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중국의 역사 中國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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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
大金

1113년/1115년[1] ~ 1234년

이칭

금조(金朝)

위치

동북아시아

수도

상경 회녕부(上京會寧府, 1115~1153)
중도 대흥부(中都大興府, 1153~1214)
남경 개봉부(南京開封府, 1214~1233)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皇帝)

주요 황제

태조 완안아골타
태종 완안오걸매
세종 완안오록

언어

여진어, 중세 중국어

문자

여진 문자, 한자

종교

여진 샤머니즘[2], 대승 불교, 도교

종족

여진족, 한족

통화

교초(交鈔) 등

국성

완안(完顔)

성립 이전

생여진
요나라

멸망 이후

몽골 제국
동하, 동요, 대요수국

언어별 명칭

여진어

/amba-an antʃu-un/ (암바안 안취운)[3]

중세 중국어

大金 (다낌)

만주어

ᠠᠮᠪᠠ 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 (암바 아이신 구룬) / ᠵᡠᡧᡝᠨ ᡤᡠᡵᡠᠨ (주션 구룬)

중국어

大金 (다진) / 金朝 (진차오)

1. 개요
2. 국명에 관하여
3. 발흥
4. 정치
5. 왜 남송을 멸망시키지 못했나
6. 위기
7. 몽골 제국과의 23년 공방전
7.1. 칭기즈 칸의 침공: 1211년~1215년
7.2. 무칼리의 침공 : 1216년~1229년
7.3. 오고타이 칸의 침공 : 1229년~1232년
7.4. 개봉 포위전과 금나라의 멸망 : 1232년~1234년
7.5. 이후
8. 문화
9. 고려와의 관계
9.1. 초기
9.2. 칭신
9.3. 칭신 이후 ~ 금나라 멸망
9.4. 그 밖의 이야기
10. 역대 황제
11. 추존 황제
12.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13. 여담

1. 개요

1115년에 세워져 1234년에 멸망한 여진족이 동아시아에 세운 나라로 개조는 완안아골타. 수도는 초기에 상경 회령부였으며 후에 금나라의 4대 군주인 해릉왕이 연경으로 옮겼다.[4] 황성은 완안(完顔). 이건 한국식 독음이고, 금계종의 여진문사전에 따르면, 금대 여진어로는 온얀(/Won-{g}ian/)[5]이라고 읽었다고한다. 만주어 발음으로는 왕야(Wanggiya) 또는 왕얀(ᠸᠠᠩᡤᡳᠶᠠᠨ, Wanggiyan) 중국식 황성은 왕(王)씨이다. 원조비사몽골의 기록에서는 '주르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을 몽골어로 부른 이름이다. 금대 여진어로는 주션(/ʤu-çiɛn/)[6], n음이 탈락하면 주셔(/ʤuʃə/)로 발음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주어로도 주션(ᠵᡠᡧᡝᠨ, /ʤuʃən/).

2. 국명에 관하여

금은 중국식 국호이고, 자신들의 언어인 여진어로는 암반안취운 구룬(Amban Antʃun Gurun), 만주어로는 암바 아이신 구룬(Amba Aisin Gurun)이라고 불렀다. 모두 대금국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국호인 금(Antʃun)은 안출호수(按出虎水)에서 유래했는데 안출호(按出虎)는 금대 여진어로 금을 뜻하는 'Antʃun'을 음차한 것이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Won-{g}ian Akutta)가

"요나라는 빈철(賓鐵)로부터 국호(國號)를 정했는데, 그것의 견고함을 취한 것이다. 빈철은 견고하지만 종국엔 녹이 슬어버리니, 오로지 완안부의 색인 백색을 띄는 금만이 변치 않고 녹슬지도 않는다."

며 금(Antʃun)을 국호로 삼았다.[7][8]

다만 《흠정만주원류고》 편찬자들은 금조의 국호가 안출호수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을 안출호(Antʃun)가 금을 뜻하는 것인지 알지 못해[9] 이 주장을 억지라고 기술하면서, 금 시조 함보가 신라 땅에서 나온게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신라 왕성인 김씨를 국호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기술하기도 했다. 환빠들 취하는 소리가 들린다.[10][11]

3. 발흥

여진족은 발해 멸망 뒤로 한동안 만주 지역을 떠돌며 거란족에게 숨죽이며 지냈는데, 이 거란(요나라)이 슬슬 막장 트리를 타자 세력을 키우기 시작해 12세기 초 부족 통일을 완수한다. 이후 금태종 때 거란에게 맨날 터지던 송나라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송나라는 그간 자신을 괴롭혔던 요나라를 제거할 기회라고 생각해 기쁘게 받아들였다. 다음 목표는 뻔히 송나라라고 반대한 신하들도 있었지만 요나라를 향한 증오가 커서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개망신을 당한다

어쨌든 1125년에 금은 송과 연합해 요나라를 멸망시키는데, 문젠 이후 북송송휘종이 잔머리를 굴려서 요의 잔당들과 배신을 때리자, 빡친 금이 1년 만에 북송의 수도 개봉(현재의 카이펑)을 박살내고 화북 지방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하는데, 이때 송은 황제·상황·황후·황자·황녀가 죄다 금에 끌려갔다.(...) 그리고 이때 북송 역시 망하고 그나마 임안(현재의 항저우)을 수도로 하는 남송은 유지해 중원의 반쪽이나마 사수하게 된다.

건국으로부터 화북을 점령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12년이다. 그야말로 다크 호스 왕조. 아골타의 형이 동북 9성 돌려달라고 고려에 애원했던 때가 1109년인데, 이때부터 따져도 20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당시 동북 아시아의 두 거대 제국을 무너뜨린 셈. 고려 입장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공 바치던 애들이 순식간에 대제국이 되었으니 황당했을 듯. 다만 이때 금에 무너진 북송 모두 변방(전자는 서쪽, 후자는 남쪽)으로 도망간 황실에 의해 재기에 성공하긴 했다.

맹안모극(猛安謀克, Miŋgan Moumugə)이라는 유목 민족 특유의 군사 조직이 힘을 발휘했고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금나라의 철기병은 매우 막강했기 때문에 20년도 안 지난 기간에 요나라와 북송을 무너뜨리고 화북을 얻었다.[12] 특히 금나라의 초중장기병대인 '괴자마' 같은 경우 말에 2~3겹의 갑옷을 입히고 자기 자신도 갑옷을 덮었으며, 군마 3마리를 쇠사슬로 연결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13][14] 1126년, 송나라의 지방관이 전공을 세울 목적으로 금나라 사신 일행을 공격했는데 사신을 호위하던 17명의 기병과 궁기병들에게 송나라 보병 2000명이 처발렸다는 기록[15]이 있을 정도니 얼마나 용맹하고 전투에 능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거기에 북송을 공격하면서 얻은 공성 무기들과 초기 형태의 화약을 노략하고 그것을 응용하여 기상천외한 신무기들을 개발했는데 대표적으로 로켓의 시초라 할만한 비화창(飛火槍)과 화약 작렬탄인 진천뢰(震天雷)가 금나라 때 나온 무기들이다.

금나라 철기병 복원도.

4. 정치

기본적으로 요나라와 비슷하게 분리적 관인 통치를 했다. 건국 초창기엔 요나라와 발해의 제도를 많이 참조하고 한자거란 문자를 본떠 여진 문자라는 독자 문자도 개발하는 등 여진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이후 중원에 정착하자 자진해서 유교를 받아들이고 한족을 적극 기용하는 등 급속히 한인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중원을 침략한 초창기에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불태웠으며, 산동에 있는 공자 사당인 공묘(孔廟) 역시 공자가 뭔지도 모르는(...) 여진족 병사들이 도굴하고 파헤치려던 것을 마침 같은 자리에 있던 발해인 출신 금나라 관료 고경예가 그 광경을 보고 "대성인(大聖人)이 계신 곳이다."라고 뜯어 말려서 겨우 무사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던 나라가 중원에 정착하고 한화된 이후에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유학을 장려하였고 황제가 공자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금나라가 점령한 곡부에 거주하는 공자의 직계 자손들에게 '연성공'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다른 한족 왕조들처럼 이들을 우대했다. 이는 유목 민족 출신의 정복 왕조의 군주도 일단 중국을 지배하고 유교의 내용을 접하게 되면 제왕의 통치와 군림을 뒷받침해주는 이데올로기로서 충과 효를 강조하는 유교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젠 내가 황제니까 공자님 말씀 잘 새겨 들어서 나한테 충성하라 이거지 따라서 정복 왕조의 군주조차도 유교를 국시로 받아들이게 되고 유교를 대표하는 공자를 성인으로 특별 대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젠 이런 과정에서 공자 가문의 정통성이 좀 꼬였는데, 금나라가 중원을 공격하기 직전 공자 가문은 남송 정부와 함께 곡부를 떠나 남하해서 절강성에 터전을 잡고, 그 곳에서 남송이 부여한 연성공 작위를 얻어서 공자 후예로 인정받았다. 같은 공자 가문에서 2개의 연성공이 나오게 된 것. 금나라가 인정한 가문을 '북종', 남송이 인정한 가문을 '남종'이라고 부른다. 이후 쭉 남북종으로 나뉘다가 원세조 쿠빌라이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남종 측에게 곡부에 돌아가 가문을 이으라고 명하였으나, 남종 측에서 연성공 직을 반납하고 북종 측에게 본래 공자 가문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정통성 문제가 정리되었다. 이 부분은 공자 문서의 '공자의 후손' 항목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금세종은 여진족들의 복장과 풍습이 한족의 것과 유사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한족 복장의 착용과 머리 모양을 법으로 금지도 하였지만 흐지부지되었다. 당시 금나라의 상류층을 중심으로 남송 의복을 입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나온 정책이었다. 금나라는 남송에게서 조공을 받는 등 상국 노릇을 했지만 지배층을 중심으로 남송 문화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남송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고 세종 이후 재정이 급격하게 나빠진다. 후대의 청나라는 금나라가 한족 문화에 빠져버린 것을 금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보고 중원에 들어오자 만주족의 옷과 변발을 한족에게 강요하였다. 물론 만주족마저도 청나라 말기 이후로는 옷과 변발을 제외하면 거의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버렸지만...

여진 문자는 금세종의 보급 노력에도 차츰 여진족 스스로가 배우는 것을 경시하고 한자 사용을 더 선호했다.(...) 초창기의 여진 부족 체제에서 유래한 정치 제도는 유명무실화하고 경의와 사부를 설치하여 한인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실시했다.[16] 또 중국식 신관제를 반포하고 중국식 백관의 의제와 조복을 채택했다. 초기에는 악비 등의 무장이 남송에 있어 이래저래 고생했지만 나중엔 한족과의 혼인도 빈번해 적인지 아군인지도 애매한 입장이었지만 기를 쓰고 공격은 했다. 이렇듯 금나라는 군사력으로는 한족에게 역사상 최초로 중원을 빼았기고 황족들이 몽땅 다 포로로 잡히는 사상초유의 굴욕을 안겨줄 정도로 강력했으나 문화적으로는 한족에 차츰 동화되는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하술되어 있듯이 피지배층인 한족들도 지배층인 여진족들의 풍습에 물드는 경우도 있었다.

송사전 금 열전에 따르면 초창기인 금태종 때만 해도 완안올출로 하여금 후손인 만주족처럼 정복지의 송나라 백성들에게 중국식 복장을 금지시키고 변발령을 내려 따르지 않으면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나중에 가면 1150년에 중국식 의복 착용 금지령을 폐지하고 황제와 관료들의 조복, 공복, 제복 및 황후와 비빈들, 명부의 복장은 모두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나라 시대 관복 그림 참조 북송 황실의 면류관 등 다수의 황실 제복들이 카이펑에 남아서 금나라 황제들과 관료들은 그 의상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금희종이 처음으로 중국식 면류관과 곤룡포를 입었다. 해릉양왕 때부터 한족 문물들을 급속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금세종 때 다시 여진의 의상을 고수하지만, 장종 이후로 다시 급격한 한화 현상이 일어났다. 하지만 중국 사극이나 무협 드라마에는 이런 점을 무시하고 한족화한 금나라 말기임에도 금나라 출신 인물들은 벙거지를 쓰고 가죽 옷을 입은 전형적인 북방 민족 복장을 하고 나온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 사극무인시대에서는 고증에 맞게 금나라 관리들이 송나라식 관복을 입고 등장한다. 서민들은 흰색 의상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5. 왜 남송을 멸망시키지 못했나

금나라는 세종부터 금 장종까지 근 50년이 조금 안 되는 번영기를 누렸다.[17] 그러나 그렇게 급하게 힘을 키운 금나라는 내부적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일단 금 태종의 사망과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등의 활약으로 금군이 강남에서 쫒겨나 화북으로 물러간 뒤로, 금은 남송에게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세폐 등을 받아냈지만 남송을 멸망시킬 능력은 없었다. 금은 분명히 그 이후에도 남송의 멸망을 노리는 군사 작전을 시도한 바가 있지만 다 실패로 끝났다. 한마디로 한족을 남쪽으로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할 역량까지는 있었으나 중국 전토를 완전히 다 차지할 역량까지는 없었던 것.

남송을 치는 데 있어 금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남송의 경제력이 믿을 수도 없을 만큼 가공한데 반하여,[18] 회남 이남 땅을 남송에 내주는 금나라의 경제력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결함 국가 수준이었다. 특히 금세종 이전까지 국가예산에 대한 회계도 없다시피 했으며 건국때부터 꾸준히 재정난에 시달렸다. 민간에게 납속을 받아 관직을 주는 상황이 금의 전성기었던 금세종 대에도 나타났으니 그만큼 금의 재정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의 해릉양왕이 소위 벌송(伐宋)군을 일으켜 남송을 공략하려다가 모두 실패했으며 나중에는 송군이 아닌 반란군에게 죽었고, 후퇴하는 금군의 뒤를 친 남송에게 숙주(宿州)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해릉양왕의 뒤를 이은 금세종은 장군 복산충의(僕散忠義)를 시켜 이를 수복시켜서 즉시 숙주를 되찾았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금 세종은 되려 서둘러 정전 이야기를 추진하라고 명령했다.

사실 일시적인 기세를 이어가는 일이면 몰라도 장기적인 전쟁에 있어 경제력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금나라는 남송이 보내는 세공(歲貢)에 크게 의존하는터라 남송과 전쟁이 벌어지면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이 나올 뿐만 아니라 남송의 경제적 지원도 모조리 끊긴다. 그나마 남송에게 받은 세공도 남송과의 무역으로 오히려 상당부분이 남송으로 다시 유출되는 상황이었다. 이때문에 고려 사신이 금에 왔을 때 금세종이 조공받는 나라의 체면에 걸맞지 않게 외화유출을 막기 위해(...) 직접 고려사신들의 사무역을 통제했을 정도였다. 남송 정도의 나라를 무너뜨리려면 장기전은 필수적인데, 정작 금은 장기전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금 세종이 추진한 화약에 따르면 남송에서 금에게 주어야 할 물건은 은 20만 냥, 비단 20만 필이었는데, 이는 일전의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에서 줄어든 액수이며, 세공(歲貢)이라는 칭호에서 세폐(歲幣)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즉 상하관계의 급이 완화된 것이다.[19] 금나라는 그만큼 다소 양보를 하더라도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남송의 지원을 받아내야 할 만큼 절박했다.[20]

물론 남송도 북벌하여 금나라를 칠 만한 수준이 아니라서 남송의 북벌군은 번번히 금군에게 격퇴되어 수비는 가능했다. 결국엔 금이나 남송이나 서로의 공격은 막을 수 있어도, 치명상을 주기엔 힘들었다.

금나라의 2번째 문제로는, 터무니없이 적은 여진족의 숫자 때문에 민족 갈등의 문제가 있었다. 당시 여진족은 금나라 인구의 7분도 1도 안되었고,[21][22] 이때문에 해릉왕이 남송을 공격했을 때 거란인들과 해족을 징집하자 이에 반발하여 서북쪽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해릉왕이 남송정벌을 위한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반란군은 아예 서북쪽을 점령한 상황이었다. 이후 금세종에게 진압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게다가 문화 수준이 본래 낮은데 역대급 속도로 지배민족이 되었기 때문에, 소수의 여진족이 그야말로 한족(漢族)의 바다에 표류하는 형태라 어느새 여진족들이 자기네의 낮은 문화 등을 부끄러워하는 풍조가 생겼다.[23] 게다가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은 만주의(그것도 문명에서 더 멀고, 더 기후가 척박한 동만주 베이스) 자연환경에 맞게 반농반목을 해왔던 여진족의 경제가 중원으로 들어가면서[24] 너무나도 빨리 농경으로 바뀌면서, 적응을 제대로 못하고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는 여진족들이 나타났다.[25]

금 세종은 여진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명색이 지배민족인 그들의 빈곤도 없애야 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관유지에서 농사를 짓던 한족들의 땅과, 세금을 안 내는 토지를 빼앗아서 여진족에게 줬다. 그런데 이렇게 여진족을 도와주다보니 절대 다수인 한족들의 반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26]

금나라 이전의 요나라의 경우는 연운 16주를 차지했지만 그곳이야 중원의 북동부 가장자리 일부였고 기본적으로는 북방의 국가였기 때문에, 중간중간 소위 한화 성향이 강해질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유목 국가의 성격이 강해서 이런 내부적 혼란은 비교적 덜했다. 반면 금나라는 근본이 어찌되었건 아예 중원 깊숙히 들어와서 뿌리를 박은 만큼, 이런 부분에서 혼란은 필연적이었다.[27][28]

게다가 금나라에 의해 조국을 잃은 거란인들도 복잡했다. 여진족은 거란족을 어느 정도 대우하면서 여진족과 거란족의 통혼을 장려했는데, 어떻게든 거란족을 끌어들이고 숫자가 적은 여진족의 단점을 보완하려고 했다.[29]

사자를 보내어 이들(거란인)을 이주시켜, 여직인(女直人)[30]과 같이 살게 하고, 남혼여빙(男婚女聘)[31]을 점차로 풍속화하는 것이 장구지책(長久之策)이다.

─ 대정(大定) 17년(1177) 세종의 조칙 ─

하지만 이 방책은 실패했다. 회유책과 강경책을 반복한 금나라의 거란족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세종은 거란인과 통혼을 장려하면서도 거란족 관료 수를 줄였으며, 세종의 뒤를 이은 장종(金章宗)은 마침내 거란 문자 사용까지 금지시켰다. 그 결과 거란족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몽골의 침입 당시 거란족은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협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이 당시 저 멀리 서방에 과거에 도망친 거란인들이 세운 서요의 존재도, 거란인들의 민족성이 남은 데 영향이 있을 것이다.

6. 위기

세종때는 그나마 통치가 잘 되었지만, 이후 국세가 기울게 된다. 게다가 이때 최강인 몽골 제국이 북쪽에서 내려오면서 금나라는 방비를 위해 방위비를 많이 지출함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야금야금 뺏기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에서도 남송을 틈만 나면 공략하며, 남송의 도움도 못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몽골과 남송의 연합을 불러와 금나라의 멸망에 기여를 하게 된다.

7. 몽골 제국과의 23년 공방전

참고 자료

7.1. 칭기즈 칸의 침공: 1211년~1215년

<1215년 경의 상황, 금나라가 많이 축소되었고 요동과 남만주 일대는 야율유가의 동요, 북만주와 연해주는 포선만노의 동하(대진 혹은 동진이라고도 함)가 성립>

1208년 금나라의 장종이 사망하고 위소왕이 즉위했다. 이후 금나라는 칭기즈 칸 무적 신화의 첫번째 제물이 된다.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211년 쿠릴타이 회의에서 금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몽골의 모든 병력(추정치 약 9만-12만명)을 총동원하였다. 봄에 초원으로부터 이동을 시작한 몽골군은 가을이 시작할 무렵 금나라 영내로 쳐들어갔다.칭기즈 칸은 이미 금나라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금나라는 수년 전부터 몽골이 침입할 만한 지역을 따라 요새와 성벽을 쭉 건설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여러 요충지에 분산배치된 금나라 군대는 몽골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했고, 방어선을 돌파한 몽골군은 금나라의 북부를 휩쓸었다.

방어선이 뚫리자 금의 총사령관 완안승유는 흩어져있던 주력군을 야호령에 집결시켰다. 야호령에는 추정치 약 40만-50만명[32]의 금군이 집결하였고, 금군의 주력을 격파하기 위해 몽골군이 야호령으로 이동하면서 이후 23년간 이어질 전쟁의 승패가 걸린 결전이 벌어졌다. 금군이 수적, 지형적 이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망했어요... 몽골군의 주력이 악귀같이 싸워서 금군의 중앙을 돌파하는 사이[33] 금군을 우회 공격한 무칼리의 별동군이 금군의 후위를 위협하였고, 결국 지휘체계가 붕괴된 금군은 포위된채로 학살을 당했다. 완안승유는 금의 패잔병을 회화보에서 모아 다시 3일간 싸우지만 또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금나라가 리즈 시절 총 동원 가능한 병력 수가 약 90만-100만 가량으로 짐작되는데, 야호령과 회화보에서 전체 병력의 절반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셈이다. 이후 몽골군은 금군에 대한 야전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몽골군은 1212년과 1213년에도 재차 침입하였는데, 3년에 걸친 원정의 결과로 만주요동을 비롯한 화북지방을 밀어버렸다. 다만 공성전에 미숙한 몽골군은 요새나 성을 제대로 공략하지는 못하고 있었고, 이는 이후에 한족 보병을 고용함으로써 해결하였다. 이 시기에 몽골은 금나라 북부에 있던 목장을 점령함으로써 충분한 양의 말과 목초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반대로 금군은 이후 기병 부족에 시달리면서 기병의 수급을 위구르, 서요, 거란족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이 수세로 몰리자 금은 거란족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는데, 이런 감시가 오히려 거란의 반란을 촉진시켰고 몽골은 이러한 거란족들의 협력을 얻어 부족한 병력을 대거 증강시킬 수 있었다.

요새와 성벽 앞에만 서면 어쩔줄 몰라하던 몽골군은 1213년 마침내 기습을 통해 거용관을 뚫고 만리장성을 돌파했고 금의 수도 연경(베이징)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금 내부에 분란이 생겨 위소왕이 암살당하고 선종이 즉위했다. 연경 포위는 다음해 초까지 계속되었는데 공성전에 자신이 없었던 칭기스 칸은 선종의 화의 요청을 받아들였으며 대신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급한 불은 껐다고 생각한 선종은 1214년 6월 수도를 연경에서 방어에 용이한 남쪽의 개봉(카이펑)으로 옮겨 몽골의 남침에 대비하고 연경에는 황태자와 중신들을 남겨 지키게 했다. 이에 자극받은 칭기스 칸은 1214년 가을 국경지대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트집잡아 다시 남하하여 연경을 포위하였다. 연경을 지키던 완안복흥은 끝까지 항쟁을 했지만, 방어용으로 모아둔 기름이 몽골군의 공격으로 불이 붙어서 불기둥이 치솟고 민심이 흉흉해져 사람들과 병사들이 약탈과 강도, 강간을 벌이는 등 생지옥으로 변하자 절망하여 결국 자결을 하였고, 그와 같이 있었던 석말진충은 부하들을 데리고 탈출하여 개봉에 도착했으나 패전의 책임으로 처형당했다. 결국 1215년 연경이 함락되었고 금은 화북, 만주,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상실하였으며, 이에 따라 거란을 비롯하여 여진에 복속되었던 이민족들이 몽골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이 시기 금나라의 지배력이 아예 사라진 만주 지역에서는 거란족 출신 야율유가가 만주와 압록강 북부 지역의 거란족을 수습하여 1213년 동요(東遼)를 세웠다. 동요를 진압하려던 금의 장군 포선만노는 몽골의 지원을 받은 동요에게 거듭 패하고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자 1215년 반란을 일으켜 요동의 동경요양부에서 동진(東眞)을 세웠다. 이후 만주와 요동지방은 동요, 동진, 각종 군벌들이 난립하며 서로 대립하다가 서서히 몽골에 흡수되었다.

7.2. 무칼리의 침공 : 1216년~1229년

칭기즈 칸은 1216년에 서요, 1219년에 호라즘 왕국을 침공하였고, 이에 따라 몽골의 주력군은 서방 전역으로 차출되었다. 중국 방면에는 무칼리가 이끄는 소규모 몽골군만이 남았는데, 약 2만명의 몽골인과 4만-7만명의 타민족 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칼리는 축소된 군대를 이끌고도 1217년부터 1223년 사이에 중요한 곡창 지대인 산서, 하북, 산둥 지방에서 금군을 연파하였다. 1223년 무칼리는 장안을 공략하던 와중에 병사하였고, 그의 아들인 보로가 무칼리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이 기간동안 몽골군은 부족한 병력 때문에 점령한 지역을 전부 유지할 수 없었고, 금나라는 반격을 가해 여러 지역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의 국력은 점차 소진되었다.

한편 이때의 금나라는 30여년간 휴전상태에 있던 남송을 침공하여 국력을 회복하려고 하였는데, 1217년부터 1224년 사이에 걸쳐진 대송 전쟁은 별다른 소득이 없이 국력만 낭비하였고, 오히려 남송의 금에 대한 적개심만 키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남송에서 매년 바치던 막대한 세폐가 끊기면서 경제적 손실이 가중되었다.

7.3. 오고타이 칸의 침공 : 1229년~1232년

1227년 칭기즈 칸이 죽고 2년 뒤 오고타이 칸이 뒤를 이었다. 오고타이 칸은 먼저 금나라에 화평 사절을 보냈으나, 금은 몽골 사절을 죽이는 것으로 답하였다. 당시 황하 북부의 대부분은 이미 몽골에게 넘어가 있었고, 금나라의 영역은 서쪽의 장안에서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서 황하 남쪽의 낙양과 개봉을 지나 황해에 이르는 길고 넓은 띠 모양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황하 연안, 특히 수도인 개봉 근처의 금나라 영토는 강과 수로, 요새들이 겹겹히 있어서 몽골군의 장기인 기병이 마음대로 활개치기 힘들었으며, 금나라의 남쪽 국경은 보다 기병이 활동하기 수월했지만 몽골이 그쪽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송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당시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할 통로는 크게 두 곳이 있었다. 첫째는 화북의 몽골 영토에서 황하의 중류나 하류를 도하한 뒤 그물같은 수로망을 피해 금의 수도인 개봉을 공격하는 길이었고, 둘째는 아예 서쪽으로 움직여 장안을 지나 동관을 돌파하여 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에 대비하여 금나라는 낙양에서 개봉까지 이르는 길에 20만 대군을 배치해 몽골군의 황하 도하를 막는 동시에, 동관에도 군사를 두어 서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당시 금나라의 국력은 완전히 기울어 있었지만, 완안진화상이라는 명장이 등장하였고, 역시 금나라 최후의 명장 중 하나인 완안합달이 버티고 있었으며, 시대를 잘못 타고났지만 명군의 자질이 있었던 금애종이 국가의 역량을 최대한 집결시켜 몽골제국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몽골군의 본격적인 침공은 1230년부터 시작되었다. 오고타이 칸은 먼저 장안에서 시작하는 두번째 루트를 선택하였는데, 이를 위해 몽골의 명장 수부타이에게 동관을 공략하라고 명령하였다.

<장안과 동관 지역의 지도>

당시 금나라의 장수 완안진화상은 군중의 일을 처리하다가 월권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18개월동안 갇혀 있었는데, 본래는 사형죄였으나 금애종은 완안진화상을 석방하여 몽골군과 싸우는 선봉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완안진화상은 대창원에서 400명의 병사를 이끌고 8,000여명의 세계 최강 몽골군을 격파하였다. 대창원의 승리는 몽골군이 1221년 파르완 전투에서 잘랄 웃 딘에게 패배한 이후 처음 겪는 완패이었는데, 파르완 전투는 6만에 가까운 병력이 소수인 몽골군을 격파한 전투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월등한 다수의 몽골군이 더 적은 수의 적에게 패배한 최초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완안진화상은 정원대장군 직을 받게 되었다.

이때 완안진화상이 이끈 부대가 충효군(忠孝軍)이다. 충효군은 금나라 말기 정예부대로,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나이만, 강족, 위구르 족, 그외 기타 거란 여진 등까지 섞인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말을 탈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병전력이 부족한 말기 금나라에 있어서 아주 강력한 전력이었다. 충효군은 비록 전투력이 강해도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 제어하기 어려운 부대였는데, 완안진화상은 부대의 규율을 바로잡고 민간인을 함부로 약탈하는 것도 막았다.

다음해인 1231년 몽골군은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세를 시작하였다. 먼저 서쪽에서는 경양을 포위하고 그 전년도처럼 대창원을 거쳐 동관으로 진입하려 하였다. 동쪽에서는 이와 조금 차이를 두고 한인 출신 장군인 사천택이 이끄는 몽골군이 남하하여 황하 북쪽에 아직 남아있던 금나라 영토인 위주(衛州)를 공격하였다. 위주는 금의 수도인 개봉의 바로 북쪽에 있어서, 위주를 빼앗긴다면 비록 황하라는 천연 장애물이 남아 있다고 해도 수도 방어에 상당한 압박을 받게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몽골군의 양동 공격에 대응하여 금나라는 대장군 이랄포아(移刺蒲阿)이 지휘하는 일군을 서쪽으로 보내 경양을 구원하는 한편, 완안합달과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파견하여 위주를 돕게 하였다.

서쪽 방면의 금군은 또 다시 대창원에서 승리를 거두고 경양의 포위를 푸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이랄포아는 위주로 이동하여 완안합달의 군대에 합류하였다. 동쪽 방면의 금군은 수적 우세에 힘입어 서전에서 몽골군을 격파하였지만, 몽골군의 주력이 북쪽으로 물러나는 사이 금군의 배후로 은밀히 이동한 일부의 몽골군이 후방을 급습하는 동시에 후퇴하던 몽골군이 공격해 오면서 금군은 크게 패하였고 위주를 몽골에게 내어주었다.

한편 이랄포아가 위주로 이동한 뒤 몽골군은 다시 서쪽 전선에 대규모 공세를 퍼부어 대창원을 함락시켰고, 몽골군의 기세에 당황한 금군은 장안을 포기하고 그 지역의 모든 인구를 동쪽으로 피신시켰다. 금나라는 장안의 동쪽에 있는 동관을 아직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랄포아와 완안합달이 지휘하는 금군은 동관에 머무른채 소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안안진화상이 지휘하는 1천명의 병력은 동관을 공격한 몽골군을 격파하였다.

동관의 서부를 완전히 장악한 몽골군은 이곳에서 여름을 보낸 뒤, 툴루이의 제안에 따라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금나라의 수도 개봉을 공격하였다. 당시 금나라의 국경을 보면 북쪽과 서쪽은 각각 황하와 험준한 산맥을 경계로 몽골, 남쪽은 평야 지대를 두고 남송과 접하고 있었는데, 기병이 주력인 몽골군은 황하와 산악지대를 돌파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툴루이가 지휘하는 서군은 금군이 집결해 있는 동관을 크게 우회하며 남동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한중을 돌파하여 남송의 영토를 통과한 뒤, 한수를 건너 남쪽으로부터 개봉을 급습하려 하였다. 그동안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북군은 낙양과 개봉 사이의 몽골 영토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금나라의 군대의 관심이 툴루이에게 쏠리는 사이 안전하게 황하를 도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또한 일군의 몽골군은 동쪽에서 금나라를 위협하였다.

툴루이가 남송의 영역에서 나타나자 완안진화상은 동관의 수비병을 제외한 금나라의 마지막 정예병 20만을 이끌고 이를 요격하려 하였다. 등주에서 벌어진 몇차례 전투에서 수적인 우세에 있던 금나라군은 격렬하게 싸운 끝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나, 몽골군이 일찍 물러나면서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하였다.

수적 열세에 있던 툴루이는 전략을 바꾸어 일부의 병력으로 완안진화상을 견제하면서 남은 병력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신속하게 개봉을 항해 어택땅하였다. 살수대첩, 귀주 대첩, 병자호란의 예와 같이 공격군이 한데 뭉쳐 있는 대규모 수비군을 우회하여 상대의 수도를 향해 냅다 어택땅을 찍은 예는 여럿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기동력의 우위가 있는 기마 민족들이 자주 사용하는 전술이다.

몽골군은 개봉으로 이동하면서 마을을 불태우며 금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공격군이 오히려 수비군에게 청야 전술을 펼친 셈이었다. 한편 황하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금군이 툴루이를 요격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집결하자 북쪽의 황하 지역은 텅 비게 되었고, 이를 틈타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고타이 칸은 황하가 얼어붙을 때를 기다려 친위대를 이끌고 안전하게 강을 건너와 남쪽으로 진군하여 툴루이와 합류하였다. 오고타이 칸의 합류로 몽골군의 군세는 5만명까지 불어났다.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금군은 수도를 지키기 위해 툴루이를 쫓아 가혹한 행군을 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3일간 폭설이 내리면서 비전투손실은 더욱 커져갔다.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금군이 균주성[34] 근처의 삼봉산(三峰山)[35]에 도착하였을 때 몽골군이 금군을 포위하였다. 몽골군은 의도적으로 균주 방향의 포위망을 일부 열어주었고, 많은 금군이 탈영하여 열린 도주로로 몰려들자 몽골군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결국 삼봉산 전투에서 금나라의 남은 정예병은 궤멸되었고, 전쟁의 승리를 확신한 오고타이 칸은 휘하의 장군들에게 남은 전쟁을 맡기고 중국 전역을 떠났다.

동관에는 아직 11만 병력이 남아 있었지만 숫자만 많을 뿐이었던 이 병력도 수도를 구원하러 가는 길에 200리도 가지 못하고 궤멸당했고, 결국 개봉 근처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그리고 몽골군은 마침내 개봉을 포위하게 된다.

7.4. 개봉 포위전과 금나라의 멸망 : 1232년~1234년

개봉을 포위한 몽골군은 개봉성 주변의 참호를 모두 메꾸기 시작하였다. 금 애종은 몽골과의 화친을 기대했지만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몽골군과의 일전을 벌이게 된다. 몽골군은 포로로 잡은 금나라 백성들을 앞장세워서 화살받이로 내세워 참호를 메꾸었고 이후 개봉성에 맹공을 퍼붓기 시작한다. 금군은 진천뢰와 비화창 등의 화약무기를 사용해 거세게 저항하였고 양측의 피해가 서로 커지자 수부타이는 이에 금나라와 화의를 맺고 군대를 물린다. 몽골군은 비록 물러갔지만 개봉성에서는 치열한 전투 이후 양식이 부족해지고 100만명이라는 피난민을 먹일 식량이 없어지자 백성들은 굶어죽어가고 심지어는 식인을 하는 행위까지 벌어지게 된다.그리고 마침내 그동안 금나라에게 이를 갈던 남송이 몽골의 동맹 제의에 응해 명장 맹공을 필두로 한 3만 명의 군대와 30만 섬의 식량을 몽골군에게 제공하면서 전쟁은 금나라에게 완전히 불리해졌다. 결국 이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애종은 개봉을 버리고 채주로 몸을 피했다. 이에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개봉성을 포위하고 황제마저 떠난 개봉은 더 이상의 저항력을 상실하고 결국 최립이라는 장수가 개봉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개봉은 결국 몽골군에 의해 함락된다.

몽골군은 개봉을 점령한 이후 채주까지 진격했고 때마침 맹공이 이끄는 남송군까지 합류해서 채주성을 포위하였다. 몽골과 남송은 채주성 근처의 연강과 시담호라는 두 개의 물줄기를 점령해서 채주 쪽으로 돌려서 채주는 수해와 굶주림으로 인해 지옥이 되어갔다. 1234년 애종은 황족 완안승린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몽골-남송 연합군이 채주 성문을 무너뜨리고 공격해 올 때 유란헌이라는 곳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결국 애종이 죽은 다음날 채주는 함락되었고 완안승린은 황위를 물려받은지 하루도 안되어 몽골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하고, 이로써 완안아골타가 금을 세운 지 119년이 되는 해에 금나라의 사직은 멸망하고 만다.

7.5. 이후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 곽하마를 중심으로 하여 다시 한 번 금나라 부흥 운동이 있었으나 실패로 끝나게 된다.

8. 문화

여진족 고유의 문화에 거란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한족 문화를 받아들였다. 여진 문자가 대표적으로 여진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거란 문자와 한자를 썼었다. 거란 문자나 한자를 참조하여 여진 문자를 만들면서 거란 문자는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서서히 한족화로 인하여 한자를 더 많이 쓰게 되었고 여진 문자는 쓰이지 않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금나라 조정은 여진인이 남송의 의상 착용을 금지하는 조칙을 세종, 장종 때 두 번이나 내렸다. 이는 거꾸로 보면 조정의 명을 한쪽 귀로 흘리고 남송 의상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이 조칙을 통해 남송의 문화가 금나라에서 크게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금나라는 남송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사치품을 수입하느라 무역에서 항상 적자를 봤다.[36]

하지만 그 반대의 현상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금나라 치하의 한족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남송에서도 여진족 패션 스타일이 유행했다. 여진족들은 장신구들을 착용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걸 보고 한족들이 따라 했으며 여진족의 호복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여진 문화 유행 현상을 보고 당대 한족 지식인들이 혀를 찰 정도였다. 예를 들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남송의 문인 범성대는백성들이 말하길 오랫동안 호복에 익숙해져 제도가 오랑캐처럼 되었다고 언급했다.[37] 연운 지역을 포함한 화북의 한족들은 요나라와 금나라의 지배를 거치면서 남송의 한족들과 언어, 복장, 풍습에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로도경에 따르면 금나라 사람의 의복은 좌임[38]이라는 점만 빼면 중국의 옷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적혀있고 조정의 공복들은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 했지만, 일상 생활에서 입는 옷들은 송나라의 의상과는 꽤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원으로 들어오기 전 수렵을 많이 했던 여진족 전통의 영향을 받아 동물 문양, 특히 사슴 문양을 선호했다고 한다. 요나라와 북송을 정복하면서 거란[39]과 한족의 의복을 수용하여 여진 전통 의상에는 변화가 생겼지만, 아예 한족 의상을 그대로 착용했던 요나라 남면[40] 의상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변발의 경우 발굴 유물과 앞머리를 밀고 뒷머리를 남겨 땋아서 묶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볼 때 후손인 만주족의 변발과 흡사하거나 변발을 양갈래로 늘어뜨린 모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건국한지 12년 만에 제국 2개를 무너뜨리고 화북을 차지했지만 12년 전까지 동북 변방의 수렵 민족인 생여진이었기 때문에 금나라 초반기의 경우 주변 나라들보다 부족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황제와 신하들이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술을 퍼마신다든가 황제가 신하에게 곤장을 맞는다든가(...)[41] 황족들과 귀족들의 의복이 일반 백성들과 별 차이가 없다든가 제대로 된 황궁도 없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뜻이다. 변두리 수렵 부족이 20년도 안 돼서 갑자기 제국을 건국해 출세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 과거 북송의 땅이었던 화북을 통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약탈만 하고 사람을 무참히 죽여대기만 하니 땅은 황폐화되고 조정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지사.

이런 현상은 금희종 이후 중국식 제도와 문물들을 수용하면서 사라졌다. 해릉왕은 북송의 황궁을 본받아 천도한 중도(연경)에 으리으리한 황궁을 지었고 세종과 장종은 한문에 능했고 서화와 서예 솜씨도 수준급이었다.[42] 한문학은 많은 여진 귀족들을 매료시켰고 많은 여진 귀족들이 한족 문화에 흠뻑 빠졌다. 대표적으로 세종의 손자이자 저헌거사(樗軒居士)라고 불렸던 완안숙(完顔璹)은 금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칭송받았으며 현대에까지 그의 시가 전해 내려온다. 완안숙과 사귀던 조병문, 원호문, 왕약허 등 금나라의 한족 시인들도 유명했는데, 대표적으로 현대에 널리 알려진 금나라 시대 한시로는 안구사가 있다.

9. 고려와의 관계

9.1. 초기

《금사(金史)》고려전에서부터 "금인은 고려의 말갈에서 떨어져나온 것에 기원한다.'[43]라 써져 있고 금이 성립되기 전 여진은 고려를 상국으로 섬겼었다. 하지만 이후 금나라가 세력이 커지자 역으로 고려에게 칭신을 요구했다. 그래도 전반적으론 대대적인 전면전을 치른 요나라-고려 시절과 달리 전면적인 충돌은 없이 지낸 편.

금나라가 건국하기 이전부터 고려는 북방의 여진족을 회유하고 속민으로 삼아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완안아골타의 숙부인 영가와 아골타의 형 오아속이 등장하여 완안부의 세력이 심상치 않아지자 숙종이 여진 정벌을 시도하나 그닥 큰 성과를 못본다. 고려는 절차부심하여 예종 대에 본격적으로 18만 대군을 이끌고 정벌을 시도한다. 이것이 바로 윤관동북 9성 개척(1107년).

이 시점에서 고려의 1차 목표는 자국 영토 확장 및 북방 안정이라서, 여진의 성장 및 건국을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되려 금나라의 성장에 도움을 줬다는 평가도 있다. 게다가 정작 동북 9성은 개척이 어려워 다음해 여진에게 반환하였다. 고려가 1109년의 갈라수 전투에서 패함에 따라 북방에서의 정책을 재검토할 수 밖에 없기도 했다. [44][45]

어쨌든 완안아골타가 본격적으로 금나라를 건국하자(1115년) 두 나라 관계는 상당히 미묘했다. 고려로서는 금나라를 정벌할 군사력은 없는데 예전에 신하였던 금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인정하기란 힘들었고, 금나라로서는 배후의 고려가 영 거슬리지만 눈 앞의 요나라송나라가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금나라가 건국된 1115년, 금나라와 고려의 이해 관계가 가장 충돌하는 지역은 사실 동북 9성보다도 보주(保州),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로 추정되는곳이였다. 요나라의 멸망이 다가오자 금나라와 고려는 각기 군사를 보내어 이 지역을 얻으러 경합한다. 일단 금나라가 요나라의 땅이었던 보주 점령에 가까워지자 고려는 즉시 아골타에게 사신을 보내 보주 반환을 요구한다. 아골타는 "爾其自取之(그대들이 직접 탈취하시오)"라고 대답한 뒤 즉시 부하들에게 전갈을 보내어, "아놔 고려가 공격하러 올 거임! 얼른 대비를 해야 됨!"이라며 경고한다.[46]

하지만 단순히 "너님들이 가져갈 테면 가져가봐."라고 한 건 아니고 고려와 금나라 사이의 암묵적인 외교였다. 당시 요나라는 금나라가 밀고 내려오자 고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고려는 당연히 거절했고, 이후 요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보주 일대를 두고 양 국가가 만나게 된것이다.

고려의 요구에 아골타는 사신을 통해 직접 탈취하라고 언급했지만 당시 보주는 아직까지도 요나라의 땅이었다. 이를 고려 쪽에서 치러간다면 고려는 요나라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작게는 연계를 막기위한 목적이었고 크게는 우군을 만들려는 금나라의 의중이 담겨있는 말이었고 고려도 이를 파악하고는 군사적 움직임보다는 외교적인 움직임으로 먼저 항복을 권유했고 결국 거란 관리 쪽에서 고려로 항복(1117년 3월)하며 보주와 내원성은 고려에 속하게 된다. 당시 고려가 유연하면서도 이득을 챙기는 외교를 했음을 잘 알려주는 사례 중 하나.

이후 금나라는 형제의 맹약을 맺자(물론 금나라가 형)고 요구(1117년)해 왔으나 고려는 무시했다.

사실 숙종, 예종 대는 여진(금)과의 사이가 전혀 좋지 않았다. 특히 예종의 여진 정벌이 큰 효과를 못본 후엔 서로 팽팽하게 노려 보고만 있었다. 예종은 위에 대한 답변으로 재위 14년(1119년) 8월에 사신을 보내지만 국서에 금 황제를 "너(彼)"라고 칭해서 금나라는 사신을 거부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군사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고 팽팽한 긴장감만이 감돈다. 일단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했다. 금나라 역시 1124년 "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오면 너의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며 압록강 주변에 군사를 두어 고려를 방비하는 한편, 불필요하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한다.[47]

9.2. 칭신

금나라는 1125년, 마침내 요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를 사로잡고 요나라를 끝내 멸망시킨다. 이에 인종은 1126년 3월 신묘일에 모든 관료를 소집, 금을 상국으로 대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했다. [48]

당시 고려인종이 즉위한 지 5년이 지난 때로 이자겸, 척준경 일파가 권력을 잡았다. 고려사 인종 세가에 따르면 토론 당시 모든 신하가 반대했으나 오직 이자겸, 척준경만이 동의했다고 한다. 같은 달 을미일엔 종묘에 점을 쳐서 물어보았다고 한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정만 반대가 극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다하다 종묘에 점을 치기까지 하니...

결국 금나라에 숙이기로 결정, 1126년 4월 정미일에 사신을 보내 번국(藩國)을 칭한다.

보면 알겠지만 계속해서 질질 끌어오던 호칭 문제가 두달만에 결정나는걸 볼 수 있는데 일단 국왕이 더 이상 숙, 예종 처럼 강경파가 아닌데다가 금이 요를 없앨 정도의 국력임을 인식하여 빠르게 결정했을 것이다. 그 여진족과 칼을 맞댔던 척준경이 앞장서서 금나라에게 숙이자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금나라의 강성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정권을 주도하는 이자겸, 척준경 일파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권력에 금이 갈수도 있으니까.

허나 이자겸 일파의 이러한 결정은 고려 내부에서 반발이 컸다. 무엇보다 당장 같은 해에 이자겸은 쫓겨난다.... 고려사에 따르면 인종9년(1131년) 9월 정유일에 대간이 한 신하를 고발했는데 무관이 문관직에 임명돼서이기도 했으나 그가 공공연히 "국가가 나에게 천 명의 군대를 주면 금국(金國)에 들어가 그 주(主)를 사로잡아 바치겠다!"라고 떠들고 다녀서 외교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삼일동안이나 간쟁했으나 인종은 끝까지 그를 임명시켰다. 윤관의 아들 윤언이의 경우엔 그들은 우리 조정의 부속이고 늘 조천(朝天)[49]해오던 자들인데 어떻게 우리가 숙일 수 있냐고 아주 분노했다고 묘지명은 기록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려 조정이 이미 정한 금나라와의 관계를 되돌리진 않았는데, 요나라 멸망 직후 칭신한 바로 다음해인 1127년(금나라 천회 5년)에 북송이 시원하게 망테크를 타면서(...)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 북송/고려와의 관계를 참고.

어쨌든 금나라는 고려가 숙이고 들어온 사실에 기뻐하여 이전에 이미 빼앗긴 보주(의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했다.

참고로 이 보주성 반환 도중에 금나라에선 땅은 주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금나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고려에선 이미 다죽었다고 사실상 반대를 뜻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다.

9.3. 칭신 이후 ~ 금나라 멸망

서화는 이미 매마르고, / 西華已蕭索

북새[50]는 여전히 멍청하다. / 北寨尙昏蒙

앉아서 문명의 아침을 기다리는데, / 坐待文明旦

천동의 해가 밝아온다. / 天東日欲紅

- 보한집 권상에 기록된 고려 외교관 진화(陳澕)의 시. 밀려난 남송과 강호 금나라를 모두 무시하고 있다.

대체로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다.

고려 의종 재위 2년(1148년) 2월, 금과 외교 문제가 발생했다. 의종은 금에 보낸 표문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았고, 보낸 사신을 배신(陪臣)이라고 쓰지 않았다.[51] 이걸 두고 금에서 이걸 처벌해야 될지 금 황제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결말은 고려사에 적혀있지 않다. 하지만 고려가 금을 꺼림칙하게 여긴 것은 알 수 있다.

특히 칭신한 지 40년이나 지난 1164년에 금-고려 국경 지역의 작은 군사 분쟁이 일어난다. 대충 말로 풀지만, 금나라와 고려 양국은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분쟁의 원인이 서로에게 있다고 적었다. 특히 고려 기록에는 병마 부사 윤인첨이 '恥削土(치삭토 : 국토가 줄어듦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 말이 남아서, 겉으로는 화목해 보여도 속으로는 불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52]

무엇보다도 금-고려 관계가 요동친 사건은 1170년 무신정변이다. 1170년 겨울에 고려는 갑자기 금나라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더니[53], 이듬해 사신을 보내어 "의종이 돌아서 정신이 혼미해서 동생(명종)이 대신 왕이 됐어요. 데헷"이라고 알린다. 당연히 금나라 조정에선 이게 무슨 일이냐며 난리가 났다. 애초에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믿기 어려운 얘기다.[54] 금나라는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왕이 병에 걸려 물러난 것이 아니라 폐위된 것임을 알아낸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끝에 고려 내부의 문제라고 판단, 명종의 왕위를 인정했다.

1175년, 금나라는 대략적인 사실을 알다가 비로소 사건의 진상을 아는데... 바로 조위총의 난 탓이다. 조위총은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의방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했다고 알리며, 자비령 서쪽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40여 성을 바치겠으니 도와주십시오라 요구한다. 하지만 금나라는 거부하고 오히려 조위총의 사신을 붙잡아 고려 조정에 보냈다. "잘했지?" 하고(...). 이 사건을 단순히 '금나라가 멍청해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금나라의 영역 확대 의지가 소극적인 성격이었다고 읽어낼 수도 있고, 그냥 단순히 이웃 나라의 내부 문제에 개입하기가 싫어서라고도 볼 수도 있고 다 어느 정도 해당되지만 주전선은 남송과의 전선이었고 그 다음 전선도 고려가 아니라 몽골과 거란 등 북방전선이었다.[55] 애초에 금나라는 자국 내부마저도 못 통합하는 판국인데 전선을 더 늘려봤자 혼란이 더 일어날 가능성에 그냥 넘어갔다.

이후로는 큰 사건 없이 조공하고 책봉하며 생일에 사신 보내고 하는 평범한 일들만 일어났다. 고려 사신이 국경 지역에서 역인驛人에게 맞아 죽은 사건만 빼면. 이 사건은 금나라의 변경 지역 통제력이 약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역사상 최강, 최악의 기마민족이 동북아시아에 들이닥쳤다. 위소왕 시절 이후로 금나라가 남쪽으로 밀려나 교류가 끊겼다.[56]

고려는 북송이나 요나라와는 유교, 불교 서적과 대장경 등을 수입하는 등 문화, 사상적으로 밀접한 교류 관계를 가졌으나 금나라와의 교역은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고려와 금나라의 교역 관계는 항목 참조.

9.4. 그 밖의 이야기

뒷날 누르하치후금(청나라의 전신)을 세운 것처럼, "금"은 전형적인 여진족(만주족)의 국호로 자리잡았다. 청나라 황족의 성인 아이신 기오로(愛新覺羅)에서의 '아이신'은 금, 기오로는 '씨(氏)'를 뜻한다. 자신들이 금나라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 그러나 환빠들은 금은 신라 왕족의 성씨인 씨를 뜻하고, 愛新覺羅가 "新羅를 사랑하고 기억한다(愛覺)"라는 말을 섞어 놓은 것이라며, 여진·만주족은 신라의 후예라고 말한다.

10. 역대 황제

금나라 추존 황제들과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 복원도[57]

  • 추존 황제는 목록에서 제외

대수

묘호

시호

(여진식/중국식)

연호

재위 기간

능호

초대

태조
(太祖)

응건흥운소덕정공
인명장효대성무원황제
(應乾興運昭德定功
仁明莊孝大聖武元皇帝)

완안아골타(完顏阿骨打)/
완안민(完顏旻)

수국(收國, 1115년 ~ 1116년)
천보(天輔, 1117년 ~ 1123년)

1115년 ~ 1123년

예릉(睿陵)[58]

2대

태종
(太宗)

체원응운세덕소공
철혜인성문열황제
(體元應運世德昭
功哲惠仁聖文烈皇帝)

완안오걸매(完顏吳乞買)/
완안성(完顏晟)

천회(天會, 1123년 ~ 1134년)

1123년 ~ 1135년

공릉(恭陵)

3대

희종
(熙宗)
[59]

홍기찬무장정효성황제
(弘基纘武莊靖孝成皇帝)[60]

완안합라(完顏合剌)/
완안단(完顏亶)

천회(天會, 1135년 ~ 1138년)
천권(天眷, 1138년 ~ 1141년)
황통(皇統, 1141년 ~ 1149년)

1135년 ~ 1149년

사릉(思陵)

4대

-

해릉양왕(海陵煬王)[61]

완안적고내(完顏迪古乃)/
완안양(完顏亮)

천덕(天德, 1149년 ~ 1153년)
정원(貞元, 1153년 ~ 1156년)
정륭(正隆, 1156년 ~ 1161년)

1149년 ~ 1161년

해릉왕릉(海陵王陵)

5대

세종
(世宗)

광천흥운문덕무공
성명인효황제
(光天興運文德武功
聖明仁孝皇帝)

완안오록(完顏烏祿)/
완안옹(完顏雍)

대정(大定, 1161년 ~ 1189년)

1161년 ~ 1189년

흥릉(興陵)

6대

장종
(章宗)

헌천광운인문의무
신성영효황제
(憲天光運仁文義武
神聖英孝皇帝)

완안마달갈(完顏麻達葛)/
완안경(完顏璟)

명창(明昌, 1190년 ~ 1196년)
승안(承安, 1196년 ~ 1200년)
태화(泰和, 1200년 ~ 1208년)

1189년 ~ 1208년

도릉(道陵)

7대

-

위소왕
(衛紹王)[62]

완안과승(完顏果縄)/
완안영제(完顏永濟)[63]

대안(大安, 1209년 ~ 1212년)
숭경(崇慶, 1212년 ~ 1213년)
지녕(至寧, 1213년)

1208년 ~ 1213년

-

8대

선종
(宣宗)

계천흥통술도근인
영무성효황제
(繼天興統述道勤仁
英武聖孝皇帝)

완안오도보(完顔吾睹補)/
완안순(完顔珣)

정우(貞祐, 1213년 ~ 1217년)
흥정(興定, 1217년 ~ 1222년)
원광(元光, 1222년 ~ 1223년)

1213년 ~ 1223년

덕릉(德陵)

9대

애종
(哀宗)
[64]

순황제(順皇帝)

완안영갑속(寧甲速)/
완안수서(完顔守緒)

정대(正大, 1224년 ~ 1232년)
개흥(開興, 1232년)
천흥(天興, 1232년 ~ 1234년)

1223년 ~ 1234년

-

10대

소종
(昭宗)
[65]

말황제(末皇帝)[66]

완안호돈(完顔呼敦)/
완안승린(完顔承麟)

성창(盛昌, 1234년)

1234년

-

11. 추존 황제

묘호

시호

성명

재위 기간[67]

능호

비고

시조(始祖)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

완안함보(完顔函普)

941년 ~ 960년

희릉(熙陵)

태조 추숭, 금의 시조

-

연목현덕황제(淵穆玄德皇帝)

완안오로(完顔烏魯)

960년 ~ 962년

희릉(熙陵)

태조 추숭, 함보의 장남

-

화정경안황제(和靖慶安皇帝)

완안발해(完顔跋海)

962년 ~ 983년

건릉(建陵)

태조 추숭, 오로의 장남

헌조(獻祖)

순렬정소황제(純烈定昭皇帝)

완안수가(完顔綏可)

983년 ~ 1005년

휘릉(輝陵)

태조 추숭, 발해의 장남

소조(昭祖)

무혜성양황제(武惠成襄皇帝)

완안석노(完顔石魯)

1005년 ~ 1021년

안릉(安陵)

태조 추숭, 수가의 장남

경조(景祖)

영렬혜환황제(英烈惠桓皇帝)

완안오고내(完顔烏古迺)

1021년 ~ 1074년

정릉(定陵)

태조 추숭, 석노의 장남

세조(世祖)

신무성숙황제(神武聖肅皇帝)

완안핵리발(完顔劾里鉢)

1074년 ~ 1092년

영릉(永陵)

태조 추숭, 오고내의 차남, 태조의 부친

숙종(肅宗)

명예목헌황제(明睿穆憲皇帝)

완안파자숙(完顔頗刺淑)

1092년 ~ 1094년

태릉(泰陵)

태조 추숭, 오고내의 4남

목종(穆宗)

장순효평황제(章順孝平皇帝)

완안영가(完顔盈歌)

1094년 ~ 1103년

헌릉(獻陵)

태조 추숭, 오고내의 5남

강종(康宗)

헌민공간황제(獻敏恭簡皇帝)

완안오아속(完顔烏雅束)

1103년 ~ 1113년

교릉(喬陵)

태조 추숭, 핵리발의 장남

휘종(徽宗)

윤공극양효덕현공우성경선황제
(允恭克讓孝德玄功佑聖景宣皇帝)

완안종준(完顔宗峻)

-

흥릉(興陵)

희종 추숭, 희종의 부친

덕종(德宗)

헌고홍도문소무열장효예명황제
(憲古弘道文昭武烈章孝睿明皇帝)
명숙황제(明肅皇帝)

완안종간(完顔宗幹)

-

-

해릉양왕 추숭, 해릉양왕의 부친

예종(睿宗)

입덕현인계성광운문무간숙황제
(立德顯仁啓聖廣運文武簡肅皇帝)

완안종요(完顔宗堯)

-

경릉(景陵)

세종 추숭, 세종의 부친

현종(顯宗)

체도홍인영문예덕광효황제
(體道弘仁英文睿德光孝皇帝)

완안윤공(完顔允恭)

-

유릉(裕陵)

장종 추숭, 장종의 부친

12.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 코에이징기스칸 4에도 당연히 등장한다. 시나리오1, 시나리오3에 등장. 망하기 직전 금 장종 ~ 애종 시기로, 영토 자체는 만주와 화북을 장악해 잘 표현한다. 역사적으로는 쇠퇴기이지만 완안진화상이라는 먼치킨이 있는 데다[68] 당시 선진적이고 생산력도 좋은 지역인 화북을 장악했다는 저변도 있고 진천뢰가 있어 이 게임의 공성 종결자인 화포병를 징병할 수가 있어서 플레이하기 쉬운 세력.
  • 문명 5 시나리오 몽골의 비상에서 적국으로 등장한다. 제일 가까운 데에 있어서 1번 타자로 썰리는 역할(...). 비주얼은 람캄행 모습으로 이름이 장종으로 바뀌어서 등장한다. 중국식 발음이 Jin이라서 가끔 진나라로 오역도 한다.
  • 정충악비에서는 악비와 대립하는 악역들인 동시에 드라마의 중요한 한 축으로 등장한다.

13. 여담

금나라의 역사를 다룬 사서인 금사가 2016년 2월 29일, 드디어 4권짜리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69] 다만 가격이 무려 26만원이나 하는 데다가, 전작인 국역 요사와는 다르게 한자 원문이 빠져 있어서 약간 불완전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래도 척박한 국내 인문학 환경에서 금사 전체가 번역되어 출간된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는 셈.


  1. [1] 여진 통합은 1113년이고 칭제건원은 1115년.
  2. [2] 압카이 허허(ᠠᠪᡴᠠᡳ ᡥᡝᡥᡝ, Abka-i Hehe)라는 하늘의 여신을 섬겼다. 여진의 후예 중 하나인 만주족은 남성화된 천신인 압카이 한을 섬기게 된다.
  3. [3] 여진 문자로는 다음과 같다. 참조
  4. [4] 『동아시아의 역사II 북방민족-서민문화』,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25쪽.
  5. [5] 여진 문자로는 참조
  6. [6] 여진 문자 표기 참조
  7. [7] 실제 요나라의 국호는 딱히 강철을 의식하고 붙인 게 아니라 그냥 거란족이 살던 강인 요하에서 따왔다. 강 이름이 요(遼)이다.
  8. [8] '遼'라는 국호는 2대 황제인 태종 야율덕광이 화북으로 진출하면서 기존의 국호였던 '거란'을 漢化한 것에 불과하다. 이후에도 '거란'과 '요'라는 국호가 倂稱되지만, 정식국호는 '대거란국'이다. 또한 강 명칭에서 나왔다는 것은 좀 더 연구해봐야 하는 것인데, 이전시기에 나오는 '遼河''遼水'라는 곳이 지금의 '라오하'와 반드시 동일한 곳이라는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오래된 기록에서 '遼'라는 명칭은 '遼山'을 기준으로 한다.
  9. [9] 《흠정금사어해》를 보면 청대의 금은 아이신(Aisin)이었다.
  10. [10] 다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조상이 신라 출신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영유권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한 가능성도 있다. 실제 과거에는 '너희 땅은 우리 왕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사돈의 팔촌(...) 땅으로 우리 왕이 정당하게 상속받은 땅인데 너희가 불법 점거하고 있다. 그러니 내놓지 않으면 전쟁이다'는 식으로 영토 정복을 제법 했다. 물론 이런거 다 떠나서 금 황실 시조가 한반도에서 넘어왔다고 일부 환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여진족 전체가 신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계 여진족설 반대 버전
  11. [11] 사실 이렇게 자기 시조가 먼 이방의 왕족 후예라는 건 대다수 건국설화의 주요 레퍼토리다. 그 땅 출신이라고 하면 사학 연구를 통해 사실 별 볼일 없는 놈이라고 밝혀져 정통성에 타격을 받기 쉬운데, 검증하기 어려운 먼 나라 왕족이라고 주장해 위신을 세우는 전형적인 설화다. 다만 금나라 시조 출신에 대한 기록은 외국의 기록에도 있어 교차검증이 가능하기 때문에 단순한 설화라고 보긴 힘들다.
  12. [12] 만주에서 나는 철 덕분에 철의 공급이 원활했다고. 이것은 고구려청나라도 마찬가지.
  13. [13] 말을 쇠사슬로 연결하는 이유는 한 명이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을 못치게 하겠다는 전의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느려터진 중장기병이 투사무기에 엄청나게 얻어맞아 대열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시도였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이렇게 할거면 애초에 전차를 만드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물론 저정도로 중무장시킨 말로 전차를 끌게만들면 더 끔찍한 속도가 나왔을 것이다. 지형 문제도 있고 속도로도 전차 특유의 충격력을 잡아먹었을테고, 백병전에서도 위력을 장담할 수 없다. 여진족이 기마술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종족이기도 하고.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실제로 말을 쇠사슬로 연결했을 경우 3마리 중 1마리가 전사하면 다른 2마리도 죽은 말의 시체 때문에 행동불능에 빠진다는 점을 들어, "쇠사슬로 연결했다"라는 문구는 실제로 쇠사슬로 연결한게 아니라 단지 말 세 마리가 한 조를 이루어 일사불란하게 행동한다는 점을 비유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4. [14] 의외로 들리겠지만,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나라들은 이런 전법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동시대 유럽에서도 기사들이 종종 서로의 과 말 사이에 쇠사슬을 연결해서 돌진하기도 했는데, 이런 전법은 원래 보병이 대다수인 적군에게 고도의 충격력으로 밀어붙여서 대형을 무너뜨리는 일반적인 기병 전술을 극대화한 것으로, 보병들이 아예 도망칠 수 있는 여지를 막아서 적의 대형을 확실히 무너뜨리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런 전술은 기병들 간의 템포가 맞아야 효과를 발휘한다는 문제가 있는데, 만일 어느 한 이라도 스텝이 엉키는 순간, 쇠사슬에 연결된 말들이 줄줄이 넘어지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전술이었다. 그래서 금나라건 유럽기사들이건 간에 자주 사용한 전법은 아니다.
  15. [15] 송사 三朝北盟會編 卷36, 靖康 원년 2월 조.
  16. [16] 과거 제도를 실시해 관리들을 선발했지만 과거 제도로 등용된 한족 사대부들은 중간직 위주로 둥용되었고 최고위직에 등용되기 힘들었다. 최고위직은 10여개 성씨의 여진족 귀족들이 계속 해먹었다. 금나라 말기까지 한족 사대부들을 중하게 쓰지 않았던 점은 국정의 전문성 향상에 지장을 줬을 뿐 아니라 민족 화합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17. [17] 다만 이미 장종 때부터 쇠퇴는 드러난 상황. 사실 금 세종 때가 제대로 된 리즈 시절이었지만 화북 왕조인 데다 전성기가 워낙 짧아서.(...)
  18. [18] 이미 요나라 때무터 전연의 맹으로 인해 막대한 셰폐를 갖다바치다시피 했고 금나라가 들어서자 강남 개발에 주력하여 더 많아졌다. 더군다나 남송때는 금나라한테 화북 지역을 빼앗겨 영토도 인구도 줄었지만 그럼에도 남송은 멀쩡했다.
  19. [19] 공(貢)이라는 글자의 뜻이 짐작되다시피 조공을 바친다, 공녀를 바친다 할 때 그 공 자인 만큼 강한 수직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20. [20] 경제적인 요건도 있지만, 그 밖에도 해릉양왕이 저질러 놓은 문제들이나, 거란족의 반란 등으로 금의 사정이 급했다.
  21. [21] 인구 조사에 의하면 여진족 인구는 600만인데, 한족이 (금나라 영토니 당연히 화북에만) 4400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여진족 인구는 이것보다 훨씬 더 적은 약 70만 정도일 가능성도 있다.#
  22. [22] 그나마 금나라는 이정도나마 여진족의 비율이 있었지 후대인 원, 청의 경우에는 더 심했다. 이들은 화북뿐 아니라 강남까지 차지해 인구가 더 많았기 때문
  23. [23] 그러나 남송의 사신이 한탄할 정도로 화북의 한족들 역시 여진족의 의복이나 풍습을 많이 받아들였다. '오랑캐와 다름없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문화가 반드시 한방향으로만 흐른건 아니었던 것이다.
  24. [24] 중원 관내에서 유목이 가능했던 환경이 한때 있었으나, 이는 주나라 때 끝났다.
  25. [25]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땅을 가진 여진족과 땅을 가지지 못한 여진족이 나타난 것이다. 땅없는 여진족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건 아니면 그냥 부랑민이 되건 해야 할텐데 양쪽 모두 결국 부유하지 못한건 사실이다.
  26. [26] 여기에 더해서 금세종 시기에는 한족을 대상으로 한 세금도 증가했다. 땅에 등급을 매겨 세금을 거뒀는데 문제는 높은 세금을 내는 등급은 한족이 많이 배정되었다. 그나마 금세종 시기에는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공정하게 매겨보려고나 했지 그 이후는 뭐...
  27. [27] 아이러니하게도 상술한 것처럼 한족들에게 자신들의 옷과 변발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던 만주족의 청나라가 그러한 혼란을 더욱 심하게 겪었다. 청나라는 금나라와 달리 중국 남부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했으며 금나라의 여진족보다도 더욱 오랫동안 중원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28. [28] 이 점은 독특하게도 비슷한 입장이었던 북위와는 다른 점인데 북위도 화북왕조+한화 라는 점에서는 금나라와 유사했지만 한화에 있어서만큼은 북위는 중앙정부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그에 따른 반발도 많았지만 금나라는 중앙정부는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 그리고 이 때문에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국가면서도 한족 위주로 돌아갔다는 것 때문에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면서도 결국 선비족의 반발을 샀고 금나라는 한족의 반발을 샀다. 그나마 금나라는 이게 멸망의 원인은 아니었는데 북위는 이것이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9. [29] 적어도 거란족은 여진족처럼 북방 유목민족이란 데서는 여진족이 한족보다 더 가깝긴 했다. 원래부터가 국경 하나 넘으면 있기도 했고. 물론 그런 점이 금나라 치하 거란족의 반여진족 감정을 완전히 커버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정도로 따지면 훗날 금나라 치하의 거란족이 대거 투항하게 되는 몽골 제국의 몽골족이 더더욱 거란족과 가까웠다.
  30. [30] 여진. 금사에서는 여직으로 기록되어 있다.
  31. [31] 결혼. 즉 여진-거란 간의 통혼과 혼혈을 의미한다.
  32. [32] 국경주둔군 10만, 중앙군 25만, 다른 지역에서 온 지원군 15만 등. 이중 보병이 35만, 기병이 15만 정도로 짐작된다
  33. [33] 이는 칭기스 칸의 정신교육이 효과를 봤다는 것을 뜻한다. 몽골의 바토르(결사대)들은 화공을 당해 갑옷이 불타는 상황에서도 불을 끌 생각조차 하지 않고 적에게 돌격했다고 한다. 뭔 로봇이냐?가장 고통스러운것이 화상인데.
  34. [34] 개봉에서 서남쪽으로 120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35. [35] 균주성에서 남쪽으로 4km 지점에 있다.
  36. [36] 가령 금인들이 기호품으로 사용하던 의 수입이 크게 늘어나 돈이 남송으로 흘러가자 적자를 줄이기 위해 자체적으로 차를 재배해봤지만 품질이 좋지 않아서 외면 받고 차 재배를 포기했다.
  37. [37] 출처 : 요 금의 역사<이계지 저>
  38. [38] 전통적인 한족 의상은 우임이다.
  39. [39] 원시적 수렵 생활을 하다가 금나라를 세운 생여진과 달리 거란은 금이 세워지기 한참 전부터 이미 중원의 문화를 수용하고 그것을 응용함으로서 수준 높은 불교 문화를 꽃피우고 유학을 장려하고 있었다.
  40. [40] 농경민이었던 한족과 발해인을 다스리던 곳
  41. [41] 금태종 항목 참조.
  42. [42] 장종의 경우 그 솜씨가 북송휘종과 버금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43. [43] 단, 여기서 칭하는 고려는 북흑수가 신하를 청한 고구려였다는 설과 신라-고려가 고향인 금나라의 시조 완안함보라는 이설이 있다.
  44. [44] 사실 고려에게도 깜짝 놀랄만한 일이긴 하지만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군사적으로 근자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진에게도 고려와의 전쟁은 꽤 충격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어 고려에 저항했음에도 오히려 삶의 터전을 짓밟고 자신들의 생존권마저 피탈당하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하물며 이 전쟁이 영토 전체적으로 벌어진 전쟁이 아니라 여진족 강역에서 벌어진 소모적 국지전일 뿐이었다. 당연히 이는 여진에게 뼈 아픈 교훈으로 남아 후대 요와 북송을 연달아 멸망시키며 기세를 탄 시기에도 고려의 털끝하나 건들지 않았다.
  45. [45] 다만 금나라는 한반도가 아닌 중원에 그 목적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고려와의 전선은 안정화시키는 것이 그들의 주 의도였다. 고려 입장에서도 금의 군사력이 요와 북송을 연달아 털어먹을 정도였으니 외교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 사대를 결정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고려와의 전쟁이 여진에게도 꽤 공포심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46. [46] 금사 외국열전 고려조 수국 원년 11월.
  47. [47] 금사 외국 열전 고려조 천회 2년.
  48. [48] 이전까진 서로 호칭 때문에 계속 국서를 거절 해왔다. 인종 3년 5월 임신일 조에는 고려가 보낸 국서엔 표문이라 하지도 않고 신하라고 칭하지도 않았다고 해서 거부했다고 한다.
  49. [49] 제후가 천자를 만나러 가는 것을 이른다.
  50. [50] 북쪽 요새. 금나라를 비꼬는 것.
  51. [51] 고려는 금의 제후이니 금 황제의 신하이다. 그러니 제후가 보낸 신하는 신하의 신하, 배신(陪臣)이다. 하지만 고려는 무시하고 그렇게 쓰지 않은 것.
  52. [52] 고려사절요 권십일 의종 장효대왕 을유 19년.
  53. [53] 하필이면 의종의 생일을 축하하러 보낸 사신이었다.
  54. [54] 고려에서도 사정을 얘기해선 될 일이 아니라고 여겼는지 사신으로 간 유응규는 아예 단식농성을 했다. 처음에는 명종의 정당성을 묻던 금세종도 제후국의 사신이 굶어죽으면 쪽팔릴 일이라 3일째에 책봉을 약속해줄테니 일단 뭐라도 좀 먹으라고 설득했지만 그래도 요지부동 7일째에 유응규가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자 결국 GG치고 승인해줬다. 이 일로 인해 유응규는 고려로 돌아가자 영웅이 되었고 금세종도 이런 유응규의 충성심에 감탄해 사신을 보낼때마다 유응규의 안부를 물었다고(...).
  55. [55] 이 때는 아직 칭기즈칸의 통합 전이었긴 했다.
  56. [56] 후에 위기에 처한 금나라가 사신을 보내 옛 사대관계를 언급하며 도와줄 것을 요청했지만 고려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57. [57] 4번째 사진부터 13번째 사진들까지 시조 완안함보부터 강종 완안오아속까지의 추존 황제 초상화, 15번째 사진부터 역대 황제 초상화.
  58. [58] 또는 화릉(和陵)
  59. [59] 또는 민종(閔宗)
  60. [60] 또는 무령황제(武靈皇帝)
  61. [61] 내란 중에 피살. 금나라 최악의 폭군. 사후 서인으로 격하되었다.
  62. [62] 또는 위왕(衛王) 혹은 폐황제(廢皇帝). 정변으로 피살당함.
  63. [63] 允濟(윤제)에서 永濟(영제)로 바꿨다.
  64. [64] 또는 의종(義宗)
  65. [65] 정식 추승은 아니고 속자치통감에 따르면 그를 따르던 친족과 병사들이 올렸다고 한다.
  66. [66] 이 황제의 재위 기간은 하루도 되지 않았다. 중국 역사상 최단기간 재 위한 황제. 항목 참조.
  67. [67] 여진족 추장
  68. [68] 시나리오1 한정으로 야율초재가 연경의 인재로 나온다.
  69. [69] 예전에도 금사 번역본이 있기는 했지만, 내용을 죄다 잘라먹은 것이어서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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