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중국의 역사
中国史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기원전 206 ~ 907년

907년 ~ 1644년

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907년 ~ 1644년

907 ~ 1279

오대십국(五代十國)

카라 키탄/대거란(大契丹)
서요(西遼)

당항(黨項)

송(宋)

북송(北宋)

백고대하/서하(西夏)

남송(南宋)

안춘 구룬/대금(大金)

1270 ~ 1368

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대원(大元)

1368 ~ 1644

대명(大明)

중국의 역사

북송/남송/서하

여진족

몽골 제국

(Jin Dynasty)[1], (Anchun Gurun)

1. 개요
2. 국명에 관하여
3. 발흥
4. 정치
5. 왜 남송을 멸망시키지 못했나
6. 위기
7. 몽골 제국과의 23년 공방전
7.1. 전기 : 1211년~1215년
7.2. 징기스칸의 죽음 (1227년) 그리고 금나라의 대비
7.4. 몽골군의 도하, 그리고 우회 공격
7.5. 수도로의 처절한 진군, 그리고 궤멸
7.6. 개봉 포위전
7.7. 채주 공방전
7.8. 그 외
8. 문화
9. 고려와의 관계
9.1. 초기
9.2. 칭신
9.3. 칭신 이후 ~ 금나라 멸망
9.4. 그 밖의 이야기
10. 역대 황제
11. 추존 황제
12.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정강의 변을 일으키며 12세기 동북아 정세를 뒤흔들었던 다크 호스 왕조(1115년 ~ 1234년).

야! 신난다~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 개조는 완안아골타. 수도는 초기에 상경 회령부였으며 후에 금나라의 4대 군주인 해릉왕이 연경으로 옮겼다.[2] 황성은 완안(完顔). 이건 한국식 독음이고, 금계종의 여진문사전에 따르면, 금대 여진어로는 온이안(Won-{g}ian)이라고 읽었다고한다. 만주어 발음으로는 왕야(Wanggiya) 또는 완얀(Wanggiyan) 중국식 황성은 왕(王)씨이다. 원조비사몽골의 기록에서는 '주르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을 몽골어로 부른 이름이다. 금대 여진어로는 쥐우쉬어(ʤuʃə) / 주-쉬언(ʤu-çiɛn)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청대 만주어로는 '주션(jušen)'.

2. 국명에 관하여

금은 중국식 국호이고, 자신들의 언어인 여진어로는 암반안취운 구룬(Amban Antʃun Gurun), 만주어로는 암바 아이신 구룬(Amba Aisin Gurun)이라고 불렀다. 모두 대금국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국호인 금(Antʃun)은 안출호수(按出虎水)에서 유래했는데 안출호(按出虎)는 금대 여진어로 금을 뜻하는 'Antʃun'을 음차한 것이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Won-{g}ian Akutta)가 요나라는 빈철(賓鐵)로부터 국호(國號)를 정했는데, 그것의 견고함을 취한 것이다. 빈철은 견고하지만, 종국엔 녹이 슬어버리니 오로지 완안부의 색인 백색을 띄는 금만이 변치 않고, 녹슬지도 않는다며 금(Antʃun)을 국호로 삼았다.[3], 《흠정만주원류고》편찬자들은 금조의 국호가 안출호수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을 안출호(Antʃun)가 금을 뜻하는 것인지 알지못해[4] 이 주장을 억지라고 기술하면서, 금 시조 함보가 신라에서 나온게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신라 왕성인 김씨를 국호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기술했다.

3. 발흥

원래 여진 자체가 발해 멸망 뒤로 거란족에게 그저 죽어지내던 민족이었는데, 요나라가 막장 트리를 타면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해 12세기 초 이미 통일을 완수했다. 이후 금태종 때 거란에게 맨날 터지던 송나라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송나라는 그간 자신을 괴롭혔던 요나라에게 한방 먹일 기회라고 생각해 기쁘게 받아들였다. 다음 목표는 뻔히 송나라라고 반대한 신하들도 있었지만 요나라를 향한 증오가 커서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1125년에 요나라를 멸망시킨다. 이후 북송송휘종이 잔머리를 굴려서 요나라의 잔당들과 배신을 때리자, 1년 만에 송나라의 수도 개봉(현재의 카이펑)을 박살내고 화북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 때 송나라는 임안(현재의 항저우)을 수도로 하는 남송으로 그 세력이 약화했고, 금나라에게 황제·상황·황후·황자·황녀가 다 끌려갔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한다.[5] 이때 끌려간 사람이 수호지의 등장 인물인 황제 송휘종.

참고로 건국으로부터 화북을 점령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12년이다. 그야말로 다크 호스 왕조.[6]

다만 재미있는 점은 요나라송나라 모두 변방(전자는 서쪽, 후자는 남쪽)으로 도망간 황실에 의해 재기에 성공하였다. (서요, 남송) 시즌.2

맹안모극(猛安謀克, Miŋgan Moumugə)이라는 유목 민족 특유의 군사 조직이 힘을 발휘했고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금나라의 철기병은 매우 막강했기 때문에 20년도 안 지난 기간에 요나라와 북송을 무너뜨리고 화북을 얻었다.[7] 1126년, 송나라의 지방관이 전공을 세울 목적으로 금나라 사신 일행을 공격했는데 사신을 호위하던 17명의 기병과 궁기병들에게 송나라 보병 2000명이 처발렸다는 기록[8]이 있다.(...) -그 금나라를 혼자서 쳐 바른 척준경은...- 거기에 북송을 공격하면서 얻은 공성 무기들과 초기 형태의 화약을 노략하고 그것을 응용하여 기상천외한 신무기들을 개발했는데 대표적으로 로켓의 시초라 할 비화창(飛火槍)과 화약 작렬탄인 진천뢰(震天雷)가 금나라 때 나온 무기들이다.

금나라 철기병 복원도.

4. 정치

기본적으로 요나라와 비슷하게 분리적 관인 통치를 했다.건국 초창기에 요나라와 발해의 제도를 많이 참조했다.

초창기에는 한자와 거란 문자를 본떠 여진 문자라는 독자 문자를 개발하는 등 여진족의 자주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중원에 정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진해서 유교를 받아들이고 한족을 적극 기용, 남송이랑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기가 힘들어져 버렸다.

중원을 침략한 초창기에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불태웠으며 산동에 있는 공자 사당인 공묘(孔廟) 역시 공자가 뭔지도 모르는(...) 여진족 병사들이 도굴하고 파헤치려던 것을 마침 지나가던 발해인 출신 금나라 관료가 그 광경을 보고 "대성인(大聖人)이 계신 곳이다."라고 뜯어 말려서 겨우 무사했다. 중원에 정착하고 한족 왕조화된 이후에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유학을 장려하였고 황제가 공자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금나라가 점령한 곡부에 거주하는 공자의 직계 자손들에게 '연성공'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다른 한족 왕조들처럼 이들을 우대했다. 이는 유목 민족 출신의 정복 왕조 군주도 일단 중국을 지배하고 유교의 내용을 접하게 되면 제왕의 통치와 군림을 뒷받침해주는 이데올로기로서 충과 효를 강조하는 유교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복 왕조의 군주조차도 유교를 국시로 받아들이게 되고 유교를 대표하는 공자를 성인으로 특별 대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 가문의 정통성이 좀 꼬였는데, 금나라가 중원을 공격하기 직전 공자 가문은 남송 정부와 함께 곡부를 떠나 남하해서 절강성에 터전을 잡고, 그 곳에서 남송이 부여한 연성공 작위를 얻어서 공자 후예로 인정받았다. 같은 공자 가문에서 2개의 연성공이 나오게 된 것. 금나라가 인정한 가문을 '북종', 남송이 인정한 가문을 '남종'이라고 부른다. 이후 쭉 남북종으로 나뉘다가 원세조 쿠빌라이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남종 측에게 곡부에 돌아가 가문을 이으라고 명하였으나, 남종 측에서 연성공 직을 반납하고 북종 측에게 본래 공자 가문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정통성 문제가 정리되었다. 이 부분은 공자 문서의 '공자의 후손' 항목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송사전 금 열전에 따르면 초창기인 금태종 때만 해도 완안올출로 하여금 정복지의 한족 백성들에게 중국식 복장을 금지시키고 변발령을 내려 따르지 않으면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나중에 가면 그런 거 없고 1150년에 중국식 의복 착용 금지령을 폐지하고 황제와 관료들의 조복, 공복, 제복 및 황후와 비빈들, 명부의 복장은 모두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 북송 황실의 면류관 등 다수의 황실 제복들이 카이펑에 남아서 금나라 황제들과 관료들은 그 의상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금희종이 처음으로 중국식 면류관과 곤룡포를 입었다. 해릉왕 때부터 한족 문물들을 급속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금세종 때 다시 여진의 의상을 고수하지만, 장종 이후로 다시 급격한 한화 현상이 일어났다. 하지만 중국 사극이나 무협 드라마에는 이런 점을 무시하고 한족화한 금나라 말기임에도 금나라 출신 인물들은 벙거지를 쓰고 가죽 옷을 입은 전형적인 북방 민족 복장을 하고 나온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 사극무인시대에서는 고증에 맞게 금나라 관리들이 송나라식 관복을 입고 등장한다. 서민들은 흰색 의상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금세종은 여진족들의 복장과 풍습이 한족의 것과 유사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한족 복장의 착용과 머리 모양을 법으로 금지도 하였지만 흐지부지했다. 당시 금나라의 상류층을 중심으로 남송 의복을 입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나온 정책이었다. 금나라는 남송에게서 조공을 받는 등 상국 노릇을 했지만 지배층을 중심으로 남송 문화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남송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고 세종 이후 재정이 급격하게 나빠진다. 후대의 청나라는 금나라가 한족 문화에 빠져버린 것을 금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보고 중원에 들어오자 만주족의 옷과 변발을 한족에게 강요하였다.

여진 문자는 금세종의 보급 노력에도 차츰 여진족 스스로가 배우는 것을 경시하고 한자 사용을 더 선호했다.(...) 초창기의 여진 부족 체제에서 유래한 정치 제도는 유명무실화하고 경의와 사부를 설치하여 한인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실시했다.[9] 또 중국식 신관제를 반포하고 중국식 백관의 의제와 조복을 채택했다. 초기에는 악비 같은 걸출한 무장이 남송에 있어 이래저래 고생했지만 나중엔 혼인도 빈번해 적인지 아군인지도 애매한 입장이었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기를 쓰고 공격은 했다.

5. 왜 남송을 멸망시키지 못했나

금세종부터 금 장종까지 근 50년이 조금 안 되는 번영기를 누렸다. 다만 이미 장종 때부터 쇠퇴는 드러난 상황. 사실 금 세종 때가 어마어마한 리즈 시절이었지만 화북 왕조인 데다 전성기가 워낙 짧아서.(...)

그러나 그렇게 급하게 힘을 키운 금나라는 내부적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일단 금 태종의 사망과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등의 활약으로 금군이 강남에서 쫒겨나 화북으로 물러간 뒤로는, 금은 남송에게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세폐 등을 받아냈지만 남송을 멸망시킬 능력은 없었다. 금은 분명히 그 이후에도 남송의 멸망을 노리는 군사 작전을 시도한 바가 있지만 다 실패로 끝났다.

남송을 치는데 있어 금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남송의 경제력이 믿을 수도 없을 만큼 가공한데 반하여,[10] 회남 이남 땅을 남송에 내주는 금나라의 경제력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결함 국가 수준이었다. 금의 해릉양왕이 소위 벌송(伐宋)군을 일으켜 남송을 공략하려다가 모두 실패했으며 나중에는 송군이 아닌 반란군에게 죽었고, 후퇴하는 금군의 뒤를 친 남송에게 숙주(宿州)까지 빼앗기고 말아, 해릉양왕의 뒤를 이은 금세종은 장군 복산충의(僕散忠義)를 시켜 이를 수복시켜서 즉시 숙주를 되찾았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금 세종은 되려 서둘러 정전 이야기를 추진하라고 명령했다.

사실 일시적인 기세를 이어가는 일이면 몰라도 장기적인 전쟁에 있어 경제력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남송이 보내는 세공(歲貢)에 크게 의존하는 금나라는 남송과 전쟁이 벌어지면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이 나올 뿐만 아니라 남송의 경제적 지원도 모조리 끊긴다. 남송 정도의 나라를 무너뜨리려면 장기전은 필수적인데, 금은 장기전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금 세종이 추진한 화약에 따르면 남송에서 금에게 주어야 할 물건은 은 20만 냥, 비단 20만냥이었는데, 이는 일전의 은 25만 냥, 비단 25만 냥에서 줄어든 액수이며, 세공(歲貢)이라는 칭호에서 세폐(歲幣)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즉 군신 관계를 숙부와 조카 관계로 개선시켰다. 금나라는 그만큼 다소 양보를 하더라도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남송의 지원을 받아내야 할만큼 절박했다.[11]

물론 남송도 북벌하여 금나라를 칠만한 수준이 아니라서 남송의 북벌군은 번번히 금군이 격퇴했지만, 수비는 가능했다. 결국엔 금이나 남송이 서로의 공격은 막을 수 있어도, 치명상을 주기엔 힘들었다.

금나라의 2번째 문제로, 터무니 없이 적은 여진족의 숫자 때문에 민족 갈등의 문제가 있었다. 여진족은 금나라 인구의 7분도 1도 안 되고,[12] 문화 수준이 본래 낮은데 극단적인 속도로 지배층에 올랐기 때문에, 한족(漢族)의 바다에 표류하는 형태라 어느새 여진족들이 자기네의 낮은 문화 등을 부끄러워하는 풍조가 생겼다.여무룩 또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여진족의 수렵 경제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농경으로 바뀌면서,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는 여진족들이 나타났다.

금 세종은 여진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그들의 빈곤도 없애야 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관유지에서 농사를 짓던 한족들의 땅과, 세금을 안 내는 토지를 빼앗아서 여진족에게 줬다. 그런데 이렇게 여진족을 도와주다보니 절대 다수인 한족들의 반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게다가 금나라에 의해 조국을 잃은 거란인들도 복잡했다. 여진족은 거란족을 어느 정도 대우하면서 여진족과 거란족의 통혼을 장려했는데, 어떻게든 거란족을 끌어들이고 숫자가 적은 여진족의 단점을 보완하려고 했다.[13]

사자를 보내어 이들(거란인)을 이주시켜, 여직인(女直人)[14]과 같이 살게 하고, 남혼여빙(男婚女聘)[15]을 점차로 풍속화하는 것이 장구지책(長久之策)이다.

─ 대정(大定) 17년(1177) 세종의 조칙 ─

하지만 이 방책은 실패했다. 회유책과 강경책을 반복한 금나라의 거란족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세종은 거란인과 통혼을 장려하면서도 거란족 관료수를 줄였으며, 세종의 뒤를 이은 장종(金章宗)은 마침내 거란 문자 사용까지 금지시켰다. 그 결과로 거란족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몽골의 침입 당시 거란족은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협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이 당시 저 멀리 서방에 과거에 도망친 거란인들이 세운 서요의 존재도, 거란인들의 민족성이 남은데 영향이 있을 것이다.

6. 위기

세종때는 그나마 통치가 잘 되었지만, 이후 가세가 기울게 된다. 게다가 이때 최강의 국가가 북쪽에서 내려오면서 금나라는 방비를 위해 방위비를 많이 제출함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야금야금 뺏기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에서도 남송을 틈만 나면 공략하며, 남송의 도움도 못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몽골과 남송의 연합을 불러와 금나라의 멸망에 기여를 하게된다.

7. 몽골 제국과의 23년 공방전

참고 자료

7.1. 전기 : 1211년~1215년

1208년 금나라의 장종이 사망하고 위소왕이 즉위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211년 칭기스 칸은 쿠릴타이에서 금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모든 병력(추정치 약 9만-12만명)을 총동원하였다. 봄에 초원으로부터 이동을 시작한 몽골군은 가을이 시작할 무렵 금나라 영내로 쳐들어갔다. 금나라는 이미 수년간 몽골이 침입할만한 지역을 따라 요새를 쭉 박아두었지만 진지하게 대비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중 가장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던 오사보에서 벌어진 첫접전에서 제베는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우회하여 후방으로부터 기습하는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오사보가 함락되며 방어선이 뚫리자 금의 최고사령관 완안승유는 흩어져있던 병력을 야호령에서 집결시켰다. 야호령에는 추정치 약 40만-50만명 [16]의 금군이 집결하면서 전쟁의 승패가 걸린 결전이 벌어지는데... 금군이 수적, 지형적 이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망했어요. 칭기스 칸은 일부의 군대를 산의 넘어 우회시켜 수적으로 우세인 적을 포위공격을 하는데... 기습을 당한 금의 후방이 붕괴되는 사이 전방도 몽골군에 의해 밀리기 시작하면서[17] 금군은 포위된채로 학살을 당한다. 국운이 걸린 전투에서조차 단순한 우회기동으로 뒤를 보일정도니 금군의 한심한 지휘능력 수준을 알만하다. 금군은 리즈 시절 총 동원 가능한 병력 수가 약 90만-100만 가량으로 짐작되는데, 이 한번 전투에서 전체 병력의 절반을 시원하게 말아먹는다. 완안승유는 금의 남은 정예병을 회화보에 모아 다시 3일간 싸우지만 또 털리고... 이후 몽골군은 금군에 대한 야전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게 된다. 1212년과 1213년에도 재차 침입하였는데, 3년에 걸친 원정의 결과로 만주와 요동을 비롯한 화북지방을 밀어버렸다[18]. 가장 큰 이득은 금나라 북부에 있던 목장을 점령함으로써 충분한 양의 말과 목초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19], 또한 거란족들의 협력을 얻어 부족한 병력을 대거 증강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20].

1213년 칭기스 칸은 마침내 기습을 통해 거용관을 뚫고 만리장성을 돌파했고 금의 수도 연경(베이징)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금 내부에 분란이 생겨 위소왕이 암살당하고 선종이 즉위했다. 연경 포위는 다음해초까지 계속되었는데 공성전에 자신이 없었던 칭기스 칸은 선종의 화의 요청을 받아들였으며 대신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급한 불은 껐다고 생각한 선종은 1214년 6월 수도를 연경(베이징)에서 개봉(카이펑)으로 옮겨 몽골의 남침에 대비하고 연경에는 황태자와 중신들을 남겨 지키게 했다. 이에 자극받은 칭기스 칸은 1214년 가을 국경지대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트집잡아 다시 남하한다. 1215년 연경을 지키던 완안복흥은 끝까지 항쟁을 했지만 연경에 기어이 침투한 몽골군이 방어용으로 쓰려 했던 살상용 불기름에 불을 놓아 불기둥이 치솟고 민심이 흉흉해져 사람들과 병사들이 약탈과 강도, 강간을 벌이는 등 생지옥으로 변하자 절망하여 결국 자결을 하였고, 그와 같이 있었던 석말진충은 부하들을 데리고 탈출하여 개봉에 도착했으나 패전의 책임으로 처형을 당했다. 연경이 함락되었고 금은 화북,만주,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상실하였으며, 이에 따라 거란을 비롯하여 여진에 복속되었던 이민족들이 몽골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이 시기 금나라의 지배력이 아예 사라진 만주지역에서는 야율유가가 만주, 한반도 북부 등에 남아 있던 거란족을 수습하여 동요(東遼)를 세우고 이를 진압하라 명령을 받은 장수 포선만노는 야율유가와 싸우고 패하자 동경요양부에서 동진을 세웠다.

7.2. 징기스칸의 죽음 (1227년) 그리고 금나라의 대비

그러다가 징기스칸은 죽게 되고, 그 아들인 오고타이가 금나라를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황하 북부를 초토화 시킨 징기스칸으로서는 남부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당시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길은(물론 사방에서 숭숭숭 뚫려서 오긴 하지만) 크게 보면 두 곳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황하 이북 지형에서 바로 황하를 건너 남하해서 수도로 어택땅 하는 것이고, 둘째는 좀 더 서쪽으로 움직여 봉상(鳳祥), 보계(寶鷄) 방면에서 동진해 동관을 돌파하는 길이었다. (우회) 이미 황하 이북 지역은 유린 당한대로 유린당한 금나라는 낙양에서 개봉까지 이르는 길에 20만 대군을 배치해 황하 이남을 막고 동관에 군사를 두어 몽골군을 대비하였다.

사실 루트를 잘 보면 남송의 영토가 포함되어 있는데, 사실 남송과 금나라는 정강의 변 이후부터 대립하는 관계였기에, 남송도 이를 갈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이는 금나라의 패인이 되었다.

7.3. 완안진화상, 완안합달, 금애종 vs 오고타이, 툴루이, 수부타이

사실상 금나라 vs 몽골 제국의 하이라이트

그런데 하늘이 금나라를 아직도 포기 하지 않는지 완완진화상이라는 명장을 내려주었고, 역시 금나라 최후의 명장 중 하나인 완안합달 그리고 시대를 잘못 타고났지만 분명 명군의 자질이 있었던 금애종이 있었다.

본래 완안진화상은 군중의 일을 처리하다가 일이 잘못 되어 감옥에 들어갔는데, 본래는 사형죄였으나 형이 확실히 결정되지 못해서 18개월 동안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금애종은 그를 꺼내주려고 했지만 함부로 죄인을 사면하면 안된다는 지적이 있어 석방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완안진화상의 종형 완안사열이 병으로 죽자 금나라 황제 애종은 완안진화상을 석방하게 된다.

황제의 은혜로 기회를 받고 무시무시한 몽골군에 맞서 싸울 선봉으로 나서게 된 완안진화상은 목욕재계를 하고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는,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타곤 흡사 목석처럼 무뚝뚝하고 태연하게 나아가 군사를 지휘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이 대창원에서 400명의 병사를 이끌고 8,000여명의 세계 최강 몽골군을 압도적으로 박살내는데 성공했다. 그 천하의 몽골군을 상대로 말이다.

사실 대창원의 승리는 몽골군이 1221년 파르완 전투에서 잘랄 웃 딘에게 패배한 이후 제대로 된 완패 중에는 처음의 완패이자, 파르완 전투는 6만에 가까운 병력이 열세인 몽골군을 격파한 전투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족한 전력으로 월등한 몽골군을 격파한 최초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몽골에게 하북 전지역을 털린 금나라로서는 말할 것도 없는 승리였다.

물론 이에 금나라 황제 역시 친필로 완안진화상의 공을 칭찬하고, 정원대장군 직을 내려주었다.

참고로 이때 완안진화상이 이끈 부대는 바로 충효군(忠孝軍)이다. 충효군은 금나라 말기 최강의 정예부대로,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나이만, 강족, 위구르 족, 그외 기타 거란 여진 등등까지 섞인 다민족 혼성부대로, 기본적으로 말을 탈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병전력이 부족한 말기 금나라에 있어서 아주 강력한 전력이었다. 충효군을 이끈 사람이 완안진화상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충효군은 그 특성상 대단히 거칠고 사나워 전투력이 강해도 제어하기 어려운 부대였다. 하지만 완안진화상은 사납기만하고 규율이라곤 없는 그 충효군을 이끌면서 일어서고 앉고, 나아가고 물러나고, 전투할떄 비바람처럼 돌진하기를 모두 격식에 맞춰 완벽하게 해내며 무뢰배처럼 함부로 약탈하는 것도 막으니, 군중에서는 당연히도 완안진화상을 중하게 여겼다.

몽골군은 참패를 당했지만, 금나라를 꼭 점령하고 싶었는지 1년이 지난 1229년 10월, 몽고군은 경양을 포위하고 다시 한번 대창원을 거쳐 진입하려는 준비를 했습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약간 늦은 시기, 개봉 북쪽에서 금나라 장군 무선이 지키는 위주 방면으로 몽골에 협력하는 한인 가문 출신의 사천택을 보내 공격하였다.

그러자 금나라 역시 장군 완안합달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위주를 돕게 하는 한편, 대장군 이랄포아(移刺蒲阿)에게 군사를 맡겨 경양을 구원하게 했다. 약간의 시간차가 있지만, 뜻밖에 양면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위주에서는 지원군으로 나아간 완안합달의 군사에는 완안진화상 역시 종군하고 있었다. 대규모 지원군이 오자 처음에는 사천택의 몽골군이 크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처음에 신나게 털리고 이에 몽골군 주력은 북쪽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사천택이 이끄는 1천 부대만은 되려 적의 배후로 몰래 들어가서 뒤꽁무니를 찔러 크게 혼란케 했는데, 이 무렵에 다른 몽골군이 협력해오는 바람에 큰 승리를 거두어 위주는 결국 몽골군 손으로 들어가게 된다.

한편, 경양에서는 이랄포아는 완안진화상이 승리를 거두었던 대창원에서 다시 한번 적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고, 경양의 포위를 풀어버리는데 성공했다. 이쪽 방면의 일이 끝나자 이랄포아는 위주 쪽으로 이동해서 완안합달의 군대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이랄포이는 경양 전투 이후 억류한 사신을 풀어주면서 자신의 군세만 믿고, 몽골군에게 어그로를 끌었다. 결국 오고타이는 섬서성으로 가서 장안 근처와 대창원 지역 모두를 초토화시키고 점령하였다. 동관 서부에서 금나라에게 남은 영토는 보계와 봉상 둘 뿐이었다.

당시 완안합달과 이랄포아는 모두 동관에 머물고 있었지만, 몽골군의 기세에 덜컥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감히 나가서 봉상을 구원할 생각은 못 했다. 이에 금나라 황제가 나서서 봉상을 구원하라고 독촉했지만, 두 사람은 "적의 군사가 너무 강해서 함부로 나갈 수 없다." 고 대답했고, 이에 황제는 다시 한번 사람을 보내 "동관에서 나아가 봉상의 병력을 조금이라도 끌어내면, 봉상의 포위가 약화될 테니 그곳에서 더 버틸 수 있지 않겠느냐." 고 독촉했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마지못해 군사를 이끌고 동관 서쪽으로 나아갔다.

위수 강가 북쪽에서 몽골군과 맞닥뜨린 두 사람은 그 날 저녁까지 적당히 교전을 하다가, 날이 어두워지자마자 바로 동관으로 되돌아왔다(...) ,이걸 눈여겨 볼수 없는 몽골군은 봉상을 마침내 함락시켰고, 동관 서쪽은 모조리 몽골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다.

그 이후 몽골군은 동관을 공격하게 되지만, 완안진화상의 1천명 군사에게 또 깨지고 후퇴하게 된다(...)

결과만 보면 몽골군이 성과를 냈다. 어쨌든 동관 서부를 다 손아귀에 넣었기 떄문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깨진 쪽이 수부타이였기에 금나라도 어느정도 전략적인 승리를 하였다.

그 이후 낙양 등지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힌 몽골군이였지만, 위에서 말했다시피 금나라군이 동관과 황하 등지에 있었으며, 이중에는 충효군같은 정예부대도 있었다. 그래서 몽골군이 개봉을 점령하기는 아주 어려울 것으로 보였으나....

툴루이가 보계를 점령하고 한중을 돌파해서 당주,등주를 함락시키고 개봉으로 우회공격하자고 오고타이에게 이야기 했고, 오고타이는 그대로 실행했다. 왜냐하면 금나라는 우회군을 맞설려고 동관에서 군대를 빼올 가능성이 높기에 이때 어택땅을 하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오고타이는 황하 남부로 어택땅하고, 툴루이는 보계를 점령하고 크게 한바퀴를 돌아서 개봉을 공격하게 된다. 이때 수십만의 양민들이 몽골군의 손에 그대로 하늘나라로 갔다.

하지만 그 길이 무려 1만리 정도나 되었기에 지구전만 시행해도 어느정도 승산이 있었지만, 애종은 백성들이 죽는 걸 보기 싫기에 지구전이 아닌, 북방을 털린 이후 20년 동안 키운 정예부대로 전면전을 하기로 하였다.

물론 동관에도 도단올전이 11만 대군을 이끌고 있지만, 이들은 정예부대가 아니라서 사실상 마지막을 각오한 것이다.

7.4. 몽골군의 도하, 그리고 우회 공격

한편 보계를 함락하고 남송 영토를 지나간 금나라는 한수 강을 도하하려고 하고 금군은 이걸 지켜보기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하를 막나, 강을 건너게 한 후 공격하나." 이런 문제로 회의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랄포아는 자신만만한 나머지 강을 건너게 한 후 공격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이게 그냥 헛소리가 아닌게 이랄포아도 자신의 군대로 승리를 거둔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군중들 중에선 도하를 막고 결사항전을 하려는 쪽이 우세했다. 결국 도하를 허용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무려 20일을 허비하게 되고, 결국 정찰병이 막 도하한 몽골군을 발견하게 되고, 금나라는 몽골군과 전면전을 하게 된다.

사실 툴루이의 몽골군은 막 도강을 한데다 2년 가까이 적의 영토안에 있었는 데다 불과 4만명 밖에 안되었기에 10만 명을 넘는 정예부대를 상대하지 못해서, 장수들도 출중했기에 도강한 이후에도 손실을 많이 내게 된다.

결국 몽골군은 물러나게 되고, 도하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장수가 퇴각하는 몽골군의 후미를 공격해 전멸시키려고 했지만, 이랄포이는 씹었다. 사실 2년동안 지치게 진군하면서 금나라에게 실컷 후두려 맞았기에 공격을 포기하려고 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 몽골군은 정말로 후퇴(?)를 하였다. 무려 4~5일 동안 수색을 했지만, 몽골군은 콧빼기도 안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도하했다는 소식은 없으니, 금군은 "설마 궤멸되었나? ㅋㅋㅋ"라고도 생각을 하였지만 그렇다고 방심을 할 수는 없기에 이랄포아와 완완합달은 대규모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등주에 도착했고, 그동안 몽골군의 습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무사하게 왔다. 하지만, 그 궤멸당했다고 생각하는 몽골군은 등주를 공격하다 또 사라졌다.

그 신출귀몰한 몽골군의 행동을 분석하던 장수들은

"설마 우리들이 있는 등주 대신에 근처의 당주를 점령하고 수도로 공격하는 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건 사실로 드러났다.

7.5. 수도로의 처절한 진군, 그리고 궤멸

리버스 모스크바 공방전 금나라 ver.

결국 금나라의 정예부대는 등주에서 금나라의 개봉으로 진군하게 되었다. 사실 당시 금나라군은 15만 대군으로 불과 4만 대군을 가진 툴루이보다 3배 정도 높기에 툴루이의 몽골군을 쉽게 박살낼 수도 있을 지도 모르고, 완안합달,완안진화상 같은 명장과 이랄포아같이 삽질도 많이 했지만, 어쩄든 성과를 낸 장수도 있었기 때문에 잘만하면 금나라군이 몽골군을 몰아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몽골군은 특유의 기동력으로 청야전술을 벌이고 휴식때도 혼란전술을 벌인 결과, 오히려 이제는 금나라군의 식량이 바닥나고 금나라군의 체력소모가 커졌다.

그럼에도 1만명으로 몽골군 유격대를 공격해서 궤멸시켰지만 전황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금나라군이 수도 서쪽의 균주성 부근에 도착하게 되지만, 몽골군의 신출귀몰한 전술에 휴식시간과 식사시간도 소모해버린 금군은 점점 지쳐만 갔고, 게다가 하늘에서는 비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군은 몽골군과 수 차례의 전투도 치르면서 균주성에서 10km 남짓까지 진격하게 된다.

문제는 그 이후 비는 폭설로 바뀌었고, 결국 여기서 3일동안 쉬었다.

이때 수도에서 구원 요청이 들어오고, 이후 금나라군은 또 이동하게 된다. 몽골군의 진로 봉쇄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처절한 사투로 균주성에서 불과 4km 남짓 남은 삼봉산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이때 금군은 추위속에서 결국 지쳐만 갔다.[21] 이때를 기회로 삼은 툴루이의 5만 대군(오고타이의 1만 대군 합류)는 밥을 먹으면서 서서히 금나라군를 옥죄면서 진격하였다. 이때 금나라군은 밥도 못 먹고 굶어 있었기에, 이미 사기는 떨어진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많은 금나라군이 몽골군이 연 균주방면으로 탈영하게 된다. 그리고 몽골군은 이를 노리고 기습공격을 했고, 결국 금나라의 정예부대는 초토화당했다.

게다가 날씨도 몽골군 편이였다. 금나라군이 깨진 이후 거짓말처럼 눈과 비가 사라졌기 때문.. 결국 나머지도 추격전에서 박살났다.

결국 오고타이군과 합류한 툴루이 군은 균주성를 점령했고, 결국 남은 건 수도인 개봉 뿐이였고, 군대는 도달올전의 11만 대군 뿐이였다.

그리고 몽골군은 마침내 개봉을 포위하게 된다.

7.6. 개봉 포위전

개봉을 포위한 몽골군은 개봉성 주변의 참호를 모두 메꾸기 시작하였다. 금 애종은 몽골과의 화친을 기대했지만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몽골군과의 일전을 벌이게 된다. 몽골군은 포로로 잡은 금나라 백성들을 앞장세워서 화살받이로 내세워 참호를 메꾸었고 이후 개봉성에 맹공을 퍼붓기 시작한다. 금군은 진천뢰와 비화창 등의 화약무기를 사용해 거세게 저항하였고 양측의 피해가 서로 커지자 수부타이는 이에 금나라와 화의를 맺고 군대를 물린다. 몽골군은 비록 물러갔지만 개봉성에서는 치열한 전투 이후 양식이 부족해지고 100만명이라는 피난민을 먹일 식량이 없어지자 백성들은 굶어죽어가고 심지어는 식인을 하는 행위까지 벌어지게 된다.그리고 마침내 그동안 금나라에게 이를 갈던 남송이 몽골의 동맹 제의에 응해 명장 맹공을 필두로 한 3만 명의 군대와 30만 섬의 식량을 몽골군에게 제공하면서 전쟁은 금나라에게 완전히 불리해졌다. 결국 이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애종은 개봉을 버리고 채주로 몸을 피했다. 이에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개봉성을 포위하고 황제마저 떠난 개봉은 더 이상의 저항력을 상실하고 결국 최립이라는 장수가 개봉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개봉은 결국 몽골군에 의해 함락된다.

7.7. 채주 공방전

몽골군은 개봉을 점령한 이후 채주까지 진격했고 때마침 맹공이 이끄는 남송군까지 합류해서 채주성을 포위하였다. 몽골과 남송은 채주성 근처의 연강과 시담호라는 두 개의 물줄기를 점령해서 채주 쪽으로 돌려서 채주는 수해와 굶주림으로 인해 지옥이 되어갔다. 1234년 애종은 황족 완안승린에게 황위를 양위해주고 몽골-남송 연합군이 채주 성문을 무너뜨리고 공격해 올 때 유란헌이라는 곳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애종이 죽은 이후에도 금나라 군대는 새로운 황제 완안승린의 지휘 아래 최후의 한 명까지 몽골-남송 연합군과 맞서 싸웠지만 완안승린이 난전 중에 전사하고 남은 금나라 군대가 모두 전멸하면서 결국 채주는 함락되었고 이로써 완안아골타가 금을 세운 지 119년이 되는해에 금나라의 사직은 멸망하고 만다.

7.8. 그 외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 곽하마를 중심으로 하여 다시 한 번 금나라 부흥 운동이 있었으나 실패로 끝나게 된다.

사실, 금나라군은 남송 다음으로 제일 오랜 기간동안 공방전을 한 국가였고, 장수들도 용맹했다. 그에 하늘이 보답하는 지 남송의 후예가 멸망한 후 다시 태어났다.

8. 문화

위에서도 언급했듯 금나라 조정은 여진인이 남송의 의상 착용을 금지하는 조칙을 세종, 장종 때 두 번이나 내렸다. 이는 거꾸로 보면 조정의 명을 한쪽 귀로 흘리고 남송 의상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조칙을 통해 남송의 문화가 금나라에서 크게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금나라는 남송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사치품을 수입하느라 무역에서 항상 적자를 봤다.[22] 하지만 그 반대의 현상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금나라 치하의 한족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남송에서도 여진족 패션 스타일이 유행했다. 여진족들은 장신구들을 착용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걸 보고 한족들이 따라 했으며 여진족의 호복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여진 문화 유행 현상을 보고 당대 한족 지식인들이 혀를 찰 정도였다. 예를 들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남송의 문인 범성대는 "백성들이 말하길 오랫동안 호복에 익숙해져 제도가 오랑캐처럼 되었다."고 언급했다.[23] 연운 지역을 포함한 화북의 한족들은 요나라와 금나라의 지배를 거치면서 남송의 한족들과 언어, 복장, 풍습에서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로도경에 따르면 금나라 사람의 의복은 좌임[24]이라는 점만 빼면 중국의 옷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적혀있고 조정의 공복들은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 했지만, 일상 생활에서 입는 옷들은 송나라의 의상과는 꽤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원으로 들어오기 전 수렵을 많이 했던 여진족 전통의 영향을 받아 동물 문양, 특히 사슴 문양을 선호했다고 한다. 요나라와 북송을 정복하면서 거란[25]과 한족의 의복을 수용하여 여진 전통 의상에는 변화가 생겼지만, 아예 한족 의상을 그대로 착용했던 요나라 남면[26] 의상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변발의 경우 발굴 유물과 앞머리를 밀고 뒷머리를 남겨 땋아서 묶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볼 때 후손인 만주족의 변발과 흡사하거나 변발을 양갈래로 늘어뜨린 모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건국한지 12년 만에 제국 2개를 무너뜨리고 화북을 차지했지만 12년 전까지 동북 변방의 수렵 민족인 생여진이었기 때문에 금나라 초반기의 경우 주변 나라들보다 부족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황제와 신하들이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술을 퍼마신다던가 황제가 신하에게 곤장을 맞는다던가(...)[27] 황족들과 귀족들의 의복이 일반 백성들과 별 차이가 없다던가 제대로 된 황궁도 없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뜻이다. 변두리 수렵 부족이 20년도 안 되서 갑자기 제국을 건국해 출세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종의 아노미 현상. 과거 북송의 땅이었던 화북을 통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약탈만 하고 사람을 무참히 죽여대기만 하니 땅은 황폐화되고 조정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지사.

이런 현상은 금희종 이후 중국식 제도와 문물들을 수용하면서 사라졌다. 해릉왕은 북송의 황궁을 본받아 천도한 중도(연경)에 으리으리한 황궁을 지었고 세종과 장종은 한문에 능했고 서화와 서예 솜씨도 수준급이었다.[28] 한문학은 많은 여진 귀족들을 매료시켰고 많은 여진 귀족들이 한족 문화에 흠뻑 빠졌다. 대표적으로 세종의 손자이자 저헌거사(樗軒居士)라고 불렸던 완안숙(完顔璹)은 금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칭송받았으며 현대에까지 그의 시가 전해 내려온다. 완안숙과 사귀던 조병문, 원호문, 왕약허 등 금나라의 한족 시인들도 유명했는데, 대표적으로 현대에 널리 알려진 금나라 시대 한시로는 안구사가 있다.

9. 고려와의 관계

9.1. 초기

금사(金史)에서 '예전에 고려에 예속했다.'고 인정하나, 끝내 고려는 금나라에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금나라가 건국하기 이전부터 고려는 북방의 여진족을 회유하고 속민으로 삼아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완안아골타의 숙부인 영가와 아골타의 형 오아속이 등장하여 완안부의 세력이 심상치 않아지자 예종은 본격적으로 군사를 들어 정벌하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윤관동북9성 개척(1107년). 하지만 이 군사 정벌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윤관이 포로로 잡힐 뻔한 적도 있고, 소드마스터 척준경이 구해냈다. 이 시점에서 고려의 1차 목표는 자국 영토 확장 및 북방 안정이라서, 여진의 성장 및 건국을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되려 금나라의 성장에 도움을 줬다는 평가도 있다! 게다가 정작 동북 9성은 개척이 어려워 다음해 여진에게 반환(...).

어쨌든 완안아골타가 본격적으로 금나라를 건국하자(1115년) 두 나라 관계는 상당히 미묘했다. 고려로서는 금나라를 정벌할 군사력은 없는데 예전에 신하였던 금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인정하기란 힘들었고, 금나라로서는 배후의 고려가 영 거슬리지만 눈 앞의 요나라송나라가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금나라가 건국된 1115년, 금나라와 고려의 이해 관계가 가장 충돌하는 지역은 사실 동북 9성보다도 보주(保州),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였다. 요나라의 멸망이 확실하자 금나라와 고려는 각기 군사를 보내어 이 지역을 얻으러 경합한다. 일단 금나라가 요나라의 땅이었던 보주 점령에 성공했지만, 고려는 즉시 아골타에게 사신을 보내 보주 반환을 요구한다. 아골타는 "爾其自取之(그대들이 직접 탈취하시오)"라고 쿨하게(...) 대답한 뒤 즉시 보주의 부하들에게 전갈을 보내어, "아놔 고려가 공격하러 올 거임! 얼른 대비를 해야 됨!"이라며 경고한다.[29] 삼국지?

하지만 단순히 "너님들이 가져갈 테면 가져가봐."라고 한 건 아니고 고려와 금나라 사이의 암묵적인 외교였다. 당시 요나라는 금나라가 밀고 내려오자 고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고려는 당연히 떠오르는 나라에게 잘보여야하니 거절했고, 이후 요나라가 점령하고 있던 보주 일대를 두고 양 국가가 만나게 된것이다. 고려의 요구에 아골타는 사신을 통해 직접 탈취하라고 언급했지만 요나라, 나아가서는 송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우군을 만들려는 금나라의 의중이 담겨있는 말이었고 고려는 이를 파악하고는 보주를 점령(1117년 3월)한다. 당시 고려가 유연하면서도 이득을 챙기는 외교를 했음을 잘 알려주는 사례중 하나.

이후 금나라는 형제의 맹약을 맺자(물론 금나라가 형)고 요구해 왔으나 고려는 무시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군사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고 팽팽한 긴장감만이 감돈다. 일단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했다. 금나라 역시 1124년 "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오면 너의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며 압록강 주변에 군사를 두어 고려를 방비하는 한편, 불필요하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한다.[30]

9.2. 칭신

금나라는 1125년, 마침내 고려가 신하라 칭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31] 당시 고려는 인종이 즉위한 지 5년이 지난 때로 이자겸, 척준경 일파가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이들은 금나라에 숙이기로 결정, 이듬해 1126년 사신을 보내 번국(藩國)을 칭한다. 척준경이 앞장서서 금나라에게 숙이자고 한 것으로 보아 금나라의 강성함을 잘 알 수 있다.

이자겸 일파의 이러한 결정은 고려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장 같은 해에 이자겸은 쫓겨난다(...). 하지만 고려 조정이 금나라와의 관계를 되돌리거나 할 수는 없었는데, 바로 다음해인 1127년(금나라 천회 5년)에 북송이 시원하게 멸망해서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 북송/고려와의 관계를 참고.

어쨌든 금나라는 고려가 숙이고 들어온 사실에 기뻐하여 보주(의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했다.

9.3. 칭신 이후 ~ 금나라 멸망

대체로 좋게 좋게 관계를 유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늘 긴장감이 있었다.

특히 칭신한 지 40년이나 지난 1164년에 금-고려 국경 지역의 작은 군사 분쟁이 일어난다. 대충 말로 풀지만, 금나라와 고려 양국은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분쟁의 원인이 서로에게 있다고 적었다. 특히 고려 기록에는 병마 부사 윤인첨이 '恥削土(국토가 줄어듦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 말이 남아서, 겉으로는 화목해 보여도 속으로는 불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32]

무엇보다도 금-고려 관계가 요동친 사건은 1170년 무신정변이다. 1170년 겨울에 고려는 갑자기 금나라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더니[33], 이듬해 사신을 보내어 "의종이 돌아서 정신이 혼미해서 동생(명종)이 대신 왕이 됐어요. 데헷"이라고 알린다. 당연히 금나라 조정에선 이게 무슨 일이냐며 난리가 났다. 애초에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믿기 어려운 얘기다. 금나라는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왕이 병에 걸려 물러난 것이 아니라 폐위된 것임을 알아낸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끝에 고려 내부의 문제라고 판단, 명종의 왕위를 인정했다.

1175년, 금나라는 대략적인 사실을 알다가 비로소 사건의 진상을 아는데... 바로 조위총의 난 탓이다. 조위총은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의방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했다고 알리며, 자비령 서쪽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40여 성을 바치겠으니 도와주십시오라 요구한다. 하지만 금나라는 거부하고 오히려 조위총의 사신을 붙잡아 고려 조정에 보냈다. "잘했지?" 하고(...). 이 사건을 단순히 '금나라가 멍청해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금나라의 영역 확대 의지가 소극적인 성격이었다고 읽어낼 수도 있다. 그냥 단순히 이웃 나라의 내부 문제에 개입하기가 싫어서라고도 볼 수도 있다. 450여 년 뒤 이괄의 난정묘호란의 빌미였음을 생각하면... 애초에 금나라는 자국 내부마저도 못 통합하는 판국인데 점령지를 더 늘려봤자 혼란이 더 일어날 가능성에 그냥 넘어갔다.

이후로는 큰 사건이 없이 조공하고 책봉하며 생일에 사신 보내고 하는 평범한 일들만 일어났다. 고려 사신이 국경 지역에서 역인驛人에게 맞아 죽은 사건만 빼면. 이 사건은 금나라의 변경 지역 통제력이 약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역사상 최강, 최악의 기마민족이 동북아시아에 들이닥쳤다. 위소왕 시절 이후로 금나라가 남쪽으로 밀려나 교류가 끊겼다.

고려는 북송이나 요나라와는 유교, 불교 서적과 대장경 등을 수입하는 등 문화, 사상적으로 밀접한 교류 관계를 가졌으나 금나라와의 교역은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고려와 금나라의 교역 관계는 항목 참조

9.4. 그 밖의 이야기

뒷날 누르하치후금(청나라의 전신)을 세운 것처럼, "금"은 전형적인 여진족(만주족)의 국호로 자리잡았다. 참고로 청나라 황족의 성인 아이신 기오로(愛新覺羅)에서의 '아이신'은 금, 기오로는 '씨(氏)'를 뜻한다. 자신들이 금나라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 그러나 환빠들은 금은 신라 왕족의 성씨인 씨를 뜻하고, 愛新覺羅가 "新羅를 사랑하고 기억한다(愛覺)"라는 말을 섞어 놓은 것이라며, 여진·만주족은 신라의 후예라고 말한다(...).

10. 역대 황제

  • 추존 황제는 목록에서 제외

대수

묘호

시호

(여진식/중국식)

연호

재위 기간

초대

태조
(太祖)

응건흥운소덕정공
인명장효대성무원황제
(應乾興運昭德定功
仁明莊孝大聖武元皇帝)

완안아골타(完顏阿骨打)/
완안민(完顏旻)

수국(收國, 1115년 ~ 1116년)
천보(天輔, 1117년 ~ 1123년)

1115년 ~ 1123년

2대

태종
(太宗)

체원응운세덕소공
철혜인성문열황제
(體元應運世德昭
功哲惠仁聖文烈皇帝)

완안오걸매(完顏吳乞買)/
완안성(完顏晟)

천회(天會, 1123년 ~ 1134년)

1123년 ~ 1135년

3대

희종
(熙宗)
[34]

홍기찬무장정효성황제
(弘基纘武莊靖孝成皇帝)[35]

완안합라(完顏合剌)/
완안단(完顏亶)

천회(天會, 1135년 ~ 1138년)
천권(天眷, 1138년 ~ 1141년)
황통(皇統, 1141년 ~ 1149년)

1135년 ~ 1149년

4대

-

해릉양왕(海陵煬王)[36]

완안적고내(完顏迪古乃)/
완안양(完顏亮)

천덕(天德, 1149년 ~ 1153년)
정원(貞元, 1153년 ~ 1156년)
정륭(正隆, 1156년 ~ 1161년)

1149년 ~ 1161년

5대

세종
(世宗)

광천흥운문덕무공
성명인효황제
(光天興運文德武功
聖明仁孝皇帝)

완안오록(完顏烏祿)/
완안옹(完顏雍)

대정(大定, 1161년 ~ 1189년)

1161년 ~ 1189년

6대

장종
(章宗)

헌천광운인문의무
신성영효황제
(憲天光運仁文義武
神聖英孝皇帝)

완안마달갈(完顏麻達葛)/
완안경(完顏璟)

명창(明昌, 1190년 ~ 1196년)
승안(承安, 1196년 ~ 1200년)
태화(泰和, 1200년 ~ 1208년)

1189년 ~ 1208년

7대

-

위소왕
(衛紹王)[37]

완안과승(完顏果縄)/
완안영제(完顏永濟)[38]

대안(大安, 1209년 ~ 1212년)
숭경(崇慶, 1212년 ~ 1213년)
지녕(至寧, 1213년)

1208년 ~ 1213년

8대

선종
(宣宗)

계천흥통술도근인
영무성효황제
(繼天興統述道勤仁
英武聖孝皇帝)

완안오도보(完顔吾睹補)/
완안순(完顔珣)

정우(貞祐, 1213년 ~ 1217년)
흥정(興定, 1217년 ~ 1222년)
원광(元光, 1222년 ~ 1223년)

1213년 ~ 1223년

9대

애종
(哀宗)
[39]

순정황제(順靖皇帝)

완안영갑속(寧甲速)/
완안수서(完顔守緒)

정대(正大, 1224년 ~ 1232년)
개흥(開興, 1232년)
천흥(天興, 1232년 ~ 1234년)

1223년 ~ 1234년

10대

소종
(昭宗)
[40]

말황제(末皇帝)[41]

완안호돈(完顔呼敦)/
완안승린(完顔承麟)

성창(盛昌, 1234년)

1234년

11. 추존 황제

묘호

시호

성명

재위 기간[42]

능호

비고

시조(始祖)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

완안함보(完顔函普)

941년 ~ 960년

희릉(熙陵)

태조 추숭, 금의 시조

-

연목현덕황제(淵穆玄德皇帝)

완안오로(完顔烏魯)

960년 ~ 962년

희릉(熙陵)

태조 추숭, 함보의 장남

-

화정경안황제(和靖慶安皇帝)

완안발해(完顔跋海)

962년 ~ 983년

건릉(建陵)

태조 추숭, 오로의 장남

헌조(獻祖)

순렬정소황제(純烈定昭皇帝)

완안수가(完顔綏可)

983년 ~ 1005년

휘릉(輝陵)

태조 추숭, 발해의 장남

소조(昭祖)

무혜성양황제(武惠成襄皇帝)

완안석노(完顔石魯)

1005년 ~ 1021년

안릉(安陵)

태조 추숭, 수가의 장남

경조(景祖)

영렬혜환황제(英烈惠桓皇帝)

완안오고내(完顔烏古迺)

1021년 ~ 1074년

정릉(定陵)

태조 추숭, 석노의 장남

세조(世祖)

신무성숙황제(神武聖肅皇帝)

완안핵리발(完顔劾里鉢)

1074년 ~ 1092년

영릉(永陵)

태조 추숭, 오고내의 차남, 태조의 부친

숙종(肅宗)

명예목헌황제(明睿穆憲皇帝)

완안파자숙(完顔頗刺淑)

1092년 ~ 1094년

태릉(泰陵)

태조 추숭, 오고내의 4남

목종(穆宗)

장순효평황제(章順孝平皇帝)

완안영가(完顔盈歌)

1094년 ~ 1103년

헌릉(獻陵)

태조 추숭, 오고내의 5남

강종(康宗)

헌민공간황제(獻敏恭簡皇帝)

완안오아속(完顔烏雅束)

1103년 ~ 1113년

교릉(喬陵)

태조 추숭, 핵리발의 장남

휘종(徽宗)

윤공극양효덕현공우성경선황제
(允恭克讓孝德玄功佑聖景宣皇帝)

완안종준(完顔宗峻)

-

-

희종 추숭, 희종의 부친

덕종(德宗)

헌고홍도문소무열장효예명황제
(憲古弘道文昭武烈章孝睿明皇帝)
명숙황제(明肅皇帝)

완안종간(完顔宗幹)

-

-

해릉양왕 추숭, 해릉양왕의 부친

예종(睿宗)

입덕현인계성광운문무간숙황제
(立德顯仁啓聖廣運文武簡肅皇帝)

완안종요(完顔宗堯)

-

경릉(景陵)

세종 추숭, 세종의 부친

현종(顯宗)

체도홍인영문예덕광효황제
(體道弘仁英文睿德光孝皇帝)

완안윤공(完顔允恭)

-

유릉(裕陵)

장종 추숭, 장종의 부친

12.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 코에이징기스칸 4에도 당연히 등장한다. 시나리오1, 시나리오3에 등장. 망하기 직전 금 장종 ~ 애종 시기로, 영토 자체는 만주와 화북을 장악해 잘 표현한다. 역사적으로는 쇠퇴기이지만 완안진화상이라는 먼치킨이 있는 데다[43] 당시 선진적이고 생산력도 좋은 지역인 화북을 장악했다는 저변도 있고 진천뢰가 있어 이게임의 공성 종결자인 화포병를 징병할 수가 있어서 플레이하기 쉬운 세력.
  • 문명 5 시나리오 몽골의 비상에서 적국으로 등장한다. 제일 가까운 데에 있어서 1번 타자로 썰리는 역할(...). 비주얼은 람캄행 모습으로 이름이 장종으로 바뀌어서 등장한다. 중국식 발음이 Jin이라서 가끔 진나라로 오역도 한다.
  • 정충악비에서는 악비와 대립하는 악역들인 동시에 드라마의 중요한 한 축으로 등장한다.


  1. [1] 중국어로 금을 진이라 읽어서 영미권 학자들도 그에 맞춘 것이다. 참고로 김씨나 금씨도 중국어로 읽으면 '찐(Jīn)'씨가 된다.
  2. [2] 『동아시아의 역사II 북방민족-서민문화』,동북아 역사 재단 엮음, 25쪽
  3. [3] 실제 요나라의 국호는 딱히 강철을 의식하고 붙인 게 아니라 그냥 거란족이 살던 강인 요하에서 따왔다. 강 이름이 요(遼)이다.
  4. [4] 《흠정금사어해》를 보면 청대의 금은 아이신(Aisin)이었다.
  5. [5] 정강의 변에 대한 인과응보였는지 금 말기 애종 때 금나라의 수도 개봉을 몽골이 함락하자 금나라의 태후, 황후, 황녀들은 송나라 황족들이 금나라로 끌려갔던 것처럼 똑같이 몽골로 다 끌려갔고(...) 남자 황족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정강의 변 때보다 더 비참했다고 사서에 나온다.
  6. [6] 참고로 아골타의 형이 동북 9성 돌려달라고 고려에 애원했던 때가 1109년이다. 이때로 따져도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당시 동북 아시아의 두 거대 제국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둘 다 변방으로 수도를 옮겨 재기에 성공하였다. 고려 입장에서는 황당했을듯.
  7. [7] 만주에서 나는 철 덕분에 철의 공급이 원활했다고. 이것은 고구려청나라도 마찬가지.
  8. [8] 송사 三朝北盟會編 卷36, 靖康 원년 2월 조
  9. [9] 과거 제도를 실시해 관리들을 선발했지만 과거 제도로 등용된 한족 사대부들은 중간직 위주로 둥용되었고 최고위직에 등용되기 힘들었다. 최고위직은 10여개 성씨의 여진족 귀족들이 계속 해먹었다. 금나라 말기까지 한족 사대부들을 중하게 쓰지 않았던 점은 국정의 전문성 향상에 지장을 줬을 뿐 아니라 민족 화합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10. [10] 이미 요나라 때무터 전연의 맹으로 인해 막대한 셰폐를 갖다바치다시피 했고 금나라가 들어서자 더 많아졌다. 더군다나 남송때는 화북 지역을 빼앗겨 영토도 인구도 줄었지만 그럼에도 남송은 멀쩡했다.
  11. [11] 경제적인 요건도 있지만, 그 밖에도 해릉양왕이 저질러 놓은 문제들이나, 거란족의 반란 등으로 금의 사정이 급했다.
  12. [12] 인구 조사에 의하면 여진족 인구는 600만인데, 한족이 4400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여진족 인구는 이것보다 훨씬 더 적을 가능성도 있다.#
  13. [13] 적어도 거란족은 북방 유목민족이란데서는 여진족과는 한족보다는 더 가깝긴 했다. 원래부터가 국경 하나 넘으면 있기도 했고
  14. [14] 여진. 금사에서는 여직으로 기록되어 있다.
  15. [15] 결혼
  16. [16] 국경주둔군 10만, 중앙군 25만, 다른 지역에서 온 지원군 15만 등. 이중 보병이 35만, 기병이 15만 정도로 짐작된다
  17. [17] 이는 칭기스 칸의 정신교육이 효과를 봤다는 것을 뜻한다. 몽골의 바토르들은 화공을 당해 갑옷이 불타는 상황에서도 불을 끌 생각조차 하지 않고 적에게 돌격했다고 한다. 뭔 로봇이냐? 가장 고통스러운것이 화상인대.
  18. [18] 하지만 요새나 성을 제대로 공략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는 한족을 고용함으로써 해결한다
  19. [19] 반대로 이후 금군은 기병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이후 금나라는 위구르, 서요, 거란족 기병에 의지했다
  20. [20] 전쟁이 수세로 몰리자 금은 거란족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는데, 이런 감시가 오히려 거란의 반란을 촉진시켰다 이뭐병
  21. [21] 사실 몽골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3일동안 진격만 했기에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22. [22] 가령 금인들이 기호품으로 사용하던 의 수입이 크게 늘어나 돈이 남송으로 흘러가자 적자를 줄이기 위해 자체적으로 차를 재배해봤지만 품질이 좋지 않아서 외면 받고 차 재배를 포기했다.
  23. [23] 출처 : 요 금의 역사<이계지 저>
  24. [24] 전통적인 한족 의상은 우임이다.
  25. [25] 원시적 수렵 생활을 하다가 금나라를 세운 생여진과 달리 거란은 금이 세워지기 한참 전부터 이미 중원의 문화를 수용하고 그것을 응용함으로서 수준 높은 불교 문화를 꽃피우고 유학을 장려하고 있었다.
  26. [26] 농경민이었던 한족과 발해인을 다스리던 곳
  27. [27] 금태종 항목 참조.
  28. [28] 장종의 경우 그 솜씨가 북송의 휘종과 버금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29. [29] 금사 외국열전 고려조 수국 원년 11월.
  30. [30] 금사 외국 열전 고려조 천회 2년
  31. [31] 이전까진 서로 호칭을 안 정하고 어물쩍 넘기며 지내왔다.
  32. [32] 고려사절요 권십일 의종 장효대왕 을유 19년
  33. [33] 하필이면 의종의 생일을 축하하러 보낸 사신이었다.
  34. [34] 또는 민종(閔宗)
  35. [35] 또는 무령황제(武靈皇帝)
  36. [36] 내란 중에 피살. 금나라 최악의 폭군. 사후 서인으로 격하되었다.
  37. [37] 또는 위왕(衛王)이나 무평황제(武平皇帝). 정변으로 피살당함.
  38. [38] 允濟(윤제)에서 永濟(영제)로 바꿨다.
  39. [39] 또는 의종(義宗)
  40. [40] 정식 추승은 아니고 속자치통감에 따르면 그를 따르던 친족과 병사들이 올렸다고 한다.
  41. [41] 이 황제의 재위 기간은 하루도 되지 않았다. 중국 역사상 최단기간 재 위한 황제. 항목 참조.
  42. [42] 여진족 추장
  43. [43] 시나리오1 한정으로 야율초재가 연경의 인재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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