궈쑹링

중화민국 동북국민군 총사령관

정체

郭松齡

간체

郭松龄

한국식 독음

곽송령

영문

Guo Songling

무신(茂宸)

출생

1883년 청나라 봉천성 어초채

사망

1925년 12월 25일 중화민국 봉천성 요하

국적

청나라 중화민국

학력

베이징 중국육군대학

직업

군인, 정치가

1. 소개
2. 생애
2.1. 초기
2.2. 군문에 들다
2.3. 장쭤린 휘하에 들어가다
2.4. 군공을 세우다
2.6. 죽음
3. 여담
4. 참고문헌
5. 관련문서

1. 소개

중화민국의 군벌, 봉천군벌의 군인. 원래 혁명가 출신으로 장쭤린의 탄압을 받았으나 장쭤린의 군 현대화 과정에서 그의 막하로 들어가 신임을 받았고 봉천군벌의 오호장군 중 한 사람으로 불렸으나 장쭤린의 하야를 요구하는 반봉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아내와 함께 총살되었다.

2. 생애

2.1. 초기

1883년 봉천 동부 어초채 태생이다.[1] 궈쑹링의 조상은 원래 산서성 분양현 출신이며, 국경을 지키기 위해 동북으로 이주하여 동북 이곳저곳을 유랑하다가 어초채에 정착했다. 궈쑹링의 조부는 문자를 조금 아는 농민이었으며 부친은 곽부흥이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여 여러 계몽서적을 읽었으나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자주 가족들과 함께 구걸을 다니는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그가 9세가 되었을 때 곽부흥이 사숙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이때 궈쑹링도 사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였다. 곽부흥은 궈쑹링에게 삼자경, 백가성 등 가르쳤고 3년 동안 궈쑹링은 빠르게 유교경전을 익혔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게 되어 곽부흥의 사숙도 폐쇄되고 궈쑹링은 지주의 집에 들어가 13세부터 16세까지 반머슴 생활을 하였다.[2] 궈쑹링은 머슴 생활 중에서도 삼국지연의, 수호지 등 소설과 고전을 탐독했으나 평소에 궈쑹링에게 품삯도 제대로 주지 않고 부려먹던 주인이 궈쑹링에게 도둑 누명을 씌우자 머슴 생활을 그만두게 되고 막노동으로 먹고 살았다.

곽부흥은 궈쑹링이 막노동을 하는 사이에도 틈틈이 과거 시험에 관련된 내용을 지도하였고 주변 농민들의 문서 관련 일을 도와주면서 '농민 수재'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곽부흥이 봉천성 안에서 일을 얻자 곽부흥은 궈쑹링에게 막노동을 그만두게 하고 서원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그 서원은 곽부흥의 친구인 유학자가 하던 곳이라 궈쑹링에게서 학비를 받지 않았고 팔고문 대신에 실용학문을 가르치는 곳이었는데 궈쑹링은 이곳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2.2. 군문에 들다

그러던 중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만주가 혼란에 빠지게 되어 상무정신의 풍조가 형성되었는데 1905년, 성경장군이 되어 만주의 통치를 맡은 조이손이 봉천육군소학당을 세우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방진을 총판으로 삼았다. 이는 육군장교의 기초 소양을 훈련시키는 3년제 학교로, 국어, 수신, 역사, 외국어, 수학, 물리, 생물, 지리, 측량 등의 기초교양과 기초과학 및 보병, 교련, 사격, 병기학, 지형학, 건축학, 전술학 등의 군사과정을 교육했다. 궈쑹링은 입학하기에는 나이가 상당히 많았음에도 성적이 우수하여 정규반에 입학할 수 있었고 각 과에서 최우수 점수를 받아 장방진에게서 특별상을 받았다.

1906년 조이손이 학당 내에 1년제의 육군 속성 무관학당을 증설하였다. 성적이 우수했던 궈쑹링은 육군 속성 무관학당에 진학하였는데 여기서 동맹회 회원인 청년교관 방성도 등이 혁명사상을 전파하여 궈쑹링은 혁명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907년 속성 무관학당을 수석으로 졸업한 궈쑹링은 북양군 제3진 견습생에 선발되고 견습 기간 만료 후 성경 장문 아문 휘하의 초장[3]이 되었다. 궈쑹링은 기강이 해이한 휘하 부대를 엄히 통솔하여 기강이 잡힌 부대로 만들었고 이 덕분에 봉천 육군 통령 주칭란(주경란, 朱慶瀾)은 궈쑹링을 크게 칭찬하고 측근으로 삼았다.

1909년, 주칭란이 사천성 성도로 부임하자 방성도, 청첸, 강승선, 엽전 등 동맹회원들이 그를 따라갔고 궈쑹링도 주칭란을 따라가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1910년, 궈쑹링은 방성도, 엽전의 소개로 사천신군의 동맹회에 가입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사천 곳곳에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 선포되었다. 궈쑹링은 주칭란을 사천 군정부 부도독으로 추대했으나 사천 순방군이 사천의 통치는 사천인이 맡아야 한다고 신군을 배척하자 주칭란은 사천을 떠나야 했고 궈쑹링도 봉천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는 동료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 집안이 빈곤하여 노동자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많은 독서를 하지 못했다. 후에 궁궐 보초 시험을 볼 때 다만 이름과 주소만 쓸 줄 알았지만 합격되었다. 이후 육군 무비학당에 응모하여 시험에 합격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공부를 못해 전부 독학으로 공부했다. 이후 육군대학에 들어왔고 역시 완전히 독학으로 공부했다. 배우지 못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1911년 11월 상순, 봉천으로 돌아온 궈쑹링은 장용이 이끄는 연합 급진회에서 혁명활동을 전개했고 봉천여자사범 부속 소학교 교사 한숙수의 집에 조직을 두고 혁명 관련 모의를 하였다. 하지만 조이손이 이를 알게 되어 장쭤린에게 혁명당원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고 장용을 비롯해 400명의 혁명당원이 처형되었다. 궈쑹링도 체포되어 머리를 깎고 달아나려 했지만 군인 신분증이 있어서 투옥되었고 봉천 육군 속성학당 동기 고기의와 한숙수가 도움을 주어 겨우 처형을 면하고 석방되었다.

한숙수는 궈쑹링과 동향사람으로, 연경대학을 졸업하고 봉천에서 빈민가 아동을 위한 학교 건립, 여중, 어청년회 설립 등의 사회운동을 하였고 이후 궈쑹링과 결혼하게 되었다.

2.3. 장쭤린 휘하에 들어가다

죽음을 면한 궈쑹링은 군사과학의 습득의 중요함을 느껴 1912년 북경장교연구소에 시험을 쳐서 입학했고 그곳에서 학생회장이 되었다. 1913년 북경장교연구소를 졸업한 궈쑹링은 봉천으로 돌아와 봉천 도독 장석란의 참모가 되어 잠시 근무하였고 당해에 베이징 중국육군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매우 열심히 공부하였다. 1916년 육군대학을 졸업한 궈쑹링은 베이징 강무학당의 초빙교관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돤치루이의 독재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궈쑹링은 1917년 단신으로 광저우로 떠나 광저우 군정부의 쑨원에게 합류하려 했다. 마침 광동성장이었던 주칭란의 소개로 광동군 경위영 영장이 되었다. 궈쑹링은 쑨원을 만나 군벌 타도를 주장했다.

"진정한 공화국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군인부터 혁명을 해야 합니다. 군인들은 매번 군벌을 이용해 특수 세력을 조성하여 실질적으로 공화 정치의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고로 군인 자신부터 혁명을 해야 합니다."

쑨원은 궈쑹링의 말을 크게 칭찬했고 궈쑹링은 삼민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다. 하지만 1918년 5월, 쑨원을 이용할 생각밖에 없던 남방군벌들에게 실망한 쑨원은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궈쑹링은 광동에서 운남강무당 소관 분교 교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궈쑹링은 광동과 광서에서 동지들을 모아 동삼성 개혁을 의논했다. 궈쑹링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동삼성을 근본부터 뜯어 고치려면 나쁜 군벌들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군벌을 쓰러뜨리려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봉천으로 돌아가 봉천 군벌의 소굴에 일단 들어갔다가 병권을 잡고 세력을 기른 후에 근본적 개조를 도모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 궈쑹링은 즉각 짐을 꾸려 봉천으로 돌아왔다.[4] 독군서 참모장이며 육군대학 동기인 펑화(진화 奉華)의 추천으로 독군서 참모가 되었고 곧 장쭤린이 1919년에 세운 동삼성육군강무당 교관이 되어 중령 대우를 받았다. 어느날 강무당에서 강의하던 궈쑹링과 장쭤린이 마주쳤는데 장쭤린은 "자네는 혁명당원이었는데 오늘 어찌하여 여기에 있는가?"라고 묻자 궈쑹링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쭤린은 과거를 묻지 않고 그가 계속 일하도록 허용했다.

궈쑹링은 전술에 조예가 깊어 그의 강의는 인기가 높았고 스스로 정문 감독을 맡아 지각하는 학생들을 엄히 다스렸으며 학생 대장, 학생 구대장들에게도 관여하였다. 이때 그가 포병과에서 가르친 제자가 장쉐량이다. 궈쑹링의 고문이었던 이견백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이때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이 강무당의 학생이었다. 궈쑹링이 교관이었던 인연으로 이 둘은 서로 친분을 맺었고 쉐량에게 새로운 군사 지식을 특별히 훈련시켜 후일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도록 하였다. 쉐량은 편협한 사람이 아니고 또 궈쑹링의 지식을 배워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장쉐량은 궈쑹링을 '존경하는 스승' 또는 '가까운 친구'로 여겼다.

1920년 육군강무당 1기생으로 졸업한 장쉐량은 동삼성 순열사 경호대 여단장에 임명되었고 즉시 궈쑹링을 아버지에게 추천하여 참모장 겸 2연대 연대장으로 임명하게 함으로 궈쑹링의 본격적인 지휘관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견백은 이를 궈쑹링의 계획대로라고 분석한다.

궈쑹링의 최초 계획은 그의 의도대로 되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회가 만들어져 마침내 여러 방면에서 장씨 부자의 확실한 줄을 잡게 되었다. 그래서 군권을 가질 수가 있었다. 궈쑹링은 신체가 매우 크고 얼굴 표정이 엄숙하였으며 생활은 검소하했다. 그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항상 제복만 입었고 모자와 구두를 단정히 하고 다녔다. 상관을 보든, 부하들을 보든, 일반 사회인을 보든 언제나 단정했고 예의가 밝았다.

2.4. 군공을 세우다

궈쑹링은 군사 교육에 가장 공을 들였다. 강무당을 정돈하고 군사 교도대 군관 교육반을 창설하여 군사행정, 군의, 군 장비 등을 교육했으며 보병학교도 창설했다. 그리고 학생과 간부들을 훈련시켜 이들의 기강을 바로잡았고 봄과 가을마다 부대 검열을 행했으며 군관들에게 학과와 기술 양과의 기술고시를 보게 했다. 또한 인재들을 모으는데도 열심이라서 군사학교 출신 인재들은 모두 포섭하였고 실력 있는 자를 중심으로 승진시켜군관 승진제도를 수립하였다. 군수독립제도도 만들어 공금 횡령과 군수품 착복을 방지하고 병사복지를 향상시켰다. 또한 부하들에게 무릎을 꿇거나 머리를 조아리는 봉건적 풍습을 없앨 것을 지시했고 구타, 횡령, 아첨 등의 기풍을 일소하였다. 이런 과감한 개혁으로 3여단과 8여단은 봉천군에서 가장 모범적인 부대로 거듭났다.

궈쑹링을 시기한 마적 출신 지휘관들은 훈련이 잘 된 부대는 군기만 잘 잡혀 있지 실전에서 쓸모 없다고 주장하며 궈쑹링을 비판했지만 이는 군사학교 출신들은 실전에 약할 것이라는 마적 출신 지휘관들의 선입견에 불과했다. 1920년 7월 안직전쟁이 발발하자 장쉐량은 봉천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장쉐량은 일부 부대만 봉천에 남기고 주력 부대를 이끌고 산해관 너머로 진군했는데 지휘권을 궈쑹링에게 맡겼다. 궈쑹링은 선봉사령으로 주력을 이끌고 톈진에서 1개 연대 병력으로 용제광의 2개 여단을 포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1920년 가을, 길림성 동부에서 마적단이 창궐하여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행패를 부리자 궈쑹링은 자신이 직접 훈련시킨 부대들을 지휘하여 순식간에 마적단을 궤멸시켰다. 궈쑹링은 자동차나 마차에 타는 것도 거부하고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며 병사들의 인기를 얻었으며 군기가 엄정한 궈쑹링의 부대는 민중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 지방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고 궈쑹링은 크게 유명해졌다. 이에 장쭤린은 1921년 장쉐량을 봉천 육군 제3혼성 여단장에 임명하고 궈쑹링을 제8혼성 여단장에 임명하여 심양의 북대영에 두었다. 3여단과 8여단의 사무는 실질적으로 같이 처리되어서 3,8 여단으로 묶어서 부르곤 했는데 장쉐량은 웬만한 사무는 모두 궈쑹링에게 맡김으로 궈쑹링이 사실상의 책임자가 되었다. 장쉐량과 궈쑹링의 우정은 더욱 깊어져 둘이 의형제를 맺기까지 하였다.

1922년 4월, 1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봉천군은 동로군과 서로군으로 나뉘었다. 동로군 2부대 사령관이 장쉐량이었고 여기에는 3여단, 8여단과 더불어 채평본의 4여단이 있었다. 1차 직봉전쟁에서 봉천군의 서로군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이 때문에 동로군도 위험해졌다. 장쭤린은 장쉐량에게 전보를 쳐서 군량성의 본부회의에 참석하라고 지시했고 장쉐량은 궈쑹링에게 지휘를 맡겼다. 서로군이 궤멸하자 장쭤린은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위기 상황이지만 궈쑹링은 침착하게 지휘권을 행사하여 직예군의 추격에 능숙히 대처하며 영정하 도하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2부대 병력을 모두 보전하여 주둔지로 퇴각시켰고 산해관에서 직예군을 섬멸함으로 만주에 직예군이 침입하는 것을 저지했다.

장쭤린은 자신의 휘하 장령과 부대들이 군사과학을 모르는 형편없는 상황이라는 것에 큰 충격을 받고 군을 정돈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히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능숙한 모습을 보인 궈쑹링이 장쭤린의 주목을 받았다. 장쭤린은 봉천, 길림, 흑룡강의 3성 부대를 모두 동북군으로 통합하고 사단제를 폐지하고 여단제로 개칭했다. 장쉐량의 3여단은 2여단으로, 궈쑹링의 8여단은 6여단으로 개편되어 2,6여단으로 불리게 되었다. 장쭤린은 궈쑹린에게 육군정리처 대리참모장 자리를 주어 핵심 사무를 맡겼고 궈쑹링은 봉군의 인사권을 사실상 전담하는 막강한 인물로 성장했다. 길림과 흑룡강, 그리고 녹림파라 불리는 원로들이 지휘하는 부대를 제외한 사실의 모든 동북군이 궈쑹링이 지휘하여 궈쑹링은 봉천군벌의 군사대권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시점에서 궈쑹링은 육대파라 하여, 중국 육군대학을 졸업한 유위, 유익삼, 제운, 범포강, 유진동 등의 장교들을 이끄는 봉천군벌 3대 파벌의 우두머리로까지 성장했다. 육대파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양위팅의 사관파와 대립하며 서로를 매우 싫어했다.

2.5. 반봉사건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궈쑹링은 3군단 부군장에 임명되었는데 3군단은 강등성, 한린춘이 지휘하는 1군단과 묶어 1,3연군이라 불리며 동북군의 주력부대였다. 1,3연군을 지휘하기 위해 연합사령부가 설치되고 위익삼이 총참모장이 되었는데 실세는 궈쑹링이었다. 궈쑹링은 1,3연군을 지휘하여 크게 이겼으나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었다.

11월 24일 취임한 임시집정 돤치루이는 자파의 세력확대를 위해 루융샹을 직예독판에 임명했는데 이 지역을 탐낸 장쭤린은 톈진회의를 통해 장강의 안휘군벌 기반을 회복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돤치루이가 수락하면서 직예독판은 리징린으로 교체되고 장쭝창, 루융샹의 연합군이 제노전쟁을 통해 강소독군 치셰위안을 축출하고 강소, 안휘를 점령하여 루융샹이 강소독판, 왕읍당이 안휘독판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강절전쟁으로 세력이 다 무너진 루융샹과 왕읍당을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8월에 물러나게 되었다.

장쭤린은 궈쑹링을 안휘독판, 장덩쉬안을 강소독판에 임명하려 했으나 양위팅이 강소독판 자리를 요구하자 양위팅에게 강소독판 자리를 주고 장덩쉬안을 안휘독판으로 이동시켰다. 이미 심복인 팽진국을 안휘군 참모장으로 임명하면서 취임준비까지 하고 있었던 궈쑹링은 이에 대단히 실망했다. 장쉐량은 궈쑹링에게 때가 되면 흑룡강이든 길림이든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달랬지만 손봉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장쭤린과 궈쑹링의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다.

일찍이 궈쑹링은 장쭤린의 관내 진출에 대해 반대했다.

"우리들이 있는 이 동북지역은 드넓은 땅이 있어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인구는 3천만명이 넘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지하게 많습니다. 이번 관내 진격은 차오쿤우페이푸가 이미 참패하여 지난날의 치욕을 설욕하였는데 다시 거병하여 남하하면 이긴다 해도 뭇사람의 비난이 되고 진다면 장군님의 명성만 더럽힐 것입니다. 관외에 있으면서 변화를 엿보는 것만 못합니다. 실력을 더 기르고 나서 다시 통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궈쑹링의 의견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으나 야심가 양위팅은 비옥한 강남을 정벌하여 중국 통일을 도모할 것을 주장하였고 장쭤린은 이를 솔깃하게 여겨 장강으로 진군하였으나 쑨촨팡의 오성연합군 때문에 곧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장쭤린은 수습을 위해 궈쑹링을 보냈으나 1925년 10월 일본 방문에서 장쭤린이 일본과 매국적 밀약을 맺었다고 확신한 궈쑹링은 한푸쥐를 통해 펑위샹과 합작하여 장쭤린을 뒤엎을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1925년 11월 23일, 궈쑹링은 도리어 장쭤린에게 맞서는 반란을 일으켰다. 자세한 것은 반봉사건 참조.

2.6. 죽음

12월 24일, 거류하에서 패한 궈쑹링은 궁지에 몰렸다. 오전에 궈쑹링은 비서처장 뇨한상, 정무처장 임장민, 부인 한숙수와 200명의 경호부대를 이끌고 탈출하였다. 한숙수는 궈쑹링에게 말을 타고 먼저 달아나라고 했지만 궈쑹링은 아내를 버리고 먼저 달아날 수 없다고 거절했고 뇨한상 등은 말을 타지 못해 모두 같이 달아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 산해관으로 달아났으나 봉천군 기병이 막고 있어 영구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들의 뒤를 목춘 사단 예하 서영의 기병 1여단과 왕영청의 기병 7여단이 추격했다.

그러던 중 7여단 예하 곽보산의 25단이 소소가둔으로 길을 잘못 들었다가 궈쑹링의 경호부대와 조우했다. 하지만 중화기가 없던 궈쑹링의 경호부대는 25단이 박격포로 공격하자 대부분 투항했다. 임장민은 전사하고 뇨한상은 달아났다. 25단 기병대는 궈쑹링이 타다가 버린 두 마리 노새가 끄는 마차에서 상장 계급장이 달린 군복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궈쑹링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머지 않아 시골 아낙네가 자신의 집에 있는 무 저장 토굴에 남녀 두사람이 숨어 있다는 제보를 하였다. 7여단장 왕영청이 직접 병사들을 데리고 토굴을 수색하자 궈쑹링은 어쩔 수 없이 이들에게 투항했다. 왕영청은 궈쑹링에게 경례하는 등 그를 공손히 예우하며 노달방에 구금했다. 잠시 후 사단장 목춘이 도착하여 궈쑹링을 체포했음을 장쭤린에게 보고했다. 궈쑹링을 잡았다는 말을 들은 장쭤린은 살려둘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잠시 후에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한시간 뒤 다시 장쭤린에게서 전화가 걸렸다.

장쭤린:"목춘이냐? 궈쑹링을 죽였느냐, 안 죽였느냐?"

목춘:"안 죽였습니다. 상장군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쭤린:"죽이지 않았다면 죽일 필요 없다. 그놈 발목을 잘라놓고 있거라. 내일 내가 사람을 보내마. 너희들에게 상으로 20만원을 보내준다. 사람을 보내겠다."

목춘은 궈쑹링의 제자인 기병 14사단 참모 겸 작전과장 방서계를 보내 궈쑹링과 얘기를 해보게 했다. 방서계는 궈쑹링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목춘이 말했다. "너는 사제지간이니 위병들을 데리고 가서 책임지고 구두 진술을 한번 받아 보아라."

그래서 내가 궈쑹링을 찾아가 이번의 거병 동기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궈쑹링은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인이야 많지. 주원인은 양위팅 한 사람 때문이지. 나는 장씨 부자에 대하여는 악감정은 없어. 지난해 직봉전쟁 승리 후 내가 상장군에게 여러 번 건의했지. 우리는 결코 입관하여 지지 기반 싸움 따위 해서는 안된다고 말이야. 동삼성은 지하자원이나 지상자원이 풍부하여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아.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이토 히로부미의 대륙정책을 계승하여 그 창끝을 동삼성에 겨누고 있단 말이야. 조선과 다롄, 뤼순 등은 동북 침략의 근거지이지. 우리는 모든 역량을 산해관을 넘는 진관 정책에 쏟고 있는데 일본이 일단 난을 일으키면 동북 삼성은 우리 것이 아니야! 그러면 우리는 그때 진퇴유곡의 국면에 빠지게 되지. 당시 상장군도 내 말에 꽤 수긍하는 눈치였어. 이틀 후 내가 또다시 상장군을 보러 갔을 때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양 총참의는 자네 말에 동의하지 않네. 그의 견해가 자네보다는 높지!' 이러질 않겠어. 우리가 관내의 지지기반을 얻으려고 싸워 보았자 다른 사람이 좋을 건 없고 우리가 보낸 4명의 독판과 1명의 도통만 신났을 뿐이야."

궈쑹링은 계속 이야기했다.

"이번에 입관하여 싸운 것은 모두 양위팅이 주모한 거야. 양위팅은 동삼성 공병창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10여 년간 한번도 정산을 하지 않았지. 자기는 무기를 내놓지 않고 전부 외국에서 많은 총과 대포를 사왔는데 한번 움직일 때마다 몇백만원이 왔다 갔다 했지. 그중 3할이 양위팅의 개인 호주머니에 들어갔네. 이번엔 그가 강소 독판으로 갔는데 작은 장군이 먼저 나하고 상의 후 나를 가라고 했는데 내가 가지 않고 양위팅이 갔지. 1개월이 안 되어 3개 사단을 보냈는데 쫓겨 왔고 장덩쉬안도 안휘 독판으로 갔지만 마찬가지로 궁지에 빠지자 도망을 나왔네. 리징린, 장쭝창도 직예 독판, 산동 독판을 맡았지만 탐관오리가 되어 백성들 고혈만 짜 관내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 두통거리였지. 누가 이익이고 누가 손해인가? 내가 이번에 일으킨 거사의 주목적은 상장군 주변의 썩은 놈들을 청소하자는 것이지, 장씨 부자를 어쩌자는 이야기는 아니네. 장씨 부자는 여전히 존경하고 있다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

궈쑹링은 일본의 유혹을 물리친 이야기를 하였다.

"톈진에서 일본 대사가 나를 보러 왔지. 내가 봉천으로 진격하는 데 도와주겠다고 말이야. 조건은 연남철로에 다시 몇개의 조계지를 만들고 길회로의 노선권을 달라는 거였는데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았네."

12월 25일 아침 8시, 장쭤린의 부관 고금산 상교가 5대의 트럭에 경호원들을 태우고 궈쑹링 부부가 감금된 노달방에 도착했다. 이때 장쭤린의 마음이 바뀌어 다시 전보를 보내 궈쑹링을 살려둘 필요가 없다고 지시했다. 이에 목춘과 고금산은 궈쑹링을 총살시키로 결정했다. 고금산이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듣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자 궈쑹링과 한숙수는 4가지 반찬을 차려놓고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궈쑹링은 자동차 소리를 듣고 심양에서 사람이 온 것을 알아 밥을 반만 먹고 남긴 상태였다. 고금산이 물었다.

고금산:"군단장님 이번 반봉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궈쑹링:"소수의 독군들이 군사를 몰아 산해관을 넘어 싸우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이것은 동북 인민들을 곤궁에 빠지게 하고 동북 인민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다. 동북 삼성은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다. 만일 입관하여 전쟁을 하지 아니하고 건설에 힘쓴다면 충분히 나라를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상장군은 건설에 힘쓰지 않고 병력을 함부로 동원하여 전쟁을 일삼았다. 동북 인민들의 고혈을 짜 입관하여 전쟁을 벌여 지지기반 쟁탈전만 하려 했다. 또 소수인의 이익만을 위하여 매년 군사를 동원하고 있다. 나는 일찍이 이것에 반대했지만 상장군은 나에게 오히려 욕을 해댔다. 그래서 나는 거병 후 동북으로 회군하여 상장군의 하야를 요구하고 다시는 입관하지 않고 동북 건설에만 주력하려 했다."

고금산은 알겠으니 심양으로 갈 준비를 하라고 했고 궈쑹링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지필묵을 청해 장쉐량에게 편지를 썼다.

한경 아우님.

우리 부부는 속히 죽기를 원하니 다음 사항에 대하여 선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이번 거사는 국가와 인민을 위하여 이 형이 모든 걸 주창했으며 부하들은 죄가 없습니다.

둘째, 형의 동산과 부동산은 노목정, 심진영, 장진로 등 3명의 군수 담당관에게 요청하여 채무를 제외한 전부를 중학교에 기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셋째,

세번째 요구를 쓰려는 순간 고금산이 들어와 더 이상 쓰지 못하게 하였고 소조린이 궈쑹링의 편지를 목춘에게 전달했고 목춘이 다시 이걸 장쉐량에게 전달했다. 궈쑹링 부부는 25일 오전 10시, 요하 강변으로 끌려갔다. 궈쑹링은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나는 대의를 부르짖고 일어섰으나 힘에 부쳐 죽음으로 이별하게 되는구나."

한숙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편은 나라를 위하여 죽고 나는 그 남편을 위해서 죽는다.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여한이 없다."

그리고 모두 총살되었는데 궈쑹링은 42세였고 한숙수는 34세였다. 고금산은 이들의 시체를 차에 태워 심양으로 옮겼고 사흘동안 냇가에 던져 시민들로 하여금 구경하게 한 후 매장했다.

한편 장쉐량은 흥륭점 사령부에서 궈쑹링 부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궈쑹링을 어떻게든 살려 외유를 보내기 위해 비서장 유명구에게 전보를 쳐서 궈쑹링 부부를 흥륭점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했으나 전보를 보내기도 전에 궈쑹링 부부가 총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했다. 이후 총본부는 동북군 각 부대에 궈쑹링 부부 시체의 사진과 문서[5]를 보냈다.

3. 여담

술도 담배도 하지 않고 도박이나 유흥가 출입도 일절 하지 않았다. 선물을 주지도 받지도 않았으며 부대 검열을 위해 부대를 방문할 때 부대에서 자신을 영접하는 것도 금지했다. 심지어 말하거나 웃는 것도 극단적으로 자제하고 또 신체가 장대하여 귀밑털이 무성하였기 때문에 마치 서양인처럼 보여 사람들을 그를 기괴하게 여기고 '곽귀자'라고 부르곤 했다.

동료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곤 했는데 친목도모가 아니라 불러서 욕하려고(...) 초대했다. 초대해서 밥을 차려준 다음에 마음에 안드는 점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질책하는 통에 궈쑹링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두통을 호소하며 밥 먹은 것도 소화가 안된다고 불평하곤 했다고 한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펑위샹은 태산에 궈쑹링 사당을 세워 궈쑹링의 항일정신을 숭모했다.

도올 김용옥차이나는 도올에서 무척이나 숭상하는(...) 사람이다.

4. 참고문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郭松齡의 '反奉事件', 송한용, 역사학연구 19권, 호남사학회.

5. 관련문서


  1. [1] 현 심양시 동릉구 심정자향 조차포촌.
  2. [2] 미성년자가 머슴을 할 경우, 어른의 반 밖에 일을 하지 못한다 하여 반머슴이라 불렀다 한다.
  3. [3] 소대장.
  4. [4] 이떄 그를 따라서 봉천군벌에 합류한 사람이 바로 성스차이다.
  5. [5] 즉시 불태울 것. 이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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