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국

독일의 역사 Die Geschichte Deutsch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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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Deutsches Kaiserreich

국기

국장[1]

1871 ~ 1918

표어

Gott mit uns
(하느님의 가호와 함께)[2]

국가

그대에게 승리의 왕관을(Heil dir im Siegerkranz)

위치

중부유럽

수도

베를린[3]

면적

2,658,161km² (식민지 포함)
540,857km² (본토 면적)

인구

1870년 39,200,000명

1913년 65,100,000명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국가원수

황제(카이저)[4]

정부수반

제국수상

주요 황제

빌헬름 1세
빌헬름 2세

주요 실권자

오토 폰 비스마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

언어

독일어

종교

개신교, 가톨릭

민족

독일인

주요사건

1871년 통일&건국
1905년 모로코 위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 선언 (멸망)

통화

굴덴, 마르크

성립 이전

북독일 연방, 바이에른 왕국

멸망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1. 개요
2. 역사
3. 사회
3.1. 정치
3.2. 군대
3.3. 인구
3.4. 경제
6. 평가의 변화
7. 독일 제국과 라이히
8. 국기
9. 국가
10. 역대 황제
11. 역대 제국 수상
12. 대중매체에서의 독일 제국
13. 둘러 보기

1. 개요

중부 유럽1871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하였던 독일인 계열의 황제국.

2. 역사

독일 제국의 황가인 호엔촐레른 가문신성 로마 제국 내의 선제후 영지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과 폴란드 왕국 내의 프로이센 공국동군연합으로 차지하고 있었고, 1640년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즉위하면서부터 북독일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30년 전쟁의 승리를 바탕으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과 프로이센 공작령을 통합해 프로이센 왕국을 세웠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부국강병책을 적극 추진하여 수만의 대군과 부유한 국고를 확보하였으며,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팽창정책을 펼쳤다. 이후 어리석고 무능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거쳐 나폴레옹 전쟁의 위기를 지나 빈 체제에 접어들어서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독일 연방을 양분하는 강대국으로 등극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시대는 바야흐로 자유주의 혁명의 시대였다. 1848년 혁명에서 호엔촐레른 왕조는 전복의 위기를 겪었고, 혁명으로 성립된 독일 국민 의회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를 거절하였고 결국 혁명은 유야무야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안정을 되찾은 호엔촐레른 왕조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정신병에 걸려 퇴위한 후 새로운 국왕 빌헬름 1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빌헬름 1세의 주요 관심사는 군대였다. 왕국의 전통대로 군인으로 성장해온 그는 독일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프로이센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군제를 개혁하고 신병을 확충하려 하였다. 그러나 곧 자유주의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개혁은 지지부진하게 되었고, 몇 차례의 의회 해산과 재선거에도 불구하고 계속 상황은 불리해져갔다. 결국 국왕은 퇴위를 결심하였으나, 당시 국방 대신이었던 보수 성향의 '룬 장군'이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재상으로 임명하라고 건의한다. 이리하여 비스마르크는 재상에 임명되었고, 그는 첫 의회 연설에서 그 유명한 철혈정책을 내세운다. 이후 덴마크 위기[5],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북독일 연방 결성,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거쳐 최종적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선포식으로 독일 제국이 탄생한다.

1871년 통일 이후 호엔촐레른 왕조는 독일 황제위도 겸하게 되었다. 황제인 빌헬름 1세는 재상 비스마르크를 전적으로 신임하였고, 그런 비스마르크에게 국내 정책은 외교 정책보다 덜 우선시 되었다. 소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불린 특별한 외교 관계를 통해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안위를 도모하였다. 외교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라고 그가 말한 것처럼, 독일은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고 남쪽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도 동맹을 맺었으며 영국과도 동맹 내지 우호적 중립의 관계를 맺었다. 독일이 확장을 멈추고 유럽의 균형자로써 행동해야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 비스마르크의 생각이었고, 베를린 회의는 이러한 구상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베를린 회의는 러시아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 최종적으로 독일-러시아 동맹의 결렬을 불러왔다. 그러나 삼제동맹이라고 일컫어지던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은 이미 발칸 문제로 무너진 지 오래였다. 결국 비스마르크의 외교술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독일의 외교는 그가 권력에서 물러난 후 갈 곳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고 이는 끝내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을 부르게 된다.

국내 문제 또한 간단하게 돌아가지만은 않았다. 비스마르크 앞에 놓인 국내 문제는 크게 세 가지, 문화투쟁과 사회입법 그리고 관세 문제였다. 문화 투쟁(자유로운 문화를 요구하는 운동)이라 불린 가톨릭 교도들과의 전쟁은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대해 교황의 무오류를 선언하면서 불이 붙었다. 교황은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중세 이후 유럽이 이룬 업적은 악마의 행위이므로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스마르크는 교황에 맞서 국내의 교황에 반하는 가톨릭파와 손을 잡았다. 그는 국정에서 가톨릭 교회를 배제하는 법안을 발의하고 민사 사건에 교회가 개입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막았다. 그렇게 7년을 싸웠지만 관세 문제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문화투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 무역을 원한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비스마르크이지만 정치인인 그는 가톨릭당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결국 관세 법안을 철회함으로써 비스마르크는 가톨릭당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을 대하는 비스마르크는 매우 교묘했다. 1878년 황제 암살 미수가 두 번이나 발생하자 비스마르크는 이를 사회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몰고 가 결국 사회민주당을 박살내 버린다. 때로는 노동자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법안, 아동 노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낸 비스마르크였지만, 그에게 사회주의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가 재상으로 있던 시절 독일에는 주요 6개의 정당이 있었다. 낡은 봉건적 이상을 품고 산업화와 기계화에 반대하던 보수당, 비스마르크의 배경인 융커(동프로이센의 지주들)들의 자유보수당, 가장 강력한 정당인 부르주아지의 국가자유당, 반군국주의, 반보수주의,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던 진보당, 가톨릭교회의 중앙당, 유일한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 이 여섯 개의 정당이 여러 주요 쟁점들을 놓고 다투었다.

1888년 빌헬름 1세가 서거하였고, 프리드리히 3세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다. 그러나 99일 만에 후두암으로 병사하자 그의 아들 빌헬름 2세가 제위에 오른다. 제위에 오른 그는 독일을 유럽의 제국을 넘어서 세계적인 제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를 위해 함대를 건조하고,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고 군대를 팽창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동맹이 결렬되었으며 함대 증강은 영국의 심기를 건드려 영국-프랑스-러시아 삼각동맹을 결성하는 계기가 된다. 비스마르크가 현 상황을 유지하며 실익을 도모했다면 빌헬름 2세는 낭만주의적인 사고로 자신의 제국을 팽창시키려 하였다고 여겨져 왔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랬듯이 독일 또한 애국주의에 고취된 청년들의 자원병 열풍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 독일은 2,000,000명이 넘는 젊은이를 잃었다. 전쟁으로 인해 독일은 피폐해졌고 장군들에 의한 군부독재 체제가 성립되었다. 의회는 힘이 전혀없었고 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전 말기에 이르러 몇 차례의 합리적인 휴전조약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부는 이를 거부했는데, 군사적으로 현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는 허황된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참패였고 군부도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살난 군대와 고갈된 자원, 피폐해진 국민들을 남기게 된 독일 제국은 킬 군항의 반란으로 시작된 독일 11월 혁명으로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제정이 종식되었다. 새로운 정부는 협상국과 휴전협상에 나섰고 그렇게 전쟁은 끝이 났다.

3. 사회

3.1. 정치

독일 제국의 상부 구조는 표면상으로는 마치 입헌군주제 국가들처럼 입헌 국가의 틀을 수용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제군주제를 따르는 전형적인 전제 국가의 모습을 다분히 띠었다. 황제는 이론상 무한의 권력을 지녔으며, '프로이센 군대'는 정부로부터 독립하여 별도의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의회양원제로서 제후들로 구성된 연방참의원(상원)과, 보통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제국의회(하원)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정부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것은 아니었고, 군주가 자의적으로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연방제를 채택한 연방 국가였었으나, 프로이센의 크기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프로이센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기 쉬웠다. 후대의 역사학자는 본 국가를 이르러 '사이비 입헌 국가'[6]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한편 경제 항목에서 후술한 공업화로 인하여서 기존의 사회 계층에도 큰 변화가 있었고, 이는 독일 제국의 정치 지형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4계급(Der vierte Stand)[7]이라고 지칭하던 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대거 양성된 것이다. 비록 숙련/비숙련공, 남성/여성, 출신계층 등에 따라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단일한 계급의식을 갖추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지만, 노동 계급은 사회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하였고 이들중 다수의 지지를 바탕으로 창설된 SPD는 당국의 모진 탄압에도 불구하고 1890년 총선에서 득표율 1위를 확보, 비스마르크스의 실각으로 이어지며 유력정당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했고 지속적으로 주요 야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와 동시에 노동 시간 규제와 사회복지 정책의 확충이 이어져 노동자들의 권익도 점진적으로 개선되게 된다.

또한 구체제 특권층들과 노동자 계층 사이에 끼여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지는 못했지만, 부르주아 계층 역시 그들 나름대로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화적인 측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였고, 부르주아적인 생활/도덕 양식이 당대 사회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3.2. 군대

독일 제국의 성립 이전부터 비스마르크가 군대 예산을 놓고 의회와 사사건건 대립했던 바에서 보이듯이, 독일 제국군은 재정상으로는 민간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재정적인 문제와 별개로, 군대의 통수권은 왕권신수설에 기반하여 황제에게 부여되었다. 문제는 이 통수권에 대한 규정이 법조상으로 명확하게 기재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통수권의 범위를 놓고 군부 내에서도 여러 차례 논란이 빚어졌고 결국 1차대전 시기에 이르면 군부가 역으로 카이저 빌헬름 2세를 쥐고 흔드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한편 프로이센 시절부터 이어져온 특유의 군국주의적인 문화로 인하여 독일 제국 시대에도 군부는 왕실 및 상층 귀족들과 긴밀히 연결된 배타적인 조직으로 뿌리내리게 되는데, 이러한 문화는 호엔촐레른 왕실이 몰락한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제3제국 시기까지도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구체제적이고 반동적인 군부의 모습을 견제하려는 시민 사회의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독일 제국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세 차례의 전쟁을 승리하는 과정에서, 독일 제국군은 애국심의 상징으로 그 이미지를 크게 탈바꿈하게 된다.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그 묘사가 얼마나 사소한 것일지라도, 비애국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짙게 형성되었고, 의회 내 자유주의 세력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1900년대에 이르면 독일 제국군의 상비 인력은 (평시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50만 명에 근접하게 된다.[8] 게다가 1차대전의 전야였던 1910년대에 이르면 삼국 협상의 등장으로 인하여 독일은 양면전쟁을 강요받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 군부는 규모 확장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군대는 독일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2년의 복무 기간을 통하여서 정부는 상당수의 남성들에게, 특히 독일인이라는 의식이 약했던 남/서부의 가톨릭 교도들과 노동자들에게, 국민 의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또한 상술하였듯이 고급장교의 상당수가 귀족 계층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어 군대 자체를 선망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역시 짙어져 갔고, 많은 부르주아 남성들에게 예비역 장교는 바람직한 사회적 지위이자 쟁취해야 할 목표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3.3. 인구

독일 제국이 수립되던 1871년에 약 4천1백만 명 규모였던 독일 제국의 인구는 이 시기 폭발적으로 성장하여서 1910년에는 6천5백만 정도로 불과 40년 사이에 1.5배 규모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성장의 원동력으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번째로는 다른 국가와 비교해서 상당히 높았던 출산률[9], 그리고 두번째로는 식민지배를 하고 있던 폴란드 일대에서 경제적 풍요를 찾아 상당한 이민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편 경제발전과 더불어서 도시화 역시 두드러진다. 여기에 밭맞추어 각종 운송 기술의 발달은 도시로의 식량 운반 및 농민들의 도시 이주를 손쉽게 하였다. 그 결과 1871년만 하더라도 독일 제국 내 인구의 5% 가량만이 도시에 거주하였으나, 불과 20년만인 1890년이 되면 도시화율이 40%를 기록하며, 1910년에는 60%를 기록한다.

3.4. 경제

독일이 전근대적 농업국가에서 오늘날과 같은 산업화된 세계구급 경제 대국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것도 독일 제국 시기의 일이다. 초기에는 철도 부설 사업, 제철업 등이 경제 분야에서 두드러졌으며, 1890년대 이후로는 2차 산업혁명의 물결에 힘입어 독일 내에서도 각종 석유화학 산업 등이 차지하는 파이가 커지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GDP 상으로도 확인가능한데, 독일 제국 수립 극초창기인 1873년을 기준으로 독일 내에서 농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 가량이고, 중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30% 가량이었다. 하지만 20년 후인 1895년이 되면 농업의 GDP 내 비중은 32%로 감소하며, 중공업이 36% 가량으로 농업을 제치고 독일 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군으로 올라서게 된다. 이러한 경제발달에 힘입어서 노동자 계층의 규모가 크게 성장하였으며, 관리자와 노동자 사이를 연결해 줄 마르크스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프티 부르주아 화이트 칼라직 역시 대거 등장하게 된다.[10]

4. 영토

독일 제국은 여러 개의 국가로 나누어졌고 그 중에서 프로이센 왕국은 여러 개의 주로 나누어졌다.

주도

베를린

베를린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서프로이센

단치히

브란덴부르크

포츠담

포메른

슈테틴

슐레지엔

브레슬라우

포젠

포젠

작센

마그데부르크

하노버

하노버

헤센나사우

카셀

베스트팔렌

뮌스터

라인란트

코블렌츠

호엔촐레른

지그마링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슐레스비히

5. 독일 식민제국

독일제국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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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위투

소말리아

동아프리카

남서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카메룬

토고

오세아니아

독일령 뉴기니

독일령 사모아

아시아

키아우초우

⑴ 키아우초우는 독일 제국이 청나라로부터 임차한 조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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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가의 변화

앞서 설명하였듯이 '독일 제국(도이체스 라이히)'은 독일 민족 국가를 뜻하였다. 독일 제국 시기 민족주의적 독일인들에게 그들의 국가는 그런 꿈이 실현된 국가였고, 보불전쟁의 승리에 뒤이은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독일 제국 선포는 그런 밝은 미래가 약속된 것처럼 보였다. 반면 독일, 특히 프로이센의 귀족들에게는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다. 독일 민족의 신화는 귀족들의 것이라기보다는 독일 민중, 정확히는 독일의 중소상공인들의 것이었다. 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보기에, 그간 귀족들은 그들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것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 영방 국가의 집합체로 판결났을 때 정해진 것이었다. 제국은 어디까지나 '민중(신흥계급)의 신화'였고, '독일 제국'이 건설되었다는 사실은 귀족들이 민족주의자에게 항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아무리 1848년 혁명에서 귀족들이 정치적으로는 승리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그들의 꿈을 배신하긴 했지만, 결국 독일 제국은 이루어졌고, 부분적으로나마 입헌군주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제국이 주는 확고한 신념 하에 보수주의는 민족주의와 차차 결합하는 길로 나아갔고, 중소 부르주아들은 관료, 군부, 기존 귀족과 결탁했다.

이렇게 안정된 체제를 오래 누리다 보니,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오랜 전제 관료 정치에 익숙해져 있던 독일 중산층들에게 민주주의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전승국들이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강요한 것, 독일의 민족성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이마르 시대에는 독일 제국 시대가 돌아가야 할 이상향이 되었다. 애초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항목에서 보듯 황제+군부와 중산층 이하 독일 국민들이 아직 힘을 가지지 못한 권력의 공백 속에서 공화국에 대한 희망을 품은[11] 독일 사회민주당이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부 극단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침략의 상징이 되었고, 따라서 이것에 기반을 둔 바이마르 공화국도 부정되었다. 이런 독일인들은 민주주의와 같은 '서구의 특성'들을 이용하지 않고 근대를 일구어낸 독일 제국의 민족성을 들먹이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것은 독일인들만이 지니고 있는 '특수노정(Sonderweg)'으로 여겨졌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런 극단주의자들에게 철혈로 독일 제국을 탄생시킨 비스마르크는 민족의 영웅으로 우상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나치 독일, 이른바 '제3제국'에서 더욱 심해졌다. 바로 이런 특성, 즉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비민주적인 국가들의 반감과 "우리식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는 매우 전형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고, 한국일본 등의 동아시아 국가도 예외는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유신 헌법 역시 한국식 민주주의를 반영한 헌법으로 포장된 바 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직후에도 당분간 독일 제국 신화는 계속되었다. 독일인들에게 부정해야 할 대상은 어디까지나 히틀러의 제국이었지 '독일 제국' 자체가 아니었다. 나치 독일은 어디까지나 잠시 존재한 이탈이었다.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하였다. 나치가 집권하는 데 필요한 대중 동원력이 바로 그 민주주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겨졌다. 그러면서 독일 제국이 지니고 있었다는 민족성-복종과 충성과 같은 특성에 대한 숭배가 이루어졌다.

'독일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68혁명기와 맞물린 1960년대, 1970년대였다. '역사적 사회과학'을 주창하면서 독일의 과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사회사가들은 '독일 제국'의 신화를 깨뜨리려고 하였다. 한스-울리히 벨러와 볼프강 몸젠, 위르겐 코카로 대표되는 그들은 '특수노정'이 지니고 있던 긍정적인 의미를 부정적으로 재해석 하기 시작했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국가들은 정상 궤도상의 근대 국가로 여겨졌고, 독일 근대 국가는 그에서 이탈한 것으로 여겨졌다. 혁명이 없이 탄생해버린 독일 제국의 체제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것으로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아울러 나치 독일의 가능성은 이미 독일 제국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고 두 체제의 동질성을 강조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다시 독일 제국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역사가로는 독일에서는 토마스 니퍼다이가 대표적이었고, 1980년 영국 소장파 역사가인 제프 일리와 데이비드 블랙번이 출간한 '독일 역사서술의 신화들(Mythen deutscher Geschichtsschreibung)'[12]은 '특수한 길'을 둘러싼 논쟁이 국제적으로 비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일리와 블랙번은 사회사학자들의 독일 제국 비판 자체가 신화라고 보았다. 그들에게는 영국도 완전한 근대 국가가 아니었다. 그들의 연구 결과로서 영국은 여전히 전통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였고, 억압성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이나 프랑스가 이상적인 국가 롤 모델이고 '정상적'이라는 관점이 탈피되었다.

또한 독일 역사학계의 전통적 역사주의를 계승하면서도 사회사와 일상사의 방법론을 수용한 니퍼다이는 1983년에서 1992년까지 그의 역작인 독일사(Deutsche Geschichte) 3부작을 출간하면서 전통적인 독일의 역사서술과 사회사가들의 비판적 관점의 절충적으로 종합하고자 하였고, 아울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일상생활을 아우르는 전체적이고 복합적인 역사상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단방향적인 역사 발전 모델은 부정되고, 복수의 근대 모델이 제시되었다. 독일 제국도 서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역동적으로 발전을 이루어 나가면서 사회 모순을 점진적으로 해소하려는 국가로 그려지는 등의 역사상의 수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사회사가들의 입장 역시 수정이 이루어졌고, '특수한 길' 테제 역시 점차 폐기처분되는 수순을 겪게 되었다. 사회사의 선봉장인 벨러 역시 1987년부터 2008년까지 니퍼다이에 비견되는 또다른 역작인 독일 사회사(Deutsche Gesellschaftsgeschichte) 5부작을 출간하면서, 19세기 독일사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관점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그간의 논쟁의 성과를 수용하여 상당 부분 수정된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동서독 통일 이후의 경향은 일상사 연구의 영향과 포스트모더니즘 조류를 타고서 이분법적 평가를 벗어나 독일 제국 및 19세기 독일의 입체적인 면모를 이해하자는 입장이 지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13][14]

한편 독일 민족주의 관점에서 볼 경우 의외로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독일의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오스트리아를 빼놓고 통일한 점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오스트리아는 독일계 국가들의 수장이였고, 비스마르크 시절에도 독일계 가톨릭 국가들의 맹주로 대접 받던 나라이다. 또한 오스트리아를 빼먹은 바람에, 최후의 신성 로마 제국 왕조이던 합스부르크 왕조와의 연결점도 날아가버렸다. 때문에 대독일주의를 표방하던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보자면 독일도 아니고, 제국도 아닌 나라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후에 대독일주의나치즘과 결합하여 패악질을 벌이는 바람에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대독일'이라는 말은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네오 나치가 아닌지 의심될 정도의 금기사항이 되어버렸다.

7. 독일 제국과 라이히

흔히 '독일 제국' 하면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하였던 중부 유럽의 국가 정치체 'Deutsches Kaiserreich'[15]을 의미하지만, 'Deutsches Reich'(독일 라이히)라고 하면 이 국가 외의 다른 것들도 지칭한다. 가령 '제1제국'(First Reich)으로 여겨지는 신성 로마 제국, 제3제국 나치 독일이 그것이다. 그리고 독일 제국 멸망 후 탄생한 바이마르 공화국도 국호는 여전히 'Deutsches Reich'이었다.[16]

이는 'Reich'(라이히)의 단어의 의미 때문이다. 'Deutsches Reich'에는 곧 "독일 민족 국가"라는 함축적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독일인과 큰 연관성을 지녔다고 볼 수 없었던 '신성 로마 제국'은 관념상 독일인에게 귀속되었다. 불발된 1848년 혁명에서도 자유주의민족주의자들이 주창하였던 민족 국가의 이름도 'Deutsches Reich'이었다. 혁명은 실패하였지만, 1871년의 본 국가도 이러한 신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념 속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첫 번째 라이히(제1제국)'으로 간주되었고,[17] 독일 제국은 '두 번째 라이히(제2제국)'으로 불리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을 이은 나치 독일은 자신들을 '세 번째 라이히'(Drittes Reich)라고 하였다.[18] 그러나 나치 독일 이후 '라이히'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워진 독일 국가는 '4번째 라이히' 식으로 칭하지도 않고, '라이히'라는 단어를 쓰지도 않게 되었다.

8. 국기

Schwarz-Weiß-Rot, 즉 흑백적 국기로 불린다. 거꾸로 보면 예멘 국기 검정색과 흰색은 튜튼기사단에서, 빨간색은 신성로마제국의 전투용 깃발에서 유래한 것이다. 1848년 혁명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거처 현제 독일에서 쓰이는 흑적금 배색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상징한다면 이 흑백적 배색은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상징으로써 전통적으로 독일 내 보수파와 옛 프로이센의 근왕주의자들이 애용해오던 깃발 배색이었다.

독일 제국 역시 나치만큼이나 현대 독일에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 데다, 네오 나치를 비롯한 극우주의자들이 하켄크로이츠의 대체물로 애용하는 상징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19] 비록 법으로는 금지되지 않았으나 역사적 고증을 위한 자료에서의 사용 외에는 대체로 터부시하는 편이다. 벨기에의 일부 지역에선 이 국기를 아예 불법으로 여긴다. 자세한 건 벨기에 학살을 참조할 것.

9. 국가

Heil dir im Siegerkranz(그대에게 승리의 왕관을)이다. 해당 문서 참조.

10. 역대 황제

대수

이름

즉위년일

퇴위년일

1대

빌헬름 1세

1871.1.18

1888.3.9

2대

프리드리히 3세

1888.3.9

1888.6.15

3대

빌헬름 2세

1888.6.15

1918.11.9

11. 역대 제국 수상

대수

이름

임기시작

임기종료

정당

1대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71.3.21

1890.3.20

무소속

2대

레오 폰 카프리비

1890.3.21

1894.10.26

무소속

3대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1894.10.29

1900.10.17

무소속

4대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

1900.10.17

1909.7.14

무소속

5대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1909.7.14

1917.7.13

무소속

6대

게오르크 미하엘리스

1917.7.14

1917.11.1

무소속

7대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1917.11.1

1918.9.30

중앙당

8대

막시밀리안 폰 바덴

1918.10.3

1918.11.9

무소속

9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1918.11.9

1919.2.11

사회민주당

12. 대중매체에서의 독일 제국

  •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을 포함한 동맹국이 승리한 탓에 멸망하지 않고 게임 시작점인 1936년까지 건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 곳곳에 괴뢰국을 세우고 패배한 협상국의 식민지를 빼앗는 등 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최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13. 둘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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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 자발 샴마르 토후국,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 조지아 민주 공화국

아프리카 : 데르비시국, 다르푸르

※ 윗첨자+: 괴뢰 국가종속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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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1889년 제정된 문장이다.
  2. [2] 이 표어 자체는 성경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임마누엘) 다른 국가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God zij met ons)와 러시아 제국(С нами Бог).
  3. [3] 대법원 격인 제국재판소(Reichsgericht) 소재지는 작센 왕국 라이프치히. 1945년까지 그랬다.
  4. [4] 프로이센의 국왕이 독일 황제를 겸했다.
  5. [5] 독일 최북단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대한 독일 문화권과 덴마크의 영유권 분쟁.
  6. [6] 학술문헌에서는 '외견적 입헌군주제'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된다. 즉 겉만 입헌군주제라는 것.
  7. [7] 당연하지만 프랑스 내에서 쓰이던 제3계급을 비튼 표현이다.
  8. [8] 재밌는 사실은 정작 군부 최상층은 이러한 인력 보강을 마뜩찮아했다는 것이다. 융커를 중심으로 한 구체제 귀족층의 수는 한정될 수 밖에 없으므로, 군대의 규모를 늘리면 늘릴수록 부르주아 출신들이 군대에 들어와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훔쳐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
  9. [9] 특히 독일의 제1적국이었던 프랑스와 비교하면 출산률 차이가 도드라진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시기만 하더라도 러시아를 제외하면 유럽 최고의 인구 대국이었던 프랑스는 근대화를 거치면서 심각한 출산률 저하를 겪으며 인구가 거의 늘지 않아서 이로 인해서 제3공화국 당국이 머리를 쥐어싸매고 대책 마련에 고심하게 만들었다.
  10. [10] 이들 화이트 칼라 종사자들은 노동자들을 경멸하면서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 경제적인 상황만 비교하자면 노동자들보다 못할 때도 많았다. 특히 숙련공 노동자들과 비교해서는 경제적인 여건이 열악한 경우가 많았다. 그건 21세기에도 똑같다.
  11. [11] 물론 전쟁 시기에는 당령을 어겨가며 전쟁에 찬동하기는 했지만.
  12. [12] 1984년에 내용이 더욱 확장되어 'The Peculiarities of German History'라는 제목의 영어판으로 출간되었다.
  13. [13] 독일 제국에 대한 역사서술의 변화상을 정리한 저서로는 Mattew Jefferies의 'Contesting the German Empire'를 참고할 것.
  14. [14] 그 외에 위르겐 오스터하멜과 제바스티안 콘라트를 중심으로 한 지구사(Global History) 경향의 대두와 함께 트랜스내셔널한 관점 역시 현재의 주류 경향 중 하나이다. 관련 내용은 오스터하멜과 콘라트가 편저한 'Das Kaiserreich Transnational'을 참조할 것.
  15. [15] deutsch('독일인의, 독일의')라는 형용사와 Kaiser('황제'), Reich('제국ㆍ국가')가 합쳐진 단어이다. 영어에선 형용사와 명사를 쓸 때, 형용사에 변화가 없지만, 독일어에선 강변화ㆍ약변화ㆍ복수변화 등이 따로 존재한다. 위의 deutsches Kaiserreich에서 Kaiserreich는 중성명사이고, 형용사인 deutsch의 앞에 정관사가 없으므로 형용사는 강변화1격으로 변형해 뒤에 -es가 붙는다.
  16. [16] 흔히 'Reich'(라이히)가 '제국'으로 옮겨지기에 오해하는 것이지만, 'Reich'라는 단어는 군주정을 전제하기 않기 때문에 공화국인 상태에도 'Reich'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영역에서도 제기된다. 영어에서도 Empire보단 Realm(연합왕국 혹은 연방왕국)이나 commonwealth가 적절하다는 견해가 있다. (라이히 문서 참조.)
  17. [17] '독일 라이히'로 간주된 것이 이후 시대라는 것이지, 그 때도 국호가 Heiliges Römisches Reich인 만큼 Reichskammergericht(제국대법원) 등 '라이히'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썼다.
  18. [18] 나치 독일과는 달리 앞의 두 국가는 당대에 'Reich'라는 말은 썼어도 '첫 번째', '두 번째'과 같은 순서를 매기지는 않았다. 애당초 '첫 번째 라이히', '두 번째 라이히'라는 개념 자체가 자신들 '세 번째 라이히'를 위한 프로파간다 차원에서 자주 쓰였던 용어이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사용을 삼가려는 경향이 있다.# 일단 그렇게 순서를 붙이기 시작한 것 자체는 나치 독일 이전인 1923년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Arthur Moeller van den Bruck)라는 작가가 시작한 것이다.
  19. [19] 실제로 나치 독일 성립 이후 몇 년동안은 독일 제국의 국기가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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