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표회의

1. 개요
2. 배경
3. 경과

1. 개요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열린 회의. 창조파와 개조파 그리고 현상유지파의 대립이 있었다.

2. 배경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시기부터 다소간의 갈등이 있었다. 3.1 운동 이후 당시 독립운동을 위해 수립된 정부는 연해주에 위치한 대한국민의회와 서울에 위치한 한성정부, 상하이에 위치한 상하이 임시정부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에 소속된 사람들 중 겹치는 사람들이 있었다.[1] 따라서 독립운동의 효율성을 위해 이 정부들을 하나로 합칠 필요가 있었는데 어디에 정부를 만들 것이냐를 놓고 많은 말이 오갔다. 한성정부는 13도 대표가 집결해 구성된 정부였지만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어 무장투쟁을 하기에 용이한 연해주에 정부를 만들려 했으나[2] 한반도와 가까워 역시 일제의 위협이 있다고 판단, 일본으로부터 충분히 멀리 떨어진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꾸리게 된다. 당시 상하이는 조계지가 설치되어있어[3] 일본이 간섭하기에 쉽지 않았고 각국 외교관들을 통해 외교활동을 하기 쉬웠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이렇다 할 만한 성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당시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것이 논란이 되었다.[4] 또한 한성정부 계승 문제, 연통제, 교통국의 발각으로 인한 어려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겹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로서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열린다.

3. 경과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크게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신채호를 위시로 한 창조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 것을 주장하였고 안창호, 이동휘를 위시로 한 개조파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근거로 임시정부를 계속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의 대립은 김구, 조소앙 같은 현상유지파의 반대와 자금난으로 성과가 없었고 상당수가 임시정부를 떠나면서 임시정부는 침체기에 빠진다.


  1. [1] 이승만은 한성정부에서 집정관 총재,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를 하고 있었다.
  2. [2] 주로 무장독립론을 주장했던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었다.
  3. [3] 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지에 설치되었다.
  4. [4] 신채호는 이를 두고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았다."라는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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