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자(子)

공(孔)

구(丘)

중니(仲尼)

출생

기원전 551년[1] 9월 28일,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

사망

기원전 479년[2] (71세-72세), 노나라

직업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3], 시인[4]

부모

아버지: 숙량흘(叔梁紇),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병관씨(幷官氏)의 여식(女息)

자녀

아들: 공리(孔鯉)

작위

문단 참조

곡부 공묘 대성전에 걸린 청나라 황제들의 친필 편액

만세사표(萬世師表)[5],
사문재자(斯文在玆)[6], 덕제주재(德齋幬載)[7],
성집대성(聖集大成)[8], 생민미유(生民未有)[9]

1. 개요
2. 생애
2.1. 조상
2.2. 출생 배경
2.3. 유랑생활
2.4. 정치인생
2.5. 말년
3. 사상
3.1. 교육
3.2. 가무
3.2.1. 금(琴) 수업의 일화
3.3. 인성론
3.4. 무(武)
3.5. 공자 관련 문헌
4. 제자
4.1. 공자의 제자 목록
5. 동시대인의 평가
6. 현대 중국에서의 부활
7. 기타 등등
7.1. 불우한 인생
7.2. 식습관
7.3. 자손 대대로 이어진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
7.4. 역대 왕조가 내린 작위
7.4.1. 공자 조상들의 작위
7.4.2. 공자의 작위
7.4.3. 공자 후손의 작위
7.5. 후계자
8. 대중매체에서
8.1. 삼국지 시리즈
8.2. 기타
8.3. 애니메이션 〈공자전〉(1995)
9. 타 문화권에서
10. 기념일
11. 사당
12. 관련 문서

1. 개요

(仁)이 멀리 있는 줄로 아느냐? 내가 바란다면야, 이리로 인이 오느니라!

논어 술이편에서: 子曰仁遠乎哉我欲仁斯仁至矣

동아시아 인문주의의 원형이 된 고대 중국의 사상가

孔子, Confucius

동아시아적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인(仁)', 즉 도덕적, 인본주의적, 인문주의적인 의미의 '사람다움'을 최초로 제시[10]하고, 이에 입각한 효제자(孝悌慈), 서(恕), 경(敬)의 윤리관, 예치(禮治), 덕치(德治)의 정치관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는 세상이 혼란한 연유를 인(仁)의 부재와 예악(禮樂)의 상실에서 찾고, 예악을 따르는 인군(仁君)을 일으켜 주(周)나라 초기와 같은 성세(聖世)를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정치는 인(仁)을 갖추고 예(禮)에 밝은 군자(君子)[11]가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 군자를 양성함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 교육을 베풀었다. 그가 정립(正立)한 사상, 그리고 그의 사후 후대 학자들이 그 사상을 골자(骨子)로 하고 여러 사상을 곁들여[12][13] 발전, 또는 변질시켜 체계화한 일련의 사상계(思想界)를 우리는 유학(儒學), 또는 유교(儒敎)라고 부른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어려서부터 예에 밝았다. 30대부터 제자 양성을 시작했고, 50대에 이르러 노나라의 중도재(中都宰)[14]를 지냈는데 잘 다스렸다. 이에 노나라 정공(定公)의 호감을 얻어 노나라의 세 권세가인 삼환(三桓)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과업을 맡았으나 끝내 좌절되었고, 그는 실각하였다. 자신의 이상이 노나라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안 공자는 이후 여러 제자를 이끌고 13년 동안 중국 천하를 방랑하며 뜻이 맞는 군주를 찾았지만 이 역시 좌절되었다. 말년에 노나라로 귀국하여 국로(國老)의 대접을 받았으나 역시 등용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제자 양성과 고문헌 정리에 진력하다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세간에서는 보통 공자를 '유교의 창시자' 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적어도 공자 자신은 절대 자신이 무언가의 창시자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공자는 다만 자신을 고래(古來)의 인문 전통의 계승자로 여겼으며, 자신의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옛 성왕(聖王), 성현(聖賢)의 행적에 깃든 참뜻을 베껴낸 것 뿐이라고 여겼다. 유명한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전술(傳述)하였되, 창작(創作)하지는 않았다."는 말은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15] 사실 묵자(墨子)의 묵가(墨家)처럼 지도자 이름을 따 공가(孔家)라 불리는 경우가 드물고 유가(儒家)라는 이름이 보편화된 것도 후대의 학자들이 이를 감안하였기 때문이다.[16]

현대 중국어 발음은 쿵쯔(Kǒng zǐ). 이름은 구(丘, 현대 중국어 발음은 추[qiū]). 는 중니(仲尼)다. 중(仲)은 둘째라는 뜻이고, 니(尼)는 공자가 태어난 니구산의 니다. 이름 구도 니구산의 구. 공자라는 존칭에서 자(子)는 선생이라는 뜻.

원 성종 11년(대덕大德 11년, 1307년)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이것이 현재 성균관 대성전 등지의 공문사당(孔門祠堂) 위패에 표기되는 공식 존호다. 大成(대성)이라 함은 맹자가 《맹자》에서 공자를 평한 말인 '공자께서는 여러 성현들의 도를 살피시어 학문을 집대성(集大成)[17]하셨다'에서 따왔다. 至(지)라 함은 '지고하다(至高)'의 의미. 聖(성)이라 함은 '~하신 성인(聖人)'의 의미로, '지'와 '성'이 결합하여 공자의 전용 칭호인 至聖(지성)이 만들어졌다: '더할 나위 없이 높은 경지에 이르신 성인'이라는 것. 文宣(문선)이라 함은 '중원(中原)에 문화를 베풀어 주셨다!'라는 뜻. 이라 함은…

'부자(夫子)'라는 표현도 있는데, 이건 별 거 아니고 원래 그(夫) 선생님(子)이라는 뜻이다. '공부자(孔夫子)'라고 표현하는 사례는 별로 없는데, 서구 선교사들은 이 표현을 라틴어 스타일로 바꿔서 '콘푸치우스(Confucius)'라는 이름을 만들었다.[18] '공부자'의 중국어 발음[19]에 남성 명사 주격 단수 어미인 '-us'를 붙인 것. 맹자도 이런 스타일로 '멘치우스(Mencius)'. 단, 맹자는 '부(夫)'가 안 들어간다. 즉 서구권에서 공자와 맹자의 이름은 '공부자우스',' 맹자우스'가 된다. 영어로는 [kənˈfjuːʃəs(컨퓨셔스)], [ˈmɛnʃiəs(멘시어스)]로 발음. 뭔가 네이밍 센스가 네로 25시, 아스테릭스 한국어 번역 같다. 이 두 사람이 라틴어식 이름으로 널리 통용되는 두 명뿐인 중국인이다. 묵자(墨子) 역시 'Micius'로 칭하기도 하나 널리 쓰이진 않는다.

위 '부자'와도 통하는 것으로, 중세 말기의 유럽에서 '철학자'라고만 써놓으면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키던 것 처럼, 한자문화권에서는 다른 수식어 모조리 생략하고 '선생님(子)'이라고만 적어넣으면 공자를 뜻했다. 즉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공자 왈'도 아니고 '자왈(子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바로는)'이라고만 해도 공자의 말을 자동으로 뜻했으며, 이러한 점에서[20] 한자 문화권에서 그의 위상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2. 생애

2.1. 조상

공자의 조상이었던 공보가(孔父嘉)는 원래 송나라의 대부였으나 가문이 화를 입어 공부가는 죽고 그 후손이 노나라로 도망쳤다. 이게 중요한 것이 송나라는 과거 은나라의 유민들이 이주하여 세운 나라라는 점이다. 마치 유대인프로이트마르크스, 아인슈타인자기 민족의 종교적 성향과 정반대되는 학문을 발전시킨 것처럼, 종교 문명인 은나라 출신 공자가 주나라의 인문문화를 발전시킨 것. 3년상도 은나라의 풍습으로, 공자가 죽음을 앞두고 말한 문구에서도 이 점이 드러난다. "하나라 사람은 동쪽 계단에 장사지내고, 주나라 사람은 서쪽계단에 지내고, 은나라 사람은 양 기둥사이에 지낸다. 어젯밤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일찍이 은나라 사람이었다."[21]

여기서 공구의 이름에 대한 논란도 추가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춘추시대의 성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22]. 춘추시대에 성과 씨는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성은 조상대대로 이어진 근원에 가까운 개념이어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교체할 수 없었지만, 씨는 집안을 구별하는 개념이어서 필요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공자의 초기 제자중에서 남궁경숙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의 아버지는 맹이자이고 형은 맹의자였다. 즉 이 사람의 성은 원래 맹이었다. 하지만 차남인 맹경숙은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남궁이라는 씨를 만들어서 분가한 것이고, 이후 사서에도 남궁경숙으로 기록되어 있다.[23] 이해하기 쉽게 한국식으로 설명하자면 시조 외에 중시조가 있어서 성을 바꿔버리면 이후의 후손들은 중시조를 따라서 성을 사용하게 된다고 보면 그나마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24]

사실 성과 씨가 구분되는 것은 고대 로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풍습. 프라이노멘[名] + 노멘[本, 姓] + 코그노멘[派, 氏]이 기본.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율리우스 본관의 카이사르 파의 가이우스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그나마 비슷한 것으로 한국에는 '본관'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공자를 보자. 공자는 일찍이 상나라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상나라에서 성을 가진 이들의 성은 '자子'다[25]. 때문에 공자의 성 역시 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송나라 거주 시기에 공자의 조상중에서 '공보가孔父嘉'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공보는 (字)고, 가嘉가 이름이라는 것이다. 춘추시대 초중기에는 자를 이름보다 먼저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표시된 것이다. 즉 이 사람의 본명은 자가子嘉이다. 문제는 이 공보가가 송나라에서 대사마까지 오르면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공보가가 결국 정적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이후 '공자가어'는 공자의 계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보가 → 자목금보 → 역이 → 방숙[26] → 백하 → 숙량흘 → 공자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가의 자였던 공보의 첫번째 글자인 공이 성씨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27] 그러다가 숙량흘 대에 이르러서 '사'에 해당하는 작은 무관직을 한 것이다.

2.2. 출생 배경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28]은 장대한 체구의 무인(武人)이었다고 한다. 노나라군이 유인계략에 속아 상대편 성 안에 갇힐 위기에 처하자, 아래로 내려오는 성문[29]을 그냥 팔로 받쳐서 아군을 달아나게 했을 정도로 힘이 좋았다고 한다. 뒤에 태어날 공자 역시 아버지 숙량흘을 닮았는지 그 또한 체구가 좋았다. 숙량홀의 키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 것(10척이라는 이야기는 있다.)과 달리 공자의 키는 9척 6촌이었다고 정확히 전해진다. 도량형이 명확하지 않지만, 당대의 거구인 것은 확실하다. 자로가 아직 공자의 제자이기 이전, 그저 글귀나 읽는 비리비리한 서생인 줄 알고 쳐들어갔다가 이 장대한 기골에 기세가 꺾였다고 한다.

숙량흘은 딸만 9명을 낳는 바람에 둘째 부인을 들여서 겨우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몸에 장애가 있었다. 이름이 맹피(孟皮)였는데, 맹은 서장남의 뜻을 지닌다. 절름발이로 추정된다. 논어에 형의 딸을 공자가 시집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실존성이 입증된다.

결국 숙량흘은 60대에 무당의 16살짜리 무녀(巫女) 안징재를 부인으로 들인다. 안씨 집안에서는 3명의 딸이 있었다고 하는데[30], 숙량흘이 셋 중 하나를 아내로 맞으려 하자, 막내딸 안징재가 스스로 나서서 숙량흘의 아내가 되었다. 결국 공자를 낳았으니 안징재는 영험한 무녀였던 모양이다.

숙량흘과 안징재는 노나라 수도 곡부 인근의 니구산(尼丘山)에서 살았다. 안징재만 거기서 살고 숙량흘은 가끔 찾아오는 형식. 얼마 후 안징재는 공자를 낳았다.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공자의 탄생을 야합(野合)이라고 표현했는데, 도올 김용옥은 이를 말 그대로 '들에서 했다'라고 설명한다. 즉,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비공식적 관계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공자는 거의 사생아나 다름 없었다. 공자에 대한 각별한 존경심을 품은 사마천이 이 정도로 표현한 걸 보면 딱히 미화시킬 방법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라는 건 잘못된 해석이다. 사마천은 굉장히 함축적인 의미로 글을 썼다. 숙량흘이 안징재와 혼을 올릴 당시 그의 나이는 66세었는데, 우선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는 결혼이라는 설과 한의학적으로 64세까지만 남자가 정기가 있는데 그걸 지났기 때문에 야합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설이 있다. 66세에 여자를 들인 숙량흘을 '조야하다', 즉 '천하고 보기 좋지 못하다'라고 했는데 이를 줄여서 '야'라고 사마천은 일컬었고 좋지 못한 만남에서 나왔다라는 뜻의 야합이생일(野合而生)이라고 보는게 맞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이상 숙량흘이 공자의 아버지라는 것이 사기(史記)로 인해 흔히 알려져 있는 내용이지만, 이것을 온전히 부정하는 학설 또한 존재한다. H.G Creel에 따르면 그의 족보가 좌전(춘추좌씨전)에 상세하게 나오는 것은 사실이나, 그 이전 문헌들이 전혀 언급하지 않은 문제를 그토록 상세하게 다루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심스럽고, 초기 문헌(공자로부터 약 100년간의 문헌)에 공자의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은 것 또한 족보에 의심을 품게 한다고 말한다. 크릴은 “공자가어(孔子家語)와 사기(史記)는 모두 공자의 아버지를 숙량흘이라 하는데, 이 사람은 좌전(左傳)에 언급된 숙흘(叔紇)과 동일인물임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조그마한 핑계만 있어도 공자 이름을 끌어대는 것이 보통인 좌전이 숙량흘이 공자의 아버지라는 것을 두 번 다 말하지 않은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후세에 그것을 동일인으로 만들었는가? 그 이유는 어리석을 정도로 단순한 데 있는 것 같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공자 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추인(陬人)이라는 것뿐이며[31] 좌전에 언급된 추인은 숙흘뿐이다. 공자에 관한 자료라면 어떤 단편이라도 고문헌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하였음에 틀림없다.”[32] 라고 추측한다.

2.3. 유랑생활

춘추시대 말기는 유세객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때이기 때문에 공자가 천하를 돌아다닌 게 유독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30대부터 60대까지를 전부 공자의 유랑생활이라고 열거해 놨지만, 공자의 유랑생활은 1기와 2기로 나뉜다.

  • 공자는 원래 밑바닥 출신이기 때문에 30대 때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여러모로 공자를 포장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적당히 필터링하면서 봐야 된다. 30~40대 때의 유랑은 거의 유학에 가까운 유랑이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천하라는 개념은 중국의 영토와 함께 확대된 개념이라서 요즘 중국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교통이 불편한 고대에는 중국의 2-3개의 성 수준도 천하였다.
  • 보통 공자의 유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젊을 때 돌아다니는 것을 포함하는 게 아니라, 60대 이후 노나라를 떠나 14년 정도 유랑한 것을 가리킨다. 이 유랑은 구체적으로 정치참여를 하려고 유랑한 거라 대통령이 순방하듯 스치고 지나간 것이 아니다. 그리고 14년 동안 노나라를 떠나 있었다는 건, 당연히 14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 살았다는 걸 의미한다.

공자가 정착하지 못하고 결국 노나라로 돌아온 건 각 나라의 군주들이 공자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자가 못나서가 아니라 군주들이 공자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거나 그의 생각에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당연히 공자는 혼자 다닌 것이 아니다. 일단 한 나라에서 정치를 하려는 사람이 혼자 짐싸들고 다니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요즘도 해외여행 다니다가 사고가 나는데 옛날에는 오죽할까. 웬만한 규모로 여행을 다닐려면 용병을 고용하거나 집단 자체가 전투력이 있어야 했다. 공자의 집단은 그냥 책이나 읽는 학자집단이 아니라 당장 전쟁을 수행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인물들을 포함한 집단이었다. 남궁경숙과 다녔다는 기록은 그다지 신뢰할 만한 설이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가 상당히 문학적으로 포장이 많이 되어 있다는 것은 오늘날 역사계의 상식이다.
  • 공자가 거물이 되어 유랑을 시작한 건 60대 이후이기 때문에 31세 연하라고 기록되어 있는 자공이 유랑생활의 물주였다고 볼 수 있다. 논어에도 공자가 자공이 엄청나게 돈을 잘 번다고 감탄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공은 원래 출신 자체가 상인이었다. 공자가 젊었을 때 물질적으로 도움을 줬다고 하는 계손씨와 남궁경숙(맹손씨)은 노나라의 대부였는데, 대부라는 건 쉽게 말해서 노나라의 한 지방을 지배하는 군주이다. 공자가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공자가 대단한 인물이라 대접받은 것이 아니라 그 집단 밑에서 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노나라가 싫어서 남의 나라에서 일하겠다는 사람한테 노나라 대부들이 왜 돈까지 줘 가면서 유랑생활을 지원하겠는가?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계손씨 맹손씨 등의 실권자들과 충돌 때문이었다. 공자의 유랑생활은 공자가 그동안 벌어 놓은 돈과 자공이 투입해 준 돈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2.4. 정치인생

그가 다스린 지역은 몇 년 안에 질서가 바로잡히고 착실하게 내실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초나라에서 그를 초청했을 때는 초나라 주변국가들이 합동으로 병력을 파견해 공자를 포위해 죽이려고 했을 정도.

절약형 경제정책을 펴며 노나라를 다스렸는데, 이웃 대국인 제나라가 공자를 견제하기 위해 노나라가 소비형 경제정책을 채택하게 만들었고,[35] 노나라 내에서 공자를 두려워했던 기득권 층의 공격도 있고 해서, 결국 실각하고 노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후 천하를 주유하며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다가 실패하고, 말년에 국부(國父) 대접을 받으며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교육에 전념하게 되었다.

노나라 정공 10년(기원전 500년)의 일인데, 춘추 경문에서 "여름, 공이 제후(제나라 왕 - 작위가 후작이라 저렇게 부른다)와 협곡에서 만났다. 공이 협곡에서 돌아왔다. 제나라 사람이 와서 운과 환과 귀음 땅을 돌려줬다."라고만 서술한 사건이다. 춘추 3전(곡량전, 공양전, 좌전)에서는 이 만남에서 공자가 보여준 활약을 각각 서술했는데, 좌전에 나오는 얘기가 가장 자세하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나라가 제나라에게 협박당할 위기에 처했고, 제나라는 "중니(공자)는 예를 좋아하지만 용맹하지 못하니 담판 때 주변에서 무기를 들고 춤추게 해서 겁을 주면 우리 뜻대로 될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공자는 회담 전부터 위엄을 세워야 한다고 많은 군사를 대동하고 회담장으로 향했고 무기를 든 이민족 춤꾼들이 노나라왕을 위협하자 "두 나라의 임금이 만나는 곳인데 이런 자들은 있어선 안됩니다."라고 꾸짖어 물리쳤고 제나라왕이 요상한 차림의 미녀와 광대들을 들여보내자 "양국의 군주가 있는 자리에서 이런 행패를 부리며 분위기를 어지럽힌 것들은 마땅히 다 죽여야겠죠?"라고 외쳐서 광대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게 만들었다. 결국 그 제나라는 노나라를 협박하긴커녕 노나라에게 기가 죽어버렸다.

다만 공자의 정치적 인생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마음에 이상을 품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쓰임받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그것을 실현할 자리를 구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한 것이다. 노나라에서 재상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지만, 당시 노나라의 실세는 계씨였다. 그리고 재상을 지냈다는 기록 자체를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논어에서 믿을 만한 기록은 공자의 어록과 관련된 것 이외에는 조작의 혐의가 매우 짙기 때문이다.

공자의 제자들 역시 노나라에서 벼슬을 얻었을 때 계씨 밑에서 일하였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다 노나라에 돌아온 계기는 공자의 제자인 염구가 계씨 밑에서 일하면서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후이다. 이때 공자의 제자들은 어느 정도 노나라에서 지위를 굳혔고, 그 존경하는 스승이 끈 떨어진 연처럼 지내는 것은 결코 그들의 체면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중국 역사의 성인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공자가 인생에서 성공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는 벼슬도 제대로 못했고, 안회, 자로와 같은 아끼는 제자들을 먼저 저 세상에 보내야 했고,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여 '仁'에 입각한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이상은 천하의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시스템적으로는 분명 한 단계 발전한 시기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군주와 신하들 간의 배신이 난무하고, 남녀 간의 근친상간 및 타락이 절정에 이르렀고, 지배층이 백성들을 철저히 쥐어짜는 말세였다. 하지만 도리어 공자가 말하는 '인간다움'을 가슴에 새긴 제자들이 온갖 배신으로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그 자신이 그 배신으로 말미암아 자리를 차지한 각 국의 군주들에게 쓰임을 받기 시작하면서 공자의 가르침은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자로의 충성스러운 죽음'은 공자 무리의 취업률을 높인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의 죽음 이후, 공자의 제자들이 노나라에서 대거 등용되기 시작했다. 자공과 염구는 각기 외교와 군사에서 계씨 밑에서 명성을 떨친다. 그리고 수백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충심을 다하는 인간적인 제자들이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수없이 되뇌이면서, 유교는 동아시아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36]

반면 공자에 관한 관직 기록을 어느 정도 신뢰하는 입장도 있는데, 본문에 자주 추가된 중국 학자 리카이저우의 글이다. 사실 논어를 포함한 글들을 제자들이 이후에 추가했다고 한다면, 공자의 말이건 행적이건 진실공방부터 복잡해진다. 그리고 이 입장에서도 공자가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완벽한 정치적 실패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뿐이다.

우선 리카이저우의 글에서 계손씨를 포함한 계씨는 공자의 후원자이지 경쟁자가 아니고, 공자 역시 재상에 오른 적은 없다. 하지만 40대에서 50대 중반까지의 기간 동안 공자는 중도재, 사공, 대사구의 직책을 거쳤으며, 이 과정에서 녹봉도 적지 않게 받았다. 하지만 노나라이건 위나라이건 제나라이건 완전히 자리를 잡고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다고 판단할 뿐이다. 그래서 공자는 다시 55세 이후에 다시 유랑을 떠났다가 60대에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공자는 노나라에서 보낸 10여년의 시기를 제외하면 제대로 관직에서 활동하지 못했지만, 이걸 인생에 있어서 좌절로 보긴 어렵다. 공자는 관직 생활 과정이나 명성으로 인하여 재산도 꽤나 모았고, 3천명에 가까운 제자를 받아들이면서 수업료도 받았다. 집도 당대의 대신들만큼 잘 살은 것은 아니지만, 100묘[37]라는 집의 크기는 소도시의 일반인들이 5묘의 집에 살았던 것과 비교하면 20배나 되는 크기다.

2.5. 말년

곡부 공림(孔林)에 있는 공자의 무덤.
묘비는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다.

10년 넘게 천하를 주유했으나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 채 고국으로 돌아온 공자는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죽기 2년 전에 "(애공) 14년 봄에 서쪽에서 사냥하여 기린을 잡았다."(十有四年春, 西狩獲麟)라는 기사를 끝으로, 춘추의 집필을 중단한다. 붓을 꺾은 이유는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였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기린 문서 참조.

노년의 나이, 여러 국가를 떠돌아다닌 피로와 더불어서, 첫째 아들 백어과 애제자 안연이 사망하고, 자로마저 위나라에서 피살당해 젓갈이 되버리자 기원전 480년에 공자는 병석에 누웠다. 《사기》 〈공자세가〉에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온 자공에게 공자가 왜 이리 늦었느냐고 탄식한 후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산이 무너지는가! 대들보가 부러지는가! 철인은 죽어가는가!" [38]

예기》 <단궁(檀弓)> 편에는, 《사기》에 전해지는 것과 거의 같은 이야기가 상당히 다른 뉘앙스로 서술되어 있다.

자공과 만난 후 일주일이 지난 노나라 애공 16년 4월 기축일(기원전 479년 3월 9일), 공자는 향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사상

공자의 가르침의 핵심은 한마디로 호학(好學)이다. 배우기를 좋아하라는 것. 물론 이 배움은 수능공부나 고시패스를 위한 공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논어에서 공자는 "10호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에도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것이 나만큼은 되는 사람들이야 분명히 있겠지만, 나보다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라고 자부하며 말하기까지 했다.[39]

또한 부자가 되든 거지가 되든 정당하게 살아야지, 부자가 되려고 더러운 짓을 하거나 거지라고 해서 더럽게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 핵심적 가르침 중 하나다. 논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공자의 가르침은 현란한 언어로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평범하고 상식적인 수준의 말만 간단하게 해주는 스타일.

인(仁)이라는 개념도 논리적으로 정의해 놓지 않았는데, 이것은 후대의 해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좋은 것을 좋아하고 안 좋은 것을 싫어할 줄 아는 마음, 궁극적으로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 많은 교류와 접촉을 하기 전부터 상대를 먼저 인식하려 노력하고 적극 배려하는 마음을 의미한다.[40] 요즘 말로 하면 비언어적 소통 혹은 다중적 소통, 즉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에 가깝다. 그래서 도올 김용옥은 간단하게 심미적 감수성이라고 설명한다. 공자는 그럴듯한 말재주를 늘어놓거나 좋은 표정을 꾸미면서 남에게 가식 떠는, 교언영색하는 인간은 불인(不仁)하다고 말한다.

원래 공자는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공자에게 충(忠)이란 마음에서 우러러나오는 진심과도 같은 의미로 쓰였고, 효(孝)란 부모자식 간의 사랑으로써 말하여졌다. 하지만 바로 직계 제자들부터 충효를 절대적 복종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증자.[41]

3.1. 교육

흔히 유교라고 하면 도식적으로 틀에 박힌 이야기를 듣기 쉽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공자 본인은 그렇게 틀에 박힌 스타일로 교육하지 않았다. 공자의 기본 교육은 원래 노래(詩)였다. 시라는 표현 때문에 그냥 조용히 독서만 할 것 같지만, 실제로 리듬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 시경은 가사만 전해져서 멜로디를 알 수 없는 것일 뿐이다.

공자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예(六藝)라는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 예는 그냥 예의범절이 아니라 각종 공식행사의 의례 절차를 배우는 것. 이걸 마스터하면 당장 외교나 제사 등의 국가행사를 주관할 능력이 생긴다.
  • 악은 음악인데, 이것도 그냥 요즘 실용음악 같은 것 뿐만 아니라 행사 때 연주할 음악을 배우는 것이라서 역시 관료로써의 실질적 교육이 된다. 한편 유교 텍스트에서는 문화 자체를 예악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참고할 것.
  • 사와 어는 활쏘기와 수레타기. 즉, 전쟁기술이다.
  • 서와 수는 문서 만들기와 회계처리라고 보면 된다.[42]

유교가 대충 뜬구름 잡는 철학공부라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착각이다. 공자는 정말 당장 관료로서 써먹을 수 있는 실용교육도 했던 사람이다.

사실 공자의 진짜 업적이라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을 민간에 전파했다는 것이다. 공자 이전에는 제대로 된 교육 기관이랄 것이 중국에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것도 귀족 한정이었다. 이렇게 귀족들이 지배계층에 필수적인 기술과 매너를 '폐쇄적'으로 가내에서 전승하는 것은 어느 문화권이나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예물로 육포 한 다발만 가져온다면 다 가르쳐주었고, 이 이야기는 지금에 이르러선 속수지례(束脩之禮)라는 성어로 굳어졌다. 여기서 '육포'를 언급한 이유는, 당시 육포는 남에게 주는 예물로는 가장 격이 낮은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스팸이나 참치캔 정도 지위였다. 즉 배우고 싶어서 찾아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르치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 다만 실력이 안 되면 그딴 거 없고(…). 논어의 자로편을 보면 공자가 백성들이 많으면 넉넉하게 해주어야 하고, 넉넉하게 되면 가르쳐주어야 된다고 얘기한다. 공자에게 있어 교육이란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꼭 받아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렇듯 공자는 자신이 배움을 좋아함을 자주 강조했다. "나는 태어나면서 알았던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구절에서 그 정신이 잘 드러난다.[43] 다만 공자 숭배가 심해지면서 "공자는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며 신적 존재로 숭배하는 유학자들이 많아졌고 최술은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에서 이를 강렬히 비판했다.

3.2. 가무

공자는 무녀 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어릴 때부터 노래와 춤에 익숙했는데, 당시에는 무녀가 곧 장례를 치러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각종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으며, 노래부르기를 심히 즐겨하여 노래 잘 부르는 사람만 만나면 노래를 먼저 부르게 하고 따라 부르곤 하는 전문적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술이편 31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자는 이러한 무속의 전통 속에서 크면서 일찍이 이 "노래"라는 인간의 문화현상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노래를 단순히 듣고 즐기는 수준에서 앞으로 올 수천년의 인류의 문명의 보편적 교양의 전범으로서 승화시켰다. 공자는 제자들에게도 노래(詩)를 암송하게 하는 교육을 했다고 한다.

3.2.1. 금(琴) 수업의 일화

사기 공자세가에 공자가 악관(사양자-師襄子)에게 금 타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가 한 가지 곡을 익히는데 악관이 다른 곡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다고 말하자 공자가 "나는 이미 그 곡은 익혔으나 아직 그 기술은 터득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계속 연습하였다. 기술을 터득하고도 '곡조의 뜻'을 터득해야 한다며 계속 연습하였다. 뜻을 터득하고도 '그 곡 속의 사람됨'을 터득하지 못하였다며 계속 연습하였다. 결국 그 곡 속의 사람됨을 터득하였는데….

이제야 나는 그 곡 속의 사람됨을 알았으니 검디검은 피부에, 큰 키에, 눈은 큰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고 사방 제후국에 왕 노릇 하는 것 같으니, 문왕(文王)이 아니면 그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으리오!

라고 말하며 문왕의 곡이라는걸 알아냈다. 악관이 일어나 두 번 절하며 "원래 나의 스승께서도 이 곡이 문왕조(操)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44][45]

3.3. 인성론

맹자가 성선을 주장하고, 순자가 성악을 주장한데 비해, 공자 본인은 간단하게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는 비슷하지만 후천적 학습에 의해 차이가 난다 정도로만 말했다. 유교는 원래 본성 같은 것보다는 교육을 중시한다. 맹자와 순자 역시 교육을 해야 하는 근거로 저것들을 제시했던 것이다.착한놈이라 가르쳐서 더 착하게해야지 vs 나쁜놈이라 가르쳐서 착하게해야지 유교의 학자들이 만든 모든 이론은 사실 근본적으로 공자의 핵심 사상인 '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상[46]의 근거를 위해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7]

하지만 2400년후에 어떤 작가을 위해 성선설을 주장한 것으로 나오는데다가 콩자로 개명당하는 굴욕을 겪게 된다.

3.4. 무(武)

또한 스스로 전차를 잘 다룬다고 했는데, 전차를 모는 사람은 지휘관이자 전사를 의미한다. 공자의 키는 9척 6촌[48]이 넘는 거구였기 때문에 당연히 육체적 능력이 허당이었을 리가 없다. 덩치도 덩치지만 공자는 목수 일이나 전차 몰기 등 온갖 궂은 노동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심지어 그 자로[49]를 무력으로 제압했다는 얘기도 있다. 위에서 말한 육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제자들에게 군사교육도 했던 사람이다. 춘추시대 때는 문관과 무관의 구분이 없었다.

원래 춘추시대의 당대의 사(士)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 계급이었다. 평소에는 정치를 하고 전시에는 전쟁을 하는 것이 사(士)였다. 즉, 공자의 집단은 거의 무장세력이었다. 당대에는 이런 무장세력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것을 제자백가라 부른다.[50] 물론 싸움만 하는 건 아니며 국가를 운영하고 행정업무를 다루기 위해서 학문도 갈고 닦았다. 플라톤도 거구에 레슬링은 잘했다고 한다. 플라톤의 스승이자, 공자처럼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른 소크라테스는 참전용사다. 크샤트리아 싯다르타채찍 마스터 예수, 메카 정복자 무함마드까지 성인은 모두 전투민족이다참고로 고대에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재산과 지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단 무장은 개인돈, 또는 지휘관의 돈으로 구비하던게 근대 이전 이야기여서 덕분에 군대의 의장과 무기는 각양각색이었다. 즉 돈 없으면 전쟁에 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후에 약탈하는 권리 또한 개인의 지위와 재산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였다. 그 때문에 지휘관이나 피 정복민은 그를 막으려면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어야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들의 권리가 커져 고대 민주주의 체제로 발전한 것도, 그리스 군대가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 보병부대 위주로 구성되고 이를 통해 시민들의 경제력과 권력이 커질 수 밖에 없게 된 것.

3.5. 공자 관련 문헌

공자는 저술가가 아니었다. 스스로도 전해져 오는 것을 정리했을 뿐, 스스로 만든 책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시경을 정리하고 주역에 해설을 달고, 춘추를 지었다고 전해져 오지만, 이 중에서 분명히 공자의 손에 의해 직접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춘추의 경문이며, 나머지는 후대에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경전들은 대부분 후대에 제국과 같은 거대한 권력체의 후원을 받아 경전화될 때 성립되기 마련이다. 논어도 공자의 책이 아니라, 공자와 그의 제자 또는 관련된 사람들의 언행을,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해 놓은 것이다. 공자는 이론보다는 행동을 한 사람이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인생에 대한 각종 일화와 기록의 일차적 소스로 가장 유명하고 진실성이 가장 높으면서도 내용이 풍부한 것은 당연히 논어. 그렇지만 예기에서도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공자와 관련된 일화를 상당히 많이 확인할 수 있다.(예: 가정맹어호) 그 외에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한나라 시기까지 구전되거나 기록에 남아 있던 각종 일화들을 모아 놓은 공자가어도 중요한 소스. 사마천사기의 '공자세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관련 자료들을 모아 한편의 완성된 전기로 만들어 놓은 현전하는 최초의 문헌이며, 당연히 위의 소스들을 이용한다. 이상의 자료들을 제외한 다른 자료들은 단편적이거나 위서이거나(예: 공총자) 실화라기 보다는 우화에 가깝거나(예: 장자) 위의 자료들을 이용한 이차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4. 제자

3천 명에 육박하는 제자들을 육성하여[51], 이후 전국시대의 인재풀을 만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10명의 제자를 공문십철이라고 부른다. 명문가의 자식교육법이라는 책에선 그 당시 잘나가던 학원원장이라는 썰이 나온다(…)[52] 사실 이 사람들이 대륙 곳곳으로 진출해서 상당수의 제자백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자도 공자의 학문을 좀 더 보편주의화시킨 인물이고, 보통 법가로 알려져 있는 상앙은 공자의 제자 자하가 위나라에 세운 학교에서 배출된 인물이고, 한비자나 이사 등은 순자의 제자였다.

그러니까 자공, 자로 등의 주요 인물만 대단한 게 아니라, 공자의 제자들이 이후 전국시대에 활약한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공자가 유랑생활 할 때도 공자의 제자들은 수시로 다른 나라로 가서 일을 하기도 하고, 그들의 소개로 공자가 초청되기도 했다. 특히 공자가 10여년 동안 유랑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재벌이었던 자공의 경제적 지원이 컸다. 공자가 마냥 가난했다고만 생각하는 건 착각. 군주나 고위관료들과 교류하려면 최소한의 경제적 수준은 있어야 된다. 노나라에 돌아왔을 때도 공자는 집에 마굿간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고급 세단 몇 대는 굴렸다는 뜻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는 확고하게 굳어진 신분제도가 없었다. 물론 노비 같은 게 있기는 한데, 신분적으로 규정된 노비가 아니다. 공자는 가르침을 베푸는데 있어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제자이자 친구인 자로도 들에서 살던 양아치였다. 공자 본인도 산골에서 태어난 천한 사생아나 다름없었다. 공자는 어릴 때 천하다며 문전박대를 당한 경험이 있었고, 꽤 오랫동안 아버지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오나라 재상(大宰, 태재)이 공자를 보고 "정말 성인이시다. 다방면으로 재주가 넘치시니." 라고 말했는데, 이를 들은 공자가 말했다.그가 나를 잘 아는구나. 나는 어렸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잔재주가 많을 뿐이다.군자가 재주가 많아야 할까?꼭 그렇진 않은 법이다.[53]

4.1. 공자의 제자 목록

  • 안회 - 논어에서는 공자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수제자로 나온다.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로 일찍이 공자가 '나는 그가 나아가는 것만 보았지 정체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54]고 말한 적이 있지만,공자보다 일찍 죽는다. 안회의 죽음을 들은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天喪予, 天喪予!)라고 탄식하며 슬퍼했다.
  • 자로 - 논어에서는 무골(武骨)에다가 성격도 드센 전형적인 호걸형 인물로 나온다.또한 대부의 가신을 지낼 만큼 정치적 능력도 상당했다.공자에게 면박을 많이 받지만 칭찬도 받고 공자와의 인간적인 관계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후에 위(魏)나라 공실의 권력다툼에 휘말려 살해당하고 그 시신이 젓갈로 담겨진다.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한 공자의 행동이 자기 집의 젓갈을 모두 버리는 것이었는데 이 것이 공자 식인설이라는 루머로 퍼졌다.

공자가 자로를 중정中庭[55]에서 곡했다. 조상弔喪하는 이가 있어 공자가 이에 답하여 절하였다.[56]

곡을 끝내고 사자使者에게 다가오게 하여 (자로가) 어찌 되었는지를 물었다.

사자가 말했다.

"젓갈[醢]을 만들었습니다."

(공자가) 마침내는 (제자들, 혹은 수행자들에게) 명하여 (집안의) 젓갈[醢]을 뒤엎게 했다.

<<예기(禮記)>><단궁(檀弓) 상(上)>

공자가 자로를 중정中庭에서 곡했다. 조상弔喪하는 이가 있어 공자가 이에 답하여 절하였다.

곡을 그치고 사자使者에게 다가오게 하여 (자로가) 어찌 되었는지를 물었다.

사자가 말했다.

"젓갈[醢]을 만들었습니다."

(공자가) 마침내는 좌우에 명령하여 (집안의) 젓갈[醢]을 모두 뒤엎게 하며 말하였다.

"내 어찌 이것을 참고 먹겠는가."

<<공자가어孔子家語>>

  • 자공 - 논어에서는 머리가 비상하고 언변에 뛰어나며 장사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먼치킨으로 나온다.굉장한 부자였는데,이 재산으로 공자학단을 경제적으로 후원해줬다.공자가 세상을 떠났을때 무려 6년상을 치렀을 만큼 공자에 대한 존경심이 엄청났다.
  • 민자건(민손), 염백우, 진항(진자금), 중궁, 염유, 재여[57], 자유, 복상(자하), 전손사(자장)

이중에서 제일 언급이 많이 되는 제자는 안회, 자로, 자공, 증자 등. 물론, 다른 제자도 고사성어 같은데서 보면 한번씩 언급이 된다. 유명하지 않더라도 그의 제자들이 대륙 각지로 흩어진 걸 생각하면 그들의 밑에서 어떤 인물이 등장했을지 섣불리 속단하기가 힘들다. 덧붙여 두자면 맹자는 증자-자사 라인에서 배웠지만 정확한 스승은 없다. 사실상 자기류 스타일.

그 외: 담대멸명, 복부제, 원헌, 공야장, 남궁괄, 공석애, 증점[58], 안무요, 상구, 고시, 칠조개, 공백료, 사마경, 번수, 유약, 공서적, 무마시 - 여기까지 논어에 기록이 있는 제자들.

이하 언급되는 제자들은 논어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이름만 언급되어 있다. 일부는 공자가어, 사기 공자세가 등에 짤막하게 일화가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공견정, 공량유, 공서여여, 공서잠, 공손룡, 공조구자, 공충, 공하수, 교선, 구정강, 방손, 백건, 보숙승, 상택, 석작촉, 숙중회, 시지상, 신당, 악해, 안고, 안조, 안지복, 안쾌, 안하, 안행, 양사적, 양전, 연급, 염결, 염계, 영기, 원항적, 임부제, 적흑, 정국, 조휼, 좌인영, 진비, 진상, 진염, 진조, 칠조도보, 칠조차, 한보흑, 해용잠, 현성, 후처

5. 동시대인의 평가

공자는 십 수년을 주유열국하며 자신을 등용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왕도와 인이 구현할 나라를 찾아 떠돌았으나 그의 사상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위험하게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공자 개인과 그의 제자 집단의 능력을 위험하게 여기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끝끝내 등용받지 못했다.

당시 공자의 사상을 비판하는 이들은 땅은 마차로 가고 강은 배로 건너야 하는데 마차로 강을 건너려 한다고 시대 착오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지만 정작 공자라는 일개인의 평가는 굉장히 높았다. 공자 본인이 흠모했던 안영은 공자가 등용되지 못하도록 방해했지만 "공자야말로 당대 제일의 군자"라고 평가하였고, 공자가 노나라로 다시 돌아와 국부 대접을 받은 것은 노나라 군주가 죽으면서 공자를 등용하지 않는 걸 한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등용해달라며 주유열국하는 그 모습을 썩 좋게 보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혹자는 공자를 상갓집 개로 비유하여 공자 본인도 그 말이 맞다 고개를 끄덕였고, 다방면으로 재주가 넘치니 정말 성인이라는 반 비아냥 섞인 말에도 그 자신은 비천하게 태어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변명하기도 한다.

이처럼 당대 열국은 일관적으로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고, 공자를 대단한 위인으로 평가하는 무리와 벼슬자리를 구걸하러 다니는 이라고 평가하는 무리로 나뉘었으나 명성만큼은 천하에 퍼져 공자 생전에 3천의 제자를 거느렸으며, 공자 사후에도 학단이 유지되었다.

공자가 주나라 낙양에 머물 당시 동시대의 인물로 추정되는 노자와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노자는 공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사기 노자•한비 열전)

>당신이 말하는 성현들은 이미 육신과 뼈가 썩어 없어지고, 그 말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군자는 때를 만나면 관직에 나가지만 때를 못 만나면 이리저리 유랑하는 신세가 되고 마오. 약삭빠른 장사꾼은 물건을 깊이 숨겨 두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높은 덕을 가지고 있더라도 겉으로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고 들었소. 당신은 교만과 탐욕, 허세와 야심을 버려야 하오. 그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외다. 내가 당신에게 들려 줄 말은 다했소.

이후 공자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노자를 묘사했다.

나는 새가 날고 물고기가 헤엄 치고 들짐승이 달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달리는 들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질로 잡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어떻게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오늘 만나 본 노자는 용과 같은 사람이었다.

6. 현대 중국에서의 부활

마오쩌둥식 근대화 과정에서 중국의 후진성·전근대성의 원인을 역사 속에서 찾았고 이때 타깃이 된 것이 유교의 수장인 공자였다. 이에 따라 한동안 중국에서는 '공자 지우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마오쩌둥이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조상 숭배가 금지됐고 1966년 시작된 문화혁명 시절에는 공자를 깎아내리는 캠페인이 전개됐다.[59]

그러나 1980년대 개혁개방과 함께 점차 재평가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시진핑이 중화민족 부흥에 활용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공자 띄우기’에 나섰다. 과거 문화대혁명 시절 봉건주의 사상가로 타도의 대상이었던 공자가 시진핑 체제 들어 공산당의 스승으로 부활한 셈이다.[60][61]

사실 중국 정부가 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채택 이후다. 80년대 중국 정부는 근대화에 성공한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홍콩·대만·싱가포르)’ 모두가 유가 문화권 국가라는 점에 주목했다. 90년대엔 유가를 근대화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대신할 국가 통합 이데올로기로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경제발전의 토대 위에서 조화사회론을 제시했다

본격적으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부터는 공자 띄우기에 나섰다. 올림픽의 개·폐회식은 중국이 이제 경제대국을 이뤘으니 앞으론 공자를 근간으로 하는 소프트파워를 구상할 단계가 됐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2011년 중국 천안문 광장의 마오쩌둥 사진 맞은편에 10m 높이의 공자 동상이 세워졌다.

시진핑은 2013년 11월 산둥성 취푸에 있는 공자묘를 참배하고 또 공자연구원에서 연설했다. 공산당 창당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시진핑은 2014년 5월 베이징대의 대유학자 탕이제 교수를 예방했다. 시진핑이 2014년 9월 공자 탄생 2565주기를 기념하는 회의에 참석해 담화를 발표했다. 2015년 6월부터는 중국 정부의 주요 부처 공무원들이 중국고전철학 전문가로부터 공자를 비롯한 옛날 학자들에 대한 강의를 듣는 것을 의무화 시켰다고 한다. 상공부, 교육부 등 중국 정부의 관료들은 당시 날짜를 정해 돌아가면서 하루에 2시간씩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2천500년도 더 된 시절에 공자가 했던 발언 등을 들으며 효도 등 유교 사회에서 강조됐던 덕목을 따를 것을 권고받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시진핑이 유교사상 배우기를 강조하는 것은 서구 정치사상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해석했다.

천라이 칭화대 국학연구원 원장이 2015년 7월 중공중앙기율검사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유가 문화가 중국 공산당원의 수양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의 학습에도 초청을 받아 강연했다. 대륙 신유학자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중국 정부가 유학을 존중하겠다는 신호로 보는가 하면 전통 사상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시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중국꿈’ 제시를 탈 서구 프레임이 가동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대륙 신유학의 대표자 격인 베이징사범대 천밍 교수는 ‘중국꿈’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로부터의 탈피로 설명한다. 반면에 간춘쑹 베이징대 교수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국가와 신유가는 여전히 긴장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공산당이 유가를 이용하려 한다면 유가는 공산당을 교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비단 정책변화뿐만 아니라 중국이 어느정도 경제적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도가 크게 높아지게 되고 한자녀 정책으로 인한 개인주의가 사회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면서 학부모들 사이에서 유교식 교육이 상당한 인기를 얻고있으며(한국에서 아이들을 청학동으로 보내서 예절과 학문교육 시키듯이) 유교식 예절과 사서오경을 가르치는 공자학교도 인기를 끌고있다.

7. 기타 등등

7.1. 불우한 인생

일단 아버지가 육십 노인에 어머니는 십대 중후반의 꽃처녀였다. 태어난지 3년도 안 되어 아버지가 사망했고, 공자는 부친묘의 위치마저 장성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생아였다. 무녀의 자식이다보니 평범한 사람과 다른 세상을 접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공자 나이 십대 중후반에 사망했다. 신분이 천해 온갖 잡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62]

나이 들어 학문이 어느 정도 자리잡자 십 수년을 주유 열국하며 자신을 등용해줄 사람과 인을 구현할 나라를 찾아 떠돌아 다녔으나 온갖 조롱, 비판, 죽을 위기 등등을 거치면서 절망을 반복했고 끝내는 이름 뿐인 국부 하나 얻어 죽기 3, 4년 전에 노나라에 돌아왔다. 정치적 야망은 전부 무너졌다.

그래도 학식이 대단하고 인품이 지극히 높아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거느릴 수는 있었지만, 노나라에 돌아온지 첫해에 아들인 백어가 사망. 그 다음해에 수제자 안회가 이제 꽃을 피워볼려는 참에 사망. 그 다음해에 가장 친한 자로가 살해당해 젓갈이 되어 돌아왔다. 이 3단콤보를 맞은 공자는 노년의 나이에 심적 충격을 너무 받아 시름시름 앓다가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세 제자 중의 마지막 한 명인 자공이 돌아오는 걸 보고 사망했다.

결국 살아서 정치적인 야망을 무엇 하나 달성하지 못했고, 자신의 학문의 적통을 이어줄 안회는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사실상 살아서 정치적이나 학문적이나 마땅한 무언가를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정치적, 학문적 야망은 죽고나서야 동양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으니 짓궂다면 짓궂은 일일 것이다.

7.2. 식습관

공자의 생활 습관을 설명한 논어 향당편을 보면 식습관이 까다로운 미식가로 나온다. 곱게 찧은 쌀로 만든 밥과, 가늘게 채썬 회를 즐겼고 색깔이 나쁘거나 나쁜 냄새가 나거나, 제철 음식이 아니거나, 알맞게 익히지 않거나, 올바르게 자르지 않으면 음식을 들지 않았다. 음식에 어울리는 장(醬)이 없어도 음식을 먹지 않았고 고기가 많아도 밥보다 많이 먹지는 않았다. 술이나 육포/어포는 집에서 만들지 않고 밖에서 사온 것은 먹지 않았고 생강을 꾸준히 먹었으며 술을 마셔도 취해서 흐트러질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고 한다.

7.2.1. 공자식인설(?)

공자에 대한 낭설 중 인육을 먹었다는 설이 있는데, 책을 팔기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다. 특히 1990년대에 재미교포 폴 임 박사가 쓴 '책 속의 책'에 나온 공자가 인육을 즐겨 먹었다라는 내용으로 인해 이러한 인식이 상당히 퍼졌다. 참고로 해당 책은 아프리카의 코뿔소는 뿔이 하나 인도의 코뿔소는 뿔이 두 개라는 오류도 범했다. 여기에 더해 일본 극우파의 사주를 받는 대만인 어용학자 황문웅이 이런 주장을 더 퍼뜨렸다.

본래 공자는 양이나 사슴, 토끼 등의 고기로 만든 일종의 젓갈(즉, 고기 젓갈)인 해(醢)를 즐겼는데, 이를 중죄인의 시신을 젓갈로 만들어 버리는 당시의 형벌과 연관시켜서 마치 공자가 사람고기로 만든 젓갈을 즐긴다고 왜곡한 것. 무엇보다 간단히 생각해보자. '사람'을 중요시하는 유가에서 그 '사람'을 먹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공자는 자신의 제자인 자로가 권력싸움에 휘말려 살해당해 그 시체가 해로 만들어져서 고인드립까지 당하자 그 충격으로 해를 다시는 가까이하지도 못했다.

공자의 유학을 계승한 맹자의 서적인 "맹자- 양혜왕 편"을 보면 "옛날에 공자께서는 '처음으로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순장에 쓰이게 한 자는 삼대가 멸할 것이다.'라 하시며 사람의 형상을 한 인형조차도 귀히 여길 것을 역설하셨습니다."라며 맹자가 양혜왕에게 백성의 목숨을 중요시 여길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할 것. 진짜 순장은커녕 이러한 인명이 희생되지 않는 가짜 순장조차도 혐오한 공자이니만큼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실 유교를 떠나서 원래 식인행위는 현대에 비해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고, 인권이라는 개념조차도 없었던 고대 중국에서도 분명한 비정상적 행위였다. 물론 전근대시절에는 영양상태나 의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긴 전쟁이나 기근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종종 나오지만,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나 나오는 행위였지, 제아무리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고대인이라고 해서 "먹을 거 없으면 사람 좀 잡아먹을 수 있지"란 식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설령 극단적 상황에서 나온 식인이라도 두고두고 지탄을 받는 행동이었다.

7.3. 자손 대대로 이어진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

부부관계는 본인은 물론 후대에까지 별로 좋지 않았던 듯하다. 공자, 공자의 아들, 공자의 손자인 자사까지 3대가 이혼을 했다는 말이 있는데, 예기의 단궁편의 다음 구절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 백어의 어미가 죽었는데, 1년이 넘어도 여전히 곡을 했다. 선생님이 들으시고 "누가 곡을 하는가?"라고 물으셨다. 문인들이 "리입니다."라고 하니 "에휴. 심하네…."라고 하셨다. 백어가 이를 듣고 그만두었다.[63]
→백어는 공자의 아들을 말하는 것으로, 리(鯉)가 이름이다. 즉, 아들이 엄마가 죽었다고 1년 동안 곡을 하자 그것이 심하다고 언급한 것.
  • 자사의 어미가 위나라에서 죽어서, 자사에게 그 소식을 알리자 자사가 사당에서 곡을 했다. 문인이 도착해서 말했다. “서씨의 어미가 죽었는데어째서 공씨의 사당에서 곡을 합니까?” 자사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하면서 그리고는 다른 방에서 곡을 했다.[64]
→자사는 공자의 손자로, 백어의 아들이다. 서씨의 어미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백어가 이혼하여 아내를 바꿨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왜 더 이상 이 집 사람이 아닌 엄마 때문에 공씨 사당에서 우느냐고 한 것.
  • 자상의 어미가 죽어도 상을 치르지 않았다. 문인들이 자사에게 물었다. "옛날에 아버님께서는 쫓겨나신 어머니의 상을 치르신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자사가 답했다. "있었지." "헌데 선생님께서는 왜 흰둥이한테는 상을 못 치루게 하십니까?" 자사가 말했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께선 도를 잃으시는 법이 없으셨네.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도에 견주어 보시고 그 예를 높일만 하면 높이고, 낮출 만하면 낮추셨지.(내 아버지께서는 능히 그리하셨으나) 내가 (도를 잘 헤아리지 못 하는데) 어찌 그처럼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내 생각하기로는) 내 마누라가 흰둥이 엄마지, 내 마누라가 아닌 사람은 흰둥이 엄마가 아닐세!(…) 이리하여 공씨네 집에서는 이혼한 어머니의 상을 치르지 않는 것이 자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65]
→자상은 공자의 증손자로, 자사의 자식이다. 흰둥이는 자상을 말하는 것. 즉, 자신의 아내가 죽어도 상을 치루지 않자 예전에 이혼한 어머니의 상을 치룬 적이 있는 자사가 왜 자기 자식에겐 그렇게 못 하게 하는지 궁금하여 물어보았다는 것. 돌아오는 대답인 즉슨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도에 견주어 보시고 능히 적절한 예식을 취할 능력이 되셨으나, 나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다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내 마누라가 곧 자상이 엄마지, 내 마누라가 아닌 사람은 자상이 엄마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

콩가루 집안(?)

설화적으로 구성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복잡한 가정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 하다. 도올 김용옥처럼 부계만을 강조하려고 사실이 아닌 장례에 대한 이야기로서 썼다는 해석도 있다. 여담으로 효자로 유명했던 증자도 아내가 부모가 좋아하는 찐 배를 잘못 쪄서 이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순자의 주장에 따르면 증자-자사학파의 계승자인 맹자 또한 아내를 쫓아낸 전력이 있다고 한다. 이놈들이『순자荀子』「해폐解蔽[66]」편의 이야기에 나오는데, 애초에 해당 편에서 이 말이 언급된 이유가 맹자를 아니꼽게 여기던 순자가 맹자를 깔 껀덕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유가 이유인 만큼, 카더라일 가능성이 높다. 여담으로, 맹자가 이혼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이야기도 카더라로 존재한다.

어느 날 맹자가 자기 방에 문 열고 들어갔는데, 마누라가 방 안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는(!) 아주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이에 기가 찬 맹자가 당장 어머니한테 달려가서 "엄마, 나 이런 무례한 애랑은 못 살겠어요!"라고 외쳤는데, 어머님 하시는 말씀이 "아니, 노크도 안 하고 귀신마냥 들이닥친 네 잘못인데 왜 우리 아가한테 성질이냐? 그리고 평소에 편안하게 쉬지도 못할 거면 방은 왜 만들어 놨겠니? 무례하기는 네가 제일 무례하다!" 이 가르침으로 인해 맹자는 근본적인 잘못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고 이후 평생 마누라랑 알콩달콩 잘 살았다고…

공자가 여성을 특별히 구별하여 말한 기록이 드문데, 그나마 그것은 부정적인 표현으로 한 부분이다. "''여자와 소인(小人)[* 이것도 여성에 대한 공자의 차별적인 요소가 없었기에 사실상 개소리에 가깝다.]만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 하면 불손해지고 멀리 하면 원한을 품는다.''" [67]

7.4. 역대 왕조가 내린 작위

취푸(曲阜)의 공부(孔府) 대성전(大成殿)

공부 전경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름

한글

곡부의 공자 유적

영어

[68]

프랑스어

[69]

국가·위치

중국 취푸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4년

등재기준

(i)[70], (iv)[71], (vi)[72]

지정번호

704

한무제가 유학을 본격적으로 진흥하기 시작한 이래 공자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만세의 스승으로 하늘같이 떠받들었다. 일단 사마천사기를 집필할 때 공자를 제후와 동급인 세가 문서에 서술했고, 이러한 융숭한 대접은 공자의 후손들 중에서도 공자의 직계 가문에게 계속 이어졌는데, 후(侯)나 공(公)의 작위를 내리고 대대로 공자의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왕조가 바뀌더라도 공자 직계 혈통에 대한 대우는 날이 갈수록 후해졌기 때문에 오랜 세월 축적된 부와 명예가 대단했는지라 곡부의 공부(孔府)를 가리켜 성부(聖府)라고 존칭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명나라 때는 자금성에만 허용되던 황금빛 기와지붕과 자금성에도 없다는 용을 아로새긴 대리석 기둥을 공부의 대성전에 세우도록 할 정도였다. 청나라때에는 만주족과 한족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관례 편법을 써서 회피하는 식으로 연성공을 부마로 삼기도했다. 또한 연성공의 지위를 얻기 위해 공자의 후손들끼리 서로 싸운 기록도 보인다.

이는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면적만으로도 공자 이하 유교 성현들의 사당인 공묘(孔廟)는 13만 제곱미터에 건물 466칸, 공자 후손들의 저택인 공부(孔府)는 16만 제곱미터에 건물 480칸, 공자 일족의 묘역인 공림(孔林)은 200만 제곱미터라는 무시무시한 크기를 자랑한다.

7.4.1. 공자 조상들의 작위

공자 덕분에 사후에 작위를 얻는 영광을 누린 사람 중에는 공자의 조상도 예외가 될 수 없어서, 공자의 아버지부터 6대조까지가 왕(王)으로 추봉되었다.

대수

이름

작위

국가

연도

비고

현조

목금보(木金父)

조성왕(肇聖王)

세종 옹정 원년(1724)

추봉

고조

기보(祁父)

유성왕(裕聖王)

추봉

증조

방숙(防叔)

이성왕(詒聖王)

추봉

조부

백하(伯夏)

창성왕(昌聖王)

추봉

숙량흘(叔梁紇)

제국공(齊國公)

북송

진종 대중상부 원년(1008)

추봉

계성왕(啓聖王)

문종 지순 원년(1330)

가봉

계성공(啓聖公)

세종 가정 9년(1530)

개봉

계성왕(啓聖王)

세종 옹정 원년(1724)

추봉

7.4.2. 공자의 작위

공자 본인에게 추봉된 작위도 어마어마해서 후, 공, 왕을 거친 뒤 급기야 (서하의 경우지만) 황제로까지 격상되기에 이른다. 최종적으로는 대성지성선사.

대수

이름

작위

국가

연도

비고

본인

공구(孔丘)

니부(尼父)

노나라

주경왕 41년(BC479)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

전한

평제 원시 원년(1)

포존후(褒尊侯)

후한

화제 영원 4년(92)

문성니부(文聖尼父)

북위

효문제 태화 16년(492)

'문성(文聖)'은 시호

추국공(鄒國公)

북주

정제 대상 2년(580)

선사니부(先師尼父)

문제 개황 원년(581)

선사(先師)

고조 무덕 7년(624)

선성(先聖)

태종 정관 2년(628)

선부(宣父)

태종 정관 11년(637)

태사(太師)

고종 건봉 원년(666)

융도공(隆道公)

무주

측천무후 천수 원년(690)

문선왕(文宣王)

현종 개원 27년(739)

'문선(文宣)'은 시호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

북송

진종 대중상부 5년(1012)

문선제(文宣帝)

서하

인종 인경 3년(1146)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원성종 대덕 11년(1307)

지성선사(至聖先師)

세종 가정 9년(1530)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

세조 순치 2년(1645)

지성선사(至聖先師)

세조 순치 14년(1657)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

중화
민국

민국 24년(1935)

7.4.3. 공자 후손의 작위

http://webpic.chinareviewnews.com/upload/201009/28/101459372.JPG

쿵더청[73], 쿵추이창[74], 쿵유런[75]

석전대제에 참석한 장이화 행정원장, 쿵추이창 총통국책고문, 마잉주 총통

공자의 아들 공리부터 시작해서 그의 직계 자손들이 역대 왕조로부터 수여받은 작위는 아래와 같다. 이 세습 제도 자체는 1935년, 중화민국 정부가 작위의 이름을 연성공(衍聖公)에서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이라고 바꾸기만 했을 뿐 지금도 존속중이다. 명칭을 바꾼 이유는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에서 '연성공'이란 귀족 작위의 형태로 인정하기는 곤란했기 때문이다. 맹자의 제사를 받들던 아성봉사관(亞聖奉祀官)이 2009년 세습을 중단함에 따라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은 현재 중화민국의 유일한 세습 공직이며 그 지위는 특임관(장관급)에 준한다. 흠좀무.

중간에 보면 남종과 북종으로 나뉘어 각각 연성공 작위를 가진 것을 볼 수 있다. 금나라를 피해 남쪽으로 옮겨간 송나라가 중화로서의 정통성을 이민족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연성공 공단우를 남쪽으로 같이 데려가서 현 절강성 구주(취저우)에서 자리잡게 하였다. 동시에 금나라도 곡부에 남아 있던 공단우의 동생인 공단조를 새로 연성공으로 봉하는 바람에 벌어진 사태. 이 상태가 원나라 때까지 이어지다가 북종에게 남종에서 연성공 작위를 양보하는 것으로 복잡한 세습 문제가 해결되었다. 본래 원세조 쿠빌라이는 남종의 종손인 공수에게 곡부에 돌아가서 연성공 작위를 이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공수는 '이미 구주에도 5대째 선영을 모신 상태라서 이제 와서 곡부에 돌아가기 어렵다.'라는 이유를 내세워서 북종의 종손인 공치에게 연성공을 양보한 것이다. 이를 공수가 작위를 양보했다는 뜻의 '공수양작(孔洙讓爵)'이라고 부른다. 사실 현실적으로도 남종이 무작정 100% 정통성을 주장하기에는 꺼림직한 면이 있었다. 금나라가 연성공을 임명할 때 마치 괴뢰 정권처럼 정통성을 무시한 채 성씨만 같은 방계 가문 일원을 형식적으로 내세웠다면 모를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북종의 공단조 역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적통 후손이었다. 그리고 전란으로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공단조와 그 후예들이 목숨을 걸고 곡부에 남아서 공자 사당과 묘지를 지킨 공로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남종은 연성공 작위를 양보한 이후 일개 민간 가문이 되어서 공자에 대한 제사와 유교 교육에 힘썼다. 물론 남종 역시 한때 공자의 직계로 인정받은 가문이므로 북종과 마찬가지로 남종 또한 명청 대에도 나름대로 대우를 받았다. 이 때문에 구주에도 곡부와 마찬가지로 공묘가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훗날 국공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패배해 타이완으로 옮겨간 중화민국장제스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공덕성(쿵더청)을 같이 데려가 또다시 재현될 뻔했으나, 대륙을 지배한 공산당은 새로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을 임명하지 않아 지금은 타이완에 공자의 직계 가문이 이어지고 있다. 공덕성의 누나 공덕무가 본토에 남아있기는 했지만 공덕성이 외아들이라 본토에는 공자 가문의 직계 남성이 없었다. 더군다나 문화대혁명의 와중에서 공자를 철저히 배격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연성공을 세우는 것은 중국공산당 입장에서는 꽤나 멋쩍은 일일듯. 참고로 문화대혁명 때 얼마나 배격을 가했냐면 홍위병들이 단순히 곡부의 문묘만 박살낸 게 아니라 공덕성의 아버지와 선조들의 묘가 파헤쳐지고 시신이 아무렇게 방치하는 만행을 벌였다. 이 때문에 공덕성은 누나 공덕무와도 도쿄에서 겨우 만났고, 대륙에서 공부의 대표들이 공부가주를 전하면서 '꼭 한번 와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청할 때에도 "우리 가문에는 이런 술이 없다"고 내쳤다. 공부가주를 몰라본 게 아니라, '조상님들의 사당과 묘들이 그런 만행을 당했는데 내가 어찌 이 술을 인정하고 곡부에 다녀올 수 있겠나?'라는 항의에 가깝다. 또한 공덕성은 생전에 곡부를 방문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곡부에 묻히지 않을 정도로 반감이 강했다. 그래서 공덕성의 묘는 곡부가 아닌 타이완에 있다. 대신 남종 계통은 지금도 본토에 살고 있다.

1998년 대성지성선사봉사관부가 폐지되고 2008년에는 공자 가문의 동의를 얻어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 급료를 받지 않는 직위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여성도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 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단, 여성의 후손은 계승 불가).

대수

이름

출생

사망

작위

국가

연도

비고

아들

공리(孔鯉)

BC532

BC483

사수후(泗水侯)

북송

휘종 숭녕 원년(1102)

추봉

손자

공급(孔伋)

BC483

BC402

기수후(沂水侯)

휘종 숭녕 원년(1102)

추봉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

문종 지순 원년(1330)

추봉

증손

공백(孔白)

현손

공구(孔求)

5세손[76]

공기(孔箕)

6세손

공천(孔穿)

7세손

공겸(孔謙)

8세손

공부(孔鮒)

노국문통군(魯國文通君)

시황제 연간

공등(孔騰)

봉사군(奉祀君)

전한

고제 12년(BC195)

[77]

9세손

공충(孔忠)

박사(博士)

문제 연간

[78]

10세손

공무(孔武)

박사

경제 연간

11세손

공연년(孔延年)

박사

무제 연간

12세손

공패(孔霸)

포성군(褒成君)

원제 연간

13세손

공길(孔吉)

은소가후(殷紹嘉侯)

성제 수화 원년(BC8)

공복(孔福)

포성군

성제 연간

[79]

14세손

공방(孔房)

포성군

애제 건평 2년(BC5)

15세손

공균(孔均)

포성후(褒成侯)

평제 원시 원년(1)

16세손

공지(孔志)

포성후

후한

광무제 건무 14년(38)

17세손

공손(孔損)

포성후

화제 영원 4년(92)

18세손

공요(孔曜)

봉성정후(奉聖亭侯)

안제 연광 3년(124)

19세손

공완(孔完)

포성후

영제 건녕 2년(169)

20세손

공선(孔羨)

종성후(宗聖侯)

조위

문제 황초 2년(221)

[80]

21세손

공진(孔震)

봉성정후

서진

무제 태시 3년(267)

22세손

공억(孔嶷)

봉성정후

동진

명제 태녕 3년(325)

23세손

공무(孔撫)

봉성정후

24세손

공의(孔懿)

봉성정후

25세손

공선(孔鮮)

봉성정후

유송

문제 원가 19년(442)

숭성후(崇聖侯)

26세손

공승(孔乘)

숭성대부(崇聖大夫)

북위

효문제 연흥 3년(473)

27세손

공영진(孔靈珍)

숭성후

효문제 태화 19년(495)

28세손

공문태(孔文泰)

숭성후

29세손

공거(孔渠)

숭성후

30세손

공장손(孔長孫)

공성후(恭聖侯)

북제

문선제 천보 원년(550)

추국공(鄒國公)

북주

정제 대상 2년(580)

31세손

공영철(孔英悊)

봉성후(奉聖侯)

폐제 광대 원년(567)

공사철(孔嗣悊)

소성후(紹聖侯)

양제 대업 4년(608)

[81]

32세손

공덕륜(孔德倫)

포성후

고조 무덕 9년(626)

33세손

공숭기(孔崇基)

포성후

무주

무후 증성 원년(695)

34세손

공수지(孔璲之)

포성후

현종 개원 5년(717)

1대 문선공(文宣公)

현종 개원 17년(739)

35세손

공훤(孔萱)

2대 문선공

36세손

공제경(孔齊卿)

3대 문선공

덕종 건중 3년(782)

37세손

공유질(孔惟晊)

4대 문선공

헌종 원화 13년(818)

38세손

공책(孔策)

5대 문선공

무종 회창 2년(842)

39세손

공진(孔振)

6대 문선공

의종 함통 4년(853)

40세손

공소검(孔昭儉)

7대 문선공

41세손

공광사(孔光嗣)

42세손

공인옥(孔仁玉)

8대 문선공

후당

명종 장흥 3년(932)

중흥조(中興祖)[82]

43세손

공의(孔宜)

9대 문선공

북송

태종 태평흥국 3년(978)

44세손

공연세(孔延世)

10대 문선공

태종 지도 3년(997)

45세손

공성우(孔聖佑)

11대 문선공

진종 천희 5년(1021)

45세손

공종원(孔宗願)

1003

1068

12대 문선공

인종 경우 2년(1035)

[83]

1대 연성공(衍聖公)

인종 지화 2년(1055)

46세손

공약몽(孔若蒙)

2대 연성공

신종 희녕 원년(1068)

봉성공(奉聖公)

철종 원우 원년(1086)

공약허(孔若虛)

봉성공

철종 원부 원년(1098)

[84]

47세손

공단우(孔端友)

1078

1132

3대 연성공

휘종 숭녕 3년(1104)

[85]

공단조(孔端操)

1133

연성공

부창 2년(1132)

[86]

남종(南宗)

48세손

공개(孔玠)

1122

1154

4대 연성공

남송

고종 소흥 2년(1132)

[87]

49세손

공진(孔搢)

1145

1193

5대 연성공

고종 소흥 24년(1154)

[88]

50세손

공문원(孔文遠)

1185

1226

6대 연성공

광종 소희 4년(1193)

[89]

51세손

공만춘(孔萬春)

1241

7대 연성공

이종 보경 2년(1226)

[90]

52세손

공수(孔洙)

1229

1287

8대 연성공

이종 소정 4년(1231)

[91]

북종(北宗)

48세손

공번(孔璠)

1106

1143

연성공

희종 천권 3년(1140)

[92]

49세손

공증(孔拯)

1136

1161

연성공

희종 황통 2년(1142)

공총(孔摠)

1138

1191

연성공

세종 대정 3년(1163)

[93]

50세손

공원조(孔元措)

1182

1251

연성공

장종 명창 2년(1192)

[94]

공원용(孔元用)

1227

연성공

남송

이종 보경 원년(1225)

[95]

51세손

공지전(孔之全)

연성공

[96]

52세손

공정(孔湞)

연성공

헌종 원년(1251)

[97]

공치(孔治)

1307

연성공

원성종 원정 원년(1295)

[98]

53세손

공사성(孔思誠)

9대 연성공

[99]

공사회(孔思晦)

1267

1333

연성공

인종 연우 3년(1316)

[100]

54세손

공극견(孔克堅)

1316

1370

10대 연성공

원혜종 지정 6년(1346)

[101]

55세손

공희학(孔希學)

1335

1381

11대 연성공

원혜종 지정 15년(1355)

56세손

공눌(孔訥)

1356

1400

12대 연성공

태조 홍무 17년(1384)

57세손

공공감(孔公鑑)

1380

1402

13대 연성공

혜종 건문 2년(1400)

58세손

공언진(孔彥縉)

1401

1455

14대 연성공

성조 영락 8년(1410)

59세손

공승경(孔承慶)

1420

1450

15대 연성공

추봉

60세손

공굉서(孔宏緒)

1448

1504

16대 연성공

대종 경태 원년(1450)

공굉태(孔宏泰)

1450

1503

연성공

헌종 성화 5년(1469)

[102]

61세손

공문소(孔聞韶)

1482

1546

17대 연성공

효종 홍치 16년(1503)

[103]

62세손

공정간(孔貞幹)

1522

1559

18대 연성공

세종 가정 15년(1546)

63세손

공상현(孔尙賢)

1542

1620

19대 연성공

세종 가정 35년(1556)

64세손

공윤식(孔胤植)

1592

1647

20대 연성공

희종 천계 원년(1621)

[104]

65세손

공흥섭(孔興燮)

1636

1667

21대 연성공

세조 순치 5년(1648)

66세손

공육기(孔毓圻)

1657

1723

22대 연성공

성조 강희 6년(1667)

67세손

공전탁(孔傳鐸)

1673

1732

23대 연성공

세종 옹정 원년(1723)

68세손

공계호(孔繼濩)

1697

1719

24대 연성공

세종 옹정 13년(1735)

추증

69세손

공광계(孔廣棨)

1713

1743

25대 연성공

세종 옹정 9년(1731)

70세손

공소환(孔昭煥)

1735

1782

26대 연성공

고종 건륭 9년(1744)

71세손

공헌배(孔憲培)

1756

1793

27대 연성공

고종 건륭 48년(1783)

72세손

공경용(孔慶鎔)

1787

1841

28대 연성공

고종 건륭 59년(1794)

[105]

73세손

공번호(孔繁灝)

1804

1860

29대 연성공

선종 도광 21년(1841)

74세손

공상가(孔祥珂)

1848

1876

30대 연성공

목종 동치 2년(1863)

75세손

공영이(孔令貽)

1872

1919

31대 연성공

덕종 광서 3년(1877)

76세손

공덕성(孔德成)

1920

2008

32대 연성공

중화
민국

민국 9년(1920)

[106]

1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大成至聖先師奉祀官)

민국 24년(1935)

77세손

공유익(孔維益)

1939

1989

미세습

-

[107]

78세손

공수장(孔垂長)

1975

(현재)

2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민국 98년(2009)

[108]

79세손

공우인(孔祐仁)

2006

(현재)

(세습 예정)

(세습 예정)

[109]

진정한 만세일계?? 공융 안습

7.5. 후계자

맹자는 요-순-탕-문왕-무왕-주공-공자로 이어지는 라인을 자신이 계승했다고 자부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도통론(道統論)이 된다. 공자-증자-자사-맹자까지 라인이 이어지고, 단절되었다가 송나라 때 다시 복구되었다는 식의 설명. 그런데 사실 맹자는 공자의 아티스트적인 측면을 생각해보면 공자의 최대의 이단일 수도 있다. 맹자가 공자의 후계자로 인정된 것도 송나라 때 성리학이 체계화된 이후.[110]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맹자를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왜 그런지는 맹자 문서로 가보면 안다.

사실 공자는 자신의 후계자를 안회로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안회는 요절하고 말았으니. 때문에 김용옥은 안회의 죽음으로 공자의 적통은 사실상 끝난다고 평한 바 있다.

후일 서쪽 종교후계자 문제가 생각난다.

8. 대중매체에서

8.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13

삼국지 11에서는 고대무장 중 1명으로도 참전(본명인 '공구'로 등장). 특기는 '인정(소속 도시 무장들의 충성도가 떨어지지 않음)'. 능력치는 73/68/84/87/85로 유교의 창시자란 명성엔 걸맞지 않는편. 특히 정치력 부분이 논란이 컸는데, 공자가 행정가로서도 유능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묘한 부분이지만 인생을 살아오면서 거의 대부분은 자신이 이상으로 삼은 정치를 마음껏 펼치지 못했던 것도 일정부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혐오무장은 법가의 신봉자였던 진시황 영정과 비슷하게 합리주의자로 포장되어 있는 조조. 전반적으로 후손을 죽인 것 때문인가? 이런 설정은 조조를 법가라고 의식하는 일본의 성향 때문인 듯도 한데[111], 조조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법가라고 보기 힘들며 당장에 조조 자신부터가 당대의 지식인으로 공자의 말이나 유교 경전을 인용하기도 했었다. 애당초 한나라 이후 유가 사상은 함부로 배척할 수 없는 사상으로 자리잡았다는 걸 생각하면 좀 미묘한 부분.

삼국지ds2에서는 통솔 90이 넘고 무력도 처음부터 70이 넘는다. 그래서 군사,시중,장군이 다 되는 놀라운 사기 능력치. 조조보다 더 사기인 것 같아

삼국지 12에서는 유교의 창시자라고 재평가를 받았는지 능력치가 68/70/92/87로 지력이 대폭 상향되어 A급 책사 정도의 능력치가 되었고, 체격이 건장하고 무예에도 소질이 있었다는 걸 반영했는지 무력도 쩌리 잡무관보다 높은 70까지 올랐다. 전법은 오리지널에서는 진정. PK에서는 도발.

삼국지 13의 능력치는 전작과 같다. 특기는 상업 3, 문화 9, 순찰 5, 설파 6, 교섭 8, 언변 8, 인덕 9이며 일기는 없다. 전수특기는 문화이다. 공자가 배우기를 좋아해 다방면의 지식과 예술을 습득하고 제자를 많이 들여 가르쳤으며 그의 사상적 특징이 인(仁)으로 정리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적절한 특기선정. 병과적성은 창병 B에 기병과 궁병이 C이며 중신특성은 화기생재, 전법은 후방지원으로 아군의 사기↑(+10) / 부상병 회복↑(+10).

삼국지 인터넷에도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통솔력 89, 무력 80, 지력 99, 정치력 90, 매력 98.

전투용으로 사용하기도 애매하고 외교용으로 사용하기도 애매한 어중간한 위치로 등장한다. 하지만 제갈량, 초선, 장각[112]과 함께 낙뢰를 쓸 수 있는 장수이다. 낙뢰의 발동확률이 거지같아서 그렇지. 아니? 자불어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이라 하였거늘.

8.2. 기타

네이버 웹툰 덴마의 등장인물인 공자의 이름의 어원이 되었다. 특히나 <The knight>에서 이름이 밝혀진 후, 등장인물인 지로의 이름에 점 하나만 찍으면 공자의 애제자 자로가 되는 것에 주목하는 독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고우영 열국지에서는 전국시대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등장하는데, 고우영 특유의 미소년 캐릭터로 등장시켰다. 일지매, 고우영 초한지의 한신 역을 한 캐릭터가 그 것.

공자가 주인공인 영화도 있다. 쌍권총 쓸 거 같은 공자님이 나오는 2010년 영화로 국내 개봉 제목은 '공자-춘추전국시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근엄한 군자인 공자와 그를 핍박하는 소인배들 구도라 그래서인지 영화 내용이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매우 건전한데, 이 건전성이 지나쳐 정말 '공자님 말씀'이다. 공자의 삶을 따르고 싶은 유학도나 위대한 조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중국인이라면 모르겠지만, 해외의 관객이 즐겁게 보기엔 어려운 영화다. 오죽했으면 영화 평 중에선 '이 영화보다 논어를 읽는게 더 재밌을듯'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8.3. 애니메이션 〈공자전〉(1995)

제자인 자공과 증삼이 스승 공자를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되며 전체적으로 여러 에피소드들을 그럭저럭 잘 재연하고 있다. 공자가 주인공 보정인지 나름대로 미중년(…)이고 곱게(?) 늙는 편. 공자의 문무겸비의 면모를 부각하려고 했는지 싸움 장면도 몇몇 등장한다. 가령 제나라와 노나라의 회담 때 등장하는 춤꾼들과 광대들은 본래 역사에서는 말로 쫒아냈지만 여기에선 직접 칼싸움을 해서 물리친다. 사실은 칼싸움 정도가 아니라 춤꾼과 광대들 중에 한 사람의 팔을 두부자르듯 자른다(…) 그런데 정작 자로와의 첫만남 때는 흔히 알려진 '참교육'이 아니라 설교로 감화시키는 모습으로 나온다. 공자의 한국판 성우는 유강진, 자공 역은 장세준.

9. 타 문화권에서

원나라 무렵에 유입되어 현지화된 중국 이슬람 신도들 중 일부는 공자를 신이 보낸 예언자 중 하나로 본다고 한다. 대충 예수급이랄까.

로코코 시대 무렵, 유럽의 귀족들은 당시 전해졌던 중국의 문물과 문화, 사상들에 동경심을 갖고 이를 부단히 수입하였다. 이를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고도 하는데, 특히 여러 계몽주의자들은 심지어 공자의 사상뿐 아니라 노장사상, 유교문화 및 과거 제도 등등이 서구권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다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프랑스계몽주의 철학자였던 볼테르는 공자를 두고 "공자는 어떠한 종교도 가르치지 않았고 어떤 종교적 기만도 쓰지 않았다. 그가 섬긴 황제에게 아부하지도 않았고 황제를 언급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경전 안에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도덕을 보았다. 단 한명의 중국인만이 그를 부정했고, 그는 보편적 저주를 맛보았다."며 공자의 사상에 매우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였고, 독일의 계몽주의 철학자였던 크리스티안 볼프 역시 "그는 그리스도가 유럽에서 받는 것과 똑같은 대우를 중국에서 받는다."라며 공자와 그의 사상이 중국에서 갖는 위상을 인정하는 발언을 한 바가 있다.

필리핀 마닐라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공원인 리잘 파크의 한켠에는 중국식 정원인 '차이나 가든(별도 요금 징수)'이 있는데 이곳에도 공자의 동상이 있다.(물론 필리핀 내 화교들이 세운 것일 테지만) #

10. 기념일

성균관대학교는 기원이 기원인지라 공자의 탄신일인 매년 9월 28일에 쉰다. 이 날을 공부자탄강일공탄절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춤추고 노래 연주하고 술 마시는 일종의 공자 생일파티다. 진사식당에서 무료로 밥도 먹을 수 있고, 생일파티 때 공자에게 올린 술도 나누어준다. 종교단체로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문화적 영향력이 있어서인지 정계, 재계에서도 많이 참여하는 편. 팔일무(八佾舞)를 볼 수 있는데, 문무와 무무로 구성되어 있다. 춤이라고 하지만, 현재의 댄스와는 비교 불가. 아주 느리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일하게 공자 생일에 쉬는 학교. 행정실도 연구실도 교수도 모두 쉰다. 이 날 에버랜드에 있는 대학생은 전부 성대생이라는 소문이 있다. 흠좀무 대만에서는 스승의 날로 지정되어있다.

11. 사당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곡부)에 사당이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크기를 자랑하는 공묘(孔廟)가 바로 그것. 덧붙여 말하자면 공자의 무덤이 아니다. 공자의 무덤은 한자를 달리해서 공묘(孔墓)라고 쓰며, 공묘에 부속된 공림(孔林)의 안에 있다. 묘지에 수풀 림 자가 붙은 사람은 공자의 공림과 후한 말의 관우의 관림 외에는 전무하다.

한국에 있는 성균관이나 궐리사(厥里祠)[113]도 공자의 사당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3대 공자 사당중 하나인 허베이성(河北省) 청더(承德) 러허원먀오(열하원묘)가 호텔로 개조되었다. 중국인들은 문화유적 훼손이라며 비난하는 중.

베트남 하노이 문묘(Văn Miếu, 文廟)내의 모습. 개요에서 언급된 '만세사표萬世師表'를 써넣은 현판이 여기에 보인다.

12. 관련 문서

위의 셋 모두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 없는 대륙에서 만들었다.


  1. [1] 노양공 22년
  2. [2] 노애공 16년
  3. [3] 공자는 기본적으로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지켰으나, 이를 부득이 한 번 어긴 적이 있었다고 한다. 맹자(孟子)의 말에 따르면, 바로 《춘추(春秋)》를 일으킨〔作〕 것이다. 《춘추》는 본래 사서(史書)의 일종인데, 예(禮)에 따르면 사서는 오직 천자(天子)의 명으로만 편찬, 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춘추전국(春秋戰國)의 혼란의 시대상에 천자가 힘을 잃고 도덕이 문란해졌으므로 제대로 된 사서가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공자가 기존의 노(魯)나라 《춘추》를 토대로 하여 유가적 도덕주의를 기준으로 한 포폄서(褒貶書)를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전해지는 《춘추》이다. 역시 맹자에 따르면, 공자는 자신의 《춘추》를 두고서 "나를 알게 하는 것이 《춘추》일 것이요, 나를 허물하는 것도 《춘추》일 것이다." 하였다 한다.(《맹자》, 〈등문공장구 하〉, 9장, 《주자집주》 기준.)
  4. [4] 공자는 기본적으로 오늘날 《시경(時經)》의 시를 외거나 다른 사람이 부른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즐겼으나, 공자가 죽기 7일 전 스스로 만들어 부른 노래라는 것이 전한다. "태산이 무너지누나! 대들보가 부러지누나! 철인(哲人)이 시드누나!(泰山壞乎!梁柱摧乎!哲人萎乎! , 《사기》, 〈공자세가〉.)"
  5. [5] 만세토록 모범이 될 위대한 스승. 공자를 지칭하는 대표적 수식어 중 하나다. 강희제 어필.
  6. [6] 천하의 모든 문화가 여기에 있다. 광서제 어필.
  7. [7] 공자가 천하를 주유한 것이 소중한 보석을 옮기는 수레와 같다. 함풍제 어필.
  8. [8] 공자가 모은 것으로써 그 도를 크게 이루었다. 가경제 어필.
  9. [9] 사람이 난 이래 그와 같은 성인은 없었다. 맹자 공손추편. 옹정제 어필.
  10. [10] 시(詩) 등 공자 이전의 문헌에서 '인(仁)'이라는 글자는 나타나지만 그 의미는 맥락상 도덕적, 인본주의적, 인문주의적 '사람다움'이라기 보다는 '남자다움', '사람 구실을 잘 함(유능함, 능력 있음, 다재다능함)', '사람 중의 사람(잘남, 빼어남, 잘생김)'에 가까웠다. '인'에 '휴머니즘'을 부여한 것은 공자가 최초이다. <<시경(詩經)>>의 <숙우전(叔于田)>, <노령(盧令)> 참고. 하지만 공자도 원래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아서, 관중(管仲)의 업적을 칭찬할 때 이러한 느낌이 강한 '인'을 사용하기도 했다.
  11. [11] '군자(君子)' 역시 '인(仁)'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휴머니즘'의 색채가 별로 없던 용어였다. 시(詩) 등에서 쓰인 군자는 '멋진 남자', '지배 계급', '어엿한 사회인'에 가까웠는데, 공자는 '멋진 남자', '지배 계급', '어엿한 사회인' 됨의 필수조건이 바로 '인문 정신'과 '도덕성'을 갖춤, 즉 '인'함이라고 보았다. 공자가 이 같은 '인' 사상을 가진 채로 '군자'라는 용어를 쓰고, 공자가 유명해지고, 공자의 말이 유명해지고, 공자의 말에 배어 있는 그의 사상이 알게 모르게 전파되면서, 공자의 '군자'가 종래의 '군자'를 압도함으로써 오늘날의 군자는 '도덕적 지성인'의 의미가 강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의 현상이 맹자의 '대장부(大丈夫)'에서도 보이는데, 다만 백가쟁명(百家爭明) 시대의 맹자의 말의 파급력, 장악력은 공자보다 덜했으며, 그 자신부터가 자신의 '대장부' 보다는 공자의 '군자'를 쓰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맹자의 '대장부'는 종래의 '대장부'를 압도하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
  12. [12] 유가(儒家), 유학(儒學), 혹은 유교(儒敎)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당시의 원시 유교 때에서부터 묵가(墨家), 도가(道家), 법가(法家), 종횡가(縱橫家), 농가(農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등 수많은 타 학파와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며(물론 꽤나 비우호적인 교류였지만) '생존'했다. 당연히 타 학파의 사상에서 온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그것을 자기 학파의 논리로 내재화해 오면서 명맥을 유지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맹자(孟子)는 공자의 최고 가치 '인(仁)'에 대항하기 위하여 묵자(墨子)가 내세운 최고 가치 '의(義)'를 오히려 공자식으로 강조해 '인의(仁義)'의 병칭어(竝稱語)를 유가적 개념어로 보편화시켰고, 순자(荀子)는 이에 더해 도가적 수양론(修養論)과 법가적 정체론(政體論), 명가적 명실론(名實論)을 비판적 수용하고 그것을 유가적 예치주의로 귀결시켰다. 중세 유교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性理學(주자학(朱子學), 정주학(程朱學)), 양명학(梁明學)도 그 당시의 경쟁 사상계(思想界)인 도교(道敎), 불교(佛敎)의 논리를 내재화하여 성립한 것이다. 산 속에 박혀서 자기네들끼리 1대 2대 3대 하면서, 순수하게 후계자 머리에서 불현듯 새롭게 튀어나온 사상만 새로 추가되면서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다.
  13. [13] 또한 이는 공자 사상이 역시 주축이 되되, 공자 이외의 옛 성현(聖賢)의 사상도 유가 사상이 적극적으로 수용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요(堯), 순(舜), 우(禹), 탕(湯), 이윤(伊尹),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태공망(太公望), 백이(伯夷) 등은 물론이요, 관중(管仲), 자산(子産), 유하혜(柳下惠), 안영(晏嬰), 섭공자고(葉公子高) 등도(물론 후자의 양반들은 공자보다 격이 떨어진다 여겨졌고, (비판할 땐 또 제대로 비판하긴 했지만) 후대 유가 사상가들이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가란 공자만 일종의 유일신마냥 받드는 종교가 아니었다. 맹자만 해도, 평소에 관중에 대해 심심하면 비판하더니, '하늘이 큰 일을 맡긴 사람'의 예를 꼽을 때 관중을 거론하고, 안영도 관중과 세트로 한 번 비판해놓고 제(齊)나라 선왕(宣王)을 계도할 때는 안영의 말을 인용하는 등 닫히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유하혜도 '조신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지만, '유하혜는 성인(聖人) 가운데 온화한 사람이었다.' 하며 이윤, 백이와 같은 반열에 올리기도 했다. 또 백이도 '결벽 떠는 게 심했다'며 비판해놓고서, '백이는 성인 가운데 청렴한 사람이었다.'면서 칭찬도 했다.
  14. [14] 중도(中都)라는 지방의 지방관.
  15. [15] 물론 공자 그 자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새롭지 않은 것을 새롭게 밝혀냈다'는 점은 인정할 만할 것이니, 이런 의미에서 그를 '유교의 창시자'라고 보는 것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주의해야 할 점은 또다시 있으니,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유교'에 대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관념이 무엇인지, 그것은 옳은 관념인지, 그리고 '오늘날의 유교'와 '공자의 유교'가 어느 정도의 관계성 혹은 연속성을 갖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이런 것을 따지려 든다면 매우 소모적인 논쟁이 발생할 것이고, 실제로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고 계속 생산되는 중이므로, 역시 공자를 가리켜 '유교의 창시자'라 칭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숙고해 보아야 하리라는 점이다.
  16. [16] 하지만 유가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없었던 서양에서는 유학(儒學)을 접하고서 그저 Confucianism(공자주의)라고 명명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굳어져 있다.
  17. [17] 수많은 지식을 한데 모아 변별하고, 그중 특히 선한 것을 골라 완전케 함으로써 그 도를 크게 이룸.
  18. [18] 서구 선교사들이 붙인 호칭이므로, 고전 라틴어가 아닌 교회 라틴어 독법을 따라 'ci'를 '키'가 아닌 '치'로 읽는 게 더 옳을 듯하다.
  19. [19] 현대 중국 보통화로는 'Kǒng Fūzǐ(쿵 푸쯔)'로 읽는다. 라틴어 이름이 붙었을 당시의 중국 발음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다.
  20. [20] '공선생님' 말고 다른 선생님, 이를테면 맹선생님이라든지, 증선생님 등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곧 공자였다.
  21. [21] 공자세가 中: 夏人殯於東階周人於西階殷人兩柱閒昨暮予夢坐奠兩柱之閒予始殷人也
  22. [22] 이 부분은 중국 학자 리카이저우의 책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에서 발췌한다.
  23. [23] 사실 남궁경숙의 원래 '성'이었다는 '맹'부터가 이미 '씨'이다. 노나라 맹 가문이 통칭 '맹손씨'라고 불렸다는 걸 생각해 보자. 삼환, 즉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의 경우 노나라 환공의 후손이기 때문에 진짜 성은 주성周姓인 '희姬'이다. 이미 여기서 한 번 '씨'가 된 것이 맹, 숙, 계인 것이다. 즉 남궁경숙의 경우인 '남궁'은 1차 '씨'인 '맹'에서 한 번 더 분화한 2차 '씨'가 되는 것.
  24. [24] 공자의 동시대 노나라의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이 대표적인 예. 노 환공(桓公)의 세 아들인 경보, 숙아, 계우가 각각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로 창씨를 하게되나 이들의 성 즉 노나라의 국성(國姓)은 희(姬)다. 맹손(孟孫)씨가 곧 맹(孟)씨로 이 가문에서 맹자가 나온다.
  25. [25] 공자가어 본성해에서는 제을의 맏아들에서 가문이 시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26. [26] 이 시기에 노나라로 이주했다고 기록
  27. [27] 그 배경은 역시 공보가와 자목금보 이후로는 거의 관직진출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춘추시대의 관직은 크게 경-대부-사로 나뉘는데 경과 대부까지는 관직을 세습할 수 있었다. 사의 직책은 공로에 의해서 임명되었고, 사 이하의 직책이나 지방하위직은 공식적으로 매관매직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28. [28] 숙량흘은 공숙량흘이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춘추 시대 초중기에는 를 이름보다 먼저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표시된 것이다. 즉, 공자의 아버지의 이름은 공흘이고, 숙량은 그 자이다.
  29. [29]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문이 아니라, 수직으로 올렸다가 내리는 식의 성문
  30. [30] 모두 무녀였을듯 싶다.
  31. [31] 子入大廟每事問 或曰, 孰謂陬人之子 知禮乎 入大廟每事問 子聞之曰, 是禮也 공자께서 태조에서 매사를 물으셨다. 그러자 누군가는, “누가 추(陬)땅 놈이 예절법칙을 안다고 했는가? 태조에 들어서서는 매사를 묻는구나.”라고 비꼬았다. 공자께서 그 말을 듣고 말씀하시길, “그렇게 하는 것이 예도(禮度)니라.”하셨다.
  32. [32] 孔子 인간과 신화. H.G 크릴 지음/이성규 역 지식산업사
  33. [33]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의하면 이 때 남궁경숙은 공자의 낙양행을 국가의 시찰사업으로 포장해서 노나라 군주에게 일체의 경비를 얻어낸다. 이 때 얻은 것으로는 마차, 말 2마리, 마부, 남궁경숙과 동행하는데 필요한 일체의 여행경비가 포함된다.
  34. [34] 일단 이 때에 노자를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
  35. [35] 심지어 제나라는 노나라 왕실에 제나라 미녀들을 보내는 등, 노나라 임금이 정치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끔 만들었다. 물론 공자는 이를 싫어하였고, 노나라 왕은 공자 말을 들어쳐먹지 아니하였다.
  36. [36] H. G. 크릴의 공자 ~ 인간과 신화에서 인용한 글이다. 조지프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37. [37] 북위 시대의 지리학자 역도원이 직접 관찰한 것을 '수경주'에 기록한 것. 묘는 춘추전국시대의 측량단위로, 현대로치면 2만평방미터에 달한다. 물론 이 전체에 건물이 있던 것은 아니고, 집과 농원, 전답 등이 모두 이 안에 있었던 것이 고대 중국 건축의 특징이다. 즉 집 하나가 자급자족이 가능한 완성된 생활공간이고, 심지어는 여기서 농사를 짓지 않으면 벌금을 걷는다는 법률도 제정되고는 했다.
  38. [38] 공자세가 中: 太山壊乎! 梁柱摧乎! 哲人萎乎!
  39. [39] 논어 공야장편에서: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40. [40] 이에 대해 공자가 주장한 대표 방법론 중 하나가 忠이다. 행동 전 먼저 상대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마음. 공자의 이론에서 이 '사전에 적극적인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나라간의 관계에 대한 태도, 즉 국가간 정치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동으로 오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먼 미래에 다른 유학자들에 의해 개인이 나라에 충성하여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뜻으로 변질되었다.(사실 인을 중시한 공자는 순수한 대의론자로 보기 어려운데 천년 뒤부터 그것이 왜곡되고 변질된다) 주체는 백성만으로 줄어들고, 상대가 모든 타인에서 나라(정부)로 줄어들었다
  41. [41] 그러나 이를 '공자 사상의 왜곡'이라고 하기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논어》라는 책을 통해 공자를 알게 된 현대인이, 공자와 직접 이야기하고 두드려 맞고(…)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직계 제자들에게 "우리가 너희 스승을 더 잘 안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현대인들이 공자에 대해 내놓은 연구들도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지만, 직계 제자들은 공자와 직접 대화한 사람들이라는 걸 무시해서는 안된다.
  42. [42] 이 육예를 서, 수 / 예, 악/ 사, 어로 나누어 현대 교육학에서 말하는 지덕체 전인교육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43. [43] 논어 술이편에서: 我非生而知之者好古敏以求之者也
  44. [44] 공자세가 中: 孔子学鼓琴師襄子, 十日不進. 師襄子曰:「可以益矣」孔子曰:「丘已習其曲矣, 未得其數也」有閒, 曰:「已習其數, 可以益矣」孔子曰:「丘未得其志也」有閒, 曰:「已習其志, 可以益矣」孔子曰:「丘未得其為人也」有閒, (曰)有所穆然深思焉, 有所怡然高望而遠志焉. 曰:「丘得其為人, 黯然而黒, 幾然而長, 眼如望羊, 如王四国, 非文王其誰能為此也!」師襄子辟席再拝, 曰:「師蓋云文王操也」
  45. [45] 거의 초능력처럼 보이지만 일단 악관인 사양자가 가지고 있을 만한 레퍼토리의 한계와 배경, 곡 자체의 형식과 구성을 통해 곡의 배경 추측, 공자의 넓은 식견을 통해 곡을 짓거나 관련될 만한 인물을 한정하는 등등을 생각해 보면 뽀록이 한 번 들어맞은 것이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공자가 뽀록에 의지했다고 주장한다면 상당한 논란거리일 것이다.
  46. [46] 물론 이 역시 목표는 있다. '인'이 크게 자리잡는 사회를 위한 것. 공자는 교육이 되어야만 인이 이뤄지는 사회를 만드는 체계가 마련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7. [47] 춘추시대말부터 전국시대 초기로 쭉 살아온 공자와 달리, 맹자나 순자 같은 순수 전국시대 출신 후배들은 날때부터 직접 보고 들은 세상이 계속 헬게이트라, 중국 전체에 끔찍하고 몹쓸 일들이 너무 많아 학문초기부터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 밖에 없긴 했으며, 왜 이 인간들은 이렇게 쓰레기짓을 많이 하는가 당대 백성이나 다른 학자들도 그런 사상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48. [48] 이 수치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후한 시대의 도량형으로 따지면 2미터가 넘지만… 물론 이 시대에는 키를 정확히 재지 않았기 때문에 대충 느낌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5척이면 매우 작은 키고 8척은 꽤 큰 키, 9척부터는 거인급.
  49. [49] 자로는 본래 지독한 폭력배였는데, 공자의 학당에 뛰어들어서 행패를 부리다가 공자에게 감화되어 제자가 되었다고 나온다. 감화의 방법은 이야기마다 다르지만 공자가 직접 주먹으로 감화(…)시켰다거나 혹은 팽팽하게 맞붙던 도중 공자가 이런 필부의 만용은 부질없으며 진정한 군자의 강함을 가르쳐 주겠다고 설득했다는 내용도 있다.물론 아동용 위인전에서는 이런 괴리감을 없애기 위해 그냥 무술을 배운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버텼다고만 나온다.
  50. [50] 이런 제자백가 중 한 갈래인 묵가의 경우 수성(守城) 전문가 집단이기도 했다.
  51. [51] 다만 최술은 수사고신록에서 이는 후세 사람들이 과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맹자가 공자의 제자는 70명이라고 한 이야기를 더 신봉한것
  52. [52] 사실 공자는 중국 최초의 학원원장이라고 할수 있다
  53. [53] 논어 자한편에서: 大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君子多乎哉? 不多也
  54. [54] 논어 자한편.
  55. [55] 옛날 가옥의 침실 문 밖 안뜰. 이성異姓의 상喪을 당하면 여기서 곡哭을 한다.
  56. [56] 공자가 자로의 상주 노릇을 했다는 것.
  57. [57] 자로는 구박하면서도 좋아한다면, 이쪽은 그냥 비난 일색(…)
  58. [58] 증삼(증자)의 아버지.
  59. [59] 마오는 린뱌오나 국민당이나 모두 공자를 존경하고, 법가(法家)에 반대하는 무리이다. 법가는 역사를 전진시켰고, 공자는 역사를 후퇴시킨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며 이 둘에 대해 비판하였다.그 유명한 비공비림(공자와 린바오를 비난하자) 열풍이 여기서 기인한 것이다.
  60. [60] 현재 중국 지도부들과 시진핑 본인이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61. [61] 이미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문화대혁명에 대해 현대 중국에 더이상 맞지 않은 낡은 악습이라고 분석하고 비난하는 학자들이 속속 나타난지 꽤 됬다. 물론 중국이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중국 정부에서 학자들을 부추기고 장려한 것이다.
  62. [62] 강신주는 공자의 모친이 아버지의 무덤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근거로 강간을 했다고 추측했지만 딱히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공자의 모친의 신분에 대해 무녀라고 추측한 인물로 대표적인 학자는 김용옥.
  63. [63] 伯魚之母死, 期而猶哭。 夫子聞之, 曰, "誰與哭者?" 門人曰, "鯉也。" 夫子曰, "嘻, 其甚也!" 伯魚聞之, 遂除之。
  64. [64] 子思之母死於衛, 赴於子思, 子思哭於廟, 門人至, 曰, "庶氏之母死, 何爲哭於孔氏之廟乎?" 子思曰, "吾過矣, 吾過矣。" 遂哭於他室。
  65. [65] 子上之母死, 而不喪。 門人問諸子思, 曰, "昔者子之先君子喪出母乎?" 曰, "然。" "子之不使白也喪之, 何也?" 子思曰, "昔者吾先君子無所失道, 道隆則從而隆, 道汚則從而汚。伋則安能? 爲伋也妻者, 是爲白也母, 不爲伋也妻者, 是不爲白也母。" 故孔氏之不喪出母, 自子思始也。
  66. [66] 가려진 것은 열어서 밝혀야 함
  67. [67] 논어 양화편에서 子曰, 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近之則不孫, 遠之則怨
  68. [68] Temple and Cemetery of Confucius and the Kong Family Mansion in Qufu
  69. [69] Temple et cimetière de Confucius et résidence de la famille Kong à Qufu
  70. [70]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71. [71]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72. [72]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73. [73] 76세손, 의자에 앉은 사람. 마지막 연성공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쿵추이창의 조부.
  74. [74] 78세손, 아기를 안고 서 있는 사람. 현직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아버지인 쿵웨이이(77세손)는 일찍 죽어 봉사관을 맡지 못 했다.
  75. [75] 79세손, 쿵추이창의 품에 안긴 아기. 차기 대성지성선사봉사관.
  76. [76] 현손의 아들은 6세손이 아니라 5세손이다.
  77. [77] 공부의 동생
  78. [78] 공등의 아들
  79. [79] 공패의 1남
  80. [80] 공완의 동생 공찬의 아들
  81. [81] 공영철의 동생
  82. [82] 공부에서 일하던 하인이 주인의 성을 따라 성을 공으로 고쳤는데 난세를 틈타 공광사를 살해하고 문선공을 참칭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성장한 공광사의 외아들인 공인옥이 황제에게 이 사건을 고하면서 역관광이 이루어진다. 공자 가문의 최대 위기중 하나.
  83. [83] 공의의 2남 공연택(孔延澤)의 아들. 즉, 공성우의 사촌
  84. [84] 공약몽의 동생
  85. [85] 공약몽의 아들. 고종을 따라 남천. 남종(南宗)의 시조
  86. [86] 공약몽의 아들, 공단우의 동생. 북종(北宗)의 시조
  87. [87] 공단조의 4남
  88. [88] 공개의 아들
  89. [89] 공진의 아들
  90. [90] 공문원의 아들
  91. [91] 공만춘의 아들. 원세조 지원 19년(1282), 북종에게 연성공 양보.
  92. [92] 공단조의 2남
  93. [93] 공증의 동생
  94. [94] 공총의 아들
  95. [95] 공불의 아들, 공호의 손자, 공단립의 증손, 공약우의 현손
  96. [96] 공원용의 아들
  97. [97] 공원조의 동생 공원굉의 손자, 공지고의 아들
  98. [98] 공지전의 아들
  99. [99] 공치의 아들
  100. [100] 공완의 아들, 공지후의 손자, 공원효의 증손, 공불의 현손
  101. [101] 공사회의 아들
  102. [102] 공굉서 사후 연성공 작위가 공굉서의 아들 공문소에게 환원
  103. [103] 공굉서의 아들
  104. [104] 공문소의 2남 공정녕의 손자, 공상탄의 아들
  105. [105] 공헌배의 동생 공헌증의 아들
  106. [106] 공림에 묻히지 않은 두 번째 연성공. 1920년 2월 23일 유복자로 태어나 생후 100일만에 연성공 작위를 승계했다.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쫓겨날 때 같이 건너가 대만 고시원 원장, 총통부자정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국공내전문화대혁명의 와중에서 대륙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생전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곡부에 돌아가지 않았다. 국공내전이야 그렇다쳐도 위에 나온 것처럼 문화대혁명은 빼도박도 못하는 병크. 2008년 10월 28일 88세를 일기로 타계.
  107. [107] 조서(早逝). 1939년 출생. 공덕성의 장남. 1989년 2월 26일 50세를 일기로 타계.
  108. [108] 1975년 7월 1일 출생. 공유익의 장남이자 공덕성의 장손. 현 대만 총통국책고문. 30대라는 너무 젊은 나이에 중책을 맡아서 처음에는 탈모(…)가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지금은 나아졌다고 한다. 2012년 3월 7일 맹자의 76대손 맹영계와 함께 방한해 안동 도산서원을 찾았는데, 퇴계 이황을 기리는 향사례에서 초헌관 역할을 사양해 도산서원 관계자들을 당황시켰다. 곡부의 공부에 아직 가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공자의 후학인 이황에게 먼저 술을 따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고.
  109. [109] 공수장의 장남. 증조부 공덕성이 이름을 지었다.
  110. [110] 귀찮은 위키러를 위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자면, 송나라 즈음하여 크게 융성한 도교 및 불교 사상, 그들의 세계론, 우주론에 대항하여 유가 사상이 존립하려면 유가 역시 그럴듯한 세계론, 우주론을 내놓았어야 했는데, 기본적으로 유가는 현실 정치에 관심을 둔 사상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분야에서의 얘깃거리가 적었다. 이때 주돈이가 『주역』과 전통적 오행설에 기반을 둔 『태극도설』을 지어 나름의 유가적 형이상학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을 본격적으로 유가적으로 정당화하려면 그 내용과 어떻게든 갖다 붙일 수 있는 유가 성현의 말이 필요했다. 그런데 공자는 형이상학적인 말을 아꼈고, 순자는 더 나아가 형이상학을 아예 거부하다시피 했다. 반면 자사나 맹자는 '천명으로서의 성'을 제시하는 등 그 이론에 형이상학적 색채가 있었다. 때문에 『태극도설』을 정당화해주기에 보다 용이한 자사, 맹자의 사상이 정호, 정이, 주자 등 신유학 운동가들을 거치면서 점차 선호되고 유가의 적통시되기에 이른 것이다.
  111. [111] 특히 일본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조조는 '고리타분한 유가를 부정한 실용적, 법가적 인물' 등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다, 재밌게도 실제 조조는 사실 도가에 심취했다는 정황이 짙다.
  112. [112] 파워업키트에서만 등장, 시나리오 상에 장수 데이터는 버젓이 들어있으나 184년 시나리오가 포함되지 않은 탓에 등장하지 못하다가 파워업키트에서 가상시나리오에 등장
  113. [113] 공자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다. 오산시논산시 노성면 2군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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