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맥나마라

Robert Strange McNamara

(1916년 6월 9일 ~ 2009년 7월 6일)

1. 개요
2. 젊은 시절
3. 포드의 중흥
4. 국방장관 재임기
4.1. 펜타곤의 개혁
4.2. 유연반응전략의 도입
4.3. 쿠바 미사일 위기의 극복
4.4. 베트남 전쟁의 실패
5. 세계은행 총재
6. 만년
7. 대중 문화에서

1. 개요

미국의 前 국방부 장관이자 기업 경영인으로, 살짝 과장하자면 마치 21세기 미국 국방장관 하면 그 분부터 떠오르듯이 냉전시대, 특히 베트남 전쟁기를 대표하는 미국 국방장관이다. 또한 포드 재직 시절의 업적 등으로 인해 합리적인 경영의 귀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라 기업경영을 연구하는 이들도 맥나마라의 경영철학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2. 젊은 시절

191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존 F. 케네디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할아버지 대에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미국 매사추세츠, 다시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가문. 미들네임은 어머니의 성이다.

1937년 UC 버클리를 졸업하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MBA를 거친 뒤 고향에서 회계사로 일하다가 하버드로 돌아가 최연소 겸 최고연봉(...) 조교수로 근무했다. 주요 업무는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장교들에게 경영학적 분석기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1943년 아예 육군 항공대 대위로 임관하여 통계분석에 나섰다.

직접 전투기나 폭격기를 조종하거나 하는 임무는 아니었지만 맥나마라는 이 시기 육군 항공대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에게 군에서 맡긴 업무는 폭격기 부대의 공습에 있어 효율성을 분석하는 것이었고, 맥나마라는 폭격기 부대에 만연하던 비효율성의 해결을 추진하였다. 결국 맥나마라는 B-17 대신 B-29를 만들기 시작해서 그냥 많이 만들자는 주장을 하여 커티스 르메이의 폭격부대가 열도를 석기시대로 보내버리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에 일조했다. 폭격부대가 유럽과 일본에서 불벼락을 내리는 데에 있어서는 맥나마라의 날카로운 분석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후방에서 펜대만 굴릴 것 같은 非조종 장교로서는 이례적으로 1946년 공로 훈장(Legion of Merit)을 받고 중령으로 전역했다. 비교적 짧은 군생활이었지만 미국이 총력전에 나서던 시기에 군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접한 이 때의 경험은 훗날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그가 추진한 미국의 국방과 안보 정책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3. 포드의 중흥

1946년 전역한 맥나마라는 처음에는 하버드 대학으로 돌아가 연구활동을 하려 했으나, 친구의 권유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포드에 입사하였다. 그 당시 포드의 고위관리자 1000명 중 대졸자는 10명에 불과하였으므로, 포드는 지식을 갖춘 전문 경영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군에서 만난 텍스 손튼이 주도한 10명의 통계분석팀의 일원으로 포드에 입사 원서를 냈고 시험[1]을 거쳤다. 맥나마라의 증언에 의하면 이 10명의 일원들은 역대 최고점수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헨리 포드 2세는 이들 전원을 채용했다.

그리고 맥나마라는 업계에서 침체에 빠져 있던 포드를 구시대적인 기업 구조 차원에서부터 싹 뜯어고치기 시작했고, 그 개혁은 성공하여 이들은 Whiz Kids로 불렸다. 또한 마케팅 면에서도 개혁을 일으켰는데, 1950년대에 주력으로 삼았지만 쓸데없이 부담스러운 포드 링컨 시리즈 대신 작지만 생산비가 저렴하여 가격 경쟁에 유리한 포드 팰컨 세단을 히트작으로 키워냈고, 링컨 컨티넨탈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또한 오늘날의 자동차들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필수요소를 상용화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안전벨트. .

이렇게 포드의 중흥을 이끈 맥나마라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1960년 11월에는 44세의 나이에 포드 가문 外 인사로는 최초로 사장까지 올랐다. 그리고 사장이 되자마자 한달만에 사장을 그만두게 되는데...

4. 국방장관 재임기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그렇게 사장까지 올랐던 맥나마라에게 사장 취임 한 달만에 뜻밖의 제의를 받는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이을 대통령 당선자인 민주당 출신 존 F. 케네디가 차기 행정부 인선에서 그를 국방장관으로 앉히려 한 것.[2] JFK의 이런 제안을 받고 이어진 면접에서 맥나마라는 질문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온갖 질문을 던져가며 JFK와 설전을 벌였다.[3] JFK는 그를 등신 같지만 멋있다는듯이 국방장관으로 확정했고, 매우 신임하여 단순한 국방에만 치우치지 않은, 경제 정책 등에 대해서도 그에게 많은 조언을 구했다.

또한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역시 그와 매우 친한 사이가 되어 당초 공화당을 지지했던 맥나마라임에도 민주당의 RFK가 이후 대선행보에 나설 때 지원을 했으며 1968년 6월 RFK마저 사망한 후에는 관을 운구하기도 했다.

4.1. 펜타곤의 개혁

맥나마라가 국방성에 부임하기 전부터, 미국에서는 소련과의 체제경쟁이 점입가경으로 치닫자 온갖 초현실적인 돈지랄이 판을 쳤다. 1950년대부터 소련에서는 차르 봄바를 만들지 않나, 미국도 캐슬 브라보 핵실험과 B41 등을 만들지 않나, 핵 만능주의미사일 만능주의가 판을 치며 세계대전기 이후 조종사들의 기량 발전이 지체되지 않나... 핵 만능주의 항목에 언급되는 대인배들이 넘쳐나던 그 시절이 바로 이 시기였다. 맥나마라는 2차 대전 시절부터 갖가지 홍보와 프로파간다에 가려진 미군의 비효율적인 면모를 접했고, 소련과의 격돌을 대비한다는 미명 하에 국민 세금 쓰기를 무서워할 줄 모르는 군을 두고 보지 않았다. 맥나마라의 눈에 그것은 문자 그대로 빈 수레가 요란한 돈지랄이었다. 그런 상황에 미사일 위기로 홍역을 겪은 뒤, 맥나마라는 군 개혁에 나섰다. 안보를 위해 돈을 써야 한다는 핑계로 군이 많이 가져가는 예산을 줄이기 위해(즉 가격 대 성능비라는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 우선 쓸데없이 복잡해서 행정적인 비용부터 펑펑 새어나가던 군용기의 명명규칙부터 통일했다. 그 결과 F2H 밴시, F9F 팬서 같은 이름들은 공군과 유사한 방식으로 명명규칙이 통합되며 추억 돋는 이름이 되었다. 그런데 공군은 자기네 식으로 통일시켜줬는데도 해군과 놀기 싫다며 F-110 스펙터라는 이름을 쓰려고 했지

그리고 해군과 공군이 같은 항공기를 운용하기 싫어하는 현상도 국방예산 낭비의 원인에 속한다고 보고 해/공군 통합 전투기 개발에 착수, F-111, F-4가 나왔고, F-111은 흥하지 못했지만 F-4는 해군과 공군이 모두 나름대로 오랫동안 잘 써먹었고 외국에도 많이 팔아먹었다. 이를 계승한 것이 21세기의 F-35라고 할 수 있...는데...

또한 인종차별이 철폐되었다고는 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처럼 인종구별이 성행했던 미군의 구조에서 실질적인 인종 통합을 꾀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1960년대와 그 이후 미군의 각종 정책에 있어 이런 가성비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개념은 기본 중의 기본으로 자리잡았다. 나무위키만 해도 냉전 시대 미국의 안보 정책이나 무기 개발에 관해 찾아보면 맥나마라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판. 1970년대에 미 해군의 엘모 줌왈트가 추진했던 확장성 좋고 많이 찍어낼 수 있는 대규모 수상함대의 개념 역시 가성비라는 것을 크게 염두에 둔 것인데 맥나마라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국방정책을 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4.2. 유연반응전략의 도입

냉전 초기인 1950년대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의 미국은 소련의 거대한 재래식 군사력으로부터 서유럽을 방어하기 위해, 어떠한 재래식 침공이든 핵무기를 통해 억지, 제압한다는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 전략을 표방했다. 소련이 1949년 핵무기를 개발하긴 했지만 양적, 질적으로 여전히 미국이 우세였고, 특히 미국 본토가 여전히 핵공격으로부터 안전지대에 있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핵 만능주의와 다양한 전술핵무기 개발, 배치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

하지만 1950년대 말 스푸트니크 위성의 발사 성공으로 소련이 ICBM을 통해 미국을 직접 공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대량보복 개념의 핵전략은 수정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에 맥나마라는 소련의 침공에 처음부터 핵무기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재래식 무기를 1차적으로 동원하면서, 이후 확전 여부에 따라 유럽 전장을 대상으로 하는 전술핵무기, 그리고 소련을 직접 겨냥하는 전략핵무기 순서로 대응하는 새로운 전략을 제시했다. 이를 '유연반응'(flexible response) 전략이라고 한다.

맥나마라의 유연반응전략에 따라 미국은 폭격기 중심이었던 기존의 핵전력을 지상 배치 ICBM, 원자력 잠수함에서 탑재, 발사되는 SLBM으로 구성되는 제2격 보복능력 중심으로 재편하기 시작했다. 미니트맨, 폴라리스가 이때의 작품. 이후 1970년대에 소련도 비슷한 구조의 핵 반격능력을 갖추면서 미소 양국간의 상호확증파괴(MAD)가 성립될 때까지, 유연반응전략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미국의 핵전략으로 지속되었다.

4.3. 쿠바 미사일 위기의 극복

그가 재임한 기간은 인류 멸망, 제3차 세계대전이 코앞에 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초창기부터 CIA가 추진해서 장렬히 말아먹은 피그만 침공 등의 여러 흠좀무한 사건사고가 있었고, 휘하에 있는 국방부도 노스우즈 작전 같은 짓에 참여하려고 각을 잡고 있었으니 당시 고위급 장군들의 상당수는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4]. 6.25 전쟁 정전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발발한 1차 인도차이나 전쟁막장 베트남 공화국 정부의 부패로 더 이상 방관만 할 수는 없는(그러나 어떻게 손을 대보기도 곤란한) 골칫거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피그만에서의 삽질의 여파로 1962년 10월이 찾아왔고, 세계 유이한 초강대국의 수뇌부가 모두 멘붕으로 치닫는 와중에 맥나마라는 클라우제비츠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말을 중히 여기며 저 미사일들은 군사적 위협이 아니라 정치적인 위협이라고 주장, 군사적인 대응(쿠바 공습!)을 주장하던 NSC의 ExCom 위원들 사이에서 확전을 반대하고 쿠바 영해 봉쇄를 주장했다. 그 와중에도 전군을 준전시태세로 대기시키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라디오로 주장하던 터키의 중거리 탄도탄 전력 철수를 받아들이는 대신,[5] 그 동네에는 막 개발된 SLBM 폴라리스를 보내자는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으며 매파의 목소리가 컸던 ExCom과 합참을 휘어잡는 리더십을 발휘, 제3차 세계대전으로 치닫던 인류사의 흐름이 빗나가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4.4. 베트남 전쟁의 실패

우리는 베트남에서 이기고 있습니다. 믿어주세요~!

하지만 맥나마라는 JFK의 사망 이후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자신 스스로 훗날 후회할 결정을 내렸다. 사실 오늘날 맥나마라에 대한 까임거리는 8할 이상이 베트남 전쟁에 관한 것이며, 이는 맥나마라의 흑역사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남베트남이 상상 이상의 막장이었음을 알고도 도미노 이론에 지레 겁먹어서 통킹만 사건같은 작은 일에 들어오기는 쉬워도 나가는 것은 어려운 전쟁으로의 본격적인 개입에 나섰고, 돈만 쳐들이고 효과는 미미했던 북폭은 역사가들이 훗날 그에 대한 평가를 낮게 보는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맥나마라도 초창기에는 베트남 전쟁 개입을 반대하다가 결국 찬성 쪽으로 돌아섰는데, 계속해서 돈은 쳐들이는데 효과가 없으니 전면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피력하려 했지만, 린든 B. 존슨 행정부에서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6] 줄창 불벼락을 내려댔다. 단적으로 공산권에서 계속 들어오던 전쟁수행 물자나 각지에 산개한 북베트남 산업시설의 분포도만 봐도 하노이 핫으로 북베트남의 전쟁수행 능력을 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LBJ 행정부에서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줄어들었고, 1968년 2월 29일 클라크 클리퍼드에게 바통을 넘기며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말년에 사이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7년의 재임기간은 역대 미 국방장관 중 최장기 집권이었으며, 퇴임하며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맥나마라가 유일하게 건진 긍정적인 성과는 M14를 제식 소총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M16 소총을 도입한 것이다. 국방장관 재임 당시 사사건건 의견이 충돌했던 커티스 르메이와 의견이 일치한 유일한 안건이었다.

5. 세계은행 총재

퇴임 후 그는 세계은행 총재에 올랐고, 베트남 개입을 고집하던 LBJ 대신 RFK를 지지하며 LBJ와 거리를 두려 했지만 RFK가 갑작스레 암살당하고 리처드 닉슨이 집권하며 정계와의 인연은 끊어졌다. 대신 그는 세계은행 총재로서 그는 부의 불평등 해소와 문맹 퇴치, 교육, 보건 등 빈민 구제가 우선임을 역설, 투자와 고도성장을 우선시하던 기존 세계은행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1981년까지 오랫동안 재임하였지만 함께 문맹 퇴치 운동을 하던 아내 마거렛 크레이그와 사별하고 급격히 쇠약해지며 은퇴하였다.

6. 만년

은퇴 후에는 베트남 전쟁기 북베트남의 명장 보응우옌잡 장군과 회동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미국 현대사의 가장 큰 이슈였던 핵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에서 얻은 교훈으로 반전/반핵 운동에 투신하였다.

2003년에는 에롤 모리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전장의 안개(원제: Fog of War.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작품상 수상)에서 출연하여 1960년대의 그 시절을 돌아봤고, 2009년 버지니아워싱턴 D.C.에서 타계하여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7. 대중 문화에서

HBO가 2002년 제작한 베트남전쟁 관련 TV 영화 <전쟁으로 가는 길>(원제: Path to War)에서 알렉 볼드윈이 맥나마라 역으로 출연했다. 싱크로율은 좋은 편.[7]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에서도 국방부 장관으로 등장하는데, 보르쿠타의 지옥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알렉스 메이슨대통령에게 데려간다.

블랙 옵스 좀비 모드에서는 JFK, 피델 카스트로, 리처드 닉슨과 함께 좀비들에게 총질을 한다(...) 좀비 모드 멀티플레이어 팀플레이를 하면 이 4명의 모델링을 가지고 플레이를 하게 된다.

전장의 안개 (원제: Fog of War)라는 에릴 모리스의 2003년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 다큐멘터리 부분 수상을 하였다.


  1. [1] 시험 문항 중에는 "플로리스트와 광부 중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는 문항이 있었는데, 맥나마라는 플로리스트 경험도 있었고 그 일을 좋아하였지만 높은 점수를 위해 광부가 되고 싶다고 거짓 답안을 썼다고 한다...
  2. [2] 원래 케네디는 제 4대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러벳을 재기용하려고 했지만, 오히러 러벳이 맥나마라를 대신 천거했다.
  3. [3] 당초 케네디는 맥나마라가 포드의 사장임을 높이 사 재무장관을 제의했으나 사양하자, 이어 국방장관을 제의했다. 맥나마라가 재차 사양하자 케네디는 "나도 대통령 전문 학교같은 곳을 안나오고도 이렇게 대통령이 되었다"다며 계속 권유했고, 결국 맥나마라도 마지못해 수락했다.
  4. [4] 노스우즈 작전 보고서가 제복군인들의 결제체계는 다 통과해서 맥나마라 앞에 도착했다는 것으로 이 것은 증명이 된다. 문민통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5. [5] 당시 터키에 배치된 중거리 탄도미사일은 이미 기술적으로 노후화되어 있어서 쿠바 미사일 위기 이전부터 미국이 철수를 검토 중이었다. 다만 사건 당시에는 '소련의 압력으로 동맹을 저버렸다'는 지적을 받지 않으려고, 소련의 미사일이 쿠바에서 철수한 지 수개월 후에야 터키의 미사일도 철수했다.
  6. [6] 물론 남베트남이 하도 막장이라 LBJ로서도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긴 했다.
  7. [7] 영화는 린든 존슨이 1964년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부터, 1968년 구정 공세 직후까지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린든 존슨 대통령이 구정공세로 인한 베트남전쟁 수행의 실패를 인정하며 재선을 위한 1968년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는 TV 연설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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