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폰 클루게

독일 국방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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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Günther Adolf Ferdinand “Hans” von Kluge
(귄터 아돌프 페르디난트 "한스" 폰 클루게)

출생

1882년 10월 30일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포젠

사망

1944년 8월 19일 (향년 61세) /
프랑스 베르됭

복무

독일 제국군(1899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1933년 ~ 1944년)

최종 계급

육군 원수(Generalfeldmarschall)

주요 참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키예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주요 서훈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 1942년 동계 전투 직후의 컬러 사진.[1]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5. 독소전쟁 중기
2.5.1. 르제프 공방전
2.5.2. 자이들리츠 작전
2.5.5. 성채 작전 관련 회의
2.5.6. 쿠르스크-오렐 전투,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
2.6.2. 갑작스러운 해임과 최후
3. 총통에게 보낸 편지
4. 평가
5. 주요 보직 내역
6. 진급 내역
7. 주요 서훈 내역

1. 개요

"나의 후임자가 될 사람은 클루게 원수밖에 없다!"

서부전선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2]

"구데리안이 내 정신적 스승이라면 클루게는 나의 동료로 삼고싶다."

에르빈 롬멜[3]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육군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전간기부터 그의 휘하에서 근무했던 장교에 따르면 클루게는 부하들과 사적인 대화를 거의 하지 않을 만큼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에 여러 모로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이긴 하지만, 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 정열적이고 특히 전술적 임기응변 능력이 탁월한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 약식 원수 지휘봉을 들고 있는 클루게 원수의 모습. 상당수의 클루게 사진에서 원수 지휘봉을 볼 수 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당시 독일 프로이센에 속하던 포젠(Posen, 지금은 폴란드의 포츠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막스 클루게는 프로이센 군의 소장이었는데, 1차 대전 직전인 1913년 귀족이 되어서 (von)자를 성에 붙였고 아들 귄터 클루게도 마찬가지로 성 앞에 von을 붙이기 시작했다. 1차 대전 이후 제정이 붕괴하자 귀족이 되어 von자를 붙일 수 있는 길은 사라졌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같은 경우는 처가에서 따왔다고는 하나, 스스로 "폰"자를 참칭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경멸스럽게 볼 정도였으니 클루게 집안은 운이 좋은 셈.

클루게도 아버지의 길을 따라 군인으로 길을 가기 시작했고, 1899년부터 저지작센 포병연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1901년 소위로 정식 임관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영리한 한스(Kluger Hans)"라는 말의 이름을 따서 친구들에게 "영리한 한스"(kluge는 독일어로 영리하다는 뜻이다.)라고 불렸다. 이러한 별칭을 마음에 들어하여 후에 자기의 이름에 공식적으로 "한스"를 추가하였다. 당대에는 귄터 폰 클루게보다도 한스 폰 클루게로 자주 불렸고, 그의 아들이 귄터 폰 클루게 중령으로 지칭되는 경우가 많았다.

1911년 참모학교를 졸업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군단 참모장교로 근무하였고, 베르됭 전투에 참전하여 심하게 부상당하기도 했다.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을 정도로 군에서 재능을 인정받으며 대위로 종전을 맞이한다.

2.2. 전간기

독일이 패전하고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군이 10만으로 제한되었음에도 우수한 참모장교였기 때문에 군에 남을 수 있었다. 이후 원래 병과였던 포병뿐만 아니라 보병, 기병 부대의 참모장교를 역임하면서 계속 승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직전인 1933년 2월 소장에 올랐다. 이후 참모가 아니라 지휘관이 되어 사단장, 군단장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8년에는 포병대장으로 4군 사령관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비교적 긴 시간 동안 4군을 지휘했다.

클루게는 많은 프로이센 출신 장교들처럼 히틀러와 나치당의 촌스러움을 싫어했고, 유대인 박해에 충격을 받기도 했으나 히틀러의 군비 확장은 적극 지지하였다.

2.3. 폴란드 전역, 프랑스 전역

▲ 1939년 기사 철십자 훈장 기념 촬영 사진. 수훈과 동시에 원수로 진급한다

1939년 9월 폴란드 전역이 터지자 클루게는 4군을 이끌고 눈부신 전략가의 재능를 보여주었다. 그의 4군은 순식간에 그단스크를 점령하고[4] 비스와 강 연안에 도달하였다. 그는 그의 부대를 따라오는 슈츠슈타펠이 벌이는 학살극을 목격하고 충격을 표시하기도 했으나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않았다. 폴란드의 전공으로 그는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성공적으로 폴란드를 점령한 후 클루게는 히틀러가 서부전선에서 영국군, 프랑스군과 전쟁을 벌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하였으나 히틀러의 결심히 워낙 확고했기 때문에 프랑스 침공은 1940년 5월에 개시되어 결과적으로 전사 상 가장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된다. 클루게는 프랑스 침공에서도 과감하게 휘하의 4군을 전진시켰고, 스스로를 미셸 네 원수라고 지칭할 만큼 자비 없이 밀어붙였는데 부하들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상당히 엄격했다고 한다. 쾌속 진격할 때에도 진두 지휘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고. 귄터 블루멘트리트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클루게는 에르빈 롬멜과 비슷하게 자신감과 야망이 넘치는 인물이긴 하지만 허영심은 없었는데 탁월한 웅변으로 휘하의 부하들을 장악하는 데 뛰어났다고 한다.

2.4. 독소전쟁 초기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귄터 폰 클루게가 지휘하는 4군은 페도르 폰 보크 휘하의 중부집단군에 소속되어 소련 침공을 시작했다. 침공은 초기에 순조로웠으나 10월 말 가을이 되면서부터 장마도로가 진흙탕이 되면서 늦어지기 시작했다. 11월이 되자 혹한이 닥치기 시작했고, 더구나 소련군의 저항도 거세져서 진격은 상당히 늦어졌다.

클루게는 편제상 제2기갑군을 휘하에 두고 있었는데, 제2기갑군의 지휘관인 하인츠 구데리안과 의견 충돌을 자주 빚었고, 구데리안을 군사 재판에 회부하려 했지만 서로 오해를 풀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패배에 직면한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클루게와 구데리안은 전화로 크게 싸웠다고 한다. 페도르 폰 보크와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의 묵인 하에 구데리안이 내린 후퇴 결정, 즉 암묵적 명령 불복종을 히틀러에게 직접 알린 자가 클루게라고 구데리안은 믿고 있었다.

다만 클루게와 구데리안의 다툼에 관한 내용들은 전부 구데리안의 회고록에 기술된 내용들이기에,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뿐임을 감안해야 한다. 구데리안은 이때 클루게에게 이런 식으로 대우받으며 지휘를 계속할 수 없으니 2기갑군의 지휘권을 거두어 달라고 중부집단군 참모장에게 요청했고, 그 결심을 즉시 전보로 알렸는데 클루게가 이미 육군 총사령부에 이를 통보하여 히틀러가 클루게의 요청을 수락하여 자신을 예비역 명단에 편입시켰다고 기록했다.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 중부집단군 사령관 보크가 해임되면서 후임으로 클루게는 중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된다. 모스크바 전투 이후 독일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전면에서 퇴각하여 르제프 돌출부를 형성하게 된다.

2.5. 독소전쟁 중기

"중부집단군을 궤멸시키지 못하면 러시아 영토에서 독일인들을 몰아낼 수 없다."

- 게오르기 주코프

2.5.1. 르제프 공방전

동부 전선에서 모스크바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르제프 돌출부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도, 소련의 대원수 이오시프 스탈린도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지켜 내야 할 동부전선 최고의 요충지'라 언급할 최대의 승부처 중 하나였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클루게와 출신이 전혀 다른 (프로이센 장교를 대대로 배출한 명문가 출신 클루게와 상반되는, 군사적 배경이 전혀 없는 음악 교사의 아들인) 르제프에 주둔한 9군의 신임 사령관 발터 모델성격적으로 100% 일치하는 면모가 있었다는 것. 클루게는 처음 만나는 상대를 일부러 밟아 버리는 성향이 있는데 이때 주눅이 들면 그 사람은 평생 클루게한테 무시당하고,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클루게는 상대의 나이나 계급이 한참 아래더라도 존중하고 존경했다고 한다. 그런데 모델은 이러한 면에서 완전히 똑같았다.[5]

▲ 왼쪽부터 6항공군 사령관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상급대장,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 9군 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대장.

모델이 발터 폰 브라우히치, 하인츠 구데리안 계열의 인맥이었음에도 이 두 사람이 1941년 12월에 동시에 해임당하고 구데리안과 철천지 원수인 클루게 휘하에서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르제프 공방전에서 게오르기 주코프이반 코네프를 줄기차게 패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기질적인 측면에서 완벽하게 일치했기 때문.

게다가 모스크바 전투 패배 이후 후퇴를 결정한 원수, 상급대장, 대장급 고위 장성들을 대거 해임시킨 히틀러는 대대 병력 배치 하나에도 사사건건 개입하여 그놈의 총통 직할 명령으로 '후방 진지 구축 금지'를 내렸지만, 정작 르제프 돌출부에 있던 9군은 종심 방어를 기본으로 하여 신나게 후방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는 모델의 기본 방어 전략이기도 했고 특히 모델 자신이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되고, 정치인 또한 군사에 개입해선 안 된다.'는 배짱의 소유자여서 때로는 히틀러의 면전에서 대놓고 총통 명령을 반대한 것으로 유명했다. 종전 후 한참이 흘러 기밀 해제된 독일군 군사 문서를 보면 9군 보고서는 사실대로 기록하면서도 히틀러의 명령을 어긴 것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상당히 애썼고 중부집단군 사령부에서는 이러한 모순이 문언 상에서 눈에 띄어도 아무런 이의 없이 결재해 주었다고 한다. 즉, 클루게와 직속 참모들은 전략적 판단에 의거하여 9군의 총통 명령 위반을 묵인해 주었다는 것. 만일 클루게의 비호가 없이 있는 사실 그대로 총통에게 알려졌다면 아무리 모델이 '방어의 사자'로 명성을 날렸다 해도 히틀러에 의해 해임당했을 것이다.

주코프가 중부집단군에 대해서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고 공공연하게 이를 의식하는 발언을 하며 중부집단군을 타격하는 데에 집중했다가 르제프 고기분쇄기(Rzhev 'Meatgrinder')에 끊임없이 갈려 버리게 된 것은 집단군 사령관으로서 클루게의 전략적 판단과 이를 기반으로 하여 군 사령관 모델이 지휘 능력을 최상으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임에 분명하다.

몇몇 전사학자들은 당시 클루게와 작전참모인 헤닝 폰 트레슈코프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집중하느라 중부집단군의 전략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아예 발터 모델에게 행동의 자유를 부여한(떠맡긴)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하나, 일단 자이들리츠 작전만 해도 클루게의 지휘 역량을 알 수 있다.

2.5.2. 자이들리츠 작전

9군 사령관 취임 4개월 만인 1942년 5월 23일, 발터 모델이 피젤러 슈토르히에 탑승하여 이륙 직후 소련군 파르티잔이 발포한 기관총탄에 상반신이 관통되어 좌측 가 손상되는 중상을 입고 본국으로 후송된다. 이때 클루게는 9군 사령관 대리인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 기갑대장과 긴밀한 협력 하에 7월 2일의 자이들리츠 작전(Operation Seydlitz)을 예정대로 강행하였고, 소련군 39군을 선제 공격으로 포위 섬멸하여 르제프 남부의 간격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처음엔 3면이 포위된 르제프 돌출부가 공세적 방어의 대성공으로 간격을 차례차례 닫아 버리면서 방어자에게 더더욱 유리하도록 완만하게 변했던 것. 이러한 성공이 없었다면 그해 겨울, 주코프가 압도적인 물량을 퍼부었던 화성 작전에서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처럼 9군을 포위하는 것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이 작전이 발터 모델의 지휘 하에 실행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모델이 직접 편성하고 훈련시킨 '모델 특수 기병여단'이 습지에서 기동력을 상실한 소련군을 압도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엄연히 자이들리츠 작전은 모델이 드레스덴의 자택에서 요양(8월 7일에 복귀) 중에 클루게와 비팅호프의 지휘로 이룩한 성과이다. 르제프 전역에서의 소련군 연결을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기존의 하노버 작전이 높은 전과를 올리자 이를 자이들리츠 작전으로 확대, 소련군 39군이 주축이 된 돌출부를 아예 잘라버리는 성과를 올렸다는 점에서 클루게는 집단군 사령관에 걸맞는 지휘력과 결단력을 과시했다.

▲ 1942년 7월, 자이들리츠 작전 당시 사령관 부재 중인 르제프 전역의 9군 예하 기갑 부대와 함께한 클루게 원수의 사진 모음

2.5.3. 화성 작전

1942년 11월 25일, 소련군이 감행한 화성 작전(Operation Mars)은 정보 부서마다 엇갈린 분석이 번복되는 와중에도 9군의 모델은 감청과 탈영병의 진술을 기반으로 소련군의 공세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고, 클루게 또한 이에 맞추어 청색 작전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인해 독일군 전력이 남부집단군에 집중된 상황에서도 중부집단군이 그나마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9군에 집중해 주었다.

당시 화성 작전에 참전한 소련군 생존자와 르제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주코프는 스탈린그라드의 6군을 포위하는 것만큼이나 장대한 포위망을 성공시켜 1942년 한해 동안 수도 없이 소련군을 갈아 버렸던 르제프의 9군을 섬멸하려 했다. 그러나 모델은 이미 참호를 2줄로 파 놓았고 특히 서전을 장식한 소련군의 대규모 포병 사격이 오히려 공격자인 소련군의 진격에 심각한 장애물이 될 만큼 지형을 파헤쳐 놓고 말았다. 여기에 전차 부대 투입마저 보병과 뒤엉키면서 9군은 소련군에 물량과 인원 면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도 클루게가 보내 준 병력을 예비대로 적절한 순간에 투입하여 소련군의 공세를 모조리 막아 내었다.

2014년 3월 1일 미국에서 발매된 <Fighting Patton: George S. Patton Jr. Through the Eyes of His Enemies>에서는 이를 제2차 세계 대전 최대 규모의 방어전 승리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집단군 사령관과 휘하 군 사령관이 기질적으로 맞아떨어지고 서로의 군사적 판단을 존중하면 어떤 최상의 결과가 나오는지 알 수 있는 예.

2.5.4. 들소 작전

중부집단군은 르제프 돌출부에서 쉴 새 없이 격전을 치러야 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6군이 완전히 소멸되면서 더 이상의 인적, 물적 손실을 보충 받을 수 없었고 도리어 남부의 A집단군과 B집단군, 돈 집단군이 하리코프까지 퇴각하면서 소련군은 남부집단군의 점령지를 재점거, 르제프의 남부 방면으로 9군을 포위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까지 갖게 되었다. 이에 대비하여 클루게는 1943년 2월, 르제프 돌출부를 포기하고 중부 전선을 축소하여 발터 모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9군과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4군이 연계하여 보다 치밀한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결정한다.

특히 발터 모델 휘하에서 오랜 시간 참모로 근무했고 이후에도 바그라티온 작전을 거쳐 1945년 2월까지 모델과 함께했던 당시 9군 참모장 한스 크렙스중장으로 승진, 클루게 직속인 중부집단군 참모장으로 영전하게 되면서 클루게는 9군의 후퇴를 히틀러에게 허락받았고 모델은 크렙스와 함께 입안해 두었던 르제프 퇴각 작전 '들소 작전(Operation Büffel)'을 실행한다. 들소 작전은 종전 직후 전범 재판을 받던 국방군 장성들에게 전설처럼 회자되었고 지금까지도 독일 연방군 장교들에게 강의될 만큼 모든 것이 예정 시간표대로 진행된 퇴각 작전의 클래식으로 극찬 받고 있다. 9군은 자신들에게 협조하여 소련군에게 처형당할 운명이 확정된 르제프 주민들과 야전 병원 환자들을 가장 먼저 탈출시키며 장비 하나 두고 오지 않고 모두 챙겨서 성공리에 4군과 합류하여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퇴각하였는데 이반 코네프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을 질책받고 일시적으로 해임당했다.

▲ 1943년 3월 13일 스몰렌스크에서 히틀러의 사열을 받고 있는 중부집단군의 장성들. 히틀러의 왼편에 클루게가 원수 지휘봉을 들고 서 있다. 왼쪽부터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상급대장, 발터 모델 상급대장,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상급대장, 발터 바이스 보병대장, 한스 크렙스 중장. 이때 클루게는 중부집단군을 방문한 히틀러의 암살 계획을 제시받았으나 거절한다.

2.5.5. 성채 작전 관련 회의

하인츠 구데리안이 기갑 부대 감찰관으로 재등용된 후 히틀러는 성채 작전을 기획하는데 여기서 상당한 모순과 괴리가 발생한다. 쿠르트 차이츨러는 히틀러에게 찬성하며 구체적인 계획안을 내놓았고,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쿠르스크 돌출부를 잘라내야 한다면 과감하게 4월 늦어도 5월 안에 해야만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대로 구데리안과 알베르트 슈페어는 '더 이상 동부전선에서의 공세는 불가능하다'며 성채 작전에 끝까지 반대하였다.

발터 모델은 르제프를 포기해야 할 만큼 9군은 지쳐 있는 상황이라며 차이츨러에게 '성채 작전은 잃는 것만 클 뿐 성공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하였고 오랜만에 현역에 복귀한 구데리안과 의견을 같이했다. 모델은 이미 4월 말에 방대한 양의 항공 사진을 제시하며 쿠르스크에는 이미 소련군의 방어가 튼튼히 형성되어 있음을 증명했고, '소련군은 아군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으니 이 작전은 아예 포기해 버리거나 성공하려면 새로운 전술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차이츨러의 제안에 반대했다. 구데리안은 모델이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고 기록했지만, 정작 모델의 직속 상관인 클루게는 이와 대조적으로 차이츨러의 제안에 분명하게 찬성한다. [6]

히틀러는 이러한 모델의 정찰 자료를 보고 결심이 흔들렸고 구데리안에게 이러한 갈등을 솔직하게 표명했지만, 신형 전차가 도입되는 6월 이후로 성채 작전을 연기하자는 차이츨러와 빌헬름 카이텔의 제안을 수긍한다.

그러나, 최근 기밀 해제된 중부집단군 군사 자료와 중부집단군 참모 장교들의 기록을 보면 모델뿐 아니라 정작 구데리안에 반대하여 성채 작전을 적극 찬성했던 클루게조차도 공세의 성공 가능성이 낮음을 분명히 인식하고(휘하의 2기갑군 사령관 루돌프 슈미트[7], 9군 사령관 발터 모델도 이에 동의) 모델이 제안한 오렐 돌출부 후방의 방어 진지 구축을 히틀러가 명시적으로 금지시켰음에도 허락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모델은 '성채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오렐 방면에 위치한 소련군의 위협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도 낮은 성채 작전을 아예 완전히 포기하여 오렐에 집중된 중부집단군을 동부전선의 전략적 예비대로 가용할 것'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6월 중순이 되어 성채 작전을 포기할 가능성이 제로가 되자 9군을 완전히 공세 작전 위주로 훈련하여 재편성하였다.

결국 클루게는 총통이 주관한 회의에서는 성채 작전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중부집단군 사령부에서는 성채 작전의 불가능을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예비 전투지구(Reserve Battle Position)를 최대한 확보하려 노력했다는 것인데 아무리 구데리안에 대한 사적 원한이 있다고 해도 상당히 모순된 모습이다. 블루멘트리트 장군도 클루게에 대하여 '두 얼굴을 가졌다'고 평가할 정도이니. 다만 이는 클루게가 히틀러 앞에서는 소신대로 발언을 하지 못했던 만큼, 히틀러의 간섭이 없는 중부집단군 사령부에서는 예하 지휘관들과 충분히 논의를 하고 자신의 뜻대로 집단군 사령관의 권한을 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클루게가 하겐 라인의 구축을 허용한 덕분에 9군과 제2기갑군을 비롯한 중부집단군은 전열을 유지하여 퇴각할 수 있었고, 그만큼 피해를 최소화하며 역으로 소련군에 막대한 손실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2.5.6. 쿠르스크-오렐 전투,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

7월 5일부터 12일까지의 쿠르스크 작전 북방 전투는 "신형 전차가 차이츨러 육군참모총장이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낼 수 없을 것."이라던 구데리안의 예측이 무섭도록 들어맞았는데 신형 전차 중 판터는 전부 남부집단군으로 보급되었고, 중부집단군에는 포르셰 티거[8]가 배치되었다. 하지만 전방 기관총조차도 장착되지 않았던 탓에 이런 중구축전차는 소련군의 육탄 공세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구데리안이 남부집단군 장교들에게 전해 준 내용을 인용하면 "소련군 보병 진지를 공격하는데 대포로 메추리를 잡는 격이 되어 헬무트 바이틀링[9] 장군의 용맹스러운 기갑 돌파가 후속 성공을 가져오지 못하며 돈좌되었다."고 한다.[10]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 발발 1주일 만에 쿠투조프 작전으로 오렐을 공격하면서 9군의 공세는 포니리에서 진격을 멈추었는데, 이때 클루게는 가히 번개 같은 속도로 휘하의 페르디난트 부대를 비롯한 예비대를 전부 오렐에 투입, 9군이 오렐로 회군할 때까지의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나아가 9군 사령관 모델에게 2기갑군의 지휘권을 겸임시켰는데 이는 오렐 돌출부의 통합된 지휘를 가능케 했다. 폰 그뢰벤 장군은 이러한 클루게의 결단을 신의 한수로 높이 평가하였다.

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38일 동안, 독일군 49만 2천 명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 128만 2천 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6만 804명, 전차 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사상자 42만 9,890명, 전차 손실 2,586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특히 소련군 포로 1만 1,732명까지 데리고 하겐 라인으로 무사히 퇴각한다.

결과적으로 중부집단군은 5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19개 사단을 가용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렇듯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함과 과감함을 겸비한 결단을 내렸던 클루게는 10월 28일, 민스크-스몰렌스크 방면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중상을 입고 오랜 시간 요양하게 된다. 중부집단군 사령관은 에른스트 부슈 원수가 임명되는데 당시의 부슈 원수는 적극성을 완전히 상실한 모습으로 일관하였기에 이러한 인사 조치는 중부집단군 최대의 불행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2.6. 서부전선 말기

▲ 1944년 서부전선 총사령관 시절

2.6.1.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여파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 서부전선 총사령관(OB West)이던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에게 정전을 건의했다가 격노를 사서 7월 2일에 해임당하였고 후임으로 클루게가 임명되었다.

▲ 1944년 6월 프랑스에서 서부전선 사령부의 참모 장교들과 함께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서부전선 사령부에서 카를 하인리히 폰 슈퇼프나겔은 히틀러 암살이 성공한 것으로 알고 파리슈츠슈타펠 대원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클루게는 암살이 실패했음을 미리 보고받았기에 암살자 그룹이 요청한 모든 지원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7월 중순에 에르빈 롬멜이 부상을 당하면서 B집단군 사령관까지 겸임하게 된 클루게는 자신의 군대가 팔레즈 포위망에 갇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8월 중순, 클루게는 예정에도 없이 사령부를 떠나 파리로 향하였는데 이때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되었음에도 단 한 대의 연합군 전투기도 하늘에서 관측되지 않았다고 한다. 독일 국방군 병원에 도착한 클루게는 30분 동안 병원 안에 있다가 돌아왔고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사위[11]를 만난 것이라 설명했다. 사령부로 돌아오는 길에도 연합군 전투기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2.6.2. 갑작스러운 해임과 최후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8월 15일, 클루게는 모르탕-팔레즈 방면에서 24시간 동안 연락이 두절된다. 클루게는 연합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은폐와 이동을 거듭한 것이지만 이미 한번 암살로 죽을뻔한 히틀러는 클루게가 연합군과 내통해 자신을 암살하려는 것이라 확신하였다.

총통은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동부전선을 재건한 발터 모델 원수를 불러들여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한 뒤 클루게의 후임 서부전선 총사령관과 B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는 상당히 급작스럽게 진행되어 당사자인 발터 모델도 라스텐부르크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된 인사 조치였고,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모델이 직접 전화를 걸어 사령부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과 클루게의 행방을 질문했을 때야 비로소 전해 듣게 되었다고 한다.

오후에 서부전선 총사령부에 도착한 모델은 침묵 속에서 옛 상관의 귀환을 기다렸고 이른 저녁에 사령부로 돌아온 클루게는 모든 참모장교들을 물러나게 한 뒤 별실에서 두 사람만의 대화를 가졌다. 그날 밤을 지새우며 클루게는 자신의 운전병, 당번병들과 떠날 채비를 하였고 모델은 늘 하던 대로 아침 6시에 전선 시찰에 나섰다.

8월 19일 새벽, 클루게는 사령부를 떠나 독일로 향한다.

"견딜 수 없군. 내 부하들을 그런 상황에, 그런 운명에 처하게 만들어 놓고 이대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

식사도 입에 대지 않고 묵묵히 떠날 채비만 하던 클루게의 유일한 감정 표현이었다고 한다.

운전병은 클루게에게 수면을 취할 것을 권유했고, 정오 즈음에 제1차 세계대전 최후의 격전지이자 클루게 자신도 참전했던 베르됭 서부 지역을 지날 때에 클루게는 차량을 멈추게 하였다. 다들 휴식을 갖는 동안 클루게는 두 통의 편지를 썼고 그 중 하나는 친동생인 볼프강 폰 클루게 중장에게 보내달라고 운전병에게 부탁하였다.

편지를 받아든 부하가 차량으로 돌아가 출발 준비를 하는 동안 클루게는 가지고 있던 시안화 캡슐로 음독 자살한다.[12]

3. 총통에게 보낸 편지

귀하께서 이 서신을 받아 보실 때에는, 저는 이미 세상에 없을 겁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서부전선이 처해진 운명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기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그 어떤 수단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천의 전우들이 결말을 맞이했던 장소에서 저도 제 자신의 결말을 짓겠습니다. 저는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습니다. 삶은 제게 더 이상 의미가 없고, 항복하면 전범 명단에 제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롬멜과 저를 비롯한 이곳 서부전선의 모든 지휘관들은 영미 연합군의 막대한 물량 공세를 경험하였고 작금의 상황을 예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생각은 비관론이 아닌 냉철한 사실에서 기반한 것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한 모델 원수가 지금의 정세를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심으로 그가 해 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만일 그럴 수 없게 된다면, 그리고 귀하께서 기대하던 신무기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총통께서 전쟁을 끝내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독일 국민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참아왔으니, 이제는 무서운 참상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게 할 시기가 된 것입니다. 이는 제국이 볼셰비키의 발길에 짓밟히지 않을 수 있게 하는 방책이기도 합니다.

저는 귀하의 위대함을 항상 찬탄해 마지않았습니다. 국가사회주의를 향한 귀하의 강철 같은 의지 역시. 그러나 운명이 귀하의 의지와 귀하의 천재성보다 한층 더 강하다면 신의 섭리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귀하는 그동안 명예로운 싸움을 계속해 왔습니다.

역사가 이 모든 것의 증인이 되어줄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희망 없는 전쟁을 종결시키는 위대함을 발휘해 주십시오.

이제 저는 떠나겠습니다, 총통 각하. 아마도 귀하가 생각해 왔던 것보다 가까이에서 주어진 의무를 최대한 이행하였던 사람 중 하나로서.

이 편지를 읽은 히틀러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에게 건네었고 편지 내용은 요들이 전범 재판에서 증언한 것이다. 요들은 클루게의 편지 내용이 총통의 이상을 칭송하는 등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달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클루게는 스스로의 죽음으로 총통에게 종전 이후의 평화를 바라는 조언을 제시한 것이라 생각된다고 진술하였다.

4. 평가

  • 클루게는 두려움을 모르는 군인이었다. 진두에 앞장서서 돌격을 지휘한 적도 많았고 심지어 소련군 기관총 탄환이 자신의 주위에 쏟아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에 임했으며 피젤러 슈토르히에 탑승하였을 때 소련군 파르티잔에 의해 몇 차례 기체가 피탄되었음에도 평상심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는 클루게가 대단한 나폴레옹 추종자인 것에 기인하기도 했는데 클루게는 나폴레옹 관련 기록을 모조리 외우고 있었으며 프랑스와 소련에서도 나폴레옹에 관련한 역사적 명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르제프 공방전 당시 클루게의 부하였던 발터 모델은 나폴레옹 전쟁의 승자인 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 원수에 관한 논문을 전간기에 발표해서 주목을 받을 만큼 소문난 그나이제나우 추종자였다.
  • 중부집단군 사령부에서 클루게는 히틀러와 직접 통화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총통 각하. 지금의 상황이 이렇단 말입니다! 총통께서는 당신만의 몽상 세계 속에서 헤매고 계시군요!" 그야말로 쉴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쏘아붙였다고.
  • 다만, 클루게는 히틀러와 직접 대면하기만 하면 "나는 그에게 현혹되는 것 같군. 총통과의 대화가 끝나고 기억해 보면 내가 그의 의도대로 말했다는 기억 밖에 없었어."라고 고백할 만큼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클루게 한 사람만의 문제점도 아니어서 대부분의 독일 국방군 장성들이 히틀러 앞에서만은 꼬리를 내렸다. 하인츠 구데리안만 해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만슈타인은 히틀러 앞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아쉬워했을 정도이니. 알베르트 슈페어는 이러한 히틀러의 면모가 단숨에 독일 정권을 휘어잡고 간혹 천재성을 발휘하는 카리스마에 기반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 그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귄터 블루멘트리트 장군은 클루게는 히틀러에 적대적이지는 않았으나 나치당, 특히 하인리히 힘러아리안 신비주의에 반대했다고 한다. 클루게가 자결하기 얼마 전에 자신의 참모들에게 고백한 바에 따르면 '암살자 그룹'은 1943년도에 2번,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실행을 제시해 왔는데 한 번은 그의 영지, 한 번은 스몰렌스크였다고 한다. 스몰렌스크에서 클루게가 거절(히틀러를 암살하기엔 독일군에도 독일 국민에게도 너무 이른 시기라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며 트레슈코프를 만류하였고, 하인리히 힘러를 히틀러와 동시에 제거해야만 SS와 독일 국방군의 내전을 막을 수 있다고 클루게가 설득하였다고 한다- Joachim Fest, Plotting Hitler's Death)한 후 자신은 더 이상 암살자들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고. 전후 리델 하트의 기록에 따르면 클루게의 이름은 1942년에 이미 암살자들의 명단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클루게를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이들은 클루게의 능동적인 참여보다는 헤닝 폰 트레슈코프의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였다.[13]
  • 서부전선에서의 클루게는 히틀러가 의심했던 '연합군과의 항복을 협상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신병을 게슈타포에 넘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만큼 군인으로서 완고한 면모의 소유자였다. 특히 클루게는 동부전선에서부터 항상 독약을 상비하고 다녔는데 "내가 중상을 입어서 움직이지 못할 경우 소련군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귀관들이 나를 사살하라. 내게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다만 영미 연합군 측에선 1944년 8월 중순 전후에서 '독일군 측 사절과 항복에 대해 논의하려 했지만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무산됐다'는 내용이 전후 패튼과 몽고메리의 수행 장교들에 의해 공개됐는데 여기에 클루게가 어느 선까지 관여했는지, 클루게는 알지 못한 채 부하 장교들이 암약한 것인지는 확인 되지 않은 채이다. 당시 서부전선 총사령부 장교들은 영미 연합군과의 전투에 회의적인 경향이 강했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전후로 항복 혹은 항전이라는 선택지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전술한 대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자신의 후임이 될 사람은 클루게밖에 없다고 공언하였고, 소련군의 게오르기 주코프가 중부집단군을 소련의 공적 1호로 생각할 만큼 당대에는 독일 국방군 장성들 중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그저 히틀러 암살 사건에서 입장을 바꾼 기회주의적 면모만이 강조되고 있고 특히 철천지 원수인 구데리안이 회고록에서 클루게를 열심히 비난한 내용이 두드러지게 언급되고 있다. 이는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군사 문서의 손실도 상당했을 뿐 아니라 중부집단군 출신 지휘관들이 종전까지 살아남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전사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중부집단군의 전적을 다룬 회고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만슈타인 휘하의 남부집단군에 비해 이들의 전과가 과소평가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그의 명성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게 된다." 블루멘트리트는 실러의 문장을 인용하며, 클루게 또한 이에 해당한다고 평가하였다.

5. 주요 보직 내역

  • 1901.3.22 : 장교 임관
  • 1901.3.22 ~ 1912.3.22 : 46 야전포병연대 2대대 참모장교
  • 1908.10.1 ~ 1911.7 : 육군대학 파견
  • 1912.3.22 ~ 1914.8.2 : 육군 총참모부 파견
  • 1914.8.2 ~ 1916 : 21군단 참모장교
  • 1916 ~ 1917 : 남부 전선 야전군 참모 및 항공관측장교
  • 1917 ~ 1918 : 산악군단 참모장교
  • 1921.6.15 ~ 1923.4.1 : 3사단 참모장교
  • 1923.4.1 ~ 1926.8.1 : 국방부 육군 훈련감실 4과 배속
  • 1926.8.1 ~ 1929.2.1 : 3포병연대 5대대장
  • 1929.2.1 ~ 1930.3.1 : 프랑크푸르트/오더 주둔 1기병사단 참모장
  • 1930.3.1 ~ 1931.10.1 : 슈테틴 주둔 2포병연대장
  • 1934.10.1 ~ 1935.4.1 : 뮌스터 주둔 6사단장 겸 6군관구 사령관
  • 1935.4.1 ~ 1938.11.24 : 6군단장 겸 6군관구 사령관
  • 1938.11.24 ~ 1939.8.26 : 하노버 주둔 6군단장
  • 1939.8.26 ~ 1941.12.19 : 4군 사령관
  • 1941.12.19 ~ 1943.10.12 : 중부집단군 총사령관
  • 1943.10.12 ~ 1943.10.28 : 지휘관 예비 대기발령
  • 1943.10.28 ~ 1944.7.2 : 교통사고로 인한 입원가료 후 약 1주간 국방군 총사령부 배속
  • 1944.7.2 ~ 1944.8.15 : 서부 전선 총사령관 겸 D집단군 총사령관
  • 1944.7.19 ~ 1944.8.15 : B집단군 총사령관 겸임
  • 1944.8.15 : 하인리히 에버바흐 상급대장의 부대 시찰 중 적 전투기에 피격, 연락 두절
  • 1944.8.16 ~ 1944.8.19 : 지휘관 예비 대기발령

6. 진급 내역

  • 1901.3.22 : 소위(Leutnant)
  • 1910.6.16 : 중위(Oberleutnant)
  • 1914.8.2 : 대위(Hauptmann)
  • 1923.4.1 : 소령(Major)
  • 1927.7.1 : 중령(Oberstleutnant)
  • 1930.2.1 : 대령(Oberst)
  • 1933.2.1 : 소장(Generalmajor)
  • 1934.4.1 : 중장(Generalleutnant)
  • 1936.8.1 : 포병대장(General der Artillerie)
  • 1939.10.1 :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0.7.19 : 원수(Generalfeldmarschall)

7. 주요 서훈 내역

  • 시기 미상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시기 미상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시기 미상 : 1918년 제정 전상장 흑장
  • 시기 미상 : 호엔촐레른 왕가 검 기사 십자 훈장
  • 1939.9.5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9.17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9.30 : 기사 철십자 훈장(에리히 레더 원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 등과 동반하여 전군 최초 서훈)
  • 시기 미상 : 1941/1942 동부전선 동계 전역 기념장
  • 1943.1.18 :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181번째 서훈)
  • 1943.10.29 : 곡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40번째 서훈)


  1. [1] 동부전선 지휘관들의 컬러 사진들은 대부분 1942년 2월 말, 동계 전투가 마무리되면서 관련 서훈을 마치고 촬영된 기념 사진들이다. 디 도이치 보헨샤우 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
  2. [2] B집단군 사령관 에르빈 롬멜이 "총통께서 내게 명백한 권한을 주셨다."며 서부전선 총사령부 참모들에게 사사건건 개입, C-in-C를 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발언
  3. [3] 물론 클루게는 썩 유쾌해 하지 않았을것 같다. 클루게 본인은 물론 서부전선에서 롬멜과 지난 프랑스에서의 다툼에 화해하고 솔직한 의견을 주고 받았다. 다만 클루게는 롬멜이 자신감과 야망은 다 좋은데 그 망할놈의 허영심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다만 이 문장에서 공격적인 전술을 선호하는 롬멜이 공격적이면서 수비면에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공격적 수비를 잘 수행 했는지 보여 주는 문장이다
  4. [4] 어차피 그단스크는 거의 대부분이 독일인인 데다가 해당 지역에 폴란드 수비대의 숫자는 우체국에 있던 56명에 불과했다. 이 중 포로로 잡힌 이들은 나중에 처형당한다. 현장에서 살아남아 도망친 수비대원은 4명에 불과했으며, 전후까지 모두 운 좋게 살아남는다.
  5. [5] 일례로, 모델이 9군 사령관에 처음 취임했을 때 보고를 하던 20대의 젊은 장군참모가 모델에게 패악한 말로 질책당하자, 격분해서 서류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나가 버렸다. 그 장교는 자신이 군기를 어지럽히고 상관 모욕죄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암울한 심정으로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도리어 모델은 그런 짓을 저지른 젊은 참모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존중하여 사이가 좋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클루게와 모델은 서로에게 고함을 굉장히 자주 질러댄 상관과 부하였다(...)
  6. [6] 하인츠 구데리안 <한 군인의 회상>. 이후 클루게는 구데리안에게 서면으로 결투를 신청하나, 히틀러와 그의 보좌관 루돌프 슈문트가 중재했다.
  7. [7] 구데리안의 후임으로 2기갑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히틀러 암살 음모에 휘말리면서 해임된다. 오렐 전투에서 모델이 2기갑군 사령관을 겸임한 것엔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8. [8] 현대에는 페르디난트로 통칭되나, 1950~60년대의 독일어 서적에서는 포르셰 티거로 단독 표기하거나 포르셰 티거(페르디난트)로 병기되는 경우가 더욱 많았다. 원문에 저자가 구데리안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포르셰 티거로 표기한 만큼 이를 존중하기로 한다
  9. [9] 베를린 전투 당시 베를린 방어 사령관이었던 장성이다.
  10. [10]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Panzer Battles>
  11. [11] 클루게의 사위인 닥터 우도 에셰는 이때 이미 클루게가 자살을 각오하고 있는 말을 했고, 자신에게 청산가리 캡슐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12. [12] Wilhelm von Schramm, Aufstand der Generale: Der 20. Juli 1944 in Paris
  13. [13] 실제로 암살자들이 작성한 내각 명단에 전혀 음모에 참여하지 않았던 알베르트 슈페어의 이름도 있는 등,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인물들이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는 경우가 많아서 당시 독일군 지휘가 공백에 빠지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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