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wiki style="margin-right:10px;margin-left:30px"

이 문서는 비로그인 사용자의 편집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사유는 여기를 참고하시기 바라며, 편집을 원하는 비로그인 사용자는 편집 요청 기능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 편집 제한이 적용된 문서는 편집 요청 또한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합니다. 불법적이거나 따라하면 위험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일부 이용자들이 불쾌감을 느낄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실제 사건·사고를 설명하므로 충분히 검토 후 사실에 맞게 수정하셔야 합니다.

또한, 이 틀을 적용하시려면 적용한 문서의 최하단에 해당 사건·사고에 맞는 분류도 함께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분류 목록은 분류:사건사고 문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도대 이런 후진국 형 참사가 계속 되어야만합니까?"

엄기영 당시 뉴스데스크 앵커의 멘트.

大邱 地下鐵 工事場 가스爆發 慘事

1. 개요
2. 전개
3. 원인
4. 대책
5. 갈수록 흉흉해진 민심
6. 정신 못 차리는 정치판
7. 미비했던 언론보도
8. 기타
9. 관련문서

1. 개요

1995년 4월 28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로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상인역 공사 현장에서 일어난 도시가스 폭발 사고이다.

2. 전개

상인네거리에 있는 대구백화점 상인점[1] 신축 공사를 위해 지반공사를 하던 (주)표준개발의 인부가 실수로 가스관을 파손시켰다. 이 때 누출된 가스가 하수관을 통해 지하철 공사장으로 유입 후 괴어 있다가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 후 50m에 달하는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400m에 달하는 건설 현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 폭발 사고로 사망 101명, 부상 202명 등 300여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차량 150대 이상, 건물 80여 채가 파손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사건 현장이 학교 근처[2][3]인 데다 등교 시간이라는 점 때문에 학생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유품으로 피 묻은 책가방, 불에 탄 교과서/참고서가 많아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당시 사진 중에 피범벅이 된 책가방을 수습하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여성 자원봉사자의 모습도 있었다. 특히 근처 영남중학교 학생들의 피해가 컸는데 사망자 중 42명이 이 영남중학교 학생이다. 그나마 영남중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인근 중학교들은 그 날이 금요일이라서 모두 소풍을 나간 바람에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4] 또 영남중학교와 붙어있는 영남고등학교는 등교 시간이 사고 시간보다 20분[5] 빨라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사고 후 1년이 지난 1996년에 영남중학교 희생자 유족과 교사, 학우들이 쓴 글을 모은 책이 발행되기도 했는데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 가능하다.

또한 폭발 당시 튀어오른 복공판[6]이나 고열 때문에 크게 훼손된[7] 시신이 많아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근처 아파트 베란다 새시는 강력한 폭발에 모두 깨졌고, 꽤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도 폭발하는 굉음이 들릴 정도였다[8]. 이로 인해 근처 아파트 주민들이 깨진 유리에 부상을 입기도 했고 재산피해 역시 상당했다.

이 와중에도 여러 의인이 나타나 많은 생명을 구했다. 교통 정리를 하던 52세의 이용선 씨가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5명의 목숨을 구하고 공사장의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 내려가다가 복공판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10여m 아래로 추락해 숨졌으며 버스 기사 29세의 임해남 씨가 자신의 버스에 탄 승객들을 구하고 근처 차량의 일곱명의 시민을 구했다.[9]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2천명의 대구 시민이 몰려들어 헌혈을 했으며 하루만에 전국 각지에서 40억원에 가까운 성금이 모였다.

3. 원인

대백프라자 신축공사를 맡은 표준개발 측의 뒤늦은 신고와 대구 도시가스 측의 뒤늦은 사후 대처로 대형 사고가 났다는 점은 한국에서 발생하는 대형 참사의 기본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표준개발 측에서는 가스관 파손 이후 30분이 지나서야 대구 도시가스에 신고를 했으며 대구 도시가스 측은 또 30분이 지나서야 사고 현장 주변의 밸브를 일일이 수동으로 잠그러 출동하는 어처구니 없는 대처를 보여주었다.

사실 한국의 대부분 도시의 지하 내에 있는 파이프나 전선 등이 제대로 정비 및 관리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벼이 여겼기 때문에 발생한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주변에서 상하수관을 실수로 건드려 물이 치솟은 일은 가끔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상하수관이 아니라 가스관을 건드렸다는 것 뿐이다. 가스관 자체도 규정인 1m보다 얕게 매설되어 있었으며 시공사 측도 가스관 매설 등의 정보를 미리 받고 피해서 공사를 해야 하지만 무허가로 막무가내로 진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4. 대책

이 사고는 관계 기관의 안일한 태도로 인해 벌어진 인재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이후 관련 법 개정과 구난체계 개혁, GIS 시스템 구축 등이 이루어졌다. 법원에서는 시공사 측의 과실을 인정하여 인부를 포함한 회사 관계자 9명에게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또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 임종순도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사퇴하였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터지면서 안전불감증에 대한 대대적인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또 당시 사고 때문에 상인네거리를 지나는 시내버스들은 모두 사고 수습이 끝날 때까지 우회 운행을 했으며 당시 사고로 파손된 121번 버스[10]는 사고의 참혹함을 말해줬다. 하지만 이 121번 버스의 경우 버스 기사의 침착한 대응으로 인해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다.

5. 갈수록 흉흉해진 민심

참사가 일어나자 민심이 흉흉했다. "세계화도 필요 없으니 제발 늙어서 죽을 수 있게 해달라"는 PC통신 게시판에서 한 네티즌의 호소부터 "대구 대참사를 보고 너무 무서워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음주운전 단속에 걸린 한 운전자의 말에 이르기까지 각양 각색이었다. 진짜 웃기도 어려웠다. 이와 같은 사실을 조선일보 4월 29일자 사설 <또 대참사>는 아래와 같이 전했다.

어처구니 없는 대형 철도 사고가 나고, 여객기 추락사고가 일어나더니, 대형 여객선 사고로 온국민이 놀라고 드디어는 한강다리의 붕괴아현동 주택가 가스폭발 참사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이 있었던 기억들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지하철 공사장의 폭발사고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육-해-공의 모든 부문에서 대참사가 났으니 이제는 지하의 사고만 남았다는 국민들의 자조섞인 탄식이 드디어 현실화했다.[11]어쩌면 우리가 우리에게는 과분한 일들을 하고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자괴감마저 들 정도다.

더 나아가 같은 날 한국일보 기사에서도 "끔찍한 사고가 터진 뒤면 으레 벌어지는 정부 당국자들의 법석과 요란한 말장난에 눈길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라고 아래와 같이 말했다.

서해훼리호 사건 뒤에도 똑같은 원인으로 충주유람선 참극이 빚어졌고 수많은 '부실근절' 다짐 속에서 성수대교가 무너져 버렸다. 아현동 가스 폭발사고 때 온 나라의 위험 요소를 총 점검할 듯한 기세로 대책을 발표한 것이 불과 4개월 전이다. (중략) 국민들은 정부 당국에 대해서는 '그동안 즐비하게 내놓았던 대책이란 것들은 단지 여론 무마용의 국민 기만책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났다'고 극도의 불신과 저항감을 표시했다.

세계일보 유럽총국장 주섭일도 다음날 칼럼 <"인재(人災)의 나라" 신한국>에서 "이것은 문민정부가 '한국병' 치유에 나섰지만, 조금도 개혁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이 존중되고 인간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잡은 사회에서는 '대구 참사'같은 인재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더 나아가 같은 신문의 5월 3일자 기사에서도 수도권 출신의 한 민자당 민주계 인사의 말을 인용해 "이제는 말이 소용없게 되었다. 열성 당원들까지 정권을 탓하고 있다. 이성적 설득이 먹히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민심은 대구 시민들의 운동권에 대한 보수적 민심까지 바꿔 놓기까지 했다. 그 증거로 <한겨레21> 1995년 5월 18일자 기사에선 "학생운동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도 많이 바뀌었다. 과거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시민들은 비난 일색이었다. 학생들이 대구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대구백화점 부근을 구호를 외치며 지날 때 상인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철시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그해 5월 1일 노동절 집회에 즈음한 거리 시위에선 시민들은 학생들에게 박수와 격려를 보내기까지 했다. 또 효성가톨릭대 여대생 A는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고 하면서도 '아마 가스 폭발에 대한 항의시위를 하는 걸로 생각해 호응을 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또 한 경북대생은 '이런 우호적 분위기에서 시위를 한 건 처음'이라 생각하면서도 '시민들이 검찰의 사건 조기 종결과 언론의 축소 보도에 대해 크게 분개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6. 정신 못 차리는 정치판

한줄로 요약하면 개판 오브 더 개판

이 상황에서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태도도 딱했다. 민주당은 국회를 열자고 했고 민자당은 이를 정치공세로 일축했다. 5월 1일에 민주당은 의총 성명에서 "과거 군사정권마저도 이보다 훨씬 작은 사고에도 즉각 국회를 소집했었다"면서 "국정조사만으로 대구 문제를 마무리하자는 민자당의 주장은 국회 문을 아예 닫자는 것"이라 주장했다. 민자당 사무총장인 김덕룡이 "야당이 이번 사고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하자, 민주당 총재 이기택은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며 "김 총장이 요즘 이상해졌다"고 개탄했다.

다음날인 5월 2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 초/재선 의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뒤 오찬 자리에서 "대구 사고는 몇 사람의 무책임한 짓 때문에 아까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정부도 공동의 피해자다"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미국에서는 아직도 76명의 실종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12] 우리나라 같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사고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비난하기는 커녕 오히려 클린턴의 인기가 올라가더라"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 서강대 교수 박호성은 5월 25일자 주간조선에서 "누군가는 지금 우리의 김 대통령을 '무면허 운전사'에 빗댄다. 그리고 이른바 문민 체제를 '뺑소니 차량'과 견주기도 한다"고 하여 정부도 피해자로 인식하는 김영삼의 상황 인식이 스스로 무정부 상태를 자초해낼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수사까지 부실했다. 대구의 시민단체들은 축소 수사에 거세게 반발했으며, 5월 2일에 대구 내 40여 개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한총련 산하 대경총련 소속 대학생 1,500여 명은 '허구적인 세계화 논리 분쇄와 사고정권 퇴진을 위한 결의대회'를 열기까지 했다.

또 당시 보수 언론들은 친여적일 망정 그래도 독자들이 지켜보는 눈이 있어서인지 정말 너무한다 싶으면 정부 여당까지 비판하기도 했다. 참사 당시 민자당이 취한 태도가 그런 경우에 속했다. 당시의 언론들은 민자당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 증거로 조선일보 5월 2일자 사설 &lt;비전문가 판치는 세상&gt;에서는 당시 한국가스안전공사의 임원 중 임종순 사장을 비롯한 네 명이 청와대나 민자당 출신이고 오직 기술이사 한 명만 본사 부장을 지낸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경향신문 5월 3일자 역시 기사 제목 그대로 &lt;소 잃고 외양간도 안 고친다&gt;라고 비판했는데, 아현동 사태 당시의 대책이 재탕되어 발표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같은 날 조선일보도 사설 <민자당 도망가기>에서는 "민자당의 태도가 해괴하고 고약하다"고 하여 "사람이 2백명씩이나 죽임을 당하거나 중상을 입었는데 그것을 국회에서 논의하자는 것을 이 핑계 저 구실로 막으니, 국회는 대체 무엇 하는 곳이며 집권당인 민자당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또 중앙일보 5월 4일자 사설 &lt;문제있는 여권의 현실인식&gt;에선 "우리는 이미 그저께 왜 이 사고를 국회에서 다루지 못하느냐고 지적한 바있지만 여당은 며칠씩이나 국회를 공전시키면서까지 이 사고를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다음날 사설 &lt;대국 못 보는 집권 여당&gt;에서도 비슷한 비판을 했다. 심지어 언론인 김진규는 국민일보 5월 10일자 칼럼에서 '여당의 한심한 국회 대응'을 지적하며 "2백여 명의 무고한 시민이 죽고 다쳤는데도 '뒤에 국조권 발동......' 운운하며 야당에게 대정부 질의조차 못하게 가로막는 등 임시국회를 공전하는 건 국민을 깔보는 처사"로 간주했다.

7. 미비했던 언론보도

"성수대교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왜 그렇게 약해요. 그런 식으로 하니 대형 참사가 계속 터지는 게 아니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XX놈이라니까."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북아현동 도시가스 사고 때는 하루 종일 보도하면서 대구에서 발생한 참사에 대해서는 왜 보도를 하지 않습니까?"

- 참사 당시 세계일보에 걸린 독자들의 전화 내용 중 일부.

위와 같이 정치판이 개판인 데다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텃밭인 대구에서 일어난 사고라 학생이 많이 죽은 대형사고 임에도 언론이 축소보도 했다는 의혹을 많이 받았다. 또 지방에서 일어난 일이라 대형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취재가 어려웠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경우도 있었는데, 당시 대경권 지역방송국이 당시 KBS, MBC, CBS 3개가 존재했고[13] 또 이를 취재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안가는 변명에 불과하다. 이전에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사고 당일에는 하루종일 뉴스특보를 했던 방송 3사라 국민들의 화는 들끓었다. 시청료 거부운동 재현이 안된게 용할정도 그래서인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틀 뒤에 벌어진 그 대형참사 때는 철야방송까지 하며 논란을 종식시키려 노력했다.

특히 공영방송 KBS의 태도는 더욱 지탄을 받았는데 1TV가 사고 당일에 10시 15분에 방송을 끝냈고 오후에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고교야구 준결승경기를 생중계해서 빈축을 샀었다. 후일담에 의하면 KBS는 당일 오전 11시부터 공보처에 뉴스특보 방영목적으로 방송시간 연장허가를 신청했는데도 허가가 나지 않았고 그럼 자막이라도 내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해서 허가받고 자막속보를 낸 시간이 오후 2시 2분부터였다. 속보방송 승인은 오후 2시 50분에야 얻어냈고 55분부터 13분간 뉴스특보를 한 게 전부였다.

이는 당시 공보처의 방송국 허가장 일부 규정 때문이었는데 지상파가 정파시간에 긴급속보를 때려야 될 경우에는 사전에 공보처에 얘기를 한 뒤 허락을 받아야 방송을 틀 수 있었다. '방송질서 유지' 명목이었지만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한다는 논란이 일었고, 결국 김대중 정부 시절에 이 시책은 없어졌다. 1994년 10월 당시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건 당일에 MBC와 함께 9시 뉴스 시간에 충주호 참사보다 성수대교 붕괴사고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담화를 헤드라인으로 보낸 바 있었고, 12월 발생한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당시에도 오후 방송 개시 5분 전부터 뉴스속보를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편성 관련자가 징계를 받은 전적이 있어서 KBS는 위에는 높으신 분들 눈치보느라, 아래에서는 국민들의 눈치를 보느라 이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MBC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공보처에 아침 방송시간 20분 연장[14]을 신청한게 전부였고, 그날 저녁 인기가요 베스트 50도 정상적으로 생방송했다. 다만 이 프로그램의 당시 MC였던 신은경-김지수가 오프닝에 이번 참사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멘트를 날리긴 했지만... 방송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이외에도 지상파 방송 3사 모두 사고 당일 저녁에 예능프로그램을 그대로 방송해 욕을 먹었다. 결국 대구시민들은 들고 일어나 5월 4일에는 방송개혁국민회의 선거방송대책본부는 서울시청 뒷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대구참사 왜곡방송 규탄집회'를 열었고, 대구에서도 며칠 동안 시민단체 중심으로 시위를 벌였으며 KBS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까지 걸었으나, 1997년 4월에 서울지방법원에서 보도가 별로 안되었던건 알권리 침해가 아니었다며 패소판정을 받았다.

사고당일 MBC 뉴스특보 방송장면. 대구MBC 50년사에서 발췌. 좌측 서울 스튜디오에 나오는 이는 손석희 앵커다.

"선배님 큰일났습니다. 여기에 도시가스가 폭발해 다 날아갔습니다"

"흥분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거 다 얘기해봐"

"지하철 공사장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해 복공판이 50미터까지 튀어올랐답니다. 사람들 시체가 여기저기 있어요. 버스도 불에 타고 트럭, 택시, 승용차 수십 대가 박살났습니다. 지하철 저 아래로 떨어졌어요. 건물도 눈에 보이는 건 죄다 부서졌어요."

- 당시 첫 취재내용을 보고하던 대구MBC 오태동[15] - 김세화 기자의 대화 중.

"여긴 지금 상인네거리. 지하철 공사장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복공판이 완전 붕괴되었습니다! 사망자, 부상자가 도대체 몇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 제 옆에도 시신이 있습니다!"

- 사고 지점에 있던 대구MBC <푸른 신호등> 통신원 전화연결 중.

한편 사건 보도는 MBC가 제일 빨랐다. 사고 당시 방송을 막 끝내려던 참이었던 대구MBC 라디오 <푸른 신호등>[16]에서 후반 CM을 내보낸 뒤 클로징하려는 순간 여기저기서 제보 전화가 걸려 왔고, 그 중 통신원 1명을 전화로 연결한 것이 사건 보도의 시작이었다. 같은 시간 여러 시민들의 제보를 받은 보도국에서는 마침 사고지점 근처를 지나가던 취재 기자를 통해 제보 5분만에 사고를 파악해 속보를 내보냈다. 개국 초기이던 케이블 뉴스채널 YTN도 24시간 동안 뉴스를 내보냈다.

방송에서는 상당 시간을 침묵하고 있었지만, 당시 PC통신 하이텔에서는 사고 현장이 보이는 아파트 등의 사용자, 해당 사고현장을 지나온 사용자 등을 통해 게시판에 거의 생중계에 가까운 현장 목격담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중앙언론을 통제해도 더 이상 정보의 전달을 막을 수 없게 된 시대가 온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의 힘이 어마어마함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현실화시켜 보여준 사건이었다.[17]

8. 기타

강준만 교수는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2권에서 해당 참사에 대해 언급하며 당시 온갖 대형 사고들을 겪으면서 드러난 김영삼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불운 이전에 진정성의 결여였는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

현재 이 사고의 추모 공간으로는 롯데백화점 상인점과 건너편 교복 대리점들이 사이에 있는 횡단보도 중간 지점 고가도로 하단에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위령비가 있다. 또 달서구 월성1동 학산공원 내부에 위령탑이 있어서 여기서 추모 행사를 벌여 왔으나 공식적인 추모 행사는 2005년 10주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열지 않았지만, 20주기인 2015년에 다시 공식적인 추모 행사를 열었다. 사고로 학생들의 피해가 심각했던 영남중학교에서도 부속 건물에 추모 공간을 마련해 놨다.

대구의 지하철 관련 사고 중 가장 먼저 발생한 인명 사상 사고다. 이후 2000년에 신남네거리 도시철도 공사 현장 붕괴 사고가,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으며 2011년 11월 8일에는 수성구 범물1동 동아백화점 수성점 앞 대구도시철도 3호선 공사 현장에서 굴삭기가 작업하던 도중 도시가스관을 파손하여 가스가 누출되었다. 다행히 신속히 밸브를 차단하고 복구해서 추가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하마터면 제2의 상인동 참사가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도시가스관 등의 지하 매설물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고 작업하다 보니 항상 참사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길을 가다보면 이곳은 도시가스 관이 매립되어 있으니 공사하려면 연락하라고 팻말을 설치해놓은걸 볼수 있다.

여담으로. 흠좀무한 것이 참사 이전에 이미 " 에서 사고가 한 번씩 터졌으니. 이제 남은 곳은 땅 속 뿐" 이라는 말이 돌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저 "그게 무슨 우스갯소리냐"흘리는 농담이었겠지만, 결국은 말이 씨가 된 것인지 결국 땅 속에서도 참사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18] 이 사고 후 두 달 뒤에 엄기영 앵커의 이 멘트는 서막에 불과했다는 사고가 터졌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러한 역사는 청산되지 않고 반복되다 못해 오히려 더해졌다.

당시 사고로 대구 영남중학교에서는 교사 1명과 남학생 42명이 목숨을 잃었고, 아들을 잃은 부모들 중 12쌍의 부부가 먼저 떠난 자식의 동생을 낳았다. 놀랍게도 태어난 12명의 아이들 중 11명이 남자아이였으며, 아이들과 부모들은 매년 만나 우애를 키워가고 있다고 한다. 이 중에는 영남중학교에 다니던 쌍둥이 아들 김준희, 김준형 군이 둘 모두 등교하던 중에 사고로 사망해서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김상돈 씨 부부의 늦둥이 아들과 당시 대구대 강사였던 유족회장 정덕규 씨의 늦둥이 아들도 있다. 영남중학교는 1997년에 추모 공간인 세심관을 건립하여 희생자들의 영정을 모시고 사고 자료를 전시하면서 추모 행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 영정사진 훼손 등이 심해지자 2015년 20주기 추모식 이후 추모 공간을 교육용 시청각실로 리모델링하고 영정을 모시는 공간은 철거하는 한편, 희생자들의 얼굴을 동판으로 제작하여 건물 중앙에 모시기로 유족들과 협의했다. 리모델링은 2015년 7월부터 이루어질 계획이라고 한다[19]

대구 출신 중 사고가 일어난 상인동과 그 근방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이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일화와 이야깃거리를 지니고 있다. 당시 영남고등학교의 어떤 교사가 학교를 땡땡이친 학생이 사고에 휘말려 죽은 것으로 여겨 노심초사하다가 건들거리며 늦게 통학한 학생을 보고 한 대 쥐어박았다던가, 평소와는 달리 늦잠을 자거나 차가 밀려서 용케 살아남았다던가, 승용차가 엔진 문제를 일으켜 브레이크를 걸면 시동이 꺼져버려서 어쩔 수 없이 신호를 받지 않게 돌아갔다가 사고를 피했다던가, 앞산순환도로에서 내려오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 커다란 게 바로 앞에 떨어져서 깜짝 놀라 차를 세우고 보니 커다란 복공판으로 추정되는 철판이 있었다던가와 같은 간발의 차로 사고를 면한 이야기들이 대다수다. 특히 영남고등학교나 영남중학교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짬날 때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아무래도 사고 현장 바로 옆에 있던 학교인 데다가 사상자도 많이 나왔고, 해당 학교가 사립 학교라 장기 근무를 하는 교사도 많아서[20] 사고를 직접 본 교사들이 직접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대구MBC 라디오 프로그램인 "푸른 신호등"의 당시 진행자였던 지역 연극배우 겸 MC인 류강국 역시 이러한 해프닝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방송을 끝낸 뒤 또 다른 공포에 휩싸였는데, 사고 지점 근처에 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어린이집을 다니던 5세 딸이 아침에 타는 통학버스가 상인네거리를 통과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으로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중이라 혹시나 해서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를 든 이는 바로 딸이었다. "아빠야~ 여기 꽝했어"가 딸이 건넨 첫 마디였다고. 알고 보니 그 날따라 차량 정체로 어린이집 차가 늦게 왔고, 차를 타기 전에 폭발 사고가 나서 어린이집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공사 발주처인 대구백화점은 판매점 확대와 외지 업체 방어 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여 상인점을 건립했다. 하지만 이 사고로 보상금만 400억 원을 지급하는 등 회사 전체가 큰 위기에 빠져 부지를 내놓아야 했고, 결국 해당 부지가 롯데쇼핑에 낙찰되어 현재의 롯데백화점 상인점이 됐다.[21] 해당 부지를 우선적으로 환매할 수 있었지만 1997년 외환 위기 때문에 끝내 되찾지 못했고, 강력한 경쟁자인 롯데백화점을 대구 시내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관련 기사 여러 모로 대백에게는 굉장히 쓰라린 기억이다.

9. 관련문서


  1. [1] 2004년 롯데백화점 상인점이 됐다. 보상금으로 인한 지출 증가로 롯데에 매각.
  2. [2] 당장 근처만 해도 영남중학교, 영남고등학교, 상원고등학교(당시 대구상고), 경북기계공고 등이 있다.
  3. [3] 이 중 영남중, 영남고, 대구상고는 위의 사진에서 보인다.
  4. [4] 예외로 그 날 화원유원지로 소풍을 간 성서중학교 학생들 중 일부는 죽전동, 감삼동, 용산동에서 화원으로 가기 위해 사고현장을 경유할 확률이 컸으므로 사고에 노출될 수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개인 휴대 통신기기가 없었기 때문에 소풍간 아들의 안위를 확인할 수 없었던 많은 학부형들이 화원유원지로 울며 찾아와 아들을 찾았었다. 정작 교사와 학생 대부분은 사고 소식 자체를 모르거나 알아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몰랐던 터라 소풍 분위기는 매우 평화로웠다고 한다.
  5. [5] 7시 30분.
  6. [6] 지하철 공사 구간이나 지하차도 공사 구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스팔트 대용 대형 금속판을 말한다. 300kg 가까이 나가는 그게 폭발로 튀어 올랐다가 떨어진 거다.
  7. [7] 팔다리는 물론 머리까지 잘려진 시체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발간된 모 월간지 기사에 따르면 중3 남학생의 시신을 염습하는 과정에서 뒤통수가 깨져 피가 콸콸 나오는 바람에 장의사가 애를 먹었다는 일화도 있었다.
  8. [8] 2km정도 떨어진 구마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근처에서도 굉음이 들렸고, 직선거리로 3킬로 이상 떨어진 감삼동 일대에는 매우큰 굉음과 더불어 상가의 셔터와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였으니 더 멀리까지도 굉음이 들렸을 것이다.
  9. [9] 이 버스 기사는 하술하는 121번의 버스 기사였다.
  10. [10] 지금은 폐지된 646(-1)번의 시내버스의 전신이다.
  11. [11] 그리고 그 말은 8년 뒤에도 재현되었다!!!
  12. [12] 같은 시기에 발생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를 가리킨다.
  13. [13] SBS, PBC, BBS가 없는 이유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당시 SBS는 수도권에만 방송을 송출하며 방송국도 수도권에만 있었으며 지역방송국의 역할은 지역민방에 맡겼는데 산하 대경권 지역민방 TBC개국 2주 전이었고, 라디오 방송사 PBC와 BBS 역시 대구지역국 개국 1년 전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대경권에는 SBS, PBC, BBS가 아예 없었다.
  14. [14] 당시에 평일 오전방송은 10시에 종료하고 정파했다.
  15. [15] 대구MBC의 전 기자. 이후 보도국 정치부장을 맡았다가 2012년에 퇴사하고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16. [16] 대구MBC 라디오에서 지금의 <시선집중> 3,4부 시간대에 방송했었던 출근길 교통정보 프로그램. 대구교통방송이 개국하고 얼마 후에 폐지됐으며, "여론현장"으로 대체됐다.(현재는 주중 아침 8시 35분으로 이동)
  17. [17] 그러나 당시에는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불온통신의 단속)이라는 벽이 있어서 정치와 시사 관련해서 민감한 글을 올리면 정보통신부 장관 명령이나 통신업체의 모니터링에 의해 아이디가 정지되거나 글이 삭제되었다. 그해 6월 6일에 하이텔 한국통신 노동조합 CUG가 폐쇄된 것도 그 이유다.
  18. [18] 공교롭게도 상인네거리 사고현장 바로 앞에 대구도시철도공사가 위치해 있어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에도 유족들이 이곳을 찾아와 항의 집회를 열었다. 또한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사고열차를 견인해와서 시신 수습을 한 월배기지 또한 상인네거리와 그리 멀지 않다.
  19. [19] 사실 추모실은 계속 시청각실로 활용되었고 무대에 흰커튼으로 영정사진들을 가려놓아 로비나 건물 외관 정도를 제외하면 추모관이라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일부 방송장비를 만지는 인원만 방송실 내의 당시 PC통신에 관한 기록물이나 사진 자료를 보면서 추모 공간임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20. [20] 5년마다 전근을 가는 공립과 달리, 사립학교는 본인이 원하고 별 문제가 없으면 한 학교에서 퇴임할 때까지 평생 근속할 수 있다.
  21. [21] 실제로 롯데백화점 상인점은 어딘가 타 시도에 위치한 롯데백화점과 다르게 외형이 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외벽을 손 봐도 뼈대가 대구백화점이 만든 형태라 그런 듯. 다만 대백은 삼풍과는 달리 회사만큼은 살아남아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나 과거의 위상은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sta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