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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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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의
2. 한계
3. 문치주의
3.1. 중앙집권체제
3.2. 우수한 기록 문화
3.3. 정교한 관료제
4. 과학/기술
4.1. 천문학
4.2. 기타
4.3. 건축
5. 범죄의 수사
6. 장애인의 인권
7. 노비의 인권
8. 여성의 인권
9. 계급
10. 조선에 대한 대중적 인식
11. 반론
11.2. 사대 혹은 사대주의, 그리고 조공
11.3. 소중화주의와 모화사상, 그리고 국학
11.4. 개화기의 사대
12. 군사력
12.1. 조선군의 문제점

1. 의의

서울대학교국정교과서가 받아들였던 시대 구분에 따르면 조선은 멀게는 통일신라부터 시작되어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던 중세를 끝내고, 근세를 열었다는 의의가 있다.[1] 또한 한반도라는 국토와 한민족이라는 민족문화, 민족의식을 완성시켰다. 그 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민간 경제(상업, 수공업, 무역)의 발전.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상인조합(유상, 만상, 송상 등), 어음, 로 대표되는 원시적인 선물, 금융 거래가 태동했다. 놋그릇[2], 자개, 칠기 등의 생활 용품이 시장에 출시돼 대중화되었다. 교역 역시 이전 고려시대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 ‘민간에 의한 무역’이 이전 시기보다 유의미하게 활발해졌다. 인삼을 가공한 상품인 홍삼의 예처럼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주도의 무역 상품이 개발되었다. 화폐가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쓰이던 시기 역시 조선시대다.[3] 이전 시기였던 고려는 물물교환, 현물화폐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제한적인 무역만 이뤄졌었다.
  • 고급 문화의 활발한 발전, 수입.
조선 시대에는 중국과 활발히 교역했는데, 선진적인 문화를 수입하려는 욕구 역시 그 요인 중 하나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도 역시 지속적으로 문화를 수입했는데, 조선 후기의 기득권층이었던 서울 북촌에 거주하던 벌열가문 경화세족들이 그 주역이다. 당시 슈퍼갑 부자들 사이에서는 세련되고 화려한 청나라 문화가 유행해 활발히 중국 문물을 수입하며, 서양이나 중동, 인도의 문화 역시 부수적으로 수입되었다. 조선은 사치를 지양했다는 편견이 있지만, 조선 후기 여흥 민씨, 안동 김씨, 반남 박씨, 전주 이씨 등 가세가 하늘에 뻗치던 당대 명문가들이 향유한 문화, 양식은 그 수준이 매우 사치스럽고 정교하며, 우수하다.
  • 건축 기술의 발전.
조선의 건축은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 평면적으로 더 복잡하고, 형태가 다양하며, 정교하다. 단순한 일자현 건축에서 탈피해 ㅁ, ㅂ, ㄱ 형태의 한옥이 보편화 되었다. 후기로 가면 만성적인 목재부족에 시달려 휘어진 나무 줄기마저 건축에 적용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상류층에서는 귀한 모과나무 등을 모양 그대로 집 기둥에 써서 자신의 부를 사치스럽게 과시했다. 왕궁, 사찰 같은 대형 토목 건축은 목재 부족으로 건축물의 규모가 작아졌으나[4] 민간의 가옥은 더 발달한 기술과 큰 규모를 갖추었다. 당연히 2층 건물도 있었다.(창덕궁 징광루, 덕수궁 석어당, 도시 지역의 상점 건축들)
  • 인구 급증.
오랜 평화와 낮은 세율, 농업 기술 발전(농업 생산량 증대)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조선의 인구는 14세기 말 약 5,500,000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18세기에는 약 18,700,000명으로 전근대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무려 3배가 넘게 인구수가 말그대로 폭증하였다. 서기 2019년이 된 지금에도 전 세계에서 국력의 펀더멘탈로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가 인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5],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 밀도는 중국 중원, 이집트와 일본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제일 높았으며, 인구의 절대적인 수치 역시 순위권이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높은 인구 부양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 통일신라, 고려 때 보다 훨씬 더 크게 늘어난 영토(영토의 확장).
1896년의 13도 체계를 기준으로 평안북도(평안남도는 고려시대때 가서야 완전히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6])와 함경남도 그리고 함경북도는 모두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 조선시대 때 4군 6진을 개척하고 나서야 다시금 한민족의 영토로 완전히 재편입되었다. 그 이전에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이들 영토들은 특정국가들의 지배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사실상 야인들의 영토였었다. 지금 현재 남북한의 영토를 완성했다는 점과 통일신라, 고려 때 보다 더 영토를 크게 늘렸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영토 확장은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 왕권과 신권의 조화(의정부서사제)와 성문법 국가체제의 완성.
다만 성문법이 있었다고 해서 법치국가인 것은 아니다. 법치국가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를 말하지만, 조선은 이념상으로는 왕이 '법으로' 지배하는 국가였다는 데서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7]. 조선의 왕은 법을 준수하는 자리였지, 법에 복종하는 자리는 아니였으므로 법치국가는 아니다. 그래도 왕권의 독주를 견제하는 장치가 동시대 어느 나라와 견줘도 잘 돌아갔다. 다만, 이는 동시에 조선 정치 시스템의 한계이자 모순이기도 하다. 법적으로는 국왕에게 무한한 권력이 주어지는 체제인데, 실질적으로 강한 신권이 왕권을 제약하는 형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군약신강 문서에도 있지만, 이는 왕권을 제약한 요소인 동시에 국왕권과 신권이 무한 충돌하는 계기가 된다[8].
문과에 합격하는 서민층의 비율이 많이 늘었을 뿐만 아니라 무과도 시행되어 양인들이 양반이 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늘어났다. 그덕분에 귀족적인 요소가 강했던 전대 왕조들에 비해 신분차별이 많이 완화되었으며, 또한 전대에 비해 훨씬 합리적인 관료체계가 완성되었다.
  • 철저한 문민통제를 통한 지방 세력의 약화와 근대적인 행정체계와 정교한 중앙집권체제 완성.
  • 향촌자치강조와 농민통제책(호패, 오가작통법).
  • 근대적인 경찰제도와 소방제도의 빠른 도입을 통한 사회안전망 강화.
치안은 포도청, 소방 전담 기구는 금화도감이라는 기관이 있었다. 이런 근대적인 사회제도의 구축은 대부분 세종대왕시기에 완성되었다.
  • 국가가 지원하고 주도한 방대하고 체계적인 기록문화와 활자, 인쇄 기술의 발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등 굉장히 세분화되고 쓰는 방법이 체계화된 방대한 양의 기록물들을 편찬했으며, 거기다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고 객관적인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 한다. 또한 전대인 고려시대 때보다 더 발전한 인쇄 기술력을 바탕으로 서적 편찬 또한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조보 같은 세계 최초의 신문 또한 발행되었다.
  • 과학기술과 문예, 의학의 발전.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앙부일구, 거북선, 화차신기전 등등 전대인 고려시대 때보다 한층 더 과학기술이 발전했으며 한민족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한글 창제와 홍길동전 같은 한글 소설의 발달 그리고 형태가 확립된 한국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시조의 발전과 궁중 악기인 편경 제작, 궁중음악인 종묘제례악과 악보인 대악후보 같은 문예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동의보감 같은 의학의 발전 또한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도 제작 기술 또한 계속 발전해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 지도나 대동여지도 같은 훨씬 더 정확한 지도들이 제작되었으며, 천문학 또한 발전해 칠정산 같은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이 만들어졌고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세계 최초의 고경도 석판 위에 새겨진 전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또한 제작되었으며, 선조대에는 인류 역사에 남은 우리 은하 마지막 초신성인 SN 1604(케플러의 초신성)을 관측해 실록에 기록했는데 이는 현대에 와서 이 초신성이 la형 초신성이었음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일 정도로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대에는 은광석에서 순수한 은을 추출하는 첨단 회취법인 연은분리법이 개발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계속 발전이 이루어졌다.
  • 왕도정치를 표방하며 상류층의 검소함과 위민정치를 지향.
다만 너무 검소함을 추구하다보니 만성적인 재정 빈곤에 시달리고 대규모 국책사업을 시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후기로 가서는 세율은 낮아졌지만 재정의 수요가 대폭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를 보충하기 위한 조세왜곡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의 문화유산에서 화려함과 웅장함을 찾아볼 수 없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청화백자 등 화려한 유물이 전무하진 않지만.
오늘날 전해지는 전통문화의 대부분은 조선시대때 생긴 것들이 많고 특히 탈춤, 판소리, 민화등 서민들의 문화가 발달했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꾸준한 개간과 간척이 이루어진 데다가, 농사직설등의 농서 편찬과 감자, 옥수수, 고구마등 해외작물의 도입으로 농업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이는 동시대 주변국과의 영양상태 비교로도 확인된다. #
  • 화약무기의 발전.
그때 개발된 화약무기들 중 천자총통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큰 활약을 할 수 있게 해주었고, 문종 때 개발된 화차행주대첩에서 큰 활약을 하였으며, 비격진천뢰는 경주성을 탈환할 수 있게 해주는 등 조선시대 화약무기의 발전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비록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임진왜란에서 승리하여 왕조를 300년 더 유지했다.
  • 후대에 남긴 영향
개항기 시장의 발전, 근대문명에 대한 이해의 확산·심화, 근대화정책의 경험, 근대적 시설과 기업의 출현 등은 식민지기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실학사상의 기반 위에 개항 직후 출현한 개화사상은 식민지화의 위기 가운데 애국계몽운동으로 연결되어서 학교 설립을 위한 신교육운동, 실력 양성을 위한 식산흥업운동 등을 낳았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식민지화 이전 조선사회의 성취가 일제시대의 변화와 성장을 뒷받침한 점을 인식할 수 있다. 1910년대에 성장률이 3% 이상으로 높아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아무리 강하고 효율적인 식민지정부라도 전근대 경제를 접수한 지 10년 정도에 자신의 힘만으로 3% 이상의 지속적인 성장국면으로 진입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근대문명의 이식이 순조로운 것은 조선시대의 문화 발달과 개항 후 근대문명의 수용 성과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시대 토지소유제의 진전은 토지조사사업의 신속하고 비교적 원활한 수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집약적 소농경영의 발전은 산미증식계획기에 일본식의 보다 집약적인 농법을 원활히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18세기에 이미 인구밀도가 높았고 노동력의 처분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일본자본이 노동력의 확보에 애로를 크게 느끼지는 않았다. 교육을 중시하는 조선시대의 문화는 일제시대 교육의 확대를 뒷받침하였다. 조선을 농업사회로 묶어두려는 회사령에도 불구하고 회사자본과 공업이 빠른 성장을 보였던 직접적인 계기는 10년대의 호홍국면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이었지만, 식민지화 전에 구축된 기반이 없었더라면 그만큼 현저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조선인 중소공장이 우후죽순처럼 발흥하던 것도 식민지화 전 회사설립운동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9]

2. 한계

  •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조세 시스템.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민본주의와 성리학적 청백리관이 더해진 구도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적게 걷고, 관료는 적은 녹봉으로 만족하고, 지방 병영은 그 나름의 수세제도를 갖추는 등, 중앙집권화 국가로서는 비현실적으로 중앙정부에 세금이 모이지 않는 중,근세 역사상 가장 작고 가난한 정부조직을 가진 나라로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과 그를 이어 받은 대한제국은 극히 일부 시기를 제외하면 무슨 일만 있으면 재정부족, 재정부족, 재정부족의 돌림노래를 부르고, 관료들은 생계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적은 녹봉을 받고, 아전들도 공식적인 급여가 없었다.[10] 즉, 이건 절대로 오래 유지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겉으로는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한들, 전술한대로 한반도 전체를 통치하기에 조선의 왕실과 중앙정부가 이런 적은 재정으로 유지하는게 가능할 리가 없다. 이 때문에 실제 조선의 재정시스템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과는 달리 관례화 된 부정부패로 유지된다. 왕실은 내장원이라는 별도의 주머니를 만들었고, 중앙 관료는 지방관들에게 반공식적인 뇌물 수증을 받았고[11], 지방관은 하다못해 수증을 내기 위해서라도 지방민들을 수탈해야 했고, 군대는 군대대로 수익원이 없어서 농사를 짓거나 후대에는 상업 활동을 했고[12], 공식적인 급여가 적었던 향리들도 그냥 알아서 백성들을 수탈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러고도 중앙정부에는 여윳돈이 없기 때문에 전쟁을 치르건, 성을 쌓거나 궁전을 짓건, 길을 닦고 광산을 개발하고 기술을 개발하건 그걸 할 수 있는 수익원부터 당장 찾거나 혹은 강제로 동원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13]. 조선시대의 정책이 모두 땜질처럼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 조세시스템에 기반한 부족한 재원탓이었다. 더 문제는 이 조세시스템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명분상으로는 아주 훌륭했으며, 무엇보다도 왕권을 줄이고 그 사이에 끼어있는 중앙관료, 지방관, 아전들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권한 이상으로 수탈 할 수 있는 구도였기 때문에, 이 제도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저 구도하에서는 민란이 발생해도 백성들의 불만이 중앙 정부가 아니라 지방관, 더 극심하게는 아전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14]에 아전들이 우리도 녹봉을 받고 수탈 안하고 싶다고[15] 싶다고 청원을 한 적이 있으나, 단칼에 거절 당했다. 결국 이 문제는 심지어 대한제국 시기까지 해결이 안 되어서, 조선은 가난한 나라라는 인식의 배경이 되게 된다.
  • 세종 이후로 정체된 과학 기술 발전.
세종이 너무 먼치킨인 탓도 있지만, 이후에 집권하는 사림들이 과학 기술을 도외시한 탓이 크다. 성리학자들 중에도 수학이나 과학, 고고학 등에 심취한 사람도 있었고 후기에는 실학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추사 김정희의 사례와 같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이었고 조선왕조 지배층이 펼치는 정책의 근본은 수신을 통한 성리학적 왕도정치의 실현이었기 때문에 기술의 향상을 통한 발전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과학기술은 서양 과학을 부분적으로 도입한 부분을 제외하면 정체되었다. 이미 성종 때부터 정체가 뚜렷이 드러났을 정도니...
  • 고려에 비해 낮아진 여성의 인권.
중기 이후 가정 내 여성의 권리가 큰 폭으로 하락하고 인권이 남편과 시가에 종속되는 경향이 심해졌다. 다만 한글의 보급으로 여성의 문화참여는 오히려 늘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문화참여라는 게 여성들의 여가문화나 바깥 활동이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고, 남편을 향한 정절과 순종, 가정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한계가 있다. 즉 부분적인 계몽은 있을지언정 인권신장은 미비했다.[16][17]
  • 반란을 두려워한 왕실과 조정의 과도한 군병 통제로 정규전을 치르기엔 한계가 많은 군사력.
이순신, 권율명장들이 지휘할 때는 전과가 훌륭했지만, 이런 명장들은 비교적 한정적이었고,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전반적으로 보여준 모습은 비록 200년 동안 전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는 하지만 역대 왕조들 중 가장 안 좋았다.
  • 후기로 갈수록 중화사상에 경도된 지배층과 이로 인한 외부 교류와 문화 수용의 감소.
중국, 일본과는 그럭저럭 교류가 있었고 초기에는 동남아나 아랍권과도 교류가 있었지만 중기 이후로는 쇄국적인 성향이 점차 강해지면서 교류가 크게 줄어들게 된다. 이는 왕조가 망할 때까지 중국, 일본은 물론 동남아, 몽골, 페르시아, 아랍권과도 계속 교류가 있었던 신라, 고려 때와 비교해보면 문화수용과 교류의 관점에서 차이가 명확했다.[18]
  • 상공업의 천시로 인한 심각한 교역의 쇠퇴와 경제 발전 지체.
다만 이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조선도 중후기에는 상평통보로 대표되는, 화폐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조선이 마냥 상공업을 천시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 불교와 무속 신앙 탄압.
삼교 균형의 입장에서 균형의 미덕을 깨는 처사라 역시 대차게 욕한다. 몽골 제국 불교의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 후기의 변질된 불교가 국가를 좀먹어 들어갔던데다, 통치이념을 미신을 배척하는 유교로 공고히 하다 보니 조선의 사대부들은 건국부터 불교와 무당들을 극렬하게 멸시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쩌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의존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는 모순 또한 보여주었다. 유교적 통체이념을 확립했지만 지배층들부터 불교를 버리지도 못하고 믿은 것이다. 당장 왕실부터가 틈틈이 불교를 비호했고 광해군이나 명성황후 민씨는 아예 궐에 무당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궐 내에서 누군가를 저주하는 물품이 발견되거나 굿이 행해졌다는 기록도 빈번하게 나온다.[19]

3. 문치주의

3.1. 중앙집권체제

조선은 신진 사대부들로 대표되는 사상가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나라로, 중국에서 먼저 만들어진 성리학을 국가 통치에 맞게 이상적으로 정비하여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국가의 틀을 완성했다. 때문에 대당률과 관습법에 의존했던 고려와는 달리 경국대전으로 대표되는 성문법 체계가 완비될 수 있었고, 철저히 관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는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권한도 중국에 비하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다. 다만, 명나라청나라 황제의 권력이 다른 중국 왕조의 나라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강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왕조차 법 아래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입헌군주제의 설명과 일치할 정도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서양 학문의 정의 그대로는 정말로 그렇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선의 왕이 진짜 성문법 체계에 강하게 구속받았는지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일단 입헌군주제라고 한다면 군주의 통치가 헌법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조선의 정치제도 구성에 대한 법률이나 관습법 등을 광의의 헌법이라고 전제하더라도 왕이 구속되는 그 헌법 혹은 법률은 왕의 통치범위에서 벗어난 주체가 만든 법률에 제약되어야 한다. 즉, 아무리 프로이센형 같은 외견적 입헌국가라도 외견적이나마 의회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런 독일 제국 자체도 법실증주의에 의거해서 비록 왕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의회지만 그 의회에서 만든 법률 자체는 군주의 권한 남용 방지에 기여했다는 의의가 헌법학의 의견이니만큼, 단지 왕이 법률로 제약받는다는 가능성이나 제약받아야 한다는 유교적 개념을 입헌군주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물론 조선의 왕 역시 현실적으로나 명분상으로나 귀신도 부릴 수 있는 절대권력이었다. 하지만 관습법에 더해 경국대전 같은 성문법 체계를 체택하고 있었던 조선에서는 신하들이 ''선왕과 조상들이 정하신 법을 위반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하고 대항하면 왕도 이를 감안해가며 움직이긴 했다.[* 왕이 작정하고 시행하려는 정책에 신하들이 반대로 내놓는 논리가 바로 '선례에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20] 결국 기본은 전제군주정이긴 하나, 신하들에게 헌법의 다운그레이드 형태인 법전을 쥐어주고 왕권을 견제했던 셈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형태는 정도전 시절에 주창된 것으로, 정도전은 심지어 입헌군주제의 개념조차 없는 상황에서 내각책임제를 제창한 성리학자'''이다.]

몇몇 학자들은 의상학과 관련하여 조선의 의복이 양반부터 평민까지 그 형태가 동일함에 주목하기도 한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에 따른 옷의 구조 차이는 보편적이고 전세계적인 것인데 조선왕조는 그런 면에서 매우 특이하다는 것. 실제 조선의 옷은 새부적인 문양이나 색 등의 차이를 제외하면 임금부터 백정까지 그 구조는 동일하다. 물론 한복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저고리나 바지가 보편적일뿐 왕이나 사대부의 경우 곤룡포와 도포같은 옷을 입은 반면 아래 백성의 경우 경제적 여력과 가사 규제 때문에 저고리와 바지 외엔 입지도 못했다.

세종실록에서는 "우리는 옛날(삼국시대)에 사람을 순장하는 것을 없앴는데, 쟤들은(명나라) 아직도 하는 걸 보면 존경할 수만은 없는 듯."하고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명나라를 비판한 바가 있었다.

3.2. 우수한 기록 문화

기록 문화 역시 세계적 수준이었다. 세계적으로 드물게 국가 주도로 방대한 역사 기록은 물론이고 및 왕실과 조정을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세한 기록 수준 및 사관들의 전문성과 프로 정신은 익히 알려져있을 정도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로, 태종이 말을 타다가 떨어진 날 태종은 부끄러워 "사관에게는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으나 사관은 그것을 '말을 타다가 떨어지셨는데 주위를 둘러보시더니 사관에게는 알리지 마라고 하셨다'라고 그대로 받아적은 적이 있다(...).

다만 이는 조선 전기에 한정되며, 조선 후기인 영-정조대에는 왕이 적지 말라고 하면 그냥 안 적었고, 승정원 일기에 적힌 내용도 조금씩 수정 및 조작이 이루어졌다. 단 사관들도 우회책을 써서 직설적으로 쓰진 않고 우회적으로라도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역적 OOO가 한 말을 쓰지 마렷다!" 라고 왕이 명하면 말은 쓰지 않되 그 OOO와 비슷한 말을 한 자인 XXX가 기록되어 있으면 "역적 OOO가 한 말은 역적 XXX가 한 말과 비슷한 말이었다," 라는 식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기록이 너무 넘쳐나다보니 왕조에 대하 환상을 가질 여지도 없고 반대로 비참한 부분은 매우 세세하게 적혀있다보니 조선이 괜히 더 비난받는 면도 없지 않다.

기록에 대한 문인 계층의 관심과 욕구도 높았다. 영조, 정조 대에 이념 및 외교적인 이유느 청나라로부터의 서적 반입을 금지했음에도 청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사신으로 오가면서 당시 북경의 서점가에 있는 책들을 쓸어담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유입된 청과 서양의 서적들은 실학으로 대표되는 정조 시대의 학문적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3.3. 정교한 관료제

관료제 또한 매우 근대적인 체계였는데 유럽 같은 다른 나라들은 19세기까지 매관매직이나 하고 있을 때[21] 조선은 이미 근대적인 실력주의 관료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동시대 유럽에서 시험으로 관료들을 선발한다는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22] 당대 조선은 이미 과거제도를 통해 관료들을 선발하고 있었는데 고려시대때 처음 시행된 과거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고려시대때의 문제점들을 대폭 개선, 지역균형과 능력주의가 매우 절묘하게 섞인 합리적인 제도로 발전했으며 소과에서 각 도별로 할당된 인원을 먼저 뽑은 뒤 대과에서 점수로 줄을 세워서 최종 합격자를 가렸다.

물론 그 만큼 난이도와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전국에서 모인 수만 명의 응시자 중에서 소과 복시(최종)에서 200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쳐내며 그 200명 중 단 33명만을 대과 복시에서 뽑았다. 명나라에서는 수십만 명 중에서 400명이었으니 조선이 경쟁률에서 낫긴 했지만... 거기다 '논술형'이었다..

또한 시험 단계도 어마어마하게 빡빡해서 진사시/생원시, 즉 소과를 통과해야만 대과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당장 생원/진사시를 통과해 생원이나 진사 타이틀을 따면 그 아래로 4대가 양반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 수준이었으니 생원/진사시의 난이도 자체가 장난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일반 양인의 경우에도,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평민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였으며, 이런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다.[23]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출처 기사1 기사2 이 처럼 과거제는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이 실력으로 관료들을 선발한다는 점에서 동시대 유럽 같은 다른 국가들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실력주의에 바탕을 둔 객관적이고 평등한 관료선발 제도였다.

서양에서는 보통 근대국가의 탄생에 대해 얘기를 할 때, 근대국가는 중앙집권을 했고, 관료주의이며, 성과중심주의였으며, 또한 영토 전체를 꿰뚫어서 효율적으로 통치했다고 주로 설명하는데 조선은 이 기준에 맞춰볼 때 근대국가에 훨씬 더 가까운 모습으로 당대 조선의 정부에는 수많은 행정 부처들(인사처(이조), 국방부(병조), 세무부(호조), 외교부(예조) 등등)이 있었고 또한 과거 같은 시험으로 선발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자문위원들이 있었으며, 실제로 이런 중앙집권 체계는 꽤 복잡한 방식으로 잘 운영되었다. 각 지방들 역시 중앙정부로 부터 직접적으로 통치되었는데 각 '도'와 그 밑의 수많은 행정구역들로 굉장히 체계적이고 정교한 모습으로 각각의 행정구역들이 설정되 있었으며, 각 지역마다 일종의 치안판사라고도 볼 수 있는 관료들이 파견되어 있었고 행정관이나 관료들은 현지에서 선출되지 않고 모두 과거를 통과한 뒤에 중앙정부로부터 각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이러한 체계적인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모습은 동시대 유럽 같은 다른 나라들에서는 굉장히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4. 과학/기술

과학 기술의 발전은 15세기 중반 세종, 문종 시대에 한 차례 큰 발전이 있었으며, 이후 18세기 후반 정조 시대에 다시 상대적으로 가시적인 진전이 있었다.

세종 ~ 문종 시대가 특히 두드러지는데, 당시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와 같은 기구들을 많이 만들었던 사람으로 이천, 장영실을 들 수 있다. 또한 칠정산으로 당시 정확한 역법에 도달했으며, 화차신기전, 화포, 총통기, 오연자포와 십연자포 등 화포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기술은 총통위가 폐지된 세조 이후 크게 쇠퇴했으나[24], 양란을 거친 다음 군사 기술은 지속적으로 발달했다. 거북선은 최초의 철갑선까진 아니라지만 최초의 장갑함이라 할 만한 선진적인 군함이었다. 또한 적군이 기병들의 눈에 석회 등을 던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정을 갈아서 고글인 '풍안경'을 만들었을 정도이며 한번 장전으로 2연발 ~ 3연발 연사가 가능한 '연발 조총'도 제조했다. 그리고 수통사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도 제작 기술 또한 계속 발전해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 지도나 대동여지도 같은 훨씬 더 정확한 지도들이 제작되었다.

4.1. 천문학

천문학 또한 발전해 칠정산 같은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이 만들어졌고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세계 최초의 고경도 석판 위에 새겨진 전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또한 제작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계속 발전이 이루어졌다.[25]

산학과 역법은 베이징의 서양 선교사들의 역법을 받아들이면서 17세기까지 일본에 대한 우위를 유지하였다. 대표적으로 일본은 1643년 조선통신사 사절중 독축관(讀祝官) 박안기에게 칠정산 계산법을 전수받고 이것을 연구하여, 1682년 시부카와 하루미(澁川春海)가 일본 최초의 역법인 정향력(貞享曆)을 완성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월성은 18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일본이 에도 시대가 무르익으면서 역전되었다. 조선 통신사에 대한 대접도 점점 더 하락하여 순조 11년인 1811년에는 더 이상 통신사가 가지 않게 되었다.[26]

북학파홍대용이 1766년 의산문답(醫山問答)으로 자전을 주장한 것은 최소한 200년 늦고, 실학자 최한기가 코페르니쿠스지동설을 (중역으로) 받아들인 건 발견 300년 후였으며[27], 아이작 뉴턴만유인력윌리엄 허셜의 근대 천문학을 (역시 중역으로)받아들인 것은 발견 180년 뒤(1867년의 '성기운화(星氣運化)')였다. 이는 유럽보다 250년 이상 뒤쳐진 것이었으며, 그나마도 기학을 통한 독자적인 해석에 기반하였다. 최한기는 근대 의학 역시 신기천험(身機踐驗, 1866년)을 통해서 소개했으나 이것 역시 막 서양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중국의 서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실패한 개화와 일제 강점기의 억압적 교육 정책을 바탕으로 한국의 과학은 한국전쟁까지 사실상 전무하다 싶은 정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단 역법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서양 천문학을 서서히 학습해 나갔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인식과 다르게 조선은 서양 과학에 그리 무지하진 않았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서양 천문학이 계속 갱신되었기 때문에 19세기에 불완전한 지식에서 완전한 지식을 얻었다고 봐야 한다.[28]

영조대에 저술되어 구한말에 증보된 증보문헌비고를 보면[29]# 18세기 조선에서 통용되던 서유럽의 천문학을 확인할 수 있다. 케플러(刻白爾)와 뉴턴(奈端)등 당대 서유럽 과학자들의 연구 실적을 인용해 조선의 하늘에 맞게 보정하는 과정을 거치는 모습이 보인다. 관에서는 19세기 홍대용이 저술한 서적보다 훨씬 일찍부터 전문적이고 수학적인 법칙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2. 기타

연산군 대에는 은광석에서 순수한 을 추출하는 첨단 회취법인 연은분리법이 개발되었으나 은본위 경제체제가 발달되어 있지 않은 조선에서 그리 유용하게 사용되지는 못했고 오히려 이후 일본으로 퍼져 일본의 은 대량생산에 큰 영향을 주었다.

4.3. 건축

정조 시대는 조선 과학의 마지막 정점이었다. 수원화성은 당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동양 성곽 기술의 결정체라 할 만했으며, 그 기록 역시 상세하게 남겨져 있다. 다만 화성은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되지는 못했으며, 서양 과학 기술의 도입 역시 매우 느렸다.

5. 범죄의 수사

조선은 범죄의 수사에 있었어도 꽤 과학적인 기법을 동원하였음을 <신주무원록>등의 저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신주무원록의 과학성을 엿볼 수 있는 글.

검시 체계도 초검과 복검, 삼검에 걸쳐 검시해 초검과 복검의 결과가 일치해야만 사건을 종결하였고 일치하지 않을 경우 삼검도 불사했다. 또한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임금에게 장계가 올라가 허락이 떨어져야만 사형을 집행하는 등 생 사람을 잡지 않도록 고심한 노력이 돋보인다. 영조 이래 잔인한 형벌(압슬, 문신)을 금지한 것도 발전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는 동시대 범죄수사의 수법으로 잔인한 고문을 통한 무조건적인 취조가 횡횡하던 동시대 다른 국가들 보다 훨씬 더 과학적인 수사방법이었다.

이러한 조선의 법 정신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조선 시대 최고의 스캔들이었던 '어우동 사건'인데, 이때에도 왕과 신하들이 철저한 법리 공방을 벌인 후에야 법에 따라서 처벌이 이루어졌다.[30]

6. 장애인의 인권

세종13년(1431년), 박연이 아뢰기를

옛날의 제왕은 모두 시각장애인에게 현송[31]의 임무를 맡겼으니 이는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32]

대중들의 인식이 인식이다 보니 조선의 인권이 시궁창이었다고 폄하되는 경우가 많으나 대부분 당시 시대상의 일반적인 인권의 비참한 실상을 고려하지 않고 한 말들이다. 물론 조선 말기의 인권 상황이 유럽 각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궁창인 건 사실이지만 이 경우에도 조선의 제도가 정비된 시기를 생각해야 한다.애당초 조선조 초기에는 전세계에서 농노와 노예제가 아예 합법이었던 시대였었다. 애당초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적인 인권 개념은 겨우 19세기 이후에나 만들어지기 시작한 개념들로 그런 점에 비추어봤을 때 조선의 인권을 논하기 전에는 14세기 ~ 18세기의 당시의 보편적인 인권 상황과 시대상을 정확히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단 조선 시대의 인권을 현대의 인권 개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대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인권, 즉 Human rights라는 개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 말이다. 현대의 인권 개념으로 당시를 해석하는 것은 현대의 인권 개념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지 고찰하는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이게 아니면 대부분 아전인수이다.

조선 시대의 인간 존중 사상은 유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종 실록에서는 당시 음악을 정비했던 박연이 맹인 악공에 대해 논의하면서 위와 같은 말을 남긴 바 있다.[33] 조선에서는 장애를 하나의 질병·장애라는 말 그대로 몸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로 인식했으며 기형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을 사회 차원에서 매몰차게 내버리지는 않았다. 장애가 심한 자들에게는 세금과 군역을 면제하는 혜택을 줬다. 시각 장애인 같은 경우 손 재주가 우수한 사람을 뽑아 전문직으로 고용하기도 했다. 즉, 20세기 한국에서 실시되는 시각 장애인 안마사 제도와 비슷한 목적의 정책을 그 시절부터 실시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출세가 가능했다. 각 부 장관급인 판서는 물론, 왕 다음가는 의정 급까지 올라간 자들이 있다. 척추 장애인 허조, 간질 장애인 권균, 지체 장애인 심희수 같이 정승의 반열에 오른 인물들이 적잖게 있으며, 채제공사시를 숨기지 않고 오롯이 초상화에 담았고, 청각 장애인 이덕수는 대제학과, 형조판서까지 오르는 등, 일단 과거를 볼 수 있고 그 중에 능력이 있다면 충분히 출세할 수 있었다. 사회 인식은 물론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같이 대우하는 것까지, 오히려 조선시대가 훨씬 나았던 셈. 오히려 장애인을 학대하면 가중 처벌을 받았고, 장애인을 살해하면 해당 사건이 발생한 고을의 읍호가 강등되었다.[34]

7. 노비의 인권

전체 인구의 3~40%가 노비인 15~17세기 조선사회는 '노예제사회'였는가?

조선의 노비제 숙의

[유머] 조선시대 국민 50퍼센트의 삶.jpg

노비의 비율이 주변국에 비해 과도하게 높으며, 포로를 노예로 부리던 대부분의 국가와는 달리 자국 백성이 주요 표적이었다. 그 인신예속적 성격 때문에 조선은 노예제 국가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많다.[35] 또한 노비는 국제법상 'Slave'에 대한 정의에 부합하는데, 인권적인 문제나 실제 처해있는 상황 및 처우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소유물이 된다면 그 사람 / 제도는 노예의 뜻에 부합한다. 즉 위의 정의대로 보자면 노비는 노예에 해당한다. 물론 이 경우 제정 러시아의 농노와 에도시대 일본의 농노들도 노예의 뜻에 부합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일본의 농노제

하지만 노예제 국가였다는 주장에 반박하는 주장들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제임스 팔레 교수의 노예제 사회 규정에 정면으로 반박한 이영훈 교수의 주장이 있다. 이영훈 교수는 평소 조선에 비판적인 교수로 알려져서 의외일지 모르지만 제임스 팔레 교수가 타계 할때 까지 계속 논쟁을 이어왔으며,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이 노예제 국가가 아니었던 이유는 아래와 같다.

우선 노비제의 대확장기를 거치는 가운데 노비들의 존재양태가 '노예'로 단순화시킬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제사회설은 이러한 변화 추이를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비 가운데는 주인의 집과 멀리 떨어진 다른 군현이나 도에 거주하면서 연간 일정량의 공물을 상납하는 '납공노비(納貢奴婢)'가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시대 노비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납공노비는 고려말기에 팽창한 사원노비가 조선왕조 국가권력에 의해 공노비로 몰수되어 양반관료층에게 분배되었던 데서 기원했다. 그들은 농촌에서 자신의 토지와 가족노동으로 독자적인 경리를 보유한 농민으로 존재하였으며, 그 점에서 주변의 양인신분 농민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존재였다. 비교사적 범주를 적용해보자면 납공노비는 '노예'보다 '농노'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전체 노비들 중 이들 납공노비가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분재기나 호적 자료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추론해보면 적어도 절반 정도는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팔레는 어째서 조선사회의 성격을 도출하는데 있어 납공노비의 존재양태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것일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는 당시 팔레와 같은 미국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납공노비의 범주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납공노비의 존재는 1980년대 이후 양반가의 분재기가 대량으로 발굴되면서 비로소 명확해졌는데, 당시 미국의 한국사 연구자들로서는 한국에서의 최신 사료발굴 현황이나 그에 기반을 둔 연구성과를 자세히 알기란 어려웠을 가능성이 있다. 여하튼 이 납공노비의 범주를 제외하고 보면 '노예'의 범주에 포함될 만한 노비의 수는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또한 『노예제와 사회적 죽음: 비교사적 연구』를 저술한 올란도 패터슨(Orlando Patterson)은 '노예'를 공동체로부터 추방되거나 다른 지역에서 끌려온 자, 그리하여 자신의 소속 공동체를 보유하지 못한 자로 규정하면서, 노예의 상태를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으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내지 문화적 관점의 노예의 정의를 조선사회의 노비제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먼저 법적인 혼인 문제의 경우, 발달된 노예제사회에는 자유민과 노예는 성적 교섭은 가능할지언정 법적인 혼인은 이뤄질 수 없었다. 자유민과 노예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깊은 심연의 경계가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조선사회에서는 노비와 하층 자유민은 법적으로 자유롭게 혼인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조선의 노비와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의 결정적 차이였다. 미국의 흑인 노예들은 마을의 가난한 백인과 결혼할 수 없었지만, 조선의 노비들은 마을의 가난한 양인들과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었다.

또한 발달된 노예제사회에서는 이름이나 의복, 두발 등의 복식에서 노예만이 지녀야 하는 고유한 상징이 강요되었고, 그러한 노예상징을 통해 노예들은 자유민과 쉽게 구별되고 또 차별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의 노비들에게는 그러한 노예상징이 강요되지 않았다. 실제로 노비의 복식은 일반 상민의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조선왕조는 신분에 따라 복식을 차별하면서 양반만이 비단옷을 입거나 가죽신을 신을 수 있다고 규정하였을 뿐, 노비들이 반드시 그들만의 두발 모양을 갖추고 그들만의 옷과 신발을 신어야 한다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신분을 차별하는 여러 법령에서 노비와 상민은 동격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1554년의 한 법령은 서인(庶人)과 천구(賤口)가 사족(士族)을 구타하였을 때 동일한 처벌을 받도록 규정하였고, 이후 1746년의『속대전(續大典)』은 상천(常賤)이 사족을 욕한 경우 동일하게 장(杖) 60 대에 처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처럼 상민과 노비는 사족과의 신분 차별에 관한 한 동격으로 취급되었다. 요컨대 조선의 노비들로부터 그들이 자유민의 공동체로부터 절망적으로 분리되었다는 노예상징을 찾기는 어려운 실정인 셈이다.[36]

조선의 노비들은 미국의 흑인노예나 일본의 게닌에 비해 예속의 강도가 훨씬 약하였고, 그런 점에서 노비들은 곧 노예라기보다 농노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러한 분석이 조선의 정치나 사회경제상이 비교의 대상이 된 다른 사회들보다 역사적으로 더 높은 수준이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농노제사회가 노예제사회보다 발전단계가 높다는 등식은 애당초 성립하지도 않을 뿐더러, 순수한 형태의 노예제사회는 인류의 역사에서 극히 예외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전근대 인간예속의 유형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구조의 성격을 "노예인가, 농노인가?'와 같은 서유럽 중심의 잣대만을 기준으로 하여 양자택일 방식을 통해 규정하려는 협소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연구자와 역사대중 스스로가 좀 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노비는 노예도, 농노도 아니다. 노비는 어디까지나 노비 그 자체일 뿐이다. (pp.155~159) - 이영훈,「한국사 연구에서 노비제가 던지는 몇가지 문제」(『한국사시민강좌』40, 2007). 출처

참고로 순수한 법제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노비의 생사여탈권은 여느 양인과 마찬가지로 군주로 대표되는 국가권력만이 행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노비는 매매ㆍ상속ㆍ증여될 수 있는 존재일지언정 어쨌든 '인간'으로 간주되고 있었고, 그렇기에 "인명(人命)의 여탈(與奪)은 군주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언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비주인이 우발적으로든 고의로든 왕민(王民)의 한 일원인 노비를 살해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불법이었다. 단지 노비주인과 노비의 관계가 '하늘과 땅의 관계'로 비유되는 현실 속에서 그러한 '법제적 당위성'이 실제적으로 구현될 여지가 거의 희박했을 뿐이다. 이렇듯 노비가 단순한 '비인격적 사물'이 아닌 엄연한 인간으로 간주되었음은 이 밖에도 주인 이외의 인간과 관련한 토지소송 등의 법적인 문제에 대해 노비의 발언권이 인정되고 있었던 점, 노비의 재산 소유 및 그 권리가 법적으로 공인ㆍ보호받고 있었던 점 등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노예제와 비교하면 분명 나은 면이 있었다. 노비재산은 법적으로 보호받았으며, 만약 주인이 이를 강제로 뺏을 경우 장소(狀訴)를 할 수 있었다. 또 외거 노비에 한해서는 신공만 제대로 내면, 그리고 주인에게 보고를 하면 거주지를 옮길 수 있는 자유도 있었다. 배경이야기. 공무원 공노비만 받았다는 한계는 있긴 했지만 여성 노비가 출산하면 100일간의 출산 휴가를 주었고 남성 노비에게도 출산 휴가를 주었다.[37] 조선의 노비제 숙의

하지만 조선의 노비가 노예에 비해 무조건 더 나은 건 아니었고, 결국엔 노예와 다를게없는 대우를 받았다는 비판과 반론도 있다. 실제로도 이를 증명해주는 증거가 1422년(세종 2년)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 수 없도록 하는 법노비의 자식은 평생 노비의 계급이 세습되도록 만들었다. 당시 지배층은 주자의 말씀을 빙자해서 노비 살해는 주 - 노의 명분에 비해 가볍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뒤의 두 일은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 대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선 시대 들어서 노비는 점점 비천한 존재로 간주되어, 성씨를 가지는 것을 금지시키며 가축, 똥 오줌, 농기구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강요받게 되었다. 이를테면 16세기 말 한 양반은 비를 구입한 다음 이름을 눌은개(訥隱介)로 바꾸었다. 이러한 노비에 대한 법적 권리 박탈, 비천 관념의 강화는 전대 왕조인 고려에 비교해서도 확실히 후퇴한 것이었다.[38]

경제 사학자인 이영훈 교수의 강연에 따르면 적어도 조선 시대 초기의 노비는 법인격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21분부터).[39] 이 교수의 설명에 따르자면 노비에 대한 관습적인 보호 장치들도 어떠한 인간적인 연민이 작용한 결과로 보기 힘들어진다. 그보다는 대노비 소유가 횡행했던 조선 사회의 특성상, 거느린 노비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스릴 경우 집단적인 보복을 당할 것에 대한 우려로 인한 자제 정도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물론 조선에서 전체 노비 소유 규모와는 관계 없이 주인의 집인 주가(主家)에 딸린 노비수는 10명 - 20명 가량으로 그다지 많지는 않았으나, 노비에 대한 학대는 일상으로 일어났으며 양반들은 이들에 대한 폭력에는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어떤 가문의 기록에는 가장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비를 때려죽인 일을 아예 '조상의 업적'으로 올리기도 했다.

게다가 노비에 관한 한, 조선의 도덕률은 덕치가 아닌 법치였다. 조선의 양반들은 농사 일이 계획대로 진척되지 않으면 이를 노비 탓으로 돌려 가차 없는 매질로 다스리곤 했다. <쇄미록>에는 계집종이 칭병하자 종아리를 때린 일, 김매기 중에 그늘에서 쉬고 있는 노비를 보자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서 채찍으로 종아리를 때린 일을 비롯해서 주인 오희문이 노비에게 구타와 매질을 가하는 모습이 곳곳에 나타난다. 1597년 오희문 가의 한 노비가 같은 집 노비였던 아내와 도망쳤다가 오희문에게 잡혀서 발바닥을 70, 80대나 맞은 다음, 관아에 넘겨져 다시 곤장을 맞고 죽은 일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오희문의 기본적인 소회는 "애석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주인에게 죄를 지은 노비가 아니라 오희문 본인이 비교적 충노(忠奴)라고 인식한 노비의 죽음을 말할 때도 이 자는 같은 표현을 썼다.[40] 당시 양반들에게 노비의 죽음이란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던 것이다.[41] 물론 양반들이 아픈 노비들의 병간호를 직접해주고 약을 지어주거나 노비들이 죽었을 경우 관을 마련해서 제사도 지내주고# 노비들이 결혼할때 지원도해주며 주인집 식구들보다 밥도 더 많이주는등 노비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그런 모습들 또한 기록에서 자주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법치가 아닌 덕치의 관점에서 노비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준 것일 뿐이었다.# ##

기본적으로 조선은 전쟁을 통한 외국인의 인신매매를 포기하였지만 대신에 건국 초부터 16세기까지 자국인의 30% ~ 40%에 해당하는 인구를 사고파는 재산으로 만들었고, 노비의 법 인격 역시 노비의 종류에 따라서 차등만 있을뿐 기본적으로는 주인의 소유물이자 폭력과 성적 학대를 방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인조 시기, 한 장수의 여자 관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여자 관노 역시 장수가 쉬고 가는 주막이나 관청에서 매우 쉽게 성접대 대상으로서 내어지는 기록도 있다.[출처][43]

이때문에 유학자 중에 유형원 같은 사람은 노비제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도 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특히 사대부들은 중요한 재산인 노비를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이것은 신분제가 완화되는 19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 같은 인물조차 노비제의 폐지를 반대했던데다가, 소수의 실학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노비제를 옹호했다.[44]

8. 여성의 인권

조선의 여성 인권이 남성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종속물 취급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대우해 주긴 했다는 주장이 있다. 조선 후기에는 남편을 가르치는 여성인 현처가 등장했으며 임윤지당, 강정일당처럼 성리학을 자기화하는 여성 성리학자들이 나타났고[45], 이들은 남성 양반들에게서도 자신들과 대등한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대접받았다. 참고로 임윤지당은 남자와 여자의 존재를 차별에 두지 않고 음양오행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인식한 사람이며, 역사 인물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도 유명했는데, 그 논리가 탄탄하여 모두들 수긍했다고 한다. 즉 여성의 말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폄하하지는 않았다는 것.[46]

또한 "출가외인", "칠거지악"이라는 예학적 제도들은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며, 그나마도 노론 출신의 양반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교육 면에서도 여성도 집에서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고 일단은 언문 정도는 쓸 정도는 가르쳤으며 왕족의 경우 인수대비, 문정왕후, 명성황후[47]의 경우에는 한문을 알다못해 유교 경전에도 나름 통달했다. 게다가 인수 대비는 여성 전용 유교 교과서 격인 내훈의 저자이기까지 하다. 공주, 옹주 등의 경우에도 일단 언문 정도는 썼다.[48] 여성이 남성보다는 교육 면에서는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지배층 여성 정도 되면 못 배웠다고는 할 수 없다[49]

다만 법적인 부분에서가 아닌 사회적, 생활사적인 면에서의 가시적인 여성 인권이 낮아지는 일은 있었다. 고려에서와 같은 여성 단독의 상거래가 자유롭지 않았으며 연애 결혼이라는 것은 양반가에서는 쉽사리 나오기 힘든 이야기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처럼 남성과 여성이 마주하는 것 역시 조선 후기로 갈수록 금기시되어, 예를 들면 여말선초까지 활발히 제작됐던 여성의 초상화가 조선 중후기로 가면서 그 수가 크게 줄어들게 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성을 앞에 두고 이곳 저곳 보는 것조차 기피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일반적인 사회 진출을 제외하고는 고려나 조선 초기까지는 호적에서의 기록 순서에서도 조선 초기 이후와 달리 남녀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했던 점, 조선 시대에 부계로 제한했던 음서 상속권 또한 고려 시대까지는 외손자까지 똑같이 가능했던 점, 고려 시대에는 여성의 재혼자유로웠으나 조선 시대에 법으로 금지된 점[50], 기타 포상 보장 등의 제도적 제사나 상례 등도 모두 여성이 주재 가능했다는 점, 경제 생활이나 가정 생활 등이 모두 남성과 어느 정도 대등한 수준이었던 고려나 조선 초반을 감안하면 적어도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여성의 인권 하락이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 시기 성립된 교조적 성리학 지배 질서가 일반 서민층에게까지 확산되고 200여년간 유지되면서 점진적으로 세계적인 여성 인권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 되어[51] 대한민국의 법제상으로까지 유지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인권 하락 현상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급격히 진전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비단 조선 후기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으며 여성 인권의 영역에서만 나타난 현상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의 인권 하락과 별도로 이미 조선 전기에 성리학 질서의 성립을 위해 조선 초기인 태종 시기부터 첩의 자손인 서얼을 문과는 물론 생원이나 진사과에도 응시하지 못하게 한 "서얼 차대법"이 제정된 바 있으며 역시 같은 시기의 "삼가 금지법"을 통해 실질적으로 국가가 과부의 재가, 혼인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명백히 소수자의 인권을 법적으로 하락시킨 이런 법률들은 그 당대에만 실시된 것이 아니고 그 후 조선의 법제로 명시적으로 제도화된다. 위의 삼가 금지법만 하더라도 성종 때에 이르러 "재가 금지법"으로 성문법으로 확정되어 공포되었으며, 양반의 정처를 대상으로 관리하여 국가가 명부를 만들어 통제하였다. 예를 들면 세번 이상 시집간 여성의 경우는 별도로 공식 명부인 "자녀안"[52]에 기록하고 통제했다. 다만 서민들이 재가를 많이 시행했다는 말을 생각하면 사문화된 듯.

다만, 신사임당이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부탁한 것으로 보면, 남성도 수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은 듯하다. 변질된 유교적 전통 문서에도 아내와 사별하고 수절한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 부분은 고려에 비교하면 확실히 성리학적 질서가 뿌리내렸음을 보여주며 성리학에 따른 가부장적 질서가 확립되고 지방에서도 향악과 서원의 영향으로 점점 심화되었다. 조선 전기에 존재했던 균분상속등의 사라지고 제사는 남자만 모시게되었는데 좋게 말하면 양반계층이 원하던대로 성리학적 질서가 자리잡은거고, 나쁘게 말하면 이런 추세속에서 여성의 권한은 사실상 없어졌으며 가부장적인 가족관계와 종법이 고착화되었다.

9. 계급

일반적으로 조선의 지배 계급으로 생각되는 양반은 건국 초엔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조정에 녹을 받고 일하는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했다.[53] 사실 조선 초기의 계급은 전대 고려와 유사한 양천제(양인 + 천민)였다. 초기만 놓고 보면, 전대 고려의 귀족적 요소들[54]이 상당부분 제거되었기에 고려를 포함한 전대 어느 시대보다도 신분간 편차와 차별이 많이 완화된 사회로 볼 수 있다.[55]

그리고 후기에는 신분간의 상하 이동도 전대에 비해 한층 '개방적'이 되었는데 몰락 양반이 많아지고 보다 좀더 자본주의적으로 바뀐 사회상 때문이다. 이 때 부터는 양반이 아니더라도 양인인 경우,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56] 과거 제도는 결국 양반층의 계급 세습을 합법화시킨 것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상민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 이런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다.[57]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출처 기사1 기사2 추가로 한영우 교수는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를 4권으로 완결지은 뒤, 4권 말미에 남긴 글 '나가면서'에서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과거시험 제도로 부단히 하층 사회에서 충원했기 때문이라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 사회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사

10. 조선에 대한 대중적 인식

조선에 대한 한국 대중의 평가는 좋지 않은 편이다. 당장 2010년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유행어 중 하나인 헬조선이 현재 대한민국을 조선[58]에 빗대어 탄생한 유행어이다. 일단, 조선왕조는 한국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왕조이다. 이는 조선이 한국사 최후의 왕조이고 기록도 풍부한 데다 공교육 및 대중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덕분이다. 하지만 그 친숙함 이상으로 현대 한국 대중에게 가장 많이 욕먹는 왕조이기도 하다. 학술적 평가야 어찌되었건 대중이 보기에는 왕조의 끝이 너무나도 비참했기 때문에 대중의 조선에 대한 반응이 부정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볼 수도 있다.[59]

조선에 대한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평가는 유서가 깊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총독 직할기관이었던 조선사편수회는 타율성론이나 정체성론 같은 조선을 비하하는 여러 왜곡된 이론들을 퍼트렸다. 이런 이론들은 식민사관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 70년대 이전의 국사 교육마저도 "조선이 왜 500년만에 망했는가"라는 질문과 전형적인 답변들이 중심이 되었다. 조선이 망한 원인은 한결같이 붕당정치와 내분, 신분차별, 유교, 사대주의, 문치주의가 꼽혔다. 이런 식민사관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당시 국사 교육은 기성 세대들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이 편견들은 80년대에 사극을 비롯한 대중 매체에 의해 강화되기도 했다.

현대에는 특히나 온라인에서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두드러진다. 조선사에 대한 토론에서 조선에 뭔가 우호적인 의견이 나타난다면 그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질 틈도 없이 바로 국뽕이라는 비난이 쏟아져 나온다. 심지어 극단적인 경우에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들을 매국노라고 비난하거나, 진눈머처럼 조선이 아예 한국사임을 부정하기도 한다. 조선에 대한 반감과 분노가 극에 달하면, 최악의 경우, 차라리 일제강점기구한말 조선보다 나았다는 역갤 같은 주장에 수렴한다. 역사적 사실과 평가에 대한 타당성을 떠나 대중이 가지는 조선에 대한 이미지는 아래와 같다.

  • 성리학붕당 정치 등 백성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이 밥그릇 싸움만 한 지배층.
  • 유교신분제로 얼룩진 극도로 보수적인 사회와 꼰대 같은 정치인들, 그리고 그로 인해 정체된 사회.[60]
  •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및 모화사상 일관.[61]
  • 일본에게 본격적으로 뒤쳐지기 시작한 한반도 왕조.[62]
  • 일본의 침공 앞에서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종국에는 35년 간의 식민지 시대를 살게 만든 원인을 제공.

이는 비단 식민사관만의 영향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도 존재한다.

그런데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별개로 조선의 문화만이 한국 고유의 문화라는 인식도 은연 중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는 조선이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왕조이기도 하면서 다른 왕조들의 역사나 문화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의식주 문화가 세세하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왕조는 조선 뿐이다. 즉, 대중의 이러한 반응은 무지의 소치이다. 이러다보니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문화 요소와 다른 모습을 띤 문화 요소들을 어색해하는 이들이 많다. 심할 경우에는 분명 우리나라 문화인데도 아예 '국적불명'이나 '왜색'으로 몰아가는 경우도 많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한복을 고증대로 복원한 것이나, 개량 한복을 두고도 왜색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11. 반론

"조선이 왜 500년만에 망했는가?"가 아닌 "어떻게 조선은 500년이나 버티어 냈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도 있다. 실제로 500년도 못가서 망한 나라들도 꽤 많다. 중국만 하더라도 500년을 버틴 왕조가 없으며, 왕통의 단절 없이 이어진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는 청나라의 286년이다. 또한, 외세에 망한 나약한 국가라는 이유로 혐오하는 것은 결국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논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선이 개혁 없이 어거지로 500년이나 존속되어서 나라와 민중이 점차 피폐해졌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의 국가적 위기 상황이었던 시기가 나라를 개혁했어야만 했던 시기인데 제대로 된 개혁을 못하고 그 상태로 200년이나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인 물을 뒤집지 못한 것이 망국의 원인이라는 시각이다. 동시대 중국과 일본은 양란 이후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사회가 크게 변화하였다. 그래도 양란 이후 대동법이 실시되고 몰락 양반과 부유한 상민이 증가하는 등 개혁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봐도 500년 이상 버틴 나라는 조선 말고도 많다며 조선의 장기적 안정성을 폄하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왕조 국가관과, 유럽을 비롯한 다른 문명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비역사적 오류이다. 동북아시아는 왕조명이 곧 국가명이었고 또한 그 왕조의 부계 혈통과 사직곧 국가의 흥망과 직결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시아권 내에서만 비교해봐도 중국 역대 왕조들이나 일본 역대 막부들 중 300년 이상 버틴 정권은 드물다.

반면, 서구권에서는 왕조를 국체와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서구권 왕국이나 제국들의 존속 기간이 긴 것도 그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왕조가 주씨에서 애신각라씨, 왕씨에서 이씨로 넘어가면 국체(Polity) 자체도 근본적으로 변한 것으로 본다. 왕족의 혼인 관계에 따라 왕조가 덜컥덜컥 바뀌면서도 국체가 유지되는 것은 봉건제의 영향이 짙은 유럽의 왕국들에서나 가능했다. 조선이나 중국처럼 왕조 자체가 500년 이상 존속한 경우는 서양권에선 유명한 경우는 합스부르크, 오스만 제국, 훗날 통일 이탈리아의 시조가 되는 사보이 왕조 정도이다.

대중이 조선의 역사에서 특별히 부정적인 부분은 세도정치 시기와 구한말이다. 확실히 당시의 조선은 국가 기강이 붕괴하고, 철종이 죽기 직전에 벌어진 대규모 민란으로 왕조도 껍데기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조선이 500년이나 지속된 후, 국력을 다하고 국운 자체가 저무는 중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결국 조선의 멸망은 "망할 때가 되어서" + "(지배층이) 개혁과 개화에 실패해서" + "일본이 쳐들어와서" 의 세 가지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중에서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조선에 대한 이미지와는 별개로 조선의 4대 왕이었던 세종대왕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좋은데 조선을 폄하하는 이들도 세종대왕만큼은 폄하하지 않는다. 사실 조선은 대중들의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왕조인데 당장 세종대왕 / 문종 때 조선이나 선조 / 인조 때 조선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비교해보자. 물론 어느 왕조나 명군이 있었으면 폭군이나 암군도 있었기에 어느 왕을 중점에 두느냐에 따라 왕조의 평가가 달라질 수 있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조선만큼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왕조는 없다.

조선의 상업과 19세기의 혼란상에도 과도하게 폄하의식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일례로 조선 문서의 경제 문단에는 조선의 육지 유통망이 부족하다는 설명이 있는데,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지라 수레 타령하기에는 한계가 많다.[63] 이미 대규모 운송 시스템을 갖춘 수로 유통망을 500년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던게 조선이다. 게다가 그 삼정의 문란 운운하는 19세기 위기론 역시 그 실체가 과도하게 부풀린건 아닌지 의문이 제기된다.[64] 물론 중국이나 일본처럼 가시적인 상업의 발달을 기대하기 힘들다지만, 원시적인 금융시스템과(어음) 상업도시(평양, 개성), 대규모 소비도시(서울) 거상의 출현, 유통망의 발달이 분명히 이뤄졌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11.1. 성리학붕당

  자세한 내용은 성리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붕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2. 사대 혹은 사대주의, 그리고 조공

국내에선 일반적으로 조선의 대중국 사대주의 외교를 치욕스러운 것이라고 비난한다.

사대외교는 조선 이전에도 빈번히 시행해 왔던 외교 정책이었는데 조공을 받는 목적은 중국이 위에 있음을 서로 인정하는 조치였에 가까웠다. 실제로 조공으로 바치는 양보다 중국에서 선물 명목으로 지급하는 물품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니, 조공을 바치는 쪽에서는 큰 이득을 보는 관계였다. 그래서 1년간 무역횟수를 정할 때 명은 3년 1공, 조선은 1년 3공으로 오히려 조선에서 조공을 많이 하게 해달라고 조르는 형편이었다. [65] 간단히 말해 중국이 우위임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선물을 잔뜩 받는 셈. 실제로 일본도 중국에 조공을 바치길 원하기도 했다.[66][67] 중국의 뛰어난 문물을 받아올 길이 없어지게 되자 직접 얻기 위해서 왜구가 되어 중국의 해안을 침범하였다.[68]

또한 조선은 항상 명나라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던 것은 아니였다. 천자만이 할 수 있던 원구단에서의 제사를 지냈으며[69] 세종대왕 시절에는 상왕 태종에게 태상'황'이라는 칭호를 올리기도 하고 황제국에서만 쓸 수 있던 묘호, 능호(황제의 무덤의 이름), 황제의 아내의 시호인 후(后) 등을 사용하는 등 많은 왕실 예법들을 제후국이라고 자칭하면서도 황제국 체제에 맞추어 쓴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조선조 초기에는 조선에서 요동을 공격하겠다는 등 자주 명과 트러블을 일으켰고, 소위 말하는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70]

사대 외교는 동아시아 당시의 기본적인 국제 외교의 전통이었고, 당시 국력이 약했던 조선이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일종의 외교 전략이었다.

주문사(奏聞使) 남재(南在)가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아뢰었다.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고 또 명령하기를, ‘너희 나라 사신의 행차가 왕래하는데 길이 멀어서 비용이 많이 드니, 지금부터는 3년 만에 한 번 조회하라.’ 하였습니다

甲辰/奏聞使南在回自京師曰: “帝厚待之, 且命曰: ‘爾國使臣行李往來, 道遠費煩, 自今三年一朝.

태조 4권, 2년(1393년 계유년 / 명 홍무(洪武) 26년) 9월 2일(갑진) 1번째 기사, 링크.

다만 이는 황제가 대놓고 '선물을 주기 부담스러우니 조금만 왔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하기에는 중화사상의 자존심이 상하기에, 다른 변명을 찾아서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는 주장 역시 강하다. 자세한 내용은 조공 문서를 참조.

또한 명사 조선전을 보면 이런 내용도 있다. 조명간의 긴장의 끈이 팽팽하던 1393년의 일이다.

[洪武] 26년 2월, 사신을 보내어 말 9천 8백여필을 진상 하므로 1만 9천 7여필[71]을 보내어 갚아 주도록 하였다. 6월에 表를 올려 사례하고, 말과 方物을 바쳤다. 아울러 옛 공민왕(恭愍王)의 金印을 돌려 보내면서 자신의 이름을 旦이라 고칠 것을 청원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명사》 조선전. 홍무 26년(1393년, 조선 태조 2년)


[永樂] 5년 12월, 貢馬 3천필이 遼東에 이르렀다 하므로 戶部에 명하여 絹布 1만 5천필을 보내어 그 값을 치르어 주도록 하였다.[72]

《명사》 조선전. 영락 5년(1407년, 조선 태종 7년)

이런 형식의 "사대 외교"는 단지 세력 강약이 바뀌었을 뿐 길게 보면 북송 때부터 시작된 체제였고, 크게 보면 춘추시대 주나라 (동주)가 종주국인 셈 치고 진, 초, 한 등의 열국이 조공하는 것까지 사대 외교로 치는 것도 있다. 또한 명나라가 주위 이민족을 대하는 정책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토목의 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관찰해 보면 잘 알 수 있는 문제다. 또한 명나라와 비슷한 시기 유목민 세력을 몰아내며 세워진 조선은 몽골제국으로 인한 반동으로 이전 왕조들과는 비교될 정도로 중국과 문화적으로 가까워졌으면서 중국의 영향권 안으로 깊게 들어갔다.[73] 더욱이 원나라 이후 중국의 통일 제국은 종전에는 중국 영토가 아니었던 요동 반도를 거머쥐고 거의 사분오열 하지 않으며 주변 국가를 압도하는 국력을 자랑했다. 고구려나 고려 또한 당나라몽골 제국과 대놓고 대적할 수는 없었다. 결국 과거처럼 중국이 분열된 틈을 타서 뭔가를 도모해 볼 만한 기회 자체가 조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74]

물론 조선이 언제나 조공으로 이득만을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들어 희사품이 조공품보다 총합적으로 가치가 높았다고 하지만 조공품 목록에 처녀[75]가 들어가 있었으며 이 탓에 세종 때 명에 공녀로 끌려간[76] 한씨 성을 가진 여성은[77]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영락제가 죽자 같이 순장되는 비극을 맞이했다.[78] 그 외에도 조선 초기, 조선을 믿지 못한 홍무제나 한창 팽창주의에 열을 올리던 영락제, 사냥을 좋아한[79] 선덕제 등은 엄청난 양의 조공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조선은 크게 고생을 했다. 이런 과도한 조공은 선덕제가 죽은 이후에 사라지고[80] 역사에 흔히 알려진 외교 형태의 조공 무역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본은 엄연히 육지와 한참 떨어져 있는 외딴 섬나라였고 공군과 공중전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전에는 상대적으로 외침과는 관련이 없는, 안전한 지역이었다. 유라시아를 휩쓴 몽골족도 바다와 태풍이라는 자연의 장벽에 막혀 일본을 정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작 일본은 명나라에 조공을 하고 싶어 유구국을 점령하는 꼼수까지 부렸다.

여진족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왜란으로 사정이 말이 아니었던 조선과 전성기를 달리던 후금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조선이 건국 초기 최고의 국력을 떨치고 있을 때 여진은 그저 심심하면 조선에게 얻어터지고[81], 심지어 가장 강성한 족장 이만주가 일가족과 함께 몰살당하던 상황인 것을 기억하자. 심지어 문약의 대표 시기인 성종 시기에도 여진족은 그냥 밥이었고, 이후 연산군 때도 자주 토벌된다. 또한 청나라 이후로는 여진족이 한족에 흡수당해 사라진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전 고려에게 상국으로 군림했던 금나라와 요나라도 처음엔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다.[82]

한반도와 중국과의 관계도 당대의 입지와 힘에 따라서 상이했던 것은 바로 전 시대인 고려북송의 예만 봐도 알 수 있다. 거란을 제어하는데 큰 전력이 되던 고려에 송나라는 웬만한 요구를 다 들어줄 수 밖에 없었는데,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조공차 가서 예의고 뭐고 다 팽개치고 송의 보물들을 이것저것 뒤져서 하사품을 이거줘 저거줘하며 직접 요구하고 송나라는 그걸 진짜로 다 주는 경우도 많았다.[83] 이후로도 조선의 힘이 강하면 반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중국 왕조보다 국력이 약했던 한반도의 왕조들이 생존 수단으로서 사대 외교를 통해 조공을 주던 형식적 조공국가였던 조선이었지만, 중기에 이르러 성리학자들이 굉장히 폐쇄적으로 변질되면서 필요 이상으로 명나라에 감화되고 빠돌이 증상을 나타내면서 아래 단락의 소중화주의나 모화사상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게 된다. 이런 변질이 바로 조선 왕조가 현 시대에 와서 자주성이 떨어진다며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11.3. 소중화주의와 모화사상, 그리고 국학

교육받은 평균적인 조선인을 뜯어보자. 그는 모종의 지적인 총명함과 세련됨을 지니고 있다. 그의 기억력은 잘 훈련되어 있다.(...) 그의 눈은 과거, 특히 중국의 과거에 고정되어 있다. 그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과 관습의 노예다. 그의 사고는 폭이 넓지도 독창적이지도 않다.

- 대니얼 기포드, 「조선의 풍속과 선교」

조선의 조공외교를 두고 굴종적이고 비자주적인 정체성을 가졌다는 폄하의식이 있는데, 반대로 조선의 소중화사상을 들어 조선이 국뽕과 교조적인 국수주의를 가진 나라라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물론 조선 후기의 정치체제가 취했던 소중화주의, 교조적 성리학이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이론이 모화사상 같은 비뚤어진 사상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런 폐쇄성은 기존의 중화 숭배 사상을 비틀어 자국 문화만을 제일로 여기는 사상을 낳아 외부의 발전된 문물이 들어오는데 큰 장애가 되기도 하였다. 사실 당시는 병자호란과 명의 패망으로 이미 서구 열강이 들어오기 이전에 중화 질서의 파괴를 한 번 겪었고, 조선 후기까지 그에 대한 반동으로 지나치게 유교와 중화에 집착하는 일종의 중국화와 정체성 혼란을 겪은 결과이기도 하다. 조선이 원래부터 이상했던 것도 아니라는 것.[84] 당시 문체반정을 주창한 정조마저도 신하들과의 사사로운 서편에서는 고문을 내팽겨치고 써버렸으니… 만약 청에서의 서적 수입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면 조선 말 오경석, 박규수 등의 개화 사상파에 영향을 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경석 같은 경우에는 역관으로 근무하며 중국에서 수많은 신(新) 사상을 들여온 인물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뭉친 이들과 청나라 문화에 대한 동경을 가진 이들이 혼재되었던 시대라는 것. 한편으로는 당시 조선의 후진적이라고 생각되는 문물을 버리고 청의 진보된 사상과 문물을 받아 들이자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언어 문학 사용론, 한국적 진경산수화 등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다만, 이 북학 사상파 역시 따지고 본다면 송시열, 이이명 등 선대의 노론 유학자들에 그 기원이 연연한다. 그리고 북학 사상파들은 주로 노론 경화사족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으며 오히려 보수파들은 충청도 등 시골 지역에 많았다. 아니 애초에 중농학파건 북학파건 실학 연구가 흥한 동네가 오늘날 서울, 경기권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기존 지식을 버리고 새로운 지식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나라는 많지 않다. 또한 그렇게 마구 받아들이고 완전히 자신의 색을 잃은 나라도 적지 않다. 애초에 세계 열강의 물결 앞에서 제대로 설 수 있었던 나라는 일본이 대표적인 예이며 왜 조선은 그렇게 못했냐는 것은 너무 크게 기대를 품는 것이다.

이 시기 조선에는 소중화주의와 같은 자뻑에 이어서 모화 사상 같은 정신승리 사상까지 융성하게 된다. 모화 사상을 통한 정신 승리는 명 황제에 제사를 지내면서 청나라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예시가 이미 명나라가 망한 지 오래인 시점에 세워진, 명나라 황제 만력제숭정제를 모시는 사당 만동묘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드러내놓고 반발을 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나마 소극적인 태도로 반발을 하겠다는 것. 또 하나는 명나라가 멸망하였으니 이제 중화는 중국이 아니라 조선이 계승하겠다는 소중화 의식으로 설명된다. 외왕내제 형식으로 황제국을 자처했던 베트남도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낸 전례가 있다. 사실상 명나라와는 달리 청나라는 조선이 강제적으로 사대를 한 나라였으므로 이러한 반발이 나오게 되는 것. 또한 중국은 한반도보다 더 선진적이었기에 이러한 문화적 동경심이 모화 사상의 바탕이었다. 극단적인 예시가 1937년까지 이어진 만동묘 제사.[85]

모문룡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병자호란과 함께 교조화된 모화 사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는 정묘호란 때 명군은 도움은커녕 민폐만 잔뜩 끼쳤다. 비단 임진왜란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대의 조선 인근의 명나라 잔당들의 행태는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는데, 조선인 양민들을 걸핏하면 죽여대고 그 목을 청군이라 속여 조정에 보내기도 하고 수시로 문제를 일으켜 보다 못한 청나라 군대가 이들을 쫓아내줬을 정도였다. 다만 조선의 보급 실패로 인해 약탈이 심했다 뿐이지, 확실히 도움은 크게 되었다. 사실상 대신 전쟁을 치뤄주는 격이니. 단편적인 시각으로 전체를 재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약탈한게 잘했다는 것은 아니고, 무엇보다 도와준답시고 왔으면서 당시 일본군에게 당했던 것 못지않게 약탈을 해댔으니 당대 조선인들이 반감을 가진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아래 글에서도 보듯이 1980년대의 학자 최완수는 조선이 중화라고 여겼던 당대의 인식을 조선중화사상으로 구분 지었으며, 이것을 조선 후기를 이끌어간 시대 정신으로 규정했다. #.

그래도 처음에는 생존 수단으로만 이용할 뿐이었던 대명 사대가 결국엔 시대착오적인 모화 사상으로 변질되어 정체성마저 그에 묶여버린 것은 분명 후기 조선 지배층의 업보라고 할 수 있다.

11.4. 개화기의 사대

중국의 속국이라는 관념을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분명 이 시기 조선이라는 정체의 업이긴 하다. 스스로가 사대를 정치적으로 너무 많이 이용해 먹어 자승자박을 해버린 게 문제. 특히 임진왜란이 끝나고 자신의 권력 안정을 위해 전쟁공 신들의 역할을 깎아내리고자 명나라 군대의 전공을 드높이고 자국 군대의 공적을 깎아내린 선조의 실책이 크다. 이후 재조지은면서 명나라의 크고 아름다운 은혜가 없었으면 우리는 망했을거야라는 생각이 뿌리내려버렸고 기존의 실리적인 사대 대신 맹목적인 사대가 나타났다. 광해군 때는 신하들이 중국 핑계를 대며 왕의 명에 항거하는 웃기지도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개화기에는 이양선이 교역을 요구할 때마다 교역을 거부하면서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기 때문에 멋대로 너희와 외교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라고 했으니 사실상 스스로 만천하에 자신들의 사대주의를 홍보한 셈. 오히려 청나라에서 조선이 외교와 국방에선 자주권을 누려왔다고 해명했다. 사실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본다면 서양의 개항 요구를 거절하기 위한 핑계에 가까운 것이기는 했다. 더불어서 "우리를 건들면 중국이 가만있지 않을걸?"하는 나름대로의 경고(?)를 겸해서. 그러나 서양 사람들 관점에선 거의 자기들이 아는 '식민지' 비슷한 걸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거문도 사건.

그러나 개화기의 지식인들도 비슷한 '사대'를 강하게 비판한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갑신정변에서도 제일 먼저 청나라와의 예속 관계를 끊을 것을 주장했고, 독립협회에서도 영은문을 박살내고 독립문을 세우는 등 '사대'에 대해 비판적이다 못해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만 이에 대해서 "개화기 지식인들이 서양인의 관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는 주장도 있다. 일각에서는 개화기 지식인들이 조선 스스로의 '사대'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서양인들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배웠을 것이라는 주장은 당시 지식인들의 지능 수준을 무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물론 당시 지식인들의 지능 수준을 무작정 무시하는 것도 지양해야겠지만 현대에도 미국이나 여타 선진국 문물이면 무조건 하악거리는 사람들이 상류층이나 지식인들 사이에도 상당히 존재함을 생각하면 당시라고 그런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당장 일본만 해도 비록 논란은 많지만 지식인이라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어떤 태도와 사상을 보였는지 생각해보자.

물론 갑신정변 이후 위안스카이가 조선 문제에 깊이 개입하고 심지어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하자는 주장까지 하면서 더 강하게 속박한 기간이 있었으므로 그 영향도 있었겠지만, 개화기 지식인들이 '사대'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갑신 정변 이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므로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힘들 것이다.[86] 게다가 나라가 망하기 전 각국에 열강들에게 이권을 내주다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겨 멸망한 것에 대한 책임 역시 두고두고 까여야 할 대목이 아닐수 없다.

개화기의 조선에 대한 옹호론에서 그 시기에 필요했던 것은 정말 국가를 바로 세울 능력자들이 한 가운데 뭉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이끌 정도로 초월적으로 능력있는 정치가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저 평범하게 능력있는 고종, 명성황후에게는 너무 거대한 시련이었다는 것. 쇄국이니 뭐니 해도 데지마에서 제한적으로 네덜란드와 교류한 일본[87]과 기껏헤야 하멜, 벨테브레이, 러시아 군인 몇명과 조우한 조선 왕조는 서구 문물에 대한 이해도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였고 그것은 이미 지도자 몇 명이서 힘낸다고 메꿀 수도 없을 정도의 격차였다.[88]

그 당시에 열강으로 성장한 일본 말고도 독립을 지킨 비유럽권 국가들이 있었지만, 이들 중에서 순수하게 자기 힘만으로 식민지가 안 된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물론 에티오피아태국 등의 예도 있지만 이들은 그들이 가진 지리적 이점-서로 적대하거나 대립하던 서구 열강들의 이해 관계-으로 일종의 완충 지대로서 국가를 보존한 것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앞에 언급한 일본도 서구 열강이 중국 뜯어먹기에 정신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일본 침탈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정세 덕을 안 봤다고 할 수 없다. 심지어 국가를 형성하지 않은 남아메리카의 마푸체 역시 오랫동안 스페인에 맞서 독립을 지켜냈다며 조선을 까는 경우도 있지만 스페인남아메리카는 거리가 조선과 일본의 거리보다 훨씬 더 먼 데다 당시는 아직 서구권이 다른 지역들을 압도하기 전이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마푸체도 결국 19세기에 들어서는 그 스페인에게서 독립아르헨티나칠레에 정복당해 거의 식민지인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으며 현재도 그저 소수민족으로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는 상황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또 식민지가 된 나라들도 마이소르 왕국처럼 치열한 항쟁 끝에 점령당한 경우가 많고, 조선처럼 우리의 독립을 유지시켜 달라고 외국에 편지를 보내는 게 '저항'의 전부였던 경우는 드물다지만 조선도 나름대로 저항은 했다. 물론 그 저항이 국가나 왕조 차원의 저항이라기보단[89] 민중의 저항에 가깝긴 했지만 일본 역시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삼기 전에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의병 세력을 쓸어버리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90]

현재 사학계에서는 형식적으로 조선은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고 그것을 근거로 근대에 속국이라고 주장되었지만 거의 형식적인 절차였고 외교와 내정에 대한 중국의 간섭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자주국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모든 시기에 그랬던 것은 아니긴 하다. 조선도 명나라 초기나 청나라 초기에는 거의 뜯기다시피 조공을 바쳐야 했다. 명과 청이 안정되면서 점차 조공의 양을 줄여주었고 조공은 오히려 조공을 '바치는' 쪽이 이익인 형태로 변해가기는 했지만, 그러한 변화는 명과 청의 국제정책 변화로 인한 것이었지 조선이 힘이 강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19세기에는 청이 간섭을 심하게 해서 그 이전보다 심하게 예속될 뻔한 시기였다. 이 때는 내정 간섭까지 받는 완전 속국이 될 뻔했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대'는 이 정도의 예속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는 청나라가 서구의 식민지 개념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열강들이 눈여겨보는 주변국에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도 이제 식민지있는 제국이라고 해야될텐데 마침 조공국들이 있네?'라는 일종의 왜곡 시도였다.

그런데 청의 예속이 절정을 달리던 1894년조차 청은 일본이 조선의 내정 개혁에 공동 착수하자는 제의를 하자 조선의 개혁은 조선인들의 몫인데 헛소리 말라고 거부했고 이홍장은 선교사들이 당신네 속국인 조선의 카톨릭 합법화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하자 조선은 자주적으로 정치를 해왔다고 못한다고 대답했다면서 이 때도 예속이 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조선이 대외적으로 '사대'를 공표한 것은 순전히 개항 요구를 피하기 위한 핑계였다고 하면서 이홍장의 대답은 전적으로 사실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반론이 있다.

12. 군사력

조선의 군사력 운용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역사적 사실 이상으로 조선군이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조선은 역사적 전과가 처참하다. 전대왕조들이 중화제국들이나 북방 유목민족과의 전쟁에서 극적인 승리를 경험한 적이 있는데 비해 조선은 자력으로 그런 승리를 한 적이 거의 없다. 또한, 대중적 이미지의 문제도 있다. 조선은 문무 중에서 무를 천시하고 문만을 숭상하여 비생산적인 글 공부에만 국가적으로 전념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게다가 대중이 조선에 대해서 가지는 시각이 기본적으로 부정적이라는 것도 유념해야한다.

다만 조선의 수많은 굴욕은 순수하게 조선의 내부적 문제만이 아니라 조선의 외교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특히 조선은 과거와 달리 안정된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형세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대왕조인 통일신라나 고려에 비해 외교적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았고, 정복 전쟁을 펼치기도 쉽지 않았다. 또한, 세간의 인식과 달리 조선은 국방 문제를 등한시하지는 않았고, 나름의 성과도 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에서 의병과 수군만 싸우고 육군과 조정은 한 것 없다는 대중적 인식과 달리 조선 조정은 정규군 전반을 지휘하며 필사적으로 일본에 맞서싸웠다. 그리고 군사의 규모가 축소된 것과 별개로 중앙 상비군의 질적 향상은 이루어졌고, 비격진천뢰, 화차, 조총을 위시한 화약무기도 대거 도입되었다. 이는 확실히 전대왕조에 비해 조선이 이룬 군사적 발전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정당한 수준 이상으로 비난이 과도할뿐, 조선의 군사체계에 심각한 결함이 많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조선군의 폐해에 대한 모든 책임을 국제정세 같은 외부 요인으로만 돌리기는 힘들다. 분명 조선은 전대왕조들에 비해 기술도 발전하고 인구 및 생산력도 증가하여 종합적인 국력에서는 전대왕조들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군사력도 전대왕조들을 능가해야 정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력을 군사력으로 치환하는 시스템의 측면에서는 조선이 너무나 후진적이었다. 이는 오히려 전대왕조들에 비해서도 퇴보했다고 봐도 될 수준이었다. 쉽게 말해, 국력의 결정요소들인 하드웨어는 제법 괜찮았지만 정작 그것을 운용하는 소프트웨어가 극히 부실했던 나라였다.

그래도 대중적 이미지와 달리 건국 초기까지는 조선의 군사력이 우수한 편이었다. 이는 초기에는 조선 조정이 군사력 강화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던 태조 이성계 휘하의 고급 무장들과 고려 말기부터 외침 및 내전으로 다져진 정예병 수만이 남아있어 조선을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록에는 조선 초기 태조의 통치 기간에만 조선의 잠재적인 병력이 20만 이상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규모 못지 않게 내실도 우수하여 방패검병인 팽배수와 중기병 전력도 견실하게 편제되어 있고 정예 궁병만 수만이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이방원을 필두로 한 신하들이 대군을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는 것을 진지하게 추진하려고 했고, 명나라에서 이런 조선의 움직임을 경계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듯 조선은 초기의 군사력이 우수했지만 정작 그 잠재력을 증명할 실적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는 조선 초기에 국제정세가 안정되어 있어서 외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군사력이 건실했던 시기에 대규모 외침이 있었다면 의외로 조선도 고려의 여요전쟁처럼 통쾌한 승전을 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조선 초중기에는 조선과 명나라 모두 안정기였기 때문에 이렇다할 전란이 없었고 북방의 이민족들도 잠잠했다. 그래서 정작 전성기의 조선군이 보인 전과는 여진족 및 왜구들에 대한 소규모 토벌 정도였다. 그래도 실적이 없지는 않아서 세종대왕 치세에는 한국사의 마지막 북벌이었던 4군 6진까지의 확장을 이룩하기도 했다. 이는 고려시대에도 실패했던 동북 9성으로의 확장에 마침내 성공하고 현대 한민족의 국경선을 확립한 상당히 중요한 성과이다.

그러나 이런 군사력이 유지되었던 것은 길게 봐도 초중기까지이고 이후로는 조선의 군사력이 약화일로를 걷는다. 이는 조선의 체제 특성을 감안했을 때 충분히 예상되는 문제였다. 조선의 창업군주인 이성계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강력한 군대를 통제하지 않을 경우 벌어지는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 조정은 중앙군부터 지방군까지 군사력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군제를 펼쳤다. 게다가 그것이 힘들다면 통제 가능한 수준까지 군사력을 축소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초기를 제외하면 조선의 군대는 외침이 발생했을 때 항상 규모도 충분하지 않고 소집도 굼떴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조정이 펼친 군제의 방향성에 있었다.

게다가 불안정하고 부실했던 재정도 조선의 군사력이 약해진 중요한 원인이다. 이는 조선 조정이 국가 운영에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낮은 조세 수준을 책정한 탓이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조세 제도를 펼친 이유는 조정이 유교적 위민사상에 근거하여 백성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유교적 명분에만 집착하고 부족한 국가 재정을 충당할 대안은 하나도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대에 돈은 많이 쓰고 싶은데 정작 세금을 충분히 걷지 않으니 군사력에 투자할 충분한 재원이 있을 리가 없다. 이런 만성적인 재정 부족은 조선의 군사 규모는 물론이고, 무기의 질, 보급, 훈련 상태에까지 전반적으로 악영향을 끼쳤다.

조선의 군사력이 약해진 또다른 이유로는 조선 초중기의 평화기동안 조정에서 스스로 대군의 필요성을 경시하고 국방 투자를 줄인 것도 있다. 조선 초중기를 거치며 몽골과 여진은 소수 세력으로 줄어들었고 왜구들도 대략적으로 정리되어 조선의 주변국은 사실상 명나라만 남았다. 그러나 조선은 명나라와 대립각을 세울 기반도 의지도 없다보니 복속을 택했고[91], 그로 인해 전란없는 안정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명나라의 지배력이 쇠퇴하자 이민족인 여진족과 일본이 발호했고 다시 전란기가 도래했다. 조선도 뒤늦게 이에 대응하고자 했지만 평화기동안 대폭으로 약화된 조선의 군대로는 이를 감당하기 너무나 벅찼다.

즉, 평화기동안 군사력이 약화되었어도 전란기가 도래했으면 이에 걸맞게 군비증강을 했어야했는데 조선은 그러지 못한 것이다. 물론, 상술되었듯이 근본적으로 조선의 국가 시스템으로는 대군의 양성이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전란이 반복적으로 터지며 전후복구도 끝낼 틈이 없이 외침이 반복되니 조선 입장에서는 군비 투자를 충분히 해낼 여유가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국가라면 외침이 반복적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최대한 신속히 군대의 방비와 전후복구를 끝내야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내지 못한 것은 조선의 국가적 능력 부족이다. 따지고 보면, 군사력 양성에 문제가 없을 수 없도록 국정을 운영한 것도 조선의 실권자들이다. 그러니 순전히 외부 요인에만 책임을 돌리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결국, 전란기가 도래하자 조선은 약체화된 군대와 국방 체계의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국토의 초토화와 수많은 인적, 물적 피해, 굴욕적인 패전이었다. 그나마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직전까지는 국방의 문제를 떠나서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을 때이니 논외로 칠 수도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에서 보여준 속절없는 모습들은 당시 조선은 물론 역사적으로 한민족에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특히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적을 상대로도 실책만 반복하다가 불과 수개월만에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했던 병자호란의 결과는 너무나 참담한 것이었다. 이는 굳이 이전 왕조들의 전공인 여수전쟁, 여당전쟁, 나당전쟁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바로 직전 왕조인 고려가 여요전쟁이나 홍건적의 난에서 보여준 실적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것이었다.

12.1. 조선군의 문제점

내 오늘의 일을 살펴보건대 우리 나라는 무략이 강하지 못하고, 조종조의 일로 말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싸워서 승리한 적이 있지 않다. 우리 나라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 2백 년 이래 여대(麗代)의 문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으로 보면 문장과 무략이 모두 고려 때만 못한 셈이다. 장수에 있어서도 고려 때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 말 홍건적(紅巾賊)의 난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 밖에 결진하여 포위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어디에서 2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는 사람의 수효가 전조보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사천(公私賤)은 날로 번성하는데 반해 군졸의 액수는 날로 감축되기 때문이니, 호령과 군정 또한 전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의(私意)로 헤아려 보건대 송(宋)나라 조정과 너무도 비슷하다. 자고로 국세가 이와 같으면 반드시 이적(夷狄)의 화를 받는 법인데 우리 나라의 일이 실로 염려된다. 무략만 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재집(宰執)들 중에도 병법을 아는 사람이 없고 신진 문사들은 전연 무사(武事)를 모르고 있다. 내가 조신(朝臣)들을 경홀히 여기는 마음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시세(時勢)를 알지 못하여 그렇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인가? 무신은 책망할 것도 없거니와 반드시 독서한 연후에야 고금 성패의 이치를 알 수 있다. 열 가지 일을 알아도 한 가지 일을 시행하는 자 또한 드문데 하물며 전연 옛글을 모르는 데야 말해 뭐하겠는가. 고사(古史) 뿐 아니라 병가(兵家)의 글을 아는 자 또한 전무하다."

선조 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 기사

임금이 경기 감사 유엄(柳儼)을 소견(召見)하였다. 이때에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의 행차가 있었는데, 경외(京外)에서 어수선하여 뜬소문이 크게 떠도니, 임금이 몹시 근심하여 도성을 지키는 것과 강도(江都)에 들어가는 것의 편의 여부를 유엄에게 물었다. 이에 유엄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외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자, 유엄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약소 국가입니다. 몽고(蒙古)가 공격해 오면 청인(淸人)의 경우와 같이 접대(接待)해야 하고, 비록 서달(西韃)이 공격해 온다 하더라도 또한 이와 같이 할 뿐입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아무 대답 없이 주서를 돌아다보며 이르기를,

"이런 말들은 모두 기록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우리 나라는 참으로 약소 국가이다. 그러나 유엄의 대답한 말은 어찌 이다지도 무례(無禮)하단 말인가? 식자(識者)로 하여금 한심하게 여길 만하니, 임금의 대답이 없었던 것도 마땅한 일이다."

영조실록 58권, 영조 19년 8월 17일 정묘 1번째 기사 1743년 청 건륭(乾隆) 8년

조선이 무를 천시하고 국방을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편견이다. 오히려 조선은 군사력 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 초기부터 과거제에 무과를 정식 분야로 추가하고 무관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한 것, 화약 무기의 연구와 도입에 힘쓴 것, 조선 후기의 정치 기구인 비변사의 설치 목적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의 그러한 노력이 실효성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군이 역사적으로 보여준 많은 군사적 결함과 정규전에서의 처참한 전과를 살펴본다면 이런 의문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조선의 군사력은 소규모 도적떼나 반란군을 토벌할 수 있을 정도였지 동체급 이상의 국가와 정규전을 벌이기에는 문제가 너무나 많았다. 조선의 실권자들도 마냥 손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라 자국의 국방력이 취약함을 알자 이를 개선하려고 하기는 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조선의 국가적 한계로 인해 모두가 의미없는 노력만 반복하고 있었을 뿐이다.

  • 지방 군사력에 대한 과도한 억제
조선은 전대왕조에 비하면 편집증적인 수준으로 국가의 군사력 전반을 완전히 통제하는데 집착했다. 만약 중앙의 행정력으로 지방의 군사력을 파악하거나 통제하기 여의치 않다면 통제가 가능한 수준까지 군사력을 축소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태조인 이성계가 당대의 최고위 무장으로서 쿠테타를 일으켜 조선을 세웠기 때문에 조선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건국 초기부터 사병 혁파가 국가의 중요한 정책 목표로 자리잡았고, 사병을 혁파한 이후에는 지방의 정규군도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유목민족들을 막아내던 북방 최전선의 정예군도 포함되었다. 물론 이도 적당히만 했으면 괜찮았겠지만 문제는 그 정도가 지나쳐서 지방의 군사력 자체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 지방의 군사력과 동원력은 갈수록 부실해졌다. 그래서 이를 어떻게든 메우기 위해 세조 대에 진관 체제나 선조 대에 제승방략 같은 제도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허점이 많은 대책이었을 뿐이다. 조선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방에 견실한 군대를 양성할 권한은 커녕 이미 있는 군대에 대한 지휘권조차 잘 허락해주지 않는 경직성이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국방력의 개선은 요원했다.그래서 양란 이후 조선 조정은 지방군보다는 직업 군인 중심의 강력한 중앙군 육성에 열을 올린다. 사실, 조선 조정도 조선 군사체계의 한계를 인식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방의 군사력과 자율권을 침해하는 조선의 체제 전반을 뜯어고쳐야만 했다. 그러나 그럴만한 정치적 의지와 여유가 조선의 집권층에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실한 지방군의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조정의 산하에 확실하게 있는 중앙군을 비대하게 키우는 것이었다. 이는 거대한 중앙군으로 수도는 물론 지방의 군사적 공백까지 커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오군영으로 불리는 조선 후기 중앙군은 크게 증강되었다. 전성기에는 10만이 넘는 규모를 자랑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비대해진 중앙군은 그 부작용으로 막대한 재정 수요를 창출했다. 이는 당연히 조선왕조의 빈약한 재정으로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이런 중앙군도 장기간의 견실함을 유지하지는 못한 채 나중에는 병력이 축소되고 부실화되었다.
  • 극심한 재정난
현대와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국방력 강화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경제력이었는데 이 부분에서 조선군은 문제가 많았다. 조선은 대부분의 존속 기간동안 왜곡된 조세정책으로 인해 국가 행정 전반에 걸쳐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당연히 군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진왜란과 북방 여진족의 발호 이후로는 조선 조정도 군사력 강화 의지를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정작 조선의 조세 수취 체계와 재정정책은 그러한 조정의 의도와 반대로 가고 있었다.이는 근본적으로 조선 조정이 백성들의 조세 수준을 대안도 없이 비현실적으로 낮게 책정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이런 명목 상 낮은 세금은 조선의 전통이었다. 유교를 국시로 삼은 이후 유교에 근거한 청빈사상과 위민정신을 실현하겠다는 것이 조정의 목표이자 명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조선의 이상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국가 운영에 절대 현실적이지는 않았다. 현실적으로는 나라에서 가면 갈수록 국방, 학문, 행정 등 정부가 지출을 해야할 부분은 늘어만 간다. 그런데 국가 예산의 재원인 세금 수준은 어거지로 낮게만 유지한다면 그런 재정정책이 지속될 수 있을 리 없다. 그나마 이런 모순된 재정정책의 부작용이 폭발하기 전이었고 각종 개혁의 성과가 나타났던 건국 초기까지는 문제가 가시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조선 조정은 무슨 일을 해도 무조건 재정난의 수렁에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국방 부문에서 이런 조선 수취체계의 모순이 드러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보법에 관한 문제이다. 조선은 초기에 봉족제에 따라 군사 1명당 조호[92]를 병종과 빈부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하였다. 그래서 병역 부담이 가구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유연했다. 평균적으로 3명이 한호를 이루되, 토지 소유의 빈부를 기준으로 의무자의 재산에 맞추어 부유한 집안은 1정을 1호로, 가난한 집안은 5정을 1호로 배정하고 부유한 이가 군역을 지는 경우에는 조호를 지급하지 않는 식이었다.그런데 세조 때 보법이 시행되면서 호가 아닌 인정을 기준으로 계산하도록 변한 데다 그나마도 1명당 2정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군역을 번거로운 조사와 산정 과정 없이 간단하게 부과하고 군사의 수를 크게 늘릴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보인이 맡는 경제적 부담이 과중해진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일단 과거에 비해 군역의 절대적인 부담 자체가 커졌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문제였던 것은 가계 수준에 맞추어 유연하게 책정되던 군역이 일률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빈민층의 군역 부담을 심화시켰다.결국 보인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유랑인이 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군인들의 임금이 복무 비용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버렸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지원이 사라지자 군역을 실질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정병 역시 제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 이전에도 존재했던 군역의 폐단은 보법을 계기로 완전히 폭발했다. 이는 군인계층의 붕괴와 양인의 감소 현상을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임진왜란기에 조선에 제대로 된 군인계층이 거의 없었던 것은 여기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 취약한 백병전 능력
전술 및 군사 훈련 측면에서 조선군이 지닌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다. 조선군은 동시대 타국의 군대에 비해 유별난 수준으로 원거리 무기에 집착했다. 사실 이는 조선만이 아닌 모든 한반도 국가들의 공통적인 군사적 특징이었다. 영토의 좌우 폭이 좁고 그나마도 산지로 뒤덮여있는 한반도의 지형에서는 산성에 틀어박혀 원거리에서 적을 요격하는 전술이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군은 궁술과 화포를 위시한 원거리 화력은 제법 우수했지만, 역으로 근접전 및 백병전 능력은 극히 부실했다. 그러나 조선군의 화력은 백병전 없이도 적을 섬멸할 수 있을만큼 강하지는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기실, 조선군보다 화력과 기술력이 몇십 배나 우월했던 근대 유럽의 군대들조차도 총검 돌격과 기병전을 비롯한 백병전을 수행했다. 백병전의 종말은 근대에 이르러 기관총이 발명되고서야 가능했다. 그런데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결국 전근대 군대 수준이었던 조선군이 원거리 화력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웠다.조선군의 부족한 백병전 능력에서 무수한 군사적 문제점들이 파생되었다. 일단, 화력에서 적을 압도해도 정작 백병전으로 적에게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다보니 적을 확실하게 섬멸하는 결정력이 떨어졌다. 게다가 적이 어떻게든 조선군의 화망을 뚫고 백병전을 걸어오면 맥없이 진영이 붕괴된다는 치명적인 약점도 생겼다. 이렇게 백병전과 난전에 취약하다보니 기병이라도 동원하지 않는 한 전술의 폭이 너무 좁다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히든카드였던 기병 전력조차도 후기로 갈수록 중기병 전력은 유명무실해지고 궁기병 위주로만 편성되어 충격력이 너무나 부실했다. 조선군의 형편없는 백병전 능력은 이전 왕조들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군사적 퇴보 중 하나였다. 수성전과 궁술이 중심이었던 것은 이전 왕조의 군대도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백병전을 절대 경시하지 않았다. 신라는 화랑을 중심으로 엘리트 무사 집단들이 무예를 꾸준히 수련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수박이나 격구 같은 실전성 높은 무술들이 성행하였고, 척준경, 이의민, 한희유 등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무장들도 많았다. 이전 왕조들의 군대는 최소한 병사들에게 창검술의 훈련은 꾸준히 시켰었다.이런 군사적 퇴보가 일어난 것은 조선군이 자신의 화력을 과신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선군의 재정난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의 재정 문제가 크지 않았던 건국 초기에는 조선군의 백병전 능력이 그다지 부실하지 않았다는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초기에는 조선군에 방패검병인 팽배수와 중기병 전력이 꽤나 견실하게 편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기에 접어들어 예산이 부족해진 조선군은 비용 감축을 위해 상대적으로 효용이 떨어지는 백병전 관련 전력을 대폭으로 축소했다. 결국, 임진왜란 즈음에는 조선군에 제대로 된 창검술 커리큘럼도 남아있지 않은 막장 상황이 일어났다.
  • 허리가 없는 지휘체계
조선군에는 군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부사관 및 하급 장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본래 조선 초기까지는 갑사가 실질적으로 부사관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세조가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넣어 사실상 없애버렸다. 게다가 그 이후로도 조선군에는 이와 비슷한 병종이나 계급이 창설되지 않았다. 물론 이는 군대 규모가 소수일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급 지휘관들이 조금만 더 신경쓰면 군의 하부까지 통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시 상황에서 수만 단위 이상의 대군이 소집되었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고급 지휘관들만으로는 군대를 완벽히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여러가지 문제가 속출했다.그나마 중앙군은 오위인 위(衛) - 부(部) - 통(統) - 여(旅) - 대(隊) - 오(伍)로 체계적으로 편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하지만 정작 병력의 대다수를 구성하던 지방군에서 군의 통제력 부족이 심각했다. 결국 조선의 지방군은 각지의 수령들이 적당히 자기 동네 병력을 소집해서 거느리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수령을 따르는 군관들이 있기는 했는데, 이들은 숫자도 부족했고 부사관 역할에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이들은 수령의 보좌, 호위, 전령, 정찰병, 돌격장까지 여러가지 역할을 겸해야했기 때문이다. 양란기에 조선군이 겪은 위기 대부분도 하급 간부의 부재로 인한 발생했다. 군대 하부까지 세세하게 통괄하는 간부가 없다보니 당장 대군에 대한 일사분란한 통제가 불가능했다. 그로 인해 조금만 전세가 기울어도 군대가 와해되었고, 이러니 조선 정규군이 일본군이나 청나라 팔기군과의 회전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부대 간의 지휘권 단일화도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다보니 당시 조선의 군대는 일국의 군대가 아닌 다국적 연합군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중앙의 지휘력이 이리 부실한 상황에서 그나마 병사들의 구심점이 될 하급 간부의 부재는 조선군의 혼란을 심화시켰다.
  • 비전문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군대
조선군 지휘체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자 임진강 전투, 칠천량 해전, 강화도 함락, 쌍령 전투와 같은 졸전들이 발생한 원인이었다. 조선군은 군사 지휘에 있어서 정작 전문가인 무관들보다 비전문가들인 문관들의 입김이 강했다. 이러다보니 장수들도 자율권이 매우 적었고 되려 문관들과 조정의 눈치나 봐야할 때가 많았다. 당연히 문관들의 지휘 간섭도 일상적으로 벌어졌다.조선시대고려시대보다 무신들에 대한 대우가 좋아졌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런 현상은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군사 반란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무관들의 지휘권과 자율권이 제한되는 정도는 고려보다 훨씬 심했다. 즉, 무관들의 대우가 개선된 것과 별개로 체제 내에서 무관들에 대한 불신은 오히려 심해진 것이다. 특히 조선이 고도의 문치주의를 추구했다는 것도 문제를 심화시켰다. 무관들의 지위가 개선된 것 이상으로 문신들의 권한이 비대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대해진 문신들의 권한은 무관들의 군사지휘권까지 침해할 정도였다. 물론, 권율처럼 군사적 식견까지 뛰어난 문관이 지휘권을 가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선 문관들은 그러지 못했다.통념과 달리 조선의 문관들은 마냥 문약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전시에 장수들보다도 호전적으로 돌변했다. 그러나 지휘관들이 보기에는 공격하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인데도 이들은 그냥 닥치고 공격하라며 닥달하는 바람에 그 호전성이 아군의 발목만 붙잡았다. 임진강 전투에서 한응인이 강변 군사의 목을 벤 일, 선조칠천량 해전 전에 이순신을 파직한 일, 쌍령 전투에서 도경유가 박충겸의 목을 벤 일, 권율까지 도원수로 있을 때 전쟁에 충실하지 않다면서 비난받은 일 모두가 '나라가 위기에 빠져 있는데 왜 빨리 공격 안 하냐? 장수라면 나라를 위해 죽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되지' 같은 맥락에서 국왕과 책상물림 관리들이 장수들을 닥달했기 때문이었다.


  1. [1] 다만 연세대학교의 경우, '근세'란 표현을 쓰지 않고 조선시대를 중세 후반부로 본다. 그리고 고려대학교는 이와 같은 시대구분을 쓰지 않고, 왕조의 변천에 따라 구분한다.
  2. [2]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릇’의 용도로 도자기가 아닌 놋그릇을 썼다. 화려한 도자기가 적은 것도 역시 이 때문. 정교한 도자기 수요가 전멸해버리니 도자기 기술이 화려해지길 기대하기 어렵다.
  3. [3] 그러나 화폐가 대중적으로 쓰였다고 보기엔 조선 말기까지 삼베나 쌀등의 현물거래의 비율이 유럽뿐 아니라 중국,일본과 비교해서도 매우 높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조정에서 군인들에게 은전을 지급하며 식량의 일부를 조선 현지에서 사먹으라고 했는데 조선에서 화폐를 받는 곳이 거의 없었다는 기록도 있다.
  4. [4] 더이상 불교가 국교가 아니라 불교 사찰은 그 세가 움츠러 들었기 때문이며, 왕궁 역시 개별 건축물은 정전 같은 주요 건축을 제외하면 딱히 규모가 작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간상 훨씬 더 크고 복잡해졌다. 경복궁이나 동궐(창덕궁, 창경궁)의 규모를 보자.
  5. [5] 이 당시의 인구란 농업이란 국가 기간산업을 지탱하고 군사력에 동원될 수 있는 인구란 개념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고급의 기술과 고도의 숙련된 인재들, 다시 말해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인적 구성원의 개념을 통칭한다.
  6. [6] 태조 왕건삼국통일전쟁 이래로 황폐해진 평양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 백성들을 이주시켜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처음에는 평양 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로 삼았다가 이어 서경으로 개편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 이전에는 사실상 버려진 땅이었다.
  7. [7] 이를 잘 보여주는게 사헌부과 사간원이라는 존재였다. 왕이 자신의 임의대로 명령을 내린다 해도 이들이 적법성을 따져 부당하다고 거부하면 왕 역시 GG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8. [8] 특히 연산군으로 인해 발생한 중종 반정이후 왕권은 급격히 쇠락해졌는데 '왕권의 회복=절대권력의 인정=폭군화'란 논리로 신료들이 왕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마저 견제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왕위에 오른 중종은 좌절감을 겪어야 했으며 신료들은 왕의 왕권 수호및 회복 시도를 '제2의 연산군의 출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어떻게든 막았다.
  9. [9] 『한국경제통사』
  10. [10] 아전들이 공식적인 급여 자체가 아예 없었다고 흔히들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즉, 아전들도 급여 자체는 분명히 받고 있었다. # ## 다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향리들에게 비공식적으로 돈을 준다 같은게 말이 안되는 것이, 수령이 지방 자금을 횡령하거나, 자기 주머니라도 털어서 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읍사례라고 해서, 조선후기 수령들이 자체적으로 내부 규칙을 제정해서 향리들의 인건비와 업무에 필요한 비용을 지급하려고 한 기록은 있으나, 이것도 드물게 나타나는 사례에, 무엇보다, 18,19세기에나 나오는 기록이다.
  11. [11] 조선 초기에는 과전법에 따른 과전이 주어졌으나, 이 과전이 워낙 부족한데다 워낙 적은 녹봉 때문에 관료들의 수탈이 일상이 되자 결국 관수관급제를 거쳐서 폐지된다.
  12. [12] 심지어 한양에 있는 경군도 시전을 열어서 그 수익원으로 유지했고, 강화도 수군은 수로 이용로를 받아서 유지했다.
  13. [13] 정약용이 감독한 수원화성은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수원 화성 건립이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역점 사업이기 때문이다. 재원 만들고, 의궤 만들고, 기록을 저렇게 꼼꼼하게 남긴 것은 정말로 수원화성 정도이다.
  14. [14] 조선시대에 민란이 일어나면, 지방관은 추방으로 끝나지만 아전은 죽는다.
  15. [15] 이걸 공식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이전에 수탈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
  16. [16] 조선시대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여성 중 한명인 신사임당의 대외적 이미지가 "현모양처"란 걸 생각해보자. 물론 신사임당은 글과 그림 솜씨가 뛰어나고 굉장히 머리가 좋았으며 정치적 감각이나 현실감각도 뛰어났다. 또한 당대에도 뛰어난 화가로 이름 높았다. 그러나 그녀의 대외적 이미지는 조선 후기를 거쳐 현모양처가 가장 짙게 남았으며, 조선 후에 비해 비교적 여권이 높았던 당대에도 그녀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화가와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곤 하나, 만약 신사임당이 그 재능으로 남자로 태어났으면 당대를 휘어잡는 학자나 정치가가 되었을 것이다. 멀리 갈것도 없이 아들 이이가 고위관료이자 학자로서 미친 영향력을 생각해보자. 물론 신사임당이 여권이 추락하는 과정에서 그 재능이나 명성이 평가절하당하고 현모양처의 이미지만 지나치게 강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낮은 여권우로 그 재능에 제약받은 것도 사실이다.
  17. [17]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권은 더욱 추락해 아예 여성들이 교육을 받는 주요 목적 중 하나가 현모양처가 되기 위함, 즉 남편을 잘 섬기고 아이를 잘 기르는 목적이 된다. 실제로 이 흔적은 근대가 아닌 현대 대한민국까지 남아있었는데, 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에 7,80년대까지 여성들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최고 명문대에 보내는 걸 꺼리는 트렌드가 남아있었으며 (이 때문에 7,80년대엔 최상위권 대학에 여성들이 적었으며, 공부 잘하는 여성들이 여대에 주로 몰려 이화여대같은 대학이 리즈 시절을 누렸다.) "신부수업"이라는 말은 90년대까지도 널리 남아있었고, 사실 이런 성차별적인 생각의 잔재는 기성시대를 중심으로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18. [18] 다만 조선도 초기에는 지금의 태국인 섬라곡국에서 온 사람에 대한 기록이 있고 세종 앞에서 중동에서 온 아랍인쿠란을 낭송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중국인, 일본인 말고도 머나먼 타국에서 온 외국인들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분명 있으며 초기 이후에는 19세기 이전까지 조선에 중국인,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들이 거의 안왔다는점도 한몫했는데 중국이나 일본도 그들이 서구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서구인들이 직접 찾아와서 교류하였다. 사실 제국주의 시기 이전과 이후의 서구 열강은 질적으로 다른데다가 앞서 언급된 아랍권, 동남아 등이 제국주의 시기에 어떤 일을 당했는지 생각해보면 외국인과의 교류 부재가 열강에 첫개항을 한 이후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게 했다는 관점은 매우 문제가 있다. 특히 제국주의 시기에는 일본을 제외하면 성공적으로 서구화, 산업화를 이루어낸 나라가 없다. 태국도 나라 보존은 해냈지만... 당장 유럽과 붙어있는 오스만 제국마저도 제 때 서구화를 이룩하지 못했다가 1차 대전 패배로 나라가 공중분해된걸 아타튀르크가 어렵게 지금의 터키로 대체했으며, 그 일본조차도 본격적인 서구화를 이루기 이전에 막부가 내세운 정책은 다름아닌 쇄국이었다.
  19. [19]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불교 탄압은 줄어들었으며 이후 불교는 한반도 내에서 쭉 지속된다. 일례로 임진왜란 직후 왕실과 국가의 주도로 사찰 복원과 건립이 활발해진 것 등.
  20. [20] 조선조 가장 기반이 약했던 철종도 진짜 작정하고 막나갔으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얼마든 휘두를수 있었다. 단지 그 뒷감당이 두려워 자제했을뿐이다.
  21. [21] 영국군이 매관매직으로 인해 크림 전쟁발라클라바 전투에서 개박살이 난 이후에야 매관매직이 사라졌을 정도로 19세기까지 유럽에서는 매관매직이 합법적인 전통이었다. 애당초 과거제도 같은 시험을 통해 관료나 군인들을 선발한다는 개념 조차 없었을 정도였다.
  22. [22] 유럽에서 지방 말단 관료는 공식적으로 돈주고 자리를 살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유명한 공식적 매관매직 제도는 근세 유럽의 군 특히 육군 전투병과의 임관 및 진급 제도로 임관 진급하기 위해서는 일정 근속 년수를 채운 뒤 돈으로 계급을 샀다. 원래는 정부의 지원 부족을 육군 장교들이 자기 돈으로 해결하던 게 공식적인 제도가 됐던 것이다. 특히 영국 육군의 사례가 유명한데, 얘네들은 크림전쟁 때까지도 이 시스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발라클라바 전투로 대표되는 크림전쟁에서의 영국 육군 기병대의 삽질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거였다.
  23. [23]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평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
  24. [24] 실제 총통위가 폐지되고 궁시 위주의 군제로 개악 개편된 시기는 세조 치세이나 군사력 약화가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하는 시기는 성종대 이후 부터였다.
  25. [25] 그러나 대동여지도는 동시기 서양 기술로 제작된 지도에 비교하면 그 정밀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있다.
  26. [26] 다만 이것은 일본이 서서히 국가 막장 테크를 타던 것도 한몫을 했다. 조선 통신사를 접대하는 비용을 조달하려다가 민란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을 지경이니,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접대하는 수준을 축소하자는 논의가 나올 판이었다. 당장 조선 통신사가 중단된지 불과 50년만에 일본에서 무슨 사건이 터졌는지를 보자. 그리고 조선 통신사가 폐지된 지 불과 12년 만에 오시오 헤이하치로라는 사무라이에도 막부의 무능함으로 인해 백성들이 굶어죽는 사태에 분개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조선 통신사가 폐지되기 약 30년 전인 1783년에는 일본사 최악의 대기근 사건인 텐메이 대기근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 사신에게 접대하는 수준을 호화롭게 한다면 나라 재정이 버틸 수 없다.
  27. [27] 1857년의 '지구전요(地球典要)'. 중국보다 15년 늦었다. 다만 세종 시대 때 이순지가 막연하게 지동설을 주장한 적은 있었다.
  28. [28] 열린연단 문중양 참조.
  29. [29] 천문학 상위 부분은 영정조대에서 크게 보충하지 않았다. 18세기에 꾸준히 도입되었던 서양 학문이 19세기에는 다소 정체되었기 때문이다. 문중양
  30. [30] ...라기 보다는 사실 이에 대해서 의문이 있는게 신하들은 의견이 갈렸고 왕은 사형을 주장했다. 의견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법에 따라 처벌할것 또다른 하나는 법에 따르면 사형이 과하지만 일이 너무 심하니(현직 관료까지 얽힌 사건이었다!) 사형시켜야 한다 둘이었다.
  31. [31]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는 것을 말한다.
  32. [32] 당시 세종도 맹인은 아니지만 시력이 심각하게 좋지 않은 시각장애인이었다
  33. [33] 박연은 음악적인 재능은 매우 뛰어나지만, 실록에 남겨진 그의 인성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재능에 비해 인성이 아주 바르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궁의 악공들을 데리고 사사롭게 영업 행위를 하는가 하면, 누이가 죽은 뒤에 바쁘다는 핑계로 유산만 챙겨서 얼른 돌아오는 등의 행동을 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즉, 저 발언은 성격이 개차반인 박연조차도 장애인들에 대해 차별을 두지 않을 정도로 사회 통념상 장애인에 대한 시선이 좋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34. [34] 물론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런 것처럼 장애인을 멸시하는 사람이 없진 않았을 것이고, 아무리 체계가 정해져있다 한들 다 지켜졌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높긴 하다. 그래도 나라의 중심 사상인 유교에서 저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렇게까지 무시되었을 리는 없다.
  35. [35] 대표적인 예시가 제임스 팔레. 하지만 제임스 팔레는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했지 고대 사회라고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팔레는 노예제 사회가 고대 사회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며 선을 그었고, 시민혁명 이전 남부 미국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한다. 팔레교수의 조선 노예제 사회설.
  36. [36] 참고로 에도시대 '일본의 농노'들에게는 이런식의 노예의 상징이 실제로 강요되었다. 출처
  37. [37] 즉 남편에게도 출산 휴가를 준 것이다.
  38. [38] 이영훈, 11-16세기 韓國의 奴婢와 日本의 게닌(下人), 경제 사학 제36호, 2004.
  39. [39] 해당 강연에는 사소하지만 분명한 오류가 있다. 이영훈은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이 족장을 때려 죽음에 이르게 한 노비의 이름을 '막정'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한복(漢卜)'이었다.
  40. [40] 다만 쇄미록에서 오희문은 집안 노비들이 전란의 혼란을 틈타 달아난 일을 기록하며 분노하면서도 피란 중에 죽은 노비들은 없는 살림을 털어서라도 장례를 치뤄주려고 노력하는 등 노비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모습 또한 같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오희문이 노비를 학대하며 죽게한 것 자체가 명백한 악행이며 노비들도 도주한 사유가 오희문의 학대이다.
  41. [41] 정성미, 조선 시대 사노비의 사역 영역과 사적 영역, 전북 사학 제38호, 2011.
  42. [출처] 42.1 박취문 부북일기, 동침녀 상황 정리표.
  43. [43] 여담이지만 성적 학대랑은 별개로, 강간은 가해자/피해자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법으로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그렇다곤 해도 상황에 따라선 그게 그거, 즉 현대 관점에서는 충분히 강간인 경우도 많았긴 하지만.
  44. [44] 대체적으로는 노비제를 옹호하되 노비의 인권에 관심을 둔 정도.
  45. [45] http://blog.naver.com/lord2345/220375064721링크 참조.
  46. [46] 고려와 조선 전기를 비교했을 때 여권은 그다지 추락하지 않았다.
  47. [47] 앞의 두 명과는 달리 조선 후기 사람이다!
  48. [48] 양반 이상은 남자는 한문을 사용했지만 여성은 언문을 사용했다. 여성들도 일단 한문은 아니더라도 문자를 배우기는 했다는 말이 된다.
  49. [49] 한국 고전소설은 매우 높은 비율로 여성의 역할이 강조되고, 주동적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주 수요층이 여성이어서 그렇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
  50. [50] 사실 법으로 완전히 막았다고 할 수는 없다. 여성이 재혼을 하면 그녀의 자식들이 과거 시험을 치룰 수 없었는데, 이를 생각해서 양반가의 여성들이 재혼을 거의 하지 않았을 뿐 아예 안 한것도 아니며, 과거 시험과는 연이 먼 일반 양민이나 천민들의 경우 남편이 죽으면 생활이 궁핍해지고 삶이 힘들어지므로 재혼을 택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51. [51] 근대 이후의 전반적인 세계 여성 인권은 "세계 인권 사상사" 참고.
  52. [52] 다만 자녀안이 조선시대에 생겨난 건 아니고, 고려시대때부터 이미 존재했었던 것을 계승한 것이다.
  53. [53] 양반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신 관료를 일컫는 무반(武班)과 문신 관료를 일컫는 문반(文班)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54. [54] 고려도 제도적으론 양천제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인 내에 권세와 지위에 따라 귀족, 향리 등이 지배계층으로 존재했다.
  55. [55] 고려가 귀족 사회로 일컬어지지만 전대의 통일신라삼국시대처럼 귀족이라는 계급이 확고불변한 계급은 아니였다. 사실 고려도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신분간 상하 이동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세한 건 고려 문서 참조.
  56. [56] 이는 고려도 보장하긴 했으나 실질적인 면에서는 조선대의 유연성이 더 높았다. 고려의 지배층들(후대에 문벌귀족이라 불리는)의 결집도가 높았던 데다 고려의 직접적 행정력과 법제적 기반이 조선처럼 전 국토에 미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57. [57]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상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
  58. [58] 특히 세도정치와 외침으로 한참 무너져내려가던 구한말조선.
  59. [59] 그런데 나라의 최후가 아름다운 경우는 어차피 거의 없다. 로마 제국과 역대 중국 왕조들 같은 휘황찬란했던 제국들은 물론이고 소련 같은 현대의 초강대국도 끝은 비참했다. 단, 조선의 최후는 타민족인 일제에 의해 변변한 저항도 못해보고 일방적으로 점령당해 식민지가 된 것이기 때문에 더 비참하게 보이는 것이 크다.
  60. [60] 당장 조선은 사람들에게 꼴보수적인 사회의 상징이다. 당장 꼰대 같은 사람이 나오면 사람들이 조선에서 왔냐고 비아냥거리는걸 생각해보자.
  61. [61] 초창기에는 그나마 요동 정벌을 시도하거나 중국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갈수록 중국에 종속적인 태도가 되어간 것은 사실이다.
  62. [62] 다만 이 점은 일본에 대한 편견이 심한 케이스이다. 일본은 조선보다 넑은 영토(혼슈만 해도 한반도 보다 넓다.)와 많은 인구(동서로 넓은 서일본 지역은 2모작이 가능한 지역이 한반도 보다 훨씬 넓어 인구증가에 유리하다.)를 가진 나라로서 원래 한반도를 능가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고, 서양의 아시아 진출과 개항기에는 해양 국가로서의 이점까지 누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63. [63] 박지원을 위시한 중상주의적 실학자들이 제기한 문제도 이미 현대 사학계에서는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청나라 등지의 겉모습만 바라보고 나왔다는 비판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마당이다.
  64. [64] 양반 가문의 족보들을 추적해 연구한 결과로는 19세기의 인구증가율은 그 이전 시대보다 더 높았다.# 물론 일부 족보로 전체를 일반화할 수 없고, 당시 조선이 사회적으로 (특히 인구학적으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65. [65] 이전 버전의 각주에서 조공 물품을 준비하느라 조선이 등골이 휠 정도였다고 적혀있었는데, 사실 명이나 청 모두 건국 초기에나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했지 명은 세종대왕 이후로, 청은 중원에 입관한 이후로는 양국 간의 무역 관계가 합리적으로 조정되었다.
  66. [66] 일본은 8세기(나라 시대)부터 12세기(헤이안 시대)까지 견당사를 파견해 중국의 선진 문물과 불교 서적 등을 도입하였다.
  67. [67] 당시 중국 왕조였던 당나라는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20년에 한번 방문하는 것을 허가했으며, 자국의 율령 / 제도나 선진 기술, 서적류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일본 사절단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을 뿐더러 안사의 난 이후 국가 세액 확충을 위해 민간의 무역 및 도항을 허가하여 공식 외교사절 운영의 필요성이 저하되었다.(예를 들면 농민(중국 상인 및 기술자) - 소비자(일본)간 직거래가 가능해져 농협(당나라 정부) 안 가도 된다는 뜻)
  68. [68] 사실 왜구는 자체적으로 생겨난 해적에 가깝지 무역이나 기술 확보를 위한 수단은 아니었다.
  69. [69] 태조 때 원단이라는 이름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지내다가 태종 때 폐지, 이후 세조 2년(1456)에 다시 원구단이란 이름으로 부활했다가 세조 사후 폐지, 고종 광무 원년(1897)에 다시 부활했다.
  70. [70] 애시당초 ~조, ~종 등의 묘호는 오로지 황제에게만 붙일 수 있었다. 문무왕태종 무열왕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가 당나라에서 한 소리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고(물론 신라는 묘호 못 고친다고 답했다.), 조선 성종 역시 "우리는 제후국인데 묘호를 붙이는 것은 참람한 일이다."라고 발빼던 적이 있었다.
  71. [71] 거의 정확히 2배다! 98 x 2 = 196이므로.
  72. [72] 심지어 관련 글에 달린 주석에 따르면 말값에 대한 명나라의 15,000필의 하사가 명실록 영락 5년 12월 갑신일조에 적혀있지만 조선 왕조 실록에는 이것이 없다고 하였다. 명 실록 해당 기록에는 貢馬三千疋 至遼東 勅保定侯孟善 遣送北京苑馬 命戶部運絹布一萬五千疋 往遼東酬之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73. [73] 유목에 근간한 원나라 시기 고려가 바치는 조공은 한족 국가에 바치는 조공에 비해 가혹했으며, 일본 원정에 동원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만주족의 근간도 유목 왕조였기 때문에 호란 이후 중국 전역을 지배하기 전까지는 조선에게 막대한 공물을 뜯어갔으며 이것도 조선으로는 피눈물 나는 일이었다.
  74. [74] 사실 청의 베이징 접수 이후 남명으로 어느 정도 가능할 뻔 했지만 남명이 망했다.
  75. [75] 간혹 처녀 조공을 원나라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행해지지 않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실제로는 명나라 시대에도 여러번 처녀 조공이 요구 및 이행되었다가 세종의 간청으로 사라졌다.
  76. [76] 이때 사람들은 명에 공녀로 가기 싫어서 심사장에서 미친 척에 병신 흉내에 난리가 아니였다. 이를 보고 사신이 '원나라 때 고려에서는 서로 여자를 들이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요새는 왜 이럼?'이라고 한탄하는 기록도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려 시대 때 죄다 원나라로 가길 원한 것은 아니었고, 고려 시대에 비해 조선 시대 때 상대적으로 더 가기 싫어했을 뿐, 고려 시대 때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강제로 낮선 타지에 끌려간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표했다.
  77. [77] 한확의 누이인데 이 인간의 행적이 가관이다. 이 여성뿐 아니라 이 여성의 동생도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당시 병이 나 있었다. 이에 한확이 약 한 첩 지어 왔는데 누이 하나를 팔아 이미 부귀가 지극한데 이 약을 또 어디에 쓰려는거냐는 말만 들었다. 누이 덕을 많이 본데다가 또 누이가 후궁이 된다니까 얼씨구나 한 듯 주위에서도 누이 팔아 먹고 산 놈이라고 욕했고 당대에서 아무리 천조국에 보낸다지만 가족을 적극적으로 보내려는 집안은 굉장히 욕먹었다.
  78. [78] 순장이라는 악습은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미 없어졌다.(그나마 발해때 순장을 했다는 증거가 있긴 하다.) 이러한 악습은 중국 내에서도 사라져야 할 풍습 취급을 받았지만 유목 민족들은 이를 꾸준히 유지했고, 중국의 황제가 죽었을 때 함께 순장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이민족들이 종종 나타났다. 요나라 같은 경우에는 순장의 여부가 주요 정쟁의 소재가 될 정도다. 대표적으로 황후 보고 같이 황제 가는 길에 따라가라는 신하들과 신하들이 먼저 순장되라는 황후의 대립은 의외로 빈번했다. 속내는 정치적 투쟁이었겠지만. 여진인이 주류인 금나라는 좀 덜했지만, 몽골인이 세운 나라인 원나라 전후로 대대적인 순장이 다시 나타났다가 명나라 초, 중기에나 없어졌다.
  79. [79] 사냥용 매를 많이 뜯어갔다고 한다.
  80. [80] 사실 위의 홍무~선덕제는 명 초기로서, 이른바 "종주국으로서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전쟁군주들이 군기잡은" 모습에 가깝다.
  81. [81] 일례로 조선은 여진이 강성해질 기미가 보이면 명나라의 화해 주선도 거진 씹고 예방전쟁을 행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으로 명의 경제적 손실과 조선의 심각한 전국토 황폐화로 명의 견제와 조선의 예방 전쟁을 받지 않아 누르하치가 후금을 크게 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누르하치 하의 떠오르는 후금이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후대의 우리가 아는 청나라로 발전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조선이 여진을 상대로 행하던 예방 전쟁의 수준은 말이 예방 전쟁이지 정벌, 학살이라고 부를 정도로 장난이 아니었다.
  82. [82] 고려도 예방 전쟁이라면 조선보다는 못했지만 꽤 하는 수준이었다. 예로 윤관여진정벌이라던지, 박위의 대마도 정벌이 있다.
  83. [83] 이유로 들자면 세번에 걸친 여요전쟁으로 고려가 나름 강국이기에 송나라 입장에서는 거란 견제용으로라도 고려를 어르고 달랠 필요가 있었다.
  84. [84] 다만 단순히 하늘에 대한 제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 소격서를 유교가 아닌 도교식 제사라며 폐지하자고 주장을 한 조광조 같은 인물도 있던 것을 보면 이런 교조적인 성리학 사상이 이전에도 이전에도 없던 건 아닌 듯 하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중종을 제후왕으로 깎아내리는 사대주의적 발언까지 했을 정도로 조광조는 교조적이었다. 물론 조광조는 지나친 교조주의와 이 발언을 포함하여 왕에게 무례한 발언으로 결국 중종에게 사사된다.
  85. [85] 이거를 그냥 단순한 답없는 수구성으로 보기는 쉬운데, 바로 이 해에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게다가 중일전쟁과 일본의 중국 대륙을 향한 야욕은 하루아침도 아니고 당시 식자들은 30년대 초반부터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국제적 조류였다. 조선이 일본에게 침략당했을 때 중국이 구원군으로 왔던 역사적 전례를 생각하면 단순한 보수성의 발로일수도 있지만 반대로 굉장히 첨예하고도 일제 당국 입장에선 어쨋든 '무해한 구시대적 종교 문화 행사'로서 제지할 명분이 없다는걸 노린 정치적 발언이었 가능성도 있고, 어쨋든 관련 사료와 그 해당 문맥을 먼저 제시, 분석하지 않고 일차원적으로 '그냥 노답 보수주의자들이 그때까지도 있었단 반증이다!'식으로 주장하기엔 재해석의 여지가 많다.
  86. [86] 다만 이 부분은 현재에도 한국 내에서 존재하는 반미, 반일이나 친중 등 일종의 정치적인 목적이나 반외세적 성향 등의 영향일 가능성은 있기는 하다. 당시라고 그런 사상이나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
  87. [87] 물론 에도 막부도 강력한 쇄국 정책을 실시했는데,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냐면 해외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아예 입국 자체를 못하게 막았다.
  88. [88] 이전 서술에서 이 부분은 고종에 대한 옹호론은 될 수 있어도 조선에 대한 옹호론은 될 수 없다며 오랫동안 나라의 문을 닫고 사대만을 해 와서 유럽의 문명에 대한 이해가 사실상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였다고 말하지만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사대는 절대 문을 닫아 거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조선의 소중화주의를 비판해야 옳다.
  89. [89] 고종은 일본에 대해서 을사조약 이전까지 할수 있는 한도에선 최대한 저항을 했다. 단 무력적 수단을 제외하고
  90. [90] 다만 이 부분은 왕조가 '사대'에 익숙해져서 독립과 외교에 대한 관점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조선 내부의 갈등이 심해져서 대외적인 항쟁이 어려웠다거나 하는 등등의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기는 하다.
  91. [91] 직할령으로 편입된다는 것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명나라의 의중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92. [92] 봉족호. 경제적으로 군인을 지원하는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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