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빈 김씨

조선의 역대 왕세자빈

세종
경빈

문종
휘빈

문종
순빈

(? - ?)[1]

조선왕세자빈. 세종대왕의 첫 번째 큰며느리이자, 왕세자 시절 문종의 첫 정실부인이 된다.

안동 김씨[2] 가문 출신으로, 상호군 김오문의 딸이자 태종후궁명빈 김씨의 조카이기도 하다. 1427년, 자신보다 4살 어린 세자 향(후일 문종)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궁에 들어왔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수려한 외모의 세자와 달리 휘빈 김씨는 박색[3]이었다. 또 키가 상당히 컸다. 거의 당대의 남자들과 비슷했다고. 첫날 밤 이후로 세자는 세자빈을 찾지 않고 학문과 연구에만 몰두했다.

사실 문제는 세자가 효동, 덕금이라는 궁녀들을 좋아했던 데에 있었다. 이런 정황을 몰랐던 휘빈 김씨는, 세자를 수발 드는 효동과 덕금이라는 궁녀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세자가 자신을 찾지 않는 이유가 수발 드는 궁녀들과 놀아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 것이다.

다급해진 휘빈 김씨는 세자가 자신에게 빠져들게 할 방책을 찾다가 갖가지 방술을 알게 되었다. 세자를 수발 드는 궁녀들의 신발을 훔쳐내 그것들을 태워 재로 만든 다음 세자가 마시는 술에 그 재를 몰래 넣어 그걸 마시게 하면 세자가 수발 드는 궁녀들은 깨끗이 잊고 세자빈만 찾게 된다는 황당한 비방(祕方)을 실행했다. 그런가 하면, 암수 뱀이 검열삭제할 때 나오는 기운을 손수건에 묻혀서 그 손수건을 지니고 다니면 색기가 일어나 세자를 혹하게 할 수 있다는 등의 갖가지 기기묘묘한 비방을 찾아다니고 그걸 실행에 옮겼다. 세자 마음 돌리는 것보다 이런 미신적 주술 찾는게 더 힘들겠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모든 비방을 행한 일이 들키고 말았는데, 세자를 수발 들던 궁녀들이 자신들의 신발이 사라지자 비방을 행한 것 때문이 아닌지 의심했고, 세자빈의 시녀 호초를 추궁하다 못해 결국 중궁전 상궁에게 모조리 고해바쳐서 파문이 일어난 것이었다.

결국 시어머니소헌왕후 심씨가 직접 호초를 국문해, 세자빈이 온갖 해괴한 비방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중전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대왕은 격노하여, 결국 호초를 참수형에 처하고, 휘빈 김씨를 폐서인하고 궁에서 내쫓게 된다. 이때 세자의 나이 겨우 16살이었다고 하는데,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자기보다 4살이나 많은 아내는 어찌 보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었고, 휘빈 김씨와는 순전히 가문만 보고 결혼한 것인지라…. 하여튼 이후에 세자는 깊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다음 세자빈이 되는 순빈 봉씨와는 잘 지내려고 했다고 한다. 상술되어있듯 나이차도 나이차이지만 휘빈의 박색인 외모가 큰 원인이었던 듯한 게, 다음 처인 봉씨를 간택할 때는 휘빈의 사례를 거울삼아 외모를 중요한 기준으로 뒀다는 설까지 존재한다.

이후 휘빈 김씨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그냥 평생 죽은 듯이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4]

현대인들의 관점에선 이해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당시 유교 윤리상 민간의 해괴망측한 방중술을 왕비가 될 세자빈이 행했다는건 세종대왕뿐만 아니라 이후 조선왕조에서도 용납하기 어려운 행위였다. 일반 백성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사대부의 대표와 모범격인 왕실에서 그런 일을 벌인다는 건 당시 기준으론 나라 말아먹을 중대한 결격사유였다.그래서 폐서인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자가 세자빈을 돌보지 않은 것도 책임을 피하긴 힘들 듯. 조선 시대이니 세자한테는 별 책임을 안 물었지만.

그리고 이후에 2번째로 들인 세자빈이 순빈 봉씨인데, 바닥 밑에는 더한 바닥이 있다라는 걸 증명했다. 세종도 김씨의 행각에 대해서는 그냥 격노했을 뿐이지만, 봉씨의 행각을 알고는 그저 황당하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5]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뒷날 성종폐비 윤씨를 폐하려는 성종에게 반대한 게 임사홍인데, 이때 내세운 근거 중 하나가 "세종대왕께서 휘빈을 쫓아내고 나중에 후회하셨습니다."였다. 임사홍의 말대로라면, 세종은 휘빈을 쫓아낸 걸 후회했다는 방증이 된다.[6]


  1. [1] 단, 1414년생의 문종보다 4살이 더 많았다고 하니 태어난 연도는 1410년일 가능성이 높다.
  2. [2] 세도정치로 유명한 신안동이 아니라 구안동이다
  3. [3] 그냥 박색도 아니라 지독하게 못생겼다고(...)
  4. [4] 일종의 명예살인이나 강요된 자살을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후발주자인 순빈 봉씨처럼.
  5. [5] 참고로 맷돌 부부라는 말은 실제 역사에 나오는 기록이다.
  6. [6] 사실 휘빈 김씨의 이런 '사랑을 얻기 위한 괴이한 행동'은, 적어도 순빈 봉씨의 개판보다는 왕실의 입장에서는 더 낫다. 휘빈 김씨가 한 행동들은 따지고 보면 건전하진 못했을지언정 그래도 남편의 사랑을 얻고 싶어서 한 것이었고, 그리고 이것이 후사를 얻는 일로 발전될 수 있었다. 게다가 세자가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왕으로 즉위하면, 신하들이 나서서 왕에게 왕비와의 합궁을 요청했다. 그 정도로 후사 문제와 정궁(중전)의 위치는 힘이 셌다. 즉 휘빈 김씨에겐 시간이 우군이었던 것. 참고 기다렸다면 '휘빈 김씨는 중전이 되어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정도의 나름 해피엔딩을 맞았겠지만, 조급함이 화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