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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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최연소 완투승을 달성하고 우승한 뒤, 메달을 걸고 찍은 사진.

이름

김상진(金相眞 / Sang-Jin Kim)

생몰년도

1977년 음력 3월 9일 ~ 1999년 6월 10일

출신지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재뫼마을 #

학력

광주서림초[1]-진흥중-진흥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해태 타이거즈 고졸우선지명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96~1999)

체격

177cm, 73kg

별명

멀뚱이

좌우명

남들보다 한 번 더 한다.

마지막 경기

1998년 9월 19일 잠실 OB 베어스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6

1997

보유 기록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

만 20세 230일[2]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1번

김성한(1982~1995)

김상진(1996~1999)

이대진(2000~2004)

2000년에 생긴 故 김상진 선수의 팬카페 '天上飛愛'이다. 예전보다는 회원 수가 줄고 활동이 뜸해졌지만, 김상진 선수에 대한 사진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카페이니 김상진 선수를 기리는 마음으로 둘러보는걸 추천한다.

1. 소개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프로 시절
3. 위암 투병, 그리고 야구와의 작별
3.1. 투병일지
4. 사후
4.1. 기일에 열렸던 타이거즈 경기의 기록
5.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이라는 벽 앞에서 너무도 비통하게 포효를 거둬야 했던 비운의 아기 호랑이.

해태 타이거즈 최후의 한국시리즈 승리 투수.[3]

해태 타이거즈 소속이었던 투수. 등번호는 11번.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광주 용봉초등학교 5학년 때 선수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던 광주 서림초등학교 김영기 감독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나 내성적이고 숫기없는 성격이었던 김상진은 "야구로 성공하면 선동열처럼 돈도 벌고 유명해진다"라는 감독의 말에 혹하여 곧바로 서림초등학교로 전학하여 본격적으로 야구에 발을 들였는데, 처음엔 소심한 태도로 일관하며 어쩔 수 없이 야구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진흥중학교 진학 이후 강의원 감독[4][5] 의 조련 하에 실력이 급성장했다. 러닝 위주의 훈련으로 박찬호에 버금가는 단단한 하체의 소유자가 되었고 고교선수라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컴퓨터급 제구를 선보이며 야구인들의 주목을 끌게 된다.

당시 1995년 고교 전국 대회에서 평균자책점은 0.86을 달성했고, 커브, 슬라이더, 직구 평가가 상당히 좋았으며, 최고구속은 145km/h까지 찍었다.

2.2. 프로 시절

아버지 어머니가 편히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해야죠. 야구가 내 직업이잖아요. 야구말고는 살 길이 없어요.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놀 시간이 어디 있어요.[6]

명문 해태의 10승대 투수로 태어나 선배들이 일군 업적을 이어가겠다.[7]

1996 시즌 입단 동기들과 함께[8][9]

2002 시즌 중, 장성호가 김상진을 추억하며 남긴 글

그 후 진흥고를 졸업하고 1996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10] 신인 때부터 선발진에 합류해 1996년 5월 2일 롯데전에서 7이닝 1피안타 무실점을 하며 프로 첫 승을 따내며 데뷔 첫해에 9승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11]

97년에도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며 아쉽게 10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147이닝을 던지면서 9승 10패 1세이브, 평균자착 3.60, WAR 3.25를 기록하여 시즌 내내 해태 선발진의 듬직한 버팀목이 되었으며, LG 트윈스와 맞붙은 그 해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완투승을 기록, 팀의 9번째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 기록을 세웠다. 해태팬들은 새로운 에이스급 투수의 출현에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데...

3. 위암 투병, 그리고 야구와의 작별

1998년 시즌 내내 지난 해에 비해 다소 떨어진 구위를 보이며 121이닝에 평균자책 3.87, 6승을 기록하는 데에 그쳤고, 그 해 9월 19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OB 베어스와의 시즌 마지막 선발 등판(이자 생애 마지막 등판)에선 목 통증을 호소하며 조기 강판했다. 그 당시 팀이나 주변이나 단순한 목 부상으로 알고 좀 쉬면 나아지려니 했지만, 시즌 종료 후 광주 시내에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다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전남대병원에 입원하여 목뼈에서 발견된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뭔가 심상치 않다는 의료진의 판단으로 정밀 조직검사를 실시한 결과, 청천벽력 같은 위암 말기 판정이었다. 목뼈의 종양도 바로 위에서 전이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선수가 이렇게 병이 악화되는 동안 구단에선 무엇을 했느냐며 팬들은 해태를 맹렬히 비난했지만, 사실 해태는 매년 선수들의 정기 건강검진을 실시했고 김상진 또한 내시경까지 받는 등 받을 검진은 다 받았다. 단지 암의 발원지가 내시경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위벽 바깥이었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던 것...

투병중이던 김상진. 평소 먹성이 좋았던 김상진은 자신이 위암이란 사실을 알기 전까지 변함없이 먹는 것을 즐겼다.

김상진은 진흥고등학교 시절 학교 숙소에서 야식으로 라면을 즐겨 먹었는데, 큰 냄비 하나 가득 끓인 뜨거운 라면을 제대로 불지도 않고 거의 흡입하는 수준으로 먹어치울 정도로 식성이 좋았다.[12]이를 기억하는 김상진의 친구들은 그 왕성한 식성 때문에 암에 걸린 걸지도 모른다고 입을 모아 말하기도 했다. 다행히 완치되었지만, 위암으로 투병했던 정현욱 또한 소싯적에 대단한 먹성을 자랑했는지라 폭식하는 식성이 암 발병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자신이 위암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엔 형처럼 따르던 구단 트레이너 김준재와 병원 부근 용산시장에 바람을 쐬러 가서 "형님, 저 순대 먹고 싶어요." 라고 졸라서 사준 순대 한접시를 뚝딱 비우기도 했고, 팀 선배인 홍현우을 사들고 문병을 오자 큼지막한 빵을 순식간에 먹어치워 김상진이 위암 환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홍현우는 "아가야 천천히 먹어라 체하겄다." 라고 다독이면서 목이 메어 혼났다고 후일 박동희 기자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이후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져 기약없는 투병 생활에 들어간 김상진은 1998년 말부터 1999년 초까지는 상태가 호전되는 듯 했으나, 1999년 3월 종양에 의한 위벽천공으로 봉합수술을 받은 후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회복하지 못한 채 그 해 6월 10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13] 향년 22세.

1999년 6월 10일 그가 하늘나라로 떠난 바로 그 날, 수원 야구장에서 열린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는 선수들이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를 뛰었고, 소소경의 7이닝 4피안타 2실점의 호투에 힘입어 10:2로 크게 승리했다.[14]

그가 먼 길을 떠나기 얼마 전, 김준재 트레이너에게 63빌딩에 가고 싶다고 간청하여 휠체어에 탄 채 전망대에 올라갔고, 어딘가를 멍히 주시하고 있던 김상진에게 김준재가 어디를 보고 있냐고 묻자 김상진은 손가락으로 잠실 야구장을 가리키며 "형님, 저곳이 제가 한국시리즈 완투승을 거뒀던 곳이죠...?" 라며 울먹이며 되물었다고 한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가 얼마나 선수생활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수 있는 부분

3.1. 투병일지

1998.09.19 - 잠실 OB전서 2회말 투구 중 뒷목의 통증을 호소하며 자진 강판.

1998.10.08 - 광주 시내에서 친구들과 저녁 식사 도중 후두부 통증과 토혈 증세를 보여 전남대학교병원에 입원.

1998.10.16 - 경추 3번 종양 제거 수술.

1998.10.23 - 전남대학교병원에서 위암 진단.

1998.10.26 -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 입원, 재검 결과 전남대학교병원과 동일 진단.

1998.10.30 - 방사선 치료 위해 서울중앙병원 입원. 통원치료 받으며 4주 간격으로 항암제 투여.

1999.03.06 - 토혈 발생, 서울중앙병원 입원. 암세포로 인한 위벽 천공이 원인인 것으로 판명.

1999.03.08 - 위벽 천공 부분의 봉합수술 실시.

1999.06.02 - 병세 악화, 강남성모병원에 입원. 의식 불명에 빠지며 산소호흡기로 연명.

1999.06.10 - 오후 3시 55분 - 강남성모병원에서 위암으로 운명. (향년 22세)

4. 사후

  • 모 신문사에서 그의 죽음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을 '김상진 인생 마운드 강판' 이라고 적어놔서 '아니 젊은 청년이 불의의 병으로 죽었는데 거기다가 안좋은 의미의 '강판'이라고 제목을 적다니 너무한거 아니냐?' 라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항의를 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그 다음주 해당 신문사에서 '그건 아니지 않냐' 라는 독자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도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한참 후에 '자기는 그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는데 편집부에서 맘대로 붙인 제목이었다' 라고 해명하기도 했다.[16]
  • 생전의 그를 끔찍이도 아꼈던 진흥고 직속 선배 이대진은 김상진이 세상을 떠난 후 한동안 등번호 11번을 달고 경기에 임했지만, 2004 시즌을 끝으로 스스로 번호를 반납해 버렸다. 이유인 즉 자신의 성적이 너무 부진해서[17] 하늘에 있는 후배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 2011년 시즌부터는 손영민이 11번을 물려받기로 했었는데, 이범호의 FA 영입 보상선수로 친정 팀에 돌아간 안영명의 등번호이던 1번을 달면서 결번으로 남아 있다가 2010년도 신인 투수인 김대웅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2011년 시즌 종료 후 김대웅이 방출되며 다시 결번이 되었다가 2012년 부터는 좌완 투수 임준섭이 11번을 달고 있다가 임준섭이 한화로 트레이드 되면서 반대급부로 기아 유니폼을 입은 김광수가 11번을 달았다. 2015년 시즌이 끝난 후에는 고등학교 시절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유창식이 11번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유창식김상진 무덤에 똥물을 퍼붓는 사건이... 결국 11번은 진흥고 후배 김진우가 가져갔지만, 정작 김진우도 영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김상진의 생전 등번호였던 11번은 2018년부터 결번으로 남아 있다.
  • 김상진이 떠난 이후 지금까지도 KIA 타이거즈는 김상진의 기일인 6월 10일에 근조 리본을 달고 경기에 임하고 있으며, 김상진의 팬클럽인 "천상비애(天上飛愛)''[18]도 매년 기일마다 아래 사진과 같이 야구 현수막을 걸고 추모 행사를 하고 있다.

  • 2016년 10월 김상진의 출생지인 재뫼마을의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김상진을 기억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사

4.1. 기일에 열렸던 타이거즈 경기의 기록

기일인 6월 10일 경기의 기아의 승률은 처참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지경, 2008년부터 2015년까지 7번 내내 패배하다가[22] 2016년에 드디어 이겼다. 모 팀레전드급 타자 기일에 여는 추모경기와 딱 비교된다.[23][24]

2014년 6월 10일 경기에서는 그야말로 희대의 난타 세례를 받으며 팬들을 폭발시켰다. 그렇잖아도 타어강 등 2013년 이후 처참한 성적으로 분위기가 살벌한 기아 팬들이었는데 이런 막장 경기까지 나오니 김상진 기일만 되면 지던 놈들이 이젠 아주 가지가지 한다며 분노어린 반응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2015년에도 또 졌다! 이번엔 양현종의 등판 경기라서 많은 팬들이 승리를 기대했지만, 라인업에서 눕동님나지완좌익수 겸 1번타자로 기용하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수를 뒀고, 결국 마무리 윤석민이 1.1이닝 2실점 불쇼를 보여주며 넥센 히어로즈에게 역전패했다.

그러나 2016년에는 드디어 이겼다! 광주 홈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이범호브렛 필의 홈런포를 앞세워 4-0의 완승을 거둔데다가 고졸 신인 정동현1군 데뷔 첫 선발승까지 거두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승전보로 김상진을 추모할 수 있었다.

2017년에는 다시 졌다. 광주 홈 경기에서 넥센에게 연패를 하며 당시 시점에서 NC와 불과 0.5경기차 1위라는 살얼음판을 걷게 됐다. 그래도 그 해 한국시리즈 제패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실점

자책점

사사구

탈삼진

WHIP

1996

해태 타이거즈

29

123⅔

9

5

0

4.29

115

62

59

55

64

1.35

1997

30

147⅔

9

10

1

3.60

135

60

59

71

91

1.28

1998

25

121

6

11

1

3.87

120

63

52

50

69

1.34

통산 기록

84

392⅓

24

26

2

3.90

370

185

170

176

224

1.32


  1. [1] 용봉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야구를 하기 위하여 서림초로 전학을 갔다.
  2. [2] 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
  3. [3] 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완투승을 기록했는데 후술하겠지만 이 승리가 역대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 기록이다. 아울러 해태 타이거즈라는 이름으로 거둔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 경기의 승리투수였다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할 기록. 이후 KIA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완투승을 거둔 투수로는 2009년 한국시리즈 5차전의 아킬리노 로페즈2017년 한국시리즈 2차전의 양현종이 있다. 둘 모두 완투승이자 완봉승.
  4. [4] 나중에 김상진이 진흥고로 진학하는 시기에 맞춰 진흥고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며 6년간 사제지간으로 같이 야구를 했다.
  5. [5] 제자 김진우의 활약에 힘입어 팀을 2000년 봉황대기와2001년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감독에서 물러나 진흥고 체육 교사로 근무했다. 아들 강하승도 진흥고를 거친 야구선수다.
  6. [6] 1996년 8월 19일 경향신문 인터뷰 中
  7. [7] 입단 당시 첫 훈련때의 출사표
  8. [8] 한남자는 고려대에 갔다와서 동기지만 4년 선배.
  9. [9] 당시 해태의 고졸우선지명을 받은 선수가 2명이 더 있는데, 김상훈은 고려대에 진학한 후 2000년에 입단했고, 서재응은 인하대에 진학했다가 중퇴 후 뉴욕 메츠와 계약하며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상훈, 서재응, 김상진, 장성호는 넷 다 77년생 동기들이다.
  10. [10] 연세대 진학이 유력했지만 해태가 계약금 1억원을 제시하자 곧바로 프로로 선회했다. 가난한 집안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외환위기 직전 모기업 상황이 악화되던 상황에서 해태가 제시한 1억은 다른 구단의 2~3억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11. [11] 신인왕을 노려볼 만 했지만, 그 해 박재홍이 사상 최초의 30-30 클럽에 가입하는 등 맹활약 하는 바람에 신인왕 경쟁에선 밀리고 말았다.
  12. [12] 라면 한 냄비가 얼마나 타격이 큰가 싶기도 하겠지만, 운동선수들은 다른 직업군보다 활동량이 많은 만큼 체력 소모가 크고 신진대사가 활발하며, 이 때문에 음식 섭취량도 많은 편이다. 즉 냄비 하나=봉지 하나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 게다가 양도 많은데 갓 조리되어서 뜨겁기까지 한 음식이라면 그 양과 온도만큼 내장에 가해지는 부담도 그만큼 크다.
  13. [13] 죽기 전 부모님께 남긴 편지에 의하면 한국시리즈에서 완투승을 거둘 당시 이미 암에 걸린 상태였다고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사실 목뼈의 종양도 위에서 옮아온 것이었고. 그러니 손을 쓰려고 해도 한참 늦은 셈이다.
  14. [14] 참고로 이날 경기에서 타선에서는 입단동기 장성호가 역전 타점과 쐐기점수를 올리며 맹활약 했다.
  15. [15] 김상진과 츠다는 팀에서 촉망받던 우완 파이어볼러였고, 암으로 인해 안타깝게 사망한 공통점이 있다.
  16. [16] 당시엔 지금도 그런가 기사는 기자가 쓰지만 편집부나 데스크에서 그 기사를 마음대로 편집하거나 제목을 붙이는게 일반적이었다.
  17. [17] 당시 이대진 역시 어깨 수술을 받고 타자 전향까지 하는 등 부진한 상황이었다.
  18. [18] 한때 회원수가 수백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십수명의 소규모로 축소되었다.
  19. [19] 네이버 스포츠로 발행된 컬럼이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네이버에서는 삭제되고 박동희 기자 블로그에 원문이 남아있다.
  20. [20] KIA 타이거즈의 2009년 10번째 우승 후 박동희 기자의 컬럼. 김상진 선수가 V9의 마지막 승리투수라는 점에서 위의 컬럼과 함께 보길 추천.
  21. [21] 임창용과 같은 진흥고등학교 출신이고, 임창용이 김상진의 한 살 많은 선배이다.
  22. [22] 2013년은 6월 10일이 월요일이라 경기가 없었다.
  23. [23] 재미있는 사실은 2016년에는 KIA가 김상진에 기일에 승리하였고, 삼성이 장효조의 기일에 패배하였다.
  24. [24] 장효조가 작고한 이 후 삼성은 장효조의 기일이나 추모행사가 있는 경기에서 무패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나 2011년 부터 삼성을 맡은 감독이 장효조와 함께 선수생활을 하였으며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던 직속 후배여서 더더욱 이기려고 하는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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