는 항우를 죽 따라다니면서 세운 공이 한둘이 아닌데도 포상은 인색하니 항우에게 불만이 아주 많다더라'라는 유언비어를 좍 뿌렸고, 찔리는 게 있는 항우는 이 네 사람이 정말 그럴까 하고 불안해하며 은근히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우의 사자가 한군의 진영에 오자, 진평은 일부러 으리으리하게 상을 차려놨다가 정작 사자를 만나자 깜짝 놀라는 체하며 "어, 우린 범증의 사자가 온 줄 알았는데 항우의 사자구만?" 이런 소리를 하며 대접한 음식을 모조리 빼앗고는(……) 그냥 평범한 음식을 내준 것이다. 항우는 이런 간단한 수작에 넘어가 범증을 의심했고, 격분한 범증은 항우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범증은 곧 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하지만 범증이 죽었어도 당장 성을 에워싼 포위망이 어디로 사라질 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유방에게 속았다는 분노로 공격이 더 거세어지고, 식량이 부족하여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장군이었던 기신(紀信)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계책을 내놓았는데 유방과 닮은 자신이 가짜 유방으로 위장하여 거짓으로 항복한 후 초의 군사들이 몰려 포위가 느슨해지는 틈을 타 반대편 성문으로 빠져나가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진평이 2천여명의 여자들을 무장시켜 성 밖으로 내보내 눈속임을 하는 계책을 냈다.[61] 그리하여 밤중에 기신이 가짜 유방으로 위장한 채 2천여명의 무장한 여자들과 함께 형양성의 동문으로 나가 초군에게 항복했다. 초군은 진짜 유방이 항복한 줄 알고 기뻐하며 방심한 사이 진짜 유방은 수십 기와 함께 서문으로 탈출하였고 속임수에 당한것을 깨달은 항우는 분노하며 기신에게 유방은 어디로 갔냐고 물었지만 기신은 항우에게 "우리 대왕은 진작에 달아나셨다. 이 멍청아!" 라고 답했고 대노한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원래 욕을 잘하고 말이 거칠었던 이런 부분까지 유방을 닮을 것까지야… 기신은 불에 타 죽을 때까지 항우를 향해 욕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유방은 탈출하여 우선 관중으로 들어가 세력을 다시 추스린 후 항우와 재결전하기 위해 동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원생(袁生)이라는 인물은 유방에게 충고를 했다.

"한과 초 두 나라는 형양성을 사이에 두고 몇 해를 대치해 왔으나 한나라는 항상 수세에 몰렸습니다. 원컨대, 왕께서 무관(武關)으로 나가시면 항우는 필시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달려올 것입니다. 그럴 경우 대왕께서는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올려 지키신다면 형양과 성고 일대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모두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 한신 등에게 명하여 하북의 조(趙), 그리고 연(燕)과 제(齊)를 평정하도록 하게 하십시오. 그때 형양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신다면 초군은 우리의 양동 작전에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며 그 전력은 분산되어 그 틈에 한나라 군사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다시 한 번 겨룬다면 틀림없이 초나라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유방이 남쪽으로 이동해서 형양에 대한 압박을 풀고, 그 사이에 한신은 북방을 평정하게 하자는 것. 이에 따라 유방은 완성(宛城)과 섭(葉)에서 경포와 주둔하며 항우의 주의를 끌었다. 항우는 이에 유방과 결전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유방은 도전에 응하지 않았고, 그 사이 팽월은 뒤치기를 시전해 항성(項聲) 및 설공(薛公) 등의 장수를 격파해서 항우를 성가시게 했다. 항우의 주의가 팽월에 쏠리는 사이 유방은 성고에 입성했다.

그런데 항우는 순식간에 팽월의 군대를 격파하고는 다시 형양으로 나아가 주가(周苛)와 종공을 모두 죽이고 한왕 신은 사로잡았으며, 성고를 포위했다. 성고가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이자 유방은 하후영과 함께 둘만 간신히 도주했고, 의지할 수 있는 한신의 군단으로 도망쳤다.

이 당시 정형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한신은 장이와 함께 상당한 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유방이 한신의 군영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이었다. 처음에 한나라의 사자라고 자신의 이름을 대고 성벽으로 들어온 유방은, 곧바로 장군의 인수(印綏)와 부절(符節)을 손아귀에 넣고, 순식간에 인사배치를 끝내 그 병력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놓았다. 이때 한신은,

잠자고 있었다.

유방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군대의 지휘관을 강탈회수하는 동안, 한신은 장이와 함께 꿈나라 여행을 떠나고 있던 중이었다. 자고 일어나보니 느닷없이 유방이 있자 한신은 경악했고(……) 유방은 장이에게는 조나라를 지키게 하고, 한신은 조나라의 상국으로 삼아 즉시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보통 역사에서 군대의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고, 역으로 군주가 군사력이 전무하다면, 결국 그 장수의 파워에 휘둘리다가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 보통은 이런 시나리오가 일반적인데, 이때 유방은 식은 죽 먹듯 순식간에 한신의 지휘권을 자기에게 가져왔고, 잠자고 있던 한신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털렸다.(……)

한신과 유방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인데, 이후로도 한신은 잠 자다가 창졸간에 군대를 빼앗긴 이 때처럼, 이상할 정도로 유방에겐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만다.

3.4.4. 광무 대치

이후 유방은 한신에게 지시하여 조참, 부관, 주설 등과 함께 제나라를 평정하게 했고, 본인은 새롭게 충원한 군단을 거느리고 항우와 교전하기 위해 나섰다. 낭중(郎中) 정충(鄭忠)은 "항우와 싸워봐야 이길 수가 없으니, 보루를 높이하고, 참호를 깊이 파서 굳게 지키기만 하자." 고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인 유방은 그 대신 노관유가(劉賈)에게 군사 2만을 주어 팽월과 협력하게 해서 항우를 괴롭히게 했다.

그런데 아직 한신의 군단이 제나라로 진입하기 이전, 역이기는 자신이 나서면 싸움 한번 없이 제나라를 항복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에 유방은 역이기를 제나라로 보냈는데, 과연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 내어 제나라를 항복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괴철(蒯徹)의 꼬드김에 넘어간 한신이 제나라를 침공함으로서, 역이기는 삶겨서 죽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유방과 한신 사이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지만, 일단 전황 자체는 최악의 시기를 넘어 호전되고 있었다. 한신은 제나라를 괴멸시키고 이후 용저(龍且)의 대군마저도 격파하여, 초나라에 대한 북방에서의 세력 우위를 확실하게 손에 넣게 되었다.

항우의 가장 큰 문제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유방과 결전을 벌이고 싶어도 팽월 때문에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유방과 팽월은 기각지세를 이루어 협공을 취했는데, 항우는 팽월을 막기 위해서 군사를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이동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유방은 항우가 팽월을 공격하려고 간 틈을 타 성고를 다시 수복했고, 광무(廣武)[62]에 주둔하면서 오창(敖倉)의 양식을 확보, 장기전을 벌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팽월을 물리친 항우는 다시 돌아와 수개월 동안 광무에서 주둔했지만, 또다시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보급선을 끊어버리는 팽월 때문에 항우는 대단히 근심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판사판으로 항우는 큰 도마를 만들고, 그 위에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을 올려 놓고 "항복하지 않으면 삶아서 죽이겠다!" 고 엄포를 놓았다. 조금만 생각해도 상당히 막무가내식의 작전인데, 당시 항우가 얼마나 초조해져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유방은 이런 충격과 공포 급 제안에 "우리가 예전에 의형제를 맺었는데, 지금 우리 아버지를 죽이면 너는 네 아버지를 스스로 죽이는 거다. 그래도 죽이려면, 아버지 요리한 국물 나한테도 한 사발 다오!" 라고 더욱 충격적인 발언으로 응수, 항우는 격분하여 정말 태공을 죽이려고 하다가 항백의 만류로 그만두었다.[63]

하지만 항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금 천하가 혼란한건 우리 둘 때문인데, 차라리 우리가 맞짱 한번 떠서 이 싸움을 끝내자." 고 제안했다. 물론 항우와 대결할 생각이 전혀 없던 유방은 "난 힘이 아니라 지혜로서 싸우려고 한다" 고 거절했고, 대신 누번(樓煩)이라는 활 잘 쏘는 인물이 나서 초나라의 장수를 쏘아 죽였다. 이에 화가 난 항우는 완전무장을 하고 누번에게 달려들었고, 누번은 항우에게 활을 쏘려고 하다가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는 소리에 식겁하고 그대로 한군의 진영으로 도망쳐 와 버렸다. 유방은 튀어나온 장수가 항우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항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나가 유방에게 말을 걸었고, 유방 역시 항우와 마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유방은 항우가 지금까지 저지른 10가지의 죄목을 열거하며 항우를 비난했다.

"하나, 팽성에서의 약속을 위반했다. 당초에 초회왕과 제후들이 먼저 관중에 입성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될 것이라 서로 굳게 약속하였지만 스스로의 욕심으로 이러한 제후들과 회왕의 맹약을 묵살하고 최초로 관중에 진입한 자신을 협박하여 파촉으로 쫓아버렸다."

"둘, 주군인 초회왕이 직접 임명한 송의를 왕명을 사칭하여 살해함으로서 상전에 칼을 들이밀었고 초회왕과 그의 군신들의 위엄을 무너뜨림으로서 그들이 이를 갈게 만들었다."

"셋, 초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폭행과 노략질을 하지 말 것을 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살로 함양성을 피로 물들이고 아방궁을 불살라 파괴만을 일삼으며 시황의 능묘를 파헤쳐 진나라의 보물을 착복하고 죽은 자마저 모독했다."

"넷, 대의에 따라 명을 받고 조나라를 구원하였으나 스스로의 욕심으로 마땅히 그 결과를 회왕에게 보고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지 않고 제후들을 협박해 관내로 들어갔다."

"다섯, 진왕 자영이 이미 투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멋대로 죽여버렸다."

"여섯, 투항한 진나라 병사 20만명을 속여 신안 경내에서 하룻밤 사이에 이들을 살아있는 채로 땅에 묻어 유례없는 대학살을 벌이고 그들의 장수인 장한과 사마흔을 보란듯이 왕에 봉하니 진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자아내게 했다."[64]

"일곱,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는 사사로이 좋은 땅을 주고 왕에 봉하며, 공이 있음에도 아랫사람들을 농락하며 유배지를 주었다. 원래의 제후들은 벽지로 내쫓아버리고 그들의 장수들은 중요한 땅의 왕으로 삼아버리니 군신의 법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모든 지역의 신하들이 앞 다투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덟, 진의 도읍을 불태운 후 자신의 마음대로 팽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그곳에 초회왕을 의제로 지칭하며 끌고와 감금하였다. 한왕의 봉지를 빼앗고 양나라와 초나라 땅을 마음대로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아홉, 의로서 우리 모두가 초회왕을 섬기기로 맹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성품으로 결국 강남에서 의제를 살해해버리고 그 시체를 장강에 처넣으니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칠 지경이다."

"열, 군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치를 함에 공정함이 없고, 약속을 초개처럼 버렸다.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고 이미 항복한 자를 죽였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신의를 저버리니 이야말로 천하가 용납하지 않는 대역무도함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모두 틀린 게 아니었으니 항우는 본전도 못 찾고 악명만 잔뜩 높이는 꼴이 되었지만, 유방은 이걸로도 속이 덜 풀렸는지 여기서 또 추가타를 날린다.

"나는 정의로운 군대를 이끌고 제후들과 함께 도적놈을 토벌하려는 것 뿐이니, 너같은 작자는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죄를 지어 군역을 하는 천한 자들만 보내도 충분하다!"

결국 항우는 격분하여 미리 숨겨놓은 쇠뇌를 쏘아 유방을 맞춰버렸다. 하지만 가슴팍에 화살을 맞은 유방은 또다시 한술 더 떠 "저 도둑놈이 내 발가락을 맞추네!" 라고 하며 달아났다. 물론 정통으로 가슴에 화살, 그것도 쇠뇌를 맞은 유방은 상태가 몹시 위중했으나 한군의 사기를 걱정해서 멀쩡한 척을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괴상한 제안과 기습은, 역으로 당시 항우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전황은 이제 완전히 뒤집어지고 있었다.[65]

3.4.5. 해하의 결전

한신은 북방의 패자가 되었고, 팽월은 징그러울 정도로 초나라의 후방을 만지작만지작 후벼파며 보급을 말아먹고 있는 상황. 앞에는 유방이 있고 경포마저도 유방의 편이 되었기에, 항우는 싸움 한번 져본적도 없으면서 패전 직전에 놓이는 괴이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보급 때문에 항우는 전진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팽월을 물리치러 갈 수도 없었다. 항우가 주력을 이끌고 팽월을 물리치러 갔을 때 유방은 초나라 장수 조구(曹咎)를 죽여버렸다. 항우로서는 승리는 고사하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에 항우와 유방은 협상을 해서 홍구(鴻溝) 이서의 땅은 한나라에, 그 이동의 땅은 초나라 땅으로 하자는 협약을 맺었다. 항우는 한왕의 부모와 처자를 한나라에 보내주었다. 한나라 진영의 군사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으며, 항우의 군사들은 초나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협악을 맺은 후 항우는 자신에게 아직까지 협력을 했던 제후들의 군사를 해산하고 팽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유방 역시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장량진평은 그런 유방을 만류했다. 지금이야말로 항우를 끝장 낼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는 것. 이 말을 들은 유방은 다시 군사를 모아 돌아가는 항우를 기습하는데 이른다. 하지만 항우는 고릉(固陵)[66]에서 그런 유방의 군대를 무찔렀다. 본래 유방은 팽월과 한신에게도 연락하여 움직이기를 권하였다. 하지만 팽월과 한신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기만 했기에 유방은 항우와 교전하여 패배했던 것이다.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넒혀주기로 약속하고[67],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경포(黥布)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서,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기원전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결국 이 최후의 해하전투에서 유방은 승리했고, 항우는 몰락하여 오강에서 자결했다. 초나라군은 10만의 군대 중 8만명이 목 없는 귀신이 되었으며,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던 노현(魯縣) 지방도 항우의 목을 보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아직 항우가 세운 열여덟 제후 중 유일하게 한에 투항하지 않은 2대 임강왕(臨江王) 공환(共驩)[68]이 있었지만, 사실상 전쟁은 종결되었고, 천하의 주인은 이제 유방이 되었다.

혹여 이 시점에서 천하의 주인으로 다른 적절한 후보가 있다면 그 인물은 바로 한신이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후 서쪽으로 가던 유방이 정도(定陶) 부근에 이를 무렵, 유방은 갑자기 한신의 진영으로 달려가 한신의 군권을 빼앗았다. 갑작스런 기습에 한신은 놀랐는지 제대로 반항도 못해보고 고스란히 병권을 넘겨주게 된다. 유방은 한신을 제나라에서 초나라 왕으로 옮기고, 도읍을 하비(下郫)에 정하게 하였다.[69]

3.5. 제국의 황제

3.5.1. 나는 세 사람보다 못하지만, 세 사람을 부릴 줄은 안다

유방 자신의 승리 이유이자 장점을 한 문장으로 말한 말.

당시 한왕이었던 유방은 이후 범수(氾水) 북안에서 형식적인 겸양을 표시한 뒤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군국제(郡國制)의 방식으로서 이성왕(異姓王)들을 배치한 유방은 낙양(洛陽)에 수도를 정했으며[70] 적절하게 부역을 면제하고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전후 복구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승리자가 되어 황제로 즉위한 유방은 남궁(南宮)에서 여러 군신들과 주연을 베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유방은 "내가 어떻게 항우를 이긴것 같나? 계급장 때고 편하게 이야기 해봐."라고 권했고, 이에 고기(高起)와 왕릉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오만무례하여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시나 항우는 인자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페하께서는 휘하의 장수를 부리시어 성을 함락하고 그 땅을 점령한 다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봉함으로써 천하의 사람들과 함께 그 이익을 같이 누리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항우는 현능한 사람들은 시기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미워하며,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의심하여, 싸움에서 승리했음에도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땅을 얻어도 나누지 않아 그 이익을 같이 누리지 않음으로 인해, 항우는 천하를 잃은 것인가 합니다."

그러자 유방은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었다.

"경들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도다! 무릇 군영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여 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군량을 준비하여 그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蕭何)보다 못하다. 또한 백만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항상 이기고,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는 데는,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호걸 중의 호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세 사람을 능히 부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항우는 그나마 있었던 범증(范曾)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후 유방은 여생을 각지의 반란 평정에 전력을 다하였다. 위에서도 말한 임강왕 공환을 노관과 유가, 또 별도로 근흡을 시켜 토벌케 하고, 연왕 장도(臧荼)의 반란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서 격파하고 노관을 새로운 연나라 왕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이기(利幾)의 반란도 직접 격파하였다.

유방은 황제가 되고 나서도 5일에 한 번씩 아버지인 태공에게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예법이라는게 일반 가정에서 행하는 거리낌이 없는 태도와 똑같았다. 이를 본 태공의 집사장이 충고 해주었다.

"하늘에는 태양이 둘이 없으며, 땅위에는 두 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황제께서는 비록 태공님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의 임금이십니다. 또한 태공께서는 비록 황제폐하의 아버지가 되시지만, 또한 그 신하도 됩니다. 어찌 그 임금되는 사람이 그 신하되는 사람에게 절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행한다면 황제의 위엄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 후 유방이 태공을 다시 만나게 되자, 태공은 빗자루를 부여잡고 대문 앞에 나와 뒷걸음치며 유방은 맞이했다. 유방은 깜짝 놀라서 어가에서 내려 태공을 부축했는데, 태공은 유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제는 천하 만백성의 임금되시는 분이라! 내가 어찌 천하의 법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이에 유방은 "그럼 그 황제보다 높으면 되겠군." 이라는 의도로 태공을 태상황(太上皇)으로 올려 버렸다. 다만, 태공에게 충고를 한 집사장에 대해서도 황금 500냥을 상으로 내렸다.

3.5.2. 내가 이제야 황제 귀한 줄 알겠다

천하가 평정되었지만, 본래 개백정 도적 출신이 대부분이던 공신들은 규율이고 뭐고 전혀 없던 판국이었고 웬만한 공신들 모두가 "내가 제일 공을 많이 세웠지." 하면서 싸우는 바람에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판국이었다. '유경, 숙손통 열전'의 언급을 보면, 이 당시 공신들의 모습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군신들이 연회석 상에서 서로 공을 다투다가 심지어는 술에 취해 망동하며 검을 뽑아들고 기둥을 내려치는 자들도 있었다. 고제가 보고 매우 근심했다.유방:이 노답들을 어찌할꼬

이때, 보다못한 유방은 자신이 직접 소하를 찬후(酇侯)에 봉하고, 공신들 중 최고의 대우를 하여 가장 많은 식읍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난리는 멈추지 않아 유방은 난감해했는데, 이 때 유학자였던 숙손통(叔孫通)이 유방에게 간언을 올렸다.

"무릇 유자들과는 앞으로 달려가 무엇을 빼앗아 오는 일은 못하지만 수성은 할 수 있습니다. 신에게는 노나라에서 데려온 유생들이 있습니다. 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의례를 일으켜보고 싶습니다."

본래 유학자들을 보면 관을 벗겨 오줌을 눌 정도로 오만불손하고 유학자를 싫어하던 유방이었지만, 이 이야기를 듣자 솔깃했다. 다만 유방의 걱정은 이게 내가 이해못할 정도로 너무 어렵지 않겠느냐는 점이었다. 이에 숙손통은 이렇게 대답했다.

"오제는 각기 다른 음악을 즐겼고 삼황의 예는 서로 달랐습니다. 예란 시대와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 간략하게 하기도 하고 화려하게도 합니다. 고로 (夏殷周) 삼대(三代)의 예는 빼기고 하고 더하기도 해서 서로 중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고대의 예법과 진나라의 의례를 취해 한나라의 의례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자 유방은 "한번 해봐라, 대신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쉽게 만들어야 된다."고 말했다. 이 부분을 보고 천하를 통일한 사람도 어려운 예법은 두려워 했다는 의견도 있다. 이후 유방은 시험삼아 한번 숙손통이 만든 의례를 보고 "이 정도라면 내가 할 수 있겠다." 며 다행스러워 했다.

이렇게 만든 예법이 시행되어 그동안 깽판을 치던 공신들이 얌전해지자, 유방은 그때서야 "야, 이제야 내가 황제 귀한 줄 알겠다!" 며 좋아했다. 황제나 신하들이나 예법 등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었으니 벌어진 촌극.

3.5.3. 백등산 포위전과 토사구팽

이후 유방은 여전히 영향이 강한 한신을 견제하고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초나라 왕으로 있던 한신이 모반을 하려고 한다는 고발을 듣고, 진평의 계책을 이용해서 한신을 사로잡은 후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려 한신도 같이 풀어주면서, 그를 회음후로 낮추어 버렸다.

그후 전긍(田肯)이라는 인물의 충고를 들은 유방은 유가(劉賈)를 형왕(荊王)에 봉하여 회수 동쪽을 다스리게 하고, 동생 유교(劉交)를 초왕에 봉하고 회수 이서의 땅을 다스리게 했다. 또한 아들 유비를 제나라 왕으로 삼아 70여성을 다스리게 하면서 본격적으로 유씨 성을 가진 인물들을 왕으로 임명하기 시작했다. 또한 유방은 형인 유중(劉仲)을 대나라 지역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 무렵, 북방의 흉노(匈奴)는 중국이 초한대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묵돌(冒頓)의 지휘 아래 절정의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유방은 한왕 신을 전방에 파견하여 흉노를 막게 했지만, 오히려 그는 묵돌에게 항복해버렸고 흉노의 편이 되어 한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격분한 유방은 한왕 신을 격파하기 위하여 직접 출진했고 유방의 군단에게 한왕의 부장들이 패배함에 따라 겁을 먹은 한왕 신은 흉노의 땅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런데 사태는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 등이 끼어든데다 이들 모두 흉노의 지원을 받는지라 묘하게 커지고 말았다. 당초에 한왕 신을 무찌르기 위한 싸움에서 종래에는 갑자기 묵돌과의 대전으로 전개되었는데, 나름대로 주의깊게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묵돌의 유인책에 당해버린 유방은[71] 결국 평성 부근 백등산에서 대패를 당하고 묵돌에게 싹싹 빌어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이후에도 유방은 한왕 신의 잔병들을 토벌하면서 계속 군사를 움직였는데, 기원전 198년 8월 조나라 상국 진희(秦豨)가 모반을 일으키자 유방은 이때 역시 직접 출진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궁중에서는 여후가 진희의 모반을 이용해 음모를 꾸며 소하를 통해 한신을 끌어들인 후 장락궁에서 한신을 참살했다. 조나라의 반란을 모두 격파한 유방은 유항(劉恒)을 대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전 왕 유중은 흉노가 쳐들어오자 나라를 버리고 달아났기 때문.[72]

이후 여름 무렵에는 팽월을 참살했고, 아들인 유회(劉恢)를 양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7월 무렵에는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아들인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임명하여 일단의 정리를 끝났는데, 문제는 이 전투에서 유방이 유시에 맞아버린 것이다. 유방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지만, 현지에서 치료를 하지 않고 귀환하기 시작했다.

3.5.4. 대풍가(大風歌)

유방은 부상을 입어 귀환하는 와중에 고향인 패현을 들렀다. 태공의 친구들인 노인들과 여러 집안의 자제들을 불러 모아서 신명나게 먹고 놀면서 즐겼는데, 유방은 패현의 어린이 120명에게 직접 노래를 가르치다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서 흥이 오르자 축(筑)을 타면서 직접 노래를 불렀다.

大風起兮雲飛揚

대풍(大風)이 일어 구름이 날아오른다.

威加海內兮歸故鄕

위(威)를 해내(海內 : 천하를 말함)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는데

安得猛士兮守四方

어디서 맹사(猛士)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까.

유방은 이 노래를 아이들이 따라 부르게 했는데,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를 듣자 흥이 나서 한참을 일어나서 직접 춤을 추다가 문득 강개(慷慨)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유방은 패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객지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는 고향 생각에 슬픈 법입니다. 내가 비록 관중에 도읍하고 있지만, 만년 뒤에라도 나의 혼백은 여전히 패현을 좋아하고 그리워할 것입니다. 게다가 나는 패공일 적부터 포악한 반역자들을 정벌해 마침내 천하를 얻게 되었는데, 패현을 내 사유지로 삼아 이 곳 백성들에게 부역을 면제해 주어 대대로 납세와 복역이 없게 할 것입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고, 패현의 어른들과 형제들, 부녀들, 옛 친구들은 날마다 흥겹게 술을 마시고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즐겁게 지냈다. 열흘 남짓 지나 유방이 떠나려 하자, 패현의 사람들은 유방이 더 머물기를 원했지만 유방은 "내 수행원이 너무 많아 어르신네들이 비용을 다 감당 할 수 없다."면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떠났지만, 패현의 사람들이 예물을 바치면서 전부 환송하러 나오자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데 3일간 더 머물면서 술을 마셨다.

이 틈을 타서 패현 사람들이 풍읍(豊邑)은 아직 부역을 면제 받지 못했다고 하자, 유방은 "풍읍은 내가 자란 곳이라 잊을 수가 없지만, 옹치를 따라 나를 배신한 사람들이 아닌가?"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패현의 어른들이 계속해서 권하자 못이기는 척 풍읍도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이후 유방은 장안으로 귀환했다. 곧 이어 노관의 배신 소식이 들려왔다.

3.5.5. 그 다음은 당신이 알 것 없소

유방의 상처는 돌아오는 중에 더욱 심해졌고, 여후는 의원을 불러 이를 고치게 했지만 유방은 한바탕 욕을 퍼부으면서 치료를 거부했다.

"나는 평민의 신분으로 일어나 삼척의 칼을 들고 천하를 얻었다. 이것이야말로 천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비록 편작(扁鵲)이 온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유방은 50근의 황금을 의원에게 주고 그냥 물러가게 했다. 이후 유방은 최고 공신인 소하가 위협적이라고 생각해 잠시 감옥에 집어넣었지만, 이내 풀어주고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다. 이 무렵 유방은 죽음이 멀지 않은 자신의 후사로 척(戚)부인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는 문제로 여후(呂后)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태자를 폐하고 새로 다시 임명하는 일이라, 대부분의 공신들은 비판적이었지만 유방의 결심이 너무 확고해서 아무도 함부로 말을 못하고 있었고, 이에 애가 탄 여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여후가 장량의 조언을 바탕으로 상산사호(商山四皓)를 초청해 유리한 고지를 장악하자, 유방도 방법이 없음을 느끼고 척부인에게 한탄했다.

"내가 태자를 바꾸고 싶으나, 저 네 사람이 태자를 보좌하고 있으니, 그것은 이미 태자의 날개가 자라버렸음이라! 이제는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여후는 당신의 주인이로다!"

척부인이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자, 유방은 "그대는 나를 위해 초나라의 춤을 추시오. 나는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리다." 라고 말하고 노래를 불렀다.

鴻鵠高飛 一擧千里

고니새 높이 날아 한번에 천리를 가는도다

羽翮已就 橫絶四海

날개가 이미 자라, 천하를 마음껏 날아다니네

橫絶四海 當可奈何

온 천하를 마음껏 날아다니니, 이제는 어쩌겠는가?

雖有矰繳 尙安所施

비록 화살이 있다 해도 어찌 쏠 수 있으리오

노래를 들은 척부인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73]

얼마 후에 여후는 유방에게 "폐하가 돌아가신 후 소하가 죽게 된다면 후임을 누구로 맡겨야 하느냐." 고 물었고, 이에 유방은 이런 방안을 내려주었다.

"조참이 좋소."

여후는 조참 사후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재차 물었고, 유방은 다시 대답해 주었다.

"왕릉(王陵)으로 하시오. 그러나 왕릉은 우직하므로 진평으로 하여금 돕도록 하시오. 진평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그렇다고 그에게 모든 맡기지는 마시오. 또한 주발(周勃)은 행동거지가 무겁고 믿음직하오. 비록 배운 바는 부족하지만 장차 유씨 왕조를 지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주발일 것이오. 그를 태위(太尉)로 삼으시오."

하지만 여후는 계속해서 그 뒤를 물어보았고, 유방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다음은 당신이 알 바가 아니오!"[74]

유방의 마지막 명령은 번쾌에 대한 부분이었다. 황제가 사망하면 번쾌가 군사를 동원하여 척부인 일행을 몰살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대노하여 번쾌를 죽이려 했으나,[75]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 장락궁(長樂宮)에서 숨을 거두었다. 여후는 4일 동안 유방의 죽음을 숨기며 이를 외부에 알리지 않았는데, 여후에게 공신들을 숙청할 의도가 있음을 눈치 챈 역상은 여후의 측근인 심이기(審食其)를 찾아가 "공신들이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그들이 움직이면 나라 꼴이 참 잘돌아갈 것이다." 는 요지의 협박을 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여후는 계획을 취소하고 유방의 죽음을 천하에 알렸다.

4. 평가

한고조 유방의 다양한 모습들

유방에 대해 일반적인 견해는 능력이 없고 무식하며, 욕심만 많은 인물. 군사적인 능력은 다른 장수들의 방해만 되는 수준이며, 판세를 읽는 능력도 부족하고 그저 운만 좋아서 천하를 얻은 인물이라는 인식이다. 또한 성격적으로도 호쾌하고 남자다운 면모가 있는 항우에 비해 비열하고 추악한 인물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런 인식은 대부분 초한지 소설등에서 퍼진 부분이 대부분이며, 실제 사기나 한서, 자치통감 등의 기록으로 살펴본 유방은 무능하다는 부분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당장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수가 있는 것이, 유방은 그 당시 천하라고 알려진 그 모든 세력들을 밟아눕히고 황제로서 우뚝 선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무능하고 욕심만 많은 인물이었다면 당대 최고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대륙을 재패하는 일은 커녕 수하들의 그릇에 짓눌려 자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세간에는 한고조가 장량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선택하여 황제로 만들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능력있는 신하를 잘 만나 입신양명에 성공한 자 정도로 인식되는 면이 있어도 정작 그 자신의 능력이 한심한 수준이었다면 최후의 승리자로 군림할 수는 없었을 것. 장량이 고조를 선택했다고 해도, 선택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거기다 항우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제아무리 한 쪽으로는 능력자일지라도, 궁극적으로 결여된 능력이 있다면 제아무리 범증같은 모사나 영웅호걸들이 자신의 아래에 있어도 패망할 수 있다. 즉, 아무리 한신과 장량이 잘나봤자, 유방이 결정적으로 무능한 인간이었다면 이미 훨씬 전에 배신당해 몰락했을 것이며 설령 통일을 완수했다고 하더라도 그 뒤의 찬란한 한나라의 문화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4.1. 군사적 능력

본 단락의 한 줄 요약 : 전쟁광, 코른의 신도, 인간흉기 항우의 공격을 탱킹한게 바로 유방.

유방에 대한 가장 크게 비난을 하는 부분이 바로 군사적 능력이다. 대부분의 인식에서 유방은 무능하고 졸렬한 지휘관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특히 상대가 전술적 차원에서 엄청난 능력을 보였던 항우이고, 한신이라는 불세출의 지휘관이 옆에 있었기에 더욱 그러한 측면도 크다.

그러나 실제 역사 기록상에서 유방은 거병 후 대부분의 전투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했으며, 그 대부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조참, 번쾌주발 등의 초반 행적을 살펴보면 이들은 전투에서 앞장 서 싸우는 정도였으며, 실제 군을 이끈건 유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사실 한신은 팽성전투 이후로 마지막 해하전투에서 선봉에 서기 전 까지 항우와 전쟁터에서 만난 적이 없다.

1. 진나라 사수군감(泗水郡監) 평(平)과의 전투

결과 : 승리

2. 사수군 태수 장(壯)과의 전투

결과 : 승리

3. 장한의 별장 사마이(司馬夷)와 탕(碭)을 놓고 벌인 전투

결과 : 처음에는 불리하여 물러났으나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싸워서 탕을 함락

4. 하읍(下邑) 공격

결과 : 함락

5. 항우와 함께 성양(城陽) 공격

결과 : 함락 성공

6. 항우와 함께 옹구(雍丘) 공격

결과 : 삼천군 태수 이유(李由) 참살

7. 항우와 함께 외황(外黃) 공격

결과 : 함락 실패

8. 강리(杠里)에서 진군과 전투

결과 : 승리

9. 창읍(昌邑) 공격

결과 : 실패

10. 진나라 장군 양웅(楊熊)과 전투

결과 : 승리

11. 영양(穎陽), 환원(轘轅) 공격

결과 : 승리

12. 낙양 동쪽에서 진군과 전투

결과 : 유리하지 못해 물러남

13. 남양군 태수 여의(呂齮)와의 싸움

결과 : 승리

14. 석현(析縣)과 역현(酈縣) 공격

결과 : 승리

15. 진창(陳倉)에서 장한과 격돌

결과 : 승리

16. 호치(好畤)에서 장한과 격돌

결과 : 승리

17. 하내(河內) 공격

결과 : 승리

18. 팽성에서 항우와 격돌

결과 : 패배

19. 경(京)과 색(索)에서 초군과 격돌

결과 : 승리

20. 형양성에서 항우와 격돌

결과 : 유방 탈주

21. 성고(成皐)에서 항우와 격돌

결과 : 패배후 탈주

22. 대사마(大司馬) 조구(曹咎)와의 싸움

결과 : 승리

23. 고릉(固陵)에서 항우와 격돌

결과 : 패배

24. 해하에서 항우와 격돌

결과 : 승리

25. 연왕 장도와 격돌

결과 : 승리

26. 이기와 격돌

결과 : 승리

27. 한왕 신과 격돌

결과 : 승리

28. 경포와 격돌

결과 : 승리

29. 묵돌과 격돌

결과 : 패배

출처 : (로그인 필요)

물론 항우와의 교전에서는 최후의 해하전투를 제외하면 유방은 항우를 상대로 이긴 적이 없다시피 하지만[76], 당시 항우는 가히 최강의 힘을 가진 세력이었음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항우 자체가 그 시대 최고의 야전지휘관이기도 하니, 항우에게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졸렬하고 무능한 지휘관으로 보기는 힘들다. 팽성대전에서의 참담한 패배가 가장 큰 굴욕 요소로 손꼽히는 부분이었지만, 이 부분은 특수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77] 이것이 단순히 '군사적 역량의 차이'로만 발생한 상황이었다면 항우는 이후에도 팽성대전같은 전투를 수차례는 더 치러야 했겠지만, 그렇지는 못했다. 항우로서도 특수한 승리였다는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초한대전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항우의 발목을 잡고 중원에서 버틴것은 유방이다. 항우는 형양 등에서 생각보다 빠르게 한군을 밀어내지 못했으며, 이 사이를 틈타 팽월, 한신이 세력을 잡고 항우를 괴롭힐 수 있었다. 이들이 망치에 해당한다면 유방은 전쟁 중 모루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바꿔말하면 유방은 초한대전의 한나라 진영에서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은 것이다. 오히려 그러면서도 자기 병력을 빼서 한신이나 관영, 조참, 유가 등에게 나눠준 것을 보면 진짜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난 뒤 벌어진 여러 차례의 반란을 제압한 인물이 유방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개국 초기의 반란들은 상당히 위험하기 마련인데 유방은 이 반란들을 수차례 제압했다. 그 중 경포같은 인물은 거록대전 당시 눈부신 공을 세우기도 하는 등 당대에도 이름이 높은 지휘관이었지만,[78] 유방을 상대로는 패배하고 말았다.

다만 백등산 포위전은 확실히 유방의 흑역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유목민족의 유인 후 포위 전술은 거의 필살기에 가까운 전법으로서,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 중 한사람으로 손꼽히기도 하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키루스 2세(Cyrus II)조차 죽음에 이르게 했던 방식이다.[79] 그리고 Battle of Adrianople 같은 서양 전투들과 항우와의 동양 전투들을 모두 참조하여 기병의 위력을 분석하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유방은 이미 더 적은 숫자의 항우의 정예 기병대에게 더 큰 대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최후에는 결국 승리하였으니 군사적 능력이 나쁜 것은 아니다. 또한 전투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유방이 아무 생각도 없이 포위에 말려든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유방은 여러 차례 흉노의 상황을 살피면서 신중한 면모를 보였는데, 기만책으로 이를 속여낸 묵돌의 기민함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80]

유방의 진정한 군사적 능력은 전술적 차원이 아닌 전략적 차원이다. 대전략의 개념조차 없던 항우에 비해 유방은 전쟁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이를 달성함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자신의 생각보다 더 옳은 전략을 제시하는 수하가 있으면 지체없이 그에 따랐으며, 항우가 자신의 꽁무니만 쫒아다니는 틈을 타 한신을 파견해 하북을 평정케 했고, 영포를 회유하고 유가와 노관으로 하여금 팽월을 지원케 함으로서 적을 고립무원 상태로 만들었다.

이러한 전략적 식견은 정치적인 부분과 연계가 되기에, 유방의 정치적 능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2. 정치적 능력

유방의 정치적인 능력은 당대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도 가장 고단수라고 칭할 수 있다. 적어도 거시적인 식견이 눈꼽만큼도 없던 항우에 비해 유방은 몇배나 앞선 인물이었다.

행적을 살펴보면 비교적 늦게 합류한 항량의 기의군에서도 유방은 금세 주동적인 위치에 놓인 주요인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81] 또한 이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모아 함양에 입성 한 후에 백성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민심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이는 신안대학살 후 함양에 입성하고 온갖 만행과 행패를 부려 민심을 잃어버린 항우의 태도와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후 관중은 유방의 지배 영역이 되는데, 진나라 사람들이 병사로 나선 진나라 젊은이들을 학살하고 마지막 왕 자영을 참살하며 궁궐을 노략질 하던 항우와 약탈을 금하고 가혹했던 법을 없애고 항복한 마지막 왕 자영에게 조용히 여생을 누리게 자비를 베푼 유방 중 누가 이기기를 바랐을지는 너무 뻔한 이야기다.

또한 살해된 의제를 추모하는 부분이나 팽성대전 패배 후 바로 경포에게 연락을 취해 그를 회유하고, 팽월과는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며 노관 등을 보내 지원을 하는 부분에서 보이듯이 기본적으로 유방은 항우보다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또한 비판받는 토사구팽도 사실 전한과 유방 입장에선 해야 할 일이었다. 애초에 한신만 해도 충신이 아닌 몇번이나 자신을 기만한 위험분자였으며, 통일 후에는 번쾌다다익선등의 일화로 만천하에 그 권위욕을 드러낸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같은 존재였다. 당장 유방 본인도 초가 임명한 제후왕으로 있다가 힘을 길러 천하를 얻은 인물이다. 이러니 유방이 자신같은 불온분자(...)를 견제하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할 노릇. 또한 이 과정에서 주로 책임자와 그 가족들이 제거되는 정도에서 끝나 사건의 파장도 적은 편이었다. [82][83] 유방이 이러한 정책 기조를 깔아 놓았기에 제후왕들의 궐기는 개국 후 한참을 지난 한경제 시절에나 오초칠국의 난으로 표면화 되었으며, 이를 제압함으로서 전한은 군현제도를 확립했고 이후 고대의 초강대국으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또한 미앙궁 축조 등에 대해 비판적이던 모습에서 보듯이 사치만 부리면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편. 애초에 패업을 진시황릉 만들 인원 끌고 가다 탈주하면서 시작한 사람이다.

그리고 유방의 능력 중에 가장 큰 능력은 사람을 쓰는 능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보통 이에 대해 "유방의 부하 운이 좋다." 는 식으로만 이야기를 하는 편이다. 하지만, 운이 계속이어진다해도, 그걸 갈무리하여 성과를 낼 능력이 없다면 말짱 황이다. 유방의 세력은 몇 번이나 와해될 뻔했음에도 그것을 견디어 냈고, 종국에는 당대 최강의 세력과 힘겨운 맞짱을 거듭한 끝에야 패권을 잡았다.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힘든 일은 부하들이 전부 처리해 주고, 유방은 그저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는 식으로만 일을 진행 했다면, 유방 최후의 적은 항우가 아니라 자신 진영의 능신 중 한 명이, 혹은 능신 무리가 되었을 확률이 절대적으로 높다. 항우와 본격 맞짱을 뜨기도 전에 부하 손에 죽었을 거라는 이야기. 당장 유방 휘하에 누가 있었는지를 보라 '그' 한신이다.[84]

유방의 인재 파악 능력은 앞서 나왔던 유언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여태후가 죽어가는 유방에게 만약 소하조참이 죽는다면 그 후임 재상들을 어떻게 임명하면 좋겠냐고 물어보자)

"왕릉(王陵)으로 하시오. 그러나 왕릉은 우직하므로 진평으로 하여금 돕도록 하시오. 진평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그렇다고 그에게 모든 맡기지는 마시오. 또한 주발(周勃)은 행동거지가 무겁고 믿음직하오. 비록 배운 바는 부족하지만 장차 유씨 왕조를 지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주발일 것이오. 그를 태위(太尉)로 삼으시오."

유방 사후 왕릉은 실제로 여태후 일족의 전횡에 우직하게 항거했으며, 진평의 경우 여씨 일족과 적당히 타협[85]하는척 하며 정국의 안정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여태후 사후 주발에게 군권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주발은 이 군권으로 여씨일족을 일대 숙청하여 유씨 왕조를 안정시켰다. 죽어가는 마당에 부하들에 대한 평가를 한치도 틀림없이 하는 유방의 매의 눈이다(.....) -그리고 이 매의 눈은 후손 유비가 물려받았다 카더라-

실제 유방은 성격, 면모, 출신배경 조차 모두 제각각인 한군의 인물들이 각자 제각각의 이야기를 하면, 유방은 개중에서 가장 좋은 판단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방 특유의 리더쉽은 진평의 등용 사례 등이 있다.

무엇보다 유방은 자신에게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판을 경청 할 줄 알았다. 유방의 부하들은 수차례 엄청나게 강도 높은 직언(直言)[86]을 퍼부었지만 싫은 소리를 못참던 항우에 비해 유방은 그 대부분의 말을 수용했다. 가장 적절한 사례로 육가(陸賈)와의 대화가 있다.

"이 어르신(乃公)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서(詩書)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육생이 대답했다.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고제(유방)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나를 위해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내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으며, 과거에 나라를 얻은 일, 잃어버렸던 일을 글을 지어 올려주시오." ─ 사기, 역생 육가 열전

이렇게 충고를 들을 줄 아는 태도는 유방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아무리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그 충고와 제안을 써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한신도, 진평도 본래 항우의 군단에 있었다. 물론 백등산 포위전에서 유경의 말을 무시했다고 혼쭐이 난 사례가 있기는 하다. 다만 이 경우는 유방이 이미 나름대로 경계를 하고 확신을 가진 후 전투에 나섰을 시점에서 유경의 충고가 있던지라 무르기가 곤란했던 점도 있었다. 유방은 백등산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유경에게 사과한 뒤 그의 조언을 자주 들었다.

그리고 여러 비판을 수용할 줄 안다는것은 자신의 그릇을 정확하게 재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방이 "나는 한삼걸보다 지략, 내정, 통솔 능력이 모두 부족하지만 이들을 쓸 줄은 알았다. 항우는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에서 보이듯이 유방은 독선적인 지도자들이 자주 보이는 지독한 아집, 자만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유방과 비슷하게 가방끈이 짦은 편이었던 아돌프 히틀러 등이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로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해버리며 계속 삽질을 하다 몰락해버린 것과 대조적이다.

즉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참모들의 의견을 수립해서 채우는데, 그 의견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개중 가장 적절한 의견을 수용 할 줄 아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날선 비판을 수용할 줄 알며, 자신의 태도와 행적을 반성하고 나아지는 지도자 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지도자상의 끝판왕 급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제군주로서의 지도자의 틀 안에서 말이다.[87]

고문원(古文苑)에 실린 手敕太子文에서는 유방의 이러한 태도가 가장 적절하게 보여진다. 이 글은 유방이 태자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하기 위해 지었다는 부분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난세를 만나 진나라가 학문을 금하자, 스스로 기뻐하여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되고 난 뒤로부터 비로소 때때로 책을 살펴보았는데 글 쓴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에 비추어 내가 옛날에 행동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니 옳지 않은 일이 많았다."[88]

4.3. 인간적인 면모

2차창작물에서 대체로 유방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토사구팽 등을 이유로 비열하고 추악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편이 많고, 그 적수인 항우에 대해서는 남자답고 화통한 면면으로 묘사되는 편이 많다. 실제로 단순한 태도에서 보자면 귀족 출신인 항우는 다른 사람들 공경하고 배려 할 줄 알았던 편에 비하면, 유방은 오만무례하고 마구 욕을 내뱉는 편이었다.[89][90] 고대에 이건 생각보다 큰 결점이다. 소하도 유방이 너무 오만하고 무례하고 욕을 많이 해서 호걸들이 유방의 곁을 떠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귀족 출신과 평민 출신으로 인한 기본적인 몸가짐의 차원을 지나면, 실제 항우의 인물됨은 작은 일에서는 멋진 일을 보여주면서 정작 크게 베풀거나 내줘야 할 때는 쓸데없는 의심을 하며, 비유적 표현이겠지만 그야말로 관인이 닳아 없어질때까지 어루만지며 아까워하기 일쑤였던 것이 비해, 유방은 일단 결정을 내리면 그야말로 배포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신이 제나라의 임시 왕을 칭할때 처음에는 욕을 퍼붓다가, 지금은 한신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자 이내 "사내 자식이 임시 왕이 뭐야, 그냥 제나라 왕 해라!" 고 하던게 대표적. 애시당초 한신의 인사 자체도 그저 소하의 추천만 듣고 아무런 공적도 없었던 인물을 단숨에 대장군에 봉했던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또한 자신을 배신하기도 해서 극도로 싫어하던 옹치를 대접하는게 이득이 된다고 판단하자 지체없이 그렇게 했다. 이렇게 유방은 개인적인 원한보단 장기적인 이득을 중시하였다. 또 항우의 심복으로서 몇 번이나 자신을 괴롭힌 계포에게 그를 붙잡거나 죽이면 현상금을 주겠다고 수배를 내렸지만 계포를 숨긴 사람이 하후영을 만나 "어차피 항우는 망했는데, 굳이 그 부하를 죽여봤자 괜히 폐하의 속만 좁아보이지 않을까요?"라는 요지의 논리로 계포를 변호했고, 하후영이 그걸 그대로 유방에게 전하자 바로 용서해주고, 낭중으로 임명시켜줬다. 거기에 계포는 한고제 때는 물론 혜제, 3대인 문제 시대까지 살아서 중랑장과 하동 태수를 역임하며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

또한 비판을 들을 줄 알았다는 태도에서 보이지만 유방은 자기에게 직언을 빙자한 폭언을 퍼붓는 신하들에 대해서도 배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수차례 신하들에게 무례하다는 언급을 듣고, 심지어 주창(周昌)에게는 "폐하께서는 걸주(桀紂)와 같은 폭군이십니다." [91]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지만 유방은 그저 웃고 말았다.[92]

이런 면모는 중원제패 후 도읍을 정할 때도 잘 드러난다. 유방은 수자리하러 지나가던 제나라 평민 유경의 말을 듣고 그 날 하루만에 도읍을 바꾸는, 이 이상 보여주기도 어려울 만큼의 화통함을 보였다. [93] 참고로 비슷하게 항우가 수도를 옮길 때 반대 의견을 제시했던 한생은 개무시당한 다음 뒤에서 원숭이라고 욕했다가 냅다 끓는 솥에 던져졌다(...). 어쩌면 이 일 때문에 유경의 말을 귀담아들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유방은 정말 깡이 좋았는데 항우와의 대치에서 항우가 직접 쏜 화살에 가슴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우를 무서워하긴 커녕 그 통증을 참아가며 항우를 비웃었다. 그러면서 유방은 갑자기 허리를 굽혀 앉더니 자신의 발을 쓰다듬으면서 항우에게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봤나. 어린 아이가 감히 어른의 발을 쏘다니!"라는 말로 일갈했다. 불리해서 도망을 칠 지언정 겁을 먹은 적은 없었고 아무리 항우에게 수세에 몰려도 항우를 우습게 여겼을 뿐이었다. 그 정도로 유방은 배짱이 좋았다.

숙청의 경우 아무렇게나 숙청한 것은 아니다. 또한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를 꾸몄던 관고(貫高)가 기개있는 모습을 보이자 장오(張敖)를 조나라 왕에서 해임하는 정도로 처벌을 끝낸다. 토사구팽에 있어서도 유방이 이들을 견제할 목적을 가졌다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 먼저 책 잡힐 만한 행동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신만 해도 유방을 수차례 기만했고, 노관은 공이 부족한 인물을 친구라고 왕으로 봉해주니 뒤통수를 쳤다. 장도나 경포의 경우 자신들이 알아서 반란을 일으킨 편. 잘못 없이 억울하게 제거된 것은 팽월뿐이다. 소하의 경우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아들여 숙청을 그만 두었다. 이성왕 숙청은 사실 한고제보다도 여후의 의지가 더 강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사실 유방은 후대의 홍무제, 영락제와 같은 진짜 숙청 전문가들과 비교한다면 토사구팽의 대명사라 불리기에는 억울한 면이 많다. 실제로 노관을 제외하면, 그와 거병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풍읍과 패현 출신의 동지들중에 토사구팽당한 이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노관도 유방이 죽지 않았다면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듯 위험 인물(몇 명은 자멸한)들 몇을 제거한 유방은 비열하고 잔혹하다고 욕을 먹고, 힘도 없는 수십만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생매장한 항우는 남자답고 화통 하다고 2차 창작물에서 띄워주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왜 그런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유방이 그저 자신의 탐욕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다면, 그의 사후에도 유씨 황족을 지키려 노력한 충신들이 존재했을리 없다.

다만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은 확실히 못 되는 편이었다. 여색을 밝히는 편이라 여후가 심하게 맘고생을 했고, 자식들을 팽성대전에서 던져버린 사례하며, 백등산 포위전 이후 묵돌의 압박이 심해지자 당시 장오와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딸인 노원공주를 묵돌에게 줘 버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작은 원한을 잊고 옹치를 대접해준 사례처럼, 더 큰 목적을 위해서는 가족도 던져버릴 수 있는 사람. 지도자로서는 나쁘다고만 하긴 그렇겠지만 부모로서는 무책임하다.

거기다 팽월은 의심으로 제거하고 소하마저도 한때 가뒀으면서 정작 외척인 여씨 세력은 견제하질 않아 사후에 여씨 세력이 날뛰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한다. 실제 진평같은 공신 세력들이 여씨 세력을 물리치지 않았다면 한나라는 몇대 만에 끝장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이고, 제후왕들의 숙청이 끝나자마자 죽은 탓에 여씨 쪽에 손을 댈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죽기 직전 번쾌를 참수하려드는 것으로 여씨 일족을 견제하려 하기도 했고. 후일 여씨를 몰아낸 신하들도 전부 유방이 추천한 인물들이다.[94][95]

2차 창작물에서의 대접의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다. 유방은 여색을 밝혀서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자면) 여자관계가 많이 추잡했지만, 항우는 평생동안 여자가 우미인 한명 밖에 없었다. 당시 사회상은 높으신 분들은 첩을 여럿 두었고, 딸자식은 애비의 소유물로 간주돼서 가문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기줄까 저기줄까 재고 따져서 시집보내고 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오늘날 식으로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나 2차 창작물의 특성상 주인공에게는 히로인과의 드라마틱한 로멘스가 들어가기 마련인데, 일부일처제가 상식인 현대인의 시점으로 보니 항우는 '귀족출신(귀공자)' + '중국 역사상 최강의 무장'임과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라는 간지폭발매력적인 캐릭터가 되지만, 이쪽 방면에서의 유방은 '듣보잡 평민 출신 건달'이 이여자 저여자 만나고 다니는 주제에 무능하기까지 해서 항우에게 여후를 포로로 잡히게 하는 둥 '마누라 고생시킨 호색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항우처럼 킹왕짱 쌘것도 아니고, 무력이 후달릴 뿐만 아니라 항우에게 쳐발리고 도망가던 와중에 자기 살려고 자식새끼를 던져버리려고 한 일화도 있는데다가, 끝으로 천하를 얻은 뒤에는 생사고락을 같이한 개국 공신들을 토사구팽해버림으로서 '비열하고 잔혹한' 악역 확정. 수십만의 죄없는 양민들을 학살/생매장한 항우의 악행은 그냥 언급하지 않거나 '그런 일이 있었다'하고 대충 넘어가면 땡.참 쉽죠? 반대로 항우가 여자관계가 추잡한 호색한이었고, 유방이 여후 일편단심의 순정남(?)이었다면 2차 창작물에서의 대접이 크게 달라졌을지도... 거기에 사람됨이라도 뭔가 기품이 있었다면 모를까, 사서에서도 대놓고 욕을 자주 했다거나 거만하다거나 하는 인간적 단점들이 드러나서 간지가 안나기 때문에(...) 더더욱 비열한 인간 쓰레기로 묘사하기 쉬워진다(...)

그리고 유방이 '인덕이 있어서' 사람들을 모았다고 하는것도 분명 대단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리 멋진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삼국지의 유비는 수백년간 이어져왔던 한나라 황실의 후손으로 한나라를 부흥시킨다는 대의명분이라도 내세울 수 있었지만[96], 초한전쟁기라는 난세의 인물들은 그런 명분도 없이 그냥 다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자기보신와 영달을 위해 행동했을 뿐이다. 즉 '유방 밑에 있는것이 수지타산에 맞으니까', '항우 밑에 있는것보단 더 짭짤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행동한 것일 뿐. 물론 사람을 끌어들이는 순수한 마성'매력'이나 적제적소에 사람을 기용하고 적절한 논공행상으로 부하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탁월한 관리능력/정치력이지만, 유방이 딱히 '황실재건', '역적토벌' 따위의 정의롭거나 천하에 평화를 가져다주겠다 하는 고차원적인 이상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역시 생각하기 나름이다. 사실 이상이 없기로는 항우도 마찬가지,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질이 나쁘다. 항우의 경우 처음에는 최소한 진나라 체제를 무너뜨리고 과거 춘추전국시대로 회귀하겠다는 복고적 이념이 희미하게나마 있었지만 결국은 의제를 죽여서 스스로의 구상을 무너뜨려버렸기 때문이다. 또, 그 시점에서는 이상이 중요한게 아니라 일단 누군가가 먼저 중원을 통일하고 혼란한 세상에 평화와 질서와 안녕을 가져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이후 고제는 숙손통을 앞세워 제도의 정비 등을 통해 새로운 제국 건설을 이룩했으니 딱히 흠잡을 일은 아니다.

또한 인간적 단점들도 오히려 '이런 건달같은 인간이 황제가 되었다는 입지전적인 스토리에 기묘하게도 중요한 상황에선 옳은 결정을 하는 모습에 오히려 인간적인 영웅상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특히 전형적인 귀공자스러운 영웅과는 달리 서민적인 맛이 있어서 오히려 이런 유방을 더 선호하는 작가들도 많다. 물론 정사에서는 일개 건달이라고 보기 힘들고 사실만 보면 지식인독학으로 글을 익히고 당시에 귀했던 서적들을 구해서 배웠다. 시대상 인구 대비를 감안에 무예한신과 비슷한 기록이 있는데, 깡패들이 도발하자마자 베어버리니까 나머지 깡패들이 칼질만 보고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닫고 살려달라고 빈다.도 뛰어나고 외모도 용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사람들도 자신을 잘 따르게 만들었다. 따르는 집단의 위세를 봐도 그 지방 유력자들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고 도적단을 만드니 토벌에 답이 없었으며 직접 근방 도적들을 토벌하기도 한다.지방군과 싸워서 이기고 일종의 민병대(도적)들도 때려잡는 세력을 보유한 일개 건달(?) 출신만 엘리트가 아니지,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던 셈.[97]

요컨대 행동거지가 너무 양아치같을 뿐이지 태생이 먼치킨

4.4. 총평

항우란 이름의 최고의 야전 지휘관이 군주라는 과분한 지위에 있어 패망했다고 한다면, 유방은 오직 군주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라고 할 수 있다. 유방의 전술적 능력은 평범했고 정치적 식견도 일반적인 가신의 재주로는 부족한 편이었으나, 여러 사람을 휘어잡아야 할 난세의 군주로서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을 줄 알고, 사고가 유연하며, 옳은 말을 따를 줄 알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파악했으며, 결정적으로 이러한 능력을 써먹을 수 있는 배포를 가지고 있었다. 군주감으로서는 이만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유방은 실수를 안하는 초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반성할 줄은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항우와는 극단적으로 대조된 인물이었다. 인간성이 완벽한건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군주로서 가져야 할 장점만 거의 골라서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최초의 평민출신 군주로서 이전의 관습과는 상관없이 즉위한 유방은 이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여 하나로 만든것은 진나라였지만 이는 곧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유방은 한나라를 탄생시키고 개국 초기의 정권을 단단하게 닦아 진나라처럼 모래성으로 무너지는 일을 막았으며, 이후 한나라는 전한 - 후한 400년의 역사를 이어나가며 이전까지 분열의 역사였던 중국을 '하나의 중국' 으로 만들었다. 언어도, 문자도, 단위도 다 제각각이었던 '다른 나라' 들은 외관, 혈면,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나라의 치세를 거치면서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이 한나라에서 시행된 유교 국교화, 군현제도 정비, 율령(律令)의 정비 등이 시행되었고 이것이 향후 2,000여년간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것을 생각하면 유방은 그 출발점을 닦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98]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중화(中華)를 시작하게 했던 인물. 가히 첫번째 중화인 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유방 개인의 차원이 아닌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겠지만, 유방의 적수였던 항우가 봉건제에 대한 선호부터 해서 전국시대 사람 그 자체였던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대조적인 편이다.

5. 기타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乃公居馬上而得之,安事《詩》、《書》!" ─ 역생 육가 열전

"竖儒,几败而公事!" ─ 유후세가

여기서 보이는 내공(乃公)과 이공(而公)은 비슷한 표현인데, 이는 본래 '자신' 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乃나 而는 "너" 아니면 "자네" 정도의 의미가 되는데, 뒤에 公이 붙이니 그렇다면 "자네 아버지" "네 어르신" 정도의 의미가 된다.

그런데 유방은 여기서 이 표현을 자신에게 사용했다. 이건 자기를 일컫어 "네 아버지" "(너희 아버지에 해당하는) 이 어르신" 같은 묘한 어감이 된다. 마찬가지로 상대 역시 "아들" "조무래기" 같은 상황이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하고 어감을 살려 문장을 번역하면 이런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어르신께서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으셨다. 그런데 시, 서 따위가 대관절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하찮은 유생 놈 때문에 이 어르신이 대사를 그르칠 뻔 했구나!"

물론 황제 등은 3인칭으로 자신을 호칭하기도 했지만, 이건 황제의 어투라기보다는 건달쫄따구에게 하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 '쫄따구 풋내기' 등을 일컫는 수자(豎子)[99]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와 대조해서 보면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다.

"吾惟豎子固不足遣,而公自行耳。" ─ 유후세가

이 부분은 경포의 반란때 여후의 아들인 혜제가 나설 지경이 되자, 여후가 울면서 만류하여 유방이 대답하는 부분이다. 기서 유방은 자기 아들을 수자(豎子)로 표현하고, 자신을 이공(而公)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대략 이런 늬앙스가 될 수 있다.

"나도 그런 조무래기가 나서기에 적절치 않다는건 알고 있었다. 이 어르신께서 직접 가시겠다."

혹은,

"그 조무래기가 시원치 않으니, 당신 남편이 나서야겠구만."

이런 느낌으로, 여하간 평민 출신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어법이라고 해야 할 듯 싶다. 사실 멀리 갈 것 없이 유방의 이런 어법은 오늘날로 치면 싱하형의 어법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연상하면 쉬울 듯하다. 남자가 좀 허세를 부리거나 잘난 척 할 때 쓰는 "이 형이 말이야.", "오빠가 한 턱 쏜다" 오빠믿지? 이런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될 듯.

자신을 따르는 신하를 고발했다고 코를 잘라버린 적이 있다(...).

正疆首茉事而當,上使參乘,解玉劍以之。天下定,出以爲守。有告之者,上曰:「天下方急,汝何在?」曰:「亡。」上曰:「正疆沐浴霜露,與我從軍而汝亡,告之何也?下廷尉劓。

정강正疆이 수차례 사건에 대해 하는 말이 타당하자, 주상(유방)은 수레에 참승하도록 하고 옥검을 풀어 그에게 채워주었다. 천하가 안정되자 (정강을) 내보내 군수로 삼았는데 그를 고발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주상이 물었다.

"천하가 위급해졌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도망쳤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주상이 말하였다.

"정강은 서리와 이슬로 목욕을 하며 나와 더불어 종군하였는데, 너는 도망을 하고서 이제 고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리고 정위에게 하명하여, 코를 베어버리는 의형에 처하였다.

- 태평어람太平御覽 648, 초한춘추楚漢春秋

한국의 성씨 유(劉)씨의 먼 조상이기도 하다. 유(성씨) 문서 참고.

6. 대중문화 속의 한 고조 유방

요코야마 미츠테루항우와 유방에선 그럭저럭 유비와 유사하게 묘사해 놓았다. 아예 그 이미지 때문인지 만화 내용이 항우가 자결하는 데서 끝나고 이후 유방의 숙청과정은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근데 나중에 나온 요코야마 미츠테루 판 사기에서는 숙청과정이 나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참고로 생긴 모습은 항우와 유방에서의 그 얼굴 그대로다.

적룡왕에서는 전형적인 모토미야 히로시형 열혈남아지만 원판이 원판이니만큼 인간이 좀 띨빵하게 나온다. 그러면서 부하들을 잘 챙기는 모습을 보이지만 마지막 두 페이지의 토사구팽이 그 이미지를 다 깬다.

고우영 초한지에서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어리버리하고 개념없고 싸가지없고 능력없는 전형적인 안하무인 건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는 짓만 보면 고우영 만화에 등장했던 수많은 찌질이 소인배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을 정도. 항우를 등진 수많은 사람들이 유방에게는 항우에게 없는 덕망이 있다...면서 몰려드는데 도대체 고우영 화백이 묘사한 유방 어디가 그렇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 하긴 그만큼 뒤통수를 쳤으니.

고우영 삼국지의 유비도 좀 희화화한 모습이 있지만 중반이 지나면 계속 간지를 뿜어내며 겉으로는 쪼다처럼 보여도 속은 광대한 야심을 갖춘데 비해, 유방은 시종일관 주색잡기에 빠져서 찌질대다가 천하통일 이후에도 공신들을 신나게 숙청하며, 장량이 은퇴한다고 전하러 올 때도 '혹시 쟤도 벼슬달라고 하면 어쩌지?' 쟤도 확 토사구팽해버려? 하며 불안해하는 쫌스러운 모습만 보여준다. 고우영 화백이 자료 조사하면서 유방에게 큰 실망을 한 듯. 사실 초반만 해도 능글맞긴 해도 부드러운 면모를 보였고, 중간까지도 직언은 잘 받아들이고 충신들을 아끼기도 했는데 수수대전 직전부터 갑자기 오만하고 의심만 많은 인간 쓰레기로 추락했다. 유방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장량까지 사실상 내쳐졌다고 묘사되는지라 원래부터 비열한 인간으로 묘사하려 한건지 권력맛을 보고 타락한 영웅상을 그린건지 애매한 부분. 사실 항우도 그리 좋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후에는 간지를 내뿜으며 사망하기에...일단 유비도 그랬지만 유방도 고우영 화백 본인의 얼굴을 오마쥬해서 그렸다. 사실 유방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숙청 내막이나 이유를 살펴보면 유방이 지나치게 능력이나 성격 등에서 까인 감이 있지만 이때 당시 유방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평가가 없던 상황이기는 했다.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유비의 출신을 설명하면서 한 고조 유방이 잠깐 설명되는데 그의 모습에 여성의 가슴을 붙여놓은 개그를 선보인다.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개그.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능글맞은 이미지가 더 강조된 얼굴로 묘사된다.[100] 한신과의 '다다익선' 대화에서 한신의 답변을 듣고 "그러하냐?"라며 한신을 향해 싸늘한 미소를 날리는 장면은 제법 섬뜩한 느낌까지 들 정도.

문정후의 초한지에서는 게으르고 느긋해서 허풍선이 취급받지만, 차후 천하를 손에 쥐는 인물답게 범상치 않은 인물로 등장한다. 다만 후반으로 갈수록 초반의 개 같은 성격도 어느 정도 고쳐지고 폭풍간지가 이어지는 항우와 달리, 후반으로 갈수록 초반의 느긋하면서 비범한 이미지나 실제 역사의 격의 없고 호쾌한 면이 많이 사라져 이미지를 좀 많이 구긴 캐릭터. 물론 후반까지 가서도 한신이 인정하는 천우신조나 인품에 대한 언급이 지속적으로 나오기는 한다.

김태권이 십자군 이야기를 구석탱이에 처박아 놓고 그리고 있는 '한나라 이야기'에서도 능글맞고 참으로 서민적으로 묘사했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말풍선 밑에 '빌어먹을', '젠장맞을' 정도의 욕설은 기본으로 깔아두고 있다(…).

조조: 황제의 반란이란 영화에서 삼국지조조가 유방에 대해 잠깐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헌제가 "이럴거면 차라리 나를 죽여라"고 하자 조조가 이에 "폐하가 고조와 같았다면 저는 기꺼이 폐하의 장량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한다.

성룡이 제작한 드라마 신화에서는 리역상이 분하였다. 역시나 처음에는 별볼일 없어보이는 백수건달처럼 보였지만, 유방을 알아본 역소천의 접근으로 의형제가 된다. 앞서 역소천이 항우와의 인연으로 의형제를 맺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항우와도 의형제로 엮인 셈(...) 극이 진행됨에 따라 임기응변에도 능한 모습을 보이며 야심을 드러내지만, 역소천과 고요를 만리장성 축조 노역과 관노로 넘겨버리면서 만악의 근원이 된다.

(항유기의 유방)

코에이의 초한지 기반 게임인 항유기에서는 항우와 함께 양대 주인공 중 한 명. 전투력과 용병은 그야말로 좌절이지만 삼국지 시리즈의 유비는 충분히 강할지도? 통솔력이 이 게임 전무장 중 최고치를 자랑한다. 단, 이 게임의 통솔력은 삼국지 시리즈의 통솔력과는 다르다는 것[101]. 일러스트는 사서에 남은 특징을 그럭저럭 잘 살린 편. 유방으로 이 게임을 클리어하면 황제가 되어 금의환향하는 장면이 엔딩으로 뜬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고대무장중 한 명으로 등장하는데 매력이 유비조차 뛰어넘는 최고치인 100인 것을 제외하면 다른 능력치는 평균 50~60대 정도로 웬만한 B급 무장들만도 못한 인물로 나온다. 기존 초한지 관련 창작물들에서 묘사되는 사람을 끄는 매력은 있지만 그 자신은 운만 기막히게 좋고 능력은 고만고만한 인물로 표현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자기 후손도 오랫동안 이런 인물상을 받으며 능력이 저평가를 받아왔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삼국지 9 PS2판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이떄 매력이 없는지라 통무지정순으로 70/76/61/77의 평균적인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후손에 비해 공격계 병법은 아예없는게 흠. 모략은 배반, 책략은 매도,고무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10에서는 매력이 100이지만 전작에 비해 그 외의 능력치는 70을 넘는게 하나도 없다. 그리고 본작에서 가진 특기로는 징병, 고무, 도발, 주호가 전부. 농민 출신 황제이니 농업 특기를 줄 법도 하지만 웬일인지 농업 특기가 없다. 신분이 농민일 뿐 직업은 건달 이었으니까. 능력치는 56/65/50/69/100.

삼국지 11에서의 특기는 강운. 정말 걸맞는 특기다. 역시 유비는 충분히 강한 건가? 능력치는 전작에 비해 상향이 되었으나 67/66/44/58/100으로 지력,정치가 더욱 너프가 되고 여전히 C급무장이다. 얼굴에 수염이 풍성했다는 기록과는 달리 일러스트는 그냥 경박해 보이는 사람처럼 그려 놓았는데 어떤 의미에선 제대로 표현한 걸지도.

삼국지 12에서는 능력치가 전작에 비해서 통솔 87[102], 무력 70, 지력 59, 정치 83[103]으로 상향되었다. 그리고 삼10에서는 특기가 적었지만 본작에서는 특기가 무려 8개로 늘어났다.[104] 일러스트도 적절하게 썩소를 보인다. 자기 후손처럼 전법이 의용병이라서 지속시간이 잛지만 병력회복을 가능해서 쓸만한 좀비이다. 다만 전국칠웅의 고대무장들이 너무 빨리 급조한지. 한고제의 친애무장 데이터에 신릉군이 빠졌다.신릉군덕후인데. 친애무장에 신릉군이 빠져있네?

6.1. 초한전기

초한전기에서는 영화 영웅에서 진시황, 드라마 강희대제에서 강희제를 맡은 것으로 유명한 진도명이 유방으로 나온다.

한국 더빙판 성우는 홍진욱. 항우와 같이 주인공급이며 1회에서 자신이랑 눈이 맞은 조씨를 희롱한 진의 관리를 손봐줄때 처음 등장한다.

6.1.1. 행적

초반부엔 건달의 포스가 좔좔 흐르며, 노관의 도박빚을 대신 값아줄려고 집안 물건을 내어주다가 다 큰 나이에 아버지에게 맞을뻔 하고 자기 형수에게 국좀 달라고 하자 형수가 국이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차갑게 "없다"라고 말하는 등 갱힐후 예약이요 가족에게도 영 좋지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 특히 형수들 구박이 심한편인데 나가서 돈도 못벌고 맨날 놀러 다니니 눈에 가시인 듯. 뭐 일은 안하고 맨날 놀러다니는데다 남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등 집안 손해보는 일만 해대니 가족들이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었다.

진시황의 행렬이 지나가자 소하와 같이 숨어서 구경하는데 "사나이라면 저 정도쯤은 해야지"라고 말한다. 물론 옆에 있던 소하는 이 이야기를 듣자 '저 미친놈'이란듯이 쳐다본다.(…)

건달이지만 사람 끄는 모습은 이미 초반부터 나와서 하후영이 조씨의 술집에서 술값 때문에 유방 패거리와 싸우다가 상처를 입자 그를 치료해주었고 이후 감격한 하후영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유방의 이름을 대지 않는다[105]. 이후 여공이 이사오고 나서 일만전을 내겠다고 허풍을 치면서 잔치에 오는데, 여공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몰아내줘서 호의를 얻게 된다. 이후 여치와 결혼하게 된다.

한편으론 나중에 토사구팽을 할 유방을 예고하는 것인지 냉정하거나 뻔뻔한 모습도 보인다. 노관이 돈을 떼먹고 유방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털어놓자 돈떼먹는 걸 문제 삼은게 아니라, "그럴땐 끝까지 잡아떼었어야지"하고 충고를 해준다거나, 조씨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고도 "내가 나이가 몇살인데 계속 건달로 살순 없다"는 이유로 여치를 선택한다. 물론 아예 냉혈한 철면피스러운건 아니고, 조씨와 인연을 끊을 때 비가 쏟아지는 길가에서 주저앉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잠시 흐느낀다. 물론 다시 얼굴표정을 고치고 여치에게 돌아가지만.[106]

항상 패거리들과 건들 건들 다니는 놈팡이 건달 같지만,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해결해주며, 정장으로서도 역할도 제대로 한다. 이웃마을과 물줄기 다툼이 벌어졌을 때 꾀를 써서 이웃마을 사람과 옹치를 골탕먹인 다던지, 부역에 동원 될 인원과 징발을 두고 소하와 나름 협상하기도 한다던지 말이다. 여산부역으로 가던 도중 징발인원에서 도주자가 생기자 무대뽀별 고민도 없이 징발자들을 풀어주려 하고 이에 반대한 관병수장을 번쾌가 죽이게 된다. 그리곤 '마을에 가도 죽고 날 따라와도 사는 건 보장 못함. 알아서해라'하곤 패거리+ 따르는 사람들과 망탕산으로 향한다.

한편 이로인해 가족들도 옥에 갇히게 되지만 소하의 보살핌으로 별 어려움은 겪지 않게 된다. 도리어 그간 유방의 쌓은 친분인맥이 효력을 발휘해 조참, 하후영 외 유방의 지인들이 알아서 유태공을 대접하게 된다. 유태공은 그제야 아들의 친분관계에 흐뭇.

망탕산에서 식수 부족과 식량 부족에 시달리다가 원래 있던 그곳 관리를 죽이고 패현을 점령, 소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추대를 받아 패공이 된다. 흰 뱀을 죽였다는 사기의 일화는 처음엔 노관이 망탕산에서 허풍을 친 것을 유방을 패공으로 추대할 때 하후영이 패현의 원로들을 설득하기 위해 써먹는 것으로 나온다.

패공이 된 뒤 이름도 소하의 조언을 받아 방으로 고쳤다. 소하는 유방을 주공이라고 부르면서 말을 높이지만, 유방 역시 소하를 계속 소대인이라고 부르면서 말을 높이고, 계속 조언을 구하고 예전에 여김없는 관계를 가진다. 옹치가 배신을 해 뒷통수를 치자 가왕 경구에게 구원군을 요청하러 가게된다. 구원군을 요청하러 가는 도중 드디어 장량을 만나고 그와 함께 동행하지만 경구군은 이미 항우군에 점령당했고 지원군을 못얻을 처지에 놓였으나 기지를 발휘해 용저와의 대면끝에 항우에게 지원군을 얻기 위해 항우와의 첫 대면을 한다.

첫 대면시에는 말 그대로 유방 군대는 본거지도 잃고 거지꼴로 구원군을 빌리러 찾아왔으나 항우쪽은 군대도 잘 훈련하고 있고 군영도 잘 갖춰져서 둘의 대비가 확연히 난다. 이런 꼬라지 때문인지 항우는 유방을 보자 홀대해 병영도 아니고 마굿간만 내준다.(...) 그래도 옹치에 대한 복수의 결의를 보이자 항우는 군사 8백을 빌려준다고 하고는 출진할 때는 5천을 빌려주긴 했다. 물론 패현을 찾은 후에는 유방의 군사까지 항가군에 합류한다는 조건을 걸었지만. 장량도 유방의 풍모를 보고 그에게 자신의 사병을 기꺼이 내준다. 그 후 패현을 점령했던 옹치를 물리치고 다시 패현을 점령하지만 항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패현을 떠나 항우 밑으로 들어간다.

항우 밑으로 들어갔지만 영 좋지 못한 취급은 계속 받고 있으며 범증까지 관심깊게 보고 있어서 힘든 생활을 계속 하는 듯 했으나 양성을 함락시키는 등 나름 큰 활약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본대와 떨어져 별동대를 만들어 이끌던 중에 항량이 장도에서 장한의 계책에 걸려 위기에 처하자 부하들 모두가 반대 하지만 그를 구하기 위해 장도에 가려한다. 하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번쾌가 뒷치기로 기절시켜 가까스로 막았다. 이후 깨어나선 자신을 때렸던 번쾌를 용서하지만 화를 내는걸 봐선 항량을 구하러 했던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구하기 위해서 부하들의 반대도 무시하고 장도로 갈려고 했던 듯 하다.. 그렇지만 이후 항우가 온다는 소리를 듣자 항우가 질책 할것을 예상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명을 번복하여 채찍질을 하라고 명령한다. 다만 진심으로 벌하는게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서인 만큼 살살 치라고 조참에게 따로 명령도 한다. 그리고 항우가 들어올 때 부하들이 가자는 걸 자기가 거부했다면서 항량의 죽음의 조의를 보이자, 들어오는 길에 번쾌가 맞는 걸 본 항우유방이 가려던 걸 부하들이 막은 거 아니냐고 하고는 다른 제후는 본체만체 할 때 유방만이 숙부를 구하려 했다면서 공경의 뜻을 보이고 의형제를 맺는다.

항우를 견제하려는 송의와 초회왕에 의하여 무안후로 봉해져서 드디어 제후의 반열에 오른다. 그리고 하사받은 저택이 있는 팽성으로 떠나면서 항량 전사 이후 머무르던 마을에서 만난 척부인을 데리고 간다. 이 때 정실부인은 없는 살림이 형수와 사이도 안 좋아서 고생하는 중인데, 따로 데려오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다.여후가 척부인 미워할만 하네.

회왕이 유방에게 관중으로 진격하라고 하자 군사 부족 등으로 어렵다고 엄살 떨다가 넌지시 관중을 먼저 점령하는 제후를 왕으로 봉한다고 선포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회왕이 선포하자 관중을 향해 진격을 시작. 이 중에 범증에 회유된 위표가 부하를 보내 유방군의 후미의 군사들을 죽이자, 이를 알고 유인하여 상대를 죽인다.

그리고 역이기가 진류성 현령을 죽이고 항복하자 그를 참모로 들인다. 계속 진격하여 진군과 대치하며 어려운 싸움을 하던 중 적 증원군이 왓다는 소리에 최후도 생각하지만, 실은 장량이 한나라 군사를 진군으로 위장시킨 것이라, 그와 재회한다. 적을 격퇴한 유방은 관중 점령 이전에 먼저 장량이 있는 한나라를 돕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점령한 한(韓)나라의 도읍이었던 양적을 한왕에게 내어주고 대신 장량을 달라고 청한다. 유방은 1년만 빌리겠다고 했지만, 양적을 거저 찾는 것에 넘어간 한왕은 겨우 바라는 게 장량이냐며 1년이고 뭐고 그냥 가지라고 하고 장량을 유방에게 보낸다.

이후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으로 무난히 진격, 호해의 뒤를 이은 진왕 자영의 항복을 받아내고 항우보다 먼저 함양 입성에 성공한다.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을 점령해서인지 호해의 후궁들이나 끼고 놀면서 정신을 못차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량항우가 가만히 있지 않을것이라며 대책을 세워야 된다고 하자 이제까지 조언을 잘듣던 모습도 내팽겨치고 "내가 함양을 점령했으니 이젠 왕이다. 그리고 여긴 군량도 많은데 뭐가 문제냐?" 라고 오히려 따지는 모습도 보여준다.

잠시 이런 모습을 보여줬지만, 부하들이 계속 조언해준 덕에 그나마 정신을 차려 문을 다 걸어 잠그고 함양을 항우에게 내준 뒤 뒤로 물러난다. 이후 항우가 초대한 홍문연에 참가해 범증의 계략 때문에 죽을 뻔하는데, 칼춤추던 항장을 항백이 막아서고, 그 후 번쾌가 들어오면서 암살은 피하게 된다. 연회가 진행되자 화장실을 핑계로 연회장을 나가는데, 거기서 옹치와 재회하게 된다. 옹치는 유방이 자기앞에 무릎을 한번 꿇게 한 뒤, 배신자가 조무상이란 걸 알려주고 유방이 도망가게 해준다.

그리고 파촉 땅으로 들어가면서 도망병은 증가하는데, 한(韓)왕은 그냥 가지라고 할 땐 언제고 장량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여 어쩔 수 없이 아끼는 부하를 보내 준다. 떠나는 장량의 충고대로 잔도를 불태우고, 고민이 많던 차에 소하로부터 한신의 병법서를 전해 받는다. 시간이 없어 다 읽진 못하다가 한신이 자신의 이동경로를 정확히 예측해 보급을 처리한 걸 알고, 병법서도 보고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직급을 올리기로 한다. 좌로장군에 봉할려고 하였으나 그것도 너무 낮다고 대장군에 임명하라는 소하의 말에는 주저하지만 결국 그 말을 따른다. 그리고 한신이 대장군이 되고 삼진을 평정하자 한신과 1:1 술자리를 함께 하는데 여기서 다다익선의 일화가 나온다.

삼진 평정 뒤 초나라 의제가 항우에게 살해당하자 이걸 계기로 본격적으로 거병을 하여 초나라 땅으로 진격한다. 각 제후들의 도움을 받아 연합군을 결성, 팽성으로 진격하는데 이렇다 할 어려움 없이 수도인 팽성을 점령하자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점령했을때 처럼 또 다시 자만심에 빠져 한신,장량 등을 만나주지도 않고 조언을 듣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신과의 불화도 이때부터 본격화 되는데 한신이 2만의 병력을 말도없이 빼서 외곽에 주둔시키자[107] 조금 의심을 하는듯한 표정을 보여주며 이후 겨우 한신유방을 찾아가 만나는데 성공하여 항우가 이쪽으로 올것이니 대비해야 된다라고 하자 듣지도 않고 신경질을 내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후로도 정신을 못차리고 장량이 "항우가 오는것을 대비해야 한다" 라고 하자 "항우는 팽성에 오지 못하거나 와도 한참 후에나 온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더불어 장량한신에게 군사를 더 내줘야 한다는 말을 하자 화를 내며 "2만을 가지고도 나에게 대항하는데 군사를 더 주라는건 말도 안된다" 라고 하는걸 봐선 한신에 대한 깊은 불신이 이때부터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유방의 예상과 다르게 항우의 군대가 폭풍같이 나타나자 연합군이 50만이라고는 하지만 오합지졸에 군기도 제대로 잡히지 않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개발살이 난다.

결국 쫒겨나 도망치게 되는데 같이 마차에 탔던 아이들을 내팽겨 치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원래 이야기와는 다르게 "나는 죽을 수 있어도 너희들은 살아야 된다. 여기서 같이 가면 우리 모두 다 죽는다. 그러니 너희들은 다른곳에 가서 숨아라" 라는 식으로 진짜 쫒아내려고 했던 원래의 유방과는 다르게 아이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쫒아내려 했던걸로 각색하였다.

겨우 추격을 따돌리고 살아났지만 팽성에서의 대패와 자기 자식을 내쫒았다는 죄책감이 겹쳐 자신감이 매우 떨어진 상태에서 패현에 숨어 지내게 된다. 이를 본 장량소하까지 불러와 소하가 유계라고 부르며 야자까지 트며(...) 설득한 끝에 정신이 되돌아와 관중으로 가게 된다. 관중으로 진입 후 한신[108]을 불러와 향후 책략을 묻고 이에 한신이 "대왕께서 형양에 가있으면 항우가 미친듯이 달려들테니 그 때 제가 나머지 제후국을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라는 전략을 받아들여 형양으로 가게된다.

형양으로 간뒤 미칠듯한 항우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버티고 있었으나 결국 위기에 빠져 제후국을 차례대로 쓸어버리고 있던 한신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응답이 없자 기신의 도움을 받아가며 겨우 탈출하기에 이른다. 이에 나름 화가 난 유방은 단숨에 한신의 군영으로 달려가 잠자고 있던(..) 한신의 대장군 인수까지 뺏어가며 한신이 잘 훈련시키놓은 군사를 데리고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항우와 다시 대치하던 중 역이기를 보내 제나라와 동맹을 맺게 하고 역이기는 임무를 완수 하지만 한신이 그만 제나라를 공격해버리는 바람에(역이기가 제나라로 갔다는걸 모르는게 아니라 알고서도 공격을 했다.) 분노한 제나라 왕에 의해 튀김이 되어 죽게된다. 이 소식을 들은 유방은 매우 화를내며 만약 한신이 제나라 공략에 실패한다면 죽여버리겠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점점 갈등이 심해진다. 다행히 한신은 제나라를 정복하였지만 "제나라의 민심을 얻기위해 자신을 왕으로 봉해달라" 라는 말을 하자 안그래도 역이기 사건 때문에 심기가 뒤틀려있던 유방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게된다. 처음에는 자신을 왕으로 봉해달라는 한신의 말을 듣자 노발대발 하였으나 장량의 발밟기 조언에 맘을 바꿔 어쩔수 없이 제나라왕에 임명한다.

이후 항우군과 긴 대치상태에 빠지게 되고 항우는 군량이 부족해지자 유방의 아버지인 유태공을 솥에 삶아 죽인다는 협박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유방은 능청스럽게 넘어가고(항우 앞에서는 "내 아버지를 삶거든 고기나 줘라" 하면서 능청스럽게 대응하지만 군영에 돌아와서는 아버지 하면서 울긴한다.) 이 방법이 통하지 않자 항우는 유방과 대화한다는 명목으로 유방을 불러내 몰래 화살을 쏴버려 유방의 가슴을 맞춰버린다. 가슴을 맞고 잠시 쓰러진 유방이었으나 여기서 자신이 완전히 쓰러지면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진다는것을 잘 알았기에 아픔을 참고 또 다시 화살이 발뒤꿈치에 맞았다면서 능청스럽게 연기한다. 하지만 상처 때문에 결국 군영으로 돌아와 쓰러지고 만다.

이 중상으로 한동안 사경을 해매게 되고 군영은 척부인의 행각[109]으로 혼란과 반목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박희가 화살을 뽑고 치료하자고 강력히 건의해 결국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이후 가족이 인질로 잡히고 팽월, 한신의 원호가 미진하자 노관에게 은밀히 지령을 내려 초군에 위장투항케 하고 항우가 흥구협정을 맺고 가족을 송환케 만들고 만다. 이후 가족들이 돌아오자 여치 등과 회포를 푸는 한편 한신, 팽월에게 봉지를 내리고 경포의 병력을 비롯한 각군을 소집, 정비해 회군하는 항우의 뒤통수를 공격한다. 하지만 한신군이 와주질 않아 고릉에 되려 갇히게 된다. 한편으론 초조해 하면서도 항우와의 대치에선 약을 올리며 위세허세를 잃지 않으려고 한다. 이때 초군의 날아오는 화살에 엎어졌다 기어 도망가는 건 덤 결국 한신군이 초군의 측면을 공격하며 곧이어 각 제후군이 집결하면서 50만 대군이 된다. 유방은 한신에게 지휘권을 위임. 한신은 서서히 초군을 몰아넣어 해하에서 마침내 격파하게 된다.

전투 마지막 항우가 최후의 분전을 하려 할때 급히 항우에게 가[110] 잠시 시선을 나누더니 짧고 차갑게 "죽여라" 하고는 돌아가버린다.

전후 노관, 한신, 경포를 비롯한 형제이자 동료였던 공신들을 숙청한다. 그런데 뉘앙스 상 대체로 누명을 씌워 숙청하는 모양새.[111] 경포 숙청 후 고향 중양리로 와선 마을 사람들이 단속으로 집에서 나오지 않아 거리가 조용하자 주발을 타박하며 "고향사람들을 잘 대해 줘야지."라고 하고[112] 주창에겐 어떻게든 기신의 일족을 찾아 꼭 보답해주라고 당부한다.[113] 그리고 옛집에서 감회에 젓다 옛 여인 조씨를 만나 다시 회포를 푼다. 그러면서 조씨가 옛 형제들의 안부를 묻자 "공적만큼 잘 대우해 줬는데, 꽤심하게 죄를 지음. 그래서 합당한 벌을 내렸다."라는 말을 하며 소하마저 탐관[114]이 됐다며 한탄한다. 그려면서 "탐관이 더 낫지. 야심은 없을테니"하고 조씨는 기막혀 한다. 그러다 소리를 듣고 나가 가무가 보이자 자신도 횃불을 들곤 그 가무에 동참한다.

장안으로 돌아와선 손자 유양[115]과 놀며 자기 인생을 이야기 한다. 장량, 소하, 한신 같은 영걸이 무능한 자신을 섬겼으니 그 이유는 자신이 용이기 때문이라고[116] 해놓곤 진승의 이야기를 하며 결국엔 자기도 거기에 용기를 얻었고 마침내 봉황인 항우를 참새인 자신이 이겼다 라고 자랑스러워한다.자기 비하인가 칭찬이가 그리곤 한의 후대를 걱정하며 집안의 부실함[117]을 탄식한다. 이에 유양은 집(장락궁)은 튼튼하다면 자기 아버지같은 소리를 한다고 한다. 이에 그 집이 아니란다라며 씁쓸해하며 왕도와 패도를 이야기하며 군주에겐 그 둘 모두가 있어야 한다며 극은 끝을 맺는다.

6.1.2. 능력 및 인품표현

유방이 건달 출신이란 걸 많이 반영한 듯. 작중 유방은 매사 껄렁껄렁하고, 소하장량에게는 수시로 문서 대필 셔틀을 시키며[118], 전투에 나가서도 그다지 유능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먼치킨인 항우와 달리 문에나서 무에서나 딱히 특출난게 없다. 하지만 앞서 건달시절서 부터 꾀를 쓰는 부분이라든가, 망탕산에서 패현 현령의 계략을 혼자서 눈치챈것이나, 가왕 경구에게 군사를 빌리러 가다 경구가 망해버리자 곧바로 항우와 우호관계를 맺는 기지를 발휘해 장량의 감탄을 자아내는 등 지도자로써의 상황판단과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은 수준급으로 표현된다. 임기응변이 강하다는 건 소하도 인정한 부분. 또한 팽성대전 대패 이후 정공의 군사들과 마주치자 손수 칼을 뽑아 백병전을 치르는 등, 무에서도 마냥 맹탕은 아니다.

또한 격식 없는 모습도 보여주는데 항우와 대면한 상태에서 자리를 가리지 않고 털썩털썩 앉을려고 하는 등 이런걸 아주 싫어하는 항우와 대조되는 성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옹치가 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직접 말을 끌어주는 등 부하들을 생각하는 모습도 나온다.

고향에서 같이 지내고 망탕상에서도 같이 지내던 형제들이 한 두명씩 크고 작은 전투에서 계속 목숨을 잃자,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전쟁에서도 최대한 싸우지 않는 방법을 먼저 찾는다. 군사들에게 충성심을 강요를 하면서 전투에서 죽으라고 강요하는 항우와는 정반대의 면을 보인다.

그리고 포로들을 죽이지 말라고 직접 항우를 찾아가 요청하는 장면도 있다. 이는 소하와의 대화에서 단순히 포로들을 부하로 들이게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닌 포로들의 목숨을 살릴려고(그냥 놔두면 항우가 다 죽일게 뻔하니) 하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청이 거부되고 포로들이 다 학살당하자 씁씁한 표정을 짓는 등 불같은 성격의 항우보단 훨씬 괜찮은 인품을 가지고 있는걸로 묘사된다. 그리고 망탕산에서 숨어있을 때부터 괜히 이목을 끌게 하지 않기 위해서 민가에 대한 불필요한 약탈과 살육을 금지했으며, 이를 어길시 무조건 죽게 하거나 엄벌에 처한다.

그리고 생각이 단순한 항우와 달리, 유방은 어떤 일이 생기면 그에 대한 생각이나 심정을 다른 사람들과 서로 말하는 편이다. 가령 양성의 포로들이 학살당했을 때, 부하들에게 죽는게 두렵냐고 물어보는데, 부하들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자, 자기는 죽는게 두렵다며 포로학살에 동의하게 된 자신을 간접적으로 깐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 이끄는 능력이야말로 유방의 가장 큰 강점으로 그려진다. 건달 시절서부터 사람 끄는 능력을 보여주는데, 자신과 자기 집안이 손해본다 하더라도 동료들이 다치지 않게 하며, 신용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하후영 일도 그렇고, 노관이 도박하다 손가락 잘리게 되었을 때도 노관의 손가락 자르는 대신 자신의 집 물건들을 가져가게 해 노관을 구해낸다. 노역에 끌려갈 때 주발에게 주발의 노모는 자기집에서 잘 보살펴드리게 하겠다고 말한다. 범증도 평하길 유방 자신의 능력은 별볼일 없는 것 같으나 수하에 있는 부하들은 모두 천하의 기재들이라 평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주군으로 모시는 유방 또한 보통 내기가 아닐거라고 말하는데 한마디로 보통 사람도 아니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알아서 꼬이는 유방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라고 할수있다.

또한 자신이 잘못을 했다는걸 알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반성을 한다는 점도 항우와는 다른 강점으로 그려진다. 장량의 말처럼 유방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에 보통 평범한 사람들처럼 조그만 일에도 자만을 잘하고 향락에 빠져서 정신 못차리는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 하지만 일단 한번 크게 당하거나 그것이 잘못된 행동인줄 인지하게 되면 그걸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나라 함양을 점령하고 나서 향락에 빠져 정신을 못차렸지만 부하들의 직언에 정신 차리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팽성 점령후 또 다시 자만에 빠져 정신 못차리다 항우에게 크게 당해서 쫒겨날때도 노관,번쾌 등이 "이게 다 한신 때문이다. 그놈이 대장군이니 다 그놈 책임이다." 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한신은 책임없다. 모든건 내 책임이다." 라고 잘못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같이 유방은 잘못을 종종 저지르는 타입이지만 그걸 남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고 또 고쳐나갈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작 격이라 할수 있는 삼국이 유비의 매력에 대해 언행이 일치된 덕행으로 표현해 나름 설득력을 부여한것처럼 초한전기의 유방 또한 그 매력이 그의 행동으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냉철한 면도 보여주기에 매력적이면서 복잡한 모습을 보여준다.

6.1.3. 기타

극초반부에 유방은 '호랭이'란 이름의 누렁이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데, 그야말로 영혼의 동반자로 묘사된다. 유방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장면들이 여럿나오며, 부역길까지 따라갔다가 식량이 떨어져 동료가 굶어죽어가자 어쩔수 없이 번쾌가 호랭이를 죽여 식량으로 제공한다(9화). 애지중지하던 호랭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방은 멘붕하나, 어쩔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 것을 애써 이해할려고 한다.

이 외에도 웬 대추나 밤같은 걸 씹어먹곤 하는데 뭔가 하려고 하면 그걸 퉤 하고 길바닥에 뱉으면서 건달 포스를 좔좔 풍긴다. 유앙과 함께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유앙에게 그런 걸 먹인다. '나는 이거 먹구 자랐단다.' '맛없어요.'


  1. [1] 묘호와 시호를 합쳐 보면, 흥미롭게도 조선 태조홍무제 호칭이 같아진다.
  2. [2] 한나라 때는 피휘해서 여러 문헌의 나라 방(邦)자를 나라 국(國)자로 바꾸게 했는데 그래서 나라 국 자가 훨씬 많이 쓰이게 되었다. 사실 그전에는 방이 더 많이 쓰였다. 이후에는 국이 많이 쓰이게 되고, 후세에 나라 방은 '연방' 같은 단어에만 쓰이게 된다.
  3. [3] 이 재위연도는 전 중국을 통일한 '황제'가 된 후의 연도로 유방이 한왕이 된 해는 기원전 206년이다. 그리고 생년에 대해서도 기원전 256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4. [4] 주로 한고조(漢高祖)라는 표현으로도 불리우는데, 이는 정식 표현은 아니다. 유방의 묘호는 태조이며 시호는 고황제다. 다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고조라는 표현이 나와서 그것이 유방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로 굳어진 것. 정확히 말하자면 고조는 시호인 고황제의 존칭인 것이다.
  5. [5] 시황제는 최초의 영토적 통일이지 중국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에 완벽하게 실패하였다.
  6. [6] 중국은 이후에도 분열기가 몇 차례 있었으나 그때마다 통일국가의 대의명분을 제공한 것은 한고제
  7. [7]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풍현(豊縣)
  8. [8] 이와 같은 케이스로 삼국지 시대의 손견 아들들이 있다. 손책이 손백부, 손권이 손중모, 나머지 동생들도 숙과 계를 써서 자를 지었다.
  9. [9] 산동선 등현(縢縣)
  10. [10] 죽피로 만든 관(冠)
  11. [11] 게다가 처음에는 큰형수 아들에게 아무 작위도 안 주려고 했다가, 부친 태공이 나서서 한마디 거들자 마지못해 내려준 것.
  12. [12] 항우는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저 자리를 차지 해야지!" 라고 말했다.
  13. [13] 진나라 때 가장 적은 지방 행정 단위로 매 10리마다 정(亭)을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 관리를 정장이라고 했다. 매 10정(亭)을 1향(鄕)이라고 하고 그 위에 현(縣), 그리고 군(郡)이 있었다.
  14. [14] 고조본기에서의 원문은 試為吏,為泗水亭長. 과거(科擧) 제도가 없던 시대이니 시험이라고 해도 간략한 통과의례 등이나 혹은 돈을 내서 자리를 얻는 일을 말할 수는 있지만, 여하간 유방 본인이 얻은 자리다. 소하는 자리를 얻게 도와준것이 아니라, 유방이 평민 시절부터 몇가지 일을 도와주다가 유방이 말단의 자리를 얻자 업무를 도와준 정도다.
  15. [15] 지금의 산동성 선현(單縣)
  16. [16] "데려가서 청소나 하는 첩으로 삼으라." 면서 권했다.
  17. [17] 드라마 초한전기에서는 후자의 경우로 나온다.
  18. [18] 이렇게 서자가 된 유비는 훗날 제나라 왕으로 봉해졌다. 배다른 동생인 혜제 유영은 유비를 깍듯하게 대접했지만, 여후는 그 모습을 보고 열불이 나 유비를 죽이려고 했는데 유비는 제나라의 성양군(城陽郡)을 여후의 딸인 노원공주의 탕목읍(湯沐邑)으로 바쳐 여후의 심기를 풀어주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 [19] 뒤에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사마천이 이 이야기의 허구성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여후가 유방의 기를 살려주려고 퍼포먼스를 했다는 식의 의견도 있다. 허구성일 가능성이 높은 게 여후가 혜제를 낳은 시기가 기원전 210년 경이다. 유방이 망탕산에 숨어 있다 거병한 시기가 209년이니 정말 관상을 보았다면 한살도 안 된 갓난아이의 관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20. [20] 이때 다른 사람들은 노잣돈으로 300전을 보탰는데, 소하만 500전을 주었다.
  21. [21] 이는 오행(五行) 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데, 백제는 서쪽을 방위하고 있으니 진나라를 의미힌다.
  22. [22] 유방의 기를 살려주고 그 평판을 늘리기 위한 여후의 자작극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23. [23] 앞서 말한 적제의 일때문에 붉은색을 상징색으로 내세운 것이다.
  24. [24]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동남
  25. [25] 어대현 서남
  26. [26] 다른 기록에서는 주문(周文)으로 나온다.
  27. [27] 사천군은 진나라가 설치한 사수군(泗水郡)을 가리킨다. 남으로는 회수(淮水), 동으로는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서로는 하남성, 북으로는 산동성과 접한 회수 이북의 안휘성 대부분을 관할했다. 치소는 지금의 회북시(淮北市)인 상현(相縣)에 두었으며 고조의 출신지 패현은 사수군 관하의 고을이었다. 군감(郡監)은 진나라 조정이 군의 관리를 감찰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다.
  28. [28] 기원전 225년 진나라에 의해 위(魏)나라의 도성 대량(大梁)이 함락 당하자 양혜왕(梁惠王)의 손자 위왕 가(假)는 도망쳐 풍(豊)으로 들어가 망명정부를 세웠다.
  29. [29] 지금의 안휘성 천장현(天長縣) 서북
  30. [30] 지금의 강소성 패현 동남
  31. [31] 지금의 안휘성 회북시(淮北市) 서쪽
  32. [32] 지금의 하남성 하읍(夏邑) 동남
  33. [33] 지금의 안휘성 소현(蕭縣) 서북
  34. [34] 지금의 안휘성 탕산현(碭山縣)
  35. [35] 대략 이 무렵에 유방은 장량을 만나게 된다.
  36. [36] 유방은 훗날 항우가 태공을 인질로 삼고 협박할때, "나와 항우는 회왕을 북면하여 명을 받을때 결의형제를 맺었다. 지금 항우가 내 아버지를 죽이면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셈이다."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로 유추하자면 당시 항우와 유방은 의형제 비슷한것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37. [37] 학살을 한 주체가 항우인지 유방인지는 명확치 않다.
  38. [38] 왕전의 손자이자, 왕분의 아들이다.
  39. [39] 지금의 산동성 하택현(荷澤縣) 동북에 있던 성양(城陽)의 서쪽.
  40. [40] 지금의 산동성 금향현(金鄕縣) 서북
  41. [41] 초회왕의 부하 장수 혹은 위왕 위구(魏咎)의 장령(將領)이라는 설 및 한고조의 공신 강후(剛侯) 진무(陳武)라는 설도 있다.
  42. [42] 욕을 하는 부분은 고조본기에는 없고, 역생육가 열전에서 언급된다.
  43. [43] 후일 영포가 귀순해 왔을때도 시녀들에게 발을 씻기며 맞이해서,영포가 자살까지 고민했다고 한다 (...)
  44. [44] 역이기의 동생이다.
  45. [45]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 동쪽
  46. [46] 지금의 하남성 언사현(偃師縣) 동남쪽
  47. [47] 지금의 하남성 맹진현(孟津縣) 동북으로 중국 고대 때 황하를 건너는 중요한 나루터가 있었다.
  48. [48] 당초 여의는 항복하느니 자결할 요량이었지만 진회(陳恢)의 설득으로 항복하였다.
  49. [49] 지금의 서안시(西安市) 동북
  50. [50] 정확한 말은 다음과 같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 타인을 상하게 한 자는 중죄로 처벌한다. 타인의 물건을 훔친 자는 감옥에 가둔다. 이 세가지 법만 제대로 지키면 당신들의 생활은 내가 책임지고 보호하겠다.
  51. [51] 이건 명백한 군사기밀 누설이고, 군인에게 있어 가장 큰 죄다. 이중톈은 아예 항백을 스파이라고 표현했다.
  52. [52] 어처구니 없게도 항우가 조무상이 고자질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53. [53] 한서 소하전의 기록.
  54. [54] 다만 개별적으로 유방을 따르는 사람들도 몇 만명이나 되었다.
  55. [55] 중국 드라마 초한쟁웅에서는 범증이 종리말과 한신에게 군을 이끌고 유방을 추격해 죽이라고 몰래 밀령을 내렸고, 장량은 유방과 헤어지기 전 잔도에 도착하면 꺼내보라는 주머니를 유방에게 건네줬다. 잔도에 도착하자마자 종리말이 이끄는 추격대가 오고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유방이 꺼내보니 잔도를 직접 불태우라는 계책이 적혀있고, 유방은 번쾌에게 잔도를 태우라고 지시. 추격하던 종리말과 한신은 불타는 잔도를 보자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가려 하지만 한신은 항우와 용저에게 무시당하고 수모당한 것과 일전에 장량과 사석에서 술자리를 가졌을 때 장량이 슬쩍 흘리는 것처럼 언급하였던 사람이 오랫동안 드나들지 않는 잊혀진 다른 진입로를 떠올리자 그 자리에서 종리말과 작별하고 파촉으로 홀로 진입.
  56. [56]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은 파촉으로 통하는 길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촉으로 가는길은 하늘로 향하는 길보다 더 어렵다.".
  57. [57] 당시 한신이 아무런 활약도 하지 않았음을 생각해보자. 아니, 그 이전에 한신은 그에게 시비를 걸던 건달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간 일로 인해 굉장히 폄하를 당하던 인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실제로 한군의 많은 장수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대장군이 될 것이라고 여기다가 한신이 대장군이 되자 엄청나게 놀라워했다.
  58. [58] 패닉 상태에 빠진 병사들이 아예 수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해서 피해가 더욱 컸다. 수수는 한군의 시체 때문에 물이 흐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59. [59] 재밌게도, 이때 진짜로 하후영을 찌르려고 했던 유방은 결국 한번도 찌르지 못했는데, 건달로 지낼 시절 하후영과 장난치다가 실수로 찔러버린 적은 있었다.
  60. [60] 실제로는 형님 집에서 얹혀살다 형수 등쌀을 못이겨 집 나왔으니 정반대다. 모르는 사람들이 집 나온 원인을 억측하여 떠돌게 된 헛소문.
  61. [61] 초나라 군대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사방에서 공격을 가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살해당했을듯.
  62. [62]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 동북의 광무산(廣武山)
  63. [63] 워낙 충격적인 발언이라 조선 효종의 경우는 행장(行狀)을 보면 "차마 입으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64. [64] 투항한 적병을 학살하는 것은 사실 고대 전쟁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다. 어차피 노예제도 없는 상황에서 선택권은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것밖에 없는데, 성인 남자의 수를 줄여 저항할 여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것도 상대의 국력이나 저항 여력 등을 고려해서 결정해야 하는데 항우는 옛 진나라 주민들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인구가 많은지는 생각을 못했다. 게다가 20만의 상당수는 다른 나라 출신의 죄수들이었으니 진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주민들의 원한까지 사게 되었다.
  65. [65] 원래 이렇게 비겁한 전술은 꺼리는 항우조차 '일단 덫을 놓든 올무를 놓든 토끼를 잡아오는 사냥꾼이 좋은 사냥꾼이다'라면서 시행하게 했다.
  66. [66] 하남성 태강현(太康縣) 남쪽
  67. [67] 물론 나중에 보복은 철저하게 했다. 둘 다 처형했으니까.
  68. [68] 공위(共尉)라고도 한다. 초대 임강왕 공오의 아들.
  69. [69] 실제로 이 때문에 한신이 군대는 잘 다루지만 머리는 나쁜 게 아니냐는 평가도 있다. 이후 여후의 손에 처형당하는 것도 그렇고. // 용병술에 비하면 처세술은 거의 0점에 가까운건 사실이지만 꼭 머리가 나쁘다기 보다는 괴철과 무섭이 한신을 설득할 때에도 한신이 은원을 내세우고(실제로 초왕으로 고향에 돌아가서 표모에게 일반천금(一飯千金)이나 과하지욕(袴下之辱)의 치욕을 준 백정에게 정장직을 주었다.) 군신간의 의리를 드는 것으로 보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 특히 은혜를 베푼 윗사람의 앞에서는 순종적이고 약한 것 같다. 여후에 의해 죽을 때에도 결국 자신을 천거했던 소하가 불러들였다. (다만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또 다르다. 예를 들면 제나라 왕 시절) 그리고 한신이 원래 군대를 얻은 기반이 한고조 덕분인데, 한신의 군대가 정말 한신만의 군대라고 볼 수 있었을까? 솔직히 한신은 제왕과 같은 기질로 사람의 마음을 잘 얻었다고는 보기는 힘든 유형의 영웅이며 그의 군대가 한고조가 강수를 두어도 잘 통하며 딱히 반발이 없는 것을 보면 정말 반역을 했다가는 오히려 한고조에게 충성하는 부하들에게 머리가 잘릴 가능성도 컸다. 그래서 명백한 한고조의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구원 요청을 구경이나 하거나 조건을 터무니없이 건 것일 수도 있다.한고조가 죽으면 자동으로 그의 유산을 흡수할 기회가 생기니까.
  70. [70] 이후 유경(劉敬)의 제안에 따라 장안으로 수도를 옮긴다. 여담으로 유경의 본명은 누경인데 제나라 평민이다. 유방에게 "네놈은 덕도 없고 한거라곤 쌈박질 만 한 주제에 주나라 흉내내서 낙양에 도성을 정한거 같은데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낙양보다 수비하기 쉬운 장안이 낫다."라는 무례한 이야기를 했음에도 유방이 껄껄 웃으며 당일 장안으로 천도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후 성씨를 하사한건 덤. 훗날 흉노와의 전투에서 유경말 안듣고 패배를 당하자 유경에게 직접 사과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
  71. [71] 유방은 사신을 파견해 흉노군을 염탐했지만, 묵돌은 일부러 허약한 병사와 가축만 보여주면서 자신들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다.
  72. [72] 때문에 유중은 후작으로 격하됐고, 나중에 아들 유비가 오왕이 돼서야 대나라 왕으로서 시호를 받았다.
  73. [73] 태자가 이미 자라 자신이 손쓸 수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 노래를 홍곡가(鴻鵠歌)라고 부른다.
  74. [74] 여씨천하의 멸망에 대한 예언, 혹은 여후의 욕심에 대한 황망함으로도 2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75. [75] 같은 토사구팽의 사례로 묶여도 번쾌의 경우는 한신, 팽월 등과는 약간 경우가 다르다. 전자가 이성왕들을 견제하는 목적이었다면 번쾌의 경우 여씨를 견제하는 측면이었다.
  76. [76] 심지어 해하전투에서도 병력 상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음에도 몇 번이나 항우에게 털릴 뻔 했다.
  77. [77] 숫자만 많지 제후들의 연합으로 인한 군사지휘권의 혼란, 지도부의 방심과 허를 찌른 기습 등.
  78. [78] 실제 경포는 '황제는 늙었고, 그 부하 중에는 한신팽월 정도만 두려울 뿐이다.' 면서 나머지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한 발언을 했다.
  79. [79] 사실 키루스 2세는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하지않고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80. [80] 백등산 포위전 항목에 나온 흉노의 패배는 일부러 패전하여 깐 밑밥이라고 한다.물론 질 생각이 없었는데 지고 나서 유인한 다음 이긴 것을 미화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최종 승자이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지휘관이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상대방의 군사적 능력이 자신에 비해 허접하다면 항우처럼 무자비하게 이기는 게 일반적이지 전술, 전략적 규모에서 패전해 아군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유인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백등산 포위전 자체가 유경의 충고를 듣지 않아서 일어난 일인데 한고제는 이전까지는 남의 충고를 그렇게 쉽게 내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81. [81] 항우가 관중을 점령하러 갈 때 초나라 의제의 신하들이 항우가 너무 난폭하다면서 그의 대항마 위치에 놓았을 정도로 유방은 의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82. [82] 재미있는 비교지만 유방과 비슷하게 미천한 출신에서 통일 왕조의 황제자리에 오른 주원장의 경우 3족도 모잘라 9족을 멸한다는 표현이 나올정도로 유방은 비교도 안되게 공신들에게 가혹했다.
  83. [83] 게다가 유방은 한신을 견제하고 실권을 빼앗기는 했지만 회음후 자리를 준 이후로는 더이상 건드리진 않았다. 사실상 한신을 죽인건 여후이다. 팽월도 마찬가지.
  84. [84] 실제로는 오히려 유방이 한신을 가지고 놀다시피 했다. 군사를 다루는 능력에서는 유방이 한신을 따라오지 못했지만 정치 쪽에서는 한신은 유방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85. [85] 왕릉이 이를 탓하자 "지금 따지고 항거하는건 자네가 나보다 낫지만 여태후가 죽은후 일을 정리하는건 내가 자네보다 나을걸세."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86. [86] 무례하다느니, 어린아이 같다느니, 걸주 같다느니 등등
  87. [87]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훌륭한 군주는 1. 스스로 좋은 생각을 짜내거나 2. 좋은 생각을 받아들일줄 안다고 평가한걸 보면 유방은 2. 스타일의 끝판왕급인 셈이다
  88. [88] "吾遭乱世,当秦禁学,自喜。谓读书无益。洎践阼以来,时方省书,乃使人知作者之意,追思昔所行,多不是"
  89. [89] 한신, 왕릉, 소하 등이 모두 말한 부분이다.
  90. [90] 사기에서 유방이 욕을 퍼붓는 장면은 12번 에 이른다.
  91. [91] 오늘날로 치면 "너님 히틀러 같음."
  92. [92] 이때 상황은 유방이 주창을 뒤에서 덮쳐서 파운딩 자세로 만든 후 "내가 누구같은 임금이냐!" 라고 물었던 상황이었다. 즉 주창은 유방 밑에 깔려서 욕을 퍼부었던것.
  93. [93] 심지어 유경은 이 당시 일개 군졸이었을 뿐이며 유방에게 올린 조언도"당신 주제 파악 좀 하시오."하는 식의 굉장히 기분나쁠수도 있는 직언 이었다. 유경항목 참조
  94. [94] 사실 이 부분은 고제가 아니라 혜제가 책임졌어야 했었는데 안타깝게도 혜제가 척부인의 일로 맛이 가서 일찍 죽은 탓에 결국 여태후의 폭주를 견제할 방법이 없어져서 문제가 더더욱 심각해졌다고 할 수 있다.
  95. [95] 원래 여씨들은 2대 황제인 혜제의 외척이기도 했기 때문에 무조건 때려잡았다가는 고제 사후 혜제의 뒷배경이 되어 줄 세력이 없어서 공신들을 견제하기 힘들 수도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96. [96] 한 황실에 끝까지 충성한 인물들 때문에 조조가 얼마나 골머리를 썩혔고 암살위협도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런 한나라의 역사로 인한 대의명분이 가지는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97. [97] 정말 보통 사람들과 다른 면모가 있는데, 아무리 심각한 상황에 몰려도 절망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이 전혀 없다. 정황상 초창기 멤버에 나중에 가장 큰 상을 줄 때도 유방의 의견이 반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장 신뢰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소하가 자기를 버린 줄 착각하고 있을 때 정도를 제외하면 위험한 위기가 와도 절망하거나 슬퍼하지도 않고 보통 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일들을 태연하게 하기 때문에 사이코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실제로 미화판 위인전이 아닌 정사로 보면 망하고 있을 때 일시적으로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거나 자살을 생각하거나 자기 판단이 틀린 줄 알고 두려움에 떠는 둥 심각한 상황에서 나름 보통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영웅들이 보편적인데 유방은 그런 거 없다. 심지어 위기에서의 가족 관계에서도 그런 점들이 거의 없다. 구체적으로, 항우가 아버지를 삶아버리겠다고 하자 당황하거나 슬퍼하기는커녕 "우리는 예전에 의형제를 맺었는데, 지금 우리 아버지를 죽이면 너는 네 아버지를 스스로 죽이는 거다. 그래도 죽이려면, 아버지를 요리한 국물을 나한테도 한 사발 다오!"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거나 지고 도망을 갈 때 가족들 때문에 수레 속도가 느려지자 가족들에게 우린 이제 다 죽었다 같은 소리를 하기는커녕 망설임없이 가족들을 버리려고 하자 하후영이 "호랑이가 독해도 제 새끼는 먹지 않는 법이라는데, 어떻게 친자식들을 버리고 갈 수 있습니까!"라고 했으나 "나는 용이라 상관없다!"라고 반박하고 막으려는 하후영에게 검을 휘둘러서 하후영이 어쩔 도리가 없어 수레에서 내려 두 아이를 껴안고 따로 도망을 쳤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목숨이 달린 위기에 처할 때조차 가족, 친구들과 감정 교류를 하거나 위안을 얻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라 흔히 떠올리는 평범한 건달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당시에도 평범한 취급을 받지 않았다.유방과 어울리고 나면 다들 유방을 비범하거나 위험한 인물로 여겨서 자기 편으로 삼으려고 하거나 죽이려고 하는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98. [98] 유교에 대한 유방의 태도는 성장형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유생이나 세객들 업신여기기를 즐겨하던 유방이 역이기에게 크게 지적받고, 자기 밑에서 수하나 역이기, 육가같은 인물들이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을 보며 다르게 보다가 기신이나 주가, 종공 등이 유교적 충성심에 입각해 자기 대신 희생하는 것을 직면하게 되면서 더이상 유생들을 업신여기는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유교는 숙손통의 예법 제정 등을 시작으로 입지를 구축하다 한무제 즈음부터 명실상부한 한나라의 지배적 사상이 된다.
  99. [99] 더벅머리 놈 정도로 번역되기도 한다.
  100. [100] 물론 초한지에서도 유방은 어리버리한 얼굴 속에 음흉함을 감추고 있는 캐릭터로 묘사되었지만 음흉함이 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무래도 십팔사략 쪽.
  101. [101] 영문판에선 매력을 나타내는 Charm으로 번역되었다.
  102. [102] 그것도 곽회과 동급인 통솔이다.
  103. [103] 손건과 같은 급이다.
  104. [104] 내정 특기로는 경작, 병심, 연병, 인맥, 변설을 가지고 있고 전투 특기로는 신속, 수련, 원사를 가지고 있다. 내정용으로 쓸 만하고 전투용으로도 꽤 좋다. 그리고 유방이 가진 전투 특기 때문인지 병력을 다 잃고 도주해도 쉽게 잡히지 않는다. 이는 아무래도 유방이 병사들을 다 잃고 죽을 위기를 여러 번 넘긴 것을 반영한 배치이다.
  105. [105] 피해자가 하후영이건만 사건 은폐를 한다는 명목으로 하후영은 모진 고문을 당한다. 같은 시간에 유방도 심문당하며 채찍질을 당했다. 이때 유방은 "간지러워! 간지러워!" 하면서 애처롭게 외치고 있었다.
  106. [106] 조씨는 떠났다가 유방이 패공이 된 후 돌아오는데, 그녀가 낳은 유방의 아들이 장남이지만 서자로 황제가 되지 못한 유비다.
  107. [107] 다른뜻이 있어서 그런건 아니고 항우와의 싸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방 본인 눈에겐 별로 안좋게 보인듯
  108. [108] 불러오는 과정에서 서로간의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 유방이 어서 오라고 하였지만 한신은 상황이 난처하여 지금은 갈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결국 가긴한다.
  109. [109] 남편이자 왕이 죽을 상황에 후사만 생각해 소하를 포섭하려 하거나 유방의 중상을 모두 비밀로 하는데 쾌유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려고 한다던가
  110. [110] 이때 의형제를 맺었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111. [111] 아예 한신의 경우 누명으로 그려진다. 여치, 소하가 꾸민일이지만 유방도 묵인했다는 암시가 있다.
  112. [112] 이때 같이 있는 주발, 조참, 하후영의 표정이 난감, 또는 어색해 하는 분위기다.
  113. [113] 중양리 씬은 80회에서 유방이 처음나오는 부분인데 80회 전반행적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114. [114] 소하가 일부러 의심을 피하려고 횡령죄를 뒤집어 썼다.
  115. [115] 조씨의 아들 유비의 자식
  116. [116] 이때 유오의 교룡이야기를 하는데 뉘앙스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의 가설을 떠오르게 한다.
  117. [117] 아마 여씨일족의 횡행을 암시하는 듯 하다.
  118. [118] 다만 아주 문맹인 건 아니어서 읽는 씬은 꽤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