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

1. 개요
2. 생애
2.1. 친일 논란
3. 같이보기

본명

원명(原名)은 최창수(崔昌洙)
개명(改名)은 강문수(姜文秀)

출생

1918년 10월 18일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주군

사망

1962년 6월 26일(43세)
서울특별시

활동 시기

1936년 ~1962년

배우자

김은하(이혼)

가족

자형 손홍팔(법조인)

1. 개요

일제 강점기 후기와 한국전쟁 전후를 풍미한 트로트 가수.

2. 생애

  • 경상남도 진주 출생으로, 원래 이름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에 들어가면서 강문수(姜文秀)로 바뀌었다. 남인수는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 남인수의 형이었던 최창도의 딸, 그러니까 남인수에게는 조카가 되는 최삼숙은 북한의 인민배우로, 무대 공연 2600회를 한 인기 가수라고 한다. 2016년 5월, 류경식당 종업원 집단탈북 의 탈북자들 중 최삼숙의 딸이 포함되었다고 보도되었다. #
  • 학력 사항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가수 데뷔 전 경력 역시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했다는 설과 중국어를 배우다가 경성부로 올라왔다는 설 등 여러 설이 분분하다. 다소 불우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다.
  • 1936년 김상화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1938년 데뷔곡을 이부풍이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약 20여 년간 타고난 미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물방아 사랑〉, 〈꼬집힌 풋사랑〉, 〈감격시대〉, 〈항구의 청춘시(靑春詩)〉,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청노새 탄식〉, 〈낙화유수〉, 〈남아일생〉, 〈일가 친척〉,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청춘 무성〉, 〈고향의 그림자〉, 〈고향은 내 사랑〉, 〈이별의 부산정거장〉, 〈청춘 고백〉, 〈추억의 소야곡〉, 〈산유화〉, 〈울리는 경부선〉, 〈무너진 사랑탑〉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약 1천 곡에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개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인생의 애달픔, 유랑의 슬픔 등을 그린 노래였다.
  •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시에론레코드에서 취입한 데뷔곡으로 큰 반응을 얻지 못했던 〈눈물의 해협〉의 가사를 바꿔 다시 부른 노래였다. 남인수는 시에라레코드의 박영호, 박시춘을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가 오케레코드에서 스타가 되었다. 이 당시 남인수의 등장은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미성의 가수 탄생'으로 크게 선전되었다. 그리고 이 곡은 토도로키 유키코가 <哀愁のセレナーデ>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가사를 붙여 불렀고 1940년에 남인수와 듀엣으로 부르기도 했다.
  • 남인수는 음역이 넓고 감정 표현도 풍부하여 가수로서의 천부적인 재질을 갖고 있었다. 목소리가 옹골찬 미성인 데다 음높이와 발음이 정확하여 고음 처리에 강점을 보였다. 남인수의 등장으로 채규엽, 고복수,강홍식 등 이전 세대 인기 가수의 시대가 저물고 가요계의 새로운 판도를 열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 동료 가수 이난영과의 로맨스가 유명하다. 이난영은 원래 작곡가 김해송의 부인이었으나 한국 전쟁 때 남편이 실종되면서 남인수의 도움으로 김해송이 운영하던 악단을 운영했다. 1962년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도 이난영이 간호해 주었다. 남인수와 전처 김은하의 이혼 사유가 이난영과의 불륜 때문이었는데, 김은하는 이난영의 남편이었던 김해송의 불륜 상대였기도 했다.
  • 사망 전 한국연예인협회 부이사장, 대한가수협회 회장 등을 지냈고, 장례식은 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진주의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동상과 노래비도 세워져 있다.
  • 사진에 관해서도 유명한데, 이별의 부산정거장과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한 모든 남인수 앨범의 커버가 전부 똑같은 사진이다.(...) 이유는 불명.
  • 친일가요 이천오백만 감격에서 3절을 일본어로 부르는데, 상당히 일본어 실력이 뛰어난지 발음이 꽤나 좋다. 유성음과 무성음 구분이 확실하다.
  • 공연 후 앵콜곡으로 <희망의 나라로>를 주로 불렀다고 한다.

2.1. 친일 논란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백년설박향림[1]과 함께 부른 〈혈서지원〉을 비롯하여 〈그대와 나〉 등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강제 동원 가요를 취입함으로써, 그 시대에 활동하였던 대부분의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을 올렸다.

또한 이러한 친일 경력으로 인해 진주시가 주최하는 예술제에 포함된 남인수가요제 개최를 시민단체가 남인수의 친일 경력을 들어 반대하는 등 여러 차례 논란이 있었다.

3. 같이보기


  1. [1] 그 유명한 노래 오빠는 풍각쟁이를 부른 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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