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 9성

1. 東北九城 : 고려북진정책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던 9개의 성
1.1. 개척에서 반환까지
1.2. 위치에 대한 논란
1.2.1. 함흥 평야설
1.2.2. 함경남도 일대설(함흥 ~ 길주 일대설)
1.2.3. 함경남북도 일대설(함흥 ~ 두만강)
1.2.4. 연길 일대설
1.2.5. 만주 일대설
1.3. 같이보기
2. 東北九省 : 만주에 위치했던 중화민국의 성

1. 東北九城 : 고려북진정책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던 9개의 성

고려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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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학설들에 대한 동북 9성의 추정도.
강동 6주와 더불어 고려의 북진 정책을 상징하기도 한다.

순서

축성

시기

비고

1

영주성(英州成)

1107년 12월
(예종 2년)

· 길주 지역 내 성 중 중앙에 위치
· 길주 지역 내 성 중 가장 먼저 축성, 본영

2

웅주성(雄州成)

· 길주 지역 내 성 중 가장 남쪽에 위치
· 길주 지역 내 성 중 두 번째 축성

3

복주성(福州成)

· 마천령 이남

4

길주성(吉州成)

· 길주 지역 내 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
· 길주 지역 내 성 중 가장 늦게 축성

5

함주성(雄州城)

1108년 2월
(예종 3년)

6

공험진성(公嶮鎭城)

· 윤관이 선춘령에 세운 척경입도비(선춘령비)
· 9성 중 최 북단에 설치
· 숭녕진(崇寧鎭)설치한 것으로 추정.

7

의주성(宜州城)

1108년 3월
(예종 3년)

· 의(宜)자와 선(宣)자를 상호 혼동하여 오기했을 것으로 판단

8

통태진성(通泰鎭城)

9

평융진성(平戎鎭城)

· 진양진(眞陽鎭)에 설치한 성으로 추정

[출처]

1108년(예종 3) 윤관이 예종의 명을 받아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해 별무반을 조직하여 천리장성 동북방의 여진족들을 정벌한 후 쌓은 9개의 성. 각 성의 위치는 함주(咸州)·복주(福州)·영주(英州)·길주(吉州)·웅주(雄州)·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공험진(公嶮鎭)에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9성의 위치, 특히 선춘령 및 공험진의 문제는 현재까지도 뜨거운 논쟁거리가 남아있다. 게다가 설치 당시의 9성과 여진족에 반환했을 때의 9성 명칭이 불일치하여 더욱 더 9성의 위치를 알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1.1. 개척에서 반환까지

고려의 여진 정벌 문서 참조.

1.2. 위치에 대한 논란

선춘령(先春領)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고 새겨진 비를 세우는 장면을 담은 조선후기에 제작된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은 공험진을 찾는다면 9성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현실은 시궁창. 만약 이 때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선춘령에 세운 비를 찾는다면 그야말로 세기의 발견.

조선세종 또한 선춘령의 위치를 파악해보려 신하들을 닦달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고 4군 6진의 개척 명분을 "공험진이 두만강 위 700리이니 두만강 까지 우리 땅이다."로 정하게 된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전지하기를,

"동북 지방은 공험령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말이 전하여 온지 오래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이 장백산[2] 북쪽 기슭에 있다고 하는데 역시 사실인지 모르겠다. 『고려사』에 '윤관이 공험령에 비석을 세워 경계를 삼았다'하였다. 지금 듣건데 선춘점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이 선춘점의 어느 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약 길이 막히어 쉽사리 사람을 시킬 수 없다면 폐단 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또 듣건데 강 밖에 옛 성이 많이 있다는데 그 옛날에 비갈(碑碣)[3]이 있지 않을까.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謄書)[4]할 수 있는지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을 쫓고 아홉 개의 성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이 지금 어느 성이며, 어느 쪽에 있는가.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실록 세종 21년 8월 6일

아래에 3가지 혹은 4가지 학설이 있으나 고고학으로 실증된 학설은 아무 것도 없다.

문헌학적으로는 두만강 이북 700 리설이 유일하나 이 마저 각 학자의 견해에 의해 논쟁이 있는 상황.

1.2.1. 함흥 평야설

함흥 평야 일대에 있었다는 설. 일제강점기 시절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등 6명의 학자들이 주장한 학설로 과거엔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임용한의 말에 따르면 일종의 프로파간다가 담겨있는 학설이라고 한다.

함흥 평야설. 이건 일본인 학자 이케우치 등이 주장한 건데 이건 음모가 있어요. 일본인들이 조선을 점령하고 나서 하는 말이 "너희는 생전 어느 나라 공격도 안하고 비굴하게 살아온 애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너희를 다스려야 너희의 민족성이 바뀌고 우리 밑에서 큰다." 이렇게 주장을 했는데 그럴려다 보니까 우리 나라는 남의 나라 영토로 쳐들어 간적이 없어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윤관의 9성을 함흥 근처라고 우긴거에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69부 고려의 여진 정벌 2 中

이 설에는 국력이 더 약했던 공민왕 시절조차도 함흥 평야를 넘어 개마고원까지 진출했으므로 진격에 어려운 것이 아니며, 바로 위인 함흥 평야 일대에 9성이 옹기종기 있었다면 17만 대군을 편성할 이유도 없고, 방어가 전혀 어려운 것도 아니다는 지적등이 있다.

함흥 평야 일대를 차지한 이후로 여진족이 이를 발판으로 금나라를 세웠다는게 정황상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여진족이 일어난 발판은 어디까지나 만주 벌판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함흥 평야를 차지해서 그 곳을 발판으로 나라를 세웠다 하더라도 높고 높은 개마 고원과 함경 산맥이 있어서 적절치 않다는 것. 하지만 동북 9성을 차지하면서 금나라로 성장했다는 것을 함흥 평야 일대의 힘만으로 성장했다고 볼경우 문제가 있는 것이지 고려에게서 차지했다는 점으로 본다면 충분히 성장했다고 볼수 있는 주장이다.[5]그리고 여진의 기반과 별개로 나름대로 생산성 좋은 함흥 평야를 후방의 곡창지로서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비록 변방지역이었던데다가, 여진족 역시 농업기술이 원시적이어서 어느 정도 제한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농업을 아예 안했던 것은 아니며, 심지어 이들은 어로생활을 하거나 배를 타기도 했었다. 함흥 역시 바다를 끼고 있어 소금을 얻는 등 나름 가치성이 아예 없었다고 볼 순 없다. 고려 역시 작지만 천리장성 이북 영토 중에서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었던 함흥을 노렸다는 것은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함흥일대에서만 점령해 9성을 이곳에만 쌓았다고 볼 순 없다.

1.2.2. 함경남도 일대설(함흥 ~ 길주 일대설)

함흥 평야설과 만주설의 절충 정도 된다.

조선 후기 정약용등 실학자들이 주장한 설로 9성의 위치가 길주 내지 마운령 이남부터 정평까지 주로 함남 일대에 9성이 위치했다는 주장이다. 고려 측에서 반환을 주장할 때 내세운 근거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함경 산맥 남쪽에 해안을 따라 9성이 일렬로 위치해 있다면 방어선이 지나치게 넓어지는데 반해 교통로가 취약해진다. 중간에 한 곳만 끊어져도 9성 전체의 교통 단절로 이어지고, 이럴 경우 9성 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다. 상호 연계를 통해 방어선을 짤 수 있는 서희의 강동 6주와는 상황이 다르다.

특히 갈라수 전투는 길주로 구원을 가던 오연총의 군대가 공험진에서 여진군과 맞닥뜨려 싸웠으나 대패한 전투인데, 이 역시 남쪽에서 길주로 가던 길목에 공험진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공험진이 너무 북쪽에 있으면 고려군의 기동이 설명이 안 되기 때문.

전쟁과 역사의 저자인 임용한 교수가 이 설을 지지하고 있다.

한 편 길주이남설이 나타났던 이유는 신라 진흥왕이 세웠던 황초령비 또는 마운령비를 윤관이 공험진에 세웠던 선춘령비로 잘못 알려지면서 나타난 설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훗날 윤관이 세운 비석이 아닌 진흥왕이 세웠던 비석으로 밝혀지면서, 이로 인해 제 1학설이었던 함흥평야설이 유력하다고 보이기도 했었다. 물론 윤관이 세운 선춘령비가 아니었을 뿐이며, 이와는 별도로 길주까지 진출하여 영토를 넓혔을 가능성도 유력해지고 있다.[6]

1.2.3. 함경남북도 일대설(함흥 ~ 두만강)

함흥 평야설, 만주설, 함경남도설의 절충설이다. 함경남도 일대설과 절충해서 두만강 하류까지 진출했다는 추정하는 함경남북도 - 두만강 일대설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애초에 국력이 훨씬 약해진 고려를 이끌었던 공민왕도 함경남도 일대와 개마 고원 일부를 정복하는데 성공했으며 세종대왕 시기 선춘령과 공험진을 대의 명분으로 공험진 내방소를 경원군으로 비정하여 두만강까지 영토를 넓혔기 때문이다.

1.2.4. 연길 일대설

만주 일대설과 함경남북도 일대설의 절충안이다. 9성이 천리장성 이북과 연길, 왕청 인근에 걸쳐있었다는 설이다.

고려사동국여지승람에 쓰여있는 기록을 근거로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에 있었다고 보지만, 문서 맨 위 그림처럼 두만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본다. 1907년에 발견된 무자년 비석을 선춘령비로 보는 관점이다. 공험진 내방소는 경원군에 있었고 외방어소는 두만강 북안에 있었다고 본다.

1.2.5. 만주 일대설

9성이 천리장성 이북과 만주에 걸쳐있었다는 설이다. 위 설과 동국지도와 여러 고지도를 바탕으로 한 학설이다.

고려사동국여지승람에 쓰여있는 기록을 근거로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으로 700리가 되는 곳(공험진 외방소)으로 간주하여 9성이 함경남도와 만주 일대에 걸쳐 있었다는 주장. 세종실록지리지에 공험진을 소하강이라고 기록한걸을 근거로 삼고 있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은 세가지 정도의 의견이 사서 내에서 충돌하고 있고, 4군6진 개척에 따른 명분이라는 지적이 있다. [7]

9성 반환에 대한 고려쪽 찬성 측의 주장( 방어의 문제점, 실질적 이득이 없다, 개척의 어려움)을 모두 만족한다고 하지만 이건 함경남(북)도 일대설도 해당하는 이야기라서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1.3. 같이보기

2. 東北九省 : 만주에 위치했던 중화민국의 성

만주에 있는 중화민국의 9개 성을 이르는 말. 자세한 것은 중화민국/미수복지구를 참고.


  1. [출처] 1.1 최창국. 공험진(公嶮鎭)과 통태진(通泰鎭) -고려와 여진의 후기 전투를 중심으로-
  2. [2] 백두산을 말한다. 흔히 오해하는 것이 장백산은 중국에서 백두산의 소유권을 주장할때 쓰는 말이라는 것인데, 실제론 조선 시대까지 백두산과 장백산을 번갈아 가며 썼다.
  3. [3] 돌로 만든 비석이라는 뜻이다.
  4. [4] 글을 베껴오는 일.
  5. [5] 고려가 정복했다시피한 동여진의 권리를 고려에게서 직접 넘겨 받은 격이되니 친 고려파 여진족들과 다른 여진 부족들을 관리하고 지배할 위상과 명분,구심점 전부 얻은 셈이다.땅의 크기나 힘과 별개로 무지막지한 것을 얻은 지라 성장이 가능해졌다는 주장은 충분히 있다.물론 이건 함흥 평야 일대가 아니더라도 적용되는 일로 어디까지나 함흥평야만 정복했다면 완안부의 성장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6. [6] 사실 신라가 이원군 지방까지 점령해서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세웠다는 것을 생각하면 반대로 고려 역시 신라처럼 이원 일대까지 점령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7. [7] 사료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일 뿐 객관적인 실증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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