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html <div style="margin-left:50px;"><b style="font-size:14px">

이 문서는 <a href="/w/나무위키 호국영웅 프로젝트">나무위키 호국영웅 프로젝트</a>에서 다루는 문서입니다. </b><br /> 해당 프로젝트 문서를 방문하여 도움이 필요한 문서에 기여하여

주세요!</div>}}}

<span style="text-shadow: 0 0 10px #ffffff; color: #fede58;">건국훈장</span> 대한민국장(重章) 수훈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강우규

김구

김규식

김좌진

김창숙

맥아더

민영환

박정희

필립 제이슨

손병희

신익희

쑨원

쑹메이링

안중근

안창호

여운형

오동진

윤봉길

이강년

이승만

이승훈

이시영

이준

임병직

장면

장제스

조만식

조병세

조소앙

천궈푸

천치메이

최익현

트루먼

플리트

한용운

허위

}}}

김구 / 한자: 金九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생몰년도

1876년 8월 29일 ~ 1949년 6월 26일 (향년 72세)

출생지

조선 황해도 해주부 백운방 텃골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국적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

본관

안동 김씨[1]

별칭

자(字)는 연하(蓮下)[2], 아호(號)는 백범(白凡)[3]
가명은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 초명은 창암&창수&구(龜)

직업

정치가, 독립운동가

종교

유교(성리학) → 천도교(동학)
불교(법명: 원종) → 개신교(감리회)

가족

김만묵(조부) 김순영(부) 곽낙원(모)
최여옥(부인) 최준례(부인)
김인(장남) 김신(차남) 김씨(장녀) 김화경(차녀) 김은경(삼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9 ~ 10대 국무

임기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부통령

없음

전임

홍진

후임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18 ~ 20대 주석

임기

1940년 3월 13일 ~ 1947년 3월 3일

부주석

김규식

전임

이동녕

후임

이승만

1. 개요
2. 생애
2.1. 유년 및 청년 시절
2.1.1. 유년기부터 동학 운동 이후 무렵
2.2. 초기 독립운동
2.3.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
2.4. 해방 후 정치활동
2.4.1. 해방과 귀국, 정치 활동
2.4.2. 이승만과의 관계
2.4.2.1. 장덕수 피살 후 벌어진 일
2.4.2.2. 남북 연석회의 참여
2.4.3. 혁명의용군 사건
2.4.4. 죽음과 장례
2.4.5. 김구의 복권
3. 김구의 사상
3.1. 종교
4. 외모에 대한 묘사
5.1.1. 독립운동가를 대상으로 한 테러 사주
5.1.1.1. 안공근 암살 의혹
5.1.1.2. 김립 암살 사주
5.1.1.3. 옥관빈 암살 사주
5.1.1.4. 안준생 암살 사주
5.1.2. 기타
5.1.3. 백의사의 북한 공격 논란
6. 평가
6.1. vs 이승만
6.2. 진보와 보수진영의 평가
6.3. 미국의 평가
6.4. 가장 무난하여 존경을 받게 된 인물?
6.5.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민족 영웅?
6.6. 친일 인사 등용
7. 가족 관계
8. 선거 이력
9. 대중매체
10. 이야깃거리

양심건국

위의 사진에서는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쓰여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걸려있었다.[4]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사본을 기념품으로 판매중.

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됐다.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안동 김씨의 익원공파이나 조상 중 김자점이 있어 몰락한 가문으로, 평민 수준의 가정생활을 하였다. 유년시절 이름은 김창암이었으나 1893년 18살에 동학에 입교하면서 이름을 김창수로 바꿨고, 이후 1912년 37세 때 비로소 김구로 개명했다. 구 자도 임시정부 시절 龜에서 九로 바꾸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정치인. 독립유공자로서 그 중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들 중 한 사람. 각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과 처음을 이끌던 지도자였고 해방정국 당시 우익 진영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다는 점에서 흔히 이승만[5]의 라이벌으로 회자된다. 그리고 최근엔 이념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일성 등과의 경쟁구도도 재조명되고 있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에서 꾸준히 1위를 하고 있다. 주류 언론은 물론 뉴라이트 성향의 중소매체 뉴데일리도 '백범 김구 선생'으로 부를 만큼 현 대한민국 국민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김구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가 진행되면서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부정적인 행적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특히 치하포 사건이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암살 지시(김립 피살 사건), 안창호와 친분을 유지했던 국민당 계열 당원 암살 지시(옥관빈 피살사건), 해방 이후의 정치 활동에서 갈등을 겪게 된 정적들에게 시도한 백색 테러 의혹, 한국독립당(1920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친일파가 많았던 한민당쪽으로부터 적극적인 자금 지원을 받은 것 등이 그 예시이다. 과거에는 이승만과 비교하여 도덕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 모두 뛰어난 인물로서 여겨졌으나 최근에 이르러 한국의 민족주의가 약화되면서 막연한 성역화에 대한 비판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김구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상당히 변화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문서에서도 개요 문단 최상위의 볼드체 요약문이 끊임없이 작성과 삭제를 반복하고 있으며, 없을 때가 더 많다.

2. 생애

2.1. 유년 및 청년 시절

2.1.1. 유년기부터 동학 운동 이후 무렵

본관은 안동. 조상인 김자점으로 인해 대대로 숨어지내야 했던 불미스러운 과거가 있다.

인조대의 재상이었던 김자점은 효종과의 갈등 끝에 북벌론을 청나라에 알렸고 이때문에 북벌에 실패한 효종은 김자점을 처형했다. 동시에 인조의 후궁이자 김자점과 내통한 조귀인(인조 후궁), 김자점의 손자이자 조귀인의 사위 김세룡 등도 함께 처형됐고, 김구의 11대조 김대충은 이후 개성으로 피신했다가 한성 근처라서 다시 황해도 해주 텃골로 낙향해서 양반 신분을 숨기고 살았던 것이다.

태어날때부터 파란만장한 인생의 징조였는지 산모의 생명이 위험할정도로 난산이였다. 온갖 의술과 미신처방을 써도 소용없었고, 김구의 아버지가 지붕의 올라가 소길마를 쓰고 소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자[6] 김구가 태어났다고 한다 어린시절 거의 개구쟁이었다. 여러 애들이 곰보라고 놀리자 식칼을 들고 와서 위협하고, 빨래하는 개울에 물감을 풀어놓고, 아버지의 곤방대를 팔고 남의 밭에서 서리하고, 장난이 거의 망나니급이었다. 그래서 매일 매를 맞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김구의 증조부가 사위를 만날때 갓을 썼다는이유로 욕을먹고 얻어맞았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김구는 반드시 아버지를 갓을 쓰게 해주겠다고 복수를 위해 글공부를 했으며 근처 마을 이씨, 강씨[7]들에게 천대받는 것에 분개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을 할 생각이 있었으나, 당시 과거 제도의 부패와 폐단을 보고 그만두었으며 아버지의 뜻을 따라 풍수와 관상을 공부하였다. 마의상서(麻衣相書)를 빌려서 석달동안 독방에서 공부하였는데 자신의 얼굴을 책의 내용에 대입하여 볼때 아무리 봐도 귀상이 아니고 천격, 빈격, 흉격 뿐이라 하여 좌절하였으나 마의상서 안에 있는 구절 중에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얼굴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 라는 구절을 마음에 새겨 손자, 육도, 삼략 등을 읽어 큰 뜻을 가지게 되었다. 동학에 입문하여 동학군으로 활동했다. 동학군이 패배한 후에는 얼마동안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의 집에 몸을 숨겼다. 재밌게도 동학활동 당시 그가 지휘하던 동학군을 때려잡은 사람은 바로 안태훈이었다. 덧붙여 나이가 비슷했는데도 불구하고[8] 안중근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태훈에게 보호받은 건 약 1년 정도인데, 이 때 이후로도 계속 안태훈의 집안과는 친분을 유지한 듯하다. 일단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과 김구는 아는 사이였고, 나중에 김구의 장남과 결혼한 여성이 안태훈의 차남의 딸인 안미생이다. 그리고 안태훈의 3남인 안공근은 김구의 측근이었다고 한다.

이 탓인지 1930년대 말,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이 자기 아버지의 죄를 사죄하러 다닌다고 하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다. 국민당의 경찰력을 동원해 살해하려 했다고. 백범일지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어쨌든 이 때 김구는 안태훈의 식객이던 유학자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2.1.2. 치하포 사건

김구의 첫 흑역사

김구(당시 이름은 김창수)가 무장한 일본 민간인 쓰치다를 살해한 사건. 보통 일반에는, 백범일지의 기록에 근거해 김구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본 군인을 죽인 의거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쓰치다는 민간인이었으며, 김구는 심증 만으로 쓰치다를 일본군 또는 간첩으로 오인, 을미사변과 무관한 인물을 살해한 셈이다.

김구는 "국모를 시해한 일본인"을 살해하여 원수를 갚고자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살해 후 그가 일본군 장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사료 교차검증 과정에서 이 증언 및 기록은 의심스러운 면이 많다. 쓰치다 조스케가 쓰시마 섬의 이즈하라 출신 상인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군 장교라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그리고 실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인물들은 사건직후 일본으로 이감되어 치하포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십수일전까지 구속된 상태였다.

일지에서는 사형 직전에 고종이 사흘 전에 개통된 첫 시외 전화로 사면하여 살렸다고 나오나[9] 당시 인천-서울은 전화 개통이 안 되었다.

인천감리소에서는 경무관 김윤정과 인천 현지 투전판 두목 김주경의 비호로 감옥내에서 대접이 좋았다.

2.2. 초기 독립운동

1918년 신한청년당에 입당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이듬해 기미 독립선언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립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초대 경무국장을 역임했다.[11]

경무국장 재임 시기 김구는 수하 20여 명의 경찰을 이끌며 일본 밀정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재판소장 대리로 친일파, 밀정에 대한 처벌을 주도했다.[12] 백범의 비서실장을 지낸 민필호 선생은 "김구 선생은 한인 밀정이 오면 비밀리에 체포해 상해시 변두리에 세 얻은 집으로 끌고 가서 처리해 버렸고 그 수가 30여 명에 달한다"라고 기록한 바 있으며, 이들에 대한 처벌은 훈방 아니면 사형이었을 정도로 강경했다고 한다.

1923년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되었으며, 1926년 12월에는 당시 의정원장이었던 이동녕의 추천으로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1930년에는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당 총재를 맡았다.

2.2.1.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 김립 피살 사건

김구의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역사.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2.2.2. 옥관빈 피살사건

김구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어두운 역사.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2.3.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

1931년 임시정부 산하 항일 특공대인 한인애국단을 창설하였다. 이후 이봉창, 윤봉길 등을 영입하여 일본 정부, 고위 요원을 대상으로 한 암살을 지휘하였다. 이때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가 성공하게 되면서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정부와 장개석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1939년 한국광복군의 전신인 한국독립당 당군(黨軍)을 건군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 주석인 이동녕이 서거함에 따라 주석에 선출되었다. 이와 함께 미국의 구미외교위원부를 부활시켰으며,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동년 4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통합하여 통합 한국독립당을 창당, 초대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동년 9월 한국광복군 건군의 정당함을 중화민국 정부에 알리며 중국 정부의 지원이 줄어듦에 따라 임시정부를 미국으로 천도하여 미국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1941년 6월에는 대한민국 국가원수의 명의로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발송하기도 했다.

1941년 건국강령을 제정함과 동시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이듬해 김원봉 등 좌파 계열의 무장독립운동 세력을 포섭하였다.

1944년 대한민국 대통령에 재선출되었으며, 중화민국으로부터 광복군 통수권을 이양받아 한국 광복군 통수부 의장에 취임했다. 이후 광복군과 미국 OSS 간의 합동 군사 활동을 계획하여 1945년 8월 18일 독수리 작전[13]을 미군과 합동으로 수행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이른 항복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2.4. 해방 후 정치활동

2.4.1. 해방과 귀국, 정치 활동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를 가진 미군정의 손에 임시정부 대통령자격으로의 귀국이 불허되고, 한참 뒤에야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귀국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나 미군정으로부터 임정은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고, 이미 국내에 여러 정치 세력이 토대를 닦아놓은 상황에서 김구의 입지는 생각보다 좁았다. 한때 임시정부의 법통을 빌려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려는 한국민주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1945년 12월 29일 경교장에서 송진우 반탁 운동의 방법론을 두고 김구와 다투고 그 다음 날 새벽 6시, 한민당의 수석 총무 송진우가 자택에서 한현우 등에 의해 암살되면서 관계가 크게 악화됐다. 미 군정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는데 브루스 커밍스는 김구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다.[14]

김구보다 일찍 입국해 이미 권력을 다져놓은 이승만과는 한때 "우남이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으나 이후 사이가 소원해졌다. 김구를 아예 "테러리스트"라고 지칭한 조봉암을 비롯해 김구를 좋게 평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는데, 이는 김구가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한 벌인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서 무장 투쟁과도 관련 되었기 때문으로 해방 후의 정치노선으로 갈아탄 대다수의 인사들은 펜과 언변으로 독립 운동을 한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며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다만 이 독립운동가들을 "고상한" 샌님들로 서술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전술했듯 김구에게는 동포, 그것도 같은 독립운동가의 피를 손에 묻힌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김구는 임정 법통성을 지지하였는데 귀국이 늦어짐에 따라 여운형 등이 이끄는 전국구 조직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등이 세력을 잡았다가 이후 미군정 및 우익세력의 손에 건준이 강제 해산되고 민족진영이 크게 위축된것을 보고는 크게 격분했다고 한다. 후일 건준의 후신인 조선인민공화국저기 북쪽의 조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다!과 임정의 통합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임정의 법통과 조직 계승 문제, 임정 인사들의 짙은 반공로 인해 실패했다.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알려지며 대규모 반탁 시위가 일었다. 김구는 반탁 시위를 주도하며 이를 미군정에게 정권을 인수받는 계기로 삼으려 했다. 그 해 12월 31일 임시정부는 내무장관 신익희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하여 경찰권 접수 등을 발표했다.이미 서울 시내 경찰서장 대부분이 임정에 협조를 약속했고, 군정청과 서울시청의 직원들도 파업과 사직을 통해 임시정부에 힘을 실어주었다. 미군정은 즉각 임정과 경찰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임정에 협조한 경찰서장을 파면했다. 1946년 1월 1일 군정장관 존 리드 하지는 김구에게 "다시 한 번 나를 기만하면 죽여버리겠다"며 경고했다. 김구도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며 받아쳤다. 살벌했던 두 사람의 갈등은 미국 본국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문이 도착하면서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날 밤 김구는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에게 지시하여 반탁운동 중지를 선언했다.

이후 김구는 이승만과 손을 잡고 비상국민회의를 출범시켰으나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등 임정 내 좌익 세력들은 임시정부가 통일 전선 수립은 외면한 채 우익 세력 통합에만 열을 올린다며 비상국민회의를 탈당한다.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임시의정원의 후신, 그 산하 조직인 최고정무위원회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의 후신으로 칭하며 임시정부 중심의 과도정부 수립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다. 그러나 최고정무위원회가 구성된 바로 다음날 미군정이 최고정무위원회를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편입하며 김구의 권위는 실추됐다.

김구는 우익정당 통합운동으로 활로를 찾고자 했다. 김구는 한국민주당을 비롯해 안재홍이 이끄는 국민당, 이갑성이 이끄는 신한민족당 등에 통합을 제안했다. 그러나 김구와 한국독립당이 내건 조건은 모욕적인 것이었다. 통합 정당의 강령은 임시정부의 삼균주의를 계승하고 총재와 당명 역시 한국독립당이 정하도록 했다. 한민당의 저항이 특히 컸다. 결국 우익정당 통합운동은 한민당이 불참한 상태에서 한독당과 국민당, 신한민족당이 통합되며 끝났다. 우익 최대 정파인 한민당이 빠진 통합의 효과는 김구가 당초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1946년 10월 미군정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를 공고하자 한독당은 내홍에 빠졌다. 김구 등 한독당 주류는 입법의원 설치가 임정법통론에 어긋난다며 소극적 입장을 보였으나 안재홍 등 국민당 계열은 입법의원 설치로 한국인의 자치권이 확대됐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불공정한 선거 과정으로 인해 한독당은 선거에서 참패했다. 이후 입법의원에 선출된 당원을 등원시킬지를 두고 또 다시 당론이 나뉘었다.

1947년 2월 김구에게 새로운 기회가 온다. 김구는 민족통일총본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비상국민회의를 통합해 국민의회를 조직한다. 국민의회는 임시의정원 계승, '독립운동의 최고기관', '대한민국 유일의 역사적 입법기관'를 자처했다. 김구는 한독당과 한민당의 합당도 다시 추진했다. 김구는 한민당이 통합을 거부한다면 정계 은퇴도 불사하겠다며 한민당을 압박했다. 3월 1일 독촉국민회와 전국학생총연맹이 임정 추대를 결의하면서 과도정부 수립 운동은 점점 고조됐다. 3월 3일 국민의회는 임시정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김구를 추대하고 정부 조직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국민의회는 실제 물리력을 가진 경찰과 관료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한민당은 언론 플레이를 통해 소극적,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며 합당을 무산시켰다. 당시 방미 중이던 이승만은 자신이 없는 사이 김구가 우익을 장악할 것을 우려하여 국민의회를 저지하려 했다. 국민의회에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역시 미군정이었다. 3월 5일 미군정은 엄항섭, 김석황을 체포하고 국민의회가 정부 수립을 선포하면 반란죄로 처벌하겠다고 경고했다. 결국 김구는 이시영, 조완구 등과 미소공위 수석 대표 앨버트 브라운 소장을 방문해 다시는 미군정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2.4.2. 이승만과의 관계

이승만과 김구는 1941년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의장으로 임명되면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942년 이승만이 한길수 등 한인 사회 일부와 갈등을 빚었을 때도 김구는 이승만을 비호했다. 이승만 역시 미국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는 등 김구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사실 해방 직후까지도 이승만과 김구의 사이는 매우 두터운 관계였다.

주변인들의 기록이나 증언을 보면, 서로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로 묘사된다. 8.15 해방 이전까지 김구가 항상 이승만을 '우남이 형'[15]이라고 부르면서 절친한 사이였고 서로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구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나의 이 박사에 대한 충절은 결코 변치 않을 것이오. 남산 위의 소나무가 그 색깔을 변한다 해도 나는 안 그럴거요.'라고까지 하기도 했었다.[16]

그러나 1945년 광복 이후 임시정부의 환국이 지체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진다. 임시정부 환국 이전 정국의 주도권은 이승만이 이끄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가 쥐고 있었다. 독촉이 주도하는 정당 통일운동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대중의 관심은 환국을 앞둔 임시정부에게 옮겨갔다. 임정 환영 행사로 사회의 분위기가 들뜨자 이승만은 "환영 소동은 이제 그만두어야 할 것"이라며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임시정부 환국 이후, 임시정부와 독촉 사이의 통합 협상이 진행되기도 했지만 이승만이 독촉을 중심으로 한 통합을 고집하여 실패했다.

1946년 1월 4일 김구는 정권 인수운동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비상정치회의 소집을 발표한다. 임시정부 중심의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조직이었다. 이런 의도를 알고 있던 좌익과 미군정은 비상정치회의 소집을 무시한다. 미군정과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원치않았던 우익도 임정 추대운동을 포기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김구의 위기를 포착한 이승만은 독촉과 비상정치회의를 통합할 것을 김구에게 제안한다. 정치적으로 고립돼 있던 김구는 이승만과 다시 손을 잡고, 두 세력의 통합 단체인 비상국민회의가 출범한다. 이후 김구가 독자 세력화를 위해 우익정당 통합운동을 진행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한독당과 한민당의 사이를 갈라놓기도 했다.

김구와 이승만은 김구가 이끄는 반탁총동원위원회와 독촉의 지방조직을 통합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군민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우익 최대의 대중조직이었다. 김구와 이승만, 두 세력은 조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다툼을 벌였다. 초반에는 '독촉군민회 전국도부군지부장회의'를 거치며 김구 세력이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1946년 봄, '광산 스캔들'로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물러난 이승만이 이른바 '남선순행'을 통해 삼남 지방의 지역 조직을 다진 결과, 김구 세력은 6월 '독촉군민회 전국대회'에서 이승만 세력에게 총재직을 비롯해 조직의 주도권을 빼았겼다.[17]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이승만정읍발언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지지를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김구를 비롯한 민족진영에서는 민족 전체의 총선거를 주장하여 이승만과 다른 견해를 드러내게 된다. 이때 여운형과 김규식좌우 합작 운동을 진행하자 김구는 지지 성명을 발표한다.[18]

1947년 5월 미소공위가 재개되자 임정법통론을 주장했던 김구는 불참을 선언하자 안재홍, 권태석 등은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한독당을 탈당했다. 이승만 역시 미소공위 불참을 선언했으나 자신의 후견 세력이던 한민당이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위기에 빠졌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반탁시위를 주도하는 등 미군정을 공격한다. 그 해 7월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김구와 이승만은 정부 수립 방법과 우익 진영의 주도권을 두고 다시 대립된다. 김구는 국민의회를 통해 단독정부 수립 반대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때 이승만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하며 손을 내밀기도 했지만 이승만은 취임을 거부한다.

1947년 9월 한국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김구는 임정법통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김구는 조소앙 등 중간파가 주장하는 남북지도자회의에 입각한 남북 총선거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에 한독당은 조소앙이 주도하는 12정당 협의회에 가입한다.[19] 이승만과 한민당은 한독당과 중간파가 연합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 결과 한독당은 12정당협의회에서 이탈해 다시 이승만 세력과 통합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국민의회와 이승만 측의 한국민족대표자대회가 통합을 결합했다. 그러나 12월 2일 장덕수 피살 이후 미군정에 암살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김구와 관계를 단절하면서, 둘은 완전히 결별하고 만다.

2.4.2.1. 장덕수 피살 후 벌어진 일

한민당 정치장관 장덕수가 피살되는 일이 벌어지자 미군은 김구를 배후세력으로 지목하며 증언을 확보하려 했다. 이는 김구가 이미 미군정에 송진우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받은 바 있고, 반탁운동을 진행하며 신탁통치의 주체가 될 미군정과 정면으로 충돌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정은 김구를 난폭한 호랑이란 뜻의 'Black Tiger'라고 부르기도 했다.

송진우에 이어 장덕수가 암살되자 "미군정은 김구가 암살에 개입했다고 의심했고, 이승만의 측근이자 미군정 정보참모부에서 일하던 장석윤을 통해 김구를 증인으로 재판정에 소환했다. 강력한 연대자였던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목전에 두고 김구와의 연대를 중단키로 결정했다. 또한 1946~47년간 한독당과 합당의 대상으로 논의되기도 했던 한민당 역시 김구·한독당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1947년말에 이르러 김구는 남한 우익진영에서 완벽하게 고립되었다."[20] 이승만은 반탁운동을 주도한 비상국민회의를 버리고 한민당과 연합해 독자적 행보를 걷기 시작하였다. 결국 김구는 대한민국 검찰청에게 미군정 재판정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 일로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는 사실상 완전히 단절된다.

2.4.2.2. 남북 연석회의 참여

1948년 4월 19일, 38선에 도착한 김구 일행.

김일성의 보고를 경청하고 있는 해방 직후 북 주석단 모습.[21]

최후의 건곤일척으로서 김규식과 방북하여 김일성과 연석회의를 열어 남북 총선거를 실현하려 했으나 실패, 북한의 프로파간다의 대상이 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22]

김구 본인은 극렬한 반공주의인데다 김일성 암살시도의 배후 [23]로 지목받아 김일성과는 원수 관계였으나 이승만과의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가하면서 서로를 이용해먹는다.[24] 김구가 이승만의 지지율을 넘기 위해 북행을 결심하게 됐다는 것은 한독당 보고서외에도 여러 인물들의 회고와, 정황에서 드러난다.

장건상이라는 인물에 따르면 김구는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하기 직전까지 북한에 가고 싶은 의향이 없다고 밝혔다고 한다. 말년에 이승만과의 사이가 얼마나 소원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애초에 남북 연석회의 자체가 북한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자리였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왜냐하면 그 때는 이미 남북한 정부 수립은 사실화되었고 애초에 김일성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할 생각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북한영화 위대한 품에서 보면 조롱을 당하는데, 김구가 김일성에게 절을 하면서 자신에게 땅을 몇 마지기 주면 황해도에서 과수원한다면서 반공운동을 한 것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25] 이로 인해 김구는 평생 반공주의자로 살았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김일성에게 이용당했다는 오명을 쓰게 된다.

2.4.3. 혁명의용군 사건

1948년에 국회의장 후보로 추천되었지만, 김구가 선거를 포기하여 이승만이 국회의장으로 당선되었다. 7월의 제헌의회에서 대통령 후보에서 지지율 6%대, 2위로 낙선했다. 부통령 후보에서도 역시 2위였다. 이는 김구가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한독당소속 정치인들의 국회의원 출마를 금지시키고 출마한 당원들을 쫓아낸 것에 기인한다.[26] [27]

같은 해에 여순사건의 와중에 소위 "혁명의용군 사건"이 일어난다. 이승만은 김구를 이 사건에 엮어서 정치적으로 몰락시키려고 했지만 완벽하게 실패한다. 이승만이 유도하려던 내용은 이승만과 같은 지역구에 출마한 최능진과 오동기 14연대장이 공모해서 공산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내용인데 막상, 최능진과 김구 사이에 아무런 접점도 없고 제대로 만난 적조차 없던지라 오히려 국내에서 이승만의 이미지가 악화되고 말았다.

2.4.4. 죽음과 장례

효창공원 내부에 자리한 묘역

1949년, 사저였던 경교장에서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하여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친다. 암살의 배후는 이승만, 김창룡이나 장택상, 심지어 미국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실행범이 안두희란 것뿐이다. 안두희는 50여년 뒤, 버스기사인 박기서의 둔기에 피살당한다.

1949년 6월26일 순국한 그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뤄졌으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가 몰렸는데, 국사편찬위의 연구에 따르면 26일 오후 12시30분께 사망한 후 28일 오후 1시까지 약 75만 명이 종로구 평동의 빈소인 경교장을 다녀갔다고 한다.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장례가 10일장으로 치러져서 조문객수는 2백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진을 보려면 본 링크를, 국민장 동영상을 보려면 이 링크를 참조하자. 1949년 10대 뉴스 1위였다고 한다.

2.4.5. 김구의 복권

김구와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이승만은 역사 속에서 김구의 존재감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김구의 백범일지를 금서로 지정하고, 학계에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업적, 즉 외교독립론을 강조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1950년대 초중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김구에 대해서 편파적인 인식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28]

김구가 본격적으로 복권된 것은 5.16 군사정변 이후의 일이다. 박정희는 이승만보다 김구를 높게 평가했고, 이승만이 1965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귀국도 거부했다. 특히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해서 격찬을 가했다. 그래서 해방 이후 12년만에 박정희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29]

박정희 시절 정권 차원에서 김구를 복권시킨 원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김구의 차남인 도깨비 김신이 군사정변의 주요 협력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정권의 입장에서는 전정부를 배격하고 그 정치적 라이벌을 복권하는 것이 쿠테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한 방법이었다. 현재 대중들에게는 김구가 중도적인 스탠스를 가진 독립운동가로 미화됐지만, 사실 김구는 민족주의 색채가 매우 강한 우파 성향이었다. 소련을 대국 섬기듯 추종하는 일부 사회주의 청년들을 일컬어 정주(程朱)의[30]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고 한다며 비판하기도 했으며, 특히 해방 후 친일세력들이 반공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백범을 빨갱이로 매도하려 했기 때문에 더욱 거리를 두게 되었다.

김구는 1946년 3월 1일, 북한의 3.1절 기념식에 맞춰서 백의사 요원들을 북한으로 올려보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들은 먼저 김일성의 외증조부인 강양욱의 집에 폭탄을 투척했다. 강양욱을 노렸으나 강양욱은 살아남았고, 강양욱의 아들 딸 며느리와 강양욱 목사 집에 심방온 다른 목사 및 경비병만 폭사하였다. 김책을 노린 테러는 실패하였으며, 김일성을 직접 겨냥한 폭탄 투척은 김일성의 곁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떨어진 폭탄을 되집어 던져[31]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북한군에 체포된 요원들은 김구, 이승만 명의의 신임장과 고당 조만식에게 보내는 서한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백의사가 김구에게 보고한 김일성, 김책, 강량욱에 대한 암살 계획을 김구가 승인했음을 진술했다. 이는 당시 소군정 문서에 기록되어 남아있다. 도진순[32]의 1997년 저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관계>에 따르면 김구의 전 약혼자였던 안신호가 김구에게 강양욱 암살에 대해 물으니 김구가 몹시 난처해했다고 한다.

이처럼 1980년대 브루스 커밍스나 리처드 로빈슨 등 한국 현대사 전공자들은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각종 암살 사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이처럼 각종 암살과 백색테러의 배후로 김구를 의심하는 평가는 비단 현대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미군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김구에 대한 각종 의혹은 김구의 존재 자체를 덮어버리려던 이승만과 의도적으로 미화를 시도한 박정희 때에 쉬쉬되다가 1980년대에 들어 다시 재조명 받기 시작한 것이라 보면 된다.[33]

3. 김구의 사상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일지 민족국가 편 中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백범일지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편 中

자유와 자유 아님이 구분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나오느냐에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나온다. 일 개인에서 나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 독재라 하고 일반적으로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백범일지 정치이념 편 中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것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헤겔의 변증법,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이 두 가지에,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 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물론 비판하는 것도 철저하게 금지하여, 이것을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 조선의 사문난적을 대한 것 이상이다.

백범일지 정치이념 편 中[34]

미군정 아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시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내 나이 73세, 이제 새삼스럽게 재물을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국 군정 아래에서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 2.) 中

해방 후에 출판된 백범일지의 부록 "나의 소원"에서 이념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피력하여 친좌익적인 인물로 비추어지는 경향이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김구는 해방 이전부터 사회주의 계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임정 시절부터 우파적 태도를 견지한 인물이다. 백범일지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그의 생각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quot;레닌의 방귀구멍을 꿀물 핥듯하는 자들!&quot;[35]. 일단 민족이 있어야 인민 혁명이든 뭐든 한다며 당시 사회주의 계열을 빙 돌려서 깐 부분도 있다. 또한 김립을 비롯하여 자신에게 거슬리는 공산주의자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임정 시절에 김구가 몰두했던 작업 중 하나가 다름아닌 다른 좌익 운동가들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처음 이 사실을 아는 사학도들을 여러모로 충공깽에 빠뜨리는 부분.

당시에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대안적인 움직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조셉 매카시(매카시즘의 선구자)의 등장 이전까지는 공개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정치가는 드물었다. 이승만마저도 취임연설에서는 "평화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다면, 공산주의자의 참여를 받아줄 수 있다"고 연설했던 일이 있으며 해방 직후 귀국한 후에는 박헌영을 만나 공산주의 사상을 깊이 존경한다는 립서비스를 해주기도 했다. 물론 폭력에 의한 자본주의 체제 전복과 혁명만이 자본주의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칼 마르크스가 자기 책에 써놓았으므로 폭력혁명 노선을 부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 노선을 수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마르크스의 저술을 경전으로 여기는 종교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회과학적 이념이기에 마르크스가 책에 써놓았다고 그대로 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역사적 유물론 자체가 보편적 교리를 주장하지 않고 시대적 상황에 맞는 동적인 강령을 추구하는 데다가[36], 폭력혁명이라는 개념의 의미가 여러 투쟁들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이기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유럽에서 극좌 정당들도 의회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김구는 공산당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소련의 국제공산당에 의지하려드는 것이 친일파와 다름 없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보았고, 이들의 활동을 임정 주류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곱게 보지 않았다. 공산당 활동을 민족해방의 수단으로 받아들였느냐(여운형, 조봉암, 이동휘), 실제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여 민족을 넘어선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주장했느냐(박헌영) 그런 구분없이 공산당=매국노라고 간주했다.

또한 해방 이후 우익세력(한민당)이 임시정부의 봉대를 주장했던 것에 반해, 당시 조선 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회주의 세력들은 임정봉대를 반대하자 김구는 사회주의 세력을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적으로 보고 우익세력과 합작해 사회주의 세력을 배척하는 데에 앞장서게 된다. 김구가 내세운 임시정부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국내 좌익계열은 이러한 주장에 크게 반발했다. 좌익계열은 사실상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데다, 그나마 한 것도 지하활동으로 구분되는 경우라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의 활동 앞에선 자연스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단, 지나치게 정통성을 내세우는 김구에 대해 당대에 명성을 날리던 민족변호사 허헌은 김구를 아주 제대로 깠다.[37]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인가.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 양반들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면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해 이들의 무장투쟁을 도왔을 것이다.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허헌 [38]

한편 이승만도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여, 동시에 민국 연호를 사용했다.[39] 물론 이승만 본인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단 점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이 민국 연호는 단군기원과 함께, 이승만의 사퇴 전까지 사용되었다.

3.1. 종교

백범 사상의 뿌리는 유가, 도가, 도참가, 무가, 동학, 주자학, 불교 등 동양 사상을 망라한 위에 그리스도교와 계몽주의가 정착한 다원적이요, 중층적이요, 포괄적이라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변화는 전환기를 살았던 젊은이가 보여준 지성적 고민의 단면으로 이해된다. 거기에 평민사상과 행동주의 생활 철학이 마지막 숨질 때까지 백범을 지켰다.

— 백범 기념관 설명문 '백범 사상의 뿌리'(조동걸)

김구의 종교위키백과에서는 유교 - 동학 - 불교(법명: 원종) - 개신교 - 천주교(세례명: 베드로)로 나열하여 개종을 4번이나 한 것으로 나와 있는 혼란이 있고, 일부 문서에도 천주교로 나왔는데 일단 천주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는 1991년 종교신문의 보도로 암살 직전 종부성사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여러 근거로 나온다… 그러나 김구의 비서 선우진이 당시 안두희에게 방으로 안내한 것이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 이었고 안내 후 미쳐 2~3분뒤에 못 되어 3층에서 총소리가 울리고 총소리에 놀라 당시 비서였던 이풍식, 이국태가 뛰어 올라갔으며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음 사람이 독립운동가이며 대광고 교장 박동엽과 경비원 2명이 따라 올라갔을때는 12시 40분경이었는데 이미 사망 했다 한다. 그런데 종교신문에서는 10시에 아침 미사를 마친 노기남 대주교가 저격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도착한 것도 약간 시간상으로 무리인데다가 이것이 사실이라해도 악의는 아니겠으나 임종직전 또는 임종 후 세례하고 병자성사를 한 것이 본인의 본의인지는 매우 의문이다. 다만, 노기남 대주교 기념 화보에 실린 사진 중에 한국 천주교회의 주요 행사에 김구가 배석한 모습이 등장한 사진이 있는 것을 보면 설령 천주교로 입교 안했더라도 천주교 고위 성직자와의 친분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여지는 존재한다.

2004년 김삼웅의 ≪백범 김구 평전≫에 의하면 사망 전 천주교 개종 내용 자체가 없다… 다만 젊은 시절 개신교 개종 사건은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초기 17세까지는 한학을 배웠으나 황해도 출신에 잔반이라 당연히(?) 과거에 떨어지고 백범의 아버님의 권유로 풍수와 관상학 공부를 공부했는데, 관상학 책≪마의상서≫를 석달정도 볼 정도로 매우 심취 했으나 자신의 관상에 부(富)나 귀(貴)는 하나도 없고, 천(賤)하고 빈(貧), 흉(凶)만 찾아서 실망하고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은게 마음좋은만 못하다는 격언을 떠올리고 마음 좋은 사람만 되자란 결심을 했고, 병서를 보기 시작해서 ≪손자≫,≪오기자≫,≪삼략≫,≪육도≫ 등을 읽으면서 1년여간 마을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마침 19세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접주가 되어 700여명을 지휘했다고 한다. 동학 운동이후 도피중에 유학자 후조 고능성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년여간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기도 했다.

김구가 개신교에 귀의한 것은 아버지의 3년상이 끝나고, 약혼자가 급사한 1903년 경인데 1896년 수감생활중에 신문과 도서로 서양문물에 관심이 생긴 영향도 있었다. 1902년경 동학 접주시절 종사였던 우종서를 만나 개신교를 소개 받았고, 1903년 11월 감리회소속 헌트 목사가 황해도 지역을 방문했을때 세례를 받은것으로 추정하는데 1903년말 2주간 평양에서 교리와 성경공부를 했다고 한다. [40]

도산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와 결혼 할뻔하다가 무산되고 11세 연하 최준례와 결혼하는데 미국인 목사 군예빈이 주례하여 개신교식으로 치뤘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반이후부터의 삶은 개신교인이다. 백범 김구의 개신교 개종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가 국권 회복을 위한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것도 바로 개신교와 연관되기 때문.[41]

개신교/대한민국 문서 참고.

4. 외모에 대한 묘사

외모만 봐서는 말년의 한복 입은 온화한 지식인의 이미지가 강하고 앞으로 대한민국의 길을 군사, 경제적 강국이 아닌 문화적 강국으로 제시하는 등 지식인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생전의 활동은 투사적인 모습을 더 많이 보였다.[42]

▲ 김구보다 1살 많은 이승만과 함께 찍은 사진.

▲ 국내정진군 OSS소속 도노번 소장 옆에 서도 꿀리지 않는 큰 체격을 자랑한다.

▲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왼쪽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왜소한 학자의 이미지와는 달리 체격 또한 생각보다 큰 편이다. 당대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 기준으로도 체격이 좋다. 동학 당시 거친 농민군 사이에서 소년이었음에도 접주 역할을 했다는 점, 치하포 사건 당시 성인 남성을 제압하여 살해했을 정도였음을 보면 체격만큼 완력도 좋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호신술을 비롯한 각종 무술도 익힌 적이 있고, 19세의 나이로 쓰치다를 죽일 때 완력으로 허리를 꺾어 죽였을 정도(!!!)면 매우 힘이 장사였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과 비교하면 김구가 머리 반 개는 더 크다. 이승만의 키도 당시 남성 기준으로는 꽤 큰 편인 약 170cm(지금의 남자키180cm...) 정도로 알려졌는데, 사진 속 이승만과 비교해 보면 김구는 거의 180cm 중반에 달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는 현재 기준으로도 큰 키인데 당시 체감상으로는 대략 190중반의 장신을 보는 느낌과 흡사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투쟁 활동은 이러한 큰 체격이 뒷받침해준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노년기의 이미지와 드라마 등에서 나오는 김구 역의 연기자들이 대부분 굵고 무게감 있는 톤으로 목소리 연기를 하다 보니 실제 김구의 목소리도 이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연설이나 대화할 때의 육성을 들어보면 톤이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이다. 느릿느릿 차분하게 정확한 딕션을 구사하면서 논리와 감성에 모두 호소하는 연설 스타일. 1946년 광복 1주년 행사 때의 연설 영상

5. 테러리스트 논쟁

김구는 민왕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상인을 군인으로 오인하여 살해하였고 복역중 탈출하였다….(중략) 3.1운동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1928년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테러 활동을 시작하였다…(후략)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129쪽

2008년 교과서포럼에서 출판된 근현대사 대안교과서[43]에는 일본에 대한 테러 활동을 수행하였다고 나왔는데, 이 내용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자 "백범을 테러리스트로 취급하다니!"라면서 여론이 폭발, 해당 교과서를 집필한 사람들이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이외수진중권 등도 이 교과서의 표현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인식이 형편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론화 하기도 했다.

김구가 독립운동 당시 수행한 일은 단순히 일본 군부에 대한 무장전에 국한되는 것만이 아니라 임시정부 조직, 광복군 조직 등의 체계적인 일이었기에 이 교과서의 설명이 그의 업적 중 일부만을 악의적으로 표현한다고 오해를 살 소지는 충분히 있다.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는 그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불특정 민간인까지 희생제물로 쓰는 비겁한 행동'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러한 반응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견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을 존중하는 입장에서는 테러 대신 의열 투쟁이라는 용어를 써서 폭력을 사용하는 독립운동을 구별하기도 한다. 의열활동과 테러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테러가 다수의 민간인을 목표로 하는 데 비해 의열투쟁은 일제의 주요기관 파괴와 중요인사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지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한국 내부만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등지에서 일어나는 활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김구의 경우 해방 이후에도 우익 진영에 몸담았으며,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을 대상으로 백색테러를 했으며, 남한 내의 민간 좌익 세력 또는 신탁통치 옹호 세력을 대상으로 백색테러를 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문단에 상술.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 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때『백범일지』상권을 기술하였다.

—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下, 돌베게

(오사마 빈 라덴의)투쟁의 방식이 테러라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민족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이해할 부분이 있다. 우리가 존경하는 김구 선생도 테러 부대원이었다.

— 오만한 나라 미국, 김승국

테러 전술이라고 판단한 김구는 특수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를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장제스를 만나 한중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침체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켰다.

—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이야기, 윤희진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도왜실기(屠倭實記)》는 원래 김구 선생이 1932년에 주도한 일련의 대(對)일본 폭탄테러 활동의 진상을 중국인에게 알리기 위해 중국어로 쓴 책이다.

— 도왜실기 - 범우문고 86, 출판사 서문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함께 테러 활동을 많이 한 남화연맹은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맹렬히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서중석

윤봉길은 6월 21일,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윤봉길의 폭탄 테러로 독립군들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더더욱 불안에 떨었습니다.

— (어린이용) 헐레벌떡 어제 오늘 근대 이야기 딱 22장면, 한정영

김구는 임시정부 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의열단에서 벌이는 테러의 방법을 써서라도 침체된 항일의 기세를 높이고자 했다.

— 한국사 이야기 21 - 해방 그 날이 오면, 이이화

목숨을 걸었던 윤봉길의 폭탄 테러는 독립 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중국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 초등학생이 가장 궁금해 하는 한국사 100장면, 오주영

독립운동 선상에서 테러는 무정부주의자나 급진과격파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과거 테러활동의 용사들이 노선전환을 한 이후인 1930년대 초반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의 외곽에 애국단을 조직하여 세상을 진동시킨 두 차례의 테러활동을 감행했다.

— 대한민국 사(史)2, 한홍구

이봉창 의사의 개인적 테러는 단지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임시정부에서 김구가 이끄는 산하조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 중딩고딩을 위한 대중매체 읽고 쓰고 생각하기, 김슬옹

김구 선생이 해방 이전에 일제에 대해 테러를 쓴 것은 구국의 혈성이 담긴 애국 행위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테러를 정치활동의 한 방법으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문제연구소

위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듯, 김구의 항일활동을 테러활동이라고 기술한 것은 사실 우파들에게 좌익적이라고 한참 욕을 먹었던 금성출판사가 먼저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외수나 진중권이 금성출판사를 옹호한 적이 있을지언정 깐 적은 없다. 이외에도 위의 수많은 인용구에서 알 수 있듯 김구의 독립운동에 '테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진보나 자유주의 계열로 분류되는 많은 저자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사항이었으며 오히려 그를 표현하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결국 편싸움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실제로 대안교과서의 기술이 테러리스트라고 한 것처럼 알려진 것은 흑색선전의 영향이 지대하다. 그의 요인 암살 행위는 사전적 의미의 테러 행위가 맞다. 말하자면 해방 이전 일본을 상대로 한 테러와 해방 이후 국내 정치인을 상대로한 테러에 대한 관점의 문제다. 예를 들어 해방 이전에 김산과 같은 인물은 테러리스트라는 의미를 긍정적으로 서술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무수히 많은 정치인들이 테러로 죽어가면서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조봉암의 경우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싫어했다.

하지만 진보진영 측에서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백의사의 활동에는 좌익보다 우익인사들이 더 많이 희생되었다. 백의사 항목 참조. 따라서 이를 두고 김구를 극우주의자라 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무엇보다 김구와 백의사는 간접적인 접점이 많았으나, 김구가 이들을 지휘하고 지시를 내렸다는 근거는 많지 않다.

이 논란은 학술적으로 연구된 김구라는 인물과 민족주의와 국부로서 존중받는 이미지의 대중적 김구 사이의 괴리가 컸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도 볼 수 있다. 김구에 대한 평전이나 연구자료를 보면 그의 행동을 '테러리즘'으로 표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대중들에게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이 용어를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그 차이가 커졌던 것이고 이 간극이 이슈화 되면서 용어사용 논쟁으로 비화되었고, 정치권이 이를 적극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현대 국제사회에서의 테러행위가 불특정다수의 민간인들을 겨냥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테러'라는 어휘에 이전보다 부정적인 의미가 짙어진 것도 대중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독립운동과 무장 투쟁을 포함한 근대의 테러 행위는 거의 대부분 적국의 국가원수 등 주요인사, 매국노와 반역자, 군인 또는 경찰 등 명백히 적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경우가 많다. 이는 20세기 당시의 테러 활동이 부정적인 의미가 강한 현대의 무차별 테러와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만 아래 문단에 서술될 해방 이후의 백색테러의 경우 그 대상이 민간인이었던 데다가, 테러 과정에서 목표로 지정되지 않은 무관한 인물들까지 덩달아 희생되는 경우가 있어서 더욱 문제가 된다.

5.1. 백색테러

김구는 중도주의자가 아니라 강경한 반공 극우 민족주의자였으며 테러를 통해 거물급 정적들을 제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연구의 진척이 없거나 사료 부족으로 의혹 수준에 머문 사례도 있지만, 김립 피살 사건 같이 본인이 직접 범행 사실을 밝혀 김구의 책임소재가 명백한 사례도 존재한다. 김구가 배후로 의심을 받는 암살들에 희생된 거물급 정적들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이 있으며 심지어 여운형도 김구가 죽였단 의혹이 존재한다.[44] 여기에 실패한 인물을 합치면 김일성도 있다.[45] 사실 현재 한국인이 김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인 평화주의자, 중도적 정치성향, 통일지상주의자, 반이승만 스탠스 등은 어느정도 후대에 덧붙여진 이미지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김구를 좌파로 보는 시각은 훗날 이승만 지지자들이 말년에 이승만과 부딪쳤던 김구의 행동을 그의 일생에 걸친 것마냥 과장하여 후대에 꾸준히 덧씌운 결과이며, 이승만과 부딪쳤으면 좌파라고 생각하는 막연하고도 무식한 생각을 기초로 한다. 김구를 중도주의자로 보는 시각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주장에 반대해 북한과의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한 말년의 행적을 과대 해석한 것이다. 김구는 김일성이 통일정부를 위해 애쓸 거라는 기대가 별로 없었고, 그의 방북은 이승만과의 사이가 틀어진 것+백색테러의 결과가 초래한 정치적 입지 감소를 타개하기 위해 감행한 감정적인 측면이 많았다. 다만 말년에 통일 민족정부 수립을 외면하고 분단을 고착화 시키는 단독정부수립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 하는 이승만의 반대점에 서게 되다보니 암살된 뒤에 용공주의자 또는 중도주의자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게 되었다.

또한 김구는 이승만과 같이, 좌익을 대상으로 백색테러를 펼치기 위한 조직인 백의사를 지휘했다는 의심을 샀다. 소련 해체 이후 비밀해제된 러시아 국방성 문서들도 당시 김구를 배후로 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구는 김규식, 이승만과 함께 좌익분자들을 억압하고, 우익진영을 강화하기 위한 용도로 미군정청으로부터 3억엔 규모의 차관을 공여받기로 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훗날 이들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이 비자금의 실체는 밝혀지게 되었다.

비망록에 의하면 이른바 <4金회담>에서 김일성과 김두봉이 김구와 김규식에게 "헌법은 채택하지만 당분간 내각은 구성하지 않고, 김구·김규식 두 선생에게 직위를 부여하고 헌법을 통과한 후 통일정부를 세울 계획"이라고 제의, 두 정치지도자를 회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5.1.1. 독립운동가를 대상으로 한 테러 사주

신탁통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백의사라는 테러단체에서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를 암살했는데, 여기에 김구가 관여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만약 김구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중 적어도 한명에 대한 암살을 지시했다면, 김구를 존경하는 사람 대부분이 김구에 대한 존경을 철회할 것이 확실시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다. 김구가 직접적으로 지시를 내린것 아니냐고 당시에도 강력히 의심은 되었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미 군정은 김구를 용의자로 의심, 반탁 데모 경고 이후 소환해서 경고를 준다.[46] 브루스 커밍스, 리처드 로빈슨 등은 김구를 의심하고 있다.[47]

송진우 암살건 같은 경우에는 미군정이 의심했던 사항이기는 하나,1990년대 김구암살이 재조명될때 다른 점이 발견되었다. 송진우는 임정 봉대론을 주장했으며 김구가 후술하기를 "자신들에게 돈을 대주는 사람을 죽일리가 있냐"고 반문할 정도로 김구 배후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한 송진우는 경교장에 정치자금 900만원을 전달한점과 한민당과 임정을 합당시켜려고 했던 점을 필두로 본다면 김구의 배후설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구의 배후론을 주장했던 장택상의 발언의 신빙성의 의문점은 장택상 같은 경우는 임정에 원한이 있었다는 점을 들수 있고, 송진우,여운형,암살사건의 배후에 1공화국은 항상 김구배후론을 견지했다는 사실이다.(실제로 1955년 경찰 요시찰요람의 1순위가 한독당이고 2순위가 민전이었다) [48][49]

조병옥도 김구를 의심하였다. 조병옥은 김구의 소행이라고 확신하였다. 조병옥은 송진우가 우파 내에서의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꺼려한 김구가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자기는 알고 있다[50]고 언급하기도 했다.

더구나 미군정의 손에 체범된 한현우가 15년형을 언도받은것과는 달리 1951년 8월에 국회에서 이미 시내를 활보중인것이 확인되었고[51], 이에 법무차관이 체포에 노력중이라고 답변하였다. 하지만 한현우는 일본에서 건너가서 살았다. 더구나 1994년 다큐에서 한현우는 안두희도 1949년에 방첩대에서 서로 알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다.

이처럼 송진우 암살배후로 미군정이나 학자 브루스 커밍스, 리처드 로빈슨도 김구를 의심했고 국내에서도 조병옥과 장택상은 그를 의심했다. 최근에는 의문이 가는점이 많다. 이미 1946년 1월1일의 임정포고령1호라고 부리는 임정쿠데타는 12월 29일 계획되었고, 한민당에 소속된 서울시내 경찰서장, 유력자들은 임정의 포고령이 따르기로 한시점이 12월 29일이다.

한현우의 진술중에 김구,이승만이 자신을 의사라고 칭찬해주었다고 하는데,이것은 신뢰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김구의 송진우 저격이 확실하다면 1공화국이 김구를 배격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굳이 숨길필요가 없다. 하지만 의혹만이 남아있다.

5.1.1.1. 안공근 암살 의혹

김구의 최측근이었던 안공근상해사변으로 상하이가 일본군에 함락되었을 때 자신의 가족보다도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을 먼저 모시고 나왔다. 그 뒤에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나온다. 그러나 형수(안중근의 부인)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구에게 심한 질책을 당한다.[52] 백범일지에는 안공근이 자신의 가족보다 김구의 어머니를 먼저 모시고 나왔다는 내용은 없다.

김구에게 호된 질책을 당한 후 김구와 결별한 안공근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려고 중국 국민당에 자금지원도 요청했다. 김구는 안공근에게 준 임시정부 및 한인애국단의 대외 연락업무를 박찬익에게 넘겼다. 이후 안공근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중 상하이의 한 부두에서 사라졌었다.

안공근은 의문의 실종을 당했고, 이후 김구의 최측근 인사인 모 독립지사의 수하들이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의혹[53] 이 독립운동가 후손들 사이에서 전해지고 있다.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죄했다는 일제가 꾸민 퍼포먼스를 놓고 안준생이 변절자라며 죽이라고 백범일지에 대놓고 기술했는데 이것도 이 사건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명망높은 안중근 가문의 영향력을 꺾고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고 했다는 가정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 근거는 별로 없다.

5.1.1.2. 김립 암살 사주

김구는 저서 백범일지에 김립이 코민테른으로부터 지급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했기 때문에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고 서술하면서 자신의 암살 지시를 정당화한다. 자세한 배경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김립 피살 사건 문서 참고. 그러나 역사학자 박노자는 이러한 김구의 주장을 근거가 없다며 정면으로 반박한다. 박노자는 "1922년 초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54]" 라고 말한다.

아울러 김립블라디미르 레닌이 준 200만 루블 중 60만 루블만 가져왔는데, 김립의 암살로 임정계는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독립운동 세력에 돌아갔을 나머지 140만 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된다.[55] 백범일지의 주장대로 김립이 향락을 했다거나 중국 여자와 집을 샀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김립은 여태 독립운동 표창을 받지 못하고 있다.

5.1.1.3. 옥관빈 암살 사주

김구 세력이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지역에서 송병조 세력과 갈등하다가 벌인 테러사건이다. 자세한 사항은 옥관빈 피살사건 문서 참고.

위에서 서술한 김립은 공산당이었는데 옥관빈의 경우는 중국 국민당에서 중요한 당직을 맡았고 장제스의 추종자였다. 이렇게 볼 때 김구의 테러대상은 좌우를 가리는 게 아닐 수도 있는 점을 보여준다. 위의 언급된 박노자가 "김구와 그 계통의 극우파들이 저지른 각종의 암살행각"을 이야기할 때 김립 암살과 같이 언급한 테러가 옥관빈 암살이다. #

5.1.1.4. 안준생 암살 사주

귀국 길에 중국 경찰을 찾아가 그곳에 거주하는 안준생을 죽여달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스스로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사죄한 것을 이유로 그를 암살해달라고 중국, 현 중화민국(대만) 경찰에 부탁했다고 스스로 백범일지에 기록하기도 했다.

5.1.2. 기타

김구는 김성수 암살을 사주했다는 의혹도 있다.[56]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때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하루 전에 피하라고 통보를 했지만 안창호에게는 거사 당일까지 통보를 미루다가 거사 당일에야 부하를 보내 통보하게 했는데 하필 안창호가 외출하는 바람에 통보를 못해 안창호는 일제 경찰에 붙잡혀 조선으로 압송되고 만다. 김구는 안창호가 이끌었던 흥사단이 개방적인 조직이라 자칫 잘못하면 비밀이 샐 것이라고 우려해서 통보를 늦췄다고 주장했지만, 안창호 항목에 서술된 것처럼 안창호는 흥사단과 무장독립투쟁 사이에 분명히 선을 그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김구가 일본 경찰의 손을 빌어 평소 껄끄럽던 안창호를 몰아낸 것 아니냐는 이론이 나오고 있다.

5.1.3. 백의사의 북한 공격 논란

백의사가 1946년 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간부들을 상대로 암살을 시도했을 때 김구가 이러한 계획을 승인했다는 증거는 많이 나와 있다. 김구가 백색테러 공격을 직접 지시한 정황이 의혹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하지만 백의사에 몸 담으며 이러한 계획을 승인한 이상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행동이 현재의 시각에서도 테러리즘이라는 문제제기가 있다.

1946년, 북한의 3.1절 기념 행사에서 맞춰 백의사는 요원들을 평양에 침투시켰다. 요원들은 김구와 이승만 명의의 신임장 및, 고당 조만식에게 보내는 서한을 소지하고 있었다. 요원들의 목표는 김일성, 김책과 김일성의 외증조부인 목사 강양욱이었다. 이들은 먼저 강양욱의 집에 폭탄을 던졌으나 강양욱은 제거하지 못한 채 그 가족과 심방 온 목사, 그리고 경비병만 폭사했다. 김책을 노린 테러는 실패했으며, 최종적으로 김일성을 겨냥한 폭탄 투척 역시 실패로 끝났다. 요원들이 던진 폭탄을 소련군 장교가 되집어 던지는 중에 폭발하여, 해당 장교는 한 쪽 팔이 날아갔다.

만약 이 김일성, 김책, 강양욱만 피해를 입고 다른 민간인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입장에선 38선 이북을 불법점거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는 반역세력을 공격한 것이고, 정당하지 못한 살인이 되더라도 민간인은 아니니까 테러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해진다. 그런데, 김책에 대한 공격과 강양욱에 대한 공격은 성공했다면 죄 없는 가족도 다칠 위험이 높았고, 실제로도 강양욱의 아들, 며느리, 딸과 강양욱의 지인인 목사가 사망했다.

김구가 계획을 승인한 이상, 민간인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승인한 것이니 테러리즘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김구 옹호세력에서는 어떠한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김일성 김책 강양욱은 못잡았지만 빨갱이 놈들 가족이라도 때려잡았으니 참 고소하단 식의 생각을 사람들이 많이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김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세력들도 김구의 북폭 승인에 대해선 문제삼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연좌제가 잘못된 것이니, 어떤 사람이 죽어 마땅하다고 해도 가족을 해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확고해진 현재 김구의 행동은 큰 논란이 될 소지를 안고 있다. 김구 옹호 세력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을 꺼리고 있다.

6. 평가

6.1. vs 이승만

라이벌로 비추어지는 이승만을 아주 높게 평가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김구의 평가가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이 압도적인 평가는 자료와 실증에 입각한 것 보다는 이미지적인 것에 가깝기 때문에 그다지 객관적이지는 않다. 해방정국 시절 김구의 맹동적인 행보나(송진우 암살설이며…) 임시정부 시절의 좌익 사냥에 대해선 대중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김구가 맹렬한 반공주의자였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또한 뒤에도 나와있지만 이승만의 대통령 이후의 행적이 너무나도 막장이어서 김구가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이승만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외교론에 의존한 독립운동을 주장하여 자주성이 없다는 평을 듣는 데 반해[57] 김구는 자주적이다 소리를 듣는데 당장 김구가 줄을 대었던 것이 중화민국장제스 총통과 그의 처남인 쑹즈원 등이다. 이승만이 미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자주성이 없고 김구가 중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자주성이 있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의문이다. 이승만도 국내진공작전에서 OSS의 협조를 얻어 조선인 무장세력을 한반도에 잠입시키는 일을 추진하는 등 무장독립에도 지원을 했으며 항일단파방송 사건 때 광복군의 활약상을 선전하는 방송을 하기도 했다. 김구가 임시정부 말엽에 마련한 한국광복군 역시 그리 자주적 군대는 아니었다. 한국광복군은 장제스의 입김이 굉장히 강해 장제스의 허가 없이는 교전을 할 수도 병력을 늘릴 수도 없었다. 서방 연합국은 장제스가 김구를 지원하는 것을 중일전쟁 종전 이후 장제스가 한국을 괴뢰국화하려는 술책의 일환으로 보았기 때문에 장제스가 광복군을 키우지 못하게 압박했고 이에 장제스는 광복군을 강하게 통제하며 규모를 제한했다. 장제스는 오랫동안 임정이 한국 독립세력의 대표라고 볼 수 없다고 여겨 정식국가로 승인도 안해줬다. 그래도 장제스가 한국에서 꽤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봤을 때 퍼주기만 하고 마오쩌둥의 손에 대만으로 쫓겨나게 되어 한국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해서인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독립 지원만 거나하게 해주고 그걸로 얻어내려던 건 모두 날린 셈.

그럼에도 이승만의 독립운동이 더 크게 비판받는 것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단체를 두고 권력싸움을 한 것[58]과 더불어 위임통치 청원 사건이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이 조선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으로 해석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분노했으며 특히 강경파인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았다."고 분노했으며 이외의 독립운동가들도 이승만의 행동을 단순히 외국에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서 매국노의 행위로 보아 "우리가 다른 나라에 위임통치 받으려고 죽어라고 독립운동 한거냐?" 분노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한 비판 여론은, 당시의 국제 정세와 국제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로 떨어지는 것이라 오해했기 때문에 나온 비판이다. 연세대 연구 등에선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이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현재야 국제연맹이 공기취급을 받지만 이승만이 인식한 그때의 국제연맹의 위상은 지금과 달랐으며 김규식도 같은 내용을 파리에서 청원한 바가 있다. 자세한 것은 위임통치 청원 사건 문서 참조.

이외에도 김구에 비해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박한 이유는 대통령 재임 시절의 삽질인 반민특위 문제, 6.25 사변 때의 추태, 부정부패, 대량학살, 독재, 3.15 부정선거로 인한 하야로 현대에 그 평가가 최악으로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백범 김구 VS 우남 이승만”

두 사람의 노선들 자체는 모두 독립운동에 필요한 것이었으니 어느 한쪽 노선만을 지나치게 깎아내리는 것은 지양하도록 하자.[59] 외교독립론,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이 조화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와 별개로, 해방 직후 김구의 정치력에 관련한 비판도 못지 않다. 이철희 소장은 한 인터뷰에서 진보진영이 대체로 높게 평가하는 김구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정치력 만큼은 이승만을 좀 닮을 줄 알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이승만은 많은 과오를 남긴 대통령이었지만 적어도 정치력 기술에 있어서만큼은 대단히 노회하고 탁월한 보스의 모습이었으며[60] 그래서 혼란한 해방정국에서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자신이 이루려 한 소기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는 것.

6.2. 진보와 보수진영의 평가

"내 마음 속의 지도자"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61]

"김구 선생은 독립투사였고 절세의 애국자였지만 정치인으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신탁통치를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시한부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어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60쪽[62]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에서 김구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편이며, 위의 두 전직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양 진영 내부에서도 평가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진보 쪽 중에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는 NLPDR이나 민주당계 정당 지지층에서는 일평생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싸웠다는 점과 해방후에도 적극적으로 친일 인사를 등용해 이들을 인력 풀로 활용한 이승만과 달리 그들을 배척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사실 김구 역시 해방 후 정계 활동과정에서 일부 친일 행적을 보이는 인사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김구의 경우는 귀국 초에 장제스의 중국계 지원으로 정치자금을 끌어모을 시도를[63] 했을만큼 해외 인맥을 구축한 상태였으며, 상해의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명망이 매우 높았다. 무엇보다 1대 국회에 임정 세력의 참여율이 낮았던 관계로, 이승만처럼 대놓고 반공세력으로 변신한 친일 세력 및 그 자금을 끌어들이는 무리수를 굳이 둘 필요가 없었다. 비록 2대 국회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일부 친일인사를 쓰긴 했어도,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산한 것과 같은 후세에 지탄받는 정치적 언행(言行)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던 것.

김구를 극우인사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적어도 중도좌파 성향의 약산 김원봉을 상해로 끌어들이는 포용력은 갖췄던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는 좌우합작 및 남북협상을 내세운 김규식과 함께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면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거나 동참했던 다른 우익인사들과도 노선을 달리하였다. 당대의 대표적 극우 인사였던 장개석과 항일투쟁을 하면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백범의 사상적 성향에 대해 단정짓는 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진보 진영쪽에서는 박노자를 비롯한 진보신당민중민주주의 계열이나 강정구같은 인물들이 임시정부 법통론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인 적 있으며, 김구에 대해서도 과격민족주의 등 오점을 거론하며 김구를 백색테러범이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김구 청문회>라는 책까지 내놓으면서 김구를 "친일파가 만든 민족 영웅"이라며 매우 강하게 비판한 적도 있다.[64]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김구의 임정 시절이나 해방정국의 과격한 행동이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대중들의 기대만큼 우호적이지는 않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대놓고 첩과 총잡이를 거느리며 반대파들을 암살했다고 깠다.

보수 쪽에서도 민족주의, 반일을 내세우는 쪽은 김구를 매우 고평가하며 박정희 시절에는 박정희가 이승만을 싫어했던 것도 있어서 대대적인 푸쉬를 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자유경제원 등을 비롯한 뉴라이트 계열의 이승만 옹호파는 김구의 단일선거운동이 김일성등의 정치선전에 이용당했다며 비난하고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은 과로 보며 최근까지도 김구를 폄하하고 상대적으로 이승만을 추켜올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두고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까니 알고보면 중도라는 사람도 있으나 양쪽에서 까는 것과 까이는 인물의 정치 성향은 아무 상관도 없다. 이게 중도인 이유면 히틀러는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이 사이좋게 깠으니 중도인 좋은 사람인가? 또한 이용당했으니 자신을 이용한 사람과 같은 정치성향이었던 것이 아니냐면서 김구를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한 공산주의자라고 까는 쪽도 있는데[65] 역시나 상관없다. 나치에게 이용당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프로이센 귀족과 우익 지도층은 히틀러의 나치당과는 성향이 아주 먼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역시나 잘 모르지만 나치는 극좌적인 성격도 강했으며 노동자 권익 운동에도 동참해서 총선에서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사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좌우 대립이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며, 거기에 주변에는 4개 강대국, 북한이라는 해괴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좌파와 우파가 다소 특이하게 자리잡았다. 타 국가에선 우파는 민족주의, 좌파는 사회민주주의 계열을 띌 때, 한국에선 우파는 국가주의+권위주의, 좌파는 사회민주주의+민족주의 등으로 다소 복잡하다. 때문에 같은 진보 진영이라 해도, 같은 보수 진영이라 해도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 현대사에서 활약한 인물들에 대한 평이 상당히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다.

6.3. 미국의 평가

해방 정국 당시 38선 이남을 장악하던 미군정에서는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었던 김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러한 정명강간(精明强幹)한 중심인물을 영수로 하고 그의 영도에 절대복종하여 정성단결 되는데서만 우리의 독립은 완성될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서도 얼마던지 그 예를 찾을 수 있으니 의대리(意大利)의 무소리니, 독일(獨逸)의 히틀러, 토이기(土耳基)의[66] 게말파샤, 중국의 장개석, 아라사(俄羅斯)의 스타린 등이 이 각기(各其) 유일무이한 영수가 되여 그의 지도하에 당세는 발전되고 국가운명을 보장하고 있다[67]. 강적을 상대로 하여 일장혈전(一場血戰)을 경(經)하고 우리의 자유를 획득할 중임을 자부하는 우리는 일개 강유력(强有力)한 당과 정명강간(精明强幹)한 영수의 영도가 없어서는 될 수 없다.

— 엄항섭[68], <한민> 창간호(1936년 3월 1일자), '아독립운동(我獨立運動)의 동향(動向)

특히 미군정은 김구를 무자비(ruthless)하고, 부도덕한(unscrupulous) 인물이이며 이해하기 힘든 인물로 묘사하였다.[69] 별명도 난폭하다는 의미의 "블랙 타이거(Black Tiger)"로 붙였을 정도.백범에서 흑범으로 여기에 더해 미군정1945년 송진우 암살 당시 그를 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고, 미군정 외에도 미국에서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 용의자로 봤다. 대표적으로 브루스 커밍스가 집필한 《한국전쟁의 기원》에 이러한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1947년 12월 8일 장덕수가 암살당했을 때 현장에서 검거된 박광옥과 배희범은 각각 현직 군정청 경찰관과 현직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한독당의 당원이기도 했다.[70]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에 따르면 염동진은 김구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가하며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 민간인(염동진)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 군인들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했다.

6.4. 가장 무난하여 존경을 받게 된 인물?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나온 바와 같이 3.1운동으로 세워진 임시정부의 법통, 불의에 항거한 민주주의 이념, 평화통일 이념에 가장 부합하는, 쉽게 말해 '대한민국 헌법적 가치'에 부합하는 인물 중 하나로 김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해방정국에서 배후로 의심받은 수많은 백색테러(대표적으로 장덕수, 송진우 암살) 혐의에서 자유롭다고 할 때의 얘기다. 평화통일은 물론이고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의 상호 존중과 공존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김구의 해방정국 행보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김구는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폭력의 사용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평화통일의 상징이 된 김구와 실제의 김구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

이는 그중 독립운동가였던 일부 피해자에 대해 '죽어서 기쁘다'는 취지로 발언했다는 의혹, 1946년 3월 당시에는 북한의 분리를 준비하기 위해 활동한 조직도 아니었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간부에 대한 암살을 시도한 사실, 그 간부의 가족들이 피살당한 사실 등에서도 드러난다. 게다가 극우적인 입장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죽이려한 걸 쉴드 친다고 할지라도 그 가족까지 희생될 개연성이 높은 방법으로 공격을 하여 무고한 가족을 죽게만든 것은 옳지 못한 것임에 틀림 없다. 가족까지 몰살될 가능성이 높은 방식으로 공격한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인 '자기책임의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6.5.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민족 영웅?

김구에게 민족적 영웅이란 이미지를 만든 것은 박정희의 군사정권 작품이란 주장이 있다. 실제로 김구의 차남 김신은 군사정변 당시 공군참모총장으로, 5.16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후 박정희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 박정희는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백범 김구를 적극적으로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남산에는 백범광장을 조성하고, 1962년에는 김구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대한민국장, 건국훈장 1등급)을 수여했다.[71]

김신은 1962년 예비역 공군 중장으로 예편하고[72], 주 중화민국(대만) 대사로 부임해 무려 8년 동안 이례적으로 장기간 재임했다. 당시 중화민국은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겐 미국 다음 가는 맹방이었다. 1971년 귀국한 김신은 대통령의 권유로 공화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낙선한다. 하지만 그후 교통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 추천으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을 거쳐 백범김구기념관 관장 및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지냈다. #

거기에 이승만 정부의 잔재를 지워내고 북한과의 대립상황을 이용해 정통성 쌓기에 몰두하던 군사정권에게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이자 (북한과의 대립상황에 한민족 한개의 정부라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극렬한 민족주의자이며 반공주의자에 임정의 법통성도 갖춘 김구만큼 띄워주기에 적합한 인물이 없다는것. 이렇게 보면 일견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민족영웅이 맞는 것 같기도 하겠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김구는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민족영웅이다"라는 주장 또한 기존의 김구에 대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주장이다. 박정희가 집권은 커녕 일개 군인에 불과했던 1940년대에 김구는 이미 대한민국 국민들 상당수로부터 민족 영웅으로 대우받았고 개중에는 국부로 여기는 이들도 존재했을 정도로 명망있는 인사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집권 이전인 1960년에 상영된 아아 백범 김구 선생이라는 제목의 기념 영화,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대회 당시 사회자가 김구를 '국부'로 소개하자 김구 스스로 나서 "국부는 이승만 박사 한 분 뿐이다."라고 해명한 일화, 장례가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조문객이 최소 200만명은 넘었을 것이라고 추산된다는 사실 등 김구가 1940년대에 이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충분히 인기 높고 명망있는 인물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여럿 남아있기 때문에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영웅이라는 표현은 상당히 과장이 섞인 표현이라 봐야 한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백범 김구가 당대에도 이미 민족 영웅으로 대접받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후대에 군사정권의 필요에 의해 과장과 미화가 덧씌워졌고 그로 인해 과대평가된 면모가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6.6. 친일 인사 등용

김구 본인은 친일 행위를 한 바 없으나, 해방 후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정치 세력을 규합하고 정치 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친일 인사들을 받아들인 사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백범일지를 윤문한 이광수[73], [74] 경교장을 제공한 최창학, 한독당과 김구의 자금원이였던 방응모 등이 있다.

먼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광수가 1947년에 발행된 국사원본 백범일지의 문장을 윤색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울러 김구 연구자인 도진순에 의하면 <나의 소원>의 작성에 이광수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의 메이지 시대에 퍼졌던 아름다운 나라라는 개념을 차용한 흔적이 존재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따라서 대중적으로 문화강국론에 대하여 긍정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에 우려가 된다는 입장을 제기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기사 다음으로 최창학은 일제강점기 '금광왕'으로 불렸던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일본광업(주)에 시가 800만원(현재 가치로 약 9600억원)이라는 가격을 받고 금광을 팔아서 손꼽히는 거부가 되었고 이후 경성(서울)에서 대지 1700평과 건물 290평에 달하는 2층 양옥 저택인 죽첨정을 건설했다.

그리고 일본 육군에 전투기 8대를 헌납했으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상무이사와 친일단체인 임전보국단의 이사를 역임했다. 해방 직후 최창학은 미군정의 강압으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자신의 저택인 죽첨정을 바쳤으며 그 이름도 경교장으로 바뀐 뒤 정치적인 사안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인사들이 집결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아시아경제 기사 마지막으로 방응모[75]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조선일보가 복간된 1945년 11월 25일 이후부터 꾸준하게 김구에 대한 일관적인 찬사를 보내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잠시 한국독립당(1920년)의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을 중심으로 제기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론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 동시 선거를 김구가 반대하자 강력한 비난을 쏟아내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디어오늘 기사

해당 내용에 대해서 보충하자면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대표되는 지지 세력들은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다양한 항일투쟁 조직을 결성하면서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대중들로 하여금 커다란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김구 세력의 대일관은 명확한 반일이었으나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친일파 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김구 세력의 이러한 태도는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친일파 청산을 주장한 박헌영 계열의 좌익 세력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대중의 지지도 줄어들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김구 세력의 전체가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닌데 김원봉, 김성숙, 김주식 등 좌익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은 친일파 청산에 있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구, 조소앙, 신익희 등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우파 인사들은 친일파 청산 문제에 소극적이었으며 먼저 민족통일을 이루고 난 뒤에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러한 논리는 급속도로 김구 세력 전체의 입장으로 고착화되었다. 김구 세력이 해방 이전의 입장에서 상당히 후퇴한 태도를 견지하게 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 대중적 인지도는 높았으나 국내에서의 정치적 기반은 취약했기 때문에 더 많은 활동을 위하여 이승만한민당 세력의 지지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앞에서 언급한 한민당 세력의 막대한 자금 지원으로 국내에서의 숙소, 활동비, 정치 후원금 등이 충당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최창학으로부터 죽첨정을 헌납받아서 경교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그 외에도 송진우장택상으로부터 9백만원을 지원받았으며, 공개적으로 애국금헌성회라는 단체를 통해서도 자금을 지원받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지원이 대부분 일제와의 협력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형성한 친일 자본가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므로 반일이라는 대외적인 정치 노선과 모순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구 세력이 상대적으로 빈곤한 재정 상황을 벗어나고자 타협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친일파 청산이라는 대의와 재정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상황이 충돌하게 되자 김구 세력은 후자를 선택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친일파 청산에 있어서 소극적인 입장을 유지했던 것이다.[76]

7. 가족 관계

생전에 부인 최준례와의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지만 딸인 장녀,(이름 미상) 김화경, 김은경은 둘 다 유년기에 사망했다. 나중에 태어난 아들 둘은 딸들에 비해 오래 살았지만, 장남 김인도 1945년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자녀들 중 그의 만년까지 생존한 유일한 차남 김신은 김구 생전에 아버지를 도와 크게 활약했고 이후로도 6대 공군참모총장[77]으로 대한민국 공군의 창건에 기여를 하였으나 5.16 군사정변에 협조를 한 전적이 있어 분명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있다. 이 때문에 현재 김구의 자손은 장남 김인이 남긴 유일한 딸이자 김구의 장손녀인 김효자 쪽을 제외하면 전부 김신의 가계다. 구체적인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78]

증조부: 김영원(金榮元, 생몰년 미상)

조부: 김만묵(金萬默, ?~1888)

조모: 장씨(생몰년 미상)

아버지: 김순영(金淳永, 1848~1901년 2월)

어머니: 곽낙원(郭樂園, 1858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

아내: 최여옥(崔汝玉, ?~1903)[79]

아내: 최준례(崔遵禮, 1889년 ~ 1924년 1월 1일)

장녀: 미상(1906년 ~ 1907년)

차녀: 김화경(金化慶, 1910년 ~ 1915년)

삼녀: 김은경(金恩慶, 1916년 ~ 1917년 2월)

장남: 입언 김인(立言 金仁, 1917년 11월 12일 ~ 1945년 3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 광복군 장교, 중화민국/국민정부 국민혁명군 소교 역임.

큰며느리: 안미생(安美生, 1914년 ~ 2007년, 안중근의 조카)

장손녀: 김효자(金孝子, 1941년 ~ ), 장자 김인의 딸.

차남: 서언 김신(瑞言 金信, 1922년 9월 21일 ~ 2016년 5월 19일) 대한민국 공군 6대 공군참모총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주 중화민국(대만) 대사, 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 제 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백범기념관 관장,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역임.

작은며느리: 임윤연(林胤嬿, 1929년 ~ 1971년 12월 11일) 독립운동가 임학준의 딸, 위암으로 사망 .

손자: 김진(金振, 1949년 10월 30일 ~ )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 (현) 광복회 자문위원장.

손자: 김양(金揚, 1953년 2월 24일 ~ ) 주 상하이 총영사, 국가보훈처장 역임.

손자며느리: 이정희(1959년 ~ )

손자: 김휘(金揮, 1955년 ~ ) 나라기획 이사, 에이블리 대표 역임.

손녀: 김미(金美, 1956년~ ) 한화그룹 회장인 김승연의 동생 김호연과 결혼.

손녀사위: 김호연(金昊淵, 1955년~ ) 기업인, 빙그레 회장 역임.

삼종조카(9촌) : 김흥두( 金興斗, 생몰년 미상)

사돈: 이후락(李厚洛, 1924년 2월 23일 ~ 2009년 10월 31일) 정치인, 대통령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 회장, 제 10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역임.

사돈: 김승연(金升淵, 1952년 2월 7일 ~ ) 기업인, 한화그룹 회장.

8.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 정당

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1대 대통령 선거

한국독립당

6.7%

낙선(2위)

간접선거

1948

제1대 부통령 선거

한국독립당

31.6%

낙선(2위)

간접선거

9. 대중매체

  • 1960년대부터[80] 여러 번 영화나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영화 감독이 손수 김구를 맡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백범 전문 배우는 조연 전문 배우 박암이 주로 맡았다. 대표작이 백범 김구와 상해 임정[81].
(박암이 김구역으로 출연한 영화 광복 이십년)
  • 1980년대부터 2017년 시점까지, 김구를 가장 많이 연기한 배우는 이영후다.[82]
  • 그 후 반민특위등의 MBC 특집극에서는 대조영에서 연개소문, 불멸의 이순신에서 어영담을 맡은 김진태가 맡았다. 김진태는 바로 이영후 본인이 '좋은 후배에게 물려주었다'고 할 정도로 '후계자'로 낙점되었지만 그리 자주 맡진 못했다. 결국 KBS의 여명의 그날에서는 이영후가 복귀했다.
  • 윤봉길 의사를 다룬 단막극에서는 정욱이 맡기도 했다. 그때까지의 덩치가 있는 김구역과는 달리 호리호리한 느낌이었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 1995년 여름 그의 생애를 다룬 내용을 KBS에서 16부작 드라마로 제작돼 방영했었는데 청년시절의 김구 역을 배우 김상중이 맡았고[83] 장년, 노년의 김구 역은 연극계에서 백범 전문배우로 유명한 조상건이 맡았다.[84][85]
  • 국가의 사생활에선 너무 순수해서 이승만에게 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는 김홍파가 맡았다.
  • 2017년 10월 19일 개봉 예정 영화인 대장 김창수에서 조진웅이 김창수(김구)역할을 맡게 된다.[86]
  • 고은 시인은 <만인보> 2권에서 그를 다룬 시를 썼다. 제목은 사람 이름과 같은 '김구'.

백범 김구!

이 사람 있어

이 땅이 사람 태어나는 곳이다

남에도

북에도

우선 이 사람 있어

이 땅이 사람 죽는 곳이다

8. 15 이후 돌아와 칠십 평생 그 걸음으로

윤봉길 댁 찾아가서

윤봉길 아내한테

넙죽 큰절 드리는 사람

오늘따라 그리운 곳이다

이 땅이 그리운 사람 있는 곳이다

험한 오늘과 내일

  • 만인보 1권에서는 그의 어머니도 다루어진다. 제목은 어머니 이름인 '곽낙원'.

<곽낙원>

물론 낫 놓고 기역자 알 리 없는

황해도 텃골 군역전 부쳐먹는 쌍놈의 집 아낙입니다

그런 아낙이 제 자식 창수가

대동강 치하포 나루에서 왜놈 한놈 때려죽이고

물 건너 인천 감리영 옥에 갇히니

초가삼간 다 못질해버리고

객줏집 식모살이 침모살이 해가며 옥바라지

차꼬 물린 살인죄 자식 면회 가서

내 자식 장하다 장하다

아들 두둔했습니다

그뒤로도

아들 옥방에 갇히니

나는 네가 경기감사 한 것보다 더 기쁘다

이렇게 힘찬 말 했습니다

몇십년 뒤 여든살 바라보는 백발 노모

중국에 건너와

낙양군관학교 사람들이 생신날 축하하려고

돈 몇푼씩 걷은 걸 알고

그 돈 미리 받아내여

생신날 단총 두 자루 내놓으며

자네들 걷은 돈으로 샀으니

내 생일 축하의 뜻으로 이 총 쏴

부디부디 독립운동 이루어주시게

그뒤 그녀는 여든두살로 중경땅에서 눈감았습니다

나라 독립 못 보고 죽는 것 원통하다

이 말이 그녀가 남긴 말 한마디 아니고 무엇입니까

10. 이야깃거리

  • 김구가 독립운동가로 활동당시 일제가 걸었던 현상금은 60만원에 달했으며 이는 현재의 120~180억에 해당하는 액수다. 참고로 오사마 빈 라덴에게 걸렸던 현상금은 당시 금액으로 약 540억원이었다.
  • 우리가 접하는 백범일지는 전부 김구가 작성한 100% 원본은 아니고 김신에 의하면 이광수의 손에 윤문되어 발간되었다고 한다.[87] 우리가 아는 그 변절자 이광수 맞다.
  • 인터넷 상에서 우스갯소리로 나라 잃은 김구 표정이라는 관용어가 있다. 어원(?)은 디씨인사이드에 올라온 "어제 소개팅했는데 여자가 내 얼굴보고 나라잃은 김구 표정 짓더라 X발 ㅋㅋㅋㅋㅋ"(…)이라는 글.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 여담으로 키가 175cm~185cm 정도였다고 한다.[88]


  1. [1] 선(先) 안동 김씨 25세손 '회(會)' 항렬. 김승회, 연우진(본명 김봉회)의 형 뻘이다.
  2. [2] 창암(昌巖)
  3. [3] 하얀 호랑이가 아니다(1음절이라 한자어 느낌이 나서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범'은 고유어이다.). 조선 시대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던 백정 및 일반 백성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아무리 신분이 낮고 배움이 적은 일반 백성이라 할지라도 배우기만 하면 나라를 바로 세울 인재로 만들 수 있다는 김구 선생의 신념이 담겨있다.관련 기사
  4. [4]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에 따르면 최후에 이르러 당시 이승만의 최측근이였던 경찰청장 장택상으로부터 사주받았음을 자복하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수전증이 매우 심하여 글씨에서 떨린 흔적이 보인다고한다. 1938년 이운환에게 저격당해 총알이 몸속을 비집고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사람들은 이 글씨체를 '떨림체'라고 말했으나, 본인은 '총알체'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5. [5] 김구는 40년대 임시정부의 주석직을 지냈고,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기 대부분을 미주에서 보냈으며, 독립운동 자금 횡령, 위임통치 청원 사건과 관련해서 1925년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다.
  6. [6] 평안, 해서지방에서 볼 수 있는 의식으로, 산모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라고 한다.
  7. [7] 덕수 이씨, 진주 강씨
  8. [8] 김구가 3살 많다.
  9. [9] 이는 EBS 역사채널에서도 나온 바 있다. 한성-인천 간 시외 전화가 첫 개통된 것은 1902년이다. 대신 전보는 있었다고...
  10. [10] 현 경찰청장
  11. [11] 임정 건국 당시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대한민국 정부의 문지기를 청원하였고, 다음날 도산은 김구를 경무국장[10]에 임명하였다. 당시 백범은 학식과 사람됨의 부족을 이유로 사의를 표했으나, 도산은 이를 반려하였다.
  12. [12]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02/2016080202019.html
  13. [13] 또는 국내진공작전
  14. [14] 브루스 커밍스, /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2001, 287쪽.
  15. [15] 우남은 이승만의 호다. 당시에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당시 예법과, 그리고 형이라고 불렀을 만큼 친근한 사이였음을 암시한다.
  16. [16] 훗날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가 틀어지자, 이승만은 기자에게 남산 위의 소나무가 다 말라버렸다며 이를 비꼬기도 했다.
  17. [17] 이때 신익희가 이승만을 지지했던 것이 김구가 밀리는 결정적 패인이 됐다. 당시 신익희는 임시정부 내무장관 직함을 이용해 사조직을 운용하며 임정 지도부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18. [18] 좌우 합작 운동의 목표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꾸리려 했던 김구의 생각과 양립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김구는 우선 단독정부론을 막기 위해 자신의 입장을 접고 좌우합작을 지지했다.
  19. [19] 한독당, 근로인민당, 인민공화당, 민주한독당, 민중동맹, 신진당, 조선공화당, 한국당, 조선민주당, 민주독립당, 사회인민당 등이 참여했다.
  20. [20] 정병준, "미국 자료를 통해 본 백범 김구 암살의 배경과 미국의 평가", 역사와현실 제61호, 2006. p.318
  21. [21] 앞줄 왼쪽부터 김일성, 백남운, 박헌영, 김두봉 뒷줄 왼쪽부터 김구, 네번째 김원봉
  22. [22] 김규식은 북한을 방문한 것까지는 맞지만, 북한의 계략에 이용당할 것을 눈치채고 병을 핑계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23. [23] 김일성은 죽지않고 한 소련장교의 팔이 절단되었다
  24. [24] 미군정 관리이자 교수인 리차드 로빈슨은 김구의 방북이 이승만에 대한 개인적 혐오감 때문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25. [25] 한국에서는 당연히 개봉하지 못했는데 이 영화를 모 교양프로에서 일부 편집으로 틀어준 적이 있었다. 영화를 본 김구의 차남 김신 장군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왜냐면 김신 장군 본인이 바로 부친을 수행하여,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던 산증인이기 때문(…)
  26. [26] 초대 대통령선거는 국회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뤄졌기 때문
  27. [27] 1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전체 의석의 과반 이상을 차지하던 무소속 의원들 사이에서 김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7월 20일 오전 김구는 &quot;단정 수립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므로 본인에게 표를 던지지 말라.&quot;라며 성명을 냈고, 이에 소수의 김구 지지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들은 아쉬움을 표하며 이승만 후보에 투표를 하게 되었다.
  28. [28]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대한민국 공군의 창설멤버이자 한국전쟁에 참전한 김구의 차남 김신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별다른 불이익 없이 군생활을 지속했다.
  29. [29] 박정희 본인은 해방이후 임시정부 계열과 접점이 있었다. 해방직후 임시정부가 광복군의 세를 키울 목적으로 군경력자들을 모집할 때, 박정희는 김학규 장군이 지휘하는 광복군 평진지대의 중대장을 맡은 바 있었다. 이때 인연으로 훗날 군부 대숙군 속에 박정희가 체포됐을 때, 박정희의 구명에 나선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김학규 장군이었다. 박정희는 5.16 성공 이후,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있던 김학규 장군을 즉시 석방했다.
  30. [30] 주자와 그 스승 이정자(二程子, 정호程顥 · 정이程頤 형제)를 일컬음
  31. [31] 되집어 던지는 순간 폭발하여, 노비첸코의 한 쪽 팔이 날아갔다.
  32. [32] 백범일지의 주해를 담당한 사람이다.
  33. [33] 다만 미군정은 애초부터 자신들과 충돌하는 김구를 좋게 보지 않았고, 언급된 여러 암살사건의 배후에는 이승만을 포함해서 여러 인사들이 배후로 지목되던 혼란한 상황이었다.
  34. [34] 김구가 철저한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어록이다.
  35. [35] 다만 이런 부분은 비서의 가필이라는 증언도 있다
  36. [36] 자본론의 공동 저자인 엥겔스만 해도 마르크스 사후의 역사적 격변 속에서 개량주의적 강령을 내놓은 적이 있다. 사실 공산당 선언에만 해도 합법적 개혁을 추구하는 강령이 나온다.
  37. [37] 그런데 사실 이 어른은 사회주의쪽과도 가까워서….. 이 말을 한 시점을 잠시 곱씹어 보면 해방 후에 한 말이었다.
  38. [38] 다만 당시의 임정 법통 논란은 임시정부만을 독립국가 수립의 주체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다른 독립운동 세력과 공동으로 할 것이냐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현재의 임시정부 법통 논란은 건국절 논란과 연관이 깊지만 해방 정국의 임정 법통 논쟁은 "통일정부 수립의 주체"와 관련이 깊었다. 즉, 당시의 임정법통 회의론은 임시정부를 깎아 내리려는 것보다는 임시정부 이외의 독립운동 세력에게도 발언권과 참여 기회를 주자는 것에 더 가깝다.
  39. [39] 중화민국 정부는 이른바 민국 연호를 사용했다. 중화민국의 수립년을 원년으로 삼은 연호였다. 중화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똑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원년으로 잡아 민국 연호를 썼다. 따라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국 30년'이란 연호를 썼다.
  40. [40] 최기영 "백범 김구의 애국 계몽운동"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제1집, 백범학술원
  41. [41] 조동걸,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1집, 백범학술원
  42. [42] 한국 영화 아나키스트에서 이런 이미지가 돋보인다.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급진적인 무장투쟁에 반대하던 안창호가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황동하는 의열단의 주인공들을 후원하던 김구와 의견대립이 있는 장면이 한 장면 나온다.
  43. [43] 이 교과서(?)는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정식 교과서가 아니다
  44. [44] 다만 여운형 암살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배후로 거론되었다. 김구를 배후로 꾸준히 지목했던 장택상조차 한 때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배후로 지목했을 정도이다.
  45. [45] 이 때문에 평양에서 김구는 김일성과 만날 때 좀 껄끄러웠다.
  46. [46] 백범어록 (김구, 도진순 엮고 보탬, 돌베개, 2007.11) 67페이지
  47. [47] 다만 당시에는 용의자에 이승만도 올라갔다. 그 때도 지금도 의혹만 남은 상황.
  48. [48] 물론 당시에는 이승만도 배후로 의심되었다. 김구의 경우 임정 당시 경력이 오히려 의심의 근거가 되어버린 상황.
  49. [49] 정작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장택상이 이끌던 경찰을 여운형 암살의 배후로 지목했었다.
  50. [50]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8) 77페이지
  51. [51] 장택상의 대한민국의 건국과 나 참조
  52. [52] 오영섭, 《한국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경인문화사, 2007) 302페이지
  53. [53] 오영섭, 《한국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경인문화사, 2007) 302페이지
  54. [54] 관련 내용
  55. [55] 관련 내용
  56. [56]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535
  57. [57] 하지만 안창호, 김규식 등도 외교론을 주장했음에도 이승만만 그런 것처럼 비판하는 것은 형평성에 위배되는 일이다.
  58. [58] 이승만/평가 문서 참고.
  59. [59] 인도 독립 운동의 양대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는 파키스탄과의 분리 여부를 두고 갈라서서 네루가 인도 수상이 되었던 반면, 간디는 파키스탄과의 분리 비판과 인도 내 이슬람교도 차별 반대를 주장하가다 과격 힌두교도에게 피살당했다. 그러나 인도에서 이러한 차이를 이유로 간디, 네루 가운데 한명의 공로만을 인정하고, 다른 한쪽은 격하하는 일은 없다.
  60. [60] 하지 중장 같은 경우는 &quot;민간인 신분이었다면 연봉 100만 달러를 준다 해도 이런 군정 자리는 맡지 않았을 것&quot;이라며 이승만, 여운형 같은 노련한 정치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을 토로한 적 있다. 밴 플리트 장군의 경우는 이승만 박사와 친분을 다지며 박사의 정치적 행보를 도우면서도 그 권모술수는 경계하였다.
  61. [61] 2003년 6월 8일, 도쿄방송(TBS)이 방영한 '한국 노무현 대통령 솔직하게 직접 대화'라는 주제의 90분짜리 토론에서 여성 방청객의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질문에,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고 답변, 야당인 한나라당로부터 "망언"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으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신)측에서 서운한 감정을 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발언은 승리를 거뒀어야 할 세력이 마땅한 성취를 이루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난 날에 대한 아쉬움이 담긴 내용이지, 김구 선생을 비하하는 의도가 아니었다.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전에 존경하는 지도자로 백범 선생과 DJ언급한 바 있다.
  62. [62] 1946년의 DJ는 선정부수립을 주장한 몽양 선생이 주도하는 건준에 동참하고 있었다. 참고로 여운형 선생은 좌우 노선에 앞서 일단 정부부터 구성해 민족의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고 외쳤는데, 신탁통치에 대해서도 유연한 시각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김두한을 위시한 일부 과격 보수우파 청년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63. [63] 미군들의 도움으로 겨우 귀국한 직후부터 지인에게 정치자금 문제를 토로했던 이승만이 이 자금에 눈독을 들였으나, 지원자체가 유야무야 된 관계로 무산된다.
  64. [64] 다만 암살 당시 상황을 보더라도 친일파들이 김구를 우상시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과대해석이다. 진보측에서는 김구의 반공성향을 지적하면서 비판하기도 하지만, 김구의 행적을 볼 때 원래부터 이승만과 같은 반공성향이었다고 보기는 힘들고, 임정 시절 잦은 마찰을 일으키며 공산주의 계열 정파들과 정적 관계가 맺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애초에 반공산주의였던게 욕할 부분은 아닌 것 같은데 일부 NL계열이 아니고서야
  65. [65] 실제로 북한에선 비슷한 내용의 선전물을 만들기도 했다. 김일성을 보고 굽신거리는 김구를 영화에 출연시키면서(…)
  66. [66] 터키의 한국식 독음.
  67. [67] 하필 예를 든 것이 다 독재자들이다. 물론 케말파샤의 경우는 상당히 다르지만.
  68. [68] 김구의 최측근, 임정 및 한독당의 선전부장
  69. [69]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1948~1950 민주주의·민족주의 그리고 반공주의》 (역사비평사,1996)
  70. [70] 다만 당시 미군정에서 최초로 배후로 지목한 건 이승만이었지 김구가 아니었다.
  71. [71] 1962년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대규모 심사 및 건국훈장 수여에서도, 김구 뿐 아니라 박정희 본인의 상관이었던 광복군 평진지대장 김학규 장군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핵심 수훈자들이었다.
  72. [72] 당시 각군 참모총장은 중장이 맡는 경우가 흔했다.
  73. [73] ' “춘원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 (‘최일남이 만난 사람’ <신동아> 1986년 8월호) 김구의 차남 김신 씨와의 인터뷰 中
  74. [74] 이광수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로.
  75. [75] 방응모의 친일 행적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로.
  76. [76] 오상택, 「한국 정당체계의 기원과 형성: 해방기 사회균열구조와 정치적 동원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215~218쪽.
  77. [77] 빨간 마후라로 유명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의 주역
  78. [78] 해당 내용에 대해서는 위키백과 김구 문서의 가족 관계 부분을 참고했다.
  79. [79] 정확하게는 약혼을 한 상황에서 병사한 것이므로 정식으로 결혼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가족관계 부분에는 포함.
  80. [80]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인 1950년대에는 공개적인 찬양은 금기시되었다
  81. [81] 김구의 맞수인 공산당 간부역을 이덕화의 아버지 이예춘이 맡았다.
  82. [82] 모 토크쇼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제1공화국(드라마)에서 처음으로 백범을 맡았을 때 박암 선생의 아성 때문에 많이 고민했다고. 정작 이영후가 MBC에 처음 가서, 고위 임원과 만나는 순간 '김구로구먼!' 소리를 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만큼 이영후에게 안성맞춤인 배역이었다.
  83. [83] 아이러니컬하게도 첫 TV 출연이 앞서 말한 작품에서 윤봉길 역이였다.
  84. [84] 영화 타짜에서 너구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원로 연극배우인 조상건의 최초의 외도가 바로 김구 전기드라마.
  85. [85] 정확하게는 105인 사건으로 수감되면서 수감 말엽부터 배우가 바뀐다.
  86. [86] 해당 영화가 하필이면 치하포 사건 당시 김구의 살인행위를 정당화하는 내용이어서 역사 커뮤니티에서는 논란이 심한 편이다.
  87. [87] ' “춘원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 (‘최일남이 만난 사람’ <신동아> 1986년 8월호) 김구의 차남 김신씨와의 인터뷰 中
  88. [88] 190cm라는 다소 과장 섞인 수치도 있지만, 165cm인 이승만과의 키 차이(10cm~20cm)를 고려하면 175cm~185cm이다. 그래도 그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구라 할 수 있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sta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