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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31230 0%, #0F0D30 20%, #0F0D30 80%, #131230)"


    미합중국 대통령}}}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7F7F7 0%, #FFFFFF 20%, #FFFFFF 80%, #F7F7F7)"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0px solid; margin:-11px; margin-top:-8px; margin-bottom:-6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앤드루 잭슨

    마틴 밴 뷰런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윌리엄 해리슨

    존 타일러

    제임스 포크

    재커리 테일러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밀러드 필모어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에이브러햄 링컨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러더퍼드 B. 헤이스

    제임스 가필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체스터 A. 아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벤저민 해리슨

    그로버 클리블랜드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우드로 윌슨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제45대

    도널드 트럼프

    ※ 22.24대 미합중국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한차례 건너뛰고 연임한 사례의 대통령이다.

    }}} }}}}}}||

    <span style="text-shadow: 0 0 10px #ffffff; color: #fede58;">Congressional Gold Medal
    <span style="text-shadow: 0 0 10px #ffffff; color: #fede58;">의회 명예 황금 훈장</span>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마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우즈 2세
    대위 에드워드 맥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톤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컵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즈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의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던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데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우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자레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란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콤

    중위 데이빗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사무엘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대령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즈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들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스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코한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란시스 퀸

    윌리엄 시노트

    1942년

    1945년

    1946년

    롤랜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멤버들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미합중국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들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마스 안소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미합중국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C.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호레이쇼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마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나탄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렌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테오도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먼로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 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쉘튼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로시 하이트 박사

    조셉 디레인 [br[ 해리 & 엘리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14대 달라이 라마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산수지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브룩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서비스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100연대 보병 대대
    442 연대 전투단
    군사 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대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으로 사망한 남녀들

    라울 발렌베리

    애디 매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롤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들

    미국의 공군 에이스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들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들

    OSS

    2017년

    밥 돌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470%, #00004720%, #00004780%, #000047)"


    스미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2014년 스미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다.
    미국 역사를 총망라해서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개척자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헨리 허드슨

    아메리고 베스푸치

    존 스미스

    조반니 다 베라차노

    존 뮤어

    메리 웨더 루이스
    윌리엄 클라크

    새커거위아

    키트 카슨

    존 웨슬리 파월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로버트 E. 리

    토마스 페인

    존 브라운

    프레드릭 더글러스

    수전 B. 앤서니

    W. E. B. 두 보이스

    테쿰세

    타탕카 이오타케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율리시스 S. 그랜트

    우드로 윌슨

    에이브러햄 링컨

    제임스 매디슨

    앤드루 잭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힐러리 클린턴

    마사 워싱턴

    오프라 윈프리

    헬렌 켈러

    소저너 트루스

    제인 애덤스

    이디스 워튼

    베티 데이비스

    사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제시 제임스

    존 윌크스 부스

    알 카포네

    빌리 더 키드

    윌리엄 M. 트위드

    찰스 맨슨

    와일드 빌 히콕

    리 하비 오즈월드

    러키 루치아노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앤디 워홀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잭슨 폴록

    존 제임스 오듀본

    조지아 오키프

    토머스 에이킨스

    토마스 내스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안셀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주니어

    윌리엄 펜

    브리검 영

    로저 윌리엄스

    앤 허치슨

    조너선 에드워즈

    L. 론 허버드

    엘런 화이트

    코튼 매더

    매리 베이커 에디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엘비스 프레슬리

    마돈나

    밥 딜런

    마이클 잭슨

    찰리 채플린

    지미 헨드릭스

    마릴린 먼로

    프랭크 시나트라

    루이 암스트롱

    메리 픽포드

    제국-건설자들

    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

    존 데이비슨 록펠러

    존 피어폰트 모건

    월트 디즈니

    토머스 에디슨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하워드 휴즈

    빌 게이츠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

    스티브 잡스

    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

    제임스 네이스미스

    아놀드 슈워제네거

    타이 콥

    마이클 조던

    헐크 호건

    짐 도프

    세크리테어리엇

    빌리 진 킹

    출처

    }}}

    미국의 제18대 대통령

    이름

    Ulysses Grant
    율리시스 그랜트

    본명

    Ulysses Simpson Grant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출생

    1822년 4월 27일, 미국 오하이오 주 포인트플레센트

    사망

    1885년 7월 23일 (향년 63년 87일), 미국 뉴욕 주 윌튼

    국적

    미국

    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졸업) (1839-1943년)

    정당

    [[공화당(미국)|{{{#!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0000; font-size: .8em"

    공화당}}}]]

    직업

    정치인, 군인

    주요직책

    미국 제18대 대통령 (1869년 3월 4일1877년 3월 4일)

    배우자

    줄리아 그랜트 (1848년 결혼)

    신체

    175cm

    종교

    개신교(감리회)

    서명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군인 시절
    2.3. 대통령 그랜트
    2.4. 전직 대통령 그랜트
    3. 우직한 전략가 그랜트 - 남북전쟁 시기 그랜트의 행보
    4. 여담
    5. 매체에서

    1. 개요

    Although a soldier by profession, I have never felt any sort of fondness for war. And I have never advocated it, except as a means of peace.

    나는 군인이 직업이었지만, 전쟁에 어떠한 호감도 가진 적이 없다. 그리고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닌 전쟁을 옹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국군인이자 대통령.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북부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남부의 총사령관인 로버트 E. 리와도 자주 비교된다. 하지만 장군으로의 명성에 비해 대통령으로의 명성은 초라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유년기

    오하이오에서 가죽 가공업자인 제시 그랜트와 농장주 집안 출신인 한나 심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말수가 적고 혼자 노는 걸 좋아할 정도로 내성적이었지만 말을 잘 다루었다. 본명은 침례회에서 받은 세례명을 붙인 하이럼 율리시스(Hiram Ulysses)이다.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는데 사관학교]] 입학을 위해 추천서를 받은 지역 연방 상원의원이 추천서에 이름을 율리시스 심슨으로 잘못 기재한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기재된ㅍ이름을 고치려면 굉장히 번거로웠기 때문에 그랜트는 할 수 없이 잘못 적힌 이름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2.2. 군인 시절

    초급장교로 임관된 후에는 늦은 진급과 낮은 급여 때문에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린다. 그랜트는 아내가 농장주의 딸이고 자신도 부유한 사업주의 아들인데 부부가 동반으로 서부 오지에 파견되어 20~30달러의 빠듯한 월급으로 살림을 이어나가는 것이 절망스러웠다고 말년에 회고하였다. 그랜트가 근무한 서부는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오지라서 돈을 가져와도 물건이 없어서 구입이 불가능할 수준이라, 개발된 도시에서 부유하게 살던 그랜트 부부는 특히 고생이 많았다. 미국 정부도 서부가 사람들이 기피하는 지역임을 알아서 사실을 왜곡하여 서부에 가면 잘 살 수 있다고 홍보하였다. 이걸 믿고 온 민간인들과 군인들은 말 그대로 지옥에서 살게 된 셈이었다.

    진급 가능성마저 낮던 그랜트는 근무지인 서부에서 대위 계급으로 경리장교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가족과 떨어지고 서부의 열악함 때문에 우울증과 술 중독이 더 심해진다. 대낮에도 술에 취해서 금화 개수조차 제대로 셀 수 없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고 결국 그랜트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벌받을 것인지 퇴역할 것인지의 갈림길 앞에 선다. 더 이상 군인으로 생활하기 힘들었던 그랜트는 퇴역을 선택한다. 당시 미국은 상비군의 규모가 작고 처우가 열악해서 유능함의 여부와 상관없이 다수의 장교가 초급장교 근무만 마치고 퇴역하였고, 그랜트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1]

    그러나 그랜트의 선택은 북부 미국이나 그랜트 본인에게나 다행이었다. 만약 그랜트가 서부에 계속 남았다면 군인 그랜트의 업적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직전까지 퇴역을 신청하지 않은 서부의 연방군 장교 상당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에서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능하다고 정평난 장교들은 처우가 좋은 동부로 차출되었지만 당시 그랜트의 경력을 감안하면 동부로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전쟁 내내 서부에서 술만 마시며 금화를 세야 할 운명이었다. 그렇게 예비역이 된 그랜트는 몇 년 동안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난다.

    그랜트는 장인에게 노예와 땅을 빌려서 노예노동 농장을 경영하려 한 적도 있었다. 그랜트의 아내인 줄리아는 켄터키 출신으로 16살부터 노예를 몸종으로 부린 노예주의 자식이었다. 하지만 켄터키의 노예주들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경향이 커서 처가의 사람들은 이후 남북전쟁에서 북부에 합류하여 연방군이 된다. 그랜트의 고향인 일리노이는 기본적으로는 자유주지만 노예노동 자체는 주 남부에서 실제로 진행되었고 주민으로서 노예주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흉년으로 실패하고 농장을 개간하면서 벤 나무를 장작으로 팔아 겨우 연명하였다.

    갈 곳이 없어진 그랜트는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죽제품 공장에서 경리로 일하게 되지만 그 일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 때문에 이런 신세가 된 그랜트를 차마 내칠 수 없어서 일은 계속하게 된다. 원래 그랜트는 일반대학에 진학히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막대한 대학 등록금은 감당하기 힘들어 사관학교로 간다. 문제는 그랜트는 이미 자신이 군인 체질이 아님을 알고 있았고 실제로 전투 임무를 제외하고는 군사 업무를 제대로 수행한 적이 없다. 심지어 행군도 엉망이어서 행군을 위한 군악도 몰랐다.[2]

    게다가 성격도 내성적이어서 상관과 동료에게 인기가 없었고 외향적인 성격이 적응하기 쉬운 군대는 그랜트에게 힘들고 외로운 장소였다. 결국 아버지는 그랜트가 이 모양이 된 것에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느껴서 무능하지만 일을 맡긴 것이다. 아버지 덕분에 제대로 된 직업을 가졌지만 그랜트는 고향에서 그저 볼품없는 주정뱅이 중년이었다. 같은 동네의 아마추어 정치평론가인 친구와 토론을 할 수준으로 머리가 좋은 걸 제외하면 유능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추한 중년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멸시받았다.

    남북전쟁 중의 그랜트.

    그러나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그랜트는 일리노이 의용군에 지원하고 군사 경력이 인정되어 일리노이 의용군 대령으로 임관된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연방군 준장으로 진급한다. 그랜트의 전술적 능력은 매우 뛰어났고 이후 전쟁 중에 서부에서 공훈을 쌓아 1864년에 미 육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이후 남군의 대표적인 명장의 로버트 E. 리와 격돌하여 그의 항복을 받아내서 전쟁을 종결시켰다. 전쟁 중 인명피해는 북군이 더 많아서 의회에서는 그랜트는 이제 안 된다고 밀어붙였으나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랜트를 전폭 지지하여 계속 활약할 수 있었다.

    남북전쟁 중에 Unconditional Surrender(무조건 항복)이라는 구호가 그랜트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랜트가 남군의 무조건적인 항복 말고는 어떤 협상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이다.[3] 빅스버그에서 승리한 그랜트는 육군 정규군에서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중장으로 진급하고 1866년에 미군 역사상 최초의 대장으로 진급하여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2.3. 대통령 그랜트

    러셀 크로우

    전쟁영웅으로서의 인기를 등에 업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얼굴을 봐서는 안 믿기지만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취임과 존 F. 케네디의 당선으로 기록이 깨질 때까지 역대 최연소 대통령(취임 당시 만 46세 311일)이었다. 버락 오바마보다도 어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우선 전쟁 영웅, 그것도 연방 붕괴를 막은 영웅이라는 까닭 하나만으로도 상무적인 미국 사회가 그랜트를 환영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고, 그랜트는 공전절후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백악관에 입성했다.

    개인적으로 그는 자신이 대통령에 맞지 않다고 했다. 정치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 그럴만도 하지만... 이 때 그의 이름을 이니셜화 한 U.S. 그랜트가 미국(U.S.)의 이니셜과 맞아떨어진 덕분에 이걸 이용한 광고전략을 펼쳤다고 한다. 전임 육군 사령관은 모두 소장 또는 명예중장이었으며, 이후로도 20세기가 될 때까지 정규군 중장은 남북전쟁 때의 영웅들 서너 명을 제외하면 거의 20여 년 동안 새로 탄생하지 않았다. 대장도 윌리엄 T. 셔먼이나 헨리 셰리든 같은 남북전쟁의 영웅들 뒤로 제1차 세계대전까지 계속 공석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막상 대통령이 된 그랜트는 그의 지지자들을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대통령 임기 중 본인은 청렴했으나 그의 주위 인물들이 타락한 게 문제였다. 정계에 인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을 측근으로 기용했는데, 문제는 사람됨이 순진하여 측근들을 지나치게 믿었다는 데 있었다는 거다. 게다가 거의 모든 친척들이 청탁을 하거나 공직에 올랐다. 유일한 예외는 어머니였는데 그녀는 청탁이 들어오는 걸 천성적으로 싫어했다. 통치를 그럭저럭 하긴 했지만 이렇게 스캔들이 끊이지 않으면서 영웅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추락했다. 그럼에도 1872년 선거에서는 오히려 1868년 선거때 보다도 많은 득표율을 얻어 승리했다. 공교롭게도 이 때 상대 후보였던(자유공화당 소속이었다.) 호레이스 그릴리는 선거인단 투표 직전 사망한다. 물론 그 전에 승부는 난 상태였지만. 미국 민주당? 이 때 당 내분으로 후보 못내고 호레이스 그릴리를 지지했다.(...)

    주위 인물이 타락한 덕분에 대법원장을 지명하는데도 애를 먹었다. 1873년에 대법원장이었던 샐먼 포틀랜드 체이스(Salmon Portland Chase)가 사망하면서 대법원장 자리가 비었는데, 그랜트가 지명한 다섯 명의 후보 모두가 청문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지명철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랜트가 지명 → 알고보니 그 후보는 정치적으로 타락했던 인물 → 상원들이 지명찬성할 리가 없으므로 지명철회 이걸 다섯 번이나 반복하는 막장상황에 놓인 것. 고민 끝에 그랜트 대통령은 모리슨 레믹 웨이트(Morrison Remick Waite)라는 변호사를 지명한다. 웨이트가 지명을 받은 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다섯 번이나 지명철회를 하고 멘붕해 있던 그랜트가 "아 맞다. 내가 기차로 오하이오를 건너가고 있었을 적에 나를 소개했던 그 변호사 이름이 누구였더라?"하고 질문, 체크해 보니까 모리슨 웨이트였던 것. 그랜트는 "음, 그 사람 맘에 들었음. 그 사람 지명하지!" 웃긴 건 웨이트는 오하이오 주에 있는 2류 변호사 중 탑(...)이었던 그저 그런 변호사였다는 것. 어쨌든 이 지명은 통과되었고, 국민들은 아 이제 끝났네 하고 안도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출처

    이에 대해서는 그랜트 개인의 인기가 아니라 공화당 후보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 미국인들이 남북전쟁의 원흉이라고 깔보던 미국 민주당[4] 및 그 지지기반인 남부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몰표를 받았다는 것이다.[5]근데 그랜트가 남부로 나올 수나 있는겁니까 애초에 남북전쟁에 남부연합으로 가담한 주들은 종전 후 전부 군정(미군정할 때 그 군정 맞다)을 받았기에 저항 자체가 쉽지 않았다. 이는 남부 선거인단을 반강제로 빼앗아 당선된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의 공약으로 해제된다.

    그랜트에 대한 미국인들의 평가는 대체로 "훌륭한 장군이라고 정치도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사람은 좋았지..." 등이다. 사람이 좋은 걸 떠나서 정치도 잘 몰랐는지, 그는 두 차례 선거 때마다 매번 상대방 후보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 3부 대통령편(12권)에서 율리시스 그랜트에 대해 마지막에 평하기를, 위대한 지도자는 위대한 지휘관을 알아보지만, 전쟁터의 사자가 곧 정치판의 현자가 되기는 쉽지 않다고 나온다.

    2.4. 전직 대통령 그랜트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대통령이 된 러더퍼드 헤이스가 약속을 지키고 1880년 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자 공화당의 막후 실력자였던 Stalwarts 파벌의 상원 의원들은 그랜트가 세계 일주 여행을 통해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그랜트에게 선거 출마를 제안하였고 그랜트는 받아들인다. 하지만 공화당 내의 3선에 대한 반발이 늘어나자 세계 일주에 동행했던 기자였던 존 러셀 영이 그랜트에게 당선 가능성이 낮아졌으니 물러나시라는 조언을 하였고 그랜트가 그것을 받아들여 공화당 전국위원회에 편지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공화당 전국위원회는 그랜트를 후보에서 제외하지 않았고 본인이 부재한 상태에서 투표가 진행되었다. 1위긴 했으나 과반을 넘지 못하여 계속 다시 투표가 진행되었고 결론을 내지 못한 공화당원들은 상대적으로 무명이었던 제임스 가필드를 밀기로 하여 결국 가필드가 과반을 넘고 후보가 되었다. 당시 공화당은 두 파벌로 갈려 있었는데 1위 그랜트를 지지하는 Stalwarts와 2위 블레인을 지지하는 Half-Breeds가 합의로 만든 후보가 가필드였다. 그랜트는 이후 가필드를 지지하였다.

    말년에는 친구 퍼디낸드 워드의 중개회사 보증을 잘못 서서 파산했다(...). 전직 대통령한테 사기치는 부은 인간 예나 지금이나 보증은 위험 자신은 이름만 빌려준 일종의 피라미드 사기에 당했다고. 그래도 사람이 너무 좋은 나머지 자신의 이름만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돈을 갚기 위해 자신의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처분하려고까지 했으나, 절친한 친구이자 전 대통령인 그랜트가 집마저 없는 빈털털이가 되지 않길 원했던 채권자의 거절로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대인배.

    노령에 빚 갚으려고 자서전 집필 중.

    이에 빚을 갚기 위해 작가이자 친구인 마크 트웨인을 고용해서 회고록을 집필. 생활비가 떨어져서 자신이 가진 모든 군 경력 및 대통령 시절의 기념품을 저당잡혀 돈을 빌려 생활하며 필사적으로 회고록을 썼다.[6] 문제는 이때 후두암으로[7] 거의 치사량에 가까운 아편을 먹어가면서 고통을 참아가며 회고록을 구술했단 거다.

    문학적으로 남북전쟁 전반에 대해 다룬 꽤 괜찮은 회고록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남북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자의 회고록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잘 팔렸다. 결국 회고록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50만 달러나 벌어들여 빚을 갚고 유족들을 돈방석에 올려주었다고 한다. 본인이 사망한 후에. 실제로 그랜트는 초고 완성 4일전에 사망했다. 초고 수정과 출판 감독은 그랜트의 부인이 했고 최종적으로 마크 트웨인이 완성한다.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회고록이 출판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소개한 바 있는데, 그랜트는 파산하기 이전, 한참 사회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부터 회고록을 써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자신은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라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것. 그런데 이후 사업 실패로 파산하여 생활비조차 마련하기 힘든 처지가 되자 호구지책 삼아 몇몇 신문사에 짧은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크게 힘들이지 않고 쓸 수 있는 짧은 글로 생각보다 좋은 원고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8]에 만족하여 본격적으로 회고록을 쓰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세 15%를 조건으로 출판사와 계약을 준비하던 상황에서 마크 트웨인이 갑자기 끼어들어 '그랜트 장군이 받을 인세가 너무 적다' 고 주장하며 해당 출판사와 계약하지 말라고 그랜트를 설득하기 시작한 것.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인세가 적당하겠느냐는 그랜트의 질문에[9] 대한 마크 트웨인의 대답은 '75% 인세에 출판 및 홍보 비용까지 모두 출판사가 부담해야 하며, 이 경우 출판사는 큰 수익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랜트의 회고록을 출판함으로써 얻어지는 출판사의 명망 상승을 생각하면 공정한 거래다'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대답을 들은 그랜트는 마크 트웨인을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최대한 마크 트웨인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자네는 뛰어난 작가지만 사업가로써는 좀 지나치게 몽상적인 것 같다' 고 타이르기 위해 고민하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마크 트웨인의 거듭된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그랜트는 아들에게 '원고를 클레멘스(마크 트웨인)에게 주겠다' 고 이야기했고, 마크 트웨인은 원래 이 원고를 자신의 책을 출판하던 출판사에 가져갈 생각이었지만, 안 그래도 원고료 문제로 출판사와 감정이 심하게 상해있던 상태라 '지금까지 내 등을 실컷 쳤던 출판사놈들에게 그랜트의 등까지 치게 해 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 직접 출판사를 차려 그랜트의 회고록을 출판하기로 결심한다.

    물론 이 일화의 경우 마크 트웨인이 자서전에서 일방적으로 주장했을 뿐, 교차 검증이 이뤄진 바는 없어 공신력이 충분치 못한 것은 사실이나, 일단 마크 트웨인이 그랜트에게 약속한 것은 '원고를 내게 넘겨주면 돈방석에 앉혀주겠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제대로 지켜 그랜트의 유족을 돈방석에 앉혀주었기 때문에[10]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일화로 받아들여지는 편. 또한 이 일화는 19세기 후반 미국의 문화사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사례로 여겨지고 있다. 말하자면 마크 트웨인이나 율리시스 그랜트처럼 순수하게 '책을 팔아서' 큰 돈을 번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당시 미국 사회의 경제적 급성장을 통해 '소비 여력이 있는 시민계층'이 충분한 규모로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즉, 중산층의 태동), 인구 밀도가 낮은 미국 사회에서 이들 중산층이 비교적 쉽고 저렴하게 접할 수 있는 문화상품으로써 '책'이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산업 영역으로써의 출판시장이 자리잡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또한, 마크 트웨인이 그랜트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본래 그랜트의 회고록을 출판하려던 출판사가 소매 출판 전문 회사임을 지적하고 '그랜트 같은 유명인의 회고록은 소매 출판보다는 예약 출판으로 출판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라고 주장했던 것[11]에서 알 수 있는것처럼 출판 시장이 산업화되면서 판매 형태 역시 고도화되기 시작했던 것.

    대통령으로써는 실패했지만 한때 전장의 사자였던 이 사람이 1885년 7월 23일에 숨이 끊어지는 순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대단히 단순한 단어였다. 여담으로 사망 당시 몸무게는 108킬로그램으로, 미국 역대 대통령 중 4번째로 뚱뚱했다.

    유언은 다음과 같다.

    "Water...(...)"

    3. 우직한 전략가 그랜트 - 남북전쟁 시기 그랜트의 행보

    한창 날리던 리즈시절. 1864년 콜드 하버에서 찍은 사진이다.

    앞서 언급한 개인적인 성향과는 정반대로 군인으로서는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랜트의 성향은 인내심과 뚝심이 매우 강하고 끈질겨서, 남군의 로버트 E. 리 장군과 싸운 다른 북군 장군들과는 달리 참패해도 겁을 먹거나 패닉에 빠져 후퇴하지 않고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며 버티고 또 버텼다.

    지금까지 남군의 승리패턴은 북군이 남군을 두려워해서 위축되어 있으면(이전에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다가 큰 피해를 입는 것이 이유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리나 잭슨 등이 이끄는 남군이 화려한 기동으로 북군을 몰아붙이거나 후방 기지를 공격해서 큰 피해를 입히고, 이에 북군의 장군들이 재편성을 이유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심지어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리 장군에게 이긴 조지 미드 장군조차 리 장군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몰라 예비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격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리는 만신창이가 된 북버지니아군을 간신히 구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랜트는 위축되지 않고 단호한 공격을 계속했으며, 그러다 참패를 당하는 경우에도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휘하의 한 사단장이 스팟실베이니아 전투에서 리의 후방 급습에 자신의 사단이 와해되자 그랜트 앞에서 이성을 잃고 후퇴를 종용했을 때 모든 참모들이 당황해서 파닥파닥하고 있는 와중에도, 정작 그랜트는 시가 한대 물고 나무조각을 깎으며 무덤덤하게 버티라고 명령했을 정도로 뚝심이 좋았다. 그때 전장 근처에서는 산불이 났는데, 하필 그 불길 속에 수많은 부상병들이 갇혀 있었다. 당연히 태반이 타죽었고, 그들의 비명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내린 명령은 공격을 계속하라였다.[12]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런 대담한 뚝심에도 불구하고 피를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이상한 기벽이 있어서 고기는 피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바싹 구워 먹었다. 그래서 그의 스테이크는 언제나 겉이 시커멓게 타 있었다고 한다. 사실 남북전쟁 참전 장군들 중에서 기벽 하나 없는 인간도 극히 드물지만, 이렇게 군 생활에 안 어울릴 것 같은 기벽을 가진 사람은 그랜트 하나 정도다. 또 1864년, 버지니아 출신의 한 병사가 진중에서 자기 말의 머리를 피나게 때리는 걸 보고 빡돌아서 그 병사의 머리채를 잡아채 목을 졸랐고 그를 6시간 동안 말뚝에 묶어 놓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랜트의 북군은 남군의 리 장군을 상대로 한 전역에서 절대적인 숫자로 보면 종종 1.2~1.5배에 달하는 피해를 더 입었다. 허나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그랜트가 공격하는 입장이었고, 리가 수비하는 입장이라 리가 더 유리했는데도 불구하고 퍼센티지로 봤을 때 리가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는 점이다. 이는 리가 수비하는 입장이였는데도, 카운터 한방으로 북부군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무리하게 공격적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랜트의 북군은 더 큰 피해를 입었어도 북부의 우수한 보급역량을 바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 피해를 회복한 반면, 남군은 북군보다 피해는 적었지만 충분한 보충을 받지 못해 가면 갈수록 전력 규모의 격차가 커졌다. 더구나 전력상 앞서는 북군이 단호하게 공세를 펴는 이상, 리나 잭슨이 북군을 농락했던 화려한 기동도 불가능해졌다. 개개의 전투에서는 다소 우위에 설 수도 있었지만, 이제 전역을 결정하는 것은 북군이 되었고 남군은 전장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채 북군의 진격에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방어전을 수행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전체적인 전력이나 보급에서 수십배나 앞서는 북군을 상대로 싸우는 남군에게는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대인 셈. 그랜트 이전에는 남군이 북군을 전장에서 몰아붙이고 북군의 후방으로 기동할 수 있었지만 그랜트가 사령관이 되면서 반대로 북군이 전장에서 남군에 대해 지속적인 공세를 취하며 전선에 묶인 남군의 후방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랜트 이전, 스톤월 잭슨의 계곡 전역. 파란색이 북군, 빨간색이 남군이다. 이 전역에서 잭슨의 남군은 북군 사이를 휘젓고 돌아다니면서 큰 피해를 입힌 후 무사히 빠져나왔다. 북군이 기민하게 움직였으면 잭슨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섬멸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겠지만, 북군은 가만히 있다가 잭슨에게 각개격파당하거나 느릿느릿 잭슨의 뒤만 쫓아다니기만 했을 뿐 변변한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랜트의 윌더니스 전역(오버랜드 전역이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파란색이 북군, 빨간색이 남군이다. 리치먼드를 향해 남군의 측면을 노리며 맹렬히 진군하는 그랜트의 북군과 이를 필사적으로 뒤쫓으며 저지하는 남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셰리든은 기병대를 이끌고 리치먼드를 강습하며 남군의 보급창을 파괴하는 등의 피해를 입혔고, 소수의 병력으로 이를 저지하던 스튜어트는 옐로 터번 전투에서 전사하는 등 남군은 끊임없이 수세에 몰렸다. 결국 이 전역은 피터스버그에서 남군이 북군을 방어하며 고착화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이후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북군의 공세 속에 이곳에서 완전히 발이 묶였다.

    상대가 남군의 잭슨 장군과 더불어 남북전쟁 최강의 전술가이며 야전축성의 달인인 리 장군이어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기는 하지만, 참신하고 세련된 우회기동으로 빅스버그를 단박에 함락시키는 등 야전지휘관으로써 전술능력도 출중했다.

    그랜트가 정식 사령관인 미드를 직접 제어했던 포토맥군은 일견 무모해보일 정도로 리 장군의 남군에게 계속 싸움을 걸었고 종종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북군의 최고의 강점인 무한한 보급역량을 잘 살리면서 남군의 장점인 우수한 장교단을 봉쇄하고 약점인 빈약한 보급을 압박한 것이 효과적인 수단임은 틀림없었다. 이렇게 북버지니아군 주력이 붙들려서 소모되어 가는 동안 서부에서 윌리엄 테쿰세 셔먼테네시군이 남부 중심부를 휩쓸어버렸다. 서부 전역의 남군 사령관 조지프 존스턴은 증원을 요청했지만, 남부에는 더이상 그럴 자원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 일을 가리켜 링컨은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그랜트가 리라는 곰에게 손을 물려 있는 동안, 셔먼은 그 곰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버렸군."

    이런 무한 소모전으로 남군의 주력인 리를 붙잡고 소모시키는 동안 앞서 언급한 셔먼의 군단이 바다로의 행진을 성공시키며 남군의 본진을 털어버리고, 이에 급히 퇴각하던 리의 뒤통수를 그랜트가 사정없이 후려쳐 마침내 남북전쟁의 끝을 맺는다.

    그랜트는 본인이 군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던 탓인지 반전주의 경향 역시 강했으며 국가가 위기에 처하지 않는 한 전쟁을 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평생 고수했다. 그래서인지 자서전에서는 남북전쟁 이전에 일어났던 미국-멕시코 전쟁을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상대로 벌인 가장 부조리한 전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여기에 '남북전쟁은 사실 이 전쟁(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미국의 전횡에 대한 일종의 천벌'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도 결국 전쟁이 터지자 국가를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 남북전쟁에 자진해서 참전한 것은 연방이 무너지는 것을 국가적 위기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4. 여담

    1913년부터 50달러 지폐 모델을 맡게 됐다.

    퇴임 직후, 1877년부터 2년 동안 세계일주를 했다. 영국윈저 궁과 독일 제국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 교황 레오 13세, 러시아 제국, 이집트, 예루살렘 성지, 태국, 버마, 청나라, 일본 제국 등을 방문했다. 당시 방문한 베네치아를 두고 "배수 시설이 안되는 도시"라고 했다(...).

    세계일주 당시 각국 군주로부터 사열을 받게 될 때마다 "난 군대라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며 대놓고 사열을 거부하기도 했다고. 그가 큰 불만없이 사열하는 것을 받아들인 군대는 일본군 정도. 일본을 방문했을 때 류큐 왕국를 병합하려는 일본의 팽창 정책과 그에 반대한 중국의 입장 차이에 대해 류큐의 대부분을 일본이 차지하는 대신, 일부 남쪽 도서와 대만 섬을 중국이 가지는 방안을 제시하면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조율해보려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1879년에는 부인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였다. 우에노 공원에서 환영회가 열렸고 자신은 우에노에 삼나무를 심었고, 그의 부인은 목련을 심었는데 현재도 남아있다.

    청나라를 방문하여 이홍장을 만난 후 당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3명 꼽으라면 비스마르크, 글래드스턴 그리고 이홍장이다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였으며 둘은 그 이후로도 교류를 이어갔다.

    총각 시절 영부인이 되는 줄리아와 연애할 무렵에 마차를 타고 가다가 비가 마구 쏟아지는 상황에서 개울을 건너야 했는데, 줄리아는 위험할까봐 두 손으로 그랜트의 팔을 붙들었다. 다리를 건너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랜트는 대뜸 이런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바라건대, 평생 내게 매달리면 어떻습니까?(I wonder if you would cling to me all my life?)"

    손발이 오그리토그리

    그리고 부부의 사이는 대단히 좋았다. 자식들과도 마찬가지. 특히 그랜트의 사진은 거의 다 죽을 상우울한 표정인데 오로지 가족사진에서만 활짝 웃고 있다. 워낙 심적으로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다보니 가족에게 굉장히 따뜻하였기에 가장으로서는 성공했다.

    퇴임한 후 어떤 연회에 초청되어 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날 비가 왔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행인이 우산 없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우산을 씌워 주었다. 마침 그 행인도 그랜트가 초대받은 연회에 가던 사람이라 즐겁게 대화를 하며 연회장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같이 가는 사람이 그랜트인 것을 몰랐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나는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을 본 적이 없는데 오늘 그 연회에 가는 것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요.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긴데 난 그랜트 장군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자 그랜트는 화를 내기는 커녕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웃어넘겼다. 가면 넌 가만두지 않겠다

    앞서 말했듯이 대단한 끽연가였고 술을 좋아해서(그래도 작전 때는 마시지 않았다) 흔히 술주정뱅이로 찍히곤 했다. 작전이 없었던 때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말 그대로 깡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남부연합이 승리하는 대체역사물에서는 주로 술주정뱅이로 일생을 마치는 역으로 나온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평상시에는 늘 꾀죄죄한 행색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잘 씻지도 않고 대충 기른 지저분한 수염에다가 술에 완전히 절은 추레한 꼴을 많이 보였다고(...). 게다가 복장관리도 안하고 청결도 가뿐하게 무시해서 술에 취한채 더러운 군복과 진흙투성이인 장화를 신고 그대로 쓰러져 자기도 했다. 작전 날이라고 다를 것은 없어서 술에 취하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똑같았다고 한다. 남북전쟁 당시의 라이벌이었던 명장 로버트 E. 리와도 전쟁 전에 만난 적이 있었으나 로버트 E. 리는 그랜트를 그냥 술주정뱅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했던 것 같다. 반면에 그랜트는 로버트 E. 리와 만났던 날을 잊지 못할 순간이라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흔한 민간인의 리 장군과의 팬미팅 일람

    훗날에 로버트 E. 리와 다시 만나 그로부터 항복을 받는 순간을 그려놓은 기록화도 여럿 있는데, 하나같이 말끔히 차려입은 리와는 대조적으로 여전히 꾀죄하고 추레한 행색을 하고 있어서 그림만 보고 있으면 어느 쪽이 항복을 하고 있는 쪽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스포트라이트도 리가 받고 있잖아. 원근법을 씹어먹는다!

    한국사와도 관계가 있는 인물인데 한국과 미국의 최초의 군사접전인 신미양요가 바로 이 사람 재임기에 일어났다(1871년).

    자서전 집필을 통해 인연을 가진 마크 트웨인과는 다른 일화가 있다. 마크 트웨인이 무명 작가인 시기에 상원의원인 친구의 소개로 대통령직에 갓 취임한 상태의 그랜트와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마크 트웨인은 상대가 대통령인데다 그랜트의 무뚝뚝한 대응에 지나치게 긴장해서 "어...참으로 당황스럽네요."하며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다.

    이후 1879년 그랜트가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것을 환영하는 시카고의 행사장에서 다시 마크 트웨인과 그랜트가 만나게 되었는데, 인사 대신 그랜트가 한 말은 "저는 당황스럽지가 않는데, 지금 당신은 어떤가요?"였다. 마크 트웨인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대로 말해 놀려먹은 것.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그랜트가 상당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친구들 중에 이로쿼이 원주민인 엘리 파커가 있다. 남북전쟁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참전이 거부되었지만 엘리 파커는 그랜트 덕에 남북전쟁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그랜트의 대통령 재임기간에 '인디언'국 국장으로 재임하며 원주민들의 권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M3 중형전차의 개량형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참고로 개량형 이전의 M3전차의 명칭은 . 덧붙혀 이 이름들은 모두 영국군이 부여한 명칭이다.

    5. 매체에서

    영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에서 그랜트 대통령이 등장하며 미친 과학자에게 미합중국의 안전을 위협받는다. 어째서인지 부하요원에게 툭하면 위장당한다

    여담이지만 비디오 게임 폴아웃: 뉴 베가스최종보스율리시스의 이름은 이 분에게서 따온 거다. 이 게임의 배경이 핵전쟁에서부터의 200년 후인데도 남북전쟁과 율리시스 그랜트를 아는 걸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이전의 미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폴아웃: 뉴 베가스의 율리시스가 자신의 이름을 율리시스라 지은 이유는 그리스 고전의 오디세우스[13]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까지도 염두에 둔 것. 핵전쟁으로 문명이 사라지고 200년이나 지났는데 기원전의 고전과 19세기의 장군, 20세기의 문학 작품을 기억하는 걸 보면 상당한 지식이다.

    죽은 자의 제국에서는 전직 미국 대통령으로 등장. 남북전쟁 때 미국에서 발전한 시병(屍兵) 기술을 각국에 판매하려는 목적 겸 '빅터의 수기'를 손에 넣기 위해 아달리 릴리스를 비서로 대동하고 해외를 순방한다. 애니메이션판에서는 시체 폭탄에 의해 폭사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그랜트 관한 전기물 영화에 제작하려고 준비 중인것으로 알려져있다.

    앤트맨과 와스프에서는 앤트맨이 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몸이 작을 때는 수개미를 타고 다닌다. 이때 그는 자신이 타고 다니는 개미 중 한 마리한테 율리스 S. 그래-앤트(영문판은 Ulysses S. Gr-Ant)라고 지어준다. Grant(그랜트) 안에 Ant(개미)가 들어간 것을 이용한 것.

    미국사의 주요 인물답게 역시나 평전이 나와있다. 아마존닷컴 1,104쪽(...)이라는 충공깽한 두께가 문제긴 하지만 내용은 굉장히 충실하다.


    1. [1] 그러한 이유로 남북전쟁 당시 남북군을 통틀어서 장군의 상당수가 대위대위, 아무리 높아도 소령으로 퇴역한 웨스트포인트 출신이었다. 남은 사람들도 진급이 어려워서 로버트 E. 리중령 진급 후 대령이 될 때까지 얼마나 남은지를 세다가 20년이 더 남았다는 결론이 나오자 진지하게 퇴역을 고민하였다. 다행히도 리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대령이 되었다. 심지어 중간에 2년을 잠정 퇴역해서 농사를 지었는데도 진급된 것이니 행운이라 할 수 있다.
    2. [2] 그랜트는 군악에 대해 "나에게 군악이란 양키 두들과 양키 두들이 아닌 것밖에 없다."하고 발언하였다.
    3. [3] 이는 'U'lysses 'S'impson이라는 이름을 이용한 별명이기도 하다.
    4. [4] 1880년대까지 민주당은 대선에서 이기겠다는 걸 꿈도 꿀 수 없었다.
    5. [5] 사실 1872년 대선에 출마한 호리스 그릴리는 노예제의 폐지를 적극적으로 주창하고 (당시 기준으로) 개혁주의적인 논지를 전개해 북부인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던 명망높은 언론인이었고 동시에 공화당 창립멤버에기도 했다. 그러나 1864년 대선에서 링컨의 재선에 반대한일이나 1867년에 남부연합의 대통령을 지냈던 데이비드를 풀어주자는 주장으로 평판을 많이 갉아먹었는데 여하튼 그랜트 행정부가 난맥상과 부정부패로 얼록지면서 이에 반발하여 따로 자유공화당을 창당했지만 이 앞의 두 행보로 인해서 중상모략을 당하게 되고 결국 처철하게 낙선하게 된 것.
    6. [6] 마크 트웨인이 회고록에 쓴 내용에 따르면, 그랜트가 회고록을 헐값에 출판하려고 해서 도와줬다고 한다. 덕분에 회고록은 인세만 2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고.
    7. [7] 그랜트는 대단한 애연가였다.
    8. [8] 다만 마크 트웨인은 그랜트의 이름값이나 당사자가 직접 쓴 원고의 가치와, 그랜트의 글을 게재함으로써 해당 신문사가 기대할 수 있는 판매량 증가등의 기대 이익에 비교하면 이 당시 그랜트가 받았던 원고료가 오히려 너무 작았고, 전문 작가가 아니었기에 자신의 글을 '팔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그랜트가 원고료의 시세를 잘 모르는 것을 신문사들이 악용하여 지나치게 적은 원고료만을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9. [9] 이 당시 마크 트웨인은 이미 전미에 이름을 떨친 유명 작가였고, 따라서 당연히 자기 책을 출판해 본 경험 역시 풍부했다. 마크 트웨인이 순수하게 책을 팔아서 부를 얻은 전업작가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그랜트의 입장에서는 해당 분야 전문가의 소중한 조언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10. [10] 안타깝게도 그랜트 자신은 초고를 겨우 완성하고 죽었기에 자신이 돈을 벌지는 못했다. 하지만 역시 마크 트웨인이 자서전에서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회고록 구술에 전념하던 말년의 그랜트는 자신이 건강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회고록의 출판에 대해 마크 트웨인과 의논할때도 출판 수입으로 빚을 갚고 가족들에게 충분한 유산을 남겨줄 수 있을지를 가장 염려했다고 한다.
    11. [11] 간단히 말해서, 출간 계획만으로도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는 유명인의 회고록이라면 일반적인 출판을 거쳐 소매상을 통해 판매하기보다는 사전 예약을 받아(가능하면 선입금까지 받으면 더 좋다) 출판하고 판매하면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다는 것.
    12. [12] 다만 마음씨 좋은 그랜트 답게, 후방이 무너져도 의연하던 그가 병사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는 펑펑 울었다고 한다.
    13. [13] 영어로는 Ulysses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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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st modified 2019-12-09 13:3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