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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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초대 총리

본명

리콴유 (Lee Kuan Yew, 李光耀)

출생

1923년 9월 16일, 싱가포르 캄퐁 자바 가

사망

2015년 3월 23일 (91세), 싱가포르 싱가포르 종합병원

국적

싱가포르

직업

정치인

배우자

과걱추

종교

없음 (불가지론)

정당

인민 행동당

총리
임기

1959년 6월 5일 ~ 1990년 11월 28일 (31년 176일)

학력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 법학

한문

李光耀

병음

Lǐ Guāngyào

객가어 발음

Lí Kông-yeu

한국어

리콴유
이광요

영어

Lee Kuan Yew
Lee Kwan-Yew[1]

"잘못된 지도자는 첫번째 임기에 정권을 망치고, 두번째 임기에 나라를 망친다." - 필리핀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비판하며 리콴유는 첫번째 임기만 32년했다[2]

1. 개요
2. 생애
2.1. 청년기
2.2. 정치 입문
2.3. 원치 않았던 건국의 길
2.4. 싱가포르의 국부
2.5. 사망
3. 평가
3.1. 권위주의적 통치
3.2. 경제성장의 허와 실
3.3. 언론통제
4. 기타
4.1. 한국과의 인연
4.2. 개인적인 일면
5. 주요 행적
6. 관련 문서

1. 개요

싱가포르국부(國父)

그리고 독재자

대한민국박정희 대통령,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권력자 덩샤오핑, 말레이시아마하티르 전 총리와 같은 개발독재자형 정치인이다. 싱가포르의 정치가이자 초대 총리.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를 지낸 뒤,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26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싱가포르를 동남아 제일의 경제강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했으나, 재임기간 중 권위주의적 개발독재정치체제를 확립하여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2. 생애

나는 일생동안 네 나라의 국가(國歌)를 부르며 살아야 했다. 영국의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일본의 ‘기미가요', 말레이시아의 ‘나의 조국’, 그리고 싱가포르의 ‘전진하라 싱가포르'이다.[3]

2.1. 청년기

1923년에 부유한 한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국 광둥성 출신의 객가(客家)[4]로, 중국인, 화교의 후손 중에서도 한족 이주민 집안의 후손인 셈이다. 집안은 사업을 통해 꽤 성공했는데 그 덕분에 리콴유도 좋은 교육과 좋은 가정환경 아래에서 자랐다. 본인의 자서전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리콴유의 모국어는 영어였고 자라면서 사용했던 이름도 해리 였다.[5] 지금도 홍콩 사람들의 경우 앞에 영어 이름을 붙이고 뒤에 중국어 이름을 붙인 일종의 영-중 혼합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6] 리콴유 역시 자라면서 사용했던 이름은 "Harry Lee Kuan Yew"였다.[7] 어쨌든 본인도 열심히 공부했는지 1935년 싱가포르 최고의 명문학교인 래플스 칼리지에 수석 입학했고, 1940년 졸업시험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전체를 통괄(영국령 말레이 연방)해서 최우수 성적을 얻었다. 쉽게 얘기하자면, 영국 식민통치 기간에 형성된 일종의 현지 엘리트 집단의 일원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졸업 직후 한창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시기인 10대 후반인 1941년, 일본군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쳐들와 영국대신 몇년간 주인행세를 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리콴유는 식민지시절 친영주의적인 가족에서 자랐고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부모 밑에서 컸기에, 영국의 싱가포르 통치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장하였다고 한다. 백인이 아시아인을 지배하는 상황은 자연적 이치와도 같다고 생각했는데, 못생기고 이상하게 생긴 일본인들이(자서전에서 서술한 표현 그대로이다.) 무적이어야 할 영국군을 무찌르면서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백인이 항상 강한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에서야 깨달았다고 한다.[8]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 영국군이 싱가포르로 돌아왔지만 싱가포르인들이 영국인을 존경하는 감정은 더이상 전쟁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결국 이 경험이 싱가포르가 더이상 영국에 의지할 수 없고, 독립을 추구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들었다고 소회했다. 일본의 지배하는 동안 대학을 다니는 것은 미룬 채 타피오카를 이용해 만든 스틱파스라는 접착제를 암거래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전쟁이 끝난 뒤 영국으로 유학, 1946년 런던 정경대학교(LSE)에 입학 후 1947년에 케임브릿지 대학교 법학과로 옮겨 Double Starred First라는 엄청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부인인 콰걱추(柯玉芝, 1920~2010)와는 싱가포르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동문으로 영국유학까지 함께 했으며 1950년 결혼하였다. 싱가포르에서 공부하던 시절 리콴유는 최고 영재였는데 자신보다 공부를 잘해서 자신을 2등으로 만든 유일한 학생이 콰걱추였다고한다.[9]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싱가포르로 돌아와 노조와 학생운동 연관된 소송일을 맡게된다. 특히 다양한 인종과 언어, 민족,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싱가포르에서 소송의 합의와 중재를 위해 발로 뛰며 좋은 성과를 얻어냈기 때문에 1950년대 이미 변호사로서 유명해져 싱가포르는 물론 말레이시아에도 알려졌다. 역시 흠좀무. 이 과정에서 영국 식민당국도 리콴유를 주목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덧붙이자면, 리콴유는 케임브릿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 법학과를 졸업 당시 Double Starred First-Class Honours 를 받았다. 영국 대학은 졸업시 학위를 나누는 경우가 많은데, 성적이 높을 경우 따로 우등 표창(Honours)을 주고, 세부적으로 그 표창은 First-Class, Upper-Second, Lower-Second, Third-Class Honours로 나뉜다. 그 중에서도 특출나게 잘난 학생에겐 "Starred First"라는 세부 표창을 주고, 그 이상으로 특출날 경우엔 "Double Starred" 학위를 준다. 한마디로 특-특-특 우등졸업. 식민지 출신이 이정도 성적을 받고 졸업하는데 식민당국이 주목하지 않을리가...

2.2. 정치 입문

1954년 10월 인민행동당(People Action Party, 현 집권 여당)을 창당하고 정치활동을 본격화했다. 인민행동당이 처음 시작되었을 땐 리콴유와 같은 영국 유학파 출신의 인텔리와 노동운동가 중심의 좌익세력이 연합한 정당이었다. 리콴유는 영국에서 교육받은 영어사용자로서 친서방주의자이며 사회민주주의자였고 비공산주의자였다. 리콴유의 출신 배경만 읽어봐도 알겠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은 세력과 손을 잡은 이유는 1. 당시 좌익세력은 굉장한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었고,[10] 2. 대중적인 기반 없이 정치적 성공을 얻을 수 없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초기엔 당내 좌파에 밀려날 뻔도 했지만 이후 불어닥친 반공 바람에 힘입어 리콴유와 당내 우파는 인민행동당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활발한 정치활동으로 리콴유는 점차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 1959년 5월 주민선거에서 PAP가 자치의회 의석 43석 중 41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당수인 리콴유는 자동으로 싱가포르 자치정부 수반에 올랐다.

자치 정부 수반이 되긴 했지만 싱가포르는 너무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리콴유 정부는 이웃 대국인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해서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 공업으로 대성하기에 싱가포르는 자원도, 인구도, 내수시장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를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말레이시아도 리콴유의 명성을 눈여겨 보고 싱가포르를 받아들였지만, 중국계가 압도적인 싱가포르와 싱가포르의 공산주의 운동은 말레이시아에게 위협적으로 보였고, 결국 양자의 갈등이 격화된 끝에 말레이시아는 1965년 8월 일방적으로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했다. 이것도 몇 번이고 늦춰진 것으로 리콴유가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몇백만 명의 시민들을 저버릴 셈이냐고 절규하면서 하도 난리를 쳐서 연기해준 것이다. 이 동안 리콴유 정부는 말레이시아의 싱가포르 축출 결정을 뒤집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고 연방 잔류에 사활을 건 리콴유의 싸움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2.3. 원치 않았던 건국의 길

하지만 1965년 8월, 리콴유 정부는 일방적으로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불려가 축출 통보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싱가포르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영상을 찾아보면 리콴유는 발표를 기다리며 손수건으로 얼굴만 닦고 있었고 축출 통보를 받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며 애통해했고, 옆에 있던 싱가포르 대표단들의 표정은 진짜 X 씹은 표정이 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소감 인터뷰 중에 자신은 일생동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통합을 꿈꿔왔다고 하며 울먹이다가 기자들에게 인터뷰를 잠깐만 중단해달라고 한다. 어지간히도 가슴이 아팠던 모양이다. 여러 나라들 중에 드물게도 분리 독립을 비통한 심정으로 받아들인 케이스이다. 리콴유가 일생 후회하고 슬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당한 것을 가장 가슴 아프고 많은 사람을 실망시킨 때라고 회고하였다.(디스커버리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편 참조) 자신들의 정치적 동지들에게 "우리는 내일 당장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축출될 거다"라고 말할 때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고 한다.

싱가포르가 경제강국이 된 오늘날 되돌아보면 이 때 말레이시아가 선택을 잘못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화교 인구가 다수인 싱가포르의 존재가 국가 통합성, 내부 안정에 장애를 초래하는 '혹'이라고 인식했던 것. 지금도 이런 이유로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인 우대 정책을 펴는 등 대놓고 화교들을 탄압한다. 몇몇 화교계 가문이 재계를 지배하며 원주민보다 월등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필리핀 같은 나라를 보면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의 주류를 이루는 화교계 인구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니 지금 싱가포르가 아무리 잘 살아도 말레이시아의 주류인 말레이인들은 화교 인구가 떨어져 나간 싱가포르 독립을 그다지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윈윈인 것. 말레이시아의 중국계와 싱가포르의 말레이계는 어떤 의견인지?

리콴유 본인이 직접 쓴 자서전인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을 읽어보면, 강제 독립 당시의 절망적이었던 상황을 절절하게 묘사한다.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군대 없지, 자원 없지, 땅 없지, 구성원들은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 타밀인 등인데 서로 싸우기나 하지 등 정말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도시국가에 불과한 상황에서 축출당했을 때의 서러움은 정말 심각하여 영연방의 기억을 되살려 영국에 빌붙어 볼까 아니면 말레이에 다시 어떻게 붙어볼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지배했다고 한다.

심지어 다른 아시아나 남미, 아프리카 등 싱가포르처럼 막 독립한 제3국들은 지하자원을 서방으로부터 뺏길까봐 걱정이라도 했지만, 싱가포르는 뺏길 자원조차도 그야말로 먹고 죽을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싱가포르는 식수조차도 말레이시아로부터 구입하여 쓰는 입장이었다. 말레이시아가 행여나 마음만 먹는다면 싱가포르로의 식수 공급을 중단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당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반서방주의자로서 친서방국가였던 말레이시아와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즉 코딱지만한 싱가포르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라는 거대 국가들로 둘러쌓여 있는, 화교들의 섬에 불과했다.

아울러 싱가포르의 독립으로 인민행동당(PAP) 또한 분리되어, 말레이시아에 잔류하게 된 옛 인민행동당 당원들은 민주행동당(DAP)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2.4. 싱가포르의 국부

독립 후 리콴유는 살아남기 위해 이스라엘 장교단을 불러 군대를 육성하고, 인재양성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를 위해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하고, 그러면서도 권위주의적 국가의 모습은 철저하게 지켰다고 전해진다. 싱가포르의 통제질서와 벌금제도, 태형제도 등은 유명하다.[11] 심지어 미국의 압력에도 태형을 강행할 정도이니.

1959년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이래 1991년 명목상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30년이 넘게 싱가포르를 통치하였으며, 퇴임 이후에도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의 지위를 가지고 싱가포르 정부를 사실상 좌지우지했고, 후임 고촉통(吳作棟) 총리가 퇴임하자 아들 리셴룽(李顯龍)을 총리에 앉혀 사실상 부자세습에 성공했다. 이후 리셴룽 총리 시절에는 고촉통이 선임장관 지위를 물려받고 리콴유 자신은 내각고문(Minister Mentor, 한국언론에서는 대부분 '고문장관'으로 표기했다. 하지만 당시 싱가포르 정부에서 한국 신문에 실은 싱가포르 홍보광고에서는 스승장관이라고 표기했다.)이 되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011년에야 고촉통과 더불어 각각 내각고문과 선임장관에서 물러났는데, 이는 그 해 총선에서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고 야당인 노동당이 사상 최다의석을 확보한 데 따른 데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본인은 성명을 통해 “총선 이후 새로운 정국에 대해 깊이 생각해 이번 결정을 내렸다”면서 “리셴룽 총리와 젊은 지도자들이 새롭고 젊은 내각을 구성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5. 사망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오더니 2015년 3월 18일 폐렴으로 위독하다는 보도가 나왔고, 닷새 뒤인 2015년 3월 23일 오전 3시 18분 향년 9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리콴유의 장남리셴룽 현 싱가포르 총리가 발표 하였다.

생전에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리콴유의 장례식은 3월 29일 국장으로, 싱가포르 국립대학교에서 엄수되었다. 세계 각국의 전현직 국가 수반 다수가 참석했고,[12]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5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유골함에 함께 안치되었다.

3. 평가

3.1. 권위주의적 통치

싱가포르/정치와 같이 보면 좋다.

리콴유가 총리로 재직하던 당시의 지지율

1968년: 86.7%

1972년: 70.4%

1976년: 74.1%

1980년: 77.7%

1984년: 64.8%

1988년: 63.2%

고촉통이 총리로 재직하던 당시의 지지율

1991년: 61.0%

1997년: 65.0%

2001년: 75.3%

리셴룽이 총리로 재직하던 당시의 지지율

2006년: 75.3%

2011년: 60.1%

2015년: 69.9%

1968년부터 1980년 까지 12년간 4번의 총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집권 여당 PAP는 전 의석을 싹쓸이 했다.

싱가포르는 여타 민주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다당제 국가를 표방하기 때문에 선거과정에서 국민들이 자신의 불만을 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이 제1당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물론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은 국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오기는 했고 특별히 저 선거 결과들이 부정선거로 이룩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총선 선거 제도가 여당에 지나치게 유리하게 짜여져 있다는 문제점이 있고, 싱가포르/정치 항목에 있는 것과 같은 우회적인 방식의 정치 탄압이 있어 야당의 세력이 자라기 어려운 점은 싱가포르를 완전한 민주국가로 보기 어렵게 한다.

리콴유는 개인적으로 검소하고 절약하는 타입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자체는 칭찬할 일이지만, 독재와 개인의 청렴성은 무관하기 때문에 충분한 방어의 근거는 되지 않는다. 돈을 사용함에 있어 청렴하지 못함은 사람의 부패함을 가늠하는 여러 기준 중 한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13]

현재 싱가포르에서 이권이 따르는 국영기업이나 관변단체의 수장, 또는 정부 요직들은 상당부분 리콴유 일가나 그 측근들이 차지하고 있다. 당장 싱가포르 최대의 기업으로 싱가포르 여러 대기업의 지주회사이자 전 세계 여러곳에 투자를 하고 있는 국영기업 '테마섹 홀딩스'의 CEO가 그의 며느리이자 리셴룽 총리의 부인인 호칭(何晶) 여사다. 물론 이들은 효율적으로 자신의 기업들을 이끄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지도자의 친인척이 국가 공기업 사장에 있는 것이 적절한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한국에서도 리콴유의 통치를 독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리콴유 옹호자들이나, 독재임을 인정하면서도 우호적으로 보는 옹호자들을 볼 수 있는데, 경제기반은 부유하되 자유와는 동떨어진 사회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것이다.[14]

흔히 싱가포르를 잘 사는 북한이라 비유하지만 싱가포르의 북한과의 공통점은 권위주의 뿐이며, 북한과 차이가 큰 건 북한의 경우에는 역할이고 뭐고 이념적 색체와 패권 그 자체가 정의이고 기반인 반면 싱가포르는 역할중심적 권위주의가 매우 강하다. 북한이 이념을 충실히 따르지 않는다는 원리주의적 반박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북한이 타인을 심판하는 기재는 해당 이념이 나타내는 분위기에 거스르는 경우가 가장 큰 구실이다. 세상에는 많은 왕국이 있지만, 그들이 모두 북한으로 불리지 않는 것에는 이와같은 체제적인 이유가 있다. 또한 몇몇 이들이 북한으로 불리는 이유에는 북한과의 유사성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민중주의 세력'과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경우이다. 보통 북한은 엘리트조차 상위관료들의 차별에 의해 핍박받을 수 있는데 반해, 특정 국가가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가 강한 경우 민중주의 세력에 의해 북한으로 불리는 경향이 있다.

3.2. 경제성장의 허와 실

싱가포르의 빈부격차가 큰 점이 비판의 대상의 되는건 사실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5만달러에 가깝지만, 지니계수가 46.3에 이르고 있다.[15] 이건 선진국에서는 소득불평등이 매우 큰 미국(45)[16]보다도 더 불평등한 경우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부익부 빈익빈이 심각한 나라인데, 1990년대까지만 해도 소득불평등이 현재처럼 심각하지 않았으나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밀려들어온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인하여 기업친화적인 경제체제가 강화되었고, 최근 10여 년 사이에 상대적으로 빈곤한 외국 이민자가 급격히 늘어난 터라 빚어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싱가포르에서는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아주 부자가 아닌 이상, 70살 먹은 노인들도 알바에 나서야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라는 식의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과장된 내용이다. 싱가포르에는 CPF(중앙연금준비기금)제도라는게 존재하는데 자신의 소득중 일정비율을 의무적으로 저축하는 개념이다.(사실 이젠 내가 뼈빠지게 벌어 저축한 연금이 정부의 통제에 의해 그 돈을 내맘데로 쓸수가 없게 되었어요~~돈 함부로 주면 막 쓴다고 이젠 정부가 관리해주겠다고...이것때문에 국민들 반발이 엄청납니다.)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하고 저축한 돈으로 노후를 편하게 보내도록 하자는게 기본취지이고 싱가포르 정부에서는 이 CPF로 조성된 재원을 운용하여 매년 수익을 거두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싱가포르도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심한 나라이다보니 싱가포르인들은 연금재원이 장래에 고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고 그에 대한 비판여론도 존재한다. 이 저출산이 심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입시 위주 교육 및 큰 빈부격차로서, 이를 통해 보면 싱가포르의 문제는 2010년대의 한국과 별반 다를 바 없다.[17]

그렇지만 오늘날 싱가포르는 관광/물류 위주가 아닌 2차산업 기반의 견고하고 건전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계 10위 내에 드는 1인당 GDP, 2000년대 중후반까지 7% 이상의 성장률을 유지했던 행정적 역량 등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아울러 효율적으로 운용되는 공기업 역량과, 아시아 최대의 공업단지인 주롱공업단지, 싱가포르를 관광국가로 변모시키기 위해서 국가주도하에 조성된 다양한 테마시설과 국가차원의 마케팅능력도 있다는 평가도 있다.

위와 같이 결과만 보고 리콴유식의 권위주의 체제의 효율성 때문에 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는 인식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아시아에서 인도양으로 빠져나가는데 꼭 거쳐야 할 항로에 있는 경유항이다. 동아시아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영국이 엄청나게 발전시켰고, 특히 아시아 경제가 성장하면서 이곳은 중계무역 및 경유기지로 엄청나게 발달할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엄청난 물류가 이동하는 고속도로의 휴게실로 비유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런 입지조건을 갖고도 성장을 못 하거나 소폭 성장만 하는 국가들이 흔하고 오히려 엉망진창인 국가들도 있다. 예를 들면예멘, 소말리아, 등이다.[18]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식으로 강고하며 말하는 건 말도 안되는 왜곡이다.

3.3. 언론통제

싱가포르에서는 항상 감시당한다.

정부가 무료로 보급하는 인터넷망은 항상 감시되고 있으며, 리콴유 일가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면 바로 정부에서 조사나온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그도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조사만 나오면 모르겠는데, 싱가포르의 많은 기업이 이 일가 소유이기 때문에, 만약 이 일가를 나쁘게 말했다가 찍히면, 본인 일자리를 잃거나 혹은 허위사실 유포 또는 명예훼손으로 거액의 벌금을 내야 한다.

여기에 언론기관에 대한 통제도 심해서 형식상 언론의 자유가 있으나 실제로는 없다. 예전 일해거사처럼 기자를 체포해서 코렁탕을 먹이는 무식한 방법을 쓰는게 아니라, 명예훼손으로 고소라는 합법적인(...) 방법을 쓴다. 여기에 독재국가가 대부분 그렇듯이 사법부의 독립성은 말뿐이며, 대부분 정부에 유리한 판결을 내기 때문에 거의 100% 패소한다. 그러니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란 실제로는 없는 셈이다. 패소한 자가 돈을 안내고 배쨀까봐, 아예 언론사들은 미리 거액의 보증금을 예치해둬야 두고, 만약 정부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승소하면 그대로 이 예치금은 날아가고 다시 거액의 보증금을 예치해야 한다. 안넣고 배째면 등록 취소. 또 사실 많은 언론기관이 국영 투자업체 테마섹 홀딩스가 대주주라 이런 과정을 안 거치고도 압력을 가해 반정부적 보도를 걸러낼 수 있다.

그리하여 실제로 싱가포르의 언론자유지수는 세계 150위권으로, 이라크러시아와 동급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렇게 리콴유 일가가 지배하는 싱가포르를 잘사는 북한이라고 혹평, 비난하기도 한다.

외부사이트 접속자체가 불가능한 북한이나 유튜브, 트위터같은 대중적인 인터넷 사이트, 서비스도 거침없이 차단하는 중국과 달리 싱가포르에선 외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언론매체에서도 외국의 민주화운동 관련 뉴스가 자주 보도되는 편이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소국인데다가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서방과 같이 행동을 하므로, 서방은 중국, 베트남, 북한과는 달리 싱가포르의 독재나 반민주적인 행태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중국, 북한과 달리 유튜브나 트위터를 막지 않는다.그러니까 1) 서방권 전반은 싱가포르의 독재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딱히 외부 인터넷이 위험하지 않고 2) 설령 자국인이 이런데 반정부적인 주장을 올려봤자, 나라가 좁기 때문에 금방 추적되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싱가포르에서는 중국, 북한, 베트남과는 달리 구글, 유튜브를 자유롭게 쓸 수 있지만, 싱가포르 인들은 이런데다가 정부 비판적인 표현을 하는 것을 극히 조심스러워 한다.

이렇게 싱가포르 국내 문제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통제와 각종 소송 등을 통해서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외국의 언론까지 교묘하게 입을 막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명예훼손은 자국 언론의 입을 틀어막는 전가의 보도로 쓰인다. 정치적 탄압은 그다지 심하지 않게 보이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야당 당원들을 "공산주의자"라는 죄목으로 가두는게 일상이었다. 90년대 이후엔 자제한 편.

일부 외국에서는 종신 총리를 예상하였으나 정권(총리직)을 측근인 고촉통에게 넘겨주고 물러났다. 그러나 실질적인 총리는 리콴유라는 말이 계속 나돌았는데 실제로 '선임장관'이 되어 내각에 관여한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고촉동은 15년간이나 재임하면서 나름대로 입지를 구축했고, 리콴유의 아들 리셴룽은 고촉통에 이어 총리가 되었다. 고촉통 정권, 리센룽 정권에서도 리콴유는 사실상 선임장관, 내각고문으로 계속 정권에 참여하고 있어 완전히 퇴임한 2011년까지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국경없는 기자회가 조사하는 세계 언론 자유 지수도 꽤 낮은 편에 속한다. 2014년 기준으로 필리핀, 멕시코와 비슷하나, 실질적으로는 카르멘 아리스테기 등 반정부진영 언론이 어떻게든 돌아가는 멕시코보다 더 낮은 수준. 참고자료

아니나 다를까 싱가포르에서 리콴유 사후 독재자라고 비판한 동영상을 올린 학생이 바로 체포되었다. # 그는 이 일로 2015년 5월에 4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출감 후 또 다시 리콴유를 비방하는 동영상을 올려 2016년 9월에 이번엔 6주 징역형과 2000 싱가포르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출감 후 2017년 미국으로 가서 망명을 신청해 받아들여졌다. #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리콴유가 수없이 많은 여러가지를 금지시키고 못하게 막았는데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막아내지 못한 것도 있었는데... 다름아닌 마작이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에게 어지간한 것들은 강요하고 금지할 수 있어도 마작은 금지할 수 없었다."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4. 기타

4.1. 한국과의 인연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한국인은 일본군복을 입고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침략의 협력자였다.[19]

- 리콴유

한국이 전쟁 피해국이 아닌 식민지였음에 더해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차출되어 전쟁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첫인상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국은 이후에도 단일 정부 구성으로 내흉을 치르거나 6.25 전쟁으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혼란에 휘말리는 등 여러 문제로 외교적으로 한국 또한 피해자임을 어필할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뒤늦게나마 한국이 이러한 인식을 벗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냉전 구도가 가시화되면서 한국을 지원하고 나선 미국의 역할도 크다.

어쨌거나 한국이 어느정도 외교력을 갖추면서 싱가폴과 정식 수교하고, 오해가 풀린 뒤 리콴유는 '식민시절 한국은 강압적 통치를 받았지만 민족적 자긍심이 강한 한국인의 정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발언했다. 또한 제국주의 시절에는 상당히 드물었던 현상으로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대부분의 피식민지 국가들은 식민주의에 순응하였으나 유독 한국만 끊임없이 저항을 하였다고 평하였다.[20][21] 70년대에 한국 정치인들을 만나보니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일본문화에 익숙한 일본식 엘리트들이었음에도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어마무시해서 놀랐다라고 한다. 한편 리콴유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일본이 싱가포르를 통치했던 방식은 법치주의적이었던 젠틀한 영국과는 달리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어서 학생시절 큰 충격을 받았다고 서술하였다.일본에게 일본이 중국과 한국, 싱가포르에서 자행했던 잔인한 행위에 대하여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여러번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비유럽국가에서는 유일하게 단결을 잘 하며 선진국으로 성장한 일본에 대한 경외감 또한 동시에 존재한다고 서술하였다.

1994년, 야당시절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태재단 이사장 신분으로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라는 미국의 외교 전문지에아시아의 민주화에 대한 글을 기고한 후 리콴유 전 총리가 설한 "아시아적 가치"를 두고국내외 저명한 석학들까지 가세해 수년 간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다. 리콴유는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는데 반해서 김대중은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강조. 외국에서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권위주의 정치인과 민주화 운동가의 논쟁을 꽤 흥미있게 보았던 모양. 두사람은 모두 계해년생 돼지띠로 나이도 같다A Conversation with Lee Kuan YewIs Culture Destiny? The Myth of Asia's Anti-Democratic Values

그래도 리콴유 자신은 한국에 꽤 우호적이다. 2000년에 출간된 자서전 <일류국가로의 길>에서도 한국 관련 내용을 1개 장에 할애했을 정도. 제2차 세계대전 시절 일본의 싱가포르 점령기에 당시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조선인 및 조선인 위안부를 통해 한국과 처음 접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인 못지 않게 폭력적이고 강압적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초기에는 한국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지만 이후 싱가포르와 비슷한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을 접하면서 우호적인 인식이 강해졌다고 썼다.

1979년 10월 한국을 방문해서 피살당하기 직전의 박정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던 내용도자 서전에서 비중있게 소개했다. 당시 영부인 대행 격으로 통역을 맡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자서전에서는 (이름은 따로 적지 않고) 그냥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가 통역을 했다" 정도로만 썼다. 아울러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일화를 인용해 공식석상에서 견해나 권고를 피력한 경우가 6차례였고, 박정희 대통령 피격 소식을 접한 후 그 부재가 단순한 지도력 공백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한국이 유무형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 실제로 5공화국 출범 직후, 한국은 무기 개발 부서를 (특히 미사일) 축소했으며, 세계은행의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한 협상에서 자동차, 중공업 축소를 사실상 강요받았다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덩샤오핑(鄧小平) 전 중국 최고지도자,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일본 총리와 함께 ‘아시아의 3대 위대한 지도자’로 꼽았다.

아시아의 3대 지도자를 꼽자면 중국의 경제 근대화를 일궈낸 덩샤오핑(鄧小平)과 일본이 완전한 친미국가로 자리잡아 일본의 재건을 이끌어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 그리고... 이 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현재 한국은 역사 바로쓰기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안합니다. - 리콴유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회고록에 평을 남겼는데, "김대중은 높은 가치를 굳게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며, 여러 차례의 위기를 겪으며 강해진 사람이다. 더 높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자제[22]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한 때는 싱가포르인과 한국인과의 결혼을 장려했다고 하며, 한국인 이민도 꽤 받았을만큼 우리나라에 호의적이었던 정치인.

1999년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전에 키배를 벌였어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그의 "아시아적 특수성"이라는 주장은 학계에도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일례로 매우 유명한 정치학자 중 하나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경우, "동양의 유교문화가 민주주의와 조합되기 어렵다는 리콴유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것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동양이 고도의 경제적 번영을 이룬 가운데서도 광범위한 정치참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4.2. 개인적인 일면

어린시절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와 가족은 그를 '해리'라고 불렀는데, 공식적 석상에서는 언급된 일은 없다. 다만, '해리 리콴유'라고 지칭된 적은 있다. 비단 가까운 친구나 가족뿐만이 아니라 영국 식민 시절 학교 다닐때는 그냥 '해리 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대영제국에 충성하는 'King's Chinese'였던 그의 할아버지 리훈렁(李雲龍)의 영향으로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그러나 리콴유 본인은 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23] 기독교도도 아닌 중국아이가 영국식 이름이 있다고 학교에서 놀림받았기 때문. 그래서 그의 고집때문에 형제들 가운데 막내동생 리솬유(李祥耀)만 영국식 이름이 없다 외신 기사엔 종종 아직도 옛 친구들에게 "해리"라고 불린다는 내용이 등장하고[24], 아예 대놓고 "Harry Lee"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리콴유 위인전도 있긴 한데 이건 어린 시절에 그렇게 불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저자 이름이 Patrick Yee

사후에 자신의 집이 국가 성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집을 허물라고 지시했다.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도록 한 것도 국토라고는 도시 하나뿐인 싱가포르의 공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고. 하지만 타 정당이 당선된 국회의원 지역구에는 예산을 깎는 행동도 했다고 한다.

표준중국어할 줄 알았다.[25] 약간 어눌하지만 보통화가 그에게 있어서 제2언어(제1외국어)도 아닌 제3언어(제2외국어)였던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유창했다.[26] 본인 말로는 표준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해 왔다고 한다. 원래 집안이 표준중국어가 아닌 객가 방언이나 복건어를 사용하던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복건어가 아닌 표준중국어를 싱가포르의 4개 공용어 중 하나로 지정한 것도 그의 집권기에 일어난 일이다.

또한 공용어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는데 2009년, 한계성을 언급하며 일부 실패를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2006년 방한 강연에서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게 외국어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만큼, 외국어 교육 그 자체를 부정한건 아니며,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시행착오를 일부 인정한 것이라 보는게 보다 타당할 듯.

생전에 2권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1998년의 첫 자서전인 <싱가포르 스토리>[27]는 청년기와 1965년의 분리독립이라고 쓰고 축출당했다고 읽음 관련 내용이고, 2000년에 출간된 후속편격인 <일류국가로의 길>은 건국 이후 싱가포르 초대 수상이자 국부로서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둘 다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정보에 의하면 이슬람교에 굉장히 부정적이라고 하며, 저 종교는 해로운 종교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리콴유도 쿨하게 인정했으며, 그 말이 나온 당시의 상황이 동남아의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해 나온 비판 중에 나온 말이라고 했으며, 모든 종교가 극단적으로 가면 신념을 지킨답시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슬람이 그 빈도가 매우 높아서 동남아시아[28]의 대표격으로 예를 든 것 뿐이라고 했다. 거기다가 사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내용도 아닌 것이, '리콴유와의 대화'라는 책을 보면 리콴유가 이슬람쪽 세상에 대해 비판을 하는 부분이 한 챕터에서 나온다. 그런데 대통령직을 맡는 주요 구성원인 말레이 민족이 무슬림...

아시아의 3대 위대한 지도자로 한국의 박정희, 중국의 덩샤오핑,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를 뽑았다고 한다.http://news.donga.com/3/all/20150324/70286474/1 대체로 개발독재 권위주의적 지도형태를 좋아하는걸로 보인다. 덩샤오핑과는 냉전 때 만나 중국의 빈농 문맹 출신들이 많이 모인 싱가포르도 경제성장을 해냈으니 중국도 해낼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http://news.donga.com/3/all/20150401/70460141/1

작은 나라의 중국인 지도자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리콴유는 키가 180cm가 넘는 장신이었다. 부인 콰걱추 여사 또한 170cm가 넘어 그의 가족 대부분은 장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임자는 리콴유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5. 주요 행적

1976년 국립 경기장에서 열린 '원예와 아쿠아리움 물고기 쇼' 개막식에 참석하여 콰걱추(柯玉芝) 여사와 정부 요인들과 함께 시찰하고 있는 사진

1966년 National Day(국경일) 기념식에서 싱가포르 달러의 그 분 유소프 빈 이샤크 싱가포르 대통령 내외와 회동한 사진

1979년 10월 19일 청와대를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영애 박근혜와 함께 찍은 사진.그리고 바로 그 1주일 뒤...

6. 관련 문서


  1. [1] 이 철자가 어떤 중국어 방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일단 '光'을 'Kuan'으로 발음하는 방언은 상하이 등지에서 쓰이는 오어(吳語) 정도인데 리콴유가 오어를 구사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耀'를 Yew라고 표기한 것은 객가어 쪽에 가깝긴 하다. 그의 동생인 李天耀(Lee Thiam Yew)의 발음은 객가어에 가깝다는 느낌이지만, 역시 그의 동생인 李祥耀(Lee Suan Yew)의 경우 '祥'을 'Suan'으로 발음하는 방언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표준중국어와 객가어 등 여러 방언이 뒤섞여서 비슷하게 흉내낸 표기로 짐작하고 있다. 다만 장남 리셴룽은 한어병음방안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표준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하였다. (리셴룽은 1952년생이고, 한어병음방안은 1956년에 제정되었다.)
  2. [2] 공식적으로는 1965년의 첫 임기 후, 6차례(1968~1988년. 각 4년 임기)의 총선으로 수상직을 수행한 7선 기록을 세웠다. 물론 그래봐야 집권 인민행동당이 늘 다수를 보장받는 방식이었지만.
  3. [3] 리콴유의 자서전 <일류국가로의 길> (From Third World to First: The Singapore Story - 1965-2000) 중에서. 싱가포르의 현대사를 단적으로 요약해놓은 표현이다.
  4. [4] 객가인들은 한족에 속하는 작은 집단으로, 이들이 사용하는 객가 방언은 고대 중국어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어 항목 참조.
  5. [5] 그의 말년에 이르러서도 옛 친구들은 리콴유를 Harry Lee라고 불렀다.
  6. [6] 예를 들어 양조위도 Tony Leung Chiu-wai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홍콩 연예인 상당수가 이름이 이런 식이다.
  7. [7] 후일 정치에 입문하면서 한족계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해리를 떼고 리콴유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8. [8] 일본을 향한 리콴유의 감정은 서양인들을 무찌른 유일한 아시아인이라는 경외감과 동시에, 싱가포르인 한국인 중국인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학살했던 일본인의 야만성에 대한 혐오감이 동시에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9. [9] 부인 역시 케임브릿지 법대 출신의 엘리트다. 참고로 아들 리셴룽 총리도 케임브릿지 대학 출신
  10. [10] 지금이야 공산주의가 실패한 실험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2차대전 종전 직후에 공산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꽤나 매력적인 정치체계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이 당시 싱가포르는 주류 민족집단인 화교들의 조상 나라 중국이 공산화에 성공하여 국가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기에 공산주의의 호소력이 매우 컸다.
  11. [11] 그의 자서전인 '싱가포르 이야기'에서 자신이 선생님에게 맞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나는 서양 교육계에서 왜 매질에 그렇게 부정적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내 친구들이나 나에게는 체벌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과거의 이런 모습이 현재의 싱가포르태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12. [12] 현직 국가원수가 참석한 경우는 한국(박근혜 대통령), 일본(아베 신조 총리), 호주(토니 애봇 총리), 인도(모디 총리) 등이었고, 중국은 리위엔차오(李源朝) 부주석을 파견했다.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과 함께 참석했다. 대만의 경우는 마잉주 총통이 '하나의 중국'을 요구하는 중국과의 마찰을 고려하여 국장 직전에 개인 자격으로, 비공개 조문을 하고 돌아갔다.
  13. [13] 다른 국가에서 악명이 높은 독재자들 중에서도 사적으론 청렴했던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스탈린 조차도 자기 아이들에게 특혜를 주지 않았고, 스탈린의 어머니는 아들이 최고 권좌에 오른 후에도 이전부터 살던 조지아의 허름한 옛집에서 계속 살다가 거기서 사망했다.돈과 권력 중 권력을 선택했다
  14. [14] 하지만 자유를 만끽하는 건 먹고 살 걱정이 해결된 다음의 일이다. 다음달 방세를 걱정하는 백수와 잔고 100억을 가진 한량도 자유의 양만 놓고 비교하면 동등하다
  15. [15] CIA FACTBOOK, 2011년
  16. [16] 그리고 미국은 전세계적인 금융기관과 IT기업들이 밀집한 곳이라 억대 연봉받는 직장인들이 넘쳐나는 곳임과 동시에 갱들과 슬럼가로 유명한 나라이다. 소득격차가 많이 날 수밖에
  17. [17]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빈부차 문제와 다른 것이 비교적 빈부격차 문제가 적은 서유럽 주요 선진국들도 거의 다 저출산 문제를 겪고있고 그래서 이민 받아들이는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출산율 높은 국가들은 대체로 개발도상국이고 빈부격차 심한 편인 국가들이다. 인식 정서 문제가 더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18. [18] 2016년 초 기준으로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되어있거나 최약국가지수가 높은 국가들을 보면 입지조건마저 안 좋은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입지조건은 좋은데 다른 부분들이 안 좋은 국가들이다.
  19. [19] 실제로 한국은 2차 대전 종전 후 2차 추축국 및 부역국 취급을 받았다.
  20. [20] 다만 이는 여러 사정이 있다. 일제의 경우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개화하였으나 여전히 서구 열강에 비해 그 역량이 부족하였고,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 또한 미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서구 열강의 반열에 들었음을 선전하기 위해 매우 우호적으로 대해주던 대만과 대조적인 부분.
  21. [21] 나머지 나라는 애초에 일제가 식민지배하지 않았고 당연히 그렇게까지 어수룩하게 지배하지도 않았다. 잠깐 점령한게 전부.
  22. [22]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1998년 홍콩의 성도일보(星島日報)에서 김대중을 평한 내용이 있다. 야당 시절 생명의 고비만 수차례를 넘긴 고초를 겪은 김대중 당선자가 속된 말로 "손볼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상황이고, 그 중에는 자식을 고문해 후유증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보복 대신 화해와 타협을 택한 DJ를 장수를 용서한 조조에 비유하면서, "간웅과 노정객은 종이 한장 차이"라는 평을 남겼다.
  23. [23] 한국에 번역된 '리콴유 자서전' 40페이지 및 162페이지 근거.
  24. [24] http://content.time.com/time/world/article/0,8599,2054444,00.html
  25. [25] 해당 동영상 1분에 나오는 내용에 의하면 표준중국어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 중 제3언어(제2외국어)이고 그래서 본인은 그렇게 썩 유창하게 잘 못한다고 했다. 다른 동영상 보러가기.
  26. [26] 과장 좀 보태서 이광요가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고 중국어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링크된 동영상들을 보면 그냥 중국인 할아버지가 중국어 하는 동영상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27. [27] 한국어판은 '리콴유 자서전'이란 이름으로 나왔다.
  28. [28] 실제로 싱가포르 바로 옆의 인구대국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모두 이슬람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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