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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5.18이 무장폭동이 아니라는 근거
2.1. 국회 해산
2.1.1. 비상계엄 확대는 정당한 법절차를 받았다는 주장
2.2. 김대중 석방운동 혹은 배후조종이라는 주장
2.3. 최규하의 민정이양 약속
2.4.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
2.5. 교도소 습격사건
2.6. 윤한봉의 사전 무기고 답사에 따른 조직적 폭동이었다?
2.7. 시위대가 과격시위를 해서 공수부대원이 진압했을뿐이다?
2.8. 최초 사망자는 시민이 아니다?
2.8.1. 최초 사망자는 경찰관 4명이다?
2.8.2. 공수부대원이 18일날 실종되서 19일날 시체로 발견된 증언이 있다?
2.8.3. 공수부대원이 18일날 실종되고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2.9. 최초 시위는 민주화운동이지만 시민군 결성부터는 폭동으로 서로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
2.10. 5.18을 성격이 다른 사건과 비교하는 행위
2.10.1. 프랑스 대혁명처럼 이기면 혁명, 지면 폭동이다?
2.10.2. 5.18이 LA 폭동과 성격이 같은데 이름만 다르게 부른다?
2.11. 그 외의 폭동설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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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5.17 내란 · 배경 및 전개 · 계엄군의 학살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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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마을 총격사건 · 광주 교도소 습격사건 ·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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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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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 · 5.18 연고대생 북한간첩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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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2년 말 무렵부터 북한군 개입설이 신뢰성을 잃으면서 고개를 들고 있는 주장으로, '"5.18 당시 어쨌든 무력을 이용한 폭동이 일어난 건 사실이니 군인은 폭도를 사살해야만 했다."라는 주장이다. 4.19폭동이야...그러니깐 대통령하야하지 않을수가 없잖아...?[1]

2. 5.18이 무장폭동이 아니라는 근거

2.1. 국회 해산

1980년 5월 12일 여야는 20일 임시국회를 열어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유신헌법을 개정하는 논의를 진행시키기로 합의했다. 양당 국회대책 계엄해제 논의 등 활성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보안사가 민주공화당을 이끌던 국회의원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진만 등을 국회의 동의없이 불법체포하고 신민당을 이끌던 이철승, 김영삼을 가택연금에 처하면서 임시국회는 정상적으로 열릴 수 없게 됐다. 더욱이 1980년 5월 20일 노태우의 지시를 받은 33보병사단 101연대 소속 병력이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국회에 등원하던 국회의원의 출입을 금지함으로써 제10대 국회는 실질적으로 해산 상태에 처했다. 제10대 국회의 역할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의결에 따라 만들어진 국가보위 입법회의가 대체했다.

신군부의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는 국회가 계엄령 해제, 개헌 논의를 이끌어 나가게 되면 군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될 것을 우려하여 단행된 정치테러의 성격이 짙다. 1997년 대법원은 이처럼 국회의원 등의 권한을 침해하거나 배제함으로써 그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은 국헌문란(내란죄)에 해당된다고 판결내렸다.

2.1.1. 비상계엄 확대는 정당한 법절차를 받았다는 주장

명분론 중 특히 자주 사용 되는 것이 "비상계엄 확대는 정당한 법절차를 받았으며, 당시 일개 군인에 불과한 전두환에겐 실권이 없었다. 모든 사태를 좌지우지 한 흑막은 최규하이므로, 모든 책임은 최규하에게 물어야 한다."라는 주장이다.

간단히 말해, 전두환5.18에 별로 관여되지 않았으니 5.18의 책임은 최규하가 져야한다는 소리인데 전두환은 1980년 4월 14일 이후 제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도 겸직했기 때문에 국무회의에도 참여가 가능했었고 5.17비상계엄확대에도 관여 가능한 상태였다. 또한 이시기 중앙정보부장은 국무회의에서 국방장관보다 높은 직위였음으로 매우 깊게 관여되어 있다.

5.17일 전군지휘관회의에서 육참총장이 참여한 가운데 비상계엄 확대가 결의 되었고 그날 저녁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었는데, 이 당시 국무회의가 열리던 중앙청을 계엄군이 둘러싸고 신분증을 검사하며 위압적인 행위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원에서는 비상계엄 확대에 대해 "내란 행위자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라고 판시하였다. 즉, 비상계엄행위 자체가 국헌문란행위에 의해 발효된 것이다.

또한 당시 계엄군 사령관이였던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은 전두환이 임명에 관여[2]했으며 확대계엄 당시 계엄군 투입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의 사전재가를 받은 일이 없고, 통상적으로 사후에 허가를 받았다라는 증언을 하였다.

즉, 확대계엄(전국계엄) 때는 계엄사령관이 대통령에게만 계엄 내용을 직접 보고하도록 되어 있어 다른 국무위원들이 개입할 수 없고, 심지어 계엄사항조차 최규하는 볼짱다본 후 사후보고만 받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최규하 대통령이 총책임자이고 전두환이 일개 사령관이니 모든 책임은 최규하에게 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이처럼 명분론을 내세울 경우, 오히려 시민군이 어떠한 수단을 사용했더라도 그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논리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신군부의 만행을 합리화할 수 없는 것이다.

2.2. 김대중 석방운동 혹은 배후조종이라는 주장

인터넷 일각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고인모독과 지역차별과 연계된 것으로, 광주민주화 운동은 계엄령 철폐를 주장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라 특정인, 대개 김대중의 석방운동이나 김대중과 같은 인사에 의한 배후조종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외쳐졌던 구호 중 하나가 "김대중을 석방하라"였음을 지적하고, 또한 김대중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나를 위해서 광주시민들이 죽었다"라는 발언을 발췌해서 그 근거로 삼곤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일단, 김대중과 광주시민들은 1980년 당시 서로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다. 김대중은 체포된 이후 며칠이 지나서야 광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으며, KBS 다큐 <푸른 눈의 목격자>에 의하면 광주시민들도 김대중의 자세한 상황에 대해 서독의 방송기자가 외신을 전해주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또한 드라마 제5공화국등의 매체들에서 나타나는 묘사 또한 김대중 대통령이 취조실에 감금되어 있다가 전향서를 제출하라는 회유술 중 하나로 광주항쟁과 관련한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나온다. 실제로,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전두환 정부는 강도 높은 언론 통제 정책을 폈다. "광주사태"에 대한 가장 빠른 보도는 항쟁으로부터 닷새 후 동아일보의 석간이었고, 이 마저도 정부측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한, 검열된 소식지에 가까웠다.

뿐만 아니라, 김대중이 배후라는 주장은 5.18이 진행되고 있을 때는 없다가 이후 신군부가 김대중의 내란 음모 사건을 조작하면서 나타났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당시 김대중은 "본적도 없는 생면부지의 학생에게 몇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광주에서 일을 벌이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말도 안되는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이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표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당시 광주 시민들, 더 나아가 호남에 대한 차별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호남에 대한 경제, 정치적 차별은 눈에 띄게 심해졌다. 당시 정부의 4대 권력 요직인 중앙정보주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치안본부장에 호남 출신은 넷 모두를 통틀어서 치안본부장에 단 한 명 뿐이었고 그나마도 임기는 고작 10개월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이었고,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심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는 등 실질적인 야당 지도자로 성장했다. 때문에 박정희, 나아가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의 선거에 대한 참여를 심하게 견제했다. 이런 맥락을 감안하면,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는 당연히 민주주의의 어긋나는 김대중 후보에 대한 부당한 억압을 멈추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고의적으로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문구와 함께 있는 "비상계엄을 철폐하라"는 구호는 일부러 모른척하곤 한다.

더욱이 김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곳[3]에서 벌어진 일이며 김대중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차별을 받다가 희생당한 일이니 당연히 지지자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하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마치 6월 민주항쟁 당시 "호헌철폐"와 함께 외쳐진 구호로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가 있었다고 해서 6월 민주항쟁을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이한열에 대한 부활을 요구한 것으로 격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2.3. 최규하의 민정이양 약속

박정희 사망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최규하가 민주적 헌법으로의 개헌과 정권 이양을 약속했는데, 그것을 믿지 않고 시위를 일으켰으니 폭동이라는 주장.

이것 역시 터무니없는 주장인데, 당시 비상계엄이 선포된 명분은 '대통령의 유고로 인해 국가의 안보가 위험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새로 당선된 이후에도 계엄령은 해제되지 않았다. 이에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5월 14일 전국 32개 대학 가두시위

5월 16일 국무총리 신현확이 늦어도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추후 선거를 실시해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5월 16일 국무총리 신현확 담화 발표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인 5월 17일 정부는 신군부의 주도하에 보안의 예비검속을 통해 김대중, 김종필를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을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했다.

주요 정치인 연행 직후 신군부는 비상 계엄령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하고, 이와 동시에 계엄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면서 정치활동 금지, 대학교 휴교령, 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 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5월 18일 새벽 2시에 신군부는 국회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봉쇄했고,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또한 최규하 전 대통령은 발표 때 "이 정부는 과도정부가 아니라 안정을 위한 정부"라며 민정이양을 부정하는 뉘앙스의 표현으로 자기 정부의 입장을 발표했다.

요약하면 정부가 개헌과 정권 이양을 약속한것은 사실이나, 집회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계엄령을 해제하지 않았고 이는 많은 국민들에게 정권이 한 약속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주요 정치인 연행으로 국민들에게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확신을 갖게 했고, 이것이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2.4.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헤리티지 재단이 1985년 작성한 보고서가 광주 폭동설의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4] 물론 헤리티지 재단의 입장이 미국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해당 보고서 전문만 놓고 보면 헤리티지 재단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6.29 선언 이후의 보고서를 보면, '신군부에 의한 학살', '민주화 운동' 으로 입장을 선회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1988년 보고서2005년 보고서2011년 보고서

참고로 말해서 헤리티지 재단은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성향의 싱크 탱크로 미국정치 특히 공화당(미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게다가 1985년은 바로 미국에서 2차대전 이후 가장 강경한 우익으로 평가되는 로널드 레이건 정권 시절이다. 이때 레이건 정권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면서 반소반공이라면 동맹국의 군사독재, 인권탄압, 민간인 학살도 모두 눈감아주고 있었다. 아예 눈감아 주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CIA와 미군을 동원해서 이런 범죄행위를 지원하고 직접 동참하기까지 했다.[5] 이런 시기에 레이건 정권의 인력풀인 헤리티지 재단이 5.18을 반정부 폭동으로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행보이다. 이후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이 무너지자 미국이 동맹국의 군부독재 정권들을 무리하게 지원할 이유가 사라지고, 당연히 헤리티지 재단도 5.18을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당시 한국의 언론과 출판이 통제되던 상황에서 미국 현지에서 민간연구기관이 명확하게 확인 가능한 사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헤리티지 재단은 당시 확인가능한 선에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고, 이후 입장을 정반대로 선회했기 때문에 광주 폭동설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리고, 해당 보고서에서는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전혀 다루지 않았다.

2.5. 교도소 습격사건

교도소를 습격했는데, 이것 자체로도 폭동이라고 불릴만하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반론이 있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장이었던 한도희씨는 1995년 한 지방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시민군이 80년 당시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일부에서 법원판결을 들기도 한다. 법원판결에 따르면 시민군이 교도소주둔 계엄군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법원판결에선 시민군이 교도소 주둔 계엄군을 공격했다는 내용만 나오지, 교도소 습격했다는 내용은 없다. 만약 교도소 주둔 계엄군을 공격할 정황이 "교도소 습격"말고 없다면 당연히 교도소 습격설이 타당하나, 당시 교도소 상황을 그렇지가 않았다.

근본적으로 광주교도소는 광주에서 담양, 곡성 쪽으로 빠져나가는 29번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동광주 인터체인지가 교차하는 곳 사이에 자리 잡은 교통의 요충지이다. 즉 광주교도소가 궁벽한 땅끝마을에 있어서 거기까지 찾아간 것이 아니라 광주에서 담양, 곡성, 순천방향으로 피난을 가던지, 놀러가던지 하려면 광주교도소 몇미터 옆을 스쳐갈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사건 직후 계엄사는 폭도들이 교도소를 5차례 습격 하였다고 주장하였고, 현재 광주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는 세력은 6차례 습격 하였다고 주장한다.

광주교도소는 최초 31사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때 광주 시위대 차량이 2차례 도로를 지나가려고 했지만 철수 권고로 자진 철수 하였고, 이후 3공수여단에게 인계 하였을 때 주로 전투가 발생 하였다. 나중에 다시 20사단이 광주 교도소를 인계 받은 후에는 교도소 인근에서 총격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일부는 광주교도소 습격 여부를 알려면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를 살펴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5년 검찰에서 작성한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1995.7.18)에 따르면 1980년 5월 22일 00:40경 시위대가 고속버스 2대, 픽업 1대, 1/4톤 트럭 3대 등 차량 6대에 나누어 타고 광주교도소에 접근, 3공수여단과 교전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같은 날 09:00경 시위대 6명이 트럭에 탑승하고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광주교도소에 접근했으며, 경계근무 중이던 3공수여단 11대대 11지역대 병력과 총격전이 벌어져 시위대 3명이 사망하고 수명이 부상을 입고 도주하였으며 3공수여단은 고속버스 2대, 트럭 1대, 픽업 1대와 LMG 1정, M1소총 1정, 칼빈 4정과 실탄 약 4백발을 회수하였다고 하고 있다.[6]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는 다음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당시 3공수여단의 임무는 두가지였다.

3공수,265/1,261 광주교도소 경계, 남부 고속도로 차단[7]

3공수여단은 남부 고속도로 차단을 하면서 교도소 부근에서 수많은 학살을 벌였다.

5. 21.의 자위권 발동과 함께 다량의 실탄을 지급받고 광주시 외곽 주요 지점에서 봉쇄작전을 수행했던 계엄군들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계엄군들은 외곽봉쇄지역에서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했고, 외곽지역에서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3공수여단이 철수해 봉쇄작전을 수행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에서도 민간인 살상이 발생했다. 당시 3공수여단이 경계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했다. 광주교도소는 민간인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됐다. [8]

해당 부분을 다시 보자.

당시 3공수여단이 경계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했다. 광주교도소는 민간인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됐다

실제로 3공수여단 전투상보에도 무장시위대가 "바리케이드로 돌진"한 것으로 나온다.

익일인 5.22일 08:20-08:50까지 수색작전 실시하였으나 흔적은 발견 못함, 수색작전간 노획버스 1대로 정문에서 약 50미터 이격지점에 도로를 차단, 수색 복귀 후 09:00경에 2 1/2톤 탑승한 폭도 6명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교도소로 접근했으나 50미터 전방의 바리케이트에 봉착 진출을 못하자 이에 11대대에서 즉각 응사 2명 사살, 4명은 부상을 입고 도주 전과(아군: 피해 무, 2 1/2톤 1대 노획, 칼빈 1정, 실탄 230발, 엠원 1정, 엘엠지 1정 노획)

전투상보에도 "바리케이드에 봉착"한 사실이 드러난다. 교도소 습격 목적이란 건 3공수여단의 주장일 뿐. 3공수여단의 추측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3공수여단의 바리케이드에서 벌어진 충돌"이다.

원래 3공수여단은 당시에 미리 수하를 한 뒤에 발포해야했다. 그러나 3공수여단은 그러지 않았다.

5. 21. 18:49 전교사는 ‘확인사격 지시(전상자전 제611호. 5. 21. 20:55)’를 하달했다. 수하 불응시 사격하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송암동 20사단 사건, 광주교도소 발포, 주남마을과 녹동마을 주민들에 대한 총격 등은 수하 자체가 없는 발포였다. 5. 24. 외곽봉쇄 작전 부대교대 지시가 내려졌다. 이때 전 부대에 사격을 중지하고 먼저 확인한 뒤 불응하거나 먼저 사격하면 대응 사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 지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이날 하루 두 차례나 오인사격이 있었다.[9]

당시 3공수여단은 민간인을 무차별로 학살했지만 그것조차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착각 혹은 왜곡했다. 그러니 교도소로 접근하지 않은 무장시위대도 교도소 습격으로 착각했으며, 무장시위대 한테는 교도소 습격이 목적이 아니라도 교도소 경계 병력을 공격할 동기가 존재했다.

이런 상황이기에 무장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했을 거란 증거는 없었다. 그러자 계엄군은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왜곡행위를 벌였는데 국방부 조사결과 날조로 밝혀졌다.

전남합수단에서 작성한 「광주교도소 습격기도사건」에는 당시 광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류락진의 처 신애덕과 동생 류영선이 시위에 가담해 교도소를 습격, 복역 중인 류락진을 구출하도록 선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특히 류영선은 시위군중과 함께 교도소를 습격하다 총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광주교도소 습격기도사건」(보안사, 󰡔383-1989-8󰡕, 89쪽). 그러나 이 개요는 ‘5. 18’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기 위한 의도에서 조작됐음이 위원회 조사결과 밝혀졌다. 류락진이 광주교도소에 복역한 것과, 류영선이 총상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나 당시 신애덕은 합수부에 의해 시위주동자로 예비검속됐던 딸 류소영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또 류영선은 소재를 모르는 조카 류소영을 찾으려다 계엄군의 과격진압을 보고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5. 21. 전남도청 앞 발포로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사망했다. [10]

죽은 사람은 변호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죽은 사람이 습격했다는 조작을 벌인 것.

2.6. 윤한봉의 사전 무기고 답사에 따른 조직적 폭동이었다?

변희재는 트위터에 이런 주장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럼 윤한봉이 '사령관'이며 이에 따라 사전 답사과 5.18과 관련됐다는 주장은 사실인가?

일단 그 출처가 된 게 윤한봉 자신의 증언인데 정작 그 증언 안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4월 1일인데 아무도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뭔 쓸데없는 소리 한다느니 회의 분위기 깬다느니 여 다른 나라 이야기 하고 앉았다느니 그런 식으로 우스워 보인거지. 내가 잔뜩 다급해가지고 그래도 지방에서는 부산은 부마항쟁으로 피해를 많이 봤으니까……근데, 아무도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더라고. 돌아와 가지고 아예 4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한테 그 이야기를 했어. 개똥이를 만나면 이 이야기, 또 두셋이 만나면 이 이야기,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를 안 기울이고, 아 쓸데없는 소리 왜 자꾸 해싸요,아이고 그런 날이 좀 왔으면 좋겠소 내가 봤을 때는 어림 반푼어치도 인자 어림없다 이거지, 민중들이 무슨 들고 일어나야 그러지. 우리가 뭐 부마항쟁은 예측이라도 했었냐. 아 그건 어떤 특수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거지, 아이고

윤한봉은 무기답사를 주장하긴 했으나 주변 사람들에게 씹혔다.

다 잡아간거다. 기습 당한거죠. 아 이거. 와 눈 앞에 캄캄해져불죠. 왜 그냐면 기습을 예측을 못했으니까. 뭐 뜬 눈으로 밤 새우고 새벽에 이제 집에서 빠져 나가 가지고 시내 용화 후배네 집에 가서 잤어요. 안전한 곳에 가서 동태를 살펴 보니까 엉망이지. 다 잽혀들어가불고. 전대 조대 할 것 없이 전부 접수되어버리고 학생회 간부도 일부 도망가고 일부 다 잽혀불고. 긍게 인제 박살나분거야, 박살이. 아무 준비없이. 와 그때처럼 내가 후회스러웠을 때가 없었어. 왜냐면 나는 21일부터 25일로 봤지, 17일날 밤에 당할 것을 생각을 못하고, 기습에 대해서는 예측을 못했거든. 그래가지고 19일날 아침에 새벽에 빠져나갔지, 광주로. 뭐 인제 연락할 길이 없는 거야.[11]

그런 상황에서 윤한봉은 대비도 없이 당했다고 한다.

윤한봉 증언을 근거했는데 정작 윤한봉 증언에서도 그런 내용 없다.

2.7. 시위대가 과격시위를 해서 공수부대원이 진압했을뿐이다?

1980년 5월 18일, 7공수여단이 벌인 행위에 대한 동아일보 기자의 증언

일요일이었다.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평균기온 16.3도로 아침을 약간 쌀쌀했지만 낮의 최고 기온은 25.1도까지 올라간 아주 쾌청한 날씨였다.

세째 일요일이어서 상가에는 문을 닫고 쉬는 점포가 눈에 띄게 많았다. 한달이면 대개 첫째와 세째 일요일은 쉬는 날로 정하는 점포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농촌에는 바야흐로 모내기철을 앞두고 그 준비에 온 힘을 쏟고 있어서 집앞과 논밭에는 활기가 넘쳐 흘렀다.

그런 일요일이었다.

광주직할시 북구 북동 180번지 앞 큰길. 금남로의 연장이어서 그냥 금남로길이라고 불리어지는 길이다.

……얼룩무늬 군복에 머리에는 방석망이 달린 헬멧을 쓰고 손에는 방패와 방망이를 든 1개중대 가량의 공수부대 군인들.……대결이 이 횡단보도 위에 도착할 무렵 내려진 명령이었다. 그러자 군인들은 횡당보도선에 맞추어 일제히 멈추어서서 대오를 가다듬고 있었다.

유동 3거리에서 4백50m쯤 떨어진 횡단보도. 여느 횡단보도와 마찬가지로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이 횡단 보도는 북동 180번지와 누문동 62번지를 연결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길로 이어져 있다.

짧고 숨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4자 위에 서고 긴 바늘이 12자 위에 이르렀다.

바로 4시 정각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1.5톤급 차량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금속성으로 위압적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거리에 나와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

……스피커에서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이 나온 지 1분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짧은 순간을 두고 엄청난 명령이 뒤따라 튀어나왔다.

시민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딱 한마디. 이 명령 이외 어떤 세세한 행동지침이 나올 법한테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었다.

……

이 명령이 떨어지자 현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돌변해버렸다.……시위했던 학생들만 잡는 것이 아니라 젊다고 보여지는 사람이면 보는대로 두들겨 패고 잡아 끌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

'저놈 잡아라' '저기 간다'는 소리와 동시에 '아이구' '억' 소리가 터져 나와 거리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횡단보도 바로 옆, 북동 276번지 3층 건물 2층에 있는 동아일보 광주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2명의 공수부대원이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는 듯한 자세로 뛰어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대검이 꽂혀 있는 M16소총을 앞으로 내밀고 서슬이 퍼렇게 되어 있었다. 마치 총검술시범을 보이는 자세처럼 착검한 M16소총을 앞으로 겨누고 있었다. 곧 아무에게라도 방아쇠를 당겨 버릴 자세, 아니면 금방 찔러 버릴 듯한 그러한 모습이었다.

……

마침 일요일인데도 출근한 정은철총무는 바깥의 시끌벌적한 사태와는 관계없이 자기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는 '시위를 한일도 없음은 물론 구경조차 하지 않았던 터라 무슨 상관이 있으랴'는 듯 태연하게 자기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을뿐이었다.

그런데 두 군인은 다짜고짜로 정총무의 뒷 덜미를 낚아챘다. 정씨는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두 군인은 정씨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짓 이기는 것이었다. 곧 숨이 끊어 질 것 같았다. 큰 일이었다.

……

정총무는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반항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두 군인은 사무실 바닥에서 기진맥진해 찍 소리도 못하는 정총무의 두발을 양쪽에서 하나씩 붙잡고 끌고 내려갔다. 바닥에 끌린 채였다. 마치 죽어있는 짐승을 끌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2층 계단을 내려갈 때도 그대로 끌고 내려갔다.

……이 날 그는 자기가 맡은 구역의 수금실적이 나빠 하루 전날 지사장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일요일인데도 출근했다가 당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담당구역 수금을 하기 위해 출근한 배달학생 박준하군(광주공고 1년)도 수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리고나서 끌려나가다 계단에서 실신해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그들은 그대로 팽개쳐 두고 내려가 버렸다.

……동아일보 광주지사 바로 앞쪽에는 두대의 트럭이 유동 3거리 쪽을 향해 정차해 있었다.

……

그 차량에는 길거리와 건물 안팎에서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이 가득가득 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머리와 코, 입에서 피를 토해 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의 하얀 옷자락은 피에 젖어 엉망으로 되어있었다.

어떤 사람은 기진한 듯 눈만 껌벅껌벅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 사람이 붙잡혀왔다. 그의 머리나 코에서는 피가 줄줄 쏟아져내렸다. 웃옷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끌고 온 군인이 대기 중인 군인에게 인계하면 또 한 차례 군화발이 날아오고 몽둥이 세례가 쏟아졌다. 그리고 짐짝 실리듯 트럭위로 이끌려 올라갔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또 다른 군인이 '이 새끼 머리 숙여'라며 군화발로 머리와 등을 짓밟는다.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아야 끝이 난다.

……

그때 마침 택시 한대가 지나가려다가 이들에게 붙잡혔다.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색동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예쁜 새색시가 차에서 끌려 나왔다. 한 눈으로 보아도 신혼부분임에 틀림 없었다.>……이 길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공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또는 광주역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다. 그래서 이 신혼부부는 공항이나 역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그들 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택시에서 끌려나오자마자 신랑은 무자비한 몽둥이와 장작개비 그리고 군화발 세례를 받았다. 이유도 없었다.

순식간에 일이었는데 신랑은 '아이구, 눈이야'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붙잡고 땅바닥으로 뒹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

신부도 군화발로 채였는지 한복은 엉망이 된 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사람 살려!"

신부는 자신의 몰골은 돌아보지도 않고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이 쌍년"

군인들은 또 다시 신부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하더니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김영택의 증언. 김영택, 현장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 1988, 사계절, 11~22

1980년 5월 19일, 11공수여단의 행위에 대한 11공수여단원 하사의 증언(본인은 5월 18일로 잘못 알고 있음),

쓰고 있는 베레모를 벗고 방탄 헬멧으로 바꾸어쓰라는 이 지시는 곧 차량에서 하차를 의미하고 어디선가 시위대와 맞닥뜨려 시위진압을 의미한다는 걸 사전교육을 통해 저희는 잘 알았답니다. 차량은 다시 양복 복개상사에서 좌회전으로 돌려서 전차량 금남로에 단숨에 달려가 관광호텔 앞에 정차를 하니 여기저기 돌멩이가 어지럽게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더군요. 차량에서 하차는 하지 않고 기다리는데 시위대는 전부 도망갔으니 전 병력이 하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른뒤(2~4분)"하차"하는 명령이 하달되더군요. 이 명령이 곧 우리 귀에는 "무자비하게 젋은 사내는 두들겨패라"는 지시로 들렸읍니다.……차량에서 하차하니 이미 다 시위대는 뿔뿔이 도망치고 누군가에 이 증오심을 풀어야겠는데 시위대는 없고 무두다 그 근처 관광호텔, 다방, 이발소 등등 건물을 수색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때 나는 관광호텔 뒤에 있는 미도장인가 하는 여관을 7~8명이서 수색하기 위해 갔더니 앞에 철문이 닫혀 있더군요.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안 열어주어 담을 타고 다른 사병이 넘어 들어가서 철문을 여니 '''몇몇 종업원이 우르르 나오더니 우리 집에는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뒷문을 통해 피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 개새끼들이 겁대가리 없네"하면서 태권도 동작 발차기로 2단 뛰어차기로 일부는 때리고 일부는 진압봉으로 구타를 시작했읍니다. 이 진압봉은 서두에 설명했듯이 너무나 단단하고 무게가 있어서 조금만 힘을 가해서 때리면 손목이나 팔목으로 막으면 팔이 부러지는 것이었읍니다. 4~5명의 종업원이 불과 2~3분 사이 하얀 와이셔츠에 나비 넥타이는 간 곳이 없이 시멘트 바닥 위에 나뒹구든 것이었읍니다. 다시 일으켜세워서 4명을 전체 벽에 뒤로 기대게 하자 마침 지역대장 소령이 오더군요. 구타 에는 장·사병이 따로 없었읍니다. 그는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신고 있는 군화발로 있는 힘을 다해서 얼굴을 한 번씩 차는 것이었읍니다.

모진 것이 사람의 목숨이었읍니다. 얼굴은 뭉개지고 피는 쏟아지고 군화발의 충격으로 인해서 뒷머리를 시멘트 벽에 그토록 강하게 부딪쳤지만 쓰러진 사람은 없더군요. 다만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얼굴로 변했지요. 한편 함께 수색하던 일부 병력 2~3명은 각 객실을 수색하여 젊은 사람은 무조건 밖으로 집합시키고 있었읍니다. 10여 명 이상의 20대 30대 젊은 사람들이 공포의 표정으로 2열종대로 집합하더군요. 그중 30대 중반의 사나이는 신혼여행 왔다고 사정을 하더군요.저희하고는 대화가 필요없었읍니다. 무조건 무자비한 구타요, 연행 이외의 방법은 통하지가 않았읍니다. 신부가 나와서 사정사정하더군요. 눈물도 피도 없었읍니다. 일단 붙잡힌 시민들은 일차례 구타가 시작되었읍니다. 왜냐하면 도망을 못 가게 한다는 이유요, 기를 죽인다는 이유였읍니다. 다음 차례는 무조건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히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차고 있던 본인의 혁대로 뒤로 손을 묶고 묶인 손으로 자신의 벗은 옷을 듣고 저희가 타고왔던 트럭 옆으로 끌고가서 다른 연행자와 함께 금남로 도로 한가운데 30~40명씩 집합 후 뒤로취침, 앞으로취침, 좌로굴러, 우로굴러 등 혹심하게 기를 죽이고 트럭 뒤에 2열종대로 집합시키는 것이었읍니다. 그후 차량에 탑승하면 손은 뒤로 묶인 상태에서, 보통 성인도 타기 힘들 정도로 높은 차량을 타는 것이었읍니다. 뒤에서 다른 연행자가 머리를 들어서 밀어 올리고 타는 연행자는 죽도록 올라타는 것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요, 또한 몽둥이 세례 때문에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모를 정도로 무섭더구요. 차량에 탑승하면 2~3명의 통신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숙여" "고개숙여" 지시합니다. 왜냐하면 고개를 들고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 용기도 생기고 특전사 요원이 2~3명이라는 것을 알면 집단으로 대항하여 도주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거나 옆사람을 보면 위에서 기다리는 요원이 또한 몽둥이로 등을 사정없이 내리친답니다. 그리고 차량으로 조선대학교 종합운동장으로 이동시킵니다.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차량이 연병장에 클랙슨을 울리면서 도착하면, 잔류하고 있던 행정병이나 취사병 경계 대기병 등이 진압봉을 들고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량에서 하차시켜 다시 줄을 세워 다시 기합과 구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글로 적을 수 없도록 구타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육관 건물에 수용시킵니다. 앞뒤 문에는 4~5명씩 초병을 세우고, 안에서 4~5명이 구타를 또 한답니다. 그리고 잠시 대기하다가 상무대 31사단으로 보내집니다. 시위를 하였든 하지 않았든지 젊은 사람이라는 죄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한번 붙들리면 3~4차례 극심한 구타와 기합 등으로 인간의 한계를 지나버릴 정도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35~37쪽 ( 편저자 윤재걸은 이 수기를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21쪽.) 참고로 이 수기가 실린 책에선 정작 수기를 쓴 사람의 정보가 전혀 없고 '공수부대원'이라고만 되어있다. 다만 글 내용을 봤을 때 11공수여단과 일치하니 11공수여단이라고 추측할뿐이었다. 그러나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12쪽, 64쪽에서 이 수기를 쓴 사람이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씨 라는 것이 밝혀졌다.

과격시위는 커녕 시위자체와 무고한 사람들이 수없이 계엄군의 몽둥이와 군홧발과 개머리판에 구타당했다. 그리고 끌려가면서 구타당하고, 끌려간 뒤에도 계속 구타당했다. 이런건 "시위진압"이 아니다. 대법원은 이것을 폭동적 시위진압이라고 평가했다. 시위진압이라는 행위가 폭동수준이였다는 것이다.

2.8. 최초 사망자는 시민이 아니다?

2.8.1. 최초 사망자는 경찰관 4명이다?

김경철 씨는 19일 새벽 3시에 사망했고, 극우선동가들이 주장하는 경찰관 4명은 20일 오후 8시 10분에 사망했다.

최초 희생자는 시민 김경철 씨가 맞다.

자세한 것은 김경철 항목 참조.

2.8.2. 공수부대원이 18일날 실종되서 19일날 시체로 발견된 증언이 있다?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은 다음 증언을 한 적이 있다.

- 5·18이 유혈사태로까지 번진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1980년 5월 계엄을 확대해 김대중·김영삼을 잡아넣으면 광주에서 '소요'가 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 아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한 부대를 배치한 것이다. 계엄을 확대하지 않으면 김대중이 대통령을 하게 돼 있었다. 군은 장악했다고 하지만 정권창출이 안 될 판이었다. 그래서 신군부는 계엄을 확대해서 김대중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5월 17일 김대중을 잡아넣으니까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5월 18일엔가 처음으로 부대가 진입했는데 그날 특전사 병사 하나가 행방불명이 됐다. 그 병사를 못 찾고 있었는데 다음날엔가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병사들의) 격분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자위권이 발동됐다고 봐야 한다. 군에 위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사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데모 진압은) 유혈사태로 번진 것이다. 처음에는 실탄을 장착하지 않았다가 병사가 시체로 발견된 이후 실탄을 장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 하지만 특전사 병사의 사망은 장갑차에 의한 사고사였다는 주장이 있다.

"아니다. 시위대에 끌려가 행방불명이 됐다가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특전사에서 그런 상황을 서면으로 보고받았다. 사고사였다면 '사고사'로 보고가 올라왔어야 하는데, 분명히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했다고 보고받았다."- &quot;5·18 '북한-미국 개입설'은 사실무근&quot;

그러나 글을 보면 알겠지만 김충립 보안반장은 목격한 것이 아니라 "보고를 받은 것이다." 이건 곧 다시 말해 실제 계엄군 기록을 검증하여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 이다. 그리고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그런 사람 없다. 당시 계엄군중 현재까지 최초 사망자로 확인된 사람은 3공수여단 정관철 중사인데, 3공수여단은 20일부터 광주에 왔다.# 18일~19일에 죽은 계엄군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반박있으신 분들은 18일~19일에 죽은 계엄군이 누군지 알려주시길 바란다.

만약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의 증언이 정확한 것이라면 오히려 당시 계엄군 사이에 유언비어가 떠돌았다는 뜻이다. 다시말해 유언비어 때문에 "격분"을 했다는 증언이 된다.

참고로 보안사 내부에서 사실과 다른 유언비어들이 퍼졌다는 건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광주에서 최초의 발포는 5. 19.에 있었다. 5. 19. 16:50 광주시 계림동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다가 멈춰선 장갑차를 시위대가 공격하자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 대위가 M16을 발포했고,(195:당시 11여단 63대대장 조창구 중령은 차○○ 대위로부터 보고를 받았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당시 조대부고 3학년인 김영찬이 유탄에 총상을 입었다. 5. 20. 01:00 보안사는 현지505보안부대로부터 “5. 19 고교생 1명(인적사항 미상)이 우측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전남의대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았다.(196: 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5. 20. 01:00, 505), 383-1980-89, 113쪽.)는 보고를 받았다. 505보안부대는 “관내 4개 파출소 파괴 집결 데모대가 쇠파이프 및 면도칼을 소지했던 점으로 보아 특정 배후 조직에 의한 조직적이고 기동력 있는 데모대로 판단”하며, “데모 진압병력에게 실탄을 미지급코 있고 경계병력만 1인당 10발씩을 분출, 장교가 통합 보관코 있을 뿐 아니라, 5. 19. 발포 사실 전무하였음을 감안할 때 고교생은 특정 데모세력에 의해 무성 권총으로 사격, 계엄군이 발포한 것으로 선동키 위한 지능적 수법”이라며, 계엄군의 발포를 부인하며 불순세력의 선동수법으로 판단했다. 계엄사령부도 고교생 총상자 확인 결과 에서 “김영찬(조대부고 3년. 19). 5월 19일 17:00 광주시 계림동 5거리에서 데모대에 가입. 장갑차에 방화하려다가 복부 관통 상해를 입고, 전남대 병원에 후송. 총탄 출구가입구보다 적으며 다수의 파편이 박혀 총기 제원 판단 곤란”으로(197:계엄사, 충정업무 일일 주요사항 (보안사, 383-1980-92, 54~55쪽 인용).)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당시 장갑차를 몰고 시위진압에 나섰던 11여단의 전투상보, 상급부대인 31사단과 전교사의 상황일지 등에는 5. 19. 발포에 관련된 어떤 내용도 찾아볼 수 없다. 11공수여단에서 상급부대에 보고를 하지 않은 채 발포 사실을 은폐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동구청은 계엄사나 보안사와는 다른 보고를 했다. 동구청은 “광주고에 서 계림파출소 사이 장갑차가 고장으로 있을 때 시민에게 총 발사로 국교생 2명, 중학생 1명, 고교생 1명 부상, 계엄군 차량으로 후송”으로 보고했다.(198: 광주시 동구청, 5․18사태일지 (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위원회, 5․18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제20권, 14~15쪽 인용).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는 1명만 총상을 입었다.) 그러나 김영찬을 후송한 것은 현장 부근에 있었던 공중보건의 정은택(현 원광대교수)씨였다. 정은택씨는 부근의 외과병원으로 김영찬을 후송하여 응급수술을 한 뒤 전남대병원으로 이송했다. 계엄사와 보안대에서는 “실탄도 지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군인들이 총을 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고 정은택씨에게 출석을 요구했으나 그는 다음날 곧바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러 광주를 떠났다고한다.(199: 5․18 첫 총상자와 그를 구한 의사의 만남 , 연합뉴스, 2007. 5. 11.) -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79~80쪽

보안사는 공수부대가 쏜 것을 시위대가 쏜 것이라고 착각해놓고는 오히려 무고한 의사를 유언비어를 퍼트린 사람으로 몰아서 출석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보안사 내부에서도 이렇게 유언비어가 퍼졌으니 검증은 당연한 것인데, 유사역사학 집단은 검증도 없이 "당시 계엄군이 18~19일날 계엄군이 죽었다고 증언했다"는 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2.8.3. 공수부대원이 18일날 실종되고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18일날 실종됐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는 주장이며 위의 김충립 증언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위의 김충립 증언에선 분명히 "발견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의 증언에 근거해도 틀린 것이다.

2.9. 최초 시위는 민주화운동이지만 시민군 결성부터는 폭동으로 서로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

이는 그나마 극우세력 중 합리적이라고 자부하는 부류에서 내놓는 주장으로, 조갑제 등 현장 증인들의 증거를 100% 무시할수 없으니 최초 시위는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만, 시민군을 결성한 순간부터는 반국가 무장세력을 결성하여 정당한 국가공권력에 대항한 것이므로 그 순간부터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무장반란으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이들은 부마민주항쟁의 경우는 똑같이 군대가 강경진압을 했지만 시민들이 무기를 들지 않았으므로 순수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만, 광주는 시민들이 무장세력을 결성한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며, 시민군 내부에서도 도청에 TNT를 설치한 과격파(이들은 무장세력, 폭도, 북한 특수군이라고 주장한다)와 무기를 반납하고 계엄군과 협상하자는 온건파(이들은 선량한 광주 시민이라고 주장한다)가 나누어졌던 점을 들어 시민군 결성 전후를 서로 분리해서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부마항쟁 때도 계엄군은 유혈진압을 준비하고 있다가 10.26 사태를 맞으면서 실행에 옮겨지지 않은것 뿐이고, 광주 시민군은 분명히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반공구호를 내걸었고, 시민군 중에 거동수상자는 간첩 가능성 때문에 계엄군에게 스스로 신병을 인도하는 등 자신들이 대한민국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권을 찬탈한 반란세력에 대항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는 궤변이라 하겠다. 시민이 반란군에 맞서는데 무기를 들었든 안 들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10. 5.18을 성격이 다른 사건과 비교하는 행위

2.10.1. 프랑스 대혁명처럼 이기면 혁명, 지면 폭동이다?

이 주장은 근본부터 틀린 주장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평가문제는 "언어적 전환"에 근거한 것인데 '프랑스 대혁명은 반란이기도 한데 반란이라 부르지는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5.18 광주민주항쟁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면 5.18 광주민주항쟁은 프랑스 대혁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과 유사한 '언어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예로 프랑스 대혁명은 행위주체가 반란이었는데, 5.18 경우는 행위주체가 상대를 하던 집단이 반란군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에선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가 내란 행위를 한 적이 없다.[12] 그러나 전두환5.17 내란을 벌이며 내란행위를 했고 이 과정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벌여졌다. 덧붙힌다면 4.19 혁명도 5.18의 경우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이승만자유당은 불법정권찬탈행위와 4.19의 내란행위를 벌였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이 행위에 저항하려는 목적으로 폭력을 쓰고 그 과정에서 4.19 혁명이 일어났다. 4.19 혁명5.18 민주화운동은 발생 이유나 내란 주체에 대한 성격이 프랑스 대혁명같은 사건과는 전혀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내란행위

내란의 주체

프랑스 대혁명 - 1792년 8월 10일 봉기

자코뱅주의자 나 과격 혁명가들

4.19 발포

이승만 세력

12.12 군사반란, 5.17 내란

전두환 세력

4.19 혁명이나 5.18 민주화운동프랑스 대혁명처럼 체제를 부수는 게 아니라, 원래 민주주의 체제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다. 오히려 이승만이나 전두환이 기존 민주주의 체제를 막은 독재세력이다. 친독재 세력들은 이승만이나 전두환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처지인걸로 착각하거나 혹은 일부러 선동하는 것 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이것은 역사왜곡 세력뿐만 아니라 리버럴, 사회주의자,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들도 범하는 오류이다.

위의 내용을 넘어가더라도, 프랑스 혁명의 당시의 정권이 지나가던 사람을 이유없이 잡아다가 폭행하고 죽이진 않았다. 5.18 당시 시민군 조직은 어디까지나 총기학살로 선빵을 날린 전두환 휘하 반란군으로 부터 살아남기 위한 조직 이였고, 총기학살 이전의 시민군 조직은 없었으며, 시민군이 광주 밖으로 나가서 청와대를 향해 진군하지도 않았다. 물론 전두환이 반란으로 정권을 잡았음을 생각하면 청와대로 가서 전두환을 끌어내렸다 해도 폭동은 아니다.

이 내용과 유사한 내용을 김재춘(5.16 군사정변, 제3대 중앙정보부장) 씨도 말씀한 바 있다.

김종필, 김재춘, 김계원, 장세동 씨 등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전두환 씨는 불참.

국회가 화제가 되고 얘기는 80년 광주문제로 옮아갔다.

장세동(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장 경호실장) 씨가 광주사태는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이라는 취지로 80년 5월의 광주상황을 설명해갔다. 그러자 김재춘씨(3代 정보부장)가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성격 그대로 '무슨 그따위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당신네들이 총칼 들고 정권 잡가고 저지른 짓을 무슨 홍경래 반란이라고?'하며 내쏘았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분은 웃으며 일어서면서 '국회에서 특위 조사할 것도 없이 결론이 이미 나와 버렸군' 하여 웃고 헤어졌다. (당시의 한 참석인사)

김충식, 2012, 남산의 부장들, 782

김재춘 씨는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을정도로 반공주의가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도 내란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분명히했고, 내란행위의 주체를 왜곡하려하자 직선으로 반발했다. 내란행위의 주체는 광주시민이 아니라 전두환 세력이라는 건 5.16 군사정변 세력한테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흔한 오해가 있는데,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사람은 프랑스 대혁명을 찬양할 것이라는 오해이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이나 전두환 세력의 국가폭력을 규탄하는 사람 중에선 프랑스 대혁명 수정주의자[13]도 있으며 부흥카페에선 프랑스 대혁명의 방데학살을 이승만 정권의 제주도 초토화 작전[14]과 비교하기도 한다.

2.10.2. 5.18이 LA 폭동과 성격이 같은데 이름만 다르게 부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같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표(記標)뿐만 아니라 기의(記意)도 유사하지 않다.

  • 행위의 목적도 다르다.
  •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내란범도 아니고, 국헌문란폭동을 벌인 적도 없다.
  • LA폭동에 개입한 군인들은 무고한 시민들을 대량으로 무차별로 두들겨 패거나 대검으로 찌른 적도 없고, 감금해서 여러명을 학살한 일은 더더욱 없다.
  • 마찬가지로 무기없이 국기 들고 달려오는 시민들에게 발포행위를 한 적도 없다.
  • 무고한 시민들에게 수사없이 학살하는 행위를 벌이지도 않았고, '자기 군인들끼리 오인사격해놓고 무고한 시민을 즉결총살한 행위'는 더더욱 벌이지 않았다.

기의(記意)가 전혀 유사하지 않는데도, 마치 언어만 다르게 부르는 것처럼 선동을 한 것이다.

오히려, LA폭동 당시 한인타운의 동포들은 흑인폭도들의 살인, 폭력, 방화, 약탈 등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흑인폭도들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극우선동가들의 논리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도 폭도들인 셈이다.

2.11. 그 외의 폭동설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신군부에 충성하는 이상, 계엄군의 모든 행위는 정당성 없는 폭력 행위로 전략한다. 그들이 광주시를 포위한 순간, 계엄군은 전두환의 개 쿠데타 위헌세력에 봉사하는 일개 무력집단으로 전락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를 진압하려다 그들에게 역으로 제압당한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의 말대로 반란군이며 탱크로 머리통을 날려버릴 존재들이 되었을 뿐. 전두환 역시 오늘날까지도 일체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예우에서 제외되고 있는데, 이는 전두환이 당시 대한민국 정부 권위를 대표하지 못했다는 성찰이다. 전두환 정권이 자신들의 부족한 정당성과 명분을 권위주의 통치로 찍어누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최초 발포명령자는 전두환이 아니다.
➜ 이것은 애매하다. 문제의 애국가 발포 사건 당시에 직접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사법부 측에서는 계엄군이 먼저 발포했다고 보고 있다. 더욱이 이 점만을 근거로 5.18 당시 공수부대의 각종 만행들을 부정하려 들거나 사건에 대해 전두환이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쩌면 계엄사령부 내의 명령을 어기고 단독적으로 발포명령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 시민군은 무분별한 파괴를 일삼았다.
➜ 아니다. 미필자와 미성년자는 무기를 주지 않았고, 신분증도 확인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시민군은 잘 조직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잘 조직된 시민군은 대민약탈 같은 무분별한 폭력이나 파괴행위를 일삼지 않았다.
  • 계엄군 철수 후 광주시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 아니다.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질서를 유지했으며 혼돈과 광기의 파괴행위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로 그런 폭동 상황이었다면 광주 시내의 주요 금융기관들 역시 이때 약탈당했다는 기록이나 보고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 실제 폭동 발발시 최우선으로 차단되는 수도나 전기는 5월 27일 이전까지 차단되지 않았다. 당시 시민군에 의한 살인사건이 3건 있었다고 했지만 그나마도 1건의 사례를 3건으로 나누어 부풀렸다는 것이 당시 경찰들의 증언이다.
  • 광주시민은 '민주화' 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 당시 광주시민들의 시위구호는 계엄철폐 독재타도, 전두환, 신현확 물러나라였다. 이게 민주화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 유네스코에서는 5.18을 uprising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무력이 사용된 반란 혹은 폭동을 의미한다.
➜ 몇 가지로 간단히 반박할 수 있는데 5.18의 가치가 그렇게 훼손되어야 한다면 이는 유네스코까지 함께 바보 만드는 것밖에는 안 된다. 또한 uprising 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는 폭동이라기보다는 봉기에 가까운 개념이고[15], 이런 정도의 의미는 3.1운동이나 4.19 혁명 때도 마찬가지였다.그리고 유네스크는 이미 5.18과 관련된 기록물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으며 선정이유로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민주주의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꼽는다. 애초에 유네스코에서 5.18을 가리킬 때는 그냥 uprising이 아니라 May 18 Democratic Uprising, 즉 민주적 봉기라 표현한다. 이는 외국 언론 등도 유사하며, 비슷한 표현으로는 May 18th K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가 있다. 참고자료1 유네스코가 말하는 5.18의 진실 EBSi: 폭동이 아닙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시민들이 버스를 몰고 계엄군에게 돌진해 사상자가 났으므로 계엄군의 사격은 정당하다.
➜ 이는 5월 21일, 도청 발포 직전 실제로 있었던 버스 돌진 사건의 책임을 시민들에게 돌린 주장이다. 19~20일에 운행하던 버스와 택시의 기사들까지 폭행당해 사망한 것에 분노한 기사들이 차량을 몰고 시위대와 함께 도청 앞에서 차량시위를 벌였다. 이 때 공수부대 측에서 버스를 향해 최루탄을 쏘았고, 버스 안에 최루탄이 터지자 당황한 기사 배용주 씨가 미처 버스의 시동을 끄지 못하고 내리는 바람에 버스가 그대로 달려서 전경들이 치여 사망한 것. 이 당시 공수부대가 버스에 실탄 사격을 하여 운전사인 김복만 씨가 사망하기도 했다. (광주매일 '正史 5.18' <61> 출처)다만 계엄군이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어쨌든 5.18은 폭동의 한 종류라고 규정되어야 하며, 굳이 타협하자면 민주화폭동(?) 정도가 될 것이다. 과격진압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 상기되었듯 신군부가 헌정질서를 준수하면서 적합한 과정을 거쳐 국민의 손으로 당선된 권력이라면 이 말이 옳겠지만 현실이 그게 아니니 틀렸다는 것이다. 신군부는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훼손한 반란모의 세력이며, 5.18 시민군은 무너진 헌법정신을 바로잡기 위한 국민적 저항이다. 이미 신군부의 12.12군사반란 그 자체가 국가전복을 위한 군사폭동인 것이다.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미 1995년에 군사반란 및 내란수괴 혐의 즉 폭동죄로 처벌받았다. 또한 이미 사법부에서 전두환 일당의 5.18에 대한 과격진압은 엄연한 학살행위라고 판결하였기에 과격진압이라고 비판하는거는 정당하며, 과격진압을 비판하는것은 부당하다는거는 순전히 개소리에 불과하다. 또한 타협 용어라는 '민주화폭동'이라는 말은 사전에 존재하지 않은 단어이기 이전에, '민주화폭동'이라는 용어는 5.18을 일종의 폭동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이기에 결코 타협 용어가 될수 없다.
  • 어쨌든 5.18은 과도하게 미화되고 포장된 사건이며, 객관적으로 성역없는 재조사를 해 봐야 한다.
김대령편견 및 고정관념/역사 항목 참고. 87년 민주화 이전 지속적으로 폭동이라 명예훼손 당해왔고 국가전체적으로 왜곡작업을 진행하여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잘못 알려져 있었던 일이다. 그것이 밝혀지고 복권된 일인데 과도하게 미화되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 유가족들은 그 이전까지 관련자들의 묘지에 찾아가지도 못했다. 또한 객관적인 성역없는 재조사는 이미 노태우 정권부터 지금까지 몇차례나 진행을 한 후에 대법원에서까지 확정된 판결이라는 것을 숨기고 아직 미완이라는 이미지를 주기위해 왜곡을 하는 것이다. 즉 정권 바뀔 때마다 재조사를 숱하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현재의 5.18에 대한 인식이다. 이걸 보고 미화되고 포장된 성역이라고 하는 건 마치 창조설자들이 진화론을 두고 자기들이 반박조차 못할 만큼 고귀하게 취급되는 성역이라고 싸잡아 욕하는 것과도 같다.
  • 5.18 당시 부상을 당하거나 PTSD 등으로 고통을 당하는 계엄군 및 경찰들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이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후대에 5.18이 과도하게 미화되고 포장된 사건이라서 묻혔기 때문이다.
➜ 당시 진압에 참가했던 계엄군 및 경찰 개개인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그들에게 '폭동 진압'을 하라고 강요했으면서 정작 제대로 된 '보훈'을 하지 않은 전두환 정권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보상과, 5.18 운동 자체의 정당성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이다. 또한, 대법원 판결에 근거하면 이들은 전두환 내란 세력에게 이용당한 집단이며, 또 다른 역사의 피해자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부당한 명령에 맹종하여 역사에 오점을 남긴 가해자들이라는걸 부정할 순 없다. 설령 신군부에게 속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저지른 행위들은 적에게도 행하면 안되는 전범행위들이었다.
  • 5.18은 전라도가 독립하려고 했던 사건이며, 이를 진압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분열됐을 것이다.
전라도의 크기를 보서는 독립이라고 하기에는 엄청 작은 크기이며 만약 전라도가 독립할 목적이었다면, 오히려 대한민국 내에서 문제들이 생기는 것을 좋아하고 문제가 더욱 커지게 부채질 했을텐데, 광주 시민들은 되려 목숨 걸고 대한민국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다. 약간의 생각만 할줄 알아도 이게 얼마나 개소리인줄 알 수 있다.
➜ 나무위키 내에 앙망문 문서에 앙망문의 원문과 해석이 있으니 참고하자. 거기에 5.18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 유튜브 등지에서 김대중노무현이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라는 발언을 하는 영상이 있다. 이런 영상들이 있으니 5.18은 폭동이다.
➜ 유튜브 등지에서 올라온 영상들은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을 전두환의 광주 폭동 발언에 합성한, 엄연히 조작된 영상이다. 이따위 조잡한 합성영상만을 근거로 5.18은 폭동이라고 할수 없다. 설령 이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5.18이 폭동이냐 아니냐는 노무현,김대중이 정하는게 아니다. 아예 시민군 참가자가 와서 폭동 이라고 해도 폭동이 아닌건 아닌거다.
  • 신군부 세력에서 주도한 폭동이다.
이 폭동설 딱 하나만큼은 맞는 이야기로, 서울고법 96노1892 판결문에도 적시되어 있다. 하도 폭동, 폭동 해대니 폭동의 주어, 주체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맞는 이야기" 부분에 걸린 링크가 그 폭동을 가리키는 링크이니 참조할 것. 전두환의 폭동적 시위진압이 폭동이며, 시민의 민주화운동이 폭동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1. [1] 실제로 4.19 당시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해 카빈과 수류탄을 탈취한 후, 군인 및 경찰들과 전투를 벌인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나가자면, 3.1운동 당시 지방 쪽에서는 농민들이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 헌병들을 구타하고 서류를 불태운 일들이 왕왕 일어났으니 이 또한 폭동이라고 해야 한다!
  2. [2] 12월 13일 전두환이 이희성 육참총장이란 메모를 보여줌 - 12.12 5.18 7차공판 지상중계 -13기사 참조
  3. [3]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경력은 제3대 총선 당시 전남 목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한 것이 시작이다.
  4. [4] 물론 상식적인 주장이 아닌, '미국도 폭동으로 생각한다!' 정도의 주장이다.
  5. [5] 중남미에서 좌파정권이 들어서면 CIA를 동원해서 군부쿠데타를 배후조종했으며, 이후에는 CIA요원들이 군부독재 정권에 고문 기술을 전수하는 등 민주화운동 탄압을 지원하였다. 이런 사례가 한두건이 아니며 최근까지도 일명 콘도르 작전의 배후에 CIA가 있었다는 기사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6. [6]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110페이지,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1995. 7. 18
  7. [7]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서 93쪽
  8. [8]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서서 94~95쪽
  9. [9]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서 102쪽
  10. [10]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 118쪽
  11. [11] 연구소 자료총서 3권에서 확인가능
  12. [12] 혁명기간을 좀 길게 잡으면 국왕부부가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다가 잡힌 사건이 있는데... 당시 국왕가족은 혁명세력에게 확실히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이해해줄 부분이 있긴 하다.
  13. [13] 여기서 수정주의는 프랑스 학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1980년대의 프랑스와 퓌레다. 한국에선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학문은 1980년대 기준도 새로운 편이다.
  14. [14] 4.3 사건 이후 이승만 정권이 계엄령을 한 후 벌인 대량학살 작전이다.
  15. [15] 당장 바르샤바 봉기가 Warsaw Uprising이라고 불린다는 점에서 이 의견은 신뢰를 잃는다. ???: 바르샤바는 어 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그러니까 독일군이기 때문에 독일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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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8-10-19 10:3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