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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주석 관련 틀














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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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3대 주석
덩샤오핑
邓小平 / 鄧小平 | Deng Xiaopíng

이름

간체자: 邓小平 / 정체자: 鄧小平 (병음: Dèng Xiǎopíng)
한국 한자음: 등소평[1]

초명

덩시옌성 (鄧先聖, 등선성, 1904년 - 1908년)
덩시시옌 (鄧希賢, 등희현, 1909년 - 1926년)

출생

1904년 8월 22일[2]

청나라 쓰촨성 광안현 협흥향 패방촌[3]

사망

1997년 2월 19일 (향년 92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

국적

청나라
중화민국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신체

152cm[4]

부모

아버지 : 덩사오창 (邓绍昌, 1886년 - 1936년)
어머니 : 덩단스 (邓淡氏, 1884년 - 1926년)[5]

배우자

장시위안 (张锡媛)[6]
진웨이잉 (金维映)[7]
줘린 (卓琳)[8]

자녀

덩린 (邓林, 1941년 - )
덩푸팡 (邓朴方, 1944년 4월 16일 - )
덩난 (邓楠, 1945년 10월 - )
덩룽 (邓榕, 1950년 - )
덩즈팡 (邓质方, 1952년 - )

학력

모스크바 손중산 대학 정치경제학과 졸업

직업

정치인, 혁명가, 외교관, 군사 전문가

종교

없음 (무신론)[9]

정당

중국 공산당

{{{#!folding [ 역임한 지위 ]

{{{#!wiki style="margin:-11px;margin-top:-5px;margin-bottom:-5px"

중국공산당 제 3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임기

1981년 6월 28일 - 1989년 11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 제 1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임기

1983년 6월 6일 - 1990년 3월 19일

중화인민공화국 제 3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장

임기

1978년 3월 8일 - 1983년 6월 22일

중화인민공화국 제 6, 7대 인민해방군 참모총장

임기

1975년 1월 - 1976년 4월

1977년 7월 - 1980년 3월

중국공산당 제 12회 중앙고문위원회 주임

임기

1982년 9월 13일 - 1987년 11월 2일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부총리

임기

1954년 3월 - 1968년 10월

1973년 2월 - 1976년 4월

1977년 8월 - 1980년 9월

중국공산당 제 10회 상무위원회 부주석

임기

1975년 1월 10일 - 1976년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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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초기 이력
3. 국공 내전과 항일 전쟁
4.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 문화 대혁명과 시련
6. 1차 복권
7. 2차 복권 및 실권 장악
8. 집권 시기
8.1. 문화 대혁명 청산
8.2. 근대화 추진
8.3. 개방 정책
8.4. 대외 정책
8.5. 톈안먼 사건(천안문 6.4 항쟁)
8.6. 임기제 확립
8.7. 말년
9. 죽음
10. 평가
11. 어록
12. 가족
13. 사진 이야기
14. 여담
15. 매체에서

1. 개요


1979년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10]

중국의 정치인. 중국 공산당 2세대[11] 중 가장 주요한 인물로, 일명 부도옹(不倒翁, 오뚝이)[12] 혹은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의 다른 지도자들처럼 공산당의 1인자인 당 총서기나 국가 원수인 국가주석 자리에 앉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중앙고문위원회[13] 주임 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14] 1978~1992년까지 중국의 최고 실권자로 군림해왔다. 이후 일선에선 물러났지만, 죽기 전까지 사실상 중공에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면 된다.

20세기 후반 중국 공산당의 개혁개방 정책을 이끈 인물로, 현대 중국 언론에선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칭한다. 흑묘백묘론으로 알려진[15] 실사구시적 태도를 취하며 자본주의사회주의의 융합을 시도했다. 일명 중국 특색 사회주의[16]로 이후 중국의 고도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정치분야에서는 여전히 일당독재를 지속,[17] 이에 반발하며 발생한 중국 인민들의 천안문 사태를 탄압하고 민중 학살을 자행한 직접적인 최종 책임자이기도 하다.

2. 초기 이력


1921년 프랑스에서 삼촌 덩샤오성(鄧紹聖)[18]과 덩샤오핑.

덩샤오핑은 쓰촨 성에서 유복한 집안(집에 방이 12칸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1900년대 초에 벽돌집으로)의 장남으로 출생해 1918년 근공검학(勤工儉學)[19] 운동에 따라 프랑스에 건너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하였다. 이 때 돈이 없어 많은 끼니를 크루아상 하나로 때웠다고 한다.

그런데 1차 대전의 여파로 노동력 부족은 둘째치고 프랑스의 일자리 자체가 적어지면서 프랑스 측의 대우가 나빠졌다. 처음에는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간 덩샤오핑은 이 시기에 공부에서 운동으로 관심을 돌려 1923년 말쯤에 '중국 공산 청년 동맹'[20]에 가입하고 조직 기관지 "적광(赤光)"에서 저우언라이와 함께 일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한다. 1924년에 저우언라이를 포함하여 청년 동맹의 지도자급들이 모스크바로 떠난 뒤 덩샤오핑이 지도자급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후 1924~1925년 사이에 적광에서 세 편의 글을 썼는데 어조는 강렬해도 저우언라이의 글에 비하면 이론적인 뒷받침이나 문장의 퀄리티는 그냥 그랬다고 한다. 이는 덩샤오핑이 중국에서 공부하던 시절과 프랑스 예비 유학생으로서 준비하던 시절에도 항상 성적이 중간에서 맴돌았던 인물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21]

그 뒤 모종의 사건으로 프랑스 경찰이 귀찮게 하기도 하고 어차피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기는 해야했던지라 경유지 비슷하게 하여 동지들과 같이 1926년 초 모스크바로 향한다. 물론 이는 모스크바가 공산주의자에게 갖는 상징성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 후 모스크바에 간 덩샤오핑은 1926년 초에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22]에 입학했고(이 무렵 장징궈와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때 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리고 마침 1920년대 초부터 중국인들이 러시아로 유학을 많이들 왔는지 1925년에 설립된 중산대학(中山大學)[23]으로 1926년 중순 쯤에 거처를 옮겼다.

덩샤오핑은 여기서 자기 이론의 배경인 마르크스-레닌 주의를 배웠는데 이것도 깊게 배우질 않고 프랑스 시절처럼 어중간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깊게 파고들지 않아서 극좌파 노선이 아니라 실용적인 성향을 가지게된 것으로 보인다.(아예 덩샤오핑이라는 인물 자체가 이론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커갔던 인물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24]

1926년 말, 당대 중국의 군벌 펑위샹 밑으로 들어간 덩샤오핑은 정치적 선동 부분의 일을 맡아서 공산주의에 대한 강의를 하며 지냈는데 펑위샹은 소련과 연계하면서도 반공을 표방한 장제스와 합작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한 펑위샹은 덩샤오핑을 군에서 내쫓았고[25] 1927년 7월, 덩샤오핑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우한(武漢)으로 가서 당의 중앙에서 일하게 된다.[26] 그리고 1927년 8월 7일 8.7 긴급회의에 서기로 참석하여 마오쩌둥을 처음 만난다. 그후 몇 개월 뒤 당 중앙이 상하이로 옮기자 덩샤오핑도 같이 따라가고 1928년 초에 중산 대학에서 같이 수학했던 동지 장시위안과 결혼했는데 안타깝게도 2년 뒤 장시위안이 사망하게 되어 그의 첫 번째 결혼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3. 국공 내전과 항일 전쟁

홍군의 정치장교로 근무했다. 1933년 당시 비주류였던 마오쩌둥을 지지하고,[27]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장교를 맡았다.


팔로군 시절 129사단 수뇌부 좌로부터 리다(후에 상장), 덩샤오핑, 류보청(후에 원수), 차이수판.

"군신" 또는 "독안룡"이라고 불리던 팔로군 명장 류보청과 함께 129사단을 이끌고 8로군 주류와 떨어져 옌안을 떠나 중원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배후에서 항일 전쟁을 치렀다. 류덩군이라고 불린 이 129사단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덩샤오핑의 군사적 재능도 높이 평가되었다.

국공 내전이 시작되자 8로군은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29사단은 확대 개편되어 제2야전군이 되었다.[28] 국공 내전 초기에 전체적으로 인민해방군은 밀리고 있었으나, 류덩군은 중원에서 국민당군을 견제하면서 산둥 반도를 본거지로 하여 후방을 교란했다. 류덩군은 산둥 반도를 장악했고, 1948년 말부터 전쟁은 전체적으로 역전되어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1949년 장강(長江) 도하 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 인민 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29]

스스로 군 경력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던듯, 최고 권좌에 오른 후, "어떤 전공을 공부하셨습니까?"는 서방 기자의 질문에 "특별히 없습니다만, 굳이 하나 말하자면 군사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대답했다고.

4.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이 건국되었지만, 서부에는 1950년대 초반까지 국민당군 40여만명이 후쭝난지휘아래 남아 있었다. 류덩군은 서부로 진격했고, 1949년 12월 청두를 함락시켜 대륙에 남아 있던 최후의 국민당 근거지를 점령했다. 국민당군은 쓰촨에서 밀려났지만 쓰촨성 서부에서 끈질기게 저항했다. 류덩군은 1950년 말부터 벌어진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이곳에 주둔하면서 서남군구로 개편되었다. 여기서 덩샤오핑은 서남군구 정치장교, 서남군정위원회 부주석을 맡아보았고 이후에는 군에서 제대해 충칭시장을 역임하면서 토지 개혁, 아편 거래 근절, 국민당 잔당 토벌들의 여러 조치들을 실시했다. 이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이었기 때문에 토지를 가진 지주들이 폭동까지 일으킬 정도로 저항했으나, 덩샤오핑은 무자비하게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덩샤오핑은 이 때 저항하는 지주계급 및 아편유통업자, 기타 국민당 잔당들을 합해 십만명 이상을 처형했다고 알려져 있다. 덩샤오핑은 이렇게 과감하면서도 별로 잡음이 없게 일처리를 했기 때문에 중앙에서 주목하게 되었다.

이렇게 행정에서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3년 후 중앙으로 전임되어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1954년 당 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국공 내전 말에 그와 지위가 비슷하거나 그보다 훨씬 높았던 인물들이 많았음에도 꾸준히 승진하여 지도부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위에서 상술한 서남지구에서 능력과 리더십에서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1957년에는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30]가 되어 국정 일반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덩샤오핑은 좀 더 큰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31] 류사오치와 그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앉히려는 계획을 세우는 한편 경제 개혁을 실시했는데, 이로 인해 당 조직과 전체 인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1960년 중국과 소련이 결별하자 공산국가들이 모인 여러 회의에서 마오주의를 설파, 소련을 "수정주의"로 비판하여 마오쩌둥의 신임을 톡톡히 받았다. 이 마오의 신임은 덩샤오핑이 실각하더라도 다시 복귀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5. 문화 대혁명과 시련

하지만 국가주석에서 물러난 마오쩌둥은 류사오치, 덩샤오핑이 자신이 죽으면 자신을 스탈린을 격하하듯이 격하할 중국의 흐루쇼프, 당내에서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반혁명분자요 주자파라 여기게 되었고 이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여기에 장칭이 열심히 마오쩌둥을 부추겼다.[32] 결국 1965년 해서파관 사건을 시작으로 1966년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이 벌어지면서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 중국 전역은 홍위병들의 살육과 파괴, 약탈로 점철되는 개판이라는 말도 아까운 생지옥으로 변모하였다. 이때 류사오치도 숙청당했다.

이후 홍위병이 일어나고 중국 전역에서 문화대혁명에 따른 혼돈이 발생했다.[33] 덩샤오핑도 반마오주자파(反毛走資派,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든 자본주의 추종자)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여 당직에서 은퇴한다.[34] 문화대혁명 당시, 그의 큰아들인 덩푸팡 역시 추락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다.[35]

6. 1차 복권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다. 방광암으로 투병 중이던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겸직하기도 했는데, 정치인인 그가 군사위원으로 간 게 조금은 이상하지만, 그는 국공 내전 당시 정치위원역을 한 적이 있는데다가, 당시 인민해방군은 계급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이상한 것도 아니다. 더구나 덩샤오핑은 훗날에 정권을 잡을 때도 보이듯이 군부에 엄청난 입김을 가지고 있었다. 덩샤오핑의 재부상에 문혁 이후 중국의 권세를 누리고 있던 4인방(四人幇)은 긴장했다. 덩샤오핑만 없다면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 사후 권력은 오로지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정치국 회의 등에서 4인방은 덩샤오핑을 격하게 비판했다. 린뱌오 사후 국방 부장 직을 계승한 혁명원로 예젠잉(葉劍英)이 덩샤오핑을 옹호했지만 마오쩌둥의 눈과 뒤를 가리고 있는 4인방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인기있던 총리의 죽음에 군중은 그와 대척점에 섰던 4인방의 처벌을 요구했고 4인방은 빈소 설치 금지, 검은 옷 착용 금지 등으로 대응했다. 이때 저우언라이의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한 것이 덩샤오핑이었다. 저우언라이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대중에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4인방은 덩샤오핑을 향한 견제를 더욱 강화했다. 4인방은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위안신을 움직여 마오쩌둥에게 덩샤오핑이 문혁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다고 모함하도록 했다. 문혁은 마오쩌둥의 역린이었다. 마오쩌둥의 불신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천안문 사태가 격화되자 덩샤오핑은 그 책임을 지고 다시 모든 직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당적 보유만은 허락됐다.

7. 2차 복권 및 실권 장악

그리고 그 해 9월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당 중앙위 주석이던 화궈펑[36]이 문화 대혁명에서 살아남은 10원수 출신의 예젠잉(葉劍英), 특무 부대장인 왕둥싱(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문화대혁명을 기반으로 급성장한[37] 화궈펑의 힘만으로는 정국 수습이 어려웠으므로[38], 예젠잉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복직되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하여 애초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릴 수 있었고, 결국 1978년 12월 자신을 사면해 준 화궈펑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하였다.[39]

8. 집권 시기

8.1. 문화 대혁명 청산

이 시기부터 그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재평가'와 '출신 성분 제도 혁파'를 단행했다. 그는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한편, 기존 공산 혁명 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지주 계급 출신이 제도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게 한 것을 철폐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마오 주석은 공이 과보다 많다."[40]라는 말로 마오쩌둥의 권위를 보호해주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 마오쩌둥을 계승한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의 직계들을 차례차례 제거한다. 마오쩌둥을 잃은 문화대혁명 지지 세력에는 권위나 경력에서 덩샤오핑을 상대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두 행동은 그가 그의 정적을 따돌리기 위한 주요 전략 중의 일부였다고 믿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개인 숭배에 빠지지 않았다. 전임 화궈펑만 하더라도 그 짧은 집권기 동안 자신을 찬양하는 포스터나 노래, 선전물을 무수히 제작하였으나, 덩샤오핑은 개인 숭배를 멀리하고 자신에 관련된 동상이나 포스터를 절대로 제작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의 동상과 선전화는 그의 사후에야 나올 수 있었다.

덩샤오핑은 분명 문화대혁명의 피해자였으나, 마오쩌둥을 격하하지는 않았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전임자를 격하하더라도 블라디미르 레닌이라는 대체할만한 인물이 있었고 스탈린의 도움없이도 이름을 날렸던 유명인들도 한둘이 아니라서 '스탈린 이 쉐끼가 레닌 유언 어겼고 대숙청으로 수십만명을 넘게 죽었다라면서'라고 맘껏 격하시켜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대체가 불가능한 인물이었고 마오쩌둥 이외에 이름을 날린 이들도 어디까지나 마오쩌둥을 보좌하면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아무리 덩샤오핑 개인이 마오쩌둥에 당한것이 한둘이 아니었다고해도 격하시키는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인지라 격하시키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8.2. 근대화 추진

또한 이 때부터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1978년 '4대 근대화'(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근대화, 과학 기술의 근대화, 국방의 근대화)로 대표되는 개혁과 개방 정책을 발표, 추진하여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 보장, 지방 분권적 경제 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 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41] 덩샤오핑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다지던 무렵, 중국의 가장 큰 문제는 농업 부문의 전근대화 및 문화대혁명과 하방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한 농촌지역 인력과잉이었고, 생산성 또한 저조해서 상당수의 식량을 외국에서 수입해야했으며 배급제로 운영되었다. 배급제 특성상 식량이 풍족하게 배급되었던것은 아니라서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닌데다가 또한 당시 중국의 인구증가속도를 생각하면 생산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더 많은 식량을 수입해야했기때문에 이로 인한 외화낭비도 목과할수 없는 문제였는데 1980년대 초반에 농업개혁을 시행해서 결국 수년 내에 식량의 자급 자족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다. 중국은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사막과 산악 지대 등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많고 도시화가 진행된 2020년과는 다르게 개혁개방이 막 시작되었을 당시에는 중국인구의 대부분이 농촌에서 주거했기때문에 실제 1인당 경지 면적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국 공산당의 상징적 성과물인 중국 농업 인민 공사(줄여서 인민 공사라고 부른다.)에 의한 중앙 통제적 농업을 과감히 버리고, 가구별 의사 결정에 따른 자율적 농업 및 잉여 농산물의 시장 판매를 허용하였다. 이는 그를 반대하는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카리스마와 그가 계획적으로 양성한 정치적 친위부대의 지원을 통해 이를 극복하였다. 시범 지역이었던 안후이성의 농업 생산은 3년 만에 3배가 된 곳도 있었으며, 1981년에는 식량의 자급 자족에 성공했다. 이를 통해 안후이성을 시찰한 중국 지도부가 "드디어 인민이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전국적으로 정책을 확대할 정도였다.

8.3. 개방 정책

내부적으로 식량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그는 눈을 바깥으로 돌린다. 덩샤오핑은 이제 농업보다 한 단계 높은 "기초적인 생산과 공업"을 육성코자 하였으나, 이를 내부적으로 추진할 생산 수단이나 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서방의 여러 국가로부터 들여오기로 결정하고, 사전 단계로서 미국과 전격 수교하였으며[42], 미국과의 수교 직후에는 자신이 구상한 경제 개발 모델[43]을 시험할 경제 특구를 4군데 지정했다. 따라서 이 4곳의 경제 특구는 모두 남서쪽 해안가에 위치하게 된다. 물자의 유통 및 수송이 편하고, 자본주의의 영향을 내륙으로 퍼지지 않게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홍콩과 인접해있고 광저우와도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써는 그저 시골 어촌 마을이던 선전을 경제 특구로 개방했고, 선전의 성공을 확인한 후 경제 특구를 총 20곳 지정하였다. 이곳들은 밀려드는 서방의 돈과 생산 기술, 시설을 활용하여 급속하게 성장하였고, 중국 전체에 성공과 부를 전시하는 표본으로 기능했다.

8.4. 대외 정책

서방과의 관계도 확연히 증진되었다. 미중수교 과정은 1970년대 초반부터 진행되어왔던것이었지만 1979년 1월 미국과 공식 수교하였고, 9월에는 중국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여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때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쓰고 로데오 경기를 관람하는가 하면, 공식 석상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열창하는 등 미국인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나기도 하였다.[44] 보잉사 등 미국 내 주요 산업 시설을 돌아본 덩샤오핑과 중국 지도부는 큰 문화 충격과 경제 개발에 대한 강한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 간에 체결한 중영공동선언을 이끌어내어,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에 중국에 반환되었다.

반면 소련과의 관계는 이념 및 국제 정세의 문제로 인해 냉랭하였다. 1960년 중소 영토 분쟁과 수정주의 논쟁으로 같은 공산주의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소련과는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그 연원은 1920년대에 코민테른을 앞세운 소련의 과도한 간섭에 대한 마오쩌둥 등 비주류의 반발부터 시작된다.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소련을 견제하는 효과도 부수적으로 얻었다. 물론 이 역시 덩이 의도한 바이다.[45]

8.5. 톈안먼 사건(천안문 6.4 항쟁)

"피해는 최소화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봐라"
- 덩샤오핑이 총리 리펑에게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덧붙인 말. 리펑의 회고록에서 언급.

"20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20년 간의 평화를 손에 넣자"
천안문 6.4 항쟁을 진압하면서 남긴 말이라고 한다.

덩샤오핑은 국가주석이나 당 총서기직에 앉았던 적이 없었지만, 중국군을 지배하는 권한을 가진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가지고 있었고,[46] 자신이 미는 이들을 요직에 앉혀 후일에 대비했다. 그래서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에는 류덩군 시절부터 친구였던 원로 리셴녠을 앉히고, 행정부의 수장인 국무원 총리는 자오쯔양, 당 총서기는 후야오방[47]이 맡았다. 자오나 후는 당시 후계자로 거론되어 있었다.

그러나 덩은 무조건적인 서방화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이는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서 드러났다. 학생 운동에서 시작한 이때의 시위는 개혁파 후야오방의 명예 회복 요구로 시작하여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덩샤오핑은 시위대를 난동꾼이라고 비난하며 유혈 진압을 단행한다. 한편, 당시 덩샤오핑을 포함한 중국 원로들이 이런 학생 운동이나 대중 운동에 대해 특히 콤플렉스를 보인 것은, 민주화에 따른 중국 공산당 실각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그 외 이들이 문화대혁명의 시련을 겪은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시선도 있다. 문화대혁명 역시 당시 홍위병이 주체가 된 학생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

물론 홍위병의 실질적 배후는 언론을 통해 이들을 선동한 마오쩌둥4인방이었지만, 어쨌든 그 주체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이었으며, 당시 덩샤오핑의 진압 성명문이나 자오쯔양의 회고록에서도 이런 운동이 일파만파로 전개되어 제2의 문혁 같은 혼란을 야기할 것임을 우려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다른 원로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시골로 끌려가서 삽질하며 개박살났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대중 운동을 더욱더 불신하고 있었다.[48] 그리하여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진압하자는 강경론이 당내에서 득세하게 된다.

허나 이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 역시 있었는데, 당시 덩의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던 총리 자오쯔양은 덩의 지시로 군 투입이 결정되자 천안문 광장에 나타나 군중들에게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군이 곧 투입될 것이니 빨리 해산해주십시오"[49]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그곳에 모인 군중은 해산하지 않았고 탱크를 앞세운 진압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때 결국 수천~수만 명에 달하는 시위대와 시위대로 오인 받은 중국 국민들이 덩샤오핑이 보낸 진압군에 의해 살해당한 걸로 추정된다.

그리고 시위대에게 눈물로 호소했던 자오의 이런 행동은 그가 시위대에 동조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때문에 덩의 눈밖에 나서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탈락했고 모든 직위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결국 자오쯔양은 권좌에서 축출당한 후 사망시까지 약 20년 간을 가택 연금 상태로 보냈는데, 그 와중에도 자신의 주장이 거의 옳았다고 믿었다.[50]

어쨌든 이렇게 축출된 후와 자오를 대신해 시위대에게 강경하다고 평가된 장쩌민을 당 총서기에 임명하는 등 권력 승계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또한 티베트인들의 반중 시위를 유혈 진압한 후진타오[51]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하였다.[52] 국가주석 직은 1988년 리셴녠이 죽자 군부의 대표자 양상쿤을 앉혀 군부를 달랬다.

헌데 지금 중국에선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총칼과 탱크로 진압한 것에 대한 비난은 3세대 지도부의 핵심이던 국무원 총리 리펑(이붕)이 바가지로 먹는 감이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사람이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실제 계엄령을 선포한 사람이고 수행도 이 사람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군권은 모두 당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이 장악하고 있었고, 장쩌민, 양상쿤과 같은 원로들이 실질적인 정책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하수인에 불과한 리펑 입장에선 좀 억울한 측면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개혁개방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보수파들이 리펑의 뒤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오히려 천안문 군중들에게 대피하라고 눈물로 호소한 자오쯔양과도 비교당하며, 당연히 '인민에게 총부리를 든 자'와 같은 욕을 신나게 먹었지만 장쩌민의 비호로 총리 직에는 남아있을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주범은 마오쩌둥이었지만, 정작 신나게 까인 건 4인방인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8.6. 임기제 확립

모든 당직의 재임 기간을 최대 10년으로 제한하고, 65세 이후에는 새로운 당직에 취임하지 못하도록 명문화하였다. 이는 1인 독재와 원로들의 간섭을 배제하고 원활한 세대 교체를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70대 ~ 80대 원로들이 당을 좌지우지하거나 수십년씩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는 행태는 사라졌으며 시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덩샤오핑 사후 장쩌민과 후진타오 모두 10년씩 집권하면서 후계 세대를 조직적으로 양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당 독재이면서도 주기적인 세대 교체가 잡음 없이 이루어지는 특이한 모습이다. 물론 당직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원로들의 영향력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현직이 아니면 힘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는 기타 공산당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지도부의 '노화 현상'을 방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만, 덩샤오핑을 포함한 8인의 원로방은 공식 직함 없이 사실상 중국을 통치했다. 예컨대 천안문 사태 당시 자오쯔양 총서기의 해임은 원로방에서 결정됐고 이후 열린 당 중앙위원회 회의는 그저 형식적 추인을 하는 데 그쳤다. 또한 덩샤오핑은 13기 5중 전회에서 당 군사 주석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개혁 개방의 총 설계사로서 인사권과 국가 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당시 그는 일개 당원[53]에 불과했다.

그런데...시진핑이 약 30년 후 사실상 종신집권을 하게 되면서 중국은 다시 한 번 격랑의 위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8.7. 말년

개혁개방, 백년의 약속

1989년의 천안문 사태와 그 후폭풍으로 경제 개혁과 개방을 반대하는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을 계속 밀어붙이면 소련처럼 나라가 산산조각나고 공산당 일당독재가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였다. 이들 보수파들은 개혁개방, 자본주의 시장경제 도입을 여기서 멈추고 당에 의한 통제를 확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중국은 한족과 56개 소수 민족이 결합되어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소수 민족의 분리 독립 혹은 자치로 인한 국가 해체는 공산당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21세기엔 '중화민족'이란 개념을 강조하며 모든 소수 민족에게 '하나의 중국인'이란 정체성을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규정한 동북공정도 만주와 조선족을 중국에 묶어두기 위한 일종의 공작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경제력을 기반으로 쌩판 남까지 복종시키는 "다민족국가" 미국보다 더 아래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한편 상하이에서 시위대에 강경대처한 공로로 단숨에 중앙정계에 진입한 장쩌민 국가주석은 덩샤오핑의 개혁파와 천윈의 보수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은 과거 마오쩌둥 시대로 퇴보하지는 않았지만, 외국에 약속했던 추가적인 개혁개방, 시장경제화는 모두 미뤄졌고, 사회 전반적으로 갈피를 못잡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잔인한 천안문 유혈진압에 격분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은 중국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해서 모든 방면에서 교류협력을 중단했으며, 덕분에 외국인 투자는 급감하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상은 실추되었다.

하지만 서구권은 중국을 적성국으로 규정한다거나 무역을 봉쇄하지는 않았다. 천안문 사태 직후에는 최혜국 대우 연장불가, 경제제제, 무역중단 같은 조치들도 거론되었으나 결국 모두 흐지부지되었다. 냉전이 막 종식된 상황에서 중국을 또다시 적성국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냉전을 시작하기에는 정치권이나 대중들이나 모두 피곤했으며, 10억 인구의 거대한 시장을 놓치기도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해가 바뀌어 1990년이 되자, 이라크의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침공해 모든 이들의 관심을 중동으로 쏠리게 하였고, 천안문 사태는 그렇게 점차 잊혀 갔다.

이후 덩샤오핑은 1992년 소위 남순강화라고 일컫는 행보를 시작한다. 80대 후반의 노구를 이끌고서 선전과 상하이 같은 경제 특구를 돌면서 중국은 더욱 개방하고 경제 발전을 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였고, 이런 개방 정책을 환영하던 중국인들의 여론을 타고서 베이징의 개혁 반대 세력을 엄청나게 압박하기 시작한 것. 허나 1992년 1월 처음 덩샤오핑이 일반 당원 신분으로 전용 열차를 타고 남방 시찰을 시작했을 때 중앙당 간부들은 그를 모두 고의적으로 무시하였다. 일반 당원의 사적인 나들이로 폄하한 것. 1992년 당시 덩샤오핑은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모든 공직에서 사임한 공산당 일반 당원일 뿐이었고, 이걸 핑계로 중앙당의 보수파들은 덩의 남방 시찰을 중앙 언론에서 보도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장쩌민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허나 개방된 연안 지방의 여론을 무시하지 못한 장쩌민과 중앙 지도부가 덩샤오핑 쪽으로 돌아서면서 CCTV와 신화통신 등 중앙 언론과 중앙당 선전 부서가 덩샤오핑의 메시지를 전국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3월 전용 열차가 마지막 시찰지인 상하이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장쩌민을 위시한 중앙당 정치국원 전원과 군사령관들이 도열해서 덩샤오핑을 영접했다.

중국 공산당 내의 마지막 개방 반대 vs 개방 찬성의 대결에서 이긴 덩샤오핑과 개방 세력은 결국 중국의 경제정책 방향에 마침표를 찍었고, 중국은 달리기 시작했다. 1993년에 NBA를 라이브로 중국 공영방송에서 틀어주기 시작한거나 같은 해에 상하이증권거래소, 선전증권거래소가 세워진 것이 대표적인 예.

참고로 중국 공산당 내부 개방 반대세력인 보수파의 수장은 덩샤오핑과 동급의 영향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던 천윈(진운, 陳雲)으로, 덩샤오핑이 먼저 죽으면 보수화가 진행되고 천이 먼저 죽으면 개혁 개방이 유지된다는 것이 당시 해외 중국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본디 천윈이 병약했던지라 덩보다 일찍 갈 것이라는 게 대부분의 예측이었으나, 부인의 극진한 간호로 인해 의외로 장수하여 세간의 관심을 받았는데, 결국 남순 강화 직후 천윈은 "과거에 유효했던 방법은 이미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자신이 밀렸음을 인정하는듯한 발언도 했다. 이후 1992년 10월, 제14차 당 대회의 당 규약 개정으로 중앙고문위원회가 폐지되어 천윈은 은퇴했고, 1995년 사망했다. 덩샤오핑은 그보다 2년 뒤에 죽었다.

9. 죽음

이후 은퇴하여 별다른 활동없이 지내다가 1997년 2월 19일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92세.

말년의 큰 소원 중 하나가 바로 자국으로 반환된 홍콩 땅을 밟는 것[54]이었지만 고작 5개월 남짓 앞두고 사망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홍콩 앞바다에 비행기로 뿌려졌다. 그 외에도 두 가지의 소원이 더 있었다. 하나는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을 하는 것이였는데, 사후 5년 뒤 2002 한일 월드컵에 중국이 본선에는 진출했으나, 이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정작 본선에서는 3전 전패로 광탈. 또 하나는 대만과의 양안통일이었는데[55], 이것은 덩샤오핑이 사망한지 20년도 훌쩍 지난 현재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유언으로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향후 50여년간은 국제 사회에 섣불리 나서지 말고 인내하며 힘을 키우라는 말을 남겼는데, 쉽게 말해 미국 패권에 도전하지 말라는 것이였으나 안타깝게도 50년도 안 돼 미국의 패권에 도전 중이다. 50여년이면 2047년 들이딱맞게 홍콩이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되는 날이긴 하나 50년도 못 가고 홍콩 반중 시위가 일어나고 말았다.

10. 평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시기 실패 등으로 휘청거린 중국을 개혁개방 체제로 돌려 사회주의 실현에 필요한 생산력을 확보할[56] 새로운 성장의 길을 이끈 지도자라는 긍정적 평가와 천안문 사태로 대표되는 중국 내 자유, 민주주의 운동과 내부 불평등,[57] 사회적 모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짓밟은 탄압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복권 이후 백화제방 백가쟁명[58]을 외치며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4인방을 숙청하고 화궈펑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후에는 그 탈을 벗어던졌다. 또 범죄소탕, 부패척결이란 명분 하에 수많은 목숨을 단번에 날려버린 1983년 엄타(嚴打) 운동 같은 사례처럼, 덩샤오핑의 통치기는 법치주의, 인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취지는 문혁 이후 흐트러진 공권력, 치안 강화였으나, 문제는 반대 의미로 너무 강하다보니 법과 처벌은 고대 진나라 이상으로 엄격했고 사법적 절차는 상당히 줄여버려 억울한 피해자들이 쌓이게 된다. 또 그런 와중에도 권력층은 유유히 처벌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줘 민심이 흔들리게 된다.

스스로 임기제를 확립하고 그 임기를 지킨 후 공식 지위에서 물러나고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해 1인 지배체제로 굴러가던 중국 공산당의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덩샤오핑을 포함한 8인의 원로방이 공식 직함 없이 중국을 사실상 통치했기 때문에 말장난일 뿐이란 반론도 있다. 또 그들끼리도 서로 견제가 있었다 하더라도[59] 사실상 덩샤오핑이 공식적인 직함보다도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2010년대 들어선 시진핑이 1인독재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집단지도체제도 점차 형해화되고 있다.

여전히 일당독재인 중국에선 중국인 개개인의 속은 알 수 없으나, 중국 공산당 차원에선 개혁개방으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실현한 위대한 지도자로 호평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좌우를 떠나 부국강병을 우선하는 쪽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언론의 자유, 사회적 자유와 민주정 지지를 우선하는 쪽에서는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보수성을 띠는 경제 관련 언론에서 덩샤오핑을 치켜세우다가, 정치 쪽 사설이나 서적에서 덩샤오핑을 독재자 운운하며 비난하는 건 이런 맥락.[60] 해외에서도 흑묘백묘론 같은 실사구시적 태도나 외교술 같은 부분은 호평하지만, 인권 문제 등에 있어서는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를 거부한 독재자이지만 서방에서 호평이 많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헨리 키신저는 덩샤오핑을 만나 그의 결단력과 통찰력을 보았다며 덩샤오핑은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극찬했고[61], 일본계 미국인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덩샤오핑을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는 아니지만 민주주의 정치인이 할 수 없는 경제 대변혁을 이룬[62] 위대한 '황제'[63]라고 주장했다.[64] 반면 좌파 성향의 중국학자 모리스 마이스너 교수는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덩샤오핑을 혹평했는데, 부작용이 많은 중국 관료 자본주의의 형성에 그가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 천안문 6.4 항쟁 역시 이런 관료 자본주의로 인해 득세한 관료들의 부패와 그로 인한 양극화를 목도한 민심이 폭발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덩샤오핑은 어찌됐든 표면적으론 말년까지 마르크스주의자란 말을 칭찬처럼 사용하고 부르주아를 비판한 사회주의자였다. 덩이 주창한 것도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무너뜨리자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첫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순으로 가야 하는데 현실은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에, 진정한 공산주의는 시작도 안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실질적으로 자본주의를 추구하지만 겉으로는 사회주의를 버리지 않으며 자본주의도 사회주의 실현의 수단이라는 공식적 견해를 버리지 않았는데, 이러한 노선은 덩샤오핑이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시장친화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중국의 자본주의 체제는 엄밀히 말하면 국가, 더 정확하게는 공산당의 주도로 행해지는 체제였고, 이런 지나친 정부 간섭이나 관치 경제가 이후 중국내 시장 체제의 왜곡을 불러왔다는 비판도 있다. 실제 성장기야 어느 쪽이건 다 겪었던 일이고.

대외적으로는 일명 '도광양회'라고 중국의 경제 발전을 우선하면서 서방을 자극하지 않는 현실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 덕에 냉전 이후 중국은 천안문 사태로 이미지가 잔뜩 실추된 후에도 WTO에 가입하는 등 국제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0년대 들어 도광양회가 다른 의미로 재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시진핑이 팽창정책을 피며 세계적으로 어그로를 끌다가, 기회를 보던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에 미중무역을 빌미로 확전 양상을 보이는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 덩샤오핑 시대에 비하면 시진핑 시대의 중국의 힘이 커졌다고는 해도 미국에 맞서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미중 무역전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에 불리하게 흘러가고있다.

마오주의자들에게는 중국을 "공산주의의 탈을 쓴 제국주의"로 만들었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이들은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공산당을 짝퉁 공산당 취급하며, 2008년 중국 마오쩌둥주의 공산당이라는 정당도 만들었지만 현재는 반체제 세력으로 찍혀 금지된 상태다.(...) 심지어 이들 중에선 천안문 사태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야 마오쩌둥이 한게 아니니까 외부에서 싸잡아 보는 시선과 달리 내부에선 그들끼리도 나름 다툼이 치열한 모양.

11. 어록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65]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으며,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

"일부가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을 인정해 가난한 사람이 따라 배우게 해야 한다."
- 선부론(先富論)

12. 가족

결혼을 세 번 했다. 첫번째 부인은 장시위안(张锡媛:1907~1930)으로 노동자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이었다. 바오딩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가 당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떠났다. 1927년 상하이에서 덩샤오핑을 만난 인연으로 1928년 결혼을 했다. 1930년 하지만 산욕열로 사산하고 사망했다.

두번째 부인은 진웨이잉(金维映: 1904-1941)으로 저장성 사람이다. 1926년 공산당에 입당하고 혁명운동에 뛰어들었으며, 1931년 첫번째 아내와 사별했던 덩샤오핑과 결혼했다. 하지만 1933년 덩샤오핑과 2년만에 덩샤오핑이 연루된 당내 모종의 사건으로 이혼했고, 다시 고위 당직자였던 리웨이한(李维汉:1896-1984)과 결혼했고, 대장정까지 마쳤다. 국공합작이 체결되자 소련으로 요양을 갔으나, 독소전쟁 당시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독일군의 모스크바 폭격때 사망했다. 덩샤오핑은 이 두번째 결혼을 언급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는데, 일설에 의하면 당의 강요에 의한 이혼이었다고 한다. 진웨이잉의 재혼남편인 리웨이한은 문혁때 덩샤오핑처럼 숙청되었지만 덩샤오핑 집권하에서 복권되어 고위 관리로 활약했다.

세번째 부인은 줘린(卓琳:1916-2009)으로 베이징 대학 물리학과의 학생이었으나, 중공 본거지 옌안으로 갔다. 1939년 옌안에서 마오쩌둥의 주례로 덩샤오핑과 결혼했다. 덩샤오핑의 2남 3녀는 줘린과 사이에서 낳았다.

덩샤오핑의 장남인 덩푸팡(1944)은 베이징 대학 시절 홍위병의 습격을 받아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가 장애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장애인 협회의 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막내아들 덩즈팡(1952)은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에서 양자물리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물리학자이다. 이후 귀국하여 중국 통신회사에서 근무했다.

장녀 덩린(1941)은 화가이고, 아버지의 전기를 펴내기도 했다. 이녀 덩난(1945)과 삼녀 덩룽(1950)은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13. 사진 이야기


"저우언라이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 중국, 적이냐? 친구냐?"란 제목의 당시 타임지 표지.


방미 시 지미 카터 대통령 내외와 함께.


방일 시 일본히로히토 덴노, 나가코 황후 내외와 함께.


방북 시 김일성과 함께.

14. 여담

  • 생전에 주로 쓰촨성 광안 방언을 사용했고 항상 통역관을 데리고 다녔다.[66] 그러나 공식 석상에서의 연설은 중국의 관료들이 그렇듯 보통화로 했다. 대표적으로 천안문 진압 후 기자 간담회에서 학생운동을 "난동"(...)이라고 비난하는 발언.
  • '탁구 외교'로 대표되는 미국의 친중 정책에 따라 닉슨 대통령이 방중한 이후, 이에 보답하여 1979년에 방미를 했는데 우주 비행 훈련소에 방문을 했다고 한다. 무중력 상태를 훈련하는 기기를 탔을 때는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며 떠나길 주저했다고.[67]
  • 김용의 열렬한 팬이였다. 기사 문화비평가 올리버 차우의 증언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비밀요원을 홍콩에 보내 김용의 소설을 구해 오게 했다. 1981년 김용을 직접 만난 덩샤오핑은 “우린 이미 오랜 친구와 같다. 당신의 책을 대부분 읽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화대혁명기에 금서로 지정됐던 김용의 작품은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한 1981년에야 중국 대륙에서 해금됐다.
  • 프랑스 유학의 영향인지 크루아상콘트락트 브리지 게임을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1970년대 부총리로 복권된 이후 해외에 파견되었는데, 귀국시 외국 공항에서 크루아상을 사와 중국에서 부하들과 나눠먹었다고 한다. 또한 마작포커를 매우 좋아해서 충칭 시장으로 재임시에 집무실에 사람을 불러 자주 했는데 이것이 문혁 때 비판되어 실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 주더펑더화이는 장기를 좋아했고, 워커홀릭저우언라이는 업무에 바빠 놀 여유가 없었으며, 마오쩌둥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잡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 엄청난 골초였고 외국 정상들을 접견할 때조차 재떨이를 앞에 두고 항상 줄담배를 피웠다.[68]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본인도 이게 좀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정상회담 시 사진 찍을 때는 치웠다가 끝난 후 다시 내왔다. 이렇게 골초였음에도 불구하고 흡연자들이 자주 걸리는 폐암이나 후두암에 걸리지 않고 92세까지 장수하였다.
  • 매운요리를 즐겨먹었는데 이 점에 있어서 마오쩌둥과 비슷했다. 다만 식사시간을 꼬박꼬박 지켰고 과식을 피하고 소식을 했는데 이것이 장수비결이라고 평가받는다.
  • 살아생전 장쩌민-리펑-주룽지의 2세대 지도부, 후진타오-원자바오의 3세대 지도부 승계를 계획하기도 했는데, 이게 사후에도 그대로 실현되면서 과장 좀 보태자면 2012년까지 30여년간 덩샤오핑이 중국을 다스렸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치면 30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던 마오쩌둥보다도 더 오래 영향력을 휘두른 셈이 된다. 물론 후세대들이 다 그의 말대로 행동한 것도 아니긴 하다만. 이 중 원자바오를 점 찍었다는 점에선 좀 흥미롭기도 하다.
  • 루마니아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처형 비디오를 입수한 후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같이 봤었다. 처형 비디오를 보고 나서 덩샤오핑이 한참 만에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라고 간부들에게 물었고, 이에 한 공산당 간부가 "반동 분자들을 때려잡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으나, 덩샤오핑은 오히려 "틀렸다. 우리도 개혁하지 않고 인민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대답하였다. 덩샤오핑이 불과 수개월 전 천안문 사태의 유혈 진압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의외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후의 남순 강화를 통해 개혁 개방에 가속도를 붙인 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요컨대 "천안문 사태 진압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을 불식시키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길은 대외 개방 확대와 이를 통한 경제 성장 성과의 극대화 뿐"이라는, 나름대로 절박한 인식의 반영이었던 셈이다. 물론 현실은 개혁 개방 와중에 반동 분자 색출까지 둘 다 했지만.
  • 1991년 아무런 직위 없이 있을 때 김일성과 비밀리에 만나 개혁개방에 대해 조언했다고 한다. 이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1994년까지 나진 개방, 비핵화 딜,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김정일에게도 이 조언을 해줬는데 김정일은 그를 수정주의자라고 하며 거절하였다고. 다만 김정일도 2000년대에 들어 신의주특별행정구처럼 비슷한 노선을 모색하긴 했었다. 허나 전권을 주려고까지 했던 중국인 장관 후보가 오기 직전 탈세 혐의로 중공에 체포되고[69] 이후 북미 외교 등이 잘 안 풀리자 2000년대 중반 핵실험으로 자폭해 끝이 안 좋았을 뿐. 헌데 정작 마오쩌둥이 반대했던 북한의 권력 세습은[70] 찬성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국가마다 맞는 게 있다는 게 일단은 표면적인 찬성 이유.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하기도 했다.#
  • 1994년 중국 시간으로 새벽에 열리던 월드컵 전 경기를 위성으로 시청할 정도로 축구광이었다고 한다. 실제 덩샤오핑 집권 시기에 처음으로 CCTV에 유럽 축구가 방송되기 시작했다.[71] 1994년 갑을 리그라고 부르던 프로 축구 리그를 창설하는데 기여했으며[72] 살아생전 국가 대표팀이 월드컵에 나가는 것도 보고 싶어했으나, 중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이르러서야 가능했고, 덩샤오핑 본인도 중국이 월드컵 본선은 출전한 것은 보지도 못한 채 1997년에 사망했다.[73] 그런데 정작 관중 우려 등으로 축구장에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 신해혁명 100주년을 앞둔 2010년 대만 총통부 직속의 역사편찬기관 국사관(國史館.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에 해당)이 인터넷으로 '중화민국 100대 인물'의 선정 투표를 실시했는데, 덩샤오핑이 중간 집계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당황한 대만 정부는 덩샤오핑, 마오쩌둥 등을 후보에서 제외했고 결국 조사 자체를 취소했다고.# 대륙 아이피가 몰려온 듯
  • 마오쩌둥은 개인적으로는 덩샤오핑을 많이 좋아했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다가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했어도 항상 그를 염려했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이나 실각하여 공장 노동자로 일하게 됐지만 몇 년 후 마오쩌둥의 부름을 다시 받았다. 문화대혁명으로 실각당한 대부분의 중국 정치가와 공직자들은 실각 후에 홍위병에게 구타당하거나, 강제 노동소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하거나 혹은 감옥에서 복역 중 사망하거나, 혹은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정치범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꽤나 신임을 받은 셈.
  • 작은 키 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가 있다. 마오쩌둥이 공산당 권력을 장악했을 당시 한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곤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시오'라고 하자 당연히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오는 '그럼 모두 내 의견에 찬성한 것으로 알고 그대로 실행하겠소.'라고 했는데 실제론 덩샤오핑 혼자 일어서 있었다. 하지만 너무 키가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았다고.(...)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실제론 마오쩌둥이 자리에서 일어선 덩샤오핑을 발견했지만, 덩샤오핑을 아낀 마오쩌둥이 '덩샤오핑 동지는 어차피 키가 작아서 앉아 있으나 서 있으나 똑같아 보이니, 그냥 앉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겠소'(...)라며 그냥 넘어갔다는 말도 있다.
  • 일본에 대해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이 자리에 있을 때 일본과 경제, 문화 교류를 허용했다. 이때 일본에서도 중국 요리나 관광 붐이 일었는데 이때를 노리고 나온 만화가 란마 1/2이나 쿵후보이 친미 같은 작품이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자국 내에서도 일본 문화를 소비하는 것에 대한 족쇄를 풀었다. 한국은 일본 문화 개방이 2000년대 초에나 이루어져서 중국도 그런줄 아는데 중국은 이미 1980년대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특촬물을 무삭제로 공중파 TV에서 보는 환경이었다.북두의 권을 거의 무삭제로 틀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그래서 지금 중국의 일본 문화 오타쿠들은 대부분 이 세대인 30~40대이다. 인구 수가 엄청나다보니 저때 방영한 더빙 애니메이션을 전편 녹화한 기인들도 많아서 저 당시 더빙작들은 지금도 더빙 자료가 그대로 남아있다.
  • 표현의 자유나 해외 문화가 중국에 퍼지는 거에 대해서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좋은 걸 많이 봐야 인민의 수준이 높아진다고 생각했다고. 오히려 너무 풀어줘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덩샤오핑은 이런 생각은 바꾸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가 정계를 은퇴하고 쉬고 있을 때도 다들 덩샤오핑의 눈치를 봐서 감히 문화통제 정책을 하지 못했다. 덩샤오핑이 죽은 뒤부터 눈치볼 게 없어진 중국은 문화통제 정책이 강해진다.
  • 1995년 일본에서 홍콩 97이라는 게임이 발매되었다. 그 당시에는 덩샤오핑이 살아있었는데 1997년 홍콩 반환 약 4달 전에 사망해 게임 스토리의 일부분이 맞자, 미래를 예지한 게임이라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15. 매체에서

홍콩97이라는 똥겜 게임에 끝판왕으로 등장한다.[74] 참고로 이 게임은 우연의 일치로 덩샤오핑이 사망한 년도를 맞추었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호이4에서 중화민국 산업장관으로 등장하는 희대의 막장 고증을 보여주었지만 1.5 패치와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온 다음에는 중국 공산당 산업장관으로 변경되고, 중화민국에는 웡원하오, 장징궈, 천이(1883), 다이리, 천궈푸 등이 새 장관으로 추가되었다.

덩샤오핑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등소평'(원제 : 历史转折中的邓小平)이 2014년 방영했다. 국내에서는 2015년 1월 CNTV에서 방영했다.


  1. [1] 1927년 - 1997년.
  2. [2] 출생 당시 광서 30년. 대한민국에선 처음엔 1903년 출생으로 소개 하였고, 차후 1904년 출생으로 소개 하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1902년 출생을 덤으로 소개 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건 1904년. 참고로 1903년은 덩샤오핑 친누나인 덩시옌리(鄧先烈, 등선렬)의 공식적인 생년이다.
  3. [3]중화인민공화국 쓰촨성 광안시.
  4. [4] 대체적으로 쓰촨성 출신들은 타지역 출신들에 비해 신장이 작다. 그래서 타지역 출신들은 쓰촨성 출신들을 먀오쯔(苗子, 땅콩보다 훨씬 더 작은 종자)라고 부르고 인식한다. 그 반대는 산둥성 출신들. 출중한 인물들이 많기로 유명하다.
  5. [5] 제대로 된 이름이 아니라 친정의 단(淡)씨에 시가의 덩(邓)씨를 얹은 것. 한국도 마찬가지였지만 옛날에는 딸의 이름을 아예 짓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6. [6] 1928년 - 1929년.
  7. [7] 1931년 - 1933년.
  8. [8] 1939년 - 1997년.
  9. [9] 공산주의 이론 자체가 무신론을 기반으로 한다.
  10. [10] 우측의 인물은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11. [11] 마오쩌둥 시대가 1세대, 덩샤오핑 시대가 2세대, 장쩌민이 3세대, 후진타오가 4세대이며 2012년 당 대회에서 시진핑을 중심으로 한 5세대가 출범했다.
  12. [12] 직역하면 쓰러지지 않는 늙은이. 몇 번이나 권력에서 쫒겨났어도 다시금 권력을 차지한 데서 유래.
  13. [13] 미네무라 겐지라는 일본 르포 기자가 쓴 '13억 분의 1의 남자'라는 책에 따르면, 은퇴한 중국 공산당 원로들의 모임으로, 덩샤오핑이 이 위원회의 주임을 맡던 시절, 중국에선 법치나 제도에 의한 통치보다 '사람에 의한 통치'가 더 중시되던 시기였으므로, 마오쩌둥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 원로들의 발언력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인 상무위원회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사실 꼭 이 케이스 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 생활에서 볼 수 있는 케이스다. 물론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보긴 어렵다.
  14. [14] 지금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 기구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라고 볼 수 있다. 중국군을 지배하는 권한을 갖고 있는 조직이기 때문인데, 인류의 정치사를 되돌아봐도 특히 민주화가 진행되지 않은 독재 국가의 경우 군 통수권을 가진 자가 곧 권력자인 경우가 많았다.
  15. [15] 사실 이 말은 저우언라이가 먼저 한 발언을 이후 덩샤오핑이 인용한 것이다.
  16. [16] 중국 공산당에선 이부분에 대해 덩샤오핑을 20세기 중국공산당을 중원에서 살려 낸 거인, 일명 '백년소평'으로 평가한다.
  17. [17] 덩샤오핑은 (죽을때까지 영향력은 행사했지만) 일단 표면상으로나마 1인 독재는 원치 않았는지, 임기제 확립이나 65세 이상 공직 금지 같은 몇몇 원칙들을 세웠다. 허나 세월이 흘러 이런 원칙들이 다수 무너지며 사실상 시진핑 종신집권으로 가는 분위기인 2010년대 후반의 중국 정치의 형세를 보면, 실질적인 견제와 감시 기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소위 원칙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꼽을수도 있다.
  18. [18] 소련에 유학 중 독소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19. [19] (근면히) 일하면서 (검소히) 공부한다는 뜻으로 1918~1920년에 약 1500명의 중국 학생들이 프랑스유학한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력이 부족해진 프랑스의 상황과 맞물려 생긴 일로, 이중 200명이 후에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그 중 20명은 미래에 중국의 요직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근공검학에는 그 근본부터 프랑스와 중국 사이에 심한 괴리가 존재했다. 프랑스는 '(근)공'에 초점을 둔 반면에 중국은 '(검)학'에 초점을 뒀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프랑스에서는 중국 유학생들을 꽤 박하게 대했고 공부를 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던 어린 덩샤오핑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공산주의자가 된다. 덩샤오핑은 나중에 자신이 프랑스로 유학한 이유를 "중국을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런데 동시기에 마오도 프랑스로 유학할 기회가 있었지만 정작 그는 가지 않았다. "중국의 붉은 별" 저자가 왜 프랑스로 유학을 가지 않았는지 마오에게 묻자 마오는 "중국 문제의 해결책은 중국에서 찾아야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마오가 매우 비범한 사람임은 틀림없다. 이 생각은 적중해서 중국 인민을 정확하게 파악한 마오는 조각조각난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20. [20] 공산당과는 약간 다르다. 1920년 초에 이미 존재했던 조직으로 덩샤오핑이 청년 동맹의 주요 인물로 부상한 뒤 프랑스 경찰을 피해 동지들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가는 1926년까지 유지된다. 덩샤오핑이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모스크바로 간 뒤의 일이다. 또한 저우언라이와도 여기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공산당에서 평생 동안 덩샤오핑을 후원했고 덩샤오핑도 6살 차이의 저우언라이를 항상 큰형님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21. [21] 덩샤오핑은 프랑스를 떠나기 전 자기가 일했던 자동차 공장과의 계약을 해지했는데 당시 공장장의 평가는 이랬다고 한다. "사직 이유 : 귀국, 근무 성적 : 괜찮음, 전반적 태도 : 양호함"
  22. [22] 일종의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를 위한 대학으로 여기에서 공부했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후에 중국에서 한 자리씩 차지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사람이 덩샤오핑, 류사오치, 런비스, 녜룽전 장징궈 등이다. 그리고 그 외의 유명 인물들로는 조봉암, 주세죽, 허정숙, 호찌민 등이 있다.
  23. [23] '중산'은 쑨원의 자(字)로 중국 공산주의자를 위한 대학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일개 하류 노동자 취급을 받았던 그들이 러시아에서는 혁명 동지로 대우받았다고 한다. 러시아 측에서도 꽤 신경을 썼는지 중산대학 초청 강연자 중에 레프 트로츠키까지 있다.
  24. [24] 하지만 집권 당시 결정적인 우를 범해 반쪽의 한계를 증명하고 말았다.
  25. [25] 덩샤오핑은 후에 펑위샹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했는데, 펑위샹이 마음만 먹었으면 자기 부대 안의 공산주의자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고 덩샤오핑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을 쫓아내면서도 그들에게 여비까지 챙겨줬다.
  26. [26] 여기서 이름도 바꾸게 된다. '소평(小平)'이라는 이름은 덩샤오핑의 세번째 이름으로 태어날적 이름은 '선성(先聖)', 청소년기 이름은 '희현(希賢)', 그리고 마지막 이름이 '샤오핑(小平)'이다. 뜻 풀이가 재미난데, 태어날 때 이름은 "옛 성인과 같이 되어라."이고 두 번째 이름은 "현명해지기를 바람."이고 마지막 이름인 소평은 "작고 평범함."으로 점점 이름의 뜻이 소박해진다. 참고로 앞서 두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고 소평이라는 이름은 본인이 지은 것이다.
  27. [27] 1920년대 말부터 마오쩌둥을 지지하였는데, 이 때문에 주류파였던 강서 소비에트 정부의 거부를 받아서 마오와 함께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심지어 아내와도 이혼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1935년 대장정 기간 중에 열린 준의 전원 회의에서야 비로소 당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때부터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가 당 중앙 지도부를 형성하게 된다.
  28. [28] 항일전 초기 수백명으로 시작했던 129사단은 항일 전쟁 끝에 12만명 규모로 불어났다.
  29. [29] 이 때의 공적 덕분에 그는 중국 군부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고, 이 시기에 군부에 만든 인맥들 특히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제2야전군 출신들은 훗날 그의 권력 탈환에 크나큰 힘이 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류샤오치를 지지하던 군부 인사들이 류의 실각과 함께 숙청 당했던 반면, 덩샤오핑의 인맥이었던 군부 인사들은 문혁 시기에서도 실권을 가진 현직에 남아 있었다. 군 실세의 한 명이기도 했던 후야오방은 "덩샤오핑 동지가 장악하고 계시면 한마디로 끝날 것이, 우리들로서는 다섯 마디나 필요하다."라는 말로 덩샤오핑의 군에 대한 영향력을 표현했다. 덩사오핑이 최고 지도자가 되는 1980년대 이후 제2 야전군 출신들이 군의 주류가 된다.
  30. [30] 다만 마오가 당 주석으로 군림하고 있어서 당내 서열은 2위였다.
  31. [31] 중국 공산당과 중국 인민해방군 및 국무원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중국 지도자들 중에서 당-군-정 모두에서 덩샤오핑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마오쩌둥 단 한 명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특정 분야에서의 영향력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32. [32] 당시 마오쩌둥은 실권을 잡은 덩샤오핑에 대해 "(덩샤오핑은) 나를 죽은 아버지 모시듯이 한다."라고 비꼬았다. 즉, 겉으로는 마오쩌둥을 최고위직인 당 주석 자리에 올려놓고 모시기는 극진히 모시지만, 대부분의 의사 결정을 내릴 때는 "뭐 이런 것 갖고 주석을 귀찮게 해 드려야 쓰겠습니까?"라는 자세를 취하면서 정치국 상무위에서 자기들끼리 알아서 처리해 버리는 식으로 마오쩌둥을 배제해 버렸던 것이다.
  33. [33] 아이러니하게도, 마오쩌둥을 홍위병의 분란을 핑계로 당 대회에서의 투표로 추방하려던 류샤오치의 계획을 성사 직전에 파탄에 빠뜨린 것은 덩샤오핑이었다. 당시 덩은 "마오 주석의 지시는 반드시 이행되어야 한다."라면서 지방에 있던 마오쩌둥 지지자들을 베이징으로 옮기려던 린뱌오의 작업을 지지하였다. 덕분에 류샤오치와 펑더화이, 허룽, 리리싼 등이 고초를 겪던 시기에서도 덩샤오핑은 주자파의 2인자라는 낙인이 찍히고도 살아남았다.
  34. [34] 덩샤오핑은 결국 장시성 시골의 트랙터 공장으로 쫒겨나 생산 노동자를, 그것도 4년이나 하면서 지내야 했다. 이 정도면 사실상의 정치적인 사형 선고지만, 덩샤오핑은 언제일지 모를 재기를 기약하며 이 기간을 묵묵히 버텨냈다. 하지만 문헌에 따라서는 4년 내내 24사를 읽으면서 지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35. [35] 홍위병의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2층 베란다에서 추락했고, 척추 골절로 인한 영구적 하반신마비가 되었다. 덩샤오핑은 이 일을 자신의 생애 중에서 가장 슬픈 사건으로 기억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덩샤오핑은 장애인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오늘날 중국은 장애인 인권이 어느 정도 잘 보장된 국가로 알려져 있다. 덩푸팡은 훗날 중국 장애인 협회 주석이 되나 부정부패로 온갖 구설수에 오른다. 그럼에도 덩은 미안한 감정에 어쩌지 못했다고.
  36. [36] 이데올로기적 신봉만이 아니라 실무 능력도 우수했고 인망도 높았기 때문에 유언으로 마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하지만 이 유언은 화궈펑의 조작이었다는 루머가 있다.
  37. [37] 이것이 화궈펑이 오래 집권하지 못한 원인이다.
  38. [38] 당시 중국의 여론은 문혁으로 인한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었고 하방정책으로 농어촌지역의 노동력이 과잉상태였기도 한데다가 무엇보다 경제성장도 침체되었던지라 문화대혁명에 몹시 부정적이었다. 이 때문에 마오는 물러가시오!와 같은 구호가 나왔을 정도였는데 그래서 나온 사건이 제1차 천안문 사건.
  39. [39] 이 당시에도 이미 서방 외교관들은 화궈펑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시 영국 대사의 말에 따르면 "전제적인 황제였다."고 할 정도. 여담으로 화궈펑은 권력에서 축출되었지만 그래도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대략 우리나라 국회의원 급)으로 20년 동안 활동하고 후에도 원로로 잘 대우받다가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중국 공산당 내에서 권력에서 축출되어도 어느 정도의 지위와 대우를 받게 된 최초의 케이스. 이후 자오쯔양과 같은 몇몇 예외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중국 공산당 내의 권력 다툼은 지더라도 한직으로 밀려나는 수준인 경우가 많아졌다.
  40. [40] 현재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는 공칠과삼(功七過三). 항일전/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하게 한 공(功)이 있으나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의 과(過)가 있다는 평가다. 이를 통해 마오쩌둥의 권위를 이용하면서도 그의 기존 정책은 싹 엎어버릴 수 있었다. 근데 재미있는 건 애초에 이 공칠과삼이라는 표현이 마오쩌둥이 스탈린을 평가할 때 쓴 표현이라는 점. 이후 독재자들 전용 변명 표현처럼 된 감도 있다.
  41. [41] 본래 중국의 4대 현대화는 1964년 저우언라이 국무원 총리가 제2기 전국 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처음 제시한 것이었는데, 2년 후 시작된 문화 대혁명의 혼란으로 덩샤오핑의 집권기에 본격화될 수 있었다. 결국 오늘날 중국 4대 현대화는 덩샤오핑의 업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42. [42] 대신 중국은 미국에게 중화민국단교하라고 요구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타이완은 자국의 영토에 불과하다는 논리였으며, 미국은 고민 후에 이를 수용한다. 대신 미국 의회는 '타이완 관계법'을 제정하여 타이완의 군사적 안전을 간접적으로 보증하였다.
  43. [43] 주로 일당독재를 시행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루워놓은 국가인 싱가포르와 당시에는 일당 독재 국가이던 대만의 사례를 많이 참고했고, 동유럽 국가 가운데에서는 유고슬라비아헝가리의 사례를 상당히 많이 참고했다.
  44. [44] 당시 덩샤오핑은 국무원 부총리였으나 미국은 사실상의 국가 원수로 대우하였다.
  45. [45] 그래도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중소 관계는 다시 회복된다. 물론 얼마 못가 소련이 붕괴되는건 함정이지만...한편 베트남 역시 사회주의권이지만 이 당시에 중국과 베트남은 전쟁을 했고 베트남에 살던 화교도 강제추방을 당하거나 보트피플로 중국으로 유입되었기때문에 중월 관계는 마냥 좋지만은 않다.
  46. [46]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고 설파하였다. 덩샤오핑도 충실하게 이 주장을 따라 군 인사권을 가진 군사위 주석이라는 자리와 당의 최고 원로 중 한 명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공산당과 중국 정부를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47. [47] 1980년대 한때 덩의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다당제 등의 강력한 정치 개혁을 주장하였고, 이에 보수파의 역공을 받아 실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1989년 2차 천안문 사태는 그의 죽음을 계기로 천안문 광장에 집결한 추모 대열이 시위로 번지면서 시작되었다.
  48. [48] 일부에선 문화대혁명을 소련식 대숙청과 같은 정부 주도의 변란으로 알고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문화대혁명은 최고 지도자 마오가 정권을 잡기 위해 대중을 선동해 벌인 일종의 친위 쿠데타며, 정부 기관은 한켠으로 물러 서 있는 가운데 순수 민간조직인 홍위병이 언론 기관을 장악한 4인방의 선동에 이끌려 나선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문혁 때 무지막지 고생한 당시 중국 지도부들은 대부분 대중 운동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때의 두려움이나 경험을 살려(?) 천안문 사태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게 된다.
  49. [49] 말이 웃긴 것 같지만 자오쯔양은 이때 절망적이었다고...자오쯔양 항목에 보면 당시 사진이 있는데, 정말로 울면서 말하고 있다. 한편 이때 자오쯔양의 옆을 지킨 사람이 이후 후진타오 국가주석 체제에서 2인자격인 국무원 총리가 되는 원자바오.
  50. [50] 이는 자오쯔양이 덩샤오핑을 비판한 구술 녹음 테이프가 자오쯔양의 사망 이후 발견됨으로써 알려졌는데, 자오는 감시원의 의심 및 수색을 피하기 위해 이 녹음 테이프들을 자신의 손자가 가지고 놀던 낡은 곰 인형 속에 숨겨놨었다. 그러다 2005년 1월 그가 사망하자 또 다시 시위가 벌어질까 우려한 중국 정부는 천안문 광장 등 주요 지역에 무장 경찰을 배치하고, 언론 보도 또한 통제하였다. 기타 자세한건 자오쯔양 항목 참조.
  51. [51] 당시 티베트 지역 당 서기였던 후진타오는 반중국 시위가 일어나자 시위 현장에서 철모를 쓰고(...) 직접 강경 진압을 진두 지휘하였다. 덕분에 개방에 유화적인 태도와 함께 내부 문제에선 강경파로 덩샤오핑과 보수파 양쪽에게 인정받았다.
  52. [52] 천안문 민주화 운동으로 덩샤오핑은 보수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방에 회의적이던 장쩌민을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장쩌민의 후임은 개방을 적극 지지하던 후진타오로 내정하였다.
  53. [53] 중국 공산당의 당원은 수천만명에 이른다. 때문에 혹자는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종교조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54. [54] 실제로 덩샤오핑의 홍콩에 대한 집념은 초지일관이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홍콩 반환 시기를 늦춰달라고 요구하자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도 모자라 "중국 인민 해방군은 당장 오늘이라도 홍콩을 접수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을 정도. 물론 제3차 세계 대전 일으킬거 아닌 딴에야 실제로 쳐들어올 가능성은 낮았겠지만.
  55. [55] 그조차도 자국 위주의 공산통일이었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56. [56]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완성된 후에야 자본주의가 이룩한 최고 수준의 생산력을 토대로 실현될 수 있다(때문에 마르크스도 영국이나 프랑스가 아닌 상대적으로 덜 발전한 러시아 지역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더 빠르게 전개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중국은 자본주의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사회혁명으로 사적 소유가 폐지되어 버렸기에, 생산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이 발목을 잡아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 덩샤오핑 노선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를 채택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생산력 수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것이라는 주장. 문제는 그걸 사회민주주의 방식으로도 훌륭하게 이룩한 북유럽 같은 지역도 있는데 중국은 여전히 일당독재라는 것. 사실 북유럽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만 받아들인 특이 케이스이다.
  57. [57] 이런 점 때문인지 일부 마오쩌둥 지지자들에겐 현대 중국의 양극화를 낳은 주범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마오쩌둥 시절만 해도 중국 대학비는 무료였지만 개방개혁이 이뤄지면서 대학 입학비를 받게 된다. 또 이런 양극화 문제의 핵심은 결국 부동산이 좌우하는 경우가 많은데, 못 살던 시절엔 다른건 몰라도 몇년 일하면 집은 살 수 있던게, 도리어 잘 살게 되자 다른건 풍족해졌는데 투기 등으로 집값이 폭등해 몇십년을 일해도 집을 못사게 되는 상황이 여러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다.
  58. [58] '백가지 꽃이 만개하게 하라, 백 가지 의견이 경쟁하게 하라'라는 뜻으로 원랜 마오쩌둥 통치 시기인 1950년대 후반 쌍백 운동의 방침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낚여 많은 당대 지식인들이 사회와 당, 국가에 비판을 가했지만, 정도가 과했는지 어쨌는지(...) 빡쳐버린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직후 반 우파 투쟁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게 된다.
  59. [59] 당시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철저한 숙청으로 인해 마오쩌둥 사후 특정 인물 한 명이 당을 완벽히 장악하는 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니 말년의 남순강화와 같은 공산당 원로들의 권력 다툼으로도 보일 수 있는 행보를 죽을 때까지 한 것.
  60. [60] 보수 우파인 조갑제,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진중권은 천안문 사태에 대해 철없는 부르주아 학생 난동을 진압했다며 중공을 조심스레 옹호하던 일부 구좌파나 군부독재를 찬양하는 한국 우익의 멘털리티가 묘한 교감을 이룬다며 이를 비꼬기도 했다.
  61. [61] 다만 2010년대 낸 자서전에선 저우언라이를 자신이 만난 중공 최고의 인물로 표현했다. 덩샤오핑은 처음엔 너무 까칠해보여 별로 안좋아했는데, 말은 무뚝뚝해도 열심히 하려는걸 보고 진정성을 느꼈다고.
  62. [62] 근데 아이러니한게 후쿠야마의 조국인 미국만 봐도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FDR 시절 방임주의에서 정부 개입을 긍정하는 혼합체제적 성격으로 경제 변환을 이룬 사례가 있다. 자본주의 속에서도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킨 유럽권도 있고. 좀 웃픈 말이긴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치며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각해졌지만 대기업의 전문화와 벤처기업육성 등 경제 체질은 강화되는 변혁을 이루어냈다.
  63. [63] 말 그대로 그를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가 아닌 황제, the Great 대제라고 부른 것이다. 왕조 시대의 지도자로 규정한 셈. 봉건전제왕정을 디스하던 공산당 입장에선 칭찬과 동시에 욕이 된다.
  64. [64] 그러나 과거 중국 왕조 시대에도 위대한 황제들이 있었음을 언급하며 민주주의 체제의 권력 견제가 없는 체제라도 황제가 좋은 사람일 때는 나라도 잘 되지만 그러나 늘 이런 좋은 지도자가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면서 마오쩌둥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황제가 절대 권력을 장악해 폭군이 된 것을 예로 들었다.
  65. [65] 그런데 정작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등소평이 실제로 했던 말은 "검은 고양이든 얼룩 고양이든"이었다고 한다. 이걸 증언한 사람은 덩의 최측근이었던 총참비서(비서실장).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이 말은 저우언라이가 한 말을 덩샤오핑이 인용한 것이다.
  66. [66] 중공 정권이 성립되어 교육기관이 정비되기 이전까지는 일상 생활은 물론 학교에서도 해당 지역의 방언만 사용했다.(요즘은 아무리 오지라도 소수민족 학교가 아닌 이상은 거의 표준중국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당시 덩샤오핑이 저랬던 건 특이하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말이 안 통하는데도 한자로 필담하던 중국 대륙이 웃길 따름 현재도 문혁 시절 학교를 못 다닌 60대 이상에서는 이런 사람이 있다.
  67. [67] 사실 중국의 우주 계획은 나름 장기 추진된 계획이었다. 과학 기술 개혁 항목 중 하나였기 때문.
  68. [68] 유튜브에 올라온 기록 영상을 보면 김일성이 방중해서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담소하면서 맞담배를 피는 장면이 나온다.
  69. [69] 때문에 당시 중국이 북한의 개혁개방을 꺼린다는 식의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
  70. [70]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권력 세습을 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그렇다면 우리가 전제 군주와 다를 게 뭐냐고 반대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공산당은 전제주의를 봉건제도의 유산으로 보기에 싫어한다.
  71. [71] 이때 주로 방송하던 리그가 이탈리아 세리에 A였다. 때마침 이 때는 세리에 A 최고의 전성기 시절의 이른바 "칠공주", "세븐 시스터즈" 시대였고, 이때를 계기로 중국에서 세리에 A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72. [72] 나중에는 중국 슈퍼 리그로 명칭이 변경된다.
  73. [73] 참고로 중국은 그해 열린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게 밀려 최종 3위로 탈락하였다.
  74. [74] 이 게임을 리뷰한 AVGN제임스 롤프는 자신의 실력대로 하기보단 여러 이유로 일부러 발컨 수준의 플레이를 하는데, 그점을 감안하더라도 5분 내에 끝판왕이 등장해 클리어했다고 말할 정도면 정말 못 만든 게임이나 마찬가지인 셈. 그것도 난이도와 내용 면 모든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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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20-05-17 10:2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