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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5대 국왕
광해군 | 光海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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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묘호

없음

존호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1]

시호

없음

군호

광해군(光海君)[2]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출생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 별궁

즉위

1608년 3월 17일 (음력 2월 2일) 경시

조선 한성부 정릉동 행궁 서청

사망

1641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66년 2개월 3일 / 2만 4,171일)

조선 전라도 제주목[3][4]

능묘

광해군묘[5]

재위

조선 왕세자

1592년 6월 8일 ~ 1608년 3월 17일
(음력 1592년 4월 29일 ~ 1608년 5월 1일)

조선 국왕

1608년 3월 17일 ~ 1623년 4월 13일
(음력 1608년 2월 2일 ~ 1623년 3월 14일)
(15년 25일 / 5,5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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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본관

<colcolor=#373a3c,#ddd>전주(全州)

혼(琿)

부모

부왕 선조, 모후 공빈 김씨[6]

왕비

문성군부인

}}}}}}}}}

1. 개요
2. 상세
4. 평가
4.1. 세자 광해군
4.2. 왕 광해군
4.3. 현대의 평가
4.3.1. 긍정설
4.3.2. 부정설
4.3.3. 소결
4.4. 연산군과 비교
5. 특이사항
6. 가족 관계
7. 무덤
8. 영상 매체에서
9. 그 외 매체에서

1. 개요

조선의 제15대 국왕.

양위폐위로 묘호가 추숭되지 않았던 4인의 조선 국왕 중 한 임금이다. 다른 3명은 2대 공정왕, 6대 노산군, 10대 연산군이다. 다만 공정왕과 노산군은 숙종 대에 들어서 각각 정종단종으로 추숭되었으므로, 결국에는 연산군과 같이 둘밖에 남지 않았다. 더불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노산군, 연산군과 같이 '실록'이 아닌 '일기'의 형식으로 그들에 대한 기록이 실린[7] 단 셋 뿐인 임금 중 하나이다.

다만 재위 내내 숙부에게 끌려다니다 죽어 동정을 받는 단종과 역으로 오직 전횡만을 일삼아 비판을 받는 연산군과는 달리,[8] 광해군은 치적의 공과가 뚜렷하여 그 평가의 폭이 상당히 넓은 편. 재위기를 떼놓고 보더라도 세자 시절 구국을 위해 분조(分朝)활동으로 전장을 누볐던 면모부터 노년기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 끝에 숨을 거두기에 이르기까지, 군주가 아닌 한 인간의 생애로 보더라도 생애의 굴곡선에 있어 굉장히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큰 편이기도 하다.

2. 상세

전왕 선조차남이자 서자로서, 훗날 이복동생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났지만 광해군이 나이(당시 34살)도 많았고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당시 세자로 책봉되어서 전란 극복의 공적을 쌓았기에 큰 이견 없이 인목대비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선조의 아들들은 영창대군을 제외하면 모두가 서자들이고, 광해군은 그 서자들 중에서도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기에, 최초의 서손 국왕인 선조만큼은 아니어도 위치가 불안정했던건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광해군의 정통성에 흠집을 낼 정도는 아니었다.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은 왕실과 신하들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개망나니였고, 영창대군이 태어나기 이전까지 실질적으로 세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은 광해군 뿐이었다.[9] 게다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온갖 찌질한 짓(질투+모함+시기 등 3종 종합세트를 시전)을 다 하는 동안 광해군이 세자의 자격으로 분조(分朝)[10]하면서 활약하면서 얻은 권위가 아버지 선조의 왕권을 위협할 정도까지 강해진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신성군을 세자로 만들려 했던 인빈 김씨조차 신성군이 죽고 아들 정원군이 개망나니 짓을 하자 광해군의 편을 들어주었으며,[11] 신하들 모두 탁소북의 유영경을 제외하고는 전부 광해군의 손을 들어주었다. 즉, 광해군이 서자이자 차남이라는 것만으로 광해군의 정통성을 흠집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등의 무리한 토목 공사로 조선의 재정을 파탄냈고, 잦은 정치적 숙청[12]으로 아버지가 물려준 여러 인재들을 쫓아냈으며, 말년에 다시 서인들과 남인들을 끌어안으려 했지만 결국 역으로 그것이 원인이 되어 몰락했다. 당파성이 적은 중신들만 처음처럼 계속 중용했어도 몰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 광해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시작되기도 하였다. 폐위된 왕치곤 후대에 재조명을 받은 몇 안 되는 왕 중 하나로, 사극이나 창작물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과도한 긍정적 재평가에 반발한 사람들이 여러 이유를 들어 혼군(昏君)이라는 전통주의적 시각을 복권시키는 등 광해군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묘호와는 별도로, 광해군은 재위 도중에 따로 존호를 받은 바가 있었다.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시호와 무관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 역대 국왕의 존호 중에서도 압도적인 길이이다. 숙청을 할 때마다 존호가 덧붙여졌는데 재위 기간 내내 정치적 숙청을 하다보니 아주 길어진 것. 이러한 존호들 가운데 일부는 명나라의 황제가 내린 칙서의 명령을 받들기 거부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예를 표하고자 바쳐진 존호였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광해군/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

세자의 지위에서 그가 이루어낸 업적은 상당히 컸으나, 왕이라는 1인자의 위치에 올라서고 나서는 편집증[13]과 궁궐에 집착하여 엇나가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4.1. 세자 광해군

세자시절의 업적은 너무나도 크고 아름다워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14]

임진왜란 당시 사실상의 전시군주.

세자 임명 후 분조를 맡게 되는데, 이 이야기가 참으로 흥미롭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세자는 영변에 머물고 대가는 정주로 갈 것이니 준비하라는 전교

"본 고을이 조폐(凋弊)하여 음식물을 제공할 수 없다고 하니 내전이 이곳에 도착한 뒤에 세자는 이곳에 머물도록 하고, 대전(大殿)은 바로 박천(博川)으로 가 가산(嘉山)을 지나 정주(定州)로 갈 것이니 모든 일을 즉시 예비하여 떠날 수 있도록 하라. 이런 뜻으로 즉시 시종(侍從)을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조치하여 준비하도록 하라."

상이 영변 행궁(行宮)에 납시어 호종한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최흥원(崔興源)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주(定州)로 이주하고 싶으시더라도 우선은 여기에 머무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에 머무를 것이니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

였다. 정철(鄭澈)이 아뢰기를,

"세자가 지금은 여기에 머물다가 끝내는 정주(定州)로 갈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귀성(龜城)이나 강변(江邊) 등처로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세자가 여기에 머무르면 힘이 분산되어 조정이 모양을 이루지 못할 성싶고 인심도 역시 요동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종하는 관원을 여기에 많이 머물게 하고 나는 가벼운 행장으로 옮겨갈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우선 평양의 소식이 오는 것을 기다려 봄이 어떻습니까."

이날 밤에 비망기로 전교하였다.

"내선(內禪)[15] 할 뜻을 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대신(大臣)들의 반대를 받아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다. 오늘 이후로는 세자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로 다스려 관작의 제배(除拜)나 상벌 등의 일을 다 편의(便宜)에 따라 스스로 처결할 일로 대신들에게 이르라."

하자, 대신들에게 중난한 일이어서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아뢰니, 답하기를,

"내선은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의역하자면, 선조가 요동가겠다고 징징대는 것을 신하들이 애써 말리고 있었다. 심지어 선조는 왕위도 다 넘기고, 신하들도 안따라와도 되니 자신이 요동가게 해달라고 한다.[16]

이 와중에 광해군은 정권을 맡게 된 것이다. 양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광해군에게 국정위임을 한 상황도 아니었다.[17] 심지어는 광해군에게 맡겨진 조정(편의상 분조라 불린다.)의 행방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냥 선조는 요동가겠다면서 영변을 벗어났을 뿐이다. 그 혼란 속에 광해군은 강원도 이천으로 향한 것이다. 책임감이었을지, 아니면 무엇이 그를 이끌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조정을 맡게된 광해군은 함경도 강계가 아니라 적진의 한복판인 강원도 이천으로 향한다. 일본군의 점령지 한복판을 향해 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광해군은 백성을 위무하고, 흩어진 관리들을 수습하고, 적과 맞써 싸웠다. 임진왜란 당시 사실상 군주역할을 한 것이 광해군이었다.[18]

정탁의 <피난행록>에는 이러한 점이 서술되어 있다. 7월 17일의 기록에는 “평양을 지키지 못한 이후부터 온 나라 백성들이 대가(大駕)[19]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크게 우러러 전하를 사모하고 슬퍼하고 있다가, 동궁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심이 기뻐하며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도망쳤던 수령들도 점차 관직으로 돌아오고 호령 역시 행해져 회복의 기회가 조금씩 가망이 있습니다”라고 기재돼 있다. 7월 27일 기록에도 “경기도 의병들이 곳곳에서 봉기해 서로 앞을 다퉈 적을 잡아 적세가 조금 꺾이고 있습니다”라고 해 분조가 의병 봉기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분조의 활동이 7개월의 짧은 기간이지만, 임진왜란 초반 전세역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아니 사실 분조가 있었기에 조선이 명나라가 올때까지 버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조는 모든 국정을 내팽겨치고 의주에서 요동요동을 외치기만 하고 있었다.[20] 그 와중에 왕다운 역할을 한 것이 광해군이었다. 또한 임진왜란에서 제일 중요한 전투였던 이치 전투도 고명승의 의병이 없었으면 패전했을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의병들의 봉기를 적극적으로 독려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광해군의 분조의 역할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조선의 창건자인 이성계와 그리고 같이 전쟁터에 나갔던 정종을 제외한다면, 외적과의 전면전에 직접 뛰어들어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국왕은 광해군이 유일하다. 농성을 포함한다면 인조도 해당되겠지만 이쪽은 삼남 쪽으로 도망치려다 갇혀서 농성했기 때문에 본의로 임한 것이 아니라서 경우가 좀 다르다.

선조의 도주로[21]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22] 왕의 아들들을 (깽판을 쳤다지만) 왜군에게 넘기던 시절[23], 유일하게 왕실의 일원으로서 해야할 일을 책임있게 그리고 꽤 성공적으로 임한 인물로 민심 수습과 사기 회복, 왕실 이미지 회복의 효과는 꽤 컸다.[24] 그 때 광해군의 나이 18살이었다. 조선에서도 왕이 20살이 되지 않으면 아직 미성숙하다고 하여 수렴청정을 했다.[25] 그 와중에 갑자기 분조를 떠맡게 됐음에도 도주하기는 커녕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 항전을 지휘했다. 이 때 대처는 한국사 들과 비교해봐도 꿇리지 않을 정도. 실제로 조선 신하들과 명에서는 선조를 상왕으로 올리고 광해군을 왕으로 즉위시켜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논의도 있었다.[26][27]

4.2. 왕 광해군

광해군이 폭군의 이미지는 부모와 가족의 도리를 저버린 자라는 것이다. 어린 형제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조반정의 표면적인 명분이다. 특히 폐모가 컸는데 조선사에서 배다른 동생을 죽인 임금은 많고 많았지만, (명목상) 어머니에 해당하는 대비를 폐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유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의 일이고, 윤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계모인 걸로도 모자라 심지어 광해군보다 9살이 어렸다. 거기다 왕비로 간택된 건 1602년. 이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선조의 위엄이 흠집 날대로 난 상황에서 들인 어린 비였다. 거기다가 영창대군이 태어나자마자 새자 책봉 욕심을 내비쳤다는 기록까지 남아있는 등 도저히 광해군 입장에서는 좋게 볼 건덕지가 없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때문에 학계의 정설은 이는 단순한 명분일 뿐이고, 실상은 15년간 궁궐공사로 인한 민심이반이 컸다고 본다. 후대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두 번 짓고는 나라 재정을 파탄시켰는데, 광해군이 지었던 궁궐은 무려 5개다.[28] 그야말로 나라 재정을 궁궐공사에 갈아 넣은 것이다. 후금이 발원하고 있고, 명의 요청에 조선군 1만명이 파병된 사르후 전투 이후에도, 궁궐공사는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의 폐위되는 그 순간에도 궁궐공사는 진행되고 있었다.

당연히 무리한 재정 속에서 궁궐공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조세제도만으로 안되니 온갖 편법을 동원하는데, 막대한 공명첩을 남발하고, 뇌물을 받았다. 계속되는 실정에 민심이 이반하고, 충성하던 세력도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던 능양군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때 능양군이 제시한 명분이 폐모살제다.

4.3. 현대의 평가

왕으로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린다. 현대에 와서는 반정을 일으켜 왕에 오른 인조삼전도의 굴욕등 병크로 인해 평이 상당히 좋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고평가 받는 경향이 있다.

4.3.1. 긍정설

근대 이후 처음으로 광해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문헌은, 1920년대 간행된 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에 실린 일본 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内宏)의 논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광해군의 밀지를 받아 후금에 투항했다고 하는 강홍립의 주장을 받아들여 중립 외교를 수행하려 했던 식견 높은 군주로 평가했다. 그러나 책 자체는 만주사와 한국사를 연결시키려는 일제의 만선 경영이 목적이며, 조선이 문약하고 당파 싸움에 시달렸다는 시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이 주장은 식민사관과 만선 사관의 일환으로 취급 받는 경우가 많다. 이 이케우치 히로시의 평가가 식민 사관과 무관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명기 교수의 책에도 식민 사관이 광해군의 평가에 영향을 주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29] 1933년 이나바 이와키치의 <광해군 시기의 만주와 조선의 관계> 역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긍정적으로 평했다.

실제로 그와 비슷한 시기인 1920 ~ 1930년대 국내에서도 광해군 치세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 중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로 잘 알려진 신채호는 광해군 치세 실권당인 대북을 높게 평가했으며, 그 중에서도 사상적 기반이자 핵심적 인물인 정인홍을지문덕, 이순신과 같이 조선 3걸로 꼽고 옥중에서 홍명희에게 전달한 친서에서도 필생의 저서인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이 세상에 빛을 보이지 못함을 아쉬워했을 정도였다고. 실증사학자 두계 이병도 박사도 1959년에 <광해군과 대후금정책>에서 긍정적으로 평했다.

한국에는 광해군 재평가에 적극적인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런 면이 반영되어 국사 교과서에서는 광해군을 외치 중심으로 설명하고, 대동법은 신하들의 공으로 나온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전후 복구 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대동법을 경기 지방에 실시하는 등의 세제 개편을 보여[30] 조선이 근대로 가는 첫 관문을 연 왕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입장에서 광해군의 실정에 대해서는 선조가 세자시절 악독하게 광해군을 괴롭힌 결과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광해군일기도 서인이라는 세력에 의해서 쓰여진 자료라 정확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4.3.2. 부정설

광해군의 궁궐 공사가 백성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마도 자신의 고생스러웠던 세자 시절에 대한 보상 심리와 왕권 강화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궁궐 증축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가지도자의 실정은 그런 사사로운 사유로는 쉴드가 안 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지나친 궁궐 공사는 당대에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광해군의 통치에서 가장 혹독한 비판을 받는 부분이다.

선조가 세자 시절부터 괴롭힌 트라우마가 심리적으로 악영향을 끼쳤다고는 하나, 그런 식의 변호는 나름 왕 노릇 잘하다 외국의 침략으로 비참한 신세가 되었던 선조의 의심병도 이해해 줘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반박할 수 있다. 광해군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즉위했기 때문에 세자 시절의 활약으로 대신들의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다. 물론 기대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꼭 좋은 군주가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또 잘못 알려진 사실로 서인이 광해군을 경계해서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것이 있는데, 광해군을 반대한 세력은 대북과 같은 북인이었던 소북이었으며 소북 중에서도 광해군의 처남 류희분이 소속된 청소북은 광해군에 우호적이었다. 남은 반 광해군파인 류영경의 탁소북조차 선조 사망 후에는 죄다 청소북을 자처하면서 자멸하는 등 광해군 즉위 초 상황이 그렇게 나쁜 환경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악조건에서 성군이 된 사례도 많았으며, 중립 내지는 광해군에게 동조하였던 일부 서인남인[31]을 내몰아 적으로 만드는 실수도 범했다.

물론 광해군도 대북파의 실세인 이이첨의 권력이 급격히 강해지자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앞서 "허풍쟁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이첨의 대북당이며, 아예 광해군은 이이첨더러 "네가 붓으로 한번 싸워봐라!"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 소북인 박승종이 이이첨의 뒷통수를 후려쳐[32] 이이첨이 소성대비를 죽이려 하면 박승종이 가솔들까지 이끌고 나서는 수준에 이르렀다.

말년의 광해군은 자신의 내치(內治)를 후회했는지 균형잡기를 시도했다. 광해군이 총애하던 신하가 서인 중 유명한 윤두수의 아들 윤휘였다는 점이 증거다.[33] 하지만 바로 그 균형 감각 때문이었을까? 박승종의 고변 역시 크게 신뢰하지 않으면서 (어쩌면 옥사에 질린 탓인지) 느린 대책을 보여서 몰락을 자초했다.

게다가 이이첨의 반대 급부로 중용된 임취정 같은 인물은 임진왜란 때는 파천 길에 사초를 태우고 도망갔다고 비판받고, 광해군과의 인연도 조카가 후궁이란 이유였으며 제 2의 이이첨이 되어 권력을 농단하는 등 막장이었다.[34]

또한 실록인 광해군일기의 사료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비록 광해군 일기가 서인이 집필한 면이 있다 치더라도 그들도 사관인만큼 없는 이야기를 지어서 쓰지는 않았다.

4.3.3. 소결

어쨌든 광해군은 세자시절 임진왜란 당시 도성을 버린 부왕을 대신해 일본군에 맞서 전란에 휩싸인 나라를 돌보고 분조를 이끌어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들을 조달했다. 이런 세자 시절의 모습은 선조인조가 전쟁이 터지자 구국보다는 일신 보전에 급급했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15년동안 집권하면서 숱한 옥사(봉산옥사, 칠서의 옥, 신경희의 옥, 계축옥사)를 거치며 점차 비대해진 김개시와 측근들의 전횡을 제어하지 못했고, 폐모로 반정의 구실을 만들었으며, 필요 이상의 궁궐 공사로 인한 치명적인 재정난과 민생난을 초래했다는 부정적 측면이 크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 일기 편은 전반부는 세자 시절의 활약과 이에 따른 선조의 질투심 및 후계 과정의 어려움, 재위기의 이런저런 치적들, 후반부는 인조반정에 이르는 과정과 광해군 시대의 옥사를 주로 서술하고 있다. 임해군 옥사, 봉산 옥사부터 시작해서 계축 옥사, 허균의 옥사 등 아무튼 광해의 총명함을 흐리게 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바로 광해가 벌였던 옥사를 들고 있다. 불안했던 광해의 입지를 강하게 만든 것도 옥사였지만, 반대로 옥사로 타 정파와 사대부가 소외되고 이이첨의 힘이 커져서 광해의 입지는 약화되었다고 적고 있으며 '인사에 관한 한 광해는 부왕 선조보다 하수'라고도 쓰고 있다.

이복 남동생 영창대군의 죽음을 접한 광해가 "내가 부덕하여 이 아이로 하여금 섬에서 병으로 죽게 했으니 비통하다.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 줘라."고 말은 해도 비정하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는 장면은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유일한 파스텔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마지막 장면은 광해군이 신선처럼 구름을 걸으면서 "세자 시절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은 빛나는 외교에서 보이듯 열린 이성과 현실 감각, 유려한 솜씨로 내치도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 상황을 만든 부왕 선조의 책임이 크겠지만, 누굴 탓하랴.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몫인 것을"이라는 글로 마무리하는데, 명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주어진 조건과 내면적 불안으로 인해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광해군에 대한 기대와 안타까움이 동시에 묻어 나는 대목이다. 다만 이런 평가는 공중파 교양 프로의 인터뷰에서 박시백 화백이 가장 좋아하는 조선 국왕 3위로 광해군을 꼽았던 것#에서도 드러나듯 박시백 화백 자체가 광해에게 매우 우호적인 성향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1. 대중의 의식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복권론을 이어받은 사극이나 창작물의 영향으로 매우 긍정적이다.

2.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광해군은 대동법에 반대하고 확대를 저지했다. 아래 나온 궁궐 5개 연달아 올리는 영건사업과 조도사의 수탈, 이를 비호하는 행보를 보면 대놓고 하지 말라고 안 했을 뿐 분명 막은게 맞다. 민생을 생각하지만 신중했을 뿐이라면 공납의 부작용을 극대화시키는 영건사업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대동법 참조.

3. 세자 때는 민심 수습과 전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냈지만, 즉위 후엔 궁궐병과 재정 파탄 사태으로 조선 내정에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궁궐 건축 사업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야말로 재앙에 가까운 악영향을 미쳐 당시 국가 재정의 15% ~ 25% 가까운 자원을 소비함은 물론, 관련 비리가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민중들에 대한 갖가지 수탈로 이어졌다. 대동법 등과 더불어 민중을 위했던 군주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사실이다.

4. 광해군은 후금과 친하게 지내자고 한 것으로 주로 알려져있지만, 실상은 정충신 등에게 첩보를 명하여 후금의 권력 구도나 병력, 군수 물자 등을 세세히 파악하게 하면서도, 강홍립에게 따로 편지를 받아서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내기도 했다. 심지어 후금의 세세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던 것을 이용해 후금의 후계구도까지 파악하고, 훗날 청 태종이 되는 홍타이지를 친조선파로 만들기 위해 정충신을 통해 접촉함과 동시에, 따이샨과 이간질을 벌여 후금의 내분을 계획하기도 했다. 적어도 후금에 대한 정보나 안목, 홍타이지라는 청 태종이 될 인물의 위험성 파악 등은 매우 뛰어났다.내치의 무능함과 정반대

5. 자신이 키워준 세력이 자신의 뜻과 정면으로 대치했다. 즉위 초에는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영창대군 즉위에 찬성하는 사람은 소북파 정도이고, 인목왕후는 그냥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무슨 이유인지 영창대군을 죽여버렸고, 인목왕후를 폐비하며 대북파를 극단적으로 키우는 무리수를 범했다. 자기를 지지하는 중신 이원익을 필두로 반대가 넘치는데도 모두 쫓아내는 자승자박을 한 것. (당장 광해군의 외교의 협력자인 윤휘, 정충신은 서인이고, 박승종은 소북 인사다.) 결국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부 배신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6. 광해군일기나 인조실록에서 광해군이 군사를 육성한 것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당장 광해군일기에서 도성 내의 군사들까지 북방 수비로 보낸다고 비판하는 것이나, 인조실록에서 이귀나 남이흥 등이 5년, 6년간 군사를 징발한 것을 그만뒀다느니, 올해에는 군사를 징발하지 않았다느니 등 광해군 때의 군사력 강화병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당장 이괄의 난 직후 정충신이 광해군 때의 절반만 복구해도 후금을 상대로 방어전이 가능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7. 대체로 조선왕조실록에선 광해군을 까면서 공민왕을 들먹이는 내용이 나오는데, 행보나 말기 그리고 정신적으로 이상해졌다는 것도 비슷하다.

부상하는 후금을 상대하면서 아버지 선조가 깔아놓은 외교 방향과 첩보체계를 잘 유지해 갔지만, 내치적으로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경제 상황을 무시한 무리한 궁궐 공사로 재정 파탄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벌충하기 위해 수탈에 가까운 고율의 과세와 매관매직을 일상화함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민생파탄은 이괄의 난과 함께 후금이 더욱 강해진 인조 시대에 인조 정권의 움직임을 크게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만 사르후 전투에 파병해서 날려먹은 병력만 1만 명에 가까운 점을 두고 오항녕은 무슨 중립 정책이 금쪽 같은 포수 1만 명을 날려먹느냐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잦은 궁궐 공사와 더불어 비판받아 마땅한 것은 잦은 옥사, 사실 옥사란 왕이 재위하면서 한 번 정도는 겪을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광해군은 다른 왕들과는 다른 것이 다른 왕들은 자신이 직접 기획했든 아니든 자기 자신이 절재하고 선은 지킨다. 즉 자기가 목표한 것을 거두면 그만둔다. 그러나 이와는 또 다른 공통점은 옥사를 벌여도 무고인지 아닌지는 봐가며 한다. 중종때의 정막개가 그나마 예외 사례이지만 이건 정막개가 워낙 기가막히게 연기를 잘한 것이니 예외로 치면 그 중종시절 상을 노리고 거짓 역모 보고가 판을 쳤을 때에도 정막개만 빼면 모두 무고로 드러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광해군에게는 그 정해진 선도 없었고 무고인지 아닌지도 보지 않았다. 봉산옥사의 경우 그냥 연루만 되면 죄다 닥치는대로 잡아들였고 안위가 조극신을 무고했을 때도 둘 다 잘못했음에도[35] 조극신만 유배하고 안위는 풀어주었으며 계축옥사 이후 폐모론이 들고 일어났을 때 당시 장령 배대유가 죄를 저지르고 그 벌을 모면하려고 고변한듯한 사례들을 2건이나 언급한다. 역모를 고변하면 천민의 경우 면천되고 벼슬까지 받는다는 어머어마한 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거짓 고변자들이 생길 것임은 분명한데도 선을 지키기는 커녕 거짓 고변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보호하고 앉았으니 거짓 고변자들이 판을 치는건 당연지사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광해군이 쫓겨나는데 일조했다. 그 많은 거짓 고변들은 신뢰하면서 정작 인조반정의 고변들은 잦은 옥사에 신물난 광해군이 무시해버렸기에 인조반정은 무려 2번이나 유출이 되었음에도 진행될 수 있었다. 더욱이 인조의 경우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자살한 것과 그것 때문에 정원군이 상심해서 죽자 이에 대한 분노로 역모를 계획한 것임을 감안하면 완벽하게 자승자박

4.4. 연산군과 비교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단 2년 만에 폐위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봉산옥사이후 폐위까지 무려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거기에 중종반정과 달리 인조반정은 정말로 극적으로 성공했다. 인조반정 직전에 이이반이 고변하였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반정군의 대표였던 김류는 두려움에 자신의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반정은 실패할 뻔 했다. 다만, 이괄이라는 희대의 장수가 있었기에 반정은 성공하였지만 말이다.[36]

즉, 광해군의 정통성과 그 위치는 연산군보다 강했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연산군은 조선왕조 역사상 정통성이 강력했던 군주 중 하나이다. 적장자이며, 중전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광해군은 서자에 심지어 차남이다. 동양의 왕위계승의 대원칙인 적장자 계승에서 보면 광해군의 정통성은 약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광해군은 세자시절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어린나이에도 민심을 수습하고, 전투를 경험했다. 당시 군주였던 선조나 다른 왕자들은 지도층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광해군이 보여준 것이었다. 그것도 겨우 18살의 나이였다.

그랬기 때문에 아무리 영창대군이 출산되었으나, 영창대군의 지위가 광해군의 지위에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선조도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넘기고 싶은 마음을 밝힌 적이 있으나, 그것을 실제로 옮길 수 없었다. 그만큼 광해군의 지위는 너무나도 굳건했다. 인조반정에서 인조가 내세운 명분은 폐모살제였으나, 그것이 만약 중대했다면 그 이후 10년의 세월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37] 연산군의 경우 단 2년만에 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이 왕으로서 한 행적은 폭군, 혼군이라는 칭호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광해군은 세지시절 너무나도 큰 업적을 이루어냈고, 이를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업적 때문에 그가 온갖 실정을 했음에도 15년 간 정권을 유지한 것이 아닐까한다. 심지어 영창대군이 죽은 이후 10년을 더 집권하였다. 반면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2년만에 몰락했다.[38]

4.5. 외교적 평가

5. 특이사항

왕으로선 꽤 특이한 기록이 있는데, 최다 공신 배출, 최다 존호 보유, 친국(親鞫) 직접 참여 등이 있단 거다. 최다 존호 보유 기록을 통해 그가 나름대로 강력했던 왕권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탯줄(태실)을 묻은 곳이 대구광역시 연경동의 야산이라고 한다. 동네에 도는 이야기 중에는 폐위당한 왕이라서 관리가 안 되다 보니 탯줄을 묻은 위치에 있던 석상 등을 집 지으려고 부숴서 가져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돌 조각을 부숴서 가져간 사람들이 안 좋은 일을 몇번 겪자 조각을 다시 다 모아서 원래 있던 위치에 던져놨다고 한다. 지금도 산에 올라가 보면 비석이나 거북이 조각 등의 잔해가 남아있다.

그를 재평가 하는 사람 중에 그를 왕으로 추존하는 경우도 꽤나 많은데, '광'해군이란 이유로 광종(光宗)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2002년 11월 15일에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사이트에서 광해군에게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 (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이라는 묘호 및 시호를 올려 추숭 복위하는 일이 있었다. 부인인 폐비 류씨(문성군부인)은 소온사헌혜장왕후(昭溫思獻惠章王后)로 같이 추존되었다. 아울러 능호는 열릉(烈陵)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가상 사회에서 있었던 일이라 정식으로 인정받지는 못하며, 당연히전주이씨의 왕실 종친회라고 할 수 있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담배 냄새를 몹시 싫어하여 궁중은 물론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예절(예법)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감사합니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고기를 먹을 때 익힌 고기는 먹지 않고 육회나 살짝 불에 익힌 정도로만 해서 먹었다고 한다. 맛잘알[39]

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 9월 25일자에는 강원도에서 UFO(미확인 비행물체)가 나타난 기록이 있다. 광해군 시기의 UFO 소동 참조. 해당 실록 국역 링크 해당 내용을 설정에 써먹은 드라마나 작품이 많다. 기찰비록이나 설희, 별에서 온 그대.

개인적으로는 미신(무속신앙/점쟁이/굿놀이 등)을 매우 신봉했다. 풍수가, 점쟁이들을 늘 가까이 두었고, 정책에서도 이들의 결정을 많이 따랐다고 한다.[40] 대표적인 사레는 이와 같다.

  • 풍수가 이의신이 한양의 지기가 다했으니 교하로 천도하자고 하자 교하 천도를 추진했다. 단 이것은 신하들이 반대해 실패했다.
  • 계축옥사때 저주 행위로 절도유배에 처해진 점쟁이가 용하다 하여 사람을 보내 점을 쳤다.
  • 복동이라는 점쟁이를 신뢰해[41]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의견을 물었다.[42]
  • 말년에는 칙서를 받는 일도 길일을 택해서 하려고 했다. 단 이를 위해선 결국 사신에게 많은 뇌물이 주어져야 했다.[43]

하지만 이런 미신 신봉은 광해군의 궁궐병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선조 말년부터 시작된 창덕궁 공사를 끝낸 광해군은 별궁인 창경궁경운궁 수리를 마쳤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광해군 9년 느닷없이 인왕산 아래 새 궁궐을 지을 것을 명령했다.(인경궁) 이는 풍수학자 시문용이 건의하고 중 성지가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어떤 의미인지는 뻔한 일.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이번에는 또 한성부 새문동에 왕기(王氣)가 흐른다는 풍수가 김일룡의 말을 듣고 새문동에 집을 짓는데, 문제는 그 터가 광해군의 동생 정원군의 집이었다는 것(...) 결국 정원군은 집을 빼앗겼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궁이 경덕궁[44] 두 개의 궁전을 한번에 지으려고 하니 재정이 고갈되는건 당연지사.

6. 가족 관계

  • 정비 : 문성군부인 류씨
    • 아들 : 폐세자, 이지
      • 손녀 : 현주 - 김문거(金文擧)에게 하가
    • 며느리 : 폐세자빈 밀양 박씨
  • 후궁 : 소의 윤씨(昭儀尹氏)
    • 딸 : 옹주 - 박징원(朴澂遠)에게 하가
  • 후궁 : 소의 홍씨(昭儀洪氏)
  • 후궁 : 소의 권씨(昭儀權氏)
  • 후궁 : 숙의 허씨(淑儀許氏)
  • 후궁 : 숙의 원씨(淑儀元氏)
  • 후궁 : 소용 정씨(昭容鄭氏)
  • 후궁 : 소용 임씨(昭容任氏)
  • 후궁 : 소원 신씨(昭媛辛氏) - 인빈 김씨의 조카
  • 후궁 : 숙원 한씨(淑媛韓氏)
  • 후궁 : 상궁 이씨(尙宮李氏)
  • 후궁 : 상궁 최씨(尙宮崔氏)
  • 후궁 : 궁인 조씨(宮人趙氏)
  • 후궁 : 궁인 변씨(宮人邊氏) - 변상궁으로 알려져 있다.[45]

폐비 유씨(문성군부인)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요절하지 않고 장성했던 아들인 폐세자 이지는, 부인인 폐세자빈 박씨와 함께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동반 자살 시도를 했으나 죽지 않았다. 마침 한양에서 가위를 보내온 걸 보고 유배지 탈출 계획(탈출기도)을 세웠다. 그리고 그 해 음력 4월, 26일 동안 숟가락과 가위로 땅굴을 파며 바깥으로 나오는데 성공했다. 박씨는 파낸 흙을 자루에 담아 방으로 옮겼다. 불행히도 이지는 도주 3일만에 인조의 감시자들에게 붙잡혔는데, 박씨는 폐세자의 도주 당일 나무 위에 올라가 남편이 안전하게 도망치는지 망을 보다가 그만 군졸들에게 들켜 떨어져 몸을 상했고 이후 남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절망하여 스스로 아까운 나이에 목숨을 끊었다. 이어서 붙잡힌 이지도 자결을 명령받아, 2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46]

광해군과 같이 유배당한 문성군부인 류씨는 아들 내외의 비참한 소식을 접하고 우울증과 홧병 등으로 죽었다. 야사 대동야승에서는 아들 부부가 죽자 스스로 식음을 전폐해서 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참고로 류씨는 광해군 재위기에도 친명배금을 주장했을 정도로 강단 있는 여인이었다.[47] 그녀가 왕비였던 시절, 사찰을 돌아다니며 "내생엔 두 번 다시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라 빌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48] 그녀의 형제들도 반정 직후 모두 처형되었으니, 실로 비극의 가계라 할 만하다.

광해군은 소의 윤씨에게서 옹주를 1명 낳았는데 옹주는 인조반정 이후 폐서인되었고, 이후 박징원과 결혼해 2남 3녀를 낳았다. 광해군의 아들 이지가 후손이 없었으므로, 서녀인 옹주의 후손들(즉, 광해군의 외손자의 후손들)이 광해군의 묘를 돌보았고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손자녀로는 폐세자와 폐세자빈 사이에서 자식이 없고[49] 후궁 소생의 현주가 1명 있었는데 김문거와 결혼하였다.

7. 무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위치한 광해군묘.[50] 어머니인 공빈 김씨성묘(成墓) 근처에 있다.

더불어 난간석, 무인석, 동물상도 조성되어 있지 않다. 옆에 같이 안장된 사람은 그의 왕비였던 문성군부인 류씨다. 다른 폐군(廢君)인 연산군의 묘는 서울특별시 시가지 근방에 있는지라 상당히 찾기 쉬운 위치에 있는데 반해, 광해군의 묘는 찾아 들어가기가 복잡하고 규모도 작은 편이다.

광해군과 그의 아내 류씨의 묘의 위치가 설명되어 있는 안내문은 주변의 교회가 운영하는 공원묘지 앞의 식당 간판과 같다. 공원묘지 너머 숲 속에 이 두 묘가 있는데, 제대로 된 길이 없으므로 산등성이를 타고 돌아가야 닿을 수 있다. 만약 찾아가고 싶다면 금곡역에서 64번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51]

8. 영상 매체에서

★은 주연

허장강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안현철 감독 작품으로, 옛날 영화라 여기선 단순한 악인으로 나온다. 재위 중 행적이 연산군 비슷하게 묘사되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실각했는데, 인목대비에게 자비를 청하자 인조가 "그냥 사사하자"고 하니 인목 대비가 "그러면 저 자와 내가 다를 것이 없지 않느냐?" 라면서 너그럽게 살려주는 위엄을 보이지만 현실은 시궁창. 실제론 오히려 반대로 인목대비가 열렬히 나서서 죽이려고 했으나, 다른 이들이 뜯어말렸다. 이 영화는 흥행도 평가도 좋지 않았다.
  • TBC 인목대비 (1974년)
이순재가 광해군 역을 맡았다.★ 신봉승 극본으로서, 그 이전 영상물과는 다르게 사료를 바탕으로 광해군의 본 모습을 찾고자 애쓴 작품이다. 인간 광해군의 고뇌와 갈등을 그린 이순재의 내면 연기가 돋보인 작품.
  • MBC 여인열전 서궁마마 (1982년)
이덕화가 광해군 역을 맡았다.★
황치훈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이희도가 광해군 역을 맡았다.★
김규철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특기할 점으로 악역 캐스팅이 꽤 화려하단 거다. 이영애김개시 역을, 서인석이이첨 역을 맡았다. 심지어 유영경 역으로는 임혁이 나왔다. 사실 악역 외에도 연기력이 후덜덜한 분들이 많이 출연하는데, 선조 역으로는 원로 배우 김성옥, 이원익 역으로는 신구가 출연하였다. 그 외에 김보성이 이영애(김개시)를 짝사랑하는 호위 무사 겸 친구이자 내시로 등장한다.
김승수가 광해군 역을 맡았다.
김주승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지성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광해군을 다룬 작품 중 그의 인간적인 내면 묘사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시청률은 대장금이라는 매머드급 경쟁작 때문에 안습. 사강이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 중이던 홍유진이 모처럼 드라마로 복귀해 비극의 왕비 문성군부인 유씨 역으로 출연했다.
이준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임진왜란 중 세자 자리에 오른다.
이호성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극 초반까지는 버진이네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미치광이 영감처럼 페이크를 취했다. 그러다 박규에게 제주도에 유배 중인 말년의 광해군이라는 게 들통나고, 그 후로 그에게 권력의 무상함을 말하며 여러 가지 현명한 조언을 해주며 상담역으로 활약한다.
이병헌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참고로 이병헌은 이 영화에서 광해군과 똑같이 생긴 천민 '하선' 역도 같이맡으면서 1인2역의 역할을 소화했다.(하선은 가상의 인물이다.) 광해군에 대한 인식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화.
인교진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1999년판 허준과 마찬가지로 왕자 시절의 인연을 통해 허준에게 호의를 보였으며, 동의보감 집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상윤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국왕으로서의 냉철함보다는 왕자 시절이 중심이 되어 한 인간으로서의 감성적인 모습을 조명했다. 여기서 그는 주인공 문근영이 배역을 맡은 도공 유정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갖는다. 여담으로, 형인 임해군 (이광수 분)보다 더 늙어보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52]
서인국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서자 출신으로 세자에 올라 16년간 내부의 적과 외부의 난으로부터 끊임없이 군주의 자질을 시험 받으며 끝내 왕으로 우뚝 서기까지의 세자 광해군의 성장 스토리를 보여준다.

나는 말입니다. 이순신이 마음에 듭니다.

불의 여신 정이에서도 아역 광해군을 맡았던 노영학이 다시 같은 역을 맡았다. 다만 이쪽은 선조때의 임진왜란이 중심이다.
차승원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초반부 선조와의 갈등 속에서 세자 자리마저 위태로웠던 광해군의 상황과, 이복 여동생 정명공주에게 따뜻한 인간적인 모습이 함께 그려졌으며, 군주의 자리에 오른 후에는 국왕으로써의 카리스마 넘치는 위엄을 갖추지만, 김개시(김가희. 김개시는 그녀를 낮춘 이름이다.)의 계략 앞에서는 다소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실상 적대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강주선과도 손을 잡으려 하는 냉정하면서도 실리를 추구하는 군주의 모습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역사의 냉혹한 모습은 가고 감성적인 인물이 되기 시작했다.원래 역사에서 직접 친국(親局)을 단행해 무고한 자들도 죽였던 광해군이 반대파 숙청을 머뭇거리거나, 명나라 파병에 조성하에게 협력을 부탁하는 등[53] 여러모로 실제 광해군의 비해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 다만 정명공주가 주인공이라 이 이상의 부각은 무리겠지만, 광해군이 얼마나 고단하게 권력을 유지하고, 외롭게 중립 외교를 지지했는지 나름 잘 묘사하였다. 폐위된 광해군의 쓸쓸함을 보여주며 마지막까지 나라를 걱정하는 멋진 모습으로 퇴장하였다.
여진구가 광해 역을 맡았다.★ 왕이 된 남자에서 후반의 광해군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막 세자의 자리에 오른 여린 광해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드라마로 리메이크한 작품. 여진구가 광대 하선과 같이 1인 2역을 맡았다.★[54] 대립군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이쪽은 불안감에 의해 광기를 표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준호가 광해 역을 맡았다.

9. 그 외 매체에서

여기서는 왕세자 시절이라서 긍정적인 인물로 나온다. 이순신이 거병한 이유를 이해하며 그를 끝까지 설득하려 하고, 결국 막판에 여진족의 화살에 맞았지만 이순신에게 구출되어, 미리 작성한 선양 교지를 부하에게 읊게 하여 이순신이 즉위하는데 정당한 명분을 붙여주고 사망한다.[55] 사후, 이순신이 한국을 세운 뒤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인정되어[56] 애종이라는 묘호를 얻는다.
2부에서 등장. 1부에서의 나비효과로 역사가 바뀌면서 가상인물인 장조대왕(즉위 전 군호는 경성군)이 왕이 되는 바람에 아버지 하성군이 왕이 되지 못해 본인도 왕자가 아닌 그냥 종친으로 태어났다. 주색잡기에 빠진 아버지 하성군과 개막장인 형 임해군과는 달리 책을 좋아하는 차분한 모범생에 개념인. 미래인이 빙의한 주인공 장조대왕이 원역사에서 광해군의 세자 시절 행보를 생각해서 높게 평가하고 잘 대해준다.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또 다른 미래인이 빙의한 인물인 상희가 완성한 종두를 맞고 회복하여 조선의 첫 종두 사용자가 되는데, 그 후로 상희를 연모하게 된다. 하성군이 일본에 간 후 보내는 정보 보고는 형식적으로는 광해군에게 보내는 편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광해군이 갖고 입궐해 주인공을 알현하는데, 이때 곁에 상희가 있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는다고 한다. 14살이 되어 어른들이 혼사를 추진하나 상희에 대한 짝사랑 때문에 결혼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조선으로 돌아온 하성군의 강력한 권유로 문성군부인 유씨와 일단 결혼했지만, 왜란이 터지고 형이 왜군 앞잡이가 되면서 인생이 꼬이고 만다. 장조대왕은 개인적으로 광해군에게 호감이 있어 연좌죄로 처벌하고 싶지 않았기에 신립의 관을 운구하는 일을 맡긴 뒤 종친들로 구성된 부대인 족친위로 참전시켜서 죄를 씻게 해준다. 그럼에도 광해군을 처벌하라는 여론이 심해서 부인 유씨와 함께 유럽으로 가는 사절단인 견서사로 파견하는데 광해군에게는 시야를 넓힐 기회가 되지만 광해군을 처벌하라는 선비들에게는 이것이 귀양으로 여겨졌기 때문. 견서사로 떠나면서 바닷길에서 임신을 하면 곤란하다는 이유로 유씨와 관계를 전혀 맺지 않는데 이 때문에 유씨와 관계가 크게 악화되어 결국 유럽 체류 도중 유씨와 이혼했고, 짝사랑인 상희에 대한 미련과 집안이 망한 것에 대한 허탈감으로 유럽에 남아 천주교에 귀의하여 신부가 된다.
메인남주. 폭군이 아니라 세자 시절부터 적이 많은 환경에서 자라왔지만 성품은 올곧다. 여주인공 경민을 잘 챙겨주는 사랑꾼.
남주인공 정이덕의 친아버지였다는 충격적인 반전으로 등장. 그리고 정이덕을 죽이려고 하는 인물로 나온다.
남주인공 함의 친아버지로 공개되었다. 4부 시점에서는 아들, 김개시, 수족들을 모두 잃은 백발의 노인으로 나온다. 실제로 사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을 반영했는지 노년에 사주를 하고 있다.


  1. [1] 재위 중 받은 존호이다.
  2. [2] 군호는 강원도 춘천(春川)의 옛이름인 광해주(光海州)에서 유래하였다
  3. [3] 현재의 제주시 이도1동 국민은행 자리다.
  4. [4] 폐위 후 그대로 유배지에서 살다 죽었다. 인조는 반정의 명분으로 폐모살제를 주장했으나 차마 가족을, 그것도 선왕을 죽이지는 못했다. 때문에 유배당한 것 치곤 꽤 장수한 편.
  5. [5] 폐위되었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묘'로 불린다.
  6. [6] 광해군 즉위 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반정군에 의해 강제삭탈되었다. 어쩜 이런 것까지 연산군이랑 데칼코마니
  7. [7] 노산군일기는 후에 단종실록으로 개수되었으나, 알맹이까지 바꾸진 못했다.
  8. [8] 사실 연산군도 즉위 초반까지는 나름대로 나라를 잘 이끌어갔다. 문제는 갑자사화 이후다.
  9. [9] 순화군, 신성군, 정원군 등이 있긴 했지만 모두 어렸고, 후에 보면 나오지만 순화군, 정원군 역시도 임해군처럼 술퍼마시고 부녀자나 아녀자들을 희롱하고 성폭행하는 등 인성과 개념에 있어 정말로 개망나니였다.
  10. [10] 말이 분조지 실제로 당시 전시조정이었다.
  11. [11] 덕분에 인빈 김씨는 편하게 살 수 있었다.처세술 9단
  12. [12] 왕이 직접 국문한 것을 말하는 친국(親鞫) 회수가 344건인데, 이는 초장기 집권을 했던 영조의 401건 다음으로 많은 횟수이다. 재위기간을 고려해 살펴본다면, 광해군의 친국횟수는 압도적으로 집약적이고 빈번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영조 재위기간 52년, 광해군 재위기간 15년....
  13. [13] 집착하고 자꾸 별것도 아닌것에 흥분하고 의심하는 병이다.
  14. [14] 광해군이 폭군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도 세자시절의 업적은 무시하지 못한다.
  15. [15] 양위
  16. [16] 괜히 선조가 욕을 먹는게 아니다.
  17. [17] 신하들이 반대해서 양위도, 국정위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18. [18] 그 동안 선조는 의주에서 요동을 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 그것을 말리던 신하들이 얼마나 빡쳤는지, 한번은 요동가면 너님 왕 아님을 시전한다.
  19. [19] 선조
  20. [20] 조선왕조실록 선조25년 6월 13일 기사부터 7개월 간의 내용은 선조의 요동행보를 말리는 신하들의 고군분투기록을 담고있다.
  21. [21] 물론 파천 자체는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요동으로 가려한게 문제지만...
  22. [22] 다만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
  23. [23] 다만 함경도는 원래 여러 차별로 민심이 안 좋았던데다가 국경인 등의 순왜들이 부추긴 탓도 있으며 그 함경도마저 왜군과 순왜들의 횡포로 나중에 의병이 일어난다.
  24. [24] 실제로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기 전에도 의병은 일어나고 있었지만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면서 의병은 활발해졌다.
  25. [25] 동양의 문화권에서 수렴청정의 기준은 20살이었다. 성종의 경우도 그러했고, 고종도 그러했다.
  26. [26]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간 아버지보다는, 뒷수습하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들이 더 신뢰가 가는 건 사실이다.
  27. [27] 문제는 이 논의로 인해서 선조는 양위소동을 거의 밥먹듯이 일으키는데, 그 때마다 광해군은 선조의 앞에서 석고대죄를 해야했다.
  28. [28] 창덕궁, 창경궁,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29. [29] 참조.
  30. [30] 단 광해군이 자발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았다. 대동법참조.
  31. [31] 실제로 서인의 영수인 이항복은 광해군의 폐세자에 반대하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32. [32] 이이첨의 딸과 박승종의 맏아들이 혼인을 맺은 후 방심하던 이이첨의 손발을 묶어버린 것. 자기 가솔들까지 동원하여 이이첨과 극한의 대립을 하기도 했다.
  33. [33] 윤휘는 인조반정 강경파에 속한 서인들에게 이 때문에 배신자로 취급되기도 해서 살해 위협도 받았다.
  34. [34] 임취정은 반정 이후 의외로 파직에 그쳤으나 1628년 임경후(任慶後)·박동기(朴東起)·이종충(李宗忠)·오현(吳玹)·이후강(李後崗)·안대홍(安大弘)·고경성(高景星) 등과 함께 광해군의 복위를 모의 하다가 실패해 죽었다. 다만 임상원이 쓴 임취정의 조카 임유후의 행장에서는 임취정이 진짜로 반역을 꾸민건 아니고 모함당해 억울하게 죽었다고 나온다. 물론 조카의 행장에 쓰여있는 내용이라 100%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은 아니다. 임취정이 인조반정 이후 바로 처단되지 않고 파직에 그친 이유는 아마 대북 이이첨과 대립 관계였던데다 중북과 관련된 인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광해군 일기를 보면, 유대건이 임귀인의 숙부 임취정과 관계를 맺었고 임취정의 아들 임흥후가 기수발과 함께 유대건의 당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유대건은 중북이고(묵재일기 연평일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건은 김자점의 외삼촌이라고 하여 탄핵을 당했는데, 광해군이 대북파가 중북(中北)을 모함하고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기수발은 중북 기자헌의 조카다.
  35. [35] 조극신은 원래 안위와 함께 거짓 고변을 하려고 했지만 안위가 뒤통수를 때렸다.
  36. [36] 이러한 일이 후일 이괄의 난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37. [37] 영창대군이 죽은 계축옥사는 1613년이고, 광해군의 폐위는 1623년이다.
  38. [38] 제위기간도 훨씬 길기도 하다.
  39. [39] 같은 자료에 '산나물은 더럽다 하여 먹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결과 심각한 배변장애(...)에 시달렸으며 혈색도 칙칙했다고 한다.
  40. [40] 가령 길하다 하면 추진하고, 흉하다 하면 추진하지 않는다든가
  41. [41] 계기가 뭔고 하니 옥사 당시 저주한 물건들이 궐안에 있는데 자신을 풀어주면 모두 파낼 수 있으며 왕비의 병세도 회복시킬 수 있다며 만일 효험이 없으면 자신을 죽이라고 말했는데, 광해군도 귀가 솔깃했는지 그대로 따라주었고 때맞춰 중전의 병세가 호전되었는지 왕이 많은 상을 내려주었다.
  42. [42] 박근혜의 최순실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된다. 이후 복동이는 인조반정 이후 처형당한다.
  43. [43] 생각해보면, 현대의 관점이든 과거의 관점이든 이는 매우 심한 외교적 결례이다. 국빈이 방문했는데 이를 길일 타령하며 기다리게 한 셈이니...
  44. [44] 그런데 말이 맞아떨어졌는지 결국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된다. 그리고 김일룡은 이 일 때문에 인조에게 밉보였는지, 위에 나온 복동이처럼 처형당한다.
  45. [45] 변개똥, 변아무개 등으로 불렸다. 그녀는 광해군 재위 말년에 반정의 움직임, 기미가 보여 상소가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변상궁이 광해군을 아첨(설득)해 능양군을 주축으로 해서 김자점, 김류 등이 이끄는 반정군이 잘 들어오게 해주게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반정군은 광해군의 궁인이라며 오히려 도와준 궁인 변상궁을 처형(참수)시킨다.
  46. [46] 만약 광해군이 실제 수명대로 만 66세까지 왕에 있었다면, 이지는 (사도세자 같이 되지 않는다면) 만 42세 7개월의 나이에 즉위할 뻔 했다. 이는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다면 영조가 죽었을 때의 나이인 만 41세보다 많은 것이며, 문종은 만 36세, 광해군과 순종 황제는 만 33세에 즉위했으니 이 기록을 갱신했을 나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 연산군이 이복 동생 중종만큼 오래 살았다면, 이황도 만 37세에 계승하게 된다. 하지만 연산군이 그렇게 반정을 겪지 않고 장수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은가? (흥미롭게도 소현세자 역시 순조롭게 계승했다면 만 37세였을 것이다.)
  47. [47] 이 때문에 광해군의 고립됨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당장 아내부터가 현실을 보지 못하는 판국이었으니.
  48. [48] 이전에 거의 유사한 말을 한 사람이 있는데, 중국 유송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제 유준이었다. 그는 "내세에는 제왕의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49. [49] 딸이 하나 있었으나 요절하였다.
  50. [50] 연산군묘처럼 폐위당한 임금이기 때문에 능(陵)이 아니라 묘(墓)이다. 당연히 묘역 관리는 다른 임금들의 능에 비해 조악한 편이다. 그의 시신은 왕자(대군)의 예로 안장되었기 때문에 그의 묘 규모는 초라하다.
  51. [51] 남양주시의 공영버스 참조.
  52. [52] 이는 당연한 게, 이광수가 노안이기는 하지만 이상윤이 더 나이가 많은 데다가, 이상윤도 얼굴이 노안이라서다. 그런지라 당연히 형으로 보인다.
  53. [53] 실제 역사에서 광해군은 대북파의 대명배금을 결사적으로 혼자! 반대했다. 그럴 만큼 강단도 있는 광해군의 모습이 잘 나오지 않는다.
  54. [54] 실제 광해군이 아닌 광해군을 모티브로 하여 새로이 창조해낸 인물임을 밝히고 있다.
  55. [55] 이때 윤두수를 비롯한 고관대작들이 말리려 드나, 이미 도 여진족에게 죽은 시점에서 세자인 광해군이 자동으로 임금이 되어 감히 옥체에 손을 대지 못했다.
  56. [56] 사실상 즉위를 못했기에 논란이 있었으나, 부왕을 포함한 모든 왕족들이 전멸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광해가 왕이 되는것이 원칙이었고, 교서를 읽어 이순신에게 선양함으로서 왕권을 행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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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20-05-27 00:2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