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관련 문서: 삼국시대, 조의선인, 해씨 고구려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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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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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고려
高句麗 ・ 高麗[1]


[2]


장수왕 64년(476년)경 고구려 영역(남한 주장)[3]

6세기 말 ~ 7세기 초의 고구려 강역(북한 주장)

공식명칭

졸본부여
→고구려,(구려, 고리 등),
→고려

위치

간도 → 한반도 북부/간도
한반도 중부/만주 일부 → 한반도 북부/만주 일부[4]

수도

홀본→국내성→환도성→국내성→평양→장안[5]

삼경

국내성
평양성
한성[6]

정치체제

군주제

국성

\해(解, 소노부) → 고(高, 계루부)[7]

국가원수

(태왕)[8]

언어

고대한국어,(고구려어),

민족

예맥(말갈족, 거란족, 선비족, 한족 등),,,

종교

불교,(도교[9], 샤머니즘, 기타[10]),

존속기간

(남한)기원전 37년[11]
(북한)기원전 277년[12] ~ 668년 9월 21일

주요사건

기원전 37년 건국
3년 국내성 천도
194년 진대법 시행
313년 낙랑군 축출
372년 불교 전래
373년 율령 반포
427년 평양 천도
545년 추군과 세군의 동란
612년 살수대첩
631년 천리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 집권
645년 안시성 전투
668년 평양성 함락

성립 이전

원삼국시대,(원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 신라,(고구려부흥운동, 소고구려),

현재 국가

대한민국, 북한, 중국, 러시아

1. 개요
2. 국호
2.1. 표기
2.2. 발음
6. 정치 제도
6.1. 초기
6.2. 후기
7. 군사
7.1. 편제
7.2. 병종
7.3. 주력대
7.4. 병기
8. 국력
9. 영역과 행정구역
10. 고구려가 남긴 것
10.1. 멸망 후
10.2. 현대
11.1. 한국
11.2. 일본
11.3. 중국
14. 고구려를 소재로 하거나 등장하는 작품
15. 둘러보기
16. 기타

1. 개요

한반도 역사상 발해와 함께 가장 넓은 영역을 영유했던 국가

삼국시대에 존재했던 세 나라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던 국가로, 오늘날 만주의 일부, 한반도 북부와 더불어 전성기 시절에는 중부와 남부의 일부까지 차지했던, 삼국 중 단연 넓은 통치 영역을 확보했던 국가이자 한국 역사상으로도 발해와 함께 가장 넓은 통치 영역을 차지했던 국가다.[13]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도 특히, 대대로 정복 사업을 벌여 광활한 국토를 영유했던 점, 대외 항전에서 보여준 눈부신 역전(力戰) 등을 이유로 역대 한반도 왕조 중 가장 대중적인 인식이 좋은 국가다. 이런 이미지나 성격은 후일 고구려의 국호(고려)를 그대로 딴 고려가 일부 계승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전성기 시절의 한국 역사를 꼽으라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국가이다. 멸망 이후에도 중국에서 고구려의 군사력만은 인정해서 임진왜란 직전까지 중국에서 조선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했던 것도 수·당과의 전쟁 때 보여준 분전 덕분이었다.

2. 국호

2.1. 표기

언어

명칭 및 해설

한국어

고구려『高句麗』 / 고려『高麗』

장수왕 이후와 고구려 멸망 이후, 대개 고려라는 말이 쓰였지만 현대의 한국어로는 왕건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라고만 불린다.

중국어

가오리「高麗」, 가오거우리(高句麗)

고구려도 그냥 가오리「高麗」라고 한다. 굳이 '고구려『高句麗: 중국에서는 高驪, 高句驪로 쓰기도 한다』'라고 쓸 때, 句의 독음이 일반적인 jú「쥐」가 아니라 gōu「거우」다. 이 독음법은 오로지 고구려라는 단어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컴퓨터 입력기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고구려를 가우리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은 중국어 독음에서 유래한 것.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인 가오리방쯔「高麗棒子」도 여기서 나온 말이나 현대 중국어 발음이다. 고대 중국어의 한자 발음은 현대 중국어와 매우 다르고 오히려 한국식 발음이 더 가깝다(물론 상대적인 의미이며 현재 한국의 한자음은 이전, 이후에도 계속 구어 사용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 중국 한자음과 달리 대체로 당나라 때 수입된 한자음이 고착된 결과로 본다. 상세한 것은 아래를 참조). 결국 고구려를 가우리로 부르는 것은 그저 중국식 읽기에 불과하다.

일본어

고쿠리「高句麗」

高句麗「고구려」로 쓸 때만 고쿠리라고 읽으며 高麗「고려」라고 써놓을 때는 고라이라고 읽는다. 때때로 高麗「고려」, 狛「박」, 駒「구」 등으로 써놓고 고마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고대 티베트어

케우리(Ke'u-li)[14]

페르시아어
(11세기)

모크란(Mokraan)[15]

터키어
(고대 돌궐어)

뵈클리(Bökli)[16]

그리스어

무크리(Moúkri)[17]

산스크리트어

무쿠리(Mukuri)[18], 쿠쿠테스바라(Kukutesvara)[19]

초기에는 국명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高離(고리), 高駒驪(고구려), 句麗(구려), 駒驪(구려) 등으로 서사되었는데 주로 高句麗(고구려)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되어 졸본부여나 '맥'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왕망듣보잡 흑역사 신나라에서는 왕망이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고구려가 무시한 것에 분노해서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불렀다고 하는 건데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는 '고구려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현재 역사학계의 정설은 장수왕 때 고구려가 고려(高麗)로 변경, 고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아 한국의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인 경우가 많다. 장수왕 때 고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증거들은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몇몇 금석문에 한자 공식 표기가 남아있다. 가령 5세기 장수왕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20]에는 고려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고, 요녕성 의현에서 발굴된 불상에는 대고구려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이 불상은 아직 시기나 국적 등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게 없어서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고구려가 세워지기 전이나 망한 후에 대고구려라는 표현을 굳이 쓰지도 않았을 테니 고구려 시기에 쓰인 불상임은 확실해 보이고, 굳이 '대'고구려라고 주변국에서 높여줬을 리도 없으니 고구려에서 만든 불상으로 보는게 자연스럽다. 좀 더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아마 장수왕 때 고구려에서 고려로 국호를 바꾼 게 사실이라면 국호 변경 이전 시기의 불상일 것이다. 또한 장수왕 시기부터 중국 측 문헌에 '고려'라고만 표기되기 시작된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인들은 그냥 이 나라를 동명성왕이 나라를 세운 이래 700여 년 내내 전부 고구려라고 부르는 관습이 정착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장수왕 때 국호를 바꿨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왜 바꾸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무래도 고구려(高句麗)의 고(高)와 구(句)의 발음이 비슷해서 빨리 발음하면 고려(高麗)나 구려(句麗)로 줄어들게 되는데 구려(句麗)보다는 고려(高麗)가 한자의 의미를 봤을 때[21] 더 그럴 듯해 보여서 고려로 변경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초창기에도 '구려', '고례' 등의 2음절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애초 이름이 '고려'와 비슷한 그 무엇이었고, 앞의 고(高)는 접두어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한자어 그대로 '높다', '숭고하다'는 의미로 붙인 것일 수도 있고[22], 또는 그것이 '고'와 발음이 비슷한 당시의 순우리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23]. 장수왕 때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여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등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여러 조치들이 취해지는데, 국호 역시 그 일환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구려말로 성(城)을 '구루'라 부른다"는 기록에 미루어 고려라는 국호가 성을 뜻하는 당시 순우리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또는 '곰'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는데, 명확한 기록이 아직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 동명성왕이 세운 나라를 보장왕 때까지 통째로 고구려, 궁예가 세운 나라를 통째로 후고구려[24], 그리고 왕건이 세운 고려를 그냥 고려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긴다. 이건 우리가 '고려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 중에 성립된 관습이라고 볼 수 있다. 자세한 건 태봉, 고려 문서 참고.

장수왕 이래로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러 왔던 탓에 오대십국시대송나라를 거친 이후부터 전근대까지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도 고구려가 거의 그대로 이어지되 왕조만 바뀐 걸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남의 나라 역사를 상세히 조사하는 것도 아닌데 이름이 똑같은 고려니깐. 고씨고려, 대씨고려, 왕씨고려[25] 모두 고려였다면 10세기를 훨씬 뛰어넘는 국호가 된다. 신라를 뛰어넘는 한국사 최장수 국가이자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장수 국명

장수왕 대의 국호 변경을 대체로 제대로 반영한 사극으로는 태조 왕건이 있다. 고증 등에서 문제 제기가 여럿 있는 사극이긴 하지만, 극중에서 고구려가 장수왕 때 고려로 바꾼 것은 제대로 반영해서 해설했으며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의 이름 역시 후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불렀다. 그런데 극중에서 옛 고구려를 언급할 때는 고구려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옛 고구려도 나중 이름을 써서 고려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지만 시청자들이 헷갈려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고구려라 한 듯.

같은 이환경 작가가 대본을 쓴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로만 표현했다. 태조 왕건과 달리 연개소문은 아예 작중 내내 고구려를 언급해야 하는데 극중에서 계속 고려라고 부르면 시청자들이 혼란을 느낄 게 뻔하니…

일본 측 기록에서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도 고려라고 표기하고 있다. 발해의 국호로 널리 알려진 발해는 고구려 기피증에 걸린 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외교용 국호이고 공식적인 국호는 고려라는 설이 있다.[26]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 이름이 '후고구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고려'였다가 나중에 마진, 태봉으로 바꾼 것이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궁예가 처음 썼던 국호로 되돌아간 것이고.

2.2. 발음

고구려인들이 자신을 뭐라고 불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단은 고려 시대 후기, 조선 시대에도 고려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27] 한국 한자음은 중국 중고음과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이 한자음은 , 무렵에 불렀던 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발해학회에서 발표했던 서길수 교수의 高句麗 소리값 연구. 이 연구에 따르면 高句의 소리값은 '고구'가 맞지만 麗의 소리값은 '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의 경우. 중국에서는 '려'를 '리' 라고 발음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까지 '리' 라고 발음하진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려' 라고 발음한다. 고구려는 한국 발음으로 고구려라고 부르자. '麗'는 대체로 중고음에서는 '려'에 가까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구다. 삼국시대에 무어라 발음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16세기 조선의 훈몽자회에서는 고구려라고 발음하고 있다.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麗의 중고한어 발음은 일반적으로 /ljɛ/ 혹은 /lje/, 혹은 그 중간인 /lje̞/로 추정된다.[28]

희한하게도 동아시아 쪽 언어들은 발음이 '고구려'와 비슷하고 서역 쪽 언어들은 '말갈'과 비슷하다. 모크란, 뵈클리, 모클리의 원음을 '맥구려'로 추정하는게 일반적이고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로 보는 게 통설이다. 당나라 때 편찬된 《범어잡명》에 의하면 고구려는 범어(산스크리트어)로 Mukuri라 하고, 한자로는 무구리(畝俱理)라 명시해놨기 때문에,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모크란, 뵈클리, 모클리는 고구려가 맞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초기의 공신인 마리를 인명이 아니라 부족명으로 보아 이러한 호칭과 통한다는 의견도 보인다. 한편 막리지의 막리도 이러한 호칭과 같은 계통이고, 『광개토대왕비』의 매구여라는 지명도 같은 계통이라고 한다.

티베트는 서역에 위치했지만 '고구려'와 발음이 비슷하다. 이는 티베트인들이 고구려를 케우리라고 불렀다기보다는 중국어 발음이 티베트에 전해저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때의 중국어 발음은 현대 중국어 발음인 가우리가 아니다. Baxter-Sagart가 재구성한 발음에 의하면 (cə)크아(우)(cə.kˤaw) 르에(rˤe)다.[29] 이외에도 다른 재구성 방식도 있는데, 중국 고대 발음은 현대 중국어 발음과 많이 다르다.

麗(려) 자가 나라 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리'라고 읽힌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를 고구리, 고려를 고리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최초로 음차 표기된[30] 단어인 高離(고리)의 離(리)는 음차표기 되었던 전한시대 당시에는 rje(례)에 가까운 발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로 《한서》에서는 '알렉산드리아'가 烏弋山離(오익산리)라고 적혀있다. ria를 離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3. 역사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사회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사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문화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문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정치 제도

6.1. 초기

고구려금관

초기의 고구려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아직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일종의 부족 연명체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초기 고구려의 왕들도 사실상 다른 부족 연맹들을 아우르는 일종의 연맹장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의 중심 세력을 이루었던 5개의 부족은 소노(消奴)[31]·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 등이었다. 이 다섯 부족의 부족장 간에 선출된 부족 연맹장이 곧 왕이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왕위는 점차 선출이 아닌 세습제로 이어졌다.

초기는 소노부에서 왕이 배출되었으나, 이후에 소노부의 힘이 점차 미약해져 동명성왕 이후는 계루부에서 세습하였다 한다. 또는 동명성왕이 아닌 태조왕 이후부터라고도 한다.

또한, 절노부에서는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여 왕과 혼인하였다고 한다. 절노부는 곧 연나부로, 차대왕을 몰아내고 신대왕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명림답부 이후부터 왕비족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왕을 배출했던 소노부와 계루부, 왕비를 배출했던 절노부등은 왕족으로 대우받으며,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다.

고구려 초기의 관등은 다음과 같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32]

삼국지 위지동이전(三國志 魏書東夷傳)

1등

상가(相加)

1등

상가(相加)

2등

대로(對盧)

2등

대로(對盧)

3등

패자(沛者)

3등

패자(沛者)

4등

고추대가(古鄒對加)

4등

고추가(古鄒加)

5등

주부(主簿)

5등

주부(主簿)

6등

우태(優台)

6등

우태(優台)

7등

사자(使者)

7등

승(丞)

8등

선인(先人)

8등

사자(使者)

9등

조의(皂衣)

10등

선인(先人)

상가는 원래 좌보-우보체제에 있었다가 나중에 신대왕 때 국상제가 도입되면서 상가가 국상자리에 가게된다. 기존의 좌보-우보는 대로로 갔는지 아니면 그대로 상가에 존속하는지는 불명이다. 초기에는 8~10등 관등제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 고구려의 특징이다.

초기 지방행정으로는 성(城) -곡(谷) - 촌(村)으로 나뉘어졌으며 성(城)의 책임자는 태수(太守). 곡(谷)의 책임자는 재(宰)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태수(太守)->재(宰)

의 모습이 나오는데 미천왕 때 압록곡의 관리를 압록재라고 불리웠던 언급과 고노자의 승진사례를 통하여 이러한 지방행정 관직이 있었음이 보인다.

6.2. 후기

고구려가 부족 연맹체적이였던 지배 체제에서 벗어나서 고대 국가로서의 관료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율령 정치가 시작된 소수림왕 때의 일이라고 하며, 그 관료 조직이 더 좋게 정비된 것은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한 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초기의 5부족은 그대로 행정구역으로 발전하게 되어 수도와 지방을 5부로 나누었다. 계루부(桂婁部)는 내부(內部), 소노부(消奴部)는 서부(西部), 절노부(絶奴部)는 북부(北部)·순노부(順奴部)는 동부(東部)·관노부(灌奴部)는 남부(南部)라 정했으며, 5부 밑에는 성(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33]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고, 욕살은 대성(大城)에 머물며, 처려근지는 각 부마다 있는 城에 머물며 통치를 했다.

고구려에는 귀족들의 회의인 "제가 회의"도 있었다.

소수림왕 때부터 체제가 다시 재편정리가 되면서 고구려의 중기~후기의 관료체제도 각각 변화가 되어있는 것이 확인되나 중국 측 기록에서는 당나라 때 저술된 북주의 역사를 다룬 《주서》를 기준으로 중기 후기는 《신당서》와 《수서》를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1등

대대로(大對盧)

1등

태대형(太大兄)

1등

대대로(大對盧), 토졸(吐捽)

2등

태대형(太大兄)

2등

대형(大兄)

2등

울절(鬱折)

3등

대형(大兄)

3등

소형(小兄)

3등

태대사자(太大使者)

4등

소형(小兄)

4등

대로(對盧)

4등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5등

의후사(意候奢)

5등

의후사(意候奢)

5등

대사자(大使者)

6등

오졸(烏拙)

6등

오졸(烏拙)

6등

대형(大兄)

7등

태대사자(太大使者)

7등

태대사자(太大使者)

7등

상위사자(上位使者)

8등

대사자(大使者)

8등

대사자(大使者)

8등

제형(諸兄)

9등

소사자(小使者)

9등

소사자(小使者)

9등

소사자(小使者)

10등

욕사(褥奢)

10등

욕사(褥奢)

10등

과절(過節)

11등

예속(翳屬)

11등

예속(翳屬)

11등

선인(先人)

12등

선인(仙人)

12등

선인(仙人)

12등

고추대가(古鄒大加)

13등

욕살(褥薩)

13등

없음

13등

없음

하지만 북송 때 저술된 책부원귀와 청나라 때 저술된 통전에는 유사하면서도 명칭이 다르게 저술되어 있다.

책부원귀(冊府元龜)

통전(通典)

1등

대대로(大對盧)

1등

상가(相加)/토졸(吐捽)/대대로(大對盧)

2등

태대형(太大兄)

2등

대로(對盧)/태대형(太大兄)

3등

대형(大兄)

3등

패자(沛者)/울절(鬱折)

4등

소형(小兄)

4등

고추대가(古鄒大加)/태대부인사자(太大夫人使者)

5등

의후사(意候奢)

5등

주부(主簿)/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6등

오졸(烏拙)

6등

우태(優台)/우태(于台)/대사자(大使者)

7등

태대사자(太大使者)

7등

사자(使者)/대형(大兄)

8등

대사자(大使者)

8등

조의(皁衣)/수위사자(收位使者)

9등

소사자(小使者)

9등

선인(先人)/상위사자(上位使者)

10등

욕사(褥奢)

10등

소형(小兄)

11등

예속(翳屬)

11등

제형(諸兄)

12등

선인(仙人)

12등

과절(過節)

13등

욕살(褥薩)

13등

부과절(不過節)

14등

선인(先人)

14등

없음

한원(翰苑)[34]

1등

대대로(大對盧)[35]

2등

태대형(太大兄)[36]

3등

울절(鬱折)[37]

4등

태대사자(太大使者)[38]

5등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39]

6등

대사자(大使者)[40]

7등

대형(大兄)[41]

8등

발위사자(拔位使者)[42]

9등

상위사자(上位使者)[43]

10등

소형(小兄)[44]

11등

제형(諸兄)[45]

12등

과절(過節)

13등

불절(不節)

14등

선인(先人)[46]

고구려 관등조직에서는 '兄'과 '使者'의 명칭을 중심으로 관등이 분화되어있다 兄계열은 연장자 혹은 가부장적 족장의 뜻을 가진 것으로 종래 족장세력이 관리로 편제된 것이고, 使者계열은 조부를 거두어 들이는 사람의 뜻을 가진 것으로 행정적 관리출신이 그들의 지위에 따라 여러 관등으로 분화된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중앙정치제도에는 관부 및 관직명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관동이 곧 관직의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대체적으로 고구려 중기이후부터는 거의 13~14등급의 관등제의 운영을 확인할수 있다. 중앙관제를 기준으로 각 5부에 속한 신하들도 유사한 관등으로 나뉘어졌는데 앞에 소속된 부를 뜻하는 형태의 명칭으로 중리대형(中裏大兄)의 경우 중리부에 속한 부의 7등급 관리를 의미하는 형태이기도 했다. 즉 부족장의 가신체제(家臣體制)가 중앙 관료 체제 속에 흡수되어 일원적인 집권 체제로 정비되었다라고 볼 수 있겠다.

대대로가 수상으로서 국사를 총괄하고, 대대로는 귀족들에 의해서 선출되었다는 사실로 고구려에는 귀족들의 합좌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강력한 왕권 아래에서도 귀족들의 합좌정치가 이루어졌고, 따라서 당시 정치가 귀족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제 5관등, 조의두대형 이상만이 국가기밀사무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귀족들 내에서의 신분 구별을 보여준다.

소수림왕 때 재편 이후로 지방행정은 기존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이나 6세기부터 재편이 되었다.관련정보

욕살(褥薩)-> 처려근지(處閭近支) 혹은 도사(道使) -> 가라달(可邏達) -> 누초(婁肖)

의 체제의 직책을 두며 성(城)을 기준으로 대성(大城)이라 불리우는 큰 지역의 행정관은 5등급 이상의 욕살(褥薩)이 파견되었고 그 이하 소성(小城)들을 처려근지(處閭近支) 혹은 도사(道使)라고 불리우는 직책의 7등급 이상의 직책이 맡은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개개별 소성(小城)들은 규모 혹은 관할에 따라서 가라달(可邏達)과 누초(婁肖)각각 맡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욕살이라는 명칭은 13등급의 하위등급에 있는 직책인 관계로 중앙관제의 명칭과 지방관제의 명칭의 음차는 같아도 차이는 있던것으로 보인다.

7. 군사

고구려의 행렬도의 일부.

7.1. 편제

안악 3호분 행렬도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전시) from Biggemstone on Vimeo.

군제(軍制)는 국민개병제와 비슷한 형태로 고구려의 국왕이 최고 사령관으로 군사조직도 일원적인 편제 구조로 국내성·평양·한성(漢城 : 재령)의 3경(三京)과 각 성에 상비군을 두었으며, 변방에 순라군을 두었다.

군관으로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이 있었으며, 상비군의 보충은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실시했다. 대모달의 관직은 5등급 이상의 벼슬아치가 맡을수 있었던 자리이며 말객의 경우 1000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7등급 이상의 벼슬아치가 맡을수 있는 직책이었다.

초기에는 고대국가들처럼 5부에서 병력을 차출하고 중앙의 계루부의 중앙군으로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국원왕 때 백제와의 전투에서 적기군만이 정예로 언급을 하면서 다른 군대는 상대적으로 정예묘사가 덜하다는 점에서도 기인할 수 있다. 물론 고국원왕 항목에서도 있지만 고구려군만 적기군으로 두고 나머지는 고구려에 복속된 지방민으로서 열악한 무장에 사기가 떨어지는 동원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던 것이 나중에 소수림왕 때 국가적 율령체제를 거치면서 손을 본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광개토태왕 때 관군이라는 체제가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중앙군의 통제하의 지휘체계와 병력체제의 집중 운영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평시 상비군의 체제가 중앙의 군대로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당연히 고대의 중앙과 지역의 권력의 균형을 볼 때나 그 이후에 귀족들이 병력을 동원하여 내전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점을 보아 각 귀족마다 사병집단은 존속해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예시로 보자면 미군처럼 연방군과 주방위군의 형태와 같은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미군과 다른 점은 평시에는 중앙의 통제를 제대로 받지 않는 주방위군 형태의 각 5부를 대표하는 귀족들의 사병집단이라는 점이다.

7.2. 병종

고구려의 병종은 개마무사(鎧馬武士)라고 잘 알려진 중장기병과 중장기병보다 무장이 덜한 중기병(重機兵) 그리고 무장이 가벼운 경기병(輕騎兵)과 기마궁수의 기병 병과가 존속했다. 크게 중장기병과 경마기병으로 구분하고 있다.

보병으로는 부월수(斧鉞手)/환도수(環刀手) /창수(槍手)/궁수(弓手)가 존재해 있다. 환도수(環刀手)/창수(槍手)는 중장보병에 속했으며 부월수(斧鉞手)는 경보병에 속했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궁수(弓手)가 별도로 존속했다. 이외에 별도로 쇠뇌를 운영하는 병사나 공병과 같은 존재 그리고 취사집단이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부분적 기록에서만 유추할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47]

고구려가 다른 고대국가들처럼 개인의 신분과 경제수준에 따라서 갑옷과 무장을 각자 갖추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흑색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밀었다는 무사집단의 경우에는 조의선인(皁衣先人)이라는 용어나 조의(皁衣)라는 표현이 나오나 둘다 모두 관등의 문제이고 실존 기록에는 적시 돼 있지 않다. 위에 서술 되었듯, 경당(扃堂)이라는 청년단체가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경당(扃堂)은 오늘날 사관학교와 같은 군사학교의 역할을 하여 성인남성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키지 않아도 고구려군에 즉각 편입시킬 수 있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당(扃堂) 이전에는 좌식자(坐食者)라는 약탈경제와 전투목적의 지배전사집단이 귀족층 내에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들에 대한 연구는 학설이 여러 가지이므로 그 존재가 아직 명확하지는 않으나 이들이 계속 존속하여 군사력의 한축을 차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7.3. 주력대

개마무사(鎧馬武士)라 불리우는 중장기병과 상대적으로 경무장인 경기병과 중기병들이 고구려의 주력이었고, 이들은 고구려의 핵심 방어기지인 산성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산성기병은 침공군에게는 매우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고구려의 영토로 들어온 침공군의 배후와 보급로를 이들이 끊임없이 차단하여 혼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방어전략에서 청야전술과 함께 산성들과 산성들에 주변에 있는 보루와 같은 군소기지들의 협력방어를 매우 중시했다. 덕분에 침공군은 장기주둔도 어려웠지만 점령한 고구려의 영토를 사수하는 일도 상당히 어렵게 만드는 환경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했다. 고국원왕 시절에도 잘 나가던 전연이 국내성을 점령하고도 물러난 이유중 하나로 이러한 점이 작용했다. 고구려의 이 방어전략 체계의 우수함은 이후 고수전쟁고당전쟁에서 압도적인 적의 침공군에 맞서 보여준 뛰어난 방어력으로 재차 증명되었다.

한편 고구려는 전쟁시 집단 예민(集團隷民)에 속하는 말갈-거란등과 같은 고구려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은 간접지배지역의 타종족들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군처럼 이들이 보조병 역할을 했을지 여부는 확인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고구려도 이들을 동원하면서 로마와 유사한 인센티브를 제시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호드? 실제 고구려가 거란-실위-말갈 등을 동원했던 기록들과 거란-실위-말갈족 등이 고구려의 멸망시기까지 함께 했던 사례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호드 맞네

7.4. 병기

고구려의 병장기들은 중국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평가될 만큼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군대가 입는 갑옷만 하더라도 높은 철생산력과 가공 운영능력을 바탕으로 비록 손질에 손은 많이 가지만 방어력을 확실히 보장하는 찰갑이 고구려 초기부터 보편화 되었다.

또한 고구려는 맥궁(貊弓)/고시(楛矢)가 유명했고, 건국신화에서도 주몽이 활의 명수였던 점, 말을 수출하고 대량으로 운영하여 경당(扃堂)에서도 활쏘기과 말타기를 배우게 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궁병기병이 상당히 뛰어났으리란 유추가 가능하다. 이러한 바탕에서 고구려는 중국 왕조들의 병장기 수준에 뒤지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는데, 특히 평원왕 때는 고구려의 쇠뇌를 개량하기 위해 수나라의 기술자들을 대거 스카웃해서 빼돌릴 정도였다. 《수서》에서는 이 대목을 아주 치를 떨며 기록해 놓았다.

다만 수레는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토인 만주지역의 전장 환경과 더불어 산성을 기반으로한 전투를 주 전략으로 펼친 고구려 입장에서는 전차(戰車)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장기병의 존재가 전차의 충격력과 파괴력을 대신했기에 수레를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8. 국력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삼국사기》 18권 고구려본기 장수왕


영명 7년[48] 에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더니 원회에서 고려(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안유명이 위나라 주객랑 배숙명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49]

《북제서》 동남이열전 고구려.


정시 연간[50]에 세종[51] 이 동쪽 당사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였다.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52]는 섭라[53]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구이 (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54]

《위서》 열전 고구려

4세기까지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유력한 세력에 불과했지만, 광개토-장수 시절 전성기를 기점으로는 동아시아 전역을 기준으로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만큼 그 위상이 매우 강해진다. 초창기 고구려는 영토자체가 인구부양력이 낮은 산지 위주라 국력팽창이 용이하지 못했다. 그러나 산지라는 지형의 특성을 잘 살려,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며 국가의 생존력을 늘려갔다. 고구려 수도 방어체계의 특징을 보면, 평시에는 평지의 궁궐에서 국가를 운영하다가 전시에 산성으로 후퇴하는 이중 수도 체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심지어 매우 비옥한 땅인 평양으로 천도하고 나서도 이어질 정도였다.[55] 워낙 외적에 의해 수도가 함락당한 경우가 많아 수성에 많은 신경을 썼고, 이런 수성의 노하우가 훗날 거대한 통일왕조와의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요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신보다 한 수 위인 부여나 한사군등의 강적들의 침공으로부터 살아남으면서 틈만 나면 요동이나 대동강 유역의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진이 멸망하고 오호십육국 시대에 돌입하자, 요동반도와 서북한 등 인구부양력이 높은 영토들을 차지하며 국력이 급속히 팽창하게 된다. 초창기 고구려는 야전에서 1~2만 명밖에 동원하지 못했지만, 광개토왕시기에 가면 동맹국인 신라의 지원군으로만 5만 명을 보낼 정도가 된다. 그리고 주필산 전투에서 보다시피 후기 고구려는 야전에서만 수십만을 동원할 정도였다.

보통 일반적인 상식으로 고구려의 국력이 방대한 만주벌판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 초창기 고구려만 해도 영토가 작은 나라는 아니었다. 그런데 《삼국지》 위서동이전을 보면, 관구검의 고구려 원정 당시 부여의 인구가 8만 호로 나오고 고구려의 인구가 3만 호로 나온다. 이 기록의 수치를 곧이 곧대로 믿을 순 없지만, 적어도 2~3세기까지 고구려는 부여에게도 국력이 밀렸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미천왕 이후 옛 낙랑군 지역과 요동반도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광개토 시대에는 중원 왕조들과 대등하게 싸우기 시작하고, 기록으로만 봐도 이전 시기보다 국제적 움직임이 폭이 넓어지기 시작한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통일제국의 파상공세를 백년가까이 막아낸 후기 고구려의 강대한 국력은 바로 요동반도와 서북한 유역의 비옥한 농토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56] 즉, 쓸데없이 영토를 확장하기보다는, 선택과 집중으로 정말 필요하고 알짜배기 영토만을 집중해서 공략했기에 강대국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57] 보통 사람들이 착각하는것과 달리, 강대국이 되는데 있어서 영토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영토의 질이다.[58] 고구려의 국력은 방대한 영토도 있었겠지만, 요동반도-대동강유역-한강유역-송화강 유역 등 비옥한 영토를 잘 유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59]

군사적인 충돌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고구려 초창기에는 인접한 군현의 태수, 일개 주의 자사급 인사가 주장이 되어 대고구려 전선을 책임질 정도였다. 후한시기 기록을 보면 거진 다 태수급 기록이 대부분이고 비류수 전투로 고구려를 안드로메다로 보낸 관구검만 해도 유주 자사였으니...

하지만 중기 이후로 이 정도급은 대고구려 전선 부장 수준으로도 언급을 보기 힘들다. 북위는 비교적 서쪽에 해당하는 농우 지역을 징발하여 고구려를 상대한다는 안조차 부담스러워 기각하는 모습을 보이며 당나라의 경우 서쪽과 남쪽 끝에 해당하는 사천성, 강남 일대까지 쥐어짜기도... 한마디로 고구려는 중국이 온 국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대가 된 것이다. 수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전투병과 수송부대까지 합쳐서 추정 300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동원한 사례를 봐도 중국의 통일왕조는 고구려를 전력을 기울여 싸워야 하는 강적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수나라, 당나라의 국제적 위치는 명실공히 세계 최강국의 하나로[60], 오늘날로 따지면 미국이랑 수 차례 전면전을 치룬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고구려는 이런 수나라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면서 수나라의 국력을 모조리 소진시켜 멸망하게 했고, 20여 년간 계속된 전쟁을 치루며 666년에 일어난 고구려 내의 내부분열을 이용하고서야 고구려를 겨우 멸망시킨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벌 때문에 국력에 엄청난 손실을 입었을 정도니, 중국의 통일왕조가 결코 고구려의 국력을 과대평가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선이 많은 중국을 옆에 둔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꽤나 목에 힘을 줄 수 있었다.

옆에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존재하고 또 그걸 위협하는 세력이 북방 몽골초원 일대에 떡하고 버티고 서있어서 그렇지 전세계로 시야를 넓혀도 중국은 군사력이나 인구로 2위 안에 꼽히고 북방 제국도 판도나 군사력에서 중국과 옆치락 뒤치락하는 세력들이다. 당시 전세계 통틀어도 인구수 400만 500만 이상을 말할 수 있거나 군사력 30만씩 보유한 국가가 대여섯 개 남짓, 고구려가 멸망한 당시 집계된 인구가 70만 가구[61]에 70년간 전쟁의 인구유실과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인구를 감안하면 이를 상회했을 가능성도 존재하니 상당한 국력인 셈이다.[62]

결론적으로 고구려는 요동(만주)의 작은 소국으로 시작해 호전적이고 거친 유목민족들이 즐비한 요동지역을 차례로 제압하여 요동 내에 확고한 패권국의 지위를 구축한 강대국이었다. 요동 내의 유목민족들은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까지 고구려의 위세에 눌려 별 힘을 쓰지 못했다. 말갈은 고구려의 존속 기간 내내 빵셔틀 신세였고, 고구려는 전성기 이후로는 거란도 찍어누른다. 거란과 말갈(여진)이 이후 한족을 어떻게 털어먹었는지 생각해보면 고구려의 역량은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63]

수, 당과 같은 중국의 통일왕조 역시 고구려를 위협적인 강적으로 보았고,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수십 년간 전면전을 벌였으며, 결국 당 고종 때 이르러 신라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당 역시 고구려 정벌의 여파로 엄청난 국력을 소모해 한동안 주변 이민족들을 통제하지 못하다가 결국 그 덕에 토번이 급성장하여 당의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르게 되며, 기껏 정복한 고구려 영역도 힘이 부족해 반쯤 무주공산으로 방치하다 발해가 세워지는 걸 제대로 막지 못하게 된다. 사실 고구려가 멸망에도 연개소문의 세 아들 중 연남건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이 당나라에 투항하는 등 심각한 내부 분열이 큰 영향을 미쳤으니, 만약 내부 분열이 없었다면 고구려가 그리 쉽게 망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었다.

9. 영역과 행정구역

고구려의 영토는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로 나누었다. 수도 5부의 경우 고구려의 주요 귀족 가문이었던 5부족(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이 고국천왕에 의해 행정구역인 5부로 정리된 것으로, 각각 방위의 이름(동, 서, 남, 북, 중)을 가졌다. 지방 5부의 경우 욕살(褥薩, 지방관)이라고 하는 대표를 두어 다스렸다. 부의 아래에는 대성(大城), 중성(中城), 소성(小城)을 두었는데, 각 성을 다스리는 처려근지(處閭近支, 중국식으로는 '도사')를 두어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욕살과 처려근지는 모두 어떤 관직을 뜻하는 순우리말(고대 한국어, 고구려어)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으로, 원음은 알 수 없다.

3세기 고구려의 영역. 서쪽에는 한사군, 북쪽으로는 선비족이 위치해 있다.

고구려는 4세기 이전까지는 압록강 북부~함경도에 걸쳐 있던 소국이었으나, 미천왕기를 시작으로 광개토대왕, 그리고 장수왕과 문자명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중국 군현의 터를 몰아내면서 한반도 북부 전역을 지배하고, 북으로는 요동과 남만주, 남으로는 한강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그 대략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재위 14년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이천 명을 사로잡았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재위 16년 2월, 현도성을 함락시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미천왕)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재위 원년) 10월, 백제 관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바다로 둘러싸였는데, 왕이 군대를 일곱 방면으로 나누어 이십 일만에 빼앗았다.

十一年,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재위 11년 왕이 병사로 하여금 숙군을 치게 했다. 연나라의 평주자사인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광개토대왕)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재위 63년) 9월, 왕이 친히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다.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장수왕)

장수왕에서 문자명왕 대에 고구려는 남으로는 평택 아산만, 북으로는 북부여(현 지린 성)에 이르는 영토를 손에 넣었으며, 동쪽으로는 책성, 서쪽으로는 요하에 이르렀다. 이 밖에 고구려계 왕족인 고운이 북연의 왕이 되었고, 변경국인 말갈, 두막루와 실위를 군사적 영향권 아래 두었다. 백제는 서울이 함락되자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신라는 일본의 침략에 시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군을 받는 등,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정세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기까지 계속된다. 이와 관련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지안의 광개토대왕릉비, 충주의 중원 고구려비, 신라 호우총 등이 있다.

고구려의 본토(직접 통치 영역), 기원후 476년경.,(출처),

5-6세기 고구려의 주요 도성과 진출지.

위 지도에 첨언하자면 직접 지배한 지역 뿐만 아니라 거란, 말갈, 지두우 등으로의 세력 확장(군사적인 영항력 투사)이 있기 때문에, 간접지배 지역과 영향력을 행사한 기준으로 폭을 넓히면, 저 지도에서 요서 조양시와 난하 서쪽을 제외한 북방 영토 거의 전부를 석권하는 것을 넘어 서북쪽의 내몽골지방, 동북쪽 삼강평원, 연해주 일대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한 의미의 '영토'라 하기는 애매한 분류고, 지도 이상의 방면으로 가면 지리를 상고하기 힘들며 이탈과 복속이 일정치 않아서 비정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후연 정벌의 경우 실제로 진출해 있었던 기간은 광개토대왕 시기의 약 10년 정도로 사료된다.

직할 통치영역은 위의 지도와 거의 비슷한 영역이다. 전성기 때는 동서남북 6천 리에 이른다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서쪽으로는 요서인 난하와 영주를 닿고 북쪽으로는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서북쪽의 몽골지방, 동북쪽 삼강평원, 연해주 일대도 포함될 만큼 확장된 모습에서 직간접지배를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세계지도, 7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러한 간접 통치구역 및 영향권을 반영하여 그린 것으로 보이는 지도가 있다. 그러나 이 지도는 너무 개략해서 그린 나머지 여러가지 오류를 범했다. 당시 일본고훈 시대야마토 정권이 막 규슈 지역에서 간사이 지역으로 세력을 넓히던 시기였고, 동쪽에는 야요이 인과 별개의 민족인 아이누족이 정착해 있었는데, 위 지도에서는 홋카이도[64]는 물론이고 사할린까지 일본 영토로 표시해 놨다(...) 그 밖에도 국가별로 저마다 조금씩 다른 시기의 영토를 한 시점에 표현해 놓았다.

출처

역시나 고구려 말기의 영향력을 그렸는데, 이 지도의 경우에는 말갈부의 위치가 잘못 표기되어 있으며 고구려의 부속 영향권까지 모두 포함하는 입장에 가깝게 표기해 놓았다.

고구려 영역들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고조선과 부여의 고대 영역을 차지하는 것으로 영토에대한 정립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고구려가 계승의지를 표방한 고조선과 부여의 의식과 함께 고구려의 천하관에 의해 그 영역의 한계와 확장에 대한 입장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스스로가 직접+간접지배지역자체의 국경의 영역으로 서쪽으로는 난하와 영주를 기점으로 국경을 정립하려고 했고 북방은 대흥안령산맥일대의 기준을 잡으면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대한 자신의 영역입장을 갖춘 형태라고 할수 있다. 동시에 고구려의 천하관에 입각하여 한반도와 같은 고구려와 동질적 문화와 의식을 갖고 있는 국가들인 백제-신라-가야-탐라와 같은 현재 우리민족의 영역 전체를 자국의 영역으로 만들려고 꾸준한 노력을 한 모양새가 현존하는 고구려의 직접+간접지배지역의 영역의 확대와 한계를 구분짓는 형태로서 작용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이러한 천하관에 입각한 영역의식은 삼한일통과 같은 삼국통일에 신라가 내세운 슬로건과 같은 형태와 민족적 영역과 민족의 결속을 하는 역할도 한 영역적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한의 경우에는 간접통치영역까지 영토로 넣고 있는데 그러한 관점이 북한의 교과서에도 드러나고 있다.

고구려가 차지한 령역은 서북-내몽골동부, 북-흑룡강남쪽류역, 동북-우쑤리강류역을 넘어 흑룡강하류, 남-아산만으로부터 청하계선에 이르게 되였다. 즉 동족의 나라 전령토의 90%를 차지하였다.

-조선력사

10. 고구려가 남긴 것

10.1. 멸망 후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이후 유민들은 , 돌궐, 말갈, , 발해, 신라로 뿔뿔히 흩어졌다.

당은 토번의 위협으로 옛 고구려의 땅인 요동을 계속 장악하는 것에 실패했고 그 지역의 유민들은 퉁구스계의 말갈족과 함께 탈출하여 발해를 건국한다. 발해는 926년 거란요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발해인들은 보통 세갈래로 갈라져서 새로운 열강인 요나라에 귀의하거나 한반도의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로 갔으며,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그냥 그 땅에 그대로 남아서 말갈의 후신인 여진족에 동화되었다.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인들은 신라가 흔들릴 때 일어나서 후고구려(태봉)의 건국에 기여하였고 이는 왕건이 세운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라는 국호 자체가 장수왕시기에 바뀐 고구려의 국명인데, 다들 알다시피 한국의 영문 국호 "Korea"의 어원이 되었다.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사에 남긴 발자취와 비중은 꽤 크다. 고구려는 만주 지역에서 최초로 700년간 통합된 고대국가로서 존속한 나라로 이후 이 지역에 할거, 등장한 갖가지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요는 고려와의 분쟁에서 고려가 아닌 자신들이 고구려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하였고,[65] , 후금, 청나라로 이어지는 여진족, 만주족에게도 모델이었다.

한국사에서는 삼국시대라는 시대 구분의 중심축을 담당한 국가였으며, 후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이후의 고려, 그리고 영어 및 비아시아권 많은 나라에서 한국을 가리키는 이름인 KOREA라는 국호에서 볼 수 있듯 이후 한반도 국가들에게 계승의식을 남겼다.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은 국가제사대상 가운데 하나였으며, 특히 민족주의 관학파의 주도 아래 중국과 맞선 고대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지닌 모델로 집중적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 왕실의 후손이라는 가문이 좀 존재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장수왕을 시조로하는 요양 고씨. 한국에는 고주몽을 시조, 보장왕의 아들인 고인승을 중시조로 하는 횡성 고씨가 그것이다.

오늘날 직접적으로 고구려의 명맥이 이어지는 곳은 의외로 일본에 있는데 사이타마히다카시의 고구려 유민 마을이 그것이다.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 왕족 (이 아니더라도 고구려인임은 확실해보임)이라는 약광과 고구려 유민 수천이 정착하여 고려 (장수왕 이후 고구려의 국호)군을 이루었는데 메이지 유신때 현재의 히다카(일고-일본고려의 준말..이 아니라 히와다 산+고려)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으나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유지하여 약광을 모시는 고려신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구려 유민 가운데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보장왕의 아들로 알려진 약광(若光)(일본명: 코마노코키시 쟛코(高麗王 若光, こまのこきし じゃっこう))이 유민들과 함께 지금의 사이타마현 근처에 세운 코마(高麗)군이 유명하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개명되어 지금은 행정구역상으론 없다. 약광은 716년 무사시노쿠니(武蔵国)에 신설된 코마군의 수장으로 부임했다. 당시의 코마군은 미개척된 들판이었다고 하며 각지에서 몰려 든 고려인(고구려인) 1,799명과 함께 개척하였다. 약광이 숨을 거두자 코마군민이 그 덕을 기려 코마신사(高麗神社, こまじんじゃ)를 세우고 영령을 코마명신(高麗明神, こまみょうじん)으로 모셨다. 이것이 코마신사가 창건된 경위이다.

고구려인들은 오늘날로 치면 코리아타운 같은 형태로 사이타마 인근에 거주했는데 11세기 중엽까지 고구려인끼리 통혼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망한 지 500여 년 동안 고구려 혈통을 이어나간 셈이다. 하지만 500여 년이 한계였는지(...) 이후 일본인 사회에 흡수되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500년 동안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을 정도로 배타성이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코마신사와 그 일대를 가보면 산과 구릉 언덕이 꽤 많다. 왜 고구려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누볐던 만주벌판과 한반도 북부와 유사한 지형이다. 역사학자 임용한의 일본 여행기에서도 코마신사를 방문한 챕터가 나온다.

코마신사 주위에는 코마(高麗)역코마가와(高麗川)역이 있을 정도로 고구려와 연관이 깊다.

이들은 가마쿠라 막부 때에 무사로 활용되었으며 어떤 계기로 멸문지화를 입을까봐 전쟁에 나서는 것을 멈춘다. 이들은 고구려의 국명을 그대로 성으로 삼은 코마(高麗)씨를 칭하여 현재까지도 일본에 코마 후미야스와 같이 코마씨를 쓰는 가문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 코마씨의 일부는 코마신사를 중심으로 여전히 고구려 왕실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코마씨 중에도 자신의 조상을 망각한 이들이 많은데 나중에 우연히 알게되고 관심을 갖는 경우도 있으며 일부는 적극적으로 고구려 관련 활동에 나서고 있다. 코마씨 외에도 무사시, 무라카미 등 고구려계통 성씨가 꽤 있다. 고구려계 유민들은 관동지방의 무사시국에 터를 잡았다. 이런 이유로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친연성을 주장할 때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의 중심지방에 대거 이주한게 원인이 아니냐는 근거가 제기되기도 한다.관련기사

10.2. 현대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중국동북공정과 그에 대한 반발, 민족주의의 강화로 대륙에 대한 로망이 강해지면서 그런 사상에 반하는 신라, 조선에 대해선 부정적인 시각이 강해졌고 중간에 끼인 백제, 가야, 고려는 묻혀가는 데 반해,[66] 고구려와 발해의 경우는 만주 근역을 아우른 영토와 중국과 싸워서 이겼다는 역사 덕분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의 역사 중 가장 역동적인 시기로 표현되는 경우도 잦고 세간의 인식도 그러하다. 광개토대왕의 경우에도 우리나라 위인들 중 순위권에 들 정도로 많은 존경을 받는 편이다. 다만 일부에서는 이 시각을 극대화하여 논란이 생길 정도의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존재한다. 고구려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이 환빠는 아니지만, 역으로 환빠들은 사실상 모두가 고구려와 대륙영토에도 막대한 호감을 가진 경우가 많아서 이미지가 겹치기에 종종 오해받기도 한다.

한편 앞서 말했듯 현대 중국은 주변국가와의 접경지역에서 패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국가(공산당) 차원에서 이론 기반을 구축하는 노력을 하는데, 이를 역사공정이라고 한다. 한국과 맞닿아 있는 동북아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동북아 지역사로서 공유되고 있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도 이 공정의 수단이 되고 있다. 이를 중국의 동북공정이라고 하여 한국, 북한은 물론 동북아 지역사를 전공하고 있는 전세계 역사학계에서 중국 정부의 정치적 의도에 의한 역사왜곡을 우려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동북공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사료

11.1. 한국

11.2. 일본

11.3. 중국

11.4. 금석문

12. 연표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연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왕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인물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인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 고구려를 소재로 하거나 등장하는 작품

<기마상>

고구려 말 성난 갈기 세워 달리는 말

그 위에 창 꼬나쥐고

허리 꺾어 냅다 달리는 군사

고구려 기마상 보고 있노라면

두 주먹에 힘 고인다

두 눈에 눈물 고인다

창과 칼 아니고서는

활 아니고서는

첫째 살아날 수 없음이

보라 고구려 아니더냐

요하 유역

송화강 유역

살수 패수 유역이 다

한나라 군현 아니더냐

이와 맞서 나라 세웠나니

어찌 싸움 없이 살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고구려는

숫제 창꾼 칼잡이 활장이 아니었나니

이 무(武)와 함께 문(文) 있었나니

문무 나누어진 중세의 기능이 옳지 못함이며

그리하여 이 땅의 먹물통 마땅히

싸우는 자 되고

싸우는 자

무단독재가 아닌

문화의 높은 향기 꺠쳐야 하나니

고구려 달리는 말

고구려 기마상 보노라면

몇천년 뒤의 자손에게도 아따 거룩하나니

  • 아테루이 - 외국 작품. 천황가가 고구려계로 등장함.
  • 하늘의 혈맥 - 외국 작품.

15. 둘러보기

고구려

역사

사회

문화

인물

왕사

건축

연호

'고구려의 추존 국왕

대양왕(태양왕) 고대양(고태양)

고구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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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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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27대

28대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

-

보덕왕

}}} ||

16. 기타

  • 한국사 교과 과목 시험에서 고구려는 다음과 같은 사료로 등장하고는 한다.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좌식자가 만여 명이나 되는데, 하호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67]이라 한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이 사료에서 고구려인 걸 알아차려야하며 고구려가 아닌 부여나 동예 등으로 오답형으로 종종 출제된다. 처음보는 수험생은 당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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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할 당시의 명칭은 고구려였으나, 장수왕 대에 이르러 국호가 고려로 바뀌었다. 국내에서는 왕건고려와의 구분을 위하여 고구려로 부른다. 후고구려(태봉)도 최초 국호는 후고구려가 아닌 고려였다.
  2. [2]삼국사기근초고왕 본기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약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붉은 깃발이 단순 군 내부에서 구분을 위한 깃발인지 왕실의 상징인지 고구려의 국기인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안악 3호분의 벽화에도 붉은 색이 첨부된 깃발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일수도 있다.

    안악 3호분 벽화 중 기수가 들고 있는 깃발이 붉은 깃발인 것을 알수가 있다.
  3. [3] 자세한 내용은 영역과 행정구역 문단을 참조.
  4. [4] 몽골 동남부 수흐바타르 아이막의 다리 강가에서 고구려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다만, 장수왕 대에 유연과의 지두우 지역 일시적 분할에 통치에 따른 것으로 학계에서는 공식적인 영역으로 비정하지는 않는다.
  5. [5] 국내성-환도성은 평시 수도-전시 수도의 개념으로 거의 일체화되어 있었으며, 고구려 장안성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과 동일하게 평양에 위치한 성이기에 애초에 《삼국사기》부터 '장안성은 평양성이라고도 한다'며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장안성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6. [6] 요사 지리지에는 국내성 수도시절 변란 때 임시 수도였던 환도성이 고구려의 중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7. [7] 건국 초기에는 소노부 해씨의 권력이 막강했으며, 이후 고씨와 해씨의 서열 다툼이 있었으나, 6대 태조왕 또는 그 이후로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8. [8] 일각에선 태왕(太王)을 고구려 군주호로 보기도 한다. 자세한 건 고구려/왕사태왕 문서 참고.
  9. [9] 보통 연개소문의 도교 수입을 현재의 정설로 인정하지만 이전에 자체적인 도교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10. [10] 일신(태양신), 영성신, 가한신, 기자신, 부여신「유화」, 고등신「주몽」 등을 섬기며 요동성 추모왕의 사당에 쇄자갑을 비치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11. [11] 이는 고려시대 역사서인 《삼국사기》 기준에 의한 것인데, 신라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 사학계에서는 소수설이지만 고구려보다 한참 후진국이었던 신라가 과연 먼저 나라를 세울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 일부는 기원전 37년보다 1~200년은 더 빨리 건국됐을 거라고 보기도 한다.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로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추모왕의 13세손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당대 금석문인 『광개토대왕비』에는 광대토대왕이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삼국사기》 기록에서도 고구려의 존속기간이 800여 년이 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신라 문무왕이 (고)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면서 내린 책문은 다음과 같다. "공의 태조인 중모왕(추모왕)은 덕을 비산에 쌓고 공을 남해에 세웠으며, 위풍을 청구에 떨치고 어진 교화는 현도를 덮었다. 자손이 대를 이어 본지가 끊어지지 않고 천리 땅을 개척하여 800년이 가까웠다(신라본기, 문무왕 10년)." 당대 신라인이 생각한 고구려의 건립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으로부터 800년을 소급하면 서기전 132년이 된다. 이는 현재의 고구려 건립연도인 기원전 37년보다 100여 년 앞서는데, 전술한 『광개토대왕비』의 4세손 누락분과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12. [12] 《당회요》와 《신당서》, 《삼국사기》에 당나라 시어사(侍御史) 였던 가언충이라는 사람이 당태종과 고구려 비기를 말하는 도중 "고구려가 900년이 되기 이전 80세된 장수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고씨가 한대로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요. 우리의 장수 이적이 80입니다." 라고 하는 대화내용이 있다. 여기서 900여 년간 존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한 듯하다. 그래서 북한이 고구려를 부르는 별칭이 동방의 천년강국
  13. [13] 두 국가 중 하나가 분명 한국사상 가장 넓은 통치 영역을 가졌음은 분명하나 고구려도 그렇고 특히 발해의 영역 기록이 워낙 모호해서 누가 더 넓었는가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판독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통치영역 자체는 발해가 고구려 보다 넓었다 보는 쪽이 조금 많긴 하지만, 발해는 고구려보다 북동쪽 변방에 중심지를 둬서 인구밀도가 낮았으므로 직접지배 영역은 고구려보다 못 미쳤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일당 그당시 살았던 발해인 대문예부터 고구려보다 우리가 약하다고 주장했으니..
  14. [14] 돈황문서 '북방 몇몇 나라의 왕통에 관한 기술'(Pelliot Tibetain 1283)
  15. [15] 샤나메
  16. [16] 돌궐 궐특근 비문
  17. [17] <Historiam>
  18. [18] 범어잡명
  19. [19] 한자 음차로는 '구구타의설라(俱俱陀醫說羅)', 의미는 '계귀(鷄貴)'. 즉 '쿠쿠테'는 '닭'이라는 의미이고 '스바라'는 '귀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닭의 신을 받들어 모시기에 닭의 깃을 꽂아 장식으로 삼는다는 해설과 함께 기록된 호칭이다. - <대당서역구법고승전>
  20. [20] 흔히 중원고구려비라 불리는 비석.
  21. [21] 물론 어원은 한자의 의미와 무관한 고유어에서 유래했겠지만.
  22. [22] 한자 문화권에서 정식 국호 앞에 대(大)자를 붙이듯이
  23. [23] 뜻은 아직 알 수 없지만.
  24. [24] 단, 근래 한국 사학계에서는 후고구려 대신 최종 국호인 태봉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음.
  25. [25] 실제로 중국 역사학자들이 종종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은 오늘날 한국에서 쓰듯이 고구려, 발해, 고려 식으로 쓰지만.
  26. [26] <발해 국호 연구>
  27. [27] 다만 이 부분은 현재까지도 확실하지가 않다. 국어 표현의 고릿적, 고린내 등의 어원이 高麗라는 설도 있기 때문.
  28. [28] 정장상팡(Zhengzhang Shangfang)은 /lje̞/, 버나드 칼그렌(Bernard Karlgren) 등은 /lje/, 판우윈(Pan Wuyun)과 사오룽펀(Shao Rongfen)은 /ljɛ/로 추정했다.
  29. [29] c는 consonant(자음)의 줄임말로 어떤 자음인지 알 수 없지만 kˤaw 앞에 어떤 부음절이 선행했을 것이라는 표시이다. kˤaw는 a음이 주모음이고 w음을 짧게 덧붙인다.
  30. [30] 전한시대의 서적인 '논형'.
  31. [31] 연노(涓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32. [32] 고구려전 항목
  33. [33] 도사(道使)라고도 한다.
  34. [34] <<한원>> 번이부 고려조옹씨괘의 <<고려기>> 출처. 이 14관등은 고구려 후기의 완성된 모습일 것이다.
  35. [35] 토졸(吐捽)이라고도 한다.
  36. [36]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라고도 한다.
  37. [37] 주부(主簿)라고도 한다.
  38. [38] 대부사자(大夫使者)라고도한다.
  39. [39] 중리조의두대형(中裏皂衣頭大兄)이라고도 한다.
  40. [40] 대사(大奢)라고도 한다.
  41. [41] 힐지(纈支)라고도 한다.
  42. [42] 유사(儒奢)라고도 한다.
  43. [43] 계달사자자(契達奢使者), 을기(乙耆)라고도 한다.
  44. [44] 실지(失支)라고도 한다.
  45. [45] 예속(翳屬), 이소(伊紹), 하소환(河紹還)이라고도 한다.
  46. [46] 실원(失元), 서인(庶人)이라고도 한다.
  47. [47] 전문 취사집단의 경우 고구려 초기 대무신왕이 부여정벌 때 '거대한 솥을 발견하여 밥을 지을 수 있었다'는 대목을 해석한 것이다.
  48. [48] 남제의 연호, 서기 489년, 장수왕 77년
  49. [49] 한마디로 남제가 '뭐? 북위면 모를까 고구려와 맞먹으라고?'라고 따지자 북위가 '이정도도 많이 대접해주는 거니 고마운 줄 알어…'하는 상황.
  50. [50] 正始, 북위의 연호, 서기 504~507년, 문자왕 13~16년
  51. [51] 생몰년 499~515. 북위의 8대 황제로 북위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다.
  52. [52] 마노 혹은 옥
  53. [53] 탐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54. [54] 고구려가 '백제랑 물길이 설쳐서 공물 못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자 북위가 '니 구역은 니가 알아서 해야지…'라고 다단계 상납을 타이르는 모습이다. 말갈과 백제를 포함한 중국 동쪽의 세계를 고구려가 관장한다는 인식도 은근히 드러나는 상황. 이게 무슨 뜻이냐면 북위가 중화사상에 입각한 천자외교를 하고 있어도 중화사상에서 분리된 고구려의 천하관과 그 천하관 내 고구려의 입지를 인정한 셈, 그러니까 하늘 아래 두 개의 세계가 있고, 하나 이상의 지존이 있을 수 있음을 돌려서 인정한 것이다.
  55. [55] 평양의 대성산성은 전통적인 고구려 수도체제의 산물이다. 그러나 초기보다 상당히 비대해진 국력을 소화하기에는 행정능률이 떨어져서, 후에 장안성으로 수도를 개선한다.
  56. [56] 평안도와 황해도는 오늘날에도 최상의 토질을 지닌, 한반도에서 농사가 가장 잘되는 땅이다. 괜히 이곳에 고조선이 자리를 잡고 부강해진 게 아니다. 오늘날 북한의 식량난은 단지 통치 체제의 문제로서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만약 황해도의 곡창지대마저 없었다면 북한정권은 진작에 붕괴했을수도 있다.
  57. [57] 역사를 보면 무리한 영토확장으로 방어선이 넓어지고 행정부족이 커져서 망한 나라는 수도 없이 많다. 반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고구려는 집요하리만큼 한사군과 요동군을 끊임없이 공격한다. 이는 중국왕조들이 가진 옛 고조선땅이 그만큼 부유하고 전략적 가치가 높은 땅이었기 때문이다.
  58. [58] 당장 전성기 오스만 제국이 그 방대한 영토를 가지고도 자신보다 한참 작은 나라인 프랑스와 국력이 비슷했던 것은, 인구부양력이 높은 프랑스의 비옥한 영토를 그 이유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러시아 제국을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59. [59] 진흥왕시기 한강유역을 상실했다고 하지만, 엄연히 한강 이북 예성강-임진강 일대는 멸망이전까지 고구려의 영토였다. 즉, 고구려는 큰 틀에서 보면 멸망시기까지 한강 일대의 패권을 빼앗기지 않았다.
  60. [60] 로마 제국의 분열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한 유럽 국가는 없다.
  61. [61] 여기다가 멸망 전에 연남생이 당으로 들고 튄 호수가 10만 호이다. 70+10=80만 내지 79만호 이고 호당 4인으로 잡을 경우 320만, 5인으로 잡을 경우 400만까지 추정 가능해진다.
  62. [62] 에프탈 유연 돌궐의 발흥은 서로 다른 시기라서 동시에 고구려 앞에 들어가기는 힘들고 이슬람이나 프랑크 토번 등은 고구려 멸망 쯤, 혹은 그 이후에 발흥을 시작한다. 남조의 경우 유송 대명 8년 인구수 468만4401, 517만4074, 진 인구 50만가구로 집계된다. 보다시피 500만 급이면 고구려와 체급이 다르다고 단정할 정도는 아니다. 강남은 제대로 된 정치체가 들어서서 관리를 잘 하면 1000만급 덩치가 될 수 있는 땅으로 후한 시대에도 그 가능성을 보여줬으나 오나라부터 남조 진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에 걸쳐 인구수 200~500만 정도의 국가가 들어서는 데 그치는 반면 화북의 절반에 해당하는 전연 북주 북제 등조차 1000만급 덩치를 자랑하며 체급 차이를 보여준다.
  63. [63] 물론 수렵을 병행한 요동지역의 민족들과는 달리 본격 순수유목민족이라 할 수 있는 몽골 고원의 유목민족들은 독자적이고 강력한 세력을 계속 건설하고 깽판을 치며, 급기야는 징기스칸 시기엔 아예 중국을 차지하고 세계정복에 나선다.
  64. [64] 19세기에 이르러서 완전히 복속되었으며, 이후에도 일부는 불모지로 남아있다가 그 개척은 20세기 초에야 끝났다.
  65. [65] 단, 이때 요의 태도가 상당히 애매하여 직접적으로 고구려의 후계자라고 한 적은 없다. 그래서인지 고려가 자신이 적통이라고 하자 별 다른 항의없이 순순히 인정해준다.
  66. [66] 그러나 고려는 고려시대 중후기 무신정권권문세족 등 당시 막장 지배층들의 폭정과 전횡으로 인한 왕조 멸망, 국가 막장 테크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
  67. [67] 국동대혈이라는 것으로, 국사편찬위 홈페이지에 정보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수험생들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혈이라 언급되기도 하며, 이 또한 고구려를 가리키는 키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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