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구

擊毬.

1. 개요
2. 상세
3. 기술
4.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을 타고 기다란 격구채로 골프공만한 크기의 공을 치는 고대~중세의 전통 공놀이 스포츠이다.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실크로드를 거쳐 당나라로, 그 후 고구려신라로 전해졌다. 특히나 고려 때에 성행했지만, 조선 중후기부터 신식 조총과 화약전차 등을 중심으로 군사 전략을 개편하면서 명맥이 끊겼다.[1]

격구와 마상재국가 무예로서 기마병의 훈련과정 중 하나였다. 군대는 막심한 지출을 발생하는 집단이고, 훈련 같은 일상 행위에서 군인을 상하게 만드는 판단은 정상적인 사회일수록 꺼리게 된다. 군인들의 치료비, 징집비가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격구 같은 무예는 국궁이 주력이었던 시기에는 기마궁수 양성을 위해서 그 시대에는 가장 안전하면서 효율성이 높은 훈련으로 각광 받았다.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말을 타고 하는 "마상격구(馬上擊毬)"와 직접 발로 뛰는 "보행격구(步行擊毬)[2]가 있다.

기마 상태로 선수들끼리 엉켜 싸우고, 격구채를 맹렬히 휘둘러야 하므로 현대의 스포츠에 비해서 매우 위험하다.[3] 의 운동 에너지와 격구채의 길이에서 나오는 원심력 때문에 강력한 타격력이 나오며, 작은 공을 신경쓰다가 떨어지면 말에 짓밟혀 죽는다! 말이 사람의 생각대로 백퍼센트 움직여주는 것도 아니니 사고위험성은 매우 높다. 게다가 인간보다 강한 말들 조차도 경기중에 다칠위험이 높은데 선수들이야 말할것도 없다. 격구의 현대 개량형인 폴로올림픽에서 퇴출된 것도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지배층들 사이에서 축국과 함께 가장 인기있던 스포츠였는데, 고려시대에는 군인들의 격구를 통해서 벼슬이 오가는등 악용된 역사도 남아있다.[4] 조선시대에는 격구 같은 놀이보다는 '활쏘기'와 '기마술'처럼 더욱 직관적인 시험 분야들의 습득을 장려한 기록들이 있으며, 격구 또한 기마궁술이 주력전술이었던 조선중기까지 인기있는 스포츠였다.[5]

기마궁수의 단련에 있어서 "격구"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기마궁술은 현대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창술에 가까운 싸움법이다. 창이 닿을락 말락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강력한 활로 '창'을 내지르듯이 싸우는 기마궁술의 싸움법에 있어서, 격구는 말을 타고 거리유지 하는 허릿심, 탄력을 적절히 훈련할 수 있었으므로 중요한 군사 훈련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마궁술의 시대가 끝나고 총포류의 시대가 찾아오자, 격구/폴로 훈련은 전술적으로 매우 위험한 훈련이 되고 말았다. 이에 관해서는, 신립탄금대에서 일본의 조총 부대에게 기마궁수를 보냈다가 전멸당한 일화를 생각해보면 된다. 근거리에서 목표물과 비비듯이 움직이는 격구 훈련은, 앞에선 그저 훌륭한 과녁(...)이 되기 위한 몸부림 정도가 되어 버리므로, 기마궁술과 함께 중요성이 낮아진다. 결국, 격구/폴로는 전 세계적으로 놀이에 필요한 경제력을 감당할 수 있으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기마부대의 육성을 장려할 필요가 있었던 서구권의 귀족/부자들의 교양 스포츠 혹은 몇몇 기마민족의 문화 스포츠로서 근근히 유지되게 된다.[6]

2. 상세

고려시대 격구에 대한 설명. 하지만 고려시대 격구를 지나치게 치켜세우며 잘못된 부분까지 칭찬하는 경향이 있는데,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격구로 벼슬을 올려주는 예시만 해도 군사행정의 문란을 부추기기 쉬운 방법이었다. 차라리 조선시대의 엄격한 군사서열 정리가 더 발달한 시스템이었다.[7]

무예도보통지 4권에 기록된 무예로 서양의 폴로(polo)와 비슷하며, 고려조선귀족들이 즐겨 하였다. 고려 무신정권의 2번째 지배자였던 정중부도 격구로 왕의 눈에 들었고, 3번째 지배자였던 경대승이 어린 나이에 명종 앞에서 격구를 시연해 2등으로 왕의 눈에 들었다.[8]

다만, 위의 영상이나 인터넷에서는 이를 종종 미담처럼 소개하고 있지만, 격구 자체는 고급군인의 진짜 능력인 지휘력, 정치력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므로, 격구를 권장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로 인해서 벼슬이 오가는 사건은 좋은 사례는 아니다.

조선 초기에 격구(擊毬)라는 이름으로 격방(擊棒)이라는 놀이가 모든 계층에서 행해지기도 했는데,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평민들까지 즐겨 행하였다. 다만, 여기서의 격구는 말위가 아닌, 평지에서 걸으며 하는 일종의 하키 형태의 놀이였다.

조선 2대 임금인 정종태종에게 양위 한 후 이 스포츠를 매우 즐겼다고 나와있는데 정종 본인이 본래 무장 출신인데다가 상왕이라는 명예직으로 나와있는 상황에서 격구만큼 시간 때우기에 좋은 스포츠도 없었는듯.

1725년 이후에는 무과의 실기시험에서 제외되었다. 위의 영상 등에서는 조선시대 무술의 천시로 사라졌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17세기 이후의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 대열 앞에서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훈련이 되었으며, 기마민족들도 화승총을 쓰면서 훈련으로서는 중요성이 매우 낮아졌다. 즉, 격구=군사력이라고 보는건, 무기의 변화를 모르는 헛소리에 불과하다.[9]

격구가 무예가 아니라는 말이 많은데 기마무예를 중시하던 조선 입장에서는 마상재와 더불어 말을 한몸처럼 다루는 기술로써 매우 중요했으며 이를 익히는 것 역시 무예였으니 무예라고 보는 것이 맞다. 현대에 들어서는 무예의 관념이 많이 바뀌었기에 일어나는 사고의 변화일 뿐.

3. 기술

여느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격구에도 많은 동작과 기술들이 존재했다. 그 중 몇가지[10] 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할흉(割胸) : 공을 격구채로 뜬 후 격구채를 말의 가슴에 곧게 대는 동작

2. 방미(防尾) : 격구채를 말꼬리와 나란히 하는 동작.

3. 수양수(垂揚手) : 원심력 등을 이용해 (쥐불놀이하듯) 격구채를 위아래로 돌리고 흔드는 동작.

4. 호접무(胡蝶舞) : 공을 공중에 던져올린 후 격구채로 받는 기술. 그 후 공을 미는 동작을 한다.

한국사에서 격구계의 메시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였다. 태조실록에 기록되어있는 이성계의 격구술을 읽어보면 그야말로 메시라고 할 정도로 진귀한 움직임들이 보이는데, 몇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태조가 공을 운행할 때에, ..., 공이 문득 돌에 부딪혀 놀라 거꾸로 달아나 말의 네 발 뒤로 나왔다. 태조는 즉시 위를 쳐다보며 누워 몸을 돌려서 말꼬리에 부딪쳐 공을 치니...

2. 공이 왼쪽으로 빠지자, 태조는 오른쪽 등자에서 발을 빼고 몸을 뒤집어 쳐서 이를 맞히고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때 사람이 이를 횡방(横防)이라 하였다.[11]

4. 매체에서의 등장

드라마 태조 왕건에선 신검애술이 각 팀의 주장을 맡아 즐기는 모습이 잠시 나온다. 다만 말을 타고 하는 마상격구는 아니고 발로 뛰면서 하는 보행격구이다. 그래서 아래의 무신의 경우에 비하면 하키같은 스포츠에 가까운 묘사로 나오는데, 작중 아버지 견훤에게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며 온갖 갈굼을 당하는 신검이 작중 유일하게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을 보인다. 해설에서는 '신검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격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언급했는데, 아마 격구라는 스포츠가 상당히 오래된 것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12]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도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마상격구는 등장하지 않고 보행격구만 등장하며 세종을 비롯한 왕족들이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위나 아래의 예와 다르게 골프처럼 매우 정적이고 우아한 스포츠로 표현했다.

드라마 무신에서는 초반에 비중 있게 나오는데, 공놀이는 둘째치고 격구채로 상대 팀부터 때려 죽이고 보는 데스매치(...)마냥 과격하게 묘사됐다. 이걸 축구로 치면 골키퍼를 때려 패 최소 기절시키고 나서 마지막 마무리로 여유있게 골대에 공을 차넣는 식.[13] 격구는 스포츠인 동시에 무예이기도 하고, 말을 탄 채로 몽둥이로 쓸 수 있는 막대를 휘두르며 엉키는 매우 위험한 종목인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극중 최양백의 대사를 통해 격구는 이렇지 않은데 무신정권 하에서 뛰어난 사병(私兵)을 뽑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다보니 도방에서 하는 격구만 이렇게 과격하다는 점을 밝혀 극적 과장에 대한 보험을 들어놓았다. 극중 과장보다는 격구중 착용하는 투구 양식이며 격구장 묘사가 스파르타쿠스 같은 로마 검투사들 묘사를 그대로 베껴와서 문제였다.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도 등장하는데 무신과 엇비슷한 경기규정으로 가긴 하지만 데스매치 수준까지는 아닌 격한 운동으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격구가 들어온 시점은 고구려 후기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격구라는 종목 자체는 역사왜곡인 셈이다.

애니메이션 장금이의 꿈에서도 임금인 중종을 포함한 민정호, 장수로, 윤환, 동이까지 격구를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원균이영남의 첫 만남에서 다루어진다. 경상우수사로 부임하자마자 부하들을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게 처벌하는 원균에게 이영남이 강력히 항변하자 원균이 그에게 격구대결을 제안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일대일 마상격구를 겨루게 되는데 이 역시 하키와 비슷한 느낌으로 묘사되었다.


  1. [1] 흔히 조선이 무예를 소홀히 해서 격구 문화가 쇠퇴했다는 이전의 기술이나 웹페이지, 유투브등의 영상물은 과장이다. 총기를 사용하는 문화가 도입되면, 유목민족조차도 이런 식의 기마훈련은 경제적으로 도태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2. [2] 혹은 "도보격구(道步擊毬)"라고도 한다.
  3. [3] 당장 부상위험이 제일 높으며 한 경기 뛸때마다 그만큼 해당 선수의 수명도 단축된다고 볼수있는 종목인 럭비와 미식축구만해도 그 위험성으로 인해 논란이 많은데 말위에서 스틱으로 공을 치고 서로 말을 탄 상태로 몸싸움을 벌이는데 이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4. [4] 격구 실력으로 벼슬을 받은 사람 중에 실력있는 군인도 있었다고는 하나, 실전이나 군사행정 분야로 경험을 쌓도록 유도한 인력보다, 귀족들의 눈에 띄는 곳에서 벼슬을 얻는 기회가 또 하나 늘어난다는 점은 사실 군인들의 정치화로 인한 혼란을 초래하기 쉽다.
  5. [5] 고대 로마에서 지극히 위험한 전차경주가 대인기였다며 격구/폴로와 비교하는 경우가 있는데, 상당히 다르다. 전차경주는 원조인 그리스에서도 실전에서 밀려난 전차를 스포츠 용도로 개편한 것이 대규모 오락산업으로 발달한 문화이다. 물론, 격구 문화도 고려시대에는 실용성과는 동떨어진 목적으로 악용되긴 했다.
  6. [6] 전 세계적으로 총기의 보급으로 같은 도태 현상이 일어났는데, 화승총 부대와 기마부대 양쪽에 모두 엄청난 자본을 쏟아붓을 수 있었던 서구권/제국에서 귀족 스포츠로 살아남은 예시를 제외하면, 기마민족들에게서도 폴로와 비슷한 스포츠의 중요성이 낮아지고 도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7. [7] 비슷한 예시로 고려시대의 무인정권도 흔히 마초적인 감성으로 이해하는 갑(문관)의 을(무관)에 대한 차별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당시에 지나치게 늘어난 정치군인들과 강력한 문관들의 대립 사이에서 조율이 실패하면서 일어난, 군사기강 실패, 정치적인 실패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더 객관적인 관점이다.
  8. [8] 다만 이러한 격구로 인한 벼슬 분배는 중앙군인들의 기강해이를 가져왔다. 나라를 지켜야할 군인들의 정치화, 중앙에서의 난립을 부추겼기 때문에 최악의 정치실패 사례 중 하나인 무인시대와도 조금은 연관이 있다.
  9. [9] 예를 들면, 총싸움(신식무기)의 패러다임이 찾아왔는데 팔씨름(놀이적인 체력훈련)을 정규 훈련에서 뺐다고 까는 정도의 핀트가 어긋난 비판이다.
  10. [10] 역사저널 그날 131편(16.07.03 방영분)에서 소개됨
  11. [11] 글로 읽어도 이해가 안가는 위키러는 역사저널 그날 131편을 참고하면 좋다.
  12. [12] 실제로 드라마상에서 역사성(?)을 보이기 위해 극중 전개와 아무 관련도 없는 장면을 집어넣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박김치와 동치미가 고려 시대에도 있었다든가, 박술희가 뱀이나 개구리까지 즐겨 먹었다는 등등.
  13. [13] 물론 전근대시대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규칙이 느슨한 편이라, 격구가 아니라도 예를 들어 축구잉글랜드에서 옛날에 하던 초기 축구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거의 패싸움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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