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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지도의 측정 값은 전라남도에서 두막루까지의 거리는
약 1,290.89 km(3천리, 3284里)[1]가 나온다.

국호

두막루(豆莫婁)

위치

만주 북부

수도

알 수 없음

정치 체제

군주정으로 추정

국가 원수

왕(王)?

존속 기간

5세기 말엽? ~ 8세기 초엽?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
2. 역사
3. 인지도
4. 관련 연구
4.1. 한국
4.2. 중국

1. 개요

두막루(豆莫婁)는 과거 만주 북단에 위치했던 국가이다.

말루(達末婁), 대막루(大莫婁), 대막로(大莫盧)라고도 한다.

(북)부여의 후계 국가로 추정하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부여계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기록도 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두막루 한국사설은 정설로 발전하지는 못했고, 2019년 기준 일반적으로 한국사를 소개하는 저명성 있는 매체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편이다.

지명이나 인명 뒤가 ~루자로 끝나는 것은 부여와 고구려, 백제만주한반도에 퍼져 있던 부여계 국가들의 언어적 특징 중 하나이다.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 관직명인 대막로와 발음이 연관성이 보인다며 여기서 국호가 나온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2]

기록 상으로는 송화강 이북의 소흥안령 지방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막루가 사료의 기록대로 정말 부여의 후계 국가가 맞다면 한국사상 최북단에 위치한 나라가 된다. 만주 서북단의 대흥안령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는 고리국(탁리국)도 엄청나게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고리국은 신화 속의 국가라 실체가 불분명하고 위치 비정도 애매하다.

두막루가 몽골계 민족인 실위, 거란과 언어가 같다는 기록이 있고, 멸망 이후 몽골로 이주된 흔적이 있는 등 몽골과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

2. 역사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니, 옛 숙신국의 지역이다. 읍락마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으며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그들은 굳세고 흉폭하여 동이 중에서 가장 강하며, 언어도 그들 만이 다르다. 두막루(豆莫婁)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며 여러 나라도 이들을 두렵게 여긴다.

勿吉國, 在高句麗北, 舊肅愼國也. 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 其人勁悍, 於東夷最强. 言語獨異. 常輕豆莫婁註 等國, 諸國亦患之. 去洛五千里. 自和龍北二百餘里有善玉山, 山北行十三日至祁黎山, 又北行七日至如洛瓌水, 水廣里餘, 又北行十五日至太魯水校勘, 又東北行十八日到其國. 國有大水, 闊校勘三里餘, 名速末水.

- 위서 물길전

豆莫婁國, 在勿吉國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扶餘也. 在失韋之東, 東至於海, 方二千里. 其人土著, 有宮室倉庫.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爲平敞. 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長大, 性强勇, 謹厚, 不寇抄. 其君長皆以六畜名官, 邑落有豪帥. 飮食亦用俎豆. 有麻布, 衣制類高麗而幅大, 其國大人, 以金銀飾之.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俗淫, 尤惡妬婦, 妬者殺之, 尸其國南山上至腐.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或言本穢貊之地也.

두막루국은 물길국 북쪽 1천리에 있고 낙양으로부터 6천리 떨어져 있다. 옛날의 북부여다. 실위의 동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와 닿아있고 사방 2천리이다. 그 사람들은 토착하며 살고, 집에 거주하며 창고가 있다. 산과 구릉, 넓은 연못이 많아 동이 지역에서 가장 넓고 높다랗게 트여있다. 땅은 오곡에 알맞고 오과가 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키와 몸집이 크고, 성품이 강직하고 용맹하고 신충하고 중후하니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그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고 읍락에는 호걸과 장수가 있다. 음식은 역시 조두를 사용한다. 삼과 베가 있고 옷을 마름질하는 것은 고려와 비슷하나 폭이 크다. 그 나라의 대인은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형벌은 엄하고 급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은 노비로 삼는다. 풍속은 음란하고 투기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서 죽여서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놓고 썩힌다. 여자 집에서 이 시신을 거두려면 소나 말을 주어야 한다. 혹 말하길 본래 예맥의 땅이라고 한다.

위서 두막루전

위서 두막루전이나 아래의 신당서 기록과 종합하자면 성립시기를 빠르게 잡으면 5세기 말로 추측된다. 485년과 486년, 물길은 북위에게 사신을 파견하는데 이 때 두막루로 추정되는 대막로국(大莫盧國)이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3]

그런데 두막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담고 있는 위서 두막루전의 내용은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부여 관련 기록을 거의 복붙하다시피 똑같아서 사료의 신뢰성이 의심되기도 한다. 이 부분을 가지고 '부여 풍습과 두막루 풍습이 비슷하니 두막루가 부여의 후계국가가 아닌가?' 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건 풍습이 비슷한 것을 넘어서 한문으로 써있는 서술 자체가 거의 똑같기 때문에 무성의한 복붙으로 보일 여지가 큰 것이 문제.

두막루가 부여계가 아니라 단지 부여계를 자칭했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최근 일부 학자들은 부여계가 맞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긴 한데, 실제로는 아래 써 있다시피 학계에서도 인지도가 듣보잡인지라 논쟁은 그냥 정체 상태... 기록이나 유물이 많이 있어야 논쟁을 하든 말든 하지

위서 실위전에서도 두막루가 나오는데, 동호계통인 실위와 두막루의 언어가 같다고 전하고 있어 두막루가 부여계통이 아니라는 근거가 같은 위서 책 안에 공존하는 것도 문제이다. 당장 부여계 연어의 종주국(?)인, 당시 요동을 폭넓게 차지하고 있었던 고구려와 바로 영토가 인접한 두막루임에도 정작 언어부터가 부여계가 아닌 북방유목민족 계통 언어라는 것은 부여계 국가설의 큰 약점이다.

그리고 위서(역사책) 문서에서도 소개하고 있지만, 이 책 자체가 가짜 책은 아니지만 '더러운 역사서(穢史, 예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확도나 공정성이 전체적으로 낮아 천수백년 전 당대부터 계속 까여온 책인 것도 문제다. 비슷한 이유로 까이는 요사만주원류고환빠의 단골집인 것처럼 책이 설령 진서라도 좀 더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開元十一年, 又有達末婁․達姤二部首領朝貢. 達末婁自言北扶餘之裔, 高麗滅其國, 遺人度那河, 因居之, 或曰他漏河, 東北流入黑水. 達姤, 室韋種也, 在那河陰, 涷末河之東, 西接黃頭室韋, 東北距達末婁云.

개원(713년 ~ 741년) 11년에 또 달말루와 달구 등 두 부락의 수령들이 조공하였다. 달말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로서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 그곳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혹은 타루하라고 하는 물줄기가 동북쪽으로 흘러 흑수에 유입된다 하였다. 달구는 실위의 종족으로 나하의 남쪽, 동말하의 동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황두실위와 접하며 동북쪽으로는 달말루에 이른다고 하였다.

신당서 권 220[4]

이들은 당나라에도 조공했기 때문에 신당서 열전에도 남아있다. 여기서 달말루(두막루)는 북부여의 후예라고 했는데, 달막루인의 '자칭(自言)'이라고 써서 신당서 편찬자도 신빙성을 보장하지 않는 것이 문제.[5]

헌데 무슨 이유인지 수·당이 만주를 엄청 갈궈대던 6세기 말부터 7세기까지는 이들의 조공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 시기에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조공 기록이 8세기 초반까지 지속되다 사라지기 때문에 이쯤에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8세기 초반은 때마침 발해 무왕과 흑수말갈이 충돌하던 시기인데 두막루의 정확한 위치는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바가 없지만 발해와 흑수 말갈 사이에 끼어 있다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보다 두막루를 연구한 내용 자체가 손가락으로 셀 정도지만... 멸망 이후 실위와 함께 몽골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그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실위, 고막해, 거란과 같은 말을 썼다는 기록으로 봐선 몽골 지방으로 이동 후 몽골계 민족들에게 동화된 것 같다.

영토는 사방 이천리로 서쪽에 실위, 남쪽에 말갈이 있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접한다는데, 동쪽 바다라는 게 아무르강인지 오호츠크해인지 동해인지 아무도 모른다. 책부원귀 외신부 조공조에 의하면 당나라 현종 개원 12년(724년)에 달말루의 대수령 낙개제(諾皆諸)가 와서 조공했다고 한다. 아마 낙개제는 기적적으로 전해지는 두막루의 유일한 인명인 것 같다.

8세기 전반 이후 당나라와의 사신교류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두막루가 어떻게 멸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6]

3. 인지도

대중적인 인지도는 그야말로 처참하다. 대체로 대중적인 인지도라는 게 국사 교육 즉, 국사 교과서 또는 국사 관련 시험에 등장하느냐 마느냐로 좌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예외적으로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실[7]같이 국사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아도 대중 매체의 상업적 흥행 덕에 인지도를 확보하기도 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8] 어차피 대중 매체에서 다루어지는 역사물은 그 역사적 소재가 어느 정도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역사 애호가들 사이에선 부여를 계승한 만주의 정체불명의 신비한 나라 정도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을까? 사실 존재한다는 '인지도'도 이곳 나무위키나 한국어 위키백과 같은 몇몇 사이트에 등재됐기 때문에 그걸 보고 생겨난 인지도에 가깝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두막루의 틀 / 한국사 잔존 여부와 두막루가 부여계 국가인가 아닌가로 엄청난 키배 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고 대부분 판단은 부정적이었다. 이 나무위키에서도 틀:한국의 역사 문서에 두막루가 있었으나 저명성 부족과 한국사 여부 불분명으로 틀에서도 제외당했던 적이 있다. 일단 한국사에서 이름 없이 등장했다 사라진 소국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런 나라들을 다 적시하지 않는 상황에서 두막루는 적시해야 할 근거가 부족하다.

4. 관련 연구

워낙 알려지지 않은 나라여서 연구가 겨우 이것밖에 안 된다. 안습 그나마도 연구 제목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김정배와 유태용 외 나머지는 핵심 주제가 두막루가 아닌데 하고 싶은 이야기와 관련해서 위서 두막루전을 짧게 참고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이름만 전해서 학자들이 연구조차 못 하고 있거나 아예 이름 자체가 잊혀 전해지지 않는 소국들에 비하면 그래도 두막루는 나은 편이다.

4.1. 한국

  • 노태돈, 〈부여국의 강역과 그 변천〉, 《국사관논총》 제4집, 국사 편찬 위원회, 1989년
  • 김정배,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제29집, 국사 편찬 위원회, 1991년 12월
  • 박경철, 〈부여사 전개에 관한 재인식 시론〉, 《백산학보》 제40호, 백산 학회, 1992년
  • 干志耿, 김영수(번역) , 〈고대 탁리 연구〉, 《백산학보》 제44호, 백산 학회, 1994년
  • 유태용,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백산학보》 제70호, 백산 학회, 2004년 12월
  • 강인욱, 〈삼강 평원 곤토령⋅봉림 문화의 형성과 물길⋅두막루⋅말갈의 출현〉, 《고구려발해연구》 제52집, 고구려 발해 학회, 2015년

4.2. 중국

  • 溤家昇, 〈豆莫婁國考〉, 《禹貢》半月刊 7卷 1,2,3 合刊, 1937년


  1. [1] 제주도를 제외한 경우임
  2. [2] 출처가 필요하다. 다른 관직명인 대대로와 막리지가 섞인 이름인 것 같다.
  3. [3] 태화(太和) 9년(A.D.485) 에 (물길에서) 또 사신 후니지(侯尼支)를 파견하여 조회(朝會)하였다. 그 이듬해에 다시 입조(入貢)하였다. 그 나라 근처에는 대막로국(大莫盧國)·복종국(覆鍾國)·막다회국(莫多回國)·고루국(庫婁國)·소화국(素和國)·구불복국(具弗伏國)·필려이국(匹黎尒國)·발대하국(拔大何國)·욱우릉국(郁羽陵國)·고복진국(庫伏眞國)·노루국(魯婁國)·우진후국(羽眞侯國)이 있는데, 연이어 각각 사신을 보내어 조헌(朝獻)하였다. - 위서 물길전
  4. [4] 관련 주소 클릭 뒤 高麗滅其國 를 검색하면 된다.
  5. [5] 교차검증 없이 자칭한 것으로 따지면 고구려는 기자조선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신라흉노 김일제 후손이고 고려 왕건당숙종의 후손이다. 물론 현대 사학계에서는 저것들 모두 신빙성이 부족한 자칭으로 결론났다. 굳이 자칭, 혹왈 같은 표현 붙이는 건 그대로 받아들이기 특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6. [6] 유태웅 교수의 두막루국 흥망사 시론 연구(2004)에 의하면 발해흑수말갈 간의 대립으로 멸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7. [7] 최근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서라는 견해가 많으니 유의하자.
  8. [8] 미실은 그나마 선덕여왕이라는 이름 하에 나와서 그만큼 알려진 것이지 아예 주인공을 미실로 놓고 '미실'이란 사극을 만들었다면 결과는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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