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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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text-shadow: 0 0 10px #ffffff; color: #fede58;">건국훈장</span> 대한민국장(重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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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십자사 역대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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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규식

2대 필립 제이슨

김규식 / 한자: 金奎植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생몰년도

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 (69세)

출생지

조선 경상남도 동래도호부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만포군 만포진읍

국적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

본관

청풍 김씨(淸風 金氏)

별칭

교명(敎名)은 요한, 아호(號)는 우사(尤史)[외]
가명(假名)은 김성(金成),[외] 별칭(別稱)은 변갑

직업

정치가, 독립운동가, 교육자, 외교관

종교

개신교(장로회)

가족

김정연(증조부) 김동선(조부) 김지성(부) 이씨(모)
조은수(본처) 김진필(장남) 김진동(차남) 김진세(삼남)
김순애(후처) 김한애(장녀) 김민애(차녀) 김우애(삼녀)

학력

로노크 대학교 영문학 학사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석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1 ~ 2대 부주석

임기

1대 1940년 ~ 1944년 4월

전임

신설

후임

김규식

임기

2대 1944년 4월 ~ 1947년 3월

전임

김규식

후임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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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부 제1대 외무부장(구미위원부 위원장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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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1919년 4월 10일 ~ 1919년 9월 11일

전임

신설

후임

박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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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부 제27 ~ 29대 외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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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27대]1933년 6월 22일 ~ 1934년 1월 3일

전임

신익희

후임

김규식

임기

[28대]1933년 1월 4일 ~ 1933년 12월 30일

전임

김규식

후임

김규식

임기

[29대]1933년 12월 31일 ~ 1935년 9월 1일

전임

김규식

후임

김구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학무부 제1 ~ 2대 학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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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1대]1920년 4월 10일 ~ 1920년 8월 27일

전임

신설

후임

김규식

임기

[2대] 1920년 8월 27일 ~ 1921년 4월 29일

전임

김규식

후임

김인전(대리)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학무부 제12대 학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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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1930년 8월 4일 ~

전임

조상섭

후임

조완구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부 제3대 선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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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1942년 10월 ~ 1944년 4월 21일

전임

윤기섭

후임

엄항섭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외교위원부 제1대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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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1919년 8월 ~ 1919년 9월

전임

신설

후임

이승만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외교위원부 제2대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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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1919년 9월 ~ 1921년 4월 25일

전임

알수없음

후임

정한경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리워원부 제1대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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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1919년 4월 22일 - 1919년 8월

전임

신설

후임

이관용(대리)

}}}

}}} ||

왼쪽으로부터 김규식, 필립 제이슨, 여운형.

1. 개요
2. 그의 생애
2.1. 출생과 어린 시절
2.1.1. 불확실한 출생년도
2.2. 유년시절
2.3. 고아가 되다
2.4. 미국 유학
2.5. 항일 독립운동
2.5.1. 파리 강화 회의와 임정 참여
2.5.2. 임정 사퇴
2.5.3. 민족 유일 당 운동
2.5.4. 임시정부 재 입각
2.6. 정치 활동
2.6.1. 미군정기 정치 활동
2.6.2.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
2.7. 사망
2.8. 기타
3. 성격
3.1. 일화
4. 어록
5. 기타

1. 개요

독립운동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성명을 해야 했다.
그래서 자기 본명을 자기도 잊곤 했다.

- 1945년 귀국 직후 인사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의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겠다.
남의 장단에 춤을 출 것이 아니다.

-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서

대한민국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다. 종교는 개신교(장로교)이고 교명은 요한(Johann)이며, 아호는 우사(尤史), 죽적(竹笛)이다. 독립운동가 중 그 누구보다 현실을 냉정히 통찰했던 당대의 엘리트 석학으로 손꼽힌다. 무려 8개 국어를 유창하게 회화할 수 있었던 어학의 천재로도 알려져 있다.[7]

선전관, 시종무관으로 지내던 동래부사 종사관인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김용원)과 어머니 경주 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미국 유학을 떠나 프린스턴 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시절 러일전쟁과 일본의 승리를 미리 예견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 경신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비서로 신앙, 종교 활동을 했다. 105인 사건에서 간신히 투옥만을 피한 뒤 망명하여 몽골, 만주에서는 독립군단 창설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918년 어학 구사능력을 인정받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됐고 현지에서 임정 외무총장에 임명됐다. 이후 구미위원부 위원장, 학무 총장을 지냈으나 임정을 탈퇴, 창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1930년대에는 대학교수로도 활동했다. 1940년에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입각하여 부주석(부통령격)과 선전부장을 지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게는 공공의 적이었다고 전해진다.

1945년 귀국 후 신탁통치를 반대했으나, 미소에 의한 탁치가 불가피함을 인식하고 찬탁으로 돌아섰다가 극우단체의 테러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좌우합작운동에 이어 남북협상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미군정소련군정의 한반도 문제 개입을 비판적으로 보고 조선 민족이 자력으로 국가를 건설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납북됐다는 이유로 남한의 극우 세력에 의해 흑역사 내지는 빨갱이라 낙인찍힌 비운의 인물.

1967년, 1968년경에 와서야 연구가 진행되고 1972년 무렵에 와서 복권되었으나 건국훈장을 수여받기까지는 15년이 걸렸다.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불렸음에도 이 때문에 이승만이나 김구에 비해 인지도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고 대부분 의도적으로 그를 외면하는 수준이며 그를 아는 소수의 인식마저 너무나 왜곡되어있어 아직까지는 현시창이다.[8]

2. 그의 생애

2.1. 출생과 어린 시절

김규식은 경상남도 동래군[9]에서 동래 군수 종사관으로 관료 출신 김지성과 경주 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경주 이씨 부인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10]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을 따라 그는 본가가 있는 강원도 홍천으로 갔다. 아버지가 대일교역을 비판하다가 유배를 가고, 어머니도 그는 7살에 숨을 거두자 구걸을 다녀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11]

집안은 화려했는데 사도세자 저격수인 김상로가 6대조의 사촌 형이었고, 부자가 영의정인 김재로, 김치인은 6대조의 사촌, 5대조의 6촌이었으며, 정조 때의 노론 지도자 김종수는 김규식의 고조할아버지의 8촌 형님이었다.

그러나 순조 때 세도가문이 집권하면서 노론 벽파를 숙청할 때, 김종수 집안 역시 노론 벽파로 몰려서 숙청. 그리고 몰락.[12]

그뒤 할아버지가 다시 관직에 올라 집안을 일으켰다. 아버지 김지성은 외무 관리로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였으나 민씨 정권의 대일본 의존 정책을 비난하다가 귀양을 갔고, 1888년 어머니마저도 사망하여 고아가 됐다.[13]

2.1.1. 불확실한 출생년도

김규식의 출생년도는 1881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이정식 교수가 청풍 김씨의 족보를 확인한 것이다.[14] 그러나 김규식의 출생년도는 1877년생 설, 1880년생 설이 있다. 1993년 이전의 자료들은 대부분 1877년생 설을 채택하고 있다. 참고로 김규식도 남북협상 당시 자신이 70고개라고 언급한 바 있다.

태어난 생일 역시 불확실하여 2월 28일(음력 1월 27일)생 설과 1월 29일생 설, 12월 10일생 설[15]이 있다.

이는 김규식에 대한 관심이나 연구가 다소 소홀하여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탓도 있다고 볼 수 있다.

2.2. 유년시절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떠돌았는데 냉담한 어른들과 짓궂은 청소년들의 시달림 때문에 개인적으로 냉정한 성격이 됐다고.

삼촌들은 형편이 안 되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의 고아원에다가 그를 데려다 주었지만, 언더우드 목사의 고아원은 8세 미만의 어린아이는 양육하기 어렵다 하여 다시 되돌려보낸다. 그는 삼촌들에게 양육되었지만, 가난한 형편의 삼촌들은 그를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고 그가 굶주림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열병으로 죽기 직전까지 가자 그를 뒷방에 눕히고 병풍을 쳐놓았다 한다.

그 뒤 언더우드 목사는 아이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강원도까지 찾아갔다. 그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딱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언더우드는 자기도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너무 굶주렸던 그 아이는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고 있었다. 너무 딱하고 불쌍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그 아이를 돌본다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아이를 고아원으로 데려 가고자 했다.#

그러자 언더우드 목사의 주변 사람들은 그 아이가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하며 말렸고, 그 아이가 죽게 되면 언더우드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덤터기를 쓸 수 있다고 경고했다.[16]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는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를 데려가 치료하고 극진히 간호하였고, 어린 김규식은 그렇게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2.3. 고아가 되다

언더우드 목사는 기력을 회복한 어린 김규식에게 영어를 가르치다가 자신이 세운 민노아 학당에 보내 영어, 수학, 지리, 과학 등을 배우게 한다. 김규식은 성적도 우수하였다.

김규식은 조선의 첫 고아원 겸 예수학당(경신학교)의 학생이 됐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해서 언더우드는 그를 '번개비'라고 불렀다. 이후 경신학교에서 영어와 수학, 라틴어, 신학, 과학 등을 배웠다.

그러나 그가 고아인 데다가 친척도 아닌 목사의 집에 산다는 것이 학교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었고 참을 수 없었던 김규식은 가출(?)을 단행하여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한성 시내를 떠돌다가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 다시 강원도 홍천으로 되돌아갔으나, 1882년 아버지도 곧 병으로 사망한다. 1884년에는 할아버지 김동선과 큰형이 연이어 사망한다. 김규식은 의지할 곳 없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2.4. 미국 유학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서재필독립신문 기자로 잠시 있었고, 1896년부터 1903년까지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버지니아 주에 있는 루터교 계열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교에서 영문 학사를 취득했다. 재학 중 그는 고종황제의 서자 의친왕(義親王)과 만나 교우관계를 형성하였다. 웅변부 활동을 하면서 연설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으며, 문학 동호회 데모스테니언 문학회의 회장이자 전체 3등으로 조선 출신 2번째 학사를 취득했다.

1903년 가을 미국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 1904년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로노크 대학에서 영문 학사를,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영문학 석사를 받았다. 그러나 보통 김규식 박사라 부르는데 이는 그가 후에 모교인 로노크 대학에서 받은 명예철학박사 학위 때문이다.

프린스턴 대학원에서는 그가 박사학위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조국의 앞날이 염려된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박사학위를 거절하고 귀국했다.

아무튼 이 도미 유학 시절에 김규식과 마찬가지로 로노크 대학에 유학 와 있던 의친왕과 교류하기도 했고, LA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안창호 및 남가주 한인 유학생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김가진을 일제의 감시에서 빼돌려 망명시킨 상해 임정에서 그해 11월 대동단[17]을 통해 국내의 유력 황족 의친왕상하이로 망명시키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는데, 김규식이 당시 임시정부의 주요인사였다는 점과 이 시절 모종의 교류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꽤나 흥미로워질 일이다.

귀국 직후 그는 교육자로 활동한다. YMCA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학관의 학감)으로 지내면서 스포츠를 강조했다. 새문안교회 장로를 지내기도 했다.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장학금과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어교수직, 도쿄제국대학 동양학과 장학생 특별 입학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람을 보내 도쿄제국대학 동양학과의 장학금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2.5. 항일 독립운동

지난 세월 나는 미국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지만, 지금부터는 조선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겠다.

2.5.1. 파리 강화 회의와 임정 참여

1918년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현지에서 외무총장에 임명되었다.[18] 그러나 파리 강화 회의에 기대를 했으나 일본의 압력, 그보다 한국 문제는 관심조차 없었던 열강의 무관심으로 참가가 무산된다.[19]

회의 주최국인 프랑스 외무성 측은 정부 자격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을 하자 그는 상하이에 정부수립의 필요성을 알리며, 임시정부 수립의 기폭제가 될 만한 사건을 기획해야 된다는 것도 알려왔다. 그에 따라 독립운동가 들은 1919년 3월 3.1 만세운동을 준비하여 실행에 옮겼고, 3.1 운동을 기회로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다.[20]

임정에 참여하여 파리위원장, 구미외교위원장, 외무총장, 학무총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2.5.2. 임정 사퇴

1920년 임시정부 내부에서 독립운동 방식을 놓고 심한 대립갈등과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김규식은 신채호와 함께 창조파의 입장에 서기도 하였다. 이 때 창조 개조론을 탐탁지 않게 보았던 임정 고수파에 의해 수시로 임정에서 퇴출되었다.

https://haruka.namu.wiki/eb/ebec7adb9f215552405f000bd7825e1b17701790bbbf8dc643add4054bc8f9ca.jpg

그 뒤 임시정부에 실망감을 느껴 이승만을 성토하고 결별. 임정을 떠나 1920년대초 고려공산당 후보당원,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동방 노력 자 대회(극동피압박자민족대회)에 조선대표 의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영국프랑스, 미국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21]

이후 1924년~1926년 초까지는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잠시 떠나있었다가[22], 1927년 2월 난징에서 유자명·이광제(李光濟)·안재환(安載煥), 중국인 무광루(睦光錄), 인도인 간다싱·비신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 유자명은 중국 국민당 중앙본부에게 적극 후원을 약속받은 뒤 그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을 창간하고, 1927년 텐진(天津)으로 옮겨가 북양대학(北洋大學)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어, 1929년까지 교수생활로 자녀와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교수 생활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계가 있었고, 이조차 일본영사관 경찰의 눈을 피해 다니느라 일정하지도 못하여 생계는 어려웠다. 1927년에는 차녀 민애를, 1930년에는 장녀 한애를 병으로 잃었다.

2.5.3. 민족 유일 당 운동

1930년 8월 다시 임시정부에 입각하여 임정 국무위원 겸 학무 장에 선임되고, 그해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선됐다.

1932년 4월 상해 윤봉길 의거 직후, 김원봉이 남경중앙정치학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자 김규식은 남경중앙정치학원 한인특별반의 군사교관이 되었다.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의 송병조·양기탁 등의 요청으로 국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32년 겨울 '중·한 민중 대 동맹', 대일전선 통일연맹, 한국광복동지회 등의 단체를 결성, 조직하였으며 이후 항일독립을 위해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다. 그해 10월 12일 상해 민국으로 동방여사에서 한독당의 이유필, 송병조, 김두봉,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한국혁명당의 윤기섭, 신익희, 의열단의 한일래, 박건웅 등과 함께 민족 유일 당 창당회담을 가졌다.

1933년 남경중앙정치학원 영어강사가 되었다. 1933년 4월 5일 미국을 방문, 로스앤젤레스에서 500여명이 모인 구류노류 대학교에서 열린 한국독립에 관한 연설에 강사로 참석, 7월 중한민중대동맹 대표 자격으로 다시 출국, 미국을 방문했다.

귀국후 그는 7월 21일 하와이 한인 교포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김규식이 중국으로 떠난 뒤 본 동맹의 비밀요원인 이용직과 한길수를 개인적으로 미주 대표로 임명하여 본 동맹과 정보교신을 담당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23]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당 주석 직에 올랐다.

2.5.4. 임시정부 재 입각

1940년 민족 유일당 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구 등을 만나 회담을 하였으나 의견 차이로 유일당은 실패하고 대신 항일 공동연합전선 설립을 결정하여 민족혁명당의 임시정부 입각을 결정한다.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944년 6월 1일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 측의 오철성 등, 한국 측의 엄항섭·안원생 등을 설득, 재중동포 중 기독교인의 우호단체인 기독교 한교복리회(基督敎韓僑福利會)를 조직하였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김규식과 외무부장 조소앙·정환범(鄭桓範)·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파견하려고 국민당 정권의 승인과 군자금까지 결재를 받았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2.6. 정치 활동

2.6.1. 미군정기 정치 활동

해방 후에는 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 제1진의 한사람으로 김포비행장으로 입국했다. 이후 거처는 서울 삼청동의 삼청장으로 정했다.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한반도 신탁통치 안이 결정되자 김규식은 처음에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하다가 모스크바 3상회의 전문을 입수하면서 부분적 찬탁을 동의했다.[24] 김규식은 국제적 합의를 무턱대고 무시할 수 없고 일단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임시정부가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그는 반탁세력에 의한 테러위협에 시달려 수시로 거처를 옮겨야했다.김규식을 암살하려던 자객들이 김규식의 자택인 삼청장의 담을 넘다가 걸려서 도주하는 일도 있었다.

1946년 3월 이승만이 '광산 스캔들'[25]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직에서 사임하자 의장 대리가 됐다. 이 때 미군정은 강경 우익 반탁 세력인 이승만 대신 온건한 중도파인 김규식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추앙받으며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그 해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이 구성되자 관선의원에 선임되고 12월 의장에 취임했다. 김규식은 입법의원 명의로 북조선인민위원회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입법의원을 중심으로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려 했다.

이와 동시에 김규식은 여러 개혁을 통해 입법의원을 민족의 자치기구로 격상시키려 했다. 특히 친일파 청산과 토지 개혁에 관심을 쏟았다. 친일 청산은 극우파의 경제적 기반을, 토지 개혁은 극좌파의 정치적 기반을 흔들 수 있는 묘수였다. 김규식은 공식석상에서 친일파 청산 문제에 적극적인 주장들을 여러차례 했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것이 1947년 새해 아침에 발표한 신년사로,# 이 신년사에서 김규식은 "특히 남북에 있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족반역분자, 악질모리배 등의 발호는 심하여 민생은 극도의 도탄에 빠지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는 비애국자의 진영으로서 계획적으로 남한에 있어서 공전의 소요사건을 양출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1947년 5월 12일에 열린 입법의원에서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단이 '민족적 명제'라고 밝히고, 토지개혁 법안과 함께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관한 특별입법조례' 등을 조속히 통과시켜 줄 것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즉, 김규식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족반역자말로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반대하는 요소로 인식하고 있었다. 극우파는 물론 미군정까지 이들 법안에 부정적이었지만 김규식은 미군정이 갈구하던 보통선거법과 연계해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관한 특별입법조례를 통과시킨다. 다만 미군정은 이를 시행하지 않고 뭉갰다.

한편 입법의원을 장악한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은 입법의원을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적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이들은 반탁 결의안을 통과시켜 중간파의 입지를 축소시켰다. 행정조직법, 남조선과도약헌 등 단독정부 수립을 암시하는 법안이 잇따라 제출됐다. 우익 세력이 통제를 벗어나는 행동을 여럿 하자 미군정은 다시 김규식을 찾는다. 1947년 2월 미군정은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며 김규식과 중간파에 힘을 실어준다. 실효성 문제와 본인의 거부로 무산되긴 하지만 김규식을 군정 하의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할 계획이 세워지기도 한다. 다만 미군정은 김규식을 미군정의 얼굴마담으로 이용했을 뿐 김규식의 개혁 구상에는 소극적이었다. 김규식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미군정에 의존만 하기보다는 좌우 합작 운동에 힘을 쏟았다.

2.6.2.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

좌우합작은 독립을 위한 제1단계요. 이 단계를 밟지 않으면 둘째단계인 독립을 얻을 수 없다면 내가 희생하겠소. 당신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댈 것도 알고 있소. 또 떨어뜨린 후에는 나를 짓밟을 것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 내가 희생된 다음에 당신이 올라서시오.

1946년 5월 미소공위 결렬로 분단 위기가 고조되자 여운형과 함께 좌우 합작 운동을 시작한다. 처음에 김규식은 여운형에 비해 좌우 합작에 소극적이었다. 김규식은 좌우 합작으로 인한 우익의 분열을 걱정했다. 미군정의 지지는 김규식이 태도를 바꾼 전환점이었다.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 한국민주당에게 좌우 합작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도 지지를 선언했다. 덕분에 좌우 합작 운동은 급진전되어 그 해 7월 좌우합작위원회가 결성됐다. 김규식은 좌우합작위원회를 북한의 소련군정과 좌익 세력과의 통일 협상을 담당하는 대표 기구로 성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의 비타협적 태도로 좌우 합작 운동은 어려움을 맞는다. 여기에 좌익 3당 통합 문제로 여운형이 정치적 위기에 처하자 미군정이 나선다. 미군정은 박헌영 등 강경 좌파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좌우 합작 운동 지지를 재천명한다. 미군정은 미군정을 대신 해 좌우합작위원회가 과도입법기구 수립을 제안해 줄 것을 요구했다. 김규식은 과도입법기구 내 좌우합작위원회의 주도권 보장, 개혁 여건 마련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과도입법기구 설립에 소극적이었던 여운형을 설득하는 일도 김규식의 몫이었다. 좌익 대부분이 과도입법기구 설립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일은 여운형의 정치적 기반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26] 김규식의 설득과 여운형의 결단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과도입법기구 설치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한다. 한민당은 토지 개혁 조항을 문제 삼으며 좌우합작위원회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원세훈, 김약수 등 한민당에서 좌우합작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탈당했다.[27] 이들은 민중동맹을 결성하고 이후 김규식의 정치 활동을 지원했다. 이후 민중동맹은 중간파의 거점이 됐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지원에 힘입어 미군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 설치를 공포하고 10월부터 선거 절차에 돌입한다.[입법의원 선거는 4단계로 구성된 간접선거 방식이었다.] 선거는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의 압승으로 끝났다.[28] 김규식은 부정선거가 치러진 선거구에 대한 재선거와 과거 미군정이 약속한 합의 이행 등을 요구했다. 미군정은 재선거 요구는 받아들였지만 좌우합작위원회의 지분과 개혁 지원 요구는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 등 중도좌익 세력은 입법의원 참여를 거부했다. 게다가 입법의원이 개원되자마자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 해체를 요구했다.

김규식은 미군정의 요구를 거부하고 좌우합작위원회의 조직을 강화하여 독자적인 정치조직으로 삼으려 했다. 1947년 5월, 미소공위가 재개되자 김규식은 중간파를 결집하는데 애쓴다. 이무렵 미소공위 재개소식에 정계에 복귀한 여운형도 좌우합작을 다시 함께 한다. 김규식과 여운형의 정치적 위상은 날로 높아졌다. 이들을 향한 극우파의 공격도 거세졌다.[29] 동아일보는 김규식을 사기사건의 공범으로 매도했고 김규식의 자택에 괴한이 난입하려다 제지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우익을 협상에서 배제하려는 소련의 주장으로 2차 미소공위 역시 7월 결렬됐다. 얼마 후 여운형마저 암살[30]되며 좌우 합작 운동은 실패했다.[31] 김규식은 이후 중도파를 결속해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을 만들고 정치활동을 했다.

이듬해 1948년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정계를 떠났다.

그뒤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위원장으로도 선출됐고, 한민당 세력(후에 민국당으로 당명 변경)으로부터 영입 제의가 들어왔으나 모두 거절했다.[32]

이후 그의 삼청장에는 출입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싸늘해졌다. 남북협상 이후 그는 좌파로 몰렸는데, 그는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빨갱이로 몰리는 것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33]

2.7. 사망

김규식의 묘소. 평양 신미리의 애국열사릉. 뒤에 조소앙의 묘도 보인다.

1950년 6.25 전쟁때 북한군에게 납북되어 12월, 평안북도 만포진이란 곳에서 뇌출혈, 천식, 동상 등 이런저런 병으로 병사했다.[34]

수백만이 슬퍼한 김구의 죽음이나 여운형의 죽음에 비교하면 그의 죽음은 한참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2.8. 기타

임시정부 소속이었는데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둘 다 참여한 몇 안 되는 정치인이라는 점에서[35] 독특한 입지를 지녔다고 볼 수 있으며, 러일전쟁을 예견하거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성격을 이해하는 등 외교적 식견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정치를 할 만큼 통이 크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몸이 약해서 항상 아팠다고 한다. 간질 증세가 수시로 일어났고 뇌종양 수술도 받고 신경통,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미군정 쪽에서 그에게 붙인 별명은 sickly(약골)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Kim Kiusic이라고 썼는데 미묘하게 비슷하다(...) 해방 후 어느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하는데 어디가 편찮으신 것이냐고 물었더니 김규식은 "차라리 안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묻는 게 더 빠를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장죽담배 피우기를 즐겼다. 남북 연석회의 차 북한에 가서 장죽담배를 물고 문서에 서명한 일도 있었다.

처음에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 좀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북분단과 좌-우 정치적 지형이 극단화되어갈수록 이대로 있어서 안된다는 생각에 총대를 메고 나서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하나로 1946년 어느날,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찾아와 좌우합작을 권하면서 당시로는 큰돈인 50만원인가를 내놓자, 애연가인 김규식은 2자나 되는 긴 담뱃대를 집으면서 "형님은 대통령이나 하시오. 나는 대통(장죽담배)이나 즐기겠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승만에게 "형님은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 댈 것임을 알고있소.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라고 발언했다고 한다.[36]

어학의 천재로 다국어에 능했고 영어를 매우 잘하여서 미군이 놀랄 정도였으며, 임시정부 활동 시절에 임정 요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신채호도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웠는데 김규식이 발음이 틀렸다고 자꾸 지적하자 신채호는 단어 뜻만 알면 되지 발음은 뭣 하러 공부해야 하느냐고 서로 싸웠고, 신채호는 이광수한테 영어를 배웠다. (...) [37]

임정 시절부터 여운형과 형님 아우님 하는 매우 친한 사이였다고 하며,(여운형이 5살 아래로 동생이다.) 여운형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한국민주당공산당에서는 그가 일본인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루머를 내서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한국민주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 했으나 김규식은 거절했다.[38]

민족자주연맹의 총재였고, 남북 총선거에 불참가 선언을 했지만 비밀리에 사람들을 보내 당원들에게 출마를 권유하기도 했는데, 특히 1950년 5.30총선거 때 주변사람들에게 출마를 적극권유했다고 한다.

KBS에서는 한때 '여명의 그날' 같은 근현대사 드라마를 찍을 때는 동명이인인 성우를 김규식 역에 캐스팅하기도 했다.[39] 위키 사이트도 없던 시절부터 대놓고 성우드립.역시 덕력 쩌는 캐백수! 대한민국 건국세력에 난부 박사라니!! 건국세력에 난부 박사라니!!

야인시대에서 배우 문회원이 연기했다. 좌우합작을 방해한 김두한의 이런 과격한 행보에 매우 실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나 그럼에도 과거 김좌진과의 인연 탓인지 미군의 조사에서는 김두한을 애써 감싸는 모습도 보여준다.

서울 1945에서 배우 이대로가 연기했다. 그러나 좌우합작 설명 내레이션 때 대사 한 마디없이 말 그대로 지나가는 역할이다.(...)

의외지만 1946년 4월 25일에 칼로 자살을 기도했다. 실패 이유는 이웃 사람이 방으로 뛰어들어 칼을 빼앗았기 때문. 사실 4월에는 김구나 이승만도 좋게 말하면 민족적 각성을, 나쁘게 말하면 시체팔이를 위해 자결을 고려한 바가 있었다.

(나) 보도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 도당은 장차 수립될 정부에서 권력의 완전한 장악을 기대하고 있다. 이승만은 자신은 대통령이 되고, 김규식은 부통령이, 김구는 국무총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적대행위를 추구할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괴뢰정부와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항의 표시로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이후 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이들의 죽음에 격분한 인민들은 조선 전역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일으킨다. 이 운동의 선두에는 친일분자들, 민족반역자들, 토지개혁에 화가 난 지주들 및 반공주의자들이 나설 것이다.

3. 성격

성격이 매우 차갑고 냉소적인 편이라 인간적으로는 친해지기 어려웠다고 한다. 전형적인 학자풍의 성격으로 정치인의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당대 인물들의 주된 평. 후일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겸 총리를 지낸 우양 허정은 그를 두고 '매우 냉정한 분' 이라는 짧은 평을 남겼다. 또 매우 현실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일평생 정치 생명을 담보로 모험하지 않았다.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주도한 탓에 원조 통일 정부 론을 주장한 대표 격 인사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실제론 제의를 받고도 매우 망설였다고 한다. 실제로 남북협상 당시에도 맹동 적이었던 김구와 달리 일찌감치 북한정권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좋게 말하면 현실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인 성격이었던 셈이다.

3.1. 일화

기본적으로는 깐깐한 원칙주의자였으나 의외의 면도 존재한다. 그 일화로 허정의 증언을 들 수 있다. 다른 임정요인들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한 허정은 김규식이 아들 김진동과 맞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공깽에 빠졌었다고. 이에 대해선 아마 그의 투철한 자유주의 사상 관에 입각한 평등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추측만 이어질 뿐이다.

내가 알기에는 공산주의라는 것은 천하에 몹쓸 것이고, 특히 한국에서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내가 만주나 러시아에서 러시아 사람을 많이 사귀어 보았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원래 대단히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레닌이 일어나서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대단히 잔인해 졌다. 이것은 왜냐하면 결국 공산당이 잔인하고 가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민족은 내가 알기에는 상당히 잔인한 민족이다. 그러니 공산주의만 되면 러시아 정도가 아닐 것이고 더욱 더 잔인해 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는 공산주의가 들어오면 안 된다.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406~407에서 재인용

한편 민족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매우 부정적이었다. 민족 스스로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수도 있겠지만 사실 민족 그 자체에 예찬적인 태도를 견지할 의무를 강요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사실 21세기의 한민족 현실을 정확히 예언했는데 하나 첨언하자면 최남선은 조선민족의 품성을 착하다고 규정하면서 친일 행각을 일삼았다. 또한, 그가 공산주의를 반대한 반공주의자라고 알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속으로 드러난 입장이지, 적어도 공식적인 담화나 발표 글에서는 좀처럼 '반공주의'적인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40] 이는 해방정국기에 좌익으로부터 각종 비난과 비판이 쏟아질때도 김규식이 정면으로 좌익을 비난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가장 중요시했던 원칙은 '민족통일전선과 좌우합작'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허례허식을 매우 싫어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을 지지하던 청년 하나가 찾아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자 "왜놈들이나 하던 짓 쓸데없이 무엇 하러 하시는가?" 라며 일축했다고.

4. 어록

본래 우리의 독립은 평화회의나 모종의 유력한 단체로부터 승인을 받던지, 첩지(帖紙)를 내어 주듯 할 것이 아니오. 우리의 최고기관으로부터 각 단체 또는 전 민족의 합심과 준비 여하에 달렸나니, 이것이 있으면 우리에게 독립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파멸이 있을 따름이오. 고로 금일 우리 민족은 그 멸취(滅取)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오.

- 1921년 1월 상해 환영회 석상에서의 연설

한민족은 홀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고 있다. 이웃 어느 나라도 한민족의 독립투쟁을 돕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결국 아시아 이웃 나라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그때는 아시아 이웃 나라들과 한국이 힘을 합쳐 일제와 싸워야 한다.

- 1922년 7월 모스크바의 『공산평론』 中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민중을 붙들자.

- 1945년 11월 28일 연설

남북회담이 성공하리라고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북한 쪽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조건을 내놓기가 쉽다. 그러므로 북행하는 사람들은 희생을 각오하고 가야 한다.

- 1948년 4월 3일 북행을 발표하면서

5. 기타

고은 시인은 <만인보> 6권에서 그를 다룬 시를 썼다. 제목은 사람 이름과 같은 '김규식'.

운양호 포격 사건으로

일제가 이 땅에 발을 디디기 시작할 때

이 땅에서는 도적이 끓어

각처 명화적 요란할 때

아버지도

어머니도 진작 죽어

하늘가 고아로 자란 사람

그가 눈 큰 김규식이다

그 고아가 선교사 손에 자라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와 연희전문 교수를 하다가

1918년 모스끄바 원동약소민조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함으로써

그의 풍운이 열린다

상해 임정 요직을 역임했으나

한때는 무력노선에 나아가

대한독립단 고려혁명군 조직에 참가한다

1930년대 민족혁명당 창당

1940년대 임정 부주석

해방이 되어 김구 일행과 돌아왔다

신탁통치 반대 선봉에 섰다

입법의원 의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단정[41] 반대로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 협상에 나섰다

자유주의였다가

혁명주의였다가

개방주의였다가

절충주의였다

그 국제신사는 늘 건강이 나빴다

그 때문에 그의 노선이

덜 뜨거웠다

6.25 당시 납치되어

황량한 전쟁의 시대

압록강 만포진에서 죽었다

객지에 오래 있으면

고향이 그리운 시인이 되는 것인가

그에게 영문시집 한 권이 있다

눈 큰 사람

양복 조끼에

시곗줄 늘어뜨린 사람


  1. [외] 1.1 1.2 김중문(金仲文) 김일민(金一民), 여일민(余一民), 왕개석(王介石)
  2. [27대] 2.1
  3. [28대] 3.1
  4. [29대] 4.1
  5. [1대] 5.1
  6. [2대] 6.1
  7. [7]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산스크리트어 구사까지 했었다고 한다.
  8. [8] 이러한 이유는 김규식의 성품 때문이다. 김규식은 호방하기보다는 내성적이어서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 사색을 즐기는 문인 기질의 학자형 인물이었다. 그 때문인지 해방정국 대표적인 정치인치고는 인지도가 많이 낮다. 오늘날 나이 드신 원로인 분들 가운데 정치에 관심 없으신 일반 원로인 분들이라도 이승만, 여운형, 김구, 박헌영 등 당대 정치인들은 잘 알고 있지만, 김규식에 대해서는 잘 아는 이들이 적은 편.
  9. [9]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로 편입
  10. [10] 이정식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김규식은 경주 이씨의 아들이 아니라 첩에게서 얻은 서자라 한다.
  11. [11] 맏형 김규찬은 큰아버지 김우성의 양자로 갔다.
  12. [12] 김종수 등은 노론 청명당 계열로 노론의 강경파였지만 벽파는 아니다. 시파는 더더욱 아니었다.
  13. [13] 경주 이씨의 친자가 아니라는 설에 의하면 법적 어머니라는 것.
  14. [14] 《우사 김규식의 생애(신구문화사, 1974)》에서 처음으로 알려졌다.
  15. [15] 북측에서는 12월 10일생 설을 채택했다. 북한 애국렬사릉 비문에는 1880년 12월 10일생으로 되어 있다.
  16. [16] 조선에 도착한 서양인 선교사들은, 조선인에 대해 "미개하고 불결하며 심보가 잔인하다"는 평가들을 내렸다. 또한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했다. / 다만 이 시각은 21세기의 한국인들이 21세기의 아프리카 빈국에 가서 살 때 그곳에 관해 가지게 될 감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인습 항목 참고.
  17. [17] 부평군수를 지낸 바 있는 전협을 필두로 조직된 소규모 독립운동조직. 관심 있는 위키러라면 신복룡 교수 저, <대동단실기>라는 책을 참고하길 추천. 이래봤자 대동단에 대해 다룬 책은 딸랑 그거 하나다
  18. [18] 임명장은 팩스로 도착됐다.
  19. [19] 당시 연합국 열강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훗날 세계에 미친 영향과는 별개로, 동맹국의 식민지를 해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였기 때문에, 영국의 동맹이자 같은 연합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인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노예와 여자는 당연하게 논외였던 식이다.
  20. [20] 1919년 9월에 가서야 각지의 임시정부가 통합된다.
  21. [21] 이 연설에서 김규식은 프랑스, 미국, 영국, 일본을 흡혈귀 국가라고 성토했다. 이러한 행보는 그가 공산당원으로서의 깊은 자각으로 인한 행보라기 보단 '민족자결주의'같은 국제조류가 조선의 상황과는 맞지 않자 또 다른 축이 될 소련에 외교적 행보를 한 것이라 추측된다. 실제로 이 시기는 민족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사회주의에 기대를 가졌던 인물들도 많았고..
  22. [22] 1924년 9월 재중국 소련무역대표부 석유과장의 이름으로 된 한 보고서 기록에 따르면, "김규식은 과거에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고 국제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의 2차 회의에도 참가했었음. 현재에 그는 그의 신념을 바꾼 변절자이며 사업쪽으로 방향을 돌리려는 그의 시도도 실패하고 있는 인물임. 미국 석유의 판매를 비롯한 몇 차례의 회사 설립을 위한 그의 시도는 알려져 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곧 러시아를 떠난 뒤 이미 김규식은 공산당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었으며 이런 그에 대해 소련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3. [23] 그가 선임한 두 대표자 중 한길수는 미국 내의 이승만 세력과 수시로 마찰을 일으켰고, 이것도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한 가지 원인을 제공했다. 한길수의 반항에 기분이 상한 이승만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그를 과격파나 공산주의자로 지목하기도 했다.
  24. [24] 모스크바 3상 원문이 '신탁통치가 주요문제가 아닌 어떻게 해서 한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느냐?, 어찌 어찌해서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거기서 미국과 소련이 어떻게 해서 지원을 해주느냐?'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에 '모스크바 3상회의'보도를 처음한 동아일보가 이를 왜곡시켜 '신탁통치'안을 부풀려버렸던 것이다.
  25. [25] 미국인 사무엘 돌베어에게 100만 달러를 받고 광산 채굴권을 약속했다는 의혹
  26. [26] 과도입법기구 설치를 막기 위해 조선공산당의 당원으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여운형이 납치되는 일까지 있었다.
  27. [27] 이들은 당내 비주류에 속했다.
  28. [28] 납세 실적을 기준으로 선거권을 부여한 입법의원의 선거 방식은 지주, 자본가가 중심이 된 한민당에게 유리했다.
  29. [29] 남로당 등 좌파 세력은 이 시기 일제강점기 시기 인권변호사로 명망높았던 허헌을 얼굴간판으로 내세워 합법적 공간에서 정치활동을 한창 하였으나, 지지기반은 1946년부터 시작된 미군정의 공격(정판사 사건을 기점으로)으로 이미 정치세력으로서 힘을 잃었던 시기였다.
  30. [30] 이 시기 여운형은 미군정청으로부터 민정장관직 제안을 받았으며, 여운형은 미군정청의 민정장관직 제안에 수락받기로 예정되었다.
  31. [31] 여운형 암살시점이 제2차 미소공위가 한창이었는데, 제2차 미소공위 때 당시 좌우세력이 '선 임정 후 반탁'이라는 내용아래에 합의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이 상황에서 좌우합작위원회가 결속되었던 것이고 그 중재자이자 구심점 역할인 여운형이 암살당했으니…
  32. [32] 1949년 4월 북한에서 송전을 끊어버려 김규식을 정치적으로 궁지로 몰고 갔다.
  33. [33] 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manhistory/vod/1340863_968.html
  34. [34] 1950년에 사망한 게 아니라 1952년까지 생존해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 1980년대까지 백과사전들은 1952년 사망 설을 실었으며, 1980년대 말부터 북한 측의 자료나 애국렬사릉의 묘비명을 보고 1950년 사망 설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6.25 전쟁 직후 작성된 납북, 피랍자 신상 관련 자료에는 1952년으로 된 것으로 보아, 1952년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35. [35] 여운형은 남북연석회의 이전에 암살당했다. 단, 좌우합작 추진 과정에서 남북합작까지 해야겠다고 홀로 5번 북행길에 오른 적이 있었다.
  36. [36] -출처 : 조규하 등, '남북의 대화', 1972-
  37. [37] 이 때만 해도 이광수는 친일파 로 변절한 단계가 아니었으므로 문제될 건 없었다.
  38. [38] 그 이유는 한민당은 극우세력에 단독정부 수립을 지향했었는데, 김규식은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지향했으며 단독정부 수립운동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했었다.
  39. [39] 참고로 김규식과 함께 김구의 한독당 세력과 모여 정국을 논의하던 조소앙역은 성우 최흘이 맡았다. 공화국 시리즈 등으로 성우의 드라마 배역할당을 가끔씩 볼 수 있었던 MBC와는 달리 KBS의 김규식과 최흘의 기용은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에 속한다. 파파 스머프난부 박사가 함께하는 해방정국이라니 뭔가 아스트랄 하다.
  40. [40] 좌익에 대한 김규식의 직접적인 언급이 별로 없는 가운데서도 몇몇 연구는 김규식을 '반공주의자'로 규정한 바 있다. 이때 근거로 많이 인용되는 것이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한 바 있던 강원룡에게 했다는 "우리 민족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잔인한 성정이다. 공산혁명을 통한 여러 나라의 유혈혁명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터지면 피바다가 된다."라고 하는 발언이다. 김규식이 속으로는 공산주의는 안된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견지했으나, 중요한것은 적어도 공식적인 담화나 글을 통해서는 좀처럼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41. [41] 단독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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