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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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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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버 클리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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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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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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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제45대

도널드 트럼프

※ 22.24대 미합중국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한차례 건너뛰고 연임한 사례의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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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주요 수상

미국의 제34대 대통령

이름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크"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Ike" Eisenhower[1][* 애칭으로는
아이크라고 불렸다. 그래서 대선 후보 당시 선거구호도 'I like Ike'였다. 꽤 적절한 언어유희를 사용한 셈.])

출생

1890년 10월 14일, 미국 텍사스 주 데니스

사망

1969년 3월 28일 (만 78년 165일), 미국 워싱턴 D.C.

국적

미국

직업

정치인, 군인

학력

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최종
계급

미국 육군 원수

배우자

매미 아이젠하워

자녀

도드, 존

종교

개신교 (장로회)

신체

179cm, 78kg, O형

정당

[[공화당(미국)|{{{#!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0000; font-size: .8em"

공화당}}}]]

주요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군 최고 사령관[2]
나토 초대 사령관
미국 대통령 (1953년 1월 20일 ~ 1961년 1월 20일)

서명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제2차 세계대전
2.3. 대통령 당선
2.4. 대통령 재임기(최초 한국 방문)
2.5. 퇴임과 죽음
3. 업적
3.2. 인종 차별 철폐
3.3. 수에즈 전쟁 종식
3.5. 사회 정책
4. 개인사
5. 대중 매체에서
6. 기타등등
7. 둘러보기

1. 개요

공식 초상화

"McCarthyism is now McCarthywasm"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즘이다.[3]

미국의 제34대 대통령. 초대 NATO군 최고사령관이자 컬럼비아 대학 총장 역임. 애칭은 아이크(Ike).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데다가 리틀록 사건으로 인종 차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혼란에 빠졌던 1950년대의 미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종신계급인 원수로서 보기 드물게 퇴역을 했다가 다시 복귀한 인물이다. 강력한 문민통제의 원칙을 따르는 미국이기에 대통령에 취임할 때 아이젠하워는 전역을 신청해 민간인으로서 취임하였다가 8년의 임기를 마친 후 예비역 소집 명령을 통해 복귀하였다.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등, 당시로는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정책들을 여럿 내놓았다. 재밌는 점은 이 사람이 가장 존경받는 대법원장 중 한 명인 얼 워렌 대법원장을 "오늘날 연방 대법원에 필요한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 라고 말하며 임명했다. 하지만 정작 임명 이후 아이젠하워의 예상과 달리 좌파적인 판결들을 많이 내리자 후일 얼 워렌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내 인생 가장 큰 실수' 라고 말했다고 한다.

2. 생애

NATO 사령관 시절 윈스턴 처칠과 함께

1966년 촬영된 사진. 아이젠하워의 자세가 인상적이다.

2.1. 초기 이력

텍사스의 데니슨 시에서 7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계 스위스인 이민자 출신으로 당시 유럽에서는 병역 거부로 이단 취급당해서 박해받던 재세례파 메노나이트 교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종교적 자유 때문에 이민까지 했으면서도 아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서 장로회로 개종했다고 한다. 군인이 되고 싶어했지만 원래 가고 싶어하던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는 떨어지는 바람에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다.[4] 것도 삼수생 출신인데 고등학교도 남들보다 1년 늦게 졸업해서 나이로는 4수 출신이다. 육군 보병소위가 된 아이젠하워는 진급이 늦어져서 개인적으로는 사관학교 선배인 육군참모총장이자 훗날의 필리핀군 육군 및 육군 원수가 되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밑에서 전속부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맥아더 쪽이 흠좀무 수준의 초고속 진급을 한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참모총장 시절부터 전속부관으로 일하기 시작해서 워싱턴에서 5년, 필리핀에서 4년,[5] 합쳐서 무려 9년 동안이나 전속부관 일을 수행했다. 즉 대대장 한 번도 못해봤다는 소리.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 대해 이런 소리도 했다.

아이젠하워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중 최고의 사무원(clerk)이다.[6]

필리핀을 떠나서야 맥아더의 요청으로 육군 대령으로 승진했고, 그제서야 재능을 인정받아 고속 승진해 1941년에는 준장까지 진급했다. 그러나 그의 고속 승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2.2. 제2차 세계대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직후에 필리핀에 관한 방위계획을 물어본 마셜 장군에게 필리핀을 지킬수는 없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여 마셜 장군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소장으로 진급하고, 1942년 6월에는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의 선택을 받아 중장 진급과 함께 유럽 주둔 미군 총사령관이 되어 북아프리카 전역에 참전했다. 1943년 12월에는 아예 유럽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아이젠하워를 다시 대장으로 진급시켰으며, 1944년 말에는 원수로 진급, 5성장군이 된다. 이때 미군은 아이젠하워를 포함 총 7명의 장군과 제독에게 원수 계급장을 수여했다(오마 브래들리 장군과 윌리엄 홀시 제독은 전후에 진급한다). 그 7명은 최고사령관 참모장 윌리엄 리히 제독,[7]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 장군, 해군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제독, 남서태평양해역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중태평양해역군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 장군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한번 만나 보면 그의 팬이 된다고 할 정도로 대인 관계가 좋았고, 대립하는 두 집단의 조정에도 능해서 당시 조지 S. 패튼이나 버나드 로 몽고메리 같은 고집불통 장군들 간의 갈등을 잘 무마하였다. 물론 그 과정이 절대 쉬운 건 아니었다. 저 두 사람은 아이젠하워보다는 선배뻘인 장군이기도 했으나, 하나같이 제멋대로인데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콧대에 한 성깔 하는 성격이라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즉, 피곤한 선배 또는 짜증나는 선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몽고메리 원수는 미군이 실수를 할 때마다 "그러게 내가 뭐랬소?" 하면서 멸시하지, 패튼 장군은 매일매일 폭주해서 자기한테 열내지...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전쟁 기간 내내 벌어졌는데도 아이젠하워가 홧병에 걸리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다.[8]

일례로 이런 일이 있었다. 선배인 조지 S. 패튼 장군이 야전병원에 누운 병사를[9] 꾀병으로 간주하고는 격노하여 전장으로 다시 가라고 떠민 부상병 구타사건이 생기자 패튼은 이로 인해 불명예 퇴역 위기에 처했고 언론의 질타를 받은 적이 있다. 이 일 때문에 후배이자 상관인 아이젠하워가 나서서 간신히 뒷수습을 했지만 부관들에게 지쳤다고 고백하며 "이제 패튼 선배님께서 또다시 이런 짓을 저지른다면 나는 선배님을 파면시킬 거야. 나도 언제까지나 뒷수습을 해줄 순 없단 말이야." 하고 체념할 정도였다.

아무튼 이 사람의 인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아이젠하워를 만난 한 여성은...

맥아더를 만났을 때. 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장군인지 알게 됐어요. 하지만 아이크를 만나자 내가 얼마나 매력있고 사랑스러운 여자인지 알게 됐지요.

횃불 작전, 시칠리아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을 지휘하며 활약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덕분에 인기가 올라가 대통령 출마를 권유받았으나 해리 S. 트루먼과의 신의를 지키려고 사양했다. 그 뒤 20년간 지속된 민주당 정권의 장기집권을 멈추려는 공화당의 요청으로 대선에 출마,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임기는 2차 대전 이후로 완전히 보수정당으로 자리잡은 공화당이 여당이었음에도 인종 문제, 노동 문제 같은 여러 부분에서 개혁적이거나 중도적인 모습들을 보여주어 현재도 미국 내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2차대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소련에서 최고 등급의 무공훈장인 전승훈장을 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소련은 같은 연합국이었기에 이러한 행위가 가능했지만 몇 년후 소련이 적대국이 될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본래 최고등급의 무공훈장은 적기훈장이지만 이 전승훈장은 그걸 뛰어넘는 것으로 소련이 판단하기에 2차대전에 큰 공헌을 한 17명에게만 주었다. 서방 연합군에서 이걸 받은 사람은 아이젠하워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 두명 뿐이다.

2.3. 대통령 당선

1952년에 공화당 경선에 나가여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상대는 민주당의 애들레이 스티븐슨 이었는데,[10]미국 국민들은 한국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공화당민주당의 20년 장기집권을 끝낼겸 총공세를 퍼부었고 그 결과 아이젠하워가 3407만(55.2%) 표를 얻고 선거인단수 에서는 442표를 얻어서 압승하였다.반면 스티븐슨 남부 9개 주 에서만 이겨 2737만표(44.3%) 표를 얻고 선거인단 수 에서는 89표 밖에 얻지 못하였다. 이로써 아이젠하워의 임기가 시작된다.

2.4. 대통령 재임기(최초 한국 방문)

대선 당시 캠페인 광고(1952년)[11]

그는 선거 당시 수렁으로 빠져가던 한국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약을 내걸며 "제가 한국에 가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을 내놓았고 실제로 당선 후 전쟁 종결을 위해 한국에 갔으며 방한한 첫 번째 미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52년의 방한은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기에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방한은 아니다.

또 이번엔 대통령 선거가 다시 다가왔는데, 이번엔 건강문제가 대두로 떠올랐다. 그 이유는 1955년에 아이젠하워가 심각한 심근경색이 발생했고 다음 해에는 회장염 수술도 받았기 때문. 그러나 두 사건 이후 빠르게 회복을 하였고, 그 덕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공화당 대통령 후보 전당대회 에서 과연 어려움 없이 큰 인기로 대통령 후보에 당선되었다. 반면 민주당에서는 이번에도 스티븐슨이 전당대회에서 에스테스 키포베르를 13% 차이로 이겨서 이번에도 아이젠하워 vs 스티븐슨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미 아이젠하워는 아래 문단에 있는 업적를 이뤄내 이전보다 인기가 더 많은 상태였고, 결국 전보다표를 더 많이 얻은 3557만표(57.4%)를 얻었고, 선거인단 투표 수도 지난번보다 15표를 많이 얻은 457표를 얻었다. 스티븐슨 전보다 인기를 잃은 2602만표(42%), 선거인단수 에서는 73표를 얻으며 참패했다.

재선한 이후, 1960년 4.19 혁명 직후 허정 과도정부 내각 시기에 아이젠하워가 방한한 적이 있기에 대통령으로 방한한 첫 대통령이라는 말은 맞다. 이 쟁점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심지어 이 시기 "go to Korea."라는 표현이 "난제를 정면 돌파하다/맞닥뜨려 해결하다."라는 표현으로 유행하기까지 했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북한 격파+막대한 원조 등 지금의 천조국 드립 이상의 위치[12]였는데, 그런 미국의 전쟁 영웅 출신에, 게다가 대한민국 정식 정부 수립 이래 첫 방한한 미 대통령이다. 그야말로 역대급 이벤트였으므로, 몇 달전부터 관 주도로 준비와 예행 연습에 여념이 없었으며 경찰은 서울시 경찰 6천여명으로 모자라 지방 경찰 4천 명을 불러 10,000명으로 수주일 전부터 연습, 며칠 전부터는 아예 합숙하며 연습하였다. 전국 중고등학생들은 '아이크방한학생준비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각 학교에서 몇 명씩 차출해 피나는 사열 연습을 하고, 신문은 며칠 전부터 석ᆞ조간할 것 없이 거의 전면을 아이크 뉴스로 도배하는 등 온 나라 자체가 들썩였다. 당시 신문

그의 인기는 그야말로 엄청나서 당시 환영 인파가 200만 서울 시민의 절반인 100만여명이었다고 하며 그가 탄 차가 앞으로 나갈 수 없었고 사람들이 하도 달려들어서 차가 일부 파손되었으며, 그를 보기 위해 국보1호 숭례문 기와 위에 사람들이 올라가는 등의 추태를 보여 당시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과유불급', 극히 귀한 손님에게 큰 실례를 저질렀다며 이를 개탄하였다. 오토바이를 타며 아이크 대통령을 호위하던 박 모 경위가 인파에 밀려 넘어져 졸도하여 병원에 실려가는 등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났다.

심지어는 참전용사 묘지를 방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우리 군 관계자가 즉석에서 "실탄으로" 축포 의전을 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내 생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무서운 축포였다."는 농담을 건넨 일화도 있었다고.

아무튼 대인배 아이젠하워는 한국인들의 예상 이상의 환대에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원래 아이젠하워는 한국 방문 이전 일본 방문을 하기로 계획했는데, 당시 일본은 안보투쟁으로 인해 반미 감정이 극에 달해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6월 10일에는 아이젠하워의 방일을 협의하기 위해 일본에 온 제임스 해거티 백악관 대변인이 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에서 시위대에게 포위당해 미국 해병대에게 헬리콥터로 구조받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로 인해 아이젠하워는 방일을 포기[13]하고 방한만 결정하였다. 일본에서의 냉대와 한국에서의 환대가 겹쳐 보일 수밖에 없으니, 당연히 아이젠하워도 한국인들의 환대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한국 방문(1분 7초부터). 1분 33초에서는 '국무총리 허정(Premier Huh Chung)'이 언급된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전쟁 영웅을 추앙하는 분위기가 강하고 일단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부터 독립전쟁 영웅이다. 이후 미국이 승리한 주요 전쟁의 사령관들은 대부분 대통령이 되었다. 1차 걸프전 이후 2000년대까지도 콜린 파월 합참의장, 노먼 슈워츠코프 사령관 등이 유력 대선후보로 거론되었다. 미국 정계에서 참전용사라는 점은 정치인들한테 커다란 자산이다. 심지어는 전쟁 참여 횟수를 4번이라고 했다가 3번인 게 들켜서 선거에서 진 사람도 있을 정도다. 게다가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선거 때 장군이라는, 그것도 원수 계급이라는 이미지에 걸맞지 않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 부드럽고 자상한 이미지가 강해서 이것이 그의 당선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뭐 만나는 사람마다 매료되는 비단결 인품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을 보면 임기 말에도 인기가 여전히 좋아서 3선 제한만 없었으면 다시 출마해도 가능성이 있었다고도 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3선 제한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장기 집권에 질린 공화당이 만든 규정인데, 실질적으로 제한받은 건 공화당의 아이크가 처음이었다.

2.5. 퇴임과 죽음

1961년 4월 22일, 퇴임 직후 후임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와의 만남

퇴임 후에는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의 농장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9년 3월 28일 심장병으로 숨졌다. 이때가 향년 78세.

"전 항상 내 아내, 내 자식들, 내 손주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전 항상 조국을 사랑했지요. 이제 전 떠나기를 원합니다. 전 떠날 준비가 됐습니다. 주여,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I've always loved my wife, my children, and my grandchildren, and I've always loved my country. I want to go. I'm ready to go. God, take me."

3. 업적

3.1. 주간 고속도로망 건설

주간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라고 하는데 정식 명칭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전국 주계간 방위 고속도로망(영어: Dwight D. Eisenhower National System of Interstate and Defense Highways)'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는 독일의 아우토반을 보고나서 훗날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미국 연방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하게 된다. 1956년 연방도로법을 제정하여 새로운 도로 체계를 도입하였다. 전국 48개주와 수도인 워싱턴 DC를 연결하는 프로젝트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급증하는 도로 교통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서였고, '방위'(Defense)라는 명칭에서 나타나듯이 군사적 목적도 있었다. 바로 미국 동부와 서부 간의 병력 이동을 단기간에 수행하기 하기 위해서 추진된 고속도로였다.

전 구간이 중앙분리대로 나뉘고 편도가 최소 2차선인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서 미국 전역을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도로 체계가 구축된다. 연방정부가 90%, 주 정부가 10%를 부담하는 구조였고 막대한 건설 비용은 휘발유 가격에 세금을 부과하여서 충당하였다.

일부는 기존 국도를 활용하기도 했으나, 이들도 곧 중앙분리대로 나뉜 편도 2차선 이상의 자동차 전용도로로 개조되었다. 1956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급속히 노선망이 확충되어 2006년 기준 총연장이 75,440 km(46,876 mi)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고속도로 체계이다.

이 고속도로 건설은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가져왔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이 단순한 강대국을 넘어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장대 교량, 장대 터널, PC 공법 등이 개발되었고 토목공학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3.2. 인종 차별 철폐

대통령이 된 후에는 냉전과 인종 문제에 애를 쓰는데 특히 1957년에 일어난 리틀록 사건은 미국 내 인종 구별 문제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뿌리 깊은 흑인 차별을 없애는 데 기여하였다.

이때까지의 미국 교육정책은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을 통해 '분리하지만 평등하게(separate but equal)'라는, 교육시설은 분리하지만 교육과정이나 시설이 동등하다면 차별이 아니라는 눈가리고 아웅 식의 원칙 하에 이뤄졌으나 1954년 연방대법원의 '분리된 교육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 라는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Brown v. Board of Education)[14]로 이 원칙이 공립학교에서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얼 워렌 대법원장이 직접 쓴 판결문은 만장일치로 수정헌법 14조 중 "...그 관할권 내에 있는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도 법률에 의한 동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에 위배되어 위헌이라고 판결했는데 유형적 차별뿐 아니라 무형적 차별도 금지된다는 내용으로 분리 자체가 차별임을 명확하게 선언했고 이 브라운 판결을 근거로 공공장소, 기관, 교통수단 등에서의 분리도 위헌으로 선언하며 이후 브라운 2판결을 통해 지방연방법원들이 브라운 판결의 집행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아칸소리틀 록에서 백인만이 다니는 공립학교에 흑인 학생들이 등교를 하자 이를 두고 백인들의 폭행과 흑백인 사이의 찬반시위가 벌어진다. 이에 아칸소 주지사 오벌 E. 포버스가 치안 유지를 핑계로 아칸소 주 방위군 육군까지 동원하여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막자 아이젠하워는 주 방위군을 연방 육군에 편입시켜 버리고 "어느 누구도 정의를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하며 정예 연방 육군 공수부대제101공수사단을 보내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호하게 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리틀록 사건 문서 참조. 이 사건은 인종 문제뿐만 아니라 주정부와 연방정부 사이의 힘겨루기도 겹쳐 있었지만 연방군까지 투입하는 아이젠하워의 뚝심에 결국 10년 뒤에는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이 비교적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배째라 하고 버티는 곳이 많아 1963년에도 흑백 통합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2%도 안됐지만... 그 후 린든 B. 존슨이 대대적으로 손봤다.

3.3. 수에즈 전쟁 종식

이집트수에즈 운하 국유화 문제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나세르의 이집트를 침공해 수에즈 전쟁이 벌어지자 소련은 이집트에서 영국 등이 물러나지 않으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아이젠하워도 영, 프, 이스라엘 등에 압력을 행사해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1957년 1월에 의회에 공산주의 세력의 중동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중동 지역의 미군 주둔 권한을 대통령에게 줄 것, 중동지역에 대한 경제원조로서 이후 2년 사이에 4억 달러를 지출할 것 등이 포함된 특별교서, 즉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보내 미국이 중동지역에서의 우위를 유지하려는 정책을 지속하였다.

3.4. 군산복합체 견제

아이젠하워는 퇴임사에서 군대와 산업이 결합된, 이른바 군산복합체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러나 실제로 군산복합체라는 개념을 꺼내든 것은 아이젠하워의 연설 각본가인 랠프 윌리엄스와 맬컴 무스였고, 이 개념의 최초 제창자는 찰스 트레벌 영으로 그의 요지는 병기산업을 국영화하고 그것을 통제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젠하워의 주장의 요지 역시 '국방예산을 줄이자!'이며, 흔히 진보 좌파 진영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수상쩍은 악의 단체가 미국을 배후 조종한다는 식의 음모론적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군사예산을 삭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정확한 해석이다. 자세한 것은 군산복합체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아이젠하워는 군 출신이기 때문에 군과 군수 대기업들이 예산을 타내가는 꼼수를 아주 잘 꿰뚫어보고 있었고 덕분에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군사 분야에 과도한 예산이 투입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는 교육이나 연구개발, 사회기반시설 건설과 보수에 가야할 예산이 군사 분야로 과도하게 투입되는 것을 극히 꺼려 군부가 요청한 예산을 무자비하게 깎았다.[15] [16]

다들 알겠지만, 군사무기는 어떠한 재생산도 하지 못한다. 전쟁에 쓰지 않는다면 결국 시간이 흘러 고철로 그냥 폐기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구형 잠수함면도기 회사에 고철용으로 팔아치운 사례도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평시에 과도한 군사비 투입은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다만, "흔히 무기개발에 투입된 예산과 인력으로 인해서 신기술이 개발되니 결국 민간경제에도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호도하지만, 그럴거면 처음부터 학교나 민간기업의 과학기술개발에 투자하면 된다. 굳이 군수업체를 통할 필요가 없다" 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왜냐 하면 보통 대표이사 재임기 안에 업적을 얻을 기술, 길면 이사회를 주도하는 회사 창업 대주주의 개인적인 관심사가 아닌 이상 경제적인 성과가 확실하지 않은 기술, 가까운 기간 안에 이익을 얻을 수 없는 기술에 민간기업은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정부가 지원하지만 대학의 연구개발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연구개발분야 정부 투자가 상대적으로 적어 아직 군수산업이 민간산업에 기대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첨단과학기술의 최초 수요자가 군수산업이고, 그렇게 연구인력을 유지하고 기술을 더 발전시키고 경제성을 키워 민간에 상용화된 경우가 흔하다.

그런 식으로, 군수산업이 이것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지만, 의도치 않게[17] 군수산업이 과학기술발전의 마중물로써 작용하고 애초 군수분야의 요구에서 시작했지만 그것에서 유관 분야나 전혀 무관한 분야의 민간 기술이 파생된 사례가 많다. 예로, 스페이스X같은 민간 로켓 개발회사들이 그나마 NASA의 지원을 받아 위성발사체 사업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근 반 세기동안의 국가주도 연구개발 "낭비"와, 엄청난 숫자의 대륙간탄도탄과 그것을 관리, 발사, 유도하는 시스템을 생산하며 발전한 결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간 NASA의 천문학자와 다른 과학기술자가 한 일 대부분은 그 자체로서 바로 미국 서민의 "빵"이나 "달러"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달탐사와 외행성탐사를 위해 NASA가 얻은 예산 역시 냉전시대 미소경쟁과 군사기술 개발 요구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만약 미소간 경쟁이 없었다면 GPS위성 발사는 훨씬 늦었을 것이고 우리는 지상기지국기반 위치추적시스템을 친숙하게 사용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한국 정부의 예산 수준으로 위성기반 위치추적시스템은 지금도 힘들다. 한반도 인근에서 사용할 용도로 겨우 시동을 걸고 있는 정도고 그마나 이것이 더 미래가 아니라 요즘 예산을 얻은 것도 국군의 필요가 반영된 것이 크다.

하지만 "군산복합체"에 대한 경고라고 알려진 그의 발언은 시대상을 읽을 필요가 있다.. 아이젠하워 집권 시기는 제2차세계대전동안 "전세계의 군수공장"[18] 역할을 한 미국이 트루먼시절 대대적인 군축에 들어갔다가,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50년대에 다시 군비를 키울 때였다.[19] 아이젠하워 재임 후기쯤 오면 이것에 다시 고삐를 졸라맬 시기가 된 것이고 이 때 나온 말이 저것.

아무튼 군 관련 예산을 삭감하는 정책 때문에 군 수뇌부들이 크게 항의를 하거나 사표를 던졌지만, 아이젠하워는 절대로 정책을 굽히지도 않았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 대통령 본인이 2차대전 시기 유럽 연합군 최고 사령관이였던 5성 장군 출신이라서 군 수뇌부들은 대통령에게 '전문가'인 자신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라는 논리를 성립시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반면, 대통령에게는 말 한마디로 군 수뇌부 인사들을 찍어누를 수 있는 방법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20] 대통령이 짬킹이라니 반칙이다

그 당시를 비롯해 냉전 기간 동안 정부 예산의 상당 부분이 이런 군산복합체로 흘러들어갔고, 이는 냉전이 끝난 현재에는 더더욱 문제였는데, 아이젠하워는 그 당시부터 이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군복합산업체 타도는 결국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핵무기의 대량생산화를 불러왔으니 이는 참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21] 물론, 핵무기의 억제력 덕분에 냉전시기가 비교적 평화적으로 흘러갔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3.5. 사회 정책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었음에도 중도 성향에 가까웠던 그는 루스벨트 시절의 뉴딜 정책을 큰 틀에서 바꾸지는 않은 채, 이를 보다 현실적으로 유지가능한 방향으로 수정하는데 집중하였다. 국방비 감축 등 예산 운용의 효율성을 증대함으로써 확보한 추가적인 세수는 사회 정책 확장에 투입되었다. 그 일환으로 보건사회복지부를 신설하였고 사회보장제도를 확장하였다. 또 현재 미국의 고속도로 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시스템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의 업적이다. 1956년부터 각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려 500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해서 만들었다.[22]

시기적으로도 전쟁이 끝나고 경제는 50년대 내내 호황을 달렸으며,[23] 거의 완전 고용이 실현된 시기였다. 이 때문에, 지금도 아이젠하워의 인기는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10위 안에는 반드시 포함된다. 아이젠하워의 인기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편이다.

임기 내에 벌어진 스푸트니크 쇼크에 대응하기 위해 연구 기구 DARPANASA를 설립해 미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4. 개인사

  • 그의 성씨인 아이젠하워(Eisenhauer)는 본래 독일어로 "철(Eisen) 때리는 사람(Hauer)"이라는 뜻이다. 조상이 광부이거나 대장장이였나보다.[24]
  • 아내를 사랑한 애처가였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25] 연합군 사령관으로 영국 주재 당시 그의 운전병이자 비서였던 영국인 케이 서머스비와 내연관계에 있었다. 아이크가 워낙 케이 서머스비에게 다정하게 굴어서 두 사람이 내연관계라는 건 당시 아이크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사람이나 아이크와 자주 접하는 가까운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당시 아이크의 나이가 많아서 성생활은 어려웠다고 한다.
케이의 회고록에 의하면 몇 번 성관계를 가졌다고도 하지만 이건 케이 서머스비가 아이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라는 주장도 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이크의 2차대전 시절을 다룬 1979년작 TV 미니시리즈 '아이크(Ike)'에서도 묘사되고 있는데 두 사람의 내연관계가 표현되는 건 아니지만 케이 서머서비가 또 한 명의 주인공 정도로 비중이 높은데다가[26] 기쁜 일이 있으면 서로 포옹하는 장면이 나오는 등 장군과 비서치고는 두 사람 사이가 너무 좋다. 유럽전 승리 이후 아이젠하워는 부인 매미와 이혼하고 케이와 재혼할 생각까지 가졌지만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커리어가 무너질 거라는 조지 C. 마셜과 여러 지인들의 충고로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이후 케이 서머스비는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정착했고 아이젠하워 사후인 1975년 아이젠하워와의 관계에 대한 회고록을 내기도 했다.
  • 그의 미소는 백만 달러짜리. 20개 사단의 가치가 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때문에 대중적인 이미지가 굉장히 좋았고 이후 대통령에 출마하고 당선하는데 이 미소가 중요한 자산이 된다.
  •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뒤를 이어서 공화당 대표로 출마한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 시절 부통령으로서 자신을 충실하게 보좌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닉슨에 대하여 명확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고 이것이 알려짐에 따라 닉슨은 정치적인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27] 케네디와의 대선에서의 득표 편차는 표 수로는 약 20만 표였으나 비율로는 고작 0.1%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가 명확한 지지를 표명했으면 닉슨이 이겼을지도 모른다는 것.
원인은 아이젠하워가 개인적으로 닉슨을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강하며, 실제로도 닉슨은 항상 아이젠하워의 명령에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직접 닉슨을 부통령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불화는 어쨌거나 아이젠하워의 태도 때문에 공화당이 대통령의 자리를 케네디의 민주당에게 빼앗기게 되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도 비판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케네디는 아이젠하워와는 다르게 젊고 활동적인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써먹었기 때문에 그와 대비되어 아이젠하워는 매일 골프장이나 전전하는 퇴물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케네디는 선거운동 도중 아이젠하워가 미국의 안보 수준을 크게 떨어뜨렸다고 계속 선전했는데, 대통령인 아이젠하워가 국가기밀들인 소련의 군사력이나 미국의 군사력을 밝힐수도 없었던 관계로 난감한 입장이였다. 아이젠하워의 정치적인 능력에 대한 평가는 그 후로도 회복되지 못했으며 대통령 당선도 오직 군인 시절의 업적에 의한 것이라는 혹평도 있다.
  • 하루 60개비 이상의 담배를 피우는 대단한 애연가이기도 했는데, 1948년 컬럼비아 대학의 총장을 지낼 때 맥박이 지나치게 빨라져서 의사의 권고로 금연을 시작했다. 1주일이 지나지 않아 맥박은 정상으로 돌아왔으나, 그는 그 후 평생에 걸쳐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 소탈한 성격이라 역대 웨스트포인트 출신들의 사열을 받을 때 동기 한 명이 "아이크, 내려와 같이 걷자" 라고 외치자 단상에서 내려와 동기들과 같이 행진하기도 했다.
  • U-2기가 소련 영공에 들어갔다가 작살나고 나서, 기껏 흐루쇼프와 조성해놓은 화해 분위기가 망가지고 여론은 여론대로 들끓고 다른 정치인들은 자기더러 무능하다며 비판하는 등 어지러운 상황만 계속되자 백악관 집무실에 출근하면서 "대통령 못해먹겠다." 라는 말을 남겼다. 이전에는 맥아더, 패튼, 몽고메리라는 짜증나는 선배들의 갈굼을 견뎌내고 뒤치닥거리까지 해준 아이젠하워 입에서 이 직업 못하겠다는 분노가 나오게 만든 것으로 미국 대통령 자리가 얼마나 신경이 많이 쓰이는 자린지 추정이 가능하다.
  • 롤스로이스하고의 악연도 있다. 아이젠하워가 대장시절 롤스로이스에다 전화를 걸어 차 구입을 원했지만 정작 콧대높은 롤스로이스측에선 "그런 건 전화로 하지 마시고 직접 우리 매장에 와서 판매 심사[28]를 받으셔야 할 게요. 무슨 4성장군씩이나 되먹은 사람이 쪼잔하게 전화까지해서 귀찮게 하시나?"라고 냉정히 거절했다. 후에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자 롤스로이스가 롤스로이스 차량 한 대를 의전용으로 제공하겠다고 하자 "장군 시절엔 무시하더니 대통령이 되더만 아부하는 거요?" 라고 말하고는 상종하지 않았다.
  •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1965년 윈스턴 처칠이 사망하자 그 장례식에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당시 다른 국가에서 대부분 국가 원수 수준의 인사들을 조문 사절로 보냈고, 아이젠하워도 전직 미국 대통령+2차 세계대전 연합군 총사령관인 전쟁 영웅으로서 충분히 미국의 공식 조문사절로 파견될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존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아이젠하워가 아닌 당시의 주영 미국 대사에게 조문 사절을 맡겼고, 그로 인해서 미국은 처칠의 장례식 당시 별다른 주목을 못 받았다. 이 때문에 존슨은 미국 국민들에게 상당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5. 대중 매체에서

2008년에 개봉한 미국 할리우드 영화 《인디아나 존스 4: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에서는 인디아나 박사가 조국을 배신하라는 소련군 여장교의 말에 "I like Ike(난 아이크가 좋아)." 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Ike(아이크)는 아이젠하워의 별명이며, 저 문구는 아이젠하워의 선거 로고이다. 한국에서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당시의 영화관 자막에서는 이 대사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로 번역되어 나왔다. 아이젠하워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쪽이 더 친숙할 듯하다.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 하프를 들고있는 야스(나나의 등장인물)의 모습을 하고 나왔다. 패튼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콜 오브 후아레즈 : 건슬링어에 등장한다. 주인공 사일러스 그리브즈의 무용담을 듣는 젊은이인 드와이트가 이 사람이다. 막 20살 되던 시점인 듯. 세간에 알려진 온화하고 상냥한 성격과 달리 어릴 적부터 무용담이나 전설, 괴기 민담 등을 무척이나 즐겼던 모양이다. 야사에 따르면 아이젠하워는 동네에서 만난 한 늙은 카우보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것이 그의 영웅적 기개에 불을 질러 훗날 군인의 길을 걷도록 이끈 것 같다.

아이젠하워부터 레이건까지 대통령의 집사로 지내온 세실 게인즈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The Butler)》에서는 로빈 윌리엄스가 아이젠하워를 맡았다.[29] 게인즈가 섬긴 첫 번째 대통령으로 게인즈가 대통령의 집사가 된 계기가 그 전까지 일하던 호텔에서 위의 브라운 판결에 대해 토론하던 백인 고객이 세실에게 그의 생각을 묻자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백악관 행정관의 눈에 들어서였다. 아이젠하워가 리틀 록에 연방군을 파견한 것에 감명을 받은 듯.

중국의 전차 모에화게임인 강철의 왈츠에서 2017년 10월 24일 업데이트때 나온 22장-1에서 강철연맹의 높으신 분으로 등장했는데 돌아가던 도중 여행자들의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리는등 영 취급이 좋지 않다.

6. 기타등등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시기(1950년대 초반에서 1960년 말엽)는 한국 현대사의 1, 2공(말기) 즈음된다.(-북한으론 김두봉최용건)

또한 미국 역사에서 취임하자마자 전쟁기를 마무리 지은 대통령 2호이기도 하다.

일정정도는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할 수도 있다. 특히 대외정책이 그랬는다. 예를 들어서 임기 말년에 쿠바 혁명이 터졌는데, 그 대책 마련을 주문해놓고 퇴임해버려서 후임인 케네디에게 도착한 것이 피그만 침공계획서와 노스우즈 작전 계획서였다. 피그만 침공이 케네디 집권 3개월차에 있었던 것이 이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경우도 도미노 이론에 따라서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 휴전안의 조건이었던 남북베트남의 통합선거를 거부하게 하고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을 지원한 것이 아이젠하워 정부의 정책이었다.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발을 빼야하고 군대 파견은 절대로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남베트남 상황에서 미국이 발을 빼면 그대로 망할 판이라서 발을 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1950년대 아이젠하워 정부 시기의 대소련 군사전략은 소련이 어떤 재래식 침공에도 핵으로 먼저 대응한다는 식의 대량보복 전략이었다. 이는 핵 만능주의라고 불리는 극단적인 핵무기 의존으로 이어졌다. 소련에 대한 재래식 열세를 핵으로 메우는 편이 경제적이라는 판단, 그리고 소련이 핵을 가졌지만 대서양 너머 미국으로 핵을 쏠 수단은 없다는 자신감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스푸트니크 쇼크로 소련이 미국 본토를 직접 핵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케네디 정권 시기부터 시작되는 미국은 당연하고 전 인류의 위기상황은 사실 아이젠하워 정권 시기 전략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정작 아이젠하워 정권 시기 대부분의 기간은 미국 1강 체제라서 미국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므로 그 문제점들이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미국 대통령들의 공식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는 아이젠하워의 손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70년대에는 1달러 주화에 얼굴이 새겨져 있기도 했으나 80년대에 들어서기 전에 생산이 중지되었다. 해당 주화는 Ike Dollar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유통용 주화는 니켈을 도금한 구리이고, 기념 주화는 구리에 은도금을 하여 은의 비율이 40%이다. 위 사진의 Ike Dollar는 은도금 버전이다.

니미츠급 항공모함 2번함에 이름이 쓰였다.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콜라를 권한 사람이다. 이후 콜라 맛을 본 주코프는 콜라 중독자가 되다시피 해서, 미국 정부에 색깔없는 콜라를 부탁해서 몰래몰래 받아마시기까지 했다고 한다.

유명한 노래인 Fortunate Son이 아이젠하워의 손자를 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누구는 할아버지 빽으로 꿀을 빨면서 전쟁에 반대한 청년들을 끌고가 사지로 내모는 모순을 비판한 것.

컬럼비아대학교 총장 시절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컬럼비아 대학은 잔디밭을 돌아서 들어가야 했는데 그것이 귀찮은 학생들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면서 잔디가 훼손되자, 학교측에서는 잔디밭 출입금지 문구를 박아놓고 심지어 철조망까지 둘러쳤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잔디밭 가로지르기는 계속되었는데, 이를 본 아이젠하워 총장이 "이 철조망은 뭡니까?"하고 묻자, 관리인은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학생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아이젠하워 총장은 "그곳에 길을 내도록 하세요. 모두가 다니면 그곳이 길입니다." 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캔자스 주 위치타에 아이젠하워의 이름을 딴 공항이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하루 전에 아내 메이미 여사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었다.#

7. 둘러보기


  1. [1] 스위스미국인으로 원래 성씨의 철자가 Eisenhauer였으나 바꿨다. 참고로 그 전의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 또한 성씨를 Huber에서 Hoover로 바꿨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간 동안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성씨를 영어식으로 바꿨다.
  2. [2] 1944-1945년에는 서부 전선에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비롯한 프랑스와 독일 지역 공격에 대한 책임을 맡아 공격을 계획하고 감독했다.
  3. [3]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조지프 매카시 견책결의안에 서명하면서 한 말. 보면 알겠지만 영어 be동사의 현재형과 과거형을 가지고 한 언어유희이다.
  4. [4] 어릴적엔 바다를 본 적도 없는데다 자신의 집이 경영하는 여관에 숙박한 육군 장교들의 태도에 반해 육군 장교가 되려 했던 텍사스 촌뜨기 체스터 니미츠가 원래 육사를 지망했다가 국회의원의 추천서를 선착순으로 받지 못해서 해사 추천서로 대신 받은 것과 겹치는 부분. 니미츠 제독의 해사 추천서도 당시로선 육사에 비해 듣보잡 취급받았던지라 상원의원의 해사 추천 TO가 남아서, 낙심한 니미츠에게 의원들이 "해군은 자리가 있는데 그거라도 갈래?"라고 제안한 걸 니미츠가 별다른 고민 없이 수락해 얻어낸 것이다. 대조적인 것은, 니미츠는 원래 고등학교 졸업반도 아닌데 추천서와 학교 선생님들의 특별과외를 받아서 동기들보다 어린 나이에 입학했다. 여러모로 인생을 바꾼 신의 한수였던 셈이다.
  5. [5] 맥아더가 필리핀으로 그를 끌고 가려 하자 그는 절망했다고 한다(...).
  6. [6] 나중에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자, 맥아더가 "저 친구는 훌륭한 대통령이 될 거야. 내 부하들 중에서 꽤 유능했거든"이라고 평했다는 후문. 다만 이는 그레고리 펙이 주연했던 맥아더의 전기 영화에 나온 내용이며, 실제 발언인지 여부는 확인 후 수정 바람.
  7. [7] 리히 제독 개인의 능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해군이 사사건건 통합군 드립을 빌미로 육군이 해군을 집어삼키려 드는 거 아니냐는 불만 종식 차원에서 해군 출신인 그를 육해군 최고 선임자로 임명했다.
  8. [8] 패튼은 아이젠하워보다 6년 먼저인 1906년부터 육군에 복무했지만 그 지랄맞은 성격 덕분에 번번이 진급에 실패해 아이젠하워는 물론 자기 부하였던 브래들리에게도 진급이 밀려버렸다.
  9. [9] 시칠리아 전투 중에 질척질척한 참호 속에 박혀 있다가 참호족염을 얻어 치료중이었다
  10. [10] 스티븐슨은 유엔의 당시 5대 대사였고 일리노이 주지사도 한 인물이었다.
  11. [11] "Ike for president!(아이젠하워를 대통령으로!)"라는 리드미컬한 구호가 돋보인다. 앞서 서술했듯 'Ike'는 아이젠하워의 애칭이다. 영상에 아이젠하워의 그림을 등에 얹은 코끼리가 북을 치는 장면이 나오고 당나귀가 이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각 정당을 비유한 것이다. 코끼리는 아이젠하워의 소속 정당인 공화당의 비공식적 상징 동물이고 당나귀민주당의 비공식적 상징 동물이다. 공화당이 비유적으로 민주당을 까는 셈이다. 영상 막판에는 어두운 배경 앞으로 누군가가 당나귀를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민주당 소속의 해리 S. 트루먼 33대 대통령이 백악관을 떠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트루먼이 가고 난 자리에 아이젠하워를 세우자는 것.
  12. [12] 이런 이미지는 광주 민주화 운동까지 이어졌다. 당시 미 해군의 항공모함이 한국으로 온다는 소식을 무장시위대들이 듣고는 '미국이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 도와주러 오는구나'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당연히 사실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 반미 운동이 촉발되는 계기가 된다.
  13. [13]오키나와는 예정대로 방문하였다. 일본 본토를 방문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은 1974년의 제럴드 포드이다.
  14. [14]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을 폐지시킨 역사적인 판결로, 영미법을 겉핥기로나마 배우는 대학교 1학년 교양수업에도 등장하는 굉장히 유명한 판결이다.
  15. [15] 정부 재정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군사비의 증액은 결국 학교, 정부 출원 연구소, 사회기반시설(고속도로, 철도, 공항, 항만, 통신, 발전소, 송전망, 상하수도, 가스 등) 건설과 보수 등에 가야할 예산을 잡아먹는 결과를 초래한다.
  16. [16] 사실 역대 한국 대통령들만 봐도 장성 출신 대통령들 보다 민간인 출신 대통령들이 국방비 증액에 더 후한 편이다.
  17. [17] 군사비에 예산을 많이 쓰고 싶어하는 정부는 없다. 이익이 아닌 개발리스크와 생산단가가 늘어나는 걸 좋아하는 군수회사도 없다.
  18. [18] 총력전 와중이었으니 자동차부품회사, 가전제품회사, 타이어회사까지 전차와 포탄, 전투기와 폭격기를 생산했다. 그런 회사들이 민수용 대단위 생산시설을 전용해 만든 물량이 전쟁 전부터 명맥을 이어온 전문 전투기, 전차회사들보다 더 많을 정도. 이 회사들은 50년대 중반 이후 하나둘 군수부문을 접거나 합병하거나 청산해 사라졌다. 전쟁때야 "우리회사에 좋은 무기 있어요"하고 시연하면 채택해주었지만 이젠 전쟁때 늘어난 여러 회사들이 국가의 콘테스트에 응모해 선정되어야 했고 두세 번 떨어지면 회사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 [19] 2차세계대전과 그에 뒤이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전쟁 패러다임과 무기가 너무 발전해버려서 가지고 있던 것들이 싹 구닥다리가 돼버렸다.
  20. [20]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군통수권자의 직위로 찍어누르지 않더라도 '자네가 나보다 군대를 더 잘 아는가?' 나 '자네가 나보다 전공이 많은가?'라고만 해도 토를 달 수 있는 장성이 없었을 것이다.
  21. [21] 이 때문에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에릭 홉스봄에게는 "스스로는 광기에 물들지 않은 채 핵전쟁의 광기로의 진행을 이끈 지도자"라고 까였다.
  22. [22] 당시 의회에서 이를 뒷받침한 게 고어 상원의원으로 그의 아들이 클린턴 밑에서 부통령을 역임한 앨 고어. 고어가 부통령으로 초고속 통신망 건설을 '정보 고속도로'로 명명한 것은 아버지의 업적에 빗댄 것이다.
  23. [23] 이 점은 1차 대전 직후처럼 세계 대공황을 기대한 스탈린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24. [24] 아이젠하워의 조상들이 종교 박해를 피하여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독일어식 철자인 Eisenhauer를 발음하기 편하도록 영어식으로 Eisenhower로 고친 것이다. 참고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조지아식 본명 쥬가시빌리도 '철사람', 즉 대장장이란 뜻이었으나 러시아식으로 바꾸면서 '강철인간' 스탈린이 된다.
  25. [25] 이 부인이 좀 유별났다. 신혼 초에 공무 때문에 아이젠하워가 자주 귀가를 못하자, 결국 부인 매미 아이젠하워(Mamie Geneva Doud Eisenhower, 1896.11.14 ~ 1979.11.01) 여사가 어느날 남편을 본다고 차를 끌고 부대로 쳐들어왔다.
  26. [26] 두 사람의 출연 빈도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27. [27] "일주일 정도 시간을 주면 아마 한 가지 쯤 기억이 나겠지요." 이 말은 아이젠하워가 "부통령 닉슨이 8년동안 어떤 주요한 정책 결정에 참여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한 답변이었다. 나중에 농담이라고 하긴 했지만, 질문에 대한 진짜 대답은 끝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선 가도를 달리던 닉슨에게 이것은 타격이 되고 말았다.
  28. [28] 당시 롤스로이스는 자신들의 자격 요건에 맞지 않으면 판매하지 않는 까다롭고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즉,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자격이 안 되면 퇴짜를 놨다. 일단 차량을 구매하려면, 보유한 총 자산도 아닌 '유동 자산'이 최소 3,000만 달러(한화 약 330억 원)가 넘어가야 했다. 쉽게 말해 롤스로이스를 소유하려면 그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와 자산이 필요했다는 소리다. 게다가 자격요건에 부합하더라도 시원찮은 지도자나 고위층들,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들, 철권통치를 한 독재자들에게는 판매를 불허했다. 일례로 한국에선 이런 일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롤스로이스를 대한민국 국가원수 의전차로 도입하려고 문의하였으나 거절당해서 캐딜락을 의전차로 썼는데 그 후 이기붕IOC위원으로 위촉되자마자 롤스로이스에서 의전차를 제공하겠다고 바로 연락이 와서 이기붕이 아주 난감해한 일화가 있다. 자칫했으면 아랫계급 사람이 윗사람보다 더 좋은 차를 탈 뻔한 셈. 이 사건은 이승만과 이기붕 모두를 당황시킨 사건이라고. 게다가 연예인들한테도 안 팔았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려고 했을때 우리 차는 딴따라들 타라고 있는 차가 아니라고 하며 거절했다. 정작 조국의 위대한 음악 아티스트 존 레논에게는 가장 먼저 차를 제공했다. 이를 아니꼽게 본 존은 해괴한 도색을 해서 복수한다. 그 차의 사진은 롤스로이스 문서에 있다.
  29. [29] 비록 한 명(테디 루스벨트)은 밀랍인형으로서였지만, 로빈 윌리엄스는 미국 대통령 두 명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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