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

역대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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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제4공화국

이승만
정부

허정
과도정부

장면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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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5.16 군정

박정희
정부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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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12.12 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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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노태우 정부 盧泰愚 政府

대선 : 1987.12.16

임기 : 1988.02.25 ~ 1993.02.24

1. 개요
2. 국정지표
3. 외교/국방
4. 정치/사회
5. 경제
6. 비판/논란
7. 주요 사건

1. 개요

[1]

제1 또는 0.5 민주정권

노태우 정부는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이 이끌었던 정부이다. 제6공화국 최초의 정부로 1988년 2월 25일 출범해 1993년 2월 24일까지 5년간 존속하였다. 이후 김영삼 정부 때 정부의 명칭을 '문민 정부'로 지칭하면서, '제6공화국(약칭 6공)'은 좁은 의미로는 노태우 정부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노태우 정부는 '형식적인' 민주주의 정부의 시발점인 정부이기도 하다.[2]

80년대 자체였던 제5공화국과 90년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문민정부 사이에 끼어 별다른 언급이 없는 시기기도 하다. 특징이 확 돋보이는 전후 시대와 비교해 딱히 눈에 띄는 시대상이 없기도 하고[3]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좀 더 멀리 가자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어진 독재 정권과 군사 정권을 종식시키고 국민에 의해 뽑힌 민주정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표현 할 수 있겠다. 윗단의 '형식적인 민주정부' 라고 적혀있듯이 이 시대는 일단 대통령부터 신군부 출신에 12.12 쿠데타의 주역이었고 상당수의 군 출신 인사들과 군 자체의 입김이 강했기에 완벽한 민간주도 민주정부라고 하기엔 어렵다.

2. 국정지표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자"

  • 민족자존
  • 민주화합
  • 균형발전
  • 통일번영

3. 외교/국방

외치 부문에서는 공이 과를 앞섰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냉전체제 설립 이후 최초로 서방국과 공산국가 모두 참여하여 외교적 의미가 컸다. 1990년부터 공산권 붕괴가 가시화되자 기민하게 동구권과 소련, 중국 등과 수교를 추진하여 국제적 입지를 크게 넓힌 소위 '북방 정책'[4]은 노태우 정부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1991년 대선 공약이었던 전시작전통제권 회수를 추진하여 김영삼정부 때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였다. 남북 고위급 회담을 통한 조율로 남북한의 국제연합 동시 가입을 성취한 것 역시 큰 성과.

4. 정치/사회

취임 초기부터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여/야 내부에서 5공 청산과 관련하여 압박을 받았다. 여기에 노태우 본인이 전두환과 5공을 수립한 핵심 측근이었다는 전력이 일종의 원죄로 작용하여, 집권 내내 지지도가 부족했던 노태우 정부는 대통령 주도의 힘있는 정책 드라이브를 펼 수 없었고 대통령의 권한도 이전보다는 많이 약해졌으며 대신 치안에 공을 들여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여 내부적인 치안유지를 꾀하였다.

그러나 1989년에 판세를 반전시킬 목적으로 공안 정국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세를 역전시키려 했고, 당시 재보궐 선거에서의 참패로 궁지에 물려있던 김영삼민정당과의 차별화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김종필3당 합당을 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개혁 정책이 크게 후퇴한 데다가 당내 계파갈등과 연이은 날치기로 지지율은 낮았으며, 1991년에 낙동강 페눌사건이 터지고 수서 비리 등 부정부패 사건도 속출하다가 높은 물가상승률이 여전히 문제가 되어 1991년 광역의원 선거에서 민자당이 대패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5]과 정원식 총리 계란 투척 사건으로 세를 역전시켰고, 투표율도 58%로 낮게 나오면서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공천 과정에서의 내분이 벌어지고 각종 공작이 들통나며 1992년 총선에서 민자당은 149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며 급속히 레임덕에 빠졌고, 이때를 기점으로 김영삼에게 실권을 넘기게 되었다.

언론자유화를 통하여 보도지침으로 대표되는 언론 통제를 약화시켜 비교적 자유로운 언론 보도가 허용되었고, 언기법을 폐지해 1도1지제를 폐지하고 언론사 설립요건을 완화시켜 언론사 수가 늘었으며, 각 언론사에 노조가 설립된 것도 노태우 정부 때였다. 언론 자유는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이에 미국 프리덤하우스가 1990년에 "언론 자유국" 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3당 합당 직후에 서영훈 사장에게 압력을 가해 퇴진시키고 서기원 사장을 임명시킴으로써 KBS를 다시 친정부적인 성향의 언론으로 만든 일이나 우리가 남이가 사건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등에서 보이듯 공작 정치가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으며 메이저 언론의 '자발적'(...) 편향성도 여전하여,[6] 실질적으로 민주화 사회에 걸맞는 정치 지형이 갖춰졌다고는 보기 어렵다.

정치공학 측면에서는 3당 합당이 이뤄지며 민주자유당이 거대 여당으로 재탄생하여 민주당계 정당들과의 양당 경합 체제가 자리잡았다.

5. 경제

노태우 정권하에서 연평균 8.5%라는 고속성장을 누렸고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는 발전한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경제호황에 따라 웬만큼 산다하는 중산층 정도면 자가용 1대 정도는 보유하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매년 자동차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그로 인해서 주요 대도시 지역에서의 주차난 문제나[7], 귀향길 고속도로 정체문제가 본격화되었을 때이기도 하며, 해외여행도 이때부터 대중화되었다. 다만 경제성장률이 높았던 것과는 별개로 경제성장 폭이 일정하지는 않아서 1989년에 3저 호황이 종료되면서 성장률이 6.9%대로 떨어지기도 했고, 1992년도에 성장률이 6%대로 떨어지는 악재도 있었다.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이라는 말 자체가 바로 노태우 정부 당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지만 문제점이 없는건 아니라서 주택값 폭등문제와 급속한 물가상승같은 문제점이 있었으며, 부동산 상승은 3저 호황이 1987년도부터 시작되었는데 1992년도를 기점으로 1기 신도시 아파트가 대량으로 공급되며 부동산 가격이 하락세에 접어들기 이전까지 연 20%대의 상승률을 기록했으며 물가상승률 또한 서울 올림픽 이후로 크게 올라가서 연 평균 7%대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비록 연 평균 16% 가량의 임금상승률에 비하면 물가상승률이 낮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부동산 가격 상승과 그에 따른 전월세비 인상으로 인해서 체감 물가상승폭은 높았던 것이 문제였고(1987년부터 1990년까지 3저 호황과 임대차법 개정 등의 영향으로 전세비가 월 20%씩 폭등했으며 지역에 따라 전세값 상승률이 연 60%까지 달한 경우도 있었을 지경이다.)[8] 이러한 전월세비 상승으로 체감 경제성장률은 생각만큼 높지는 않아서 노태우 정부의 인기가 낮은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주식시장도 정권초기에 엄청난 활황세를 보였지만 1989년 4월 1일에 종합주가지수(코스피 지수)가 고점을 찍은 이후에 하락세를 보이자 여러번 부양책을 써보기는 했지만 결국엔 실패로 끝나고 1992년 6월에 바닥을 찍을때까지 종합주가지수가 하향세를 걸었기 때문에 주식투자자들에게 평가는 별로 좋지는 못했다. 실질주가가 고점에 비해 1/3 이하로 떨어진 셈이니 물론 주가상승률과 경제성장률이 꼭 일치하지 않기는 한다만

6. 비판/논란

7. 주요 사건

7.1. 1988년

7.2. 1989년

7.3. 1990년

7.4. 1991년

7.5. 1992년

7.6. 1993년


  1. [1] 그 유명한 3당 합당 선언이 이뤄졌을 때 찍힌 사진이고 감히 현 한국 정치판을 만든 사진 이라 할 수 있겠다. 여소야대 형국으로 고생하던 당시 여당이자 5공시절 생긴 노태우의 민정당과 박정희 시대부터 이어진 김종필의 공화당, 그리고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계열이 합당을 해 민주자유당 을 창당한다. 민주자유당은 이후 신한국당으로 시작해 한나라당 으로 개명하고 이어지다 2010년대에 새누리당 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2016년 이후 바른정당자유한국당 으로 갈라진다. 그리고 김영삼 계열이 빠져나간 민주세력은 김대중의 동교동 계열인 평화민주당이 주류를 차지했고 후에 새천년민주당, 대통합민주신당,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으로 내려오다 2016년 부로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 으로 나뉘어진다. 또 저때 3당합당을 반대하며 다 때려치고 나간 의원 하나가 있었고 이 사람은 김대중 쪽으로 가 자기 세력을 구축하고 대통령이 된 뒤 그 세력은 지금도 굳건히 내려와 2017년 5월경 문재인 정부를 성립하는데 이 사람의 이름은 노무현이다.
  2. [2] '실질적인' 민주주의 정부의 시작은 거의 일반적으로 김영삼의 문민 정부로 본다.
  3. [3] 이래서 인지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전임후임에 비해 언급이 별로 없는 편이다.
  4. [4] 서독동방 정책에서 이름과 콘셉트를 따 왔다.
  5. [5] 후에 조작으로 밝혀짐.
  6. [6] 실제로 명절 때만 되면 여당 정치인들과 정치부 기자들에게 명절선물로 용돈(...)을 주었다고 전해지며, 이를 토대로 메이저 언론에서 정부여당에게 유리한 보도를 하게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궁핍한 야당 정치인들에게도 일정 수준의 용돈을 주기도 했다고(...) 더군다나 3당 합당 이후로 술값과 택시비를 잘 쏘기로 유명한 김영삼이 민자당에 합류하면서 효과는 배가 되었다. 당시 정계와 언론계 사이에서 얘기가 노돌았던 김영삼 장학생 얘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여담이지만 당시 유력 대권주자였던 김대중을 비판하거나 마타도어하는 기사가 많이 나왔던 이유 중 하나가 기자들에게 한 턱 쏠 때 꼼꼼하게 계산하면서 술값과 차비를 내주는 습관때문이었다고 한다.(...) 뭐, 김대중의 측근 인사중 하나였던 박지원은 기자들에게 술값과 차비를 펑펑 싸주어서 대중적인 인기는 없어도 기자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말이다.
  7. [7] 물론 이때의 주차난에는 당시 전철망이 그리 잘 깔려있지 않고, 주차장 시설도 늘어나는 수요에 비해서 많이 부족하다 보니 수요분산이 덜 되었던 것도 있기는 했다. 1기 지하철 건설계획으로 서울에 4개 정도의 지하철망, 부산은 1개 정도의 지하철망이 깔려 있었기는 했지만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했기 때문
  8. [8] 덕택에 PD수첩 1회 주제도 집값과 전월세값 폭등으로 인한 자살행렬에 대해 다루웠다.
  9. [9] 라디오는 1월, TV는 12월에 이뤄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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