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아 공영권

일화만협조 천하태평(日華滿協助 天下太平)

일본(日), 중화(華), 만주(滿)가 화합하여 서로 도우면 온 땅이 크게 평안해진다.[1]

▲ 사진은 대동아 공영권의 범위를 나타내는 10전짜리 우표. 1942년부터 1947년(!)까지 썼다.

大東亞共榮圈[2] /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1. 개요
2. 유래
4. 실체
5. 대동아 공영권에 관한 일본의 구체적 계획
5.1. 식민지
5.2. 괴뢰국 + 동맹국
6. 21세기의 대동아 공영권
7. 창작물에서
8. 관련 문서

1. 개요

전시 국가 독점 자본의 폭력적인 블록 경제 체제

- 권오신, 태평양전쟁기 일본의 필리핀 점령과 지배 대동아공영권의 그림자 - p.20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쇼와 시대의 일본 제국 정부와 일본군이 고안해 보급한 개념. 일본 자국을 제외한 해당 국가에서는 "개념"으로 봐주기도 싫을 정도다. 동아시아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을 중심으로 서양 열강의 식민 지배를 몰아내고, 서로 번영평화를 누리자는 내용의 일본판 레벤스라움이다. 일본 제국의 팽창주의와 생존권을 보여주기 때문에 일본 제국이 파시즘 국가였다는 주장의 매우 결정적인 근거 중 하나다.

참고로 이 이름은 각 한자가 좌우 대칭이 되도록 지었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의 예에서 보듯 좌우 대칭으로 갈라지는 한자가 길하다고 여겨졌기 때문. 圈이 조금 비대칭이지만.

2. 유래

이 개념은 메이지 유신 이래로 꽤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다. 그 내용은 서구 국가 대신 일본이 아시아 각국을 통치하면 해방이라는 것이다.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도 쇄국 정책을 펴는 조선이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본이 나서야 한다(통치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다만 서구 열강들에게 당시 조선은 식민지로 삼기에는 이득이 있는 땅은 아니었다.

김옥균도 이런 주장을 듣고 일본에 기댄 개화를 하려다 실패했다. 이후에도 이런 사상은 일본 극우 세력 안에서 명맥이 이어졌고, 이들은 아시아의 해방을 위한다는 논리로 중국쑨원과 그가 이끄는 신해혁명을 돕기도 했다. 그리고 2.26 사건의 주모자였던 기타 잇키나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시와라 간지 같은 인물도 이런 소리를 했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이 당시까지는 아시아주의로 불렀다.

처음에는 이렇게 근대화를 표방하면서 시작했음에도 나중에는 일제의 막가파식 정신주의를 상징하는 사상이 되었다는 점도 병맛스러울 만큼 모순이다. 다만 일제가 본격적으로 똘기를 드러내기 이전에는 서양세력의 수탈에 지친 동남아나 중국 등지에서 지지를 보내기도 했고 한국에서도 진심으로 이 이야기를 믿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안중근이 이토 사살 후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에서도 "서양인의 압제를 끝내고 아시아가 다 같이 살자는 좋은 대의는 좋았지만 스스로 망쳐버렸다"라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사실 그 좋은 대의였다는 것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백인의 의무의 일본 버전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3. 제국주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은 1940년 7월, 일본이 국책요강으로 '대동아 신질서 건설'을 내세우면서 처음 나왔다.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에는 이 전쟁을 "대동아 전쟁"으로 부르기로 결정했고, 같은 달 12일에는 전쟁 목적이 '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있다고 주장했다.

제국주의 시대의 일반적인 식민 통치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대표적으로 영국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시기에 현지의 지배 계층 및 지식인들을 적극적으로 영국에 유학 시켜주면서 정신적으로 회유하던 것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 대동아공영권은 실제 여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통치 정책과 그 정의가 조금 다르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통치 정책이 더욱 원활한 식민 통치에 목적을 둔다면, 대동아공영권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식민지들의 독립이 점차 늘어나자 일본이 식민지의 통치권을 지키려고 주장한 개념이다.

실제로 이런 식민 정책은 유화적인 식민 통치 정책의 일환으로서, 식민지의 탄압을 줄여나가면서 하는 통치권의 유지가 매우 핵심적인 전략이었다. 하지만 정작 일본은 이 당시 겉으로는 유화 정책을 펴면서 뒤로는 물자 수탈 및 독립운동가 탄압이라는 통치 기조를 유지했다.

이 개념이 등장하기 바로 직전에 일본은 비슷하게 식민지인과 일본인의 단합을 호소하기 위한 비슷한 개념 또는 표어를 주창했는데, 1930년대 설립된 협화회를 비롯한 관제 단체들에서 주창한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통치 이념도 비슷하다. 이 이념의 골자는 일본인만주인, 몽골인, 중국인, 조선인 다섯 민족이 힘을 모아 왕도낙토라는 지상락원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 말을 실제로 철석같이 믿은 사람이 바로 이시와라 간지다. 이 양반은 오족협화를 이룩하기 위해 만주에 "오족협화의 지상낙원"을 만들고자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온 나라가 바로 만주국이다.

하지만 대동아공영권이든 오족협화든 이러한 식민 지배 이념들은 큰 파급효과가 없었다. 특히 일제 치하 36년의 식민 통치로 갖은 굴욕을 다 겪은 조선난징 대학살로 2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중국 등 주변 국가들은 이 사상들을 더욱 헛소리로만 들었다.

4. 실체

1943년 11월 5, 6일 일본에서 열린 대동아회의에 참여한 각국 정상들. 왼쪽으로부터 버마의 바 마우, 만주국의 장징후이, 중화민국 남경 정부왕징웨이, 일본 제국의 도조 히데키, 태국의 완 와이타야쿤, 필리핀의 J.P.라우렐, 자유 인도 임시정부찬드라 보세.

일본은 마치 G7 회담처럼 "대동아공영권"의 국가들의 정상을 모아서 회의를 했다. 이 회의는 이른바 "대동아회의"라고 불린다. 여기에서는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아시아를 영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렇게 "해방자"를 자처한 일본군이 대동아공영권 점령지에서 한 짓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국에서 벌인 학살은 너무 유명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갖은 차별, 학살, 폭행, 약탈과 강간을 저질렀다.

일단 대동아공영권의 명목상 개념부터 진심과는 거리가 멀었고, 말과 행동이 정반대였으니 대동아공영권의 지배 아래 있는 나라의 국민 가운데 일본군을 진심으로 해방군으로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본 정부일본군의 실제 의도와 달리 이를 철석같이 믿고 구호에 맞게 행동하려고 했던 일본인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도 동남아 국가들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고 주장했다. 또 일본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구 열강의 군대를 상대로 승승장구하던 전쟁 초기에는 동남아시아 식민지의 민중들도 일본군을 환영했다고.

얼마 못 가서 본색이 드러난 일본군이 마구잡이로 약탈을 일으키자, 식민지인들은 도리어 연합국 측에 협력해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필리핀을 들 수 있다. 조선에도 러일전쟁 때는 오랑캐를 몰아내 준다며 일본군의 승리를 바랐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경술국치 뒤에는...

한편 이 개념에 편승해 자기 나라를 독립시키려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찬드라 보세 같은 인도의 독립운동가는 일본군에 협력해 인도 국민군을 결성했고, 일본군과 함께 영국으로부터 조국 인도를 해방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희대의 팀킬로 역사에 남은 임팔 작전으로 귀결되었다. 당연히 일본은 정말로 대동아공영권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으며, 찬드라도 정말로 일본군이 해방군임을 믿지 않았다.

서로 이용하는 관계라고 하지만, 당시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 솔깃할 이야기라서 독립운동가이자 인도네시아 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도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는 일본의 약속을 믿고 자국의 지하 자원을 일본에게 공여하거나, 인도네시아 청년들을 징병하여 일본군을 돕게 했다.

역시 얼마 못 가 해방군은커녕 네덜란드와 자리만 바꿔 인도네시아를 지배하려고 했던 일본의 야욕이 드러났기에 인도네시아에서도 반감이 심했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이 거국적으로 들고 일어나기도 전에 일본이 패망해서 별일은 없었다.

종전 뒤, 몇몇 일본군 육군 장병들이 일본으로 귀국하기를 거부하고 현지 독립운동가들과 합류해서 다시 돌아온 네덜란드에 항거하는 데도 기여했고, 이들은 인도네시아 국립 묘지에 안장[3]하고 국가유공자로 추대하는 등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는 평판이 좋다. 그래서 일본 우익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접한 뒤, 자기들의 식민 지배를 인도네시아인들이 긍정했다고 착각하고는 식민 통치 시기의 인도네시아 주둔 일본군을 해방자로 미화하고 전후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에 일본군 출신 주인공들이 합류하는 내용의 메르데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가 인도네시아에서 개봉하자 전국적인 반일 운동이 일어나 인도네시아 내 일본 기업들의 매출이 반토막 났다. 결국 일본 기업들은 분노 어린 반발에 일찍 막을 내려야 했다. 영화도 개차반이었던 게 일본군에게 인도네시아인들이 충성하며 발에 입을 맞추지 않나, 아주 엉터리였다. 이런 설정을 쓴 게 그냥 동남아에선 발을 신성하게 여긴다고 대충 알고 넣은 것인데 이게 만일 미얀마나 태국 같은 나라라면 맞기는 하다. 상대방 발을 씻어주는 게 굴복이다. 그만큼 당신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다만 정반대로 네놈은 내 발이나 씻어라! 라고 하면 욕이나 도발이 된다.) 문제는 인도네시아는 무슬림이 많은 곳이며 이슬람에서는 발을 상대에게 보이거나 발에 관련된 걸 치면 네놈은 내 발 밑이라고 죽어라 모욕하는 의미가 된다.[4]

만일 일본이 정말 일본 극우들의 주장처럼 조선인들을 형제처럼 대우했거나, 진정으로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해방시키고 친구가 될 생각으로 움직였다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수탈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중일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침략의 의도가 뻔한 상황에서 그럴싸한 논리를 내세우는 것 자체가 표면적인 명분을 내세우는 기만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5. 대동아 공영권에 관한 일본의 구체적 계획

1941년 12월, 도조 히데키의 명령으로 일본 육군성해군성<대동아 공영권에서의 토지 처분안(大東亜共栄圏における土地処分案)>이라는 문서를 작성한다. 이 문서에는 대동아공영권의 범위가 중국, 동남아뿐 아니라 북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지배영역은 각지의 총독부괴뢰국으로 분류하여 계획은 구체적으로 세워 놓긴 했다.

해당 문서에 나오는 대동아 공영권의 범위. 회색 부분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실제로 점령했던 영토이며 다만 태국의 경우 일본의 영토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래쪽에 잘려진 부분은 남극이다. 저 지도에 나오는 일제의 아시아 대륙 서쪽 끝 경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2차대전 당시 일제는 나치 독일과 함께 세계정복을 완료한 다음, 동경 70도선을 경계로 &quot;국경&quot;을 정하려고 했다. 분할한 뒤에는 패배시킨 유럽 국가들과 1960년대에 결전을 벌인다는 구상까지 있었다고 한다.

5.1. 식민지

5.2. 괴뢰국 + 동맹국

괴뢰국들은 대동아회의에 편입할 구상이었다.

위의 아메리카 지역 총독부 구상에서는 일본이 나치 독일과 함께 북아메리카 침공을 하여 성공할 경우, 태평양 해안의 주들을 괴뢰국으로 편입하는 방안도 검토되었다. 미드 높은 성의 사나이가 이 구상이 실제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6. 21세기의 대동아 공영권

2013년 아베 신조 총리의 2차 내각이 등장하면서 일본 우익들을 중심으로 "대동아공영권은 정당했다!"는 주장이 기어 나와서 큰 우려를 낳았다. 세계시민주의가 널리 퍼지는 21세기에 전쟁 세대에게 겨우 통하던 대동아공영권은 퇴행적이라는 비난을 당연히 받는다.

21세기에 대동아공영권이라니 이게 무슨 삽질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이는 1995년 일본의 전쟁범죄에 사죄했던 무라야마 담화의 한계에서 온다. 95년 당시 무라야마 담화에서 사죄한 "전쟁범죄"의 범위는 중일전쟁난징대학살뿐이고 태평양 전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일본에서 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태평양 전쟁을 "미국이 다짜고짜 일본에 석유금수조치를 하더니 일본에 원폭까지 날린" 일종의 스캔들로 잘못 인식한다. 괜히 일본에서 소위 "대동아전쟁"에 대해 얘기할 때 "철광석석유" 타령을 하는 게 아니다. 타국 입장에서는 갑자기 생뚱맞은 소재를 꺼낸다고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태평양 전쟁을 서구에서 일본의 생존을 위협한 사건으로 본다. 러시아식 유머일까? 하긴 생존을 위협 당할 정도로 반격 당해 두들겨 맞기는 했다.

다만 2015년에 들어서 이러한 주장은 다시 쏙 들어갔다. 2015년의 아베 신조 내각은 중국의 견제에 온 힘을 쏟는데 괜히 대동아공영권을 다시 주창하여 대중국 외교의 동맹국인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면 멍청한 짓일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 일본의 견제에도 점점 성장하니 앞으로도 주창할 일이 별로 많아질 것 같지는 않다. 중국은 일본의 극우적 시각에 치를 떠는 나라이니 중국의 성장은 일본 극우들에게 결코 좋을 일이 아니고, 앞으로도 일본은 국력이 점점 커지기만 하는 중국의 난징대학살을 비롯한 태평양 전쟁 관련 태클을 수시로 감당하느라 정신 없어질 확률이 높다.

그 와중에 일본 정부에서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의 유서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재점화했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는 "내일은 목숨이 없다"는 대원들의 절박함이 담긴 유서가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등재를 신청했다고 하지만 옥쇄라는 키워드가 늘 따라다니는 대동아공영권을 생각하면... 그리고 아직 과거 청산이 되지 않아 일제와 관련한 극우적 발언이 아시아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인 판에, 하필 일본의 정체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카미카제를 골라서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함은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주변국에게 대놓고 배째라는 식으로 맞불 놓을 심산으로 한 짓일 뿐이다. #

결국 자살 특공대원들의 유서는 심사에서 광탈해버렸다. # 그러나 논란이 사그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 것이, 아베 신조 총리는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나는 2년 안에 모든 기득권을 박살내겠다."는 발언까지 해가며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태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2010년대 일본의 외교적인 돌발 행동들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물론 버블경제 전성기 시대도 아닌 황혼기의 일본이 단독으로 세계의 기득권을 박살 낼 가능성은 없을 뿐더러 중국이 일본의 이런 의지와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요원한 일일 뿐이다.

그러다 몇 해 지나고 나서는 역시 일본이 피해국이라고 주장하는 시베리아 포로들의 수기 등을 세계기록유산 후보에 올렸으나 이마저도 결국 탈락했다. 더더욱 우스운 것은 기득권을 박살 낸다는 것이 그러니까 미국이나 승전국 기득권이란 셈이라서 나치의 전쟁 옹호도 세계기록유산에 오를 일이라고 중국에서 비웃는 것이니 유네스코에서도 당연하게 반발할 망언이나 한 것이다.

2015년 들어서는 엉뚱하게도 웹 게임 쪽에서도 논란이 터졌는데, 해당 게임은 다름 아닌 도검난무-ONLINE-. 안 그래도 극우 논쟁에 휘말려 있던 참이라 파장이 더욱 커졌다. 자세한 사항은 도검난무-ONLINE-/사건사고 문서 참고.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에서는 일본어를 국적 불문하고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일본인이 없는 대화에 일본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농담 삼아서 대동아공영권이 실행되었다고 이야기한다.#1#2

7. 창작물에서

  •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는 네아 소 코프로스(신 대동아 공영권)이라 하여 동북아시아가 속해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원래 역사와 달리 한국에서 시작되어 수도는 네오 서울(신 서울)이라고 하며 군대의 규모가 200만 명 정도, 지도자 명칭은"주체"라고 하고 전세계가 천재지변 방사능 오염과 해수면 상승 등 문제를 겪고 있지만 연방의 경우 괜찮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디스토피아 세계의 초 거대 기업 국가로 나온다.

8. 관련 문서


  1. [1] 조선이 없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들에 대해 첨언하자면 저 포스터는 중국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이미 조선은 충분히 식민지화가 되어 영토상으로만은 하나로 취급했으니
  2. [2] 정자(구자체) 기준. 신자체로는 大東亜共栄圏
  3. [3] 이 중에는 조선 출신도 있다.
  4. [4] 실제로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다룬 세계에서 하지 말아야 할 상식적인 행동이란 기사에서 모로코 가서 사업하던 미국 바이어가 다리를 포개어 앉아 발바닥을 무슬림 사업가들에게 보이자 그들 얼굴이 확 변하며 계약을 취소해 큰 손해를 보았다고 할 정도였다고 나온 바 있다. 신발로 상대를 치는 것도 모독이다. 조지 부시에게 신발을 던진 이라크 기자도 대표적이다. 그런데, 발에 입을 맞추는 인도네시아인이 나오니... 또한 인도네시아 언론이 비난하여 보도한 것도 컸다.
  5. [5] 옛 하와이 왕국만주국을 모델로 해 재건하는 것도 검토되었다. (화태청을 모델로 한) 하와이의 순조로운 편입은 1920년 기준 하와이 인구의 약 43%(약 16만 명)를 차지하는 지역 일본인 공동체의 영향력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하와이는 식량 공급을 자급자족할 것이었고, 설탕과 파인애플을 재배하는 하와이의 5대 사탕수수 기업은 해체될 예정이었다. 하와이가 일본에 합병될지, 꼭두각시 왕정이 설립될지,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패가 될지 논의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6. [6] 호주와 뉴질랜드는 일본 이주민을 2백만 명까지 수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호주를 일본에 합병하는 것이 아닌 미얀마, 필리핀과 같은 위성국으로 두어 상호 평화를 추구했다는 증거도 있다.
  7. [7] 고아 주벵골 만을 잇는 선 이남
  8. [8] 멕시코의 1942년 5월 22일, 페루의 1944년 2월 12일, 칠레의 (나치 독일이 거의 전쟁에서 져 갈 무렵의)1945년 5월 11일의 대일 선전포고는 서반구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세 환태평양 국가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두 일본과 적대 관계에 들도록 했다. 일본의 손에 들어갈 영국과 프랑스 소유지들의 미래는 승리한 추축국 나치 독일과의 협상에 놓일 것이었다.
  9. [9] 아닌 게 아니라, 환단고기에서 주장하는 '동이족은 모두 같은 민족이다'라는 이야기는 대동아공영권과 일맥상통하는 면을 지니고 있다. 애초에 환단고기를 지어낸 이유립이 일제 말기 친일 유교 단체 수장을 맡았던 이력도 있으니 그 시기에 일제의 프로파간다에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이 유력한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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