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준

1. 개요
2. 데뷔 및 전성기
3. 암흑기 및 재기
4. 평가
5. 그밖의 이야기들
6. 앨범
7. 관련항목

1. 개요

이름

김원준

출생

1973년 2월 16일, 서울특별시

신체

175cm, 65kg

데뷔

1992년 1집 모두 잠든후에

소속

베일(V.E.I.L) (2006~)M4 (2010~2013)

소속사

Fe 엔터테인먼트
(구 후너스 크리에이티브)

한국가수이자 대학 교수 파문전사. 1992년 1집 타이틀곡 '모두 잠든 후에'로 데뷔, 이후 대표곡으로는 '언제나', '세상은 나에게', '너없는 동안', 'SHOW'등이 있다.

2. 데뷔 및 전성기

2남 1녀 중 막내다. 의사인 아버지[1] 밑에서 엄격하게 자랐으나 고교 시절 4인조 아마추어 그룹 '쥬크박스'를 결성해 처음으로 음악을 접한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예술대학 영화과에 진학, 재학 중에 교내 메탈 그룹 'Last Scene'을 거쳐 통기타 클럽인 '예음회'에서 활동하면서 음악에 심취한다.

1992년 8월 예음회 선배의 소개로 당시 삼성그룹 계열의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의 음악 담당 직원이자, 그룹 자전거 탄 풍경[2]의 리더로도 유명한 강인봉과 조우하여, 당시 제일기획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던 가수 오디션의 기회를 얻어 300: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다. 당시 제일기획에서는 같은 삼성그룹 계열인 삼성물산의 의류사업부에서 런칭한 새로운 패션브랜드인 '카운트다운'의 광고 기획을 맡았는데, 참신한 신인 가수를 발굴하여 음악과 CF를 동시에 선보이며 유행을 만들어가는 파격적인 광고 전략이 수립되어 오렌지라는 레이블로 음반사업을 시작하였고, CF 전속모델을 겸하는 신인 가수를 발굴해 내는 과정에서 김원준이 뽑힌 것이다.

제일기획은 곧바로 김원준의 데뷔 앨범 제작에 착수했으며 김원준의 자작곡 2곡을 비롯해 작곡가들에게 받은 노래를 편곡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동시에 김원준은 카운트다운 CF 촬영과 8일간 밤샘작업을 통해 음반 녹음을 수행하는 등 타이트하고 톱니바퀴가 맞물리듯이 딱딱 짜여진 계획 속에서 데뷔 준비 과정을 거치며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결국 김원준은 오디션 합격 후 45일 만에 CF 모델과 가수로 데뷔하는 기염을 토하였으며, 데뷔 앨범 타이틀곡 '모두 잠든 후에'는 가요 차트 4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김원준은 그야말로 성공적인 데뷔를 하며 가능성을 보이게 된다.[3]

▲ 김원준의 데뷔곡 '모두 잠든 후에'의 뮤직비디오[4]

데뷔 당시 신인 아이돌의 이미지가 강했던지라 그저 반짝하는 스타로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1993년부터 각종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도 적극적으로 출연하여 당시 MBC 대표 예능 프로그램인 특종TV연예에서 당대 최고의 개그우먼 이영자와 함께 영화 보디가드를 패러디하는 콩트[5]로 단순한 10대의 아이돌 스타를 넘어서 2030세대의 연령층까지 포섭하게 되어, 1990년대 초중반의 대표적 문화현상이었던 X세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 1993년 X세대의 대표주자로 이병헌과 함께한 아모레 트윈엑스 CF

그리고 그 해 8월, 2집 '나에게 떠나는 여행'을 발표하면서 록과 댄스리듬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자작곡 '언제나'를 타이틀곡으로 활동을 시작, 1집 때와는 사뭇 다른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 그는 1993년 골든 디스크 본상, MBC, KBS 10대 가수상을 수상하는 등 비디오형 가수가 아닌 오디오와 비디오가 결합된 가수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어, 1994년 6월 3집에서는 타이틀곡인 '짧은 다짐'이 표절 논란에 휩싸이며 잠시 위기를 맞았으나,[6] 급히 '너 없는 동안'으로 활동곡을 변경하여 하우스 리듬과 정열적인 '허리춤', 치마패션으로 일약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는 등 인기를 이어가면서 가요톱텐에서 골든컵까지 수상하게 되었다.

장국영을 연상시키는 조각같은 외모 덕분에 1995년에는 배우로 영역을 넓혀 공군사관학교 생도의 생활을 그린 KBS 드라마 '창공'에 절친인 류시원과 함께 주연으로 활약하기도 하였고, 이 드라마의 주제곡인 '세상은 나에게'도 김원준이 직접 불렀다. 드라마 자체의 평가는 고만고만한 수준... 다만, 영화 데뷔작 불의 태양은 안타깝게도 흑역사급으로 망한 영화인지라 언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김원준은 1990년대 중반의 대표적 하이틴 스타로서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소속사인 제일기획의 전략대로 '카운트다운'를 비롯한 광고 모델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며 당시 패션유행을 일으킬 정도였다. 지금 10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 당시엔 김원준의 인기는 김건모를 능가할 정도였고, 2000년대로 치면 이승기를 능가할 정도로 엄청나게 잘 나가던 완소남 스타였다.

데뷔 앨범 때 부터 타이틀 곡을 작사/작곡 할 정도로 뛰어난 음악성도 갖추었던 김원준은 1995년 10월 발표한 4집 'Dear'로 자신이 직접 앨범 프로듀싱까지 담당해 뮤지션으로서 진일보했음을 알렸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거기에 이듬해인 1996년에 발표한 5집 '쇼(Show)'[7]가 가요 차트 상위권에 진입하는 등 히트를 치면서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잡게 된다.

3. 암흑기 및 재기

하지만 그 이후로 김원준은 아티스트라는 강박관념에 빠지게 되면서 따라부르기 쉬운 댄스 일변도의 과거와는 달리 6집부터는 과감하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음악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앨범 프로듀싱을 하는 바람에 대중성은 그만큼 떨어지기 시작하여 6집부터 9집까지 4장의 앨범들은 모두 처참하게 실패하고 나락의 길로 떨어졌다.[8]

게다가 1999년 병역비리에 연루되며 연예인의 이미지에도 큰 손상을 입고 마음고생으로 무기한 활동중단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예기치 않았던 수난도 겪는다. 의혹의 주요 내용은 의사이던 아버지가 뇌물수수에 연루되어 김원준이 뇌물로 습관성 어깨탈골로 면제 받은 게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재검을 통해 결국 동일 사유로 면제 판정을 받았으니, 어찌보면 억울할 수도 있는 케이스.[9]

결국 정규 9집 발매 후에는 생활고에 빠지며 잘 나가던 시기에 좋아하는 모델을 종류별로 사 놓을 정도로 많았던 자동차들을 비롯하여 적금과 부동산도 정리하면서 재산은 밑바닥을 드러낸다. 결국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는 지경까지 갔지만 아들이 스스로 일어서길 바라는 아버지는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본인이 스스로 재기하기로 마음을 먹고 2002년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행사를 뛰고, 잘 나갈 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단편 드라마나 아침 연속극 등에 조연으로 출연하는 등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인지도는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된다. 이후 베일(V.E.I.L)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는 동갑내기 가수 친구들과 M4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해 활동했다.

2015년 4월 18일 콘서트 7080에 출연하여 # 쇼를 공연했다.

2015년 11월 베일(V.E.I.L) 데뷔 10주년을 기념해 새 앨범으로 컴백했다.

4. 평가

비주얼 때문에 인기가 있다는 선입견과 실제로 아주 좋은 가창력을 소유하진 못했지만 자신의 음악성을 키우기 위해 밴드를 결성한다던지,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원준은 아이돌로 통하던 시절부터 작사작곡을 해 온 싱어송라이터이며 다른 가수들 곡도 종종 쓴다. 참고로 데뷔곡인 '모두 잠든 후에'도 자작곡이다. 다만 최고의 히트곡인 쇼(항목 참고)는 조무래기 김동률 작사 작곡.

재기한 후에도 댄스곡은 가급적 기피한다던지 하는 등 노력을 보이고 있다. 다만 자작곡이 표절 논란에 휩싸인 흑역사가 있다. 대표적인 곡은 바로 3집의 타이틀곡이었던 '짧은 다짐'. 자세한 내용은 표절 항목을 참조바람.

5. 그밖의 이야기들

40대의 나이임에도 20대같은 외모의 대표적인 사기 동안 캐릭터의 소유자이다. 위의 프로필 사진이 39살 된 2011년에 찍은 사진이라니 말 다했다.

한 방송에서 배기성이 김원준의 동안 비결에 대해 "하루 세끼 다 챙겨 먹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비결"이라고 했다. 하지만 군인도 그런데 근데 흥미로운 건 일부 프로필에서는 김원준의 취미가 게임으로 밤새우기인데 어찌된 일인지... 규칙적인 주침야활일 수도 있다

코요태신지가 김원준 팬클럽의 인천지부 회장이었다고 한다. 신지가 불후의 명곡 김원준 편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공식 인증하기도 했는데, 팬클럽 시절부터 서로 익히 아는 사이인지 김원준이 신지의 본명인 지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11년 5월부터 2012년 1월까진 우결에서 박소현과 가상부부로 출연했다.

동갑의 유리상자의 이세준과 의 배기성 말로는 "김원준은 왕자 기질이 있어서, 방송에 부르려면 PD가 삼고초려를 해야 마지못한 척 나온다."라고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박승화는 "그런 애들은 말로도 안 되고 약으로도 안 되고, 좀 맞아야 정신차린다."라고.(…)

데뷔 초 일간 신문에 연재된 어린시절 회고를 보면 의외로 굉장히 우울하다. 김원준의 유아기 때 놀이 상대는 오로지 강아지와 자전거였으며 말도 없고 사람 살이 몸에 닿기만 해도 깜짝 놀랄 정도로 소심해서 주위 사람들이 자폐증 걱정까지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무척 엄하게 키웠다. 그의 아버지가 용산에서 개인병원을 하던 시절, 동네 수준이 좋지 않다고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 하게 했으며 걸어서도 갈 수 있는 몇 분거리 유치원을 자가용으로 통학시킬 정도였다. 또 아버지 눈에 나는 행동을 하면 병원의 지하방에 감금당하기도 했다. 수술실 바로 옆에 있어서 어린아이에겐 음침하고 무서운 그 지하방에 12시간이나 감금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가정교육과 소심한 성격은 초등학교 진학 후에도 계속되어서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같이 놀았던 친구나 추억이 전혀 없다고. 중학생 즈음에야 겨우 외향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진갑용과 중학교 때부터 형동생하던 사이라는 것. 진갑용이 한 살 동생이다! 형 동생은커녕 갑드래곤이 삼촌같은데?~~ 참고로 김원준은 Fe 엔터테인먼트의 수장인 김현철과 더불어 삼성 라이온즈의 열혈 팬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히트곡 SHOW가 삼성 4번타자 최형우의 응원곡으로 쓰이고 있다.

1집인 'Wanna be sexy'의 인트로를 듣다보면 본인 주민번호가 나온다.(...)

2012년부터 강동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동시에 학과장 직도 맡고 있다.

2013년 5월 30일에는 부친상을 당했다.#

2016년 1월 28일 () 웹툰히어로 툰드라쇼 2(꽃가족)에 출연하였다.

2016년 3월 8일 14살 연하인 현직 검사와의 결혼을 발표했다! 4월 16일 대검찰청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6. 앨범

음반

제목

발매일

타이틀곡 및 후속곡

정규 1집

(Wanna be sexy)

1992

(눈에 띄고 싶어)

정규 2집

(2집)

1993.10

(나에게 떠나는 여행)

정규 3집

(3집)

1994.10

(너 없는 동안)

정규 4집

(Dear)

1995.10

(넌 내꺼,꿈을 꾸는 너에게)

정규 5집

(Show)

1996.08.20

(Show)

라이브

(나에게 떠나는 여행)

1996.09.06

(나에게 떠나는 여행)

정규 6집

(6집)

1997.07.30

(얄개시대, 내 품에 안겨)

정규 7집

(Self Destruction)

1998

(가까이)

정규 8집

(Another 8000)

2000.06

(부탁)

정규 9집

(Dearro Nine)

2001.08

(나인)

7. 관련항목

김원준 미니홈피


  1. [1] 고 김기영씨로 산부인과 전문의. 어머니는 간호사로, 아버지가 인턴으로 일하던 병원의 간호사였다. 할아버지는 소아과 의사였으며, 고모, 고모부, 친형도 의사이다.
  2. [2] 퓨전 포크 록 음악그룹으로, 영화 클래식의 OST 타이틀 곡인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 대표곡이다.
  3. [3] 김원준의 이런 단기간의 데뷔 및 성공은 절친이었던 류시원에게 연예계 입문의 결정적인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한다.
  4. [4] 2016년 기준으로 정확히 24년 전인 1992년에 촬영된 영상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감상하자. 원색 위주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영상효과와 촌티나는 패션은 그 당시 X세대로 불리던 20대들 사이에서는 매우 유행하던 최신 스타일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김원준의 외모는 지금의 모습 그대로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듯 싶다. 역시 방부제 동안이다.
  5. [5] 톱가수로 나오는 이영자를 간주때 유덕화 닮은 괴한이 무대위로 올라가 총으로 위협하며 이영자를 인질로 삼는데 괴한의 총에 왼쪽어깨를 맞음에도 불구하고 발차기로 괴한을 제압한뒤 육중한 이영자 라고 쓰고 더미라고 읽는다 를 김원준이 업고 나가던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에 가까운 폭소를 자아내며 김원준의 인지도는 급상승한다. 이영자의 "삐에로는 우릴보고 웃지" 립싱크로 부르며 김완선 따라잡기 댄스도 꽤 화제였다. "김완선" 실명이 그대로 쓰임 영상자료를 가지고 계신분의 블로그
  6. [6] 사실 위기랄 것도 없는 까닭이, 곧바로 멜로디를 바꿔 대응한 데다 너 없는 동안으로 가요톱텐 골든컵을 차지한 이후 '짧은 다짐'을 후속곡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짧은 다짐'의 표절 이후 하락세가 있었다고 서술됐으나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3집 때의 인기가 절정이었고, '짧은 다짐'은 이후 콘서트의 정식 넘버가 될 수준에 중박 정도로 히트한 노래였다.
  7. [7] 김동률이 작사/작곡한 곡으로 김동률이 고교시절 TV에서 본 김원준의 가수 활동 모습을 보고 만든 곡이라고 한다. 흠좀무.
  8. [8] 6집 타이틀곡인 '얄개시대'와 9집 타이틀곡인 '나인'은 중위권에 들 정도로 선전했으나, 7,8집은 가요차트에 제대로 진입조차 못했다.
  9. [9] 1990년대에는 특히 가수들의 병역비리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 당시 잘나가던 가수들은 몇몇을 제외하곤 요상한 사유로 면제 받은 인간들이 꽤 많다. 21세기 들어서는 유승준 스티브 유 사건이 워낙 큰 충격과 영향을 끼쳤고 그 뒤로는 군대의 잣대가 까다로워지고 대중의 눈총도 따가워져서인지 최소한 공익이라도 다녀오는 분위기이나, 이 당시는 대놓고 군대 안 가는 인간들이 수두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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