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속

촉서 「동류마진동여전(董劉馬陳董呂傳)」

동화

유파

마량

마속

진진

동윤

여예

馬謖

(190 ~ 228)

1. 개요
2. 정사
2.1. 초기 생애
2.2. 남만 정벌
2.3. 가정의 패전
2.4. 마속의 실패
2.5.1. 정치적 처형?
2.5.2. 탈영죄?
3. 연의
4. 평가
4.1. 유비의 평가
4.1.1. 유비가 실제로 마속을 그렇게 평했는가?
4.1.2. 반론
4.2. 능력
4.3. 강유에게 라이벌 의식?
5. 기타
6. 미디어 믹스

1. 개요

삼국시대 나라의 산악인무장으로 자는 유상(幼常). 산을 너무나 사랑한 사나이 혹은 마막과 더불어 촉의 마레기

백미로 유명한 마량의 동생이다. 마씨 오형제 중 마량이 넷째, 마속이 막내라고 한다.[1]

2. 정사

2.1. 초기 생애

젊은 나이에 형주종사로 임용되어 유비를 따라 촉에 들어갔고 이후 성도령, 월준 태수직을 역임했다. 재주와 기량이 빼어났고 군략 논하기를 즐겨 제갈량은 그를 특출나게 여겨 아꼈으나 유비는 그를 크게 써서는 안되는 인물이라 평했다. 특히 백제성에서 임종하기 직전 제갈량에게 "마속은 말이 그 실제를 과장하니, 크게 기용할 수 없소. 그대가 이를 살펴보시오."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런 유비의 말에도 크게 개의치 않고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삼아 가까이두고 밤낮으로 대화를 나누며 신임하였다. 하지만 둘 중 누가 마속을 제대로 평했는지는 오래지 않아 드러나게 된다.

제갈량이 마속의 형 마량과 형제같은 관계였던 만큼[2] 이릉대전에서 불행하게 전사한 그의 아우를 배려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2.2. 남만 정벌

남만 평정전에서 제갈량에게 마음으로 공격하여 위무할 것을 건의하고, 제갈량은 이를 받아들여 남만인들의 마음을 공략해 복속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 이후 1차 북벌 이전까지 특별한 기록은 없다. 그 사이 군대를 지휘하거나 특정한 임무를 맡아 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제갈량 밑에서 참군이라는 벼슬까지 하면서 놀고 먹었을 리는 없으므로, 군사 행정이나 진언 등 참모 업무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제갈량은 별탈없이 제몫을 해낸 마속을 보고 '마속을 크게 쓰지 말라'는 유비의 말을 서서히 신경쓰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연의에서는 사마의를 헛소문으로 삭탈관직시키는 활약까지 한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이 다음부터 마속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다가 한 방에 무너지게 된다.

2.3. 가정의 패전

가정이 무너지고 마속이 무너지고 북벌이 황폐화되고

천수, 안정, 남안 3군을 성공적으로 점거하며 성공적으로 진행되던 1차 북벌. 주위에서는 오의 혹은 위연 등의 경험 많은 장수를 가정 방어전에 투입하자고 추천했으나 제갈량은 마속에게 왕평, 장휴, 황습, 이성 등을 부장으로 딸려주고 가정에 배치한다.

그런데 여기서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무시하고 멀쩡한 길목 대신 산 위에 진채를 꾸리는 바보짓을 한다. 산이 거기 있기에 올랐을 뿐... 부장 왕평이 끝까지 이를 말렸지만 이마저도 무시해버린다. 결국 왕평만이 1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따로 떨어져 진채를 세운다.

위의 명장 장합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고 산 위의 마속군은 포위되어 물줄기와 보급로가 끊겨 말라가다 참패한다. 이 때 가정을 지키던 촉군 중에서 따로 빠졌던 왕평의 부대만이 그나마 무사했던 정도였다. 이로 인해 가정을 잃게 되면서 촉군은 한중으로 퇴각하였고, 이로써 촉한의 1차 북벌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유비의 예상했던 대로 마속은 야전 지휘관으로는 조괄과 다를 바 없는 무능한 인간이었다.

2.4. 마속의 실패

마속이 저지른 삽질 요약 왕평이 좀 많이 귀여운데요? 승상님도...

위의 명장 장합은 바로 치고나가는 대신 산위에 진을 친 마속을 포위하고 급도를 끊어 촉군을 말려죽였다. 적지에서 산위에 고립되어 물길이 끊기고 보급을 받지 못한 마속의 군대는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나마 왕평의 분전으로 어느정도 피해를 수습할 수 있었으나 그것 뿐. 3군의 호응에 힘입어 자신있게 막을 올린 1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산 위에 아무 대책없이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물론 전략, 전술적으로 고지대를 점거하는 이점은 크다. 실제로 고지대에서 소수가 다수의 적을 물리는 경우도 흔하다.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쪽은 적부대에 대한 완벽한 감제가 가능하며 험난한 지형조건을 이용해 성채처럼 방어에 임하기 쉽기 때문이다. 당장 투사무기의 사거리와 위력이 비약적으로 늘고 곳곳에 매복병력을 배치해 좁은 산길을 오르는 적병을 덮치기 용이하다. 그리고 등반으로 힘이 빠진 적병과 접전시 유리한 면도 있다.

하지만 이건 고지대가 중요한 통로일때, 그러니까, 그곳을 지나지 않으면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한 보급로라든지, 아니면 전력 우위를 믿고 공세 일변도로 나오는 식으로 적이 고지대를 공격해 줘야 할 때 이야기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산과 이어져 있거나 해서 적의 포위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하며, 충분한 수자원과 물자의 확보는 기본이다. 특히 중국 서북부는 기본적으로 건조한 지역이므로 식수의 확보가 중요한 요소인데, 마속은 이러한 전장 환경을 전혀 살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정의 산은 다른 산과도 이어져 있지 않고, 제대로 된 물줄기도 없으며, 옆에 멀쩡한 길이 있는지라 적이 그냥 무시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위치였다. 물론 감제의 이점이 있지만 전군을 거기다 배치시킬 필요는 없다. 그냥 대부분을 대로에 배치시키고, 관측소 정도만 세워 조기경보 효과를 노리거나 일부만 산등성이에 진채를 세우게 하고 기각지세를 이룬다면, 어느 한 쪽이 공격받을때, 다른 한쪽이 적의 취약점을 찌르는 식으로 수비측에 굉장히 유리한 포지션을 점할수 있다.[3]

만일 마속이 산위에 전병력을 배치한 뒤 일부러 포위당하게 해서 죽을 각오로 싸우게 하는 것을 노렸다면 이는 그의 정신상태를 의심해 보아야 할 정도의 중대한 판단착오이다. 전술론에서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듯 산은 패자를 위한 마지막 버팀목일 뿐이다. 산성같은 진작에 갖춰진 방어 시설이 아닌 그냥 산 위에 포위당했는데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이겼다는 역사적 예도 없고 반대로 정예군이 산위에 포위당해 몰살당한 예는 역사에 무수히 나온다. 애초에 병법에서 '사지로 들어가면 죽을 각오로 싸우게 된다'고 한 것은 되려 공격 측에서 적을 사지로 몰아붙혔다고 안심했다가 역으로 죽을 각오로 덤비는 적에게 털릴 수 있음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지 이를 '지휘관이 장병들을 일부러 무조건 사지에 쳐넣으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건 부적절하다. 배수진으로 유명한 한신도 적군에게 약점을 보여서 적군이 진영에서 나와 공격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의도가 강했고, 실제 전황도 별동대가 적진을 점령해서 승리한 것이지 결코 배수진에 있는 군대가 죽을 각오로 싸워서 적군을 격파함으로써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왜 마속이 그런 중대한 착각을 했는지 정확한 심중은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병서에서 말하는 전력전술의 요지가 실전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고지대의 점거가 유용한 경우도 분명 있다.[4][5] 다만 그것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한데 마속은 그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가 전혀 없었다. 아마 마속은 배운 건 많았지만 실전에서의 응용력이 떨어지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괄을 비롯한 역사 속 수많은 똥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경험 없고 이론에 능통한 사람들중에선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 외에도 마속은 물이 풍부한 지역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물이 부족한 중국 서북부의 상황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다.

가정 전투의 경우 연의에서처럼 보급로 방어라는 견해와 그와 달리 요충지 선점[6]을 둘러싼 전투라는 견해가 있다. 아니면 둘 다이거나.

2.5. 읍참마속

읍참마속의 고사의 근원. 결국 마속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을 당하게 된다.

정사 상랑전을 보면 상랑이 마속과 친했기 때문에 마속이 도망가는 것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파면되었다가 제갈량이 죽은 후에야 관직으로 복귀했다고 한다. 즉 마속은 가정에서 전선을 말아먹고 잘못을 시인하는 대신 도망쳤다가 잡혀 왔던 것이다. 아니면 일단 도망쳤다가 나중에 가책을 느끼고 자수했거나. 배송지의 주석에서 인용된 양양기를 보면 마속은 제갈량에게 남기는 글에서 곤과 우의 고사를 들며 자기 자식을 부탁했는데, 굳이 말이 아닌 글로 남긴 것을 보면 처형당하는 시점에서 제갈량과 직접 대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은 약속을 지켜 마속의 자식들을 챙겨 주었다. 왕평전에 따르면 마속이 처형당할 때 부하인 장휴, 이맹도 군법에 따라 처형했다고 한다.

마속이 어떻게 처형당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마속이 참수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삼국지연의에 그렇게 묘사되었고 정황으로 봐도 참수형이 자연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고사의 제목 자체가 읍마속 내지는 휘루마속이다. 다만 참수되었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왕평전에는 마속을 주살했다고만 나오며 마속전에는 옥에 갇혀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기록이 달라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2.5.1. 정치적 처형?

한가지 의아한 것은 정사에서 구체적으로 시기를 보여주진 않지만 마속의 죽음이 신속하게 결정됐다는 점이다. 삼국지 강의의 저자 이중톈은 형주, 익주, 동주병 계열로 나눠진 촉을 통일하던 법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그를 처형했다는 추정을 내놓았다.[7] 그 근거는 "마속을 죽여서 사람들에게 사죄하였다"는 기술이다. 단순히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형한 것이라면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것과 관계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중톈이 주장하는 촉한의 지역감정, 갈등 운운은 사서에서 구체적인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통치체제가 미비하던 유장 시절까지 익주가 분열되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유비와 제갈량이 국가를 정비한 이후 반란은 있었을 지언정 신하들이 파벌로 갈라져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엄만 해도 제갈량은 그의 죄를 만방에 공언하자 출신성분 가리지 않고 핵심 관료들이 대거 참여해 탄핵시켰고, 북벌에 관해 반대하는 주장은 있었지만 출신과는 별개의 주장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승패는 병가지상사라지만 마속의 행위는 너무나 초보적이고 명백한 자신의 잘못. 그것도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상식적으로 당연히 해야 할 결정을 잘못한 것으로 인해 국가의 대업인 북벌을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굉장히 큰 죄였다. 차라리 능력 부족이나 착각으로 벌어진 일이었으면 나중에 중용하지 않으면 않았지, 책임은 묻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북벌과정에서 수많은 장수들이 실수를 저질러 일을 그르쳤지만, 제갈량이 이들에게 군법을 적용해 중벌을 내린 사례는 없다.

또한 정치적 문제 때문에 과도한 처벌을 하는 것 역시 법치를 바로 세운다고 보기는 어려운 정책이다.

참고로 어떤 사람들은 고대 로마만 하더라도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온 장군들을 군법을 물어 무작정 처형하지는 않았고[8] 삼국시대에도 한 번의 실수로 장군을 처형시키는 일은 매우 드물었으니 이는 마속의 실책이 대형삽질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정치적 처형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거꾸로 된 논리이다.

2.5.2. 탈영죄?

마속의 문제가 패전만이 아니라 군령이나 군율에서 더 큰 문제였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마속은 당시 제갈량의 기본적인 지령조차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명백해 보인다. 사실 제갈량의 북벌은 늘 난항이었던 만큼 북벌 중에 패전한 장수는 조금 있지만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처벌을 받은 사람은 매우 드물며 이름있는 장수 중에서 이런 사유로 사형까지 당한 것은 마속이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잘못으로는 마속에 뒤지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는 이엄도 삭탈관직 서인강등으로 끝났다. 다만 말아먹기는 했어도 다수의 병사들을 자신의 실책으로 잃은 마속과 적어도 병사를 잃지는 않은 이엄은 당연히 처분이 다른 게 정상이라는 반론도 있다.

이 때문에 마속의 처분이 패전이나 명령 위반 자체보다 몇몇 기록에 언급되는 탈영, 극단적으로는 오(吳)로의 망명 시도로 볼 수 있는 행동[9]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전시상황에서 탈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즉결처형이 가능한 중죄다.

3. 연의

"승상은 마속의 재질을 어떻게 보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당세(當世)의 영재(英才)입니다."

선주는 베개 위에서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짐은 이 사람을 보니 말은 잘하지만 능력이 말만큼 뛰어나지 않아서 크게 쓸 인물이 못 되오. 승상은 깊이 살피시오."

연의에서는 조비가 죽은 틈을 타서 유언비어로 사마의를 실각시켜 더 큰 신임을 얻는다. 그리고 마속을 가정에서 깨뜨리는 역할은 사마의가 가져갔다.

최후도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공개처형이 되었다.

한중에 퇴각한 제갈량은 곧바로 마속을 군법에 회부하고, 마속에겐 경솔하게 총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행동해 전쟁을 망친 죄로 간단하게 사형 판결이 내려진다. 그래도 스스로의 잘못을 자각하곤 있었는지 사형판결이 내려졌을 때에 변명 한 마디 없이 단지 가족을 제갈량에게 당부한다. 마속을 아꼈던 제갈량은 가족을 돌봐주겠다고 하고 마속을 끌고나가 목을 자르게 한 후 통곡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마속의 죽음에 안타까워한 것이 아니라 선황 유비의 말을 제대로 따르지 않아서 1차 북벌이 실패로 끝났다는 데서 좌절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시 유비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4. 평가

4.1. 유비의 평가

마속에 대한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유비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先主臨薨謂亮曰 : 「馬謖言過其實, 不可大用, 君其察之!」亮猶謂不然,

선주(유비)가 훙(사망)할 때 (제갈)량에게 말하길, "마속은 말만 요란하고 실속이 없어 크게 쓸 사람이 아니니 그대가 주의해야 할 것이오!" (제갈)량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여(이하 생략)

<마속전>

마속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유비가 임종의 자리에서 그에 대해 했다는 위와 같은 말로 요약된다. 즉, 말이 실질보다 앞서니 크게 쓸 자가 못된다는 것. 결과적으로 이 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4.1.1. 유비가 실제로 마속을 그렇게 평했는가?

  • 유비가 마속에 대해 따로 평할 이유가 있었는지 여부 : 마속이 제갈량의 최측근이었던 마량의 동생으로 당대에 이미 주목받고 있었다 하나, 실제로 마속이 본격적으로 군정에 두각을 드러낸 것은 제갈량의 남방평정 당시의 일이고, 유비가 마속을 저렇게 평가할만큼 활동한 바가 있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 유비가 저런 평을 내렸는데 마속이 중용될 수 있었겠는지 여부 : 황제가 "크게 쓸 자가 아니다"라고 평한다면, 그 평의 대상이 된 자가 중용된다는 것은 그 황제의 뜻이 무시되었다는 것에 다름없다. 촉한은 한실부흥을 대의명분으로 삼아 건국된 국가였기 때문에 후주 유선의 시대에조차 조정 대신과 장군들이 황제를 어찌 못할 정도로 황제의 권력과 권위가 모두 강력한 편이었고, 제갈량을 비롯한 재상들의 권력 또한 황제의 위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또한 제갈량은 유비 사후 단독으로 고명대신이 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정적에 가까웠던 이엄과 함께 고명대신이 되었다. 선제가 특별히 이름까지 거론해가며 중용할 인재가 아니라고 했던 이를 그 뜻을 받드는 고명대신이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멋대로 기용한다는 것은, 유비의 고명을 가장 강력한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제갈량으로서는 심각한 리스크를 부담하는 일이다. 문제는 이에 대한 비판의 정황이 명확하지 않다. 물론 습착치가 이에 대한 비판을 하고는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후세의 평가일 뿐이고(무엇보다 본전을 기록한 진수부터 마속의 기용 자체는 비판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당시 촉한 내부의 정황이 제갈량에게 마냥 우호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마속이 제갈량의 뜻에 따르지 않은 부분이 비판거리가 될 뿐, 마속의 기용과 관련된 비판은 보이지 않고(위연과 오의라는 대안이 이미 제시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 두 장군은 1차 북벌 당시 그 역할 자체가 불분명하다.) 오히려 장완이 "아까운 인재를 성급하게 죽인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표할 정도다. 물론 제갈량이 유비의 유언을 무시한 것 때문에 이후 마속을 죽이고 스스로 벼슬을 깎아 사죄할만큼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렇게 보기에는 제갈량의 실권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이엄이라는 잠재적 정적이 존재함에도) 앞서 서술했듯 마속이라는 인물을 놓고 유비가 따로 평가를 내리거나, 제갈량이 선제의 유명을 무시한다는 모험을 걸 정도로 당시의 마속이 거물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마량 형제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제갈량이 그 정도로 공사구분을 하지 않았다고 속단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위와 같은 문제들을 감안한다면, 이른바 '유비의 평가'는 당대의 기준에서 볼 때 후세의 시각에서 해석되는 것처럼 마속에게 비판적인 것이었다고 보기 어려웠던가, 비약한다면 그 실체 자체가 불분명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저 이야기가 마속이 기용되기 전에 이미 세간에 알려졌는지, 아니면 마속 사후 비로소 알려진 것인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마속의 당시 나이를 생각해볼때, 유비의 평가를 아직 미숙하니 큰 역할을 맡기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 또한 가능하고 보면, 유비의 위와 같은 평가 하나로 당시 마속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다소 성급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1차 북벌 이전의 마속에 해당되는 것이고, 1차 북벌의 결과만 놓고 보면 할 말 없지만.

4.1.2. 반론

  • 일단 마속이 두각을 드러낸 것이 남방 평정부터라는 것부터가 잘못된 주장이다. 정사를 보면 마속에 대한 기록은 마량전 끝에 꼽사리껴서 간략한 출세 과정과 기산 출병에 대해 기록된 것이 전부이며, 여기에 양양기에 기록되어 있는 제갈량에게 남방 평정에 대한 조언을 한 것이 마속에 대한 기록의 전부이다. 즉 애초에 마속에 대한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황인데, 위의 주장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기록을 근거로 실제 존재하는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제갈량이 마속을 신뢰했다는 기록이 실제 있기에 평소 유비가 이를 우려했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 위의 '유비가 마속에 대해 따로 평할 이유가 있었는지 여부'는 유비가 사망할 당시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그 전에는 마속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한 바도 없다가 그 시점에 갑자기 마속 이야기를 꺼냈다는 비현실적인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선 유비가 특별히 마속에 대해서만 말했으리라는 법은 없다. 유비는 이릉대전 다음해에 병사한 것이지 이릉대전의 상처로 바로 사망하거나 한 것이 아니므로 전반적인 국정 운영 등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즉 충분한 시간을 들여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마속도 언급된 것일 수 있다. 마속은 유비가 부정적인 평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용했다가 기록적인 실패를 겪은 특별한 경우라서 기록에 남은 것이지, 마속만을 언급했기 때문에 마속에 대한 언급만 기록에 남았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설령 마속만 별도로 언급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릉대전 이전에도 당연히 제갈량 등과 인재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것이므로, 과거에 마속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의견이 어긋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마음에 두고 있다가 따로 이야기할 이유가 된다.
  • 유비는 어디까지나 마속을 크게 쓰기에 능력이 부족하다고 보았지, 어떤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도덕적인 문제가 있으니 등용하면 안 된다고 한 것은 아니다. 황제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한 사람을 이후에 재평가해서 등용한다고 해서 황제의 뜻이 무시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실제로 능력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해도 그보다 적임자가 없다면 당연히 쓸 수 있다. 또한 제갈량의 마속을 기용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능력을 완전히 신임하지는 않았는데 그 증거가 바로 정사에서 언급되는 "마속이 제갈량의 절도를 어기고..."이다. 즉 제갈량은 단순히 마속에게 "알아서 수비해라"고 가정의 수비를 맡긴게 아니라 어떻게 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는 말이다. 따라서 실제 제갈량은 마속의 능력 부족을 감안하였고 이에 대해 나름 대책을 세웠으나 마속의 성격 때문에 최후의 보험장치까지 해제되었고 더불어 이는 유비조차도 예상치 못한 문제였다.
  • 이엄은 제갈량과 실제로 동등한 위치였다고 볼 수 없다. 이엄은 본래 유비의 부하가 아닌 유장의 휘하였으며, 유비가 죽기 직전 그를 상서령에 임명하기 전까지 그의 위치는 건위태수에 불과했다. 반면 제갈량은 형주 시절부터 유비를 보좌하여 이미 유비가 입촉하기 전부터 장사, 계양, 영릉의 3군을 진수하는 위치에 있었고, 이 당시 유비군 내에서 그와 같은 위치에 있는 인물은 오직 관우 뿐이었던 데다가, 여기에 제갈량은 유비가 황제에 오르는 시점에서부터 이미 승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애초에 유비의 유언으로 고명대신이 되기 이전부터 제갈량은 이미 유비 세력의 2인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를 견제할 수 있는 관우장비, 황권과 같은 인물들은 형주 공방전이릉대전에서 죽거나 위나라에 투항해버린 상황이었다. 반면 이엄은 파촉의 기존 인사들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그 이전에도 법정이나 유파, 황권과 같은 인물들이 그보다 먼저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엄은 제갈량에게 구석을 받아 왕의 작위를 얻으라고 권유한 바가 있는데, 이는 당시 제갈량의 권력이 불안정한 상황이었거나 둘의 위치가 동등한 상황이었다면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즉 이엄은 독보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제갈량을 견제하는 위치였을 뿐 마속의 기용 문제만으로 둘의 위치가 한순간에 바뀔 만한 상황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와 같은 가정이 성립되려면 먼저 제갈량의 기반이 불안한 상태여야 성립되는 법인데, 기록상으로 제갈량의 정치 기반이 불안한 상태였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

4.2. 능력

기본적으로 마속은 그리 큰 그릇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건 몰라도 인재 보는 눈만큼은 득도한 유비의 말이다. 다만 참모로 일할 때는 나름대로 괜찮은 조언도 했고, 제갈량이 병법도 논하며 신임했다는 것을 보면 참모로는 적어도 평균치는 했을 것이다. 가정에서 거하게 말아먹기는 했지만 야전 사령관과 참모는 임무가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제갈량은 형제처럼 가까웠던 마량에 대한 옛정 이외에도 마속에게 나름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에게 전략가로서의 자질을 보고는 북벌에서 전술가로서의 경험도 높여주고 군인으로서의 경력도 쌓게 해주려는 배려로 가정 전투에 파견한 것으로 그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실적을 올릴 계획까지 지참해주어 마속을 가정에 투입했다. 이는 한진춘추에 나오는 "가정과 기곡 양쪽에서 아군의 수가 적보다 많았다"는 제갈량의 언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촉군의 전력은 위군보다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때 제갈량 곁에는 사람이 부족했다. 유비가 이릉에서 수년간 쌓아온 인재풀을 전부 날려버린것이 치명타였다.[10] 조운은 조진과 대치하고 있으니 제외, 주변에서는 위연오의를 가정으로 돌리라고 권했지만 그럴 경우 그들의 빈자리를 마속이 메워야 하고, 가정에서 막는동안 농서지역을 장악하는 더 어려운 임무가 마속에게 주어진다.[11] 3군이 호응했다고 하지만 민심이 쏠렸다는 것이지 관리들까지 죄다 문열고 투항한게 아니다. 특히 위의 명장 곽회가 필사적인 노력으로 농서 지역을 촉이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저지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한진춘추의 저자인 습착치는 마속을 인재라 평하며 비록 실패했으나 그를 처형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반박했다. 유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이 마속을 기용했던 것은 그만큼 마속이 능력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안그래도 인재가 부족한 작은 나라에서 그런 인물을 없앤 것은 스스로의 힘을 깎아먹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참고로 습착치는 촉한정통론의 시조격인 인물이다. 아무리 한 개인이 뛰어나다고 해도 집단을 통솔하는 원칙과 규율보다도 중요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처형을 하는 것이 당연한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적어도 당시에는 마속의 재능을 아까워하는 의견이 있었다.

“제갈량이 상국(上國-위나라)을 겸병하지 못한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는가! 무릇 진나라는 순임보를 살렸으니 폐법(廢法)하여 공을 이루었고, 초성왕은 득신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를 죽이고 거듭 패배했다. 이제 촉은 궁벽한 한 귀퉁이의 나라로 인재가 상국보다 적은데 그 준걸을 죽이고 물러서서 어리석은 자를 거두어 쓰니 명법(明法)을 인재보다 중히 여겼던 것이다. 이는 삼패지도(三敗之道)를 배우지 못한 것으로 장차 대업을 이루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았겠는가! 또한 선주(유비)가 마속을 크게 쓰지 말라고 경계했지만 어찌 마속이 인재가 아니라 말할 수 있으리? 제갈량이 유비의 가르침을 받들고도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은 분명 마속을 완전히 버리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천하의 재상으로 큰 공을 세우려 하면서 재능을 헤아려 임무를 제한하지 않고 그 그릇에 따라 일을 맡기지 않았다. 만약 사람을 알아보는 일에 허물이 있었다면 주군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이고, 능력을 헤아림에 실수가 있었다면 유익한 인재를 죽인 꼴이다. 이를 두고보면 (제갈량을) 지혜로운 자라 말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그런데 마속이 단지 패군지장이라 처형 당한게 아니라 정사 상랑전의 기록대로 도망가려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때문에 이런 견해도 있다.

사사발복(四史發伏)에서 홍량길(洪亮吉)이 말하길,

"이를 살펴본즉 마속은 군사가 패하자 도망하였고 후에 다시 잡아들이니 하옥(下獄)되어 죽은 것이다. 마속은 말이 그 실제보다 지나쳐 본래 취할 바가 없었다. 또한 제갈량의 절도(節度-군사 명령)를 어겨 군사를 잃는데 이르렀으나 복죄(伏罪)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尙] 멀리 도망갔으니, 죄가 있으면 형벌을 피하지 아니하는 가르침을 어겼으매 제갈량이 그를 주륙(誅戮)한 것은 심히 마땅하거니와 습착치(習鑿齒)등이 제갈량이 잘못 형벌을 내렸다라고 기록한 것은 지나치다." 라고 하였다.

4.3. 강유에게 라이벌 의식?

강유가 촉에 합류해서 제갈량의 가르침을 받게 되자, 마속이 자신의 입지에 위기를 느껴서 강유를 질투하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실제로 근, 현대의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는 이런 식으로 각색되는 경우도 많다.[12] 하지만 이런 해석은 별 근거가 없는데, 강유가 투항한 시점은 1차 북벌이고, 마속이 가정에서 대패한건 그 직후이므로 둘 사이에 이렇다 할 접점이나 친분이 형성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거기에, 나이 면에서도 강유가 마속보다 훨씬 젊고 경력도 많이 차이나기 때문에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는 어렵다. 흔히 1차 북벌 당시의 마속은 젊고 경험이 부족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지만, 실은 이 당시에 마속의 나이는 추정치 38-40세 정도였으므로 한 방면의 장수를 맡아볼 만한 때가 되기는 했다. 그리고 마속이 그 이전까지 일을 잘 해왔으니 제갈량이 마속을 믿은 것이다. 반면 강유는 이제 막 촉에 등용된 몸이었다.

이런 오해가 생긴 이유는 연의의 1차 북벌 묘사 때문이다. 연의의 강유는 천수 전투에서 제갈량을 한 번 엿먹였고 이후 대 조진전, 대 강족전에서도 활약하며 마속은 이런 강유의 활약을 모두 지켜보고 가정으로 간다. 그래서 연의의 묘사만으로 보면 마속이 강유를 질투했다는 해석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하지만 정사의 내용을 보면 마속과 강유는 서로 만난 적도 없었을 확률이 높다. 기껏해야 마속이 붙잡혀왔을때 한 번 봤을까말까 할 정도.

5. 기타

일본에선 중국을 대표하는 산악인이라고 부르고 국내에서는 등애와 산악인 지분을 나눠먹고 있다.

삼국지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5월가정의 달이므로 마속을 까야 한다는 개드립이 있다(...). 덧붙여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와도 가끔 섞인다. 가정이 무너지고 마속이 무너지고 북벌이 황폐화되고

6. 미디어 믹스


  1. [1] 마량과 마속의 세 형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량과 마속이 항렬에 따라 자를 쓴 것을 보면 적어도 그의 세 형은 백상(伯常), 중상(仲常), 숙상(叔常)이라는 자를 썼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2. [2]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제갈량이 마량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음은 틀림없다.
  3. [3] 이는 매우 타당한데 주변의 아군과 연계하고 있는 고지대에 위치한 병력은 그 수가 소수일지라도 수배에 달하는 병력수의 효과를 낼 수 있다
  4. [4] 한중 공방전 정군산 전투가 대표적이다. 법정의 계책으로 황충은 하후연보다 높은 곳을 장악하여 하후연의 진지를 훤히 내다보았고, 견디지 못하고 출진한 하후연은 황충의 군대에게 당했다.
  5. [5] 다만 정군산 전투는 가정 전투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정군산 전투는 가정 전투와 달리 촉군이 숫적이게 위군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기에 황충이 고지대를 점령해서 싸우는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주변의 아군 지원 없이 황충이 덜컥 고지를 점령해서 하후연을 공격했다면 그 또한 마속 못지않은 병크가 됐을 것이다.
  6. [6] 지도를 보면 농서의 남안, 천수, 안정 삼군에서 위의 중앙인 장안 방면으로 나아가려면 강을 배타고 가지 않는 이상 꼭 거쳐야 할 지점이다.
  7. [7] 애시당초 이중톈은 역사학자가 아니며 삼국지 강의도 오류가 만만찮게 많으니(국내에선 중국판 김운회 소리도 듣는다) 적절하게 필터링하며 듣는 게 좋다.
  8. [8] 고대 로마는 카르타고처럼 패배를 초래한 장군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다시 기용해 싸운 적도 없었다. 단지 처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로마사회에서 패배한 장군을 처형하는 경우는 등장하지 않았고 이는 심지어 로마 역사상 최악의 참사를 일으킨 아루시움 전투(12군단이 전멸하였으며 칸나이 전투를 능가하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규모의 패배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항목 참고)에서조차 패배를 초래한 지휘관이 처형이 아닌 망명형을 당했을 정도였다. 이는 로마인들이 관대한 것보다는 당대 사회구조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전쟁지휘권인 임페리움을 가질 정도면 집정관 혹은 전직 집정관급으로 공화정 사회에서는 함부로 처형당할 레벨의 정치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즉 공화정에서는 집정관은 한 나라의 왕과 같은 권한이 있었며 이런 집정관을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은 호민관의 탄핵을 거쳐야 했다. 호민관의 탄핵이 집정관의 처형으로 이어지는 것은 원로원의 권위(집정관은 원로원 의원이기도 하였다.)를 실추시키므로 원로원 지배하의 로마 공화정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9. [9] 상랑전에서 상랑이 마속의 도주를 눈감아주려 한 것을 보면, 거의 확실하다. 애초에 촉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으면 눈감아주고 할 상황이 성립되지 않는다.
  10. [10] 유비가 이릉에서 날려먹은 인재 규모가 어느정도냐면 전사하거나 오에 투항한 인원 제외하고 길 끊겨서 위에 투항한 인원중에서 열후가 42명, 낭장이 100명 나왔다. 이릉대전 전후로 사망한 건국 1세대까지 합치면 견적이 안나온다. 거기다 출정 직전에 장비도 죽었다.
  11. [11] 다만 이에 대해서 차라리 왕평을 부장이 아닌 총대장으로 쓸 수도 있지 않냐는 반론이 있다.
  12. [12] 삼국지 공명전,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에서의 마속은 클론 무장이긴 하지만, 주변 인물들의 평이나 진지 대화 등을 통해 마속이 강유에게 라이벌 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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