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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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中國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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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위(東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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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北齊)

581 ~ 619

수(隋)

618 ~ 907

당(唐)
무주(武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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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
大唐


8세기 당나라의 강역

존속 기간

618년 ~ 907년 (289년)

별칭

당조(唐朝), 이당(李唐)

위치

중국, 베트남 북부, 서역 일부, 요동, 몽골리아

수도

장안(長安, 618~684, 705~904)
낙양(洛陽, 684~705, 904~907)

인구

7세기 5천만 명
9세기 8천만 명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李)

국가원수

황제[1]

주요 황제

주요 섭정

측천황후 무조

언어

중세 중국어

문자

한자

종족

한족, 선비족, 돌궐족, 소그드인

종교

대승 불교, 도교, 유교
네스토리우스교, 마니교

통화

개원통보(開元通寶)

주요 사건

618년 건국
626년 현무문의 변
644년 ~ 668년 고구려-당 전쟁
670년 ~ 676년 나당전쟁
690년 ~ 705년 측천무후의 집권
755년 ~ 763년 안사의 난 발발
780년 양세법 시행
805년 영정혁신
808년 ~ 846년 우이당쟁
835년 감로의 변
875년 ~ 884년 황소의 난 발발
907년 멸망

성립 이전

수나라

멸망 이후

후량

현재 국가

중국, 베트남, 몽골, 북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라오스

1. 소개
2. 출신
3. 역사
3.1. 초당(初唐)
3.2. 무주(武周)
3.3. 성당(盛唐)
3.4. 중당(中唐)
3.5. 만당(晩唐)
3.6. 후계국가
4. 행정 구역
5. 평가
6. 한계
7. 역대 황제
8. 계보
9. 추존 황제
10. 임시(비정통) 황제
11. 관련인물, 항목
12. 여담

언어별 명칭

중국어

大唐 / 唐朝
(Dà Táng / Tángcháo)

중세 중국어

大唐[2] (Da Dang)

돌궐어

𐱃𐰉𐰍𐰲 (Tabgač)

한국어

당나라

일본어

唐 (Kara / Tō)

1. 소개

수나라(隋)에 이은 중국의 통일 왕조로 618년에 수의 당국공이자 관롱집단 출신인 이연이 건국해 907년 애종후량주전충에게 멸망하기까지 289년간 20대의 황제가 다스렸던 국가였다. 수도는 장안이었으며 고, 중세 중국 제2의 도시인 낙양이 부수도로 기능하였다. 장안은 인구가 100만이라 칭할 정도로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3]

군대는 절충부가 전국에 6백 곳이 존재하는데, 소속 병사는 상중하로 나뉘어 초기에는 상 1000 ・ 중800 ・ 하600명, 후에 1200・1000・800명으로 증원되었다. 10명이 1화(火), 5화가 1대(隊), 4대가 1국(國)을 이루었고, 각각의 지휘관을 화장(火長) ・ 대정(隊正) ・ 교위(校尉) ・ 절충도위(折衝都尉)라 불렀다. 600 × 1000=60만 명으로 이것이 당 왕조의 정규 병력이었다. 물론 옛날 국가들이 흔히 그러했던 것처럼 총원이 다 채워지지 않은 곳들도 있어서 장부상 병력에 비해 실제 병력은 더 적어 정규 병사들만으로는 부족할 경우 따로 징병을 하기도 했다.

전통 중국 문물을 발전시킨 왕조이자 동시에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추진하였고 이민족의 문화에 대한 인정과 자치를 인정하는 등 다민족적인 국제적인 요소가 가장 짙었던 왕조로 평가받는다.[4] 북쪽으로는 회흘(위구르), 토번(티베트), 남방의 베트남과도 교류를 하였다.

한국사에서는 백제의 맹공과 고구려의 협조(내지 방조)로 인해 위기에 빠졌던 신라와 동맹을 통해 신라의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하였다.[5] 또한 일본이 백제 멸망 이후 견당사를 보내 중국 문물을 수입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반도는 위치상 중국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지만, 당나라는 그 중에서도 한반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향후 1000년 이상 지속되는 동아시아의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완성한 나라였다.

그러나 670년대부터는 초반의 성장세가 꺾이고 신라, 토번, 돌궐 제2제국, 발해 등에게 연달아 패하거나 휘둘렸으며 지배 체제의 모순과 문제점, 지배층들의 이해 관계의 상충으로 인하여 안록산의 난 이후 이민족들과 중국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당나라 정부 자체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어 쇠퇴의 길을 밟았다.

2. 출신

중국 한족에 의해 편찬된 기록이나 한국의 사료[6]를 보면 모두 당을 선비족 정권보다는 한족(또는 한족 성씨를 쓴 선비족) 정권으로 여기고 있었다. 당 왕조 멸망 후에 한족 인식으로는 당나라 선비족 국가였지만 당 왕실은 한족 등을 책봉시켰고 당에 한족은 선비족에 비교해 하급계급이 많았지만 어느정도 한족 포용 정책을 펼쳤다는 점을 들어 한족의 국가로 인식했다. 특히 요미원은 수나라, 당나라 왕족들을 철륵 튀르크로 보고 있다.

당나라 왕실의 혈통은 선비족으로 보고 있다. 설들의 출처는 진인각(陳寅恪), 장경(張競), 요미원(姚薇元) 등이다. 일본의 모리야스 다카오는 탁발 국가설[7]을, 중국의 진인각이나 장경, 요미원 등의 학자는 한족화된 선비족이라는 이 학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미 선비족 왕조는 북위 효문제 이래 적극적인 한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한자로 기록된 당나라 황실의 계보에서는 농서 이씨인 당 황실의 시조는 춘추전국시대 유명한 사상가 노자로 나와 있다. 기록의 경우 이민족도 한족계로 많이 나타난다. 이후 전국시대 이신, 한나라명장 이광, 이릉 등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 이후 당 황실은 오호십육국시대 서량의 태조 흥성제의 8세손이 당 고조 이연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당태종이 장안성에 입성 한 직후의 노자 사당부터 만들었던 이유가 그가 노자의 자손이였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하지만 당실 이씨는 탁발의 달도(達闍)이며 선비어 달도(達闍)의 의미에 대해서 호랑이설, 어둠 속의 빛을 의미하는 고대 튀르크어 '타르두'(Tarduš‎)설, 오얏설 등이 있다.즉 농서의 유파가 아님을 뜻한다.

당 왕조 수립의 주체는 북주 시대 6진을 중심으로 형성된 군벌인 8주국 관롱집단이라 불리는 세력으로, 이들은 선비족 왕조인 북주에서 무장으로 활동하며 집안끼리의 통혼을 통해 연척으로 맺어져 있었다.[8] 북주의 우문씨와 수의 양씨, 당의 이씨 모두 당시 실세인 무천진 군벌, 소위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 불렸던 세력에서 나왔다. 수문제는 북주 때만 해도 보육여견(普六茹堅)[9]이라는 선비족 성명을 갖고 있기도 했고(수 왕조 개창 전후에 개명) 당 고조 이연의 어머니도 선비족 성씨인 독고씨에서 나왔다. 즉 당나라 황실에 한족이 한명도 없는 셈. 선비족으로만 이루워졌다는 것을 진인각은 주목하고 있다.

물론 한족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10]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계기도 씨족지라고 해서 오랜 과거부터 존재하며 한족들을 차별하던 선비족 문벌귀족들의 족보를 모아 약화시켜 다수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선비족이 한족 여성과 통혼했으니 한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지배민족이 피지배민족이 결혼하는 건 어디나 있어왔던 것이며 이것으로 민족이 바뀌진 않는다. 물론 피지배인 한족 지배의 정당성을 위해 한족화되었고 한문으로 기록한 자도 한족이다. 당나라 멸망 후 선비족-한족의 혼혈 민족이지만 문화적으론 한족이니 한족 입장에선 중국 정복 왕조도 한족 왕조로도 볼 수 있다.

오늘날 당나라 황실의 혈통이 중국을 정복한 선비족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선비족의 북위가 중국을 정복하고 한족의 성씨를 쓰기 시작하고 부터 중국과 해외에서는 한족의 왕조 또는 선비족의 왕조 둘 다 주장하는 경향이 많다.

3. 역사

618년

당고조 이연, 수 공제에게 선양받아 당나라를 건국

626년

현무문의 변

630년

당나라, 설연타와 연합해 동돌궐을 정복

644년

고구려를 침공, 고구려-당 전쟁 발발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고연수의 고구려군을 격파

645년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

647년

울독군산 북쪽에서 설연타를 격파

651년

노실필과 당이 연합하자 을비돌육가한은 토화라로 도주

658년

소정방이 서돌궐을 정복하고 안서도호부를 쿠차로 이전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와해, 백제 멸망

663년

나당연합군백강 전투에서 백제 잔당군과 왜군을 크게 격파

668년

글필하력이세적이 평양성을 총공격, 고구려 멸망

670년

가르친링대비천 전투에서 당군을 궤멸시키고 안서 사진을 점령

670년

나당전쟁 발발

675년

신라군이 매소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실상 한반도 점유에 실패

680년

왕방익이 이려하에서 반군을 섬멸시키고 열해에서 10만여 명을 격파

683년

고종이 사망하자 중종 이현이 즉위

684년

중종이 폐위되고 예종 이단이 즉위

690년

예종이 폐위되고 측천무후가 즉위. 국호를 주,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

697년

대조영걸사비우를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유민 및 말갈족 일파가 당나라 영주에서 탈출, 천문령 전투에서 이들을 추격하던 당군을 격파

698년

대조영,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

705년

측천무후가 사망하고 중종이 복위되어 당나라 부활

710년

위황후안락공주 모녀가 중종을 독살시키고 상제 이중무를 옹립

710년

임치왕 이륭기와 태평공주가 난을 일으켜 위황후 일파를 제거시키고 예종을 복위

712년

이륭기, 예종에게 선위를 받아 현종으로 즉위

722년

소발률이 내전으로 당에 복속

727년

토번의 명장 실뤄라를 이간계로 제거

732년

발해의 장수 장문휴가 당의 등주 기습

741년

고선지가 달해부를 평정

747년

고선지의 1만 군대가 서역 원정 개시, 연운보에서 토번군을 격파하고 소발률을 점령

750년

고선지가 2차 서역 원정 개시, 사마르칸트와 석국을 점령

751년

고선지의 당군이 아바스 왕조와 탈라스에서 접전, 돌기시의 반란으로 탈라스 전투 패배

755년 ~ 763년

안사의 난 → 이형 숙종으로 영무에서 즉위

762년

숙종이 사망하고 이예가 대종으로 즉위

763년

복고회은의 난

763년

토번의 장안 함락

779년

대종이 사망하고 덕종 이괄이 즉위

780년

양염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용조제를 폐지하고 양세법을 시행

781년

토번이 이때부터 농우 지방에 진출하기 시작

782년

제나라가 당의 변주를 공략하고 당으로부터 독립 선언

782년

토번과 당이 청수 동맹을 결의

783년

주비의 난으로 장안이 함락

787년

당의 명재상 이필의 노력으로 당과 위구르 제국의 관계가 개선

789년

토번의 명장 줘치수가 당의 북정도호부에 진출하여 북정 도호부가 폐지됨 → 서역 전역 상실

793년

남조가 당에 사신을 파견해 속국이 되기를 맹세

794년

당과 남조와 연합해 토번을 침략

805년

덕종이 사망하고 순종이 즉위하나 환관들의 퇴위 강요로 아들 헌종에게 양위

815년

제나라가 하음전운원의 200만 석을 불태우고 낙양을 습격

816년

오원제의 난

819년

이사도가 유오에게 암살되고 운주가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 제나라 멸망

820년

헌종이 환관 진홍지에게 살해당하고 목종 이유가 즉위

824년

목종이 사망하고 이담이 경종으로 즉위

826년

경종이 환관들의 권력 쟁탈전으로 살해되고 환관 왕수징에 의해 문종 이앙이 즉위

829년

남조가 당의 검남을 공격하고 성도성을 점령

835년

당의 재상 이훈과 문종이 환관들을 말살시켜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이훈은 피살당함(감로의 변)

840년

문종이 환관들에게 시해당하고 이찬이 무종으로 즉위

847년

무종이 사망하고 선종 이침이 즉위

848년

토번과 당이 주전파의 토번군을 협공하여 패배시킴

848년

장의조가 군사를 일으켜 농우 일대의 토번 세력을 침략함

859년

강남에서 구보의 난이 일어남

859년

선종이 사망하고 의종 이최가 즉위

863년

안남도호부를 재건

868년

방훈의 난

873년

남조를 침략해 성도성을 탈환

875년 ~ 884년

황소의 난

888년

희종이 사망하고 소종 이엽이 즉위

900년

황태자 이유가 대신의 반란으로 즉위

901년

이유가 폐위되고 소종이 다시 복위

904년

소종이 주전충에게 살해되고 이축이 애종으로 즉위

907년

주전충이 애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후량을 건국

3.1. 초당(初唐)

당국공 이연의 둘째아들인 이세민은 아버지[11]에게 수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 것을 진언하고[12], 여러 곳에서 높은 전공을 세우며 건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에 이연은 이세민을 천책상장(天策上將)에 봉하는 등 크게 신임하였다 이에 불안해진 장남이자 황태자 이건성삼남 이원길이 이세민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으로 세민은 위기를 맞고, 심지어 형제들간의 모임에서 이 든 을 마시고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이에 이세민은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궁궐 안에서 형 이건성과 이원길을 살해하고(현무문의 변), 직접 황태자에 봉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연은 스스로 이세민에게 제위를 물려주게 된다. 일각에선 당태종이 자신이 먼저 쿠데타를 일으키고는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변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태종 이세민은 국가의 제도를 총체적으로 정비하여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어냈다. 외부로의 확장도 활발해서 서돌궐 등 수나라 때부터 눈엣가시였던 새외세력을 연달아 격파하지만 다만 고구려를 침공해(고구려-당 전쟁) 안시성주 등의 활약으로 실패한 점이 오점으로 남았다. 뒤를 이은 고종은 황후 측천무후의 진언에 따라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침공하여 승리한다. 내친 김에 신라까지 정복하려 하였으나(나당전쟁)에서 신라에게 패배하고 토번 전선의 악화가 겹쳐 실패하고 만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토번 전선과 한반도 전선에 둘 다 발을 담그고 있었고, 두 전선 모두 무너지자 더 이상의 확장을 포기하게 된다.

3.2. 무주(武周)

이후 무후의 궁궐에서의 힘이 점점 커지고, 고종이 늙어 힘이 약해지면서 무후는 사실상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후 무후는 몇 명의 황태자를 죽이거나 몇 명의 황제를 폐위시키거나 한 뒤 국호를 주나라(周)라 칭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른다. 전례없는 중국 최초의 여황제 탄생으로 당(唐)은 사라질 뻔 하였으나, 이에 반감을 가진 중신들이 그녀가 병든 말년에 정변을 일으켜 무후는 국권을 내놓고, 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던 중종이 복위했다가 다시 제2의 여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황후와, 황태녀를 생각하고 있던 위후의 딸 안락공주에 의해 독살되었다.

3.3. 성당(盛唐)

측천무후와 고종의 딸인 태평공주는 올케 위황후, 조카 안락공주와 대립했고, 예종[13]의 아들인 이융기가 고모인 태평공주와 손을 잡고 아버지를 복위시켰다. 이후 정치적으로 큰 힘을 얻은 태평 공주와 황태자가 된 이융기가 대립하기 시작했고, 이융기가 황제로 즉위한 후 태평 공주가 숙청되면서 당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종의 시대는 국가의 재정비와 교류의 발달로 '개원의 치(712년 ~ 740년)'라는 태평성대를 열게 되었다. 수많은 명재상들의 보필로 내치와 외치를 갈고 닦았다. 내적으로는 "화적법"을 반포해 국내의 조세/군량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에 성공하고, 부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완전히 바꾸었다. 다민족 정책으로 선비족 문화의 면모를 보여 외적으로는 돌궐 · 토번 · 거란과 같은 유목세력들과 협력하여 실크로드를 이용하였다. 그리고 중동이슬람 제국아바스 왕조의 전성기 때 동쪽의 팽창으로 탈라스 전투가 일어났다. 실크로드로 인해 서양 문화와의 교류가 가장 활발하게 이어진 시점 역시 당나라 때이며 실크로드동로마 제국과 무역 또한 있었다. 하지만 돌궐, 토번 등 유목민족들이 짧은 시간 다시 강성해져 당나라 서쪽 지역이 함락됐고 빈번히 실크로드를 통한 동로마 무역은 중지되었다.

그러나 말년(741년 ~ 755년, 천보난치)에 하필이면 현종이 며느리(…) 양귀비에 푹 빠지게 된다. 양귀비에 의해 현종은 아예 정사에 손을 놓고, 정국은 재상 이임보 (뒤이어 양국충) 등 몇몇 지도층과 양귀비의 일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게다가 당시 지방의 치안을 담당한 절도사들의 세력이 커지고, 그중 가장 힘이 강했던 안록산안사의 난을 일으키면서 궁궐이 함락당하고 양귀비가 그녀에게 반감을 품은 군병(軍兵)들의 강요에 의해 자살하는 사태를 겪었다.

3.4. 중당(中唐)

이후 당나라는 심하게 막장트리를 타게 된다. 바로 절도사의 난립 + 토번의 흥성 때문이다. 당나라는 건국 당시 균전제와 연계한 군사 제도인 부병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토지 지급량이 줄어들면서 과중한 군역에 못 이겨 군역을 피해 도망치는 도호화가 진행되었고 이는 당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측천무후, 당 현종 시기부터 심각한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은 번진을 설치 했다. 이때까지의 번진은 어디까지나 변경지역에 국한되었는데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내지에도 번진을 설치하는 내지번진이 설치된 것이다. 이로서 당조는 수도 인근 지방 일부와 당을 지지하는 강남지방의 번진(순지 번진)을 제외하곤 잠재적인 적들에게 둘러 싸인 형국이 된다 절도사들의 군사력은 급속히 강해지고, 절도사들끼리 서로 결탁하여 중앙 정부로 조세를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심지어 중앙 정부의 군사력은 규모와 훈련, 사기 모두에서 최악의 막장 군대가 되는 등 당나라는 총체적인 쇠퇴를 겪게 된다. 특히나 번진은 물론 당 황실에서도 부병제를 대신하여 용병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재정 부담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한때는 절도사들을 진압해서 지방 통치를 반짝 복구해 그럭저럭 120년을 버티지만, 외부적으로는 토번회흘의 강성으로 당은 장안까지 위협받는 시기였다. 또 요동만주 지방은 거란발해의 세력권이었다. 또 이정기의 치청 번진 등은 사실상 반독립 왕국이었다.

이 때 활약한 황제가 두 사람 있는데 바로 (숙종, 대종 다음인) 덕종과 (순종 다음인) 헌종이다. 덕종은 양세법을 실히하여 재정을 충실히 했고 당조에 적대적인 하북 3진을 치러 나섰지만 전선이 지지부진했던 사이에 장안에서 주차-이회광의 난이 터지고, 그거 진압한 후에도 토번-회흘과 중앙아시아를 두고 계속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화해했다. 덕종의 노력은 헌종에게 이어진다. 특히 헌종 시기가 되면 친위 부대인 신책군이 설치되고 이를 이용해 적대적인 번진을 모두 진압한다. 이에 번진의 재정과 군사력을 회수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등 큰 소득을 거두었다("원화중흥"). 그렇지만 헌종은 말년에 마약 금단에 빠지고 불교를 맹신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환관에게 독살당하고 만다. 다시 당조는 막장으로 흘러간다.

3.5. 만당(晩唐)

이후 당은 환관들이 좌지우지하는 나라로 서서히 몰락한다. 최후의 중흥 군주 선종 때부터 시작된 연속된 반란 크리는 희종 때 터진 황소의 난을 통해 당나라에게 그야말로 페이탈리티를 먹이고 말았다. 사실 당조가 적대적인 번진에 맞서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에 충성하던 순지였던 강회(강남-회수) 지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강남 개발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고 상업이 발달하자 강회 지역은 부유해졌다. 당조는 이 지역에 과중한 세금을 매기고 이를 이용해 신책군을 만들어 당조에 적대적인 번진에 맞섰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지역은 당의 착취에 저항하게 되었다. 이미 구보의 난, 방훈의 난 등이 있었고 끝내 소금 밀매상 출신인 황소가 나옴에 따라 당은 확실하게 골로 가게 된다. 농민 반란군에 불과했던 황소군은 막장이었던 중앙군을 마구 격파하면서 유유히 장안에 입성하였고, 주민들의 지지까지 얻으며 다음 왕조를 예고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에 포위되고, 심복이었던 주온이 배신하여 관군에 합류하면서 황소의 난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주전충은 자신의 이름을 파자해 인왕중심(人王中心)이라고 해석하는 등 이미 야심을 품고 있었고, 이미 당나라는 막장 크리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전충이 황소군을 자기 세력으로 흡수하는 등 세력을 키워 당나라를 멸망시키니, 전충(全忠)이란 이름이 무색해져 버렸다. 당의 애제를 끝으로 당은 289년 만에 멸망한다.

3.6. 후계국가

오대십국시대에 오대의 하나인 후당과 십국의 하나인 남당은 당나라의 후계 국가를 자칭했으나 후당의 경우 왕조의 연결성은 불분명하다. 후당 황가는 애당초 사타족이었으니 아예 연결성이 없고 남당은 남오의 승상 서온의 양자였던 이변이 남오를 찬탈하여 세운 나라이다. 이변은 당 황족인 이각의 후손이라 자칭하긴 했다.

4. 행정 구역

당나라의 행정 층위는 3단계이다. 도(道)-주(州)-현(縣).

원래 고대 중국의 행정구역춘추전국시대에 각 국은 자신의 영토에 군(郡)이 설치하였다. 그 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36군(郡)을 설치하였다. 한(漢)대에 이르러서 전국을 9주(州)로 나누어 최상위 행정 구역으로 주(州)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원래 주(州)는 삼국지에 나오는 형주서주같이 광역 행정 구역이었다. 그러다 시대가 점점 흘러 진(晉)나라를 거쳐 5호16국시대에 이르러 주(州)는 광역 행정 구역에서 그 치소를 가리키는 지역명[14]으로 변화하였고, 주가 분할되어 그 수는 계속 늘어났다. 당(唐) 태종은 최상위 행정 구역으로 10도(道)를 설치하였고, 광역 행정 구역의 도(道)는 한국과 일본에도 도입되었다.[15]

명칭

한자

치소

현재지명

비고

경기도

京畿道

장안(長安)

섬서성 시안시

현종 설치

도기도

都畿道

낙양(洛陽)

허난성 뤄양시

관내도

關內道

장안(長安)

섬서성 시안시

하동도

河東道

포주(蒲州)

산서성 윈청시 융지시

하북도

河北道

위주(魏州)

허베이성 한단시 웨이현

하남도

河南道

변주(汴洲)

허난성 카이펑시

회남도

淮南道

양주(揚州)

장쑤성 양저우시

농우도

隴右道

선주(鄯州)

칭하이성 하이둥시 러두구

산남도

산남동도

山南道

山南東道

양주(襄州)

후베이성 샹양시

현종 분할

산남서도

山南西道

량주(梁州)

섬서성 한중시

검남도

劍南道

익주(益州)

쓰촨성 청두시

강남도

강남동도

江南道

江南東道

소주(蘇州)

장쑤성 쑤저우시

현종 분할

강남서도

江南西道

홍주(洪州)

장시성 난창시

검중도

黔中道

검주(黔州)

충칭시 펑수이 먀오족 투자족 자치현

영남도

嶺南道

광주(廣州)

광둥성 광저우시

5. 평가

동아시아 세계를 완성한 중화 왕조 국가로서 단순히 중국사에서만이 아니라 동양사 전반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왕조이다. 중국사에서 당은 한나라가 만들어 놓은 중국 문화의 토대 위에 주변국의 문화를 잘 흡수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완성, 동아시아 전체로 전파했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봐도 상당히 중요한 국가 중 하나다. 우선 한국사에서는 잘 알다시피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시대를 종식시킨 바 있다. 또한 당의 서역 침략은 결과적으로는 탈라스 전투를 끝으로 패배하였지만 그전에 서돌궐이나 고창국 등을 제압하면서 상당기간 영향력을 행사했고, 중앙아시아의 문화가 대륙으로 전파되었다. 그만큼 군사력도 막강하여 서구권에서 활동하는 중국계 학자 창준수 교수에 따르면 그 전성기에 57개의 국영 말목장을 보유했고, 44만~70만 6천 필에 달하는 말을 양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은 10만 기병으로 흉노를 밀어버린 한나라보다도 훨씬 기병에 주력한 국가였다.

후한 이후 대륙에서는 삼국지부터 시작된 위진남북조시대라는 혼란기를 겪었는데 이 혼란기는 근 370년이나 이어지는 긴 시기였다. 흔히 한나라는 유럽의 고대 로마와 비교되곤 하는데, 로마 또한 고대 통일 제국을 완성하였으나 로마의 멸망 이후 다시는 통일 제국을 등장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혼란을 마무리하고 대륙을 통일시킨 것은 수나라였다. 수문제당현종의 '개원의 치'에 맞먹는 수준으로 나라를 번영시켰으나, 하필 후임자인 수양제가 나라를 대차게 말아먹어(...) 이종사촌인 당고조 이연에게 제위를 찬탈당한다.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정권을 장악한 문벌귀족은 오대십국시대까지 명맥을 이었고 송태조에 와서야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당나라도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당태종부터 당고종, 측천무후를 거쳐 장기적인 통일 왕조를 등장시키는 데 성공한다.

도중에 중국사 유일의 여자 황제 측천무후가 등장하고 국호가 주(周)로 갈리는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측천무후가 고용한 북문학사에 의해 태상황제로 퇴위하고 측천무후의 후손이자 당나라 이씨가 복귀되면서 국호 또한 당으로 돌아왔다. 측천무후의 치세 또한 역사적으로는 사실상 당나라 치세나 다름없기 때문에 당태종부터 측천무후의 치세까지 당나라의 장기집권을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북송 이후에 보편화되기는 하지만 과거제의 형태도 이때 완성되었다.

당나라의 존재 의의는 중국 대륙의 재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그것을 성공하지 못한 유럽 및 서양사학계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와 함께 요주의 연구 대상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나라 황실 이씨는 관롱집단이라고 해서 오호십육국시대에서 대륙으로 유입된 선비족한족에 동화된 자들이었다. 이러한 기원 때문인지 당나라는 중원 바깥의 이민족들도 인재라면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이정기, 고선지, 흑치상지, 설계두, 장보고,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는 본국이 아니라 당으로 진출해서 명성을 떨쳤다. 외국인 유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837년 당나라 국학에서 공부하는 신라인은 216명이었고 이조차 사비 유학생은 제외한 기준이었다. 국비 장학생은 당에서 왕복 교통편과 의복이나 식비 같은 체제비에 책값까지 지원했다.

다만 이러한 외국인 고용 기조는 측천무후처럼 관롱집단과 문벌귀족에게 일정 이상의 지지를 받을 수 없던 일부 권력자들이 이들 외의 인재들을 고용하기 위해 외국인들을 대거 끌어다썼다. 무천진 관롱집단과 문벌귀족은 역사와 혈통부심이 장난이 아니라 차별이 대단했는데, 관롱집단이거나 역사적인 문벌귀족이거나 신라인들처럼 사이좋은 이민족이 아니면 마음대로 다니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원나라 시대까지도 중국은 외국인 유학생들을 받아들였는데, 명나라 이후 극도로 폐쇄적인 사회로 변해서 유학생 응시제도까지 폐지된다.

현대 중국인들에게 중국 역사상 가장 좋아하는 왕조 시기를 꼽으라 하면 대부분 당나라 시기를 꼽을 정도로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영광스러운 과거로 인식되고 있다. 역대 왕조 중 가장 활발한 대외 팽창정책과,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혼란기를 최종적으로 마무리지었다는 점,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태평성대를 이룩한 당태종과 당현종이 있었으며 심지어 당태종과 위징의 관계는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 중 하나라고 치켜세워진다는 점, 또 중국 역대 왕조들 중 가장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 같은 이유로 인해 가장 인기있다고 한다. 물론 마지막 이유는 약간 중국 경내 소수민족을 흡수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로 현 중국 당국에서 밀어주는 것과 연계되기도 한다. 당나라가 멸망한지 5백여 년이 지난 명나라 치세에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대명(大明)'이 아닌 '대당(大唐)'인이라고 소개하는 부분이 최부표해록에 나오며, 현대 차이나타운도 중국인들은 당인가(唐人街)라고 부른다. 한(漢)이 한족(漢族)의 어원이 된 민족적인 개념이라면 당(唐)은 문화적인 개념의 중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당과 실크로드로 인한 활발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인식이 좋은 편.

사회문화적으로 동아시아에 분류되는 통일신라, 발해, 일본, 베트남에서는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율령, 불교, 유교를 통해 국가 체제가 자리잡힌다. 또한 균전제 - 조용조 - 부병제 - 율령제 - 3성 6부로 대표되는 당 중기까지의 국가체제는 고대 중국 국가체제의 완성으로 여겨지고 당 후기 이후 격변하게 된 국가체제 또한 고대사회에서 동아시아 중세사회로 넘어가는 제도적인 변화로 주목받는다.

당삼채로 대표되는 도자기 등은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때 화려하면서도 이국적이고, 자유로운 풍조를 띄게 되었으며, 이러한 문물은 이슬람을 거쳐 유럽에도 일부 영향을 주게 된다. 종이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문명으로 넘어가 전 세계로 퍼지게 된 중요한 사건은 빼놓을 수가 없다. 불교도교의 교단이 확립되어 다양한 종파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것도 당의 시대이며, 문학적으로도 이태백, 두보, 백거이, 한유, 이고 등의 문학적 업적이 후에 고문(古文)의 표본이 되었다.

여담으로 사람들이 과거 중국의 미녀들은 다 육덕 뚱뚱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당나라식 미인이고 애당초 풍만한 것과 뚱뚱한 것은 다르다! 과거에는 보통 동서양을 막론하고 풍만한 여성을 미인으로 여겼지만 중국은 옛날부터 마른 여성을 미인으로 쳤다. 한나라 시대 미녀의 기준이 마른 체형과 흰 피부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풍만한 여자들이 인기였던 것은 서방의 영향을 많이 받은 당나라 때가 예외였던 것.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 시대임에도 관료제의 발달과 행정력의 정교함으로 유명하다. 당대 일본의 승려 엔닌이 당을 여행하며 집필한 여행기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당에서는 당으로 들어오는 외국인들을 모두 체계적으로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각 도시마다 관료들이 오고가는 것을 중앙에 보고하고, 일본에서 온 외국인인 엔닌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도착지에서는 엔닌의 정보를 훤히 알고 있었다. 고대에, 그것도 중국처럼 넓디넓은 대륙에서 중앙정부에서 각 지방의 입출입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 정작 동양의 초 중앙집권적 체제와 서양의 행정체계를 받아들인 현대 중국은 독재와 관료들의 부패 때문에 지방통제력과 행정력이 제대로 굴러가지를 않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16]

지름길이지만 출입이 불가능한 지역이라 엔닌은 뇌물을 써서 통과하게 해달라고 고위 관료에게 청탁했더니 당나라에서는 관리가 뇌물을 받지 않는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기록했다. 이때가 당 행정력이 무너지던 당 말기 시절이며, 공무원들이 예나 지금이나 봉급문제와 지위문제 때문에 뇌물을 많이도 받아먹는다는 걸 생각한다면 놀랍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해당 관리가 청백리였을 수도 있지만.

한국사에서는 애증의 존재이다. 신라, 발해 등의 나라가 당나라의 문물의 받아들이며 교역을 하는등의 모습도 있었지만 요나라 다음으로 한국사에서 가장 많이 싸운나라인게, 2차례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 그리고 신라와 싸운 나당전쟁, 고구려의 후손국인 발해와도 천문령 전투발해 무왕 시기 발해가 당나라의 등주지방을 공격해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는등 당나라는 고구려-백제-신라-발해 등 한국사 고대국가들과 많은 전투를 치루었다. 오죽하면 요나라가 한국사 후기의 숙적이라면 당나라는 한국사 초기의 숙적이라고 할정도.

6. 한계

그 천하의 당나라 조차도 유목민족을 끝내 제대로 견제하지 못 했다는 결점이 있었다.[17]

분명히 당나라는 외부적으로는 여러 숙적들을 제거하고 비단길을 차지하였으며, 무역의 꽃을 피운 나라였다. 내부적으로 봐도 역시 혼란스러웠던 중국의 대륙을 다시 통일하고, 여러 관료제도와 행정제도를 정리해서 중국 제도에 기틀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구려 정벌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유목 세력과 기타 외부 세력들을 정리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끝은 제대로 맺지 못 했다.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수많은 장수들과 군사들을 희생시켜가며 전쟁을 해서 겨우 멸망시켰더니 얼마안가 발해가 다시 나왔으며, 당나라는 이를 그냥 거의 방치에 가깝도록 내버려뒀다.[18]당나라가 외부 세력을 견제하지 못 하자.북방의 돌궐세력과 서쪽의 토번 그리고 남쪽에 언제 독립할 지 모르는 베트남과 남조 세력들까지 다시 세력을 모아서 당을 견제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어쩔 수 없이 절도사환관 등의 문제에서 보이듯이 권력의 통제와 국가 통치의 구조라는 부분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 계속 펼쳐지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문제에서 온 내전과 국력의 소모는 당의 멸망의 하나의 원인이 됐다.[19] 환관들의 전횡은 후한, 명나라급으로 심각해서 당헌종 이후 황제들을 환관이 옹립하고 환관이 시해하거나 폐위한 황제들도 있을 정도였다.

여담이지만, 한나라와 당나라가 끝끝내 정벌하지 못 한 여러 유목 세력들은 훗날 한족이 아닌 유목민이 세운 국가인 원나라청나라가 완전히 개발살을 내버리게 된다.[20]

7.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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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고조
태황제

태종
문황제

고종
성황제

중종
화황제

예종
정황제

무주(武周)

성신황제

복위

임시

복위

제6대

제7대

중종
화황제

상황제

예종
정황제

현종
명황제

숙종
무황제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대종
예황제

덕종
소황제

순종
안황제

헌종
장황제

목종
혜황제

제13대

임시

제14대

제15대

제16대

경종
민황제

강왕

문종
헌황제

무종
숙황제

선종
성황제

제17대

제18대

제19대

임시

복위

의종
공황제

희종
정황제

소종
흠황제

양왕

소종
흠황제

제20대

애종
소선황제

추존

태조 경황제 · 세조 원황제 · 의종 효경황제

삼황오제춘추시대전국시대삼국시대
진(晉)유송남제진(陳)오호십육국북위
서위동위북제북주오대십국서하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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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묘호

이름

출생

사망

연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1대

고조(高祖)

이연(李淵)

566년 12월 21일

635년 6월 25일

무덕(武德, 618년 5월 ~ 626년)

618년 6월 18일

626년 9월 4일

8년 78일

헌릉(獻陵)

2대

태종(太宗)

이세민
(李世民)

598년 1월 28일

649년 7월 10일

정관(貞觀, 627년 ~ 649년)

626년 9월 4일

649년 7월 10일

22년 309일

소릉(昭陵)

3대

고종(高宗)

이치(李治)

628년 7월 21일

683년 12월 27일

영휘(永徽, 650년 ~ 655년)
현경(顯慶, 656년 ~ 661년 2월)
용삭(龍朔, 661년 3월 ~ 663년)
인덕(麟德, 664년 ~ 665년)
건봉(乾封, 666년 1월 ~ 668년 2월)
총장(總章, 668년 2월 ~ 670년 2월)
함형(咸亨, 670년 3월 ~ 674년 8월)
상원(上元, 674년 8월 ~ 676년 11월)
의봉(儀鳳, 676년 11월 ~ 679년 6월)
조로(調露, 679년 6월 ~ 680년 8월)
영륭(永隆, 680년 8월 ~ 681년 9월)
개요(開耀, 681년 9월 ~ 682년 2월)
영순(永淳, 682년 2월 ~ 683년)
홍도(弘道 683년 12월)

649년 7월 15일

683년 12월 27일

34년 165일

건릉(乾陵)

4대

중종(中宗)

이현(李顯)

656년 11월 26일

710년 7월 3일

사성(嗣聖, 684년 1월 ~ 684년 2월)

684년 1월 3일

684년 2월 26일

54일

정릉(定陵)

5대

예종(睿宗)

이단(李旦)

662년 6월 22일

716년 7월 13일

문명(文明, 684년 2월 ~ 684년 8월)
광택(光宅, 684년 9월 ~ 684년 12월)
수공(垂拱, 685년 ~ 688년)
영창(永昌, 689년 1월 ~ 689년 11월)
재초(載初, 689년11월 ~ 690년 8월)

684년 2월 27일

690년 10월 8일

6년 223일

교릉(橋陵)

당(唐) → 무주(武周)

1대

무측천(武則天)

무조(武曌)

624년 2월 17일

705년 12월 16일

천수(天授, 690년 9월 ~ 692년 3월)
여의(如意, 692년

4월 ~ 692년 9월)
장수(長壽, 692년 9월 ~ 694년5월)
연재(延載, 694년 5월 ~ 694년12월)
증성(證聖, 695년 1월 ~ 695년 9월)
천책만세(天冊萬歲, 695년 9월 ~ 695년 11월)
만세등봉(萬歲登封, 695년 12월 ~ 696년 3월)
만세통천(萬歲通天, 696년 3월 ~ 697년 9월)
신공(神功, 697년 9월 ~ 697년 12월)
성력(聖曆, 698년 ~ 700년 5월)
구시(久視, 700년 5월 ~ 701년 1월)
대족(大足, 701년 1월 ~ 701년10월)
장안(長安, 701년 10월 ~ 704년)
신룡(神龍, 705년~ 707년 9월)

690년 10월 18일

705년 2월 22일

14년 129일

건릉(乾陵)

무주(武周) → 당(唐)

복위

중종(中宗)

이현(李顯)

656년 11월 26일

710년 7월 3일

경룡(景龍, 707년 9월 ~ 710년 6월)

705년 2월 23일

710년 7월

3일

5년 130일

정릉(定陵)

임시

-

이중무(李重茂)

695년

714년

당륭(唐隆) 710년

710년

710년

-

복위

예종(睿宗)

이단(李旦)

662년 6월 22일

716년 7월 13일

경운(景雲, 710년 7월 ~ 712년 1월)
태극(太極, 712년 1월 ~ 712년 4월)
연화(延和, 712년 5월 ~ 712년 8월)

710년 7월 25일

712년 9월 8일

2년 45일

교릉(橋陵)

6대

현종(玄宗)

이융기
(李隆基)

685년 9월 8일

762년 5월 3일

선천(先天, 712년 8월 ~ 713년 11월)
개원(開元, 713년 12월 ~ 741년)
천보(天寶, 742년 ~ 756년 7월)

712년 9월 8일

756년 8월 12일

43년 340일

태릉(泰陵)

7대

숙종(肅宗)

이형(李亨)

711년 10월 19일

762년 5월 16일

지덕(至德, 756년 7월 ~ 758년 2월)
건원(乾元, 758년 2월 ~ 760년 윤4월)
상원(上元, 760년 윤4월 ~ 761년 9월)
보응(寶應, 762년 4월 ~ 763년 6월)

756년 8월 12일

762년 5월 16일

5년 278일

건릉(建陵)

8대

대종(代宗)

이예(李豫)

726년 11월 11일

779년 6월 10일

광덕(廣德, 763년 7월 ~ 764년)
영태(永泰, 765년 ~ 766년 11월)
대력(大曆, 766년 11월 ~ 779년)

762년 5월 18일

779년 5월 23일

17년 5일

원릉(元陵)

임시

-

이승굉(李承宏)

?

?

대룡(大龍)

763년

763년

-

9대

덕종(德宗)

이괄(李适)

742년 5월 27일

805년 2월 25일

건중(建中, 780년 ~ 783년)
흥원(興元, 784년)
정원(貞元, 785년 ~ 805년 5월)

779년 6월 12일

805년 2월 25일

25년 265일

숭릉(崇陵)

10대

순종(順宗)

이송(李誦)

761년 2월 21일

806년 2월 11일

영정(永貞, 805년 5월 ~ 805년 12월)

805년 2월 28일

805년 8월 5일

184일

풍릉(豊陵)

11대

헌종(憲宗)

이순(李純)

778년 3월 17일

820년 2월 14일

원화(元和, 806년 ~ 820년)

805년 8월 9일

820년 2월 14일

14년 165일

경릉(景陵)

12대

목종(穆宗)

이항(李恒)

795년 7월 26일

824년 2월 25일

장경(長慶, 821년 ~ 824년)

820년 2월 20일

824년 2월 25일

4년 5일

광릉(光陵)

13대

경종(敬宗)

이심(李湛)

809년 7월 22일

827년 1월 2일

보력(寶曆, 825년 ~ 827월 2월)

824년 2월 29일

827년 1월 2일

2년 308일

장릉(莊陵)

임시

-

이오(李悟)

?

827년

-

826년

826년

-

14대

문종(文宗)

이앙(李昂)

809년 11월 20일

840년 2월 10일

대화(大和, 827년 2월 ~ 835년)
개성(開成, 836년 ~ 840년)

827년 1월 13일

840년 2월 10일

13년 28일

장릉(章陵)

15대

무종(武宗)

이염(李瀍)

814년 7월 1일

846년 4월 22일

회창(會昌, 841년 ~ 846년)

840년 2월 20일

846년 4월 22일

6년 63일

단릉(端陵)

16대

선종(宣宗)

이침(李忱)

810년 7월 27일

859년 9월 10일

대중(大中, 847년 ~ 860년 10월)

846년 4월 24일

859년 9월 10일

13년 142일

정릉(貞陵)

17대

의종(懿宗)

이최(李漼)

833년 12월 28일

873년 8월 15일

함통(咸通, 860년 11월 ~ 874년 11월)

859년 9월 13일

873년8월 15일

13년 340일

간릉(簡陵)

18대

희종(僖宗)

이현(李儇)

862년 6월 8일

888년 4월 20일

건부(乾符, 874년 11월 ~ 879년)
광명(廣明, 880년 ~ 881년 7월)
중화(中和, 881년 7월 ~ 885년 3월)
광계(光啓, 885년 3월 ~ 888년 1월)
문덕(文德, 888년 2월 ~ 888년 4월)

873년 8월 16일

888년

4월 20일

14년 251일

정릉(靖陵)

임시

-

이온(李熅)

건정(建貞, 886년)

886년

886년

-

19대

소종(昭宗)

이엽(李曄)

867년 3월 31일

904년 9월 22일

문덕(文德, 888년 4월 ~ 888년 12월)
용기(龍紀, 889년)
대순(大順, 890년 ~ 891년)
경복(景福, 892년 ~ 893년)
건녕(乾寧, 894년 ~ 898년 8월)
광화(光化, 898년 8월 ~ 901년 3월)

888년 4월 20일

900년 11월

16년 159일

화릉(和陵)

임시

-

이유(李裕)

-

900년

901년

3달

-

복위

소종(昭宗)

이엽(李曄)

867년 3월 31일

904년 9월 22일

천복(天復, 901년 4월 ~ 904년 윤4월)
천우(天祐, 904년 윤4월

~ 907월)

901년 1월

904년 9월 22일

16년 159일

화릉(和陵)

20대

애종(哀宗)[21]

이축(李柷)

892년 9월 27일

908년 3월 26일

천우(天祐, 904년 ~ 907년)

904년 9월 26일

907년 5월 12일

2년 228일

온릉(溫陵)

8. 계보

이경

이이

.
.
.
.
.

凉. 이고

.
.
.

이희(李熙)

이천석

이호

이병

1. 이연

2. 이세민

3. 이치

이홍

4. 이현

5. 이단

이현(李賢)

이중무

6. 이융기

이수례

이종

7. 이형

이승굉

8. 이예

9. 이괄

10. 이송

11. 이순

이온
,(이형의 현손/玄孫),

12. 이항

16. 이침

이오

13. 이담

14. 이앙

15. 이염

17. 이최

18. 이현

19. 이엽

이유

20. 이축

9. 추존 황제

묘호

시호

이름

연호

재위 기간

비고

능호

-

덕명황제
(德明皇帝)

고요(皋陶)

-

-

고조 추숭

-

-

선천태상황제(先天太上皇帝)

이경(李敬)

-

-

현종 추숭, 노자의 부친

-

성조(聖祖)
대성조(大聖祖)

고상대광도금궐현원태상천황대제
(高上大廣道金闕玄元太上天皇大帝)

이이(李耳)

-

-

현종 추숭, 노자

-

서량 태조
(西涼太祖)

흥성황제(興聖皇帝)

이고(李暠)

-

400년 ~ 417년

고조 추숭, 서량의 시조

건세릉(建世陵)

헌조(獻祖)

선황제(宣皇帝)

이희(李熙)

-

-

고조 추숭, 고조의 고조부

건초릉(建初陵)

의조(懿祖)

광황제(光皇帝)

이천석(李天錫)

-

-

고조 추숭, 고조의 증조부

계운릉(啓運陵)

태조(太祖)

경황제(景皇帝)

이호(李虎)

-

-

고조 추숭, 고조의 조부

영강릉(永康陵)

세조(世祖)

원황제(元皇帝)

이병(李昞)

-

-

고조 추숭, 고조의 부친

흥녕릉(興寧陵)

의종(義宗)

효경황제(孝敬皇帝)

이홍(李弘)

-

-

중종 추숭, 고종의 5자

공릉(恭陵)

-

양황제(讓皇帝)

이헌(李憲)

-

-

현종 추숭, 예종의 장자

혜릉(惠陵)

-

봉천황제(奉天皇帝)

이종(李琮)

-

-

숙종 추숭, 현종의 장자

-

-

승천황제(承天皇帝)

이담(李倓)

-

-

대종 추숭, 숙종의 3자

순릉(順陵)

10. 임시(비정통) 황제

시호

이름

연호

재위 기간

비고

상황제(殤皇帝)
소황제(少皇帝)

이중무(李重茂)

당륭(唐隆) 710년

710년

위황후에 의해 즉위, 17일 만에 폐위

광무왕(廣武王)

이승굉(李承宏)

-

762년

토번에 의해 즉위

강왕(絳王)

이오(李悟)

-

826년

환관 이극명에 의해 즉위, 헌종의 6자

폐황제(廢皇帝)
양왕(襄王)

이온(李熅)

건정(建貞) 886년 ~ 887년

886년 ~ 887년

주매에 의해 즉위, 숙종의 현손

성황제(成皇帝)
덕왕(德王)

이유(李裕)

-

900년 ~ 901년

소종의 장자, 유계술에 의해 즉위

11. 관련인물, 항목

12. 여담

  • 중국의 자동차 제조사인 BYD에서 생산하는 BYD 탕의 이름의 유래가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1. [1] 황제의 현 중국어 발음은 황디(huángdì)지만 당나라 시대의 중고음으로는 황떼이(/ɦwɑŋ tei/)에 가까웠다.
  2. [2] 636년에 저술된 수서(隋書) 등 다수의 고문헌에 大자가 붙어 언급된다. 대당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현장의 순례 여행기인 대당서역기. 물론 이전 왕조에서도 大자가 붙는 용례는 있다. 삼국지의 대위(大魏)나 진서의 대진(大晉), 그리고 앞서 언급한 수서에서도 대수라는 용례가 나온다.
  3. [3] 때문에 관중 지역의 식량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었던 당대 후기에는 거의 국가 대부분의 식량 공급을 강남 지역의 생산력에 의지하게 된다.
  4. [4] 다만 대외적인 활동이 활발했고 국제적인 요소가 많았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한계점도 분명하였다.
  5. [5] 물론 이 과정에서 통일신라(대신라)나 발해와 군사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6. [6] 조선시대 필수 교재였던 동몽선습 같은 것.
  7. [7] 모리야스 다카오(森安孝夫) 오사카대학 동양사학과 명예교수의 발언
  8. [8] 옛부터 '8주국'의 관롱집단은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무천진 출신의 선비족 장수 집안끼리만 혼인을 하였다.
  9. [9] 보육여가 성이고 견이 이름이다.
  10. [10] 갈족처럼 일부 정복 민족이 지나친 탄압 정책을 펴자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11. [11] 이연은 수나라 황제였던 양광과 이종사촌 관계였다.
  12. [12] 당시 수나라대운하건설과 고구려 원정 실패 등으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13. [13] 중종의 동생으로 마찬가지로 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다.
  14. [14] 예를 들어 삼국지를 보면 종종 강릉성과 형주성을 혼용해 적곤 한다. 그냥 혼용해서 적으면 괜찮은데 형주성과 강릉성이 별도의 성으로 나오는 자아분열(?)을 보여줘서 독자를 혼돈에 빠트리기까지 한다. 이는 삼국지 연의가 명대 나관중의 소설이고, 이처럼 지역명으로 형주는 강릉을 의미하게 되었다.
  15. [15] 한국은 고려 성종10도를 설치하여 현종대에 5도 양계가 되었고, 조선8도가 되어 현재 대한민국북한의 도제도에 이르렀다. 일본은 율령국을 제도화할 때 5기 7도로 도입되었고, 메이지시대폐번치현으로 폐지되어 홋카이도를 제외하고 사라지게 되었다.
  16. [16] 공무원들에게 지방 시찰을 나가라고 했더니 현장을 안 나가고 사진을 합성해서 속여 보고하는 일도 많다. 막장.
  17. [17] 사실 당나라 조차도 순수 정통 한족이 아닌, 선비족과 피가 섞여있긴 하다...
  18. [18] 사실 방치라기 보다는, 당나라가 더 이상 발해까지 견제 할 힘을 상실했다고 봐야한다. 당나라 입장에서도 어차피 고구려를 멸망시켰더니 또 다시 비슷한 나라가 나왔다면, 차라리 명목상으로라도 책봉과 조공을 통해 서로를 인정하는게 좋았다고 봐야한다.
  19. [19] 이런 절도사 문제는 오대십국시대를 일으키게 되었으며 결국 송태조가 절도사의 병권을 술자리에서 취하게 만들고 엄포를 놓아서 빼앗는 것으로 정리된다.
  20. [20] 청나라대에는 아주 잔인할 정도로 유목민들의 씨앗을 말려버려서 결국 중국의 영원한 숙적이었던 서방의 위구르와 티베트 지역은 완전히 현재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21. [21] 원래 묘호는 후당명종 이사원이 추증한 경종(景宗)인데, 그리고 이 애종이라는 묘호는 후량주전충선양 받고 올린 시호는 애황제(哀皇帝)인데, 이는 이사원이 경종이라는 묘호를 채택하다가 중간에 취소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주전충이 올린 시호인 애자를 따서 묘호를 애종으로도 호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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