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일치시기

타이완 섬의 역사
台灣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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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일치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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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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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두 왕국

대만
臺灣

일본 제국의 식민지

국기

국장[1]

1895년 4월 17일 ~ 1945년 10월 25일
(50년 6개월 7일)

위치

타이완 섬

수도

다이호쿠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군사독재 · 익찬 체제

통치기관

대만총독부

국가원수

천황

정부수반

총독

주요 총독

고다마 겐타로 (1898~1906)
아카시 모토지로 (1918~1919)

언어

일본어, 대만어

문자

가나 문자, 한자

종교

국가신토, 도교, 유교, 불교

민족

일본인, 본성인, 대만 원주민

성립 이전

타이완 민주국

해체 이후

중화민국,(타이완 섬/역사/중화민국),

1. 개요
2. 명칭 논란
3. 상세
3.1. 초기 통치
3.2. 문관 통치
3.3. 후기 통치
4. 결론
5. 관련 문서

1. 개요

1895년에 시작되어 1945년에 끝난, 일본 제국타이완 섬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이다. 중국 대륙의 기준으로 대만일치시기(台灣日治時期)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대만에서는 편의상 '일치시기(日治時期)'나 '일본(제)시대(日本帝時代)', '일거시대(日據時期)' 등으로 표현된다. 일치시기 당시엔 일본제국령 대만(日本帝國領臺灣) 또는 그냥 '대만(臺灣)'으로 불렸다.[2]

이 시기는 간혹 중화민국사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중화민국은 1945년이 아니라 1912년에 중국 대륙에서 세워졌다가 1949년 대만 타이베이로 옮겨왔을 뿐이라 일제 통치 당시의 대만은 현재 정치체제로서의 중화민국과는 큰 관련이 없다. 대만 섬의 역사 관점에서 일치시대는 19세기까지의 '청조 시대'와 현재의 '중화민국 시대' 사이의 계보에 해당한다. 물론 장제스의 대륙 중화민국 정부는 명목상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불평등 조약으로 보고 대만의 영유권을 주장했는데, 사실상이 아닌 명목상으로도 일본의 영유권을 인정했다고 할 수도 있다. 타이베이에 중화민국 영사관이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2. 명칭 논란

이 문서의 문서명이기도 한 대만일치시기, 혹은 '일치시기', '일치시대'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대만 식민 통치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이 명칭은 한국에서 쓰이는 '일제시대'와 비슷한 뉘앙스이다.

그러나 대만에서는 이 시대를 일거시기(日據時期)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이 (대만을) 점거(占據)했다는 의미이며, 일본의 대만 통치의 불법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한국에서 말하는 일제강점기와 비슷한 뉘앙스로, 주로 중국 국민당 등을 중심으로 한 범람연맹 세력에서 사용한다. 마잉주 정권에서 있었던 역사 교과서 개정에서 '일치시기'를 '일거시기'로 바꾸어 범록연맹 측에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이런 논란 때문에 대만의 문서에서 日據와 日治를 병기하기도 한다.

3. 상세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승전 대가로 대만요동을 합병한 후부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그해 10월 중국 국민당 군대가 진주한 기간 사이에 해당하며, 따라서 대만은 한국의 일제강점기보다 15년 이상 긴 50년 정도를 일제 치하에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대만총독부가 구성되었다.

흥미롭게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무단 통치 → 문화 통치 → 말살 통치(황민화) 테크를 비슷하게 밟았다. 독립운동가나 일제 불만 세력들이 일제에 맞서 저항했던 것도 비슷하다. 심지어 이들 사이에서 다시 좌우로 분열되어 서로 편가르고 싸운 것까지도(...). 하지만 대만인들 입장에서는 그저 외부 지배세력이 서구→ 정성공 통치시기→ 만주족→ 일본인으로 바뀐 것에 불과해 대규모 탄압을 받은 이후론 조선만큼 끈질기게 식민 통치에 저항하진 않았다.[3]

조선과 달리 중국 본토는 남아있으니 일제 통치가 불만인 한족들은 거기서 살아도 됐었고[4] 대만 원주민들은 저항하긴 했지만 한국의 임시정부 같은 구심점도 없었고 세력도 미약했다. 게다가 일본 본토에서 거리가 멀다보니 사실 조선만큼 좋든 싫든 뭔가가 일본과 빠르게 엮이지도 않았다. 사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지만 반대로 거리가 가까우면 그만큼 투닥거릴 확률도 더 높기 마련이니... 이는 대만인들이 일본보다 거리가 가까운 중국 대륙에 불만을 가지는 것과도 연관지어 볼 수 있다.

한편 일제 역시 소위 '내선일체'라 일컬을 만큼 (명목으로나마) 조선인을 자신들로 동화하려 했지만, 대만 섬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라고 난리를 쳤던 조선과 달리 대만에서는 상당히 느슨하게 창씨개명 정책을 진행한데다, 오히려 일본식 이름을 가지는 데 까다로운 조건까지 걸어놨다. 이는 한편으로 대만 사람들을 본국인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다는 의식이었다.

다만 대만에서도 황국신민화 정책이 실행되었고 일제의 주장에 의하면 일본어 보급률도 굉장히 높았다.[5]

3.1. 초기 통치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인해 청나라로부터 타이완 섬을 할양받은 일본 제국은 타이완 섬에 상륙했다. 그러나 대만인들, 특히 그 중 청나라의 관료들은 일본 제국의 통치에 강하게 저항하였으며, 청나라의 타이완 섬 할양을 '매국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1895년 5월 25일 당경숭(唐景崧)과 구봉갑(邱逢甲), 유영복(劉永福)을 중심으로 타이완 민주국이 건국되었으나 일본 제국이 대만총독부 총독으로 임명한 가바야마 스게노리(樺山資紀)[6]에게 진압당하고 동년 10월에 멸망하고 만다.

타이완 민주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1902년까지 7년 동안 대만인들은 산발적인 저항 운동을 벌였으며 이는 일본 제국 정부에게 재정적 부담을 주었다. 이 때 총독부 지출이 수입의 3배를 넘었으니 그 부담을 알 만 하다. 또 통치 초기 첫 5년 동안에 사형된 대만 주민만 3천여명이었는데, 이는 항일 세력 소탕까지 염두에 두고 강력 범죄는 물론 건물 표지 훼손 같은 잡범이나 심지어 미수범이라도 범죄자는 사형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악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만 섬 관련 지출이 늘어나자 당시 일본 제국의회에서는 타이완 섬을 프랑스에 팔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허나 4대 대만 총독 고다마 겐타로가 타이완 섬의 지정학적 가치의 중요성(일본 남부에 대한 방어요충지)을 역설(力說)하고[7] 타이완 섬을 통해 일본도 서구 열강에 맞서 식민 통치를 할 수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여 매각 계획은 철회되었다.

그러다 1902년 이후에는 저항운동이 한풀 꺾여 타이완 섬 사회는 일제 통치가 사실상 정착되었으며[8] 이후 대만 총독부는 식민지 경영을 위해 도시계획 전문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를 민정장관에 발탁하는 등[9] 타이완 섬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대만 정부의 재정 자립 역시 추진하게 된다.

3.2. 문관 통치

총독의 권한이였던 대만군(대만 주둔 일본군) 지휘권이 대만군 사령관에 이양된 이후,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달리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10] 그래서 전쟁의 기운이 퍼져가던 1930년대 이전까진 이런 문관 총독들이 주로 타이완 섬을 통치했다.

3.3. 후기 통치

1936년부터는 대만총독부에 군인 출신 총독이 다시 임명되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의 무분별한 전선확대로 인해 이뤄진 조치였다. 고바야시 세이조(小林躋造), 하세가와 기요시(長谷川清),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모두 무관 출신이였다. 또 이즈음부터 말살 통치(황민화운동)가 시작되어 국어운동을 통해 철저하게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만어, 대만 원주민 언어, 객가어 사용을 탄압하고 금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만의 종교와 풍속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한족들을 병사로 뽑는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던 일본 제국은 병력 부족을 느끼게 되자 대만에서도 징병을 하였다. 군속을 포함한 약 21만 명의 대만인들이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되었으며, 그 중 3만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제국은 점점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타이베이, 가오슝 등이 미군의 폭격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히로히토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9월 2일에는 일본 정부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고 GHQ의 명령에 따라 대만 섬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는 중화민국에 항복하였다. 10월 15일부터 국민혁명군이 대만 섬에 진주하기 시작했고 10월 25일에 안도 리키치가 중화민국의 대만 행정장관 천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여 일제의 대만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4. 결론

대만이 독립국으로서 제대로 된 지위를 누린 것은 전체 역사에서 극히 한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관점에 따라서는 지금도 독립국이 아니라 대륙 세력의 통치 연장기라고 볼 수도 있다.[11] 그래서인지 식민 지배를 겪었음에도 대만인들에게 이 시기는 흘러가는 흑역사 중 한페이지 혹은 흑역사 중에선 그나마 나았다 정도로 인식될 뿐 한국만큼 최악의 흑역사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편이다. 식민 지배도 많이 당해보면 무덤덤해진다

이는 일제가 깽판(...)을 치고 간 다른 중화권 지역과 비교해도 그런데 홍콩, 싱가포르, 중국 대륙에서는 현대 일본이나 일본인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당시 벌어진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선 학을 떼는데 반해, 대만은 상술했듯 까긴 하지만 시기 대비론 오히려 무덤덤한 편이다. 그리고 이는 역시 현실적인 생존권이 외교 노선에 달려있다보니[12] (지금은 미국의 최우방국이 된 패전국 일본만 봐도 알 수 있듯) 현재가 과거 역사의 평가에도 연동되는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부정적인 역사는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5. 관련 문서


  1. [1] 이미지 출처
  2. [2] 당시에는 일본도 현재 대만과 마찬가지로 정체자를 사용했다. 신자체를 도입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자체로는 台湾이다.
  3. [3] 다만 분명한 점은 식민지 시기가 반환 후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대만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야스쿠니 신사까지 참배하는 등 극단적인 친일 성향으로 대만에서도 논란이 되는 리덩후이 전 총통조차 "과거 대만인이 일본의 '노예'로 전락했던 점을 대만인으로서 매우 비통하게 생각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4. [4] 대만일치시기에 이런 식으로 '나는 염황 자손이요'하며 대륙으로 떠났다가 대만 반환 이후 귀향한 사람들을 '반산'이라고 부른다.
  5. [5]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41394
  6. [6] 세이난 전쟁에서 활약한 군인으로 당시 일본 해군 대장이였다.
  7. [7] 실제로 대만 섬은 중일전쟁 당시에 중국 본토에 대한 제공권 장악에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8. [8] 다만 통치를 흔들 수준이 아니었다는거지, 1915년 일어난 타파니 사건이나 1930년 일어난 우서 사건 등 항일 봉기는 꾸준히 지속되었다. 이에 따른 일제의 대만인 학살과 탄압은 덤. 때문에 우서 사건의 중심 세력으로 일제에 잔인하게 탄압받은 시디그족은 지금도 일제하면 이를 간다고 한다.
  9. [9] 근데 상기된 시대착오적 악법을 만든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한다(...).
  10. [10] 사실 조선도 문화통치기 당시엔 명목상으론 문관 총독이 임명될 수 있게 해놨지만, 실제론 문관 총독이 단 1명도 임명되지 못했다. 조선의 지정학적 가치를 들어 군부가 계속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대만의 지정학적 가치는 조선에 미치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대만의 총독은 조선의 총독보다는 서열이 낮았다.
  11. [11] 중화민국=대만 섬으로 한정해서 본다면 대만은 사실상의 독립국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중화민국은 본래 대륙을 통치하는 국가로써 세워졌으며, 그래서 대만의 지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대만인도 외성인, 본성인 할 것 없이 중국 대륙에서 이주 온 한족들이고 중화민국 자체도 국부천대로 대륙에서 쫓겨난 외성인 세력이 주도해서 세워진 것이니 대만은 역사시대 절대 부분이 일본 통치를 제외하고는 대륙의 통치기라고 볼 수도 있다.
  12. [12] 쉽게 말해 중공에 대한 공포가 그 것. 문화적으론 이미 일류보다 한류가 더 영향력이 커졌고 정치적으로도 오히려 한국과 비슷한 면이 더 많지만 외교 노선에서 친일이 필요하다보니 대만 정치권 일부에서 친일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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