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력

金武力

(518년 ~ 579년)

1. 소개
2. 생애
3. 기타

1. 소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막내) 아들. 노리부(김세종)의 동생. 김서현의 아버지이며,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금관가야의 왕자였으나, 금관가야신라에 복속된 후 신라의 장수가 되었다. 골품은 아버지를 따라 진골.[1]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서는 둘째 아들 무력(茂力)으로 돼 있는데 둘째와 셋째 순서에 착오가 있었던 듯. 삼국유사 김유신조에서는 호력(虎力)으로 써 있지만, 이건 삼국유사고려시대에 쓴 책이므로 2대 혜종 왕무의 이름을 피휘한 것으로 원래는 무력(武力)이 맞다.[2]

2. 생애

518년에 금관국의 셋째 왕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이미 6세기 초반 시점에 금관국은 가야 지역의 주도권도 대가야 등에 빼앗기고 가야 안에서도 약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한 상태였다. 529년 대가야 이뇌왕의 결혼동맹 결렬 사건이 결정타가 되어, 결국 532년 아버지 구형왕은 신라에 나라를 바치고 항복한다. 이 때 싸우지 않고 순순히 항복한 덕에 무력을 비롯한 금관국 귀족은 신라의 진골 귀족에 편입되어 권세를 누리고 활약할 수 있었다.

이름 그대로 무력이 높았는지[3][4] 진흥왕대 한창 신라가 세력을 넓히던 시기 신라의 장군이 되어 550년경 백전노장 이사부의 부관으로서 단양 적성 전투에 참여했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 공략(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에 참여해 군공을 세웠으며, 삼국사기단양 신라 적성비에 김무력의 이름이 나온다. 이후 553년에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 새로 신라가 차지한 한강 유역에 설치한 신주(新州) 지역의 도지사격인 초대 군주가 되었고, 나제동맹 결렬의 보복으로 백제성왕(백제)이 신라에 쳐들어갔을 때는 신주 국경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해[5]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전사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6] 이후 왕을 잃어 혼란에 빠진 백제군을 크게 무찔러 좌평급 귀족 4명과 군사 29,600여명의 목을 베는 대승리를 거뒀다.

이런 공을 세운 덕분인지 이후 초고속 승진을 한 정황을 여러 기록간의 내용을 비교해서 알 수 있다. 551년 단양 적성비나 553년 7월 삼국사기의 신주 군주로 김무력을 임명할 때 김무력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여섯째 등급인 아찬이었는데, 555년 세워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나 561년 창녕 척경비에서는 3번째 등급인 잡찬으로 관등이 3등급 승진한 상태다. 거의 약 2년만에 3관등 승진인데 신라의 다른 기록을 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3단계 승진은 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7] 아무튼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창녕 척경비의 561년에도 잡찬이므로 8년만에 3관등 승진이니 이렇게 쳐도 상당히 고속 승진한 것은 맞다.

그 후 신주성주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냈으며, 이러한 발판으로 김무력의 한강유역 쟁취와 관산성 전투의 승리는 신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으며 무력 역시 신흥 무장으로서의 발판을 확보하게 되어 신라 사회의 최고위 인물로 부상되었다.

579년 10월 16일에 사망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62세였다.

3. 기타

  •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선 그의 첫째 아내가 법흥왕의 왕비 보도부인의 동생 '박씨'라고 하며 둘째 아내가 진흥왕과 사도부인의 딸 '아양공주'라고 나온다. 정사에선 김무력의 아내가 누구인지 나오지 않으나, 김세종의 외손녀가 그의 아내라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에서 문무왕문명왕후를 소개할 때 구형왕의 아들 김세종의 아들 김솔지의 아들 김서현의 딸이라고 했기 때문. 여기서 김서현을 김솔지의 외손자로 본 것이다. 직계가 아니라 이렇게 표시한 이유는 김수로의 제사를 떠받들기 위해 명목상 왕계 기준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 김무력의 무덤으로 전하는 무덤이 통도사[8]가 있는 양산 영축산 경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무덤의 이름값 때문인지(...) 세 번이나 도굴을 당했다는 안습의 역사가 있다. 무덤의 위치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속한다.#


  1. [1] 단 아무리 같은 진골이라도 일단 신라 입장에서 가야계 신김씨는 굴러들어온 돌이므로, 김춘추를 비롯한 경주 김씨 진골들에 비해서 실질적인 대접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무력 본인을 비롯해 세종, 아들인 김서현, 손자인 김유신 등 가야계 신김씨들이 대대로 큰 공을 세우면서 조금씩 나아진다.
  2. [2] 같은 이유로 문무왕삼국사기 원문에서는 문호왕으로 표기하고 있다.
  3. [3] 참고로 이름의 한자도 흔히 생각하는 그 무력(힘)과 같다(...)이름값
  4. [4] 이사람보다 약 200년 후에도 비슷한 사람이 나왔는데 바로 발해의 2대 왕 대무예로 이름부터 그 무예랑 한자까지 같으며 실제로 군사적인 성과를 많이 올린 왕이다. 시호도 무왕이였을 정도.
  5. [5] 성왕은 한강의 신주 병력을 간과했던 듯 하다. 신주의 병력을 남쪽으로 보내면 한강 유역은 텅 비기 때문에 당연히 고구려가 신라를 빈집털이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라가 고구려로 오지 말고 백제랑 니들끼리 싸우라고 신라와 불가침 밀약을 맺어둔 상태였으므로 한강이 빈 동안 북방 돌궐 전선에 집중했고 이는 성왕의 패착이 된다.
  6. [6] 직접 성왕의 목을 벤 것은 휘하의 비장 도도다.
  7. [7] 다만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교과서나 각종 시험 레벨에서는 555년 건립설이 정답이지만 학계에서는 555년설과 561년설, 568년설이 대립하고 있다. 당연히 교과서와 시험에선 정답이 여러 개일 순 없으니 어지간하면 정설 하나만 제시한다. 그리고 진짜로 애매한 사례면 그냥 그 주제로 시험문제를 내지 않고, 내서 논란을 만들면 그건 좋지 않은 출제 예시다. 한 공무원 시험에서 북한산 순수비의 건립년도 문제가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국정교과서에 써 있는 555년이 정답으로 인정됐다. 그러니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555년 건립으로 알고 있는 것이 좋다.
  8. [8] 통도사 역시 신라 상대에 창건된 사찰이다.
  9. [9] 그것도 요괴의 모습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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