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베리아

서아프리카의 국가 및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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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니


시에라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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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다쿠냐

(영국)


라이베리아


코트디부아르


가나


토고


베냉


나이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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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리아 공화국
Republic of Liberia

국기

국장

면적

111,369km²

인구

4,299,944명(2016)

민족구성

크펠레족 20.3%, 바사족 13.4%, 그레보족 10%, 지오족 8%, 마노족 7.9%, 크루족 6%, 로마족 5.1%, 키시족 4.8%, 골라족 4.4%, 기타 20.1%

종교

기독교 85.6%, 이슬람 12.2%, 토착 신앙 및 기타 2.2%

대통령

조지 웨아[1]

부통령

쥬얼 테일러[2]

수도

몬로비아[3]

공용어

영어

GDP

GDP: 21억 4000만$(2017.10)
PPP: 39억 600만$(2017.10)

1인당 GDP

GDP: 475$(2017.10)
PPP: 867$(2017.10)

표어

The love of liberty brought us here(자유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여행현황

여행자제: 전지역[4]

1. 개요
2. 역사
2.1. 건국과 근대
2.2. 현대,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2.3. 찰스 테일러의 집권과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
2.4. 이후
3.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
4. 경제
5. 문화
5.1. 스포츠
6. 외교 관계
6.1. 한국과의 관계
6.2. 사생아 문제
7. 라이베리아의 현 상황
8. 여행 정보

1. 개요

서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에 있는 공화국. 수도는 몬로비아. 공용어는 영어. 인접국가로는 시에라리온, 기니, 코트디부아르가 있다. 미국이 해방노예를 식민(殖民)시켜서 건국하였던 영향 때문에 국기도 미국성조기와 비슷한데 별이 50개가 아닌 큰 별 1개로 되어 있고 공식명칭은 '외로운 별'(또는 '고독한 별')이라고 불리는데 독립 당시 최초의 아프리카 독립국이었음을 상징한다. 빨간색은 용기, 흰색은 미덕, 파란색은 아프리카를 의미한다. 줄이 11개인 것은 독립문서에 서명한 지도자 11명을 상징한다. 허나 미국과 달리 라이베리아는 20세기 오랜 독재와 내전으로 고통받다 21세기 들어 겨우 아무나 했지만, 2010년대 들어 다시 국가 전역에 에볼라가 유행하는 바람에(...) 영 좋지 않은 상황을 겪고 있다. 그나마 2010년대 중후반 들어 에볼라 종식선언이 되긴 했다.

2. 역사

2.1. 건국과 근대

원주민 역사에 대해서 대부분을 구전과 고고학에 의존해야되기 때문에 불분명한 점이 많으나, 원주민들의 상당수가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 서부와 북부에서 왔다고 추정되어진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과 접촉하면서 '후추 해안', '곡물 해안' 따위의 이름이 붙여진 지역 인근이다. 1602년에 네덜란드가 라이베리아 일대에 마을을 세운적이 있지만 1년만에 관두었고 영국도 라이베리아 일대를 식민화 하려다가 관두었다. 이 나라가 세워지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아무래도 19세기 미국의 영향이 매우 강하다.

후에 남북전쟁을 불러 일으킨 흑인 노예 문제가 심각해지는 와중에 1822년 미국에서 일부 노예들이 해방되었고, 이들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1847년까지 아프리카로 이주한 후 1847년에 건국한 해방노예의 나라가 바로 라이베리아였다. 사실 정착이 쉬운 일만은 아니라서 초기 해방노예들은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면서 정착하는데 고생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흔히 에티오피아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시대를 겪지 않은 둘뿐인 나라'로 소개되기도 하는데,[5] 정확히 말하자면 라이베리아 지방에 식민지 구조가 성립되지 않았다 뿐이지 '식민(植民)'이란 개념에서는 전형적, 태생적인 식민국가였다.[6]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식민은 대항해시대 이후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례에서 이야기하는 식민은 고대 식민의 개념과 유사하다. 이런 고대 식민지의 대표적인 국가는 페니키아의 식민지였던 카르타고가 있다.

라이베리아라는 이름부터가 Liberia, 즉 해방(Liber, 라틴어)이라는 뜻이다.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이라는 나름 영예로운 타이틀을 가지고 건국했으나, 정작 미국계 해방노예(Americo-Liberian)들은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에서 온 자신들이 야만스런 토착 원주민들보다 우월하다고 착각하고는 신분제도를 도입했으며, 이 땅에 살던 다른 흑인 원주민들을 차별하며 노예로 삼았다(...). 참 좋은 거 배워왔다[7]

사실 흑인들이 단일 집단도 아니었고, 라이베리아는 대다수 흑인 해방노예들에게 연고지도 아닌 생판 처음 보는 땅이었다. 노예 무역으로 인한 노예 수의 증가에 흑인들도 참여했다는 점은 학계에서도 알려진 사실. 그리고 19세기 노예 무역의 쇠퇴에도 아프리카 내부에서 장기간 확산되어 온 노예 제도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아프리카 국가들이 내부 발전을 위해 활용하기도 했다. 약자나 피해자가 반드시 착하지만은 않다는 대표적인 사례로 들 만하다. 물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약자 집단에서도 그나마 강자 중 인성 파탄난 놈들이 더 약자를 괴롭힌다고 보는게 정확하겠지만.

그나마 변명하자면 19세기 중엽은 아프리카의 농산물 플랜테이션 사업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노예를 비롯한 노동력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시기긴 했다. 라이베리아만이 돌출된 행동을 한건 아니라는 것. 애초에 본국이었던 미국도 아직 흑인 노예 제도가 폐지되지 않은 상황인데 사고의 전면적 변화를 기대하는게 넌센스일 수도 있고... 물론 잘한 일은 절대 아니다. 최소한 본인들도 노예 생활을 했던 케이스기에 더 비판받을 부분.

그래도 유럽 및 미국과의 커넥션을 통해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 중에서는 무역이나 교육 등의 면에서 유리한 점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내부의 마찰은 결국 10여 년 간의 내전을 부르게 된다. 독립을 하긴 했으나 말이 좋아 독립국이지, 미국괴뢰국이나 마찬가지. 덕분에 독립 이후 미군이 주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미국을 등에 업고 유럽 아프리카 국가들을 무시하는 라이베리아에 대해, 안그래도 고깝게 여기던 유럽 열강들과 우간다를 비롯한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은 내전이 터지자 얼씨구나 하며 반군 쪽에 무기를 지원하며 친미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 정권 타도에 열을 올렸다. 심지어 장교도 아닌 상사쿠데타를 일으킨 사례도 있을 정도다. 후술하겠지만 이 사람이 바로 라이베리아의 21대 대통령 새뮤얼 케니언 도(Samuel K. Doe)다. 그럼에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는 전쟁 발발 일주일만에 미국보다 먼저(1917년 선전포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날렸다. 여하튼 라이베리아 초기에는 휘그당과 공화당간의 양당체제였지만, 1878년 이후로 1980년까지는 휘그당의 일당체제였던 국가가 되었는데, 참고로 이는 소련 공산당과 멕시코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 기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2.2. 현대,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총을 든 소년들은 마약에 취해 풀린 눈으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거리를 쏘다니다 보이는 것마다 약탈하고 소녀들을 강간하여 임신시켰다.”

"수만 명이 한꺼번에 음식과 숨을 곳을 찾아 몰려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총알과 폭탄 아니면 강간과 콜레라 뿐이다" - 영국 BBC 방송이 보도한 국경 없는 의사회(MSF)의 한 의사가 보내 온 일기 중에서

1944년부터 1971년까지 윌리엄 터브먼이 집권하면서 라이베리아는 안정기를 맞게 되었다. 1944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윌리엄 터브먼은 미국계 라이베리아인들과 라이베리아 현지 원주민들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통치를 모색했고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내주는 등 원주민들의 불만을 어느정도나마 해소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졌고, 미국과는 혈맹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외국자본을 끌여들였다. 그 결과 1950년대에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고도성장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27년에 걸쳐서 집권했다는 부분에서 어렴풋이 알 수 있듯이 그는 1955년 암살미수사건이 터진 이후로는 야당의 발을 묶고 독재적인 정치를 폈으며 경제성장이 되고 있음에도 교육에 대한 투자는 저조하여 라이베리아의 문맹률은 여전히 높은 수준에 머물게 된다. 이 때문에 근본적인 빈부격차는 해소되지 않아 경제적 부분에서도 명과 암이 뚜렷이 엇갈린다. 하지만 이후의 참상에 비하면 그나마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평화로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라이베리아 장노년층들은 현재와 비교해 이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여튼 1970년대 중반부터 고무철광석 가격이 떨어지는 바람에 경제성장도 한계를 맞으며 라이베리아는 현지인들과 이주민간의 갈등이 심화된다.

쿠데타를 일으키며 라이베리아 내전의 막을 연 새뮤얼 케니언 도(Samuel Kanyon Doe, 1951년 5월 6일 ~ 1990년 9월 9일)

결국에는 1980년 하사관들의 쿠데타가 벌어져 토착 원주민계인 크란족 출신의 새뮤얼 케니언 도가 대통령으로 집권한 뒤 미국 출신의 흑인들과 덤으로 기타 부족들까지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쿠데타군은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의 윌리엄 톨버트 대통령 및 톨버트 밑에서 일하던 고관을 살해하여 아메리코 라이베리안 정권을 무너뜨렸고 사무엘 도 장군은 정권을 획득한 후 독재정치를 실시하여 사무엘 도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이에 1985년 11월 12일에는 기오족 출신으로 1980년 도의 쿠데타에 가담했던 토마스 키옹파 장군이 이끄는 기오족과 마노족의 병사들이 사무엘 도 정권에 반발하여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실패하여 키옹파 및 사무엘 도 정권에 반기를 든 기오족과 마노족의 일원들은 11월 15일에 처형되었다. 그 후 사무엘 도는 자신의 출신부족인 크란족만으로 구성된 라이베리아군(AFL)을 기오족과 마노족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파병하여 보복으로 기오족과 마노족을 학살했다. 1986년 선거에서 도는 대규모의 부정 선거를 저질러서 불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당연히 이에 반발한 미국계 흑인들인 '아메리코 라이베리안'들은 크란족 정권의 박해를 받던 기오족, 마노족까지 총규합해 찰스 테일러를 중심으로 1989년부터 라이베리아 민족애국전선(NPFL)을 조직하고 저항했다. 이미 1987년에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의 찰스 테일러가 사무엘 도의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리비아에서 라이베리아 국민애국전선(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을 결성하여 게릴라전의 군사훈련을 받았다.

리비아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테일러는 크란족의 도 정권에 고생하던 기오족과 마노족과 손을 잡고 1989년 12월 24일에 NPFL은 코트디부아르 측에서 국경을 넘어 라이베리아의 님바 군 부토오 마을로 침입하여 체류중이던 크란족 주체의 라이베리아군을 기습해 250명 전원을 죽이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1990년에 접어들며 내전은 라이베리아 전역으로 확대되었는데 1990년 1월 4일에 사무엘 도 정권에 비판적으로 알려진 로버트 필립스가 몬로비아에서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 후 님바 군에서 라이베리아군에 의해 기오족과 마노족 주민 500명이 처형당하자 보복으로 NPFL도 부토오 마을에서 200명을 학살했다. 2월에 친미파이던 프린스 존슨[8]이 동료인 기오족과 함께 리비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찰스 테일러의 방법에 반발하여 NPFL에서 이탈하여 라이베리아 독립국민애국전선(INPEL)을 결성하자 찰스 테일러는 존슨을 반역죄로 체포하여 처형한다고 선언했다.

이윽고 수도인 몬로비아를 제외하곤 사무엘 도 정권과 라이베리아군만으로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미국 국무차관보 아프리카 담당도 사무엘 도 정권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고 발언했다. 사무엘 도 정권 내부에서도 해리 모니바 부통령이 사무엘 도에게 사임을 요구하는 등, 사무엘 도 정권은 이제 막장을 넘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5월에 미국 해병대가 라이베리아 주재 미국대사관의 미국인 구출을 위해 라이베리아에 도착했다. 6월 14일에 몬로비아의 기독교회 관계자가 미국에 내전종결을 위한 미군개입 데모를 몬로비아 주재 미국대사관 앞에서 벌였다. 사무엘 도는 자신의 라이베리아군 간부와 함께 미군의 호휘하에 고향인 그랜드 게데 군까지 안전하게 복귀한다면 금방이라도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말했다.

프린스 존슨(Prince Johnson 1952년 7월 6일~ )

그리고 미국에 망명원조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미국은 사무엘 도 정권의 뒤를 봐주고 있었지만 라이베리아 내전의 근본 원인이 사무엘 도의 독재 정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INPEL의 존슨이 친미적인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그에게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사실상 포기해버린 사무엘 도는 대통령 관저에서 농성했지만 답이 없다는 것을 판단했는지 나이지리아의 이브라힘 바방기다 장군에게 서아프리카 각국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의 중재로 INPEL과의 동맹협의에 나서, 몬로비아의 ECOMOG 본부에 부하 90명을 대동하고 방문하러 나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INPEL의 존슨은 도를 붙잡기 위해 도와 대화하고 싶다고 ECOMOG측에 전했다. 이 말은 도에게 전달되어 존슨을 신뢰한 사무엘 도는 ECOMOG 본부에서 존슨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존슨은 사무엘 도의 뒷통수를 쳤다. 그는 사무엘 도를 체포하기 위해 지프차에 무기를 숨기고 부하 20명을 ECOMOG 본부로 보냈다.

ECOMOG 본부에 들어온 INPEL 병사들은 참모본부에 있던 도의 호위병 90명을 모두 죽인 후 도가 있던 참모본부 2층으로 침입했다. 가나 출신인 ECOMOG 사령관인 아놀드 쿠아이노는 저항을 막을 수 없어 도를 INPEL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사무엘 도는 존슨이 기다리던 INPEL 진지로 연행되어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사무엘 도는 필사적으로 대화하고 싶다고 애원했지만 존슨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부하에게 명령하여 새뮤얼 케니언 도의 귀와 코, 손가락을 잘라내는 가혹한 고문을 가한 후에 총살형에 처해버렸다. 이리하여 사무엘 도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사무엘 도가 사망한 후 반테일러의 기치를 내건 만딩고족의 알하지 크로마가 이끄는 무슬림 조직인 라이베리아 민주통일 해방운동(ULIMO)이 무장봉기하여 아모스 소여가 몬로비아만의 대통령이 되었다.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의 군벌 찰스 테일러

‘혁명전선연합(RUF)’의 지도자이자 시에라리온 내전의 전범 포다이 산코

그렇게 끈질긴 내전 끝에 1990년 새뮤얼 케니언 도 대통령이 집권 10년 만에 암살당하고 그 뒤를 이어 아모스 소여의 임시정부가 출범하였지만 내전상황은 정부군과 테일러 측의 갈등으로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찰스 테일러의 NPFL과 존슨의 INPFL은 아모스 소여를 인정하지 않았고 1992년이 되자 라이베리아는 사우어파와 테일러파, 존슨파의 3개 세력으로 나뉘어져 분쟁을 벌이 시작했고 여기에 ULIMO에서 분리된 사무엘 도 대통령 밑에서 일하던 크란족 출신의 루즈벨트 존슨의 ULIMO-J파, 같은 크란족인 크로마파 등의 무장세력이 가세하면서 싸움이 더욱 격렬해졌다. 또 NPFL에는 5세 이상의 "차일드 솔저 유닛"이라 불리는 소년병 부대가 있었으며, 다른 무장세력도 동일한 소년병이 있었다. 또 찰스 테일러는 인접국인 시에라리온의 반란군 혁명통일전선(RUF)의 리더인 아흐메드 포다이 산코와 연대하여 NPEL은 국경을 넘어 시에라리온에서 RUF와 함께 전투를 벌여 댔다. 1993년에 일시 평화협정에 합의했지만 그 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이후 7년간의 내전끝에 간신히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찰스 테일러대통령에 집권했으나, 이 양반도 곧 독재자가 되어 독재자답게 막장스런 행보를 자랑하였다. 이쯤되면 걍 미국 관할령으로 편입되는게 훨씬 낫긋다

2.3. 찰스 테일러의 집권과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

"그는 우리 아빠를 죽였다.

그는 우리 엄마를 죽였다.

그는 우리 누이와 딸을 강간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투표할 것이다."

- 찰스 테일러가 97년 대통령 선거에 내건 구호 이게 뭔 개소리야!? 뭐긴 개소리지

찰스 테일러가 선거에서 자신이 지면 다시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사실상 공갈 협박을 대놓고 하며 어찌어찌 대통령으로 집권했지만, 라이베리아 내전은 해결되지 못한채 결국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이 터졌고 라이베리아는 개막장 상황이 되어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찰스 테일러 항목을 참조.

찰스 테일러는 집권한 지 1년만에 UN 평화유지군을 추방시켰는데 그 이유는 내전이 끝났으니 평화유지군이 필요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임무 완료를 선언했던 UN은 이의 없이 철수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찰스 테일러의 미친 짓이 시작된다. 1999년 테일러는 시에라리온에 ‘혁명 연합 전선(Revolutionary United Front)’이라는 이름의 무장 집단을 조직하여 시에라리온 내전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여기에 찰스 테일러는 라이베리아 전사들을 이 혁명 연합 전선에 보내서 용병으로 참여하게 하여 시에라리온의 도시를 파괴하고, 약탈하거나 민간인 살해를 자행했는데 이 일들을 벌인 이유는 테일러가 시에라리온 내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기 위한 것이였다. 물론 반군을 훈련시키고 지원하는 데에도 역시 다이아몬드 밀무역을 통해 얻은 자금이 투입되었다.

한편 대통령이 된 찰스 테일러가 대통령이 된 이후 공권력을 이용해서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정적을 탄압하는 폭압정치를 펼치자, 사무엘 도랑 다를 바가 없다며 찰스 테일러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져 갔고, 무엇보다도 찰스 테일러가 시에라리온 내전에까지 개입하며 무자비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자 국제사회에서도 그에 대한 비난여론이 갈수록 거세져갔다. 결국 라이베리아 내 불만세력들이 2000년 2월에 시에라 리온에서 ‘화해와 민주주의를 위한 라이베리아인 연합(Liberians United for Reconciliation and Democracy, LURD)’을 결성하며 내전을 재개했는데 이를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시작된 내전은 2001년부터 정부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혀 서서히 찰스 테일러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반군들도 막장이 따로 없어서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 국경지대는 반군에 의한 무자비한 강간과 약탈 그리고 온갖 잔학행위가 벌어지며 황폐화되었다. 한편 반군은 여러 지역을 장악해나가며 2003년에 이르러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까지 공격하였고, 이즈음 새로운 반군집단 ‘라이베리아 민주 운동(Movement for Democracy in Liberia, MODEL)’이 출현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이에 2003년 6월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다시 내전이 일어났고 LURD는 몬로비아에 대한 무차별 포격을 감행해 1천여 명이 사망하고 45만 여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특히 2002년과 2003년에 벌어진 2차 라이베리아 내전은 가장 치열한 상황으로 전개되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수많은 아이들에게 마약을 주고 총을 쏘게 하였고, 반군들은 길에서 눈에 띄는 대로 사람들을 사살했다. 정부군 혹은 반군이 되어도 같은 편이 아니면 언젠가는 총을 겨누기 때문에 내전에 참여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다 죽였다. 내전 중반군이 항구를 점령하면서 도시로 양식이 반입되는 것을 막아 몬로비아 시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고, 차와 설탕으로 끼니를 때웠다. 찰스 테일러가 몰락하기 전인 2003년에는 의사회 본부에서 보내 온 구호품을 통째로 약탈당하고, 임시로 지은 진료소에서 쫓겨나는 일은 다반사였으며, 진료소에는 늘 환자와 강간으로 인해 생긴 사생아가 넘쳐 화장실은커녕 전염병 환자 격리실도 마련할 공간이 없었으며 한 의사는 “유산탄에 등을 맞은 사람이 사지를 모두 잃은 채 실려와서는 이미 숨진 나머지 가족들을 애타게 찾을때가 가장 가슴 아팠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내전이 격화되자 UN은 반군들이 항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고, 반군은 테일러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기 때문에 끝판왕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찰스 테일러에게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고 여러가지 제제조치들이 가해지자 찰스 테일러나이지리아로 망명하면서 라이베리아 내전은 막을 내렸다. 찰스 테일러가 2003년 8월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악당의 18번 대사를 연설한 후 라이베리아 대통령직은 모세스 블라가 승계를 하기는 했지만 반군이 이미 수도인 몬로비아를 공격하였고 결국 반군들의 공격으로 찰스 테일러 정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UN에서 라이베리아에 5만여 명의 인력을 파견해 국가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1989년부터 2003년까지 15년의 내전이 끝났다. 2003년 10월에 미국이 동원한 서아프리 연합군 3500명이 치안을 담당하면서 라이베리아 정권을 앞으로 책임지는 위원회를 만들고 브라이언트를 의장으로 세웠다. 브라이언트 의장은 미국과 UN의 절대적인 지시와 후원하에서 여러 종파들이 지금까지 친미 흑인 정권과 싸운 반정부 게릴라 10만명 이상의 반군들에 대하여 무장해제를 강행하여 성공했다. 2005년 10월 11일 UN과 서아프리카 연합군의 평화유지 활동에 힘입어 드디어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존슨 설리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내전은 끝났지만 내전에서 벌어진 잔학행위는 처참하기 짝이 없다. 이 내전에서 약 1백만 명 가량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전투의 진행에 따라서 이웃나라인 시에라리온, 코트디부아르를 전전하며 피난을 해야했지만 문제는 시에라리온과 코트디부아르 이 두 나라 또한 모두 내전에 휩싸인 상태기 때문에 정착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였다, 게다가 국제단체의 구호물자는 무장집단에 의해 약탈당하는 탓에 제대로 된 지원이 되지 않았으며, 정부군이고 반군이고 할 것 없이 자기측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은 부역자로 몰아 살해하고, 고작 10살이 된 어린이까지 징집해 무기를 쥐어주고 전선에 투입시켰다. 민간인에 대한 강간은 물론이고 젊은 여성이나 소녀들을 납치하여 성노예로 끌고 다녔는데, 이런 식으로 라이베리아 내전에 투입된 청소년들이 유니세프가 추산하기로는 전체 청소년 인구의 10%, 강간으로 양산된 사생아들이 1% 였다고 한다. 특히 반군들은 UN군 배치를 앞두고 마지막 기회라며 대대적인 약탈과 징병, 살해, 강간 등을 자행하였다. 고문과 납치도 행해졌다 또한 라이베리아 정부군은 이웃 시에라리온 국민들까지 납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혐의로 찰스 테일러시에라리온 내전 당시에 반군을 도와준 혐의로 기소되어 UN 국제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결국 형이 확정되었다.

2.4. 이후

엘런 존슨 설리프(Ellen Johnson-Sirleaf, 1938년 10월 29일 ~ ) (80세)

라이베리아는 2006년 중도 자유주의 성향인 통일당(Unity Party) 소속 엘런 존슨 설리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아프리카의 첫 여성 대통령인 설리프는 기초교육 보급, 평화 정착 등의 성과를 낸 공로로 201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 재선에 성공했다. 물론 내전으로 인해 GDP는 여전히 세계 최하위에 워낙 장기간에 걸친 내전의 결과로 국가가 피폐해지고 사회적 손실이 막대한데다 지역 여성단체에 따르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현재도 심각한 상태로 매춘을 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많다. 게다가 부룬디처럼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버티는 일부 집단들이 다시 들고일어날 가능성도 있어서 아직은 갈길이 멀다.

실제로 2007년 3월 설리프 정부는 정부기금을 횡령한 혐의로 과도정부 대통령 브라이언트를 체포하여 기소했으며, 2007년 7월 17일 브라이언트 과도정부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조지 쿠쿠(George Koukou)와 사무엘 도 정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찰스 줄루(Charles Julue)를 중심으로 한 전직 장교들의 쿠데타 기도가 있었으나 사전에 적발되어 실패했다. 여담으로 찰스 줄루는 1994년에도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ECOMOG에 의해 진압된 적이 있다.

한편, 엘런 존슨 설리프는 대통령 임기를 2번 연임하며 12년 임기를 모두 채웠다. 이후 유럽에서 축구 선수로 활약한 바 있는, 지난 대선에서 엘런 존슨 설리프에게 패한 조지 웨아가 2017년 10월 10일 치뤄진 대선에 출마했고, 스포츠 스타의 명성 등에 힘입어 1차 투표에서 39.0%를 받아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그런데 문제는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로 전직 독재자 찰스 테일러의 전 부인을 선택하고(...) 옥중의 찰스 테일러 본인과도 통화해서 논란이 되었다.# 실제 선거에서 찰스 테일러의 정당이었던 극우 국민애국당과 연합을 해서 이겼는데, 조지 웨아 본인부터가 우파 진영 소속이라 이쪽 지지자들의 기반을 다지려는 목적인듯. 징글징글하게 떨어지지 않는 찰스 테일러의 유산

하여튼 이러저러한 논란 끝에 조지 웨아는 결선 투표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18년 1월 22일에 취임했다.# 그리고 찰스 테일러의 전 부인 쥬얼 하워드 역시 부통령이 되었다.(...) 전 부인이라고 보기도 뭐한게, 찰스 테일러“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면, 내 전 부인 쥬얼 하워드 테일러에게 투표하라. 쥬얼이 당선되면 나도 감옥에서 나갈 수 있다”라는 개드립음성을 녹음해 뿌릴만큼 그녀를 정치적 동지로 여기고 있으며, 덕분에 그의 근거지인 '봉 카운티'에서 쥬얼 하워드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될 만큼 찰스 테일러의 대리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때문에 그와 그녀의 세력을 흡수한 조지 웨아 역시 찰스 테일러에게 포섭되어 라이베리아 정치에 다시 찰스 테일러가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2019년 6월 7일 조지 웨아 정권의 경제 부진과 고물가에 항의하는 시위가 몬로비아에서 발생했다.#

3.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

라이베리아 내전이 끝나고 라이베리아에서는 전쟁범죄를 심판하자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세워졌지만 처벌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범죄 조사 임무만 부여받았고, 집단살해 등 국제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재판소가 창설된 2002년 이후 사건에 대해서만 관할권을 갖고 있다. 또한 라이베리아에서는 르완다, 캄보디아,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처럼 국제재판소가 설립되지도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만약 처벌을 한다면 모든 사람이 살인으로 기소받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극악무도한데다 교화가능성도 전혀 없는 사람 빼고는 사회차원의 제재 및 교정으로 끝내자고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악명높은 찰스 테일러 및 소수의 전범만 처벌받고 나머지 사람들은 법적 처벌을 면하고 그냥 잘 살아가고 있다.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에 새뮤얼 케니언 도의 귀를 잘라내 출혈로 죽게 내버려둔 군벌 지도자 프린스 존슨이 상원의석에 앉아 있을 정도로 전쟁범죄에 완전한 면책을 준 게 바로 라이베리아다.

프린스 존슨은 이후 기독교인 목사로 변신했으며, 2005년 선거에서 자신의 지역 기반인 님바 지역에서 상원의원으로 출마해서 선출되기 까지 했다. 특히 그는 2010년 9월 BBC와의 인터뷰에서 "'누구도 자신이 특정인을 고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뻔뻔스러운 개드립을 날렸으며, 자신은 압제적인 체제에 맞서 국민을 해방시키려 싸웠다는 점을 강조하고 다만 내전 기간 주민들이 고통을 입었다면 그에 대해 사과한다고 말하며 별로 잘못한 것이 없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또다른 미치광이 장성 한 명은 한때 수백 명의 민간인을 밧줄로 묶어놓은 채 강물에 빠뜨려 익사시킨 죄가 있었음에도 현재 버젓이 라이베리아의 상원의원을 지내고 있다.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의 반군 지도자 조슈아 밀턴 블라히.

심지어 라이베리아에서 손꼽히는 최악의 학살자가 목회자로 변신하기도 했다.도대체 목사로 받아 준 교단은 어떤 교단인가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 반군 지도자로 2만명 이상을 학살한 조슈아 밀턴 블라히인데, 그는 옷을 다 벗은 채 적에게 돌격을 하기도 해서 이른바 "엉덩이 깐 장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목사로 활동하며 과거 피해자들을 찾아 용서를 구하고 있다. 그런데 기가 막힌 사실은 밀턴 블라히는 자신이 목사가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서기 전에 우리는 보통 술과 마약에 만취가 되어 동네 십대 아이를 희생물로 바치고 이 아이의 피를 들이킨 다음 완전 나체가 되어 형형색색의 가발을 뒤집어쓰고 민간인들로부터 탈취한 핸드백을 들고 다녔다. 우린 길에서 맞닥뜨리는 누구든지 살육했고 이들의 머리를 잘라내어 축구공으로 썼다. 우린 완전히 취해서 벌거벗고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고 살의만 등등했었다. 우리는 수백 명을 살해했다. 사실 몇 명을 죽였는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나? 그러다가 2004년 6월에 하나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하나님은 내가 영웅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그 후부터 나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미친 발언을 일삼으며 자신을 정당화하다가 지난 2008년 1월 15일,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에서는 내전 당시 군벌들의 범죄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진실화해위원회 청문회가 열렸는데, 블라히는 신발부터 바지, 셔츠까지 모두 하얗게 차려입은 채 청문회에 출석했다. 이 청문회에 증거사진들이 제출되었는데 블라히가 이끌던 ‘벌거벗은 엉덩이 연대’의 소년병들이 사람의 심장을 먹고 있는 모습, 거리 교차로를 사람의 뼈로 장식하는 모습, 처녀 소녀들을 윤간하고 있는 모습들이 찍혀 있었다. 블라히는 자신의 나신이 탄환을 보호해준다고 믿어서 소년병들도 신발만 신은 나체로 전투에 임하게 했다. 심지어 조슈아 밀턴 블라히가 사람의 심장을 먹기도 했다는 잔학행위가 드러나기도 했지만 그는 현재까지도 목회자코스프레로 살아가고 있다. 사실 라이베리아 정부가 의도한 측면이 있는게 어지간해선 이런 식으로 죄를 드러내 사회적 응징을 받게 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기사

이렇게 범죄자들이 득시글거림에도 라이베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과거의 비극을 들춰내지 말고 그냥 묻어두자는 여론이 더 강하다고 한다. 심지어 헤이그 재판을 받고 있을 당시의 인물들 가운데 우두머리 격인 찰스 테일러 대통령을 지지하는 간판이 몬로비아 거리 곳곳에 걸려 있고 심지어는 테일러를 사랑하는 모임전사모?이 운영하는 웹사이트까지 만들어졌다. 사실 이 정도의 헬게이트라면 우리가 소위 문명사회에서 배우고 지켜오는 도덕률 자체가 의미를 잃게 되는 아노미현상이 벌어질 법도 하다. 그러니 결국 학살자 니들 때문이다 이를테면 문명사회에서라면 사람 한명을 죽여도 죄책감을 크게 느끼고 자수하거나 PTSD에 시달리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애들도 사람을 킥킥대면서 죽이는 것이다.

또한 찰스 테일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라이베리아에서 전범 재판을 해야 한다면 라이베리아 국민 모두가 피고석에 앉아 있어야 한다.", "우리들 중에 손에 피 묻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냐?"라는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관광시키는 논리를 펼치면서 전범 재판에 반대를 하기도 했다.[9]

흠좀무한 사실은 라이베리아의 많은 가정에서는 강간을 당한 딸을 갖고 있는 동시에 군대에 끌려나가 남의 집 딸을 강간 살해한 아들을 두고 있는 집안이 숱하게 많이 있는 까닭이 있을 정도로 처벌 받을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쉽게 범죄자 처벌을 주장할 수 없는 난감한 처지에 있긴 하다. 그렇게 보면 여성어린이들이 가장 두드러지는, 진정한 피해자인 참극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차피 가해자 본인이 평생 고통받을 테니 법적으로는 가능한 용서하고 잊자는 모양.

나아가서 라이베리아 역시 칠레 같은 다른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확산은 커녕 자국의 이익만 따져가며 필요에 따라 독재자나 전범들도 지원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1973년 칠레 쿠데타 당시 미국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지원했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 정치인들이 하급 전범으로라도 처벌받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라이베리아의 반군 사령관 출신 인사가 이례적으로 스위스에서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4. 경제

오랫동안 내전의 아픔에 시달려 경제 망했어요가 된 나라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제2위의 선박보유국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단, 이 중 외국 소유 선박이 90%, 아니 99%가 넘는다.(...) 그냥 연안 어업용 통통배를 빼면 전부 다 외국 선박들이라고 보면 된다. 외국 소유 선박이 라이베리아 선적으로 등록하는 이유는 세금이 싸고 규제가 약하니까. 편의치적(FOC) 목적으로 등록하는 것이다. 참고로 선박 보유 1위는 파나마이며 역시 같은 이유로 외국 선박이 잔뜩 등록되어 있다. 가끔씩 국내 뉴스 선박 관련 사고를 보면 한국 영해에서 파나마 선적 **호가 라이베리아 선적 **호와 충돌했다 이런 기사를 보게 되는데, 뜬금없이 이역만리 먼 나라의 배들이 왜 한국 영해에 있나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게 다 이런 이유 때문.

미국, 미얀마와 함께 미터법 단위계 같은 것을 쓰지 않는 나라다. 오죽하면 이 문제로 미터법 좀 쓰라고 해외에서 봉사까지 오겠나(…). 물론 이는 미국의 강한 영향력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과 깊은 우호관게를 맺음에도 라이베리아가 아프리카에서도 그리 큰 나라가 아니라서 지원금이 그렇게 많은건 아니고 부패문제도 걸려있기도 하며, 세계에서 제2위의 선박보유국 타이틀을 달고있음에도 인구가 별로 많지 않은데다가 자원이 많음에도 오랜 내전의 여파로 산업은 낙후되었으며 제대로 된 기업도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라이베리아는 전세계 실업률의 하드캐리(...)를 담당하는 곳이며, 실업률 통계가 보통 실제 실업 문제를 축소화해서 나타내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액면적인 실업률 자체가 70%에 인접하는 곳이었다. 2008년발 경제위기로 아프리카까지 영향을 받게 되자 라이베리아의 실업률이 곧 70%의 장막을 뛰어넘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는데...

결국 2011년에 CIA에서는 라이베리아의 실업률이 70%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했다.이 정도 단계에서는 실업률 통계가 실질적 의미를 거의 상실할 정도가 된다. 고용 창출을 논하기 이전에 이미 정부는 그냥 호구가 된 지 오래다. 거기다 암시장의 활성화 등으로 완벽한 헬게이트가 열려있기 때문에 이 정도 단계에선 정확한 수치를 내는 것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이다.

5. 문화

애초에 건국 자체가 미국에서 온 해방노예들 주도로 이루워지다보니 문화에 있어서도 미국의 영향이 지대하다. 다만 마냥 미국의 영향만 받은건 아니고 해방노예가 도착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전통문화도 어느정도 보존되어있으며 서로 공존하고 있다.

5.1. 스포츠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장비상의 애로사항으로 인해서 미식축구와 야구는 인기가 별로 없고 주로 축구와 농구가 인기가 많다. AC 밀란첼시 FC에서 뛰었던 전설적인 축구선수 조지 웨아(George Weah)가 이 나라 출신이다. 조지 웨아는 누구보다 테일러 독재에 항거하였던 인물인데다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그리고, 2017년 대권에 다시 재도전하면서 11월 25일까지 2차 결선투표의 결과를 기다린다고 한다. 그리고, 2017년 12월 28일 2차 결선투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자신이 사비까지 들여가면서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FIFA 월드컵에도 도전했으나 2002년 한일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나이지리아에게 승점 단 1점 차이로 밀려서 아깝게 탈락했던 적도 있다. 이 나라의 축구에 대한 자세한 건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조.

2018년 K리그 2 소속의 안산 그리너스 FC가 이 국가 출신의 공격수인 세쿠 코네를 영입했다.

6. 외교 관계

6.1.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는 1964년 수교하여 주한(駐韓) 나이지리아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으며 북한과는 1973년에 수교하였으나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터지면서 1988년 단교하였다. 최근(2018년)에 KT는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에 해양수산부와 함께 서부아프리카 통합 IUU 어업 감시 시스템 구축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레소토, 보츠와나, 에스와티니, 세네갈, 감비아 등과 함께 한국인이 비자 없이 무비자로 갈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의 6개국들중 하나다. 체류기간은 약 90일. 하지만 나라 꼴이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된 같은 아프리카 대륙의 소말리아 못지 않게 치안이나 위생 상황이 워낙 위험해서 같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무비자 국가인 남아공이나 레소토, 에스와티니, 보츠와나 등과 달리 한국인들도 여행을 오지 않는다.[10] 그나마 남아공이나 레소토, 에스와티니, 보츠와나는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 등지에서 이 국가들로 여행 갔던 한국인 네티즌들의 여행담이 많이 나오기라도 하지만 라이베리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관광목적으로 이 나라를 갔다 온 사람들의 여행담조차 없었다. 결국 난민 문제 등으로 인해 2019년 7월 18일부로 상호 사증면제협정이 정지되었다.#

6.2. 사생아 문제

현지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에 의한 성매매 및 성폭행 등에 의한 사생아 문제가 있다. 나라망신 시사IN의 기사에 따르면 라이베리아에도 한국인 생부를 둔 혼혈인들이 있다. 물론 백인 혼혈인보단 적은 편인데 이는 이 나라에 일하러 오는 미국인, 영국인, 독일인,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등이 워낙 많아서이다. 참고로 이 나라 인구의 3%는 레바논에서 온 아랍인 이주민들이며 고문 자격으로 여기저기에 미국 출신 백인들이 많이 와 있다.

문제는 미국계나 독일계, 레바논계, 스페인계 등 백인 혼혈인들과 달리 한국 혼혈인들은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 미국계나 독일계의 경우 생부가 책임을 지려고 하는 한편, 한국인 생부들은 생모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한국으로 도망가서 연락을 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11] 어떤 여인은 생부를 찾으러 딸아이를 데리고 한국을 찾기까지 했다.[12] 기사 참조: 검은 대륙에 버려진 한국의 핏줄

한국의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사람이 있다면, 라이베리아의 한국계 사생아인 심제프. 이쪽은 40대 중년 한국인 노동자가 15세밖에 안된 현지인 소녀를 강간하고 심제프가 태어났지만 일절 책임지지도 않은 채 본국으로 내빼는 바람에... 찾아내자

7. 라이베리아의 현 상황

라이베리아는 20여년에 걸친 내전을 거쳐 2006년 민선 대통령의 취임 이후 정치적으로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으나, 경제적으로는 처참하기 짝이 없으며 공권력과 치안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 현재 국가 경찰의 재편 및 능력 향상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어 치안유지는 거의 전적으로 UN 평화유지군(UNMIL)에 의존하고 있으나, UN에 의한 민생 치안 유지에도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생계형 범죄가 빈민가를 중심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강도강간과 같은 강력범죄가 매우 심각하며 백인을 비롯한 외국인 여인들이 강간을 당해 임신하는 경우가 잦으며 범죄자들은 총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특히 택시안에서 강도를 당하는 사례가 많은데, 특히 다른 승객이 먼저 타고 있는 경우에는 운전자와 승객이 강도 공범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타지 말아야 한다.

아직도 아메리카 라이베리아인과 원주민, 원주민 종족 사이의 갈등과 반목은 종종 집단간의 충돌로 나타나 폭동과 인민재판이 벌어지거나 관공서를 습격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높은 청년층 실업률과 라이베리아의 주수입원인 고무농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폭동 그리고 국가 행정력의 부재를 이유로 불법적인 자원을 팔아넘기거나 마약을 거래하는 범죄의 증가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약 7,200명에 이르는 전직 정부군의 군인과 무장단체 전투원의 사회복귀도 상당히 해결이 어려워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8. 여행 정보

라이베리아 입국 시에는 황열병 예방접종 여부를 확인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여행 전 접종이 필요하다. 라이베리아 내 모든 의료시설은 매우 열악하기 짝이 없고, 의료시설에서 보관하고 있는 혈액은 매우 위험해서 절대로 혈액을 이용한 치료를 하면 안 되며[13] 약품 재고도 거의 없어서 여행할 때에는 비상약품을 반드시 휴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부상이라도 당할 경우 의료 후송기를 이용해 스페인이나 아랍에미리트로 후송해야 한다.

또한 말라리아 위험지역이기 때문에 말라리아 억제약을 복용하면 발병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장티푸스콜레라 등의 전염병이 만연하기 때문에 반드시 음식물을 익혀서 먹고 위생에 주의해야 하며, 식수는 병으로 판매되는 물만 사용하는 것이 권고된다고.

2014년 기준 전 지역이 "철수권고" 등급이다. 외교부의 등급 중 두번째로 위험한 등급. 긴급 용무가 아니면 귀국 /가급적 여행취소하라는 뜻이다. 현재 에볼라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국경이 폐쇄되어 있다. 2014 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을 참고할 것.

2015년 5월에는 에볼라 주요 발병국 기니, 시에라리온과 달리 WHO에서 에볼라 종식 선언(에볼라 프리)을 하여 특별여행주의보가 해제되고 철수권고로 바뀌었다.

에볼라 환자가 추가 발생하어 2015년 9월에 다시 종식선언을 했지만, 다시 2015년 11월 22일 현재 3명의 감염자 추가발생으로 당분간의 종식선언은 힘들 듯 보였다. 하지만 WHO는 2016년 1월 12일에 라이베리아의 에볼라 종식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다가 종식선언한지 하루만에 다시 에볼라 환자가 발생하였다.#

2018년 10월 29일 외교부는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의 경보를 3단계에서 2단계로 하향조정했다.#


  1. [1] 발롱도르를 수상한 축구선수 조지 웨아가 맞다. 현역 은퇴 이후 정계 진출을 하였다.
  2. [2]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생기게 만든 라이베리아의 전 독재자 찰스 테일러의 부인이다.
  3. [3] 이 도시 이름은 미국의 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으로, 라이베리아 자체가 제임스 먼로 덕분에 풀려난 노예들에 의해 건설된 나라이다.
  4. [4] http://www.0404.go.kr/dev/country_view.mofa?idx=&hash=%23LBR&chkvalue=no2&stext=&group_idx=7&alert_level=0
  5. [5]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많은 열강들이 미국과의 충돌을 우려해 라이베리아를 식민지로 삼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보면 빽도 없이 자력으로 나라를 보존해낸(물론 이태리한테 잠깐 지배당한 적이 있긴 한데 이것도 통치 주체가 애매해서 학자에 따라선 식민지배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에티오피아의 임팩트가 좀 더 커보이긴 하지만.
  6. [6] 첨언하자면 이런 노력과 관계 없이 미국 내의 흑인 노예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흑인의 라이베리아 이주안도 일시기를 제외하고는 어영부영 무위로 돌아갔으며, 남북 대립을 막는데는 어떠한 효과도 없었다. 거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세워졌던 반투스탄 미승인국들과 같은 아이디어였다.
  7. [7] 다만 배워왔다고 보기도 뭐한게, 유럽노예상들은 현지에서 노예를 주로 토착부족에게 구매해왔지 직접 생포한 경우는 잘 없었다. 오히려 전통(?)이라면 전통이라고도 볼 수 있는 점. 걍 둘 다 쓰레기. 그리고 흑인 원주민들이라고 다들 순수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던게, 되레 순진하거나 약간 지능이 떨어지는 장애인삘 미국계 해방노예들을 속여서 다시 노예로 팔아버리는 케이스도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개막장.
  8. [8] 1985년의 쿠데타에 참가하여 사건 후 코트디부아르로 망명.
  9. [9] 물론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살기 위해 정당방위긴급피난으로 하는 행위와 학살급의 행위는 급이 다르다. 나아가서 실제로 전쟁터에서 강간 살해를 저지른 일반 병사들은 정당방위나 긴급피난과는 관계없는 흉악범죄를 저지른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범들과 급이 같은 것은 아니다. 정 모두를 처벌하는게 무리이면 각자 지은 죄에서 10년씩 까고 처벌받든가 그럼 경(?)범죄를 저지른 대부분의 국민들은 생업에 계속 종사하겠지
  10. [10]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에스와티니, 레소토, 보츠와나도 치안이나 보건 상태가 나쁜 곳들도 많이 있지만 관광업이 국가 외화 벌이의 주요 산업인데다 해당 국가 정부에서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치안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편이기 때문에 라이베리아보다는 꽤 나은 편이다.
  11. [11] 물론 어디까지나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이는 필리핀 등지에서도 마찬가지.
  12. [12] 해당 케이스의 경우에는 여성이 대학까지 다녔던 인텔리였기에 가능했다. 참고로 1995년 당시 라이베리아 여성의 문해율(읽고 쓸 줄 아는)은 22.4%.
  13. [13] AIDS에볼라가 둘 다 이 나라에서 발생했으며, 혈액은행 내에 보관된 현지인 혈액들은 이 바이러스들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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