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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9대 국왕
숙종 | 肅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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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당시 존시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최종 존시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colbgcolor=#bf1400> 묘호

숙종(肅宗)

존호

숙종 39년

현의광륜예성영렬
(顯義光倫睿聖英烈)

영조 29년

유모영운홍인준덕
(裕謨永運洪仁峻德)

영조 52년

배천합도계휴독경
(配天合道啓休篤慶)

고종 27년

정중협극신의대훈
(正中恊極神毅大勳)

시호

조선

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희순(僖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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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본 또는 이모본으로 추정되는 숙종의 익선관본 어진으로 1950년 12월, 6.25 전쟁 직후 부산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절반이 타버렸다.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출생

1661년 10월 7일 (음력 8월 15일)

조선 한성부 경덕궁 회상전

즉위

1674년 9월 22일 (음력 8월 23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사망

1720년 7월 12일 (음력 6월 8일) 9시[1]
(58년 9개월 5일 / 2만 1462일)

조선 한성부 경덕궁 융복전

능묘

명릉(明陵)

재위

조선 왕세자

1667년 2월 14일 ~ 1674년 9월 22일
(음력 1667년 1월 22일 ~ 1674년 8월 23일)

조선 국왕

1674년 9월 22일 ~ 1720년 7월 12일
(음력 1674년 8월 23일 ~ 1720년 6월 8일)
(45년 9개월 20일 / 1만 67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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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본관

<colcolor=#373a3c,#ddd>전주(全州)

광(爌) → 순(焞)[2]

명보(明普)

아명

용상(龍祥)[3]

전호

효령전(孝寧殿)

부모

부왕 현종, 모후 명성왕후

왕비

인경왕후, 인현왕후, 옥산부대빈(폐비), 인원왕후

}}}}}}}}}

1. 개요
2. 강력한 왕권의 원동력
3. 불 같은 성격
4. 환국(換局) 정치
5.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의 악연
6. 치적
6.1. 추증과 복권
6.2. 국방 정책
7. 가계
8. 정유독대와 최후
9. 영향과 평가
10. 여러 이야기거리
10.1. 애묘가
10.2. 지극한 자식 사랑
12.1. 영화
12.2. 드라마
13. 관련 문서

숙종의 어필(御筆)

1. 개요

使人長智莫如學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를 기르게 하려면 배움만 한 것이 없으니

若玉求文必待琢
옥의 문채를 찾기 위해서는 절차탁마가 반드시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라

經書奧旨于誰問
경서의 깊은 뜻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는가?

師傅宜親不厭數
마땅히 사부를 가까이하여 자주 뵙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야 한다네

1715년 11월 4일, 6남 연령군 이훤에게 내린 한시.[4]

조선의 제19대 임금이자 경종과 영조의 아버지.

주로 사극의 인기 소재인 희빈 장씨 드라마에서 나오는 일이 잦아 드라마에서는 우유부단한 이미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으며, 심한 경우에는 여자들한테 푹 빠져서 말 하나 하나에 속아넘어가는 바보로 나오기까지 한다. 허나, 실제 숙종은 절대 그런 인물이 아니다. 몸이 병약하고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지만, 성격은 다혈질에 가까웠고 정치판에서는 냉혹하며 매우 강력한 왕권(무수한 환국정치)을 휘둘렀던 군주였다.

왕비를 4번 들였는데 그 중 2번째 왕비가 그 유명한 인현왕후 민씨, 3번째가 장희빈이다. 각종 미디어에서 숙종은 여자 관계가 복잡한 것처럼 비춰지는것과 달리 실제로는 후궁의 수도 타 임금에 비해서 적었고 자식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치 여자 문제가 가득한 왕(...)처럼 보여지는것은 그가 다른 왕들과 달리 정치 문제에 자신의 부인들을 적극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만 봐도 숙종이 얼마나 냉혹했는지 알 수있다. 게다가 정치판에서도 유감없이 그 성질을 드러냈으니 다혈질과 냉철함이 합쳐진다면 말 그대로 머리도 갖춘 신하 갈구는 임금이 된다는 거다.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장남의 수난이라는 유서 깊은 징크스를 깨부순 유일한 사람[5]. 즉위 당시엔 14세라 약간 어린 편이었다. 당시는 15세만 되면 성년으로 보았다. 왕족이면 빨리 자식을 보길 바라는 마음에 10세 ~ 12세에 일찍 결혼시켰지만, 손(孫)이 그렇게 급하지 않은 일반 양가집이면 15세 정도에 결혼을 시켰고, 과거 시험에도 응시해 합격하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20세가 되면 이제 완전한 성년으로 보아 아버지도 20살 된 아들의 집안 일에 관여하면 큰 실례로 여겼다. 숙종은 14세(만13세)여서, 조선의 기준으로도 아직은 성인이 되기 전이었다. 모후인 명성왕후, 계증조모 자의대비[6]가 생존했으므로 수렴청정을 해도 되었지만 즉위하자마자 수렴청정을 스킵해 버리고 권력을 휘어잡아 친정을 했다. 이는 정통성을 떠나서 총명함과 결단력을 왕가의 어른들과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인정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7]. 오히려 비빈 사이를 오가며 아내들을 환국에 이용했다는 평. 이런 상태로 장장 46년을 재위하며 신하들을 휘어잡았다.

본래 휘는 '광(爌)'이었으나 현종 7년인 1666년 전한 때 장군 이광과 음이 같고 폭군의 대명사였던 수양제의 이름(양광)과 음이 같다는 대사헌 조복양의 지적을 받아들여 공모를 통해 휘를 '순(焞)'으로 고쳤다.

2. 강력한 왕권의 원동력

아버지인 현종도 할아버지인 효종외아들이었고, 자신도 정실 부인 소생의 고명아들이었으며 딱히 외척에 관련한 트러블도 없어 정통성에서는 꿀리는 게 전혀 없는 왕이었다. 꿀리기는커녕, 부계와 모계 정통성이 모두 완벽한 조선조 정통성의 끝판왕이었다. 그가 태어났을때, 세조같이 왕위를 찬탈할 백숙부도 당시에 없었고, 연산군 때의 중종처럼 폐위시키고 세울 대군도 없었다. 2대독자였기에 태어난 기준 가장 가까운 왕족은 당숙, 즉 소현세자인평대군의 자손들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소현세자의 자식들은 귀양과 석방을 되풀이하면서 종친으로서의 영향력은 사실상 없다시피했고, 인평대군의 후손들은 현종-숙종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 사실상 그 누구도 숙종을 견제할 수조차 없었다.[8] 이 때문에 14세라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을 받지도 않고 바로 친정에 나섰다.[9]

왕비나 세자빈 소생의 왕의 장남 또는 장손으로 출생, 원자(원손) - 세자 - 왕 순서로 정상적으로 왕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기준) 장수하기까지 한 왕이다. 역대 조선 왕조의 적장자들은 단명, 숙청, 폐위 등 유난스러울 정도로 풍파에 시달렸으나 숙종만큼은 이런 풍파를 무난히 피해갔다. 숙종의 성깔은 어머니(명성왕후 김씨)에게서 유전된 것도 있으나 이처럼 귀한 아들(현종의 아들이라곤 숙종 혼자다.)인 탓도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 어머니도 세자빈 - 왕비 - 대비 테크를 제대로 밟았다. 추가로 친증조모는 아니었지만 대왕 대비까지 있었으니 수양대군 같은 야심 많은 종친이 있었다고 쳐도 계유정난 같은 쿠데타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수양대군이 개념인으로 보일 만큼 엄청나게 막나가는 종친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다행히도 그런 종친은 당시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문종인종헌종[10]은 왕위에 올라 단명한데다, 정확히 말해 문종은 원손으로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11] 상기된 최초의 금지옥엽 + 정통성 + 상왕까지 올랐던 단종[12]은 3년만에 수양 대군에게 반강제적으로 양위당하고,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었다. 원손 - 세손 - 왕의 절차를 밟은 정조의 경우 호적상으로는 효장 세자의 아들이지만 어쨌든 생부 사도세자의 문제가 있었다.[13] 비슷한 예로 아버지 현종이 있는데 정확히 따지면 현종이 태어날 때의 세자는 소현세자이니 원손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세자 교체와 관련한 효종의 원죄가 남아 예송논쟁이 발생하고 현종 자신 또한 비교적 요절한지라 조금 '격'이 딸린다. 아들인 경종도 장희빈이 중전에서 폐위되어 사사당했으므로 적자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순종 황제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즉, 숙종의 막강한 왕권은 왕위에 오를 때 어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완벽한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조선 왕조에서도 정말 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 정통성 면에서 꿀릴게 전혀 없는지라 왕권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고, 이 양반 시절에 신하들을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노는 환국(換局)이 그렇게 많이 일어난 것도 이런 정통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불 같은 성격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지만, 성미는 매우 같아[14] 궁녀들이 머릴 빗겨주거나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결국 머리 빗겨 주는 것은 어머니가 직접 했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못 참아 투정을 부리자 등으로 머리를 때려가면서 빗겼다고 한다. 그래서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15]도 아들을 평하기를

"세자는 내 배로 낳았지만, 그 성질이 아침에 다르고 점심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 나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
출처 요망.

어쨌거나 명성왕후는 며느리인 인현왕후에게 이런 언급도 하였다.

"(인현왕후가 출궁당한 장희빈을 불러들이자고 주청하자[16]) 아직 내전이 그 사람(희빈 장씨)을 보지 못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그 간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소. 주상께서는 평소에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불길처럼 일어나시는데 간악한 사람이 그것을 옆에서 부채질한다면 그것은 큰 재앙이 될 것이오."

조선왕조실록은 숙종 14년(1688년) 7월 16일 숙종의 건강 상태를 이렇게 전한다. 전형적인 화병 증세다.

"이 때에 왕의 노여움이 폭발하고 점차로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이지 않았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다, 마음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번뇌가 심했다."

숙종이 평생을 두고 호소한 질병은 산증(疝症)이다. 산증은 아랫배에 병이 생겨서 배가 아프고 대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증상이다. 동의보감은 이 병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형적인 화병의 증상이다.

"대체로 성을 몹시 내면 간에서 화(火)가 생긴다. 화가 몰린 지 오래되면 내부가 습기로 차가워지며 통증이 심해진다."

숙종 본인도 자신의 이러한 성품을 인지한듯, 실제로 <숙종실록>을 보면 1704년(숙종 30년) 12월 11일자에서 숙종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의 화증(火症)이 뿌리 내린 지 이미 오래고 나이도 쇠해 날이 갈수록 깊은 고질(苦疾)이 되어 간다. 무릇 사람의 일시적 질환(疾患)은 고치기 쉽지만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화증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하면 화염(火炎)이 위로 올라 비록 한겨울이라도 손에서 부채를 놓을 수가 없다."

밑의 송시열과의 악연 문단에서 알 수 있듯이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도 조선 왕비들 중에서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로 한 성질하는 왕비였다. 아버지 현종은 온화한 성격이었으니 그의 성격은 모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명성왕후는 1675년 '홍수의 변'[17] 때에는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대전까지 와서 통곡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는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홍수의 변 때 총대를 매고 삼복(복평군 형제들)을 탄핵했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삼복과 반대 당파에게 무고죄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라서 이랬던 것. 신하들 역시 '이건 뭐 문정왕후가 또 나타났나요?'라고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장희빈만 나쁜 X이고, 착한 숙종은 끌려다녔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숙종이 다혈질에 사리분별을 모르는 짓을 종종 했던 인간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숙종 14년(1688년)에 장희빈이 아들(훗날의 경종 이윤)을 출산하자 장희빈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입궁한 적이 있다. 이 때 사헌부의 말단 직책인(심부름꾼 수준) 소유들이 장희빈 어머니의 가마를 보고는 이를 적발해 가마를 부쉈다. 그 가마는 옥교라는 지붕이 달린 여성용 가마로, 당시 법에 의하면 정 3품 이상 관리의 여자 가족이나 탈 수 있었다. 즉, 소유들이 원칙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들은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소유를 전부 때려 죽이라고 명했다. 물론 신하들이 뒤늦게 말려 중단되기는 했지만, 결국 내수사에 끌려가서 심문당하던 소유 중 2명은 고문 중에 맞아 죽었다.

당시 상궁들도 가마를 타고 다니고 암묵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일이였으나 일단 엄격히 법을 적용하자면 장희빈의 어머니가 주제넘은 짓을 한 것이 맞다. 결국 신하들의 극심한 반발로 숙종도 물러서서 법대로 한 것뿐인 자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그들에게 상을 내리고 이 일을 문제삼은 대간들을 칭찬하기도 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인 것도 특징. 위의 소유를 패대기친 것은 장희빈의 환심을 사려고 한 짓이며 장희빈을 이용해서 강적인 송시열(과 서인)의 끝을 보려했다는 시각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송시열이 죽고 난 이후에는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를 이용하면서 장희빈을 외면했단 것.

생각해보라. 계비인 인현왕후까지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행동을 트집잡아 폐서인으로 만들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아줬다. 하지만 장희빈의 이용 가치가 사라졌고 다시 인현왕후를 왕비로 삼았다. 인현왕후는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지만 폐위됐을 때 얻은 병이 악화되어 결국 복위된지 7년만에 사망했다. 이에 숙종은 그 죽음을 희빈 장씨의 저주 탓으로 돌려 그녀를 사사시켜 죽였다. 즉, 숙종이라는 인간 자체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는 인물이자 권모술수의 달인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다르게 말하자면 왕권 강화를 위해서 바른 말 하는 신하들도 가차없이 죽이고 두 여자를 갖고 놀며 자기의 아들의 인생도 엉망으로 만드는 짓을 많이 저질렀다는 애기도 된다. 일단 인현왕후는 5년이라는 길고 열악한 폐비 생활이 사망에 영향을 많이 끼쳤고, 장희빈은 저주를 했다는 증거도 고문으로 인한 궁녀들의 자백뿐인데다 세자(이윤)의 어머니인데다 남인 세력도 씨를 매우 많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귀양이고 뭐고 가차없이 죽여버렸다. 거기다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릴 당시 세자는 완전 어린 나이도 아니고 14살이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피를 많이 흘린 태종도 적어도 충신들이나 왕비인 원경왕후나 후궁 자체는 건드리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숙종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 수 있다.

숙종의 이런 불 같은 성격으로 인해 극단적인 피해를 본 사람이 많은 건 부왕인 현종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현종은 숙종과 달리 왕권이 지나치게 강하면 다음 왕 때부터 부작용이 나타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남인에게도 힘을 실었고 사약 같은 극단적인 수단은 쓰지 않았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현종 실록 대에 정치적으로 피바람이 불었다는 등의 묘사가 없는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양육적인 측면과 결합해서 보면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부터가 독선적이었는데, 조선 시대 왕의 스케줄이 워낙 살인적이었으므로, 중전이자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세자인 숙종의 주 양육자로서 성격적인 측면을 비롯해서 숙종에게 많은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아버지인 현종이나 친할머니이자 효종의 왕비인 웃어른 인선왕후[18]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숙종도 이들의 영향으로 잔혹한 수단들이 다소 완화되거나 최소한 이들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왕권을 독단적으로 행사하기 힘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4. 환국(換局) 정치

숙종의 진면목.

인조반정 이후 현종 때까지의 정국이 붕당 간의 적절한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숙종 즉위 후 기사환국 이후부터는 한 당파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너 죽고 너 다시 한 번 더 죽자" 너 죽엉 두 번 죽엉 식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왕실 종친들은 즉, 숙종의 적당숙인 복평군과 복선군, 복녕군은 아버지인 인평대군(인조의 3남)이 서인에게 탄핵을 받고 외척들인 서인과 사이가 안 좋아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서종조인 숭선군[19] 서당숙인 동평군 또한 장희빈과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서인은 주로 외척이 중추가 되었는데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이고 외조부인 김우명도 서인이었고 어머니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도 서인이었다. 숙종의 첫째 왕비의 아버지이고 장인인 김만기와 처숙부인 김만중도 서인이었고 둘째 부인인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과 오빠인 민진후, 민진원, 처숙부인 민정중도 서인이였다. 또 숙종의 증조할머니인 장렬왕후의 친척인 조사석도 서인이었다.[20] 게다가 숙종의 매제인 오태주도 서인 중진인 오두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도 김수항, 김수흥 가문의 종질녀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남인과 서인의 싸움은 종친과 외척의 대리전과 다름 없었다.

간단하게 임금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이 죽어나가는 거였고,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이 죽어나가는 형태였다. 붕당이 처음 일어난 선조 시절에 붕당간에 정철정여립의 난으로 대표되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혈투를 벌인 것과 비슷한 상황이 다시 전개된 것.[21] 이로 인해 집권 당파가 바뀔 때마다 보복성 숙청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장희빈적절히 이용해 환국을 일으켰다. 보통 조선 역사를 배울 때 이러한 숙청 시기를 환국으로 표현한다. 대표적인 환국과 그에 준하는 정국 뒤집기로는...

  • 재위 15년(1689년), (재위 16년차)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왕비 교체에 반대하는 서인을 내몰고 남인을 중용했다. 이때의 남인은 민암 중심.[25][26]
  • 재위 20년(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27]
  • 재위 27년(1701년), 신사의 옥으로 남인 잔존세력들마저도 쓸어버림. 그리고 소론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노론의 영향력이 강해지는데 일조함.[28][29] 이건 어찌보면 갑술환국의 속편이라고 볼 수 있다.[30]
  • 재위 31~32년(1705년~1706년), 임부의 옥사와 이잠의 옥사로 이미 재기불능에 빠진 남인들을 또 한번 대거 숙청함. 이 사건들로 인하여 소론의 영향력은 더욱 약화되고 노론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됨.[31]
  • 재위 36년(1710년), 예기유편 편찬에서 불거진 논란이 확산되고 게다가 당시 편찬자였던 최석정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면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고 거기에 대해 당시 영의정이자 내의원도제조였던 최석정이 임금의 병환에 시약을 잘못했다는 의혹까지 확산되면서 이에 분노한 숙종은 소론인 최석정에게 영의정 관직을 삭직하고 노론인 이여에게 영의정으로 제수를 하는데, 이로 인해 노론의 영향력은 계속 강화되고 소론의 영향력은 계속 약화되는데 일조함.
  • 이미 숙종 즉위 이전, 분명해지기로는 전자로는 경신환국 이후로, 중자로는 기사환국 이후로, 후자로는 갑술환국 이후로 서인이 소론노론으로 분열되자, 초기엔 소론을 중용했으나 신사의 옥, 임부의 옥사, 이잠의 옥사 등 여러가지 옥사들이 일어난 이후로 노론을 점점 계속 등용하더니[32]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을 대거 내몰고 노론을 대거 등용. 재위 21년 시절, 마지막 환국 이후 20년만에 벌어진 속편 격이라 잘 알려지지 않지만 이후의 붕당 대립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환국 정치는 숙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며, 숙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숙종은 살아서 신하들에게 존호까지 받게 되었고(그만큼 신하들이 그를 두려워 한다는 뜻), 충(忠)의 상징인 관우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신하들에게 반강제로 왕을 향한 충성을 강요했다.[33]

숙종은 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훗날 연산군처럼 피바람을 불게 할까봐 두려워 노론과 공모해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택군(擇君) 경험 때문에 노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면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서 피바람이 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임옥사[34]다.

숙종이 잦은 환국과 신권을 억누르는 정치를 한 탓에 몸이 약한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은 개판 5분 전 + 피를 피로 씻는 배틀로얄이 되었고, 독살설과 역모가 횡행하였다. 영조 즉위 이후에는 점점 소수 붕당의 독재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영조,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밀어붙여야만 했다. 근데 사실 탕평책이란 이름 자체는 숙종이 최초로 제기한 것.

숙종은 또 기본적으로 신하들을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숙종 17년(1691년)엔 우의정 김덕원이 오래 봉직한 내시의 경험담을 듣고 '인조대왕과 효종대왕은 검약하셨는데 님도 좀 검약하시져'라고 했다가 '네가 감히 선조의 일을, 그것도 천한 내시의 말을 들먹이면서 나를 능멸?'이라는 식의 말과 함께 오래 전에 사망한 그 내시는 일가 친척들과 함께 내시 명단에서 삭제되고 발언자 본인은 단칼에 파직 크리를 먹은 적이 있다. 영의정을 비롯해 주변 신하들이 다 싹싹 빌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바로 그해에 '그동안 당쟁이 심해 그거만큼 폐단이 없는데 나님이 그런거 다 없앰'이라는 율시도 지었다.[35] 그 내용을 다룬 만화, 송시열과 윤휴의 혼백이 숙종을 디스하는게 압권.

“예전부터 나라를 어지럽힘은 붕당보다 혹독한 것이 없는데, 동서(동인과 서인)가 겨우 주장을 내세우자 노소(노론과 소론)가 바로 마구 헐뜯어대어 공도는 때로 아주 없어지고 사심이 날로 이어 붙어 있으니 모름지기 은감이 가까운 줄 알아서 끝내 충성의 힘 다하여야 하리라."(從古禍人國/莫如黨比酷/東西纔標榜/老少轉橫拆/公道時淪喪/私心日係着/須知殷鑑邇/終始竭忠力.)

5.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의 악연

환국을 일으킨 끝에 즉위하기 전부터 미워했던 송시열에게 결국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로써 본인의 증조부, 조부, 부친인 인조, 효종, 현종 선대 세 왕을 섬긴 거물 정치가 송시열도 별 수없이 "어, 어"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이 때 송시열이 사약 1사발에 안 죽자, 3사발을 먹여서야 죽었다고 한다. 자세한 건 사약 참조.).

왕권 강화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송시열이 사약을 받은 계기가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삼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다소 감정적인 요인도 컸을 것이라 추측된다. 원래 숙종은 송시열을 싫어했고 송시열은 하던 버릇대로 숙종과 각을 세우다[36]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그리고 송시열을 따르던 유생들이며 신하들이 상소를 올리자 상소를 올린 이들도 다 유배를 보내는 숙종다운 성질을 보여준다.

결국 계속되는 상소에 열불난 숙종이 송시열을 국문을 열기 위해 한양으로 불렀다. 그때 송시열이 올라오는 길에[37] 그를 따르는 노론들이 몇백명이었다한다. 점점 한양으로 올라가며 졸졸 따르는 이가 500명이 넘었다고 했으니 숙종이 국문이고 나발이고 사약을 출동시켜서 결국 죽여버렸다.

송시열은 할아버지인 효종을 둘째 아들이라 못을 박고, 현종 때도 강씨(소현세자의 세자빈, 강회빈)의 신원 회복을 주장하는 등 당대 왕가에 껄끄러운 문제를 계속 건드렸다. 이는 적자 - 적손으로 이어지는 숙종의 정통성을 건들게 되는 일이니 좋아할리 없었다. 그리고 송시열의 세자 책봉 반대는 단순 반대로 여기기에는 문제가 있다. 송시열 같은 거물이 세자 책봉에 반대한다면 세자의 정통성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다만 이런 일을 했던 숙종이 정작 죽을 때 경종의 정통성을 훼손해서 노론이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게 한편으로는 아이러니.

숙종과 송시열의 다툼은 야사에서는 숙종 탄생 시기까지 간다. 숙종의 회임 기간으로 볼 때 숙종을 임신한 시기가 하필이면 효종 초상기와 맞물린 것.[38] 야사에선 이때 송시열이 원자 축하를 디스했다고 한다.(사실은 상경하다가 중간에 일이 생겨 기일을 못 맞추게 되자 송시열이 이것을 이유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근데 이 어머니 되시는 분도 조선사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성깔을 자랑하던 명성왕후[39] 김씨 되시겠다. 이후 명성왕후송시열이 왕실에 한소리 하기만하면 "저 놈의 영감탱이는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어쩌고" 하면서 송시열 디스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뒷날 숙종이 노론의 손을 들어준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단행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송시열의 학통이 교조화되는 데 한몫한 군주도 다름 아닌 숙종이라 할 수 있다.

숙종은 이런 송시열에 대해 짬밥이 너무 엄청나서 맞대결하기가 부담스러웠고[40] 그래서 장희빈을 이용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얻기도 전인 즉위 직후인 14살 시절부터 송시열을 갈구며 송시열의 제자들을 죄다 내쫓고 송시열을 귀양보낸 게 숙종이었다.

6. 치적

경제적으로는 대동법평안도, 함경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시행하여 민생의 안정을 추구했고 본격적으로 주전, 즉 화폐 제조를 실시했다. 흔히 우리가 잘아는 상평통보는 숙종 즉위 초년부터 주조되기 시작해 전국의 중앙, 지방 관청에서 유통되었다. 숙종이 상평통보를 발행한 목적은 국가 재정의 확충이라는 목적이 컸다.

숙종의 의도가 적중해서 이후 조선 말까지 화폐 제조를 통한 이익으로 국가재정을 충당한다는 개념이 정착했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도 일본과의 은 무역에서 크게 번영했다.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은 숙종 시대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국가 재정 역시 탄탄했다. 특히 숙종은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강해서 민생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대동법의 영남 / 황해 확대와 후술하는 을해정식을 통한 궁방전의 억제 등이 대표적이다. #

조선의 국경도 숙종 년간에 사실상 확정되었는데, 조정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널리 알려졌듯 1690년대 안용복울릉도는 우리 땅(덤으로 독도도)을 외치고 왔고, 앞서 말했듯 북쪽은 백두산에 청과 국경선을 다시 긋고 정계비를 세워 "서위압록 동위토문"을 적어넣었다. 문제는 당시 이 작업에 참여한 청나라 관리 목극등의 문제로 근 170년쯤 뒤에 간도 떡밥이 시작되어 버린 것. 이는 조선 왕실에서도 알아챘기 때문에 숙종실록에 토문강을 치면 간도 떡밥을 분쇄하는 가장 큰 근거가 나온다. 다만 그 뒤에 대한 대응은 적혀있지 않다.

한편 1678년, 안남(베트남)의 회안부(호이안)에 표류한 김태황(金泰璜)을 6개월 정도 머물게 한 후 청나라 상인을 통하여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안남왕은 답신을 기대하며 조선에 교류 국서를 보냈으나 조선 측에서는 제주에 도착한 김태황과 청나라 상인 일행을 표류한 것으로 처리하였다.[41]

6.1. 추증과 복권

조선 왕조의 과거사 정리에 관심이 많았는지 정종(定宗)과 단종(端宗)을 왕으로 복권시켰다. 정종은 본래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이라는 짧은 시호만 있어 약칭 '공정왕'이라고 불리고 묘호가 없었는데 이때 묘호와 조선의 다른 왕과 동일한 글자 수의 시호(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를 갖추게 되었고, '노산군(魯山君)'이라 불렸던 단종은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격상되었다가 다시 단종의 묘호와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의 시호를 받아 복위되었다. 이 때 혜빈 양씨와 사육신도 모두 복권되었다. 물론 그냥 짠, 하고 복위한 것은 아니고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치기는 했다.[42] 단종 복위 때는 기념으로 특별 과거까지 열었다.

태종의 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자손들이 정식으로 왕족으로 복귀한 것도 이 때였다. 그 전까지는 사실상의 역적[43]처럼 간주돼 그 후손들은 연좌제에 따라 족보상으로만 왕족이고 왕족으로서의 혜택은 아무 것도 누리지 못했다.[44]

신덕왕후강씨의 아들들인 방번방석을 복권시켜 이 때부터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으로 불리게 됐으며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를 복권시키기도 했다.[45]

숙종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왕권 강화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충(忠)을 강조하고[46] 왕가의 정통성을 다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다.[47]

숙종 자신이 출생 배경과 성장 과정에서 오는 정통성이 여느 왕과 달리 튼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왕권이 워낙 튼튼했기 때문에 과거사 정리 쯤 폭넓게 들어줘도 큰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48]

이런 작업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정조 대에 이르면 광해군의 충신으로 여겨져 사사되었던 유몽인이 복권되었고 철종 때에는 광해군의 사돈이자 소북의 영수인 박승종 또한 복권되었다. 고종 때는 정도전을 완전히 복권시켰고[49] 인조를 폐위시키고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한 유효립도 복권 되었고[50] 순종 대에 이르러선 김일경, 유자광, 윤원형, 정인홍 같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인물들조차 대부분 복권된다.[51]

6.2. 국방 정책

숙종은 방위 체계를 수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손봤다.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오군영 제도가 확립된 것이 숙종 대로 평가되는데 방어 체계가 수도 중심으로 재편된 김에 북한산성을 축성한다. 상대적으로 한양도성은 성곽이 너무 길어 수비하기가 어렵고, 강화도는 바다에서 접근하는 적을 못막으며, 남한산성한강을 건너가야 하는 위험함이 있다는 이유였다.

실록에 보면 이 과정에서 신료 사이에 의견이 크게 갈려 싸우게 되는데 숙종은 이미 마음을 먹어놓고선 계속 논의토록 지시한다. 아마도 청나라의 간섭[52] 때문에 책임을 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711년에 청에서 해구[53]의 준동이 있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군사와 도성 백성들을 동원하여 그 험하디 험한 북한산[54] 6개월 만에 성을 쌓아 올리고 행궁을 만든다.

이후에도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방비가 허술하다며 탕춘대성을 만들고, 크고 수비하기가 어렵다고 한 한양 성곽을 고치고,[55] 허술하고 멀다고 한 강화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김포문수산성을 축성했다.

또한 추가로 개풍군에 있는 대흥산성을 고쳐 쌓고, 평안도 남포황룡산성, 강화성, 경상북도 칠곡가산산성, 황해도 해주 수양산의 수양산성, 평안북도 염주의 용골산성, 충청북도 청주시상당산성을 증개축하고, 남한산성 행궁을 증축한다. 이래저래 성도 많이 짓고 북한산성 행궁남한산성 행궁에는 각각 행차하여 잠시 지내고 오는 등 재위 동안[56] 수도 방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때 만들어진 수도 방어 체계는 영조가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경리청을 폐지하고 정조장용영을 만드는 등 약간의 변화를 거치긴 하지만 고종 때까지 유지되었고 덕분에 이때의 산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손실된 내부 시설을 제외하고 대부분 잘 남아있다.

또 한꺼번에 무과 합격자를 1만 8천여명이나 뽑아서 국방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비변사 당상 중 구관당상을 제도화 한 8도구관당상제(八道勾管堂上制)를 도입하였다. 각 도에 1명의 구관 당상관이 임명되어 군무를 분담하여 그 도의 장계(狀啓)와 문부(文簿)를 처리한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삼번의 난이 터지자 예의주시하며 북벌을 준비하는 구절이 실록에 여러번 등장한다. 결국 흐지부지 하긴 했지만...

7. 가계

8. 정유독대와 최후

숙종의 건강이 악화되어 가는 와중에도 세자를 연잉군(영조)으로 바꾸려는 노론과 경종을 지키려는 소론이 끊임없이 싸웠다. 노론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자의 자리는 그대로였다.

다만 정작 숙종의 의중은 이미 은연중에 연잉군에게 넘어가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당시나 지금이나 주를 이룬다. 경종에게 후사가 없었고 그가 희빈 장씨의 친아들이라는 점도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숙종이 아무 말도 없이 죽었다면 왕위 문제가 한동안은 조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종은 기어코 분란의 씨앗을 남기고 만다. 이것이 바로 정유독대다.

죽음이 임박했을 무렵, 숙종은 노론의 대신인 이이명을 불러 독대를 한다. 조선 시대에 사관도 없이 왕과 신하가 만나는 것은 불법이었다. 더욱이 왕의 임종이 임박한 시점의 독대는 정치적으로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수 있는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독대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실록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후 이이명의 말과 행동, 노론이라는 그의 위치로 볼 때 세자 교체나 경종 즉위 후에라도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된다. 어쨌든 숙종의 정유독대라는 나비 효과는 경종 기간 끝 없는 정쟁의 씨앗을 제공했고 신임옥사(신축옥사와 임인옥사)로 이어져 결국 당사자 이이명을 죽게 만든다.

어쨌든 재위 46년째인 1720년 6월 8일 승하했다. 숙종은 역대 조선 왕 중 사망할 때의 모습이 자세하게 기록된 왕인데 사망할 무렵에는 앞도 거의 못 보고 복수, 배에 물이 차서 배가 불룩 나온 상태였다고 하며 사망하던 날에는 인원왕후와 세자, 연잉군, 신하들이 와서 울면서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고 가래 끓는 소리를 많이 냈다고 한다. 신하들과 연잉군이 서로 대화하던 사이 숨소리와 가래 끓는 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다가 갑자기 크게 토하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있는 명릉(明陵). 숙종과 2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가 나란히 묻혀 있는 쌍릉과 3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가 혼자 묻힌 능 1기가 오른쪽 위 언덕에 따로 떨어져 있다. 그리고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능은 명릉 내에 있지 않고 아예 따로 조성되었다. 서오릉 내에 있는 익릉(翼陵)이 그것. 숙종의 명릉은 서오릉의 능역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이다. 나머지 서오릉의 능들은 정자각 쪽에서만 구경할 수 있고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없다. 덤으로 이 명릉 택지와 관련해서 야사도 있다. 암행 나갔다가 숨은 명풍수를 만나서 얻은 자리라 한다.[57]

9. 영향과 평가

전체적으로 군주로서의 자의식과 책임감이 강해서 여러 업적을 남긴 뛰어난 군주였지만, 민생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나 효과를 보는데는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물론 이것도 "그 긴 재위 기간을 놀고만 있었다"라고 보기엔 실체화만 안되는 것이지, 이미 균역법의 근거가 되는 여러 조사들이 숙종 말년에 마련되고 있었다는 지적도 많다. 예를 들면 균역법이 "남자 1인당 포 2필"이었던 것을 1필로 줄인 것인데, 전국의 군포를 모두 포 2필로 통일한 것이 바로 숙종 때 이루어졌다.

또한 부왕 현종이 기껏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산당의 세력을 약화시켜 서인과 남인간의 붕당의 균형을 간신히 맞추어 놓은 것을 환국을 통해 다 무너뜨려 정국의 혼란을 초래했으며 말년에는 아예 대놓고 노론의 편을 들면서 결국 조선 후기 노론의 일당 독재를 초래한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환국으로 촉발시킨 조선의 합리적 정치 시스템 파괴 역시 영조, 정조 시대까지 지속돼 마침내 정조 대에 붕당 정치의 붕괴로 절정에 이르니, 그 결과는 세도정치로 이어진다. 또한 숙종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왕권 강화를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외척을 척결한 태종과는 다르게 외척에 많이 의지했다.[58]

이런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치세는 결국 영조, 정조 시대라는 조선 후기 중흥기의 기반이 되었던 만큼 제법 그 의의는 크다. 또한 숙종 무렵부터 조선이 여러 가지로 사회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해서 그런지 딱히 장희빈 이야기가 아니라도 사극에서 배경으로 많이 다뤄지곤 하는 시기가 바로 숙종 시기.

숙종은 예순살에 사망할 때까지 46년(정확히는 45년 10개월)[59]을 다스렸다. 이는 아들 영조의 재위 기간인 52년(51년 7개월)에 맞먹는 것이며, 조선 왕 중에 2번째로 재위 기간이 긴 인물이다. 즉 숙종과 영조 부자가 합쳐 조선 왕조 500년중 100년 가까이 재위했다.[60] 참고로 재위 기간이 40년 이상인 왕은 이들 외에는 둘뿐으로 선조가 41년(40년 8개월), 고종이 43년(43년 7개월)을 다스렸다. 이 점에서 영조, 정조보다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숙종 치세는 전란으로 감소한 조선의 국력이 거의 수습된 시대였고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했으며, 화폐 유통 경제가 정착되었고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시기라서 조선 경제사에서는 의미가 매우 큰 시대다.

10. 여러 이야기거리

  • 본격 관우 빠돌이였다. 숙종은 개인적으로도 관우가 보여준 충의로운 모습에 푹 빠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임진왜란 중에 들어왔지만 별 관심을 못받던 관우 신앙을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관우에 대한 제사를 국가 주관 제사로 격상시켰고 자신이 직접 제사에 참석해서 제삿상에 을 따르고 4번이나 절을 올릴 정도로[61] 열렬히 관우를 숭배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서종태가 항의했지만 무시했다고 한다.[62] 자세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찾아보시라.
  • 단 관우와 현실 정치는 별개로 봤다. 특히 이 시기 북쪽에서 많이들 들어온 중국 이민자들이 재조지은이나 상국 드립 치며 차이나 타운에서 자기들끼리 노는 건 용납하지 않아서 강제 부역이 가미된 동화 정책을 실시. 말 그대로 싹 정리해 버렸다. 조선 땅에서 살고 싶으면 세금을 내라는 것이 그의 지론.
  • 을지문덕에게 청천(淸川)이라는 호를 내리고 사우(祠宇)에 향사(享祠)하도록 지시하였다. 호를 받고 사우에 향사된 것은 이순신, 최윤덕, 이원익, 김덕함 등과 함께였으나 조선 이전의 시대의 인물은 을지문덕이 유일하다.
  • 이순신에게 높은 평가를 내렸는데, 사우에 현충(顯忠)이라 호를 내리고, 현충사의 제문을 직접 지었다.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 분으로 처음 보네. ㅡ 현충사 제문
  • 상술된 이순신의 사우에 현충이라는 호를 내림과 동시에 을지문덕, 최윤덕, 이원익, 김덕함 등을 아울러 사우에 향사하게 하고 청천이라는 호를 내렸다. 1707년(숙종 33년)의 일이었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 성종과 함께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조선 왕인데 함께 민담에서는 암행을 나가서 백성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꽤 멋진 임금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다. 서울 지역에서는 "숙종 시대는 태평성대였다"는 구비 설화가 상당히 많이 채록되어 있다. 이런 걸 보면 아무래도 백성들 사이의 이미지는 상당히 괜찮았던 모양이다. 백성들 입장에서야 신하들이 죽든 말든 왕비가 바뀌건 말건 기본적으로 별로 상관없는 문제이긴 하다. 하도 치세가 길기도 했고, 지역마다 이미지가 달랐을 수 있다.
  • 박시백은 만화 조선 왕조 실록에서 꽤 박한 평가를 내렸다. 전체적으로 역량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결과에 대해선 비판의 강도가 높은 식. 군강신약을 이루었다는 점과 민생, 군역 문제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 그러한 평가의 근거는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그의 치세를 대표하는 '환국'에 일관성이 없고 기준도 모호하였기에 정권 교체를 통한 개혁에 쓰여야 할 에너지를 정권 교체 자체와 그 뒷수습에 소모했다는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바뀌는가 하면, 정치 세력과 명분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흑백 논리에 빠지는 등. 심지어 모 상소는 '권력을 잡게 한 초기에는 무릎에라도 앉힐 듯 하시다가, 배척할 적엔 연못에 밀어버리듯 하십니다'라는 비난까지 하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는 왕 아래에서 신하들은 그저 몸을 수그린 채 눈치만 살필 수 밖에 없었고, 행여나 눈 밖에 나 숙청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비판 정신을 버렸으며[64] 생존을 위해 상대 붕당들에겐 더욱 가혹해져 허울뿐인 화합이 되고 말았다.
    • 또 하나는 그렇게 거듭된 환국과 숙청으로 근래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으면서도 한게 딱히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핵심에 다가서면 발을 빼기 일쑤였고(양반층 군포 징수에 일관되게 반대), 기득권층의 희생을 요구하기 위해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일에도 인색하였다[65]는 주장이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엔 그냥 저자의 조사가 부족해서 오류낸 거다. 숙종 대에는 궁방으로 하여금 해당 땅 주인에게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절수지를 획득하도록 한 금가 매토제와 절수지의 총량을 제한하는 을해정식이 제정, 시행되어 궁방전의 확대를 제한했다.[66] 양역변통이 사대부의 눈치보다 지지부진했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역시 틀렸다. 오히려 양영변통절목같은 절목들이 마련되어 영조 대 균역법의 기틀을 닦았다.[67]
  • 유일하게 남은 여동생 명안공주(明安公主)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68] 돌아가신 아바 마마 대신해서 결혼식을 성대히 챙겨준 것도 오빠 숙종이고, 그 이후로도 사신을 통해 예쁜 수입산 비단이 들어오면 이걸 곧잘 선물로 챙겨주었다고 한다. 또 공주가 자기 땅을 갖고 싶다고 하니 마침 원을 그리면서 하늘을 날던 솔개를 가리키며 '쟤가 그리는 원 아래 땅 다 네 꺼 해라'고 했다는 야사에서는 숙종의 남다른 동생 사랑 스케일을 엿볼 수 있다.[69] 그러나 불행하게도 명안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고, 결국 23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숙종을 상심케 했다. 이때 실록의 기록을 보면 숙종은 아직 염습도 못 해서 문상객 받을 준비가 안 된 공주의 집에 만사 다 제치고 달려가 한참 통곡했다고 하며, 너무 슬퍼서 고기 반찬도 못 먹겠다는 걸 궁인과 신료들이 겨우 뜯어말리기도 했다[70]. 이후 먼저 간 여동생에게 못해줬던 걸 매제에게라도 대신 베풀고 싶었던 것인지, 숙종은 홀로 남겨진 매제 오태주(吳泰周)를 곁에 두고 매우 아꼈다.[71] 오태주가 49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숙종은 그에게 직접 지은 글을 내리며 애도를 표했다. 지금도 명안공주 부부 묘에 가면 제문비에 새겨진 숙종의 글들[72]을 볼 수 있다.
  • 몸이 약하고 잔병치레가 잦아서 온갖 몸에 좋다는 약재들을 찾아 먹고는 하였다. 우황 문서 참조.
  • 한국에서는 여러 모로 영국 튜더 왕조헨리 8세와 닮은 점이 많다고 평가받는 왕이다. 비정하고 다혈질스러운 성격, 절대왕권을 바탕으로 한 통치, 변덕스런 숙청, 여성 편력과 이로 인한 자손들의 편애와 냉정함, 후계 다툼 등 군주로 보면 명군이나 가정사나 개인의 인격 등을 보면 긍정적인 측면은 없고 가장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숙종은 백제의 동성왕과도 닮은 점이 있다. 재미있게도 두 왕의 후계자들의 행보나 성격에도 닮은 점이 있어서 경종은 메리 1세의 위치에, 영조는 엘리자베스 1세의 위치에 매치되기도 한다.

10.1. 애묘가

고양이를 정성스럽게 키웠다는 기록이 있다. 고양이 한 마리를 금손(金孫)이라 이름붙여 손수 먹이를 먹이며 정사를 볼 때도 곁에 두고 쓰다듬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이는 네이버캐스트다음 웹툰 <탐묘인간>(85화 ~ 89화)[73] 역사 웹툰,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훗날 금손은 숙종이 훙서한 직후 먹이도 안 먹고 울고 다니다가 시름시름 앓더니 죽어서, 대왕 대비(인원왕후)의 명으로 명릉(숙종의 릉) 옆에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양이집사’-숙종의-퍼스트캣-‘김손’-스토리

이 기록은 실록에는[74] 없는데 국정에 관련이 없는 사소한 일이라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을 듯.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익이 숙종 때의 관료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숙종이 애묘가였던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기록으로도 교차검증이 되며, 그 가운데는 금손의 어미인 금덕(金德)을 위해 장례식(!)을 치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시까지 지었다고 한다. 빼도박도 못할 역대 한국사 최고위 애묘가가 맞을 것이다.(열성어제 수록.) 이 금덕 / 금손의 품종은 불명이나, 이름에 '금(金)'자가 들어간 것을 볼 때 '한국 고양이' 중 이른바 '치즈 태비'로 불리는 황색 종으로 추측하는 주장이 있다.

또한 조선 후기의 문인 김시민(金時敏[75], 1681년 ~ 1747년)의 문집인 동포집(東圃集)에도 금손이의 죽음을 추모한 시인 금묘가(金猫歌)가 전하고 있다.[76] 동포집을 보면 금묘가는 동포집 2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동포집 2권에는 김시민이 1715년에서 1721년 사이에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 시기는 숙종이 승하한 1720년과 딱 겹치는 시기이기 때문에 숙종이 고양이를 길렀다는 사실은 제법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을 보면 유독 고양이가 궁궐에서 깽판을 치는 기록이 숙종 실록 이후 영조 실록에까지 많이 나타난다. 궁궐에 고양이가 많기는 많았던 모양. 특히 영조는 팔에 통증이 오자 어의로부터 "고양이 생가죽이 팔 통증에 좋다고 하니까 시험해 보시옵소서"라는 처방을 들었는데 "내가 옛날부터 여러 고양이가 궁궐을 싸돌아다니는 걸 봐서 그런지 차마 못죽이겠다"라고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조의 발언으로 미뤄보면 숙종이 고양이를 길렀거나 기르지는 않았어도 최소한 애묘가였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애묘와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숙종 실록을 보면 유난히 기형 고양이에 대한 기록도 자주 나온다. 각각 숙종 4년, 9년, 10년 기록에 나타나는데 눈이 4개였다거나 머리가 2개였다거나 머리는 하나인데 몸통이 2개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기형 고양이에 대한 기록은 이전 왕들의 실록에도 보이지만 대개 한 번 정도 기록되었을 뿐이고 숙종 실록에 유난히 자주 나타난 편이다.

10.2. 지극한 자식 사랑

아들을 지극히 아끼기도 했다. 여섯 아들 중 겨우 살아서 성인이 된 세 아들 가운데 6남인 연령군 이훤을 가장 총애했다. 연령군이 5세 때 모친인 명빈 박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찾았다. 숙종은 이 어린 아들을 애처로워하며 조정 신료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 어느 아들들보다 연령군을 아껴서, 원래 6세 이후에 봉군(奉君)하는 예법을 무시하고 5살 때 군호를 내렸고 7세의 나이엔 종친부 당상관의 작위까지 내렸다.

게다가 1708년 연령군이 출가할 땐 직접 제택(第宅)[77] 구입에 수만냥을 들이려고했다. 이에 부제학 조태구 등이 1년전 연잉군의 제택을 마련한 돈이 수천냥이라 지적하며 반대하자 숙종은 할 수 없이 선조의 적녀(嫡女)[78]정명공주의 제택을 구입하여 하사하는데 그것도 연잉군이 구입하려 하는 것을 금한 것이었다[79] 더구나 이후 그 제택을 복구하는데 들인 비용도 중인 4가구에 해당하는 비용이었다고.

이후 연령군이 21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자 숙종은 오열을 하며 친히 제택(第宅)으로 찾아가려고 할 정도였으니, 가히 아들 영조의 딸 사랑에 견줄만 했다.

경종의 경우 완전 '스트레스 해소용'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숙종이 심하게 갈구는 경우가 많았으며, 영조에 대해서는 똑똑하다 공부 잘한다 이런 칭찬이 아니라 유난히도 몸 튼튼해서 오래 살겠구나 하는 칭찬이 잦았다.[80]

헌데 정작 숙종을 본받아(?) 아들을 경종 이상으로 심하게 갈궈댄건 다름아닌 영조였다. 참으로 씁쓸한 부전자전. 게다가 숙종이 아들인 경종을 갈군 것은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갈군 것에 비하면 약과였다.

그러나 이렇듯 극진한 애정은 연령군에게만 보였던 것은 아니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한 뒤에 바로 2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에는 신료들 앞에서도 매우 기뻐했다가, 나중에 그 아들이 100일을 갓 넘기고 죽었을 때에는 "내가 슬퍼서 마음을 진정할 수 없다" 라며 역시 신료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모후인 명성왕후가 언급한 것처럼 감정 기복이 매우 심하고 희로애락이 극단적인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11. 어진

숙종의 익선관본 추정 어진

일제강점기 당시 익선관본 어진이 원본 + 이모본 형태로 총 2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관리 실수로 인한 화재로 소실된 줄 알았지만... 사실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화재 당시 구출한 숙종으로 추정되는 어진 1본이 보관되고 있었다. 그러나 절반이 훼손된 탓에 용모 파악은 불가능하며 오른쪽 표제가 불타버린 탓에 해당 어진이 원본인지 이모본인지 조차도 알 수 없다. 이 어진의 경우 훼손이 심한 탓에 보존처리만 마치고 수장고에 계속 보관되어 있었고 2019년 하반기에야 공개되었다.

아래는 국립고궁박물관이 해당 어진을 숙종어진으로 추정하게 된 결론의 근거이다.

관모 부분은 소실되었지만 곤룡포를 입었기 때문에 익선관을 착용한 어진의 형식임을 알 수 있다. 바닥에 깔린 화문석은 조선시대 어진 제작 연대의 지표가 되는 것으로 처음에는 태조와 세조의 어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화문석이 아닌 채전을 그렸다. 채전이 화문석으로 바뀌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숙종대부터이다. 화문석의 용문양을 순조어진(1830년 도사)과 철종어진(1861년 도사)을 통해 분석해 보면 후대로 갈수록 용문양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묘사, 채색이 정교해지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와 비교해 보면 이 어진의 크고 거친 용문양은 순조어진보다 더 앞선 시기로 볼 수 있다. 화문석을 그려 넣은 순조 이전의 어진으로는 숙종, 영조, 정조 어진이 있으며 이 중 익선관본은 숙종과 영조의 어진이다. 곤룡포에 나타나는 양식은 18세기 초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이 어진이 숙종의 어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궁중서화Ⅱ_소장품도록 제14책, 2019년, 국립고궁박물관, 44쪽

열성 어진에서도 숙종의 간략하게 그려진 초상화를 볼 수 있다.

열성 어진에 실린 숙종 초상화

12. 사극

12.1. 영화

12.2. 드라마

그저 장옥정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바지사장스러운 임금으로 묘사되다가 숙빈 최씨가 장희빈보다 더 예뻐서 장희빈을 버리고 숙빈 최씨를 선택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역대 숙종 중 가장 카리스마 있던 숙종을 꼽자면 단연 KBS 2TV 장희빈의 전광렬. 정말 카리스마 있고 불같은 성품이지만 실은 냉혹한 정치가였던 숙종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나마 이 숙종이 역사의 숙종과 가장 비슷한 드라마 속 숙종이라 할 수 있다. 무예를 연마하며 칼을 휘두른다든지... 그러나 중반 이후부터는 기존 사극의 이미지로 되돌아갔다.
지진희가 연기한 드라마 동이에서는 시청자들이 깨방정 혹은 허당으로 부르며, 대부분의 사극에 나오는 진중하고 고풍스러운 임금님이 아닌 유쾌하고 천진난만한 그렇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이른바 신세대 임금님으로 나왔다. (나는 이렇게 뛰어 본 적이 없다. 나는 담을 넘어본 적이 없다.)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왕이 뛰어다니거나 담 넘을 이유가 없으니까.궁궐에서 빠져나와 암행하는게 취미 생활. 하지만 역적의 딸로 몰려 출궁당하게 된 동이를 끌어안고 너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임금 자리도 포기하겠다고 하는 장면에서는, 사랑하는 여자라도 왕권을 위해 이용하고 버렸던 실제 역사 속 숙종의 모습과의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드라마만 놓고 보면 괜찮은 주인공이지만, 노회한 정치인 송시열을 15살 때 귀양 크리 태우고 29살 때 사약을 내려 보내버린 역사 속의 냉혹한 카리스마 군주와는 거리가 멀다.[81] 일본판 성우는 이노우에 노리히로.동이 다음으로 이병훈 pd의 사극이자 강한별이 연기한 드라마 마의(드라마)에서는 현종의 외동 아들로 극중에서 얼굴에 종기가 생겨 사투를 벌이고, 백광현의 외과술을 받고 무사히 목숨을 건졌다라고 나오지만 그게 전부다.
2013년 방영한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유아인이 캐스팅 되었다. 희빈 장씨 역은 김태희. 숙종 쪽이 연하라는 것을 반영한 것 같다. 특유의 목소리와 섬세한 연기에 시청자들의 호평이 줄을 잇고 있는 상태. 사실상 드라마를 떠받치는 기둥.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전의 냉철하고 정치적인 숙종의 모습은 사라지고 패악을 부리는 장옥정도 용인하는 등 갈수록 캐릭터 자체가 붕괴하고야 말았다. 일개 후궁이 대전에 난입하는데도 좋다고 지켜보는 꼴을 보면 혼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듯.
201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대중들 사이에서 숙종이 재조명 되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애묘가의 모습이고 하나는 성질머리로 대표되는 불같은 성격과 냉철한 정치가의 모습이다. 때맞춰 숙종때의 드라마가 방영이 되는데 그게 바로 "대박"
"대박" 에서의 숙종은 그전에 묘사됐던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실록상 기록된 모습과 가장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해당 배역을 맡은 최민수의 노력 덕분이다. 기사
얄궂게도 7대 숙종인 전광렬이 이인좌 역으로 등장한다. 이색적이게도, 폐병에 의한 고통 때문에 아편을 복용하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배우 특유의 카리스마와 재해석이 잘 어울려 기존의 숙종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표현해 내었다는 평이 있다. 드라마의 묘사는 말수가 적은 편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정곡을 찌르는 말 한마디, 특유의 행동과 분위기 덕분에 그의 앞에 서는 모든 이들의 숨을 죽이게 만든다. 성질을 안부리는 것은 또 아니라서 초반에 숙빈 최씨를 음모를 꾸며 제거하려 했던 장희빈의 머리채를 냅다 잡아[82]내동댕이 쳐버리는 모습도 보여준다. 패왕 숙종 패왕 숙종 2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왕이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에 대한 고증도 잘 지켜졌다. 사극들을 보면 '과인'이 남발되는 경향이 있는데 과인은 왕이 스스로 자신의 과실을 인정할 때 등 스스로를 낮추는 경우에 한정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평소에는 평범하게 '나'라는 표현을 썼던 것으로 보이며, 실록 상에는 '여(余)'라고 쓰여있다. 그러니 스스로를 '나'로 지칭하는 극의 숙종은 고증이 잘 된 셈.

13. 관련 문서


  1. [1] 숙종은 실록에 사망한 시간이 진정(辰正) 2각(二刻)이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옛 시각으로 '진정시(辰正時)'는 약 오전 8시 30분에서 오전 9시 29분 사이를 일컫고, '1각(刻)'은 약 15분을 의미한다. 즉, 숙종의 사망 시간은 오전 9시 무렵이다.
  2. [2] 바꾼 까닭이 불 화(火)자가 변으로 들어간 글자를 넣어 지어 광이 되었는데 신하들이 수양제와 이름이 똑같다고 건의하여 다시 불 화(火)자가 들어간 글자를 찾다가 순으로 지었다. 물론 수양제의 휘와 숙종의 휘는 다른 한자를 사용한다. 한국어 발음이 같기에 바꾸자고 한 것 뿐이다.
  3. [3] 할아버지 효종이 붙여준 아명으로, 명성왕후의 침실에 뭔가가 이불에 덮여 있는 것을 열었더니 용이 나왔다는 태몽을 꾸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숙종이 태어나기 전에 미리 붙여놓은 아명이라 태명이기도 한 셈.
  4. [4] 현대어로 풀이하자면, "사람이 지혜를 기르려면 배워야 한다. 좋은 글솜씨를 갖기 위해서는 노력(절차탁마)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책의 내용을 잘 이해하려면 스승님을 자주 찾아뵈어 여쭤봐라."
  5. [5] 그냥 조선 왕실의 맏아들이면 피하기 힘든 팔자(그냥 장남은 현왕의 소생에 장남이고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으면 왕이 될 운명)였다. 이 징크스는 적장자와 서장자를 가리지 않았다. 조선 왕실에서 왕위에 오른 장남은 숙종을 제외하면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경종, 현종, 헌종, 순종 이 8명뿐이다. 하지만 문종과 인종은 모두 병으로 왕위에 오른지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났고, 연산군과 단종은 각각 반정정난으로 폐위당했다. 현종은 재위기간 내내 아버지 효종의 왕위 정통성 문제인 예송논쟁에 휘말렸고, 헌종도 그리 오래 장수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순종은 庚戌國恥로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다른 필요 없을 정도.
  6. [6]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
  7. [7] 신하들이 섭정에 찬성하는 데는 왕의 능력을 못 미더워 하는 것도 있기 때문. 즉위하자마자 하는 소리가 "송시열이 잘못했다"였다.
  8. [8] 아이러니하게도 철종을 마지막으로 효종의 직계 혈통이 단절된 후에는 인평대군의 후손인 고종순종이 효종계 직계 혈통에 입적되어 차례대로 즉위했다.
  9. [9] 근데 숙종이 설령 3~6살 정도에 즉위했더라도 어머니 명성왕후가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10. [10] 다만 헌종은 워낙 어린 나이(고작 8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단명하긴 했어도 재위 기간은 길다. 세도정치 때문에 제대로 왕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서 그렇지. 반대로 문종은 재위 기간은 짧은데 아버지 세종의 말년부터 대리청정으로 실권을 쥐어서 통치 기간은 그리 짧진 않다.
  11. [11] 문종이 태어날 때의 세자는 양녕대군으로, 문종은 왕의 삼남의 적장자로 태어난 것 뿐이다.
  12. [12] 원손 - 세손 - 세자 - 왕 - 상왕을 모두 거친데다 정통성도 완벽한 유일한 왕이다.
  13. [13] 게다가 효장세자사도세자나 둘 다 영조의 서자다. 영조의 적자가 없어서 문제가 안 됐을 뿐이다.
  14. [14] 이 성질머리는 아들내미손자, 증손자까지 제대로 물려받았다. 허약한데다 지지 기반도 약해서 늘 조심해야 했던 맏아들도 드물지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성깔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있다. 특히 아들내미와는 오래 장수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15. [15] 본관은 청풍이고, 이 왕비의 할아버지는 대동법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명재상 김육이다.
  16. [16]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투기를 하지 않는 것이 왕비의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승은을 입었으면서도 특별 상궁이나 후궁의 첩지를 받지 못한 궁녀들에게 첩지를 내리자고 자주 간청했고 그런 일의 연장선상에서 명성왕후에 의해 쫓겨났던 희빈 장씨도 다시 입궁시키자고 간청했다. 결국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 특별 간택령을 내려 부르는 형식으로 희빈 장씨가 다시 궁궐에 돌아오게 된다. 연령군의 생모인 명빈 박씨도 이때 특별 상궁으로 승차했다. 야사에 전하기로는 숙종의 부친인 현종에겐 후궁이 단 1명도 없었다 보니 명성왕후 자체가 아들의 첩질을 허용하기 힘들어했다고도 한다.
  17. [17] 紅袖之變. 효종의 동생 인평 대군의 아들들이자 숙종의 당숙에 해당하는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 형제가 내시와 나인들을 심복으로 만들었다거나 심지어 이 나인들과 간통해 아이까지 낳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은 사건이다. 홍수(紅袖)는 직역하면 '붉은 소매'지만 나인들이 붉은 끝동 저고리를 입었기 떄문에 '나인'을 뜻하기도 한다. 이 사건을 쉽게 말하면 종친과 궁녀 사이에 섹스 스캔들이 났다고 보면 된다. 단, 실제로 이렇다 할 증거는 없었다.
  18. [18] 인선왕후는 아들인 현종처럼 무척 인자한 성격이었고 그래서인지 며느리 명성왕후와 달리 시어머니었던 자의대비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시아버지 인조의 후궁 조 귀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왕이 후궁을 이용해 왕권을 마구잡이로 휘둘를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만약 오래 살아 숙종이 장희빈인현왕후를 이용해 환국을 펼치며 마구잡이로 왕권을 휘두르는 행태를 봤으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19. [19] 본래 숭선군은 서인 집안과도 혼례를 맺었지만 김자점 일파와의 친분으로 인해서 서인들에게 탄핵을 받자 남인 편으로 돌아선 듯하다.
  20. [20] 다만 조사석은 서인이었지만 장희빈의 편을 들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사환국 이후 장희빈에게 토사구팽 당하면서 귀양을 가게 된다.
  21. [21] 다만 이 때는 피바람이 한 번 뿐이었지만 숙종 때는 피바람이 계속 몰아쳤다. 게다가 선조 때는 정여립의 옥사로 동인들이 많이 숙청되었어도 동인은 야당으로서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균형과 견제가 나름대로 이루어졌지만, 숙종 때 환국 이후로는 야당이 별로 힘을 못 썼다. 게다가 선조 때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한 지 2년 만에 다시 동인 정권이 들어섰지만 서인은 정권만 내놨지, 보복은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숙종 때 환국이 일어날 때는 보복성 숙청이 많이 일어났다. 보복성 숙청의 시작은 다름 아닌 기사환국이었다.
  22. [22] 사실 현종 15년(1674년) 갑인환국 이후 남인이 집권한 일의 연장선상에 있다.
  23. [23] 다만 이 때까지는 좀 붕당 간에 적절한 견제와 균형이 잘 이루어졌다. 그리고 피바람도 없었다.
  24. [24] 그래도 기사환국 이전까지는 약간이나마 붕당의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졌고, 서인과 남인이 원수지간으로 변했을지라도, 아직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은 아니었다.
  25. [25] 이 때를 기점으로 서인과 남인은 그냥 원수지간 정도를 넘어서서 서로 피튀기는 싸움을 하는 사이로 변질되었고,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말았다.
  26. [26] 이 때를 기점으로 당쟁은 사생결단 식으로 격화되었다.
  27. [27] 이것으로 이후 남인은 다시는 제1당으로 올라서지 못했다. 크게보면 동인에 대한 서인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28. [28] 이것으로 남인은 몰락을 넘어서서 재기불능 상태로 전락했다.
  29. [29] 신사의 옥으로 인해서 당쟁은 사생결단 식으로 더욱 격화되었는데 그래도 신사의 옥 이전까지는 겉으로나마 유지되던 붕당의 균형이었지만, 신사의 옥 이후로는 붕당 균형이 완전히 파괴되기에 이른다.
  30. [30] 특히 이 사건을 기점으로 노론은 완전히 좌의정과 우의정 자리를 모두 완벽하게 장악했고, 이미 육조의 판서 자리도 완벽히 장악했다. 이미 무고의 옥 이전인 재위 22년인 1696년부터 노론이 정승 자리를 차지했는데, 이 사건으로 좌의정과 우의정은 노론 세력에 완벽히 넘어간다.
  31. [31] 결국 재위36년인 1710년에는 영의정마저 노론이 다시 가져가 버린다.
  32. [32] 다만 병신처분 이전까지는 소론도 같이 등용했다.
  33. [33] 해외파 중에서는 관우였고 조선의 인물 중 충의 상징으로 내세운 인물은 사육신이다. 남효온의 육신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부터 선비들 사이에 사육신과 단종에 대한 복권론이 있긴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하던 것을 실행에 옮기고 강조한 이가 숙종이다. 이후로 사육신의 사적을 복원하는 사업도 착착 진행된다. 사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는 사육신의 시조는 모두 원래 원작자 미상으로 전해오던 것을 숙종 ~ 정조 시기를 거치면서 사육신의 것으로 '비정'된 것이다.
  34. [34] '신임사화'라고도 하나, '사화'란 사림이 화를 당한다는 의미이므로, 사림 : 훈구의 대결이 종식된 이후에 사화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35. [35] 후대에 당쟁이 가장 격화된 시기를 숙종의 시기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말이다.
  36. [36] 종묘에 고한 일을 뒤집으려했을 정도로 날뛰었다.
  37. [37] 당시 국문이면 뭐 고문 받고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 게다가 송시열은 당시 80넘은 노인이었으니 그야말로 고문받다 죽는 것은 자명한 일...
  38. [38] 원래 유교 사상으로 볼 때 상중에는 부인과 동침도 안 해야 한다. 예학이 교조화된 조선 후반기엔 시부 상중에 임신한 부인이 자살하는 일까지 나온다.
  39. [39] 고종의 비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며느리인 어떤 분과는 다른 인물이다.
  40. [40] 반면 노신 표연말을 가차없이 패대기친 연산군 같은 왕도 있다.
  41. [41] 참고로 1678년 당시는 베트남후 레 왕조(黎朝, 여씨왕조) 시기였고, 당시 안남왕은 희종이었다.
  42. [42] 근데 뭐 사실 이는 요식 절차에 가까워 보인다. 이미 사회 전반적으로 이들에 대한 동정론이 당시부터 지금까지 있었기 때문.
  43. [43] '사실상'인 이유는 회안대군과 그의 가족들은 권세를 잃고 귀양 가는 선에서 그쳤기 때문. 대신 박포가 죄를 다 뒤집어 쓰고 처형돼 오랫동안 2차 왕자의 난이 박포의 난으로 불렸다. 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안대군의 아들 이맹종은 위험 분자로 인식돼 결국 세종 때 자결을 명 받아 자결하게 된다.
  44. [44] 인조 때 그나마 군역과 세금을 면제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복권된건 아니었다.
  45. [45] 이게 왜 대단하냐면 민회빈 강씨와 악연이 있는건 효종 즉 자신의 할아버지이기 때문.
  46. [46] 그런 목적으로 단종의 충신들도 모두 복권되었다. 사실 사육신은 야사 논외로 치고 보면 정말 (조선 왕들이 좋아할만한)충신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사육신이나 김종서, 황보인 등은 그렇다쳐도 일개 무당까지 복권해서 위패를 배식단에 올려주는 후대 왕들의 행적을 보면 그 목적이 아주 노골적으로 보인다.
  47. [47] 역시 정통성에서 문제가 적었던 현종은 이러한 사안에서 무신경했는데 이는 아들인 숙종의 입지가 매우 탄탄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숙종은 정실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였고 후계자인 경종은 어머니 장희빈이 사사당한 약점, 경종 이후 왕이 되는 영조는 어머니 출신이 한미한 무수리로 죽은 남편이 있다는 소문과 함께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는 거짓 소문(영조는 숙빈 최씨의 둘째 아들이기에 숙종의 자식인 점은 확실하다.)이 떠도는 등 후계자가 되는 두 왕자 모두 정통성에 크나큰 결함이 있었기에 이러한 작업 특히 단종과 그 충신들의 복권은 후계를 생각한 작업이라 추정할 수 있다.
  48. [48] 반대로 왕권이 강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를 반대 의견을 찍어누를 수 있을 정도의 왕권쯤은 있어야 복권도 할테니까 물론 설사 왕권이 허약했더라도 여론의 뒷받침이 있다면 복권쯤은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49. [49] 흥선대원군경복궁 중건을 하면서, 처음 경복궁 등 한양 도성을 기획하고 궁궐 내 각종 전각의 이름을 붙인 정도전의 업적을 인정해 그를 복권시켰다.
  50. [50] 인조 6년에 반정을 계획했다가 잡혔는데 놀랍게도 광해군과도 접촉하였으며 광해군의 친필 편지도 있었다. 때문일까 광해군은 사건의 실패를 접하자 한동안 밥도 먹는둥 마는둥 하며 서럽게 울었다고.
  51. [51] 참고로 이완용이 건의하고 주도했다.
  52. [52] 조선은 호란의 패배로 인해 전쟁 준비가 금지되어 있었다. 산성의 축성과 수리는 청나라 사신이 꼬투리 잡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문제였다. 자세한 것은 병자호란 참고.
  53. [53] 실록에 해구로 적혀있는데 왜구로 보거나. 이양선으로 보기도 한다.
  54. [54] 봉우리를 이어 성을 쌓았기 때문에 성벽을 따라 돌면 북한산 봉우리를 전부 돌아볼 수 있다. 이런 험한 산지에 성을 쌓고 보초가 기거하는 성랑을 만든 고생은 답이 없을 수준이다. 오늘날 성곽을 복원하는데 있어 헬기가 돌을 실어 나르는데 이를 등짐으로 일일히 올렸다고 생각하면 그 고생이 짐작될 것이다.
  55. [55] 여담이지만, 숙종 시대에 축성된 부분은 돌들이 하나같이 크고 아름답다. 기본 가로세로 2(60cm)인 돌들이 한몸처럼 꽉꽉 짜맞춰져 있으니, 조선 전기에 축성된 부분이 짱돌처럼 보일 정도.
  56. [56] 재위 기간도 긴편이었다.
  57. [57] 야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숙종이 암행을 나갔다가 어떤 청년이 딱 봐도 안 좋아보이는 물가에 부모의 묘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물어보니 어떤 풍수가가 그렇게 하라고 알려주었다고 했다. 이에 숙종은 풍수가가 돌팔이라서 그랬을 거라 생각하고는 청년에게 거금을 하사하고 관가에게 말해서 명당 자리로 이장하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풍수가가 살고 있던 초막으로 찾아가서 화를 내면서 따지니까 풍수가 역시 화를 내며, "그 곳은 거금을 받은 뒤 명당 자리로 이장하게 되는 명당 자리다"라고 자부했다. 이에 놀란 숙종은 자신의 풍수 실력에 그렇게나 자신이 있으면 왜 이런 허름한 초막에 살고 있냐고 묻자, 풍수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풍수를 이용해선 안 되며, 그래도 이 자리는 언젠가 왕이 찾아오는 자리라고 말했다. 숙종이 그러면 언제 왕이 찾아오는 거냐고 묻자 풍수가는 날짜를 계산해보다가 오늘이 바로 왕이 찾아오는 날이라는 걸 알고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왕이라는 걸 깨닫고 넙죽 엎드려 절했다. 숙종은 그의 실력에 탄복해서 거금을 주겠으니 자신의 묫자리를 봐줄 것을 부탁했고, 풍수가는 천하의 명당 자리를 알려주었으나 사례는 끝까지 받지 않은 채 떠났는데 그곳이 바로 명릉이라는 이야기.
  58. [58] 숙종은 김수항, 김수흥, 민유중, 민정중, 민시중, 김만기, 김만중, 김익훈, 김석주, 조사석, 정치화, 정지화, 정재숭, 오두인, 민진후, 민진원, 조태채, 민진장, 민진주, 조태구, 조태억 등의 외척들을 중용했다.
  59. [59] 그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고려 시대의 왕 고종 역시 정확히 45년 10개월이나 왕위에 있었다.
  60. [60] 비슷한 시기 청나라 강희제(61년)와 건륭제(60년)가 121년 재위한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숙종과 영조는 부자지간이지만 강희제와 건륭제는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이다.
  61. [61] 이 때 숙종이 '선조 대왕도 임진왜란 후에 사배(四拜)를 드렸다'란 전례를 근거로 들었는데, 선조는 명이 구원병을 보내준 상황에서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던 데 반해 숙종은 진심으로 '관공 하악하악'이란 마음가짐이었다.
  62. [62] 신하들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을 일인데 중국 인물인 관우를 굳이 숭배할 필요성도 없고 무엇보다도 숙종은 신하들에게 관우다움을 요구했지만 숙종은 유비같은 군주는 아니었다. 이러니 신하들 입장에서는 내로남불에 가깝다.
  63. [63] 얼핏 보면 웃기는 말이지만, 땅의 넓이가 아닌 국력의 관점에서 보면 의외로 일리가 있는 생각이다. 고구려의 만주는 척박한 땅이여서 크기에 비해 별가치가 없었고(고구려가 남하한 이유가 다 있는 법이다) 조선은 백제+신라의 땅에 고구려의 주요 곡창지대였던 대동강 유역까지 차지한 국가였다. 고구려의 권역을 정확히 알지 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만주의 가치를 낮게 생각하면 고구려의 최대 권역은 만주+대동강+한강 유역 정도인데, 숙종은 이런 관점을 취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64. [64] 특히 인현왕후의 폐위는 정말 생억지에 가까울정도로 정당성이 없었기 때문에 남인들까지 반대했을 정도였다. 하다못해 인성 문제로 후대에 까이고 후궁을 더 예뻐한 선조도 정실인 의인왕후가 40이 넘어도 자식을 못낳는데도 내치지 않았으며, 인조도 후비인 장렬왕후를 홀대할지언정 내쫓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신하된(당연한) 도리로 반대한 사람들을 자신의 말에 거역한다는 이유로 싸그리 귀양or사형과 고문을 일삼았으니 바른 말을 해야할 신하는 숙종 대에 남을래야 남을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왕권을 강화한다는 명목하에 외척이란 이유로 자기 처기와 무고한 심온을 죽인 태종도 바른 말 하는 신하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역할을 하는 대간의 역할을 위축시키려는 대신들의 제안을 거절했을 정도
  65. [65] 폐단이 더할나위 없이 크던 왕족의 토지 사유 등을 방치
  66. [66] 을해정식으로 황무지를 개간해서 땅을 무한정 늘리는 '절수'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고 이제 각 궁방은 매입을 통해 토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아울러 민결면세제(民結免稅制)가 시행되어, 궁방은 소유권과 무관한 민전에 호조수세분(戶曹收稅分)만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절수지의 규모를 대략 200결 단위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여 궁방전의 확대와 이후 궁방재정 통제의 근거로 삼고자 했다.
  67. [67] 여말 선초와 같은 대격변기가 아닌 이상, 특히 조선 시대와 같은 보수적 유교 사회에서 세법같이 민감한 주제의 개혁은 임금 하나가 마음먹는다고 뚝딱 해치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대동법이 실시되기까지 광해군 - 인조 - 효종 - 현종까지 100년 동안 엄청난 수의 논의와 다양한 중간 조치들이 있었음을 떠올려 보자. 영조 시절 균역법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도 숙종 시대의 여러 조치들이 기반이 되었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68. [68] 원래 숙종의 형제 자매로는 누나인 명선공주(明善公主)와, 명안 공주보다 언니였던 첫째 여동생 명혜공주(明惠公主)도 있었지만 그가 세자였을 시절에 모두 죽고 말았다. 두 공주는 같은 해 4개월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정확한 사인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비슷한 시기 궁에 돌림병이 들어온 탓에 이어(왕가가 거처하는 궁을 옮기는 것)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공주들은 전염병으로 사망한 듯 하다. 게다가 이듬해에는 아버지 현종까지 승하하고 말았으니, 어린 숙종에겐 어머니 명성왕후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명안공주가 보통 존재는 아니였을 것이다.
  69. [69] 숙종의 여동생 사랑의 대표적인 피해자가 도화서인데, 명안 공주에게 중부 견평방의 땅을 주는데 하필이면 그땅에 도화서 청사가 있었다... 그로인해 도화서는 태평방에 다시 청사를 잡기까지 타 관청 전전하면서 그림을 그려야했다. 문제는 10년에 한번 어진 그리는 등의 새로운 제도를 숙종이 만들었고, 당대 유행하던 초상화로 인해 도화서의 일이 늘어나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70. [70] 세종 대왕 역시 세자 시절 큰아버지였던 정종이 세상을 떠나 애도 중일 때 너무나 적게 먹은 나머지 신하들이 다 걱정할 정도였고 특히 그 좋아하던 고기 반찬도 먹지 않아 애간장을 태우게 했다. 이후 어머니였던 원경왕후가 타계해서 상중 일때도 아버지였던 태종이 세자에게 고기를 허락했고, 심지어 자기가 죽어 애도 기간을 지킬때도 세종만큼은 고기를 먹을수 있도록 하라며 지시를 내렸다. 이런 태종의 조치는 후대의 모범이 되어서 '상중이라도 몸 약해질 정도로 하지는 말자' 가 은연중에 원칙으로 자리잡는다.
  71. [71] 해창위 오태주는 글 솜씨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고, 스스로도 시 쓰는 취미를 즐겼던 숙종은 그와 자주 시를 주고받곤 했다. 또 이 시기 왕실에서 쓰던 문서 중에도 숙종이 오태주를 시켜 지은 것이 꽤 많았다고. 그런데 오태주의 부친이자 명안공주의 시아버지인 오두인은 인현왕후 폐위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지독한 국문을 받는다. 결국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유배 가는 길에 사망했다.
  72. [72] 내용이 궁금하다면 이 링크를 참고할 것. 뒷면 명안공주의 어제치제문에서 당시 숙종의 절망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다.
  73. [73] 현재 유료화
  74. [74] 승정원일기 영조 부분에서는 이름 金孫과 숙종이 총애했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승정원일기 영조 원년 11월 9일자 상소에는 "선왕께서 고양이를 대하고 우 임금이 어질어 죄인을 보고 울었던 일을 본받아 금손(金孫)이라 이름을 내리셨으니, 덕이 금수에 미치도록 힘쓴 것"이라는 글이 있다.
  75. [75] 임진왜란진주 대첩의 명장 충무공 김시민과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 물론 이 김시민은 충무공 김시민보다 훨씬 후대 사람이다.
  76. [76]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에서 금묘가로 검색하면 볼 수 있는데, 아직 고전 번역원에서 공식 번역이 되어 있지는 않은 상태. 숙종과 금손이 이야기를 다룬 탐묘인간 웹툰에서 번역본을 볼 수 있다.
  77. [77] 살림집과 정자.
  78. [78] 정실 부인이 낳은 딸.
  79. [79] 근데 실록에는 연잉군의 가례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연잉군에게도 들인 비용이 많았다는 당시의 견해가 있었으니, 연령군에게 들인 비용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80. [80] 실제로도 조선 왕들 중에서는 제일 오래 살았으니 그의 말대로 되었다.
  81. [81] 사실 동이(드라마)에는 송시열이 등장하지도 않았다. 이 사극에서 숙종 당대의 실제 신료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극중 조정 대신들의 모델이 되는 인물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우의정 오태석(정동환 분)은 남인의 영수이자 우의정을 지냈고 갑술환국으로 숙청되는 민암이 모델.
  82. [82] 머리채를 잡는 건 대본에는 없었던 최민수의 애드리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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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20-04-21 01:2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