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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유왕대비

명헌왕대비*
(명헌왕태후)

* 효의왕후는 대비의 존호를 사양하여 존호가 없다.
* 명헌왕대비는 갑오개혁 이후 조선이 독립국이 됨에 따라 왕태후로 격상된다.

고구려백제신라발해고려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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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대

명경대왕대비

효유대왕대비

부여고구려백제신라발해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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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4대 왕비
文定王后
문정왕후

성렬인명문정왕후
(聖烈仁明文定王后)

존호

성렬인명(聖烈仁明)

시호

문정(文定)

출생

1501년(연산군 7년) 12월 2일

사망

1565년(명종 20년) 5월 5일 (63세)

조선 한성부 창덕궁 소덕당

능묘

태릉(泰陵)

재위

왕비

1517년 ~ 1544년 12월 3일

왕대비

1544년 12월 4일 ~ 1545년 8월 10일

대왕대비

1545년 8월 11일 ~ 1565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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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파평(坡平)

부모

파산부원군 윤지임, 전성부부인 이씨

부군

중종

형제

오빠 윤원로, 남동생 윤원형

자녀

명종,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총 1남 4녀

종교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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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왕비 시절
3. 인종 치세 - 대비 시기
4.1. 불교 부흥
5. 죽음
6. 평가
7. 문정왕후의 능
8. 매체에서
9. 어보
10. 관련인물
10.1. 가족 및 친인척
10.1.1. 자녀
10.2. 측근
11. 둘러보기

1. 소개

중종의 제2계비이자 인종의 계모, 명종의 모후. 시호는 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정희왕후와 더불어 파평 윤씨 가문이 배출한 알파걸.[1] 그리고 명성황후와 더불어 조선의 역대 왕비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높은 왕비이기도 하다. 즉, 윤원형윤임의 권력 다툼은 같은 가문의 내전이라고 봐도 될 정도.

대비로 수렴청정하던 시절의 공식 존호는 성렬대비(聖烈大妃)[2]이지만 대중적으로는 문정왕후라는 호칭이 더 잘 알려져 있다.[3] 덕분에 대비일 때는 '문정대비'라 표기하는 약간의 오류가 있었다.

이전의 정희왕후[4]소혜왕후, 후의 순원왕후, 신정왕후, 명성황후 등의 네임드 왕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순왕후도 문정왕후가 누린 위세에 비견하자면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외척극혐 태종은 피꺼솟.[5]

2. 왕비 시절

조선의 2번째 간택 왕비[6]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이다. 1517년, 17세 때 당시 중종의 왕비이자 문정왕후에게는 9촌인 삼당고모인 장경왕후가 죽자 원자 이호(훗날의 인종)의 외숙부 윤임의 뒷배로 간택되어 가례를 치르고 중전이 되었다. 중전이 되었으므로 당시 태어난 원자 이호를 잘 돌봐야 할 책무가 있었고, 처음엔 성심성의껏 훈육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인간의 욕심이 시작된다. 당시 중종은 후궁들로부터 많은 서통 왕자들을 얻은 상태였으나, 적통 왕자는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 이호가 유일했다. 한미한 집안 출신인지라 든든한 친정 배경에 왕자들까지 생산한 후궁들보다도 기반이 미약했던 문정왕후는, 적통 왕자를 낳아 입지를 다지려 했다.[7] 실제로 문정왕후는 연달아 임신하여 의혜공주(懿惠公主), 효순공주(孝順公主), 경현공주(敬顯公主), 인순공주(仁順公主)[8]를 낳았다.

문정왕후가 원하던 아들을 좀처럼 낳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문정왕후에게 기어 오르던 경빈 박씨뭬야?는 자신의 아들인 복성군을 내세워 문정왕후의 양자인 세자 이호에게 도전해 왔다. 이에 세자의 또 다른 친위세력인 세자의 누나 효혜공주의 시아버지 김안로작서의 변을 조작하여 경빈 박씨를 찍어내고 조정의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문정왕후는 이들과 잠시 한 배를 타기도 했다. 참고로 문정왕후가 드라마에선 군기(…) 잡는 연상의 이미지이지만, 실제 역사에선 경빈 박씨보다 8살 정도 나이가 어렸다고 한다.[9]

그러다 문정왕후가 34살의 나이에 마침내 고명아들[10] 경원대군을 낳으면서 정국에는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요즘에야 34살에 아이를 낳는 것이 그리 나이 많은 편이 아니지만, 문정왕후는 17살에 궁에 들어와 결혼 17년 만에 이제야 자신의 다섯째 아이로 첫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노산(老産)아라 봐도 무방하다. 문정왕후뿐만 아니라 늦은 나이에 2번째 적자를 본 중종도 당연히 몹시 기뻐했다.

사실 경원대군을 낳기 전까지의 문정왕후는 세자의 편이 되어 세자를 감싸는 입장이었다. 상술한 작서의 변 사건 때도 문정왕후는 최대한 힘써서 세자를 보호했다. 혹시나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한 채로 중종이 죽게 된다면, 왕으로 즉위한 세자를 등에 업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대하던 아들을 낳자, 문정왕후는 태도를 싹 바꿔 노골적으로 세자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중종 말년 세자가 있는 자선당이 불탄 사건의 배후로 문정왕후가 지목받을 정도다.[11] 이 때부터 자신의 남동생들을 불러 당파를 만드는데 그 유명한 윤원로윤원형.[12] 이들이 바로 소윤(小尹)의 축이다. 그 후 대윤의 영수이자 세자의 외숙 윤임과 김안로가 짜고 맘에 안 드는 문정왕후를 찍어내려 하나, 여기서 실패. 이를 눈치챈 중종은 "김안로가 대역부도하다"며 도리어 그를 찍어내고 사약을 내린다. 이때 또 다른 세자의 보호자 윤임이 김안로 숙청에서 한몫을 담당하는 바람에, 세자를 옹호하는 세력(대윤)들을 때려잡는 데는 실패하고 다만 세력을 엇비슷하게 맞추는 데는 성공했다.

3. 인종 치세 - 대비 시기

1544년 중종이 죽고 세자가 인종이 되었으니, 소윤은 픽 사그라들고 대윤의 기세가 승승장구했다. 이와 더불어 소윤의 축 윤원로는 유관 등의 주도로 대윤의 탄핵을 당해 귀양살이까지 했다. 자신을 감싸던 윤원로가 사라지자, 문정왕후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인종을 몰아세우면서 자신의 안위를 보존하려 했다.

중종의 장례 때 인종은 장례의식을 철저히 준수[13]하며 안 그래도 허약한 몸을 망치고 있었는데, 그랬던 인종에게 계모 문정왕후의 핍박은 더욱 치명타였다는 견해도 있다.[14] 특히 인종이 식음을 전폐하고 장례의식을 준수하는 걸 본 정승들이 "세종대왕도 장례 중에 고기를 드셨습니다." 하며 고기 들기를 권했으나 인종은 "대비마마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했고, 문정왕후는 정승들 앞에서는 "주상께 고기를 드시라고 허락했는데 주상이 안 드시는 걸 나한테 어쩌라고?" 하면서, 신하들이 "그럼 자전(대비)께서 먼저 고기 반찬을 드시죠. 그러면 주상께서도 드시겠죠."라고 건의하자 "내가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상중에 고기를 먹니?" 하고 거부했다.[15]

어쨌거나 문정왕후가 인종을 몰아세우는 모습만 보인 건 아니라서, 인종의 환후가 위중하니 명산대천에 기도를 올릴 것을 지시하는 등 친밀한 모습도 많이 보였다. 그러나 그전에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고, 이러한 행동들이 조정에서의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 한 연막 작전이었을 뿐이라는 해석이 많다… 정순왕후 김씨정조가 사이가 안 좋았다는 건 이덕일 부류의 소설에 불과하지만, 문정왕후와 인종의 사이가 별로라는 건 진짜다.

결국 인종은 몸이 본래 약한데다가 아버지 중종의 장례를 무리하게 치르느라 등극한지 9개월만에 요절했다.

하지만 야사가 일반인들에게 더 유명한데,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환한 얼굴로 인종을 맞으며 을 주었는데 문제는 그 떡에 독이 있었고, 떡을 먹으면서 '계모가 드디어 날 용서하나?' 싶었던 인종은 기쁜 마음에 떡을 먹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승하했다. 다른 야사에는, 인종이 그 떡에 독이 있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너무 착한 나머지 떡을 먹고 죽는 걸 선택했다고도 한다. 전설의 고향 시리즈 중에는 이 설을 택한 에피소드도 있다. 거기의 나레이션에서 "인종의 유령이 자주 보였다"는 야사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독살 떡밥이 사실이라면, 무엇보다도 사관들이 없는 근거라도 만들어서 비난했을 테니 기록에 안 남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장 차기 왕 명종이 문정왕후의 친아들인데다가 한동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까지 했었기에 권력의 속성상 그런 의혹이 묻혔을 수 있고, 따라서 독살 가능성 역시도 상당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듬해인 1545년, 결국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명종이고, 이와 더불어 대왕대비인 문정왕후가[16] 수렴청정을 하였다. 드디어 여인천하의 시작이다!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아아~ 어아~ 아아~ 어어 아~ 아아아~ 어어아~ 아어~ 어아아아아아아~

4. 대왕대비 시절 - 여인천하

결국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과 대윤을 찍어내었고 오히려 자신을 길들이려는 대신들이 윤원로를 귀양보내자 오히려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서 유관, 유인숙을 비롯한 대신들을 차례로 죽였고 백인걸, 권벌, 이언적을 비롯한 반대파 대신들도 유배를 보내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 다음해에 일어난 양재역 벽서 사건[17]을 빌미로 다시 사림들과 눈엣가시였던 다른 왕족들도 제거하였다. 대윤의 잔당을 뿌리 뽑는다는 명분으로 을사사화보다도 이 양재역 벽서 사건이 그 여파는 더욱 컸다. 그리고 다음해에 충주에서 이홍윤의 옥사가 터지자 수십 명의 목을 날려버리고, 충주를 유신현으로 강등시킴으로써 충청도(충주, 청주가 있는 도)를 청홍도(청주, 홍주가 있는 도)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 이홍윤의 옥사가 가관인데,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죽은 유학자 이약빙은 원래 충주의 대유학자로 일대의 선비들이 죄다 그의 문하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죽자 분노한 그의 아들 이홍윤이 아버지의 장지를 잡으며 친구들과 "좋은 날이 오면 옥사의 결과가 뒤집힐 것"이라는 요지의 '불온한 말'을 주고받았다. 이홍윤의 이복형 이홍남이 이를 수상쩍게 여겨 고변을 함에 따라, 10여명이 능지되고 그 이상이 고문사하는 초대형 사건으로 커져버렸다. 그런데 이런 대형 역모(?)를 때려잡았는데도 공신 책봉이 없었다는 것 때문에 조작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거기에 초기에 책임자인 이기는, "미친 놈들이 모여서 헛소리 좀 한 사건이니 곤장이나 치고 유배나 보내고 말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언각이란 자가 "'헛소리를 하면서 한 일'을 캐내야 한다"고 이기를 꼬드겼고, 이에 이기는 난언율 사건을 역모 사건으로 확대하여 충청도 지역의 유생들을 전멸시켜 버렸다.

추신으로 정언각은 양재역 벽서 사건을 키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원래 괘서는 범인을 잡을 수도 없으니 보는 족족 태우는 것이 관례인데 정언각은 이를 떼어 갖다바친 것이다. 그런데 이기, 정순붕 등은 "벽서가 붙은 이유는 역적들에게 가볍게 벌을 준 탓이다."라고 전혀 관련도 없는 엉뚱한 종친 봉성군, 송인수, 이약빙, 이언적, 노수신, 정황, 유희춘, 권응정, 이천제, 권벌, 백인걸 등을 처벌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를 문정왕후가 수락함에 따라 일대 피바람이 불었다.

이 정도면 완전히 여왕이다. 세간에서도 문정왕후를 여왕이라 칭할 정도였으니. 이와 더불어 소윤의 핵심인 남동생 윤원형, 이기,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등에게 요직을 주었고 윤원형의 정난정은 정경부인으로 올려주기까지 했다. 이와 더불어 문정왕후와 그 딸들인 공주들, 윤원형, 정난정까지 그 권세는 엄청났고 시전을 장악하여 시전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드셨다. 한양 각지에 엄청난 사저를 가지고 백성들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하여 엄청난 원성을 들었다.

헌데 소윤의 핵심들 중에서 잘나간 이들은 몇 안 된다. 우선 윤원형과 이기는 엄청난 권세를 누렸지만 정언각,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윤춘년 등은 사화 이후 몇 년도 못가서 죄다 골로 가버렸고, 온건파였던 허자는 윤원형과 이기의 성미를 건드렸다가 숙청당했다. 그리고 전 항목에선 "윤원형이 문정왕후의 빽으로 영의정에 올랐다"고 기술되어 있었는데, 윤원형이 영의정이 된 건 맞지만, 문정왕후의 섭정이 종료된 다음에 외척 이량이 급부상할 시점에 명종이 외삼촌 윤원형을 안심시키는 차원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영의정은 정승으로써 별로 실권이 없었다. 윤원형이 권력이 최강인 시절에 우의정이 진짜 알짜배기가 있는 권력이였다. 병권을 감독하는 자리에 좌의정과 더불어 정승들 중 권력이 쎈 직책이었는데, 이량이 등용되자 윤원형이 그를 우습게 보아서인지 "한직에 머물러도 막후에 권력을 휘두르면 되겠지"라고 해서 1년도 안 되어 사임했는데, 문제는 이량 또한 권력에 대한 욕심이 윤원형보다 더 배포가 커서인지 "차라리 우의정하고 있을걸"이라고 후회막급하였다. 그런데 이량도 권력에 절정에 달했을 때 이조판서였다. 정승에 오르지 못하고 육조의 수장을 끝으로 실각되었다. 문정왕후 시기의 영의정은 윤인경, 홍언필, 심연원[18] 등이다. 윤원형은 심연원의 후임인 상진이 명종 13년에서 명종 18년까지 재임한 다음인 명종 18년이 돼서야 영의정이 되었다.

20살이 된 명종이 친정을 하자, 편전을 내주고 물러난 문정왕후는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윤원형을 이용해 조정의 뜻을 모았다.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내시궁녀들을 이용해 명종을 감시했으며 명종에게 가서 따지고, 만약 아들인 명종이 자신의 말을 안 들으면 다 큰 자식, 그것도 임금에게 뺨을 때리거나 회초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명종은 어머니만 보면 겁부터 먹고 쫄며 지냈다 카더라. 어디까지나 야사인 것에 주의. 그러나 이러한 야사도 어느 정도는 실제 상황을 반영하기는 한 모양이다. 다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스스로 명종(明宗)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주상께서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 《조선왕조실록명종실록 31권, 2번째 기사

4.1. 불교 부흥

숭유억불인 조선에서 승려보우를 총애하여 불교의 중흥을 꾀하고 승려들의 과거인 승과도첩제를 부활시키는 등의 행보를 밟았다. 엄밀하게 따지면 불교를 총애한 것은 거의 전 시기의 조선 왕실의 특징이기도 했다. 애초에 유학은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왕실내부, 특히 궁중의 여인들에겐 매력이 없었다. 하지만 문정왕후와 이런 일반적 이들과는 실질적인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이 승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서산대사 휴정사명당 유정과 같은 인물들이다. 이 2명만 고려해도 조선은 본전 이상을 거두었다고 봐도 된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서 가장 불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해서 성과를 거둔 시기가 이 문정왕후의 치세이기도 하다.

이런 중흥책은 불교 자체에 대한 문정왕후의 개인적인 독실한 불심도 작용했겠지만, 가뜩이나 자신의 말을 안 들어먹는 사림파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계책이기도 했다. 이를 안 사림들과 유생들은 노발대발하며 반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국정 장악력 자체는 대단한 것이라 얼마 안 있어 사그라들었고, 내수사의 권력화로 사대부들은 더 이상 에서 깽판을 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내시 주제에 사대부를 능멸한다"고 사대부들의 어그로를 더 끌었다.

보우의 경우 사실 땡중으로 알려져 있지만, 보우의 악행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엄밀하게 따지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보우 비판의 내용을 보면 국정이 문란해지고 재난이 늘고 하는 등의 이유를 보우와 불교에서 찾고 있을 정도이지만, 분명한 비리의 증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문정왕후 생전에 보우가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에서 물건 훔치고 패악질 하던 유생들 중에서 가장 악질적이었던 황언징을 경국대전에도 언급되는 유생들이 절에 가지 못하도록 한 '금유생상사지법'을 통해서 처벌하고, 유생들이 사찰에 들어가서 횡포를 부리는 것을 막은 것이었다.

이후 보우 처벌 후 과거 무학대사이성계가 머물렀을 정도로 대찰이자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회암사가 보우의 거점이었다는 이유로 유생들과 인근 농민들에 의해서 약탈되어서 말 그대로 터만 남을 정도가 될 정도로 불교에 대한 멸시가 강했던 조선시대였기 때문에, "그까짓 절의 물건 좀 가져온 것이 무슨 죄냐, 황언징을 석방하고 보우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물밀듯이 쏟아졌다. 또한 보우가 문정왕후의 쾌유를 기원하려는 목적으로 부처님오신날에 대형 법회를 벌인 것을 두고 "많은 국고를 소모하였다"는 명목의 죄가 더해졌다. 사실 유생들 입장에서는 숭유억불이 모티브인 조선에서 불교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만으로도 죽일 놈이었다.

5. 죽음

1565년 창덕궁에서 문정왕후는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필이면 이것이 불교 행사를 위해 목욕재계하다 한기가 들어 중병에 걸린 것이라, 가뜩이나 사대부들의 미움을 받으며 적승이니 요승이니 하는 오명은 다 듣던 보우는 완전히 죽일 놈이 됐다.(…) 그녀의 죽음 이후로 윤원형정난정도 몰락하여 집에 처박혀 있다가 부부가 잇달아 요단강을 건너고, 보우는 한때 친했지만 살기 위해 배신한 윤원형까지 가세한 신하들의 처형 요구에 승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귀양갔다가 불교 중흥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제주목사 변협에게 곤장을 맞다가 이내 참수당하고(…)[19], 승과도첩제 등 문정왕후가 추진한 불교 융성책들은 모두 휴지통에 들어갔다[20].

이는 아들 명종에게 호기가 되었으나, 명종은 2년 뒤에 34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게다가 명종의 유일한 후사였던 아들 순회세자도 앞세운 상태라, 명종 사후 왕통은 조선 개국 이래 처음으로 방계 서자 혈통인 선조[21]에게 이어지게 된다. 안습.

문정왕후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유언에서 "주상이 이단(불교)을 박해하려거들랑 신하들 너희들이 좀 막으라"고 했는데, 정황상 명종이 불교를 신봉하려 들어도 어림없는 판국이라.(…)

그러나 이것은 실록의 '사관 논평'에 나온 말이라서 문정왕후를 비하하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문정왕후의 권한이 막강하긴 했지만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정치에 크게 개입은 하지 않았고[22] 명종의 정책에 문정왕후가 크게 제동을 건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중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크게 중용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문정왕후는 이의를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학자들 입장에서는 일단 대왕대비가 지나치게 전횡을 부린다는 것에 불만이 많았고[23], 무엇보다도 숭유억불 원칙을 가진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국가차원[24]에서 불교를 중흥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야사에서 이미지가 너무 강해지자 사람들은 자주 명종을 '마마보이 임금'이라고까지 비하하기도 한다. 굳이 마마보이라고 불릴 만한 이유를 들자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다고 했을 때 울며불며 사양했고 "대신들은 뭐하는가! 어머니를 말리지 않고!"라며 징징거렸던 모습 정도인데, 사실 저런 쇼는 수렴청정 거둘 때 다들 하였다.[25]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막상 친정을 시작한 후에는 딱히 모후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정치를 펼쳐 나갔다.

윤원형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문정왕후의 죽음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가 하나 있는데, 문정왕후가 죽기 전 한강 두모포에서 거대한 괴 물고기가 낚여 올라왔다. 이 광경을 구경하던 여러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이를 보고 "큰(大) 물고기(魚)가 낚여 올라오니(行), 이는 윤원형의 '형'(衡) 자를 암시하는 것이라, 곧 그가 몰락 테크를 타게 될 것이다"라ㄱ 점쳤다. 그로부터 3일 후, 과연 점괘대로 문정왕후가 죽음을 맞이하며 그와 동시에 윤원형과 정난정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6. 평가

(상략) "사신은 논한다...... 그의 아우 윤원형(尹元衡)과 중외에서 권력을 전천(專擅)하매 20년 사이에 조정의 정사가 탁란(濁亂)하고 염치가 땅을 쓸어낸 듯 없어지며 생민(生民)이 곤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졌으니,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중략)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尹氏)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조선왕조실록》 명종 31권, 명종 20년 4월 6일 2번째 기사

그야말로 평가가 분분한 왕비인데, 8년간 섭정하며 사림들을 죽이고 권세를 이용하여 외척들을 비호한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것과 불교를 숭상한 여걸이라는 평가가 유명하다. 전자는 사림을 싫어한 나머지 윤원형으로 대표되는 척신세력과 자신을 따른 소윤을 전적으로 신임했는데 문제는 그들의 부패가 극심해(…) 국정이 심각하게 문란해졌기 때문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게 당연한 경우고, 후자는 사실 지나치게 커진 사림파의 권한을 약화시킬 목적에서 한 거라 사대부 입장에서야 못마땅하겠지만 국가가 무너질 정도로 무리하게 힘을 실어준 것도 아니고 유생들의 행패를 저지하고 문정왕후가 시행한 승과는 세종대왕도 시행했던 거라서 객관적으로 봤을 땐 좀 지나치게 까인 분야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는 편이나 명종시기 조선의 국방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하여 아버지 중종 시기 조선군은 삼포왜란을 쉽게 제압한 반면, 명종은 을묘왜변전라남도 해안가를 점령당하는 등 조선군은 왜군을 상대로 어려움을 겪는데,[26] 이러한 국방력의 약화는 임진왜란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27] 거기다 임꺽정이 활동하던 시기가 이 시대였으니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는 분명 수탈과 고통의 시기. 근데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 개선되었냐면 그건 또 아니다.

사실 문정왕후를 까는 상당수의 근거들이 명종에게 매를 때렸다는 둥 인종에게 독을 탄 떡을 먹여 죽였다는 둥 하는 야사이거나[28] 조선왕조가 세워진 지 100년 넘어가면서 생긴 중기적 문제들을 그냥 문정왕후의 책임으로 돌리고 본 것이 많긴 하다. 불교 문제만 해도 한때 땡중으로 매도되던 보우의 행보를 보면 딱히 땡중으로 부를 이유도 없고, 승과고려 때 하던 걸 조선 초기에도 계속하다가 연산군 때 폐지했다가 다시 부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승과, 즉 정식으로 스님이 되는 과정이 없는 관계로 가짜 중들이 판을 치고 돈을 내지 못한 이들이 몰래 절에 들어가 중이 되는 경우도 있어 호구 파악에 어려움이 컸기에, 이 점은 전혀 까일 만한 것이 못 된다. 게다가 승과로 뽑힌 게 천하의 사명대사라서(물론 이 마지막 부분은 결과론이라 역사학적으로 옳은 해석법은 아니다).[29][30]

국방력의 약화도 계속된 문치주의로 인해 이미 성종조부터 꾸준히 보고가 올라오면서 수면 위로 올라오던 것이 문정왕후 치세에 이르러서 폭발한 것이고 방납의 폐단으로 대표되는 수취 제도의 문란은 문정왕후 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전에도 있었고 문정왕후가 죽은 후에도 대동법이 실시되기 전까지 계속 이어져가던 문제다.

물론 이러한 병폐들을 바로 잡는 것이 권력자의 의무이고 이걸 못했다는 점에선 백번 까여도 할말이 없다. 여기에 그리고 윤원형, 이기로 대표되는 소윤 측근들의 비리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이걸 잡지 못한 것도 병크다. 게다가 바로잡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더더욱 할 말이 없다. 아무리 이전부터 존재했던 문제점이라고는 하지만, 문정왕후 섭정기의 정부는 그 이전 시대와 비교해도 심각하게 부패한 정부였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31] 그렇다고 해서 조선 중기 국력 급락의 원흉이라던가, 권력에 눈이 멀어 인종을 죽인 막장부모 타이틀을 달 정도로 막장은 아니라는 것이 결론...이라지만 이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평가를 그대로 옮겨온 것에 가깝다. 조선의 역대 집권층에서도 손에 꼽을만큼 무책임하고 탐욕스러운 측근들의 횡포를 방임했으니, 당시 조선의 심각한 문제가 문정왕후의 탓만은 아니더라도 그녀의 탓이 컸던 것도 사실이고, 인종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닐지라도 세자 시절부터 정신적으로 심하게 압박한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여자 + 불교를 숭상한 것 때문에 사림들에 의해 까인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왕가에 관한 문제만큼은 제대로 못 까는 체제의 엄연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까였다. 훗날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고종의 부인 명성황후 민씨가 아님)가 아버지 김우명을 구하기 위해 왕이 신하들과 면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뒤에서 울면서 왕을 은근히 압박하고 대신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자, 한 신하는 명성왕후를 '문정왕후가 돌아온 건가여?'라며 까기도 하였다.

조선 역사상 왕비들 중에서 정순왕후와 함께 세간의 인식이 가장 혹독한 인물이다.[32] 하지만 후의 영조정순왕후 김씨의 경우에는 또 이덕일 부류의 노론 사관에 무고를 당한 것에 가깝다. 게다가 정순왕후 김씨는 그나마 명백한 실정이라도 있는 문정왕후와는 달리, 전횡을 하거나 이렇다 한 실책을 하지도 않았고 이시수 등의 조리있는 반박에 수렴을 쳤다가도 물러나기도 했다.

본 단락의 처음에 인용된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의 논평은 문정왕후 사망 기사에 기록된 것이다. 후세의 인물들이 평가한 것도 아니고 당대의 평가가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고, 윤씨는 사직의 죄인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조선의 사관들에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해도 저런 고인드립성의 멘트를 사망 기사에 적는 경우는 없었을뿐더러, 문정왕후의 전이나 후나 사망 기사에 저런 심한 사론이 적힌 왕비는 더더욱 없었다. 21세기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누군가의 사망 기사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논평하면 고인드립 수준이다. "문정왕후의 숭불 정책에 대한 유림들의 반발심으로 저런 심한 사론이 적혔다"는 견해도 있으나, 객관적으로 봐도 저 정도의 평가가 나와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나라를 개판으로 만든 건 사실이다.[33]

그러나 이런 해석도 조심해야 하는데, 사관들은 이런 드립을 그냥 적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사론은 그 전에도 있었다.

以天言之, 則陽剛而陰柔, 以人言之, 則男尊而女卑. 豈可許姥嫗出閨房, 斷國家之政事乎? 新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 幸也. 『書』云: "牝鷄之晨." 『易』: "羸豕孚." 其可不爲之戒哉?

하늘의 원리로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운 것이며, 사람의 원리로 말한다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다. 어찌 늙은 할미가 규방을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 것인가?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게 하였다. 이는 실로 어지러운 세상에나 있을 일이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경」에는 "암탉이 새벽에 운다"고 하였고, 주역에는 "암퇘지가 껑충거린다"고 하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 내용은 김부식삼국사기에서 선덕여왕 기사에 쓴 사론이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고려시대 사론에 이런 글이 쓰인다. 특히 문정왕후는 정치의 전면에 등장해서 사림과 대립했던 인물이었다. 실록을 볼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관의 개인적 생각인 사론을 객관적 실체로 단정하지 않는 것이다. 실록 본문이라면 몰라도 사론에 사관이 개인적 감정을 더하는 것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7. 문정왕후의 능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태릉(泰陵). 유명한 태릉선수촌이 바로 근처에 있다. 왕비의 무덤인데 능호가 클 태(泰) 자인 것을 보면, 문정왕후의 권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크기도 웬만한 왕의 무덤보다도 더 크다. 본래 문정왕후는 중종과 묻히고 싶어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장경왕후의 무덤 옆에서 선릉(宣陵, 중종의 아버지 성종의 능) 근처에다 이미 마련하였으나 정릉 근처가 지대가 낮아[34] 여름에 비만 오면 침수되었다 하여 결국 강 건너 북쪽인 태릉에 묻혔다.

그런데 이 자리는 풍수지리상으로 무후지지(無後之地)라고 한다. 즉 후손이 끊기는 자리라는 것인데, 당시에도 이 자리가 무후지지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나보다.[35]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명종윤원형과 총호사 심통원에게 대방동[36]경기도 장단 이 2곳을 두고 의견을 물었는데, 윤원형이 술관의 이야기를 듣고 대방동에 묻힌 사람의 후손을 비교해본 결과 풍수지리설이 별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 결국 대방동이 묘 자리로 전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로 여기에 묻힌 명종은 후사가 끊겼다.(…) 결국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의 아들인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면서 이후 왕위는 방계 혈통으로 흘러간다.

애초에 침수가 잦자 다시 묫자리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거듭해서 묫자리를 옮기는 것은 불가하다"는 이유로 상소가 쏟아져서 중단되었을 정도로 당시에도 그런 이야기는 별로 먹히지도 않았다. 풍수지리가 맞건 틀리건 생전에 그만큼 문정왕후가 아들을 죽도록 들볶아 댔던 탓도 크다. 조선왕릉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태릉 내부에 조선왕릉 전시관을 지어 놓았다. 태릉선수촌을 사이에 두고 아들 명종의 능인 강릉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왕릉 중 유일하게 왕비릉이 왕릉을 앞장 선 형태라고 한다. 물론 왕의 어머니이기도 해서 그렇지만 묘의 위치 자체가 어머니 치맛바람에 치여 살던 명종의 삶을 사후에도 보여주고 있는 꼴이라 그저 지못미. 순회세자뿐 아니라, 2년 뒤 문정왕후 자신이 죽고, 그녀의 아들인 명종도 2년뒤에 승하하였다.

왕후답지 않게 큰 규모의 능역을 가진 덕분인지, 현대에 들어서는 노원구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정작 바로 옆에 붙은 진짜 왕릉인 강릉은 제한공개능역이라 사람도 별로 안 온다.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은 세조광릉, 성종선릉, 신덕왕후정릉, 명성황후홍릉 등과 더불어 지명화 된 왕릉들 중 하나이다.

8. 매체에서

문정왕후는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간택되었고, 남편인 중종보다 12살이나 어렸지만,[37] 사극에서는 중종과 나이가 비슷한 동년배 부부로 묘사될 때가 많다.[38] 그나마 옥중화 같이 명종 치세를 그리는 사극에서는 중년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고증에 맞지만, 중종 치세 초반을 그리는 사극이라면 비교적 어리고 젊게 묘사되어야 맞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천하전인화대장금에서의 박정숙의 이미지 때문인지 사극 속 문정왕후는 중종 치세때부터 중년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풍란》에서의 문정왕후

풍란》에서의 어린 문정왕후

정난정(김영란 분)과 문정왕후가 주인공인 작품. 그야말로 서릿발 같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당시 《전원일기》를 찍고 있던 김혜자는 이미지 변신이 필요하다 싶어 이 작품을 선택했다고 한다. 다만, 문제는 이 드라마에서 문정왕후가 상당히 미화되었다는 것이다. 명종에게 "정치는 이런 것이다"라고 하면서 훈수를 두는 정도로 지혜롭고 정치에 노련한 사람으로 나왔다. 여기서는 실제 나이에 맞게 입궁 초엔 아역배우가 연기하였다.

조광조》에서의 문정왕후

아직 중종 치세인데다가 조광조(유동근 분)가 주인공인만큼, 어린 소녀로 묘사된다. 앞 서 언급한데로 문정왕후는 17살에 이미 중년인 중종에게 간택되었던 만큼, 극 중 문정왕후가 어린 소녀로 나와서 중종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부로 묘사되는 것은 상당히 고증에 신경 쓴 부분. 다만, 자신의 양아들 원자를 처음부터 견제하려는 모습을 많이 보이면서, 어린 나이임에도 싹수는 꽤 노란 인물로 묘사된다.

임꺽정》에서의 문정왕후

여인천하》에서의 문정왕후.

문정왕후 사극의 대명사. 덕분에 2001년 SBS 연기대상에서 문정왕후 역의 전인화와 정난정 역의 강수연이 공동 대상을 수상하였다.[41] 인기만큼이나 명대사가 참으로 많다.
  • 암! 암 ~ ! 그렇고 말고!
  • 뭐라?
  • 네 정녕 단매에 죽고 싶은 것이더냐?
  • 윤임이와 김안로를 정녕 찍어낼 방도가 있느냐?
  • 그 입 다물라 하였느니!
  • 난정아!
  • 엄 상궁!
  • 네년 ~~ 이 미쳤구나.
  • 나가라, 경빈! 경빈 : 뭬야!?

문정왕후 복장으로 시구하는 전인화

오죽 《여인천하》로 인기 몰이를 하셨으면 2001년 한국시리즈/4차전에서 문정왕후 복장을 하고 엄 상궁(한영숙 분)에게 공을 받는 걸로 시구까지 했다.[42] 이때의 인기 덕분에 지금도 사극 속 '문정왕후'라면 전인화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문정왕후 어보 특별전에 참석한 전인화, 유동근 부부

심지어 드라마가 종영된 지 15년이 지난 2017년에 문정왕후의 어보가 미국에서 반환되었고,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문정왕후 어보 특별전이 열렸을 때 남편 유동근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대장금》에서의 문정왕후

포커스가 장금이(이영애 분)에게 맞춰 있고, 중종(임호 분)과 시어머니 자순대비(엄유신 분) 살아 있을 때라 비중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장금이를 눈여겨보고 있었으며, 의녀가 된 후에도 장금을 후원해 준다. 중종 사후 조정을 장악하여[43] 도망다니던 장금과 민정호(지진희 분) 일가의 신분을 단번에 회복시켜준다. 그리고 중종의 다른 후궁들은 모두 쫓아낸 것과 달리, 장금이의 절친인 숙원 이씨(연생이, 박은혜 분)는 동생 같다며 잘 보살펴 준다. 잠깐 흑화해서 장금에게 원자 이호의 시해를 명령한 적도 있지만, 확실히 선역이라고 볼 수 있다.

《옥중화》에서의 문정왕후

《마녀보감》에서의 문정왕후

명종(이다윗 분)과 중전 심씨(장희진 분)를 혼인시켰으나 중전 심씨가 혼인을 한 뒤 5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자 흑무당인 홍주(염정아 분)를 궁 안으로 불러 들여 엄청난 짓을 저지른다. 배역을 맡은 김영애가 2017년 작고하면서 이 작품이 그녀의 마지막 사극이 되었다.

9. 어보

문정왕후의 어보(御寶, 왕실 도장)는 지금 LA카운티 박물관(LACMA)에 있다. 그 이유가…

6.25 당시에 종묘에 있던 걸 미군 병사가 훔쳐갔다! 그것도 문정왕후 어보 포함해서 39개의 어보를(…)이런 날강도 쉐키.

2000년 LA 카운티 박물관이 경매로 산 것을 시민 단체가 확인했고, 꾸준히 반환 요청을 한 결과, 2013년 9월 반환 결정이 내려졌다링크

아직 완전반환일지 영구임대일지는 결정 안 된 상태이고,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서도 문정왕후 어보는 반환되지 못했다.

그리고 아직 미군 병사가 훔쳐간 어보 중 37개가 사라진 상태다…

그리고 드디어 현종 어보와 함께 국내에 들어오게 되었고, 2017년 8월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가 될 예정이다.

10. 관련인물

10.1. 가족 및 친인척

10.1.1. 자녀

10.2. 측근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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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의왕후는 대비의 존호를 사양하여 존호가 없다.
* 명헌왕대비는 갑오개혁 이후 조선이 독립국이 됨에 따라 왕태후로 격상된다.

고구려백제신라발해고려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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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파평 윤씨이며, 인종의 생모인 장경왕후 윤씨도 파평 윤씨다. 장경왕후와 문정왕후는 서로 9촌 관계다.
  2. [2] 인수대비와 반대로 알려진 케이스인데, '인수대비'란 명칭은 생전에 받은 공식 존호로 대중에는 이 이름이 더 유명하고, 그녀의 실제 시호는 '소혜왕후'다.
  3. [3] 후기의 대비로는 신정왕후 조씨가 해당된다. 이쪽도 대비 존호는 '효유대비'지만 흔히 성인 조씨를 이용한 '조 대비'로 잘 알려졌다.
  4. [4] 조선 7대 왕이였던 세조의 왕후
  5. [5] 정순왕후 김씨도 위세가 대단하긴 했지만 소론 신하 이시수와의 키배에서 지고 물러나야 할 정도여서, 자신에게 개긴 신하들을 죄다 골로 보낸 문정왕후의 서슬퍼럼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래도 정순왕후가 문정왕후보다 나은 점은, 절제와 원칙을 중시하였고, 민생에 신경 쓰고, 손자 정조의 정책을 잘 이어 받았다는점이다. 문정왕후와 달리 숙청은 파직이나 유배로 하였고, 피의 숙청은 별로 안 좋아했다.
  6. [6] 조선 최초의 간택 왕비단종정순왕후 송씨다. 간혹 장경왕후 윤씨가 간택 왕비라고 아는 경우가 많지만 장경왕후는 후궁 출신이다. 의외로 조선왕조에는 간택 왕비가 별로 없다. 오히려 간택 세자빈 혹은 후궁 출신이거나, 원경왕후 민씨처럼 군부인(왕자의 아내)이었다가 남편의 급작스런 즉위로 함께 된 왕비가 많다. 조선은 당연히 현대 한국보다 평균수명이 짧았으므로 혼인연령도 낮았다. 왕세자 시절에 혼인하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다. 간택 왕비는 정비의 사망, 폐위 또는 세자가 혼인하기에 너무 어린데 갑자기 왕이 사망하는 때에나 간택하게 되는 것이니 그 수가 적을 수 밖에. 참고로 이전판까지 조선왕조의 간택 왕비는 총 6명이라고 서술했으나 이는 잘못으로, 실제로는 총 11명이다. 정순왕후 송씨(단종), 문정왕후 윤씨(중종), 인목왕후 김씨(선조), 장렬왕후 조씨(인조), 인현왕후 민씨(숙종), 인원왕후 김씨(숙종), 정순왕후 김씨(영조),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헌종), 철인왕후 김씨(철종), 명성황후 민씨(고종황제).
  7. [7] 이것은 문정왕후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에서 왕비가 본인의 기반을 다지는 가장 강력하고도 확실한 방법은 왕위를 계승할 적법한 왕자를 낳는 것이었다.
  8. [8] 경원대군 이후 8년 만에 인순공주를 출산했으나, 인순공주는 4살 때 죽었다.
  9. [9] 경빈 박씨뿐만 아니라 창빈 안씨, 희빈 홍씨중종반정 이후 반정공신의 양녀 자격으로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반면, 문정왕후는 장경왕후 사후에야 계비로 간택돼 입궁했으니, 당연히 저 세 후궁들보다 한참 어릴 수밖에 없었다.
  10. [10] 문정왕후 입장에서만 고명아들. 중종에게는 이미 왕세자 인종을 비롯해 아들이 여럿 있었다.
  11. [11] 중종과 세자 인종 모두 수사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의문. 인종이야 조선 최고의 도덕군자 중 하나일 정도의 인물이지만, 자식들 사랑이 지극했던 아버지 중종은 왜…?
  12. [12] 여인천하에선 둘 다 오빠로 나왔으나, 남동생들이 맞다. 윤원형 역할로 나온 이덕화전인화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액면상(…) 어쩔 수 없이 오빠로 설정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13. [13] 세종대왕조차도 어머니 원경왕후의 장례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장례의식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않았다.(혹은 지키지 못했다.)
  14. [14] 비슷한 예로 문종도 그렇게 몸을 망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종은 원래부터 그리 이성계적인 체질을 물려받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실록에 인종 즉위 이후 허구한 날 '육선을 잡수십쇼~~!!', '아니 나는 갠츈해요^^;' 인종은 왠지 신하에게도 존대했을 듯한 사람이다.하는 밀당이 계속된다. 상을 치르느라 더욱 악화된 어느 날, 인종을 진맥한 어의에 따르면 "지금 상태로 고기를 드신들 소화도 못시키고 더 탈이 날 수 있으니 타락죽, 즉 우유라도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에 대한 인종의 대답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내가 많이 아파보이는 것일 뿐, 죽을 만치 아프지는 않소."였다. 보다못한 사관이, "신하 놈들이 억지로라도 먹일 것이지, 안 먹이는 거 보면 먼가 있는 듯, 쯔쯔" 하고 혀를 차는 논평까지 붙였다.
  15. [15] 그런데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닌 게, 인종도 문정왕후의 허락 이후 육선을 받긴 받았다. 그런데 그대로 다시 나왔다는 기록이 허다하다.
  16. [16] 명종의 형수이자 인종왕비인성왕후왕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문정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17. [17] 양재역은 말죽거리를 의미.
  18. [18] 훗날 동서 분당의 빌미가 되는 심의겸의 할아버지며 윤원형괴 결탁한 심통원의 형이다.
  19. [19] 사실 이것도 엽기 그 자체였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런 식의 참수는 지방관이 함부로 내릴 수 없고, 한양으로 올려서 처형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법률체계였다. 현대식으로 보면 조정의 의정부대법원이자 대검찰청이고, 제주목은 일개 검찰지검이나 지방법원의 지원이고 한성부나 유수부 감영이 고등검찰청고등법원이다. 그런데 보우는 제주목사의 선에서 죽은 것이다. 보우가 제주도유배를 떠난 것이 6월말에서 7월이었는데, 보우의 죽음이 도성에 알려진 것은 10월 중순이었다. 더욱 엽기적인 것은 실제 보우가 죽은 다음에도 유생들은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고, 명종은 "이미 보우의 죄가 정해졌다"는 이유로 "더 이상 논죄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이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10월 14일, 보우의 죽음이 전해지기 바로 하루 전이었다. 여러모로 법률 체계를 무시한 처벌이었으나 그냥 저냥 넘어간 듯하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변협의 입을 빌려 "모후를 생각하면 죽이라는 명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는데 꽤 그럴듯해 보이긴 한다. 사실 변협이 목을 쳐버리든 말든 보우가 살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만, 명종 입장에서는 그래도 어머니가 총애한 승려의 목을 날리라는 명령을 내리기에도 껄끄러울 테니, 이런 절충점(?)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20. [20]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능침의 사찰이나 고찰의 경우는 잡인들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막고, 무뢰배가 유생인 척하고 절에 들어가서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단속하라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출입한 것은 유생들이었으니, 이런 명목상의 지시가 지켜질 리가 없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회암사의 파괴로 단적으로 드러난다.
  21. [21] 중종후궁창빈 안씨의 손자이다. 이전 문서에는 조선의 첫 방계 혈통으로만 기록되어 있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조선의 첫 방계 계승은 태종이 형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이다. 다만 이전까지 방계 계승을 이은 왕들은 아버지가 왕이었기 때문에 직계 계승으로도 볼 수 있고, 선조는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이 중종의 서자이기 때문에 첫 방계 서자 혈통의 왕이 된다.
  22. [22] 만약 그랬다면 개입한 예를 문정왕후를 까기 위해 사관들이 안 실었을 리가 없을 것인데, 그런 기록은 없다.
  23. [23] 한 고조 유방의 비인 여후와 애초에 나라를 세워버렸던 측천무후의 전례가 있으니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24. [24] 조선 초기 사찰을 세우고 불경을 편찬한 그 세조마저도 불사는 개인적인 일로 처리했다.
  25. [25] 다만, 시기는 좀 늦은 건 맞는 게, 문정왕후가 청정을 거둔다고 한 해인 1553년에 명종은 20세의 청년이었다. 물론 당시 상황이 친 문정왕후 파로 신하들이 꽉 차있었을 때라는 점, 몇 번 정도는 저 '쇼'를 해줘야 불효자 딱지가 안 붙는다는 점 등을 감안해야 한다.
  26. [26] 더 웃긴 사실은 삼포왜란은 철저히 계획되고 준비되었는 반면, 을묘왜변은 규모만 삼포왜란보다 컸다 뿐이지 계획적인 것도 준비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구잡이로 털렸다. 일본에서도 어찌나 만만히 봤는지 "이대로 한양 고고씽"을 외쳤을 정도.
  27. [27] 하지만 이는 반대로 왜군이 질적으로 향상된 결과일 가능성도 있는데, 센코쿠 시대를 겪으면서 왜군은 무기와 전술의 향상을 보이게 된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거기에 국방력의 약화는 성종 때부터 이미 조짐이 보여서, 이미 "화살이 부족하여 싸울 수가 없고, 군선이란 군선은 죄다 조운에 쓰는 형편이라 포구에 군함이 없다"는 보고가 들어올 정도였다. 앞서 말한 중종 시기에도 왜구가 해안가를 노략해도, 가덕도에서 재목을 벌채하던 사람을 살해해도, 심지어 제주도에서 올라오던 공마선을 털어도 별 대책도 못 세웠다.
  28. [28] 실록에는 민가의 어머니처럼 왕을 꾸짖었다는 정도의 기록이 있다. 게다가 명종이 이량을 등용하여 윤원형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을 구경만 하는 등 수렴청정을 거둔 후에도 위세는 등등했지만 정치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명종에게 매를 때렸다는 기록은 십중팔구 과장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왕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왕의 몸을 때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 당연하지만 매체에서도 이런 내용은 안 나온다. 나온다 하더라도 명종을 꾸짖는 게 아니라 단호하고 엄정하게 말하는 정도다.
  29. [29] 결과론이 매우 위험한 것이, 이것은 결국 기승전결이 아니라 우연과 행운의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 이렇게 잘 되었으니 만사형통"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실제로 그런 우연과 행운이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30. [30] 다만 이 부분을 무작정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 이라고 폄훼하는 것 역시 적절한 해석은 아니다. 물론 승과 부활 자체가 잘못된 정책이었다면 설령 우연과 행운에 의해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결과만을 근거로 높게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만, 위에서도 설명된 것처럼 승과 부활 자체는 전혀 까일 만한 정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승과의 부활과 서산대사사명대사의 등장이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기본적으로 인재가 많은 것은 나라에 좋은 일이고, 인재를 얻으려면 합리적인 등용 절차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불교의 경우 조선시대 들어 많은 억압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천년 이상 사회 전반과 대중의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져왔던 종교였고, 그런 만큼 유능한 인재를 포함한 상당한 저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이 저력을 이끌어 내려면 당연하 합리적인 장치가 필요하고, 따라서 불교의 기반에서 사명대사서산대사 같은 뛰어난 인물을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과 승과라는 제도의 시행(부활)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즉, 승과 부활의 목적이 딱 짚어 '국난의 시기에 승병 지휘관이 될 수 있는 인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건 공식적인 제도를 통해 가짜 승려의 난립을 막고 재능과 자격을 갖춘 인물에게 적절한 공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과 그렇게 등용된 인물들이 유사시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명확하게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아니더라도 그런 인물들이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어느 정도의 인과관계가 성립한다는 것. 차라리 조선시대 유생의 관점에서라면 '설령 좋은 결과를 얻는다 해도 불교와 같은 이단을 나라에서 장려한다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 결과만 보고 정당화할 수 없다' 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현대인의 관점에서 적절한 비판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31. [31] 그나마 중종시기의 권신들은 최소한 개인적으로는 청렴한 이들이 많았고, 전권을 틀어쥐지 못했거나, 틀어쥐어도 몇년 내로 몰락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달라서 장장 20년에 걸쳐 이것들이 반복되어왔다.
  32. [32] 단종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가 아니라, 영조의 왕후 정순왕후 김씨다.
  33. [33] 세조비인 정희왕후도 왕실 대소사를 위해서 불공을 드릴 정도로 불교를 지나칠 정도로 신봉하였고, 연산군은 부친 성종을 위해서 수륙재를 지내려다가 신하들과 충돌한 적이 있다. 조선 전기는 겉으로는 숭유억불을 표방했으나 오랜기간 이어온 불교 숭상 관습이 왕실에도 남아 있었다.
  34. [34] 원래 강남 일대가 상습 침수 지역이라, 묫자리로 쓰기에는 문제가 많다.
  35. [35] 이 풍수설은 세종대왕의 능과도 관련이 있다. '절사손장자'라고 해서 무후지지와 비슷한 의미였는데 세종대왕의 마지막 항목 참고.
  36. [36] 지금의 서울 동작구 대방동이 아니라, 오늘날 태릉이 위치한 공릉동이다.
  37. [37] 게다가 문정왕후가 새 중전으로 간택되었을 당시 중종은 이미 여러 자식을 둔 상태였다. 또한 문정왕후는 중종의 후궁이었던 경빈 박씨보다도 8살이나 어렸다.
  38. [38] 여인천하에서 중종 역을 맡았던 최종환과 문정왕후 역윽 전인화는 같은 1965년생이였고, 대장금에서 각각 중종과 문정왕후를 연기했던 임호와 박정숙 또한 70년생으로 동갑이다.
  39. [39]불타는 청춘》에 나오는 그 분 맞다.
  40. [40] 남편이 이방원이성계를 맡았던 유동근인걸 생각하면 묘한 인연.
  41. [41] 전인화는 담당 연출자 김재형 PD의 전 연출작인 KBS 1TV 《용의 눈물》에서 원경왕후(최명길 분) 물망에 한때 거론됐으나 남편 유동근(극중 태종 이방원 역)이 부부가 동일 드라마서 같이 연기하는 것을 반대하여 무산됐고, 전인화 외에도 강수연, 도지원 등이 원경왕후 역에 한때 거론됐다.
  42. [42] 하필 이 경기에서 삼성두산 양 팀은 29점을 주고받았다.
  43. [43] 구체적인 모습은 안 나오지만, 민 상궁이 "요새 얼마나 무서운데!"라고 말하는 장면은 있다.
  44. [44] 여담으로 인종의 모후 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9촌 숙질간이라면, 문정왕후와 인종은 10촌 남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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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20-03-27 11:2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