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시 전쟁

동맹시 전쟁

날짜

기원전 91년~88년

장소

이탈리아 반도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로마 공화정

이탈리아 공화국

지휘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티투스 디디우스†
가이우스 코스코니우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퀸투스 폼파이디우스 실로
가이우스 파피우스 무틸루스
티투스 베티우스 스카토†
가이우스 폰티디우스†
헤리우스 아시니우스†
가이우스 비다킬리우스†
푸블리우스 프라이센티우스
누메리우스 루킬리우스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루키우스 클루엔티우스†
트레바티우스
마르쿠스 람포니우스
마리우스 에그나티우스†
폰티우스 텔레시누스†

결과

로마의 승리
이탈리아에 로마 시민권 부여

1. 개요
2. 배경
3. 전쟁의 시작
4. 전쟁의 경과
4.1. 초반전, 이탈리아의 승리
4.2. 로마의 반격
4.3. 술라의 활약
4.4. 종전
5. 의의
6. 영향
7. 기타

1. 개요

기원전 91년부터 88년까지, 로마 공화국과 이탈리아 반도의 동맹시 연합이 벌인 전쟁이다.

2. 배경

이탈리아 반도에트루리아 연맹과 삼니움족, 키살피나 지방의 켈트족과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까지 모두 복속시킨 뒤, 로마는 명실공히 이탈리아 전체의 패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 에트루리아계, 라틴계, 그리스계 도시들은 로마와 동맹 관계를 맺게 되는데, 전쟁에서 패하고 강제로 동맹이 된 터라 사실상 로마의 속국과 같은 처지였다. 이들은 전쟁 시 로마에게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야하고, 상호 간에 외교관계를 제한받았으며 각자 개별로 로마와만 동맹을 맺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처우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했을 때 꽤 관대한 편이었는데, 사실상 피정복국인 이들은 상술한 몇가지 제약 외에 내정에 간섭받지 않았고, 통상 등의 활동에 자유로웠으며,[1] 외적[2]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았다. 이탈리아 내에서도 분쟁의 불안이 사라진건 덤. 이처럼 로마의 패권은 동맹시 입장에서도 유리한 부분이 있었기에 로마가 국난의 위기에 휘청거리던 2차 포에니 전쟁[3] 때도 이들은 대다수 로마의 편에 섰고, 결국 로마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이처럼 끈끈했던 관계였으나, 전쟁을 통해 로마의 영토와 부가 축적될수록 동맹 도시들의 불만은 점점 높아졌다. 동맹시의 주민들은 해마다 로마의 전쟁에 불려가 종군하며 함께 피를 흘렸으나 실질적인 이득은 모두 로마의 몫이었다. 물론 로마 내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인식한 그라쿠스 형제와 같은 개혁가들이 등장하여 로마 시민권의 확대를 주장하였으나, 기득권층인 원로원의 보수파들은 그때마다 초법적인 수단까지 동원하여 이를 결사적으로 막았다.

3. 전쟁의 시작

그렇게 쌓이던 불만은 한 사건으로 인해 결국 폭발하게 된다. 동맹시 시민들에게의 로마 시민권 부여를 주장하던 호민관 드루수스[4]는 당대 최고의 영웅 마리우스[5]와 원로원의 일인자 스카우루스[6]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7] 집정관 필리푸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이 잘 풀리는 듯하였으나 드루수스는 원로원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8] 이번에는 너무 지지를 많이 받은 게 문제였는데, 원로원 의원 중 상당수가 드루수스를 지지했고, 평생의 악숙인 스카우루스와 마리우스마저 힘을 합쳐 드루수스를 지지하는 수준에 이르자 다른 방법이 없어서 암살을 한 것이다. 드루수스의 유언은 누가 나처럼 우리 공화국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Ecquandone similem mei civem habebit res publica)였고, 정말로 그런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해 불만이 터져버린 동맹시들은 이탈리아 공화국을 결성, 정부와 수도를 정하고, 군대를 양성했다. 백여 년 전, 한니발도 이루지 못한 로마 연합의 해체가 시작된 것이다.

4. 전쟁의 경과

이에 로마는 북부 집정관에 푸블리우스 루푸스, 남부 집정관에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9]를 내세워 맞섰는데, 여기서 동맹시가 오랫동안 군사셔틀을 하며 쌓아온 경험[10]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동맹시는 로마군과 완벽히 같은 편제와 전술을 가지고 로마군을 궁지에 몰았고, 기선제압에 성공한다.

4.1. 초반전, 이탈리아의 승리

로마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처음부터 파일리그니족[11]의 베티우스 스카토에게 패배하여 약간의 병력을 잃었다. 삼니움족[12]의 무틸루스는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 놀라를 점거했고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대치했다. 무틸루스는 루키우스 카이사르에게 누미디아[13]군이 많은 것을 파악하여 한가지 계략을 생각해냈다. 삼니움 군대에는 누미디아 왕자 옥신타가 포로로 있었는데[14] 무틸루스는 옥신타에게 누미디아 왕의 복식을 갖추게 하여 루키우스 카이사르 휘하 누미디아군을 동요하게 했다.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누미디아군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냈고 무틸루스의 습격을 막아내지 못하여 퇴각했다.

북쪽의 집정관 루푸스는 군 지휘 경험이 많은 노장 마리우스에게 지휘권을 제공했고 마르시족을 행해 공격을 가했다. 그런데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패배시킨 베티우스 스카토가 성동격서의 계책으로 마리우스 진영 앞에 진지를 구축하고 루푸스 진영에 기습을 가하여 현직 집정관인 루푸스를 전사시켰다.

마리우스는 강물의 로마군 시체를 보고 상황을 파악하여 스카토의 본진을 습격한다. 허를 찔린 스카토는 마리우스와 휴전하여 루푸스의 시신을 돌려주었다. 루푸스의 집정관급 지휘권은 마리우스에게 넘어간다.

마르시족의 폼파이디우스 실로는 거짓으로 로마에 항복하며 노예의 자식을 자기 자식이라 속여 인질로 로마 사령관 카이피오에게 보냈다. 그는 카이피오의 로마 군대를 매복지로 유인하여 포위하였고 카이피오는 목숨을 잃는다.

4.2. 로마의 반격

노장 마리우스는 당대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군사적 업적이 대단하여 이탈리아인들조차 마리우스를 매우 존경해했다. 즉 북부에서 마리우스가 사실상의 총사령관 역할을 한 셈이다. 마리우스는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보좌관이자 옛 부하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합동작전을 벌여 마르시족을 공격하고자 했다. 마리우스와 술라는 마르시족을 무찔렀고 마르시족이 도주하자 술라가 그들을 추격하여 크게 격파했다.[15]

피케눔의 로마장군 폼페이우스 스트라보[16]는 비다킬리우스에게 한 번 패했으나 이탈리아군에게 반격을 가하여 무찔렀다. 이어 마르시족을 습격하여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한편 마리우스는 마르시족과의 싸움이 진전이 없자 장군직을 사임했다. 당시 67세로 고령이었던 것으로 보아 노쇠함과 병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시민권 제공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키자, 이탈리아 공화국은 전쟁을 할 명분이 사라졌다. 이듬해인 기원전 89년 집정관에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와 루키우스 카토가 당선되었다.

4.3. 술라의 활약

마리우스의 보좌관 술라는 남부전선의 총지휘를 맡았다. 폼페야니족[17]의 클루엔티우스는 술라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폼페이군은 로마군을 압박했으나 군량 보급을 위해 잠시 떠나있던 로마 기병대가 복귀하여 공격을 퍼붓자 크게 패배했다. 술라는 추격을 가하여 클루엔티우스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하고 그를 전사시켰다.

술라는 히르피니족[18]을 복속시키기 위해 그들의 도시인 아이클라눔을 포위했다. 술라는 아이클라눔의 성벽이 목재로 이루어졌음을 파악하여 화공을 가했다. 아이클라눔은 함락되었고 로마군에게 약탈되었다. 겁먹은 히르피니족은 술라에게 대항할 엄두가 나지 않게 되었다.

술라의 칼날은 이탈리아의 집정관이자 삼니움족의 수장 무틸루스를 향했다. 술라는 빠른 공격으로 무틸루스를 격파하고 아이세르니아로 고립시켰다. 무틸루스는 부상을 당해 아이세르니아로 힘들게 도주했다. 술라는 남은 삼니움 세력을 천천히 정리해 나갔다.

술라의 활약으로 전세는 확실히 기울어졌고 반로마를 외치는 중심 세력인 삼니움족은 대부분의 세력을 잃었다.

4.4. 종전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는 파일리그니족을 복속시키고 이탈리아 전쟁의 시발점 아스쿨룸을 점령했다. 술라는 가까운 최측근이자 부하인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지휘권을 제공했다. 메텔루스는 이탈리아의 집정관이자 마르시족의 수장 실로를 전사시키는 대승리를 거둔다. 이제 로마에 위협이 되는 세력은 대부분 정리되었고 술라에게 패해 급속도로 약화된 삼니움족의 무틸루스 정도만이 남게되었다.

5. 의의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기존의 느슨한 도시국가 연합의 형태에서 벗어나 진정한 이탈리아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19] 동맹시들은 비록 전쟁에서는 패하였지만 목적이었던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게 된다. 이는 로마의 대외 정책 방향에 영향을 주었고, 훗날 로마의 부드러운 속주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6. 영향

동맹시 전쟁의 일등공신 술라는 풀잎관을 받고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술라는 집정관 권한으로 폰투스 전쟁의 지휘권을 얻는 등 승승장구한다.

마리우스의 지지자이자 호민관인 술피키우스는 이번에 로마 시민권을 얻은 신시민들이 35개 선거구 어디서나 투표하게끔 하게 했지만 술라를 비롯한 보수파와 구시민들은 이에 반발하며 신시민들이 수도 근처의 4개 선거구와 지정된 4개 선거구에서만 투표하기를 바랐다. 한편 노장 마리우스는 술라의 부상을 질시하여 폭력적인 수단으로 술라에게서 폰투스 지휘권을 가져가려했고 신시민들은 이를 지지했다. 결국 술라는 동맹시 전쟁 당시 지휘했던 군단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로마를 장악했다. 술피키우스의 선거구법 역시 술라에 의해 폐지되었다.

동맹시 전쟁의 주동자였던 마르시족의 실로는 죽었지만 삼니움 세력은 여전해서 다른 주동자인 무틸루스는 마리우스를 지지해 정권을 탈취하도록 도왔고 5년이 지나 술라가 2차 내전을 벌일 때 마리우스편에서 싸웠다. 그는 술라가 승리하자 자살했는데 삼니움 세력도 그때 완전히 몰락한다.

술라는 매우 보수적인 정치가였던 까닭에 자신에게 적대한 동맹시들에게 불이익을 가했다.[20] 수많은 동맹시의 땅이 로마의 공유지가 되었으며 주민들의 시민권 역시 박탈당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당시 전체 로마의 35개의 선거구 중 동맹시들은 단 4개만을 배정받는 등 여전히 차별 요소가 남아있었고 이는 훗날 카이사르의 내전 때 민중파의 거두가 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남하하기 시작하자 이탈리아 도시들이 전부 그에게 붙는 계기가 된다.

7. 기타

한편 동맹시(市) 전쟁이 아니라, 동맹국(國) 전쟁이라 해야 옳지 않느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동맹시라고 하면 동맹도시를 가리키는데, 그 '도시'들을 살펴보면 도시뿐만 아니라 농경지라든가 항구 등 꽤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어 '도시'라고만 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이유. 이와 같은 맥락에서 폴리스를 '도시국가'라 번역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도 있다.


  1. [1]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가 이들을 공격할때, 보급의 목적으로 만든 도로망이 이런 교류를 더욱 활성화시켰다.
  2. [2] 주로 북 이탈리아의 켈트족.
  3. [3] 한니발은 로마를 직접 공성하기는 어렵다고 보았기에 일단 로마의 속국들인 동맹시를 로마로부터 이탈시키려 했다. 먼저 로마 측의 홈그라운드인 이탈리아에서 대승을 거두어 로마의 주력을 박살냄과 동시에 힘을 과시하고, 그 힘에 겁 먹은 동맹시들을 회유하여 자신에 편에 붙게 하는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카푸아 등 몇몇 주요 도시들을 로마로부터 등 돌리게 만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세 번이나 로마군의 주력을 궤멸시키는 압도적인 전과를 거뒀음에도 불구, 결국 로마 연합은 무너지지 않았다.
  4. [4] 소 카토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5. [5] 로마 군단의 아버지. 누미디아를 평정하고 게르만족의 침입을 격파하여 집정관을 6번이나 지낸 거물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부이기도 하다.
  6. [6] 기원전 115년도 집정관으로 원로원 내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원로원의 수장이었다.
  7. [7] 드루수스는 보수파에 속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스카우루스 같은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었다. 특히 그라쿠스 형제의 전례를 참고하여 모든 절차를 합법적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8. [8] 필리푸스나 법무관 카이피오가 배후로 많이 의심되는데 키케로는 히스파니아의 수크로 출신인 바리우스 세베루스를 배후로 지목했다.
  9. [9]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큰아버지.
  10. [10] 2차 포에니 전쟁 참전 로마군의 절반 이상이 동맹시 보병이었다.
  11. [11] 이탈리아 중남부의 부족.
  12. [12] 이탈리아 중남부의 삼니움에 사는 부족. 카우디움에서 로마에게 큰 굴욕을 안겨준 곳으로 유명했다.
  13. [13] 아프리카 북부의 왕국, 현재의 알제리.
  14. [14] 마리우스가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를 제압할 때 생포되어 이탈리아 남부에 연금되었다.
  15. [15] 로마사의 라이벌로 유명한 마리우스와 술라의 마지막 협동작전이었다.
  16. [16]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이자 키케로의 상관이다. 키케로는 이때 군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7. [17] 유명한 도시 폼페이의 주민.
  18. [18] 남부 이탈리아에 사는 삼니움인 가운데 한 부족그룹.
  19. [19] 고대 로마가 좀 자세하게 표현된 연도별 나라들의 영역이 나타나는 유튜브 동영상들에서는 이 때까지는 이탈리아의 상당부분이 로마 본국보다는 색깔이 연한 동맹국 내지는 부용국 정도로 표시되다가 동맹시 전쟁이 끝나면서 로마 본국과 완전히 같은 색깔로 합쳐지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20. [20] 상당히 많은 수의 동맹시가 민중파인 마리우스의 편을 들었다. 프라이네스테가 대표적인 예인데 주민들은 도시에서 마리우스의 아들과 같이 농성하다가 술라 군대에게 도시가 점령당하고 지도자들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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