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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정 사건사고 문서는 유머성 서술과 비하적인 표현이 제한되며, 사실관계를 작성할 때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야 합니다.

    松江騒擾事件

    폭도들이 시마네 현청사에 불을 질렀다.

    1. 소개
    2. 배경
    3. 전개
    3.1. 오카자키 이사오
    3.2. 궐기 준비
    3.3. 궐기(...)
    4. 이후
    5. 기타

    1. 소개

    쉽게 설명하면 자신들이 말하는 조선진주군의 현실판

    일본 제국이 패망한 1945년 8월 24일, 천황옥음방송으로 "우린 졌다…" 라고 선언한 지 거의 열흘만에 시마네현 청사 소재지인 마츠에시에서 발생한 극우 세력들의 항복반대 폭동.

    2. 배경

    마츠에시가 포함된 시마네현은 17세기 대규모 은광이 개발되며 크게 발달하다 은광의 고갈 이후 지역 경제가 크게 침체되고 퇴화되었다. 이렇다 할 성장동력도 없는 혼슈 서부에 위치한 시마네 지방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갔고 인구 유입이 거의 없어지며 자연스럽게 매우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렇다보니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패퇴한 뒤 일본 본토 공습으로 도쿄나 오사카같은 대도시는 물론, 지방의 여러 소도시들까지 석기시대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인구도 없고 산업시설도 없고 교통의 요충지도 아니고 그 어떤 전략적 가치도 없는 시마네현은 폭격은 고사하고 직접적인 전쟁 피해를 입지 않았다. 비슷한 이유로 전쟁의 참화를 피한 홋카이도를 비롯한 일부 지방들은 전쟁 막바지 미 항모기동부대의 공습을 받거나 일본 서부 해안으로 넘어온 미 해군 잠수함들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 와중에도 시마네 현은 공격할 가치도 없는 지역으로 판단되어 아무런 공격도 가해지지 않은 것이다.

    바로 아래 히로시마 현에서 자국 해군 함대가 몰살되고 엄청난 폭탄이 떨어져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가는 동안에도 시마네현의 주민들은 징병으로 끌려간 친지들의 전사통지서 정도를 받아들며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른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몰랐다.

    3. 전개

    다른 지역들은 미군의 공습으로 쑥밭이 되가고 있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일제는 결국 항복선언을 하며 종전을 맞이한다. 그런데 외부의 상황을 잘 몰랐던 시마네현에서는 항복 소식을 듣고 왜 일본이 항복을 하냐고 반응했고 종전 이후의 궁성사건, 카스미가우라 호수와 아츠기에 있던 항공대[1]가 항전을 부르짖고 시마네현의 옆 동네인 돗토리현에서 온 항공대가 마츠에 시내에 결사 항전을 호소하는 선전문을 뿌리니 마츠에 시내에서는 종전 이후에도 "귀축영미 타도!" "성전 완수!" 따위의 선전물이 날아다녔고 급기야 항복 5일 후에 시마네 현의 어떤 마을에서는 촌장을 중심으로 미군에 맞서서 항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스멀스멀 형성되기까지 했다.

    3.1. 오카자키 이사오

    오카자키 이사오(岡崎功, 1920-2006)는 제국주의 단체 활동으로 요주의 인물, 사상범으로 낙인찍힌 인물이었는데 극좌도 아니고 극우활동가이었음에도 그 미쳐가던 일제에서 사상범 취급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인물이었다.[2] 오카자키는 패전 당시 근로동원 관련 부서에 있었는데, 유력가에서 자기 자제들을 뒷돈을 주고 동원에서 제외시키고 알고 지내던 장교들이 본토결전에 적극적이지 않자 크게 격분하였다.

    3.2. 궐기 준비

    일제의 항복 이후 오카자키는 도쿄로 상경하여 수도의 정세를 파악하고자 했으나 사상범이라는 이유로 경찰에게 저지되자(...) 동료를 대신 보내 도쿄의 상황을 살펴보게 하였다. 도쿄는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만 남았으나 종전 이후 궁성사건 등 일부 극우세력의 발악이 벌어졌고 이 동료는 이 광경을 보더니 이렇게 뜻있는 신민들이 남아있음에도 정부가 겁을 집어먹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오카자키에게 전달한다.

    오카자키는 전해들은 도쿄의 정세와 미군이 8월 26일에 상륙한다는 신문 기사를 접하고 미군이 상륙하기 이전에 궐기를 일으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일당을 모아 스스로를 황국의용대라 칭하고 준비에 나선다. 그러나 이 '의거'에 동참한 사람들은 겨우 40여 명, 이나마도 여성들이 포함된 숫자였고 오카자키는 친분이 있던 장교들이 무기와 탄약을 제공해줄 것이라 믿었으나 당연히 이 정신나간 계획에 진지하게 참여할 장교는 없었다. 결국 오카자키는 일본도 몇 자루와 다이너마이트 몇 개, 각 학교에서 일전에 일제가 본토결전을 대비하며 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비치해 둔 38식 아리사카 소총 10여 정을 긁어모아 의용대를 무장시켰다.[3]

    3.3. 궐기(...)

    오카자키는 황국의용대를 '화약탈취조', '현청사습격조', '전신국 습격조', '요인암살조'로 나누어 각각 화약점에서 화약을 탈취하고, 시마네 현 청사를 습격하여 불태우고, 전신국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 폭파시키고, 현의 주요 요인들을 암살하는 임무를 하달했고 8월 24일 새벽 2시에 전격적으로 거사를 일으킨다.

    그런데 화약탈취조는 화약점의 위치를 몰라 길을 헤메다가 각자 집으로 돌아갔고, 전신국습격조는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는데 성공했으나 불발로 실패, 현청사습격조는 경찰에게 발각되었음에도 계획을 앞당겨 청사 방화에 성공하여 전소시키는데 성공, 요인암살조는 현청사습격조가 계획을 앞당겼다는 사실을 전해듣지 못하고 계획대로 움직이다가 실패하였다.[4][5]

    오카자키는 일이 이렇게 되자 집으로 돌아간 화약탈취조를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을 집결시켜 방송국을 장악하고 제국신민들의 봉기를 호소하는 방송이라도 해보려 했으나 무기가 없던 탓에 방송국이 문을 걸어잠그고 농성에 들어가자 또 실패, 덤으로 상황을 알아차리고 현장에 집결한 군경에 포위되며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투항했다.

    4. 이후

    결국 황국의용대의 궐기는 단 하루도 안돼서 실패하고 주동자를 포함한 전원이 체포당하는 결말로 막을 내렸다. 사건은 일본 정부의 검열로 '마츠에시에서 원인불명의 화재'정도로 보도되며 거의 한달 동안 은폐되었다.하긴 불이 대놓고 났는데 안 났다고 할 순 없으니

    오카자키는 자신에게만 죄를 묻겠다는 조건으로 투항했으나 정부가 이를 지키지 않자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살아남았다. 이후 재판에서 주동자 오카자키는 사형, 나머지는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이 선고되었으나 1946년 천황이 내린 종전 기념 은사령 및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기념 사면을 받고 모조리 석방되었다(…).

    5. 기타

    • 여담으로 주범인 오카자키가 이전에 사상범으로 몰려 투옥된 이유는 무려 도조 히데키 암살 모의다. 오카자키는 도조가 기껏 개전해놓고 전황이 불리해지니 총리 자리 던져놓고 도망친다고 생각했다고.
    • 위키백과 일본어판과 그것을 번역한 한국어판에서는 알찬글로 등록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대체적으로 "의도는 병맛이지만 저돌적인 자세는 본받아야" 같은 식으로 두둔하는 편. 반면 꽤 비중 있는 반동 운동임에도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 듯하다. 국내에서 일본사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잘 다루지 않는 사건이다.
    • 2013년 10월 6일, 한국의 독도 관련 시민단체에서 시마네현에 가서 독도 편입 문서에 대한 정보(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요구했다. 그런데 여기서 아무도 생각 못 한 일이 터졌는데 "68년 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서, 시마네현의 독도편입 행정 문서 원본이 소실되었다"는 답변을 들었다는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문서는 필기체 기록으로 남아있는 동년의 다른 기록들과는 다르게, 이후에 인쇄기로 뽑아낸 사본이라고 한다.[6] 워낙 중대한 안건이라 관계자들은 이게 사실인지 재차 확인할 예정이라고 한다. 관련 기사
    시민단체 독도련의 주장(그들이 직원에게서 들었다는)에 의하면, 화재가 발생한 날짜는 1945년 8월 24일이었다고 한다.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시마네현의 독도 편입 관련 문서의 원본을 소실시킨 화재는 마츠에 소요 사건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1. [1] 모두 도쿄 근교. 전자는 이바라키현, 후자는 가나가와현의 오다와라 윗동네.
    2. [2] 하술하겠지만 일제가 부르짖던 1억 총옥쇄를 진심으로 떠받들던 미친놈이었다.
    3. [3] 그런데 애초에 교육용 기재로 배치된 것이라 총은 있는데 총알이 없었다(...).
    4. [4] 주요 요인들은 청사가 불타고 있다는 소식에 전부 현장으로 출동했고 현장에는 무장경찰들이 대거 대기하고 있으니 당연히...
    5. [5] 심지어 이 난장판 와중에 지나가던 행인을 적으로 오인하고 살해하기까지 했다. 황국신민 잡는 황국의용대
    6. [6] 한국 정부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1905년)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그보다 5년 앞선 대한제국 칙령 제 41호(1900년)의 울릉군수 행정문서에 독도가 명시되어 있으므로 "독도가 주인 없는 땅이라 점령했다능!"이라는 일본의 논리는 성립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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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st modified 2020-04-17 20: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