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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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國時代

남북 시대가 아니다.

1. 개요
2. "남북국시대" 개념의 역사
3. 현대 학계에서의 "남북국시대" 개념의 위치
4. 시대적 특징
5. 두 나라의 국력 비교
6. 관련 창작물

1. 개요

넓게는 신라의 삼국통일전쟁부터 후삼국시대 이전까지, 좀 더 정확하고 좁게는 발해의 건국인 698년부터 통일신라가 후삼국으로 갈라진 900년까지를 말한다.

1990년대만 해도 삼국 통일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라고 칭하며 국사 교과서로 가르쳤으나, 발해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면서부터 발해가 존재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통일이라고 말할 수 없고, 따라서 남북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 대세가 되었다.[1] 게다가 통일신라라고 칭하게 되는 순간 중국의 동북공정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발해가 중국 역사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당시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통합했다고 당시에 스스로 인식했던 것은 사실이며,[2] 후술할 남북국시대 명칭은 그럼 적절한가[3]나 이전 삼국의 신라와 전쟁이 끝난 뒤 커진 신라의 구분 문제[4]부터 시작해 여러가지 이유로 통일신라라는 명칭도 여전히 상당히 쓰이는 상태다. 어쨌든 현재의 경향은 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시대의 이름은 남북국시대로 상당히 대체되었고, 고구려와 백제 멸망 이후의 신라라는 나라의 이름은 통일신라로 부르는 경향. 혹은 초등학생 대상으로는 이 시기를 가리켜 '통일신라와 발해'라는 좀 더 완곡한 표현도 쓰이는 듯 하다. 어찌되었건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간주한다는 데에선 차이가 없다.

2. "남북국시대" 개념의 역사

신라의 삼국 통일론(삼국통일전쟁)과 발해는 우리 역사와 거리가 있다라는 개념은 고려 후기 ~ 조선 중기까지는 확고하게 지지를 받았고, 발해는 말갈 계통의 국가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고려사에서 발해의 주체를 속말말갈이라고 하였고, 고려가 발해의 영토를 통합하지 못했음에도 태조가 즉위 19년만에 통일삼한(統一三韓)했다고 기록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발해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고, 대몽항쟁을 겪으면서부터 비로소 발해를 한국사의 범주에 포함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삼국유사에서는 발해를 말갈의 별종으로 서술해 신라에게 정통성을 부여하였고 신라가 일통삼한(一統三韓)했다고 명시했다. 고려 말의 제왕운기에서 최초로 발해와 말갈의 연관성을 언급하지 않아 한국사로 보는 시각이 나타났지만, 조선 초기의 동국통감에서는 고려 태조의 대 거란 정책을 비판하면서 우리 민족과 발해의 연관성을 부정하였다.

비로소 신라 통일론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반대적인 시각이 뚜렷히 드러난 건 조선 중기로, 가장 먼저 지적된 것은 영토의 불완전성 문제인데, 조선 중기의 한백겸(韓百謙)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에서 이런 면을 수도의 위치와 연관시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정할 때는 그 규모가 크지 않으면 안 되며, 그 형세를 잘 살펴야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초기에 당군이 철수한 뒤 수도를 국토의 중앙 지역으로 옮겨 사방을 제압하였다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할 수 있어, 부여와 요양 심양 지역을 우리 판도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어찌 저 거란이나 여진족(女眞)이 홀로 그 땅을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신라의 군신이 일이 성사되자 쉽게 만족하여 한 모서리에 안주하여 당장의 안전을 추구하며 나날을 보내고, 서북 지역 태반을 헌신짝 버리듯 인접한 적들에게 내주어, 마침내 그 뒤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7백여 년간 계속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어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으니, 어찌 가히 탄식치 않으리오.

동국지리지》 中

 

한백겸은 신라 지배층이 안정책을 취해 고구려의 옛 땅을 방기한 것을 비판하면서, 고구려 영토의 태반을 포기한 점이 결국 나라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며 불만스러운 점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는 신라의 삼국 통일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18세기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에서 통일신라의 정통성을 인정했지만,[5] 9주 5소경을 기술하면서, 위에 제시된 한백겸의 글을 인용하였다. 안정복도 고구려 영역 통합의 불완정성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

신라 삼국 통일론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 것은 조선 후기,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다.[6]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면서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 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가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으로, 동쪽과 서쪽, 북쪽을 개척하여 (고구려의 영역)보다 더 넒었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유득공(柳得恭), 1784년, 《발해고(渤海考)》 서문

 

유득공은 남북국시대론을 개진하면서 고려 통일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이는 결국 신라 삼국 통일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라 통일의 불완정성을 논하는 것은 결국 고구려의 영토를 신라가 제대로 통합하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우리나라가 약소국이 되었다는 식의 인식과 연결되었다. 이런 인식이 근대에 들어와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신라 통일론을 비판하고 남북국시대론을 진전시켰다. 그러면서 신라가 외세와 결탁하여 동족을 팔아먹었다는 식의 비자주성, 비민족성을 강조하여 비판하게 된 것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신채호가 1908년에 발표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그는 신라의 통일을 부정하고, 신라와 발해의 양국 시대를 주장하였으며, 이종(異種)을 불러 동종(同種)을 멸함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임과 다를 바 없는 행위라면서 신라의 통합 전쟁을 비난하였다. 신라가 민족적 역량과 영토의 축소를 가져왔으며, 외세와 결탁한 반민족적 행위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독소를 심었다는 것이다.

삼국통일론과 남북국시대론을 둘러싼 논의에서, '민족'이 핵심 화두가 되었다.

역사의 도덕화, 이념화는 민족주의 사학의 주요 특성이고, 이에 따른 신라 통일론 비판과 남북국시대론의 강조의 사론은 20세기에 꾸준히 이어졌다. 그런가 하면 삼국시대에는 아직 민족 관념이 성립하지도 않았다면서 민족 관념으로 삼국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신라 통일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671년,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보낸 문무왕의 서한에서 언급한, 대동강 이남 지역을 신라 영토로 한다는 무열왕당태종의 합의를 주된 논거로 하여, 신라 조정의 전쟁 목적이 삼국 통일이 아닌 백제의 병합이었다고 파악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 설에서는 신라가 고구려 영역을 온전히 통합하지 못한 것은 본래 의도부터가 그러한 만큼, 이에 대한 비판은 삼국 통일론에 집착함으로서 야기된 자승자박적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남북국시대를 깊이 추구하다 보면 결국 통일신라라는 명칭에 대해 거부감을 보일 수 밖에 없고, 이에 따라 7세기 말 이후의 신라 국가의 명칭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견해 등에서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시각이 7세기 이전의 이른 시기에 한국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삼국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식이다. 그런 인식에 의거하면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죄악의 행위이며, 그나마 온전히 통합하지 못하고 남은 일부가 따로 나라를 세웠으니, 이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역시 상당하다. 삼국통일전쟁 항목의 해당 부분 참조.

3. 현대 학계에서의 "남북국시대" 개념의 위치

남한 학계에서도 남북국론에 서서 후기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이 시기의 역사를 서술한 개설서 등이 출간되었다.[(한명우「다시 찾는 우리 역사」,1997년, 제3장 발해와 그 문화, 제4장 후기 신라의 사회와 문화). 반면 북한 한계는 '후기 신라'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초기에는 신라가 당과 결전을 벌여 이를 몰아낸 사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는 발해사를 강조하고 신라 통일론을 부정하였다. 나중에 가면 오히려 더 발해에 비중을 두는 식으로 전개가 되었다.

사실 발해의 정체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학계에서 첨예한 논쟁 중이긴 하지만, 국내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나라이며 한국의 역사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이므로 1990년대 후반부터 국사 국정 교과서에 남북국시대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남북국시대'라는 표현이 병존하고 있어, 이것이 모순적인 교육이라는 지적도 자주 있어 왔다. 물론 발해의 정체성에 대해 국내 학계에 회의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거부하는 표현.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각각 통일신라발해 항목을 참고. 사실 '남북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면 신라와 발해의 당시 비중이 비슷하게 다루어져야 하겠지만, 발해에 대한 기록이 턱없이 적은 탓에 비중은 압도적으로 신라 연구 쪽으로 쏠려 있다. 서강대학교 이기백 교수를 위시한, 신라와 발해의 '남국 - 북국' 의식 주장에 대해 회의하는 입장에서는 아예 이러한 분류보다 '요동사' 개념을 도입하는 등의 시도를 하기도 했다. 신라가 발해를 '북국'으로 지칭한 기록은 분명하나(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 등), 발해가 신라를 '남국'으로 지칭했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게다가 이러한 표현 또한 남북국이란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단순한 방향 표시라는 주장이 제시되었는데, 예를 들어 발해는 일본을 남국으로 지칭하기도 해 신라만을 특별히 다룬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제시되었고, 신라 역시 최치원이 직접 남긴 사산비명(四山碑銘)에서 당나라를 일관적으로 서국(西國)이라고 불렀다.

2016년 한국사 국정교과서에 해당 시기인 7세기에서 9세기 사이를 남북국 시대가 아닌 통일신라 시대로 수정 기술될 것이라 알려져 한때 논란이 있었다. 교육부 관계자에 따르면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쓰게 되면 지금이 제2의 남북국시대로 볼 여지가 생기며 이는 북한 정권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한국일보 기사) 또한, 북한에서도 남북국 시대라고 부른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상술된 '남북국 시대라는 이름이 과연 적절한가?'는 차치하더라도, 남북국 시대 표현을 배제하는 데 있어 북한이 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신라와 발해를 묶어 남북국시대라 칭하는 것과 현 시대를 미래에 제2의 남북국 시대로 칭하게 되는 것은 단순한 추측일 뿐더러 별개의 문제지 않은가. 또, 남북국 시대란 명칭을 북한이 최초로 만든 것도 아니므로[7] 북한에서 쓰이는 명칭이라 하여 사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이에 대해서는 남한에 뿌리를 두었던 신라가 최초로 통일을 이룩하였고, 거기에서 비롯된 국가적 정통성이 통일신라 - 고려 - 조선 - 대한민국으로 이어짐을 재확인하려 했다는 해석이 많다. 한국사 국정 교과서의 전반적 기조가 국가 정통성 강조이기 때문. 결국 논란 끝에 결과적으로는 남북국 시대로 표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국정 교과서가 채 도입도 되기 전 폐지되면서 옛 논쟁으로 남게 되었다.

4. 시대적 특징

이 시대는 매년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던 삼국시대의 전란을 종식시키고 수백년간의 평화기를 맞이하였다. 발해의 중심지는 고구려 시절보다 훨씬 북쪽이었으므로[8] 남북으로 대치한 두 나라 사이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군사적 충돌은 한 번도 없었으며, 발해 역시 전 왕조 고구려와 달리 국가 초기 이후로는 당나라와의 무력 충돌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 역시 국가 내부가 안정되고 과거 적이었던 신라와 화친하면서 규모가 큰 무력 대립은 사라졌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이나 남북국 시대 후기로 가면 당나라 해적이나 거란족의 대두 같은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전면전이 일상이었던 삼국 시대와 비교하면 위협도는 확연히 적었다.

국가간 전면전이 사라지고 동아시아 정세가 안정화된 것에 덧붙여 이슬람교 세계의 국제성에 힘입어 한반도 왕조에서도 국제적인 조류를 타, 중동까지 신라가 알려져 세계지도와 지리서에 신라의 이름이 등장하고, 발해는 모피 수출로 이름을 날리는 등의 족적을 남겼다. 국가간 인적 교류도 후대에 비해 더 활발했다. 8세기 후반 들어 당, 신라, 발해, 일본이 비슷한 시기에 모두 정치적 혼란 속에 빠지면서 국제성은 쇠퇴하고 연안 무역이 발달하긴 했지만, 9세기 초 발해와 신라가 약간의 회복세를 보이면서(대인수흥덕왕 등) '신라도'가 뚫리고 청해진이 설치되는 등 교역은 오히려 더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10세기 들어 발해는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신라는 진골들의 소모적인 내전 상황에 이은 민란의 폭발과 지방 세력의 대두로 인해 900년에 견훤후백제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후삼국으로 분열(후삼국시대)하며 남북국 시대는 종결된다.

5. 두 나라의 국력 비교

사실 신라와 발해의 국력을 비교하는 건 엄밀한 의미는 없는 게 결국 둘이서 각 잡고 싸운 적이 없고 구체적인 국력 관련 자료는 특히 발해는 기록이 심각하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알 수 있는 건 땅 크기는 발해가 넓었고 인구 밀도는 농사 잘 되는 따뜻한 땅인 신라가 높았을 거라는 것이다.

행정구역으로 비교해 보면 신라는 9세기 초반 헌덕왕 기준 9주 5소경 120군 298현이었고, 발해는 선왕 때 5경 16부 62주였다. 여기서 5소경과 5경이 대략 대응하고 신라의 9주가 발해의 16부와 대응하고 120군이 62주와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 대한민국으로 치면 광역시 수는 같고 도(행정구역)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은 발해가 7군데 많고 시(행정구역), 군(행정구역)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은 신라가 2배 정도 많다는 것이다. 물론 발해와 신라의 행정구역 인구 배분이 달랐겠지만 비슷했을 거라고 치면 발해가 신라보다 영토는 넓은데 관리할 인구는 더 적을 거라는 가정과 연결된다.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유사에서 신라 수도 서라벌의 인구를 178,936호(戶)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서라벌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1호가 5명 ~ 6명이라고 치면 100만에 달하므로 당시 인구로는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9] 사실은 서라벌이 포함된 수도권인 양주가 178,936호거나 아니면 신라 전체 인구가 178,936호거나, 서라벌 인구가 178,936명인데 호라고 단위를 잘못 적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발해의 경우는 중국의 사서 구당서에서 발해 전체가 10여만 호라고 되어 있다. 신라의 전체든 일부든 인구가 18만 호 정도 된다고 치면 확실히 인구 수는 신라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나라가 엮인 기록 자체가 많지 않지만 그 중에서 찾아보자면 897년 7월에 발해 왕자 대봉예(大封裔)가 당나라에 가서 신라 사신보다 발해 사신이 더 높은 자리에 서게 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당나라 측에서 거절했다. 이것이 기존에 신라가 상석에 앉았다는 것인지 두 국가가 동격으로 앉았다는 것인지는 또 자료가 없어서 오리무중(...)

결국 국력, 군사력, 외교적 입지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두 국가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현재로썬 불가능한 것이 결론이다. 그나마 북방 국가라 기병이 발달했을 발해가 군사적으로 더 낫지 않았겠는가 하는 추측만 가능할 뿐.

6. 관련 창작물

후삼국시대와 같이 소외되고 있는 시대로 관련 창작물이 많지 않은 편이다. 물론 예외는 존재한다. 아무래도 앞 시대인 삼국 시대나 뒷 시대인 고려 시대에 비해 외적으로 평화로운 시대였기에 전쟁 영웅 같은 소재를 그리기는 어렵고, 정치 사극이나 퓨전 로맨스물의 배경은 주로 사료도 많고 인지도도 높은 조선 시대로 만들어지고 있어서 그렇다. 신라도 신라지만 발해는 기록 자체가 적어도 너무 적어서 완전 가상 스토리가 아니라면 뭘 만들기가 어려울 정도라 그렇기도 하다. 2백여 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남북의 두 나라가 평화로우면서도 어떤 시대였는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시대를 공존하며 보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느낌이 들기도 하다. 이 시대에서 예외적으로 꽤 인기가 있는 소재로 장보고가 있으며, 발해의 경우 대조영이 그나마 인지도가 있다.

  • 소설
    • 대발해 - 대발해(만화)
    • 대조영 - 위의 드라마 대조영의 원작.


  1. [1] 과거엔 절대 다수로 통일신라 시대라고 표기하던 것이 대세였지만 최근 학계와 출판물에선 남북국시대를 언급이 늘어났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통일신라와 남북국을 같이 쓰는 흠좀무한 경우도 많다.
  2. [2] 발해가 건국되기 이전인 7세기 후반부터 보덕국, 9주 5소경 행정구역 설정(옛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각각 3주씩 부여해서 9주), 9서당 설치 등 '고구려도 이제 신라의 일부'로 간주하고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했고, 당시 신라는 신라의 속국인 보덕국 왕을 고구려 왕으로 칭했다.
  3. [3] 서로 남국, 북국으로 불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발해에선 일본을 남국이라고 부른 적은 있지만 신라는 글쎄다.
  4. [4]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인 신라와 676년 이후의 신라는 어떻게 보더라도 국가의 성격이 너무나 바뀌었기 때문에 구분하는 용어 자체가 없으면 상당히 문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은 당시에는 그냥 구분 없이 쭉 이어지는 '로마'라고 불렀는데, 그렇다고 현대인들이 그 둘 다 그냥 로마 제국이라고 부른다면 상당히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같은 나라라고 해도 용어 자체의 구분은 필요한 것이다. 후기 신라, 대(大) 신라 등 통일신라를 대신할 다른 용어가 제기되기도 했다. 신라의 국명 표기 문제는 통일신라 문서 참조. 애초에 천년왕조 신라도 신라라는 이름으로 시작된게 아니었지만 다 신라로 퉁치는거랑 같다.
  5. [5] 안정복은 신라가 삼국 중 한 나라이던 시기는 한국사의 정통이 아니었고, 통일하면서 정통성을 가졌다고 보았다.
  6. [6] 즉, 근현대에 와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성장에 의해 발생한 불만이 아니라 이미 조선 시대부터 그 문제 의식이 생겨나고 있었다.
  7. [7] 위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조선 시대부터 이미 나온 명칭이다.
  8. [8]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450km 정도지만,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까지는 1천여 km에 달한다.
  9. [9] 이후 시대인 고려의 개경이나 조선의 한양보다 3배 ~ 5배 많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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