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베르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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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베르캄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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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 1992}}}


1993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로베르토 바조

2위
호마리우

3위
데니스 베르캄프

1997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호나우두

2위
호베르투 카를루스

3위(공동)
데니스 베르캄프
지네딘 지단

1992 Ballond'or

수상
마르코 판바스턴

2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3위
데니스 베르캄프

1993 Ballond'or

수상
로베르토 바조

2위
데니스 베르캄프

3위
에릭 칸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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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축구코치 }}}

이름

데니스 베르흐캄프
Dennis Bergkamp

본명

데니스 니콜라스 마리아 베르흐캄프
Dennis Nicolaas Maria Bergkamp

출생

1969년 5월 10일 (50세) /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 암스테르담

국적

네덜란드

신체

188 cm[1]체중 91 kg[2]

직업

축구선수( 공격수[3] / 은퇴)
코치

소속

선수

AFC 아약스(1986~1993)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1993~1995)
아스날 FC(1995~2006)

지도자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B(2008 / 수석코치)
AFC 아약스(2008~2017 / 코치)

국가대표

79경기 37골(네덜란드 / 199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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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플라잉 더치맨[4], 황금 거위, 아이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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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어린 시절
3. 클럽 경력
5. 플레이 스타일
6. 별명
7. 큰 대회에서의 불운
8. 여담

1. 소개

네덜란드의 前 축구선수이자 축구코치.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개념을 완성시키고,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라고까지 불렸던 3인 중 한명으로[5] 초창기 벵거볼의 절대적 핵심이었던 선수다.[6]

2. 어린 시절

베르캄프의 집은 전체적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팬이었기 때문에 맨유의 선수 데니스 로[7]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베르흐캄프의 이름은 Dennis로 데니스 로의 이름에 n이 하나 더 붙었다. 데니스 로의 이름인 Denis가 네덜란드쪽에서는 여성의 이름으로 쓰이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가족들이 다들 맨유를 응원했기에 혼자 튀고 싶어서 토트넘을 응원했다고 한다. 베르흐캄프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하던 선수는 잉글랜드의 테크니션 글렌 호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두 구단의 라이벌인 아스날의 레전드가 되었으니 인생 참 모를 일이다.

그런데 후에 베르캄프는 축구잡지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가족들과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놔두고 왜 아스날을 선택했냐는 질문에 아버지는 데니스 로의 팬이지, 맨유의 팬이 아니었고 자신 역시 글렌 호들의 팬이긴 했지만 토트넘 구단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스날을 선택하는데 크게 망설임이 없었다고 밝혔다. 어째 변명 같은데?

3. 클럽 경력

3.1. AFC 아약스

아약스 시절에는 뛰어난 시야와 볼 컨트롤, 슈팅력을 바탕으로 미칠듯한 득점을 올리는 전형적인 타겟형 스코어러 & 오른쪽 윙어였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인터 밀란으로 이적한다. 무려 세 시즌 연속으로 에레디비지 득점왕을 차지할 정도로 미친 득점력을 선보였다. 실제로 1992년에 베르흐캄프는 그 해 득점왕이였다. 91-92시즌 UEFA컵 결승 1차전에서 풀타임 출장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8] 아약스 시절 총 7시즌동안 리그에서 185경기 103골, 컵대회까지 합치면 총 237경기에서 122골을 기록하고 이탈리아로 향한다. 물론 본인은 1992년에 발롱도르 3위에 선정되고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로 2년 연속 (1991 & 1992) 선정될 만큼 엄청난 활약을 보였지만 아약스에서 총 1번의 리그 우승, 2번의 KNVB컵 우승, 1번의 UEFA 컵 위너스컵, 1번의 UEFA컵 밖에(?) 달성하지 못했다.[9] [10]

3.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인터 밀란 시절에는 과도기로, 세리에의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평가. 리그에서는 부침이 심했으나, 93-94시즌 UEFA컵에서는 FC 레드불스 잘츠부르크와의 결승전 1, 2차전 모두 선발출장하여 두 경기 모두 89분을 뛰는 등 활약하였고, 팀도 1, 2차전 모두 1대0으로 승리하며 생애 마지막 유럽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베르흐캄프는 이때 UEFA컵 득점왕이였다.

인테르에서의 2시즌 동안 리그에서 52경기 11골을 기록했고 컵대회 포함하여 총 81경기 30골을 기록했다.

3.3. 아스날 FC

95-96 시즌을 앞둔 여름, 당시 조지 그래엄 감독 사퇴 이후 대대적인 팀 개혁이 필요했던 아스날은 거액의 이적료로 베르캄프를 데려온다.[11] 그리고 베르캄프가 아스날에 온 지 1년 후 나고야 그램퍼스를 떠난 영국인들에게는 듣보잡의 프랑스인이었던 아르센 벵거 감독이 아스날에 부임, 그의 지휘 아래에서 아스날의 전성기, 그리고 베르흐캄프의 기량 역시 만개한다. 벵거는 후에 인터뷰에서 베르흐캄프가 자신보다 아스날에 먼저 와있던 것이 자신에게는 큰 행운이었다고 밝혔다.

아스날 이적후에는 EPL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 11시즌동안 리그에서 315경기에 출장하며 87골, 94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였고, 컵 대회까지 합하면 423경기에서 120골, 16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동시대의 클럽 레전설인 앙리가 228골을 넣어서 상대적으로 적어보일 뿐, 베르캄프의 득점 역시 아스날 클럽 사상 11위의 기록이다.

득점력 뿐만 아니라 뛰어난 공격 조율 능력 또한 갖추었던 선수이다. 티에리 앙리와 보여주었던 환상적인 호흡은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천재 콤비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베르캄프 본인도 포포투 인터뷰에서 마르코 판바스턴, 이안 라이트,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니콜라 아넬카 등 함께 뛰었던 수많은 레전드 공격수들을 제치고 티에리 앙리를 최고의 공격 파트너로 꼽은 바 있다. 하지만 또다른 인터뷰에선 앙리보다는 아넬카와 호흡이 더 잘 맞았다는 발언을 했으며, 아넬카가 조금 더 직선적으로 움직이는 편이라 자신과 스타일이 잘 맞았다고 한다.

일명 '베르기 턴' 엄청 쉽게 넣는것처럼 보인다

01-02 시즌 리그 뉴캐슬 원정경기에서의 니코스 다비자스를 제치고 넣은 골장면.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노리지는 않고 그냥 본능에 몸을 맡겼을 뿐이라고 많이 알고 있지만 어디서 이런 유언비어가 퍼졌는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베르흐캄프는 실제로 노린 플레이라고 답했고 매우 구체적으로 그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상황에서는 그 플레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고 나의 의도가 성공할지는 몰랐지만 일부러 노린 플레이는 맞다" 이후 수비수를 밀쳐버리고 돌파한 건 일단 파울은 아닐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골은 루니의 맨시티전 오버헤드킥 골을 제치고 BBC에서 선정한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고의 골로 선정됐다. [12]

97-98시즌 더블, 01-02시즌 더블, 03-04시즌 리그 무패우승 등 아스날의 전성기에는 항상 그가 있었으며, 파트리크 비에라와 함께 4-4-2 전술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참고로 97-98시즌의 더블 때에는 무패우승시즌 멤버인 앙리나 융베리, 피레스, 캠벨 등은 없던 시절. 03-04 무패우승 시즌 때는 티에리 앙리가 아스널을 이끌었다면 97-98 시즌 때 아스널을 이끌었던 에이스는 데니스 베르흐캄프였다. 데니스 베르흐캄프는 이 시즌 BBC sport에서 정리한 스탯에 의하면 무려 22골 20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리그에서는 16골을 기록하였다. 막판 부상 때문에 뉴캐슬과의 FA컵 결승전은 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시즌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골 & PFA 올해의 선수 & FWA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석권하며 가히 베르흐캄프의 시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01-02 시즌 때는 2002년 3월에 이달의 선수로 선정됐다. 03-04 시즌 때는 당시 팀 동료인 에두와 함께 2월에 이달의 선수로 선정됐다.[13]

한국나이로 37세였던 04-05시즌이 끝나가던 즈음에 아스날과 계약연장 없이 아약스에서 은퇴할거라는 루머가 돌았으나 리그 37라운드에서 리그 4위였던 에버튼을 상대로 회춘한 경기력을 보이며 7-0승리를 이끌었다. 04-05 시즌 때 리그 어시스트 3위를 기록했다. 베르캄프보다 어시스트를 많이 기록했던 선수들은 1위의 프랭크 램파드와 2위의 티에리 앙리 뿐. 그리고 계약을 1년 연장하며 하이버리 경기장과 함께 은퇴. 05-06 시즌은 베르흐캄프가 아스널에서 주전이 아닌 후보로 뛰었던 유일한 시즌이다.[14]

2006년 7월 22일 아스날 FC의 새 홈구장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의 개장경기에서 친정팀이자 고향팀인 AFC 아약스와의 경기로 은퇴 경기를 가졌다. 이때 아스날과 아약스 그리고 네덜란드 국대의 전•현직 선수들이 총출동해서 그의 은퇴경기를 함께했다. 오버르마르스, 시먼, 비에라, 프티, 윈터번, 판데르사르, 스탐, 레이카르트, 판바스턴, 더부르 등. 게다가 무려 환갑의 나이였던 요한 크루이프도 후반전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4.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로서는 79경기 출장, 37득점을 기록하였다. 현재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역대 득점 랭킹 4위.[15] 하지만 자신은 I`m assistant 라고 하며 스코어러 보다는 어시스턴트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실제로 커리어 후반기로 갈수록 베르캄프는 국가대표와 클럽 모두에서 골보다는 어시스트를 더 많이 기록했다.

첫 메이저 대회 출전으로는 UEFA 유로 1992로 이 대회에서 맹활약으로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된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모로코, 아일랜드, 브라질을 상대로 각각 1골씩을 득점하면서 맹활약하였으나 8강에서 브라질에게 2-3으로 아깝게 패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호사가들의 화제인 '세계 4대 공격수' 중 가장 유력한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함께 언급되던 동시대 공격수들은 호나우두,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앨런 시어러 등.[16]

이 대회에서 베르캄프는 한국 수비진을 그야말로 유린하며 5-0의 참패를 안겨줘 한국 축구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을 남겼다. 부상을 입은채 출전해서 꽤 많은 1vs1 찬스를 날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특히 한국 수비수들을 바보로 만드는 드리블 후 필립 코쿠에게 어시스트한 장면, 아크 정면에서 한국 수비수 2명을 간결한 터치만으로 제치고 가볍게 툭 차넣는 득점 장면은 지금도 회자된다.

같은 대회 16강전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선제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사실 베르캄프는 이때 퇴장당했어야 마땅한 반칙을 저지른다. 유고슬라비아의 미하일로비치의 무릎을 일부러 밟는 비신사적인 반칙을 저질렀지만 심판은 이를 보지 못했다. 제대로 된 판정이였다면 베르캄프는 이때 퇴장당하고 8강전에는 못 나왔어야 했다. 만약 이때 출전하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1998년 월드컵 8강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전반전에는 천재적인 헤더 패스로 네덜란드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했다. 바로 다음에 서술된 골 때문에 매우 저평가된 어시스트인데 가히 베르캄프의 어시스트 중 가장 지능적이면서 창의적이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훌륭한 어시스트였다. 그리고 후반 막판에 말도 안되는 오른발로만 쓰리 터치 골을 성공시켰다. 이 골은 지금도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골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으며 베르캄프 커리어 통틀어서 가장 경이로우면서도 중요한 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골은 데니스 베르캄프가 어떤 선수인지를 완벽하게 담아낸 장면이다. 당시 그를 마크하던 수비수는 로베르토 아얄라로 역시나 한 시대를 풍미한 명 수비수이며[17], 롱패스 어시스트를 연결한 선수는 프랑크 더부르이다.

5. 플레이 스타일

스타일은 전무후무한 세계 최정상의 볼터치와 트래핑, 컨트롤 그리고 시야를 바탕으로 화려한 플레이를 펼친다. 세컨드 스트라이커라는 포지션을 베르캄프가 정립했다고 할 정도의 전술 이해도와 천재적인 축구지능을 가졌다. 볼트래핑, 즉 퍼스트 터치에 대해서도 축구사에서 손꼽히는 본좌였다고 평가받는다. 당장 본문에 링크된 동영상들도 하나같이 비범한 퍼스트 터치로 만들어낸 명장면들이다. 패스를 받는 순간 수비를 따돌리기 용이하면서 위협적인 슛 또는 패스를 날릴 수 있는 방향으로 공을 보내는 재능은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특히 빈공간으로 쇄도하는 선수를 바로 찾아내어 망설임 없이 바로 스루패스를 찔러주는 능력은 퍼스트 터치와 함께 세계 최정상급이였다. 이 능력은 볼을 다소 끌어 경기 템포를 불필요하게 지연시킬 때가 종종 있었던 동시대 테크니션 지네딘 지단보다 나았다. 티에리 앙리가 지단보다는 베르캄프와 함께 했을 때 더 빼어난 활약을 선보인 이유는 바로 위에 언급한 베르캄프의 다이렉트함 때문이였을 것이다. 지단의 퍼스트 터치는 최대한 안정된 볼 컨트롤을 추구했다면 베르캄프의 퍼스트 터치는 안정성을 기본으로 했지만 보다 더 도전적이고 공격전개에 용이한 퍼스트 터치를 자주 구사했다.

단, 준수한 피지컬의 소유자였으면서도 몸싸움을 상당히 꺼리는 스타일이었다. 몸싸움에서 쉽게 밀리지는 않았지만 세컨드 스트라이커 포지션에 서게 된 것도 상대 수비와 부대끼는 최전방 공격수 역할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싸움 피하려다보니 퍼스트 터치의 신이 되었다 카더라 왠지 농담같지가 않다

1998/99 시즌 잉글랜드 FA컵 준결승 맨유전에서 필 네빌의 반칙으로 얻어낸 페널티 킥을 맨유의 전설적인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의 선방에 막혀 실축한 이후, 페널티 킥 공포증도 생겼다. 이 경기 이후 그는 은퇴할때까지 페널티 킥을 한번도 차지 않았다.[18] 그래서 아스날에서는 앙리가 주로 PK를 담당했고 앙리가 PK를 얻을시에는 본인이 얻은 PK는 차지 않는 징크스가 있어서 보통 로렌이나 피레스가 찼다.

6. 별명

별명은 Non-Flying Dutchman(날지 못하는 네덜란드인). '비행 공포증' 때문에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그의 성격으로 인해 붙여진 별명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한 저널리스트가 농담으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이 탈 비행기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고 주장해 비행이 취소된 사건때문에 비행 공포증이 생겼다고 한다. 94년 월드컵 당시에는 자신에게 공포증이 생긴줄 몰랐었고 월드컵이 끝나고 인테르 시절 알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비행기를 아예 못 타는 것은 아니고 비행기만 타면 상당히 긴장을 해서 경기장에서 자신의 퍼포먼스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타는 것을 꺼렸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코치 생활을 하는 현재는 비행기를 타기는 한다고 한다.

이 별명의 연원인 'Flying Dutchman'은 전설 및 바그너의 오페라에 나오는 유령선의 이름이며, 서양 세계에서는 꽤 유명한 고전 이야기이다. 여기서 플라잉은 헤맨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지만, 말 그대로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므로 그 이름으로 인해 뛰어난 네덜란드 출신 운동선수에게 곧잘 붙는 별명이다. 예를 들어, 호너스 와그너요한 크루이프, 마르크 오버르마르스등. 독일계인 호너스 와그너가 왜 더치맨인지는 항목 참조.

베르캄프는 장거리 원정시에도 반드시 육로로 이동하기로 유명했다. 아스날의 유럽대회에서 베르캄프는 혼자 육로로 이동했다. 동유럽처럼 먼 곳은 아예 참여하지 않았고 프랑스나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북부등 원정경기는 참여했다. 마지막 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는 꽤 중요한 경기였기 때문에 스페인 원정경기에서 벤치에 앉긴 했다. 그리고 파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도 엔트리엔 들었는데 골키퍼가 퇴장당하면서 교체카드 1장을 썼고 팀이 베르흐캄프를 투입할 여건이 안되어 출전은 못했다. 그의 비행 공포증은 UEFA 유로 2000 이후 비교적 빠른 국대 은퇴의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국대은퇴 후 베르흐캄프-섀도 체제에서 클라위베르트-섀도우 체제로 변환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2002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같은 조의 포르투갈아일랜드를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시망.[19]

그 밖에도 '아이스맨'[20] 등의 별명도 있으며, 애칭은 '베르기'.

7. 큰 대회에서의 불운[21]

한 시대를 풍미한 테크니션인 그였지만 정작 월드컵과 같은 굵직한 대회와는 인연이 없었다. 굳이 찾자면 93-94시즌 UEFA컵 우승 트로피가 전부. 동시대의 테크니션인 지네딘 지단FIFA 월드컵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UEFA 챔피언스 리그 등을 전부 우승한 것과 대조되는 부분. 두 선수는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인 2006년 여름에 은퇴했다. 2006년 7월 10일 2006년 독일 월드컵 결승전이 지단의 은퇴경기였고 12일 후인 7월 22일이 베르캄프의 은퇴경기였다.[22][23]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 UEFA 유로 1992에서 득점왕과 해당 대회 베스트 11안에 들었지만 팀은 덴마크에게 준결승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했다. UEFA 유로 2000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회일 것이다. 자신의 고향이자 친정팀인 아약스의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열린 이탈리아와의 4강전에서 수적 우세에도 불과하고 승부차기 끝에 탈락했다. 개최국인 네덜란드는 UEFA 유로 2000 당시 강력한 우승후보였으며 죽음의 조를 통과하고 유고슬라비아를 6-1로 이기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4강전에서는 잔루카 잠브로타가 전반 34분 퇴장당하며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 이탈리아 특유의 빗장수비에 막혀 연장전까지 간 끝에 승부차기로 이탈리아에 패하고 만다. 베르흐캄프는 후반 15분에 클라렌스 세도르프와 교체되어 나갔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A매치가 되었다.
  • UEFA 챔피언스 리그 - UEFA컵은 아약스 시절과 인테르 시절 각각 1번씩 우승했지만 챔피언스리그와는 인연이 없었다. 2000년대 초중반 아스날이 잘나가던 시절에도 유독 챔스에서 고전하던 이유 중 하나가 유럽 원정경기에서의 그의 부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스날에서의 마지막 시즌 그에게도 베르흐캄프에게도 기회가 왔다. 조별리그 FC 툰과의 홈경기 1-1상황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집념의 결승골을 넣을정도로 챔스 우승의 열망을 나타냈다. 사실 마지막 시즌 그의 나이는 한국나이로 38세였고 주로 후반에 교체 출전했는데 챔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스날이 결승에 진출하자, 그도 파리까지 육로로 이동하며 결승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출전하지는 않았고, 아스날도 바르셀로나에 아쉽게 패하고 만다. 이 날의 결장으로, 공식적인 그의 마지막 아스날 소속 경기는 하이버리 고별전인 위건전이다.

8. 여담

  • 차갑고 냉철한 이미지에 테크니션이라는 특성에, 언론과의 접촉이 적어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24] 사실 트래쉬 토크와 몸 싸움, 반칙에 매우 능했다. 중요한 점은 언제나 그런 일을 절대로 심판에게 찍히지 않는 범위에서만 행했으며, 그를 통해 결정적인 순간에 심판에게서 좋은 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나름의 노하우라면 노하우고 능력이라면 능력. 이런 능력 위에 그 좋은 터치와 드리블이 있었기에 더욱 더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 인테르 시절은 보통 흑역사 취급되며 아약스와 아스날의 레전드로 대우받고 있다. 항목 상단에 언급된 것과 같이 아스날의 홈구장 에미레이트 구장에는 그의 동상도 있다.
  • 비행기 공포증 탓에,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접근하는 팀이 극히 적었다고 한다. 아스날과는 비행기 공포증을 이유로 적절한 주급에 계약을 해나갔는데 은퇴할 때까지 1년씩 단기계약을 했다.
  • 은퇴 후 현재는 AFC 아약스의 코치로 활동 중이며, 또 다른 네덜란드의 레전드인 프랑크 데 부어 감독을 보좌하고 있다. 위의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 동영상에서 끝내주는 롱패스를 날리는 바로 그 선수.
  • 챔피언쉽 리그의 브라이튼& 호브 알비온에서 뛰었던 로날트 베르캄프는 그의 조카라 한다. 현재는 네덜란드 2부 리그 팀에서도 후보에 그치는 중이다(...)
  • 또한 아스날에서의 활약때문에 아약스에서의 활약이 묻히는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베르캄프의 순수기량만 보면 발롱도르 2,3위를 차지한 아약스 시절이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1. [1] CelebHeights.comTransfermarkt 저녁키 187 cm 아침키 189 cm
  2. [2] 선수시절 80-85 kg
  3. [3] 유사시 최전방, 아약스 시절엔 오른쪽 윙도 소화하기는 했으나 주 포지션은 세컨드 스트라이커이다.
  4. [4] Non-Flying Dutchman, 고소공포증(정확히 말하자면 비행기공포증)이 있어 비행기를 못타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자세한 내용은 '별명' 문단 참조.
  5. [5] 나머지 2명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라울 곤살레스
  6. [6] 지금의 성격이 조금 달랐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벵거볼은 두두다다로 대변되는, 지공보다 속공이 중시되는 빠른 템포와 패스로 상대방을 공략하는 스타일이었고 그 핵심에는 섀도우 스트라이커 베르흐캄프가 있었다. 하지만 베르흐캄프의 은퇴와 비에라 & 앙리 등 주축선수들의 이적으로 벵거볼은 세스크 파브레가스 & 로시츠키 등을 통해 지공으로 변화하게 된다.
  7. [7] Denis Law.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트라이커로 1964년 발롱도르 수상자. 보비 찰튼, 조지 베스트 등과 더불어 맨유의 1960년대 초기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경신하기 전까지 맨유의 한시즌 리그 최다 득점기록을 가지고 있던 선수였다.
  8. [8] 2차전은 결장했다. 이때 아약스의 감독이 최악의 맨유 전 감독인 루이 판할이다.
  9. [9] 베르캄프는 1993년까지 아약스에 있었지만 1993년 발롱도르 2위, 1993년 FIFA 올해의 선수상 3위를 기록한 것은 인터 밀란 소속이였을 때다.
  10. [10] 베르캄프의 당시 기량과 개인 수상을 감안하면 아쉬운 팀 커리어인 것은 분명하다.
  11. [11] 베르캄프는 계약 당시 자신이 최고로 좋아하는 위치였던 섀도우 스트라이커로의 출전 보장과 자신의 절친한 친구 오베르마르스의 이적을 단서로 달았고, 아스날이 이를 흔쾌히 수락하며 아스날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아스날은 2년 후에 아약스로부터 오베르마르스를 데려옴으로서 단서조항을 지켰다. 이적료는 750만 파운드로 당시로써는 꽤 쳐준 편. 베르흐캄프의 영입 하나만으로 클럽 과도기에 스쳐간 감독 중 한 사람 정도인 브루스 리오치 감독은 아스날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12. [12]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에서 주최한 20 SEASON AWARDS 이벤트에서는 베르캄프의 골이 2위로 선정됐다. 여기서 1위는 루니의 오버헤드킥 골
  13. [13] 프리미어 리그에서 이달의 선수상을 4번 받았다. 1997년 7월 & 1997년 8월 & 2002년 3월 & 2004년 2월
  14. [14] 공격수일수록 벵거는 노장에 대한 신뢰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벵거처럼 노장에게 박했던 감독이 30대 후반을 달리던 베르캄프만큼은 주전으로 기용했다.
  15. [15] 1위는 로빈 판페르시 2위는 클라스얀 휜텔라르. 3위는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16. [16] 한국 vs 네덜란드 전에서 신문선이 직접 언급하기도 한다.
  17. [17] 21세기 초반에 발렌시아에서 짠물 수비를 이끌며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과 리그 2번 우승, 유에파컵 우승을 이룬 명 수비수. 국대에서도 아르헨티나의 센추리 클럽 멤버이며,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주장으로 많은 경기를 출장한 당대 최고의 센터백 중 한명. 단신 센터백으로 파비오 칸나바로와도 흔히 비교되곤 했다.
  18. [18] 이 경기에서 라이언 긱스의 그 유명한 매직 드리블이 나왔고 이 경기를 승리한 맨유는 FA컵 우승은 물론, 리그와 챔스까지 석권하면서 유러피언 트레블을 달성했다.
  19. [19] 국가대표 감독 루이 판할의 삽질도 큰 몫했지만...이 당시 클라위버르트가 뛰던 바르샤에서도 클라위버르트는 섀도우로 활약하기 시작했는데, 국대와 클럽 모두 하락세를 보이고 말았다. 이후 커리어는 그야말로 안습.
  20. [20] 냉정침착한 성격과 골 결정력에, 영화 '탑건'의 발 킬머와 닮아서.
  21. [21] 그렇다고 해서 그가 큰 대회나 경기에서 약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월드컵을 단 2회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6골을 기록했으며 조별예선보다 토너먼트에서 더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1994년 월드컵에서는 3골 & 어시스트는 후에 추가 바람. 1998년 월드컵에서는 3골 & 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FIFA에서 선정한 1998년 월드컵 올스타 팀에 선정됐다. 1994년 월드컵 때 조별예선에서 모로코를 상대로 1골, 16강전 아일랜드 상대로 1골을 기록했다. (1994년 월드컵까지는 16강도 조별리그로 진행됐으며 대회를 24강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토너먼트인 8강전 브라질을 상대로 1골을 득점했다. 1998년 월드컵 때 조별예선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1골 1어시스트, 멕시코를 상대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토너먼트인 16강전 유고슬라비아전에서는 1골 그리고 8강 아르헨티나전에서는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비행 공포증이라는 뚜렷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축구를 넘어 스포츠 대회 통틀어서 가장 위상이 높은 월드컵에서 베르캄프는 맹활약했다.
  22. [22] 베르캄프와 지단은 커리어에서 총 3번 만났다. 첫번째 만남은 UEFA 유로 1996 8강. 6월 22일 안필드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베르캄프는 60분을 소화하고 클라렌스 세도르프와 교체되었다. 지단은 풀타임을 뛰었고 승부차기 끝에 프랑스가 4강에 진출했다. 두번째 만남은 1997년 2월 26일 파리에서 열린 친선경기였다. 베르캄프와 지단 모두 풀타임을 뛰었고 프랑스가 2-1로 승리했다. 베르캄프는 선제골을 넣었고 훗날 아스날에서 만나는 로베르 피레스가 동점골을 넣었다. 마지막 만남은 2005-06 챔피언스리그 16강 토너먼트였다. 1차전은 마드리드 원정경기라 베르흐캄프가 불참했고 하이버리에서 열린 2차전에서 후반 42분 흘렙이 빠지고 베르캄프가 교체투입되었다. 지단은 풀타임을 뛰었고 아스날이 8강에 진출했다. 그로부터 몇개월 후 베르캄프와 지단은 2006년 7월에 은퇴했다.
  23. [23] 앙리는 베르캄프와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지만 지단이 중심인 국대만 가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앙리는 베르캄프가 지단보다 비교적 트릭을 덜 쓰며 가급적 템포를 빨리 가져가려는 경향이 있다고 얘기했다. 앙리와 베르캄프가 아스날에서 수많은 골을 합작했지만 앙리와 지단은 국대에서 단 1골을 합작했다. 2006년 월드컵에서 브라질과의 결승골이 그것이다. 다만 경기에서 호흡이 안맞았다고 앙리가 개인적으로 지단과 사이까지 안좋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 앙리가 2014년 12월 은퇴를 선언하자 지단이 직접 나서서 프랑스 축구협회에서 앙리의 은퇴경기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적으로도 앙리는 지단을 Zizou라 부른다. 꽤 돈독한 편. 반면에 선수시절의 찰떡궁합에 비해 베르캄프가 은퇴하고 앙리와는 사적으로 연락이 없는 편이라고 한다. 나이차도 8살차이라 꽤 나는 편이고... 앙리의 단짝은 주로 로베르 피레스.
  24. [24] 인터 밀란 시절 언론과 꽤나 불편한 관계였다. 베르캄프는 자신이 정한 날에만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길 원했지만 이탈리아 파파라치들은 그걸 원하지 않았고 베르캄프에게 상당한 조롱과 압박을 가했다. 2시즌만에 인터 밀란을 떠나게 된 이유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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