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

斷頭臺 / Guillotine

1. 개요
2. 목이 잘리면 어찌 되는가?
3. 왜 발명되었는가?
4. 해외로 수출된 단두대
6. 단두대에 처형당한 인물
7. 기타
8. 관련 문서

1. 개요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에서 발명된 사형기구. ,단 두 대 밖에 없는 것이 함정 참수형의 발전형으로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루이제트(louisette)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가 언젠가부터 기요틴으로 알려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두대(斷頭臺)라는 것은 그 용도를 통해 의역(意譯)하여 붙인 이름이고, 서양에서는 조제피냐스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박사의 이름을 따서 기요틴(Guillotine)으로 부른다. 그가 발명한 것은 아니고, 단두대를 보고 '그나마 인권이 보장되는 사형기구겠구나'라고 해서 이걸로 사형시켜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때의 주장은 같은 죄를 지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형벌을 받게 하자는 것이다. 참수형을 할 때 뇌물을 주고 안 주고에 따라 위력을 달리하는 관행이 있던 것을 생각하면[1] 단두대는 그런 관행이 거의 적용되기 힘들기 때문에 평등하다면 평등하다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본래 대학교 해부학 교수였기 때문에 인체를 어떻게 잘라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몸을 고정시킨 다음, 낙하하는 칼날[2]의 운동에너지를 이용해 목을 자르기 때문에, 별다른 기술과 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으며, 필요한 에너지는 칼날을 끌어올리기 위한 약간의 노동과 처형인을 틀에 고정시키는 정도의 수고뿐, 나머지는 간단한 물리법칙으로 끝난다. 작동은 순식간이기 때문에 고통이 없다고 하나, 이는 아직도 논란거리다.

2. 목이 잘리면 어찌 되는가?

당연히 죽기는 하지만, 목이 떨어졌을 때 바로 의식을 잃느냐 마느냐에 대한 연구자료가 한 가득 나오는데, 대부분 집행당하는 사람에게 잘린 다음 의식이 있으면 눈을 깜빡여 달라고 부탁(?)하는 등의 원시적 실험에 근거하기에, 신빙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의학계 소견으로는 약 10초 내에 뇌사하겠지만 일단 잘린 순간에는 피가 뇌에 남아 있고 천천히 흘러나오기 때문에, 수초 가량은 의식이 있을 수도 있다는 모호한 상태이다. 잔류 혈액으로, 산소가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뇌에 공급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밝힐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사실 목이 잘리는 게 자연스러운 상태는 아니기에 밝혀야 할 이유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긴 하다.

실험적인 방법으로, 1905년에 발표된 논문으로 '의사가 잘린 목에 대고 그의 이름을 불렀더니 잠시 눈을 뜨더라'라는 것이 있다. 이 역시 의식적으로 움직인 것인지 사후경련인지 밝히는 데는 역부족인 방법이라 지지받고 있지는 않다. 말해 보라는 것이 제일 확실하지만, 발성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폐와 목근육이 없으면 불가능하므로 잘린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자세히 설명해보면, 1905년, 보리오라는 의학박사에게 한 사형수의 처형 직후에 목을 조사할 기회가 주어진 적이 있었다. 당시 이 의사의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목은 절단된 경부(頸部)의 평면을 바닥으로 하여 직립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목을 세우기 위해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단두대에서 처형된 사나이의 눈썹과 입술은 5, 6초 동안 불규칙적으로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얼굴이 이완되고 눈이 반쯤 열리더니 백안(白眼)이 보였다. 큰소리로 상대 이름을 불러 보았다. 눈두덩이 조금씩 열렸으나, 수축되지 않았으며 — 이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 잠을 자거나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이 정신을 차렸을 때 흔히 볼 수 있듯이 조용하고 정확하게 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인(囚人)의 눈은 나를 응시하며 동공이 좁아졌으나, 죽은 자에게서 볼 수 있는, 표정 없는 흐릿한 눈은 아니었다.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살아있는 인간의 눈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은 점점 닫혔다. 다시 한 번 크게 이름을 불러보았다. 또 눈두덩이 뜨이며 나를 응시하다가 다시 감았다. 세 번째 불렀을 때는 반응이 없었다. 눈두덩을 펼쳐 보았더니 눈은 움직이지 않는 유리알과 같았다. 목이 잘린 지 약 30초 후였다.[3]

물론 동체에서 절단된 머리에 잠시 의식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건 현대의 의학전문가들의 의견은 일치되지 않는다. 다만 혈류가 아예 막힌 뇌가 1분 후, 늦어도 2분 후에 죽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때까지는 잘린 머리가 자신의 참상을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그리고 실험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4]

따라서 도시전설이고 뭐고 간에 이에 대한 정답은 죽은 사람만 알고 있기에 아직 아무도 모른다.

때문에 별별 희한한 괴담이 나오기도 했다. 잘린 머리가 움직이거나 말을 했다는 것부터 심지어는 잘린 몸통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문서에 나오듯 닭이라면 완전히 불가능은 아니다. 물론 닭이 아닌 사람은 불가능에 가깝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잘린 몸통이 일어나 몇 걸음 걸어가기까지 했다는, 영웅담일지 괴담일지 모를 호걸들에 대한 전승이 있긴 하다.[5] 하지만 몸이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고 말을 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발작 정도면 모를까 몸은 척수반응 정도를 제외하곤 뇌의 명령이 있어야만 움직인다. 또 목소리는 성대가 있어야 하니 잘려나간 머리가 말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다만 연쇄살인마 유영철의 증언에 따르면 머리없는 몸뚱아리가 달려들었다는 언급이 있는데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확인된 바 없다.

3. 왜 발명되었는가?

단두대에 얽힌 여러가지를 나타낸 카람볼라지(Karambolage) 영상. 참고로 카람볼라지는 쿠르츠게작트와 비슷한 상식 영상 시리즈다.

단두대는 역설적으로 사형수의 인권평등을 위해서 발명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범죄자의 인권과 처벌의 평등이 중요한 논쟁이 되었는데, 특히 그 중 논란이 된 것은 혁명 당시 '범죄자를 교수형에 처해야 하느냐, 아니면 참수형에 처해야 하느냐?' 였다.목졸려 죽을래, 목잘려 죽을래? 지금이라면 개소리로 들리겠지만, 이는 유럽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논쟁이었다. 크리스트교적 교리가 주를 이루는 서양에서 나무에 매달려 죽는 죽음(자살을 암시하기도 함), 즉 교수형은 평생 구원받음을 실패하고 지옥에 떨어졌다고 보는[6], 유교 사상과는 반대되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참수형을 교수형보다 좋게 치는 풍조가 생겼다. 그리고 대대로 숙련된 망나니 집안의 사형집행인이 집도하는 참수형은 나무에 매달려서 온갖 모욕이란 모욕은 다 받으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교수형이나 거기에 못으로 박히기까지하는 십자가형보다 더 나은, 교리상 천국을 갈 수 있기는 하는 처형방법으로 보던 가톨릭의 인식이 한 몫했다고 한다.[7] 이 중세를 거치며 그대로 이어져 "참수형은 귀함, 교수형은 천함"이라는 처형법의 전통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물론 '왜 범죄자를 끌어올리는 것이냐?', 혹은 '귀족을 인정하라는 거냐? 전원 교수에 처해 모두 평등하게 끌어내려야 한다!'는 반론도 있었다. 하지만 기요탱 박사 등이 범죄자에 대한 인도적이고 고통이 적은 처형을 주장했고 최종적으로는 모든 사형수에 대한 참수형이 결정되었는데, 이 참수형을 대체할 목적으로 발명된 게 바로 단두대다.

동양에서는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내 몸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함부로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상 때문에[8] 참수형이나 거열형 같은 신체를 분리하는 신체훼손형벌이 교수형이나 사약 같은 정적인 사형보다 더 잔인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현대에도 교수형 등으로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

기요틴 도입을 두고 프랑스 혁명 때문에 사형 수요가 많다거나 참수가 어렵기 때문에 도입되었다고 알려진 경우도 많은데, 이 논리는 도입목적이 아니라 단두대 도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논리였다. 위 논쟁이 "전부 참수"로 결정난 후에도 기요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도입 당시 시민들은 기요틴으로 처형하면 기존의 일반적인 참수형보다 덜 고통스럽다는 점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 이유는 유럽을 비롯한 많은 전근대 국가에서 사형집행은 참수든 교수든 마을 사람들에게 오랜 오락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사형을 구경하러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특히나 참수형이 진행되면 사람들은 사형수의 피와 기름 등을 가져가려고 노력했다. 참수형이 처형 방법이 된 것은 이 때문도 있었다. 그런데 참수형을 기요틴으로 바꾼다니까 불만이 심했던 것였다. 한 마디로 그 시절 사람들에게는 마치 현대에 연극이나 영화, 혹은 프로 스포츠를 중단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걸 설득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 당시 파리의 사형집행인들로, 이들은 소수의 사형집행인들로는 처형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시민들을 설득했고, 실제로도 참수형은 물리적으로는 고도의 전문 기술+전문 도구+집행 시간이 필요하고, 집행인이 직접 목숨을 빼앗아야 한다는[9] 점에서 사형집행인에게 정신적 고통을 동반하는 처형법이며, 당연히 집행비용과 실패할 확률이 높은 비효율적인 처형수단이었다.[10]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시민들도 납득하여 단두대의 도입이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단두대의 도입은 당시 시민들의 의식과 사형도구의 도입 명분의 합의가 이뤄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기요틴의 용도를 생각하면 매우 아이러니한 사실로 보이나, 그 당시에는 실제로 차륜형, 능지형, 기타 고문을 동반한 처형에서 단두대 참수형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역시 매우 급진적인 진보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단두대가 사용되었는데, 특히 자코뱅 집권기에 적극 이용되어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다만 시대 변화에 따라 이것조차 너무 잔인하다는 비판 여론이 늘게 되자 단두대를 이용한 공개처형은 독일 출신의 연쇄살인범 오이겐 바이트만(Eugen Weidmann)에게 집행한 1939년 이후 사라지게 되었다.[11] 단두대형은 이후 교도소 내의 처형장에서 비공개로 집행되었는데, 이것도 1977년에 강도와 강간, 살인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튀니지 출신 사형수 아미다 잔두비(Hamida Djandoubi)[12]의 사형 집행을 끝으로 1981년에 프랑스에서 사형제 자체가 폐지되며 단두대도 해체되거나 박물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4. 해외로 수출된 단두대

단두대 도입은 나름 인권과 관련되어 이뤄졌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당대 사회적 변화와 함께 급증하던 범죄와 엄벌 분위기가 결합해 사형을 최대한 신속하게, 대량으로 집행할 목적으로 프랑스 및 해외에 널리 보급된다. 전근대에서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인권 의식이 발달하자, 사형을 찬성하더라도 신속하고 고통이 적은 사형집행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와 여전히 남발되던 사형의 현실이 합쳐진 결과였다. 살인죄나 아동 성범죄 같은 중범죄가 아닌 다른 범죄에 대해서 사형이 적용되지 않게 된 건 유럽에서도 19세기 말 이후의 일이었다.

뮌헨에서 쓰던 독일식 단두대 팔바일(모형)

독일에도 도입되었고, 독일은 프랑스 이후로 단두대 사용을 가장 많이 한 국가가 되었다. 독일어로는 팔바일(Fallbeil-떨어지는 칼날)이라고 한다. 독일에서 원래 정치범에게는 주로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단두대형은 일반 흉악범에게 사용되었으나,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제3제국에서는 즉결재판으로 사형을 언도받은 정치범의 처형에도 엄청나게 많이 사용되었다. 유명한 반나치 비밀결사였던 하얀 장미의 단원들도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았고, 패전 후에도 사형이 폐지되는 1949년까지 중범죄자 처형에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나치의 경우 죽음의 공포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피형자를 엎드리게 하는 게 아닌 피형자가 칼날을 보도록 눕혀서 형을 집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쟁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연합군 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교도소로 사형수를 이송해 처형하는 것도 촉박하고 위험해지자, 아예 처형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단두대를 탑재한 밀폐 트럭에 사형수를 태워서 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물론 나치는 전쟁 초반에 국민들에게 '배신자의 말로는 이런 것이다'는 의미로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총살형이나 교수형 등으로 진행하는 공개처형도 자주 실시했고, 홀로코스트도 초반에는 아인자츠그루펜의 주도로 벌어진 바비야르 학살처럼 총살형 형식으로 자주 집행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자 군대에 공급할 탄약도 모자란 판에 왜 사형수에게 아까운 총알을 사용해야 하느냐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고, 교수형의 경우에도 처형 현장의 사진 촬영을 엄격히 금지했음에도 기념품 삼아 병사들이 몰래 찍어간다든가 빨치산이나 레지스탕스 비밀 요원들이 몰래 촬영해가 전쟁 범죄 폭로의 증거물로 사용하는 일이 잦아지자 이렇게 비공개적인 형 집행 위주로 노선을 바꾸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 나치 독일 때까지 단두대 처형을 전문적으로 도맡아 집행했던 처형 전문가로 요한 라이히하르트(Johann Reichhart,1893~1972)가 있었다. 라이히하르트는 자신이 처형한 3,165명의 이름과 처형 시기를 기록해 놓았는데, 처형된 죄수들 중 대부분(2,876명)은 1939~1945년 동안 나치가 2차대전을 일으키고 막장으로 치닫을 때 집행되었다. 이들 중에는 연쇄 살인범 등 흉악범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정치범이나 저항 세력 구성원들이었다. 하얀 장미 단원들의 처형도 라이히하르트가 집행하였고, 나치가 전쟁을 벌이며 유럽 각지를 점령하자 점령지역에서도 단두대를 트럭으로 싣고 다니면서 (주로 나치에 반항하다가 체포된 자들의)처형을 집행했다.

라이히하르트는 종전 직후 나치 부역 혐의로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 신분이 나치 당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은 교도관이 아니라 일종의 특수 면허를 갖고 아웃소싱된 외주업자였기 때문에 엄한 처벌이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얼마 후 비나치화(또는 탈나치화. Entnazifizierung) 재판을 받고 석방되었다. 다만 라이히하르트는 1933년부터 나치당 산하 자동차 군단, 보훈처, 공공 복지회, 노동 전선 등에 가입해 활동했고, 1937년에는 나치 당원으로 입당한 전력도 있었기 때문에 완전 무죄 방면은 아니었고 비나치화 심사 기준에 따라 4단계인 단순 가담자(Mitläufer)로 분류되었다.

석방된 뒤에도 라이히하르트는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상주하며 연합군 측 사형 집행관들을 도와 전범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사형수 156명의 교수형 집행에서 결박이나 발판 레버 조작 등을 담당했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피고인들의 처형에도 협력했다. 라이히하르트는 사형 집행 때마다 반드시 연미복, 흰 셔츠, 나비넥타이, 실크햇 세트로 갖춰진 전통적인 집행인 복장을 착용하고 등장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유명했다.

전후인 1946년에 만들어져 1949년까지 9번 쓰인 Rastatt 팔바일. 동독에서도 비슷한 것을 썼다.

종전 후 몇 년 동안에도 동서독 양측에서도 계속 사용되었는데, 서독에서는 군정기 프랑스 점령지에서 흉악범만 처형 전용으로 쓰였고 1949년 살인범 리하르트 슈흐(Richard Schuh)의 처형을 마지막으로 사형제 폐지[13]와 함께 사라졌다. 동독에서는 소리도 없고 좋다는 이유로 1965년까지 슈타지가 애용하였다. 물론 여기서도 대부분 살인범을 비롯한 흉악범들에게만 집행됐는데, 마지막으로 처형된 사람은 생체 실험 등 반인도적 행위를 저지른 죄로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은 아우슈비츠의 군의관이자 SS 단원 호르스트 피셔(Horst Fischer)였다. 동독 역시 이후 총살형으로 바꿨다가 1987년에 사형제를 폐지하며 단두대도 폐기되었다. 동독의 단두대형에 대해 큰형님 소련이 폐지 압력을 비선으로 계속 넣어 굴복하며 없앴다는 의혹도 있다.

1868년 11월 24일 이탈리아 통일주의자였던 Giuseppe Monti와 Gaetano Tognetti의 처형.[14]

교황령에서도 1816년부터 이걸 도입해서 썼다. 특히 '마스트로 티타'라고도 불렸던 사형 집행인 조반니 부가티(Giovanni Bugatti)가 이것의 대가로 명이 높았다. 훗날 마차텔로(Mazzatello)라는 형법과 병행되는데, 이 마차텔로라는 게 긴 나무망치로 죄수의 머리를 세게 쳐서 죽이는, 19세기에 존재하기엔 매우 야만적이고 효용도 안 좋은 정신 나간 형벌이었다. 심지어는 잘 죽지도 않아서, 나이프로 쓱싹쓱싹(…)하는 과정이 따로 필요했다고.[15] 때문에 이 단두대가 훨씬 더 많이 쓰였다. 마지막 처형은 1870년 7월 9일 Agatino Bellomo의 처형으로, 교황령에 이탈리아군이 입성하기 꼭 2일 전이었다.

겐트 Gravensteen 박물관의 단두대

벨기에에서는 겐트안트베르펜 등지에서 도입하여 쓰였다. 1798년 수입(?)한 이후 1856년까지 19번의 단두대 처형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처형된 사람은 안트베르펜의 살인범 프란시스 콜(Francis Kol)이었다. 룩셈부르크에도 도입되어 1821년까지 쓰였다.

아테네 범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리스식 단두대

그리스에도 도입되어 1834년부터 1913년까지 쓰였던 적이 있었다. 본토와 달리 날의 모양새가 커터칼의 날같이 생긴 날로 바뀌어 있다.

1924년 루체른 Altdorf의 단두대

스위스에서도 도입하였다. 참수검이 너무 잔혹하다고 폐지한 뒤 단두대를 들여온 것인데, 마지막 처형은 1940년에 살인범 한스 폴렌바이더(Hans Vollenweider)가 옵발덴에서 처형된 것이다. 참고로 스위스는 참수검을 마지막으로 처형에 사용했던 동네이기도 하다.

스톡홀름 Långholmen 교도소의 단두대

스웨덴에서는 딱 한번(…) 사용된 적이 있다. 1910년, 살인죄로 사형된 요한 알프레드 안데르손 안더(Johan Alfred Andersson Ander)라는 사람이 그 주인공이다. 스웨덴은 1866년부터 도끼 참수형을 주력으로 사용했는데[16], 근대화되는 유럽 속에서 도끼 참수형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프랑스에서 도입한 건데, 마침 딱 한번 사용하고 그해 스웨덴에서 사형제가 없어졌다.(…)[17] 참고로 이 안더라는 사람이 참 비범하기 짝이 없는 인물인데 사형 날 아침이 되자마자 동료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전혀 긴장하는 기색 없이, 마치 기쁘다는 듯이 "굿 모닝 에브리바디!"하고 외쳤다고 한다(…).

아시아에서도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사형 집행에 쓰였는데, 이후 베트남이 독립하게 되면서 북베트남에서는 단두대형 대신 총살형이 도입되었고, 현재의 베트남에서는 약물주사형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남베트남에서는 1975년 패망 당시까지 단두대형으로 사형을 집행했고 그 때 쓰였던 단두대가 아직까지 박물관에 남아있다. 이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아직 프랑스 제국주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할 때 주요 빌미거리가 되었다. 당장 맨 위에 있는 짤의 단두대부터가 옛 남베트남 교도소에서 쓰였던 단두대이다.

알제리에서도 알제리 전쟁 때 프랑스가 알제리 독립군을 처형하는 데 썼지만, 베트남과 달리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면서 바로 사라졌다.

중국에서는 판관 포청천에서 보듯이, 단두대 대신 커다란 작두로 죄인의 목을 자르는 것 같지만, 이는 드라마상에서 처형 장면을 얼버무려 생긴 착각이며, 작두는 실제로는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문서 참조. 역시 흔히 쓰인 편은 아니다.

의외로 북아메리카에서도 사용되었다. 1889년 생피에르 미클롱에서 한 살인범이 사형당했고 그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영화로 2000년 개봉한 '길로틴 트래지디(La Veuve de Saint-Pierre[18])'가 있다. 단, 프랑스 교도소가 있었던 마르티니크과들루프에서는 1965년까지 사용되었다. 누벨칼레도니에서도 1864년에서 1910년까지 적어도 74명이 처형당했다.

미국에서도 1996년 더그 테퍼(Doug Teper) 조지아 주지사가 전기의자를 이 물건으로 바꾸자는 계획을 제안했는데,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무산되었다.

5. 단두대의 발명자는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

조제피냐스 기요탱 박사(1738~1814)는 위에서 말했듯이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며 단두대에 사형을 당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기요탱은 귀족임에도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지 않았는데, 혁명의 시작인 '테니스 코트의 맹세' 당시에 삼부회 의원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직접 마련해주는 등 혁명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무사했다. 나폴레옹 정권 시절에도 고위직으로 잘 살다가 당시로선 장수한 76살까지 살다 갔다. 기요탱이 이 법안을 만들었다는 것부터가 그가 인권과 평등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임을 증명해준다.[19]

1861년에 쓰인 영국 소설 《필립의 모험》(윌리엄 M. 새커리 지음)에서도 기요탱은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대목이 나오는 걸로 보아 오래전부터 이런 설이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나 유럽에선 그가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소문이 워낙에 정설로 전해져서 불쾌해하던 기요탱 집안은 기요틴이란 이름을 바꿔달라고 소송을 제기했으나, 실패하면서 성을 아예 갈아버렸다고 한다.

사실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은 외과의사인 앙투안 루이(Antoine Louis, 1751~1825)이다. 처음에 불리던 단두대의 이름인 루이제트(louisette)는 바로 그의 이름을 따서 부르던 이름이다. 루이는 아이디어를 생각했고 다른 6명이나 되는 기술자들이 여러 번에 걸쳐 만들고 개량하여 완성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 독일인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루이를 비롯하여 7명 그 누구도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지 않고 다들 제 명대로 살다가 갔다.

또한 발명자가 쳄발로피아노를 만들던 악기장인인 토비아스 슈미트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슈미트는 발명자까지는 아니고 기요탱의 제안과 루이의 설계를 받아서 맨 처음 단두대의 원형 1호를 만든 제작자이다. 즉, 전술한 6명의 기술자 중 한 사람이며 최종적으로 루이가 슈미트의 도면을 채택하여 단두대의 원형 1호를 선보인 것이다.

단두대의 칼날 부분의 문제를 지적하는 루이 16세(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1989년 영화 <프랑스 혁명>의 한 장면이다)

단두대의 발명자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사실 이것 말고도 있다. 처음 개발된 단두대는 날이 반월 모앙이었는데, 기요탱 박사는 이것을 국왕의 측근들에게 보여주면서, 앞으로 힘 안 들이고 사형을 집행할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루이 16세가 직접 그 축소모델을 시찰하게 되었는데, 반월형 칼날을 보고 루이 16세는 "이렇게 반월형이면 중간에 목뼈가 걸려서 쉽게 안 죽을 뿐더러 처형했을 때 죄수가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약간 기울어진 칼날로 바꿔보면 어떤가?"라고 말했다. 이는 오랜 기간 열쇠와 자물쇠, 칼날 쪽으로 취미를 두고 있던 루이 16세의 전문가적 조언이었다. 쉽게 말해서 단두대의 최종 디자인 감수자는 루이 16세였던 것이다. 잘 알려진 소문인 '단두대의 발명자는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말의 주인공은 사실 루이 16세일 수도 있는 것. 물론 이에 대해서는 왕실 일화 또는 야사로 기록되었을 뿐 아직 공식적인 역사로 기록된 건 아니라는 말도 있다. 참 공교로운 일이지만 만약 사실이었다면 그나마 적은 고통 속에 죽었을 것이니 루이 16세 본인에게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반월형 칼날에 의해 처형당하는 것보다 좋은 일이 되었다.

기요탱 박사와는 반대로 공포정치를 하여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몰아넣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단두대에서 목이 나가버렸다. 대표적으로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조르주 당통의 예를 들 수가 있다. 혁명 당시 쟈코뱅 당을 이끌던 수장격인 로베스피에르는 개인적으로는 강직한 사람이었으나, 정작 정치하는 자리에서는 극단적이고 엄격한 정치를 펼쳤으며 귀족들은 물론이고 동료 정치인들까지도 반혁명분자로 의심된다면 모조리 단두대로 올려 처형시켰다. 결국은 테르미도르 반동 당시 재판에 회부되고 권총자살도 실패로 돌아가[20] 최종적으로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로베스피에르의 동료이자 공포정치 지지자 중 한명인 생 쥐스트는 '단두대의 천사'라고도 불렸을 정도로 냉혹했는데, 처음엔 국민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고 개념찬 발언을 하던 사람이 나중에 가서는 혁명에 방해만 된다면 누구든지 죽여야 한다며[21] 극단적인 흑백논리까지 내지르는 무개념 선동자로 흑화한다. 심지어 로베스피에르더러 우유부단하다면서 보다 열심히 사람들을 처형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는데, 그도 역시 로베스피에르와 같이 테르미도르 반동 때 자신이 그토록 애용했던 단두대로 공개처형당한다. 국민들을 선동하여 혁명을 이끌던 조르주 당통 역시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와 같이 활동했는데, 그 역시 공포정치의 극단적인 지지자이며 사람들을 잡아다 처형시키는 데 앞섰다. 그러나 당통은 뇌물수수 혐의와 반역혐의로 이들보다 먼저 단두대로 올랐고, 처형날 로베스피에르에게 "다음은 귀하의 차례다" 라는 예언격 유언을 남기고 단두대에 오르기도 했다.

결론은 단두대를 개발한 자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는 것은 근거없는 낭설이지만, 단두대를 앞장세운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당통 같은 권력자들이 결국 자신들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쳤다는 것은 후대에 남겨준 중요한 교훈이다.

여담으로 사형기구의 창시자 본인이 그 사형기구로 처형되었다는 이야기의 원조는 팔라리스의 황소다.

6. 단두대에 처형당한 인물

7. 기타

프랑스 혁명아이콘(?)이다 보니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거의 100% 등장한다. 길로틴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걸 소재로 한 보드 게임도 있을 정도.

그러던 와중에 프랑스 왕과 왕비가 이걸로 목이 베어진 게 소문나면서, 유럽 전역에서 장난감까지 나왔다는 것. 그것도 놀랍게도 진짜 칼날을 넣은 작은 단두대 미니어처였다. 이 정신 나간 물건은 인기리에 팔렸는데, 당시 아이들이 벌레를 잡아 이걸로 베어 죽이거나, 심지어 손가락을 넣고 놀다가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까지 벌어진 탓에, 반발도 커서 허겁지겁 제조 및 판매를 금지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아들에게 선물할 단두대 장난감을 사주려고 했더니 제조가 금지되어서 찾기 어렵자, 어머니에게 어찌 구할 수 있느냐는 편지를 보냈다가, 어머니에게 호되게 꾸짖는 편지를 받고 사과편지로 답장해야 했다고 한다.

단두대에 사용되는 날은 그 무게가 수십kg에 달하며 100kg가 넘는 것도 존재한다. 날을 이렇게 무겁게 하는 이유는 이게 사람이 내리쳐서 참수하는 게 아니라 중력의 힘을 빌어서 날이 낙하하면서 참수하는 것이기 때문인데 날이 너무 가벼우면 사형수의 경추뼈가 잘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두대의 날은 상당히 무겁다.

단두대는 크게 두 종류로 하나는 목만 집어넣는 단두대가 있고 다른 하나는 목과 손을 같이 넣는 단두대가 있다. 목만 잡어넣는 단두대는 받침대에 구멍이 하나만 있고 손도 같이 집어넣는 단두대는 받침대에 구멍이 3개 있다. 후자로 참수당하면 목만 아니라 손도 같이 잘린다. 아마 후자가 나온 이유는 사형수가 살고 싶어서 자꾸 단두대를 열고 단두대에서 목을 꺼내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Heads will roll"라는 어떤 실수로 여러 명이 잘리는 걸 뜻하는 영어 표현은 단두대 밑에 있는 바구니가 꽉 차서, 말 그대로 머리가 굴러다니는 장기자랑스런 상황에서 나왔다.

한국에서는 절박한 경기를 두고 단두대 매치라는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기동전사 V건담잔스칼 제국이 사용하는 형벌이다.[24] 애초에 광기에 미쳐 날뛰는 작품이긴 하지만 우주세기에...

캐리비안의 해적 5에서 잭 스패로우 사형 집행 도구로 등장한다. 집행관이 '넌 뭘로 죽을래? 교수형? 총살형? 아니면 신형 길로틴?'라고 선택지를 주자 잭이 '길로틴? 불어인가? 난 프랑스가 좋아, 마요네즈도 만들었잖아.' 라고 대답한 것. 결국 잭을 구하러 온 부하들이 발포한 대포알에 집행대가 무너지면서 잭은 단두대 자이로스윙을 체험하게 된다. 물론 현실에서 대영제국 정부는 단두대를 이용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전술한 카람볼라지 영상에서도 영국은 교수형 밧줄로 그들의 뚝심을 지켰다고 나온다. 고작해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치기 한참 전 잉글랜드의 기벳(Gibbet)이나 스코틀랜드의 메이든(Maiden)같은 원시적인 기구들이 몇 번 쓰이고 만 것이 전부이다. 물론 이 원시적인 기구들이 기요틴을 발명하는 데 참고용 토대가 되긴 했다.

Dies irae(게임)에서는 성유물의 하나로 등장한다. 단두대가 변이된 존재는 마리이며, 소유자는 후지이 렌.

한국의 PLAYERUNKNOWN'S BATTLEGROUNDS 아마추어 팀 이름이기도 하다. APL 파일럿, PSS 베타, PWM 파일럿 본선에 진출했었고, 팀 리빌딩 이후 ASUS의 네이밍 스폰싱을 받아 ASUS ROG Centurion으로 팀명 변경. 에란겔의 벙커 서쪽 ㅛ자 도로 가운데 푹 파인 지형을 프로들은 단두대 존이라고 부른다. 본래 방어에 적합한 지형으로 유명했는데 스크림에서 단두대가 자주 이용해서 단두대존이라는 명칭을 얻은 듯.

포켓몬스터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기술인 가위자르기의 영칭이기도하다. 일본판의 경우 가위 길로틴.

공포게임 Granny에서도 단두대가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목을 자르는 용도뿐만 아니라 과일을 자르는 용도로도 사용된다.

신을 죽이는 방법에선 신살자 제5석 리베르테의 신살기가 기요틴인데 단두대를 소환하여 공격한다.

8. 관련 문서


  1. [1] 목이 그렇게 쉽게 잘리지 않는다고 한다. 한 번에 잘리면 깔끔하게 죽겠지만 한 번에 못 자르면 두 번, 세 번, ⋯⋯, 여러 번 시도해야 했다. 당연히 이렇게 되면 사형수는 훨씬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이 때문에 실력있는 사형 집행인을 뇌물을 주면서까지 고용하기도 했다.
  2. [2] 약 4킬로그램짜리 칼날에 30킬로그램짜리 무게추(칼날 위의 쇳덩어리 부분)를 달았고, 약 4미터 높이에서 낙하시킨다.
  3. [3] 출처: Kershaw, Alister, 《Die Guillotine》 1959, S. 104.
  4. [4] 현대의 뇌파 측정 장치를 부착한 상태에서 참수를 한 후 베타파와 감마파를 측정해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윤리적, 법적인 이유로 실제로 행해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5. [5] 여기에 얽힌 괴담으로 어떤 해적 선장이 처형될 때의 이야기가 있다. 해적들이 잡혀서 전원 처형을 받는데 제일 먼저 단두대에 올라간 선장에게 죽기 전에 소원을 말하라 하니, 자신이 목이 잘리고 나서 달려간다면 자신이 지나친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한 다음, 목을 잘랐는데 몸통이 벌떡 일어나 몇 사람을 지나쳐 달려가다 쓰러졌고, 놀라워하며 정말로 지나간 사람들은 살려줬다는 이야기다. 물론 진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6. [6] 이미 이스카리옷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고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는 전승이 있으며, 구약의 율법에서는 나무에 달린 자(κρεμάσητε αὐτὸν ἐπὶ ξύλου)는 신에게 저주를 받은 자이므로 계속 매달아두어 땅이 저주를 받게 하지 말고 당일에 내려서 장사지내라는 규정이 있다.(신21:22~23)
  7. [7] 로마 제국에선 십자가형이 최악의 형벌이었다.
  8. [8] 유교문화권이 아닌 몽골의 경우에도 만물의 영혼은 그 피에 들어 있어서 땅에 피를 흘리면 대지로부터 저주를 받아 그 영혼은 하늘에 오를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칭기즈 칸과 대립하던 자무카가 잡혀온 자리에서 "원한은 잊고 다시 예전처럼 잘 지내보자"는 칭기즈 칸의 회유를 거절하고 사형을 요구하면서 "피를 흘리지 않는 죽음"을 청했고 칭기즈 칸이 이를 허락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땅에 피를 흘리게 되면 그 피냄새 때문에 맹수들이 꼬인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9. [9] 집행인도 엄연히 인간이므로 인간을 죽인다는 것 자체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현대에는 사형 집행인들의 죄책감을 줄이는 방법을 여럿 사용하고 있다. 총살형에 참석하는 집행 병사의 소총 중 실탄을 랜덤으로 지급하거나, 한국의 사형법에서도 교수형을 집행할 때 3명의 집행자가 하나만 진짜고 나머지는 가짜인 랜덤 버튼을 동시에 눌러야 바닥이 열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10. [10] 프랑스, 특히 파리의 사형집행인(대표적으로 샤를 앙리 상송)들은 고도의 의학적인 지식을 배우고 일격사를 위해 검술훈련까지 받는 전문직이지만 그 이전에 단승도 아닌 세습작위를 가진 귀족이었다. 특히 사형집행이 없는 때에는 의학적 지식을 사용하여 부업으로 의사를 하였고 자체적인 징세권도 있었기 때문에 단두대가 본인들의 직장을 위협한다고 해도 아쉬울게 없었다. 더욱이 당시 사형집행인의 지위는 법적으로 보장된 것이였기 때문에 단두대가 도입된다 하더라도 '사형을 받아야 할 죄수가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되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면' 단두대를 사용하더라도 칼날을 내리는 집행 자체는 사형집행인이 했다.
  11. [11] 여담으로, 당시 사형 장면을 영국의 배우 크리스토퍼 리(반지의 제왕에서 사루만을 맡은 그 배우 맞다)가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당시 나이 17세.
  12. [12] 단두대 사형집행까지 다룬 영상이 유튜브에 떠돌아다닌다는 말도 있는데, 영상이 있는 건 맞지만 진짜 사형집행 영상인지, 아니면 비슷한 사람을 데려다 연출만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13. [13] 대신 종신형이 채택되었다. 다만 사형의 대안으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논의되기 전의 일인지, 현재도 독일은 한국과 같은 무기징역 제도만 운영한다.
  14. [14] 주세페 가리발디의 입성에 맞추어 무기고를 폭발시키려 했으나, 운이 없게도 가리발디가 멘타나 전투(Battle of Mentana) 때문에 제때 교황령에 입성하지 못했는지라 결국 둘 다 잡혀서 사형.
  15. [15]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에드몽 당테스 백작과 알베르 드 모르세르가 사형 장면을 구경하는 장면에서 잠시 등장한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한국어판에서는 '박살형'으로 번역.
  16. [16] 정말 말 그대로 무식하게 큰 도끼를 사용했다.
  17. [17] 맨 위의 카람볼라지 동영상에서도 이게 뭔 낭비냐면서 풍자하고 있다. 스웨덴 아니랄까봐 이케아 설명서 그림체로 넣어놨다.
  18. [18] 직역하면 생피에르의 과부가 되는데, 위 영상에서 나왔듯이 단두대의 별명 중 하나가 '과부(La Veuve)'였다.
  19. [19] 본래 기요탱은 예수회 신자로 사형제 폐지론자였다. 혁명으로 인해 전보다 유례없이 사형이 많아지자 그나마 타협하는 방안으로 돌아선 셈이다.
  20. [20] 자신의 턱 밑에 대고 머리 방아쇠를 당겼지만 고개가 뒤로 확 젖혀지면서 턱뼈가 박살이 나는 부상에 그쳤고, 결국 붕대로 턱을 고정시킨 채로 단두대까지 끌려갔다.
  21. [21] 실제로 생 쥐스트는 혁명 초엔 '빵은 인민의 권리'라고 발언하며 혁명에 앞장섰으나, 이후에 '자유는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나 누리는 것'이라고 하다가 결국 '혁명의 반대파뿐만 아니라 중립을 지키는 자들도 처벌해야 한다'는 독설까지 할 정도로 극단적인 정치인이 된다.
  22. [22] 본명 마리 구즈.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여권운동가로 공포정치 시기에 반대파에 의해 처형됨.
  23. [23] 방데 전쟁의 주범 중 하나이다. 물론 방데 전쟁의 혐의로 처형된 것은 아니며 정치 싸움에 휘말려 처형당했다.
  24. [24] 다만 자주 사용되지는 않는다. 작중 단두형을 집행한 집행인은 상부의 허가 없이 단두대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좋지 못한 꼴을 당해야 했다. 자세한 것은 파라 그리폰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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