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밴드)

왼쪽부터 허성욱, 최성원, 전인권, 조덕환

왼쪽부터 손진태, 허성욱, 최성원, 주찬권, 전인권, 최구희

왼쪽부터 최성원, 주찬권, 전인권

딱 까놓고 얘기하면, 앞으로 100년 안에 우리 같은 애들 안 나올것 같아.

ㅡ 최성원 (들국화의 베이시스트)[1]

1. 개요
2. 역사
2.1. 활동 당시
2.2. 2집 발표와 해산
2.3. 2012년 재결성 이후
3. 총평
4. 사족

1. 개요

2년이란 짧은 활동 기간 동안에도 한국 락 음악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전설적인 락 밴드.

1983년 보컬 전인권, 키보드 허성욱 듀오에 베이스 최성원 이 합류하여 결성되었다. 8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밴드로 손꼽힌다. 84년 경 최성원이 잠시 빠지고 기타 조덕환이 가입하였고, 얼마 안가 다시 최성원이 합류하여 이 4명으로 1집 앨범을 낸다. 1집에 이미 세션으로 참여하고 있던 믿음 소망 사랑의 멤버들인 드럼 주찬권과 기타 최구희도 2집부터 정식 멤버로 가담한다. 하지만 2집의 부진후 해체하게 되었고 90년대 중반 전인권의 주도로 들국화 3집을 내지만 최성원이 빠진 상태라 평가도 좋지 않았고 주목도 받지 못했다. 이후 2012년 드디어 재결성을 했지만 2013년 10월 들국화의 드러머 주찬권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다시 해체 상태에 이르게 된다. 2013년 12월 신보+리메이크 형식의 4집 '들국화'를 발매했다.

2. 역사

2.1. 활동 당시

들국화 1집의 앨범 커버[2], 이 앨범이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중 1위다.

원래 존 레논은 (전)인권이가 좋아했었고 나는 폴 매카트니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에요. 1집의 커버를 비틀스의 Let It Be처럼 만든 것도 (전)인권이의 아이디어입니다.

최성원 인터뷰

앨범 발매 이전에 방송이 아닌 소극장이나 라이브 카페 같은 곳에서 라이브를 하면서 실력을 다지기 시작했으며, 1985년 1집 들국화를 발표하면서 엄청난 인기와 함께 한국 록의 전설이 되었다.한국인의 정서를 외국의 록 형식에 잘 담아냈다고 평가받는다.

대한민국 락그룹의 원형격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멤버들은 원래 락커라기보다는 포크송 가수에 가까웠고, 들국화 역시 4명이 파트가 확실한 게 아니라 보컬과 연주를 번갈아가면서 했다는 점에서 밴드보다는 크루에 좀 더 가깝다. 이것은 포크 음악가들의 문화의 영향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크루가 밴드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락음악이 현대 대중 음악으로 발전해왔는데, 한국땅에서 80년대에 똑같은 모습이 들국화에서 보이고 그게 결국 한국 락의 직접적인 시조격이 된다는 것. 백두산김도균이 들국화를 평할 때 '락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 밴드'라고 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1집 음반 안에 라이브 콘서트 할인권과 전국 순회 콘서트 일정표를 넣을 정도로 철저하게 라이브 활동을 고집하였다.

1집 음반 녹음이 끝날 무렵 조덕환이 탈퇴하고, 드러머 주찬권은 정식멤버로 가입하였다.

1집 발매와 동시에 시작된 4명의 멤버에 세션 기타리스트를 포함한 5인조로 진행된 전국 순회 콘서트는 말 그대로 인기 폭발하였다.

2.2. 2집 발표와 해산

1집에 참여한 신중현과 뮤직파워,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괴짜들을 거친 당대 탑 클라스의 기타리스트 최구희 [3]와 드러머 주찬권 [4] [5]그리고 세컨드 기타리스트로 이미 라이브 앨범 레코딩에 세션으로 참여했고 허성욱의 친구이기도 한 손진태 이렇게 세명의 새로운 멤버와 함께 2집 녹음에 돌입한다. 새로 가입한 최구희가 두곡, 주찬권도 한곡을 크레딧에 올린 2집은, 전인권 과 최성원의 음악적 음악외적 견해차이가 불거지면서 1집과 비교하면 어정쩡한 결과물이 나와버렸다. 시간이 흘러 재평가를 받긴 했지만 1986년에 발매한 2집은 6인조의 최강의 멤버구성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당시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믿음 소망 사랑 이라는 전설적인 하드록 밴드의 기타리스트와 드러머의 영입, 또한 두 명의 기타리스트를 좌우로 포진 시켰다는 것은 팬들로 하여금 들국화가 본격적인 락밴드로 발전할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6]

매일 그대와 같은 어쿠스틱한 넘버들도 무시할수 없지만, 들국화의 진면목은 역시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 같은 강렬한 밴드 음악에 있었다.

실제 이 당시 라이브에서는 Led Zepplin, Styx 등의 록 넘버들을 앙콜 곡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2집은 이런 기대와 달리 포크락그룹을 연상시키던 1집보다도 훨씬 말랑말랑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이럴거면 왜 기타리스트를 둘씩이나 두냐

"1집 같은 경우는 참 오랫 동안 준비한 것이었죠. 반면 2집에서는 새로 영입한 멤버들과 모든 포커스를 맞출 시간도 충분치 않았어요. 공연을 줄이고 음반에 집중하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여건이 되지 않았어요. 2집을 녹음하면서 이미 멤버간에 균열이 생겼어요.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2집 앨범을 좋아하는데… 최성원 인터뷰 "

결국 들국화는 87년 해산을 선언하고 전국 순회 고별 콘서트를 끝으로 모든 활동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 멤버로는 결국 다시는 모이지 못했다.

해산 이후에 전인권은 허성욱과 함께 '추억 들국화'음반을 발표하여 인기를 끌었다. 기타리스트 최구희는 괴짜들 을 재결성하여 활동하고 한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는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7]

손진태는 한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였고 곧 이어 김현철, 함춘호, 조동익과 함께 야사라는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후 손진태는 90년대 들어서는 A급 기타 세션맨으로 맹활약 했다. 다른 멤버들도 여러가지로 음악계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최성원은 나중에 솔로로도 활동하여 제주도의 푸른 밤이라는 명곡을 남기기도 했다. 음반제작자 겸 프로듀서로도 유명한데, 최성원이 발굴한 가장 대표적 가수가 바로 이적과 김진표.패닉 1, 2집이 최성원 제작이다. 드러머 주찬권은 이런저런 드럼 세션에 한때는 신중현 밴드의 드러머로 뛰기도 했으며 무려 6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였다.

2.3. 2012년 재결성 이후

이후 꾸준하게 재결성 떡밥이 흘러나오고 1990년대 중반 전인권 주도로 3집이 나왔다. 그 전 앨범들에 비해 전인권의 보컬이나 사운드 면에서도 락에 충실한 음반이었으나 최성원의 부재로 평가는 인색하였다. 이 와중에 1997년 허성욱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은둔중인 최구희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모여서 공연을 갖기도 하였다. 이러면서 2001년 후배 뮤지션들의 들국화Tribute 음반도 나왔다. 이후 10여년동안 재결성, 콘서트 등 온갖 소문만 무성하다가, 2012년 5월에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 세 사람이 모여서 재결성 한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이후 여러 방송이나 콘서트, 락페에 참여하여 녹슬지 않는 실력과 인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2013년 10월 20일 드러머 주찬권이 갑자기 쓰러져 사망하였다. 근 30년만에 재결합해 활동에 박차를 가할 찰나에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들국화 멤버들과 팬들은 통한을 감추지 못했다. 주찬권 회고 영상

2013년 12월 3일, 신곡인 '걷고, 걷고'가 공개되었고 같은달 9일 셀프타이틀 4집 정규앨범 '들국화'가 발매되었다. 드러머 주찬권은 생전에 드럼 트랙을 마친 상태였고 나머지 멤버는 하찌, 함춘호, 한상원, 정원영, 김광민등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멤버들로 구성되었다. 2CD로 구성되어 있으며 1CD에는 신곡들이 2CD에는 리메이크 곡들이 들어있다.

주찬권의 죽음 이후 들국화는 사실상 해체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전인권은 자신의 이름을 필두로한 '전인권밴드'를 만들어 음악 활동을 계속 하고 있고 최성원은 제주도에 거주하며 라디오 '제주도의 푸른밤 최성원입니다.'의 DJ를 맡고 있다.

3. 총평

현재의 한국 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영향이 크다. 유재하, 조용필, 산울림, 서태지와 아이들 등과 함께 한국 대중 음악사를 엄청나게 뒤바꿔놓은 그룹. 그들의 음악세계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곡으로 '그것만이 내 세상'과 '행진'이 있다. 암울하고 어두웠던 지난 날들을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표현한 명곡들이라 할 수 있겠다.

여러모로 한국 록이 '무엇을' '어떻게' 노래해야하는지를 재정의한 그룹이다. 기존 한국 음악의 소위 '뽕삘'(부정적이던 긍정적이던)이라 불리는 것에서 벗어나 해방 후 새로운 형식의 한국 감성으로 각광받던 포크 음악을 잘 계승하면서도 정형화된 록 음악의 형태를 도입하고 민주화 운동 시기 빼놓을 수 없는 저항적인 측면도 상당히 갖춘 완전체라고 보면 된다. 물론 해외의 록 마니아나 요즘의 록 청자들이 들으면 당장 서구의 7080 로커들같은 하드함이나 혁신성은 조금 부족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포크 음악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어서 그렇지 당장 각 멤버들의 연주력이나 보컬 능력, 곡의 구조나 요소들을 보면 순수하게 '록 밴드'로서만 평가하여도 충분히 상급이며, 거기에 '한국의 음악가'로서의 가치가 더해져 넘사벽 밴드가 된 것이다.

사실 상당수의 '민족적' 뮤지션들은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평가가 상당히 미묘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당장 동아시아 삼국에서만 봐도 일본의 '핫피 엔도'나 중국의 '최건' 같은 뮤지션들 또한 현대의 젊은 록 청자들이 그 고평가에 대해 상당히 의구심을 갖고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록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자국의 음악 시장의 역사를 본다면 그들이 왜 전설이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들국화의 경우에 대해서만 설명해보자면 한국 음악 시장에서 록계에는 이미 이전부터 당대까지 신중현, 산울림, 송골매, 김현식 등의 걸출한 뮤지션, 포크 계에도 세시봉 4인방, 한대수, 양병집, 김민기, 조동진, 이장희, 정태춘, 어떤날 등등 상당한 거장들(다른 장르까지 따져보면 훨씬 많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해방 후 새로이 태어나는 한국적인 음악 형질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들국화는 그 '현대 한국의 대중음악'을 이루는 큰 줄기 중 하나인 록과 포크라는 양 줄기를 모두 포괄하여 등장하였고 자연스럽게 그 감성을 완성해낼 수 있었다. 비틀즈가 밥 딜런이라는 포크의 거장과 사이키델릭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만났을 때 비로소 음악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완결되었던 것처럼, 그러한 화학작용이 한국에서는 들국화에 일어났던 것이다. 들국화의 음악은 록이면서 동시에 포크였고, 심지어 연주력이나 선율도 훌륭했으며 시대적 상황까지 반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느 기원을 쫓아 가도 결국에는 한국 자생적이라는 결론(해외 음악의 영향을 아예 받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두 합쳐져 해외에서는 찾기 힘든 독특한 형식이 되었다는 것)에 이르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에 마침내 완성된 '현대 한국의 감성'이 '완성된 록'의 형태로 등장한 최초의 사례가 들국화라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대상 또한 확고해져 6070에서 포크 음악이 수행하던 '저항'의 역할이 세대교체를 거치며 록 음악으로 이전되고 들국화는 이 시대의 요구까지 반영되어 있는 밴드로 태어난다.

젊은 청자들이 들국화를 들으며 흔히 겪기도 하는 '이게 왜 록 음악이지?'라는 의구심은 이러한 기원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들국화는 록 음악이 한국화된 결과물이라기보단, '한국 음악'이라는 존재가 록의 형태로 현현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며 그렇기에 훨씬 부드럽고 대중친화적인 형태로 접근했을 뿐이다. 비틀즈가 뒤로 갈수록 정형화된 록의 형태를 벗어나 '음악 전반'에 접근했더라도 여전히 록 밴드로 취급받듯이, 들국화의 부드러움 또한 그러한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약하면, 해방 후 받아들여진 서구의 대중음악들이 서서히 한국화되어가는 흐름 속에서 들국화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지며 '현대 한국의 대중음악'이라는 여러 장르간의 공통된 실체가 발현되기 시작하고 동시에 80년대 격동의 시대상까지 저항적인 록 음악의 형태로 반영되며 80년대 한국인들의 감성의 상징이자 신시대의 한국 음악의 시작을 고하는 밴드로서 존재하게 된 것이 바로 들국화라고 말할 수 있다.

4. 사족

이외에도 '매일 그대와, '내가 찾는 아이', '제발', '아침이 밝아 올때까지' 등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곡들. 행진은 전인권의 곡이고 나머지 곡들 대부분은 최성원의 손을 거쳤다. 실제로 이 밴드가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리더는 최성원이었고 심지어 조덕환은 연주 못하고 노래도 못한다고 쫓겨날뻔 한 적도 있을 정도. 그러나 들국화 1집 이후 히트곡은 행진이었고, 전인권의 카리스마적인 보컬에 의해 밴드의 균형이 바뀌면서 해체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비틀스와 매우 비슷한 길을 겪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들국화의 명곡들이 배경음악으로 나와서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콘서트 7080에서 전인권이 밝히길 '들국화'란 밴드 이름은 택시 타고 가다가 택시기사님께 의견 청취를 듣고 정했다고 한다. 코스모스(..), 들장미(...) 등을 제치고 기사님께서 들국화가 괜찮다고 하셨다고. 그 들국화란 이름도 마침 허성욱이 씹던 해태제과의 껌 이름이었다.


  1. [1] 불후의 명곡에 나와 농으로 던진 말이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2. [2] 사진속의 전인권이 입에 문것은 오징어다.
  3. [3] 사실상 1집의 화려한 애들립을 포함한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는 모두 최구희의 솜씨다. 최성원은 조덕환의 기타실력으로는 앨범을 레코딩하기엔 부족하여 1집에서 축복합니다 의 간주 정도만 시켰다고 밝혔다 최성원 인터뷰
  4. [4] 역시 1집의 드러머이며 믿음 소망 사랑 출신, 기타 드럼 키보드 등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멀티플레이어 이며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서. 그는 한때 고교생 최구희의 기타 스승이기도 했다!)
  5. [5] 1집 레코딩 당시 이 두명은 리허설을 끝낸 후 본격적인 녹음에 들어가려 했는데 당시 녹음을 맡았던 서울스튜디오 최세영기사가 녹음 다 끝났으니 이제 나오라고 했다고 한다. 즉 1집의 일렉기타와 드럼 녹음은 리허설이 그대로 레코딩으로 나와버렸다. !)
  6. [6] 이 당시는 전세계가 하드록, 헤비메탈의 전성기이기도 했고, 라이브에서 가끔 선보였던 최구희 와 손진태의 트윈기타 플레이는 경쟁력이 충분했다
  7. [7] 10년에 한번 정도 세상에 나와 연주도 하고 레코딩도 하지만 대부분 비상업적인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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