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

로마의 역대 황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네 황제의 해

4대 클라우디우스

5대 네로

6대 갈바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Lucius Domitius Ahenobarbus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1]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황제 즉위 전)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즉위 후)

출생지

이탈리아 안티움

사망지

이탈리아 로마

매장지

이탈리아 로마 도미티아 가 묘지

생몰 년도

서력기원 37년 12월 5일 ~ 68년 6월 9일

재위 기간

서기 54년 ~ 68년

1. 개요
2. 즉위와 집권
3. 로마 대화재
4. 몰락
5. 평가
6. 기타
7. 대중매체

1. 개요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이어지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방탕한 생활로 인한 막장성과 정신병자 수준의 광기를 동시에 갖춘 인물로 오늘날까지도 폭군의 대표주자로 꼽히고 있는데, 이런 평가는 가혹한 측면이 많다. 물론 제정신 아닌 짓들을 많이 저지르기는 했으나 네로 본인은 크게 잔인하지도, 정국에 아예 관심이 없지도 않았다. 단지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예술가적 기질이 너무 강한데다[2] 몇가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면서 반란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스스로 자살하는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콤모두스나 군인황제 시기의 막장 황제들의 시절과 달리 네로 치하의 로마는 오히려 전성기였으며 그의 사후에도 계속 발전하여 극성기를 맞이하였다.

따라서 최악의 폭군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단지 무능해서 '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폭군보다는 암군에 가까운 인물로 볼 수 있다.

2. 즉위와 집권

네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소)아그리피나의 아들로,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의 후처로 들어오며 그의 양자가 된다. 참고로 네로의 친아버지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대(大)안토니아의 아들이고, 대(大)안토니아는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의 딸이기에 네로는 부모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받은 셈이다. 어릴 때에는 영특하고 현명하였다고 한다. 손호?

네로의 본래 풀 네임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인데, 아헤노바르부스 가(家)[3] 는 대대로 로마 집정관(consul)을 역임해 온 로마의 명문가이며, 네로의 조상 중에도 이름 있는 인물들이 꽤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로마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라면 잘 아는 사실이겠지만, 네로의 고조부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4], 그와 포르키아(Porcia)[5]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네로의 증조부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Gnaeus Domitius Ahenobarbus)[6]브루투스와 더불어 카이사르의 대표적인 적수(適手)였으며,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대 안토니아의 아들이며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이기에, 대 안토니아의 누이인 소 안토니아의 아들인 게르마니쿠스(Germanicus),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이종 사촌 동생[7]이 된다. 그런데 그나이우스의 부인 소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의 조카이므로 그나이우스는 그의 부인 소 아그리피나에게 오촌 당숙(!)이 된다. 그러므로 부계 쪽으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뻘이 되지만, 모계 쪽으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손자뻘이 되는 것이다. (...) 또 클라우디우스의 황후 중 한 명인 발레리아 메살리나(Valeria Messalina)의 어머니는 네로의 고모인 소 도미티아 레피다(Domitia Lepida the younger)이므로 네로와는 사촌 관계이다. 그만큼 로마 황실 구성원 간의 관계는 복잡하다.

네로의 증조부는 옥타비아누스의 최대 적수 안토니우스와 사돈 관계를 맺은 사이였고, 그런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가차없이 그를 배신하였다는 이유로 해군 제독으로서 악티움 해전 이전에 그가 세운 많은 공적과는 별개로, 그 인간성은 비루하게 여겨졌으며 그러한 인식은 그 자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손자(네로의 아버지)[8]는 한번은 완전히 티베리우스의 눈 밖에 나서 여러 가지 죄목으로 무려 사형 판결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그러나 판결을 내릴 당시 티베리우스는 고령이었고, 얼마 안 있어 티베리우스가 세상을 떠나서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자 칼리굴라는 그를 바로 풀어주었다. 비슷한 사람 끼리는 역시 통하는 게 있기 마련 그러나 석방된 지 얼마 안 있어 네로가 태어났고 그가 2살도 채 되기도 전에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자신을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칼리굴라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재산을 아들 네로 뿐 만 아니라 칼리굴라[9] 에게도 일부 넘긴다고 했었고 그것을 빌미로 칼리굴라는 그의 대부분의 재산을 가져가 버렸다. 죽음과 재산 기부, 당신의 선택은?! 그러나 칼리굴라가 가져갔던 재산은 네로가 황제가 되면서 다시 돌아왔다.

사실 네로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지 않았는데, 클라우디우스에겐 전 아내인 메살리나 발레리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브리타니쿠스란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해 직접적으로 피가 안 섞였다고는 하나 표면적으로 남매간이 되는 클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10]와 네로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네로가 클라우디우스의 후계자가 되기 쉽도록 길을 터줬다. 이러한 아그리피나의 영향도 있었고, 불륜을 저질렀던 메살리나에 대한 악감정 탓인지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그 뒤 석연찮은 죽음을 맞는다. 클라우디우스 사후 네로는 브리타니쿠스가 어리다는 이유로 17세의 나이에 황제로 추대되었다.

네로는 원래 황제가 될 생각이 없었고, 네로와 옥타비아의 결혼은 사실상 강제였기 때문에 금슬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옥타비아는 당시 기준으로도 착하고 현명한 아내감으로 명망이 높았고, 네로에게 철저히 무시당한 터라 로마 시민들의 동정을 받고 있었다. 네로의 아내 박대가 스스로 정통성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아그리피나는 그 점을 상당히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게다가 네로가 포파이아를 사랑하게 되어 옥타비아를 몰아내려고 하자 아그리파나는 옥타비아 편을 들어 아들과 대립했다. 이 때 네로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실권을 잡으려 하면서 아그리피나와 조금씩 충돌하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이혼 문제까지 끼어들자 둘의 사이가 나빠질 대로 나빠진다.

이 때 아그리피나가 브리타니쿠스를 후원하자, 사실상 정통성에서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브리타니쿠스가 심각한 위협이 되었으므로 네로는 하수인을 보내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한다. 그리고 몇 달 뒤에 아그리피나를 뒤이어 암살했다. 아그리피나를 죽이고 나서는 그동안 사이가 나빴던 아내 옥타비아에게 간통의 혐의를 뒤집어 씌운 뒤 처형한다. 이런 짓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네로의 치세에는 그다지 큰 영향이 없었는데, 왕위다툼에 이정도는 뭐당시 로마 시민들의 아그리피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으며 이 때까지는 네로가 정치적으로 뚜렷한 실책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의 보좌를 받은 네로의 초기 치세는 꽤나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그리피나라는 걸림돌이 사라지자 네로는 조금씩 자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때마침 보좌의 한 축이었던 부루스가 병에 걸려 죽자, 가족까지도 가차없이 살해해 버리는 네로의 성격에 경계심과 위협을 느낀 세네카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로써 네로는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네로는 자신을 위대한 예술가 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연예인 기질이 강했는데 그를 제약하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자 이러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한다.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11]에게 신설된 "아르비테르 엘레간티아이[12]"라는 장관직을 주고 궁정에서 모든 종류의 취향에 관한 판단을 맡겼으며[13], 자신은 그리스 문화와 시에 심취하여 수염을 기르고 그리스 등지에서 열리는 시 낭송 대회에 출전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고, 그와 관련된 여러 일화와 농담들이 전해진다. 올림픽 경기에 직접 출전해 자신을 위해 창설한 음악 경쟁에서 우승하고, 7두마차[14]를 끌고 출전한 전차경기에서는 중간에 전차에서 굴러떨어졌음에도 심판진의 안 퍼졌으면 님이 1등 판정으로 우승. 그 외에 다른 종목에서도 전부 우승하였다. 네로를 이기면 사형 판결을 받기 때문에 선수들은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리스에서 열렬히 환영(?)받던 네로가 로마에서 자신의 시 낭송회를 열자, 연예인 황제에게 좌절한 시민들의 반응이 환장환상적이었다고 한다.[15]

나름 시인이자 아티스트, 체육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어보려고 노력은 참 많이 했지만 당시 로마인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데, 명색이 황제란 인간이 정무는 안 돌보고 그리스에 가서 놀고 앉아있으니 실력 여하를 떠나서 좋은 소리가 나올 턱이 없다.[16]로마인들은 예술가 황제를 원한게 아니라 나라를 잘 돌보는 황제를 원했다. 다만 네로 사후에 그야말로 나라를 말아먹는 막장군주들이 속출한 덕분에 오히려 네로 치하를 그리워했다 한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지만 결국 그리스 문화도 '외국' 문화였기 때문에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많았다. 특히 동성애의 경우, 로마인들은 그리스 식의 소아동성애가 장차 로마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을 나약하게 만들고 여성화시킨다고 생각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17] 예로 대 카토는 미소년 시종논밭이나 도자기보다 더 값나간다는 사실에 로마는 망할 거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네로가 예술에 빠져 지내자 네로는 여자라고 험담을 했으며[18] 네로의 스승인 세네카도 이런 네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만 로마의 예술 발전에는 매우 큰 공헌을 했다. 네로의 예술 활동은, 동양의 경우로 따지면 정무는 안 돌보고 황궁에 틀어박혀 도적 패거리가 깽판을 치든 말든 돌 감상에 시간을 허비한 북송의 황제에 비교할 수 있겠다. 물론 통치는 그들보단 훨씬 잘했지만.

그렇게 취미활동을 즐기긴 했지만 네로가 정무에 그렇게 무신경한 것은 아니어서 네로 통치하의 로마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다. 특히 외교적인 면에서 네로는 그 이전 누구도 하지 못했던 획기적인 업적을 남기는데, 파르티아 방면으로 파견한 장군 코르불로의 중재를 통해 한동안 파르티아와의 평화를 얻어낸 것이다.

당시 파르티아의 황제였던 볼로가세스는 원래 측실 소생이라 황제가 될 자격이 없었으나 정실 소생이었던 동생 티리다테스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고 장자상속의 원칙을 내세우며 형에게 양보한 덕분에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동생의 의리에 감복한 형은 파르티아 정실왕자에게 어울리는 번듯한 자리를 만들어 주는 걸로 보답하려 했고 국내의 반대파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도 겸해서 파르티아의 최고제사장 자리와 더불어 이웃나라이자 로마가 대두되기 이전에는 속국이었던 아르메니아 왕위를 주려고 하고 있었다.

이때 아르메니아의 관할 문제를 두고 파르티아와 로마가 전쟁중이었는데 네로가 개입하여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대관식을 로마에서 치르게 함으로써 로마와 파르티아 양국의 자존심을 모두 살렸다. 이 때 티리다테스는 비슷한 나이대였던 덕분인지 네로와 상당히 친해졌는데, 아르메니아로 돌아간 후 수도 명칭을 네로의 도시라는 의미의 '네로폴리스'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축제를 매년 열었다. 심지어 네로가 죽은 후에도 이 축제를 계속할 수 있도록 "네로 황제가 국가반역죄다 어쩐다 한 모양인데 우리한테는 은인이니까 계속 축제 열어도 괜찮겠음?" 하고 로마에 허가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것으로 로마의 동방 국경이 안정되었다. 문제는 정작 네로 본인은 이걸로도 까였고 덕분에 한동안 내전이 벌어졌다는 것(...). 이후 파르티아와 다시 전쟁을 하는것은 트라야누스인데 트라야누스의 출정은 파르티아가 쳐들어와서 한 게 아니라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네로의 정책을 파기하고 출정한 그냥 정복 전쟁[19]이다. 즉 협정을 깬 건 로마였다.

3. 로마 대화재

네로의 몰락은 엉뚱하게도 정무 수행에서가 아닌 다른 데서 촉발되었다. 우선 로마의 대화재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로마 시의 대화재는 지금까지의 역사에도 유래가 없을 정도의 규모로, 무려 5일에 걸쳐 불이 타올랐으며 로마의 14개 구 중 4개 구를 뺀 나머지가 탔다고 한다. 10개 구 중에서도 3개 구는 완전히 불에 타 소실되었고 나머지 7개 구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이때 로마인들 사이에서 네로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는 네로의 그리스 애호 취향을 섞어 그럴 듯하게 각색한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 그리스 문화 중 호메로스일리아드, 오딧세이가 유명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의 하이라이트인 트로이가 파괴되고 불타는 장면을 네로가 일부러 연출하기 위해 로마를 불질렀다는 이야기였다. 이 소문은 나중에 네로가 로마를 불사른 다음 궁중의 높은 누각에 올라가 리라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까지 부풀어서 전해지게 되었다. Nero Burning Rome 그 자리에 엉뚱한 걸 세우니까 이런 말을 들은 거다

하지만 이러한 루머와는 달리, 실제로 네로는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네로는 로마가 아니라 80km나 떨어진 해안 도시 안티움(오늘날의 안치오)에 있었으며 대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불타는 로마로 혼자 전차를 몰고 달려가 현장에 직접 나서 화재 진압을 전두지휘하였다. 심지어 그러던 중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있게 되었을 때 '네로 방화 주범설'에 분노한 한 시민의 습격을 받았으나 의연하게 자신의 떳떳함을 밝혀 오해를 풀기도 하였다. 로마 대화재 이후, 건축 자재로 가연성 재료를 쓰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든 것 역시 네로다. 또한 도시를 복구할 때도 민심을 잘 추슬렀는데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난민들을 지원한 데다 궁전을 개방하여 재산을 손실한 시민들의 피난처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대화재를 네로가 직접 냈다면 네로의 정치적 생명은 그야말로 끝장나는 거다. 네로는 그런 일로 정치적 생명을 말아먹을 멍청이는 아니다.[20]

그러나 많은 증거와 상황이, 네로가 화재와 무관함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네로가 범인이었고 직접 불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네로의 명을 받은 노예들이 불을 질렀다는 식으로 낭설이 계속해서 퍼졌다. 이는 훗날까지 전해져 폴란드 작가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쿠오 바디스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네로는 이러한 소문에 매우 질색하였으며 이를 일소하기 위해 기독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죄를 뒤집어 씌우기도 하였다. 당시 로마는 나라의 행사에 불참하고 군대에도 불참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대화재와 같은 국가적 재난 때 시민들이 신전에 가서 울부짖을 때도 기독교인들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시민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네로는 이를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방화를 한 주범이라고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기 시작한다.

단, 네로가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도를 사자들의 밥으로 주는 등의 방식으로 처형했다는 얘기가 매우 유명한데, 네로는 콜로세움에서 단 한 명의 기독교도도 죽일 수 없었다. 왜냐면 콜로세움은 네로 사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네로의 거대한 동상(콜로수스) 자리에 지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이 있을 정도.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씨족명) 원형 경기장이다. 아마도 이 설은 네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원망+쿠오 바디스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또한 '로마'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콜로세움을 떠올릴 만큼 콜로세움 자체가 유명하기 때문이고.

대신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독교도에게 짐승의 가죽을 덮어 씌운 다음 사냥개를 풀어 물어 죽이게 했다고 한다.

4. 몰락

대화재 이후 네로의 로마 재건 정책은 시민들의 혹평을 사게 되었다. 네로는 불에 타 소실된 넓은 지역에 네로를 위한 궁전[21][22]을 짓기로 하였는데 이를 전의 대화재 사건 의혹이 가득찬 와중에 그 자리에다… 어? 혹시 자기 집 지으려고 우리집 다 태운뒤 연극하고 있는거 아니야? 라고 생각해도 별수없다 로마 시민들의 거처를 빼앗는 짓이라고 생각한 원로원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그의 양부인 클라우디우스의 신전터도 궁전 건설 계획 부지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대공사를 위한 비용은?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속주들도 털렸으며 심지어 신전까지 털렸다. 네로의 인기는 추락하기 시작하였고 그 때문인지 일 년만에 그의 스승인 세네카까지 가담한 네로의 암살 계획이 발각된다. 세네카는 자살을 명령받고 생을 마친다.[23]

그 뒤 네로는 유태인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유대 지방은 시리아 총독이었던 파르티아 전쟁의 영웅 코르불로의 관할하에 있었는데 네로는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코르불로 휘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내리고 코르불로를 자신이 머물던 그리스에 소환한다. 영문도 모른 채 달려온 코르불로에게 '내란 주모 혐의로' 자살할 것을 명령하였고 코르불로는 죽었다. 당시 로마 병사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코르불로[24]가 황제에게 처형된 것에 경악하고 분개하는 장병이 많았다. 결국 젊은 장교들이 황제 암살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또한 근위군에 의한 암살시도도 있었다.

코르불로 사후 일 년 뒤에 갈리아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딕스가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스페인 총독이었던 갈바를 반란에 가담시켰으며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네로는 게르마니아 고지 사령관이었던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에게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루푸스는 빈딕스와 결전을 벌여 빈딕스를 격파하고 빈딕스는 자결한다. 하지만 네로를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던 로마 군대는 루푸스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요청하였고 루푸스는 이를 거절한다. 이렇듯 루푸스의 진압군마저 네로를 따를 마음이 없음을 보여주자 스페인 총독 갈바는 마음껏 황제를 칭하면서 원로원을 압박했다. 병사들의 마음이 이미 네로를 떠나 갈바 쪽으로 기운 것을 본 원로원은 마침내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하고 이 때 네로의 근위대장도 갈바 쪽으로 붙게 된다.

이렇게 되자 네로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다음날 아침 궁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음을 발견한 네로는 배를 타고 파르티아로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선장들의 거절로 인해 이를 실현하지 못한다. 그 뒤 네로는 직접 로마 포룸으로 나아가 로마 시민들에게 연설하여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포룸으로 가는 도중 민중에게 맞아 죽을 것을 겁내어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마침내 네로는 자신의 노예의 집으로 달아나 숨게 되는데 이때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였음을 알게 된다. 뒤이어 '원로원이 자신을 채찍질로 처형할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 듣고 공포에 질려 있다가[25] 원로원으로부터 파견된 전령의 말발굽 소리를 듣자 칼로 자기 머리를 찌르는 방식으로 목숨을 끊는다. Qualis Artifex Pereo

그래도 그에 대한 시민과 군인의 원한이 그리 깊지는 않았는지 죽은 뒤 별 험한 꼴 당하지 않고 정중히 화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석관에 안치되어 자기 조상들의 묘역 인근에 매장되었으며, 나중에 밝혀진 네로의 무덤에서 그의 석관이 발견되었다.

5. 평가

여러 막장스러운 사건을 제법 남겨서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로마 말기의 막장 황제들에 비할 만큼 끔찍한 막장은 아니었다. 네로의 통치는 몇가지 커다란 삽질도 했다지만 비교적 온건했으며 역대 폭군들처럼 나라를 말아먹지는 않았다. 물론 나라를 말아먹기 전에 쫓겨난 덕분이기는 하다. 여러가지 실책 을 저지르긴 했지만 로마 대화재 이후 소방법을 개정하는 등 잘한 일이 없지는 않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폭군이라고 보기엔 어폐가 있는 인물. 공도 많고 과도 많은 인물이었으나, 변덕이 심하고 즉흥적인 성격이라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에는 확실히 걸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노래 부르며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음유시인의 인생을 걷는 것, 오늘날로 치면 정치인보다는 연예인에 더 어울리는 남자였는데, 본인 스스로도 황제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심정을 털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로마의 막장황제 = 네로'라는 공식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대화재 직후 자신이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기독교도를 범인으로 몰고 박해하였기 때문이다. 이게 원인이 되어 훗날 전유럽이 기독교화되고 난 후 기독교인들이 너도나도 네로를 로마에 불을 지른 사악한 폭군으로 묘사하게 된 것이다.[26] 물론 굳이 기독교 때문이 아니더라도 수에토니우스나 디오 카시우스 등의 역사가들에게도 많이 까였다. 제국의 황제임에도 수염을 깎지 않은 채 노래나 시, 연극 등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고, 로마에서는 그리 좋은 취향이 아니었던 동성애적인 행사를 공개적으로 하는 등 "문란"했기 때문. 게다가 툭하면 로마가 아름답지 못하다며 다 때려부수고 새로 건축해야겠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이러한 평소의 언동 때문에 로마 대화재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크게 이미지를 깎아먹었다. 아직 로마인들이 진짜 폭군들의 뜨거운 맛을 보지 못한 시절이기도 했고

네로는 자신의 사치를 감당하기 위해 로마의 속주를 세금으로 쥐어짰다. 당시 로마의 재정 수입방식이 잘못된 점 중 하나가 있는데 소득세가 없었다보니[27] 고스란히 속주세로 메워야 했다. 이때 네로의 선물비용만 20억 세스테르테스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는 연간 군사비의 몇 배에 해당하는 액수였다고 한다. 그만큼 속주는 막대한 세금을 내야했고, 심지어 속주 왕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일도 발생하여 불만이 고조되었다. 60년의 브리타니아 켈트부디카 여왕의 거병이나 66~70년에 이스라엘에서 대대적인 민란이 일어난 원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는 재미있는 이벤트를 자주 만들어냈고 황제로서 선정을 펼치려고 노력했으며, 개인으로서는 호감가는 젊은이였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았다. 그 최후가 매우 비참했던데다 네로 사후 내전기를 거치며 자격 미달인 후대 황제들의 행태에 질린 근위대와 시민들이 네로 탄핵을 후회했다고 한다. 덕분에 네로의 무덤에는 꽃이 끊이질 않았다고. 대부분은 네로의 유모나 애첩인 아크테가 바친 것이지만, 의외로 일반 시민들이 바친 것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네로에게 완전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필요이상으로 악마화되기는 했지만, 그가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각을 선보이며 온갖 횡포를 저질렀던 것도 분명 사실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어머니인 아그리파를 살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이후로 맛이 가버렸는지 포파이아와 혼인하기 위해 원래 부인이었던 옥타비아마저 살해하였다. 그렇게 해서 포파이아와 혼인하여 슬하에 딸 하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포파이아를 발로 차서 죽여버리는 등 이해하지 못할 근친살해 행각을 이어나갔다.

또한 화재로 인하여 심각하게 훼손된 로마시를 재건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한 점은 충분히 이해할만 하지만,[28] 자신의 "예술가적인 면"(?)을 충족시키기 위해 로마시를 전체를 더욱 화려하게 개조하는 과정에서 필요이상의 무자비한 수탈을 일삼았던 것은 그의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정치 스타일도 점차 변해서, 처음에는 나름 신중했던 성격이 가면 갈수록 광포해졌으며 앞서 언급하였듯이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무절제한 사치 행각이 날로 극심해졌다. 이는 속주의 이탈과 반란, 그리고 원로원과 상류층의 반감을 유발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네로 사후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무질서를 잉태하여 로마 제국을 한동안 내전에 시달리도록 하였다.

한편 네로는 주로 상류층을 상대로 재산 몰수를 감행했기 때문에, 그의 수탈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던 로마 민중들은 네로 자체에 대한 악감정은 그리 강하지 않은 상태였다. 네로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속주와 원로원의 반역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이를 살릴만한 정치적 역량은 없었다. 애당초 그에게 그만한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다면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리도 만무했겠지만 말이다. 실제 폭군이었는지 프로파간다 였는지 현재는 확신할수 없다고 해도 후대에 평가가 나빠진건 사실이었는지 현재 콜로세움터에는 네로 황제의 청동상과 인공호수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굳이 지반이 불안정한 호수를 매꿔가면서 까지 네로 황제의 흔적을 없애려고 한것을 보면 굉장한 집념이 느껴질 정도다.

6. 기타

  •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 전설에 따르면 네로가 어린시절 암살 시도가 있었었는데 이때 암살자들이 뱀허물을 보고 뱀으로 착각해서 목숨을 건졌고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이 뱀 허물을 황금 팔찌로 만들어 네로가 착용하고 다니도록 시켰는데 훗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팔찌를 버렸으며 얼마 뒤에 그가 몰락했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출처:수에토니우스, 12명의 카이사르, 네로 편 6장)
  • 예술에 탐닉했지만 정작 그의 능력은 함량미달이였다는게 중론이다. 자기는 노래를 잘 불렀다 생각했지만 심각한 음치였다. 그래서 네로는 노래를 어떻게든 잘 부르기위해 목에 안좋다는 음식도 가려먹고 복근도 단련하는등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결과가 영 시원찮자 박수부대를 조직해 거금을 쥐어주며 공연마다 따라다니며 억지호응을 유도해 바람을 잡았고, 공연장 문을 잠가 청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노래를 듣게 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한편 베스파시아누스는 젊었을적 네로의 시를 듣다가 조는 바람에(!) 네로의 노여움을 산적이 있다.다행히 그 자리에 있던 네로의 총신 페트로니우스의 비호로 유배되는 선에서 끝났다.
  • 네로의 아내인 포파이아 사비나는 목욕을 위해 당나귀를 500마리나 길렀으며 본인의 피부 관리를 위해서 아침과 저녁에 당나귀 젖으로 목욕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 500명의 노예를 두었고 여행을 떠날 때도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

7. 대중매체

  • 게임 Ryse: Son of Rome에서는 네로가 죽지 않고 늙고 연로할 때까지 통치하고 있었다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게임상 설정으로는 네로가 두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그들의 이름이 '콤모두스'와 '바실리우스'다(...). 콤모두스는 네로처럼 로마사에서 못난 황제로 악평이 높고, 네로는 파르티아와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한편 대화재 진압과 전후 복구사업을 몸소 지휘하는 등 그나마 실드를 쳐줄 수 있는 구석이 군데군데 있지만 이쪽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바실리우스[29]는 원래 왕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를 부르는 칭호가 되었다.


  1. [1] 양자 입적 후
  2. [2] 그래봐야 '기질'이 강했을 뿐, '재능'은 별로 없었다.(..)
  3. [3] 여담으로 아헤노바르부스 가의 인물들에 대해 당시 로마 역사가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평가가 하나같이 좋지 못하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 등은 아헤노바르부스 가에서 그나마 나은 인물이 후술할 네로의 증조부이자 해군 제독이었던 그나이우스라고 기록했다. 네로의 조부와 아버지 그나이우스만 해도 뇌물을 굉장히 밝혔으며 검투사 경기에 열광하여 푹 빠져 재산을 낭비했다고 한다. 성격은 더 심하여 탐욕적이고 상스러웠다고 여러 역사가들이 전한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에는 한계가 있는 게, 당시 역사가들 중에 네로를 좋게 본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선대 조상들도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었던 것이다.
  4. [4] 네로와 동명이인이다. 서양에서는 꽤나 흔한 일.
  5. [5] 로마의 유명한 학자 대 카토(Cato the elder)의 증손녀이자 소 카토(Cato the younger)의 누이이다.
  6. [6] 해군 제독이었으며, 악티움 해전 당시 안토니우스의 진영에 서서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는데, 연이은 패전과 전쟁은 뒷전이고 클레오파트라에 빠진 안토니우스의 행실에 불만을 품고 그를 배신하여 진영을 이탈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로 향했으나 곧 열병에 걸려 죽음을 맞는다.
  7. [7] 게르마니쿠스는 기원전 15년 생, 클라우디우스는 기원전 10년 생, 그나이우스는 기원전 2년 생이다.
  8. [8] 전술한 대로 권력과 황제 가문과의 가까운 혈연 관계만 믿고 막장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모욕과 폭행은 예사였고 거액 사기 및 국고 횡령의 명수였으며 도박과 전차경주, 검투사 경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여자 관계가 매우 더러웠는데 그의 누이와 근친 혐의까지 받을 정도였다. 여러모로 칼리굴라와 행실이 닮았다.
  9. [9] 사실 안토니우스를 통해서 네로와 칼리굴라는 6촌 형제가 된다. 칼리굴라의 할머니가 소 안토니아이고, 네로의 할머니는 대 안토니아이기 때문.
  10. [10] 브리타니쿠스의 누이
  11. [11] 소설 쿠오바디스에서 주인공 중 하나인 비니키우스의 외삼촌으로 나온다. 서양사에서는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로 알려져 있으며, 소설 판본에 따라서는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간단하게 페트로니우스라고 잘 알려있다.
  12. [12] 우아함을 관장하는 장관 혹은 우아함의 심판자라는 뜻을 가진다.
  13. [13] 즉 취향과 관련된 문제가 생겼을 때, 페트로니우스의 결정이 바로 법적 효력을 지닌다는 의미다.
  14. [14] 10두라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는 4두마차로 하여간 반칙.
  15. [15] 시민들은 매우 끔찍한 시를 들으면서 강제로 환호와 박수를 보내야 하는데 싫은 티라도 냈다간 목숨이 위험했다고 한다. 다만 어느 재치 있는 시민 3명은 훌륭하게 시 낭송회에서 빠져 나갈 수 있었다. 한 명이 갑작스레 쓰러진 척을 하자 다른 두명은 쓰러진 사람의 머리와 다리를 잡고 들어올려 시 낭송회를 빠져 나갔다.
  16. [16] 콤모두스의 경우 네로와 달리 진짜 검투사로서 실력이 매우 출중한 인물해서 뛰어난 쇼를 많이 보여줬는데도 놀고만 있다고 욕을 먹었다. (물론 콤모두스는 네로보다 더한 막장 군주다) 애초에 이들은 검투사나 예술가가 아닌 황제다. 아무리 예술이니 스포츠니 신경 써도 정치를 못하면 군주로서 실격이다.
  17. [17] 5현제라고 칭해지고 동시대의 사람들도 황금시대 라고 말하던 트라야누스도 미소년에 대한 동성애에 대한 스캔들 논란이 있다. 물론 이건 거의 무시되는 수준이다. 다만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대놓고 안티노우스를 사랑하기도 했다.
  18. [18]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로마 남자들에게 가장 큰 불명예는 남자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19. [19] 이사람은 네로의 정책뿐 아니라 도미티아누스의 협정도 깨버리고 다키아 전쟁을 일으켰던 사람이다.
  20. [20] 이때의 화재진압과 시민들을 위한 여러 대처는 네로에 대해 혹평을 했던 동시대의 최고의 역사가조차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1. [21]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황금저택(黃金邸宅)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22. [22] 실제로는 이름만 이렇고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될 수 있는 공원과 같은 구조로 지으려 했다는 가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도 대체 왜 도무스 라는 이름을 썼냐는 비난을 한다. 도무스가 사저를 뜻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23. [23] 다만 세네카가 정말로 네로 암살에 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24. [24] 그의 인기는 사후에도 식을 줄 몰라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코르불로의 딸을 아내로 삼을 정도였다
  25. [25] 당시 로마에서 쓰던 형벌용 채찍은 보통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당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기분에 따라 훨씬 가닥 수가 많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채찍은 땋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쇠 구슬, 날카로운 뼛조각, 쇳조각, 가시 등의 치명적인 흉기 등이 박혀 있었으며, 거기다가 이 가죽을 하룻동안 물에 담가 불려놓아 무게를 무겁게 만든다. 이를 맞게 된다면 이 드는 것은 기본이고 상처난 곳이 벌어지고, 살이 찢겨져 나갔다. 이런 채찍질은 단순히 몇 대 맞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죽음의 문턱에 도달할 정도로 혹독하게, 어깨에서 시작하여 등, 팔, 가슴, 복부,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정강이까지 전신을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이렇게 얻어 맞으면 사형수는 피부 밑의 골격 근육까지 찢어져서, 살은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된다. 3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을 인용하면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뼈, 그리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한다.
  26. [26] 무고한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워서 학살했는데 폭군이 아니라는 서술들은 무리가 많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을 가진 술자들이 많은 탓으로 보인다.
  27. [27] 아예 없었던 것 은 아니고 소득세 개념 의 세금이 존재 하기는 했으나 그리 큰액수 도 아니었고(세율 1%)그보다도 군 장병들 의 급여용 으로 책정된 목적세 였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28. [28] 당시 로마는 14개 구역 중 10곳이 대화재로 소실된 상태였기에,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29. [29] 라틴어식 발음으로, 그리스어식으로는 '바실레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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